Voyo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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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미가 느껴지는 조선왕들의 일화 (꿀잼 시간순삭)


왕이라는게 진짜 준니 하드코어하구나.. 를 느낀 일화들
잼나는 것도 있고 안타깝고 씅나는 내용도 있고 재밌어서 퍼옴 ㅇㅇ
어진을 찾을 수 없는 왕들은 걍 뭐 대충,, 상상의 나래를 펼쳐보자



태종


1. 직업정신 투철한 사관이 따라다니며 일 거수 일 투족을 다 기록해서 태종이 걷다 헛발질한 것도 적었다.
태종이 그건 제발 지워달라, 창피하다 애원까지 했는데도 사관은 끝까지 '왕이 길을 걷다 헛발질하다. 헛발질한 것을 적지 말라고 말한 것은 적지 말라 명하셨다' 라고 적었다.


2. 하도 사관이 쫓아다녀서 못 쫓아오게 멀리까지 사냥을 나갔는데 사관이 거기까지 말 타고 쫓아와 사냥기록을 적었다고 한다.


3. 태종은 아들 양녕대군이 너무 사고를 치고 돌아다니자 속이 상해 밤새 울어 목이 쉰 적도 있다고 한다.
그런데 더 재미있는 점은 양녕대군의 아들인 이혜는 아버지인 양녕대군보다 더 많은 사고를 쳐 양녕대군의 속을 썩혔고 결국 왕자의 아들의 직위인 '군'의 작위를 깎여 서산군에서 서산윤으로 강등당했다. 결국 이혜는 스스로 목숨을 끊기 위해 자살시도를 하였고 이틀 뒤 후유증으로 사망하였다.

(이혜는 사람을 때려 죽이라고 시키기도 하였고 직접 사람을 죽이기도 하였으며 남의 첩을 빼앗기도 하고 시전에서 종친들과 패싸움을 하였고 과격한 놀이판을 벌이다 놀이 중 사람이 죽어나가게 하기도 하였다. 실록에서는 이혜가 망가진 원인을 사랑했던 첩을 아버지에게 빼앗기고 난 후에 울화병이 생겨 이리 되었다고 한다.)


4.태종은 운명론자가 아닌 현실론자였는데 태종이 세종에게 양위한 어느날은 우연히 하급관리 두명의 토론을 듣게 되었다.
한명은 부귀영화는 모두 임금에게서 나오는것이라고 하였고 도 한명은 하늘이 정하는 것이라고 하였다.
현실론자였던 태종은 부귀영화가 임금에게 나온다고 주장하는 사람에게 한품계를 올려주려 하려고
그 관리에게 '지금 가는 아무개에게 한 품계를 올려주도록 하시오'라는 종이를 세종에게 전해주라고 하였다.
그러나 그 관리는 갑작스러운 복통으로 운명론자인 관리에게 대신 종이를 전해주라 하였고 결국은 그 관리가 진급을 하였다.


5. 조선왕들중 가장 많은 자식을 가진 왕으로 12남 17녀, 29명의 자식을 가졌다.






세종


1. 세종대왕은 좋아하던 후궁에게 신하들 몰래 따로 불러서 말없이 귤 하나를 쑥- 내밀어 준 얘기도 있다. (그 당시 귤이 귀한 것이었다.)


2. 친경한다고, 소 끌고 밭 갈다가 갑자기 비가 내리자 배고픔을 못 견뎌, 밭 갈던 소를 때려잡아서 국 끓여 먹은 적도...


3. 명재상 황희는 청백리가 되고 싶어서 된 게 아니었다.
임금이 사람을 붙여 철저하게 감시하고 너무도 기분 나쁘게 점검하는 바람에 ‘내참 더러워서 뇌물 먹지 않으리라’ 결심한 케이스다.


4. 훈민정음 반포식을 축하하는 잔치 행사에는 집현전 학사 절반이 참석하지 못했다.
대부분이 살인적인 과중한 업무와 임금의 요구사항에 시달리다 못 견뎌 병석에 누운 탓이었다.
성군의 캐치프레이즈는 “신하가 고달파야 백성이 편안하다”였다.


5. 세종은 부하들을 휘몰아치는데 도가 튼 인물이었다.
아침 조회 격인 새벽 4시 상참에서부터 과업 달성이 부진한 부하들을 닦달하였다.
밤낮으로 시달리다 못한 김종서의 경우 임금 곁에 있다가는 제명에 못살 것 같아, 스스로 궁궐을 떠나 삭풍이 몰아치는 북방을 개척하겠다고 손을 들고 나섰다.
정인지는 임금이 너무 독촉하고 소위 ‘갈궈 대는’ 바람에 모친 3년 상을 핑계로 상소를 올리고 낙향하려 했으나, 임금은 법령까지 바꿔서 그를 다시 붙잡아다 오히려 일을 더 시켰다.


6. 양녕대군이 평안도를 유람하게 되어 세종은 형인 양녕대군에게 ‘제발 여색을 조심하라’고 당부한다.
몰래 평안도 관찰사에게 명하기를 “만일 양녕대군이 기생을 가까이하거든 즉시 그 기생을 역마에 태워 서울로 올려 보내라” 라고 하였다.

양녕은 세종과의 약속도 있고 하여 가는곳마다 기생의 수청을 물리치고 근신하였으나, 그가 평안북도 정주에 이르렀을 때 그만 양녕의 마음을 사로잡는 절세의 미인이 나타났다.
양녕은 그날로 동침하고 귀신도 모르리라 자신했다.
그래서 시를 지어 하룻밤 풋사랑을 읊기를 “아무리 달이 밝다하나 우리 두사람의 베게를 들여다 보진 못할것이다. 그런데 바람은 어이해서 신방을 가린 엷은 휘장을 걷어 올리는가” 라 하였다.

그러나 이튿날 정주수령은 이 기생을 역마에 태워서 서울로 보냈다.
세종이 기생에게 명하기를 “너는 양녕대군이 읊은 시를 노래로 불러 익혀두라” 하였다.

양녕은 이런 사실도 모르고 유유히 서울로 돌아와 세종을 알현하였다.

세종: 잘 다녀오셨습니까. 제가 신신 당부한 말씀을 잘 지켜주셨는지요?
양녕: 물론입니다. 어찌 어명을 어기겠습니까? 한 번도 여색을 가까이 한 일 없습니다.
세종: 얼마나 수고가 많으셨습니까. 제가 형님의 노고를 덜어 드리고자 가무를 준비하였습니다.

양녕은 기생이 나와 노래하는 것을 보고 처음에는 누군지 몰랐다.
그런데 가사를 들어보니 자신이 지은 시구가 아닌가. 깜짝 놀란 양녕은 그 자리에서 땅에 엎드려 용서를 빌었다.
세종을 웃으며 뜰에 내려와 형님의 손을 잡고 위로하면서 그날 밤 그 기생을 양녕댁에 보냈다.


7.양녕대군과 세종은 원래 우애가 깊지 않았다. 태종은 양녕과 효령과는 별로 친하게 지내지 않았지만 유독 충녕, 즉 세종을 편애 하였다. 게다가 세종은 알려진것과 같이 머리가 아주 좋았고 공부를 좋아했다.
태종이 충녕에게 나중에 '너는 할일이 없으니 놀아라'라고 하며 글씨,그림, 비파등을 마련해준 때가 있었다.
그 때 양녕은 충녕에게 비파를 배우며 서로 친해졌고 다른 면에서 보면 자신의 경쟁자였던 충녕이 공부를 포기 했기 때문에 위기의식을 느끼지 않았기 때문일것이다. 그 후로는 양녕대군도 공부에 열심이었다.
그러나 세종은 비파, 글씨 등에 관심이 있지 않았고 언젠가부터 다시 학문에 관심을 가지고 양녕에게 많은 충고를 하였다. 양녕은 열등감으로 인해 방황하였고 다시 비행에 빠져들게 되어, 결국 세자 자리에서 쫓겨나게 되었고 그 자리는 세종이 차지하게 됬다.


8. 나라에 큰 일이 있어, 모두 고기를 먹지 않는 기간이었다.
태종은 특별히 세종에게는 삼시 세끼 고기를 챙겨먹도록 하였는데… 그것은 충녕(세종)이 고기가 없으면 밥을 먹지 않았기 때문이다.






문종


1. 수염이 매우 풍성하여 관운장과 같은 풍모를 냈었고, 얼굴 또한 매우 잘생겼다고 전해진다.
임진왜란 이후 폐허가 된 궁을 정리하는데 타다 남은 왕의 어진이 한 장 나왔다.
수염이 길고, 풍채도 당당하여 신하들은 인종의 어진이라고 생각했지만, 한 사람만은 수염이 길다는 말만 듣고 문종의 어진이라고 주장했다.
나중에 어진을 조사하다가 보니 어진 구석에 문종대왕의 어진이라는 기록이 나왔다고 한다.


2. 학식, 외모 모든 것이 완벽했다. 그에게 부족한 것은 단 하나.. 건강






세조


1. 술 먹고 신하 팔 꼬집고 신하한테 '너도 나 꼬집어라' 라고 시키자 신하는 세조를 꼬집었다. 그 뒤 자기 혼자 열 받아서 혼내주려다 그냥 넘어갔다.
+세조의 팔을 꼬집은 것은 신숙주다.
정확히 말하면 꼬집은 게 아니라 팔씨름하다가 세조의 팔을 두 손으로 넘겼다.
그래서 세조가 신숙주 죽이려고 했다가, 술 취한 것을 감안하여 넘어갔다.


2. 세조는 후궁이 단 한 명뿐이고 평생 중전인 정희왕후와 금슬이 좋았는데, 국사를 논할 때도, 국가의 모든 행사에도 꼭 정희왕후를 대동했으며 사냥을 할 때도 둘이 나란히 말을 타고 사냥에 나갔다.


3. 신숙주가 영의정었을 때 구치관이라는 사람이 좌의정이 됐다.
이때 세조가 신숙주하고 구치관을 불러서 "내 오늘 경들에게 질문을 할 테니 대답을 잘 못하면 벌을 줄 것이요"라고 하였다.
그리고 세조가 "신 정승!"하고 부르니까 신숙주가 대답했는데 세조가 "나는 새로 된 정승을 불렀는데 경은 대답을 잘못했소"하면서 벌주를 먹였다.

그리고 "구 정승!"하고 부르니까 구치관이 대답하니 그리고는 "나는 옛 정승을 불렀는데 경은 대답을 잘못했소"하면서 구치관한테도 벌주를 먹였다.

그러고 다시 "구 정승!"하고 부르니까 이번에는 신숙주가 대답했다.
근데 이번에는 "나는 성을 불렀는데 경이 대답을 잘 못하는구료" 하면서 또 벌주를 먹였다.
그러고서 또 "신 정승!"하니까 구치관이 대답하는데 구치관한테도 "나는 성을 불렀는데 경은 잘못 대답하였소" 하고 벌주를 먹였다.

그러다가 이번에는 "신 정승! 구 정승!" 하고 부르니까 둘다 대답을 하지 않았다.

그러니까 임금이 부르는데 신하가 대답을 안하는건 예의가 아니라면서 또 벌주를 먹였다고 한다.








성종


성종은 후추 중개무역으로 돈을 벌기 위해 후추 씨앗을 구하려고 백방으로 알아보았지만 결국 후추는 구하지 못 하고 주변국에 성종이 후추를 좋아한다는 소문이 나 계속해서 조공으로 후추가 들어오는 바람에 창고에 후추가 가득히 쌓여, 예쁜 비단 주머니에 담아 조정 관리들에게 다 하사하였다.







연산군


1. 성종과 연산군이 오랜만에 밖에 바람 쐬러 나와서 성종이 ‘융아, 좋지 않으냐?’ 하니 연산군이 소떼를 보며 ‘아바마마 저 송아지도 어미 소가 있는데 저는 왜 어미가 없습니까’ 라고 말했다.


2. 또 다른 야사에서는 연산이 동궁이었을 때 어느 날 성종에게 거리에서 나가 놀고 싶다고 하여 성종이 허락하였다.
저녁에 동궁이 궁궐로 돌아오자 성종이 “오늘은 밖에서 무엇을 보았느냐?” 하고 묻자 연산은 “구경할만한 것을 없었습니다. 다만 송아지 한 마리가 어미 소를 따라가는데 그 어미 소가 울면 송아지도 따라 우니 그것이 가장 부러운 일이었습니다.” 하여 성종이 가여워 눈물을 흘렸다는 일화가 전해짐.


3. 공부하는 걸 엄청 싫어하여, 왕자를 훈육하는 학자들이 엄청 고생을 했다고 한다.
매일 꾸중 듣고 야단맞아, 폐비 윤씨 사건이 일어났을 때 모두 죽여버렸다.


4. 춤을 잘 췄다고 한다.


5. 모후인 폐비 윤씨와 고려 공민왕의 비인 노국대장공주의 얼굴이 비슷하게 생겼다는 이유로 관공서에 노국대장공주의 초상화를 수집하게 한 일도 있었다.


6. 엄청난 꽃미남이었다고 한다.


++ 보너스
연산군에 대한 잘못된 사실들

연산군이 정치를 잘 하지 못하고 폭군의 모습을 다소 보인점은 사실이지만, 몇가지 왜곡된 사실들이 있다.

1.연산군은 궁궐 담장 아래 백척 내에 있는 민가들을 철거하여 쫓아냈다.
- 하지만 이것은 원래 불법주택들이였다. 선왕, 후궁들의 모습이 민간에 노출되어서는 안된다는 법도에 의한 것들이였다. 그러나 연산군은 오히려 봄까지 기다려주고 주택의 등급을 나눠 무명을 보상으로 주고 대토 와 거주지까지 마련해 주었다


2.궁을 짓기 위해 열한 고을의 백성들을 내쫓았다
- 백성들을 내쫓은것은 사실이지만 그 수는 500여호에 불과했고 열한고을은 사관이 의도적으로 과장해서 쓴것이다. 또 지나가는 자는 죽여서 시신을 구경시키는 형을 내린다고 했으나 무덤이 있는 자들에게 명절 출입을 허가했으며 불법주택에도 보상을 해준 연산군이 보상을 안해줬을 가능성은 적다. 게다가 궁은 큰집 50칸으로 몇몇 사대부들의 99칸 집들보다도 작은 크기였다.


3.연산군은 음란했다.
-연산군이 비구니를 간음했다는 일화가 있다. 그러나 연산군은 기생의 출입도 소문이 두려워 꺼렸던 인물인데 늙은 비구니를 몽둥이로 쫓고 젊은 비구니들을 간음했다는것은 말이 맞이 않는다.
-연산군이 여성 음악인들을 혼음했다는 이야기가 있다. 그러나 연산군에게 그들을 예술가들였을뿐이며 오히려 여성 음악인들은 사대부들에겐 첩을 들이는 통로였다. 사대부들은 연산군에게 연산군이 남성음악인들만 잔치때 내려주자 불만을 갖고 여성음악인들 을 내려달라는 주장을 하기도 했다.
- 좋은 왕으로 묘사되는 성종은 16남 21녀를 가졌으나 그의 아들 연산군은 4남3녀만을 두었다.
- 연산군이 백모인 월산대군 부인 박씨를 강간했다는 주장이 있다. 그리고 그녀가 죽자 임신을하고 약을 먹고 죽었다고 하였다. 그러나 그녀의 나이를 추측해보면 그 때는 이미 쉰세살에서 쉰다섯으로 당시에 그나이엔 잉태가 불가능했다.


