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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작가의 오후

'어느 작가의 오후' / 페터 한트케 저
(지극히 주관적인 제 생각을 쓴 글입니다.)

짧은 중편 소설이다. 2019년 노벨 문학상 수상자인 페터 한트케의 소설로 제목 그대로 어느 작가의 오후를 그리고 있다. 평범한 오후의 일상은 글을 쓰는 자, 작가가 언어로 표현하는 순간 현실과 환상을 넘나 든다.

소설 속 화자이자 주인공인 어느 작가는 글쓰기를 마치고 집을 나선다. 계단을 오르내리기도 하고, 식당에 들어가 무언가를 먹기도 하며, 하늘과 광장과 건물들을 바라보고 관찰하기도 한다. 그리고 작가는 집으로 돌아온다. 그게 전부다. 소설의 처음부터 끝까지 어떤 사건도 없으며 그저 작가의 눈으로 바라보는 오후의 풍경이 묘사될 뿐이다. 그렇지만 그 모든 일들을 작가의 눈으로 바라보고 작가의 언어로 기술하면서 온갖 환상과 상상과 사건들이 생겨난다. 갑자기 누군가 길을 틀어막고 작가에게 "당신의 문학을 기소합니다!"라고 외치기도 하고 머리카락이 다 빠진 늙은 여자가 나뭇가지 위에 걸쳐져 있기도 하며 일에 대한 강박에 화자가 갑작스러운 대인기피증에 걸리기도 한다. 작가는 일반인에게는 평범한 오후의 풍경에서 온갖 문장들과 언어, 새로운 상상들을 불러낸다. 그 때문에 이 소설에서는 어디부터 어디까지가 오후의 풍경이고 또 작가의 생각과 언어의 확장인지 구분이 되지 않는다.

페터 한트케는 언어 자체에 대한 연구에 골몰하며 전통적인 문학의 형식, 언어를 사용하는 기법 등에 질문을 던지고 때로는 과감히 파괴하기도 하는 작가다. 그는 "문학이란 언어로 서술된 사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바로 언어 그 자체로 이루어진다"라고 말하며 언어의 기능과 언어로 이루어진 문학의 본질을 깊게 탐구했다. 만약 이 소설이 "언어로 서술된 사물"로 이뤄진 소설이었다면 작가가 지나다니는 경로에서 보이는 풍경과 사물들의 묘사만으로 소설이 끝났을 것이다. 하지만 화자는 소설의 세계 속에 존재하는 평범한 오후의 사물들을 그대로 묘사하는 것으로 언어의 기술을 끝내지 않는다. 단순하게 묘사된 오후의 풍경과 사물들에서 출발한 화자는 자신의 기분, 감정, 생각, 사상 등을 묘사된 사물들에 투영하여 언어를 확장시킨다. 작가를 지나치는 인파들은 작가의 글을 읽는 독자로 둔갑하여 작가가 느끼는 자신의 작품, 그리고 그것을 읽는 독자들에 대한 불안감을 표현하는 수단이 되고 묘지에서 그리스어와 라틴어로 된 묘비명을 보고 그들이 살아생전 내질렀을 그리스어와 라틴어로 된 비명을 듣기도 한다. 작가의 주관적인 경험과 생각들이 오후의 풍경과 사물 속에 스며들어 단순한 묘사가 아닌 새로운 언어로 탄생하는 것이다.

소설 속에 이런 문장이 나온다. "확정적인 모든 것을 그는 오래전부터 무시무시하게 생각했다." 언어란 한없이 비확정적이다. 같은 문장, 같은 단어를 보고도 모든 사람은 제각각 모두 다른 생각을 떠올린다. "사과"라는 하나의 단어를 보고도 누군가는 뉴턴의 사과를, 누군가는 사과의 단맛을, 누군가는 사과를 딴 경험을 떠올린다. 어느 누구도 "사과"라는 단어를 보고 정확히 같은 것을 떠올린 사람은 없다.(같은 빨간 사과를 떠올렸을지언정 크기, 모양, 빨간색의 진하기 등등 어느 사소한 부분에서라도 차이가 생긴다.) 작가는 이 소설을 통해 오후의 풍경에서 느낀 한없이 주관적인 자신의 경험들을 언어로 기술함으로써 독자들이 객관적인 사물에 대한 단어가 아닌 주관적인 경험의 언어를 과연 어디까지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를 알아보려고 한 것이 아니었을까. 언어가 사유를 전달하는 수단으로써 어느 정도까지 정확하게 기능할 수 있는가에 대한 실험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짧은 중편소설이기에 페터 한트케의 소설을 읽어보고픈 이들의 시작으로 좋을 듯하다. 개인적으로는 언어의 불확정성에 대해 생각해 볼 수 있는 기회가 되었다.

소설 속 한 문장

확정적인 모든 것을 그는 오래전부터 무시무시하게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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헬로의 모험
기사에 나빌라에 대한 언급이 나오는데, 이 인물은 모르셔도 된다. 리얼리티 TV 쇼로 뜬 모델/배우이고, 뭔가 좀 맛이 간(?) 느낌으로 말을 하기 때문에 대중의 호오가 극도로 갈린다. 하지만 나빌라의 상징어라 할 수 있는 말이 바로 “여보세요(allô)”다. 그렇다면 여보세요는 어디서 나왔을까? 친구들도 알고 계시다. 알렉산더 그레이엄 벨이 처음 전화를 만들었을 때 사용했던 단어이기 때문이다. 물론 음모론으로 나가자면(여기서 이 글이 주말 특집임이 드러난다), 벨 형님의 여인(!) 중에 Allessandra Lolita Oswaldo라는 여자가 있었다. 그녀를 그리워하던 벨이 이름의 약자인 ALO를 사용해서 그렇다는 설이다. 정말 그랬다면 좋겠지만(신빙성은 별로 없어 보인다) 사실 “헬로”를 누가 먼저 고안했는지는 밝혀져 있다(참조 1). 그 고안자는 다름 아닌 토마스 에디슨. 하지만 여기서 끝낼 수는 없다. 그래도 누군가 에디슨에게 헬로가 좋다고 영향을 끼친 사람이 있지 않을까? 여기서 헝가리인 푸쉬카시 티버더르(Puskás Tivadar, 성-이름 순이다)가 등장한다. 지금으로 비유하자면 뭔가 스티브 워즈니악스러운 인물인데, 원래는 전보 시스템을 궁리하다가 알렉산더 그레이엄 벨, 그리고 토마스 에디슨의 소식을 듣고 에디슨과 같이 일하기로 한다. 그리고 바로 이 푸쉬카시가 전화 교환기를 발명했다. 초기의 전화기에는 교환 시스템이 없었다. 그냥 설치 장소간 선으로 연결한 것에 불과했기 때문에, 교환기의 발명은 전화기의 역사에서 매우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 하지만 아마 처음 들어보셨을 것이다. 푸쉬카시가 곧바로 에디슨 회사의 유럽 지사를 세우러 파리에 들어가서 미국에서의 에디슨과 일은 금방 끝났 때문이다(1879년). 동생과 함께 그는 전화 테스트에 들어간다. 듣고 있니? Hallod? 듣고 있어. Hallom. 들려. Halló. 헬로랑 너무 비슷하지 않으신가? 그렇기 때문에 아마 에디슨도 헬로우를 더 좋아했을지 모를 일이다. 게다가 푸쉬카시는 고국(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으로 돌아간 다음, 전화 뉴스 서비스를 개설한다! 아마 예전에 썼던 19세기의 전화 스트리밍 서비스, 이른바 Théâtrophone이다(참조 2). 다만 이 Théâtrophone이 오페라 위주였고, 푸쉬카시의 Telefon Hírmondó는 뉴스 위주. 전자가 MTV라면 후자는 CNN의 느낌? 역시 세상은 바뀌지 않는가. 시기를 따지자면 원래는 비행기 엔지니어의 선구자로 유명한 Clément Ader의 Théâtrophone은 1881년이고 푸쉬카시의 Telefon Hírmondó은 1893년이니 아무래도 뉴스보다는 음악이 먼저일 것이다(응?). Théâtrophone의 경우, 빅토르 위고나 마르셀 푸르스트와 같은 네임드(...) 얼리 어돕터들이 덕질을 해대니 더 빨리 발생했을 테고 말이다. P.S. 여보세요나 모시모시는 유래가 모두 각각 한국어와 일본어에서 나왔다. 별로 낭만적인 연원은 없는 셈이지만, Hello 및 그 계열의 단어를 안 쓰는 나라가 별로 없기 때문에 좀 튀기는 튄다. ---------- 참조 1. Great 'Hello' Mystery Is Solved(1992년 3월 5일): http://www.nytimes.com/1992/03/05/garden/great-hello-mystery-is-solved.html 2. 19세기의 스트리밍 서비스(2014년 4월 22일): https://www.facebook.com/minbok/posts/10152322654979831
선을 넘었다, '기생충' 영화 솔직후기/리뷰/해설/쿠키영상 [5분영화겉핥기]
안녕하세요, 재리입니다. 오랜만에 포스팅을 하게 됐네요. 곧 종강이니까 방학하고 나면 바로바로 후기를 쓰겠죠? 제가? 본 영화는 꽤 있는데도 많이 밀려있네요 포스팅이,바쁘더라도 분발하겠습니다. 오늘의 영화는 칸 영화제 황금종려상 수상작, 영화 '기생충'입니다. 이미 개봉 전부터 봉준호 감독과 송강호 배우의 만남으로 큰 화제를 모았던 작품이죠. 그런데 칸 영화제에서 최고수상의 영예까지 얻었으니 인기는 날개를 달은 격입니다. 비록 시간이 없다는 핑계로 포스팅을 미루고 있던 저지만 이번만큼은 영화 보자마자 바로 컴퓨터 앞에 앉아 후기를 씁니다. 본론만 간단히 말하자면 어마무시한 여운을 가진 작품입니다. 양극화를 극단적으로 영화를 묘사하자면 양극화 현상을 극단적으로 보여준 작품입니다. 다시말해 우리가 살고 있는 현실에서 이미 존재하는 양극화라는 사회문제를 전혀 현실적이지 않게 표현했는데요. 문제는 이러한 묘사가 과연 어디까지 허구일까 가늠이 안 된다는 점입니다. 다수의 중간층을 제외하고 상하위 소수의 입장을 모르는 사람들은 영화를 보고도 확실히 정도를 정하기 어렵다고 생각합니다. 영화를 보면 볼 수록 블랙코미디라는 사실을 망각할 정도로 소름 돋게 영화 자체가 사실일 수 있겠다 싶더군요. 그 정도로 작품은 평범한 소재를 전혀 평범하지 않게 극적으로 보여줍니다. 자신의 분수에 대하여 영화는 잔혹합니다. 미장센적으로도 치명적이나 인물을 바라보는 시각 역시 잔혹했다고 생각합니다. 영화 제목 '기생충'에서도 느껴지지만 숙주에게 몰래 붙어 기를 빨아먹고 사는 벌레같은 사람들의 모습을 그립니다. 하지만 기생충에 입장에서 이러한 행동은 결국 자신의 생존을 위한 어쩔 수 없는 선택이죠. 숙주의 입장에서는 굳이 누군가에게 기생하지 않아도 충분히 살 수 있기 때문에 기생충이 굳이 될 필요가 없습니다. 우리는 과연 이들을 벌레라고 치부하며 살아가야 할까요? 아니면 그 사람들에게 어떤 시선을 가지자고 말하는 걸까요? 영화를 보고 온 저라도 확실히 단정짓기는 어려운 문제입니다. 선을 넘을 필요가 없는 인간들 반대로 기생충으로 묘사되는 인간과 달리 사실과는 멀리 떨어져 자신들만의 세상에서 사는 인간들도 있습니다. 언제나 양극은 존재하기에 극빈곤의 삶이 있다면 부유한 상류의 삶도 존재하겠죠. 충분히 부유한 사람들은 기생충과 달리 선택의 여지가 있습니다. 정확히 말하면 굳이 위험을 감수할 필요가 없는 사람들이죠. 영화에서는 '선을 넘는다'는 표현이 자주 나옵니다. 이는 공사를 구분하는 선도 맞지만 이면적으로는 자신의 분수와 주제의 선을 말하기도 합니다. 기생충이 숙주가 되려고 마음먹지만 선을 넘는 순간 스스로를 갉아먹고 다른 기생충들과 충돌하여 전멸하는 사태까지 벌어지게 됩니다. 영화는 잔인하게도 이 선에 대해 단호합니다. 극명하게 보여주는 예는 부유한 사람들이 멍청할 정도로 순수한 모습으로 묘사되기까지 하지만 아무리 머리를 굴려도 기생충은 숙주를 넘어서지 못하는 모습입니다. 그들은 사는 세상이 달랐습니다. 모든 사건은 자신의 분수를 지키지 못하고 선을 넘었기 때문에 발생합니다. 무계획이 계획이다 언뜻 명언처럼 보이지만 사실 이 또한 생존을 위한 법칙일 뿐입니다. 계획을 세우면 계획대로 흘러가지 않고, 오히려 실망과 좌절의 반복을 맛 보게 됩니다. 이미 마음 속 깊이 자리잡은 패배의식은 그들의 선을 더 견고하게 만들어주는 장치입니다. 언제나 실패하지 않고 제대로 흘러가는 계획이란 사실 무계획에서 출발한다는 엉뚱한 발상은 피식 웃음 짓게 만들 수도 있지만, 자세히 들여다본다면 얼마나 스스로를 연민의 눈으로 바라보고 있는 지 느껴지게 됩니다. 하지만 결국 무결점의 무계획으로 인해 더 큰 사고로 번지게 되고 마지막에는 돌이킬 수 없는 비극으로 끝나게 됩니다. 무계획이 당연히 정답은 아니지만 그들의 선택지는 무계획이라는 하나의 선지 밖에 없었고 선을 넘으면 응당한 대가를 받아야 하는 멈추지 않는 악순환에,그들은 그저 갇혀있는 기생충이었습니다. 돌이나 기생충이나 작품은 그들을 묘사하는 대상을 기생충에 한정하는 모습은 아니었습니다. 저는 작품 전반에 등장하는 선물용 돌에 신경이 쓰였는데요. 후반부에 강에 다른 돌들과 선물용 돌이 함께 있게되는 장면이 있습니다. 사실 선물용 돌도 그저 평범한 돌일 뿐인데 자신의 자리를 벗어난 존재라고 생각했습니다. 누군가는 평범한 돌일 뿐인데 거기에 의미를 부여하고 정말 특별한 힘을 갖고 있게끔 착각하게 만들죠. 하지만 그 본질은 절대 변하지 않습니다. 돌은 돌이고 기생충은 기생충일 뿐 다른 존재를 흉내내고 쫓으려 한들 본성은 변하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누군가는 냄새로, 또 누군가는 용도로, 다른 누군가는 생김새로 그 본질을 제자리에 돌려놓게 만듭니다. 영화는 사필귀정의 원칙에 따라 모든 것들은 각자 제 자리를 찾아 돌아가도록 인도합니다. 그들만의 모스부호 영화는 철저히 그들은 인간과 다른 어떠한 다른 존재로 인식합니다. 대표적으로는 기생충, 다르게는 돌이나 여하 다른 존재들로 말입니다. 그 증거로는 영화 내내 등장하는 모스부호입니다. 자세히 보면 상류층들은 모스부호를 인지하지도 않으며 관심도 없습니다. 아직 세상을 잘 모르는 어린아이가 관심을 가지는 모습을 살짝 넣습니다만, 그렇다고 내용이나 결말에 큰 영향을 주지는 않습니다. 땅 밑에 사는 사람들은 자신들끼리 말이 아닌 부호로 서로의 안부를 묻고 상황을 전달하고 있습니다. 아이러니한 상황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인간답게 살고 싶어 발악을 하지만 결국 살기 위해 인간이기를 벗어나는 행동들을 하며 그들은 무엇이 되어가고 있나 혼란스럽게 합니다. 존경의 대상이자 원망의 대상, 같은 부류지만 서로가 서로의 포식자인 셈임을 교묘하게 녹여낸 작품입니다. 영화를 자세히 보시고 해설을 보신다면 봉준호 감독의 천재성을 피부로 느끼실 수 있습니다. 물론, 저 나름대로의 생각일 뿐이고 다른 분들과 의견이 다를지 모릅니다만 생각을 정말 많이 하게 되는 시간이 됐습니다. 결말에 대하여 결론적으로 결말에 대해 모든 분들이 궁금해하실 거라 생각합니다. 열렸는지 닫혔는지 애매하거든요. 저는 열린 결말이라고 생각합니다. 독전의 마지막 장면처럼 말이죠. 과연 그는 그래서 어떻게 된 것인가? 이 점이 논란의 대상입니다. 꿈을 이룬 후의 회상일 수도 있지만, 망상일 뿐 현실은 여전히 현실일 뿐이라는 의견도 존재하겠죠. 저는 후자에 더 설득력이 있다고 생각하긴 합니다. 영화의 성격상 그들의 선을 바꾸려고 하지 않을 거라 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들이 올라오기에는 너무 깊이 내려갔습니다. 후반부는 정말이지 충격 그 자체입니다. 곡성에서의 소름을 또 한 번 겪었습니다. 쿠키영상은 없지만 엔딩 크레딧 올라가는 시간 동안 긴 여운에 빨리 일어서지는 못했습니다. 어딜봐도 현실에서 일어날 법한 일들이지만 정말 현실이라면 너무 공포스럽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그리고 모든 장르를 총 망라해 평범한 소재를 얘기한 봉준호 감독은 정말 보면 볼 수록 놀랍기만 합니다. 감히 말하기를 올해의 영화입니다. 기준이 후한 편이지만 혼자나마 호들갑 좀 떨겠습니다. 여러분들의 의견도 언제든 들려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영화 '기생충'이었습니다.
