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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은 봄날에..♡

사랑은
봄날에 피는 하얀 목련 같아서
늘 마음이 하얗고 순수합니다
깨끗한 마음 안에 소중한 사랑을
고이 담아 예쁜 꽃을 피웁니다
봄 여름이 오고 가을 겨울이 오고
사랑 그 사랑이 나를 숨 쉬게 하는 걸요
사랑은
마치 몰래 하는 짝사랑 같아서
때로는 마음을 숨길 때도 있습니다
저 태양처럼 붉게 타는 석양 노을처럼
어찌 뜨겁게 불태우고 싶지 않겠나이까
사랑은 날마다 시나브로 자라나
아름드리 한 그루 사랑나무 키웁니다
사랑은
너무 소중하여서 단 하나라서 그래서
나는 너에게 꽃별 너는 나에게 한별
때론 여우별이 되고 싶은 날도 있어요
괜한 질투를 내죠 하지만 마음속엔
초승달 하나 걸어두고 행복하게 웃는
내 맘은 사랑의 향기로 달보드레합니다

- 고미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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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이 반 고흐에 대해 몰랐던 사실 8가지
후기 인상파 화가 반 고흐의 작품은 1890년 그가 37세의 젊은 나이로 죽은 후, 더욱 대단한 평가를 받았다. 근래에는 아카데미상 수상작 ‘열정의 랩소디(Lust for Life,1956)’, ‘미드나잇 인 파리(Midnight In Paris, 2011)’에서 그의 작품이 주제로 다루어졌는데 고흐는 아직까지 전 세계인의 사랑을 받고 있는 화가 중 한 명이다. 그런데 사실 이 네덜란드 화가는 자신의 인생을 완전한 실패로 여겼다고 한다. 전해져 내려오는 이야기에 따르면 반 고흐는 평생 딱 한 개의 작품밖에 팔지 못했으며 미술계에서 알려진 인물도 아니었다. 그의 인생은 자신에 대한 회의감 등 다양한 심리적 문제로 가득했다. 반 고흐는 자신의 대표작이라고도 할 수 있는 ‘별이 빛나는 밤(The Starry Night, 1853)’의 작업을 마쳤을 때 그다지 좋게 생각하지 않았다고 한다. 작품이 소개될 당시 미술계의 반응도 변변찮았다. 하지만 이 그림은 1941년부터 뉴욕 현대미술관(MOMA)에서 상설 작품으로 전시되었으며, 1973년에는 그의 모국 네덜란드 암스테르담에 반 고흐 미술관이 설립되기에 이른다. 지난 12월 잡지 배니티 페어(Vanity Fair)는 반 고흐의 갑작스러운 죽음과 그의 마지막 순간에 대해 새로운 의문을 제시했다. 그래서 허핑턴포스트도 새로운 발견에 나섰다. 아래는 당신이 반 고흐에 대해 몰랐던 8가지 사실이다. 1. 반 고흐는 밤에도 작업을 하기 위해 모자 위에 초를 올려놨다. 고흐가 진짜로 밀짚모자 위에 초를 두르고 그림을 그렸는지는 확실하지 않다. 하지만 동생 테오에게 쓴 편지에서 을 “가스 불 아래서” 그렸다고 하는 대목이 있다. 그래서 이 전설은 계속 반복되고 있다. 