4.정치는 하지않고 사냥을 즐겼다
-연산군은 군사력 강화를 원했던 왕이다. 연산군 5년 여진족이 백성들을 사로잡자 연산군은 정벌에 나서려 했으나 그때마다 신하들은 반대했다. 그 이유는 그들의 노비들이 부역에 나가는것을 원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사냥은 군사력 강화를 위했던것이고 이것이 신하들의 반대로 무산된 결과가 임진왜란이다.


5.폐비 윤씨사건으로 폭군이 되었다
- 완전히 틀린말은 아니지만 연관인들의 처형은 신하들을 무력화 시키려는 의도였기도 하다. 그러나 훈구파를 무너트렸으면 사림을 불러들였어야 하는데 사림들조차 적으로 만들었으니 그를 보호할 사람은 없었다. 결국 연산군은 백성들에게는 폭군은 아니였지만 모든 사대부들에게는 적이였다. 그 결과 사관들에 의해 폭군으로 기록되었으며 그 기록이 지금까지 많은 사람들에게 믿어지고 있다.






명종


1. 다른 사람들은 다 물러가 있거라 하고 노래 잘 부르는 내관이랑 둘이서 내관은 노래 부르게 하고 명종은 그에 맞게 춤추며 2인조 가수 못지 않게 퍼포먼스를 선보였다.


2. 꾀병 부려서 총애하는 내관의 극진한 간호를 받았다.


3. 위의 내관은 동일인물로 남자이다.


4. 내시와 있는 시간이 너무 좋았던 명종은 몸이 아프다고 꾀병을 부려 경연을 취소하고 내관들과 놀러 다니기 일쑤였다.


5.조울증을 가지고 있었다.
명종에게는 손빈이라는 총애하는 환관이 있었는데, 그에게 집과 많은 값비싼것을 하사했으면 원하는것들은 모든지 들어줬다고 하였다. 그러나 그는 장령을 만났을때 말에서 내리지 않았다는 사소한 이유로 명종으로부터 모든 재산을 몰수당하고 벼슬길도 막혔다.
명종의 조울증에 관환 일화는 이밖에도 많으며 아침에 파면했다가 저녁에 회복시켜주는 일들도 많았다.






중종


1. 자식 사랑이 남달라서 공주, 옹주랑 왕자들이 오랜만에 문안 오면 눈물을 흘리며 버선발로 뛰어나갔다.


2. 또 중종은 동궁 전에서 불이 나자 맨발로 달려 나와 훗날의 인종을 애타게 부르며 울었다.


3. 또한 효정옹주의 남편(부마)가 바람을 피우고 다니자 철거지악이었던 질투를 하지 않는다고 딸을 꾸짖은 적도 있었다. 결국 효정옹주가 남편의 구박을 견디지 못 하고 죽자 직접 부마를 잡아와 친국을 하기도 했다.


4.연산군을 폐위할 때, 중종을 보호하려 군사들이 오자 중종은 자기를 잡으러 온줄 알고 놀라서 자결 하려고 했다. 다행히도 그의 부인 신씨가 말려서 중종은 살아서 왕이 되었다.


5. 중종이 연산군 폐위후 왕위에 즉위했을때, 위에서 말한 신씨는 당연히 왕비책봉이 될 줄 알았다.
그러나 반정때 그녀의 아버지 신수근을 죽였는데 보복이 올줄도 모른다는 이유로 조강지처였던
신씨를 중종은 '조강지처'라는 말 한마디의 저항을 딱 한번 하고는 출궁시켰다.

중종 11년 3월 28일,ㅡ 그는 고려사를 공부하게 되었다. 그가 배운 부분은 최충헌 최충수가 명종을 폐위하고 신종을 옹립하는 부분이였다. 최충수는 배필이 있던 태자에게 자신의 딸을 태자비로 들이려고 신종을 협박했다. 신종은 완강하게 저항했지만 결국 눈물을 흘리며 태자비를 폐출시켰다.
이 부분을 읽으며 중종은 울먹거리며 책을 제대로 읽지도 못했다고 한다.






인종


인종은 모후인 장경왕후가 자신을 낳고 7일만에 죽자 중종의 계비인 문정왕후의 손에 자란다.
하지만 문정왕후는 어린 인종을 끈임 없이 못살게 굴었다.

하루는 밤에 쥐의 꼬리에 불을 붙이고 인종이 잠을 자고 있는 궁 안에 들여 보냈다.
인종이 창문을 보니 문정왕후가 웃으며 빨리 불이 타오르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하지만 빈궁만 내보내고 자신은 문정왕후에게 효를 행하기 위해 불 속에서 죽으려 했다.
빈궁과 인종이 어쩔 수 없이 불을 바라보며 울고 있는 그때, 밖에서 중종의 목소리가 들렸다.
인종은 죽는 것이 문정왕후에게는 효가 되지만 중종에게는 불효가 되므로 곧바로 나왔다.
그 후 인종은 불을 지른 장본인을 알고 있으면서도 중종에게 고하지 않았다.








선조


1.임진왜란 이후 선조는 의주까지 도망을 하는데, 의주에서 어느 백성에게 생선이 올려진 상을 접대 받았다.
그 생선이 너무 맛있어서 인조가 생선의 이름을 묻자, 백성은 '묵'이라 대답하였다. 선조는 생선의 이름이 그 맛에 비해 별볼일 없다 생각하여 '은어'라 명했다.
나중에 궁에 돌아와 그 생선을 먹었으나.. 맛이 전 같이 않아 '도로 묵'이라 하게 하였는데, 바로 여기서 '말짱 도루묵'이라는 말이 생겨났다.

2. 임진왜란 당시 일본군이 파죽지세로 평양까지 밀어오는 바람에 의주로 도망하였으나 그에 만족하지 않고 명에 혼자 도망가기 위해 망명을 요청하였다.
명은 일국의 왕이 백성들을 버리고 어찌 그럴 수 있냐며 거절하지만 그에 굴하지 않고 계속적으로 명에 끊임없이 압록강을 건너겠다고 시위를 했다.
결국 명은 그렇게 오고싶으면 개처럼 네발로 기어서 북경까지 건너오라고 무안을 줬고 선조는 그제서야 망명을 포기했다. 이후 이여송이 이끄는 명 지원군이 선조앞에 도착했고 이여송은 선조가 보는 앞에서 조선의 대신들의 싸대기를 후려치면서 어찌 나라를 이지경까지 만들었냐며 타박을 주었으나 선조는 아무말도 못하였다.






광해군


선조가 세자를 가리기 위해 여러 왕자를 시험하였는데 “반찬을 만드는 것 중 무엇이 제일이냐?”라는 질문에 광해군이 “소금이옵니다” 라고 대답하였다.
임금이 그 이유를 묻자 “여러 가지 맛을 조화시키려면 소금이 아니면 안 됩니다.” 라고 답하여 그 현명함을 인정받았다.
이에 선조가 “너희에게 부족한 것이 있느냐?” 라고 묻자, 광해군은 “어머니가 일찍 돌아가신 것이 가장 애통하옵니다” 라고 답하였다.






효종


1.나르시즘에 빠져, 항상 거울을 볼 땐 스스로 만족에 차 웃음이 끊이질 않았다고 한다.

2.효종의 얼굴에 난 종기의 치료를 놓고 침으로 피를 빼내어 독기를 제거하자는 신가귀와 그에 반대하는 유후성이 싸웠다. 이에 왕이 가귀의 의견을 취하여 침을 놓았는데, 침구멍에서 피가 쏟아져 왕이 "이제 정신이 좀 든다. 가귀가 아니면 큰일날 뻔했다"라고 말했는데 침이 혈락(血絡)을 범하여 과다출혈로 사망. 어의 가귀는 조사결과 수전증 있는걸로 밝혀졌다.





현종


유일하게 후궁을 두지 않은 왕이다.






숙종


1.신하들이 따뜻한 온돌방에서 꾸벅꾸벅 졸자 온돌을 빼버리고 얼음장에서 일하게 하였다.


2.관우의 팬이였다고 한다.






인조


1.소현세자는 손톱밑이 시커멓게 변하고 얼굴은 검게 변하며 죽었다. 전혀 확인되지 않은 병이었다.
독살이라는 소문은 퍼져나갔지만 인조는 이것에 대한 조사를 피하려 했으며 어의를 처벌하지도 않았다.


2.자신의 몸과 봉림대군의 몸이 아프자, 소현세자의 아내가 저주를 내려서 아프다고 하여 사약을 내리고 가족들을 모두 죽였다.
소현세자를 죽일 때 11살과 6살이던 아들들도 다 죽이고 임신했던 세자빈까지 죽였다.






영조


1.연애소설을 좋아하여 가끔 자신의 글에서도 소설을 인용하기도 하였다.
성품이 근검하여 백성들에게 사치를 금하라는 뜻으로 금주령을 내리기도 하였다.


2. 영조의 어진에 나와있는 쌍꺼풀지고 길쭉한 눈과 오뚝한 코에 조그마한 입술은 조선의 남성들이 추구하는 최고의 미인상이었다. 왕실에서는 이런 외모를 천하다 하여 기피하였으나, 영조의 어머니 숙빈 최씨가 양반 사대부가 출신이 아닌 무수리 출신에서 정1품 빈까지 신분상승 한 것을 감안할 때, 숙빈 최씨는 굉장한 미인이지 않았을까.


3. 영조가 왕위에 등극하기 전, 연잉군이었던 시절, 달성 서씨 집안의 규수(정성왕후)를 아내로 맞이하여 첫날밤을 치를 때의 일이다.
영조가 아내의 손을 잡고 ‘손이 참으로 곱다.’ 면 서 칭찬을 하자, 연잉군부인이 무심코 ‘궂은 일을 해본 적이 없어 그렇다’고 했더니 영조가 그날로 부인을 소박하며 그 다음부터는 멀리하였다.
아마, 무수리로 고생했던 어머니의 거친 손과 발을 생각한 게 아닌가 싶다.


4. 영조의 계비인 정순왕후가 간택에서 아버지의 이름이 쓰인 방석에 앉지 않자, 그 이유를 물으니 “자식이 어찌 아버지의 존함이 쓰인 방석을 깔고 앉겠습니까." 라고 답하였다고 한다.
또 ‘고개 중에는 어떤 고개가 제일 넘기 힘드냐’ 묻자, 강원도에서 온 규수가 대관령고개라 답하고 경상도에서 온 규수가 추풍령고개라 답하였다. 헌데 김규수는 보릿고개라 대답하였다.

보릿고개라! 겨울 양식이 봄이 되자 다 떨어지고 그렇다고 햇보리는 아직 나오지 아니한 때 세끼, 아니 두 끼, 심지어 한끼를 채우기가 그 얼마나 난감한가.
이것이 보릿고개인데 김규수가 넘기 힘든 고개가 바로 보릿고개라 하니 얼마나 명답인가!

다음으로 꽃 중에 제일인 꽃을 묻자, 김규수는 목화 꽃이 제일이라 답하였다.
이유를 물으니, “목화 꽃이 다른 꽃들보다 화려하지도 예쁘지도 않지만, 핀 연후 사람에게 혜택을 주는 면에서는 다른 꽃이 따라올 수 없을 정도로 유익한 꽃이니, 바로 목화가 백성의 옷감이 되어서 예절도 지키고 품격도 살리고 추울 때 보호하여 주기 때문입니다.” 라고 답하였다.






정조


1. 정조가 말하길, “매양 취침하기 전에 두 발바닥의 가운데를 마주 문질러 비비면 기운이 절로 퍼진다. 내가 밤마다 시험해 보았는데, 처음에는 힘이 드는 듯 했으나 오래도록 계속 했더니 신통한 효험이 있다.”


2. 연애소설을 비롯한 소설을 무척 싫어하여 영조가 죽고 왕이 되자마자 서고에 있던 모든 소설을 불태웠다. 또한 숙직을 하던 규장각 학자들이 몰래 연애소설을 읽고 있다 들켜서 정조에게 혼이 났고 벼슬을 삭탈했다.
그들은 정조에게 다시는 소설을 안 보겠다는 반성문을 쓰고 나서야 벼슬길을 다시 열어주었다.


3. 영조는 근검하여 백성이 먹을 쌀이 없어진다는 이유로 금주령을 내렸지만
정조는 개인적으로 술을 너무 좋아해서 영조가 죽고 왕이 되자마자 금주령을 없앴다.


4. 공부 못하는 신하한테 공부하라고 끈임 없이 시키며, 숙제를 내고 제대로 하지 못하면 망신을 주고 술을 마시지 못하는 신하에게 술을 강요하여 기절할 때까지 마시게 하고, 활을 못 쏘는 신하에게 끊임 없이 연습을 시켰다고 한다.


5. 술을 무진장 좋아하여, 정약용에게 필통에 술 한가 득 부어 원샷! 하기를 강요하여 정약용은 술을 싫어했다고 한다. 그때 당시 필통에 술 붓기라면, 요즘 사발에 소주를 들이붓는 거와 맞먹는다고 한다.


6. 정조 20년, 이정용이라는 유생이 술에취해 늦은밤 궁궐 담장 아래에서 잠에 들었다 잡혀간적이 있었다.
그러나 술을 좋아했던 정조는 요즘 유생들은 술을 잘 마시지 않는데 술을 좋아한다고 칭찬을하였다.
그리고 많은 유생들이 숙박하던 잡촌과 집춘영은 벽을 맞대고 있으니 이정용은 잡촌에서 잤던거라는 궤변을 펼쳐서 오히려 상까지 주어서 보냈다.






헌종


1. 이 헌종이 그렇게 미남이었다고 한다.
기록을 보면 여색을 즐기는 왕 때문에 궁궐 내 용모가 예쁘다고 하는 궁녀들은 거의 승은을 입었다고 한다.
(덕분에 후궁첩지도 아무나 내리지 못했음. 딸을 낳은 궁인 김씨도 첩지를 받지 못했다.)
왕 자체가 너무 미남이라 젊은 궁인들이 참 많이 유혹을 했다고 한다.
하지만 너무 어린 나이부터 가진 잦은 성관계 때문에 건강이 악화되어 죽기 직전에는 피가래까지 토하며 고생하다가 23살이라는 어린 나이에 요절한다. 궁녀들이 유혹을 할 정도였으니 엄청난 미남이 아니었나 한다.


2. 헌종은 어린 나이에 아버지를 잃었으므로 늘 아버지의 얼굴을 기억하지 못하는 것에 마음 아프게 여겨 한 신하에게 늘 물었는데, “진전에 모신 수용이 오히려 매우 닮으신 전하의 용안에 미치지 못합니다.
하니 헌종이 거울을 보고 눈물을 줄줄 흘렸다고 한다.









고종


1. 고종 황제가 행차하다가 땀을 뻘뻘 흘리며 테니스 라켓을 휘두르는 미국인들의 모습을 보고 “어찌 저런 일을 하인들에게 시키지 않고 귀빈들이 하느냐”고 안타까워 했다.


