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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띵] #1 The one thing

A. 케리갤러 / 제이파파산
F. 복잡한 세상을 이기는 단순함의 힘, 한가지에 집중하라
C. 일이관지, 저자는 처음부터 끝까지 내가 해야 할 한가지를 찾고 그것을 하나로 만들고 그 것 하나에 집중하고, 하나를 위한 시간을 만들라고 말한다. 
S.
'One thing Just one thing'. City slickers (영화)

'나는 그 날의 만남이후, 엄청난 결정을 했다. 바로 나를 해고 한 것이다.'

'도미노는 1.5배의 크기의 다른 도미노를 넘어 뜨릴 수 있다. 5센티의 도미노는 등비수열로 보면 18번째는 피사의 사탑을 31번째는 에베레스트 산을 900미터 위에서 내려다 볼 수 있다. 57번째 도미노는 넘어지면, 달에 닿을 수 있다. 

'당신이 가진, 당신이 해야 할, 단 하나가 무엇인지 모르겠다면, 그 것을 찾는 일이 당신이 해야 할 단 하나 이다. '

' 가장 중요한 일을 화는 것이 가장 중요한 일이 되어야 한다'

'효율이란 일을 제대로 하는 것이고, 효과란 올바른 일을 하는 것이다'

'보상이 먼 미래에 발생 할수록 그것을 달성하고자 하는 즉각적인 동기가 줄어든다'

'최종의 목표를 이루기 위해 앞으로 5년내에 내가 할 수 있는 단 하나는 무엇인가?'

'오늘을 당신이 가진 모든 내일과 연결시켜라'

'펜을 들어 적어라 목표를 종이에 써서 가까이 두면, 
이루어 질 확률이 39.5% 늘어난다. 사람들에게 이야기 하거나 공유하면, 76.7%로 늘어난다'
'5년 후 내 연봉은 20억이다. 
나는 지금 무엇을 해야 하는가?'
+
내가 가진 모든 것을 나의 내일과 연결시킨다는 것, 
5년 후에서 돌아온 내가 해야 할 목표는?
그것이 돈이어도 좋고, 직위여도 좋고 상태여도 
좋다. 멀티태스킹의 함정에서 기어놔와 해야 할 
나의 단 한가지를 찾아 내야 한다. 
그것이 나의 원띵이고, 한가지만 제대로 해야 한가지라도 이뤄 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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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과 여, 사랑에 관한 명언 21가지】 ● 연애란 남자의 삶에서는 하나의 순간에 불과하지만 여자의 삶에서는 역사 그 자체이다. - 스탈 부인 ● 싫어하는 남자의 명백한 말보다는 매력적인 남자의 애매한 말이 더더욱 여자의 마음을 뒤흔들어 놓는다. - 라 파이에트 부인 ● 사랑하는 것은 천국을 살짝 엿보는 것이다. - 카렌 선드  ● 안타깝게도 여자와 함께 살아갈 수도 없고, 여자 없이도 살아갈 수가 없다. - 바이런 ● 다른 사람으부터 사랑받지 못하는 사람은, 다른 사람을 사랑하지 않는다. -라파데르 ● 남녀 두 사람이 세 번이나 저녁식사를 하고도 아무 일이 없을 때는 단념하는 것이 좋다 - 고즈 야스지로 ● 음식에 대한 사랑보다 더 진실된 사랑은 없다. - 조지 버나드 쇼 ● 사랑은 눈으로 보지 않고 마음으로 보는 거다. - 윌리엄 셰익스피어 ● 남자는 아무 생각 없이 어리석게 행동하지만 아무 이유 없이 행동하는 여자는 없다. - 바제스 ● 남자에게 있어 사랑은 인생의 일부이며, 여자에게는 삶의 전부이다, - 바이런 ● 여자가 바보라는 사실을 부인하지 않는다. 아무튼 신은 어리석은 남자들에게 어울리게 여자를 만드셨으니까. - 비드 ● 남자는 망각으로 살아가고 여자는 기억을 자양분으로 살아간다. - 엘리엇 ● 여자란 돈은 남자가 벌고 여자가 쓰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 쇼펜하우어 ● 매일 1,440분이 있다. 그만큼 긍정적인 효과를 낼 수 있는 기회가 하루 1440건이라는 의미다." — 레스 브라운 ● 태도란 큰 차이를 만드는 작은 것.. — 윈스턴 처칠 ● 연애란 남자의 삶에서는 하나의 순간에 불과하지만 여자의 삶에서는 역사 그 자체이다. - 스탈 부인 ● 사랑한다는 것은 자기를 초월하는 것이다.  -O.F.와일드 ● 겁쟁이는 사랑을 드러낼 능력이 없다. 사랑은 용기 있는 자의 특권이다.  - 마하트마 간디  ● 진정한 사랑은 영원히 자신을 성장시키는 경험이다.  - M. 스캇 펙
[진안] 마이산 탑사
사면이 막힌 채 고여있는 기분입니다. 수많은 갈증과 갈망을 축여줄 것이 필요합니다. 그렇다면 자연이 좋겠단 생각이 듭니다. 유일하게 마음을 온전히 내보일 수 있는 존재입니다. 물을 좋아합니다. 온 몸에 흘러내리는 물줄기가 좋아 한 번 씻으러 들어가면 도통 화장실 문이 열리는 법이 없습니다. 그러니 이 곳에서 물에 시선을 고정한 채 걸을 수 밖에요. 작은 돌멩이를 던지니 크고 작은 파동이 일어납니다. 구의 떨림. 맑은 웃음이 지어집니다. 빛에 투영되어 반짝이는 고드름이 녹아 내리고 있습니다. 혼자 고요히 서서 떨어져내리는 물을 바라보고 있었습니다. 걷다보니 더 큰 고드름이 한가득입니다. 올해 처음 보는 고드름에 감탄사가 절로 나옵니다. 고드름 옆으로 마이산이 모습을 드러냅니다. 태어나서 이토록 큰 바위산은 처음 봤습니다. 흥분되기 시작합니다. 콘크리트화된 돌산의 수많은 공동 집합체라는 문장을 사전에서 봤을 땐 이해가 잘 되지 않았는데 실제로보니 문장 그대로입니다. 신기할 따름입니다. 마이산 탑사에 도착했습니다. 수행을 위해 마이산으로 들어왔던 이갑룡 처사가 만든것으로 전해지는 거대한 돌탑. 마스크 속 입 안이 다물어질 기미가 보이질 않습니다. 마이산은 풍수지리적으로 S자형의 산태극과 수태극의 한가운데 있기 때문에 영험한 기운이 움트는 곳이기도 하다고 합니다. 이제부터 전반적인 탑사의 모습을 보여드리겠습니다. 곳곳에 이갑룡 처사의 모습이 있습니다. 낙사의 위험이 있으니 항시 조심해주세요. 아 이건 귀여워서 찍었습니다. 인간의 수많은 염원과 갈망은 자꾸만 침묵하게 만듭니다. 능소화라고 씌여있었는데 여름에 오면 돌산을 기반으로 피어난 능소화를 볼 수 있을까요. 표면적인 질감을 보여드리고 싶었습니다. 봐도 봐도 신기합니다. 향내를 맡으며 조용히 돌탑을 바라봅니다. 돌 틈으로 흘러나오는 물줄기를 바라보다 손을 닦고 그 속에 서있었습니다. 정화되고 싶은 마음이 발걸음을 자꾸 묶어둡니다. 바위보다는 작고 모래보다는 큰 돌의 성질에 대해 생각해봅니다. 쉽게 부서지지 않는 단단함. 이갑룡 처사 기념 비석입니다. 대단하다는 생각밖에 들지 않는 분입니다. 감탄을 뒤로하고 내려가는 길에 손금은 인생의 축소판을 봅니다. 아 안본 눈 삽니다. 빛바랜 간판이 정겹습니다. 이모님 전 별미감자전과 도토리묵이요. 세계는 황폐해졌고, 신들은 떠나버렸으며, 대지는 파괴되고, 인간들은 정체성과 인격을 상실한 채 대중의 일원으로 전락해버렸다고 하이데거는 말했습니다. 자연을 바라보며 다시금 이 말을 떠올립니다. 존재자에게서 존재가 빠져 달아나지 않도록 해야한다고 생각하며 포스팅을 마치겠습니다.