어둠의 왼손
'어둠의 왼손' / 어슐러 K.르 귄 저 (지극히 주관적인 제 생각을 쓴 글입니다.) 어둠의 왼손은 무엇일까? 선뜻 생각나는 것이 없다. 달? 악마? 무(無)? 이 소설에서는 예상치 못한 답을 내놓는다. 두 명의 주인공, 아이와 에스트라벤의 여정을 따라가다 보면 저절로 이해할 수 있게 되는 답을. 행성들의 문화적, 경제적 연합체인 에큐멘은 인류의 진보와 발전을 위한 지식 공유를 주 목적으로 아직 에큐멘의 일원이 되지 않은 행성들에 특사를 보내 에큐멘 가입을 요청한다. 에큐멘의 특사 중 한 명으로 게센 행성이 에큐멘의 일원이 되도록 설득하라는 임무를 받은 겐리 아이는 게센 행성의 부족 국가와 비슷한 개념의 공동체, 카르히데에 도착한다. 카르히데의 수상인 에스트라벤의 도움으로 아르가벤 왕에게 에큐멘 가입을 설득하려던 차에 왕의 사촌인 티베가 권력을 잡기 위해 에스트라벤을 모함하고 에스트라벤이 역적 취급을 받으며 추방당하게 되자 그의 도움을 받고 있던 아이의 임무까지 실패하게 된다. 아이는 포기하지 않고 카르히데와 대립하고 있는 다른 국가, 오르고레인에서 에큐멘 가입을 설득하려 하지만 이해관계와 정치적 대립에 휘말린 아이는 범죄자 취급을 받으며 오르고레인에서 쫓겨나 노동의 형벌을 받게 되고 죽어가는 아이를 에스트라벤이 구해낸다. 게센 행성을 에큐멘에 가입시켜야 하는 임무를 받은 아이, 그리고 게센의 에큐멘 가입이 게센 전체 인류의 진보를 가져올 것이라 믿는 에스트라벤은 누구의 눈에도 띄지 않고 카르히데로 돌아가 게센의 에큐멘 가입을 성공시키기 위해 끝없이 펼쳐진 빙원 위를 통과해야만 하는 상황에 놓인다. 아이와 에스트라벤은 과연 기나긴 빙원 위에서 펼쳐질 고된 여정을 무사히 끝마칠 수 있을까? 언뜻 스토리를 보면 SF 소설이라기보다는 판타지 소설 같은 느낌이 든다. 사계절 내내 눈이 내리는 겨울 행성 게센, 마치 남극을 탐험하는 듯한 아이와 에스트라벤의 빙원 위의 여정, 게센인들의 특이한 성적 특징(이 소설의 핵심이다.) 등등. 에큐멘이라는 행성 공동체의 특사가 보여주는 SF 적 면모와 지구와 전혀 다른 게센 행성의 환경, 인류가 보여주는 판타지적인 특징이 절묘하게 섞여 환상적이고 새로운 세계를 창조해냈다. 게센 행성의 인간들은 평소에는 아예 성별이 존재하지 않는다. 성별이 나뉘는 때는 25~30일마다 한 번씩 돌아오는 케메르 주기 때뿐이다. 같은 케메르에 든 사람에게서 풍기는 체취, 페로몬 등의 작용에 의해 남성, 혹은 여성으로 성별이 결정되고 그 시기에만 임신이 가능하다. 그리고 케메르가 끝나면 다시 성별이 존재하지 않는 상태, 소메르 주기로 돌아온다. 즉, 모든 게센인들은 남성이 될 수도, 여성이 될 수도 있으며 임신을 할 수도 있고 출산을 할 수도 있다. 그 때문에 게센인은 아직도 화로라는 부족 공동체 단위의 생활을 지속하고 있으며 아이의 임신, 출산, 양육 등은 그 부족 공동체 전체의 임무가 된다. 그 누구도 자신이 언제 아이를 가지게 될지, 또 아이를 낳게 될지 알 수 없기 때문이다. 현재 우리 사회의 한쪽에서는 남성과 여성이 서로 반대편으로 나뉘어 전쟁을 하고 있다. 서로를 비난하고 모욕하며 자신이 속한 성별의 상대적 우월함을 과시한다. 그 지점에서 세상에 나온 지 40년이 지난 이 소설은 아직도 힘을 잃지 않고 살아 숨 쉬게 된다. 성별이란 것이 없다면? 그 누구도 다른 누구와 다르지 않다면? 태어나면서부터 가지게 되는 선천적인 차이가 존재하지 않는다면? 그 간단한 상상 하나에서 출발한 이 소설은 현대 사회에서 일어나고 있는 성별 간의 다툼을 다시 생각해 보도록 만든다. 소설 속 주인공인 겐리 아이는 어느 누구도 성별을 가지지 않는 게센인들 사이에서 유일하게 한 성별을 유지하는 지구인 남성이다. 그는 에스트라벤의 다름을 인정하지 못하다가 몇십 일에 걸친 고된 빙원 위에서의 여정을 함께 해 나가며 겨우 그를 진정한 친구로, 우정의 상대로 받아들인다. 자신과 선천적으로 다른 한 존재를 마음으로부터 인정하고 이해하게 되는 아이. 그 모습을 보면서 우리도 언젠가는 그처럼 길고 긴 다툼을 겪으며 성장해 자신과 다른 성별을 인정하고 이해하는 때가 오지 않을까 생각해본다. 이 소설은 거기서 한 발 더 나아가 인간의 이분법적 사고방식의 한계를 보여준다. 인간은 무엇이든 흑과 백, 남성과 여성, 낮과 밤 등, 두 개의 반대되는 범주로 나누려고 한다. 거기서 나오는 흑백논리는 모든 것을 내 편과 네 편으로 분리한다. 하지만 게센인들에게는 애초에 남과 여라는 선천적인 두 개의 범주가 존재하지 않고 거기서 파생된 문화는 그들을 이원론적인 사고방식으로부터 멀리 떼어놓았다. 빙원 위에서 에스트라벤은 아이에게 말한다. "어떻게 개인이 한 국가를 미워하거나 사랑할 수 있겠습니까?...... 저는 사람들을 알고, 도시, 농장, 언덕, 강, 바위들을 알고, 가을이 되면 언덕 위의 어떤 경작지 위로 어떻게 해가 지는가를 압니다. 하지만 그런 것에 경계를 긋고 이름을 붙인 뒤 이름이 적용되지 않은 곳은 더는 사랑해선 안 된다니 말이 됩니까?" 게센인인 에스트라벤에게는 나의 국가와 남의 국가, 즉 땅 위에 인간이 폭력적으로 만들어 낸 경계선에서 이루어지는 아군과 적의 구별이 없는 것이다. 태어나면서부터 남과 여, 둘 중 하나의 성별을 가지고 태어나는 인간은 흑백논리로 세상을 바라본다. 그런 이들에게는 낮과 밤 사이 노을 지는 붉고도 어두운 하늘에 붙일 이름이 없고, 흑과 백 사이에 존재하는 수많은 아름다운 색들에 붙일 이름이 없으며, 남성이면서 남성을 사랑하는 존재나 여성이면서 여성을 사랑하는 존재에게 붙일 이름이 없다. 그 얼마나 안타까운 일인가. 이 세상에 존재하는 온갖 것들을 흑백논리를 위하여 외면해야만 한다는 사실이. 아군도 적도 아닌 존재가 있다는 사실. 우리는 폭력적인 이분법에서 벗어나 다양함을 조금 더 받아들일 필요가 있다. "빛은 어둠의 왼손 그리고 어둠은 빛의 오른손" 빛은 어둠의 적이 아니라 어둠의 왼손이다. 어둠은 빛의 적이 아니라 빛의 오른손이다. 어둠과 빛은 서로 한 몸이며 서로가 없으면 존재할 수 없다. 우리는 서로 정반대로, 또는 적으로 보이는 어떤 것들이 실은 서로 하나이며 서로가 없으면 존재하지 못할 수도 있다는 사실을 깨달아야 한다. 소설 속 한 문장 "어떻게 개인이 한 국가를 미워하거나 사랑할 수 있겠습니까? 티베는 그런 말을 합니다만 저에게는 그런 재주가 없습니다. 저는 사람들을 알고, 도시, 농장, 언덕, 강, 바위들을 알고, 가을이 되면 언덕 위의 어떤 경작지 위로 어떻게 해가 지는가를 압니다. 하지만 그런 것에 경계를 긋고 이름을 붙인 뒤 이름이 적용되지 않은 곳은 더는 사랑해선 안 된다니 말이 됩니까?"
