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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레힐 / 라일라 섬 사건(2002)

금요일은 역사지. 이 사건은 내가 모로코에 살던 시절 일어났던 일인데, 당시의 나님은 살고 있던 나라에 대해 별로 잘 알고 있지 못 했었다. 갑자기 생각나서 찾아봤더니 이 영토분쟁(?) 또한 기나긴 사연과 복잡한 관계를 갖고 있었다. 뭐 하나 간단한 일은 없다. 최대한 간단한 설명은 있을 수 있더라도 말이다.

우선 짤방의 지도(참조 1)부터 보자. 왼쪽 상단에 빨간색 원 안에 그려진 섬이 바로 오늘의 주인공, 페레힐(Perejil)/라일라(ليلى, 참조 2) 섬이다. 자, 2002년에 어떤 일이 일어났는가? 모로코의 해안경비대 선원이 모로코 땅에서 200m도 안 떨어진 저 섬에 모로코 깃발을 두 개 꽂았고, 스페인 해안경비대 순찰선이 이를 발견한다.
며칠 후, 모로코는 아예 해병대를 보내서 이 섬을 점령하고, NATO는 모로코에게 경고를 때린다. 그리고는 처음 점령된지 1주일 후, 스페인은 Romeo-Sierra(참조 3) 작전을 개시, 육해공군을 모두 동원했다. 전투기를 날리고 해군 함정을 보내고 육군을 보내어서 간단하게 모로코 해병대를 제압시킨다. (사상자는 없었다.)

(모로코 병사 12명 잡으려고 육해공을 다 동원한 것인지라, 너무 오바해서 대응했다는 비판이 있었다고 한다.)

그리고는 이틀 후, 역시나 최종 보스이신 미국이 개입한다. 콜린 파월 미국 국무장관이 중재를 맡았고, 결국은 그냥 이전 상태로 되돌리기로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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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에서 언급했지만 지브롤터 해협에 속해 있는 이 섬은 모로코 땅으로부터 불과 200여 미터밖에 안 떨어져있다. 스페인이 북아프리카 해안선의 여러 섬들을 갖고 있었다는 사실이 이제서야 세상에 알려졌다.

그렇지만 가까우니 내 땅이오, 하는 주장이 과연 맞말인가… 하면 잘 모르겠다가 정답이다. 이 섬은 예나 지금이나 완전히 무인도이며(암석만으로 이뤄져있으며 축구장 14개 정도 크기다) 지금으로부터 무려 600년 전 포르투갈이 세우타(Ceuta)를 점령하면서 같이 영토에 편입시켰었다. 그랬다가 잠시 포르투갈과 에스파냐 왕실이 합쳐졌고, 그 후에는 스페인 왕국의 영토가 됐다.

즉, 현 모로코 왕조가 생기기도 훨씬 전부터 “스페인의 영토”였다는 의미다. 물론 모로코측의 설명은 스페인이 군대를 동원해서 무력으로 빼앗은 것으로 되어 있다(그러나 전투 기록은 없다). 다시 말하지만 19세기-20세기의 제국주의 시절 스페인이 얻은 땅이 아니다. 15세기 때부터 갖고 있던 땅이며, 특히 세우타와 멜리야는 그 후에도 숱하게 아랍-베르베르의 포위와 침략을 받았지만 다 이겨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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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묘한 것은, 어째서 모로코가 2002년에 도발했느냐이다. 주된 설명은 당시 모로코 국내 언론으로부터 엄청나게 두둘겨 맞고 있던 국왕 무하마드 6세(참조 4)를 구하기 위해, 외국을 이용한다…였다. 99년 재위 오른지 얼마 안 되어서 이리저리 놀러다니는 꼴만 보였었기 때문이다. 물론 명확히 밝혀진 것은 현재까지 없다.

또 한 가지 재미난 것은 관련국들의 반응이다. 모로코는 서부사하라 및 알제리 문제 때문에 식민지를 당했다 하더라도 프랑스와의 관계가 매우 좋다(참조 5). 그래서 그런지 이 사건을 두고, 유럽연합은 일제히 스페인을 지지했는데, 여기에 프랑스가 빠졌다. 그래서 EU의 성명은 맥이 빠진 채였다. 말인즉슨, 실제로 전투에 나설 경우 스페인 혼자 나설 가능성이 높았다는 얘기다.

아랍연맹은 당연히 모로코를 지지했었는데, 여기에서는 알제리와 시리아가 빠졌다. 친-서방 국가인 모로코에 반대하기 위함이기도 하고, 알제리는 모로코와 숙명의 라이벌, 그런 관계이기도 하며 서부 사하라 문제(폴리사리오 독립문제)가 걸려 있어서였을 것이다. 이 사건에서 알제리는 스페인을 지지하지는 않더라도 모로코가 잘못했다며 모로코를 비난했다(참조 6).

따라서 오늘의 교훈, 식민관계도 단순하지 않다는 얘기다. 이면을 보면 어느 한쪽을 손들어주기 매우 어렵다. 물론 내가 모로코 시민이라거나 스페인 시민이었다면 전혀 다른 얘기가 되겠지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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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조



2. 영문 위키피디어에서는 명칭이 마다누스(معدنوس) 섬이라 나오지만 무함마드 6세 국왕은 당시 이 섬을 별도로 “투라(تورة, 베르베르어로 “무인도”의 뜻‎)”라 불렀으며, 내가 살던 당시 모로코 언론들은 대부분 라일라 섬이라 칭했었다. 정식 명칭은 라일라 섬이 맞으며, 아랍어 위키피디어에서는 “투라” 혹은 “레일라”로 나온다.

3. 작전명이 어째서 단순한 NATO 음성 문자(NATO phonetic alphabet)로 되어있는지에 대한 명확한 설명은 없다. 추측으로, “주권 회복(Restaurar Soberanía)”의 약자였다는 설이 있다.