어느 작가의 오후
'어느 작가의 오후' / 페터 한트케 저 (지극히 주관적인 제 생각을 쓴 글입니다.) 짧은 중편 소설이다. 2019년 노벨 문학상 수상자인 페터 한트케의 소설로 제목 그대로 어느 작가의 오후를 그리고 있다. 평범한 오후의 일상은 글을 쓰는 자, 작가가 언어로 표현하는 순간 현실과 환상을 넘나 든다. 소설 속 화자이자 주인공인 어느 작가는 글쓰기를 마치고 집을 나선다. 계단을 오르내리기도 하고, 식당에 들어가 무언가를 먹기도 하며, 하늘과 광장과 건물들을 바라보고 관찰하기도 한다. 그리고 작가는 집으로 돌아온다. 그게 전부다. 소설의 처음부터 끝까지 어떤 사건도 없으며 그저 작가의 눈으로 바라보는 오후의 풍경이 묘사될 뿐이다. 그렇지만 그 모든 일들을 작가의 눈으로 바라보고 작가의 언어로 기술하면서 온갖 환상과 상상과 사건들이 생겨난다. 갑자기 누군가 길을 틀어막고 작가에게 "당신의 문학을 기소합니다!"라고 외치기도 하고 머리카락이 다 빠진 늙은 여자가 나뭇가지 위에 걸쳐져 있기도 하며 일에 대한 강박에 화자가 갑작스러운 대인기피증에 걸리기도 한다. 작가는 일반인에게는 평범한 오후의 풍경에서 온갖 문장들과 언어, 새로운 상상들을 불러낸다. 그 때문에 이 소설에서는 어디부터 어디까지가 오후의 풍경이고 또 작가의 생각과 언어의 확장인지 구분이 되지 않는다. 페터 한트케는 언어 자체에 대한 연구에 골몰하며 전통적인 문학의 형식, 언어를 사용하는 기법 등에 질문을 던지고 때로는 과감히 파괴하기도 하는 작가다. 그는 "문학이란 언어로 서술된 사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바로 언어 그 자체로 이루어진다"라고 말하며 언어의 기능과 언어로 이루어진 문학의 본질을 깊게 탐구했다. 만약 이 소설이 "언어로 서술된 사물"로 이뤄진 소설이었다면 작가가 지나다니는 경로에서 보이는 풍경과 사물들의 묘사만으로 소설이 끝났을 것이다. 하지만 화자는 소설의 세계 속에 존재하는 평범한 오후의 사물들을 그대로 묘사하는 것으로 언어의 기술을 끝내지 않는다. 단순하게 묘사된 오후의 풍경과 사물들에서 출발한 화자는 자신의 기분, 감정, 생각, 사상 등을 묘사된 사물들에 투영하여 언어를 확장시킨다. 작가를 지나치는 인파들은 작가의 글을 읽는 독자로 둔갑하여 작가가 느끼는 자신의 작품, 그리고 그것을 읽는 독자들에 대한 불안감을 표현하는 수단이 되고 묘지에서 그리스어와 라틴어로 된 묘비명을 보고 그들이 살아생전 내질렀을 그리스어와 라틴어로 된 비명을 듣기도 한다. 작가의 주관적인 경험과 생각들이 오후의 풍경과 사물 속에 스며들어 단순한 묘사가 아닌 새로운 언어로 탄생하는 것이다. 소설 속에 이런 문장이 나온다. "확정적인 모든 것을 그는 오래전부터 무시무시하게 생각했다." 언어란 한없이 비확정적이다. 같은 문장, 같은 단어를 보고도 모든 사람은 제각각 모두 다른 생각을 떠올린다. "사과"라는 하나의 단어를 보고도 누군가는 뉴턴의 사과를, 누군가는 사과의 단맛을, 누군가는 사과를 딴 경험을 떠올린다. 어느 누구도 "사과"라는 단어를 보고 정확히 같은 것을 떠올린 사람은 없다.(같은 빨간 사과를 떠올렸을지언정 크기, 모양, 빨간색의 진하기 등등 어느 사소한 부분에서라도 차이가 생긴다.) 작가는 이 소설을 통해 오후의 풍경에서 느낀 한없이 주관적인 자신의 경험들을 언어로 기술함으로써 독자들이 객관적인 사물에 대한 단어가 아닌 주관적인 경험의 언어를 과연 어디까지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를 알아보려고 한 것이 아니었을까. 언어가 사유를 전달하는 수단으로써 어느 정도까지 정확하게 기능할 수 있는가에 대한 실험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짧은 중편소설이기에 페터 한트케의 소설을 읽어보고픈 이들의 시작으로 좋을 듯하다. 개인적으로는 언어의 불확정성에 대해 생각해 볼 수 있는 기회가 되었다. 소설 속 한 문장 확정적인 모든 것을 그는 오래전부터 무시무시하게 생각했다.
날짜 없음
'날짜 없음' / 장은진 저 (지극히 주관적인 제 생각을 쓴 글입니다.) 그게 온다고 한다. 179번부터 0번까지 하나씩 줄어드는 숫자들. 끝을 향해 달려갈수록 숫자의 크기는 점점 줄어든다. 시작인 179도, 끝인 0도, 그게 온다고 말한다. 과연 그건 정말 왔을까? 와서 세계를, 지구를, 도시를, 회색 눈들을, 그 속에 누워있는 시체들을, 컨테이너 박스를, 반을, 그를, 나를, 집어삼켜버렸을까. 어느 날 갑자기 붉은 눈이 내렸다. 사람들은 저마다 붉은 눈의 이유에 대해 뜬구름 같은 해답과 소문들을 내놓지만 진실은 알 수 없다. 시간이 지나면서 붉은 눈은 회색으로 바뀐다. 하늘에는 때가 낀 양말과 더러워진 털을 가진 양 떼 같은 회색 구름이 떠 있고 회색 눈이 끝없이 쏟아진다. 오늘도, 내일도, 낮에도, 밤에도 회색 눈은 회색 구름에서 계속 떨어져 내린다. 늘 회색 구름과 회색 눈에 덮여있는 도시, 회색시는 낮과 밤이 구분되지 않는다. 1년이 넘도록 쏟아진 눈에 회색시의 기능들은 마비되어버리고 불길한 소문들만 알음알음 회색 눈을 타고 퍼진다. 해를 보지 못한 사람들은 점점 피골이 상접하고 피부색마저 회색으로 변한다. 회색인이라 불리는 그들은 안전한 곳을 찾기 위해 줄줄이 회색시를 떠난다. 누구도 돌아온 적 없고 목적지가 어딘지도 모르는 회색인들의 행렬. 회색시에는 세 종류의 사람이 생긴다. 행렬을 따라 어딘지 모를 곳으로 떠나는 회색인, 끊이지 않는 회색 눈과 보이지 않는 미래에 스스로 죽음을 택하는 사람, 평범한 생활을 이어가려 노력하는 사람. 세 번째 사람에 속하는 주인공 해인과 그녀의 애인인 그, 그리고 그의 반려견 반이 소설의 주요 등장인물이다. 회색시에는 한 가지 소문이 퍼져 있다. [그게 온다고 한다]는 소문. 그게 무엇인지는 소설 내내 나오지 않는다. 하지만 179부터 0으로 줄어드는 소설 속 챕터(?)별 숫자들과 그게 오면 모든 것이 끝나버릴 것처럼 이야기하는 인물들의 대화를 보면 그게 뭔지 어느 정도 짐작은 된다. 지구가, 적어도 인류 문명이 끝나버릴 만한 거대한 자연재해, 혹은 인간의 멸망을 일으킬 만한 사건일 것이다. 소설 속에서 우리는 의사인 주인공 해인과 구둣방을 운영하는 그녀의 남자 친구 그(이름이 나오지 않는다), 그리고 그의 반려견 반이 컨테이너 박스 속에서 하루를 보내는 이야기를 엿볼 수 있다. 마지막이 될지도 모르는 하루다. 바로 다음 날, 그게 온다는 이야기가 파다하다. 그 날 하루 동안 많은 사람들이 그의 구둣방인 컨테이너 박스의 문을 두드린다. 근처 분식집 아주머니인 또와 아주머니, 맡긴 구두를 찾으러 온 노인, 우산 장사를 하는 그의 친구, 회색인의 행렬을 따라갔다가 반죽음 상태로 돌아온, 이미 회색인이 되어 버린 기타 리페어샵을 운영하던 진수 등등. 이 책은 담담하게 그것이 오기 전 하루 동안 해인과 그와 반과 그들이 있는 컨테이너 박스를 방문하는 여러 방문객들의 이야기를 보여준다. 일반적인 디스토피아, 혹은 아포칼립스를 다룬 소설의 강점으로는 무너져가는 세계를 구하려는 주인공의 분투와 그 속에서 살아남으려는 사람들의 처절함, 생존자들 간의 싸움과 다툼에서 생겨나는 긴장감을 들 수 있겠지만 이 소설은 전혀 다르다. 