"번역의 마술을 만나다"
언어 통합번역 마켓 '플리토' 구글번역기, 파파고, 지니톡 등 세상에 언어 번역 서비스는 많다. 그럼에도 청년 스타트업 '플리토'의 6년 업력을 기록할 수 있었던 비결은 바로 '철학'이다. 플리토는 기계번역과 인간번역을 한 곳에서 이용할 수 있는 통합 번역 서비스를 제공하는 스타트업이다. 언어장벽 없는 세상을 실현하자는 전략으로 현재 173개국 750만 사용자를 확보했다. 얼마전 폴란드, 체코, 네덜란드, 말레지아어을 포함 23개 언어를 지원하며 매일 7만건 이상의 번역 요청을 처리하고 있다. 시작은 이정수 대표가 유년시절 외국인 학교에서 다국적 학생들이 서로의 언어를 알려주며 소통하는 모습에서 언어에 대한 관심이 증폭됐고, 자동 번역 시스템이 언제가는 나올 것이라는 생각에서다. 꼭 필요하지만 세상에는 없는 기능을 담은 서비스로 첫번째는 사라지고 있는 과거 언어의 창고로 두번째는 정확하고 완벽한 번역 시스템에 대한 고민이 지금의 플리토 탄생 배경이다. 풀리지 않은 것에 대한 고민과 언어 데이터가 없는 사례를 연결하여 플리토 번역 서비스를 시작했다. 사용자들 간에 포인트를 이용하여 번역을 요청하고 받을 수 있는 집단지성 번역 플랫폼으로 시작한 플리토는 2017년에는 그동안 구축한 언어 데이터를 활용해 앱 내에 인공신경망 기반 자동번역 서비스인 인공지능 번역 기능을 선보이며 서비스 영역을 넓혔다. 현재 인공지능, 집단 지성, QR코드, 1대1 전문번역 등을 활용한 서비스와 번역 서비스 외에 기관 및 기업에 언어 데이터를 판매하는 B2B사업을 진행하고 있다. 특히, 30분 만에 다국어로 번역된 메뉴판 제작할 수 있는 ‘QR 플레이스’ 출시하여 스마트폰만 있으면 누구나 23개 언어로 다국어 메뉴판 제작할 수 있다. 메뉴 변경 혹은 추가 등으로 인해 메뉴판을 변경하더라도 플리토 앱에서 지속 업데이트가 가능하다. QR 플레이스 번역 요청을 통해 음식점 정보를 설정한 후, 번역이 필요한 메뉴판 혹은 기타 안내문 이미지를 촬영해 전 세계 집단 지성 번역가에게 번역 요청을 보낸다. 번역이 완료되면 QR코드가 생성되고, 사용자는 생성된 QR코드를 출력해 원하는 곳에 비치해 외국인 고객에게 안내하면 된다. 또한 번역 결과만 보여주고 끝나는 유사 자동번역 서비스와는 달리 번역을 더 요청할 수 있도록 플리토의 집단지성 번역 서비스를 유기적으로 연결해 둔 것이 이점이다. 이 대표는 스타트업을 처음 시작했을 때 와는 사못 달라진 분위기에 초창기를 회상하며 벤치마킹을 할 곳도 어려움이 닥쳤을 때 기댈 곳도 없이 버틸 수 있었던 단 한가지 이유가 돈을 따라가지 않고 자신이 명확하게 하고 싶었던 일에 대한 철학과 책임감 이었다. 언어에 있어 철학 있는 회사가 되고 싶고, 철학을 인정하면 철학이 힘을 만든다. 이어 그는 대기업은 위치가 자리를 만들지만 스타트업은 철학이 자리를 만든다. 가치 창출 철학 아래 기회는 오고 그것이 발판이 되어 성장할 수 있는 여건을 만들어준다. 플리토는 수학적 확률 계산이 어려운 언어 영역에서 언어 데이터 최고의 회사를 꿈꾸며 언어 데이터를 필요로 하는 모든 회사에서 플리토가 사용되는 목표를 달성할 계획이다.
살면서 반드시 피해야 하는 12명의 어둠의 세력!
우리는 성공과 성장을 위해서 꼭 만나야 할 사람과 네트워킹 하는 것도 필요하지만 그에 못지 않게 살면서 꼭 피해야 할 어둠을 세력들을 선별하는 것도 중요하다. 의식적이건 무의식적이건 나에게 방해가 되는 사람들을 멀리 해야 한다.  다시 한번 나의 네트워크를 자세히 살펴보고 아래의 인물이 속해 있는지 확인해 봐야한다. • 나를 힘 빠지게 만든다. • 내가 나의 능력에 의구심을 갖게 만든다. • 자신만의 아이디어는 없어 보이면서 언제나 나의 의견에는 찬성한다.  • 늘 모든 상황에서 부정적인 면만 본다. • 나를 수세에 몰리게 한다. • 나의 의사결정과 하고 싶은 일을 망설이게 만든다. • 항상 자신의 얘기만 할 뿐 나에게는 거의 관심을 두지 않는다. • 나의 의견이나 아이디어를 자신의 것으로 취한다. 페이스북이나 인스타그램 친구를 가려내거나 아니면 주위에 전화해 이제 다시는 만나지 못하는 이유를 설명하라는 얘기가 아니다.  또한 “너는 이제 내 네트워크에서 아웃이야!”라고 말하라고 권하는 것도 아니다.  그보다 이 작업은 나의 내부 조직에 어떤 인물이 있기를 희망 하는지, 그리고 누가 나와 나의 여정을 응원하지 않는지를 알아가는 과정이기 때문에, 그들에게 실제로 입 밖으로 이야기할 필요는 없다.  일단 나의 발전을 방해하는 부정적인 사람들을 찾아내고 나면 그들에게 얼마만큼의 시간을 할애할지 정하면 된다. 테두리를 치고 시간을 정해서 나의 에너지에 부정적인 영향력을 미치는 그들을 배제해야 한다.  ※ 주변에 숨어서 당신의 가능성을 제한하며 인생에 걸림돌이 되는 12가지 어둠의 유형 “부정적인 사람들은 당신의 에너지를 빼앗는다. 당신 주변을 사랑과 풍요로 채우고 적대감이 접근하지 못하게 하라.”  -디팩 초프라 Deepak Chopra-
목표 달성을 도와 드립니다: 새해에는 챌린지가 제격
가장 의지가 충만한 때, 뭐든 다 해낼 수 있을 것만 같은 때, 그러니까 뭔가를 시작하기 가장 좋을 때는 언제다? 바로 새! 해! NEW YEAR! 하지만 그렇잖아요. 마음이 가득이어도 혼자서는 작심삼일이 되기 일쑤인 거. 목표를 이루기 위해 필요한 것은 강한 의지와 그 의지가 바래지 않도록 함께 으쌰으쌰 할 수 있는 동료들 아닐까요? 같은 목표를 위해 달려가는 사람들의 모임, 빙글 챌린지. 2020년을 맞아 다시 달려 보도록 합시다! 가장 많은 사람이 목표로 삼는 것이 뭐가 있을까요? 매년 생각하지만 이뤄내기가 싶지 않은 다이어트, 책 읽기, 외국어 공부... 어떤 걸 함께 해 볼까 고민하다가, 까짓거 다 하면 되잖아요. 그래서 세 가지를 다 하기로 했습니다! 1. 다이어트 운동이든, 식단이든 원하는 대로 정해 봐요. 대신 자신이 정한 규칙은 이 카드에 댓글로 꼭 남겨 주세요. 그래야 나중에 합리화하지 않을 테니까. 예를 들어 하루 한 끼는 꼭 샐러드를 먹어야지, 또는 일주일에 다섯 번 이상은 꼭 헬스장에 가야지, 걸어서 출퇴근해야지 등등. 그리고 매일 식단 사진을, 또는 운동 일지를 빙글에 업로드 하는 거죠. 2. 책 읽기 책을 읽는 속도는 사람마다 다른 거니까, 중요한 건 조금이라도 읽었다는 것이니까 인증 방식을 조금 달리해 보는 게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 날 읽었던 것 중 가장 마음에 와닿은 구절을 직접 적어 보는 거예요. 꾹꾹 눌러 쓰다 보면 마음에도 글귀가 새겨질 테니까 :) 거기에 더해서 내 생각을 적어 준다면 금상첨화일 테고요. 3. 외국어 공부 올해는 꼭 외국어를 하나쯤은 공부해 볼 거야! 다이어트와 더불어 새해 목표 양대 산맥. 마음만 먹고 몇 년을 훌쩍 보내 버리는 목표 중 하나죠. 초보들은 그날 배운 단어를 이용해서 문장 하나씩을 만들어 보거나, 좀 하시는 분들😉은 작문을 해 보셔도 좋을 거예요. 어때요, 어렵지 않죠? 너무 빡빡하게 하지는 않을 거예요. 각자 자신에게 맞는 속도가 있으니까요 :) 중요한 것은 꾸준하게 하는 것 아니겠어요? | 챌린지 참여 방법 1. 이 카드에 댓글로 원하는 챌린지에 대한 참가 신청을 해주세요. (중복 신청 가능) ex) 다이어트 챌린지 신청합니다! * 참가 인원에 따라 조기마감 될 수 있으니 서두르세요! 2. 매일 매일 업로드되는 해당일의 챌린지 카드에 댓글로 인증샷을 올려 주세요! 댓글로 담기에 역부족이라면 카드로 작성해 주셔도 좋아요 :) 3. 한주에 4일 이상, 3주간 총 12일 이상 댓글 또는 카드를 작성하면 챌린지 성공! | 챌린지 기간 2020년 2월 1일~ 2월 21일 (총 3주) 챌린지가 시작될 때 다시 한번 공지할 예정이니 알림을 꼭 켜두세요! | 리워드 챌린지를 완수한 모든 빙글러들에게는 특별한 빙글 배지가 수여 됩니다. 아무나 가질 수 없는, 챌린지 완수자들만이 가질 수 있는 배지. 프로필에 걸어 두고 남다른 의지를 자랑해 보세요! - 1월 1일의 결심이 작심삼일로 끝나고, '진짜 새해부터 시작할 거야! 우리 설날은 아직이니까!' 이렇게 생각하고 있을 빙글러들의 마음, 잘 알아요. 이걸 작성하고 있는 빙글코리안 담당자도 마찬가지거든요. 시작하기 딱 좋은 우리 진짜 설날, 음력 1월 1일. 하지만 연휴는 보내고 나야 마음이 좀 잡히니까, 설 연휴가 끝나고 정신을 좀 차린 2월 1일을 시작 날로 잡았답니다. 함께 하실 분들은 챌린지가 시작되는 날까지 구체적인 실행 방법을 고민해 보는 것도 좋겠죠? 그럼, 참여를 원하는 빙글러들은 얼른 댓글로 신청해 주세요!
그리스인 조르바
'그리스인 조르바' / 니코스 카잔차키스 저 (지극히 주관적인 제 생각을 쓴 글입니다.) 그리스인 조르바. 이 소설 속 알렉시스 조르바의 모델은 작가 니코스 카잔차키스가 실제로 만났던 기오르고스 조르바스라는 인물이다. 작가는 이 책이 소설이라기보다 조르바스에 대한 추도사에 가깝다고 말한다. 그만큼 조르바스는 작가에게 엄청난 영향을 준 인물이었다. 이 소설이자 추도사 속에는 빛나는 삶을 살아가는 조르바의 모습이 그대로 담겨 있었고 나는 니코스 카잔차키스가 왜 그에 대한 이야기를 이토록 긴 글로 써 내려갈 수밖에 없었는지 깨달았다. 소설 속 화자이자 주인공인 '나'는 늘 책을 읽고 고뇌하며 이상을 추구하는 지식인이지만 어느 순간 자신이 구체적인 삶의 현장 속으로 뛰어들어본 적이 없다는 것을 깨닫는다. 삶의 치열함 속에서 무언가 얻을 것이 있으리라고 생각한 '나'는 고향인 크레타 섬으로 돌아가 갈탄 광산을 운영하기로 결심한다. 피레우스 항구에서 크레타행 배를 기다리던 '나'에게 갑자기 한 늙은 노인, 조르바가 다가와 다짜고짜 자신도 크레타 섬으로 데려가 달라고 말한다. 어떤 일이든 잘 해낼 자신이 있으며 수프 하나는 기똥차게 잘 만드니 자신을 요리사로라도 고용하라는 조르바. 그의 거침없는 말과 행동거지에 '나'는 왠지 모를 호감을 느끼고 결국 조르바와 함께 크레타 섬으로 향한다. 조르바와 함께 늙은 마담 오르탕스의 집에 머물게 된 '나'는 갈탄 광산의 현장 책임자로 조르바를 고용한다. '나'와 조르바는 하루 일과를 마치면 저녁을 먹으며 늘 함께 이야기를 나눈다. 조르바의 인생 이야기에는 책에만 파묻혀 있던 '나'는 알지 못하는 생동감이 넘쳐났고 '나'는 갈탄 광산이 아니라 조르바와의 대화, 저녁 식사에 점점 빠져들게 된다. 거침없는 말과 행동, 책 속에서 해답을 얻지 못했던 인간과 신, 여러 인생의 문제들의 핵심을 꿰뚫는 경험에서 우러난 통찰력, 평범한 것도 항상 새롭게 바라보는 시각 등 '나'는 조르바에게서 많은 것을 배운다. 책 속의 글자에서는 배울 수 없었던 인생의 경험에서 우러난 날카로운 이야기들을 조르바는 아낌없이 풀어놓는다. 갈탄 광산의 일이 잘 풀리지 않아 돈을 날리게 되었지만 '나'는 조르바와의 대화를 통해 잃은 돈보다 훨씬 많은 것들을 얻게 된다. 하지만 결국 갈탄 광산의 일이 실패하며 둘은 각자의 길을 가게 된다. 가끔씩 조르바를 회상하던 '나'에게 몇 년의 시간이 지나 조르바의 부고가 날아온다. '나'는 그때야 비로소 자신이 알고 있는 조르바에 대한 모든 것을 글로 쓰기로 결심한다. 그 글이 바로 이 '그리스인 조르바'인 것이다. 이 소설은 니코스 카잔차키스의 자전적인 소설이다. 실제로 작가의 행보가 소설 속 화자와 많은 부분에서 겹치고 기오르고스 조르바스라는 소설 속 조르바의 실존 모델이 존재한다는 점도 그렇다. 소설 속 이야기처럼 실제로 니코스 카잔차키스도 조르바스에게 커다란 영향을 받은 듯하다. '나'는 조르바와 많은 대화를 나누며 큰 충격을 받는다. 수없이 많은 책을 읽고 철학자들의 사상을 공부하고 인간이라는 존재에 대해 끝없이 고뇌하던 '나'의 물음들을 조르바는 단숨에 해결해버린다. 자신의 내면이 원하는 대로 슬플 때 슬퍼하고, 기쁠 때 기뻐하며 그 순간의 감정들을 아낌없이 표현하는 조르바는 늘 행동보다 고민과 생각이 앞서는 나를 질책한다. 그놈의 책을 다 불태워버리면 삶을 좀 더 이해할 수 있을 거라고 말하고 똑똑한 두뇌란 이것저것 재고 이익과 손해를 따지는 '영원한 식료품 상인'이라 말한다. 이것저것 생각하느라 진정한 삶을 살지 못하게 만든다는 것이다. 이렇듯 조르바는 '나'가 끊임없이 고민하는 문제들을 이성적 고민이 아니라 그 순간 자신의 감정과 내면에 대한 충실함, 그리고 직관을 통해 마치 알렉산드로스 대왕이 고르디우스의 매듭을 풀듯이 단칼에 잘라내 버린다. 복잡하게 엉켜있는 문제를 하나하나 고심하느라 생각이 앞서 매듭에 손조차 대지 못하고 있던 나에게 매듭을 칼로 잘라버리는 조르바의 대답은 신선한 충격을 안겨준다. 