2. 명성황후가 죽고 나서 끝까지 재혼을 하지 않았지만 아끼던 후궁이 있었는데 명성황후가 부리던 상궁이었다고 한다.
명성황후는 그녀를 곁에 둔 이유가 못생겨서 고종이 쳐다도 안 볼 것이라고 생각하고 곁에 두었는데 나중에 사람들이 말하기를 그녀는 명성황후와 똑같이 생겼다고 말했다.


3.당시 1887년대, 전신(전보총국)의 등장과 함께 최초 궁궐에 가설된 전화를 경험한 고종은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아무리 멀리 떨어져 있어도 성음을 들을 수 있군"
이 생각에 고종은 상당한 고액의 전화를 경기도 남양주시 금곡동 141-1번지 홍릉에 설치한다.
그 곳은 고종의 부인 명성황후(민씨)의 무덤.
전화의 설치가 끝난 직후 고종은 아침마다 그 곳으로 통화를 걸어 말을했다.

"여보, 어제는 춥지 않았소?"

고종은 매일아침 홍릉으로 전화를 걸어 죽은 민씨에게 안부를 전했고 매일아침 울었다고 한다.

"아무리 멀리떨어진 사람의 목소리를 들을 순 있어도 저승까지는 못 하는구나."

그럼에도 고종은 매일아침 홍릉으로 전화하는 걸 잊지 않았고 일제에 의해 강제퇴위를 당하는 그 날에도 전화를 걸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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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다읽었다 진짜 재밋네요 마지막 고종 ㅜㅜ
뭔가 실록과 다른 내용도 많네요 그리고 실록은 태조, 영조, 정조 말고는 다 진짜가 아닙니다 (고종은 사진이니까 제외하고) 실록과 그 당시 용안, 어전을 본 궁인들의 기억을 토대로 복원한거죠 그 이유가 임진왜란땜에 그 이전의 왕들 어전 다 날리고 일제강점기 땜에 또 날렸습니다 망할 개객기들
광무 황제 폐하께서 부인을 정말 사랑하셨군요ㅠㅠ
재밌었어요!!
현종짤은 못구해서 고려현종꺼 가져다오신거?
@wens 그냥 잘생김+현종이라는 텍스트만 봐주십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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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이 가장 충격을 받았던 사건
스푸트니크 쇼크 (Sputnik crisis) 1957년 10월 4일, 소련이 세계 최초의 인공위성인 스푸트니크 1호 발사에 성공하면서  미국 정부와 미국인들이 겪은 과학기술·교육 부문의 거대한 쇼크 미국 역사상 미국이 이처럼 멘붕한 사건은 없다. 때는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냉전이 시작된 시기 19세기부터 200여년간 세계를 지배했던 유럽 국가들이 2번의 세계대전으로 힘을 잃었지만 유럽 국가들 중 유일하게 러시아(소련)는 힘이 더욱더 강해졌다. 미국은 직감적으로 이제 자신들의 최대의 적이 소련이라는 사실을 느꼈으며 중부 유럽에 진군해 있는 소련의 강력한 붉은 군대의 탱크 웨이브에 미국 기업의 주요 수출 시장인 유럽 시장을 잃지 않기 위해 공산주의의 확산을 막기로 한다. 하지만 유럽은 예전의 유럽이 아니였다. 영국은 해군 밖에 없는 반쪽 짜리 군대였으며 유럽의 육군을 자처하던 프랑스는 독일 육군에 의해 붕괴되었고 그 독일 육군은 결국 소련 육군에게 붕괴된다. 유럽은 스스로를 소련으로부터 지킬 힘이 없었다. 처칠은 철의 장막이라는 표현까지 써가며 트루먼 대통령에게 유럽을 보호해줄 것을 요청했으며 소련 육군이 유럽을 침공한다면 전유럽을 포기하거나 소련 육군의 진격지에 핵폭탄을 투하하는 것뿐 이라고 미국을 설득했다. 거기다 소련이 핵 개발에 성공, 핵보유국이 되면서 미국을 중심으로 한 서구권 국가들은 핵보유국인 소련과의 직접적인 대립은 피하고 있었지만,  그래도 은근히 미국쪽의 파워를 더 높게 치고 있었다. 실제로도 미국이 더 우위에 있는게 맞았다 당시 미국은 해군국이였고 소련은 육군국이였다. 미국은 해군력의 우위로인해 항공모함 전단을 필두로해서  소련에 대한 직접적인 공격을 시도를 할 수 있었지만  소련은 미국에 대한 직접적인 공격을 할 수 없었다. 전차 웨이브로 밀어버릴 수 있는 건 소련 영토와 붙어 있는 유라시아 대륙뿐 소련은 해군력의 열세로 인해 아메리카 대륙에 있는 미국 영토에 대한  직접적인 공격이 불가능 했던 것 그래서 당시 소련은 미국에 대한 엄청난 공포를 지니고 있었다. 미국 항모에서 발진한 폭격기가 언제 소련 영토에 핵폭탄을 떨어트릴지 모른다는..  소련 정부는 해군력의 열세와 상관없이 미국 본토를 공격할 수 있는  신무기 개발을 지시하고 소련 군부는 그 신무기를 찾고 있는 상황이었다.  그리고 소련 군부는 그 신무기로 핵폭탄을 장착했으며 대륙을 넘어 날아가는 미사일을 생각해냈다. 바로 오늘날 대륙간 탄도미사일(ICBM)이라고 불리는 바로 그 무기다. 1947년 10월에 첫번째 소련제 V-2 로켓의 시험발사가 성공했지만,  이미 미국은 V-2를 수백 발 가지고 있는 상황이었다.  미국과의 경쟁에서 이기기 위해서, 소련에겐 무언가 더 엄청난 것이 필요했다.  그리고 마침 소련에는 한 천재 과학자가 있었다.  인류가 우주 시대를 맞이할 수 있게 만든 천재 공학자 코룔료프라는 사내가. 오른쪽이 코롤료프  세르게이 코롤료프는 독일 V-2로켓의 설계를 그대로 카피해 사정거리가 278km인 R1로켓과 사정거리가 556km인 R2로켓을 개발했다.  그러나 R2 로켓은 V-2로켓의 길이를 14m에서 16.9m로 늘려 연료를 더 채운 것에 불과했다. 사실, 코롤료프는 전쟁 무기 개발 따위에는 관심이 없었다.  그는 그저 로켓과 우주가 좋아서 연구를 하는 것일 뿐이었다.  사실 그는 대륙간 탄도탄보단 인공위성을 쏘아올리고 싶어했다. 그가 생각하기에 인공위성을 우주에 올린다면 그만큼 그의 조국에 애국하는 것도 없을 것 같았다.  그를 위해서는 데이터 수집이 필요했기 때문에, 그의 연구팀은 곧 동물을 이용한 고고도 비행 실험을 시작했다.  탑재물은 러시아인들이 친근하게 생각하는 개가 주로 이용됐다.  이러한 고고도 실험들은 우주비행이 그리 위험하지 않다는 것을 입증했다.  그러나 몇 분 동안의 실험으로는 만족할 수 없었던 코룔로프는 지구궤도를 끊임없이 돌 수 있는 인공위성을 발사하자고 사실 스탈린 시절부터 소련에 제안했었다.  이러한 제안은 스탈린의 아들인 바실리 스탈린 소련 과학 아카데미 소장의 화를 돋우었다.  바실리는 인공위성 제안서를 제출한 코룔료프에게 이렇게 말했었다.  "다른 사람이 추상적인 계획을 세워 시간을 낭비할지라도 동무는 공공요원이기 때문에 국가방위에 실질적인 도움을 주는 데 관심을 가져야 하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제트 전투기지 어리석은 스푸트니크(동반자)가 아니란 말이오."  그렇게 인공위성 발사계획은 잠시 잊혀지는 듯 했으나,  흐루쇼프가 서기장이 된 몇 년 뒤에 다시 빛을 보게 된다. 한편, V-2로켓 기술의 습득을 완료한 소련의 다음 목표는 서유럽까지 핵탄두를 나를 수 있는 중거리 탄도미사일을 개발하는 것이었다.  서방에서 'SS-3 샤이스터'(사기꾼이란 뜻)라고 부른 이 중거리 탄도미사일의 사정거리는 1,204km로, 1955년 실전에 배치됐다.  1957년 6월에는 1Mt의 핵탄두를 탑재할 수 있는 사정거리 1,800km의 SS-4 샌들 중거리 탄도미사일이 완성됐다. 이로서 미국이 핵무기를 배치했던 서유럽, 서아시아, 동북아시아 지역은 모두 소련의 미사일 사정거리 내로 들어오게 되었다. 하지만 아직도 미국 본토를 공격할 순 없었다  그러나 소련은 슬슬 탄도미사일 개발에 한참 자신감이 붙기 시작했고 1955년 소련은 인공위성 개발을 준비하기 시작한다. 그 해 1월 소련은 중앙아시아 지역(현 카자흐스탄)에 위치한 퇴레탐에 대륙간 탄도 미사일 시험장을 건설하고,  마침내 코룔로프는 1957년 8월 3Mt의 수소폭탄을 7,000km 떨어진 곳까지 나를 수 있는  세계 최초의 대륙간 탄도 미사일인 R-7을 시험발사하는데 성공했다.  (참고로 현재 중국 최고의 탄도미사일이 탑재 가능한 최대 탄두가 1Mt의 핵탄두,코룔로프는 60년전에 현재의 중국도 탑재 못시키는 폭탄을 탑재시킬 수 있는 미사일을 만든 것) 9월 두 번째 시험발사는 당 제1서기였던 니키타 흐루쇼프가 지켜보는 가운데 이뤄졌다.  평소 인공위성을 발사하고 싶어했던 코롤료프에게는 절호의 기회가 찾아온 것이다.  소련이 한창 발사체 개발에서 성과를 거두고 있을 즈음, 미국은 공군에서 개발하고 있던 아틀라스 시험이 계속 실패, 개발 일정은 하염없이 지체되어 있었다.  이를 안 코롤료프는 흐루쇼프에게 미국을 엿 먹이기위해 R-7(위성을 쏠 때는 A로켓이라고 부름)을 이용해 인공위성을 발사하자고 설득했다.  게다가 미국이 최초의 인공위성으로 준비하고 있던 뱅가드 위성을 쏘아올리기로 약속한 날이 불과 몇 달 앞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마침내, 흐루쇼프는 인공위성 발사계획을 승인했다.  그러나 이번에는 코롤료프의 기술자들이 문제였다.  그들은 이 임무가 불가능하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코롤료프는 결국 팀 멤버들을 하나하나 설득시켰다.  당시 코롤료프가 그의 팀 멤버 중 한명이었던 유리 실라예프(Ю́рий Сила́ев)에게 스푸트니크는 가능하다는 것을 설득하기 위해 말한 것 중 명언이 하나 있다. 코롤료프: 달을 보곤 하는가? 실라예프: 예, 봅니다. 코롤료프: 스푸트니크가 그것처럼 보일 거야, 조금 작은 별처럼 보이긴 하겠지만. ㅡ BBC 다큐 'The Planets' 中 인공위성은 몇 달도 안 되어 준비되었고,  처음으로 모습을 드러낸 스푸트니크 1호는 라디오 송신장치를 단  지름이 58cm인 공 모양의 인공위성이었다.  무게는 83.6kg.  그리고 코롤료프는 그의 아들같은 첫 인공위성에 '동반자'라는 뜻의  '스푸트니크'라는 이름을 붙여주었다. 코룔로프와 그의 팀은 결국 인공위성을 완성하고 우주로 쏘아보낼 시기에 대한 카운트 다운만 남기고 있었다. 같은 시기 소련의 서기장 니키타 흐류쇼프는 자신들이 이미 미국을 초토화 시킬 수 있는  신무기를 개발 , 보유하고 있다고 떠들고 있었다. 그 신무기란 바로 핵탄두를 장착한 대륙간 탄도탄을 말하는 것 그러나 미국은 아직 자신들도 만들지 못한 것을 소련을 만들었을리가 없다며 단순한 허풍으로 취급했다. 그리고 흐류쇼프는 자신들이 대륙간 탄도미사일을 개발하는 데 성공했다는 것을 증명하기위해  발사시기만 기다리고 있던 인공위성에 발사명령을 하달했다.  모스크바 시간으로 1957년 10월 4일 오후 10시 28분 바이코누르 우주기지에서 A로켓 엔진이 불을 내뿜으며 스푸트니크를 우주로 올려보내기 시작했고,  5분 후 인간이 만든 최초의 인공 위성은 궤도에 자리를 잡고 최초의 메시지를 지구로 보내왔다.  흐루쇼프가 인공위성 발사계획을 승인 했을때 프로파간다의 목적으로 위성이 발신하는 신호는 암호화하지 말라고 연구팀에 명령했고,  전세계의 사람들은 우주시대의 개막을 알리는 "삐...삐...삐..." 소리의 첫 신호를 들을 수 있었다. 같은 시기 워싱턴에서 소련 대사관에서는 세계 각국의 과학자들이 모여 화기애애한 분위기 속에서 파티를 즐기고 있었다.  월요일부터 시작된 '국제지구관측해'(IGY)를 기념한 '로켓과 인공위성'이라는 학술세미나였는데,  당시는 냉전시대라 동서의 과학자가 만나는 건 매우 어려운 일이었기 때문에 과학자들은 세미나 후에도 이야기를 나누며 즐기고 있었다.  당시 소련은 자신들의 우주계획을 1급 비밀에 부치고 있었기 때문에, 서방 과학자들은 저마다 소련 과학자들 옆에 붙어 진척 상황에 대해 묻고 있었다.  그러던 중 술에 취한 듯한 한 러시아 과학자가  "우리는 조만간 인공위성을 발사할 것."이라며 너스레를 떨었다.  "조만간이 대체 얼마나 되냐?"고 미국 과학자가 묻자  그는 "1주일 , 아무리 늦어도 한달안."이라고 답변했다.  그러자 장내는 한바탕 웃음바다가 됐다.  "1주일이라고?"  미국 과학자들은 말도 안 된다고 생각했다.  "고작 농업국가 밖에 안 되는 소련 따위가 어떻게 우리 미국보다 먼저 인공위성을 발사하겠어?" 라고들 생각했던 것이다.  그런데 그것이 실제로 일어났습니다.... 