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arang06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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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구 선생을 암살한 살인범의 최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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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두환 노태우도 살아있는뎅 ᆢ 이명박근혜도 살아있는뎅
wensTOP
개멋지네
살인범인데.. 왜 이렇게 멋있지???
참 잘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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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에 포로로 끌려간 내가 일본 주자학의 아버지?
오늘의 주인공은 강항(1576~1618) 임진왜란이라는 대사건 속에서 기구한 삶을 살다 갔지만 알게 모르게 일본에 큰 영향을 끼치고 간 사람이었다 강항은 임진왜란 도중인 1593년에 문과에 급제했고 4년만에 형조 좌랑까지 올랐다 전쟁이 소강상태가 되자 잠시 휴가를 얻어 고향인 영광에 내려와 있었는데 정유재란이 터지는 바람에 휴가가 쫑나고 군량수송임무를 수행했다 강항한테는 비교적 사소하지 않은 문제가 있었는데 당시 수군통제사가 이순신 장군이 아니라 원균이었다는 점. 칠천량 해전 패배의 여파로 일본군의 공세에 직면하게 된 강항은 간신히 영광으로 도망쳐 의병을 모았다 (?? : 님아 ㅈㅅ) 하지만 사방에서 몰아닥치는 일본군의 공세 앞에 의병이 제대로 모일리가 없었고 기껏 모은 한줌의 의병도 도로 흩어졌다 이순신이 수군 통제사로 돌아왔다는 소식을 들은 강항은 이순신에게 가려고 가족들과 배를 타고 가던 중 일본군에게 포로로 잡히게 된다 그리고 강항이 문관 고위직이라는 사실을 알게 된 일본군은 강항을 일본으로 보내버렸다 일본으로 가는 길은 매우 힘들었는데 아들과 딸이 죽었으며 병에 걸린 조카가 일본군에 의해 산채로 수장되기도 했다 강항 본인도 가족들이 죽어나가는걸 보고 자살을 시도했지만 실패했다 처음에는 일본 에미헤현에 감금되었는데 탈출 시도가 적발된 후 수도인 교토로 이송되었다 강항에게는 천만다행인게 교토에는 말이 통하는 지식인들과 접촉할 수 있었다 후지와라 세이카와의 국적을 초월한 만남이 이때 성사된다 강항이 기록한 세이카는 매우 파격적이었는데 '두뇌가 총명하고, 옛글을 잘 쓰며, 책을 많이 읽는 성품이 바른 사람으로 다른 일본인들과는 다르다'라며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세이카는 학구열이 높은 사람으로 성리학을 독학으로 공부하였으나 아직 일본에 성리학이 제대로 전수되지않아 배움에 어려움이 많았는데 조선에서 장원급제한 '성리학 마스터'가 고위직 포로로 끌려왔으니 그야말로 동경하던 아이돌이 옆집에 이사온 꼴이었다 서로 의기투합한 두 사람은 자주 만나며 이야기를 많이 나누었는데 강항은 조선 정부의 시스템과 과거 제도, 여러가지 성리학 해석을 가르쳐주었고 세이카는 승려의 신분을 버리고 유학자로 갈아탔다 강항이 포로 생활로 힘들어할때 세이카는 강항에게 은전을 주어 생활비로 쓰게 하였으며 강항은 세이카에게 사서오경 일본식 해설집을 만들어주기도 했다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죽자 