이 소설은 끝을 앞에 둔 소시민들의 모습을 담담하게 그린다. 세계를 구하겠다는 야심 찬 주인공도 없고 처절하게 살아남으려 남을 약탈하고 죽이는 인물도 없으며 손에 땀을 쥐게 만드는 사건도 딱히 없다. 또와 아주머니는 곧 다가올 끝을 외면하며 하루하루 손님 없는 분식집을 운영할 뿐이고 구두를 찾으러 왔다는 노인은 내일이면 찾아올 그것에 대해 체념하고 자신의 죽음을 넌지시 암시한 채 구두를 찾지도 않고 돌아간다. 홍 여사님은 두 달만에 찾아와 전과 다름없이 폐지와 폐품을 받아 손수레를 끌고 돌아가고 유나라는 여고생은 학교를 안 가도 돼서 좋다고 말하면서도 수의사가 될 것이라며 오지 않을지도 모르는 미래를 이야기한다. 주인공인 해인과 그녀의 연인인 그도 마찬가지다. 내일이면 모든 게 사라질지도 모르는 오늘, 그들은 평범한 하루를 보낸다. 늘 먹던 김치찌개를 끓여 저녁을 먹고, 커피를 마시고, 시디플레이어로 음악을 들으며 이야기를 나누고, 반을 쓰다듬으면서. 그 지점이 좋았다. 곧 다가올 마지막에 대한 절망과 체념과 포기로 얼룩진 인물들이 아니라는 점이. 내일이면 사라질지도 모를 세계와 회색 눈이라는 절망 속에서 퍼지는 사람 간의 당연한 호의와 공감의 모습도 인상적이었다. 내일이 세상의 마지막이라도 인간으로서 당연히 가져야 할 가치들, 사랑, 공감, 연민이 남아 있는 인물들의 모습은 뭉클하기도 했다. 반의 기도를 막은 누런 콧물을 직접 입으로 빨아내 반을 살려내고, 숨이 꺼져가는 진수를 살리기 위해 최선을 다하는 해인과 그의 모습. 보이지 않는 홍 여사를 걱정하던 구두를 찾으러 온 노인과 홍 여사가 늘 고맙게 생각한다며 해인에게 쥐어 준 곶감 몇 개. 고층 빌딩에서 뛰어내린 죽은 연인의 놓쳐버린 손을 다시 수습해 이어주는 해인. 유나와 해인에게 신을 수 있을지 없을지 알 수 없는 직접 만든 단화와 부츠를 선물한 그. 몇 시간 후면 이 모든 게 사라질 회색 눈뿐인 세상에 조그맣고 또 커다란 행동과 언어들이 남아 있다는 점이 기뻤다. 해인의 가족들, 엄마, 아빠, 여동생은 회색인들의 행렬을 따라 떠나기로 하고 그 전날 해인과 마지막 파티를 한다. 해인의 아빠는 그와 함께 남겠다는 해인에게 그가 무슨 일을 하는지, 돈을 얼마나 버는지, 나이는 몇이고 부모님은 무슨 일을 하시는지 묻지 않는다. 그를 많이 좋아하는지, 함께 있으면 안 무섭겠는지를 묻고 그럼 됐다고 말한다. 아이러니하다. 온전한 세상일 때는 사랑만으로 함께 있을 수 없다. 연인의 직업이 무엇인지, 함께 살 집은 있는지, 부모의 직업은 무엇인지, 나이는 몇인지, 아이는 없는지, 결혼한 적은 없는지. 둘의 사랑에 온갖 요인들이 끼어든다. 부모와 가족의 반대, 친구들의 만류, 주변의 시선 등등. 사랑해서 결혼한다는 지극히 당연한 이야기가 당연해지지 않는다.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살고 싶다는 그 당연한 이야기는 온통 회색 눈으로 뒤덮여 거의 모든 기능이 마비된, 하루하루 사람들이 죽어나가고 머지않아 모든 게 사라질 당연하지 않은 세상이 되고 나서야 당연한 이야기가 된다. 서로를 사랑하고, 그것만으로 함께 살 수 있는 세상은 사실 당연하지 않은 세상인 걸까. 시종일관 조용하고 고요하다. 그렇다고 슬프거나 침통하거나 체념과 포기의 기운이 감도는 것도 아니다. 담담히 보여줄 뿐이다. 내일이면 모든 게 없어질 세상에서 오늘 하루를 살아가는 사람들의 모습을. 전기가 나가고, 불이 꺼지고, 온몸이 덜덜 떨리는 추위 속에서 서로를 꽉 껴안은 해인과 그가 서로를 놓치지 않았기를. 그래서 다음과 같이 이어지기를.  -1 그것은 오지 않았다. 소설 속 한 문장 "많이 좋아하니?" "네. 많이요." "같이 있으면 설레니?" "네." "함께라면 안 무섭겠니?" 나는 확신 있게 고개를 끄덕였다. "됐다. 그럼."
白으로 만들어진 하루
눈이 내릴 거예요. 설레는 예보가 적중했습니다. 옷을 든든하게 입고 길을 나섭니다. 아무도 밟지 않은 곳을 좋아합니다. 두 발을 살포시 올려뒀다가 신중하게 한 걸음씩 옮깁니다. 어렸을 때부터 스마일 표시를 좋아했습니다. 굳어져만 가는 자아의 얼굴 대신 이 아이는 언제나 제 손끝에 따라 활짝 웃어줍니다. 아, 산에 가야겠습니다. 오랜만에 내린 소중한 눈을 이대로 떠나보낼 수 없습니다. 애정 하는 카페로 가는 길엔 산이 존재합니다. 평지보다 높이 솟아 있는 땅의 부분 위로 백의 세상이 쏟아져 내렸습니다. 뽀드득 뽀드득 소리를 좋아합니다. 눈이 쌓여져 있는 곳이라면 언제든 두 발을 올리는 겁니다. 뽀드득 뽀드득. 미련이 많은 사람은 어떤 계절을 남보다 조금 더 오래 산다 다른 이를 위해 참고 참다가 이 부분만 하며 장갑을 벗고 눈을 쓸었습니다. 기분 좋은 차가움이 손 가득 느껴집니다. 아 너무 좋습니다. 세상이 점묘법이야 빛이 가득한 날엔 그림자 사이로 나타나는 점 하늘 한구석이 번져가 가장 밝은 날 세상의 화상 입은 점들 반짝여 순수 결정체로 가득했던 백의 세계 속에서 흑으로 빛어진 전 가만히 서 있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암흑'이란 '알 수 없음, 알지 못함'에 붙여진 멋진 은유라는 말이 이해되기 시작합니다. 무수히 많은 것들이 정제되어 가고 있습니다. 이 세계는 지금 통과하고 있는 중이다 눈발이 다시 날리기 시작합니다. Let it go.
(약혐) 현미경으로 본 작은 세상 #신기
그냥 현미경 아니져 레이저 스캐닝 현미경이라 그냥 현미경으로 볼 수 있는 것 보다 훨씬 많은 걸 볼 수 있거든여 그러니까 곤충 무서워 하시는 분들은 여기서 후딱 뒤로 가기 누르시길! 그럼 준비되신 분들만 스크롤을 내리세여!!!!! (이미 미리보기로 보였겠지만 그래두 크게 보는거랑은 다르니까..) 그러니까 이게 뭔 줄 아시게쪄염? 전 알고 나서도 도저히 모르겠지만 ㅋㅋㅋ 얘는 바로바로 물방개 +_+ 물방개를 이렇게 샅샅이 들여다 본 적이 있나 생각해 보면 있긴 하지만 암만 떠올려도 이런 비주얼은 떠오르지 않지 말입니다만? 얘는 뭘까여 이건 좀 쉽긴 하당 이라고 생각하신 분들 많으실텐데 아마 여러분의 직감은 다 틀렸을 거예여 ㅋㅋ 얘는 바로 바다거북의 등껍질이나 몸에 달라붙어 때로는 생명을 위협하기도 하는 그.... 따개비 아니 따개비????? 놀란 분들 많으실거구 안 놀라신 분들은 따개비가 뭔지 모르는 분들일 듯 ㅋ 사진 가져오기 귀찮으니까 찾아 보시구... +_+ 그럼 얜 뭐게~여? 진짜루 이건 모르실거라서 바로 말씀드리자면 식물의 포자, 홀씨주머니...라고 합니당 ㅋ 신기신기 +_+ 요건? 마치 공작의 깃털같은 요건 등각류의 동물이라구 해여 +_+ 그니까 호옥시 찾아보실까봐 찾진 마시라고 미리 말씀드리면ㅋㅋ 갯강구, 쥐며느리 뭐 이런 애들이여. 괜히 검색하셨다가 이미지 보고 놀라실까봐...ㅋ 그런 아이들이 이렇게 예뻐 보이다니 넘나 신기하지 않나여! 얘는 물맴이라는 딱정벌레 종류의 발이구, 이건 나방의 더듬이 +_+ (사진 출처) 정말 신기한 작은 세상 탐험 무시무시했지만 즐겁기도 했져? ㅋㅋ 마치 후룸라이드를 타고 어두운 동굴을 지나는 짜릿한 기분 부디 즐거우셨길!!