반 고흐는 테오에게 보낸 또 다른 편지에 “적어도 나에겐 색채가 낮 보다 밤에 더 살아있고 풍부한 느낌이다”라고 적었다. 전해 내려오는 이야기대로는 고흐가 밤에도 그림을 그리기 위해 카페를 찾아가서 밀짚모자 위에 초를 올려놓고 다른 손님들이 옆에 있는 건 아랑곳하지 않고 작업을 했다고 한다. 동료 미술가인 안톤 밴 라파드(Anthon van Rappard)에게 쓴 글에서 반 고흐는 여자를 의미하는 초와 남자를 의미하는 나방에 대한 우화를 설명하기도 했다. 2. 반 고흐는 자살이 아니라 타살일 가능성도 있다. 2011년에 출판된 ‘반 고흐: 삶(Van Gogh: The Life)’이라는 책에서 퓰리처상 수상 소설가 스티븐 네이페와 그레고리 화이트 스미스는 반 고흐가 자살을 한 것이 아니라 지역에 사는 십 대 불량배에게 살해되었다고 주장했다. 미술 역사가들이 이 이론을 용납하려면 아직 멀었지만(암스테르담의 반 고흐 미술관은 타살이 아니라 자살이라고 못 박고 있다) 베니티 페어의 기사에 따르면 한 법의학자는 반 고흐가 총으로 자신을 쐈을 가능성이 낮다고 말했다고 한다. 그 이유는 화가가 총을 자신의 몸에 그렇게 가까이 겨냥하기가 어려웠을 것이고 또 총을 쏜 후 손에 남는 그을음 흔적이 없었다는 것이다. 책 내용에서 알 수 있듯이 반 고흐를 쏜 총은 발견되지 않았고 반 고흐가 작업을 하고 있었다는 이젤도 발견된 적이 없다. 그리고 치명적인 상처를 입은 후 고흐가 걸었다는 보리밭에서 여관까지의 거리(약 1.6km)는 너무 멀다. 그리고 저자의 추측이지만 그 시대에 반 고흐가 그리던 그림은 다른 때보다 훨씬 가벼운 느낌이었다고 한다. 또한 이 책은 반 고흐가 보낸 여러 편지와 서문을 통해 자살에 반대한다는 입장을 확인했다고 한다. 그런데 자살에 대한 발상이 고흐 자신에게서 비롯된 것도 사실이다. 여관에 돌아온 그는 죽고 싶다며 치료를 거부했고 동생 테오에게 이렇게 말했다. “슬픔은 영원하다.” 3. 반 고흐의 유명한 ‘귀 상처’는 자해가 아닐 수도 있다. 우선 확실히 해야 하는 것은 고흐가 귀 하나를 다 잘라버린 게 아니라는 사실이다. 왼쪽 귓불 일부만 잘려 없어졌다. 사건 3일 후 프랑스 일간지 ‘르 프티 주르날‘의 보도에 의하면 반 고흐가 자신의 귀 일부를 어느 매춘녀에게 준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정작 자기가 베어낸 후 건넨 것인지는 의심의 여지가 있다. 그 사건이 있었을 즈음 고흐는 동료 화가이자 친구인 폴 고갱과 함께 살고 있었다. 고갱은 펜싱 선수였다. 둘은 자주 심하게 싸웠는데 고흐가 귀 일부를 자른 밤도 예외가 아니었다. 두 사람 모두 고흐의 자해였다고 확인했지만 그의 수치심을 덜어주기 위해서였을 수도 있다. 또 고흐는 거짓말을 잘했다. 고갱이 고흐를 좋아하는 것보다 고흐가 고갱을 더 좋아하는 것을 안 동생 테오는 고갱에게 형과 함께 살아달라고 돈까지 줬다. 무슨 이유인지 고흐는 사건에 대한 기억이 없다고 나중에 주장했는데 동생 테오에게는 이런 편지를 보냈다. “다행인 것은 고갱이... 아직 기관총이나 다른 위험한 무기로 무장하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4. 