이 소설 속에서 지속적으로 반복되는 메시지는 삶의 순간들에 대한 충실함이다. '나'가 철학적 물음과 고민에 빠져 어떤 것도 행동으로 옮기지 못하고 죽음으로 달려가고 있는 삶을 허비하고 있는 사이, 조르바는 매 순간 떠오르는 해의 찬란한 빛, 바람에 흔들리는 꽃의 모습, 검푸른 바다의 철썩거리는 파도 소리를 마치 처음 경험하듯 환희에 가득 차 바라보며 삶의 아름다움과 기쁨을 만끽하고, 식사 시간이면 자신의 배고픔을 해결해주는 음식의 맛과 향과 포만감에 집중해 육체를 활동할 수 있도록 가득 채우는 데 전념하고, 아름다운 여자를 보면 그 여자에게 사랑을 말하고 기쁨을 줌으로써 자신과 그녀의 육체적, 정신적 행복을 채우기 위해 최선을 다한다. '나'는 그런 조르바를 바라보며 언젠가 죽음으로 끝나게 될 삶을 충실히 살아간다는 것, 자신의 내면에서 자신의 삶이 진정으로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알아내는 법을 배우며 현실과 동떨어진 물음들에 매몰되어 책 속에만 파묻혀 있던 지식인의 모습에서 점점 변화해 간다. 조르바의 모습은 니체가 말하는 '초인'에 가깝다. 신에 기대어 자신의 나약함을 초월적 존재에 의지하려고만 하는, 스스로를 신의 노예로 만드는 자. 신을 부정하며 허무주의와 맞닥뜨려 인간이란 존재의 의미를 찾을 노력도 하지 않는, 스스로의 삶에 충실하지 않고 삶을 긍정하지 않는 자. 조르바는 그러한 단계를 뛰어넘은 인간이다. 인간은 언젠가 죽는다는 것을 완전히 인지하고 있고, 인간이 초월자에 의해 어떤 사명을 띠고 지구 상에 나타나 인간의 존재가 태어나는 그 순간 살아가야만 하는 의미가 부여되어 있는 것이 아님을 알고 있다. 그럼에도 조르바는 인간이란 무의미하고 그저 태어나 죽을 뿐인 어떤 가치도 없는 존재라는 식의 허무주의에 빠지지 않는다. 스스로 자신의 삶에서 아름다움과 기쁨을 찾아내고 태어난 이래로 죽음을 향해 달려가고 있음에도 지금 이 순간 태양과 바다와 공기와 꽃의 향기를 느낄 수 있다는 사실에 충실하며 그곳에서 오는 자신의 육체적, 정신적 충만감을 만끽하는 자가 바로 조르바다. 스스로 삶의 가치를 만들고 긍정하는, 초월한 자(초인)인 것이다. 소설 속에서 과부가 살해당하는 장면을 보면 조르바와 '나', 그리고 군중의 차이가 확연히 드러난다. 군중은 과부가 남자들을 홀린다는 이유로 하느님의 이름을 외치며 과부를 죽이려 든다. '나'는 과부를 죽이려는 군중들을 바라보며 그것이 잘못되었다고 인지는 하고 있으나 적극적으로 끼어들어 말리지는 못하고 관망할 뿐이다. 조르바는 군중의 광기에 휩쓸리지 않고 귀를 뜯기면서도 과부를 죽이려는 사람들들을 막아선다. 군중은 하느님의 이름을 외치며 과부를 갈 곳 잃은 분노의 희생양으로 결정한다. 그 군중 속에는 과연 이 일이 맞는 것인가 스스로 자문하며 옳고 그름을 규명하려는 자가 없다. 그저 잘못 해석되고 비틀린 기독교적 윤리관을 맹목적으로 믿는 자들, 주변의 열기와 광기와 휩쓸려 스스로 판단하려는 노력조차 하지 않고 과부에게 칼날을 들이미는 자들 뿐이다. '나'는 군중보다는 낫지만 적극적으로 사태에 끼어들어 과부를 구해내지는 못한다. 행동하지 못하는 자가 바로 '나'이다. 옳다고 느끼는 자신에게 즉시 충실하지 못하고 일의 합리성과 옳음에 대한 판단에 너무나 많은 시간을 허비하며 자신의 결정을 늘 의심한다. 그런 '나'가 할 수 있는 일은 옆에 있는 양치기에게 그녀에 대한 자비를 베풀라고 말하는 것뿐이다. 그러나 조르바는 군중과도, '나'와도 다르다. 조르바는 과부를 죽이려는 자들을 보자마자 뛰어들어 그들을 막아선다. 귀가 뜯기는 부상을 당하면서도 과부를 구하기 위해 최선을 다한다. 결국 과부가 죽고 난 뒤 조르바는 '슬플 때는 진짜 눈물을 뚝뚝 흘리고, 기쁠 때는 고운 형이상학의 체로 걸러 내느라 기쁨을 잡치는 법이 없는 그런 사내의 고통'을 겪는다. 조르바는 군중들이 과부를 죽이는 일이 옳지 않다고 판단하자마자 몸을 던져 그들을 막기 위해 노력한다. 군중의 광기에 휩쓸려 자신을 잃어버리지도 않고 '나'처럼 방관하지도 않는다. 그 순간 자신이 옳다고 생각하는 일을 행하고 그 일이 좌절되어 과부가 죽은 후에는 온전히 슬퍼하고 고통스러워하는 것이다. 주변의 행동이나 시선, 종교적 윤리적 제도와 가치에 휩쓸리지 않고 자신만의 가치를 스스로 만들고 결정하고 판단하는 자, 순간순간에 충실하게 행동하는 자, 고통도 기쁨도 슬픔도 고뇌도 그대로 받아들이고 체험하며 외면하지 않는 자, 인간은 태어나면서부터 죽음으로 달려가고 있다는 것을 알면서도 지금 살아있는 자신의 모든 것을 긍정하는 자, 그런 사람, 초인이 바로 조르바인 것이다. '신은 죽었다'라고 말하는 니체의 무신론적 실존주의의 관점에서 이 소설은 책과 먹물 속에 파묻혀 삶과 동떨어져 있던 '나'가 초인 조르바의 영향을 받아 변화해가는 과정을 그리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이성과 정신의 세계에서 꿈꾸듯 이상만을 그리며 살아가던 '나'가 자신의 '실존' 즉, 자신이 관념의 세계가 아닌 이 시간, 이 장소, 이 현실 세계에 존재하고 있다는 것을 조르바를 통해 온 몸과 정신으로 체감하며 순간의 삶을 사는 인간으로 변화해 가는 과정은 마치 '나'가 새로운 인간으로 다시 태어나는 듯했다. 특히 소설 후반부, '나'가 생각과 합리와 이성을 거쳐 나온 언어, 말로는 도저히 표현할 수 없는 어떤 것을 표현하기 위해 조르바에게 그의 언어, 춤을 가르쳐달라고 하며 둘이 함께 춤을 추는 모습은 드디어 '나'가 먹물과 책으로 둘러 싸인 한 세계를 깨고 나온 듯한 느낌을 주었다. '실존은 본질에 앞선다' 무신론적 실존주의 철학자 장 폴 사르트르의 말이다. 조르바는 무엇보다도 자신의 존재를 철저히 감각하고 느끼는 자다. 그에게는 지금 내 앞에 있는 여자와 자신이 행복해지는 것, 지금 맛있는 음식과 달콤한 포도주를 마시는 것, 지금 풍겨오는 레몬과 오렌지 나무의 향기를 맡는 것, 지금 느껴지는 슬픔과 기쁨을 온전히 온몸으로 체험하는 것을 통해 자신이 살아있음을 자각하고 자신의 삶을 살아나가는 것이 그 무엇보다 중요하다. 한 번뿐인 삶은 한 번 뿐이기에 소중하고 한 번 뿐이기에 온전히 경험해야만 한다. 삶을 살아가는 이유가 무엇인지 알고 싶다면 조르바의 인생을 보고 그의 이야기를 들어라. 그는 오롯이 그 자신만으로 삶을 긍정하고 인간의 존재 가치와 의미를 찾아내는 자다. 조르바에게 "제가 살아가야 하는 이유는 무엇일까요?"라고 물으면 아마도 이렇게 대답하지 않을까 싶다. "저 푸른 바다를 보게. 어찌 저렇게도 일렁이는지. 너무나 아름다워 눈물이 날 것 같지 않은가?" 소설 속 한 문장 "보스 양반, 돌멩이들과 꽃과 비가 하는 말을 알아들을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82년생 김지영, 조금 예민하고 크게 슬프다 [5분영화겉핥기] 영화 솔직후기/리뷰/해설/쿠키영상/관객수예상
안녕하세요! 재리예요!! 시험기간이 무려 3주째 이어지고 있습니다. 막학기라 그런지 별로 의욕도 없는데 고역입니다. 시간이 남길래 과제를 하려 했으나발길은 역시나 영화관을 향하더군요. 왜냐하면 오늘은 화제작이 개봉을 하는 날이기 때문입니다. 오늘의 영화는 소설원작 '82년생 김지영'입니다. 모두가 사실 리뷰를 쓰기 꺼려하더군요. 특히 저같이 블로그를 하는 사람이나 후기를 주로 작성하는 분들은요. 그 이유는 대부분 아시겠지만 현상의 기폭제 역할을 했으니까요. 저는 소설을 읽어보지 않은 사람으로서 영화만 보고솔직하게 느낀점을 남겨보려 합니다. *본 글은 개인의 솔직한 견해와 의견일 뿐입니다. 영화는 영화로만 일단 영화를 사랑하는 사람으로서 영화는 그냥 작품 자체로서 감상했으면 좋겠습니다. 지금 현상황도 때론 영향을 주고 받기도 하지만 배우가 어쨌다, 이 부분이 어쨌다 미시적인 부분을 크게 부풀리는 해석은 확실히 지양했으면 합니다. 실제로 지금 영화 개봉 1일차임에도 불구하고 사이트 평가글들은 폭발적입니다. 아직 10만명도 보지 않은 영화에 대해 어떻게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반응할 수 있을까 신기하기도 합니다. 영화도 마치 지금 현 상태를 반영하듯 이렇게 말합니다. 본인들의 생각을 말하고 떠드는 건 상관없지만 적어도 피해를 주지는 말아야 하며, 행여나 상처를 줄 말들은 들리지 않게 해야죠. 모두의 이야기 영화는 모두의 이야기를 다루고 있는게 맞습니다. 그래서 본 영화가 어떠한 갈등의 촉매제가 되진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역시 이래서 그랬구나, 역시 누구는 이렇구나 하는 무분별한 일반화는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우리는 싸우려고 영화를 보지 않고, 남에게 피해를 주기 위해 살고 있지 않으니까요. 집안일을 여성인 김지영이 하고 있습니다. 일을 포기한 것도 김지영입니다. 육아를 대부분 맡아하는 것도 김지영입니다. 하지만 반대로 남성일 수도 있고 남편인 대현의 일상일 수도 있는 얘기입니다. 남성과 여성이 바뀐다고 해서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근본적인 원인은 사회입니다. 육아휴직조차 제대로 못 쓰게 하는 직장과 아내에게 일을 편중시키는 가족문화, 남아를 선호하는 전통사고의 잔존은 '성'이라는 문제로 해결되지 않습니다. 우리 모두가 차이는 있지만 가지고 있는 마음의 고통을 다룬 이야기입니다. 조금 예민하고 공격적이다 소설에 비해서는 덜 자극적이라는 평이 많더군요. 원작을 경험하지 못해 비교는 안 됩니다만 저에게는 영화도 날카로웠습니다. 굳이 이런 사건을 보여줬어야 했나? 굳이 저런 멘트까지 나왔어야 했나? 싶더군요. 이렇게 하나하나에 반응하는 스스로에게도 회의감이 들 정도입니다. 전체적으로 남성이 여성에게 주는 상처가 주를 이루며 작품에 등장하는 남성은 대부분은 생각이 없고 무례합니다. 반면에 여성은 대부분 피해자고 희생적입니다. 여성들끼리의 문제를 다루는 부분은 시어머니와 관련한 고부갈등이 전부고 남성의 고통이 나오는 부분은 육아휴직을 고민하는 부분 정도입니다. 그마저도 여성이 남성에게 줄 수 있는 가능성은 고려하지 않았습니다. 영화가 잘 만들어졌고 감동적이나 전반적으로 깔린 의식은 조금 예민하고 남성에게 공격적이라고 생각합니다. 묵직하게 슬프다 눈물이 안 날수가 없더군요. 분명 가족들을 먹여 살리기 위해 일생을 바친 미숙이라는 어머니의 역할을 제대로 이해하기란 힘듭니다. 그런 삶을 살아보지도 않았고 견뎌내지도 못했을 삶이기에 헤아리기란 어렵습니다. 그럼에도 어머니가 느꼈을 고통과 딸에게는 전해주고 싶지 않은 아픔, 그리고 잘 살았으면 하는 걱정이 하나가 되어 커다란 슬픔이 됩니다. 미숙을 연기한 김미경 배우님은 종합적인 감정을 표정 하나에 다 실었습니다. 응축된 감정에 동요하지 않기란 매우 힘듭니다. 덕분에 오랜만에 영화관에서 엄청 고생했습니다. (눈물 닦느라요) 개인의 잘못은 올바르게 돌아가길 전체적인 주제는 김지영의 대사에서 나옵니다. "절 아세요?" 이 한 마디입니다. 우리는 아는 사람보다 모르는 사람과 함께 세상을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런데 요즘에는 너무나 쉽게 모르는 사람에게 상처를 줍니다. 오히려 친하고 소중한 사람들에 대해서는 아는 게 없고, 모르는 사람들에 대해서는 자꾸만 과하게 알려고 파고들죠. 어딘가 이상하지 않나요? 챙길 사람들만 신경쓰고 살기에도 바쁘고 힘든데 왜 굳이 남들까지 신경쓰고 살아야할까요? 그들이 당신에게 얼마나 큰 피해를 주었나요, 아니면 그럴 특별한 이유라도 있는 건가요. 본인의 삶을 남들이 알기 힘든 것처럼, 남들의 삶도 본인이 알기 힘듦을 아는 역지사지의 마음가짐이 절실히 필요한 시기라고 생각합니다. 혹시 누군가의 잘못된 언행이 있다면 그 본인에게 올바르게 돌아가기를 희망합니다. 오발탄처럼 아무에게나 흩날리지 말고 말이죠. 당당하게 맞서다 어딘가에 구속되고 억압받는 삶을 산 김지영은 마침내 온몸을 내리쬐는 태양 앞에서 당당하게 서 있었습니다. 영화는 듣고만 있지 말고, 능동적으로 헤쳐나가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부조리한 상황에서 당당하게 맞서라고 얘기합니다. 기죽지 말고 슬퍼하지만 말고 화내고 당차게 할 말은 하고 살라는 뜻입니다. 의외로 후련하지 않을 수도 있지만 기분이 한결 나아질지 모릅니다. 자랑거리는 아니지만 그게 당연한 반응이니까요. 단, 본인 당사자의 억울함에 한해서입니다. 우리는 타인의 대변인도 아닐뿐더러 세상물정을 다 아는 도사도 아니고 사람의 감정을 통달한 독심술사도 아닙니다. 그러니 우리는 우리 삶에 최선을 다합시다. 우리가 경험한 것에 한해 마음껏 대답합시다. 한 마디로 모두에게 용기를 주고 모두의 슬픔을 이해하는 영화였습니다. 쿠키영상은 없구요, 관객수는 100~200만 예상합니다! 이상 '82년생 김지영'에 대한 솔직한 후기였습니다.