장 폴 사르트르 <구토>
<구토> / 장 폴 사르트르 저 (지극히 주관적인 제 생각을 쓴 글입니다.) 이번 리뷰에서는 한 번 더 짚고 넘어가야 할 것 같다. 이 리뷰는 주관적인 내 해석에 기반한 것이다. 나는 사르트르의 문학이나 철학적 사상에 대해 체계적으로 배우거나 교육받은 적이 없으며 지금 쓰는 글도 내가 <구토>를 읽고 깨달은 점, 스스로(즉 주관적으로) 해석한 내용들을 기반으로 작성되었다. 물론 몇몇 해설이나 평론을 찾아 읽으며 전문가의 글을 참고하긴 했지만 어디까지나 <구토>의 텍스트와 관련 해설, 평론들을 내 관점에서 받아들이고 해석해 2차 가공을 거쳐 글로 써내는 만큼 절대적인 정답이 아닐뿐더러 어느 정도 공인되고 인정된 해석이 아닐 수도 있음을 미리 밝혀두는 바이다. 그럼에도 내가 이 글을 쓰는 이유는 <구토>가 사르트르의 철학을 담고 있다고 하더라도 어디까지나 독자의 주관적 해석을 허용하는 장르인 소설이라는 점, 내가 받아들이고 이해한 내용을 토대로 <구토>의 내용을 조금 더 알기 쉽게(찾아 읽은 해설과 평론들이 도대체 무슨 말인지 이해하기 매우 힘들었기 때문에) 사람들에게 소개하고픈 욕구 때문이라고 할 수 있겠다. 지금도 많은 부분들에 대한 이해가 불명확하긴 하지만 적어도 이해한 범위 내에서 최대한 알기 쉽게 <구토>를 풀어내는 것이 이번 리뷰의 목표이다. 1. <구토>의 줄거리 <구토>는 주인공, 앙트완 로캉탱의 일기이다. 그는 프랑스 부빌시에 머물며 역사 속 인물인 로르봉 후작의 전기를 쓰고 있다. 로캉탱이 일기를 쓰게 된 이유는 바로 자신에게 일어난 어떤 사건, 어떤 변화를 파악하고 규명하기 위해서이다. '변화의 범위와 성질을 정확하게 결정지을 필요가 있다'(p.11)라고 로캉탱은 일기 작성 직전에 쓰인 날짜 없는 쪽지에서 말하고 있다. 그렇다면 그 변화는 무엇일까? 그것이 바로 소설의 제목이기도 한 '구토'이다. 로캉탱은 어느 날 바닷가에서 물수제비를 뜨고 있던 아이들을 보고 자신도 물수제비를 뜨기 위해 매끈한 조약돌 하나를 집어 들었다가 어떤 불쾌한 감정을 느끼고 돌을 바닥에 떨어뜨린 채 그 자리를 떠난다. 그러한 불쾌한 느낌은 이후 계속 반복된다. 카페에서, 땅에 떨어진 종이쪽지를 줍다가, 자신의 손을 보면서, 거울 속 자신의 얼굴을 보면서, 독서광과 마주 앉아 저녁을 먹으며 대화를 하면서. 로캉탱은 수없이 반복되는 그 불쾌한 느낌을 '구토'라고 말하면서 왜 '구토'가 나타나는지, '구토'는 어떤 변화에 의해서 촉발되는지, 이 갑작스럽게 나타나기 시작한 '구토'의 정체가 무엇인지 알아내기 위해 일기를 작성하기 시작한 것이다.('구토'에 대해서는 뒤에서 자세히 이야기하기로 하자.) 로캉탱이 지속적인 '구토'에 대한 사유와 관찰을 통해 '구토'가 무엇인지 깨닫고 이를 극복하기 위해 로르봉 후작의 전기 작성을 그만두고 철저히 자신의 통제로 만들어진 필연성의 산물, 소설을 쓰기로 결심하면서 이야기가 끝난다. 2. '구토'란 무엇이며 왜 나타나는가? 로캉탱은 '구토'에 대해 끊임없이 생각하고 주변을 관찰하며 분석하지만 '구토'가 무엇인지 파악하기는 쉽지 않다. 얼핏 보면 '구토'는 무작위 하고 일관성 없이 나타나는 듯하다. 거울 속 자신의 얼굴을 보다가 나타나기도 하고, 카페에서 아무런 사건도 없이 갑자기 나타나기도 하며, 아돌프의 자줏빛 멜빵을 보며 걷잡을 수 없이 커지기도 하고, 땅에 떨어진 종이쪽지를 주우려다 나타나기도 한다. 그렇다면 이 '구토'라는 반응을 일으키는 원인은 무엇일까? 일기를 쓴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 로캉탱은 ''구토'는 나의 내부에 있지 않다. 나는 '거기에서', 벽 위나 멜빵에서, 그리고 온갖 내 주위에서 그 '구토'를 느낀다.'(p.44)고 이야기하지만 사실 '구토'는 로캉탱의 주위, 외부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로캉탱 내부의 변화에서 야기된 것이다. 로캉탱이 주위를 인식하는 감각의 변화, 주변의 온갖 것들이 '우연히 존재하고 있다'는 사실을 순간적으로 확연히 느끼게 되면서 '구토'가 나타난다. 즉, 로캉탱 자신이 외부를 인식하는 과정의 변화가 '구토'라는 반응으로 귀결된 것이다. 여기서 의문이 생긴다. 주변의 사물, 혹은 생명체들이 존재하고 있으며 그것이 우연하다는 사실이 왜 '구토'라는 불쾌하고 직접적인 반응으로 나타나는 것일까? 그 이유에 대해 생각해보자. 일반적으로 인간은 주변의 모든 것들을 '언어를 통해 규정'하고 '속성과 본질을 파악해 범주를 나누며' 그것들에 주관적인 '필연성과 의미'를 부여한다. 예를 들어 '의자'라는 단어를 보자. '의자'는 '사람이 걸터앉는 데 쓰는 기구. 보통 뒤에 등받이가 있고 종류가 다양하다.'라고 정의된 어떤 사물이다. 즉, 인간은 인간이 앉기 위해 만들어진 어떤 물건을 '의자'라는 단어이자 기호로 지칭하고 서로 그에 대한 범주와 의미를 약속한다. 인간에게 '의자'라는 사물은 '의자'라는 언어로 규정되고, 인간이 앉을 수 있는 사물이라는 속성과 본질을 지니고 있으며 이를 통해 특정한 사물을 '의자'로 분류한다. 또한 '의자'는 애초에 만들어질 때부터 인간이 앉기 위한 목적으로 제작되므로 사람이 앉기 위한 사물이라는 의도, 필연성, 본질을 지니고 있다. 하지만 로캉탱은 그러한 일반적인 인식과 전혀 다른 방식으로 주변에 대해 인식함으로써 '구토'를 겪게 된다. 로캉탱의 주위에 대한 인식, 즉 '구토'를 일으키는 원인을 파악해보자. 앞에서 예로 들었던 '의자'를 가지고 설명해보자면 지금 이 문장 안에 나는 '의자'라는 단어를 썼고 이 문장을 읽는 사람들은 각각 머릿속으로 '의자'를 떠올릴 것이다. 그 수많은 '의자'들이 전부 정확히 같고 동일한 '의자'일까? 그렇지 않다고 확신할 수 있다. 누군가는 나무로 된 의자를, 누군가는 등받이가 없는 의자를, 누군가는 지금 앉아 있는 푹신한 소파를 떠올릴 것이다. 즉, '의자'라는 단어는 사실 정확한 단어가 아니다. '의자'라는 단어를 통해 정확히 자신이 생각하는 어떤 특정한 사물을 표현하거나 전달할 수 없기 때문이다. 여기서 한 발 더 나아가면 '의자'라는 단어가 지칭하는 사물의 경계는 정확히 무엇인지, 어디까지가 '의자'라고 불릴 수 있는지 의문점이 생긴다. 어디까지가 '의자'일까? 다리가 네 개고 사람이 앉을 수 있는 물체? 사람이 뒤집어진 박스 위에 앉아있다면 그것을 '의자'라고 부를 수 있을까? 등받이의 유무와 '의자'라고 지칭되는 사물의 범주는 관계가 있는가? 만약 다리가 네 개가 아니고 세 개라면? 열 개나 혹은 한 개뿐이라면? 이렇게 질문을 던질수록 우리는 '의자'라는 단어가 정확한 경계와 범주를 가지고 어떤 사물을 지칭하는 단어가 아니라 그저 인간이 앉을 수 있는 사물이라는 두루뭉술한 정의를 가진 단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게다가 그 정의마저도 언제든지 깨질 수 있다. 여태까지 아무도 앉지 않아서 '의자'라고 불리지 않았던 어떤 것에 누군가 앉기만 한다면 그 사물은 이전부터 '의자'였음에도 아무도 그 사실을 알지 못했을뿐더러, 그때부터 '의자'라고 인식되기 때문이다. 즉, '의자'라는 단어는 절대적이고 정확하게 특정한 사물을 지칭하는 단어가 아니며 인간의 생각, 관념 속에서만 의미를 가지는, 현실에는 전혀 적용할 수 없는 의미 없는 기호일 뿐이다. 심지어 지금 상태에서 '의자'라는 단어를 사용하는 인간들이 전부 증발해버린다고 해도 여전히 '의자'라고 불렸던 사물은 그 자리에 그대로 남아있을 것이다. 인간들이 '의자'라고 부르는 것과 상관없이, '의자'라는 기호의 존재 유무와 상관없이 '의자'라고 불리는 사물은 존재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로캉탱은 '내가 그 위에 앉아 있는 물건, 내가 그 위에 손을 얹은 물건의 이름은 의자이다. 사람들은 우리가 거기에 앉을 수 있도록 서둘러서 그것을 만들었다. 그들은 가죽이나 용수철, 천을 가져다가 의자를 만든다는 관념을 품고 일을 시작했다. 