4. 아이러니컬하게도 독재와 귄위주의적이었던 부왕 하산 2세와는 달리, 무함마드 6세는 탈권위, 리버럴리즘을 추진하고 있었고, 스페인의 프랑코 이후 시대를 모델로 삼고 있었다. 당연히 국내적으로 반대가 아주 컸기 때문에 국내 정치적 음모에 맞서기 위해서…라는 해석이 있는 것이다. 지금은? 노 코멘트.

5. 가령 모하메드 6세가 국왕이 된 다음 맨 먼저 방문한 나라가 프랑스였다. Relations bilatérales: https://www.diplomatie.gouv.fr/fr/dossiers-pays/maroc/relations-bilateral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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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도 생각이 나네요. 물론 소유국은 반대(?) 상황이긴 하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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벨라 챠오
넷플릭스의 드라마 시리즈 중, “종이의 집”을 좋아하는데(나의 넷플릭스 아이콘이 “엘 프로페소르”) 그중에서도 제일 인상 깊은 건 바로 노래였다. Bella Ciao(참조 1), 드라마와 아주 잘 어울려서인데, 이 노래 자체가 사연이 많다. 바로 또 다른 주말 특집. 참고기사: ‘Bella Ciao’, a história por trás do hino da liberdade e da resistência(2020년 4월 26일): https://brasil.elpais.com/cultura/2020-04-25/bella-ciao-a-historia-por-tras-do-hino-da-liberdade-e-da-resistencia.html?ssm=TW_CC 해방 이후 밀라노에 입성하는 저항군 벨라 챠오는 원래의 가사가 이탈리아어이고(드라마에서도 출연자들이 이탈리아어로 부른다), 원래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반-파시스트, 반-무솔리니 진영에서 즐겨 불렀던 노래다. 비슷한 노래로서 현대 한국의 고려대 응원가 중 “지야의 함성”도 있기는 한데(…) 이 노래는 원래 러시아곡(카츄사)이다. 이 곡에 대해서는 다시 말하겠다. 비교적 현대에 나오기는 했지만 이 노래의 작곡자 작사자가 누구인지는 모른다. 다만 이탈리아가 무솔리니 치하에 있을 때는 물론(…잠깐, 이것도 논쟁의 여지가 있다, 아래 레시스탄짜를 보시라), 현재 마테오 살비니에 대한 반대 시위에도 빠짐 없이 등장하는 저항의 노래다. 그런데 가사를 보면 오히려 좀 서정적이다. 내가 죽으면 묻어주오 예쁜이, 안녕. 가사에 딱히 이념이 없다는 얘기다. 실제로 무솔리니 정권 말기, 무솔리니에 반대해서 일어났던 반-파시스트 운동은 공산당만이 아니라 기독교민주당, 사회주의자, 왕당파, 공화주의자 등등, 극우파를 제외한 모두가 다 합세했었다. 따라서 모든 이념을 다 포함하려면, 역시 이념이 없는 저항가가 제격이었다. 반면 공산당이 주축이 됐던 “가리발디네(Brigate Garibaldi)”, 사실 반-무솔리니의 선봉장이 공산주의자들이었는데 이들이 불렀던 노래는 “바람이 분다(Fischia Il Vento, 참조 2)”였다. 그들의 공식 군가이기도 했던 이 노래에는 가사에 이념이 들어있다(참조 3). 이 노래의 원곡이 바로 러시아의 카츄사(Катюша), 고려대 응원가 “지야의 함성”이기도 하다. 물론 이 노래도 “벨라 챠오”처럼 기독교 민주당에서 부르기도 했고, 1968년 유럽을 휩쓴 데모의 시대에서 청년들이 부르기도 했었다. 이들은 다만 “벨라 챠오”를 즐겨 부르지는 않았다(참조 4). 이념이 없어서라는 이유였고 “자기 손을 더럽히고 싶지 않은 놈들”이나 부르는 노래라는 인식이 있었다고 한다. 아니 그럼 벨라 챠오는 레시스탄짜(resistenza italiana al nazifascismo) 말고는 생각보다 저항곡의 주류가 아니었다는 말씀? 사실 이 노래의 기원이 제1차 세계대전 당시 오스트리아-헝가리 군에 맞서기 위한 노래에서 나왔다는 주장이 있는 만큼, 그냥 가늘고 길게 간 민중가요라고 볼 구석도 없잖다. 그런데… 사실 레시스탄짜 시절에도 거의 안 불렀다는 주장마저 있다. 해방(!) 이후에서야 많이 불렀다는 증거도 많기 때문이다. 하지만 전쟁 이후, 체코슬로바키아의 반 소련 시위, 68년 당시 베를린에서의 반정부 시위에 이 노래가 퍼졌고, 엉뚱하게도 이 노래를 처음 “녹음”한 가수는 프랑스의 이브 몽땅이었으며(참조 5), 2015년 샤를리 에브도 테러 당시도 프랑스인들은 저항의 상징으로 이 노래를 불렀다(참조 6). 터키의 게지 공원 데모 할 때에도 부르고(참조 7) 심지어 시리아 내 쿠르드 역시 벨라 챠오를 부르고 있다(참조 8). 가늘고 길게, 그리고 전세계로 퍼진 노래 중 하나가 됐다는 의미다. 아마 가사에 이념이 없어서일지도. -------------- 참조 1. Bella Ciao | La Casa de Papel (스페인어와 이탈리아어 자막이 같이 있다!): https://youtu.be/Pa2Vvv2Gw1U 2. 