한편, 연회를 즐기고 있던 과학자들 틈바구니에는 뉴욕타임스의 기자인 월터 설리번도 끼여 있었다.  파티가 한참 무르익을 무렵 그는 신문사로부터 전화 한통을 받았다.  바로 러시아가 인류 최초의 인공위성인 스푸트니크 1호를 발사해서 성공했다는...  설리번은 파티장으로 헐레벌떡 뛰어들어가 사람들에게 말했다.  "그게 정말로 올라갔어!" "루스끼들이 망할 스푸트닉을 띄웠다고!!!!"  그때 누군가가 옥상으로 올라가 인공위성을 보자고 제안했다.  그러자 사람들은 너나없이 대사관 지붕으로 올라가기 시작했다.  맨눈으로 볼 수 없는 작은 인공위성인데도 불구하고 눈으로 확인하고 싶었던 것이다.  스푸트니크 1호는 그들이 파티를 벌이고 있는 동안 그들의 머리 위를 2번이나 지났다 그리고 또 같은 해 1957년 11월 3일, 미국은 다시 한 번 패닉에 빠진다.  소련이 세계 최초로 우주로 생명체를 보냈기 때문이다.  비록 그게 사람이 아니고 개이기는 하지만,  그것은 소련과 미국의 기술력 차이를 세계 만방에 보여주는 것이었다 이전까지 소련의 흐루쇼프는 "수소폭탄을 실은 대륙간탄도미사일을 보유하고 있다"고 말하기도 했지만  미국을 비롯한 자본주의진영은 단순한 체제선전용 허풍으로 치부하고 있었다.  그런데 소련이 인공위성의 발사에 성공하자  미국을 비롯한 서방자본주의국가들은 엄청난 충격을 받았다.  소련이 세계 최초로 인공위성을 쏘아올렸다는 사실 뿐만 아니라  대륙을 넘어설 수 있는 로켓 기술을 소련이 미국보다 먼저 보유하면서  핵탄두를 장착한 소련의 미사일이 선제공격을 가할 수 있다는 사실이 공포와 위기감을 준 것이다. 흐루쵸프가 말하고 다녔던 미국을 초토화할 수 있는 신무기와 그 신무기를 증명하는 스푸트니크 1호 발사 성공은 그를 1957년 타임지 올해의 인물로 선정되게 만든다. 실패한 미국 뱅가드 정치적으로 큰 타격을 입은 미국 정부는 준비중이던 뱅가드 로켓을 이용한  인공위성의 발사를 서둘러 강행한다.  그러나 1957년 12월 6일에 세계 각국의 언론을 불러놓고 발사된 뱅가드 로켓은  고작 1미터 상승하더니 폭싹 주저앉으며 폭발한다.  대실패를 놓고 미국 언론도 조소와 비난을 하기에 이르렀고,  뱅가드가 폭발하고 며칠이 지난 후, 소련은 공식적으로 조문을 보냈다.  그 조문에는 흐루쇼프의  '뱅가드(전위부대)라고 부르지 말고 리어가드(후방부대)로 부르는게 좋겠다' 는 통렬한 조롱까지 실려있었다 망신살 톡톡히 당한 아이젠하워 대통령은 결국 폰 브라운의 레드스톤팀에게  인공위성을 쏘아 올릴것을 명령한다.  2차대전 이후 미국에 건너와서 눈치밥 먹으며  육군의 탄도미사일연구소(레드스톤)에 은거하던 폰 브라운의 로켓팀은 다시금 기회를 맞고  1958년 1월 31일 레드스톤 미사일을 개량한 주노-1 로켓으로  미국 최초의 인공위성 익스플로러(Explorer) 1호를 발사하는데 성공한다. [출처] 6. 스푸트니크 쇼크!|작성자 엘랑 미국 최초의 인공위성 익스플로러 1호 무게는 약 5kg 로 83kg인 스푸트니크 1호에 비해 매우 작으며 익스플로러 1호보다도 두 달 먼저 성공한 세계 최초로 생명체인 개를 싣고 우주로간 스푸트니크 2호의 무게  500kg 에 비하면 백분의 1 밖에 안되었다. 흐류쇼프는 소련이 500kg 를 우주로 쏘아올리고 두 달이나 지나서 쏘아올린  자칭 세계 최고의 기술 국가인 미국의 인공위성이 겨우 5kg란 사실에  미국이 드디어 오렌지를 우주로 쏘아올린 것을 축하한다는 조문을 보낸다. 당시 천조국 대통령이던 아이젠하워 이 위성이 발사되었던 당시, 미국과 소련은 냉전이라 불리던 준-전시상태에 있었기 때문에,  미국 국민들은 스푸트니크 발사 이후 패닉에 빠졌다.  미국 국민들이 세계 최고인 줄 알았던 조국 미국이 세계 최고가 아니란 사실을 알았기 때문이다. 여기에는 현실적인 이유도 있는데,  "소련이 우주에 익스플로러의 100배 무게인 인공위성을 올릴 수 있다면,핵무기를 우주로 보내 우리 머리 위에 떨어트릴 수도 있지 않은가?" 가 그 이유다.  이렇게 되면 미국은 꼼짝도 못하고 소련에게 굴복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이걸 실현시킨 병기가 바로 대륙간 탄도미사일.  미국 정부는 소련이 인공위성을 쏘아 올린 것은 사실이지만  아직 핵탄두를 쏘아올리진 못할 것이라고 미국 국민들을 안심시켰다. 소련이 익스플로러 1호의 100배인 무려 500kg 짜리 위성을 성공시킨 것은 사실이지만 500kg를 간신히(?) 올린 소련이 1톤이 넘어가는 핵탄두를 우주로 쏘는 건  불가능하다는 판단을 한 것. 그러나..... R-7 (인류 최초의 대륙간 탄도미사일이자 인류 최초의 위성인 스푸트니크 1호를 우주로 올린  최초의 대륙간 탄도 미사일 완성체.  이 한마디로 설명가능한 발사체다. 2016년 현재 중국 최고의 대륙간 탄도미사일인 DF-31 보다 탄두 중량이 무려 3배나 높다. 이게 1957년에 나온 것 더 놀라운건 2016년인 현재도 우주로 가는 유일한 방법이 이 R-7을 타는 거다 싸고 안전하고 신뢰도 있으며 내구성도 좋은 그야말로 미스터리한 물건 개발자는 소련의 천재 공학자 코룔로프) R-7은 1958년 5월 15일 무려 1327kg 짜리 위성을 우주로 보내버린다. 이에 미국은 또 난리가 난다. 핵폭탄은 500kg 짜리 위성보다 무거워서 소련이 위성을 우주로 보낸 발사체에  핵폭탄을 장착해서 미국으로 보내는건 무리라고 미국 정부가 말해왔는 데 소련이 무려 1.3톤 짜리 위성을 우주로 올리면서  다시한번 미국 국민들은 멘붕.... 미국 정부가 "핵탄두를 쏠려면 최소 1톤은 탑재할 수 있어야돼!" 했는데 1.3톤을 우주에 올리는 걸 성공했으니 미국 정부 스스로 소련은 미국에 핵탄두를 보낼 수 있다라는걸 인정한셈... 참고로 1.3톤인 스푸트니크 3호가 발사되고 나서 두 달 후인 1958년 7월 26일에 발사한  미국 익스플로러 4호의 무게가 25.5kg.....(255kg이 아니라 25.5kg...) 이후 소련은 스푸트니크에 이어서 최초의 유인 우주선인 보스토크 계획을 추진하고 결국 세계 최초의 우주인인 유리 가가린을 우주로 보낸다. 달에 세계 최초로 탐사 로봇도 보내고 세계 최초로 우주 유영도 성공하고.. 이후 미국은 국가적 수치를 씻기 위해 아폴로 계획을 추진했고,   이 계획이 성공해서 아폴로 11호가 달에 착륙할 때까지  모든 우주 세계 최초 타이틀을 소련에 뺏기는 등 '스푸트니크 쇼크'에서 헤어나오지 못했으며,  미국,소련 간의 우주 경쟁이 시작되었다. 그리고 그 후 약 50년간,  인류는 미국과 소련에 의해 사상 최고의 첨단 과학 기술 발전을 맛보게 된다. P.S 911 역시 미국 국민들에게 큰 충격을 줬지만 충격의 강도가 다르다 911 사건이 터진후에 지구상에서 미국이 사라질지도 모른다고 생각한 미국 국민은 없지만 스푸트니크 쇼크 때 미국 국민들은  미국이 소련의 선제 핵미사일 공격으로 지구상에서 언제 사라질지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스푸트니크 쇼크로 엄청난 충격을 받은 미국은 자신들이 왜 소련에게 졌는가? 를 연구하기 시작했고 바로 '미국의 천재들이 소련 천재들에게 밀려서'라는 판단 실제로 당시 소련에는 코롤료프급 천재가 많았다. 특히 코롤료프, 첼로메이, 글루쉬코, 얀켈 ,켈드쉬, 쿠르차토프, 란다우, 콜모고로프 등 모두 다 인류 역사에 길이 남을 천재들이다. 코롤료프 사후에도 첼로메이와 얀겔은 서로 자신이 개발한 로켓을 ICBM으로 제식 채용해달라고 싸웠고, 이를 중재하기 위해 므스티슬라프 켈듸쉬가 나섰으나 두 사람이 만든 로켓이 모두 시대를 초월한 고성능인지라 우열을 가리지 못하고 모두 제식 채용되는 결과가 나왔다. 그러나 이러한 중복 투자는 소련 국방예산에 큰 부담을 지워주는 결과가… 2차 대전 전국토가 폐허가 되고 3천만~4천만이라는 국민들이 죽은 소련이  냉전 초기에 우주 분야에서 미국을 압살하고 냉전 중기에도 우주 기술에서 미국에 근소 우위를 유지한 건 우주 분야 4대 천재라 불리는 코롤료프, 첼로메이, 글루쉬코, 얀켈이 그만큼 대단했기 때문 즉, 미국의 교육 체계가 소련의 교육 체계에 밀려서란 판단을 내린다. 이로 인해 기존 미국의 교육 방식이였던 듀이의 학생들이 웃고 즐기던 미국의 교육 체계가 브루너의 엄.근.진 교육 체계로 변하게 된다. 출처 역사는 언제나 '그러나...' 에서 시작하는듯 흥미롭네 zㅋㅋㅋ
중세시대의 아기들은 넘나 불편했을 것 같긔....jpg
안냐세여? 그림 구경을 하다 호기심이 생겨서 글을 쓰게 됐어여 제가 보던 그림은 이건데여 네덜란드의 화가 브뢰겔의 Massacre of the Innocents라는 그림입니당. 우리나라에선 영아학살이라는 제목으로 알려져있지여 영아학살..? 제목 한번 어마무지하긔 줜내 살벌 근데 자세히 살펴보시면 그림 속에 영아라고 할법한 애긔들은 없긔 농민들의 식량 꾸러미를 수탈해가는, 커다란 개를 끌고가는, 거위의 목덜미를 쥐고 자르려는 기사들만이 존재해여 사람들은 두손을 붙잡고 애원하거나 가져가지 말라고 말리거나.. 혹은 하늘을 보고 울부짖고 있습니당. 학살이라기보단.. 걍 농민들 삥뜯어가는 느낌..? 게다가 학살이라 하면 되게 피범벅..우울하고,,어둡고,.그럴거 같은데 핏자국도 하나 없냄.. 하늘은 또 엄청 샛파랗네..이상타 그림 지적 전에 영아학살이 뭔지부터 짚고 넘어가겠읍니다! 부처님급 초이스는 아니지만 매해 12월마다 우리에게 즐거운 휴일을 선사해주시는 예수님은 국적이 이스라엘이에여 겨우 2018년전 탄생했으니 그때 이스라엘은 이미 왕국도 있고 노예도 있고 상인도 있고 그랬겠져? 사람들 사이에 계급이 생긴건 청동기 시절 때부터쟈나~ 예수가 태어났을 적엔 이미 한 나라가 존재했을 때쟈나~ 예수 탄생시 이스라엘을 다스리던 헤롯왕입니당. 이 사람이 영아학살을 주도했지여. 글차나욥 내가 이 나라 정통왕인데 신의 자손이라는 애가 태어날거래..뭔데 시벌..반란인가..아님 사이비..? 나라도 혼란해질 거구 자기 권력에 위협을 느낀 헤롯왕은 화가 났어욥 그래서 2살 이전의 애기들을 모조리 죽여버리기에 이릅니다. 근데 정작 예수는 이집트로 도망가서 살아남음..ㅎ 가장 왼쪽에 아기들을 죽이라 명령하는 헤롯왕이, 가운데엔 죽어가는 아이들의 시체가, 오른쪽엔 절규하는 부모들을 확인할 수 있읍니당 헤롯왕의 영아학살. 이 이야기는 성경에 기록되었기에 후에 많은 화가들이 그림으로 남겼어여 양인애들 그림이 글쳐 뭐 그리스로마신화 아님 성경말곤 그릴것도 없음 아마도 가장 유명할 루벤스의 그림 당시의 처절함과 슬픔, 고통과 잔인함이 역동적으로 표현되어있지요 헤롯왕과 날뛰는 기사들, 아이를 감싸는 부모들 헤롯왕 바로 밑, 중간에 노란색 옷을 입은 남자가 칼을 들고 내리치려는 장면이 보이실거긔 엄마는 아이를 끌어안고 애원하고 있고요 이렇게 상황과 구도, 그림체, 화가만 다를뿐 영아학살은 굉장히 많이 그려진 종교화 중 하나인데여 실제로 헤롯왕이 죽였는지 아닌지는 모릅니당 의견이 분분해여 모든 위인들의 탄생설화가 그렇듯 헤롯왕의 영아학살도 예수의 탄생을 강조하려는 거짓말일수도 있져 세상은 태평성대하였ㄷr 그래서 예수가 필요없었ㄷr..보다는 아이들을 무참하게 죽일 정도로 엄청난 폭군이 나라를 다스렸ㄷr 예수만이 구세주였ㄷr..이런쪽이 좀더 설득력있자나욤. 하여튼 저는 탈덕한 구개신교신자라 종교화도 잼나게 보는데 이 그림은 참 이상한거긔 바로 위에 올린 세 영아학살과는 많이 다르져? 학살보다는 수탈에 가깝게 묘사됐긔 피도 울부짖는 부모들도 없고 무엇보다 아이가 없긔! 이유는 바로 이 사람, 신성 로마 황제 루돌프 2세 때문인데욤 평소 정치보다 예술과 과학에 몰두했던 루돌프 2세는 그림을 보고 너무 잔인하다고 생각했긔뚤 그래서 어두운 하늘을 밝게, 죽어가는 아이들을 닭이나 개 등으로 바꿔 그리게 한 거긔 그림은 캔버스 위에 유채물감으로 그려졌으니 얼마든지 위에 덧칠할 수 있었겠져? 수정되지 않은 버전은 다음과 같습니당 같은 그림, 구도, 사람들인데도 분위기가 확 달라졌죠 이 그림은 오스트리아 비엔나에 소장되어있어여 아들이 아빠 작품을 따라 그린 모조작이져. 원본은 맨 위처럼 하늘색 하늘로 덧칠이 되어서 찾아볼 수 없긔뚤 분위기말고 뭐가 달라진거냐? 비교를 해보자면 수정버전에선 거위나 꾸러미였던게 모두 아이의 시체라는게 보이실 거긔 끌려가던 개는 사실 어린아이였고.... 조그만 크기인데도 엄마를 바라보며 어쩔줄 몰라하는 아이가 느껴지시죠 이외에도 죽은 아이, 끌려가는 아이를 찾아볼 수 있읍니당 그리고 무엇보다 그림의 중심. 