그리고 일이 완성되었을 때, 그들이 만든 것이 바로 '이것'이었다. ...... 그것은 의자가 아니다.'(p.234) 라거나 '사물들은 명명된 그들의 이름으로부터 해방되었다. ...... 나는 이름붙일 수 없는 '사물들'의 한복판에 있다.'(p.235)라고 말한다. 게다가 우리는 '의자'라고 불리는 사물을 정확히, 완벽히 이해하는 것이 불가능하다. 지금 당신의 앞에 있는(없다면 당신이 매일 앉는 어떤 '의자'를 상상해보라.) '의자'를 한 번 완벽히 이해해보자. 다리가 몇 개인지, 등받이가 있는지, 재질은 무엇인지, 바퀴는 있는지 없는지. 완전히 이해했다고 생각한다면 '의자'라는 사물에 대해 정말로 더 파악할 것이 없는지 질문해보라. 분명 놓친 것이 있다. 언제 만들어졌는지, 누가 만들었는지, 어느 정도의 무게까지 견딜 수 있는지, 단면은 어떻게 생겼는지 등등. 사실 '의자'라는 사물을 완전히 이해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언제나 우리가 알 수 없는 부분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심지어 '의자'를 만들어 낸 사람도 마찬가지다. 우리는 '의자'가 인간의 앉음이라는 목적을 가지고 만들어졌다고 생각하지만 왜 '인간의 앉음'이라는 목적을 수행하는 사물로써 정확히 저러한 모양과 재질, 무게, 길이의 사물이 만들어졌는지 알 수 없다. 의자를 만든 사람조차도 왜 등받이 길이를 50cm로 했는지, 51cm나 49cm면 왜 안 되는 건지 설명할 수 없다. 인간이 명확한 목적과 의도를 가지고 만든 '의자'조차도 완전한 필연성 속에 놓이기에는 그 외의 설명되지 않는 '여분'이 너무나 많다. '의자'는 인간의 관념 속에서만 필연성을 지닐 뿐, 현실에 사물로서 만들어지는 순간 필연성은 사라져 버린다. 즉, '의자'를 포함한 주위의 모든 것들은 사실 어떤 속성이나 본질, 필연성을 지니고 있지 않은 여분의 존재, 완전한 우연성 속에 놓인 존재들이다. 그것들은 그저 존재할 뿐이며 그 존재들을 지칭하는 언어며 기호, 또는 인간이 생각하는 그 존재들의 의의, 사용법, 특징 등은 우리가, 그리고 사물이 실제로 존재하는 현실 안에서 절대적인 어떤 의미를 전혀 가지고 있지 않다. 그러한 관점에서 우리가 어떤 사물을 '의자'라고 부르는 것은 제대로 이해하지조차 못하는 어떤 존재를 기만적으로, 오만한 방식으로 대하고 있는 것이다. 로캉탱은 공원에서 마로니에 뿌리를 보며 앞에서 말한 사실들을, 자신이 '구토'를 일으키는 이유를 인식한다. '3,4일 전만 해도 나는 '존재한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가를 결코 예감하지 못했다.'(p.237)라고 말한 그는 '나는 '속성'이라는 것을 생각하고 있었다. 나는 바다가 초록색 물건의 계급에 속해 있다고, 또는 초록색이 바다의 성질의 일부를 이루고 있다고 생각하고 있었다.'(p.238)라고 생각하던 사람이었다. '초록색'이라는 단어가 가지는 어떤 속성이 존재하고 그 속성으로 '바다'의 일부를 설명할 수 있다고 생각하던 로캉탱이었지만 공원에서 마로니에 뿌리의 특징들을 파악하고 설명해보려고 하다 실패한다. '껍질이 그래도 검은 것을 나는 보았다. 검다니? 나는 이 말이 부풀어올라서, 엄청난 속도로 그 의미가 공허해지는 것을 느꼈다. 검다니? 뿌리는 검지 '않았다'. 그 나무조각 위에 있었던 것은 조금도 검지 않았다. 그것은...... 다른 것이었다. 원과 마찬가지로 검은 빛깔도 존재하지 않았다.'(p.243)라는 말에서 보듯이 마로니에 뿌리껍질이 검다고 말하려던 로캉탱은 사실 진정한 '검은 빛깔'이라는 것은 인간의 관념 속에서만 존재할 뿐 현실에 존재하지 않음을 깨닫는다. 마치 완전히 관념적인 단어, 존재의 세계가 아닌 설명이나 이치의 세계에 존재하는 '원'과 같은 단어처럼 말이다. '원은 부조리하지 않다. 왜냐하면 원은 직선의 일부분이 그 끝에서 회전한 것이라는 정의에 의해서 충분히 설명될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원은 또한 존재하지도 않는다.'(p242)라는 로캉탱의 말처럼 모든 언어와 단어는 인간의 관념 속에서 필연성을 지니며 이치에 맞게 설명되지만, 우리가 존재하는 현실 세계로 옮겨오는 순간 그냥 존재하고 있는, 이해와 표현이 불가능한 부조리한 사물들이 된다. '역부 회관의, 그날 밤의 아돌프의 멜빵. 그것은 바이올렛빛이 '아니었다''(p.243)나 '맥주잔의 그 애매한 투명.'(p.244)처럼 로캉탱은 주위에 존재하는 어떤 것도 자신이 언어로 혹은 다른 무언가로 정확하게 표현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달은 것이다. 로캉탱은 그러한 주위의 사물들의 부조리와 우연성을 앞에서 말했듯 '여분'이라는 말로 표현한다. '우리는 너 나 할 것 없이 누구나 거기에 있을 이유가 조금도 없다. 당황하고 어딘지 불안한 각 존재는 다른 존재와의 관계에서 여분이라는 것을 느끼는 것이었다. '여분', 이것이야말로 저 나무, 저 철책, 저 조약돌들 사이에서 내가 설정할 수 있는 유일한 관계였다.'(p.240)라는 로캉탱의 말을 보자. 여기서 '여분'은 필연적이지 않은 어떤 부분을 말한다. '의자'는 인간이 앉기 위해 만들어졌지만 꼭 다리가 4개에 등받이가 있을 필요는 없다. 우리가 상상도 못 한 모양의 사물이더라도 앉을 수만 있다면 그것은 '의자'다. '의자'를 만든 사람이 전혀 누군가 앉을 것을 고려하지 않았더라도, 혹은 앉는다는 행위와 전혀 관련 없는 어떤 부분이 존재하더라도 그것은 '의자'가 될 수 있다. 심지어 우리가 '의자'라고 부르는 모든 사물에는 앉는다는 행위와 관련 없는 여분이 반드시 존재한다. 앞에서 예를 들었듯이 등받이의 길이가 50cm라고 해보자. 등받이의 길이가 49cm이더라도, 40cm이더라도 앉는 데는 전혀 문제가 없다. '의자'를 만든 사람의 목적과 의도에 포함되지 않은 어떤 '여분'이 존재하는 것이다. 그것은 등받이의 길이가 될 수도, 의자의 색이 될 수도, 의자 다리의 개수가 될 수도, 그 외의 어떤 것도 될 수 있다. 인간이 확실한 목적을 가지고 만든 사물조차도 수많은 여분이 존재하는데 나무는, 돌은, 잔디는 어떻겠는가? 그것들은 완전한 '여분'의 존재, 완전한 우연 속에서 태어나 그 자리에 존재할 뿐인 존재인 것이다. '약간 왼편 쪽으로 나의 정면에 서 있는 마로니에, 그것은 '여분의 것'이었다. 라 벨레다도 '여분의 것'......'(p.240)처럼 모든 것은 '여분'의 존재다. 로캉탱의 인식은 주위의 사물에서 자신, 혹은 인간의 존재로까지 확장된다. '그리고 '나'도-힘 없고, 피곤하고, 추잡하고, 음식을 삭이며, 우울한 생각을 되씹고 있는- '나 역시 여분의 존재였다.''(p240)나 '그 여분의 존재를 최소한 하나라도 말소시키기 위해서 자살이나 할까 막연히 생각해보았다. 그러나 나의 죽음 자체가 여분이었을 것이다. 나의 시체도, 그 미소하는 정원 깊숙이, 이 조약돌 위, 풀 사이에 흐를 피도 여분이다. 그리고 썩은 육체는 그것을 받아들이는 땅속에서도 여분의 것이며, 또 깨끗이 씻기고, 껍질이 벗겨지고, 이빨처럼 깨끗하고 청결한 나의 뼈도 여분의 것이었으리라. 나는 영원히 여분의 존재였다.'(p.240)처럼 로캉탱은 자신이나 인간조차도 어떤 본질이나 의미, 속성이 없는 '여분'의 존재이며 우연히 태어났고 우연히 살아가고 있는 우연성 속의 존재임을 깨닫는다. ''부조리'라는 말이 지금 나의 펜 아래에서 태어난다.'(p.241)라는 문장에서 '부조리'는 '의미를 전혀 찾을 수 없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한 관점에서 로캉탱에게 이 세상의 모든 것, 나무, 건물, 돌, 바다, 동물, 인간, 심지어 자신이나 자신의 삶에 이르기까지 모든 것은 우연히 의미 없이 생겨났고 '부조리'하다. 