겨울왕국2, ooo가 캐리했다! (영화 솔직후기/리뷰/해설/쿠키영상/관객수예상) [5분영화겉핥기]
안녕하세요! 재리예요 요즘 정말 힘들게 살고 있습니다. 드디어 두려워하던 영화가 개봉하면서 하루도 제대로 못 쉬고 있습니다. 정말 많은 분들이 보러오는 영화입니다. 저도 드디어 봤습니다. 오늘의 영화는 오랜 시간을 지나 돌아온 '겨울왕국2'입니다. 상상은 했지만 그 이상으로 대박의 징조입니다. 오히려 페이스만큼은 1편을 능가하는데요. 같이 일하는 크루들마저도 너무 재밌다고 호평을 이어갔습니다. 더욱더 커진 기대를 안고 저도 드디어 겨울왕국을 보고 왔습니다. 세상 가장 솔직한 재리의 리뷰, 그럼 지금 시작하겠습니다. 여전히 강하다 역시 1편 못지 않게 OST와 비주얼은 확실히 대단합니다. OST는 실망을 하지 않았고 비주얼은 오히려 더 좋았습니다. 새로운 모험과 1편에서의 떡밥을 더 커진 시야를 통해 풀어가는 이야기입니다. 애니메이션과 뮤지컬 형식을 융합한 형식인데요, 처음에는 어색할지 몰라도 보다보면 중독되는 디즈니만의 표현방식입니다. 엘사와 안나는 여전히 매력적이고 주변 인물들 또한 명백한 개성을 보여주는 편이었습니다. 변하는 것, 변하지 않는 것 겨울왕국 2편은 꽤 많은 주제를 담고 있습니다. 그러나 가장 중심이 되는 내용은 역시 '변화'입니다. 시간이 흘러도 변하지 않는 것, 시간에 따라 변해가는 것을 비교해서 보여줍니다. 분명한 건 어느 한 쪽이 옳다 그르다의 시선이 아닙니다. 변하지 않는 건 그대로 있지만, 변하는 건 그대로 변해야만 괜찮다고 말합니다. 반대로 변하지 않는 걸 변화시킨다거나, 변화해야 함에도 억지로 막는 행위는 큰 재앙을 불러오기도 합니다. 1편이 어린이들 을 위한 작품이었다고 보면 2편은 더 어른스러운 이야기를 선보입니다. 디즈니식 운영 정말 전형적인 디즈니 영화입니다. 그래서 저는 이제 모든 스토리가 대충 예상이 갑니다. 전개 - 심화 - 하이라이트 - 해소 - 결말로 이어지는 루트가 너무나 비슷합니다. 어느 부분에서 흥미롭게 의도했는지, 또 어느 부분에서 눈물을 자극하는지 이제는 눈에 훤합니다. 그야말로 디즈니만이 만들 수 있는 내용이며 디즈니이기에 더이상 새롭지 않은 길입니다. 그래서일까요, 너무나 기대를 한 나머지 생각보다 감흥이 줄었습니다. 메인은 단연 올라프입니다. 영화 보자마자 바로 올라프 굿즈 및 인형을 구입했습니다. 노골적으로 캐리를 하고 있습니다. 단적으로 말씀드리면 올라프가 없었다면 중간에 졸았을지도 모릅니다. 그 정도로 작품 전체의 유머, 교훈의 전달, 감동의 주체까지 모두 올라프가 만들고 있습니다. 1편에서는 철저한 감초의 역할이었다면 2편에서는 없어서 안 될 중요한 요소입니다. 이제는 주연이라고 말할 수 있을 정도로 작품 전체를 휘어잡는 역할로 발전했습니다. 다시 한 번 올라프의 희생에 감사를 표합니다. 엘사의 히어로화 엘사의 마법이 더욱 강력해지고 더욱 중요해집니다. 전편은 엘사의 고민해결이었다면 2편은 엘사의 정체성 찾기 모험입니다. 작품의 세계관에서 엘사가 가지는 존재감, 그리고 전편에서의 떡밥을 회수해야 하는 목적이 합쳐지면서 이번 겨울왕국이 탄생했습니다. 심지어 이번에는 엘사의 능력을 더욱 강력하게 어필하고 히어로를 연상케 하는 능력을 보여주며 화려한 액션씬까지 보여줍니다. 앞서 말씀드린 점을 종합해보면 액션이면 액션, 스토리면 스토리, 노래면 노래, 감동이면 감동까지 빠짐없이 들어가있지만 왠지모르게 그 조합이 조화롭지는 않았습니다. 1편과 2편 저는 1편이 더 재밌고 좋았습니다. 분명 더 커진 세계와 다채로운 인물들이 이야기를 채우기는 합니다만 1편에서 느낀 감명이 더 좋았습니다. 기대를 너무 많이하면 실망도 큰 법이니까요. 특히 주위 사람들이 너무 칭찬을 많이 하는 바람에 객관적인 판단이 다소 흐려지기도 했습니다. 저에게는 만약 올라프가 없었다면 영화를 끝까지 맨정신으로 볼 자신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더 많은 얘기를 할 필요가 없습니다. 재미가 없다는 뜻이 아닙니다. 다만 생각보다 루즈하고 힘이 적을 수 있다는 얘기입니다. 취향은 개인의 차이니 직접 한 번 확인해보시기 바랍니다! 쿠키영상은 10분 가량의 엔딩크레딧이 모두 올라간 후 하나가 있습니다. 관객수는 단연 천만 이상입니다. 다만 여유롭게 넘지는 못할 거 같습니다. 돌아온 겨울왕국, 생각보다 미미한 존재감, 영화 '겨울왕국2'였습니다.
태국 동굴소년, 어떻게 영국 다이버와 의사소통했을까?
미얀마 와족 출신 소년, 다국적 구조대에 영어로 의사전달 구조작전에 결정적인 역할을 한 아둘 삼온(사진=ABC뉴스) "I'm Adul, I'm in good health. What day is it?"(저는 아둘입니다. 제 건강은 괜찮습니다. 오늘이 무슨 요일인가요?) 태국 북부 치앙라이 동굴에 고립됐다가 구출된 유소년 축구팀 가운데 유창한 영어실력으로 다국적 구조대와 소통을 도운 한 소년이 주목 받고 있다. 태국에서 자란 소년은 어떻게 외국어인 영어를 할 수 있었을까? 태국 정부는 지난 10일(현지시간) 저녁 동굴 안에 갇혀있던 12명의 소년과 코치가 전원 구조됐다고 공식 발표했다. 동굴에 고립됐던 유소년 축구팀의 14세 아둘 삼온은 태국어를 할 줄 몰랐던 다국적 구조대와 영어로 소통하며 구조작전에 결정적인 역할을 한 것으로 밝혀졌다. 태국 매체 더 네이션은 그가 발군의 영어실력을 발휘하게 된 데에는 그가 다닌 교회와 학교가 큰 영향을 미쳤다고 전했다. 아둘은 미얀마 소수민족인 와족 출신으로 그의 부모는 아들이 7살일때 더 나은 교육을 받게 하기위해 아둘을 태국 북부로 보냈다. 혼자가 된 아둘을 돌봐준 건 태국과 미얀마 국경지대에 있는 한 교회였다. 목사부부의 헌신적인 보살핌 속에서 아둘은 교회와 학교에서 다양한 친구를 만나며 성장할 수 있었다. 그가 재학 중인 위앙판 학교는 지리적 특성상 소수민족 출신이 많아 정책적으로 태국어와 미얀마어, 중국어 그리고 영어를 가르쳤다고 한다. 아둘이 재학 중인 위앙판 학교의 푼나윗 텝수림 교장은 "우리 학교는 중국어 및 영어를 가르치는 데 중점을 두어 학생들은 일상 생활에서 중국어와 영어로 의사 소통을 할 수 있다" 고 더 네이션에 설명했다. 특히 아둘은 학업성적도 높은편으로 평균학점이 3.96에 달하며 영어 외에도, 태국어, 중국어, 미얀마어를 구사할 수 있다고 더 네이션은 전했다. 프나윗 텝수림 학교장은 AFP와의 인터뷰에서 "아둘은 보석이다. 그는 공부와 스포츠 모두에 능하며 그가 수상한 메달과 상들이 학교에 걸려있을 정도"라고 아둘의 학업생활을 평가했다.