강항이 조선에 돌아갈 수 있게 힘을 써준 것도 세이카였다 임진왜란에서 드물디 드문 국경을 초월한 우정. 1600년 조선 땅을 밟은 강항은 한양에 올라가 일본에 대하여 자세한 보고를 올렸고 기록을 모아 '간양록'을 지었다 이후 벼슬을 버리고 고향에 내려가 후학을 양성하다 1618년 51세의 나이로 사망한다 도쿠가와가 일본을 재통일하고 군사적인 필요가 없어진 사무라이들을 문신으로 바꾸기 위해 유학을 주입하는데 이때 후지와라 세이카를 불러 대학에서 유학을 가르치게 했다 그렇게 일본에 주자학과 성리학이 자리잡게 되었는데 세이카의 제자 하야시 라잔은 도쿠가와의 개인유학 교사인 '시강'이 되었다 100년도 지나지않아 17세기 후반이 되면 조선 주요 수출품에 성리학 서적이 포함되고 조선통신사들이 일본에 오면 일본유학자들이 이들을 잡고 학문과 정치를 논했다 하니 전쟁포로였던 강항이 쏘아올린 작은 공이 마냥 작지만은 않았던거 같다 일본에는 강항 헌창비가 있는데 일본인들이 여기에 '일본 주자학의 아버지, 유학자 강항'이라고 적어놓았다 피를 피로 씻는 임진왜란이었지만 강항과 세이카처럼 동화 같은 이야기도 있었다구.... 강항의 기록에는 재밌는게 많은데 "우리나라 사람들은 조선이 일본보다 크다고 하는데 믿을만한 일본인(세이카)이 보여준 기록을 보니 일본이 우리보다 더 큰거 같아요" "일본 군인들은 수백, 수십년 묵은 오래된 검(원문은 천년, 수백년)은 챙겨가는데 최근 만들어진 검은 안 좋다고 그냥 버려요" "조선에서 돌아온 일본애들이 자기들은 한두걸음 칼싸움을 잘하는데 조선애들은 수백걸음 밖에서 활을 쏴서 힘들었다고 하네요" "일본은 세금을 너무 거두어서 백성들이 힘들어하고, 군인으로 끌려가는 애들은 충성심이 아니라 먹고 살려고 따라다닐 뿐이니 이전에 항복한 왜인들을 잘 품어주었으면 좋았을것 같네요"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출신에 문제가 많고 지식인들 중에서는 알음알음 천하가 뒤집어졌다(신분제가 아작났다)라는 불만이 나오곤 해요" 등등 몇 안되는 고위직 포로의 신분으로 그 당시 일본 상황을 총망라한 보고서여서 당시 일본을 이해하는데 도움이 되는 자료가 많다 (출처) 저게 바로 한류인가 K-성리학
밀양시립박물관을 둘러보다.
각 도시마다 박물관을 운영합니다. 우리나라 111년 기상관측이래 최고의 폭염일에 방문했던 밀양시립박물관.. 밀양 하면 제일 먼저 떠오르는 여행지가 우리나라 3대 루이며 영남의제일루라 일컽는 영남루와 그 주변의 객사,얼음골 정도였었는데요, 이번에 다녀온 밀양시립박물관도 주변분들이라면 다녀오실만 할듯 합니다. 특히나 밀양아리랑대공원 내에 건립되어 있어서 자연과 어린이놀이시설 밀양아트센터등과 함께 둘러보신다면 하루정도 시간을 내어도 좋을듯 합니다. 밀양시립박물관은 2층의 박물관시설과 박물관건물에서 진입이 가능한 독립운동기념관도 둘러볼수 있어서 자녀에겐 역사공부에도 참좋은 그런곳인듯 합니다. 1층은 역사실 2층은 유학ㆍ서화실로 구성이 되어 있으며 각 층마다 작지만 휴게실도 따로 만들어져 있습니다. 1층 역사실은 구석기유적인 밀양 고례리 유적의 설명으로 시작하여 조선시대까의 다양한 유물들로 꾸며처 있습니다. 아랑의전설과 밀양의 다양한 민속속놀이에 대하여 설명이 되어 있습니다. 특히 국가지정 중요무형문화제인 밀양의 백중놀이에 대해서도 알수 있네요. 밀양은 이만여전인 후기 구석기새대부터 사람이 살기 시작했던것 같습니다. 2층의유학ㆍ서화실입니다. 그림과 글에 대한 설명공간 입니다. 인쇄술의 발달과정등을 알수 있는 공간이죠. 목판과 탁본, 금속활자에 대한 내용과 옛조상과 선비들의 그림과 글씨 그리고 문집이 전시되어 져 있네요. 1층로비에서 입장이 가능한 독립운동기념괜입니다. 일제 강점기에 밀양지역의 독립운동가와 독립운동에 대한 내용들로 구성되어져 있습니다.