반 고흐는 생-레미에 있는 생-폴 정신병원에 자발적으로 입원했는데, 환자실 창밖을 내다보며 ‘별이 빛나는 밤’을 그렸다. 반 고흐는 1889년 1월에 왼쪽 귀를 잘라낸 후 치료받던 병원에서 퇴원했다. 하지만 정신적인 건강이 회복되지 않았다고 느낀 그는 몇 달 후인 5월에 생-폴 병원에 환자로 입원하기를 자처했다. 반 고흐 미술관에서 설명하듯 바로 그 뒤에 테오는 형에게 아래와 같은 편지를 보냈다. 반 고흐는 유명 작품 ‘붓꽃(Irises, 1889)’과 ‘올리브나무(The Olive Trees, 1889)’ 그리고 ‘별이 빛나는 밤(The Starry Night, 1889)’을 정신병원에 묵으면서 그렸다. 반 고흐는 ‘별이 빛나는 밤’을 실패라고 일컬었는데, 테오에게는 편지로 여러 개의 그림을 보낼 것이라 전했다. (테오의 노력과는 상관없이 고흐의 그림은 한 점도 팔리지 않았다. 반 고흐는 ‘별이 빛나는 밤’을 가리켜 자신에게 “아무 의미도 없다”고 했다. 다른 그림에 대해선 “약간 괜찮다”고 했는데 ‘별이 빛나는 밤’에 대한 화가의 평가는 후하지 않았다. 고흐는 테오에게 모든 그림을 보낼 배송비가 모자라서 ‘별이 빛나는 밤’은 그대로 남겨진 것이다. 5. 반 고흐는 자신과 같은 이름의 형이 어렸을 때 죽는 바람에 유년기에 자신의 이름이 적힌 묘비를 지나쳐야 했다. 반 고흐는 네덜란드 쥔데르트(Zundert)에서 태어났다. 아버지 테오 반 고흐는 그 지역 네덜란드 개혁교회 목사로 1849년에 임명됐었다. 반 고흐의 이름 ‘빈센트’를 딴 형이 아기 때 죽으면서 그의 이름이 적힌 묘비가 교회 묘지에 세워졌는데, 이 아기는 아직도 그곳에 묻혀있다. 쥔데르트에서는 지금까지도 고흐의 생가를 기념하고 있으며, 빈센드 반 고흐 광장과 반 고흐는 물론 동생 테오를 추모하는 동상도 있으다. ‘Markt 29’에 있던 고흐의 원래 집은 불행히도 이전에 철거되었다. 6. 반 고흐는 27, 28세가 되어서 화가 활동을 시작했다. 그는 37세에 짧은 인생을 마치기 전 거의 900개의 작품을 그렸는데 한 주에 약 2개를 그린 셈이다. 화가의 길을 걷기 전 반 고흐는 목사, 교육자, 미술상 등 다양한 직업을 전전했다. 그러다가 1881년 12월에 동생 테오에게 이런 편지를 보냈다고 반 고흐 미술관은 설명한다. 반 고흐는 900개 이상의 유화, 1,100개 이상의 스케치를 남기고 죽었다. 대단한 다작인 것이 사실이지만 그 이유는 일종의 간질 때문일 수도 있다. (그는 간질을 진단받은 적이 있다). 즉 하이퍼 그라비아 - 끝없이 글을 쓰는 정신 질환 (주체할 수 없을 정도로 글이 쓰고 싶어지는 욕망) 증상이 있었을 수 있다는 것인데 반 고흐의 경우는 그림이 주체하지 못하는 욕망이었다. 7. 반 고흐가 사용한 독특한 노란색은 시간이 지나자 변질되고 누레졌다. 반 고흐는 산업혁명 덕분에 개발된 새로운 물감, ‘크롬 옐로우’를 그림에 많이 사용했다. 그 시대에 이용되던 물감은 화학적으로 완벽하지 않았고 인체에 유해했다고 한다. 