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gotgye
10,000+ Views

영국 화가의 눈으로 본 그때 그 조선

‘Portrait of Miss Elizabeth Keith’ by Ito Shinsui, 1922


20세기 일본 화단의 대가로 꼽히는 이토 신수이(伊東深水, 1898-1972)가 그린 키스의 초상화이다.

엘리자베스 키스(1887-1956)

1919년 엘리자베스 키스라는 호기심 많은 한 영국 여인이 극동의 작은 나라 조선을 방문했습니다. 그녀는 곧, 일제 식민 지배에서 신음하는 이 가난한 나라의 사람들과 풍습과 경관에 빠져들었고 깊은 애정으로 이를 그림과 글로 담아냈습니다.

그러나 정작 그녀의 그림은 오랫동안 우리에게는 알려지지 않다가 2006년에야 재미동포 송영달 선생의 노력으로 비로소 빛을 보게 됩니다.

아마, 엘리자베스 키스의 그림을 처음 보시는 분들이 많을 터인데, 1920~1940년대 무렵 옛 우리나라의 모습이 아름답고 정밀하게 나타나 있는 그림들을 보면 경탄을 자아낼 것입니다.


◆ Marriage Procession, Seoul_1921 혼례 행렬


이 그림은 혼례 행렬, 정확히 말하면 신부 행차입니다. 꽃가마가 아주 아름답게 채색되어 있네요.

행렬 앞에는 빨간 모자를 쓴 사람이 신랑 집으로 가마를 인도하여 갑니다. 그 인도자는 백년해로를 뜻하는 기러기를 보자기에 싸서 들고 있습니다.

청사초롱을 든 사람들이 가마 앞뒤에 있고, 동네 아이들이 구경삼아 따라가고, 빨래하던 아낙도 고개를 들어 쳐다보는데, 한 아낙은 길에다 물을 버리고 있네요.

뒤로 동대문이 보이는데, 다리는 청계천의 어느 다리였을 것으로 추정됩니다.


◆ East Gate, Seoul, Moonlight_1919 달빛 아래 서울 동대문


푸른 달빛 아래의 동대문(興仁之門). 이 그림에 보이는 돌담 표현은 목판화로는 하기 어려운 기법이라고 합니다.

키스의 작품 중 가장 뛰어난 그림으로 평가받고 있습니다.

1923년 도쿄 대지진 때 목판 원본이 소실되었고, 이 그림은 키스의 저서 <동양의 창>에 실린 것인데, 현재 누가 실물을 소장하고 있는지는 모른답니다.


◆ East Gate, Pyeng Yang, Korea_1925 평양의 동문


“1392년에 지은 평양 성곽 중 동쪽에 있는 문만이 유일하게 남아 있다. 서울에 있는 동대문만큼 웅장하지는 못하지만, 평양의 동문은 그 단순한 스타일과 함께 연륜의 은은함이 배어 있는 문이다.

에카르트는 한국의 건축에 대하여 이렇게 논평했다.

‘한국은 그 건축법을 중국에서 들여왔지만, 그것은 한국의 상황에 맞추어 단순하면서도 우아하고 더욱 절제된 형태로 발전시켜 한국 특유의 건축문화를 만들어냈다.’

평양의 동문은 바로 이런 한국 건축의 진수를 보여준다.”


◆ Riverside, Pyeng Yang_1925 평양 강변


“대동강변의 이 정자는 약 150년 된 것이라고 하며, 그 주변 환경이 너무 완벽하여 그보다 더 오래 전에 아주 조심스럽게 정자 터로 선택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한국의 경치는 너무나 아름다워 때때로 여행객은 기이한 감동을 맛보게 된다.”

키스가 대동강변이라고 적고 있는 것처럼, 이곳은 모란봉, 을밀대, 부벽루가 있는 근처인 듯싶습니다.


◆ Wonsan_1919 원산


“내가 아무리 말해도 세상 사람들은 원산이 얼마나 아름다운 곳인지 알지 못할 것이다.

하늘의 별마저 새롭게 보이는 원산 어느 언덕에 올라서서 멀리 초가집 굴뚝에서 올라오는

연기를 보노라면 완전한 평화와 행복을 느낀다.”

명사십리로 유명한 원산. 키스의 그림을 보니 과연 원산이 아름다운 곳임을 알겠습니다. 밤하늘의 별빛과 바다 위 배의 불빛이 기막힙니다


◆ Korean Domestic Interior 한옥 내부


“비교적 여유 있는 집의 내부 풍경이다.

이 그림을 그린 것은 여름이었는데, 이 집의 가장은 사랑방이 아닌 대청에서 식사를 하고 있다. 한국에서는 남녀가 같은 식탁에서 식사를 하지 않으며 부인이 식사를 날라다 준다.

남자들이 기거하는 사랑방은 대문 가까이 있다.
여자들이 기거하는 안채는 보이지 않는다

가난한 사람의 집은 길가에 붙어 있을 수도 있지만 대부분의 집은 마당이 있고 부유한 집은 안채 앞마당까지 해서 마당이 둘이다.

한국 사람들은 방안에서는 신발을 벗는다.
방바닥은 노란 장판지로 덮여 있는데 항상 반짝반짝 닦아놓고 있다.

사랑방 나무기둥에는 ‘집에 연기가 자욱한 것은 즐거운 일이다’라고 써 있는데, 그것은 부엌에서 나는 연기를 가리킨다.”


◆ The Eating House 주막


“맛있는 음식 냄새가 솔솔 밖으로 새어 나온다.

주막은 추운 겨울날 먼 거리를 걸어가거나 무거운 짐을 나르는 시골 사람들에게 아주 인기 있는 곳이다.

이 집을 닮은 초라한 주막이 하나 더 있었는데, 그 집 문 위에는 이렇게 쓰여 있었다.

< 달을 쳐다보는데 최고로 좋은 집 >”


◆ The Hat Shop 모자 가게


“간판에 ‘높은 모자, 둥근 모자, 리본 달린 것, 세상 모자란 모자는 다 있습니다’라고 써 있다. 이 자그마한 모자 가게의 주인은 덩치가 큰 사람이었다.

하지만 주인은 어떻게든 공간을 만들어서 키가 큰 친구들까지도 가게 안에 다 들어오게 했다. 그들은 거기서 하루종일 담배를 피우면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다정하게 나눈다.

한국에서 모자는 중요하다. 학자는 특별한 모자, 그러니까 검은 말총으로 된 모자(갓)를 쓰는데, 오로지 중국 고전을 다 읽은 사람만 쓸 수 있다.

총각은 약혼식에서 노란 짚으로 만든 둥그런 모자를 쓴다. 결혼식 날에는 한 사람이 빨간 모자를 쓰고 손에는 백년해로와 신의의 상징인 기러기를 들고 간다.

이런 옛 풍습은 한국에서 차차 없어져 가고 있다.”


◆ The School - Old Style 서당 풍경


“하늘 천, 따 지, 달 월, 사람 인. 후렴처럼 반복하는 소리가 담장 너머로 들려왔다. 여름 해는 따갑게 비치고 있었는데, 서울 성문에서 멀지 않은 그 집은 대문을 활짝 열어놓고 있었다.

이것은 내가 서당 안을 슬쩍 들여다본 장면을 스케치한 것이다. 남자아이들이 글을 외면서 그 소리에 맞추어 앞뒤로 몸을 흔들어댔다.

나이 많은 훈장은 실내용 모자를 쓰고 앉아서 마치 조각상처럼 미동도 하지 않았는데, 어쩌면 마음속으로 아름다운 한시를 한 수 짓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사실 훈장은 조금도 학생들의 공부를 염려할 필요가 없다. 반장쯤 되어 보이는 아이가 긴 대나무 작대기를 들고 감시하고 있다가 학생의 외는 소리가 끊긴다거나 조는 듯한 동작을 보이면 곧바로 등이고 어디고 내려치기 때문이다.

그러면 어린 학생은 퍼뜩 정신을 차리면서 글 읽는 소리가 조금 커졌다.”


◆ Temple Interior 절의 내부


“서울 동대문 밖에 있는 이 사당은 전쟁의 신을 위해서 지어진 것이라 한다.

노란색의 작은 지붕 밑에 나무로 깎은 시커먼 조각상은 약 3백여 년 전 임진왜란 때 한국을 지켜주었다고 믿어지는 중국 장군의 영혼을 기념하기 위해서 만든 것이라 한다.

사당은 이상한 모양의 조각상들로 꽉 차 있었고 내부는 어두컴컴하였다. 얇고 가벼운 치마를 입고 땅에 납작 엎드려 염불하는 여인들은 마치

깊고 어두운 숲 속에 떨어진 꽃잎처럼 보였다.“

※ 여기서 말하는 사당은 지금도 동대문 인근에 있는 관제묘를 말합니다. 동묘라고도 하고 관운장을 모시고 있죠.


◆ White Buddha, Korea_1925 흰 부처


이 그림의 흰 부처는 현재 서울 홍은동 보도각에 있는 백불(白佛)입니다.

14세기에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되며, 서울시 무형문화재로 지정되어 있습니다.


◆ A Game of Chess_1936 장기두기


“전형적인 한국 시골의 두 노인이다. 한국에서는 남자들이 장기를 두는 모습을 흔히 볼 수 있는데 때로는 길가에 앉아서도 한다. 한국에는 놀이가 여러 가지가 있지만, 내가 보기엔 여자들에겐 그네뛰기가 유일한 놀이이다.

그들은 우리 스코틀랜드 여자들보다 훨씬 높이 그네를 탄다. 그네 타는 여자들은 자리에 앉아서 타는 것이 아니라 일어서서 탄다.

그네는 대개 소나무에 줄을 맨 것이지만, 때로는 벽돌로 세운 기둥에 매기도 한다. 그네는 이런저런 명절에 타기도 하지만 주로 봄에 타는 듯하다.”


◆ Kite Flying 연날리기


“서울은 연날리기에 최고로 좋은 도시이다.
연 날리는 철이 돌아오면 어느 날 갑자기 하늘이 온통 형형색색의 연으로 뒤덮인다.

웬만한 가게에서는 각종 크기의 연을 파는데, 값도 싸서 어떤 것은 불과 일전밖에 하지 않는다.
여기에 그려본 것은 전형적인 아이들의 연 날리는 모습이다.”


◆ New Year's Shopping, Seoul_1921 새해 나들이


키스는 자신의 저서 <동양의 창>에 “정월 초하루인 설은 한국 최대의 명절이다.

이 날은 남녀노소를 막론하고 누구나 제일 좋은 옷으로 갈아입고 나들이를 한다”라고 썼습니다.

광화문 해태 상 앞에서 어머니와 함께 나들이를 나온 아이들이 풍선을 가지고 놀고 있군요. 옛 우리의 세시풍경을 그린 귀중한 그림입니다.


◆ Young Korea_1920 한국의 어린이들


색동저고리를 입은 여자아이, 두루마기에 예쁜 꽃신을 남자아이들을 나란히 앉혀 놓고 그림을 그렸군요.

키스의 초기작 중 하나인데 이 그림에 대한 기록은 없지만 아이들이 설빔차림을 한 것 같군요.


◆ Two Korean Child_1925 두 명의 한국 아이들


“아이들의 의상은 그 디자인에 있어서 부모나 조부모가 입는 옷과 다를 바가 별로 없으나 색깔이 더 다양하다.

어린 여자아이들은 분홍장미 색깔의 넓은 치마를 발목까지 내려오게 입고, 어린 남자아이들도 같은 색깔의 옷을 입는다.

조금 큰 남자아이들의 바지는 어른들과 마찬가지로 통이 넓고 발목까지 온다. 갓난아기들의 저고리에는 색동 소매가 달려 있다.”


◆ Country Wedding Feast_1921 시골 결혼잔치


한국인의 풍습을 흥미를 가지고 관찰한 키스는 결혼식 장면을 여러 장 그렸습니다. 혹 그보다는 미혼이었기 때문에 결혼식에 더 흥미가 있었을지도 모르죠.

한번은 신부 행렬을 보려고 급히 따라가다가 물에 빠진 일도 있었다고 합니다.

이 그림에는 아이 어른 다 합하면 20여 명이 넘는 사람들이 흥겹게 잔치를 치르는 모습이 잘 표현되어 있습니다.


◆ Korean Bride_1938 한국의 신부


“한국에서 제일 비극적인 존재!

한국의 신부는 결혼식 날 꼼짝 못하고 앉아서 보지도 먹지도 못한다. 예전에는 눈에다 한지를 붙이기도 했다고 한다.

신부는 결혼식 날 발이 흙에 닿으면 안 되기 때문에 가족이 들어다가 자리에 앉힌다.

얼굴에는 하얀 분칠을 하고 뺨 양쪽과 이마에는 빨간 점을 찍었다. 입술에는 연지도 발랐다.

잔치가 벌어져 모든 사람들이 맛있는 음식을 먹고 즐기지만 신부는 자기 앞의 음식을 절대로 먹어서는 안 된다.

때로는 과일즙을 입안에 넣어주기도 하지만 입술연지가 번지지 않도록 조심해야 한다.