그래서 나는 아직도 미야자키 하야오가 어째서 그 만화 제목을 “바람이 분다”로 했는지 많이 궁금하다. 비단 폴 발레리(Paul Valéry)의 그 시(Le vent se lève !… Il faut tenter de vivre !)만 의미하지는 않았을 것 같다. 3. FISCHIA IL VENTO : https://youtu.be/5nqibaqKWuw 4. 대신 이 노래를 불렀다, Per i morti di Reggio Emilia : https://youtu.be/WmFYVEiXGyA 5. Yves Montand "Bella ciao" | Archive INA(1964년 7월 6일): https://youtu.be/mv3iY4v9EOc 6. Christophe Aleveque - Bella Ciao - #JeSuisCharlie(2015년 1월 12일): https://youtu.be/YulNK8djaiw 7. Gezi Park i manifestanti cantano Bella Ciao(2013년 6월 5일): https://youtu.be/rGk4aKtUwIo 8. Il 25 aprile con le combattenti curde che cantano Bella Ciao(2020년 4월 25일): https://www.globalist.it/world/2018/04/24/il-25-aprile-con-le-combattenti-curde-che-cantano-bella-ciao-2023251.html
아스피린과 특허
주말 특집, 바이엘은 과연 베르사이유 조약 때문에 아스피린 특허를 잃었을까? 모두들 아스피린에 대해서는 잘 알고 계실 텐데, 아스피린의 현재 지위는 제너릭이다. 어느 제약회사든 마음 먹으면 만들 수 있는데 당연히 아스피린을 처음 만들 때는 그렇지 않았다. 지금도 있는 독일의 제약회사 바이엘(Bayer)이 1899년 처음 아스피린을 만든 이래 특허화를 노력했었다. 게다가 여전히 그러하듯 특허는 전세계에 통용되지 않고 나라별로 출원을 해야 한다. 그래서 바이엘은 1898년 영국과 독일 그리고 1900년, 당시 무섭게 성장 중이던 미국에도 특허를 받아 놓았는데 미국은 시장 규모가 워낙 크기 때문에 바이엘은 미국에 아예 공장을 세우기로 결정한다(참조 1). 1918년도 광고, 미국땅에서 만들어지고 있음을 강조하고 있다 그런데 1914년,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고만다. 어차피 미국에 공장이 있으니 그대로 팔면 된다고 생각하기 쉬울 텐데… 그렇지가 않았다. 당시 전세계에 페놀을 공급하던 영국이 전쟁 물자 생산(폭약을 만드는데 페놀이 들어간다) 집중을 위해 수출 규제를 해버린 것이다. 여기에 열받은(참조 2) 토머스 에디슨은 자기가 페놀 공장을 설치해버린다. (뭔가 고순도 불화수소 공장을 만들어버리는 한국 이미지가 오버랩된다.) 막 발명한 레코드를 만들 때 페놀이 필요해서였다. 자, 아스피린 만드는 데에는 페놀이 들어간다. 바이엘은 미국에 Chemical Exchange Association이라는 중개회사를 만들어서 에디슨과 비밀 계약을 맺고, 에디슨이 만드는 모든 페놀을 매입한다. 이 계약이 1915년 언론(New York World, 참조 3)에 노출되어버리는 바람에 결국 중단하기는 했지만 말이다. -------------- 자, 에디슨이 몰래 페놀을 독일 바이엘에게 판매하던 사실을 적발하고 2년 후 미국은 연합국 측에서 붙어 직접 참전까지 한다. 전쟁까지 시작했으니, 미국은 적성국들의 자산을 압류하기 위해 적성국교역법(Trading with the Enemy Act of 1917, 참조 4)을 제정, 미국 내 바이엘 자산을 압류하여 경매를 해버린다. 1918년 바이엘 자산을 경매로 구입한 곳은, 그때까지 거의 종이 회사 수준이었던 Sterling Drug이었다(참조 5). 자, 전쟁이 터졌고, 시기를 보시면 소위 스페인 독감마저 퍼진 시기임을 알 수 있다. 적성국 독일 회사의 특허는 누구도 인정하지를 않았다. 전쟁은 1918년 11월에 끝났고 독일은 전쟁에서 패배했다. 제1차 세계대전 참전국들은 1919년 4월 파리 베르사이유에서 모여 조약을 만들었고, 독일은 여기에 서명하는데, 베르사이유 조약이 어땠는지는 잘 아실 것이다. 독일은 동등한 당사자가 될 수 없었고, 조약문에는 전쟁 기간 중 연합국의 독일 자산(특허 포함) 조치는 그대로 인정되는 조항(참조 6)이 들어가 있었다. 그러니까 예. 정확히 말하자면, 베르사이유 조약에 따라 바이엘은 특허를 잃은 상태를 유지하게 됐습니다…이다(참조 7). -------------- 그러나 위에 언급했듯, 자산을 인수한 Sterling은 그전까지 페이퍼 컴퍼니에 가까웠던 곳인지라 노하우가 별로 없었고 미국 내 생산에도 급급했었다. 그래서 거의 포르투갈과 에스파냐가 전세계를 갈라 먹기로 한 토르데시야스 조약(Tratado de Tordesilhas, 1494)처럼, 바이엘은 독일에서, Sterling은 미국에서 각자 따로 아스피린을 만들기로 한다(참조 8). 