내 배를 망치는 따개비를 죽인다
뱀코 짤을 보다가 배에 들러붙은 따개비를 보게 되었다 따개비는 게의 친척으로 바위나 뱃바닥에 붙어서 증식하는 아주 무시무시한 생명체로 인간이 처음 배를 띄운 고대부터 오늘날까지 모든 배들의 숙적이 되었다 뱃바닥에 증식한 저 징그러운 따개비들 따개비가 늘어나면 1) 유선형 선체가 뭉개지면서 저항이 높아지고 속력이 느려지며 2) 방치하면 점점 무거워졌다 따개비의 석회질 껍데기는 매우 날카롭고 단단해서 손으로 때어내는게 매우 어려웠으며 배를 뒤집은 다음(?) 불에 지지거나 망치로 때리는 방법을 썼다 큰 항구에 도착하면 이런 대대적인 정비를 한번씩 받고 했는데 쥐를 쓸어버리기위해 배를 아주 침수시켰다가 끌어올리는거랑 따개비 제거하는게 가장 까다로운 작업이었다 항해는 길면 몇 개월이나 걸리는 길고 긴 여정이고 그 동안 한번도 정비를 못 받는 경우로 왕왕 나왔기에 따개비가 들러붙는걸 막기위해 그 비싼 동판을 뱃바닥에 두르는 경우도 있었다 동은 지금도 비싼 금속이므로 이런 고급 처리를 받은 배는 소수였다 요즘은 유독성 페인트를 발라 따개비 증식을 늦추거나(페인트도 항해를 오래하면 독성이 씻겨나가기 때문에 확실한 해결책은 아니었다) 전기 충격으로 조지거나 화학약품을 뿌리는 방법으로 따개비를 제거하고 있다 독성 페인트와 화약약품 처리는 해양오염 문제 때문에 점점 사용이 줄어들고 있다고 한다 역사와 전통의 영길리들은 중죄를 지은 선원을 밧줄에 묶은 다음 뱃바닥을 한번 쓸고가게 하는 형벌을 가했다 이 경우 선원의 등판은 따개비 때문에 너덜너덜해졌으며 운좋게 살아나도 감염 때문에 큰 고생을 했다고 한다 역시 영길리야 대단한 창의력! (출처) ????? 따개비 형벌 미친 거 아니냐며 영길리 창의력은 정말 ㄷㄷ 차라리 형벌로 바닥의 따개비를 떼라고 하지 이거 뭐......
협곡 대신 북촌 선택한 '리그 오브 레전드' 소환사들, '독립운동가의 길' 걷다
데이트코스인 줄 알았던 북촌 한옥마을에 새겨진 '대한 독립 만세' 꿀맛 같은 5월의 주말, '협곡'이나 '나락'을 포기하고 북촌에 모인 '소환사'들이 있습니다. 우리가 흔히 아는, 한복을 입은 연인들이 사진을 찍는 그곳이 맞습니다. 오늘(11일) 서울의 날씨는 27도, 바깥에 가만히 서 있어도 등줄기에 땀이 흐르는 날입니다. 그런데 소환사들은 왜 북촌에 모였을까요? 이들은 라이엇게임즈 코리아가 주관하는 '소환사 문화재지킴이'의 프로그램 '독립운동가의 길'에 참여하기 위해 문밖을 나섰습니다. '독립운동가의 길'은 3.1운동 및 임시정부 100주년을 맞아 신설된 문화 답사 프로그램으로 서울의 옛 골목길을 함께 거닐며 역사문화 유산을 살펴보고, 국가보훈처에서 선정한 12인의 독립운동가에 대해 공부하는 프로그램입니다. 우리가 흔히 데이트코스인 줄 알았던 북촌에는 치열했던 독립운동의 흔적이 살아 숨 쉬고 있었습니다. 게임에서 서로의 안부를 물었을지도 모를 소환사들은 이날만큼은 한뜻이 되어 우리 역사의 발자취를 따라가며 그 의미를 되새기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디스이즈게임도 이 뜻깊은 길을 함께 걸었습니다. 안국역 1번 출구와 2번 출구로 나가기 전에 있는 공간에서 집결했습니다. 안국역은 3.1운동 및 임시정부 수립 100주년을 맞아 새단장했습니다. 왜 안국역이 그 대상이 됐을까요? 출발 전에 코스에 대한 안내를 받습니다. # '한복 데이트코스' 북촌 한옥마을에 숨겨진 사연 북촌은 서울시 종로구 계동과 가회동 일원의 한옥 밀집지역을 뜻합니다. 