하루종일 신부는 안방에 앉아서 마치 그림자처럼 눈을 감은 채 아무 말 없이 모든 칭찬과 품평을 견디어내야 한다.

신부의 어머니도 손님들 접대하느라고 잔치 음식을 즐길 틈도 없이 지낸다. 반면에 신랑은 온종일 친구들과 즐겁게 먹고 마시며 논다.”

'신부가 한국에서 제일 비극적인 존재'라는 키스의 표현이 재미있으면서 격세지감을 들게 합니다.


◆ Wedding Guest_1919 결혼식 하객


결혼식 하객으로 온 이 부인은 머리에 장식이 달린 조바위를 쓰고 단아한 자세로 앉아 있습니다.

키스의 관찰입니다.

"일본 여자들은 두 다리를 붙이고 무릎을 꿇고 바닥에 앉아 전혀 움직이지 않는다. 반면에 한국 여자들은 가부좌로 앉아서 피로하면 서슴지 않고 수시로 다리를 고쳐 앉는 게 풍습이다.

교회에 나온 한국 여자들을 그리다 보면, 다리를 고쳐 앉을 때마다 치마가 불쑥하게 들어올려졌다 내려앉았다 하는 것을 볼 수 있는데 재미있는 광경이다.”


◆ Returning from the Funeral_1922 장례를 마치고 돌아오는 길


성 안에서 사람이 죽으면 성 밖에 묻는 것이 법이라, 겨울 저녁 어두워진 후에 등불을 켜 든 상여꾼들이 빈 상여를 메고 돌아오는 장면입니다.

성문의 현판에 ‘東大門’이라 쓰여 있는 것으로 보아 서울은 아니로군요.

키스가 영국에서 전시회를 할 때 영국 왕실에서 이 그림을 구입했다고 합니다.


◆ The Widow_1919 과부


"온화하면서도 슬픈 얼굴을 한 이 부인은 한국 북부 출신의 여인이다. 한국에서는 남남북녀라 하여 북쪽의 여자를 더 쳐준다.

모델을 서려고 내 앞에 앉았던 그 당시,일제에 끌려가 온갖 고문을 당하고 감옥에서 풀려 나온 지 얼마 되지 않았다.

몸에는 아직도 고문당한 흔적이 남아 있었지만 그녀의 표정은 평온하였고 원한에 찬 모습은 아니었다. 타고난 기품과 아름다움이 전신에서 뿜어져 나오는 여인이었다.

이 과부는 남편의 죽음을 마냥 슬퍼할 처지가 못 되었다.

외아들은 일제에 끌려갔고 그녀는 언제 그 아들을 다시 만날 수 있을지 기약이 없는 상태였다.
아들은 삼일운동에 적극적으로 가담한 애국자였다.

이 그림을 그린 것은 여름이었다.

여자는 전통적이고 폭넓은 크림색 치마를 입었고 그 속에는 헐렁한 바지를 입고 있었다. 저고리는 빳빳한 삼베였다.

북부 지방에 사는 사람들은 자기들의 풍습대로 머리에 두건을 두른다. 무척이나 더운 날씨인데도 여자는 그런 두건을 쓰고 있었다.

여자의 머리는 숱이 많고 길었으며 그것을 땋아서 머리에 감아올리고 있었다.“


◆ Embroidering, Korea_1921 자수놓기


긴 머리에 빨간 댕기를 하고 수를 놓고 있는 처녀. 혼기를 맞아 자신의 혼수 준비를 하는 걸까요.


◆ Woman Sewing 바느질하는 여자


“중류 가정의 한 여자가 바느질을 하고 있는 모습.
그녀의 옆에는 바느질 그릇과 인두가 꽂혀 있는 놋화로가 놓여 있다.

한국 여자들은 세탁과 바느질을 아주 잘해서 아무리 더럽고 거칠었던 옷도 그들의 손을 거치면 반짝반짝 윤이 나도록 깨끗하게 세탁된다.”


◆ A Hamheung Housewife_1921 함흥의 어느 아낙네


“한반도 북쪽에 있는 함흥의 여자들은 서울 여자들보다 키도 크고 자세도 더 꼿꼿하다.

독특한 옷차림으로 머리에 무거운 짐을 이고 다닌다.
큰 두건 같은 머릿수건은 치마를 이용해서 만든 것이다.

나는 이 여자를 대낮에 그렸다.

그녀는 땡볕도 개의치 않았을 뿐 아니라 머리에는 빨래를 담은 붉은 함지를 이고 있었는데도 별로 힘들어하는 기색이 아니었다.

그녀는 옥가락지 두 개를 정성스럽게 끼고 있었다.”

이 그림과 아래의 ‘아침 수다’는 같은 소재의 그림입니다.


◆ A Morning Gossip, Hamheung, Korea_1921 아침 수다


"아침에 빨랫감을 이고 씻어야 할 요강을 들고 냇가로 나가던 여자와 다른 한 여자가 길에서 만나 수다를 떨고 있다.

머릿수건을 기술적으로 두르는 것이 풍습이며, 어떤 때는 치마나 아이들 옷으로 머리를 둘러싸기도 한다.

치마는 풍선처럼 넓게 퍼져 있고 저고리는 무척 짧다.“


◆ From the Land of the Morning Calm_1939 고요한 아침의 나라에서 온 사람


“중하층 계급에 속하는 한국 남자의 전형적인 모습이다. 추운 겨울이라 머리에는 털이 안으로 달린 남바위를 쓰고 그 위에 말총으로 만든 갓을 쓰고 있다.
하얀 무명옷에는 솜을 넣어 방한을 하고 있다.”


◆ The Country Scholar 시골 선비


“이 선비는 원산 사람이다. 그가 입고 있는 전통적인 선비 의상은 800여 년 전부터 내려오던 것이고 모자도 옛날식이다.

그가 들고 있는 막대기는 끝 부분이 백옥으로 단장되어 있었고 복장과 잘 어울렸다..선비는 그 부분이 잘 보이도록 막대기를 들고 있었다.

그의 옷고름은 연홍색 비단이고 옷은 엷은 옥색이었는데 까만 단하고 훌륭한 색깔의 조화를 이루었다.

이 나이 많은 한국 선비와 얼굴을 대한다는 것은 즐거운 일이었다. 그의 표정에서 좋은 가정교육, 자기 절제, 인자한 부드러움 등을 읽을 수가 있었다.

그의 매너는 은근하면서도 정중했다. 그는 속세의 근심을 떠나 별천지에서 노니는 사람이라는 인상을 주었다."


◆ Young Man in Red 홍복을 입은 청년


"이 청년은 자기의 아버지, 할아버지가 입궐할 때 입었던 관복을 입고 있다.

붉은색의 겉옷 밑에는 파란색 옷을 입고 있었고, 백색 옥돌이 들어 있는 자그마한 주머니를 달고 있어서 걸을 때마다 패옥 소리가 낭랑했다.

거북이 등과 가죽으로 만든 허리띠는 꼭 매게 되어 있는 것이 아니고 허리 위로 둥그렇게 두르도록 되어 있었다.

앞으로 내린 에이프런에는 금으로 된 단추가 두 개 있었는데, 그것은 관직 등급을 보여주는 표시였다.
모자는 말총으로 만들어졌는데 금색 칠을 했고, 신발은 넓적하고 코끝이 뭉특해서 발이 작아 보인다.“


◆ A Daughter of House of Min_1938 민씨 가문의 규수


“이 처녀는 지체 높은 집안의 규수에게 어울리는 복장을 하고 있다. 그녀의 아버지는 암살된 명성황후의 친척이다.

나는 그녀를 고풍스러운 병풍 앞에 세웠고 예쁜 신발을 그리고 싶어서 비록 실내지만 일부러 신발을 신게 하였다.

그녀의 아버지는 프랑스에 외교사절로 파견된 최초이자 최후의 인물이었다. 또 그는 내가 만난 최초의 한국 양반이었다.

그는 하얀색 옷을 입고 있었고 크림색의 얇은 천으로 된 두루마기를 입고 있었다. 그의 하얀 버선은 발에 아주 잘 맞았다.

만약 내가 시인이었더라면 그의 멋진 발을 노래하는 시를 지었으리라!

훗날 나는, 결혼하여 어린 딸을 둔 이 여자를 다시 만났는데, 그 모녀에게서 그 아버지의 우아함이나 온화함은 찾아볼 수가 없었다.

이 여자는 영어를 잘하고 꽤 똑똑해 보였다. 나는 그녀가 좋은 배필을 만난 듯해 기뻤다.”

처녀의 아버지는 조선 말기 최초의 프랑스 공사였다는 것으로 보아 1900년 파리에서 열린 만국박람회에 특권대사로 파견되었다가 1902년에 주불공사로 임명되어 일본에게 외교권을 박탈당한 1905년까지 공사로 활약한 민영찬으로 추정됩니다.

민영찬은 국권을 빼앗긴 것을 분히 여겨 자결한 충정공 민영환의 동생입니다.


◆ The Gong Player_1927 좌고 연주자


이 악기는 조선 말기 화가 혜원 신윤복의 풍속도에도 보이는 좌고(座鼓)로 생각되는데, 좌고는 궁중음악 연주에 사용되는 북입니다.

보통 삼현육각(三絃六角) 편성으로 연주하거나 춤 반주를 할 때 좌고를 치는데, 앉은 채로 연주할 수 있도록 높이가 낮은 틀에 북을 매달아 놓고 칩니다.

좌고의 북통에는 용을 그리고, 북면에는 태극 무늬를 그려 넣습니다.


◆ The Flute Player_1927 대금 연주자


"이 사람은 과거 국악원 소속이었으나 현재는 조선왕조가 망하여 궁중음악이라는 것이 있을 수 없으므로 일본정부가 이들의 활동을 지원하고 잇다.

다행히도 나는 국악원 사람을 몇 명 그릴 수 있었다.
하지만 내가 전에 종묘제례 때 보았던 아주 희귀한 악기를 연주하는 사람은 만나지 못하였다.

제일 보기 드문 악기는 다듬지 않은 옥같이 보이는 삼각형의 돌을 여러 개 나무틀에 걸어놓은 것이었다.
(편경을 가리킵니다).

이것을 기술적으로 치면 전 음계의 음정을 낼 수가 있었고 소리가 아주 좋았다. 대개는 피리소리의 효과를 높이는 데 사용하였다.

또 오리 모양으로 만든 나무딱따기도 있었는데, 밝은 색깔의 옷을 입은 20여 명의 사람들이 전후좌우로 돌아가면서 소리를 냈다.(박을 가리킵니다).

북의 종류도 여러 가지여서 각기 다른 소리를 냈는데 언제나 피리소리가 제일 고음이었고 또 제일 아름다웠다. 이 대금 연주자는 연주도 잘하지만 행동도 점잖아서 좋은 가정에서 자란 사람 같았다.

한국 사람들은 일본 사람과 마찬가지로 손이 잘생겼으며, 대금을 부는 사람의 섬세한 손놀림이 정말 보기 좋았다.“


◆ Court Musicians, Korea_1938 궁중악사


대한제국이 일본에 강제 병합된 후 전통 한국음악의 정수인 궁중음악이 사라져갈 무렵, 키스는 궁중악사들을 애써 찾아 몇 점의 그림을 남겼습니다.

아마 이 예복을 입은 사람들이 고종과 순종 재위 시에 궁중음악을 연주하던 마지막 궁중악사들로 생각됩니다.