날짜 없음
'날짜 없음' / 장은진 저 (지극히 주관적인 제 생각을 쓴 글입니다.) 그게 온다고 한다. 179번부터 0번까지 하나씩 줄어드는 숫자들. 끝을 향해 달려갈수록 숫자의 크기는 점점 줄어든다. 시작인 179도, 끝인 0도, 그게 온다고 말한다. 과연 그건 정말 왔을까? 와서 세계를, 지구를, 도시를, 회색 눈들을, 그 속에 누워있는 시체들을, 컨테이너 박스를, 반을, 그를, 나를, 집어삼켜버렸을까. 어느 날 갑자기 붉은 눈이 내렸다. 사람들은 저마다 붉은 눈의 이유에 대해 뜬구름 같은 해답과 소문들을 내놓지만 진실은 알 수 없다. 시간이 지나면서 붉은 눈은 회색으로 바뀐다. 하늘에는 때가 낀 양말과 더러워진 털을 가진 양 떼 같은 회색 구름이 떠 있고 회색 눈이 끝없이 쏟아진다. 오늘도, 내일도, 낮에도, 밤에도 회색 눈은 회색 구름에서 계속 떨어져 내린다. 늘 회색 구름과 회색 눈에 덮여있는 도시, 회색시는 낮과 밤이 구분되지 않는다. 1년이 넘도록 쏟아진 눈에 회색시의 기능들은 마비되어버리고 불길한 소문들만 알음알음 회색 눈을 타고 퍼진다. 해를 보지 못한 사람들은 점점 피골이 상접하고 피부색마저 회색으로 변한다. 회색인이라 불리는 그들은 안전한 곳을 찾기 위해 줄줄이 회색시를 떠난다. 누구도 돌아온 적 없고 목적지가 어딘지도 모르는 회색인들의 행렬. 회색시에는 세 종류의 사람이 생긴다. 행렬을 따라 어딘지 모를 곳으로 떠나는 회색인, 끊이지 않는 회색 눈과 보이지 않는 미래에 스스로 죽음을 택하는 사람, 평범한 생활을 이어가려 노력하는 사람. 세 번째 사람에 속하는 주인공 해인과 그녀의 애인인 그, 그리고 그의 반려견 반이 소설의 주요 등장인물이다. 회색시에는 한 가지 소문이 퍼져 있다. [그게 온다고 한다]는 소문. 그게 무엇인지는 소설 내내 나오지 않는다. 하지만 179부터 0으로 줄어드는 소설 속 챕터(?)별 숫자들과 그게 오면 모든 것이 끝나버릴 것처럼 이야기하는 인물들의 대화를 보면 그게 뭔지 어느 정도 짐작은 된다. 지구가, 적어도 인류 문명이 끝나버릴 만한 거대한 자연재해, 혹은 인간의 멸망을 일으킬 만한 사건일 것이다. 소설 속에서 우리는 의사인 주인공 해인과 구둣방을 운영하는 그녀의 남자 친구 그(이름이 나오지 않는다), 그리고 그의 반려견 반이 컨테이너 박스 속에서 하루를 보내는 이야기를 엿볼 수 있다. 마지막이 될지도 모르는 하루다. 바로 다음 날, 그게 온다는 이야기가 파다하다. 그 날 하루 동안 많은 사람들이 그의 구둣방인 컨테이너 박스의 문을 두드린다. 근처 분식집 아주머니인 또와 아주머니, 맡긴 구두를 찾으러 온 노인, 우산 장사를 하는 그의 친구, 회색인의 행렬을 따라갔다가 반죽음 상태로 돌아온, 이미 회색인이 되어 버린 기타 리페어샵을 운영하던 진수 등등. 이 책은 담담하게 그것이 오기 전 하루 동안 해인과 그와 반과 그들이 있는 컨테이너 박스를 방문하는 여러 방문객들의 이야기를 보여준다. 일반적인 디스토피아, 혹은 아포칼립스를 다룬 소설의 강점으로는 무너져가는 세계를 구하려는 주인공의 분투와 그 속에서 살아남으려는 사람들의 처절함, 생존자들 간의 싸움과 다툼에서 생겨나는 긴장감을 들 수 있겠지만 이 소설은 전혀 다르다. 이 소설은 끝을 앞에 둔 소시민들의 모습을 담담하게 그린다. 세계를 구하겠다는 야심 찬 주인공도 없고 처절하게 살아남으려 남을 약탈하고 죽이는 인물도 없으며 손에 땀을 쥐게 만드는 사건도 딱히 없다. 또와 아주머니는 곧 다가올 끝을 외면하며 하루하루 손님 없는 분식집을 운영할 뿐이고 구두를 찾으러 왔다는 노인은 내일이면 찾아올 그것에 대해 체념하고 자신의 죽음을 넌지시 암시한 채 구두를 찾지도 않고 돌아간다. 홍 여사님은 두 달만에 찾아와 전과 다름없이 폐지와 폐품을 받아 손수레를 끌고 돌아가고 유나라는 여고생은 학교를 안 가도 돼서 좋다고 말하면서도 수의사가 될 것이라며 오지 않을지도 모르는 미래를 이야기한다. 주인공인 해인과 그녀의 연인인 그도 마찬가지다. 내일이면 모든 게 사라질지도 모르는 오늘, 그들은 평범한 하루를 보낸다. 늘 먹던 김치찌개를 끓여 저녁을 먹고, 커피를 마시고, 시디플레이어로 음악을 들으며 이야기를 나누고, 반을 쓰다듬으면서. 그 지점이 좋았다. 곧 다가올 마지막에 대한 절망과 체념과 포기로 얼룩진 인물들이 아니라는 점이. 내일이면 사라질지도 모를 세계와 회색 눈이라는 절망 속에서 퍼지는 사람 간의 당연한 호의와 공감의 모습도 인상적이었다. 내일이 세상의 마지막이라도 인간으로서 당연히 가져야 할 가치들, 사랑, 공감, 연민이 남아 있는 인물들의 모습은 뭉클하기도 했다. 반의 기도를 막은 누런 콧물을 직접 입으로 빨아내 반을 살려내고, 숨이 꺼져가는 진수를 살리기 위해 최선을 다하는 해인과 그의 모습. 보이지 않는 홍 여사를 걱정하던 구두를 찾으러 온 노인과 홍 여사가 늘 고맙게 생각한다며 해인에게 쥐어 준 곶감 몇 개. 고층 빌딩에서 뛰어내린 죽은 연인의 놓쳐버린 손을 다시 수습해 이어주는 해인. 유나와 해인에게 신을 수 있을지 없을지 알 수 없는 직접 만든 단화와 부츠를 선물한 그. 몇 시간 후면 이 모든 게 사라질 회색 눈뿐인 세상에 조그맣고 또 커다란 행동과 언어들이 남아 있다는 점이 기뻤다. 해인의 가족들, 엄마, 아빠, 여동생은 회색인들의 행렬을 따라 떠나기로 하고 그 전날 해인과 마지막 파티를 한다. 해인의 아빠는 그와 함께 남겠다는 해인에게 그가 무슨 일을 하는지, 돈을 얼마나 버는지, 나이는 몇이고 부모님은 무슨 일을 하시는지 묻지 않는다. 그를 많이 좋아하는지, 함께 있으면 안 무섭겠는지를 묻고 그럼 됐다고 말한다. 아이러니하다. 온전한 세상일 때는 사랑만으로 함께 있을 수 없다. 연인의 직업이 무엇인지, 함께 살 집은 있는지, 부모의 직업은 무엇인지, 나이는 몇인지, 아이는 없는지, 결혼한 적은 없는지. 둘의 사랑에 온갖 요인들이 끼어든다. 부모와 가족의 반대, 친구들의 만류, 주변의 시선 등등. 사랑해서 결혼한다는 지극히 당연한 이야기가 당연해지지 않는다.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살고 싶다는 그 당연한 이야기는 온통 회색 눈으로 뒤덮여 거의 모든 기능이 마비된, 하루하루 사람들이 죽어나가고 머지않아 모든 게 사라질 당연하지 않은 세상이 되고 나서야 당연한 이야기가 된다. 서로를 사랑하고, 그것만으로 함께 살 수 있는 세상은 사실 당연하지 않은 세상인 걸까. 시종일관 조용하고 고요하다. 그렇다고 슬프거나 침통하거나 체념과 포기의 기운이 감도는 것도 아니다. 담담히 보여줄 뿐이다. 내일이면 모든 게 없어질 세상에서 오늘 하루를 살아가는 사람들의 모습을. 전기가 나가고, 불이 꺼지고, 온몸이 덜덜 떨리는 추위 속에서 서로를 꽉 껴안은 해인과 그가 서로를 놓치지 않았기를. 그래서 다음과 같이 이어지기를.  -1 그것은 오지 않았다. 소설 속 한 문장 "많이 좋아하니?" "네. 많이요." "같이 있으면 설레니?" "네." "함께라면 안 무섭겠니?" 나는 확신 있게 고개를 끄덕였다. "됐다. 그럼."
리스본행 야간열차
'리스본행 야간열차' / 파스칼 메르시어 저 (지극히 주관적인 저의 생각을 쓴 글입니다.) 리스본행 야간열차. 소설의 제목이 매우 감각적이다. 그에 끌려 열어본 책 속에는 생각보다 훨씬 철학적인 질문들이 문학의 틀 속에 담겨 있었다. 스위스 베른의 김나지움에서 고전 문헌학을 가르치는 그레고리우스. 그는 몇십년 동안 변함없이 8시 15분전에 출근해 학생들을 가르치는 하루하루를 살아가고 있는 사람이었다. 그런데 어느 날 8시 15분 전에 출근하던 그의 앞에 처음 보는 여자가 나타난다. 이름도 모르는 그녀가 자살을 하려는 듯한 모습에 몸을 던져 이를 막은 그레고리우스. 그 여성은 갑자기 사인펜을 꺼내 그의 이마에 전화번호를 적는다."죄송해요. 이 번호를 잊어버리면 안되는데 종이가 없어요." 뭔지모를 묘한 느낌에 휩싸인 그가 여자에게 모국어를 묻자 그녀가 말했다. "포르투게스." 그 단어의 울림에 잠긴 그는 수업을 하다 말고 책을 놓고 교실에서 나온다. 갑자기 찾아온 단조로운 삶에 대한 혼란. 그는 고서점에서 포르투갈어로 된 책, 아마데우 드 프라두라는 사람이 쓴 '언어의 연금술사'를 손에 넣게 되고 그 책에 매료된다. 아마데우 드 프라두의 흔적을 찾기 위해 무턱대고 리스본행 야간열차에 몸을 실은 그는 자신의 행동을 후회하면서도 결국 리스본으로 향한다. 아마데우 드 프라두의 족적을 찾기 위해. 그레고리우스는 리스본에서 여러 인물들을 만난다. 아마데우 드 프라두와 함께 저항운동을 하던 주앙 에사, 그의 여동생들인 아드리아나와 멜로디, 그의 어릴 적 친구였던 조르지와 이루지 못한 사랑의 상대인 에스테파니아 에스피노자. 마지막으로 그의 어릴적부터의 여인 마리아 주앙까지. 그 삶의 흔적을 쫓던 그는 여러 가지 철학적 질문과 마주한다. 이미 이 세상에 없는 아마데우 드 프라두가 던지는 수많은 질문들. 남이 바라보는 나와 내가 생각하는 내가 과연 같은가? 다르다면 어느 쪽이 진짜 자신인가. 자신과 완전히 다른 한 타인의 행동과 삶을 완벽하게 이해하는 것이 가능한가. 지금까지와 완전히 다른 삶을 살기로 결심한다면, 그 이전의 자신과 지금의 자신은 어떻게 다른가. 이 수많은 질문들에 그레고리우스는 스스로 답을 찾아가며 의사이자 저항운동가이자 작가이자 불운한 천재였던 아마데우 드 프라두의 생을 추적해나간다. 필자가 이 소설 속에서 가장 기억에 남았던 질문은 남이 보는 자신과 내가 보는 자신이 얼마나 다른지, 그 중 진실에 가까운 나의 모습이 무엇인지에 대한 것이었다. 사람은 누구나 남들은 모르는 비밀스러운 면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다른 이들이 나도 모르는 진짜 나의 모습을 꿰뚫어보는 듯한 느낌을 받을 때도 있다.(자신의 모습을 동영상으로 찍어 봤을 때 느끼는 괴리감이 바로 그런 것이지 않을까.) 인간이 진정한 자신의 모습을 완벽하게 파악하기란 불가능하다고 생각한다. 자신의 감정이 어떻게 생겨나고 왜 그런 행동을 했는지에 대한 이유도 정확하게 파악하지 못하는 것이 바로 인간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진짜 자신을 파악하는 것을 포기한다면 그 또한 인간다운 삶에서 점점 멀어지는 것이 아닐까. 분명히 진정한 나는 타인이 보는 나와 내가 보는 나 사이 어딘가에 존재하고 있고 진정한 자신의 모습을 알아내기 위해 사유하고 행동하고 분석하는 것은 수많은 동물들 중 오로지 인간이란 존재만이 가지고 있는 인간의 존재와 그 이유에 대한 의문을 풀어내는 것이라고 필자는 생각하기 때문이다. 결국 리스본에서의 기나긴 여행을 마치고 돌아온 그레고리우스는 인생은 우리가 사는 그것이 아니라 산다고 상상하는 그것이다 라는 생각을 한다. 무엇인지는 모르겠지만 어딘가 변한 그가 앞으로 어떤 삶을 살아갈지에 대한 이야기는 더 이상 이어지지 않는다. 온전히 독자의 몫으로 남겨진 것이다. 몇 십년 동안의 단조로운 삶을 버리고 긴 여행을 마치고 돌아온 그레고리우스. 그는 다시 한 번 베른을 떠나 철학적인 여행을 하게 될까 아니면 이전과 같은 베른에서의 단조로운 삶을 이어가게 될까. 그가 어떤 삶을 살아가든 간에 그의 삶은 이미 달라졌다. 리스본으로의 여행이 가져온 그의 생각의 변화는 이미 그레고리우스라는 사람을 변화시켰고 이전과 같은 삶을 살더라도 생각이 달라진 사람은 다른 사람인 것이다. 그의 행보가 궁금해지는 결말이었다. 솔직히 필자로서는 이해하기 많이 어려운 책이었다. 작가가 어떤 것을 말하고 싶은지에 대해서 이해하고 함께 생각할 수 있는 부분이 있었던 반면 도저히 이해하지 못하고 넘어간 부분도 많았다. 현대의 대중 소설들에 비하면 흡입력이나 재미도 약간은 떨어지는 면이 있었다. 하지만 문장의 아름다움과 그 속에 담겨있는 평소에 해보지 못한 묵직한 철학적 질문들이 계속해서 페이지를 넘기게 만들었다.(문장이 예술적이라 할 만큼 아름다운 은유와 상징들이 담겨있다.) 한 번쯤 삶의 의미와 나 자신이 누구인가에 대한 철학적 사유를 해보고 싶은 독자라면 읽어보기를 추천한다. 주관적인 별점 : 4.0개 (개인적으로는 소설은 일단 흡입력과 재미가 있어야 한다고 생각하기에 그리 높진 않지만, 이 소설이 묻는 철학적 질문들의 무게와 문장의 아름다움은 도저히 이보다 낮은 별점을 줄 수 없게 만들었다.)