고흐의 그림 ‘화가의 침실’은 시간이 지나면서 상당히 색이 바랬는데, 누런색을 띠게 되어서 원작의 화려함을 현재는 감지하는 것이 불가능하다. 누렇게 변하는 물감을 실험한 전문가 중 한 사람인 코엔 얀센은 이를 되돌릴 수 없는 결과라고 한다. 그는 “이미 일어난 화학 작용을 되돌리려다간 그림을 더 손상시킬 수 있다”고 말했다. 8. 세상에서 가장 오래 산 여자가 반 고흐를 회상했다. 그를 “더럽고, 복장도 형편없고 매우 불손한” 사람으로 기억했다. 1875년에 태어난 진 칼멘트는 1997년 122세 나이에 죽었다. 반 고흐가 1888년에 살던 프랑스 아를 지방에 그녀도 거주했었는데 칼멘트의 삼촌이 운영하는 가게에 반 고흐가 물감을 사러 자주 들렸다고 했다. 칼멘트는 반 고흐를 “더럽고, 복장도 형편없고 매우 불손한” 사람으로 기억했다. 뉴욕타임스는 그녀는 당시 12, 13세였으며 반 고흐를 “매우 흉하게 생기고, 예의가 없고, 불친절하고, 아픈 사람이었지만 이젠 용서한다. 다들 그를 미친놈이라고 했다.”고 했다고 보도했다. 보너스: 반 고흐는 30개 이상의 자화상을 그렸다. 그런데 반 고흐의 사진 또한 존재할 가능성이 있다. 오른쪽 그림은 1886년 12월 31일에 완성한 자화상이다. 왼쪽 사진은 1886년에 촬영됐는데, 1990년 초 어느 앤티크 가게에서 1달러에 받고 팔렸다고 한다. 그 후 2004년 법의학자들이 이 사진이 반 고흐의 얼굴임을 입증했다. 반 고흐 미술관은 당시 사진의 진위를 확인하지 않았는데, 그가 훨씬 젊을 때 찍은 사진 몇 개만 진품으로 인정하고 있다. 사진 하단에 적힌 주소 때문에 논란이 있기도 했다. 캐나다 주소가 적혀있기 때문이다. 반 고흐는 유럽을 떠난 적이 없다. 두 얼굴의 눈을 자세히 보면 약간 다른 것 같지만 인상파 화가가 보면 또 다르게 생각할 수도 있지 않을까? *이 기사는 허핑턴포스트US의 ‘8 Things You Didn’t Know About The Artist Vincent Van Gogh‘를 번역, 편집한 것입니다. 출처 관심이 가는 분들은 '영혼의 편지'를 읽어보시길 !!
악필을 탈출해보자! 예쁜 글씨 쓰는 법!
2n년간 악필이었던 내가 이젠 글씨를 잘 쓰는 어른이 되었어. 별거 없지만 팁 써본다.. <악필 시절 원래 글씨체> 노트 필기한거 보이지? 나름 펜으로 내딴엔 반듯하게 쓴거야.ㅋㅋㅋㅋ 단순히 글씨체가 안예쁜거랑 악필은 좀 다른 문제야. 악필이면 남이 내 글씨를 잘 못알아보고 심지어 나도 내가 뭐라고 썼는지 헷갈릴 때가 많아서 일상생활에서 소소하게 불편했음 요즘 글씨체 어딜가나 예쁘다는 소리 들음 다꾸를 하는데 글씨가 안예뻐서 뭘 써도 별로인거야..ㅠㅠ 사실 이정도까진 쓸 필요 없긴한데 난 오기생겨서 열심히 연습했어! 그럼 내가 어떻게 글씨를 바꿨는지 알아보자.. 참고로 나는 책을 따로 사거나 학원을 다니거나 하진 않고 혼자 연습하듯이 서서히 바꿨어! 일단 가장 중요한건 꾸준함.. 글씨체 바꾸는데는 오래 걸려.글씨도 하나의 습관이고 생활 양식중 하나야. 이십년 넘게 날려서 쓴 필체가 하루아침에 뚝딱! 하고 고쳐진다면 누구나 명필이겠지? 