12 Comments
Suggested
Recent
그림이 따뜻하고 실사 그대로 인듯해서 저 시대로 여행 갔다온 기분이 들어요😀😀😀
담아갑니다 물론 가슴에요
저기 나오는 절은 동묘이고, 중국의 장수는 관우이네요^^
@wens 링크걸어두었어요ㅎ
@cndqnr1726 주말에 시간되면 봐야겠어요 감사합니당(❛◡❛)✿
Cards you may also be interested in
영화 다크나이트 오프닝 씬 "뱅크로버" 디오라마 컨셉샷 :)
디오라마는 피규어의 완성이다. 최근 작업하고 있는 다크나이트 뱅크로버 씬 디오라마 작업이 거의 마무리되어가는데.. 손목건초염이 재발하는 바람에 며칠동안 작업을 쉴 수 밖에 없는 현실.. 마냥 놀고있을 수는 없기에 완성전에 미리 피규어를 넣어두고 컨셉샷을 몇장 찍어봅니다. 모든 작업을 수작업으로 하기에.. 꽤나 오랜 시간동안 작업하고 , 또 수정하고... ㅎㅎ:) 하루하루는 매우 길지만 한달은 순식간에 지나가는 요상한 나날들을 보내는 요즘입니다. 그래도 1미터가 넘어가는 거대한 세트형 디오라마 속 , 부족함들로 가득하지만 제 손이 닿지않은 곳이 단 하나도 없으니:) 항상 사진을 찍을때 만큼은 내심 흐뭇해진답니다. 작업 과정들.. 저 작은 세계를 만들어내기 위해 수백가지의 공정들과 소재들.. 그리고 그것들을 가공하고 붙여나가고 깍아내고 또 다듬어나가는 하루하루.. 그 하루하루들이 모여서 다른 분들에게 감동과 행복함 , 그리고 재미를 줄 수 있다는 것이 얼마나 감동적인 일인지.. 어쩌면 매일 힘들다고 찡얼대고 앓는소리(?)를 달고 살지만:) 이일을 그만두지 못하는 가장 큰 이유는 제 부족한 작업물들을 재밌게 즐겨주시는 많은 분들이 계시기 때문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작은 베이스 타입의 뱅크로버 디오라마 작업물:) 2년동안 100여개의 디오라마 작업물들을 내어오면서.. 단 하나의 작업물도 쉽지않았지만.. 이번 작업물은 유독 기억에 남을 것 같습니다. 개인 콜렉터에게 가는 마지막 작품이자 , 프리랜서 디오라마 작가로 내는 마지막 작업물이기도 하기 때문입니다. 많은 사랑과 응원을 보내주시는 분들이 많다보니:) 조만간 좋은 소식을 전해드릴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이젠 개인에게 작업물을 내어드리진 못하겠지만.. 더 많은 분들이 즐기실 수 있는 방식으로 좋은 제안을 해주신 국내 기업 몇곳과 계약하여 제 다양한 작업물들과 콜렉터블을 보여드릴 수 있는 기회가 생겼어요 관련된 사항들이 정리되면 다시금 포스팅해볼게요. 그럼 다음 포스팅에서 뵈요 늘 감사합니다. 늘 덕분입니다. -AJ- www.instagram.com/aj_custom
글 하나로 초한지 속성 마스터하기 (feat. 패왕별희).jpg
때는 기원전 2세기쯤. 중국은 춘추전국시대라고 해서 한반도의 삼국시대처럼 여러 나라로 나뉘어져 있었음. 이 중국을 통일하고 최초로 황제가 된 사람이 등장하니 그 유명한 진시황 되겠음. 불로초 찾고 병마용갱 지은 그 할배 맞음ㅇㅇ그러나 진시황의 폭정으로 인해 진나라는 통일과 동시에 망테크를 타고 있었음. 이때 등장하는 초한지의 주인공 1이 항우임. 사실 항우는 중국의 전통적인 영웅관에 완전히 어긋나는 인물임. 중국은 한반도보다 땅이 훨씬 넓고 다민족 국가잖아? 그래서 중국의 이상적인 군주라 하면 (본인의 지력이나 무력이 좀 딸리더라도) 능력 있는 신하를 알아보고 적절하게 등용할 줄 알며 포용력과 너그러움을 갖춘 군주임. 한국인에게 조금 더 익숙한 삼국지를 예로 들자면, 유비는 지 능력 조또 없음. 싸움은 관우랑 장비가 다 하고 지혜는 제갈량이 냄. 하지만 유비는 그들을 이끄는 인덕이 있는 사람임ㅇㅇ 항우를 냉정하게 평가하면 지휘관으로서는 정말 말하는 게 입 아픈 명장이지만 그거 빼면 무력과 카리스마에 스탯 몰빵한 망캐임. 대가리 멍청하고, 군주로서의 자질은 바닥이고, 성격 더럽고, 백성을 사랑하는 너그러움 따위 눈을 씻고 봐도 없음. 하지만 항우는 중국에서 가장 사랑 받는 영웅 중 하나임. 왜 그런지 그 이유를 지금부터 함께 알아보겠음. 항우는 초나라 명장 집안의 후손이었음. 초록색이 초나라인데, 중국이 여러 제후국으로 갈라져있던 춘추전국시대 때 진나라와 더불어 가장 강력하던 국가임. 항우는 진나라가 전국을 통일하루무렵 태어났지만 삼촌 항량이 지역의 유지였기 때문에 모자람 없는 어린 시절을 보냄. 간단히 말해서 귀족 도련님이었음ㅇㅇ 항량은 조카에게 글과 무예를 가르치지만 항우 존나 건성건성함. 빡친 항량이 항우를 꾸짖자 항우의 대답이 "글이라는 것은 본래 자기 성과 이름을 쓸 줄 알면 족할 뿐입니다. 검술 역시 한 사람과 싸워 지지 않을 정도면 충분합니다. 둘 다 배우기는 충분치 못하니, 만인을 상대해서 이길 수 있는 학문을 배우겠습니다." 였음. 만인을 상대해서 이길 수 있는 학문은 병법을 뜻함. 군대를 이끌고 배치하고 전투하는 전술 ㅇㅇ 당시 진시황은 툭하면 전국을 순례했는데, 그 웅장한 행차를 지켜보던 항우는 "내가 저 자리를 차지해야지!!" 라고 포부를 드러냄. 항우는 키가 180이 넘었음. 지금도 큰 키인데 기원전인 저 때는 그냥 존나 거인임. 거기에 힘도 쎄서, 삼촌 항량은 그런 말 하지 말라고 주의를 주면서도 내심 조카의 미래를 기대하게 됨. 이렇게 항우가 성장하던 중 진시황이 불로초 찾기에 실패하고 뒤짐ㅋㅋ.. 진시황이 죽고 아들 호해가 즉위하는데, 호해의 곁에는 조고라는 환관이 있었음. 조고는 간신배의 조상 같은 사람임. 진나라가 중국을 통일하긴 했지만 아직 국가로서 완벽하게 자리 잡지는 못했음. 이전까지 각자 다른 나라였잖아? 문화적으로는 여전히 서로 다른 나라였고, 반란이 끊이질 않음. 예를 들어 삼국시대가 끝나고 신라가 한반도를 통일했을 때 고구려와 백제의 유민들이 부흥 운동을 한 것처럼ㅇㅇ 진시황부터 만리장성 건설, 불로초 찾기 등 온갖 대건축과 사치를 부리느라 가혹한 세금을 매기고 엄벌주의를 앞세운 정치를 해서 불만이 많은 상태였음. 근데 호해가 즉위하고 지 애비보다 더한 사치와 방탕 행보를 보이니 사람들이 가만 있겠음? 전국시대 6국을 재건하려는 반란이 각지에서 일어남. 항량은 조국 초나라 왕의 후손인 웅심 이라는 양치기를 찾아 왕으로 옹립하고 전쟁에 뛰어듬. 항우는 당연히 삼촌의 진영에서 종군함. 이 때 초한지의 다른 주인공이 등장하니..... 유방임. 유방은 항우보다 15살 많은데, 원래 패현이라는 마을의 동네 건달 백수였음. 소하, 번쾌 등 친구들과(?) 어울려 다니며 싸움박질하고 똥 폼 잡는 삼류 양아치 같은 인간이었지만 주인공의 자질인 패기 하나는 제대로 있어서, 시황제의 행차를 보고 "오호! 대장부라면 모름지기 저래야 하지 않겠는가?" 라고 했다고 함. 항우가 비슷한 멘트를 쳤을 때 삼촌 항량이 기겁한 걸 생각하면 저런 무모한 패기가 초한지 주인공의 필수조건인가 싶음. 여튼 이렇게 백수짓하며 사고 치고 말단 벼슬이나 하던 유방은 어느 날 여공이라는 사람의 집들이에 가게 됨. 여공은 다른 지방 사람인데 패현으로 이사온 거였음. 여공이 패현의 현령과 아는 사람이다 보니 다들 잘 보이려고 하례금을 바치고 있었음. 거기 등장한 유방은 대뜸 하례금 일만전 < 이라고 적은 어음을 내밈. 물론 땡전 한 푼 없는 채로(....) 패현의 서기 겸 유방의 친구였던 소하는 여기가 무슨 외상 술집인 줄 아냐고 기 막혀 하지만 관상 보길 좋아하던 여공은 유방의 관상과 기세에서 비범한 기운을 느끼곤 귀히 대접함. 여공은 거기서 그치지 않고 유방을 따로 불러 자기 둘째 딸 여치를 소개시키며 결혼을 주선함. 여공의 부인은 "동네 건달 따위를 사위 삼다니 님 미침???" 했지만 여공이 강력하게 혼사를 밀어붙여서 유방과 여치는 결국 결혼하게 됨. 진짜 관상에 뭐가 있었나 봄. 한편 이 시기 진나라는 진시황릉을 만드느라 온갖 사람을 동원해 일을 시키고 있었음. 말단 벼슬을 하던 유방은 패현의 죄수들을 공사 현장으로 데리고 가는 업무를 맡게 되는데, 공사 현장이 원체 시궁창이다 보니 죄수들이 하나둘 도망침. 그걸 지켜보던 유방은 대뜸 행렬을 멈추더니 "가고 싶은대로 가라. 나도 튈 거임ㅋㅋ" 이러고 속 편하게 술을 진탕 마심(....) 죄수들은 대부분 도망쳤지만 그 중 몇은 유방을 따르고 싶어했고, 유방은 그들과 함께 도피생활을 하다 진시황이 죽고 여기저기서 반란이 일어날 무렵 친구 번쾌의 연락을 받고 패현으로 돌아와 마찬가지로 거병함. 하지만 패현의 젊은이들이라고 해봤자 고작 몇 천임. 유방은 몇 번의 전투를 겪고 항우가 모시는 초 회왕의 아래로 들어가게 됨. 물론 진나라가 괜히 통일 국가가 아니라 저항이 만만치 않았음. 진나라 최후의 명장인 장한은 부활한 위나라를 멸망 시킨 후 초나라 군대를 역습하고, 항량은 전사함. 항우와 유방이 이끄는 초나라 군대는 어쩔 수 없이 후퇴함. 한편 초 회왕은 먼저 관중에 입성하는 자를 관중의 왕으로 삼겠다고 공표한 상태였음. 지도에 표시된 땅이 진나라의 중심인 관중인데, 생산력이 좋아 당나라 시대까지 대부분 국가의 수도였던 중요한 땅임. 관중의 제후가 되는 건 당연히 누구나 혹할 제안이었음. 아버지 같은 삼촌을 진나라 군대에 잃은 항우는 당연히 서쪽의 진나라 땅으로 가고 싶었음. 하지만 항우는 얼마 전 양성이란 곳을 공격할 때 결사항전하는 주민들 때문에 자기 예상보다 힘든 싸움을 하자 분노해 함락한 양성 주민 5천명을 전부 죽여버린 전적이 있었음. 다시 말하지만 이건 기원전 시대임. 지금처럼 인구가 많지 않기에 백성 하나하나가 곧 국력일 때임. 항우가 얼마나 잔인하며 군주로서 자질이 없는지 보여주는 예시임. 더군다나 관중 땅은 가장 중요한 요충지임. 회왕의 측근들은 항우를 보내면 저 잔혹한 성격 때문에 민심이 돌아설 거라며 항우보다 군사적 역량은 좀 떨어지더라도 유방을 보내는 게 낫다고 조언함. 한편 항량을 죽인 장한은 북으로 진군해 부활한 조나라를 공격하고 있었음. 이대로 진나라 군대가 제후들을 하나하나 무너뜨리면 초나라 입장에서도 부담스러움. 회왕은 결국 유방을 서쪽, 관중으로 보내고 송의를 상장군으로 삼아 조나라를 도와주게 하면서 항우를 송의의 차장으로 임명함. 서쪽에 못 가는 것도 짜증 나는데 별 공적도 없는 송의 휘하에서 진군하라니 항우는 빡쳐 돌아가실 지경이었음. 항우는 간신히 화를 참고 송의와 함께 조나라로 가지만 송의는 장한을 공격할 생각은 않고 마냥 시간만 보냄. 폭발한 항우는 송의를 죽여버린 후 회왕에게 "송의가 초나라를 배신하려고 해서 처단했음ㅇㅇ" 이라고 일방적으로 통보함. 