물론 히틀러가 정권을 장악하고 독일 재벌들을 규합하는 시기에 같이 협약을 맺은 건 타이밍이 안 좋았다. 미국 정부는 Sterling의 자산을 압류하겠다고 위협했고, 1941년 결국 Sterling은 독일 바이엘(이때는 I.G. Farben)과의 관계를 끊는다. 하지만 어지간한 국가에서 특허를 인정 못 받으니 복제품과 유사품이 우후죽순 나왔고, 이전만큼 재미를 보지는 못 한 듯 하다. 특히나 이부로프로펜이 1962년부터 출시됐었다. 아스피린은 이제 진통제 역할에 더해서 암도 예방해주고 계시다. 물론 약은 약이니 무턱대고 복용해서는 안 되지만 말이다. 1958년도 광고, 피곤하면 바이엘 아스피린! -------------- 참조 1. 1900년대 초(시어도어 루즈벨트 시절이다) 미국의 평균 관세율은 거의 50% 내외였다. 공장을 미국 내에 세울 만한 요인이 있었던 것. 2. 제1차 세계대전 초기 미국은 영국 프랑스와 독일 모두에게 꽤 적극적인 중립이었음을 아셔야 한다. 연합국들에 호의적으로 바뀌고 결국 참전까지 하는 계기는 1915년 독일의 루시타니아 호 격침 사건 때문이었다. 3. 당시 신문기사: https://en.wikipedia.org/wiki/Great_Phenol_Plot#/media/File:New_York_World_front_page,_August_15,_1915.jpg 4. 현재까지도 살아 있는 법률로서 미국 내 북한 자산에 적용된 적이 있다(1950-2008). 2008년 이후에는 여러 행정명령과 함께, 별도의 대북제재법(North Korea Sanctions and Policy Enhancement Act of 2016)으로 제재를 하는 중이다. 5. 1994년 바이엘이 다시 미국과 캐나다 내에서의 권리를 사들인다. Aspirin: http://pubsapp.acs.org/cen/coverstory/83/8325/8325aspirin.html 6. 제306조이다. https://en.wikisource.org/wiki/Treaty_of_Versailles/Part_X#Article_306 7. Why did Bayer lose aspirin and heroin trademarks under the 1919 Treaty of Versailles?: https://history.stackexchange.com/questions/55729/why-did-bayer-lose-aspirin-and-heroin-trademarks-under-the-1919-treaty-of-versai 8. ASPIRIN'S LONG RECORD BEGAN WITH GERMANY, WORLD WAR I(1993년 1월 12일): https://www.washingtonpost.com/archive/lifestyle/wellness/1993/01/12/aspirins-long-record-began-with-germany-world-war-i/248b0a5e-6950-488b-ae6e-9be78c45d9c8/ 9. 짤방은 각각 1918년 및 1958년도 바이엘의 아스피린 광고다. 출처는 Aspirin: The First Wonder Drug (2019년 3월 6일): https://www.saturdayeveningpost.com/2019/03/aspirin-the-first-wonder-drug/
IRA 대원의 사진
금요일은 역시 역사지. 이 사진은 아일랜드의 사진사 Colman Doyle이 촬영했다고 한다. 정확한 촬영 날짜는 알려지지 않았으며 1970년대 북아일랜드의 웨스트 벨파스트에서 AR-18 공격소총을 겨누고 있는 여자 IRA 자원자라는 캡션이 붙어 있다(참조 1). 자, 소총의 견착자세가 왜 저런지는 묻지 말자. 사진의 초점이나 포즈를 봤을 때, 아마 선전용으로 촬영하지 않았나 싶은데, IRA와 저 총의 관계를 얘기하지 않을 수 없겠다. 보통 IRA 하면 북아일랜드와 아일랜드 간의 통일을 위해 북아일랜드에서 영국을 상대로 테러를 하던 무리를 가리키는데, 일단 1960년대로 가 보자. 아일랜드 공화국 독립 이후 IRA는 상당히 약화되기는 했는데, 60년대 당시 가톨릭계 인구 증가를 경계한 개신교계 급진파들이 도발(화염병을 주택에 집어던졌다)하면서 갈등이 심해진다. 이때부터가 T를 대문자로 적는 The Troubles의 시작이다. 이는 1969년 폭동으로 이어지고, IRA가 온건파 IRA와 과격파 IRA로 갈라지는데, 이 과격파가 IRA 임시파(Provisional Irish Republican Army)를 가리킨다. 영화에 나오는 주요 테러리스트들은 보통 이 임시파이다. 이들이 활동한 시기가 1969년부터 2005년 사이다. 자, 왜 이들이 과격하겠는가? 영국을 상대로 진심으로 무장 투쟁을 벌였기 때문이다. 숱한 분열을 경험했던 이들은 서로 믿지 못하는 분위기가 팽배했기 때문에 외국인은 거의 끼어들 여지가 없었으며, 그렇기 때문에 동네에서 같이 자라난 남녀 모두를 대원으로 받아들였었다. 즉, 사진처럼 여자 대원들이 활발하게 활동했다는 의미다. 그렇다면 누가 이들에게 무기를 공급했는가? 크게 두 나라가 있다. 미국과 리비아다. (여담인데, 배를 통해 밀수했다. 아일랜드 선원들을 통해서다.) 