기사들에게 단체로 죽임당하던 닭과 거위들이 바로 어린아이들이었는데요 좀 더 크게 보시면 이런 장면임을 확인하실 수 있긔 제가 의문스러웠던게 바로 저거긔.  으아니 애긔들이 너무 딴딴히 묶여있는거아니냐. 아니..글차나욥..넘나 피라미드 속 파라오처럼 보따리처럼만 그려놓은것.. 진짜 뜬금없는 포인트에서 호기심이 생겼긔뚤 특히 중세시대는 어린아이에 대해 굉장히 무지했을 시기쟈나요  아이는 그저 '조그만 어른'으로만 취급했을 때쟈나  그래서 갓 초등학교에 들어갈 유아도 코르셋을 착용했고요? 그러니 영아라고 뭐가 달랐을까..? 라는 생각이 들었읍니당 복지가 몬데..했던 시절의 아기들이라.. 조아 찾아보자 클릭클릭 검색검색 영어는 못하지만 단어는 알긔 구글로 검색하면 구글이 너 혹시 이거 찾는거 아니니?? 하고 자동교정도 해주고요? 올ㅋ 뭐가 막 나온다 나와 첫번째 페이지 Surviving Infancy in the Middle Ages는 "중세시대에 살아남는 아기들"로 해석할 수 있겠긔 live도 아니고 survive..으아니..무시무시한 단어선택이다 클릭 올ㅋ 클릭하자마자 처음 본 그림이쟈나!!!!! 엄마 옆에 누워있는 아기 보이시냐긔!!! 여기서도 팔다리를 꽁꽁 싸매고 있내..! 유레카!!!!!!!!!!!! 영알못이지만 번역기를 돌려가며 기사를 읽어봅니당 Life for the Infant Folklore has it that the medieval child spent his first year or so wrapped in swaddling, stuck in a cradle, and virtually ignored.  민속학에 따르면 중세시대의 아이는 태어난 후 1년 동안 감싸여있고(wrapped) 요람에 갇히고(stuck in a cradle) 사실상 무시당했다(and virtually ignored.) 오호........!!!!!! 애긔는 체온조절을 못하니까 보자기에 감싸져야 하는건 당연한 일이져 근데 궁금한점: 중세시대 때도 지금 애긔들에게 쓰는 부드러운 순면이 있었을까? 지금이야 이렇게 포근폭신한 천으로 감싸놓지만 과연 중세시대 유럽은 어땠을까염.... 비단은 귀족들에게도 비싼 원단이었을거고 순면은 있을리가 없고.. 과연 평민들이 저런 부드러운 천을 쓸 수 있었을까..? 스와들링(강보) 다크에이지로 검색ㄱㄱ 뙇. 그렇읍니당. 중세시대 때 아기들은 감싸여있었다기보다 거의 묶여있었어여. 팔다리를 곧게 펼쳐놓고 움직이지 못하도록 긴 천으로 꽝꽝 짬매는거긔(??) 물롱 애기옷이나 기저귀 없이 천으로요.. 저 천 안에서 온갖 일..해결하고..네..위생 바이 21세기의 눈으로 보면 모냐 시벌..? 하고 뜨악할만한 일이 또 농민계층의 어머니라면 농사일, 집안일에 전념하느라 아이를 볼 시간이 없었을거긔 애가 뒤집거나 기어다니다가 요람에서 떨어지면 큰일나내.. 차라리 꽉 짬매두고 요람에 눕혀두면 전래 편하내.. 위 그림처럼 운반;하기도 쉽고요 밭매러가거나 일하러갈때는 나무에 기대세울수도 있고요. 약간 요느낌..? 그렇다면 상대적으로 자유로운 귀족들은 어땠을깡..? 글쎄염..귀족 아기라고 해서 다를 바는 없었을거긔 육아라는 개념자체가 없던 시대..! 애긔는 유모가 돌보던 시대! 놀아주는 하인과 유모로 보아 귀족집 아이들인걸 알 수 있는데도 꽉꽉 묶여있져 여기서도 장식만 화려할뿐 단단한 스와들링은 달라지지않았긔 그리고 중세시대는 '어린아이'라는 개념이 없던 때긔 서양의 소파 방정환, 루소가 등장할때까지 어린애는 그냥 '덜 자란 어른'이었긔뚤 아이들을 위한 바느질, 자수, 이런게 존재할리 없고요? 그러니 어린애의 활동성을 중시한 옷, 편안한 옷 그런거 없이 어른옷의 치수만 줄인 코르셋을 입혔던거겠죠 애기옷이란게 존재하지도 않았는데 애기를 벗겨둘 수는 없어..추워.. 그래서 스와들링, 강보가 발달하게 되었읍니당  심지어 아기 예수를 묘사한 그림에서도 스와들링이 나타나지여. 엄마 마리아와 아기예수긔 요기서도 요기서도 보이는 단단한 스와들링. 화가도 그림체도 모두 다르지만 머리에 쓴 천으로 성모마리아라는걸 알수있긔뚤 성모 마리아랑 아기예수 그림 다른버전 이렇게 보니 애기를 완조니 미라처럼 묶어뒀다는게 확 와닿으시져? 영유아 사망률이 하늘을 찌를만도 한것.. 한창 커야할 시기에 저랬으니 얼마나 괴로웠겠긔뚤 물롱 중세시대라고 해서 애긔들을 전부 묶어둔건 아니고요. 자유롭게 활개치는 애기들도 있었을 거예여 그러므로 이 그림에서의 아기들도 2살 이하가 맞으며 당시의 풍습대로 단단히 스와들링되어있다는 사실을 배울 수 있습니당 위키백과 영어에 따르면 서양에선 스와들링 문화가 사라졌지만 몇몇 동양국가에선 여전히 애용 중이라고 하네욤. 근데 그게 중세시대처럼 무식하게 짬매는게 아니고.. 속싸개라고 부르더라구여 (아니 근데 여기 사진속 인물들은 죄다 서양인인데 서양에서 스와들링 문화가 사라졌다는건 대체..?) 12개월 미만 애긔들은 자다가 자기 손짓에 놀라서 깰때가 있으니 움직이지 못하게 감싸야한다네요 이게 바로 21세기의 스와들링!!! 속싸개!!!!!!!! 크흡 자기 손에 놀라는 애기라니 넘나 귀엽긔 ㅠㅠㅠ 오잉또잉 나한테도 팔이? 다리가? 이러는 거잖아욥 ㅠㅠㅠ 전래 겹냉..  하여튼 속싸개는 사실 되게 오래전부터 존재했고 근데 옛날에는 지금처럼 애기를 돌본다는 개념이 없어서 걍 꽉꽉 묶어뒀고 당연히 천을 갈아준다거나 그런건없었고.. 지금처럼 애기들이 불편해하면 사용하지 않는다 그런 거 없었고.. 이게 영아 사망률에도 한몫했을거고.. 머 그렇다는 글이었긔.. 음 약간 밑도끝도없는 결론.. 출처 오잇..? 정말 그런건가!!!! ㄷㄷㄷㄷ 첨 알게된 사실!!!!!!!
조선시대 공금 횡령한 공무원 최후.jpg
여기 홍순언이라는 조선시대 역관이 있음 (*역관이란? 통역 같은 역학에 관한 일을 담당한 관직) 중국 퉁저우(베이징 근처인가 봄 안중요하니까 넘어가자)기생집에서 놀다가 어떤 여자를 만남 홍순언은 기녀가 흰 옷을 입고 있는 것을 의아해하며 이유를 물었다고 함(우리는 백의민족이지만 중국에서는 흰색을 죽음의 색으로 꺼려서 장례때만 입는 걸로 알아.. 아님 말고ㅋ) 여자 "부모가 객사하여 장례 비용을 구해야하는데 돈이 없어 여기서 일하고 있습니다" 헉 그럴수가...안되겠다 내 300금을 주겠소 홍순언이 건넨 300금으로 여자는 무사히 부모의 장례를 치를 수 있었음 ....여기까지 보면 존나 아름다운 얘기지만 이 300금이 공금이었다는 문제만 빼면 완벽했을거임 참고로 당시 300금이면 쌀 60섬, 그러니까 쌀 8,640kg 어치였음. 여자가 불쌍하기로서니 공금에서 쌀 8톤어치 살 수 있는 돈을 빼돌렸다...? 완전 도라이죠 큰 금액을 삥땅친 죄로 홍순언은 옥에 갇힘 당연함. 그리고 이 시대의 왕=선조 조선의 왕들은 조선 건국을 한 태조 이후부터 계속 골머리를 앓고 있는 일이 있었음 바로 종계변무 였음 종계변무 종가의 혈통에 관한 억울함을 사리를 따져 밝혀냄 지들 입에 들어가는 음식이나 엉망진창으로 만들 것이지, 남의 나라 역사 왜곡에도 도가 튼 건 아주 조상때부터 내려온 전통인지 짱깨들 책이었던 《태조실록》과 《대명회전》에 조선 태조 이성계의 선조를 이인임으로 잘못 기록한 문제를 수정해줄 것을 1394년(조선 개국)부터 1588년(선조 시절)까지 자그마치 2백 년 동안 계속해오고 있었음. 야 ㅅㅂ 진짜 도저히 안되겠다 이새끼들 바꿔준다고 2백년간 아가리만 털고 이제는 진짜 고쳐야겠음 역관들 니네 중에 누가 가라 누가 갈래? 아 참고로 이번에 가서도 못 고쳐오면 모가지 날아간다 ;;;;;;저번에 공금 횡령해서 옥에 갇힌 홍순언을 사면의 대가로 보내는 것이 어떠할까요 그렇게 홍순언은 중국으로 가게 됨 또 중국 퉁저우로 가게 되는데 퉁저우에 도착하자마자 으리으리한 잔치상이 차려지고 머 하여간 분위기 장난아님 근데 준비하던 사람들이 홍순언 님 언제 오냐고 묻는거임...? 게다가 명나라 고위 관료인 석성이 홍순언을 마중나옴 게다가 갑자기 홍순언에게로 뛰어오는 사람이 있었으니... 바로 석성의 아내인 류씨였음 헉쉬;; 님은 누구신데 저한테 절을 하시죠 은인께선 저를 오래되어 잊으셨습니까? 하며 울면서 젊을 적 홍순언이 건넨 300금을 받은 후 기생집을 나와 석성의 후처로 들어가게 된 얘기를 했음 일이 잘풀릴 운명이었는지 종계변무의 담당 부서였던 예부에서도 높은 관료가 바로 석성이었음; 그길로 바로 종계변무는 해결됨....ㅋ 야 장하다 홍순언 내 그대를 종2품 우림위장에 앉히겠노라 아니 전하;; 아무리 장해도 그렇지 역관은 종3품까지밖에 올라갈 수가 없는데요? 어 아냐 내맘대로 할거야 2백년간 골머리 앓은거 해결해 줬는데 뭘 못주겠냐 이렇게 홍순언이 선조의 신임을 얻고 세월이 흘러 임진왜란이 터짐 야 나 중국 요동쪽으로 좀 도망가야겠다;; 홍순언 자네가 가서 나 좀 받아달라고 말 좀 잘해보게 그렇게 홍순언은 또 오랜만에 명나라로 가게 됨 명나라 황제에게 왜군이 조선을 침략해서 유린하고 있으니 지원병을 보내달라고 요청했지만... 거절당함 어쩌지ㅠ 저렇게 단호한데 어찌 설득한단 말이냐 님 걱정 ㄴㄴ 나 지금 국방부 장관임ㅋㅋ 내가 폐하께 말씀드려 보겠음 운 무슨 일이냐고 (명나라 황제임) 그래 내가 석성에게 듣자하니 지원군은 보내주겠음 근데 왕이 자기 나라를 버리고 도망치는건 안되지; 선조 요동으로 오는건 반대임 이렇게 지원군도 잘 받아내서 돌아오게 됨. 홍순언 운 죽인다...🤔 홍순언은 임진왜란 내내 전장에서 통역을 하다가 68세의 나이로 죽게됨 선조는 그를 종1품으로 올리고 당릉군으로 봉군해주기까지 함... 홍순언의 부고를 들은 석성도 명나라 황제에게 그의 죽음을 고하고 관직을 요청함 (대체 왜요) 안줄줄 알았는데 명나라 황제는 명나라 정3품 관직을 하사함 .....로 얘기가 끝났다면 좋았겠지? 명나라가 조선에 군대를 파병했을때 이미 명나라는 망조가 들었었음;; 그래서 안보낼라고 했는데 석성이 요청해서 보내준거 야, 임진왜란 7년동안 엄청난 병력과 전쟁비용을 들여서 우리나라 지금 망하게 생겼다; 니가 파병하자고 했지? 너 관직 내놔 그리고 너 참수시킬거임ㅇㅇ ㅠ... 모 당연한건지도 모르지... 여하튼... 석성의 큰 아들과 작은 아들은 석성이 죽은 후에 계모인 류씨 부인(그 기생집에서 돈 준 그 사람임...)을 모시고 조선으로 망명해서 해주 석씨와 성주 석씨로 분적하고 뿌리를 내려 살고 있다고 해 공금을 횡령한 홍순언... 그러나 남을 도와주려는 마음에서 횡령을 해서인지(?) 본인은 일 잘 풀리고 서얼로서는 받지도 못할 파격적인 관직을 받았음 (근데 선조가 전쟁 공신으로는 인정 안했대...왜일까) 물론..홍순언에 대한 고마움을 너무 극적으로 표현한 석성은 죽었지만 말이야... 교훈: 공금 횡령하지 말자 개인적인 감정을 공적인 일에 쓰지 말자 출처
야!!! 문화재!! 너는 대한민국의 <<<국보 및 보물>>>에서 탈락이다! 그 이유는 다음과 같다!!!