초나라를 재건 시킨 주축이 항우의 삼촌인 항량인데다 앞서 말했듯 무관으로서의 자질은 정말 킹왕짱인 항우였기에 회왕은 하는 수 없이 항우의 쿠데타를 승인하고 항우에게 상장군 직을 넘겨줌. 항우는 곧장 출정해 진나라 군대를 박살 내고, 장한에게서 항복을 받은 후 말을 돌려 진나라 수도로 감. 근데 여기서 역대급 병크를 또 터뜨려버림(....) 신안대학살임. 항우가 장한의 항복을 받고 서쪽으로 진격하던 시기, 자영이라는 진나라 황족이 조고를 처단하고 진나라의 왕이 됨. 하지만 진나라의 국운은 이미 다 한 상태였음. 자영은 스스로 성문을 열고 유방에게 항복의 의사를 표함. 몇몇 장수들은 자영을 죽이자고 했지만 유방은 "회왕이 나를 관중으로 보낸 건 내가 관대한 사람이기 때문이다. 이미 항복을 한 사람을 죽이는 건 옳지 않다." 며 자영을 살려주고 법삼장을 약속함. 살인을 한 자는 죽이고, 남을 다치게 한 자는 중죄로 처벌하고, 물건을 훔친 자는 감옥에 가둔다. 이 세가지 법 외에 나머지 법은 전부 없앤다는 뜻이었음. 진나라의 가혹한 엄벌주의 정치와 세금에 고통 받던 백성들은 유방을 환영하며 유방이 황제가 되기만을 바라게 됨. 문제는 유방이 진나라의 멸망 소식을 항우에게 안 전했다는 거였음(.....) 일부러 그런 건지 아닌지는 알 수 없지만, 이로 인해 항우 진영 분위기는 개판이었음. 그도 그럴 게 초나라 군사들은 진시황릉 공사에 끌려가 개고생을 했거나, 가족이 만리장성 건설 현장에서 죽었다는 식으로 진나라에 원한을 가져 초나라 부흥군에 합류한 경우가 많았음. 아무리 장한이 항복했다지만 초나라 군사들 눈에 진나라 군사들이 곱게 보일 리 없음. 반대로 진나라 군사들도 불안했음. 초나라 군사는 자기들을 노예 취급하며 괴롭혀대니 "이러다 우리 죽는 거 아님....?" 걱정이 저절로 나옴. 양쪽이 다 이러니 자연히 진영 분위기는 개판이 됨. 하루라도 빨리 관중으로 가야했던 항우는 포로들의 존재가 점점 거슬렸음. 군대 분위기는 엉망이지, 행군 속도는 느려지지, 군량도 부족하지. 군량 문제가 제일 컸음. 송의가 조나라 땅에서 지체한 탓에 안 그래도 군량이 부족한데 항우를 견제하기 위해 송의&유방을 기용한 회왕이 항우의 군대를 제대로 지원해 줄 리 넚었음. 참다 지친 항우는 야심한 밤 포로들을 전부 죽여버림. 무려 20만명을 ㅇㅇ...이게 신안성에서 일었나기 때문에 신안대학살이라고 부름. 항우의 선택은 인간된 도리를 떠나 군주로서 정말 멍청한 짓이었음. 유방은 관중 땅에서 백성들의 지지를 얻고 있었잖아? 애초에 진나라 군사들도 진시황의 건축 사랑 때문에 많이 고생한 사람들임. 좋게 말로 설득해서 자기 사람으로 회유하거나, 정 감당이 안 되면 그냥 풀어주고 각자 고향으로 돌아가라고 하면 되는 거였음. 이렇듯 항우는 업보를 적립하며 관중으로 진격하는데..... 엥....이미 유방이 진나라의 항복을 받아낸 상태였음. 이러다간 중원의 알짜배기 땅인 관중이 유방의 소유가 되게 생김. 게다가 유방은 관중 땅이 욕심 나서 관중으로 들어가는 입구인 함곡관을 독단적으로 막아버리는 실책을 저지른 후였음. 또 빡친(....) 항우는 함곡관을 단숨에 박살 내버리곤 유방을 죽일 결심으로 홍문이라는 곳에 진영을 침. 항우의 또다른 삼촌인 항백은 유방의 책사인 장량과 절친한 사이였는데, 항우의 성격에 다 죽일 게 뻔해 보이자 몰래 장량을 찾아가 항우의 계획을 전해주며 너라도 도망치라고 충고함. 유방이 관중 백성들의 신임을 얻었다곤 하지만 항우랑 비빌 처지는 아니었음. 더군다나 전쟁으로는 더더욱. 어이가 털린 장량은 유방에게 항우가 빡쳤다는 소식을 전해주며 "너 제정신임??? 함곡관을 왜 쳐막고 지랄임 미친새끼야!!!!" 라고 지랄하고, 그제야 사태의 심각성을 깨달은 유방은 장량에게 빌디시피 조언을 청함. 장량은 일단 항백을 소개 시켜주고, 유방은 자존심 다 버리고 항백에게 술과 식사를 대접하며 싹싹 빔. 요지인 즉 "저는 항우 장군 오시기만 기다릴 뿐 사사로운 욕심은 조금도 없습니다ㅠㅠㅠ 함곡관을 막은 건 도적들을 막기 위해서일 뿐입니다ㅠㅠㅠㅠ하...저는 항상 항우 장군을 위해 충성했는데 이렇게 죽는 군요.....죽는 건 두렵지 않지만 항우 장군과 이렇게 틀어지는 건 너무 안타깝고 슬픕니다....하이고......." 라며 개쩌는 감성팔이를(.....) 시전함. 사실 함곡관은 입구가 좁아 적은 병력만 배치해도 도적떼를 막을 수 있음. 유방의 변명은 당연히 개소리임. 저딴 개소리로 항우&항백을 속여먹을 생각을 한 유방이 대단한 건지 저딴 개소리에 속은 항우&항백이 대단한 건지(........) 물론 항우에게도 책사는 있었음. 범증이라는 사람인데 얘가 그나마 항우 진영의 머리 역할을 함. 범증은 당연히 안 속았고, 유방을 살려두면 나중에 큰 걸림돌이 될 테니 죽이자고 설득함. 어쨌든 유방은 꼬리를 내렸고, 다음날 장량과 번쾌 등 자기 사람들을 데리고 홍문의 항우 진영으로 감. 홍문에서 열린 연회라고 해서 홍문연이라고 부르는데 초한지의 명장면으로 손 꼽히는 장명임. 유방은 당연히 항우 앞에서도 온갖 아부를 했음. 범증이 유방을 죽이자고 신호를 보냈지만 항우는 껄껄 웃으며 술을 마실 뿐 무시했고, 보다 못한 범증은 항우의 친척 동생을 불러내 유방을 죽여야 한다고 재촉함. 친척 동생이 "술자리에 즐길 만한 게 별로 없으니 제가 검무를 춰서 흥을 돋워보겠음ㅇㅇ" 하고 칼을 빼들지만 눈치를 챈 항백이 함께 추자며 칼을 막은 덕에 유방은 죽지 않음. 이쯤 되면 항백이 존나 스파이임ㅋㅋㅋㅋㅋ 일이 이상하게 돌아간단 걸 눈치 챈 장량은 슬쩍 빠져나가 번쾌를 부름. 번쾌는 패현에서부터 유방과 알고 지낸 동생 겸 부하 장수인데, 여공의 막내딸과 결혼해 유방과 인척 관계기도 했음. 모시는 유방의 목숨이 위급하다는 소식을 들은 번쾌는 연회장에 난입해 "남의 장수들은 밥을 안 주니 배고프고 추워 들어왔슴다!!!" 라며(....) 이상한 패기를 시전함. 근데 그게 항우의 마음에 들었음(......) 역시 이 새끼는 그냥 전장에서 평생 굴렀어야 함. 항우는 번쾌의 호탕한 모습이 재밌었는지 술과 고기를 내렸고, 장량은 이 틈을 타 유방을 피신 시킨 후 유방이 만취해 먼저 돌아갔다고 인사하고 준비한 선물을 바침. 단순무식한 항우는 유방이 자기한테 쫄았단 거에 흡족해하지만 범증은 극대노함. 범증은 "이래서 어린애와 대사를 도모하면 안 된다니까 ㅅㅂ 우리 이제 나중에 유방한데 다 뒤질거임 십새끼야" 라고 갈궜다구 함.... 이렇게 관중 땅에 입성한 항우는 항복했던 자영을 죽이고 진나라 황궁을 약탈하고 불태우는 또다른 병크를 저지름. 앞서 말했든 관중 땅은 매우 풍족한 요충지였고, 항우의 책사는 항우에게 관중을 거점으로 삼으라고 조언하지만 이미 관중은 불탄 폐허였고 항우는 고향에 돌아 가고 싶은 마음밖에 없었음. 초 회왕을 황제로 높여 의제로 칭한 항우는 고향인 팽성 땅을 차지한 후 자기를 '서초패왕'이라고 부르고, 유방을 포함한 나머지 장군들을 각지의 제후로 삼음. 아직 의제가 살아있긴 하지만 실질적인 권력자는 항우라고 할 수 있겠음ㅇㅇ 물론 항우도 아주 바보는 아니라 유방을 경계했고, 가장 외진 땅인 파촉 땅을 줌. 파촉 땅은 산골짜기 벽지라 대대로 유배지로나 쓰이는 땅이었음. 한반도로 치면 저어기 연평도나 남해안의 섬 정도? 관중에 가장 먼저 입성한 유방은 당연히 분노함. 유방은 "ㅅㅂ 싸우다 뒤지더라도 항우랑 함 싸워봐?" 했지만 유방의 오랜 친구이자 책사인 소하가 뜯어말림. 소하는 은거하며 힘을 기르다 보면 언젠가 전세가 바뀔 거라고 유방을 설득했고, 유방은 결국 파촉으로 향함. 이게 기원전 206년의 일임. 이제 초한지의 하이라이트인 팽성대전임. 앞서 말했듯 항우는 초 회왕을 의제로 삼고 여러 제후에게 땅을 나눠줬는데, 부활한 제나라의 전씨 일족은 만족하지 못했음. 우리가 제나라를 부활할 때 너네한테 딱히 도움 받은 게 없는데 왜 우리가 초의 제후국이 돼서 내정간섭을 받아야함?ㅡㅡ 이 정도. (항씨랑 전씨는 이전부터 사이가 안 좋았는데 그건 너무 길고 재미 없으니까 생략) 제나라의 전영은 반란을 일으키는 동시에 다른 제후들도 이간질하고, 항우는 제나라와 전쟁을 벌이게 됨. 그 과정에서 의제가 전영이나 유방에게 붙을 게 걱정 됐는지 의제도 죽여버림. 물론 무력과 카리스마 스탯 하나는 풀인 항우라 한방에 전영의 군대를 박살내고 전영을 죽이지만, 문제는 위치였음. 항우는 제나라와 전쟁하느라 자기 본거지인 팽성을 떠나 제나라 깊숙한 곳에 있었고, 이 틈을 탄 유방이 파촉을 떠나 팽성을 향해 진군함. 여기서 항우는 자기의 잔인한 행보에 발목을 잡힘. 잔인하기로 유명한 징기즈칸도 "저항하는 새끼는 죽이지만 깔끔하게 항복한 놈은 살려준다ㅋ 항복해라ㅋ"는 스탠스를 취한데 반면, 항우는 전영의 군대를 완전히 박살내기 위해 제나라 땅을 누비며 모든 성과 가옥을 불태우고 항복하든 말든 전영의 군사는 다 죽여버림. 여자와 노인만 살려 포로로 삼을 뿐 남자는 싹 생매장해버림. 항우가 왜 이랬는지 정확히는 모름. 항우는 이렇게 잔인한 성격과 별개로 자기 사람과 자기 가족에게는 정말 신의 있고 관대했는데, 항우에게 아버지나 다름 없던 삼촌 항량은 장한이 이끄는 진나라 군대가 제나라를 압박할 때 교전하다 역습 당해 전사함. 항량의 죽음을 제나라 탓이라고 생각해 보복한 걸 수도 있고 두 번 다시는 자기한테 반기를 들지 못하게 본보기를 세우려던 걸 수도 있음. 이유야 어쨌든 항우의 이런 선택은 자충수였음. 싸우다 져도 뒤지고 항복해도 뒤지는데 누가 항복함ㅠ 전영의 동생인 전횡이 남은 제나라 군사들을 모아 성양 땅에서 죽기 살기로 항전하기 시작하면서 항우는 성양에 발목이 묶임. 이 틈을 탄 유방은 의제를 시해한 항우를 처단하자는 명분으로 근처의 제후들을 연합하고, 제후 연합군은 쉽게 팽성을 점령함. 항우를 포함한 병력이 거의 제나라에 가 있으니 당연히 쉬움ㅇㅇ 소식을 들은 항우는 나머지 군사들은 성양에 그대로 두고 최정예 군사 3만을 데리고 팽성으로 내려감. 당시 팽성에 있던 유방 연합군은 57만 명이었음. 항우가 이기면 기적인 수준이었음. 근데 항우가 이김. 일단 이유는 크게 두 가지였음. - 유방은 항우의 군대가 습격할 길은 북쪽 뿐이라고 생각해 북쪽을 위주로 막고 대비했음. 하지만 팽성은 항우의 본거지였고, 누구보다 팽성의 지형을 잘 알고 있던 항우는 팽성을 빙 둘러 서쪽으로 우회한 후 동쪽으로 밀고 들어가는 전략을 취함. 항우 군대 >>>>>> 유방 진영 이런식으로 - 3만 VS 57만. 아무리 초나라 군대가 장한이 이끄는 진나라 군대도 격파한 정예병이라고 해도 전면전으로는 가망이 없는 숫자임. 항우는 야심한 밤에 기습하는 전략을 선택했고, 아무런 대비 없이 습격 당한 유방의 군대는 속수무책으로 쓸려나감. 