사진 속의 저 소총 이름이 AR-18, 원래 M-16의 모태가 되는 AR-15를 만들었던 미국의 ArmaLite사가 만든 AR-15의 개량형이었다. 그런데 미군은 15만 채택했지, 18은 채택하지 않았고, 이 AR-18이 IRA로 흘러들어간다. 누구를 통해서? 미국 내 아일랜드 갱(참조 2)과 아일랜드계 미국인들(NORAID)이었다. 리비아는? 미국에 대한 반발로 서유럽 내 반정부 세력(참조 3)에게 무기를 공급하던 나라가 리비아였다. IRA의 단식투쟁이나 폭동에 감명 받은 가다피는 IRA에게 수많은 무기를 공여했고(그때문에 AK-47도 IRA에서 많이 썼다고 한다), 1986년 미국이 리비아를 폭격하는 빌미를 제공했다. 하지만 뭣보다도 IRA의 상징은 미국에서 공급됐던 AR-18이었다. 개머리판도 접을 수 있고 작으면서 견고하고 쉽게 조작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IRA도 이 총을 사랑해서, AR-18을 위한 노래/군가를 만들어서 불렀을 정도(참조 4)이고, 이 총을 “과부제조기(widowmaker)”라 불렀다. 넷플릭스 드라마 데리 걸스(Derry Girls, 시즌3가 나온다고는 하는데…)가 그리는 시기는 휴전 직전의 북아일랜드인데, 비극적인 시기인 “더 트러블”에서 코메디를 뽑아냈다는 것 자체가 대단하다. 다만 IRA가 주제에 나왔다 하면 영어권의 키배가 어마어마하다. 데리를 런던데리로 부르느냐, 그냥 데리로 부르느냐가 그 인물의 정체성을 드러내니까 말이다. -------------- 참조 1. Female IRA fighter, 1970s:https://rarehistoricalphotos.com/female-ira-fighter-1970s 2. 영화 Gangs of New York(2002)에 나오니만큼 아일랜드 조폭의 역사는 깊으며 지금도 존재한다. 아일랜드에 무기를 공급한 조직 중 하나는 보스턴에 있는 겨울언덕파(Winter Hill)였다. 3. 서독의 적군파(Rote Armee Fraktion 혹은 Baader-Meinhof-Gruppe/바더-마인호프 그룹)과 이탈리아의 붉은 여단(Brigate Rosse), 그리고 아일랜드의 IRA를 가리킨다. 4. My Little Armalite with lyrics: https://youtu.be/P8wgrZ6t5B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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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삼겹살 데이~ 삼(3)삼(3)하니 삼겹살을 먹고 싶은 오늘!! 고기굽기의 똥(?!)손들을 위한 고기집 사장님이 알려주는 고기굽는 방법! 이베리코? 이베리코가 뭘까...?(흠) 스페인에서 자연방목을 하는 흑돼지의 종류로 올리브나 도토리를 많이 먹고 자란 흑돼지랍니다~ 마블링이 마치 소고기 같아요. (츄릅) 이베리코의 기름은 엄청 건강하다는 점! 어떤 부위부터 구워야 할까? 그냥… 순서 없이 구웠는데 따로 방법이 있을까? 기름기가 많은 두꺼운 고기부터 출~발! 고기는 언제 올려야 할까? 팁 집에서는 코팅팬(후라이팬)을 중불로 가열한 후 구어주세요. 스텐석쇠는 불판이 뜨거우면 바로 들러붙기 때문에 바로 바로 바로! 불의 세기는? 불을 세게하면, 기름이 빠지기전 열에의해 타버리기 때문에 연기가 굉장히 많이 납니다 (주의) 은은하게 구어주세요~ 올린 후 어떻게 해야할까? 고기를 구울때는 고기에만 집중하는걸로ㅋㅋㅋ 들러붙지 않게 계속 조금씩 움직여주세요! 언제 뒤집나요? 육즙이 올라올때 살짝 뒤집어 익은 정도를 확인한 후 뒤집기! 기름 털어주기 기름이 숯에 떨어지면 불도 약해지고 연기도 많이나요 ㅠㅠ 집에서 구울때는 그릇을 이용하세요:) 몇번 뒤집나요? 많이 뒤집으면 육즙이 다 빠져나가니 2번정도로! 고기 자르기 기름이 숯에 떨어지면 불이 약해지니… 기름이 떨어지지 않는 위치에서 잘라주세요 잘라서 다시 올리면 쾌적하게 굽기 성공!!! 아... 이것이 행복이다. 인생은 고기서 고기~~~~♡♥ 굽기의 마무리 단계 덜익은 부분도 골고루 세워서 익혀주세요! 오늘 저녘은 삼겹살 파티당 ♥♥♥♥♥ 도전꿀팁의 다양한 영상이 보고싶다면? <편의점 재료로 홈카페를? #도전꿀팁>
스페인의 핵무기 개발
주말 특집, 하면 역시 핵이지. 독재자들은 으레 핵무기에 대한 끌림이 있게 마련인데 알아보니까 역시나, 스페인의 프랑코도 핵무기에 대한 욕심을 갖고 있었다. 역사의 여러 사건이 그러하듯 우연한 계기에 이곳 저곳의 상황이 맞물려서 돌아가다가 결국은 미국이 승리하는 그런 이야기다(참조 1). 시작은 프랑스다. 워낙 기초가 든든했고, 대학원에 가라는 장모의 명에 따라 착실하게 학위를 받은 프레데릭 졸리오 퀴리(참조 2)와 부인인 이렌 퀴리가 이끈 핵에너지위원회(CEA), 이걸 무조건 지원해 준 드 골 덕분에 50년대 말이 되면 어느 정도 체계를 갖추는 나라가 프랑스였는데 문제는 시장성이었다. 수출할 곳이 마땅치 않았던 것이다. (라팔과 비교하지는 맙시다.) 