청계천과 종로의 북쪽 동네라서 북촌이라 불리었으며, 조선시대부터 궁궐이나 육조거리에 오가던 양반들이 모여 살던 곳입니다. 하지만 그때의 북촌은 지금의 북촌과 많이 달랐다고 하는데요. 소환사들은 그 이유를 파헤치는 것으로 탐방을 시작했습니다. 북촌에 가보신 분들은 아시겠지만 북촌의 한옥은 대체로 좁은 마당을 ㄷ자나 ㅁ자 모양의 집이 두르고 있으며 그 크기가 작아서 서로 오밀조밀 붙어있는 편입니다. 그런데 조선시대에 콧바람 꽤나 뀌던 양반이 그렇게 좁은 집에 살 턱이 없습니다. 옛날 북촌에 살던 양반들은 쌀을 놓는 창고도 있었을 테고, 머슴 부릴 공간도 필요했을 것이며, 경우에 따라 넓은 마당에 나무도 심었을 것입니다. 북촌의 한옥은 오밀조밀 붙어있습니다. 이렇게 말이죠. 그러면 오늘날의 한옥 밀집지역은 어떻게 형성된 것일까요? 1920년대 충무로와 명동 일대에는 진흙이 가득 깔려 걷는 사람을 불편하게 했던 고개가 있었습니다. 경성에 들어온 일본인들은 이 고개를 통으로 밀어버리고 이 일대를 일본식 번화가로 만들었습니다. 드라마 미스터선샤인의 칼잡이 구동매가 바로 이 진고개를 근거지로 활동하죠. 우리 땅에 일본식 가옥이 들어서는 것을 안타깝게 본 사람이 있었습니다. 당대 경성을 주름잡던 부동산 거물 기농 정세권 선생입니다. 정세권 선생은 북촌도 진고개처럼 되는 것을 막기 위해 그 일대의 한옥을 모조리 사들여 소규모 한옥으로 개조했습니다. 일본인들이 북촌에 발을 들이게 하지 못하게 하기 위함입니다. 정세권 선생은 부엌과 화장실이 딸린 조그만 개량한옥을 대량으로 공급해 조선인들이 살 집을 확보했습니다. 정세권 선생은 창신동, 서대문, 왕십리, 행당동 등 경성 곳곳에 개량한옥을 지어 조선인에게 보급했습니다. 돈이 없는 조선인 구매자에게는 연부 또는 월부로 집값을 받았다고 합니다. 당시 신문 기록에 따르면, 그가 지은 집만 조선인 주택의 35%에 해당한다고 하니 그 규모는 엄청났죠. 요즘 '핫플레이스'로 뜨는 익선동의 한옥과 한성대입구역 성북동 방면에 남아있는 한옥도 모두 정 선생이 기획한 것입니다. 정세권 선생 어떤 이들은 정세권 선생을 돈벌이에 매진하는 부동산업자라고 매도했지만, 그는 자신이 번 돈의 대부분을 독립운동에 쾌척했습니다. 그는 신간회와 조선물산장려운동에 필요한 활동자금을 마련했으며, 얼마 전 영화 '말모이'로 사람들에게 알려진 조선어학회에 참가해 한글을 지켰습니다. 그는 공간이 필요한 독립운동가들을 위해 회관이나 사무실을 지어 무상으로 넘겨주기도 했습니다.  이러한 활동으로 정세권 선생은 형무소에서 고문을 받았으며, 가지고 있던 땅을 일제에 몰수당하기도 했습니다. 우리가 그저 데이트코스 내지는 관광지로 알고 있던 북촌 한옥마을에는 이런 사연이 숨어있었습니다.  # 신분, 계급, 성별, 종교, 지역을 뛰어넘은 3.1운동, 북촌 곳곳에 살아있는 그 흔적 올해로 100주년을 맞은 3.1운동은 신분, 계급, 성별, 종교, 지역을 뛰어넘어 대한의 독립을 외친 비폭력 불복종 운동으로 대한민국 근현대사뿐만 아니라 20세기 세계사에서도 중요한 위치를 가지고 있습니다. 100년 전, 우리의 독립운동가들은 북촌 인근에서 3.1운동을 준비하고, 기획했습니다. 1919년 춘원 이광수 등 일본 도쿄에 유학하던 학생들은 민족자결주의를 바탕으로 대한의 독립을 요구하는 '2.8 독립 선언'을 발표합니다. 