닥터 두리틀, 신나지가 않아! (영화 솔직후기/리뷰/해설/쿠키영상/관객수예상) [5분영화겉핥기]
안녕하세요! 재리예요!! 오랜만에 포스팅을 하는 느낌이네요. 졸업을 맞이하게 되면서 본격적인 취준에 들어갔습니다. 아직 특별히 달라진 점은 없지만 마음만은 더 조급하네요! 이럴 때일수록 좋아하는 영화와 함께해야하는데 말이죠~ 오늘의 영화는 돌아온 아이언맨(?)과 동물들의 이야기 '닥터 두리틀'입니다. 사실 할 얘기가 많지 않습니다. 예상대로 그저그런 평범한 영화였습니다. 아이언맨의 팬 분들은 이 작품을 추도의 의미로서 본다고도 하지만 이제는 그를 새롭게 볼 준비가 확실히 필요해보입니다. 신나지가 않아 흥이 안 납니다. 거대한 모험과 동물들과의 유쾌한 케미를 기대했겠지만 만족하지 못하는 수준이었습니다. 일단 모험은 생각보다 스케일이 작았고 오히려 밋밋하게 끝난 감이 있습니다. 동물들이 귀엽긴합니다만 각각의 매력은 부족하고 개성도 뚜렷하지 않습니다. 한 마디로 어디에 임팩트를 줄지 제대로 짚지 못했습니다. 단순히 동물들과 소통하는 신비한 모험이라는 소재만으로 밀고 나가기에는 전반부까지만 유효합니다. 뒤를 이어가는 힘은 부족합니다. 개연성 부족 저는 개연성과 설득력 측면을 영화에서 중요시합니다. 판타지고 공상과학이고 드라마건 모두 관객을 얼만큼 이입시킬 수 있는지가 관건입니다. 아무리 터무니 없는 설정이라도 각본과 연출, 배우의 힘이 조화롭게 융합한다면 모든게 사실로 둔갑하게 됩니다. 선동의 의미가 아닌 영화가 가지는 간접체험의 의미에서 말이죠. 하지만 두리틀은 철저히 동화 속 어느 존재의 무용담처럼 느껴집니다. 총알을 맞고도 죽지 않는 다람쥐, 모든 동물들끼리 서로 소통이 가능한 이유, 현실감이 떨어지는 액션은 몰입을 방해했습니다. 어린이 영화 어른들이 보기에는 다소 유치합니다. 흥미진진하다기보단 훈훈하고 따뜻합니다. 이런 감동도 좋습니다만 어른들까지 매료시키기에는 영화적인 어필이 모자릅니다. 동물들에 대한 사랑과 교류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것도 의미는 좋지만 거기서 멈춥니다. 평이한 주제는 포스터만 봐도 느낄 수 있는데 직접 영화를 관람한 후 더 얻어갈 수 있는 여운이 없습니다. 아직 2편의 동물과 관련된 한국영화가 더 남아있는데, 만약 주제가 비슷하다면 보기도 전에 물리지 않을까 싶습니다. 우리가 원하는 모습은 우리가 원하는 로버트 다우니 주니어만의 매력은 아니었습니다. 방향이 틀렸다기보다는 충분히 표현되지 않았습니다. 예고편에서는 꽤 매력있었는데 오히려 작품 전반에서 그의 모습은 겉도는 느낌이 강했습니다. 분명 주인공이고 메인이 되는 인물인데 난잡하게 섞인 플롯과 캐릭터 사이에 중심이 되어주지 못했습니다. 아이언맨을 통해 봤던 그 모습을 저도 모르게 상상했나봅니다. 그러나 우리가 알고 있던 그의 모습은 사라졌고 이제는 앞으로의 배우로서의 새로운 로버트 다우니 주니어를 지켜봐야겠습니다. 무난한 가족영화 어린 아이들과 함께 가족 나들이겸 영화관을 왔다면 무난한 작품입니다. 소소한 재미와 감동이 있고 그럴듯한 배경과 모험이 있으니까요. 한편 반가운 얼굴의 등장, 그리고 유명한 배우들의 더빙참여로 이끈 주목에 비해 정작 중요한 영화 자체로의 매력은 아쉬웠습니다. 큰 기대를 가지고 들어간다면 어쩔 수 없는 실망을 남긴채 나올 수 밖에 없습니다. 최근 동물과 관련된 영화가 무더기로 나오면서 각각의 작품이 궁금하긴 합니다만, 그 첫 시작은 만족스럽지 못했네요! 쿠키영상은 크레딧 중간에 1개 있습니다. 관객수는 180만 정도 예상해보겠습니다. 이상 솔직하고 짧았던 리뷰를 남긴, 영화 '닥터 두리틀'이었습니다.
조운 자룡 (趙雲 子龍) A.D.? ~ 229
아오.. 시부랄 다 써놨더만, 뭔 에러가 났는가.. 업로드 누르니 싹 씻은듯이 날아가 처음부터 다시 쓰는 오늘의 주인공새끼는 바로 "조운" 삼국지라는 컨텐츠의 인기가 가장 좋은 동아시아 삼국인 한국, 중국(타이완 포함), 일본은 각기 최고인기 인물이 그 나라의 국민성향 및 역사적 특성에 따라 다른데, 중국 : 이미 신격화된 "관우" 한국 : 전통의 문(文) 숭배 영향인지 "제갈량" 반면, 삼국지를 가장 상업적 컨텐츠로 잘 활용해낸 일본은 조운의 인기가 제일 좋다. . . . 아마 오랜시간 무(武)가 우선시되며, 또 그런 문화특성상 주군의 명이라면 유불리 떠나 묵묵히 수행하는 "사무라이(侍) 정신"이 모토인 점 등이 작용한 듯. 조운이 일본에서 가장 인기 있다지만, 중국이나 한국에서 인기 없진 않다. 두세번째쯤에서는 반드시 언급이 되는 역시 인기스타! 심지어 인기는 오히려 삼국지를 잘 모르는 이들에게 더 높은데, 이건 조운을 좋아하면 삼국지를 모른다거나... 그런 디스가 아니라, 아무래도 삼국지에 대한 관심이 깊을수록 더 많은 인물들에 대해 알게 되고 그러다보면 조운 외의 다른 인물들을 최애할 수도 있으니까~ 이건 워낙 유명한 조운의 인기에 대한 반증이라 할 수 있다. 삼국지는 잘 모르거나 안읽어본 이들도 알만한 급의 유명스타기에 그렇다는! (이는 조운 외의 인기인물들도 비슷한.. ,) . . . 조운은 위처럼 유명할 수 있는 여러 이유 있지만 무엇보다 후한 말, 초창기 떠돌이시절의 유비를 따르기 시작, 후에 그 유비가 황제 되고 또 붕어한 이후까지의 긴~ 활약기간의 이유가 있는데, 정말 의외스럽게도 그런 긴 시간 활약하며 제국의 개국공신되고 또 그만큼 고위직에 오른것치고 의외로 기록이 많이 부실하다. 정사의 촉서 중 조운전과, 신뢰성은 좀 문제가 있지만 조운전의 부실함을 좀 채워주는 조운별전 등의 기록을 모두 합쳐도 군시절 내가 쓴 편지의 양보다 적다....;;; 조운이 이토록 부실한 기록을 가졌음에도 거대한 인기를 누리는 실질적인 큰 이유는, 내가 보기에는 바로바로.. 일본게임업체 "코에이(KOEI)" 의 "삼국지 시리즈" 덕이다. 삼국지는 이미 오래전부터 책과 코믹스가 있었고... 중국에는 그보다도 훨씬 더 옛날부터 "경극"이라는 미디어(?)매체들 통해 후대인들이 삼국지(연의)를 즐겼다. 하지만 사서 통해 확고한 비쥬얼 이미징이 되어 있던 극소수의 몇몇 인물들 외에는 인물간 개성을 구분지을 표현은 부족했다. 그러던 와중, 1985년 일본의 코에이에서 창업자이자 삼국지 시리즈의 창조자이기도 한 삼국지덕후인 "에리카와 요이치"가 미칠듯한 덕력으로 자료들을 수집해 이를 토대로 자신의 상상력을 더해 전문 일러스트레이터와 함께 각 인물들의 프로필을 제작하여 이를 게임에 응용하게 되는데... 이 게임이 대박이 나게 되며 나름 고증도 괜찮았고 멋지게 잘 표현된 인물들 일러스트들도 같이 대박났다. . . . 이후 각종 게임, 만화, 애니메이션, 영화, 드라마 등등 온갖 미디어물에서 다루는 삼국지의 인물묘사들은 이 코에이 삼국지 시리즈의 일러스트를 모티베이션으로 나오게 되는데, 바로 이 삼국지 시리즈에서 조운을 초절세미남으로 표현했고 시리즈 거듭될수록 나날이 더 미남이 되어가며 대부분 사람들에게 "조운 = 미남"의 공식이 공식화 되었다는... 이로서 사료와 연의 속의 과묵하고 충직한 무력깡패 이미지에 코에이가 미남 이미지를 데코레이션 해주며 인기가 없을래야 없을 수 없는 인물이 되어 버린 것...ㅋ . . . 참고로 위에 언급한 에리카와 요이치는 삼국지 시리즈 오프닝 초반에 이름 나오는 프로듀서인 "시부사와 코우"와 동일인물! 저작권 관리 등 사업적인 이유로 지은 이름인데 에리카와가 존경하던 "시부사와 에이이치"라는 이의 성과 코에이의 코를 따와서 지은 이름. 실제 조운도 미남이였는지에 대해 조운전은 무언급, 조운별전에서만 "8척의 위풍당찬 체구와 사내다운 용모" 라고 짧게 언급이 꼴랑...ㅎ 당시 도량형 기준 8척은 지금 기준으로도 큰 키인데, 정말 딱 자로 재서 저만큼의 키라는 것보다는 주로 당시의 작디 작던 일반인들보다 훌쩍 키 큰 이들을 일컬으며 쓰던 감탄적 관용어구로 주로 쓰인 표현. 그래서 사료에도 실제로 키가 크다며 제법 명확한 데이터가 있던 제갈량이나 정욱 등등도 있지만 대체로 삼국지에서 8척, 여덟 자 어쩌고 하는 표현이 붙는 이들은 대개 "덩치 좋다!!" 는 의미로 쓰였고 조운도 마찬가지다. 보아하니 그냥 덩치 좀 있고, 생긴 것도 잘 생겼다기보다 남자답게 생긴 호남형 외모 수준인 것을 코에이가 무슨 존잘러로 만들어 놨다...ㅋㅋㅋ 오히려 조운의 외모묘사는 요코야마 미쓰테루가 더 사료에 입각했지 싶은ㅎ 어쩌다 그리 되었는지는 나도 모르겠는데, 우리나라에서 제갈량과 함께, 주로 자로 불려지는 인물. 간혹 조운이란 이름은 모르고 조자룡으로만 아는 이들도 꽤 있다. . . . 많은 분들이 별 생각없이 넘겼을 수도 있지만.... 은근 논란이 되었던 건 조운의 "나이"다. 제목에서 보듯 그의 생년관련 공식기록은 없다. 긴 시간 활약하며 사망당시는 제법 고위직이였음에도 인물기록 중 가장 기본이랄 수 있는 생년기록이 없으며 정사 저자 진수조차 체크를 못한 듯 싶다. 삼국지연의내의 내용들만 보면 유비보다 8살이나 연상으로 나오지만, 이건 나관중이 이렇게 저렇게 조운을 띄우다보니 설정붕괴가 오며 생긴 착오로 보여지고... 대체로 중국과 일본의 관련 사학자들은 조운을 대략 170 ~ 171년생쯤으로 보고는 있다. 그런데 170년으로만 잡아도 만 60세도 채 못 채우고 사망.. 연의에서 그려지는 노익장의 이미지에는 살짝 아쉽다. 물론 당시 평균수명 짧은 탓이 영유아 사망률이 높아서이기도 했다지만 노인사망연령 역시 짧은 탓도 있던 터라, 단명으로는 절대 볼 수 없겠지만 오래 살았다 할 수도 없는 나이임은 분명하다. 하긴, 당시 기준에 50대 중후반 나이의 장수가 전장에서 현역생활 했다면 노장인건 맞긴 하지... 살짝쿵 이견들은 있지만 확실한건 "공손찬" 아래에서 사실상의 사회생활을 시작했고 그 와중에 공손찬 휘하에서 객장, 즉 일종의 용병 생활하던 유비를 만난것도 맞지만, 소년장수 조운이 이미 당시의 하북에서 네임드 맹장이던 문추와 대결한건 허구다. . . . 연의에서처럼 실제로도 조운은 공손찬 휘하에서 별 다른 활약기회없이 지내다 공손찬과 원소 양측이 제대로 전쟁 치르기 전에 형의 장례를 이유로 낙향하며 사실상 공손찬측에서 '퇴사' 했다. (형이 있었어?ㅋㅋ) 많은 이가 조운을 못 알아본 공손찬의 무지함을 까지만 이는 결과론적인 관점일뿐... 당시 시점에서 공손찬이 무지했다 볼 수는 없는게, 그때의 공손찬은 북방의 여러 소수민족들과의 전투를 이겨내며 명성을 키운 실전강자였다. 거칠고 사나운 그들을, 몸소 전장지휘하며 조져놨던 공손찬세력에는 당연히 병력들을 이끌던 여러 검증된 장수들이 있었을테고 공손찬이 무슨 스카우터를 쓴 것도 아닌데 어느 날 나타난 젊은 신입장수의 전투력을 알아보고 기회 주기보다는 기존의 전공 많고 검증된 이들 위주로 운용했을거다. 체격이나 그런거 딱보면 모르겠냐 할 수도 있지만, 아무리 평균신장 작던 그 시절이라도 공손찬처럼 성공한 큰 세력하의 장수들까지 다 작진 않았을거다. . . . 축구로 치면 몇 시즌 동안 리그우승을 거듭한 강팀이 있다 치고 그 팀에는 당연히 우승을 이끈 여러 스타 플레이어들이 있을텐데 이런 와중에 그들을 벤치에 앉히고 유망주에게 선뜻 기회 주긴 쉽지 않다. 게다가 스포츠는 큰 의미없는 게임이나 대승을 거둘 때 잠깐 투입해도 무리없겠지만 후한 말의 난세는 실전이라 괜히 검증안된 어설픈 지휘관을 투입했다 혹여 실책이라도 저지르면 그대로 수 많은 인명/재산피해가 발생한다. 또 여러 번 말했듯 당시 전투는 "기세싸움"이라, 내리 이기고 또 전력이 유리해도 엄한 짓 한 번으로 역전패 할 수도 있는 말 그대로 "실전"이였다. 그리고 조운이 공손찬 휘하에 임관한 때는 공손찬이 북방을 어느 정도 다져놨고, 원소와는 제대로 붙기 전이라 더욱 전투에 나설 기회가 많지 않던터에, 원소와 붙기 전 낙향했다. 여러모로 공손찬이 모자라서 조운을 활용안했다 몰기는 공손찬도 억울하다. 