원래 프랑스는 자신의 천연우라늄흑연가스(UNGG) 원자로를 인도에 판매하려 했었는데(라팔 아니라니까), 미국 관점에서 이 UNGG 방식의 원자로의 가장 큰 단점은 플루토늄을 생산해내는데 쓰인다는 점이었다. 미국은 온갖 방법을 다 동원하여 인도가 결국 프랑스 원전을 못 사게 하는데 성공했고, 그대신 미국이 개발한 비등경수로(BWR)를 넘긴다. 판매가 아니라 “넘긴다”에 주안점을 두셔야 한다. 인도는 대가를 지불하지 않았다. (물론 미국의 노력과 의도와는 관계 없이 인도는 1974년, 캐나다의 도움으로 얻은 플루토늄으로 핵실험에 성공한다. 이건 다른 주제다.) 그렇다면 어디에 팔아야 할까? 이 때 접근한 곳이 스페인이었다. 당시 스페인은 프랑코가 독재를 하는 국가였으며 비록 소련보다는 서구에 가깝기는 했어도 데면데면하는 사이였다. 특히 민주주의하는 국가 미국이 대놓고 돕기 좀 뭐한 나라였다는 얘기다. 그래도 미국이 스페인에게 웨스팅하우스의 가압수경수로(PWR)를 설치해준다. 이걸로 만족하라는 예방용이다. -------------- 이 틈을 프랑스가 파고들었다. 우리가 제공하는 원자로를 사시면 플루토늄을 얻으실 수 있다는 점이 세일즈의 포인트, 게다가 프랑스와 스페인은 지리적 인접성때문에 이미 전력 교환을 하고 있었다. 프랑스에 있어서 스페인의 장점은? 장사가 된다는 점 외에, 우라늄 광산이 있었다. 스페인과 포르투갈 접경 지역이다. 게다가 드 골 치하의 프랑스는 미국과 영국을 믿지 않았고, 그렇다고 하여 서독에게 핵무장을 하라고 권유하기는 참 뭐하기 때문에 파트너로 스페인을 택한 것도 있었다. 나중에 미국이 프랑스를 돕는 이유와도 꽤 유사하다(참조 3). 스페인에 있어서 프랑스의 장점은? 위에 썼지만 뭣보다 플루토늄이다. 또한 EEC 가입을 장기적으로 노리고 있기 때문이기도 했었다. 게다가 프랑스 남부 산업지대와 연결해서 전력을 팔 수 있었다. 자연스럽게 위치는 카탈루니아로 정해진다. 바로 지금도 가동되고 있는 반데요스(Vandellòs) 원자력 발전소다. 이때가 1964년. -------------- 스페인에는 유명한 투우사도 있지만, 투우사를 죽인 소는 더 유명세를 얻는다. 그중 하나로 이슬레로(Islero)라는 소가 있었는데, 프랑스와 함께 핵발전소 건설 발표를 한 1964년보다 1년 앞선 1963년, 스페인의 1급 비밀 핵무기 프로젝트가 바로 이 이름을 갖고 탄생한다(참조 4). 프랑코와 프랑코의 2인자였던 카레로 블랑코(Carrero Blanco) 제독의 걱정거리는 당시 독립 직후, 에너지가 충만한 모로코가 언제든 스페인 영토(참조 5)를 빼앗으려 들 것지도 모른다는 것이었다. 당시 독립 직후, 에너지가 충만한 모로코가 언제든 스페인 영토(참조 5)를 빼앗으려 들 것지도 모를 일이었다. 포르투갈이 인도의 침략을 받아 고아를 그냥 넘겼을 때처럼, 미국은 그런 상황에 개입하지 않을 것이 뻔했었다. 그래서 스페인은 1968년 있었던 비확산조약(NPT)에도 서명하지 않았었다. 하지만 이론은 다 알고 있다 하더라도, 뇌관과 같은 핵심 부품을 어떻게 만들지 몰랐기에 연구는 그다지 진척을 보이지 않고 있었다. 게다가 너무 강력하게 밀어붙이면 결국 바깥에 노출된다는 프랑코의 걱정도 있었고 말이다. 이걸 해결해 준 건 의도치 않게 일어난 한 사건이었다. -------------- 1966년 1월 17일에 있었던 Palomares 사건(참조 6)이다. 스페인 영공을 지나던 미국 공군의 B-52 폭격기가 급유를 받으려 하다가 급유기(KC-135)와 충돌하여 추락했는데(승무원 7명이 사망했다), 대단히 큰 문제가 있었다. B-52 폭격기에 있었던 핵폭탄이 유실된 것이다. 소련이 가져가면 안 될일이기 때문에 난리가 났었다. 게다가 방사능 물질마저 떨어져 있었다(물론 당시 프랑코 정권은 안전하다면서 여행부장관과 주스페인 미국 대사가 해당 지역에 가서 해수욕하는 장면도 연출했다). 그리고 제일 중요한 것, 스페인이 당시 떨어진 폭탄의 잔해(떨어진 4개 중 2개가 파괴됐었다) 일부를 회수했고 그걸 조사분석한다(참조 7). 미군에 알리지 않고 말이다. 그래서 결국 스페인은 1967년, 핵폭탄 제조 가능 상태가 됐다(참조 7). 두 번째 필요한 건 플루토늄, 위에서 프랑스의 도움을 얻어 추출이 가능한 발전소를 짓기로 했지만 일단은 마드리드 대학 내에서도 군사용 플루토늄을 뺄 수 있는 고속반응로를 설치한다. 당연히, IAEA는 이 사실을 모르고 있었고 말이다. -------------- 이제 준비가 됐다. 프랑코 정권의 2인자였고 장래 프랑코의 뒤를 이을 것으로 촉망받았던 블랑코 제독은 이슬레로 프로젝트에 대한 서류를 들고 1973년 12월 19일 헨리 키신저를 만난다. 미국과 보다 대등하게 관계를 설정하기에 앞서 스페인에게 이런 힘이 있다는 점을 비밀리에 알리기 위해서였다. 그리고 키신저와 만나고 나오면서… 그는 암살당한다. (일단, 범인은 바스크의 ETA였다.) -------------- 물론 고위급 암살이 스페인의 핵개발을 멈추지는 않았다. 블랑코 제독이 암살당한지 2년 후 프랑코도 사망했고, 스페인은 민정이양이 됐지만, 이슬레로 프로젝트 자체는 민간 정부도 중단시키지 않았었다. 그러나 독재자 킬러 지미 카터 정부는 이전과 달랐다. 미국은 스페인에게 NPT 가입을 촉구했고, 경제제재를 위협한다. 