정말 많은 사람들이 글씨를 개선해보겠다고 서적을 사고, 며칠 또는 몇 주동안 열심히 따라 써. 그러다 예전처럼 다시 날려쓰면 당연히 원래 글씨로 돌아올 수 밖에ㅎㅎ 그러면 아 글씨는 안 바꿔지네~ 하면서 포기해버림ㅋㅋ 나는 글씨체 바꾸고 자리잡기까지 일년은 넘게 걸린 것 같아! 필사를 하든 일기를 쓰든매일매일 꾸준하게 한바닥 이상을 쓰면서 서서히 연습하는걸 추천해. 나는 매일 일기를 썼는데, 쓸 때마다 글씨를 신경써서 연습을 했어. 지금 다시 보면 야금야금 날마다 천천히 바뀐게 눈에 보이더라. 절대 하루아침에 바꾸려고 하질 말아. 느리더라도 꾸준히 연습하는게 중요해. 이건 내 개인적인 의견인데! 정말 악필인 사람이 갑자기 악필교정 책을 사서 무작정 따라하는것 보다는, 내가 원래 갖고 있던나쁜 습관을 서서히 제거하는 식으로 고쳐나가는걸 추천해! 악필인 경우 대부분이 자음과 모음을 붙이고 후루룩 날려쓰는 경우가 많은데, 이렇게만 써줘도 읽는덴 문제가 없어져! 이 때는 꼭 예쁘게 쓰려고 하기보다 최소한의 가독성을 위해 하나하나 들여쓴다는 생각으로 써봐! ㄹ, ㅂ, ㅁ 같은건 최대한 각지게, ㅇ ㅎ은 둥글게 따로 생각하고 써보기 이렇게 연습을최소한 한달 이상 글씨를 쓸 때마다 신경써서 적고, 꾸준히 연습을 해봐 이 과정만 거쳐도 악필은 벗어나게 되어있어! 두번째는 은근 중요한데 일정한 크기로줄 맞춰적는 연습하는거! 악필러 대부분이 글씨 자체도 못 쓰긴 하지만 이게 안 되어있음! 글씨가 예뻐도 이 과정이 안 되어있으면 한눈에 글자가 잘 들어오지 않고 읽기에 피로하게 돼!ㅠ 이게 두번째 과정을 거친 내 글씨체야 누가봐도 예쁜 글씨는 아니지만 한눈에 글자가 들어오고 가독성이 많이 좋아졌지! 줄노트보다 모눈종이에 쓰는걸 추천해. 이 과정을 거치면 다음 단계로 넘어가지 않아도 충분해. 마지막으로 두근두근! 예쁘게 쓰는법!! 2과정까지 거쳐서 글씨가 안정화 된 후라면 글씨체를 바꾸는게 초반보다 훨씬 수월해져. 그때부터 원하는 폰트를 다운받아서 쓰는 연습을 하면 돼. 나는 이미 나와있는 글씨체를 따라하진 않았고, 최대한 네모지고 반듯하게, 일정하게 쓰려고 노력했더니 이 글씨체가 나왔어. 기존 글씨체에서 새로운 글씨체로 완전히 바꾼게 아니라서 고치기 더 수월했는지도..? 개인적으로 이런 노트로 연습하니까 글씨체 바꾸기 좋더라 칸+줄까지! 내 글씨 변천사를 볼래? 이 간격이 일년을 훌쩍 넘었네 ㅎㅎㅋㅋ 이것만 봐도 한번에 고쳐진게 아니라 서서히 바뀐게 보이지? 이건 반듯하게 쓴 건 아니고 날려쓴 글씨체야. 위에처럼 아주 깔끔하진 않지만글씨의 틀 자체는 그대로란걸 알 수 있지? 공부하느라 글씨 신경 안쓰고 예전에 쓰던 속도랑 비슷하게 쓰면 저런식으로 나오더라구. 난 교정해도 잠깐이고날려쓰면 원래 글씨가 나오더라 하는 경우는 대부분 오랜 기간에 걸쳐서 교정한게 아니라 잠깐 바꾼것일 뿐, 이런 경우는 다시 예전 글씨로 돌아가게 되어있어. 무조건 꾸준히가 중요해. 마지막으로 설명했던거 한짤로 첨부할게 한장으로 보는 비포 & 애프터 출처 와 대단하다.. 저렇게 꾸준히 연습해서 교정한거 진짜 쉽지 않은데! 대단해 !! 다들 글씨 잘쓰나? ㅜㅜ 난 그냥 저냥인듯..