와세다대학에서 공부하던 유학생 송계백은 이 독립 선언의 실행위원으로 1919년 1월 조선에 파견됩니다. 그의 임무는 춘원이 작성한 독립선언서를 인쇄할 활자와 활동 자금을 구하는 것이었습니다. 2.8 독립 선언의 주역들의 모습 송계백은 선언서를 비단조각에 써서 이를 학생복 속에 바늘로 꿰매어 숨기고 국내에 잠입했습니다. 그는 지금도 학생들이 공부를 하고 있는 중앙학교에 찾아가 1년 선배 현상윤에게 독립선언서를 보여주며 거사 계획을 알렸습니다. 크게 감동한 현상윤은 송진우와 최남선에게 이들의 계획을 전파했습니다. 도쿄 유학생들의 거사 계획은 대규모 독립 운동을 조직하던 천도교 계열의 손병희와 최린에게도 알려져 이들을 자극하는 역할을 합니다. 수업 시간에 배우신대로, 2.8 독립 선언이 3.1 운동의 도화선이 된 것입니다. 이후 송계백과 현상윤이 만나 독립운동의 계획을 공유한 것을 기념해 서울 중앙고등학교에는 기념관이 남아있습니다. 중앙고등학교의 전신인 중앙고보 학생들은 3.1운동의 선두에 서기도 했습니다. 북촌 중앙고등학교의 삼일기념관. 당시 거사를 논의하던 숙직실의 모습을 재현한 것입니다. 천도교의 손병희는 다른 종교 지도자들과 '우리도 3월 1일에 파고다공원에서 독립선언문을 낭독하자'는 거사를 논의했습니다. 개신교의 남강 이승훈과 불교의 만해 한용운이 계획에 동참했습니다. 종교 지도자들은 중앙고보의 설립자인 인촌 김성수의 집에서 주로 회합을 가졌습니다. 그의 집은 학교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있었습니다. 당시 불교 잡지 '유심'을 발간하던 만해는 잡지 사무실이자 본인의 거처인 '유심사'에서 동국대학교의 전신인 중앙학림 학생들과 독립운동 계획을 나눴습니다. 3.1운동 당시 불교계 독립운동의 주요 거점인 유심사 역시 인촌의 집에서 멀지 않은 곳에 있습니다. 유심사가 있던 곳은 현재 게스트하우스로 운영되고 있습니다. 인촌선생고당 유심사 앞에서 만해에 대한 설명을 듣고 있는 소환사들 # 오늘 밟은 발도장 오래도록 기억하자 의미 담아 전각 도장 새겨 북촌의 골목 골목을 탐험하며 독립운동의 족적을 따라간 서른 명의 소환사들은 세종대왕 시대의 청백리로 유명한 고불 맹사성의 집터에 위치한 전망대에서 목을 축인 뒤, 그 아래 북촌동양문화박물관의 고불서당에서 오늘 밟은 발도장를 오래도록 기억하자는 뜻을 담아 전각 도장을 새겼습니다. <리그 오브 레전드> 로그인 화면에 나오는 '문화재지킴이' 공지를 보고 덜컥 프로그램 참가를 신청했다는 최승옥 씨는 "대학교 1학년 때는 관광지인 줄 알고 왔는데 이렇게 뜻깊은 이력이 담겨있는 곳이라니 놀랐다"라며 자신의 소감을 전했습니다. "전부 <롤> 하는 사람일 텐데, 이 사람들 티어는 어느 정도일지 궁금하다"고 이야기하기도 했습니다. 오늘 프로그램에서 처음 만나 함께 이야기를 나누며 돌아다녔다는 윤철희 씨와 김태진 씨는 묵묵히 도장을 파면서 기자에게 "재밌다"라며 앞으로도 문화재지킴이 프로그램을 한다면 또 참가할 의향이 있다고 밝혔습니다. "좋아하는 게임을 만드는 회사가 좋은 일 한다고 해서 왔다"는 김희정 씨 역시 앞으로도 긍정적으로 문화재지킴이 프로그램을 지켜보겠다고 말했습니다. 실제로 2016년에 문화재지킴이 프로그램에 참가한 이력이 있는 한 커플은 "예전에 북촌에서 데이트를 한 적 있는데, 그때는 안 보인 것들을 볼 수 있어 뜻깊다", "개인적으로 왔으면 잘 몰랐을 텐데 이 프로그램을 통해 우리의 역사를 되돌아볼 수 있어 좋았다"라고 전했습니다. 