항우의 3만 군대는 거의 피해를 입지 않았지만 유방의 군대는 57만 중 절반 이상이 몰살 당함. 얼마나 피해 규모가 컸는지 시신이 너무 쌓여 강물이 흐르지 않았다고 함. 이 과정에서 유방의 아버지와 아내는 항우의 포로가 됨. 여담으로 유방은 도망치는 길에 고향 패현에 들러 자식들을 챙겼는데, 마찬가지로 유방의 가족을 사로 잡으려던 항우의 군대가 쫓아오자 수레의 속도를 높이기 위해 지 새끼들을 버림(.....) 부하 장수 하후영이 도로 아이들을 챙기며 "한낱 짐승도 자기 새끼 귀한 것은 아는데 니는 뭐하는 새끼임 대체 ㅅㅂ" 라고 갈구자 그제야 부끄러움을 느껴 아닥했다고. 또 한편 유방의 아내인 여치는 측천무후&서태후와 함께 중국 3대 악녀로 손 꼽히는 사람인데 (이 이야기는 나중에!) 포로로 잡힌 후에도 겁 먹기는 커녕 항우 면전에 대고 "그래봤자 너는 내 남편 상대가 안 되니 어디 죽여볼 테면 죽여봐라"고 당당하게 소리 쳐서 그 항우조차 말을 잃었음. 이때부터 중요하게 등장하는 인물이 한신임. 소하&장량과 더불어 한삼걸로 불리는 명장임. 간신히 도망친 유방이 전력을 재정비하는 사이 한신은 3만의 별동대를 이끌고 차근차근 북쪽 땅을 정벌함. 또한 유방도 형양 땅을 본거지 삼아 죽을 기세로 버텼음. 항우가 제나라에서 시간을 보내는 사이 관중 땅을 점령한 덕에 사전적 재기할 여력이 충분했음. 게다가 지속적으로 말해왔던 항우의 능력 부족이 서서히 본인의 발목을 잡기 시작함. 항우의 중요한 책사였던 범증도 죽었고ㅇㅇ 항우와 유방은 정반대라고 할 수 있음. 항우는 장군 내지는 전략가로서의 자질이 뛰어난 대신 큰 그림을 보고 정치하며 사람을 다스리는 능력이 없고 지나치게 잔인함. 반대로 유방은 사람은 좀 찌질하고(...) 멋 없을지언정 주변의 충고를 듣고 인망을 쌓는 건 항우보다 훨씬 나았음. 유방의 지휘관 스탯이 항우에 비해 좀 딸릴 뿐 없는 것도 아니었고. 지지부진하던 초한전쟁은 항우의 부하인 용저가 유수 전투에서 한신에게 패배하며 기울기 시작하고........ 해하 전투가 벌어짐. 유수 전투에서 진 후 항우는 포로였던 유방의 아버지와 아내를 돌려보내며 자기가 이끄는 초나라가 동쪽 땅을, 유방이 이끄는 한나라가 서쪽 땅을 다스리는 협약을 맺음. 협약이 성사된 후 항우는 팽성으로 돌아갈 준비를 하는데 이번 기회에 항우를 끝장내야한다는 참모들의 설득을 들은 유방은 항우의 군대를 공격함. 이게 초한전쟁 최후의 전투인 해하 전투임. 항우와 맞붙은 한신은 밀리는 척 후퇴하며 항우를 깊숙이 유인하고, 한나라의 나머지 병력이 좌우에서 초나라 군대를 공격함. 초나라 군사 10만명 중 8만이 전사하고, 항우를 포함한 나머지 2만도 포위당함. 이때 한나라 군사들이 초나라 군대의 사기를 완전히 꺾기 위해 초나라 고향 노래를 부른데서 나온 사자성어가 사면초가. 여담으로 자기가 선봉으로 나선 전투에서 패배한 적이 한 번도 없었는데, 이 해하 전투에서 딱 한 번 패배함. 항우는 결혼하지 않았고, 대신 사랑하는 여자 한 명이 있어 어딜 가든 항상 함께함. 원체 옛날이다 보니 출신에 대한 기록은 없고 성이 우씨라는 것만 남아 우희 혹은 우미인이라고 불림. 역사 속에선 패자인 항우가 인기 있는 이유 중 하나가 우미인임. 한 때 패왕으로 군림하며 엄청난 권력을 누렸던 항우인데 평생 한 여자만 만났다니 로맨스 소설이 안 나올 수가 없음ㅇㅇ 사면초가의 상황에서 자신의 최후를 직감한 항우는 늦은 밤, 자신의 군막으로 연인 우희를 불러 술을 마시며 해하가라는 노래를 부르고 눈물을 흘림. 力拔山兮氣蓋世 힘은 산을 뽑고 기개는 세상을 덮었도다. 時不利兮骓不逝 시운이 불리하니 추도 나아가지 않는구나. (추는 항우가 아끼는 명마. 삼국지의 적토마 같은ㅇㅇ) 骓不逝兮可奈何추 추마저 나아가지 않으니 난 어찌해야 하는가. 虞兮虞兮奈若何 우희(虞姬)여, 우희여! 그대를 어찌하면 좋은가. 여기에 우희가 부른 답가가 화화왕가 漢兵已略地 한군이 이미 천하를 다 빼았으매 四面楚歌聲 성 사방에서 들려오는 것은 초나라의 노랫소리 大王義氣盡 대왕의 의기가 다하셨다면 賤妾何聊生 천첩이 살아서 무엇하리요. 한 때 전국을 호령했던 영웅이 자기 최후를 예감하고 사랑하던 연인을 걱정하며 눈물 흘린다는 게 참 드라마틱한 소재잖음? 저기서 파생된 작품이 장국영의 패왕별희 ㅇㅇ 패왕별희 뜻 자체가 패왕 항우와 우미인의 이별임. 장국영이 맡은 청뎨이는 동명 경극에서 우미인 역, 샬로는 패왕 역. 이후 우희가 어떻게 됐는지는 사서에 안 나옴. 항우에게 짐이 되기 싫어 자결했다는 말도 있고, 난전 중에 죽었다는 말도 있고, 항우가 죽음 앞에 목숨을 걸고 우희를 피신 시켜 조용한 곳에 숨어 여생을 보냈다는 썰도 있고. 보통의 작품에서는 자결을 택하는데 난 후자였으면 좋겠넴. 고향 노래를 들은 초나라 군사들은 하나둘 탈영하기 시작함. 항우는 남은 군사를 이끌고 도망치지만 유방이 보낸 5천 명의 기병대가 항우를 추격하고, 100명의 군사로 5천명을 뚫는(....) 기적을 일으켜 동성에 도착하지만 항우의 곁에 남은 건 28명 뿐이었음. 이제 여기부터는 거의 뭐 드라마임. 참고로 연의처럼 소설적 허구가 섞인 기록 아니고 사마천이 지은 사기임.... "내가 군사를 일으킨 이래 지금으로써 8년이 되었다. 그 동안 몸소 70여 차례의 전투를 치렀고, 내 앞을 가로막은 자들은 모두 목을 베어 죽였다. 나의 공격을 받은 성들은 모두 항복을 하였고, 나는 지금까지 한 번도 싸움에서 진 적 없이 천하를 제패했다. 그러나 오늘 내가 졸지에 이곳에서 곤궁한 처지에 놓이게 되었다. 이것은 하늘이 나를 망하게 하려는 것이지 내가 싸움을 잘하지 못해서 지은 죄가 아니다. 오늘 내가 한사코 죽음을 무릅쓰고 통쾌하게 싸워 반드시 세 번 싸워 모두 이김으로써, 너희들을 위해 한군의 포위망을 풀고, 적장들의 목을 베면서 적군의 깃발을 부러뜨려, 지금 내가 이런 곤궁한 처지에 놓이게 된 이유는 하늘이 나를 망하게 하려고 했기 때문이지 내가 싸움을 못했기 때문이 아니라는 사실을 지금부터, 증명해 보이겠다." 라고 외친 항우는 남은 28명의 군사를 사방으로 뛰게 만든 후 앞으로 말을 달려 한나라 장수를 죽이고 100명이 넘는 병사들을 죽임. 이 과정에서 죽은 초나라 병사는 딱 두 명. 미친놈임. 남은 26명을 데리고 계속 도망친 항우는 오강 이라는 강에 도착함. 오강을 관리하던 말단 관리는 항우를 맞이하며 "강동(江東)의 땅은 비록 협소하다고 하나 사방 천리에 달하고, 백성들의 숫자는 수십만에 이르고 있어 가히 그곳을 다스릴 만하다고 하겠습니다. 원컨대 대왕께서는 속히 배에 오르시어 강을 건너시기 바랍니다. 이 강 안에는 오직 이 배밖에 없어, 비록 한군이 쫓아오더라도 강을 건너지 못할 것입니다." 라고 말함. 이에 항우는 "하늘이 나를 망하게 하려고 하는데, 강을 건너서 무엇하겠는가? 또한 옛날 내가 저곳 강동의 자제 8천과 함께 강을 건너 서쪽으로 나왔다가 모두 전사하고 오늘 단 한 사람도 돌아가지 못하게 되었다. 설사 강동의 부형들이 나를 불쌍히 여겨 왕으로 삼아 준다 한들 내가 무슨 면목으로 그들을 대하겠는가? 비록 그들이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 할지라도 이 항우 혼자만 부끄러운 마음을 갖지 않을 수 있겠는가?" 라고 답하고 그대가 충신임을 알겠다며 이 관리에게 자기의 명마, 오추마를 넘김. 이때 항우를 따른 26명의 군사들은 탈영하지 않고 항우를 따라 죽을 각오를 한 장병들이었음. 이들이 항우와 함께 끝까지 싸우다 죽었다는 썰도 있고, 항우가 "지금 주군의 명령을 어길 셈이냐? 어서 배에 타라." 라고 윽박 질러 그들은 피신 시켰다고 하는 책도 있음. 이후 항우는 혈혈단신으로 한나라 기병대 5천에 맞서 수백명을 죽이고(....?......) "내가 들으니 한왕이 내 목을 천금과 만호(萬戶)의 봉지로 사려 한다고 했다. 내 그대들에게 은혜를 베풀어 주겠노라." 라는 유언과 함께 스스로 목을 베어 자결했다고 함. 이 때 항우의 나이 31세. 항우의 시신은 유방이 건 상금에 눈이 나간 한나라 군사들이 달려들며 수십조각이 났고, 유방은 그 시신을 수습해 장례를 치뤄주고 노공으로 봉함. 썰에 따르면 본인도 그 장례식에 와서 울다 갔다나 뭐라나. 이렇게 해서 초한지는 유방의 승리로 끝남. 유방은 한나라의 황제가 되는데, 한나라는 중국 역사상 가장 오랜 통일 제국임. 이 한나라가 망해갈 즈음 벌어지는 이야기가 유비 관우 장비의 도원결의 장면으로 유명한 삼국지ㅇㅇ 이제 밑으로는 여담 타임 + 여치 이야기 여담 1 장기 판에 적힌 게 초나라 한나라임. 빨간 색이 한나라 / 파랑이나 초록이 초나라 여담2 유방의 승리에 가장 크게 기여한 한신은 이후 반란 혐의로 유방에게 제거 되는데, (소하나 장량은 천수 누리다 감) 여기서 유명해진 사자성어가 토사구팽. '사냥이 끝나면 사냥개를 잡아 먹는다.' 이전부터 있었던 말인데 한신의 일화로 유명해져 널리 쓰이게 됨. 여담 3 유방이 황제가 되면서 아내인 여치는 황후가 되어 여후라고 불리게 됨. 여후는 유방이 사고 치고 다니던 건달 시절 유방 대신 옥살이를 하기도 하고(.....) 유방이 거병한 후 묵묵히 내조를 해준, 말 그대로 조강지처였음. 더군다나 팽성 대전의 패배 이후 항우 진영에서 포로 생활도 함. 황제가 된 유방은 여러 후궁을 두고 총애했음. 뭐 여기까지는 괜찮을 수 있었음. 정치에 간섭하는 여후가 거슬렸던 건지 뭔지, 갑자기 여후 소생의 태자 유영을 '성정이 유약하다'는 이유로 폐위하고 가장 총애하는 척 부인 소생의 아들 유여의를 태자 삼으려고 함. 진나라의 처참한 말로를 아는 대신들이 적통인 유영을 폐위하면 안 된다고 기를 쓰고 말려 수포로 돌아갔지만... 여후는 이 원한을 간직하다 유방이 죽자 본색을 드러냄. 원래 다정한 성격이었는데 결혼 후 고생하면서 성격이 점점 변해 독해졌다고 하니 만악의 근원은 유방이지만, 여후가 중국 3대 악녀로 손 꼽히는 이유가 있긴 함....이하 잔인함 주의. 유방이 죽고 여후와 유방의 아들 혜제가 황제가 된 직후, 여후는 척 부인을 연금 시키고 아들인 유여의를 황궁으로 부른. 어머니와 달리 심약하고 정이 많은 혜제는 어머니가 유여의를 죽이지 못하게 동생과 함께 먹고 자며 보살핌. 하지만 어느 날 혜제가 아침 일찍 사냥을 가자 어린 유여의는 혼자 남겨지고, 여후는 곧장 12살의 유여의를 죽인 다음 척 부인에게 데려가 아들의 시신을 보여줌(.....) 거기서 그치지 않고 척 부인의 눈을 뽑은 후 귀, 혀, 손, 발을 자르고 돼지 우리에 넣어 인간 돼지라고 부르며 아들 혜제를 불러 그걸 보게 함. 유여의와 척 부인을 잔인하게 죽인 거야 그렇다 치고 대체 무슨 생각으로 혜제한테 보여준 건진 모르겠음. 이복 동생을 지키려고 그렇게 노력한 사람한테 굳이....? 심지어 이때 혜제도 고작 16살이었음. 얼마나 심하게 훼손 됐던지 처음에는 누군지도 못 알아보다가 뒤늦게 척 부인이란 걸 알고 충격 받은 혜제는 "이것은 사람이 할 짓이 아닙니다. 태후마마의 아들인 저 또한 다시는 천하를 다스릴 수 없게 되었습니다."라고 비난한 후 앓아눕고, 이후 실의에 빠져 술만 마시다 23살의 나이로 요절함. 여후는 혜제가 죽었을 때 눈물 한 방울 안 흘렸고, 혜제 사후 멋대로 황제를 세우고 섭정하며 나라를 주무르다 노환으로 사망함. 이 횡포가 나중에 독이 되어 여후의 여동생을 포함한 여씨 일족 사람들은 맞아죽었다고,,,, 이때가 남존여비 시대라고 하지만 최소한의 권리는 있어서, 첩이 정실 부인을 무시하고 방자하게 군다면 어느 정도의 처벌은 용인 됨. 중국 사극에서 황후가 건방진 후궁 꿇어 앉히거나 화내는 장면이 종종 나오는 것도 이래서ㅇㅇ. 다만 여후는 혜제 사후 나라를 망칠 뻔 하기도 했고, 척 부인에게 한 보복이 정말 듣도 보도 못할 수준으로 잔인해서 악녀 소리 듣는 것. 힘들었다. -끗- 출처