그러므로 인간의 삶, 로캉탱의 삶에는 어떤 의미도 없고 앞에는 무한한 자유가 놓여 있다. '나는 내가 무슨 짓이든 할 수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이 치즈 나이프를 독서광의 눈에 꽂는 일.'(p.230)과 같은 로캉탱의 말처럼 말이다. 사르트르는 '인간은 자유를 선고받았다'라고 이야기한다. 이 세상의 모든 것이 어떤 의미도 없는 '부조리'한 것이므로 인간은 무슨 행동이든 할 수 있는 자유를 가지고 있으나 그것은 엄청난 형벌이나 다름없다. 어떤 이유도, 의미도 없이 무한히 자유로운 선택지가 주어진 상황에서 인간은 어떤 선택을 반드시 내려야만 하고 그 선택에 대한 책임은 오롯이 인간의 몫이다. 앞으로의 선택에 대한 어떤 근거도 존재하지 않는 상황에서 주어진 자유는 당연하게도 선택의 결과와 책임에 대한 엄청난 불안감을 야기한다. 끝없이 펼쳐진 흰 무(無)의 공간에 나침반도 지도도 아무것도 없이 뚝 떨어져 있다는 사실을 갑자기 깨달은 것과 다름없다. 그렇기에 사르트르는 '인간은 자유를 선고받았다'라고 말한 것이다. 지금까지 쓴 내용을 정리해보자. 로캉탱이 구토를 일으키는 이유를 정리해보자면 첫째로 로캉탱의 주변에 대한 인식의 변화를 들 수 있다. '그것들이 쫓기는 토끼처럼 우리의 코밑을 빨리 지나갔을 때, 그리고 거기에 너무 주의를 하지 않았을 때, 우리는 그것을 아주 간단하고 안심할 수 있는 것이라고 믿을 수 있었고 세상에는 진짜 청색, 진짜 분홍색, 진짜 편도나 오랑캐꽃 냄새가 있다고 믿을 수가 있었다.'(p.244)는 로캉탱의 말처럼 우리가 주변의 사물들을 슥 지나가듯 보았을 때는 그 사물의 '여분', 우연성, 적나라한 이해 불가의 존재성을 인식할 수 없다. 하지만 로캉탱은 어느 순간(마로니에 뿌리를 보며) 자신이 이해하고 있고 말로써 표현하고 있다고 생각했던 모든 존재들이 사실 그렇지 않음을 깨닫는다. '그러나 이런 것들을 잠시나마 붙잡아 놓으면, 이 평안과 안전의 느낌은 심각한 불안에 자리를 양보한다. 빛깔, 맛, 냄새 들은 절대로 진짜가 아니었다.'(p.244)를 느끼는 순간이 로캉탱에게 도달한 것이다. 언어는 그저 인간이 만든 텅 빈 기호일 뿐 어떤 실제적 의미도 가지지 않으며 그러므로 당연하게도 모든 존재는 언어로 표현되어 왔던 속성과 본질이 없다는 것, 그리고 인간이 인식하는 존재에는 늘 '여분'이 존재하며 그것은 모든 존재가 우연성 속에 놓여 있음을 의미한다는 것을 알게 된 것이다. 이는 로캉탱이 당연히 이해하고 알고 있다고 여겨왔던 모든 것들이 사실 전혀 그렇지 않음을, 의미나 본질, 속성 따위는 전혀 가지지 않은 채 존재할 뿐인 도무지 이해할 수 없고 설명할 수 없는 것들에 자신이 둘러싸여 있음을 알게 되는 순간이다. 인간은 언제나 자신이 이해하지 못하는 것, 인식의 범주를 넘어선 것에 두려움과 공포를 느끼기 마련이다. 그렇게 만들어진 공포와 불안감, 두려움이 '구토'라는 증상으로 나타난 것이다. 둘째는 인간, 그리고 로캉탱 자신의 존재가 가진 우연성과 자유에 대한 깨달음이다. 로캉탱은 모든 사물이 그저 존재할 뿐이며 그 존재에 어떠한 이유나 근거도 없음을 즉, 모든 사물이 우연히 존재하고 있음을 알게 된다. 곧 로캉탱은 인간도 사물과 마찬가지임을 깨닫는다. 인간도 그저 존재할 뿐이며 그 존재에 어떠한 이유도 의미도 근거도 없다. 로캉탱 자신이 왜 이렇게 생겼고, 왜 머리가 붉은색이며, 왜 로르봉 후작의 전기를 써야 되는지 그에 대한 어떠한 합리적인 설명도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 그 순간 로캉탱은 형벌과도 같은 무한한 자유 속에 놓인다. 우연히 존재할 뿐인 로캉탱은 완전히 우연한 존재이기에 무엇이든 할 수 있다. '나는 내가 무슨 짓이든 할 수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이 치즈 나이프를 독서광의 눈에 꽂는 일.'(p.230)과 같은 짓도 할 수 있는 것이다. 사회 질서상으로 안된다고 생각했던, 도덕적으로 하지 말아야 한다고 스스로 규제했던 일들은 사실 언제든지 실행할 수 있는 일이었다. 못할 이유가 없기 때문이다. 그러한 규제는 스스로에게 무한한 자유가 있음을 외면하는 것이며, 자유에 대한 책임을 스스로가 지는 것이 두려워 사회 질서와 그것을 만든 타인들에게 떠넘기는 것과 다를 바 없음을 로캉탱은 알게 된다. 즉, 로캉탱 자신의 삶과 존재에 어떠한 이유도 없음을, 그러므로 어떠한 근거도 이유도 없이 무한한 선택지에서 영원히 형벌과도 같은 자유를 누리며 선택을 해나가야 함을 깨달은 로캉탱이 자신에게 주어진 한없이 자유로운 자유에 대해 느끼는 불안감이 '구토'로 나타나게 된다. 3. '구토'를 극복하는 방법은? '구토'는 로캉탱에게만 나타나며 다른 이들에게는 나타나지 않는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 다른 이들은 모두 깨달음을 얻어 '구토'를 극복한 것일까? 이번에는 다른 이들이 '구토'를 겪지 않는 이유, 그리고 로캉탱이 '구토'의 극복 방안으로 제시한 내용을 알아보자. 3.1. 부빌 시의 시민들이 '구토'를 겪지 않는 이유 <구토>에 보면 부빌 시의 시민들이 일요일에 교회를 방문하며 거리에 온통 모자의 행렬이 이어지는 장면이 나온다. 그 광경은 '머리만이 그 두 줄에서 완전히 튀어나와 있기 때문에 모자들, 모자의 바다가 보인다.'(p.87), '행렬의 진행은 멈추지 않는다. 겨우 약간 사이가 벌어졌을 뿐이다. 서로 악수를 하고 있는 여섯 사람들 앞을 우리는 걸어간다.'(p.87), '열 명쯤 되는 사람들이 서로 부딪치고는 소용돌이를 이루면서 인사를 한다. 모자 춤은 내가 자세히 설명할 수 없을 만큼 재빨리 시작했다.'(p.89)와 같이 묘사된다. 부빌 시의 시민들은 일요일 미사를 보기 위해 붐비는 대로를 휩쓸려 다니듯 걷고, 아는 이를 만나면 일제히 모자를 벗어 손에 들고 모자 춤을 추며, 모두가 비슷비슷한 인사를 나누고 비슷비슷한 복장으로 대로를 걷는다. 즉, 자신의 행동을 스스로 고민해 선택하지 않고 다른 이들이나 사회가 정한 규칙을 맹목적으로 따르는 것이다. 이들은 다른 이들 혹은 사회의 규칙이나 질서에 자신의 자유에 대한 선택과 그 책임을 내맡겨 버렸다고 볼 수 있다. 자신들에게 무한한 자유가 있다는 사실을 외면하고 마치 자신에게 주어진 사명이나 임무가 있는 듯이 행동하는 부빌 시의 시민들은 주위의 모든 것, 심지어 자기 자신조차도 우연성 속에 놓인 무한한 자유가 주어진 존재임을 깨닫지 못한다. 그렇기에 그들은 다른 모든 이들과 같이 행동하며 사회 질서를 철저히 지키고 그것이 자신의 존재 이유인 것처럼, 자신의 직업이, 위치가, 성별이, 지위가 자기 자신의 본질인 것처럼 행동한다. 사르트르는 이를 일컬어 '자기기만'이라고 명명했다. '이미 지나간 일요일은 씁쓸한 맛을 그들의 입 안에 남겼고, 그들의 생각은 이미 월요일에 가 있다. 그러나 나에게는 월요일도 없고 일요일도 없다. 있다는 것이라곤 무질서하게 밀려오는 나날과 그리고 번갯불같이 돌연 생겨나는 마음속의 움직임이다.'(p.106)라는 문장이 로캉탱과 부빌 시의 부르주아들의 차이를 확연히 보여준다. 부빌 시의 부르주아들은 일요일과 월요일이라는 실제로 존재하지 않는 가상의 요일과 그것이 가지는 사회적 질서에 자신을 맡기고 아무런 의심도 없이 평소와 같은 일요일을 보내고 월요일을 준비한다. 그러나 로캉탱에게는 오늘도 내일도 그저 밀려오는 새로운 나날일 뿐 일요일이나 월요일이라는 가상의 관념으로 정의되는 날이 아니며 7일 전의 일요일이나 월요일과 같은 날이 전혀 아니다. 부빌 시의 부르주아들이 추구하는 안정된 삶, 일주일 단위로 같은 나날들이 이어지는 삶, 늘 새로운 날임을 외면하며 사회에서 만든 가상의 가치에 안주해버린 삶이 로캉탱이 깨달은 무한한 자유 속 인간의 삶, 존재함을 깨달은 인간의 삶과 얼마나 동떨어져 있는지 알 수 있는 대목이다. 심지어 부빌 시의 부르주아들은 자신의 자유를 책임질 노력도 하지 않고, 스스로의 생각으로 판단을 하는 일조차 없이 사회에서 준 직책, 지위, 역할에 몰두한 자들을 초상화로 남겨 기념하기까지 한다. 