어차피 농축우라늄을 미국만이 제공할 수 있고, 미국이 지어준 핵발전소 부품은 미국이 제공하고 있었으니, 미국 말을 들으라면서 말이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1981년 스페인에서 쿠데타 시도(Golpe de Estado en España de 1981)가 일어났었다. 후안 카를로스 1세가 직접 나서서 쿠데타 시도를 막은 것까지는 좋았는데, 미국은 이를 계기로 새로 성립된 스페인 정부(Leopoldo Calvo Sotelo)를 압박하여, 핵무기 불사용 및 반데요스 핵발전소에 대한 감시를 조건으로 IAEA에 스페인을 가입시킨다. 이슬레로 프로젝트의 종말이었다. NPT는? EEC에 스페인이 가입(1986년)하는 조건이었다. 결국 스페인은 NPT도 1987년 체결했다. -------------- 참조 1. 당연히 느끼셨을 텐데, BBC의 해설가 Gary Lineker의 유명한 발언, “Football is a simple game; 22 men chase a ball for 90 minutes and at the end, the Germans always win.”의 패러디다. 2. 핵의 무기화에 반대했던 공산주의자이자 실제로 공산당원이었는데도 불구하고 드 골이 직접 임명했다. 그의 중용은 좌우 모두의 협공을 받았던 드 골 정권의 성격을 알 수 있는 인사 중 하나랄 수 있겠다. 3. 프랑스의 핵잠수함(2020년 9월 15일): https://www.vingle.net/posts/3109164 4. Proyecto Islero, la bomba atómica que España pudo tener durante el franquismo(2016년 11월 13일): https://www.elconfidencial.com/tecnologia/2016-11-13/proyecto-islero-la-bomba-atomica-que-espana-pudo-tener-y-no-tuvo_1288538/ 5. 페레힐 / 라일라 섬 사건(2002)(2020년 4월 17일): https://www.vingle.net/posts/2877201 6. Incidente de Palomares : https://es.wikipedia.org/wiki/Incidente_de_Palomares 7. La bomba atómica que Franco soñó(2001년 6월 10일): https://www.elmundo.es/cronica/2001/CR295/CR295-12.html 8. 짤방 출처는 여기, https://twitter.com/Mangeon4/status/1352152792065040384 이 책의 저자가 이슬레로 프로젝트의 책임자였다.
공항에서 재입장이 힘든 이유를 알아보자
공항에 가본 사람들은 알겠지만, 공항에선 수하물 찾고선 나갈때 다시 들어올 수 없다고 엄중히 경고한다 왜 그럴까? 여기에는 비하인드 스토리가 있다 시간을 잠시 돌려 1999년대로 가보자 이사람의 이름은 니시자와 유지 흔한 항덕이었지만, 사정이 안되서 철도회사에서 일하게 되었지만, 그마저도 안되어 자살할 결심으로 회사를 나가게 되지만, 실패하게 되어 히키코모리가 된다 히키코모리였던 당시 그가 주로 했던게임은 플라이트 시뮬레이터였다 그는 1000회 이상 무사고 비행을 했으며 도쿄의 레인보우 브릿지를 통과하는 것을 즐겼다고 한다 그렇게 히키생활을 하던 와중 항덕이었던 니시자와는 어느날 하네다 공항 단면도를 보다가 경비시스템의 사각을 발견하게 된다 그것은 바로 1층에서 수하물을 찾고 2층으로 올라가 환승을 할때, 검문을 받지 않고 탈 수 있다는 점이었다! 개쩌는 보안 취약점을 발견한 니시자와는 관련회사에게 여러가지 정보를 취합하여 이 보안 취약점을 이력서와 함께 보내서 자신을 경비원으로 취직 시켜달라고 요구했다 오우! 그렇게 해서 재입장이 불가능 해진거구나! 만일 그랬으면 이 이야기는 여기서 끝이겠지만 아무래도 현실은 좀더 각박했어 관련회사는 무슨 생각이었는지 모르겠지만, 니시자와의 편지를 그냥 무시해버렸던거야 칙쇼...감히 무시를 해? 좋아. 날 무시한 댓가를 톡톡히 치러주겠어!!!! 그렇게 그는 범죄의 길로 빠지게 된다... 1999년 7월 23일 오전 6시 45분 니시자와는 하네다공항에서 오사카의 이타미공항에 가는 티켓을 사게 된다 니시자와는 또 하나의 보안취약점을 이용하는데 기내 수하물을 맡기면 X레이 검색대에 들어가지만 위탁 수하물은 X레이 검색대를 통과하지 않는다는 점을 이용하여 가방에 칼을 넣고 공항을 떠나게 된다 8시 50분 그는 다시 이타미공항에서 하네다공항에 가는 비행기를 타게된다 또 다시 가방을 위탁수하물에 맡겨 검문에 당하지 않고 흉기를 넣고 하네다공항으로 오게된다 10시 7분 하네다 공항에 도착한 그는 오전 11시에 출발하는 ANA 61편을 목표로 행동에 돌입하기로 한다 우선  위탁 수화물을 찾은 후 화장실로 가서 가방은 휴지통에 버리고 칼은 작은 가방에 넣고 약간의 변장을 한다 그리고 그는 내렸던 1층을 다시 역주행해서 2층으로 올라가게 된다 이렇게 올라갔던 그는 X레이 검문소를 통과하지 않고 흉기를 반입한 채 목표물인 ANA 61편에 탑승하게 된다 이륙 2분후 칼로 승무원을 