코리아둘레길 서해랑길 서해바다 대부도
#대부도가볼만한곳 #대부도갈만한곳 #서울근교바다 #코리아둘레길 #서해랑길 안녕하세요. 호미숙 여행작가입니다. 새벽 5시 못되어 일어났는데 귀뚜라미가 가을을 알리는 멜로디로 노래를 부르고 있네요. 한쪽에서 먼저 시작하면 저쪽 귀뚜라미가 따라 부릅니다. 아침부터 가을 전령사의 합창에 즐겁습니다. 오늘 국내 여행지 추천은 걷기 여행 코스를 소개합니다. 코리아둘레길을 아시나요? 우리나라 외곽을 하나로 연결하는 약 4,500km의 초장거리 걷기 여행길입니다. 서쪽 서해랑길, 동쪽 해파랑길, 남쪽 남파랑길, dmz 평화의길이 있습니다. 서해랑길 91코스인 경기도 안산 대부도권역 코스 소개합니다. 경기도 대부도 가볼만한곳 안산 여행 코스 서해랑길 91코스 10곳 1. 경기도 안산 대부도 2. 대부도 바다낚시터 3. 대부도 상동 갯벌 람사르습지 4. 대부도 캠핑장 추천-해솔길 캠핑장 5. 대부도 체험마을-종현어촌마을 6. 대부도 구봉도 7. 구봉도 낙조전망대-서해일몰명소 8.동춘서커스-96년 전통 서커스 9. 대부도 방아머리 먹거리타운 10. 대부도 맛집 -사또횟집.수산물직판(바다뷰.노을뷰) * 댓글의 상세한 정보를 원하면 링크를 클릭하세요. * * 대부도 가볼만한곳 생생 영상도 감상해요. * #대부도가볼만한곳 #대부도여행 #대부도맛집 #구봉도 #구동보낙조전망대 #동춘서커스 #대부도먹거리타운 #서해랑길 #서해랑길91코스 #코리아둘레길 #안산캠핑장 #서해바다 #경기둘레길 #대부해솔길 #종현어촌마을 #대부도람사르습지 #걷기여행 #걷기여행길 #걷기좋은길 #대부도갈만한곳
라면값 70원만 인상해도 괜찮겠습니까?
라고 태국 라면 회사들이 정부에 라면 가격 인상을 허가해 달라고 애원하였다 태국의 이러한 모습은 우리로서는 이해하기 힘들다 자유시장경제 체제에서 제품 가격은 판매자가 자유로이 매기는 것이 상식이니까 하지만 태국은 물가 안정을 이유로 생필품의 가격을 정부가 통제하는 나라다 지난 14년 동안 태국의 라면 가격은 6바트, 그러니까 220원 정도로 정해져 있었다 태국의 라면 업체들은 이러한 가격으로는 마진이 남지 않는다고 주장했지만 태국을 장악한 군사 정권 앞에서 그러한 불만은 씨알도 먹히지 않았다 오히려 군사 정권은 라면 업체들에게 '민생에 도탄에 빠졌는데 나약한 소리를 지껄이지 마라!' 라며 라면 업체들에게 앞으로도 현재 가격으로 제품을 계속 생산하라고 명령했다 군바리들 특유의 '까라면 까' 태도에 질린 라면 업체들은 괜히 군바리들에게 반항했다가 코로 똠얌꿍을 마시고 싶지 않았기에 울며 겨자먹기로 마진을 포기하며 220원짜리 라면을 계속 찍어냈다 하지만 코로나로 인해 태국 경제가 파탄이 나버렸다 엎친데 덮친격으로 러시아가 우크라이나를 침공하며 밀가루 가격까지 폭등했다 태국 라면 업체들은 라면을 만들면 만들수록 적자가 눈덩이처럼 불어나는 상황이다 이러한 상황이 되자 라면 업체들은 이대로 가면 전부다 망할 판인데 군부에게 찍혀서 코로 