삼국지연의에서 조운의 하이라이트는 누가 뭐래도 역시 당양 장판파에서 아두(유선)를 품고 조조의 대군 사이를 들쑤시고 다니는 부분이다. . . . 이 부분을 보면 따르는 이도 없이 오로지 혼자... 심지어 애까지 품고 전장을 휘저으며 싸울 놈과 싸우고 죽일 놈은 죽이는 등 할 거 다하고 다니는 육아무예의 정점을 찍는다. (물론, 훗날 유선 하는걸 보면 이는 조운 최고의 실책....;;;) 이 부분은 역시나 나관중이 조미료를 과도하게 쳤다. 물론, 저 극한상황 속에서 목숨바쳐 자기주군의 유일한 적자를 구해낸 자체는 맞는데... 저렇게 이리저리 죄 후비고 다닌 것은 아니였다. 상식적으로... 적군이 널린 상황 속에, 자기는 혼자. 주군의 아이를 품고 있는걸 떠나 설령 혼자라 해도 대놓고 '내가 조운인데 뭐 어쩌라고' 하며 다니는건 무예와 용맹을 떠나서 만용의 정점을 찍는 어리석음밖에 되지 않는다. 정말 부득불 적병과 마주쳐도 걔네들을 싹쓸고 가기보다 아주 최소한의 마찰만으로 어떻게던 돌파하거나 경우에 따라 제법 많은 인원이 다가오면 숨어있다가 다 지나가면 뒤도 안보고 달아남을 반복하며 빠져나갔다. . . . 나쁜소식은 당시 장판벌을 헤집던 조조군의 주력은 평상시 조조의 호위를 목적으로 양성된 최정예부대인 "호표기(虎豹騎)"였다는거고... 좋은(?)소식은 이들의 포커스는 유비를 쫓는것이였다는 것. 게다가 당시 호표기가 뉴스나 인터넷으로 조운의 프로필을 검색해보거나 유튜브로 조운의 활약상을 본건 아닐테니 설령 조운을 마주한들 알아보지 못했을 것이며, 당시 조운의 꼴도 말이 아니였을터라 효표기 입장에서 조운을 마주한들, 그냥 난전 중 낙오된 적군의 기병쯤으로 봤을테니 굳이 무리하게 전원이 덤벼서 악착같이 쫓거나 막으려고는 안했을 것이다. . . . 여튼 실상은 좀 김새고 싱거운건 맞지만, 조운의 활약이 과장되었단거지 없는걸 지어낸건 아니고 아무리 위와 같은 상황인들 조운이 생사고락의 아수라를 혼자만의 실력으로 돌파해 나온건 팩트다. 저 때의 활약이 인상깊었는지, 이후부터 조운은 주로 유비의 신변을 보호하는 호위부대장을 맡거나 유비 부재시 유비의 집안질서를 잡거나 보호하는 보안대장 비슷한 포지션을 주로 맡게 된다. 유비 입장에서는 성격도 단호박에 무력도 빼어나고 전략기재가 빼어난건 아닐지라도 원리원칙에 상명하복 확실하며 당장의 전술적 판단은 괜찮았던 편인 조운이, 성격적으로 워낙 개성들이 강하다보니 장단점이 확실한 의제보다 그런쪽으론 더 믿음 갔을 것이다. . . . 다만, 원체 난놈이라 전투에도 수 차례 투입되긴 했어도 기본적 포지션이 유비와 그 가솔들의 신변보호를 우선하는 직할대장이다보니 여타 야전지휘관들보다 가시적인 공적 세울 기회는 아무래도 부족할 수 밖에 없다. 그래서인지 우리가 느끼는 임팩트 대비 훗날 유비가 왕이 되고 황제가 되며 공신들의 공을 기려 직위를 하사때 조운은 우리가 알기로는 거의 동급 혹은 조운보다 아쉬운 이들이라 여겨지는 관우, 장비, 마초, 황충보다 낮았고 위연, 이엄 등과 비슷하거나 살짝 앞서는 정도였다. 물론, 관직면에서는 그랬을지 몰라도 유비세력.. 나아가 촉한내에서 그는 직급을 떠나 아무도 감히 함부로 할 수 있는 존재는 아니였다. 현대군에서 주임원사는 엄연히 계급상 갓 임관한 어린 소위보다 낮음에도 위관급은 물론 영관급 고위 장교들도 절대 함부로 못 하는 것과 비슷한 이치. 당장 서열 No.1 인 유비 제외 그 아래로 관우나 제갈량조차 조운에게 큰소리조차 내지 못했으며 지시를 내릴지라도 대놓고 명령조로 말하지 않았다. 물론, 이는 단순히 조운의 실력이나 공적 및 짬밥만으로 가능한게 절대 아니였고 조운의 "인성" 이 뒷받침 되었기에 가능한 이야기다.... 당장 관우, 장비, 위연만 해도 촉한내에서 눈도 못 마주칠 거물들이였음에도 뒤에서는 그들을 싫어하거나 속으로 욕하는 이들이 적잖았고 결국 관우와 장비는 부하들의 하극상이 원인되어 남의 손에 목이 날아가고, 위연 역시 안티들에 둘러싸여 어그로만 끌고 살다 그 무수한 공을 세우고도 끝내 숙청이나 진배없는 최후를 맞은 걸 보면 조운은 전혀 그런 부분이 없었다. . . . 무엇보다 상명하복에 철저한 "진짜 군인" 이였다. 다른걸 떠나 제갈량 영입 직후... 나이도 어리고 당장 크게 보여준 것도 없는 키만 큰 허연 선비가 이래라 저래라 하는 것에 대해 관우와 장비는 몹시도 불편한 기색을 보였으나 당시 넹~ 하고 따른건 조운뿐이였다. 이후에도 유비의 명이건, 제갈량의 명이건 조운은 자신의 위세 높아지고 공적이 쌓여가도 대부분 군말없이 이행했다. 그런 조운이 유비의 지시에 대해 그와는 다른 자기주관을 드러낸건 역사적으로 딱 두번이다. 하나는 익주 정복 직후 기존 촉의 고관대작들과 부호들의 집과 토지와 뽕나무밭을 모두 압류 후 공신들에 재분배 하자는 것을 민심안정우선을 이유로 반대한 것. 두번째는 유비가 초사이언이 될 정도로 개빡쳐서 온 나라를 들어 오나라를 불싸지르러 가겠다는걸 정세와 이치상 맞지 않다며 반대한 것. . . . 둘 모두 너무나 옳고 바른 반대였다. 그러나 당시 분위기로는 정말 감히 반대하기가 거시기한... 사나이의 반대였다. 재산재분배의 경우, 가만히 있었으면 공이 적잖은 자신도 상당한 수혜자가 되며 유비의 그 발표 직후 모든 문무대관들은 입이 귀에 걸려 샴페인을 따는 분위기였고.. 오정벌의 경우, 의제 둘의 죽음과 오가 연관되어 인자함과 덕의 아이콘 유비가 생전 처음 눈까리가 뒤집혀 폭주를 하고 있는 현장이였다. 하지만 조운은 반대했다. 상명하복에 충실했지만 대의명분과 시국을 판단할 줄 아는 지혜에서 비롯된.. 조운이 단순히 커맨드대로만 움직이는 전투머신이 아니라는 뜻. 참고로 재산재분배건 당시에는 조운보다 서열이 위였던 제갈량, 장비, 수틀리면 상대 안가리고 막말 쏘는 법정, 조운 못지 않은 공적과 역시 근소하나마 윗서열 황충 등등 조운의 저 이뭐병소리를 지적하려면 지적하고도 남을 사람들이 잔뜩 있었음에도 누구도 저 의견에 싫어요를 누른 이가 없음은 조운의 위세를 보여주는....! 평소에 원체 말수가 적었고 다른 이들과 별 다른 교분을 갖지 않았다. 조운의 사료가 부족하기도 하지만 다른이들의 기록을 봐도 조운과 술 한잔 했다는, 조운과 사냥을 했다는, 조운과 식사를 했다는, 조운과 담화를 나눴다는, 조운과 차를 마셨다는, 조운과 바둑을 뒀다는, 조운이 집에 찾아왔거나, 조운의 집에 찾아갔다는 그 어느 기록도 없다. 그렇다고 조운이 그냥 아싸거나 독고다이였다기보다 과묵하지만 인성이 좋고 필요시에는 바른말을 했고, 맡은 소임에 충실한 직장인의 정석같은... 비록 노잼이긴 해도 누구도 그를 싫어하지 않는 그런 묵직한 존재감의 인물이였다. 게다가 전장에 나가면 그 과묵함을 유지하며 미칠듯한 용맹을 자랑했으니, 별 기록 없다는 정사에도 조운이 매우 용맹했다는 기록이 강조되어 있다. 위에서 지시 떨어지면 형세가 불리하건, 병력이 적건 일단 묵묵히 들이대러 갔기에 붙는 기록이다. 연의에 등장하는 유비의 코멘트 중 "자룡은 온몸이 담덩어리(子龍一身都是膽也)" 라는 멘트도 실존했던 멘트. 이릉대전 당시 유비에게 반대 걸었다 후방으로 빠지는 부분이 있는데, 이건 나가리의 개념이 아닌 조금이라도 본군의 형세가 불리할시 바로 지원 및 혹여 만에 하나라도 패퇴시 밀려올지 모를 오군을 사전에 방어할 수 있는 전략적 요충지인 강주를 맡긴 것이였고, 촉에서도 한중과 함께 매우매우매우 중요한 요지여서 조운 직전은 장비가 맡았던 곳! . . . 유비가 백제성에서 유언 당시 제갈량과 함께 문무대관들 중 유이하게 유언을 직접 받은 신하로 연의에 나오는데, 하긴 유비가 떠돌던 시절부터 따르던 이들 중 당시 생존해 있던 신하가 그 둘뿐이도 했고 관우, 장비, 간손미, 진도 다 죽고 미방은 배신때리고 당시 숨 쉬던 게 그 둘뿐....T-T . . . 헌데 사실 저것도 나관중이 감동을 더하고자... 독자의 눈물을 뽑고자 지어낸 신파! 사실 유비 사망 당시 신하들 중 유비의 유언을 직접 받든건 제갈량 포함 두 명이 맞는데, 또 한 명은 조운이 아닌 바로 "이엄".. ..;;;; 이후 조운은 촉한에서 군의 인사권을 관할하고 황실을 호위하는 정예부대를 지휘감독하는 등... 대외정벌 부문 제외한 내부적 군사업무를 총괄하는 직위에 오른다. 보통 저 역할을 하는게 대장군인데, 본래 대장군은 타국원정권도 갖지만 그 방면은 제갈량이 도맡았던 터라 조운은 대장군의 저 책무만 분담한다. 유비는 직위, 직책에 대해 상당히 프리하게 실리를 중시해서 운용해왔는데... 유비는 당시 후한에 없는 직위도 임시로 만들어 쓰거나 기존 직위의 롤을 임의적으로 변형 하는 등 포지션보다 롤에 더 포커스를 맞춰 내부운영을 했고 이는 제갈량도 일정부분 비슷하게 진행했다. 그래서 조운의 직위자체는 실상 공적과 재직기한 등 커리어 대비 그닥 높은편은 아니였으나 역할은 상당히 주요업무를 맡은 편이였다. 이후 조운은 제갈량과 함께 남만정벌도 다니고... 북벌도 다니며 눈감는 날까지 쉼없이 말타고 싸우러 다닌다. 참고로 위와의 전투 중 한덕과 그 다섯인지, 여섯 아들을 죄다 썰어놔서 한씨집안 씨를 말린건 조운의 노익장을 버프해주기 위한 나관중의 픽션이며 저런 한 부자들 자체가 없던 인물이다... 실제로 연의 속에서 조운의 창 아래 비명횡사한 이들 일부가 가상의 인물들이다. . . . 여튼 조운은 쉼없는 전투로 굴려지다 1차 북벌 다음해인 229년에 사망하는데.... 위에서 언급했듯, 짧은 생은 아니지만 길게 살지도 못한데는 역시 촉의 영토를 구석구석 누비며 거듭 참전하며 쌓인 과로탓인듯 하다. 그도 그럴게 촉은 고질적인 인재부족문제로 조운 정도의 경력과 나이의 장수면 황도에서 머물며 주요사안결정과 천자알현업무가 주가 되어야 했으나 당장 승상이 최전선에 지휘관으로 나가는 상황이니 조운 성격에 당연히 본인도 쉬지 않고 따라 나갔을 것이다.... . . . 조운 사후 순평후라는 시호가 내려졌는데 이 시호는 조운 생전, 촉에 귀순하며 평소 조운을 존경해 마지않던 강유가 지었는데, 강유는 조운을 공경하여 몇 차례 함께 술자리나 식사자리를 권했으나 모두 뺀찌먹었다... 전형적인 군인 of the 군인 스타일이다. 맡은바 임무에 의문제기없이 유불리 떠나 최선을 다하며 정치적 개입도 일절 없이 사리사욕조차 없다. 늘 과묵하며 정말 필요한 말이 아니면 하지 않았고 매사에 엄정한 일처리 위해 개인적 친분도 나누지 않았으며 역시 무엇보다 주위의 신뢰와 존경을 받을 실력자였다. 본인의 경력, 실력, 공적에 맞지 않는 포상이나 직위에 대해 일절 불평불만을 가진적이 없다. 자신의 직위와 처우가 높아져도 이를 토대로 과한 야욕은 커녕 직권남용이나 후배들에 대한 하대조차 없었다. 게다가 이런 모습을 흐트러짐 한 번 없이 죽음의 순간까지 지켜냈다.., . . . 공직자, 군인으로서의 조운은 완벽 그자체다. 제갈량과는 또 다른 면에서 공직자로서의 완벽을 보여준다. 다만, 인간 조운의 삶은 완전 개노잼이였을거 같다. 모르겠다... 난 주위에 저런 선배나 형, 상사가 있으면 분명 당연 존경하고 롤모델 삼긴 했겠지만 고민이나 걱정 있을 때 조언을 구하진 않을거 같다.ㅋㅋ 하지만 요즘같은 세상에 그게 정부관료건, 군인이나 경찰이건, 국회의원이건, 공무원이건간에 공직자로서는 확실히 저런 사람이 필요하고 절실하다는 것이다. 한 번도 아쉬운 처사에 불평불만이 없고 사리사욕 채우지 않았고 다른 고위직들과의 친분은 커녕, 말수도 없었던 그였지만 역설적으로 그런 조운을 아무도 쉽게 보거나 하지 못했다. 위나 오에는 있었겠지만 유비를 만나 따르고, 훗날 고관대작 되어 최후 맞기까지 최소한 내부에는 적이 없었다. 나는 조운같이 살고 싶진 않지만, 주위에, 사회에는 조운같이 사는 사람들이 많아지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