[맥주 이야기]: 세계 1티어 자연 발효 맥주 드리 폰타이넌(3 Fonteinen) ABC 모음집 -1편
'람빅'이라는 단어를 들을 때 먼저 어느 양조장이 생각나시나요? 가장 많이 언급되는 곳은 칸티용,드리 폰타이넌, 분 등등 정말 많은 양조장/블랜더리가 언급될 것입니다. 솔직히 말하자면 저에게는 드리 폰타이넌 양조장 맥주가 가장 먼저 생각이 나는데요. 아무래도 저의 첫 람빅이 바로 드리 폰타이넌의 람빅이었고 여러모로 가장 큰 인상을 주었기 때문인데요. 벨기에 Lot 마을 외교에 위치한 드리 폰타이넌 양조장은 이미 다양한 라인업은 보유하고 있는데요. 오늘 그 라인업을 한번 간단히(?) 정리해봤습니다. 참고로 드리 폰타이넌 라벨은 2017년에 이미지 디자인을 업데이트하여 종이 라벨에서 작은 원형 라벨과 뒷면 라벨이 있는 실크스크린 '3'으로 변경했습니다. 눈길을 사로잡는 병의 흰색 '3' 숫자는 잊을 수 없는 추억을 불러일으킬 정도로 람빅 양조장 중에서도 독특하고 선구적인 디자인을 보여주기도 했는데요. 예전에 유럽에서 맥주를 마실 때, 제가 혼자서 유유히 칸티용, 드리 폰타이넌 2병을 오픈했을 때, 옆에 현지분들이 저 ‘3’은 뭐냐고 수없이 들었던 기억이 나네요 ㅎㅎ. 다만, 2020 겨울 세트 출시와 함께 새로운 이미지가 소개되었습니다. 이번에는 뒷면 로고가 원래 원형 로고와 숫자와 결합되었습니다. "3"은 동일한 종이 라벨에 결합되어 내용을 작성할 공간 (네덜란드어와 프랑스어뿐만 아니라 영어 설명이 들어감)이 눈에 띄었습니다. 여기서부터 재미가 시작됩니다. 새로운 제품이 계속 출시되고 라벨에 정말 다양한 영어 알파벳 같이 글자의 종류가 다양해지는데요. 처음에 저는 어지러울 정도로 다양한 제품을 보며 다른분들도 첫 번째 궁금증으로 기본적으로 '이 모든 다른 글자들은 무엇을 의미할까'일지도 모르죠. 그러면 오늘 이 알파벳을 따라가면서 알아봅시다. A 네덜란드어로 "딸기"를 뜻하는 아드베이 - Aardbei. 이 술은 2020년 7월에 출시된 특정 딸기 세트에서 나온 술로, 알파벳 A라는 글자로 작품에 표시한 것은 이때가 처음입니다. 둥근 라벨의 바이오 아드베이(Bio Aardbeien)는 EU 인증 유기농 딸기를 사용했음을 의미하며, 배럴 모서리 라벨은 오크통에서 과일 숙성이 이루어졌음을 의미합니다. [사진 제공 Matthijs B.] 아드베이(Aardbei)는 이 술인에 드리 폰타이넌 자체 베이스 원주를 100% 사용하며, 최종 과일 비율은 1리터당 658그램입니다. 과거 경험으로 볼 때 이것은 매우 높은 비율인데요. 병입 전에 어린 람빅을 다시 혼합하지 않았지만 과일의 잔류 당이 병에서 약한 2차 발효를 이끌어냈습니다. 아드베이/크릭(Aardbei/Kriek)는 딸기와 체리를 첨가한 과일 람빅입니다. 딸기를 먼저 람빅에 첨가하여 침식 및 발효시킨 다음 일정 시간이 지난 후 체리를 첨가하여 최종적으로 병에 담습니다. 이 와인은 스펠링 반 헤트 로트(Speling van het Lot) 제품군에서 출발한 람빅으로 약간의 실험작 느낌이 듭니다. 이는 드리 폰타이넌이 이 실험적인 작품에 매우 만족하고 있다는 뜻이겠죠. 동그란 라벨 아래의 바이오 아드베이엔(Bio Aardbeien)은 이 람빅에 사용된 딸기가 EU 기준에 따라 유기농임을 나타내며, 그 옆에 있는 작은 통 모양의 라벨은 오크통에서 과일 숙성이 이루어졌다는 사실을 나타냅니다. 드리 폰타이넌의 과일 람빅의 경우 과일의 모든 숙성이 배럴에서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며 람빅의 상당 부분을 스테인리스 스틸 탱크에서 먼저 처리한 다음 오크통으로 옮깁니다. 이 방식은 오크통을 보호하기 위한 것이기도 합니다. B 알파벳 B에는 블루베리, 블랙베리, 블랙베리 람빅의 세 가지 유형이 있습니다. 블라우베 보스베스(Blauwe Bosbes) 블루베리 람빅은 스웨덴산 야생 블루베리를 몇 달 동안 어린 람빅에 담근 후 약간의 맥아즙과 혼합한 제품입니다. 병 라벨에는 스웨덴 수입업체 브릴(Brill)이 추가되어 스웨덴 국기가 그려져 있습니다. Braambes 브람스 블랙베리 람빅(블랙베리의 왕)은 엄선된 블랙베리를 람빅으로 침식 및 발효시킨 제품으로, 공급업체 페르메 프람부스(Ferme Framboos)의 블랙베리를 사용했습니다. 2019년은 드리 폰타이넌에서 블랙베리를 사용한 람빅이 처음 출시된 해이며 그 이전에는 스펠링 반 헤트 로트(Speling van het Lot)의 실험 버전으로 출시되었습니다. 병 라벨 하단의 Oogst 2018은 과일 수확 연도가 2018년임을 의미합니다. 오른쪽 하단의 작은 원형 라벨은 오크통에서 과일 숙성이 이루어졌음을 의미합니다. 브람베스(Braambes) 블랙베리와 달리 브람스 블랙베리 람빅(Bramenlambik)은 한 곳에서 나온 끓인 맥어즙을 사용하여 만들고 나중에 어린 람빅을 추가하지 않았기 때문에 이론적으로 병에서 2차 발효가 일어나지 않아 기포가 미미합니다. 이 람빅은 플랑드르의 아름다운 마을 훌덴버그(Huldenberg)에 위치한 페르메 프람부스(Ferme Framboose) 과일 과수원에서 생산된 블랙베리로 만들어집니다. 드리 폰타이넌에서 직접 만든 단일 탱크 맥즙을 식혀 작은 오크통에 넣은 후 과일을 넣어 약 4개월 동안 침식 및 발효시킨 후 병에 담았습니다. 이 람빅의 과일 농도는 와인 1리터당 645그램입니다. 이것은 새로운 라벨로, "3"을 포함한 모든 단어가 종이에 인쇄되었으며 더 이상 실크 스크린으로 된 "3"이 없음을 보여줍니다. 한 시대가 끝나고 새로운 시대를 알리는 거 같네요. C 알망 앤 가스통 스페셜(이하 알망)은 드리 폰타이넌에서 생산된 1년, 2년, 3년산 람빅을 블렌딩한 술입니다. 본질적으로 알망은 괴즈입니다. 시중에는 어지러울 정도로 다양한 빈티지와 배치의 알망이 판매되고 있지만, 사실 알망드의 첫 번째 병은 불과 7년 전에 생산되었습니다. 2016년 6월, 드리 폰타이넌은 750ml와 375ml 용량의 첫 번째 알망을 출시했습니다. 그 후 1.5L 매그넘 병에 채워진 매그넘 버전은 2018년이 되어서야 출시되었으며, 나중에 알망드 & 가스통 스페셜 리저브(빈티지)로 알려지게 되었습니다. 아르망은 드리 폰타이넌을 대표하는 아르망 드벨더(Armand Debelder)의 이름이며, 가스통은 아르망의 아버지인 가스통 드벨더(Gaston Debelder)의 이름으로 그의 아버지를 기리는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드리 폰타이넌은 여러 곳에서 베이스 원주를 구매하지만, 아르망 & 가스통 스페셜에 포함된 모든 베이스 와인은 드리 폰타이넌 자체에서 생산됩니다. 현재까지 50가지가 넘는 버전의 알망이 출시되었으며 앞으로 그 수는 더 늘어날 것입니다. 드리 폰타이넌의 마스터가 되고 싶으신가요? 알망의 모든 배치를 모으는 것부터 시작하세요! D D는 네덜란드어로 '포도'를 뜻하는 단수형과 복수형인 드루이프/드루이븐(Druif/Druiven)의 줄임말입니다. 오늘날 람빅 포도는 드물지 않으며, 칸티용 양조장의 람빅 중 람빅 다우니스(Lambic D'Aunis), 돈키호테(Don Quijote), 성찬 기념 람빅인 빈 산토(Vin Santo) 등 많은 람빅도 피노 누아, 피노 그리스 같은 포도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지금까지 판매된 람빅 중 가장 비싼 람빅 중 하나인 돈키호테] 드리 폰타이넌은 포도 람빅에 대한 시도를 비교적 안하는 양조장인데요. lambic.info에 따르면 1996-98년 샤르도네 람빅을 제외하고 드리 폰타이넌은 2000년경 말바시아 로소(Malvasia Rosso), 피노 누아 람빅(Pinot Noir Lambic), 그리고 아직 어떤 포도를 사용했는지 알 수 없는 드루이븐 괴즈(Druiven Geuze) 등을 생산했습니다. 드리 폰타이넌은 2020년 겨울 세트에 덴펠트 품종인 도른펠더(Dornfelder )와 블루 머스캣 품종인 머스캣 블뢰(Muscat Bleu) 두 가지 포도 람빅을 준비했습니다. 머스캣 블뢰(Muscat Bleu) 포도 람빅에 사용된 토종 포도는 플랑드르의 빈도마인 호엔스호프 (Wijndomein Hoenshof)에서 공급받았습니다. 드리 폰타이넌의 람빅 베이스 원주를 사용하여 병입됩니다. 머스트를 채취하여 약 5개월 동안 다른 배럴에서 베이스 람빅과 함께 발효시킨 다음 서로 혼합한 후 젊은 람빅과 블렌드를 진행합니다. 해당 람빅의 과일 농도는 38.1%에 이릅니다. 머스캣 블뢰(Muscat Bleu) 와인 포도와 테이블 식용 포도를 교배하여 얻은 스위스산 적포도입니다. 이 포도는 향이 비교적 가볍고 아름다운 푸른 껍질을 가지고 있으며 와인과 신선한 음식 모두에 적합합니다. 이 람빅은 빈도마인 호엔스호프(Wijndomein Hoenshof)에서 생산된 도르펠더 포도로 만든 와인으로, 포도를 압착하여 주스를 만든 다음 잠시 침식시킨 후 베이스 원주와 함께 오크통에서 발효시키는 드리 폰타이넌 람빅을 기반으로 합니다. 병입 전에 소량의 어린 람빅을 첨가하여 병에서 2차 발효를 촉진하고 와인에 거품을 더했습니다. 이 와인의 과일 농도는 51.7%입니다. 도르펠더 “Dorfelder”는 짙은 색, 짙은 베리 향과 풍부한 꽃 캐릭터를 가진 독일 적포도 품종입니다. 