똠얌꿍을 마시더라도 뒤지기라도 하겠냐면서 라면 업체들이 모여서 라면 가격을 6바트에서 8바트로, 그러니까, 220원에서 290원으로 인상하게 해달라고 청원서를 보냈다 만일 이러한 요구조건을 받아들여주지 않으면 라면 사업을 정리할 수 밖에 없으며 이제 태국은 베트남과 인도네시아의 라면을 수입해야만 할 것이라고 배수의 진을 친 상태다 하지만 태국 정부는 이들의 요구를 들어주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 태국 군사 정권은 이미 코로나 대응 실패와 경제 파탄으로 민심을 잃어서 대규모 반정부 시위에 시달릴 정도로 지지 기반이 무너진 상황이다 무자비한 진압으로 간신히 시위대를 해산시킨 상황에서 그 동안 총칼로 간신히 억누른 물가마저 폭등하기 시작한다면 전국 각지에서 불만을 품은 폭동이 일어날 상황이기 때문이다 물론 라면 가격 인상 말고도 라면 업체들을 만족시킬 방법이 없는 것은 아니다 한국 같은 경우 라면 생산에 필요한 밀가루 등의 품목에 대해 수입 관세를 면제해 주는 방법으로 간접적으로 라면 업체를 도와주고 있다 태국도 이러한 방법으로 라면 업체를 도와주고 싶겠지만 이러한 정책을 시행한다고 해도 태국 정부는 썩을대로 썩은 상황이라 그보다 많은 액수의 뒷돈이 흘러나갈 것이라 오히려 역효과가 날 게 뻔하다 태국 정부가 얼마나 무능하고 형편없는지 보여주는 대표적 사례가 과거 태국 세관이 북한으로부터 비료를 수입했다고 발표한 사건이다 북한과의 교역은 대북 제재로 엄격하게 제한되어 있는 상황에서 태국이 대량의 비료를 북한으로부터 수입했다고 하자 국제 사회에서는 태국이 대북 제재를 대놓고 생깠다고 경악했다 하지만 이 사건은 태국 세관이 남한과 북한을 혼동하여 벌어진 실수였다 태국 정부는 이 정도로 무능하다 심지어 태국 정부는 부패하기까지 하였다 태국의 어느 경찰청장은 자신이 뇌물을 뜯어내기 위해 무고한 시민을 마약사범으로 몰아서 뇌물을 요구하다 해당 시민이 뇌물을 지불하지 못하자 살해해버렸다 당시 해당 경찰청장은 고급 스포츠카만 13대를 갖고 있었을 정도로 엄청난 액수의 뇌물을 받아먹은 것이 드러났음에도 처벌을 받지 않았다 태국인들의 분노를 자아낸 이 사건은 태국 정부의 부패상을 보여주는 사건이다 민심 봐야 한다고 가격 인상도 못해주고 행정력과 부패 문제로 수입 관세 면제도 못해준다면 아예 중국처럼 라면 제조 기업에게 대놓고 직접적으로 보조금을 뿌리는 방법도 있기는 하다 하지만 태국 군사정권은 경제 운용 능력이 개판이라 코로나 시국에 태국 경제를 파탄으로 몰고 갔으며 이를 수습하는 과정에 엄청난 재정을 탕진한 상황이다 태국 정부가 라면 제조 기업들에게 보조금을 지급하고 싶어도 지급할 여력 자체가 없다 현재 태국의 상황은 총체적 난국이기에 조만간 베트남이나 인도네시아 등지에서 라면을 수입해야만 할 것 같다 (출처) 저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