자신의 자유를 방임한 자, 그에 대한 책임을 지지 않고 외면해 버린 자, 끊임없이 자신을 기만하며 자신의 본질이, 의무가, 사명이 존재한다고 여기던 자들의 그림을 보고 로캉탱은 말한다.'작은 그림의 성당 속에 한없이 고운 백합이여 안녕, 우리의 자존심이여, 우리의 존재 이유여 안녕, '더러운 자식들'이여 안녕.'(p.178) 인간은 자유를 선고받았다. 그 무한한 자유 속에서 스스로 치열하게 고민하고 고뇌하며 올바른 선택을 찾아내고, 그 올바른 선택에서 자신만의 가치를 찾아내는 것이 올바른 인간의 자세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부빌 시의 부르주아들은 자신 앞에 놓인 무한한 자유를 외면한다. 무엇이든 할 수 있다는 사실이 주는 역설적인 두려움과 불안감 그리고 자신의 선택이 가져올 막중한 책임이 너무나 버겁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들은 자신에게 자유가 없는 듯이 행동한다. 사회 질서로 정해진 월요일이기 때문에 출근하며, 일요일이기 때문에 교회 미사에 참석하고, 사회가 정한 방식대로, 다른 사람들이 행동하는 대로 자신의 자유를 외면한 채 거짓 근거를 만들어 행동한다. 그러한 행동들이 자신의 임무나 사명, 의무인 것처럼. 그러나 그 속을 끈질기게 파고들어본다면 그 행동들에 스스로 납득할만한 근거는 없다. 사회가 정한 규칙이 무조건 맞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부빌 시의 부르주아들은 자신의 규칙적이고 정해진, 평안한 삶에 안주할 뿐 그 삶의 방식이 올바른 선택인지, 무엇이든 할 수 있는 자신의 자유 속에서 따를 만한 가치가 있는 것인지 진지하게 생각하고 판단하지 않는다. 맹목적으로 따를 뿐이다. 자신에게 선고된 무한한 자유에서 눈을 돌린 부빌 시의 시민들은 당연히 '구토'를 겪지 않는다. '구토'는 존재의 '여분'에서 깨닫는 세상 모든 것들의 우연성, 그리고 우연히 만들어져 존재하는 존재들이 가지는 무한한 자유를 직시하고 그것의 두려움을 체감할 때 나타나는 현상이기 때문이다. 3.2. 독서광이 '구토'를 겪지 않는 이유 독서광은 도서관에서 알파벳 순으로 모든 책을 읽어나간다. 그는 책 속에 진리가 있다고 여기며 그것을 통해 자신의 삶의 의미를 만드려 노력한다. 하지만 책은 과거의 것이다. 이미 지나간 사실에 대한 기록이며 그것은 지금, 여기에서 일어나고 있는 현실에 대해 어떠한 답도 줄 수 없다. 과거는 이미 지나갔으며 현재와 다르기 때문이다. 이 사실은 로캉탱이 로르봉 후작의 전기 집필이 자신의 '구토'를 해결해 줄 수 없음을 깨닫는 것과도 연관이 있다. '나는 내 주위를 불안한 눈초리로 둘러보았다. 현재뿐이다. 그것 이외에는 아무것도 없었다.'(p.180), '현재의 진실한 본성이 드러나 있었다. 그것은 현존하는 그것이었다. 그리고 그 현재가 아닌 모든 것은 존재하지 않았다. 과거는 존재하지 않았다. 사물 속에도, 나의 생각 속에도 없었다. 확실히 오래전부터 나의 과거가 나에게서 도주해버렸다는 것을 나는 알고 있었다.'(p.180)처럼 과거는 이미 사라졌으며 존재하는 것은 현재뿐이다. 그러한 상황에서 과거의 기록으로 점철된 책들이나, 이미 사라진 과거의 존재인 로르봉 후작의 전기 집필이 현재의 로캉탱이나 독서광에게 어떤 도움을 줄 수 있을까? 현재의 존재, 현재 일어나고 있는 일들을 과거의 시각으로 해석하는 것은 영어 문제를 수식을 이용해서 풀겠다는 것과 마찬가지다. 로캉탱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로르봉은 이미 존재하지 않았다. 전혀 존재하지 않았다. 만약 그의 뼈가 조금이라도 남아 있다면, 그 뼈 자체로서 독자적으로 존재하는 것이고, 그것들은 염분과 수분을 포함한 인산염과 탄산석회에 불과하다.'(p.182). 이처럼 현재를 과거로 재단하려 하는 것은 '염분과 수분을 포함한 인산염과 탄산석회'를 보고 "로르봉 후작님, 잘 지내셨나요?"라고 말하는 것과 다름없다. 독서광은 로캉탱과의 식사 자리에서 자신이 사회주의 단체 S.F.I.O. 에 입당했음을 밝힌다. 그때 '그의 얼굴은 자부심으로 빛난다. 고개를 뒤로 젖히고 눈을 지그시 감고 입을 살짝 벌린 채로 그는 나를 바라본다. 그는 순교자처럼 보였다.'(p.216)고 로캉탱은 묘사한다. 그는 과거 전쟁에서의 경험을 통해 사회주의 단체에 입당하고 그런 자신을 자랑스럽게 여기며 휴머니스트적 면모를 보인다. 로캉탱은 "여기 있는 사람들, 그리고 모든 사람들을 사랑해야 합니다."(p.222)라고 말하는 독서광에게 일침을 가한다. 로캉탱은 독서광에게 "당신이 저 둘을 사랑하고 있지 않다는 것이 분명해졌습니다. 아마도 당신은 길거리에서 그들을 알아볼 수 없을 것입니다. 당신에게 그들은 상징에 불과하니까요. 당신이 흐뭇해하고 있는 그것은 전혀 그들에 대해서가 아니라 '인간의 청춘' 특히 '남녀의 사랑' '인간의 목소리'지요."(p.224)라고 말한다. 독서광은 과거의 경험을 토대로 사회주의 단체에 입당하고 모든 인간을 사랑해야 한다고 말하지만 그들을 왜 사랑해야 하는가에 대해서는 생각하지 않는다. 과거의 경험에서 얻은 것을 현재에 그대로 적용하고 있으며 현재 자신의 행동, 지금 자신이 모든 사람을 사랑해야 하는 이유, 입당으로부터 긴 시간이 지난 지금 사회주의가 현재의 상황에 적합한지에 대한 고민 없이 맹목적으로 과거의 깨달음과 과거의 경험을 따른다. 심지어 자신이 사랑하는 것이 사람 그 자체인지, 로캉탱이 말한 것처럼 '인간의 청춘'이나 '남녀의 사랑' 혹은 '인간의 목소리'인지도 제대로 구분하지 못할 만큼. 그런 독서광이 현재 존재하고 있는 모든 것들의 우연성, 존재의 '여분', 지금 이 곳에 주어진 무한한 자유를 깨달으며 생기는 불안감이 형상화된 '구토'를 느끼지 못하는 것은 당연하다. 존재란 현재에 있는 것이지만 독서광은 과거에 묻힌 자이기 때문이다. 3.3. 안니가 '구토'를 겪지 않는 이유 사실 안니는 로캉탱과 같은 '구토'라는 현상을 겪지 않을 뿐, 어렴풋이 로캉탱과 비슷한 불안감, 공포를 느끼고 있다. 그 과정은 안니가 자신이 추구해오던 '완전한 순간'이 허상임을 깨달으면서 나타난다. 안니는 로캉탱과 만나던 시절에도 늘 '완전한 순간'을 추구했다. 일상을 벗어난 특권적인 상태에 이른 어떤 한순간에 그 공간, 그곳에 속한 인물, 그들의 행동 등을 통제해 마치 스틸컷을 찍듯 완벽한 질서를 부여한 '완전한 순간'을 만드는 것이다. 그러나 안니는 어느 순간 그 '완전한 순간'이란 것이 없음을 알게 된다. '"그 완전한 순간이 없단 말이야?" "없어요."'(p.267)가 보여주는 로캉탱과 안니의 대화에서 확인할 수 있다. 안니가 '완전한 순간'을 만들려고 하는 이유는 로캉탱이 '구토'를 겪으며 깨달은 사실, 세상 모든 존재가 어떠한 존재 이유나 근거가 없는 우연성 안에 놓인 존재라는 사실에서 오는 불안감에 저항하기 위함이다. 안니는 '완전한 순간'을 만듦으로써 그 공간과 시간을 완벽하게 통제하고 질서를 부여해 우연성 속에 놓인 존재들에 필연성, 그렇게 되어야만 하는 이유, 근거를 만들려 했던 것이다. 물론 안니 자신이 명확하게 그 사실을 깨달은 것은 아닐 테지만 머리로는 이해하지 못해도 피상적으로 느끼던 불안감이 '완전한 순간'을 만듦으로써 해소되는 것을 깨닫고 그것을 추구하기 시작하지 않았을까. 그러나 위에서 안니가 말한 것처럼 '완전한 순간'이란 사실 존재하지 않는다. 그것은 그 순간이 가지는 시간적 한계 때문이다. 3.2. 에서 이야기한 것처럼 과거는 현재 존재하는 것들에 어떤 영향도 끼치지 못한다. 과거는 이미 지나간 시간이고 모든 인간, 모든 생명체는 과거가 아니라 현재를 살아가고 있다. 현재와 과거는 완전히 단절되어 있다. 만약 안니가 추구하던 '완전한 순간'이 정말 완전하다면 그 순간은 현재에도 '완전'해야만 한다. 그러나 과거의 '완전한 순간'이 현재에 완벽히 재현되는 것은 불가능하다. 