전문가가 대한민국 국보 중의 국보 중의 국보라고 하는 문화재.jpg
다른 사람도 아니고 관련 전문가가 국보 중의 국보 중의 국보라고 하는 유물. 과장이나 호들갑이 아니라 진짜 원 오브 카인드라 말하는 유물이란 무엇일까. 그것을 알려면 1993년으로 돌아가야 함. 1993년 부여 능산리 문화재가 가장 없을 만한 곳에 주차장 짓기로 결정 주변 다 파보고 검사했는데 없어서 승인됨. 발굴단 중 한 명이 아무래도 느낌이 이상함. 한번만 더 파보자라고 공무원에게 필사적으로 요청함. 원래 규정되면 이미 승인되서 윗사람들까지 결재 땅땅 받은 거라 NO인데 갑자기 우주의 기운이 이상하게 몰렸는지 당시 부여군청 문화재관리국 기념물과 담당자가 오케이 해봅시다! 이러고 무리해서 예산까지 따로 때줌. 그리고 땅을 파보는데.. 갑자기 진흙 속에서 이게 나옴 전에 이런 유사한게 한번도 없어서 발굴 당시에 뭔지 아무도 모름 보름동안 유물처리 끝에 발굴단은 엄청나게 경악함. 백제 금동 대향로 무려 1300년전 향로가 완벽한 형태로 보존된 유물인 것. 1300여 년을 당 속에 있었지마 진흙이 완벽한 진공상태를 만들어줘 녹이 슨 흔적조차 없었다. 당시 학자는 이 유물 하나가 무령왕릉 발굴 전체와 맞먹는 고고학적 대발견이다 할 정도 당나라에 의해서 사비 백제가 멸망할 때 이름 없는 한 명의 백제인이 목숨을 걸고 보물을 보호하다, 진흙 속에 파 묻은 것이라 한다. 이것이 천년이 지나 우연하게, 그것도 완벽하게 보존된 상태로 후손에게 발견된 것. 수은과 금을 이용한 도금법인 ‘수은아말감법’을 사용했는데, 이는 서양보다 천년이나 앞선 기술이었음. 정밀하고 화려한 백제 문화재 중에서도 초초초초고난이도의 작품으로, 동시대에도 견줄만한 작품이 없음. 이것을 만든 사람은 삼한 중에서도 미켈란젤로에 해당하는 초특급 천재일 것으로 추정. 1300년전 유물이 어디 손상된 곳없이 완벽하게 보존된 지금의 자태를 보노라면 나라가 멸망하고 온 도시가 불타고 사람들이 죽느 ㄴ와중에 무명의 한 백제인이 왜 목숨을 걸고 이것을 보호하여 진흙속에 파 묻었는지 알 것 같음. 정말 우연의 우연의 우연의 연속과 행운이 겹쳐서 발견된 유물. 발견될 때 섬유 조각과 흔적이 발견되었는데, 금동대향로를 감싸서 묻은 흔적이라 추정된답니다. 즉 우연하게 던져졌거나 난리중에 떨어져 간게 아니라 누군가 의도적으로 파묻어 숨겨둔 것. 현재로 소개할 때 학자가 국보중의 국보중의 국보라고 말하는 그것. 백제 금동대향로. 출처 도탁스 향피우는 장면도 추가해봅니다. 정말 예술이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