문화재가 일종의 스포츠라면 최상위 리그는 국보임. 문화재는 무수하게 많지만 당연 모두가 국보가 될 수는 없는 것이고, 문화재중에서도 특별한 소수만이 깐깐한 심사를 거친 후에야 국보의 자격을 얻을 수 있는데... 그러나 안타깝게도 모종의 이유로 인해 국보에서 탈퇴 당하는 문화재들이 있음. 오늘은 그런 비운의 문화재들에 대해서 이야기를 해볼까 함. 1. 주작 때는 1992년 여름. 한산도 앞바다에서 건져진 별황자 총통 하나에 온 대한민국이 들썩거림. 이 별황자총통을 특별하게 만든 건 바로 총통의 몸통에 적힌 글자였는데, 새겨진 내용은 다음과 같음. 龜艦黃字 驚敵船 一射敵船 必水葬 귀함(거북선)의 황자총통은 적선을 놀라게 하고, 한 발을 쏘면 반드시 적선을 수장시킨다. 한산도....? 거북선....? 눈 감고 봐도 임진왜란 당시의 유물;;;; 그것도 거북선의 뮤울;;;;; 기록으로만 전할 뿐 파편 하나 남아 있지 않은 거북선과 연관된 유일한 유물이었기에 학계 및 온 대한민국이 난리가 남. 별황자총통은 문화재계의 슈퍼스타로 떠올랐고, 이런 인기에 힘입어 발굴된지 불과 17일의 최단기간에, 무려 만장일치로 국보 274호에 지정되는 쾌거를 이루어 냄. 이게 얼마나 빠른 결정이었냐면 누가 봐도 국보 문화재인 무령왕릉 유물들도 국보가 되기까지 3년이나 걸렸고, 천마총 금관도 5년 연습생 생활 끝에 국보로 데뷔함. 별황자총통이 얼마나 특별 대접을 받았는지 알 수 있는 부분임. 그러나 4년이 지난 1996년, 뜻밖의 곳에서 예상치 못한 폭로가 터짐. 광주지검은 당시 문화재 보호 지역에서 피조개를 재취하기 위해 뇌물을 뿌리다 걸린 수산업자 홍모씨를 조사하는 중이었음. 그런데 이 홍모씨가, "황동환 대령(별황자총통 발굴 책임자)에게도 뇌물을 줬는데, 국보 별황자총통은 가짜라는 이야기를 들었다." 라는 말을 한 것임. 이에 검찰은 은밀하게 황 대령을 불러 조사를 시작했는데, 이 냄져 하는 말이 아주 가관이었음. 황동환 대령 : 아ㅋㅋㅋㅋㅋ 그 소문ㅋㅋㅋ 나도 그런 소문 듣긴 했는데, 우리 해군 이미지도 있고 하니까 그냥 좀 덮읍시다. (별황자총통은 해군 주도로 발굴됨.) 국보가 뭔 이불도 아닌데 덮긴 뭘 덮자는 말임?? 이 미심쩍은 태도는 검찰의 수사 욕구를 더욱 자극할 뿐, 아무런 해명이 되지 못했고 결국 두 달이 지난 후 대령은 모든 사실을 실토했음. 결론부터 말하자면, 별황자총통은 처음부터 모든 것이 가짜였음. 애초에 총통 본체부터 조선시대 물건이 아니라 현대에 만든 가짜 총통에 인공적으로 약품을 부어 부식시킨 물건이었으니 말 다 한 셈임. 심지어 별황자총통의 미심쩍은 점은 이것만이 아니었음. 일단 별황자총통이 주목을 받게 된 계기인 龜艦黃字 驚敵船 一射敵船 必水葬 이 문구부터 존나 수상쩍었음. 화포의 문구에선 거북선을 배 함자를 써서 '귀함'이라고 칭했는데, 군사용 배에 함이라는 단어를 붙이는 것은 근래의 어투라고 함. 조선 시대에는 군사용 배, 민간 배 할 것 없이 모두 배 '선' 자를 사용했고, 실제로 실록 등의 기록을 봐도 모두 '龜船' 이라는 단어를 쓰지 '龜艦'이라는 단어를 사용하는 건 별황자총통 뿐이었음...ㅋ 뿐만 아니라 과학 조사 결과, 별황자총통에는 아연 성분이 8%나 검출되었는데 아연은 불에 매우 약한 금속임. 불에 약한 아연을 8%나 화포에 처넣는다고...? 적군에게 보내는 트로이의 목마가 아닌 이상 이딴 식으로 무기를 제작하는 멍청이가 어디 있단 말임? 심지어 문화재청은 이와 같은 사실을 뻔히 알고 있었으면서 모르쇠를 했던 것으로 드러나 만인에게 빡침을 안김. 화포 무기에 아연을 섞는 멍청한 조상은 없지만 뻔하게 수상한 물건을 만장일치로 국보 시켜주는 멍청한 후손은 있었다는 것이 블랙코미디.... 결국 문화재 위원회는 4년만에 별황자총통의 국보 지정을 철회하고 국보 274호는 영구결번으로 남게 됨. 마지막으로 다시 빡치는 tmi 하나. 이 물건을 국보로 지정할 때 심의 과정에 참여한 문화재 위원회 중 군사유물 전문가는 1명도 없었다는 것.... 존나 뭘 믿고 국보 지정한 거임? 2. 1등만 기억하는 더러운 세상 이 안타까운 사연의 주인공은 국보 제 278호 이형 원종공신녹권부함임. 대체 저게 뭔 소린가 하면 쉽게 말해서 공신 임명장이라는 소리임. 조선 초기 태종 시절, 이형이라는 사람에게 태종이 내린 공신 임명장&보관함이 나란히 국보가 되었다는 말임. 조선 전기 공신에 대한 대우와 공신록 양식을 연구하는 귀중한 역사적 자료라 당당하게 국보로 선발됨. 그런데 이게 왜 국보에서 쫓겨났느냐.... 여기에는 무척이나 슬픈 사연이 있음... 우리가 잘 아는 올록볼록한 인성의 철퇴같은 이방원에겐 모두 두 종류의 공신이 있었음. 하나는 좌명공신이요, 다른 하나는 원종공신임. 둘 사이에 무슨 차이가 있냐면 좌명공신은 정공신, 즉 찐공신들이 받은 공신직임. 방원이의 철퇴메이트 하면 딱 떠오르는 하륜, 이숙번, 이지란 등이 바로 이 좌명 공신을 받음. 누가 봐도 아, 저 사람은 이방원을 위해 철퇴의 짜릿한 손맛 좀 많이 봤구나! 심은 사람들 47명이 좌명공신에 임명 됨. 그럼 원종공신은 무엇이냐? 쉽게 말해 명예 공신직, 짭공신이라고 생각하면 됨. 좌명공신 시켜주기엔 급이 딸리는데, 그렇다고 공신 안 시켜주면 삐질 것 같은 애매한 애들... 그런 애들이 원종 공신이 됨. 이제 좀 감이 오지....?ㅎㅎㅎㅎㅎ 2006년에 찐공신증인 ‘마천목 좌명공신녹권’이 보물 1469호로 새롭게 지정된 것임. 심지어 태종이 발급한 47개의 찐공신증 중에서도 유일하게 남은 물건... 근데 이렇게 하고 보니 행태가 뭔가 미묘했던 거임. 찐공신증이 보물인데 짭공신증이 국보라니 에어팟을 두고 차이팟을 국보 시키는 기분이기도 하고 그래서 지난 2010년, 문화재 위원회는 고심 끝에 이형의 짭공신증을 국보에서 보물로 강등시킴. 그딴 식으로 굴지 마라 인간들아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 3. 짭인 듯 짭은 아니지만 결국은 짭인 너 이번엔 국보가 아니라 보물 이야기임. 보물 제1173호였던 남은유서분재기가 그 주인공임. 사실 보물 1173호는 남은유서와 남재왕지라는 임명서가 한 쌍이지만 귀찮으니 남은유서만 말함. 어차피 탈락된 이유는 같거든 일단 남은유서분재기가 뭔지 먼저 설명하겠음. 조선 초기 남은이라는 사람이 남긴 유서라고 보면 됨. 참고로 남은 죽인 사람 저기 위에 방원이ㅎ 뭐 내용은 딱 유서 내용임. 자식들아 나 죽는다... 제사 꼬박꼬박 지내주렴... 전답은 누가 가지고 노비는 누가 가지고 금 허리띠 은병은 대대손손 물려줘라... 이런 내용이 전부임. 그래도 조선 초기의 유산 상속 방식을 알 수 있는 귀한 물건인 것은 맞아서 보물로 지정되었는데, 이전부터 꾸준히 원본이 아니라는 논란에 시달려왔음. 그 증거 중 하나가 바로 수서(手書)라는 단어였는데, 손으 쓴 글, 즉 손수 적었다는 뜻임. 근데 이 수서라는 단어는 중종 이후에 보편적으로 쓰이기 시작한 단어고, 남은이 살던 조선 전기에는 자필(自筆) 이라는 용어를 썼다는 것이 문제였음. 학자들은 별황자총통처럼 악의적 주작은 아니고, 남은의 후손들이 원본을 필사한 물건으로 추측하고 있음. 원본을 필사하는 도중에 몇 글자 오타를 냈다고 보는 것임. 그래서 전체적인 골자는 원본이 맞긴 한데 어쨌건 원본이 아니기는 아닌... 그런 애매한 물건이 되어 벌임... 그래서 남은유서분재기는 2010년 보물에서 강퇴당하고 일개 골동품 1로 돌아감. 학술적 가치가 풍부한 건 맞아서 좀 안타까운 경우라고 함. 4. 그때는 맞고 지금은 틀리다 여기에는 한때 보물 5호였던 중초사지 삼층석탑이 속함. 삼층석탑은 1935년 조선총독부에 의해 보물로 지정됨. 그러던 1997년 문화재관리국은 일제가 지정한 국문화재들을 재검토하기 시작했고 그 과정에서 중초사지 삼층석탑은 연대가 고려 중기 것으로, 다른 석탑들에 비해 최신 물건인데다 조형미도 떨어진다는 이유로 보물 자격을 박탈당함. 지금은 그냥 경기도 문화재로 사는 중. 5. 문화재가 있었는데요... 없습니다. 여기에는 아주 가슴 아픈 사연의 문화재들이 해당함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 바로 화재 등으로 소실된 문화재들이 여기 속하기 때문임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 대표적인 예가 바로 낙산사 동종임ㅠㅠㅠㅠㅠㅠㅠㅠㅠ 예종이 아버지 세조의 극락왕생을 위해 만들었다는 낙산사 동종은 보존 상태도 훌륭하고 조형도 좋아 보물로 지정되었음. 보존 상태가 얼마나 좋았는지 소실되기 직전까지도 실제 타종에 이용되엇다고 함. 그러나 2005년 4월4일 강원도 양양에서 시작된 산불이 바람을 타고 낙산사로 번졌고... 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 종각의 재질이 목재템이라 더 크게 탔다고 함....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 낙산사 동종은 이후 복원을 거쳐 현재는 새로 만든 종이 자리에 세워져 있지만 복원품은 보물이 될 수 없다는 문화재청의 규정에 따라 보물 479호는 영구 결번으로 남음...ㅠㅠ 여기서 예리한 사람들은 떠올린 문화재가 하나 있을거야. 그렇다면 숭례문은...? 불에 타서 복원한 것도 같은데 숭례문은 국보의 자격이 있나? 이에 관해서 문화재청은 1층 누각은 전소가 아니라 10%의 손실만 입었을 뿐이기에 자격을 박탈할 이유는 없다고 본 것 같음.(낙산사 동종은 진짜 심각하게 훼손되었음.) 글쎄 논란이 없지는 않은 것 같은데,  개인적으로 국보 1호가 결번이면 너무 슬플것 같음..... 6. 일 똑바로 안 하지 보물 제341호 청자상감모란문표형병은 대한민국 보물들 중에 가장 짧은 이력을 가지고 있음. 1963년 1월21일 보물로 지정된 이후, 단 24시간도 지나지 않은 1963년 1월21일 보물에서 해제 되었기 때문임. 어째서? 짭이어서? 놉. 진품임. 이유는 존나 황당함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바로 국보 제116호랑 중복 지정이어어섴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소개합니다!! 국보 제116호인 청자 상감 모란문 표주박모양 주전자입니다! 보물 제341호 청자상감모란문표형병과는 동일 문화재입니닼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엌ㅋㅋㅋㅋㅋㅋㅋ 심지어 국보가 된 날짜는 1962년 12월 20일로 보물로 지정된 1963년 1월21일과 한 달 차이밖에 안 남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문화재청놈들이 이미 한 달 전에 국보로 뽑아놓고는 또 보물로 지정했다가 급히 정신차리고 취소했다는 말임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대체 왜 이런 해프닝이 벌어졌는지에 대해서는 알려진 바가 없음. 아마 쉬쉬하고 묻어버렸겠지...ㅋ 아무래도 이 청자가 너무 아름다워서 두 번 지정하고 싶었나 봄. 완전 대한민국 국보 면접 프리패스상 아님? 보물로도 뽑히고 국보로도 뽑혔으니 사실상 대한민국의 1등 문화재가 아닐까... 출처 오매.. 신선하네.... 재밌다 ㅋㅋ 이런일이..!
공포게임에서 AI가 너무 똑똑하면.jpg
일반적인 공포게임에서의 괴물 AI는 크게 정해진 곳 없이 추적 수색을 하다가 시야에 들어오는 유저를 추격하는 추격자 형태이거나(ex화이트데이) 일정 구역을 계속해서 순찰 탐색하는 순찰자 형태로 나눌 수 있다(ex아웃라스트) 이러한 형태의 AI들은 결국 유저가 게임 플레이에 익숙해지면 추적자를 농락하거나 정해진 순찰 구역만 알게되면 괴물과 마주치지 않고 피해서 게임 플레이가 가능해지는데 '에일리언 아이솔레이션'은 이러한 공포게임의 고질적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두 가지의 AI를 사용하였다 하나는 일반적인 추적자 AI이고 다른 하나는 플레이어의 모든 정보를 알고 있는 관찰자 AI이다 추적자 AI는 관찰자 AI에게 정보를 받아 추적을 시작하는데 관찰자 AI는 추격자 AI에게 추상적인 정보만 알려주게끔 설계가 되어있다 그러면 추적자 AI는 대략적인 플레이어의 위치 정보를 바탕으로 그 주변 일대를 수색한다 때문에 플레이어는 게임 내에서 에일리언에게 항상 추격당하지만 에일리언은 내 위치를 정확히 알고 있지 않기 때문에 계속해서 도망쳐야 하는 세밀한 추격시스템이 완성되었다 또한 플레이어가 게임내에서 에일리언에게 저항하는 수단들은 일정 횟수 이상 사용하면 AI가 그에 대응하게끔 설계하거나 (ex초반 에일리언 조우시에는 화염방사기로 대응하면 물러나게 할 수 있지만 계속 사용하면 어느순간부터 개나리 스탭 밟으면서 피해서 달려들음) 인게임에서 마이크에 들리는 숨소리만 듣고도 플레이어를 추적하는등 플레이어가 인간을 학습하는 미지의 괴물을 상대하는 느낌을 생생하게 느끼게끔 만들어졌다 이러한 뛰어난 AI설계는 유저들에게 많은 호평을 받음과 동시에 게임 난이도가 너무 어렵고 에일리언이 너무 무서워서 게임을 못하겠다는 혹평을 함께 받았다 출처 와씨 개무섭다ㅠㅠㅠㅠ 근데 혹시나 드는 생각인데 양자역학적으로 이 세상이 게임속세상과도 같다면 언젠가 저런 삽소름돋는 외계인이 나타날 수도 있지 않을까 싶음 ㄷㄷㄷ 무섭다고요
이런 게 있어?! 당신의 흥미를 돋울 이색적인 물건들
뜨개질로 만든 잠만보 [IDEA RABBIT] 실생활에 직접적으로 필요한 것은 아니지만, 갖고 싶은 물건들이 있다. 독특한 디자인과 이색적인 기능을 가지고 있어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기 때문이다. 이러한 디자인의 물건들은 대부분 “기분이 좋아진다”라는 놀라운 효과가 있다. 당장이라도 주변 사람들에게 자랑하고 싶은 유쾌한 기분을 가져다주기 때문에, 정신 건강에는 이로운 결과를 전달한다. 물론 금전적인 주머니 사정에는 악영향을 끼칠 수 있으니 무작정 구매하는 것엔 대해서는 많이 생각해봐야 한다. [글: Idea Rabbit News Editor] 입체적인 지구본 퍼즐 숲속처럼 꾸며진 버스 인테리어 정육점 문 손잡이 꽃게 펜 홀더 3D 프린터로 만든 모아이 석상 티슈 케이스 고양이를 위한 DJ 스크래쳐 와인 애호가를 위한 신발 해양 플라스틱 쓰레기로 만든 기타 화장실의 휴지 선반 강아지를 닮은 조명 잔디 위를 걷는 듯한 샌들 지퍼가 노출되지 않는 도난 방지용 가방 6번째 손가락 뜯기 쉬운 택배 전용 테이프 스케이트보드 유모차 팔이 저리지 않는 베개 전구 명함 책상 위 아늑한 텐트 스팀펑크 조명 별이 있는 침대 베개로 사용할 수 있는 후드 야간 독서를 위한 조명 킹 콘 고양이 가구 양말 출처ㅣ아이디어래빗