이 포도는 크고 일관된 수확량을 생산하며 현재 독일의 주요 와인 포도 품종 중 하나입니다. F 프람부스(Framboos) 라즈베리(라즈베리의 왕)는 다양한 원산지의 라즈베리를 람빅 베이스에 첨가한 과일 람빅으로, 프람부스는 프랑스어로 프람부아즈, 영어로 라즈베리에 해당하는 네덜란드어로 2018년까지 모든 라즈베리 과일 람빅은 6% abv로 라벨이 지정되었지만 2018년부터는 각 배치마다 정확한 알코올 함량이 표시됩니다. 라즈베리 람빅은 원래 레스토랑에서 사용하기 위해 적어도 1990년부터 생산되었습니다. 당시에는 특별히 디자인된 라벨이 없었고 라즈베리 람빅임을 나타내는 분홍색 불필 마크만 있었습니다. 종이 라벨이 등장한 후 라즈베리 람빅은 몇 차례 출시되었지만 소량만 출시되었습니다. 파조텐란드(Pajottenland )의 일반 라즈베리 외에도 2018년부터 드리 폰타이넌은 훌덴베르그에 있는 Ferme Framboos 공급업체의 "유기농" 라즈베리를 사용하고 있습니다. 라즈베리 람빅은 이제 일반 제품 라인의 일부가 되었죠. 라즈베리 람빅은 다양한 버전으로 제공됩니다. 둥근 라벨 Oogst 20xx (20xx 년에 수확 한 라즈베리) 외에도 다른 통에서 숙성되거나 신선한 맥아 즙이나 꿀이 첨가 될 수 있습니다. 정확한 버전을 확인하려면 뒷면의 라벨을 읽어야 하는데, 이는 끝없이 흥미로운 정보를 말해줍니다. 드리 폰타이넌의 -lambik 접미사가 붙은 이 과일 람빅은 병에 2 차 발효가 없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병에서 2차 발효를 하면 이산화탄소가 더 많이 발생하여 술에 더 많은 기포가 생기며, 이 카테고리에서와 마찬가지로 -lambik을 마실 때 거품 느낌을 거의 맛볼 수 없음을 의미합니다. 라즈베리 람빅 방법도 매우 고전적입니다. 페르메 프람부스 과일 과수원의 라즈베리를 스테인리스 스틸 통에서 몇 달 동안 숙성시킨 다음 어린 람빅을 첨가하지 않고 병에 담아 병에서 두 번째 발효가 드물고 거품이 거의 발생하지 않습니다. 이 람빅은 2018년 오픈 비어 데이에 처음 등장했으며, 2020년 12월 드리 폰타이넌이 출시한 겨울 패키지에 새로운 라벨과 과일 수확 연도가 표시되어 다시 등장했습니다. G G라는 글자 아래에는 일반 괴즈와 골든 블렌드라는 두 가지 괴즈가 있습니다. 많은 설명이 필요 없을 정도로 드리 폰타이넌에서 일반 괴즈보다 더 친숙한 술은 없죠! 드리 폰타이넌의 괴즈는 양조장의 역사만큼이나 오랜 세월인 1950년대부터 만들어져 왔습니다. 괴즈의 제조법은 시대에 따라 조금씩 달라졌지만 1년, 2년, 3년 된 람빅을 블렌딩하고 병에서 두 번째 발효를 거쳐 괴즈가 탄생하는 기본적인 핵심은 크게 변하지 않았습니다. 자체 생산을 위해 여러 양조장에서 공급하는 맥즙을 구입하는 관행은 람빅 양조장들 사이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방식입니다. 대형 양조업체인 분, 린데만스, 지라딘(Girardin)은 모두 드리 폰타이넌에 원액을 공급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드리 폰타이넌 역사상 한 번의 사고가 있었는데, 2009년 숙성을 위해 병을 보관하던 저장실의 온도가 섭씨 60도에 이르렀을 때 온도 조절기가 고장나 히터를 끌 수 없었고, 이는 의심할 여지없이 람빅에게 치명적인 온도였습니다. 이 온도 조절기 사고로 인해 8만 병 이상의 숙성 람빅이 열에 의해 완전히 파괴되었고, 일부는 그 자리에서 폭발하기도 하는 등 그 결과는 심각했습니다. 람빅 제조 장비의 임대 계약이 곧 만료될 예정이었기 때문에 와이너리는 겨울을 재정적으로 버티기 위해 전략을 조정해야 했죠. 그 후 오랫동안 드리 폰타이넌은 자체 람빅을 만들 수 없었고 대신 블렌딩을 위해 외부에서 원액을 구입하는 데 의존했습니다. 2013년 이후 드리 폰타이넌은 자체 람빅 제조를 재개했고 점차 자체 양조 괴즈도 세상에 나오게 됩니다. 2016년 중반부터 후반까지 드리 폰타이넌 괴즈에는 새로운 라벨이 도입되었으며, 지금까지 60여 가지의 다양한 버전이 등장했습니다. 드리 폰타이넌을 알고 싶다면 다양한 버전의 괴즈가 여러분을 기다리고 있으니 꼭 드셔보세요! -2편에서 계속
다크나이트 오프닝 씬 디오라마 마스터 사이즈 작업기:)
바쁘다는 핑계로 정말 오랜에 작업기네요. 이번 작업은 해외쪽 의뢰처에서 작업요청이 들어온 녀석입니다. 다크나이트 오프닝 씬 "뱅크로버' 해외쪽 피규어 수집 유저들에게 가장 큰 사랑을 받고 있는 다크나이트 시리즈 디오라마입니다. 히어로물을 좋아하시지 않는 분이라도 히스레저의 조커는 아실만큼 명작 그 자체인 작품이다보니 만드는 과정도 매우 즐거웠습니다(?) 언제나 정의가 옳은 것은 아니다. 그럼 작업기는 최대한 간소화하여 :) 올려보겠습니다. 해당 디오라마는 1:6 Scale로 작업된 100% 핸드메이드 작업물입니다. 작업과정은 설명보다는 사진으로 갈음하겠습니다:) 간소화한다고 했는데 생각보다 사진도 제법 남았네요. 설계부터 디자인 , 구성요소들 모두 손으로 만들어야 하는 디오라마 장르 특성상.. 굉장히 긴 시간과 노력이 들어갑니다. 이른바 "갈아넣는"과정이 필요하지요. 어떨땐 정말 수양을 하는 것과 비슷한 느낌을 받는답니다. 버스에 달린 리뱃 찡 하나까지 전부 달아줬습니다. 대단치 않은 작업의 연속이지만 결국 그 대단치 않은 작업들의 연속들이 모여러 제법 그럴 듯한 작업물을 만들어내준다는 것을 알기에 :) 작업과정중에 느껴지는 현타(?)마저 즐길 수 있게 해주는 것 같습니다. 이번 마스터 사이즈 작업전에 이미 뱅크로버 디오라마 씬 작업은 조금 더 작게 작업해본 적이 있다보니 사실 좀 지루한(?)작업이었습니다 ㅎㅎ 10체 한정 작업으로 진행했던 베이스 타입의 뱅크로버씬 디오라마. 그럼 곧 다음 작업기에서 다시 뵙겠습니다:) 늘 감사합니다. www.instagram.com/aj_custom
19살 연상의 유모를 사랑했던 명나라 황제 이야기.jpg
때는 명나라 당시 왕실이나 황가에서 아이를 양육하는 건 궁녀들의 역할이었음. 10살의 태자 주견심도 마찬가지로 어머니가 살아 있었지만 주로 궁녀들 손에 키워짐. 그 중 한 명이 만정아 라는 궁녀였음. 만정아는 황자보다 19살 많았음. 지금도 물론 나이차이가 많은 거지만 이 때는 15세기 중반임. 10대 초반에 혼인하던 시기기 때문에 만정아는 황자에게 그냥 어머니 뻘임. 실제로 황자의 생모인 귀비가 만정아보다 어림. 친어머니와 거의 보지 못하고 태자 교육을 받던 어린 주견심은 매일 곁에서 자길 돌봐주는 만정아에게 애정을 가지게 되고, 그게 연모로 발전함. (.....?) 야사에 따르면 만정아는 미래의 황제인 태자의 환심을 사면 엄청난 부귀영화를 누릴 것이라고 생각해 주견심의 애정 공세를 받아주고 더 나아가 유혹했다는데 정말 그게 전부였는지, 아님 만정아도 주견심을 진심으로 사랑했는지는 나도 모르겠음. 타임머신 개발되면 가서 알아보겠음. 이후 1464년, 정태제가 죽자 주견심은 19살의 나이로 황제가 됨. 젊은 황제는 제일 먼저 만정아를 황후로 책봉하려고 하지만 주변의 반대가 심했음. 결국 황제는 만정아를 귀비로 책봉하는데 만족해야했음. 물론 황제가 만귀비를 총애했기 때문에 황궁 실세는 만귀비였음. 만귀비는 다른 후궁들 괴롭히는 건 물론이요 자기보다 윗 사람인 황후까지 무시함. 황후 입장에서는 존나 자존심 상할 일임. 보다 못한 오 황후는 만귀비를 불러 군기를 잡음. 뺨을 때렸다는 썰도 있고 채찍을 들었다는 썰도 있음. 수모를 당한 만귀비는 엉엉 울며 황제를 찾아가고, 황제는 극대노하며 바로 황후를 폐위시켜 내쫓아버림. 황후 책봉 한 달만에 일어난 일이었음. 이후 새로운 황후가 된 왕 황후는 만귀비한테 찍 소리도 못하고 설설 기었기 때문에 만귀비는 완전히 비선실세가 됨. 그러던 중 만귀비가 황제의 아들을 낳음. 황제의 첫 아이기도 했음. 황제는 뛸 듯이 기뻐하며 온 중국 명산에 사람을 보내 황자의 건강을 기원하는 제를 올리게 하지만 그런 보람도 없이 아기는 요절함. 황자가 요절했을 때 만귀비의 나이는 39살이었음. 지금 기준으로도 노산인데 저 시대는 어떻겠음. 만귀비가 건강한 아이를 또 낳을 가능성은 사실상 없어 보였음. 하나 뿐인 아이를 잃고 절망한 만귀비는 흑화해서 온 후궁이란 후궁은 다 괴롭힘. 그러다 현비가 황제의 차남인 주우극을 낳고 주우극이 태자가 되자 네 살짜리 태자와 현비를 독살해버림(.......) 당시 황궁에는 기씨 성을 가진 말단 후궁이 있었음. 요족이라는 소수 민족 출신으로 요족의 반란이 진압 당한 후 황궁으로 끌려와 서고를 관리하는 사람이었음. 황제는 어느 날 우연히 기씨를 보고 하룻밤을 보내고 이내 까먹는데, 문제는 이 하룻밤 사이에 아이가 생겨버림. 만귀비는 기씨를 유폐 시키고 낙태 약을 먹이려고 했지만 만귀비의 악행에 진절머리가 난 환관이 몰래 약을 버려서 무사히 황자가 태어남. 하지만 만귀비의 악명을 알고 있던 기씨는 장민 이라는 내관을 불러 "(어차피 만귀비가 죽일 테니) 아이를 물에 빠뜨려 죽이는 게 낫다" 고 말함. 위에서 말했듯 만귀비가 낳은 장남은 요절했고, 둘째 주우극은 만귀비가 독살해버려서 황실에 후사가 없는 상태였음. 장민은 아이를 숨겨서 6년간 키우다가 어느 날 황제가 "짐도 이제 서른인데 후사가 없으니 큰 일이다..." 한탄하자 사실 기씨가 낳은 황자가 있다고 고백함. 이렇게 해서 기씨의 아들 주우탱은 황자로 인정 받고 태자가 됨. 물론 만귀비는 이 아이도 죽이려고 했지만 보다 못한 태후가 주우탱을 자기 처소로 데려가 보호하고 키워서 아이를 죽일 수 없었음. 분노한 만귀비는 주우탱의 생모인 기씨와 주우탱을 숨겨 키운 장민을 독살해버림(....) 태후의 비호를 받는 주우탱을 해칠 방법이 없단 걸 인정하자 허탈해진 건지 뭔지 그 다음부터는 황제가 다른 후궁에게 잠깐 관심을 보이거나 아이를 낳아도 안 죽였다고 함. 이후에도 만귀비는 황궁의 비선실세로 군림함. 조정의 중신들도 만귀비에게 굽신거렸고, 만귀비의 남동생은 금의위지휘가 되어 황궁 군권을 가지게 됨. 사실 황제가 병신도 아니고 만귀비의 이런 악행을 모를 리 없었음. 근데 황제는 만귀비를 너무 사랑한 건지 뭔지 다 묵인했다고 함;;;; 하지만 이런 만귀비도 피해갈 수 없는 것이 있었으니 바로 세월이었음. 1487년 봄, 만귀비는 60세의 나이로 사망함. 썰에 따르면 만귀비는 젊어서부터 뚱뚱하고 혈압이 높았는데 노령의 나이에 궁녀 붙잡고 화내다가 쓰러져 죽었다고 함(;;;) 슬픔에 빠진 황제는 법도를 어기고 7일 동안 조정 회의를 취소하고, 대신들이 뭐라하는 거 다 씹어버리고 천수산에 만귀비의 무덤을 만듬. 천수산은 원래 황제만 묻힐 수 있는 곳인데 거기서도 가장 터가 좋은 자리를 골라 묻었다고 함. 물론 지금은 도굴 당해 몇몇 부장품만 전해지고 전부 폐허가 됐지만 극도로 호화로운 무덤이었다고... 만귀비의 무덤에 함께 들어갔던 부장품 중 하나인 '황후의' 봉관. 이후 황제는 슬픔에 빠져 "만귀비가 세상에 없는데 내가 살아서 무엇 하겠냐...." 라며 시름시름 앓다가 그 해를 못 넘기고 죽음. 성화제의 뒤를 이어 주우탱이 즉위하는데, 얘가 홍치제임. 사실 홍치제는 만귀비를 부관참시해도 모자랄 처지였음. 어머니를 만귀비 손에 잃은데다 본인도 죽을 뻔 했으니까 ㅇㅇ 하지만 홍차제는 아버지를 생각해 만귀비에 대한 일을 전부 불문에 부침. 성화제와 만귀비가 트라우마가 된 건지 당대 군주로서는 드물게 후궁을 하나도 들이지 않았음. 동시대 조선을 봐도 양반 이상은 첩을 들이는 게 당연했는데 다른 사람도 아닌 황제가 평생 황후만 보고 살았으니 아주아주 드문 일임. 당연히 자식도 황후에게서 낳은 2남 1녀가 전부. 명나라 최후의 명군으로 평가 받는 홍치제답게 나라 잘 다스리다 갔다고 함. 출처 존잼.. 역사이야기가 젤 잼써 역시