시간, 공간, 인물, 위치, 기억 등등 온갖 요인들이 달라졌고 '완전한 순간'에 포함되어 있던 것들은 현재의 것들과 완전히 다른 존재다. 그러므로 '완전한 순간'은 사실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 안니는 '완전한 순간'을 만들고 그 순간에 대한 기억을 통해 현재의 불안감과 두려움을 잊고 또한 미래에도 과거의 '완전한 순간'이 그러한 역할을 해주기를 바란다. 그러나 과거의 '완전한 순간'은 그 순간이 지나는 그때 이미 사라지고 완전함은 남아있지 않게 된다. 예를 들어 안니가 과거의 '완전한 순간'을 떠올리고 그것에서 현재의 고뇌와 불안을 잊으려 해도 안니의 기억에 남아 있는 '완전한 순간'은 그 당시의 한 부분이자 현재에는 전혀 존재하지 않는 것들일 뿐이다. 게다가 과거의 '완전한 순간'을 기억하고 추억한다고 해도 현재 처해있는 상황과 현재 존재하는 세계는 전혀 달라지지 않으며 어떠한 실재적 변화도 일어나지 않는다. 안니는 결국 그 사실을 깨닫고 말한다. "나는 일종의 물리학적...... 확신이 있어요. 완전한 순간이란 없는 것 같아요."(p.268)라고. 안니는 '완전한 순간'의 허상을 깨달았으며 만물이 가지고 있는 우연성과 혼돈의 세계를 직면했다. 그녀는 과연 어떤 해답을 찾게 될까. 3.4. 로캉탱이 '구토'를 극복하는 방법 로캉탱은 부빌의 카페에서 격렬한 '구토'를 느끼다 카페에서 흘러나오는 재즈곡을 들으며 '구토'가 사라지는 걸 느낀다. 재즈곡이 시작된 순간 모든 것은 정해져 있다. 음악이 시작되고 정확히 몇 초 후 흑인 여자가 노래를 시작하고 정해진 가사와 음과 시간이 소비되면 노래가 멈추고 음악이 끝난다.'몇 초 후면 흑인 여자가 노래를 부를 것이다. 그것은 불가피한 일 같다. 그만큼 이 음악의 필연성은 강하다. 이 세상이 주저앉아버린 그 시간, 그 시간으로부터 오는 그 어떤 것도 이 필연성을 방해하지는 못한다. 그 필연성은 질서에 따라 스스로 멈출 것이다.'(p.48)라는 로캉탱의 말처럼 이 재즈곡은 철저히 작곡자의 의도에 의해 만들어진 완전한 질서와 필연성 속에 놓여 있다. '일어난 일, 그것은 '구토'가 사라졌다는 사실이다. 침묵 속에서 소리가 튀어나왔을 때, 나는 내 몸이 굳어지고 '구토'가 사라진 것을 느꼈다.'(p.49)에서 보듯 재즈곡은 로캉탱의 '구토'를 그 즉시 잠재웠다. 이처럼 작곡자의 철저한 의도에 의해 만들어진 '여분'이 없는 완벽한 필연성의 산물인 재즈곡은 존재 이유가 없는 존재들의 우연성이 가져다주는 불안감과 '구토' 증상을 완전히 사라지게 만든다. 그리고 로캉탱은 부빌을 떠나기 전 같은 카페에서 같은 재즈곡을 들으며 다시 한번 재즈곡의 완전한 질서, 필연성을 체감하고 곡을 부른 가수와 작곡가를 생각한다. 그들이 음악 속에 남긴 생각, 관념, 필연성, 질서는 그들이 이미 사라진, 현존하지 않는 존재임에도 로캉탱이 그들을 기억하고 생각하도록 만든다. '나는 7월의 어떤 날, 어두운 자기 방의 더위 속에서 그것을 작곡한, 저쪽의 그 사나이를 생각하고 있다. 멜로디를 '통해서', 색소폰의 희고 시큼한 소리를 통해서 그에 대한 생각을 하려고 애쓰고 있다.'(p.327)처럼 말이다. 또한 로캉탱은 '그런데 내가 그들을 다정하게 생각하는 만큼 나를 생각해주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아무도.'(p.328)라고 말한다. 작곡가와 가수, 그들은 무의미와 우연성 속에 놓인 존재임에도 자신들의 선택과 행동을 통해 완전한 필연성, 존재 이유를 가진 산물인 재즈곡을 만들어냈고 그 음악은 인간이 존재하는 한 영원히 우연성과 무의미에 속한 것들 사이에서 필연성과 존재의 의미를 가진 음악으로 남을 것이다. 즉, 그들은 우연성 속에 놓인 존재로 태어났지만 필연성과 질서를 가진 산물을 창조해냈고 그로 인해 우연성에서 태어난 그들의 존재가 필연성을 가지도록(존재 이유가 존재하도록) 만든 것이다. 로캉탱은 그 과정에서 '구토'의 극복 방법을 찾아낸다. 로캉탱은 자신의 글 쓰는 능력을 이용해 한 권의 책을 쓰기로 한다. 단 지금까지 쓰던 로르봉 후작의 전기나 역사책이 아닌 소설을 쓰기로 한다. '역사책이 아니다. 왜냐하면 역사는 존재했던 것에 관해서 이야기하기 때문이다-한 존재는 결코 다른 존재의 존재를 정당화할 수 없다.'(p.329)는 이유 때문이다. 로캉탱은 철저히 자신의 의도와 목적으로 만들어진, 완전한 질서와 필연성 속에 놓인 소설을 쓰기로 결심한다. '한 권의 책. 한 권의 소설. 그 소설을 읽고 다음과 같이 말하는 사람이 있으리라. "그것을 쓴 사람은 앙투안 로캉탱이다. 그는 카페에 빈들빈들 드나들던 머리칼이 붉은 놈이었다"라고.'(p.330)라는 문장에서 알 수 있듯이 로캉탱의 손에서 쓰인 한 권의 소설, 즉 로캉탱이 의도한 질서와 필연성 안에 놓인 소설은 영원히 그 존재가 남을 것이고 로캉탱은 영원히 그 존재 이유를 지닌 소설의 창작자로서 의미 없이 우연히 태어난 존재에서 자신의 의미, 존재의 이유를 스스로 만들어 낸 존재가 된다. '구토'는 모든 것들이 존재의 이유가 없는 우연성 아래 놓여 있다는 사실에서 나타나므로 그 우연성을 벗어나 스스로의 선택을 통해 존재의 이유와 의미를 만들어 내는 순간 극복된다. 그런 의미에서 로캉탱은 소설 쓰기를 통해 '구토'를 극복하려 한다. 여기서 주의해야 할 것은 '구토'를 극복하게 만들어주는 것이 재즈곡이 녹음된 CD나 로캉탱이 쓴 소설책 그 자체가 아니라는 것이다. '구토'를 극복하게 만들어주는 것은 CD나 책 같은 사물이 아니라 그 속에 담긴 창작자의 관념, 사상 그리고 창작자가 의도한 질서와 창작 이유, 의미이다. 음악은 음표로 표시된 악보, 혹은 녹음된 CD나 음악 파일로써 현실에 존재하지만 사실 그 속에 담긴 음악은 현실 세계가 아니라 창작자의 머릿속, 그리고 그 음악을 들은 청중들의 기억 속에 남는다. 소설도 마찬가지다. 소설이 쓰인 책이 곧 그 소설인 것이 아니다. 소설의 이야기는 창작자의 머릿속과 독자들의 머릿속에 존재하는 것이지 글자, 혹은 책 그 자체가 소설이 아니다. 악보나 CD, 책이나 글자는 창작자의 관념 속에 존재하는 음악과 이야기, 즉 생각의 산물을 현실의 세계, 존재의 세계에 현존하도록 만들어주는 매개이다. 위에서 말했듯이 원이나 검은 빛깔은 관념의 세계 속에서는 충분히 이치에 맞게, 필연성을 지니며 설명된다. 그러므로 모든 존재하는 것이 우연성 속에 놓인 현실 세계에서, 창작자는 관념 속 필연성을 지닌 어떤 것들(음악, 소설)을 현실 세계에 존재하도록 만듦으로써 필연성을 지닌 존재를 현실 세계, 존재의 세계에 만들어낼 수 있게 된다.  4. <구토> 리뷰를 마치며. 며칠에 걸려서 문헌들과 책을 몇 번씩 들여다보며 썼지만 지금도 제대로 쓴 것인지 걱정이 든다. 사실 <구토>에 대해 얼마나 이해했는지도 의문이다. 절반이나마 제대로 이해하고 썼다면 다행이라고 생각한다. <구토>에 드러난 사상은 현재를 살아가는 많은 이들이 자신의 삶에 적용해볼 만하다고 생각한다. 인간에게 절대적 존재의 이유를 부여하던 신이 과학에 의해 부정당하고 사라진 세상에서 인간은 존재 의미를 찾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해 왔다. 사르트르는 말한다. 인간이 존재하는 이유 따위는 없다고. 인간이 사는 이유는 우연히 태어났기 때문이며 우연히 존재하기 때문이라고. 그렇지만 존재하는 이유가 없으니 살 가치가 없다는 말 따위는 하지 않는다. 로캉탱이 소설을 쓰기로 결심하는 <구토>의 결말은 인간은 우연성 아래서 태어났지만 스스로의 선택을 통해 필연성, 존재의 이유를 만들어낼 수 있음을 시사한다. 자신이 자유롭다는 사실을 외면하고 있지는 않는지, 주변에 자신의 선택에 대한 책임을 떠넘겨버리고 '자기기만'에 빠져 있지는 않는지, 내 삶의 이유, 내 존재의 이유는 무엇인지 <구토>를 통해 깊게 고민해 볼 기회를 갖기를 바란다. 소설 속 한 문장 나는 내가 무슨 짓이든 할 수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