조선시대 백정은 왜 차별받았는가
백정이 조선시대에 최하위 계층이었다는건 다들 알거임 왜 이들이 이렇게 욕을 먹었는가에대해 알아보자 다만 나는 이 차별을 정당화하려는건 아니므로 이상한 오해는 금지 이들은 유목민의 후예로 추측되는데, 한 곳에 정착을 못하고 말을 잘 탔기 때문이다. 이들은 고려시대에는 '양수척'이라고 불렸었다. 신하들 : 전하 백성들이 양수척이랑 같이 지내기 싫어합니다. 불쌍하니까 얘네한테 토지 줘서 농사짓게 합시다. 그럼 얘네들도 일반 백성처럼 변하지않을까요? 왕 : ㅇㅇ그렇게하게 신하들 : 이름도 바꿉시다. 백정이라고 지으면 딱 좋을듯. 고려시대에는 백정=일반 백성 이었으므로 조정에서는 나름 좋은 의도로 백정이라는 이름을 붙인거였다. 이들이 일반 백성과 함께 살길 바랬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들의 꿈은 산산조각나게 되는데... 어느날 어느 마을이 불타게되는데 신하들 : 전하 어제 화재난거 범인을 잡았는데요 백정 무리들이었습니다. 근데 다는 못잡고 몇명만 잡았는데 얘네들은 무기들고 다녀서 생포하긴 어려워요 범인은 백정이었다. 이 녀석들은 말을 타고 무기를 들고다녔으며 화재도 저지르고다니는 노답 개무리였던거다 괜히 일반백성들이 피해다녔던게 아니다 거기다 잡힌 백정 중에는 남장한 여자도 있었는데 이들도 남자들과 함께 말타면서 강도짓하고 다녔다. 왕 : 그래도 어떻게 좀 해봐 어떻게든 교화시켜서 백성들이랑 잘 지내게해야지 신하들 : 그럼 군대도 보내고 교육이라도 시킬까여? 왕 : ㅇㅇ그렇게해봐 나름 조선 정부에서는 얘네들 학교도 보내줬다... 그러나 백정들은 바뀌지않았고 일반 백성들과의 사이는 계속 나빠졌다. 농민은 백정을 살해하고 백정은 농민을 살해하고 같은 백정끼리도 개싸움하다가 서로 죽이는 개노답 상황이 된 것이다. 왕 : (ㅅㅂ...왕도 못해먹겠다 진짜....) 신하들 : 전하 얘네들한테 토지 주고 교육 기회 줘도 전혀 말을 안듣는데 그냥 얘네들 싹 다 어디 쳐넣으면 안돼요? 어차피 범죄자들 절반 이상은 다 백정이던디 왕 : 그래도 얘네 교화시키는 방향으로 가자 수령들이 마을에 있는 백정들 좀 제대로 관리하면 좀 나아지지 않을까 관리들 : 야 이 백정 놈들아ㅠㅠ 너네 왜 농사안짓냐 우리가 땅까지 다 줬잖아ㅠㅠㅠ 백정 : 야 농사 짓는거 개힘들더라ㅋ 힘들게 그 짓을 왜함??ㅋㅋㅋㅋㅋ 남의 꺼 뺏으면되지ㅋㅋㅋㅋㅋㅋㅋ 그래도 조선은 포기하지않는다 신하들 : 전하 오랫만에 좋은 소식 들고왔습니다^^ 한 백정이 도둑놈을 떼려잡았다는 소식입니다 왕 : 오ㄹㅇ? 그것 참 좋은 소식이구만 걔한테 벼슬도 주고 다줘 드디어 효과가 나오는건가?ㅎㅎㅎㅎ 신하들 : 응 아니야 범죄자들 중 8할이 다 백정임ㅎ 이 새끼들 강도 살인 방화 등 안저지르는 범죄가 없음요 아예 백정마을 자체가 합심해서 단체로 강도짓하는 경우도 있고요 그리고 걔네들 체포하려고 하면 활 들고 설쳐서 오히려 우리 관군들이 다치고옴;; 상황이 이렇다보니 백정이 농사 안짓고 범죄 저지름 → 백성들이 피함. 관리들도 어차피 쟤네들 농사안하니까 땅도 안주기 시작 → 백정들은 땅이 없어서 농사를 더 안하게됨 이런 악순환이 반복되기 시작한다 얼마나 이들의 범죄율이 높았는지 과거시험에 백정들의 범죄율을 낮추려면 어떻게 해야하는가가 문제로 나온적도 있었다. 신하들 : 전하 그냥 백정과 백정끼리 결혼못하게 합시다 강제로 일반 백성들과 혼인시키면 어떻게든 동화되지않을까요? 농민들 : 뭐래.... 우리가 왜 저런 범죄자들이랑 결혼해야함;; 농민들에게도 백정은 믿고거르는 놈이 되어버렸다. 신하들 : 전하 이제 백정이라는 말 사용못하게합시다 좋은 의도로 지은 백정이라는 호칭은 이제 욕이 되어버렸다 이 당시 패드립으로 "니 아빠 백정"이 쓰였을정도니 말 다한거다 신하들 : 전하 백정이 또 왕 : 그놈의 백정백정ㅅㅂ!!! 노이로제 걸려 뒤지겠네ㅠㅜ 수령들한테 백정 관리 좀 잘하라고해 그리고 요즘 백정한테 땅 안주는 관리들도 있다던데 그러지마라 진짜ㅡㅡ 신하들 : 아니 전하 100년간 노력했는데도 실패했다는건 안된다는 겁니다. 백성들을 위해서라도 그 새끼들은 족쳐야한다니까요? 밤에 백정 마을 한번 덮칩시다 왕 : ㅅㅂ... 물론 이들의 노력이 완전 헛수고인것은 아니었다. 중종 대에 오면 백정들의 범죄는 상당히 줄어드는 모습을 보인다. 그래서 백정에대한 이미지가 그나마 괜찮아지나 싶었다. 임꺽정 : 응 아니야^^ 명종 대에 백정출신의 도적인 임꺽정이 나타나는데 우리는 그를 의적이라고 알고있지만 실제 실록을 보면 딱히 의적의 모습은 드러나지않는다. (다만 당시 너무 살기 어려웠기 때문에 도적이 나타날만 하다는 사관의 평이 있긴하다) 임꺽정의 처형 이후로 백정들의 범죄율은 많이 사라지게 된다. 백정들이 드디어 정착하며 살게됐기 때문이다. 선조 : 백정들 잘 싸우잖아 걔네들을 군대에 편입시키면 안되나? 임진왜란이 터지자 백정을 병력에 활용하려는 방안이 제시되기도 했는데 신하들 : ㄴㄴ예전 백정이랑 지금 백정은 다름 요즘 백정들은 존나 비리비리해가지고 오히려 군대가면 더 민폐입니다. 이 때의 백정은 예전백정과 달리 이미 한 곳에 정착한 상태였던지라 딱히 전투 능력이 없는 상태였다. 이처럼 초기 백정과 후기 백정은 아예 다른 집단으로 봐도 될 만큼 성질이 달랐다. 농민들 : 백정?? 걔네들 완전 무개념 집단 아니냐? 그러나 백정=범죄자 라는 인식은 전국민들에게 완전히 자리잡혀 시간이 가도 사라지지 않게 된다. 출처 오 완전 흥미진진썰 ㅋㅋ 이렇게보니까 또 완전 색다름
중국의 티베트 만행
이 사건을 설명하려면 우선 티베트불교의 환생과 달라이라마와 판첸라마의 관계, 중국과 티베트에 대해 설명해야함 1. 티베트에서는 모든사람이 환생한다고 믿음 2. 티베트불교의 몇 고승들은 환생을 찾아 지위를 이어감 3. 판첸라마와 달라이라마는 현재 11대, 14대째 환생자임 4. 중국은 티베트지역을 봉쇄하고 티베트승려들을 탄압중 환생이라는게 우리한테는 흠..스럽지만 암튼 저쪽지역에서는 쭉 이어져온 세계관(?)이라 하니 뭐 걍.. 그런갑다..하고 읽으면 사건이 이해가됨 이 사람은 티베트 불교서열 1인자 13대 달라이라마임. 중국과 티베트가 영토분쟁 중이던 1933년에 죽음 티베트 불교계의 서열 2인자인 판첸라마가 달라이라마의 환생자를 찾고, 공인하고, 교육하는 임무를 맡고 있음 이에 따라 9대 판첸라마가 현 14대 달라이 라마를 찾아서 교육했음 이사람이 9대 판첸라마임 ↓ 14대 달라이라마 텐진 갸초는 2년후 티베트 국경지역 농민의 아들로 태어남 그리고 네 살의 나이에 티베트 국왕에 즉위함 아래 막 찾았을당시 아기 달라이라마 우리가 아는 얼굴은 이거일거임 1937년에 9대 판첸라마가 급사하고 14대 달라이라마가 10대 판첸라마를 찾아서 교육함 50년대에 같이 찍은 사진임 왼쪽이 10대판첸, 오른쪽이 14대달라이 이 10대 판첸라마는 1989년에 죽음 10대 판첸라마가 죽었기 때문에 11대 판첸라마를 찾아야 했고 달라이라마와 판첸의 제자들이 수년동안 환생자를 찾아다닌 끝에 1995년 한 티베트 마을에서 6세의 소년 '게둔 최끼 니마'를 판첸라마의 환생자로 확인하고 공표함 얘가 게둔 최끼 니마임↓ 환생자를 찾고나면 일정한 의식을 거쳐 즉위식을 한 후 대대로 판첸라마가 주지로 있던 타쉬룬포 사원의 주지가 되어야함 그러한 절차를 남겨놓고 있었는데.. 여기서 짚고 가야할것이 타쉬룬포 사원은 현재 중국에 속해있음 환생자를 찾았다고 공표한지 3일만에 중국 정부가 이 소년과 가족들을 납치함ㅋ 그리고 자기들이 진짜 판첸라마를 찾았다면서 기알첸 노르부라는 애를 11대 판첸라마라고 마음대로 앉힘ㅋㅋ ↓기알첸 노르부 즉위식 참고로 이 애의 부모는 공산당원이었음 그리고 이 아이는 사원의 주지스님으로 중국의 비호 아래 자랐고 성인이 되고나서 아래처럼 중국인민정치위원이됨 ㄷㄷㄷ 이런 상황이 당연히 문제일 수 밖에 없는게, 리얼 판첸라마의 환생자를 찾고 교육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14대 달라이 라마 사후 환생한 15대 달라이 라마를 찾아서 공인할 자격은 판첸라마에게 밖에 주어지지 않았음 현 달라이라마는 알다시피 언제죽어도 이상하지 않을 나이임 중국은 이 점을 이용해서, 자신들이 내세운 판첸라마를 이용해 후대 달라이 라마 역시 자기들 입맛에 맞는 인물로 내세우려는 것.. 그래서 달라이 라마는 독일매체와의 인터뷰에서 "환생을 하지 않을 수도 있다"는 뜻을 내비침 (오래된 전통을 끝낼수도 있다) 그러자 중국이 노발대발함ㅋㅋㅋㅋ "왜 니맘대로 환생 안한다고함? 너 환생해야됨ㅋㅋ 니맘대로 정하지마" 라고함ㅋㅋㅋㅋㅋㅋㅋㅋ 미신같은거라면서 티베트불교를 탄압하던 중국정부가 달라이라마보고 환생하라고 윽박지르는 상황이됨ㅋㅋㅋㅋ 아래는 2011년 유툽에 올라온 티베트 잠입취재인데 티베트지역에 들어가면 폰이안터지고 인터넷도 안되며 외국인은 출입금지임 저상황이 지금까지 계속되고있음 중국정부는 중국에 반대하는 승려들을 다 죽이거나 강제로 파계시키고 (강제로 남승과 여승이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관계를 맺게해서 스스로 파계하게 만들거나 자살하게 만들기도 함 개막장임) 친중국성향 승려들로 그 자리를 채워넣고있음 현재 티베트지역은 이주 한인들이 기득권을 차지해버렸고 경제난속에 회유당한 티베트인들이 점점 많아지고 있음 이러한 상황이라 달라이 라마가 죽고나면 지도자를 잃은 티베트의 독립은 정말로 힘든 일이 될 수 밖에 없다는 것이 대다수의 의견 참고로 중국정부에 의해 납치된 게둔최끼니마는 아직까지 행방이 불분명함 중국정부가 몇년전에 "우리의 보호아래 평범한 삶을 살고 있으며 부모는 당에 고용되었고 아이의 형제자매는 대학에 다니고 있음^^" 이라고 말했지만 진실은 알 수 없음 ㄷㄷㄷ 이종격투기카페 펌
소름끼치게 예쁜외모 갖고 10억 받기의 현실판같은 한 배우의 일화
1. 중고등학교때 레슬링하다가 부상 입고 연기로 전향함 첫 오디션 지원은 단역이었는데 바로 붙었음. 그래서 생전 처음으로 촬영장에 갔는데  감독이 자길 보자마자 "벨리시모...벨리시모..." 하더니 갑자기 없던 단독 대사를 주고 팬티에 가까운 트임 숏팬츠 입히더니 영화 찍게 함 나중에 알아보니 벨리시모=아름답다의 최상급 단어 2. 다음 오디션도 단역에 지원함, 그리고 또 합격함. 근데 비중있는 조연으로 합격해버림 엥? 전 단역 지원했는데요 하니 너한텐 더 좋은 거 아님? 그래서 그건 글쵸 하고 찍게 됨 덕분에 살면서 두번째로 찍은 영화인데 포스터에 얼굴이 대문짝만하게 등장함 데뷔한지 1년도 채 되지 않았는데 조연까지 와버림 3. 그 다음 영화는 원래 에이전트 측에서 이 배우를 오디션 없이 바로 주연으로 뽑으려 했는데, 감독이 캐스팅 반대함.  왜냐면 전에 조연으로 나온 영화에서 개또라이미친놈 역을 맡은 바람에 중산층 도련님 역할에 어울릴 리가 없다고 판단.  (감독이 "저녀석을 조엘에 캐스팅하라고? 저녀석은 살인자야! 가서 호러무비나 찍으라고 해!" 라고 실제로 말했다 함 대체 얼마나 안어울린다고 생각했으면ㅋㅋ) 그래서 일단 카메라 테스트 받으러 감, 바로 합격함 참고로 살면서 단 한번도 오디션 떨어진 적이 없다고 함 3-1. 그 영화가 북미 흥행 대박치고 순식간에 라이징 스타가 됨. 밖에 나가서 밥을 못 먹는 수준 촬영 당시 레이벤 선글라스를 착용했는데 영화 개봉 후 레이벤 매출이 80% 증가함...  걍 끼고 영화 찍었을 뿐인데 당시 스타일과 맞지 않아 파산 직전이던 레이밴을 살려낸 구세주 됨 그리고 한 번도 연기 배워본 적 없었는데 첫 주연작으로 골글 남우주연상에 노미됨 이 모든 게 데뷔 3년차에 일어난 일 4. 그 영화와 같은 연도에 개봉한 다른 주연 영화도 있었는데 (이거임) 이 영화를 본 한 감독이 자신의 영화에 주연으로 캐스팅하고 싶어서 2년 동안 설득함.  