의외로 고양이의 대한 지식이 많았던 조선시대
조선의 온것을 환영하오 젊은이여 변상벽(변고양이) <묘작도> 당지 조선시대는 의외로 고양이의 대한 지식이 많았는데 (자주 보네요 대군?) 양녕대군이 세자시절 재상의 집에 있던 금빛고양이를 달라고 떼쓰다가 빠꾸 먹었는데 이때 양녕대군은 "금빛고양이는 수컷이 귀하다길래 한번 보고 돌려주려고했어." 핑계를 댐 사실 금빛고양이는 80% 확률로 수컷임. 변상벽(변고양이) <묘작도> 오히려 삼색이가 90% 확률로 암컷이라 수컷이 더 귀함 양녕대군이 둘을 햇갈린건지 내려오는 썰이 와전되서 그런건지 모르지만 어쨌든 당시 조선시대 사람들은 이미 털색에 따라 암수의 특징이 있다는걸 이미 알고있었다는말ㅇㅇ 그리고 단순히 고양이가 가축에서 분양이 가능하게 반려(애완)으로서 입지가 올라갔다는것ㅇㅇ. 그리고 세종말에 나온 선택요략이라는 책에서는 장승업 <고양이> 고양이가 가축으로 등장하며 "정묘" 라는 단어를 찾을 수 있는데 이 정묘라는 말은..... 고양이의 거세를 말함 이미 조선초기에 고양이의 중성화가 이루어지고 있었다는 것. 어떻게 중성화를 시켰는지는 모르지만.. 조선시대에도 한 중성화 지금도 고양이를 위해 잘 해야겠쥬? 그리고 조선중기 허준과 동시대의 의원이었던 양예수와 정경선은 의림촬요라는 자신이 쓴 책에서 고양이가 개박하를 먹으면 취한다. 라고 기록되어있음. 이 개박하라는건 현재 우리가 부르는 캣닢임 고양이가 캣닢에 미친다는걸 이미 알고있었다는것ㅇㅇ 그리고 조선 후기때 사람들은 고양이의 동공으로 시간을 가늠하기도했음 시계가 없던 당시에 해시계처럼 시간을 대략적으로 측정한것.ㅇㅇ 즉 고양이가 빛에는 동공이 작고 어둠에는 동공이 커진다는걸 알고있었음 비록 어두울때는 잘 안보여서 약간의 오차가 있긴했지만 아주 유용한 시간체크 ㅋ 이익이란 실학자는 오전 12시 전후로 고양이 동공이 좁아진다고 생각했음 뭐 약간의 오차가 있긴하지만 그래도 그 당시에 대단하지라~ 하나 재미있는 얘기가 있는데 어느날 이익이 고양이를 쓰다듬다가 정전기가 일어나자 이익 : 오잉? 고양이 털안에 불티(불씨)가 있나?? 이익 : 고양이는 차가운곳(서쪽)에서 온 동물인데 이익 : 어떻게 몸에 열기를 품고있을까??? 고민하딘 이익은 이익 : 고양이는 참 알 수 없는 것이로다~ 했다고한다. 사실 우리나라에 고양이 경로는 서아시아 -> 중국 -> 우리나라인데 이때 이미 고양이의 기원(?)에 대해 알고있었다는것! 당시 이익은 서극(서쪽)을 해가 지는곳이라 추운곳으로 생각했나보다.ㅋㅋㅋㅋㅋ (또 나왔네 양ㅡ하!) 그리고 양녕대군에 금빛고양이 일화에서 스승신하가 세자인 양녕대군을 혼내기위해 이런 말을 하는데 스승신하 : 고양이는 사냥개만큼 사납지는 않지만 귀여워하기 어려워 구경하기 어려운 동물입니다 근데 신효창 재상에게 빼았으려하시다니요 세줄 요약 : 고양이는 사냥개보다 안사납지만 성격도 지 마음대로고 니 말 잘 듣고 사람을 따르는 동물이 아님 ㅡㅡ 변상벽 (변고양이) <묘작도> 조선시대에도 고양이는 도도하고 키우는 사람들은 집사라는 이미지가 있었나봄ㅋㅋㅋㅋㅋㅋ 변상벽(변고양이) <묘작도> 김득신 <야묘도추> 그럼 냥ㅡ바~ 출처
고려청자 '매병'의 반전쩌는 사용 용도.jpg
일단 아래 사진을 보자 이건 "梅甁"이야 '매병'이라고 읽어 매병은 정의상 "아가리(도자기는 입구를 이렇게 표현함 ; 혹은 '구연부(口緣部)')가 좁고 어깨(구연부에서 몸통으로 내려가는 부분)가 넓고 풍만하며, 동체(몸통)가 저부(바닥부분)로 갈 수록 홀쭉해지는 형태" 를 말해 (아휴 길기도 해라) 우리가 아주 잘 아는 학 무늬의 청자야 이건 알다시피 국보🤩야 (정확히는 국보 제86호 청자상감운학문매병) 개인적으로 '매병'은 영화로 치자면 떡밥회수가 매우 잘 된 스릴러라고 생각하는데 입에서 어깨로 떨어지는 선은 완만한데에 비해 어깨에서 바닥으로 흘러가는 선은 매우 과감해서 활자로만 보면 균형감이 없어야 정상일 것 같은데, 실제 도자기는 그 균형이 정말 잘 잡혀있잖아? 👍 완전 굳이지 굳 (마쟈 내 취향이야 그니까 굳임😋) ㅋㅋㅋ 문제는 "이게 실제로는 어떻게 쓰였을까🤔?" 야 우리가 문화재를 잘 이해하는 혹은 잘 감상하는? 그런 방향 중에 하나는 '이 유물이 그때는 어떻게 쓰였을까?'를 상상해보는거야 우리가 지금 '문화재'로 감상하는 대부분의 유물이 최초로 만들어졌을 당시에는 '실용품'이었다는 것을 알면 꽤 재밌어 그래서 '매병'도 "실제로는 어떤 쓰임이었을까🧐?" 라고 상상해보는거야 우리가 이런 도자기를 '매병'이라고 부르지만 이 "매병"이라는 이름은 사실 18세기 중국 문헌에서나 확인할 수 있어 그런데 우리가 아는 '고려'청자의 고려는 918년. 그러니까 10세기에 건국되었는데!? 18세기면 1700년대 조선이잖아😮?! (임진-병자전쟁도 끝난 뒤임) 😊 그래서 우리가 "고려청자 운학문매병"이라고 부르는 도자기가 사실은 "매병"이라고 불리지 않았다는 것을 알 수 있어 사실 이런 도자기는 중국 '당唐' 때부터 등장하는 형태야 (이에 대해 여러가지 이야기를 더 덧붙일 수 있겠는데 일단 스킵하쟝) 어쨌든 매병의 '梅'는 '매화'를 의미하기 때문에 "화병花甁(꽃병) 아니었을까? 괜히 그런 이름을 후대에 덧붙였겠어?" 라는 의견이 있었고 "술병일 수도 있지! 대부분의 그릇들이 술그릇에서 출발한 경우가 많잖아?" 라는 의견도 있었고 "뭔 소리야. 야, 딱 봐라. 저걸 누가 썼겠냐? 딱 봐도 사치품인데, 귀족들의 관상용일 수도 있지!" 라는 의견도 있었어 사실 각 의견마다 충분히 납득될 만한 증거들이 있었어 매병 형태의 도자기가 등장하는 그림이나 비슷한 형태의 쓰임새, 그에 대한 기록 등등 하지만 그 어느 쪽도 우세를 점하지 못한 채 (사실 술병일 것이라는 의견이 좀더 컸음) 일대의 사건이 우리를 찾아오게 되는데... 태안 앞바다에서'옛날 배'가 발견된 거임😮 이 배는고려시대의 무역선혹은조운선(세금운송선)으로 생각되는데 우리가 주의깊게 봐야할 보물선은  2010년에 수중발굴된 "태안 마도 2호선"임 이 보물선에서 다름아닌 '매병'이 발견되는데 그 이전에는 찾아볼 수 없었던 '부속품'이 함께 발견됨 그게 바로 "목간木簡"임 이 '목간'은 오늘날로 말하자면 일종의 "상품사용설명서"라고 할 수 있음 이 상품이 무엇이다~ 라고 설명해주는 거임 (발견 당시에는 '목간'이라고 기사가 많이 났으나, 현재 국립중앙박물관에서는 '죽찰竹札'로 표기하고 있으므로 이하 '죽찰') 그러니 이 말이 무슨 말? 이 도자기가 무슨 도자기인지 알 수 있다는 말!!!!!!!!! 태안마도 2호선에서 이런 죽찰이 발견된 매병은 두 개인데 놀랍게도 이 두 개에는 매병의 정체가 적혀있음 딱 봐도 위의 도자기와 함께 있는 죽찰과 밑의 죽찰에 써있는 글자가 다르다는 것을 알텐데 앞 뒤로 다른 글자가 써있어서 그럼 하나는 重房都將校吳文富 宅上眞盛樽封 앞면 : 중방도장교오문부 뒷면 : 택상진성준봉 요렇게 쓰여있고 다른 하나는 重房都將校吳文富 宅上精蜜盛樽封 앞면 : 중방도장교오문부 뒷면 : 택상정밀성준봉 이렇게 쓰여있음 두 죽찰에서 "重房都將校吳文富(중방도장교오문부)"라는 글자가 겹치는데 '어라?'하는 부분이 있을 거임 "중방重房" ㅇㅇ 맞음 그 '중방'의 중방임 고려시대 무신들의 합좌기구이자 무신정변 이후에는 고려 최고의결기구가 된 그 중방을 말하는 거임 그 뒤의 "도장교都將校"는 당시 정8품의 무관직을 말하는 거임 그 다음의 "오문부吳文富"는 그냥... 그냥 사람 이름임😊! (오늘날로 치면 옥뮤다 같은 곳으로 택배가 빠져서 영영~ 못 받게 되신 분임) 그러니까 두 죽찰의 앞면에 써진 글자는 '회사-직책-이름' 순으로 일종의 수취인을 쓴 거임 "중방에서 근무하시는 오문부 도장교 귀하께" 정도 되는거임 그럼 뒤에 써진 "宅上眞盛樽封" "宅上精蜜盛樽封" 은 무엇일까 "택상宅上" = 받들어 올리다 "진眞" / "정밀精蜜" = 참기름 / 꿀 "성준봉盛樽封" = 준(樽)에 담아(성盛) 봉(封)하여 참...기름??? 꿀이요????????? 녜... 참기름 & 꿀단지였던 거임ㅇㅇ 세상에서_가장_비싼_포장용기.jpg 앙대ㅠㅠㅠ 이렇게 이쁜 내 고려청자가 고작 포장용기일리가 없어!!! 실제로 죽찰의 발견 당시 그 어느 누구도 상상해보지 못한 쓰임새라서 학계에 일대의 파란...까지는 아니고 놀라움?을 선사해주었고 지금도 대학교 한국미술사 or 한국도자사 수업을 들으러 가면 교수님과 강사님들이 아주 재미있게 말해주는 일화 중에 하나😉 ^^ 어케 끝내 이거... 처음 썼을 때도 어떻게 끝내야 하는지 망설였엉 +덧 죽찰의 발견으로 우리가 '매병'이라고 부르는 것이 고려 당시에는 "준(樽)"이라고 불렀다는 것을 알 수 있음 +덧2 "도장교都將校"는 정8품의 '하급'무관직임 하급무관이 저런 도자기를 선물(혹은 뇌물?) 받았을만큼 당시 무신들의 위세(혹은 오문부吳文富 아저씨의 위세?)가 컸음을 알 수 있음 +덧3 설마 포장용기로만 썼겠..썼을까? 다 쓰고 꽃병으로든 술병으로든 썼을 것으로 생각되는데... 어쨌든 '참기름&꿀단지'로 쓰인 실사용례를 아주 정확하게 알게 된 사례😊... 자, 마지막으로 죽찰과 발견된 매병을 보자! 둘다 보물로 지정되었음 참기름단지 국보 제1783호 청자 상감국화모란유로죽문 매병 꿀단지 국보 제1784호 청자 음각연화절지문 매병 ㅎㅎㅎ 안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