첨엔 계속 완강히 거절하다가 전투기 체험을 한 뒤 자신이 대본 수정한다는 전제 하에 수락하게 됨 역할은 반항적인 젊은 천재 해군 파일럿 5. 그렇게 촬영하고 개봉한 영화는 개봉 첫 주부터 미친 수익을 벌어 들이더니 그 해 전세계 박스오피스 1위의 영화가 됨  영화 하나 찍었을 뿐인데 그 해에 해군, 공군 가리지않고 입대지원자가 폭발적으로 증가함. (미해군은 지원자 5배 증가함) 영화 내에서 착용한 레이밴은 매출이 40% 더 증가 이 영화에서 월드 프리미어를 돌자고 먼저 제안함, 할리우드 월드 프리미어의 창시자가 됨 그리고 이 영화로 데뷔한 지 겨우 5년, 24살의 나이로 전세계의 탑스타가 됨 5-1. 후에 저 영화를 인상깊게 본 레이건 대통령이 만남 청해서 만남 이왜찐 6. 님 얼굴은 작품으로 남겨야 한다며 앤디워홀이 초상화 그려줌 위 그림 밑 사진 6-1. 그 뒤 앤디워홀, 키스해링과 마돈나-숀펜 결혼식 참석도 함 ㅈㄴ그사세 7. 그냥 흰티, 청바지, 항공점퍼를 걸쳤을 뿐인데 수트 팔던 하이패션 브랜드들이 똑같은 흰티, 청바지, 항공점퍼에 지들 브랜드 박아서 팔기 시작함 내의였던 흰티를 패션으로 만든 게 말론 브란도라면 이 패션을 하이엔드로까지 전파하게됨 쟤 때문에 티쪼가리 하나가 수십만원 한다고 원망도 들음.  그냥 늘 입던대로 청바지에 흰티 입고 나갔는데 패션 잡지들이 찬양하면서 "미국 캐쥬얼의 왕" 이라고 이름 붙여줌 밑은 당시의 실제 지큐 기사 THE KING OF CASUAL AMERICANA In the past few years, you’ve probably noticed expensive plain T-shirts with fancy designer labels. And you might have wondered, When did the humble T-shirt become fashion? You’re looking at the answer. [미국 캐주얼의 왕] 지난 몇 년 동안 당신은 평범한 티셔츠가 디자이너 브랜드를 달고서 값비싸게 팔리는 것을 봤을 것이다. 혹시 궁금했던 적은 있는가? 대체 언제부터 평범한 티셔츠가 패션이 되었는가? 당신은 지금 그 대답을 보고 있다. If you're wondering what to wear today, we suggest exactly this. 당신이 오늘 무엇을 입어야 할지 고민중이라면, 바로 이대로 입을 것을 제안한다. 8. 그 다음 영화 찍었더니 레이밴 매출 15% 더 증가 (이후 미임파 2로 39% 또 증가) 이쯤되면 레이밴은 뭐라도 줘야 하는 거 아닌가 9. 이후 모든 필모가 승승장구함 그 와중에 썩토 5퍼 막장극마저 <톰 크루즈> 단 네 글자로 대흥행시킴 추후에 동료배우가 '그는 칵테일 같은 영화조차 흥행시켰다' 라고 말하게 되는... 게다가 그냥 흥행만 시킨 게 아니라 당시 칵테일 문화를 뒤집어 엎어버림 전세계에 칵테일 붐을 일으키고 동네마다 칵테일 바가 생기게 하고 바텐더들이 칵테일쇼를 하게 만듦 이시기에 바텐더 된 사람 중 이 영화를 보고 꿈을 키웠던 사람도 많다고 한다 +) 얼마나 어린나이에 성공했는가를 보여주는 80년대 파라산 75주년 단체사진 쟁쟁한 배우 사이에 박혀있는 뽀송한 빨간 니트... 톰 크루즈의 데뷔 후 20대 중반 정도까지의 일화임ㅋㅋㅋ 출처ㅣ해연갤
고릴라는 난폭하다? 알고보면 순둥이
할리우드를 대표하는 괴수 킹콩 여러 차례 영화화가 이루어졌으며 대중들이 기억하는 킹콩은 양 주먹으로 가슴팍을 두들기는 고릴라의 모습이다. 그리고 본 영화의 영향 탓에 고릴라가 호전적이고 난폭한 짐승인 것처럼 인식되고는 한다. 인상이 험상궂은 것도 한 몫을 하겠지만. 그러나 고릴라는 양순한 초식동물이다. 짤에서 보이는 고릴라는 '코코'라는 이름의 암컷 고릴라로 어린 시절 밀렵꾼들에 의해서 눈 앞에서 어미를 잃은 친구다. 생전에 올볼이라는 새끼 고양이를 애완동물로 키웠는데 올볼에게 선물할 장난감을 직접 고르기도 하는 등 지극정성이였다고. 엄마 미소를 짓고 있는 코코 코코는 2000가지의 단어를 이해하고 이를 수화로 표현할 수 있었기에 훗날 자신이 아끼던 고양이가 차에 치여 죽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자 "슬프다. 웅크린다. 운다. 보고싶다. 고양이 잔다." 등의 감정표현을 하면서 몹시 슬퍼했다고 한다. 또한 친구였던 할리우드 배우 로빈 윌리엄스가  죽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는 입술을 파르르 떨면서 눈물을 흘리기까지 했댄다.  그것도 박사의 전화통화를 엿듣다가 그가 죽었음을 알았다는 것. 동료 고릴라가 죽었을 때도 이와 같은 반응을 보였는데 죽음이라는 것이 무엇인지를 알고 있다는 이야기. 영화를 보다가도 슬픈 장면이 나오면 보지 않으려고 등을 돌려서 '슬픔, 사랑, 이별' 등을 이야기했다고 한다. 고릴라가 우리에 떨어진 어린아이를 보호한 사례도 있다. 동물원의 고릴라 우리에 어린 아이가 떨어진 적이 있었는데 덩치 큰 고릴라 한 마리가 아이에게 다가가자 지켜보던 사람들은 안타까움에 발을 동동 굴렀으나 오히려 그 고릴라는 아이를 지키기 위해서 다른 고릴라들의 접근을 막고 정신을 차린 아이가 울자 자기 때문에 우는구나 싶었는지 멀찌감치 물러서기까지 하더랜다. 덕분에 아이는 무사히 구출되었다. 오히려 침팬지나 개코원숭이 등이 고릴라보다는 호전적인 편이다. 미국에서도 가정에서 애완동물로 키우던 침팬지가 손님을 습격해서 면상을 곤죽으로 만들어놓았다는 이야기가 있고 개코원숭이나 맨드릴은 표범과도 종종 드잡이질을 벌이는 반면에 고릴라는 의외로 겁도 많고 온순해서 위협을 느끼면 도망치는 게 보통. 그러나 무리를 이끄는 우두머리인 실버백 고릴라는 싸워야 될 때는 싸운다. 별명이 실버백인 이유는 등에 난 털의 빛깔이 은회색이라서 그렇댄다. 무리를 위협하는 침입자나 도전자와 싸울 때가 있는데 고릴라는 한 마리의 수컷이 여러 마리의 암컷을 거느리는 일부다처제라서 도전자에게 패배하면 암컷들을 모두 잃게 된다고 한다.  고릴라의 주력은 역시 힘 싸울 때는 이렇게 싸운다. 인간처럼 펀치를 사용하지는 못하고 쥐어뜯거나 물어뜯는 방식으로 싸우는데 사실 펀치를 사용할 정도로 섬세한 근육도 없거니와 주먹은 인간에게나 유용한 것이지 짐승들의 싸움에서는 주먹질할 시간에 물어뜯는 게 더 효과적이다. 같은 방식으로 투견을 찢어버린 적이 있다. 1911년 미국에서 고릴라와 투견을 철창에 넣고 싸움을 붙인 적이 있었는데 기사내용을 보면 고릴라는 자신에게 달려드는 투견을 낚아채더니  머리를 물어서 골을 부수고 허리를 접어서 온몸을 찢어버렸다고 적혀있다.  비록 온순한 고릴라지만 위급한 상황에 내몰리면  부득불 호전성을 드러낼 수 밖에 없는 것.  그리고 고릴라에게 도전장을 내밀었던 왕년의 타이슨 물론 동물원 직원들이 말도 안되는 소리 하지말라고 거절해서 대결은 성사되지 않았지만 진짜 싸움이 붙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과연 타이슨이 목숨을 부지할 수 있었을지 궁금하군. 아마 지금은 타이슨도 그 동물원 직원에게 고맙게 생각하고 있지 않을까? "어? 폰놔두고 왔네." 고릴라의 힘은 영장류 최강이지만 그 성격은 온순하다. 일부러 괴롭히지만 않는다면 인간이 고릴라 때문에 피해를 입는 일은 없을 것이다. 오랫동안 인간과 함께 살았으면 좋겠다.  공포갤러리 히죽님 펌
한국ㆍ일본처럼 사이가 안좋은 아시아 국가들
1. 말레이시아 - 인도네시아 같은 이슬람종교를 믿고 언어도 비슷한데 사이가 나쁘다. 말레이시아가 UN 비상임이사국이 되자 인도네시아가 항의차원에서 탈퇴를 했다가 다시 복귀한 일도 있었다. 전통무용이나 음식, 옷감 염색방식 등을 놓고 원조전쟁까지 벌인 사이. 단순 국력에서는 인도네시아가 우세하다. 일단 인구수에서 9배 정도 차이가 나기 때문이다. 하지만 1인당 국민소득으로 따지면 말레이시아가 거의 3배 가량 높기 때문에 인도네시아에서 말레이시아에 허드렛일 하러 건너오는 사람들이 꽤 많다. 그러다보면 이런저런 이유로 불법체류자도 발생하기 마련인데, 말레이시아에서는 불법체류자를 태형으로 엄히 다스리므로 이런 가혹한 처벌도 당연히 양국간의 감정을 악화하는데 일조하고 있다. 2. 미얀마 - 태국 인도차이나 반도의 패권을 놓고 충돌했던 역사적 라이벌. 미얀마는 괜히 인도에 있던 영국군을 자극해 식민지배를 당할 빌미를 제공했던데 비해 태국은 국왕들의 외교력으로 주권을 유지했는데, 이러한 근대사는 양국 국민감정을 자극하는데 기여한다.(식민지배 당한 바보 vs 굴종외교로 살아남은 겁쟁이) 현재 태국과 미얀마는 국가 차원에서는 친구사이임을 강조하고 있지만, 태국사람들은 미얀마사람들을 불법 이주노동자로, 미얀마사람들은 태국사람들을 거만한 졸부로 볼 수 밖에 없는 상황이다. 3. 인도 - 파키스탄 카슈미르에서 세번씩이나 전쟁을 벌였으며 국제사회의 반발을 무시하고 서로 핵개발 경쟁도 강행했다. 유명한 앙숙이라 항상 국제적인 이목을 끌고 있다. 게다가 파키스탄은 중국의 유일한 우호국가이고, 인도는 중국과 철천지 원수 & 미국의 절친한 동맹국이기까지 하니 가히 앙숙관계 4. 이라크 - 이란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적대관계를 자랑하는 이웃나라. 같은 이슬람 영향권에 놓이면서도 줄곧 주변 제국에 병합당한 이라크와 달리 이란은 페르시아라는 민족적 자신감에 바탕한 독립세력을 유지해왔다. 게다가 이란은 골수 시아파여서 이웃 이라크의 수니파를 눈엣가시로 삼았으며 영토분쟁까지 벌어졌다. 이렇게 계속 쌓여가던 양국의 악감정은 1980년 이란 - 이라크 전쟁으로 폭발하였는데, 전쟁이 지속된 8년간 100만명이나 되는 사상자를 낳았으며 이라크는 생화학 무기를 풀어 이란을 지원하던 수많은 쿠르드족을 학살하기까지 했다 5. 인도 - 중국 카슈미르 지역 국경분쟁도 원인이고 티베트 관련 문제도 원인으로 이 두 나라는 서로가 서로의 훼방을 놓는 사이이다. 특히 티벳 문제는 티벳의 망명정부를 인도에서 마련해줬다. 게다가 파키스탄은 인도와 핵개발 신경전을 벌이다가 중국(+북한)과 연합했다. 인도는 중국의 힘이 갈수록 커지자 일본과 협력을 시도하고 있다. 6. 부탄 - 중국 부탄이 형님국가로 모시던 티베트가 중국에 강제병합된 이후 중국의 침입을 막기 위해 골수 반중국가가 되었다. 현재도 부탄은 중국과 인접해있음에도 중국식당을 찾기가 매우 힘든 나라인데다가 중국인의 입국이 매우 까다로우며 현지인들은 중국 소리만 들어도 아주 제대로 경기를 일으킨다. 양국은 아예 수교조차 하지 않았으니 말 다했다. 7. 몽골 - 중국 과거 몽골이 원나라로 중국을 지배한 적이 있었으며 이후 명나라에 의해 중국에서 쫓겨났다. 냉전시대에는 같은 공산주의국가 동지로서 잘 지냈지만 냉전체제 몰락 후 내몽골자치구를 놓고 중국과의 사이가 상당히 안좋아졌으며 몽골사람들은 중국사람들을 호자라고 부르며 혐오한다. 특히 중국내 내몽골인들에 대해서는 중국앞잡이 정도로 생각하며 깔본다. 8. 베트남 - 중국 같은 유교국가에 한자문화권에 공산주의 국가라는 공통점이 있음에도 원수지간이다. 역사적으로 중국의 팽창주의에 맞서 가장 격렬한 저항을 보였고, 심지어 원나라까지 격퇴한 나라가 베트남이다. 베트남전 와중엔 중국이 물자를 원조해주는가 싶더니, 미국과의 전쟁이 끝나기 무섭게 중국 - 베트남전쟁을 일으켜 베트남의 뒤통수를 치기도 했다. 2014년 5월 중국에서 베트남국경에 원유시추선을 설치하면서 이에 반발하여 베트남에서 대규모 반중시위가 일어나 다수의 사상자가 발생했다. 지금은 중국을 견제하기 위해 한때는 박터지게 싸우던 미국에 우호적인 제스쳐를 보내고 마찬가지로 중국과 원수지간으로 유명한 인도에게 군사훈련을 부탁할 정도. 9. 필리핀 - 중국 스카버러섬을 두고 중국과 영토분쟁을 벌이고 있는데 중국은 이 섬을 황옌다오라고 부르며 필리핀을 자극하고, 결국에는 중국이 필리핀산 바나나와 파인애플 수입을 금지시켜 필리핀에서는 반중(反中) 및 혐중(嫌中)감정이 일어났다. 게다가 필리핀 대통령궁에서 기자회견을 하던 도중 한 기자가 "중국언론이 도발이라는 표현을 했는데 어떻게 보는가?"라고 묻자 "중국에 이렇게 말해주고 싶다. 샤오신이디앤.(小心一点; 조심해라)" 라고 말한 것. 이로인해 중국에서도 반(反)필리핀 운동이 격화되어 중국정부가 중국인들의 필리핀 방문 및 여행을 금지시키기도 하였다. 출처 ㅋㅋㅋ앙숙이 있을 수 밖에 없음.. 우리만 그런게 아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