위협하여 기장실을 열라고 협박했다 기장도 바보는 아니었는지라 조종실로 들어오기전에 하이잭당한 사실을 관제소에 알렸다 이후 니시자와는 비행기를 요코스카쪽으로 돌리라고 지시했다 원래 이 비행기는 훗카이도로 가는지라 기존에 보이면 안되는 후지산이 보여 승객들도 사태의 심각성을 깨닫게 된다 이후 요코스카를 통과하자 이즈오시마 섬으로 가라고 지시했다 그다음 요구는 아주 미친짓이었는데 10000피트에서 비행하던 항공기를 3000피트로 비행하라고 지시한다 참고로 3000피트는 900m이며 가장 높은 빌딩인 부르즈 할리파가 828m니까 얼마나 낮게 나는지 대충 짐작이 갈거다 얼마나 낮게 날았던지 근처 아마추어 야구장에서도 비행기를 육안으로 볼 수 있었다고 한다 고도를 낮추고 부기장을 내쫓고 문을 걸어잠근 후 니시자와는 꿈에 그리던 비행기 조종을 시도한다 실제로 전문용어까지 쓰면서 했다고 함 그러나 비행기는 니시자와 뜻대로 제대로 움직이지 않았다 왜그랬을까? 사실 비행기는 기장과 부기장 두개가 서로 연동되어 움직이는 시스템이었다 그니까 어느 한쪽이 안움직이고 버틴다면 잘 움직이지 않는 시스템이다 즉, 기장이 니시자와가 개짓거리를 할까봐 조종간을 꽉 붙잡고 있었던것! 실로 영웅적인 행동이 아닐수가 없다 결국 원인을 알아낸 니시자와는 기장에게 컨트롤을 넘기라고 했으나... 당시 납치된 ANA 61편 기장 : 좆까 난 승객을 지켜야해 너같은 병신에겐 맡길수없어 결국 빡친 니시자와는 기장의 목을 칼로 찔러서 살해해버린다 그렇게 더이상 장애물이 없는 니시자와는 11시 55분 혼자서 단독으로 비행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이미 비행기가 힘을 많이 잃어버려 주택가로 급강하 하게 된다! 이대로라면 수천 수만의 무고한 시민들이 죽게 되는 절체절명의 상황이 벌어지게 되는데!! 경보음이 쉴새없이 울려대고 자동항법장치까지 꺼지자 보다 못한 부기장과 기타 사람들이 이래죽나 저래죽나 하는 심정으로 문을 박살내고 니시자와를 끌어낸다 웃기게도 이 고생을 하고 니시자와가 수동으로 비행한 시간은 단 2분밖에 안되었다고 한다 승객중에 있던 파일럿과 부기장이 가까스로 고도를 상승시켜 비행기를 안정시킨다 몇분만 늦었어도 하치오지 주택가에 떨어져 천문학적인 피해가 날뻔한 위험천만한 사태였다 12시 14분 비행기는 다시 하네다공항으로 회항하여 무사히 착륙한다 니시자와는 곧바로 붙잡혔지만, 칼에찔린 기장은 골든타임을 놓쳐 끝내 과다출혈로 사망하게 된다 사망한 기장과 부기장은 승객을 안전하게 보호한 것을 인정받아 민간항공사에서 줄 수 있는 최고의 상인 폴라리스상을 받게 된다 그리고 니시자와는 2005년 항소없이 무기징역을 받게 된다 범행 전에도 공항에 전화를 걸어 보안취약점에 대해서 조치해달라고 했던 점 그리고 범행동기가 요미우리 신문에 까발려지게 되면서 하네다 공항은 개쪽을 당하면서 공항 전체의 보안을 재검토를 하게 되었고 이를 계기로 공항에선 내린후에 다시 역방향으로 재입장을 하지 못하게 되었다고 한다 공항에 쓰인 경고문의 대부분은 피로 쓰여진거다 (출처) 아니 근데 어이없네 아무도 몰랐던 (또는 신경쓰지 않았던) 취약점을 적어서 낸 이력서를 무시하다니 하다못해 그 취약점 개선도 안하다니
스페인은 어째서 산업혁명에 뒤쳐졌을까?
금요일은 역시 역사지. 심심해서 써 보는 유럽사이다. 전형적인 역사 이야기가 아닌 기사본말체(紀事本末體)이니 한 번 보시기 바란다. 발단은 넷플릭스의 드라마, “마드리드의 모던 걸(Las Chicas del Cable, 참조 1)”이다. 이 스페인 드라마의 배경은 1920년 초반, 스페인 최초의 전화통신 회사인데 연대를 잘 보시라. 미국에서 벨 전화회사가 생긴 연도가 1877년이고 이미 19세기 후반까지 영국, 프랑스에는 다 퍼졌었으며 1927년에는 심지어 대륙간 무선 전화(미국 버지니아와 프랑스 파리의 에펠 탑, 참조 2)까지 현실화됐었다. 유선은 이미 미국과 영국이 최초로 한 적 있었고 말이다. 스페인도 유럽 국가이니 당연히 근대 산업화로 나아가는 건 맞는데 왜 느렸을까? 물론 교과서에 답이 있긴 합니다. 식민지에서 들어온 막대한 금은보석(즉 금융자본의 융성)이 산업 육성(즉 산업자본의 발달)을 늦췄고, 그에 따라 열강에서 탈락했다고 말이다. 하지만 이건 너무나 정답이라서 시시하다. 더 세부적이고 구체적인 이유는 없었을까? 크게 보면 19세기 당시, 첫 번째, 역사적 우연성(스페인 국내적 사정)이 있겠고, 두 번째, 사회적 우연성, 세 번째, 지리적 우연성(산업화 조건이 안 맞었다는 점)이 있겠다. 여러모로 역사는 조건도 조건이지만 우연이 많이 좌우하는 느낌적 느낌. --------- 19세기 스페인의 역사적 우연성, 정치적 혼란 때문에 못 했다. 19세기는 나폴레옹으로 시작된다. 나폴레옹이 스페인에 쳐들어와서 10여년 후 퇴출될 때, 스페인도 프랑스처럼 부르본(…) 왕조로 다시 왕정복고가 이뤄지는데 이때 프랑스는 스페인에게 새로운 프랑스식 헌법이라는 선물(?)을 안겨다줬었다. 이게 상당히 자유주의를 가미하고 있었지만, 새로 국왕이 된 페르디난드는 이 헌법을 무시한다. 그에 따라 19세기부터 이미 국왕을 위주로 한 보수파와, 다른 유럽(결국 프랑스를 의미한다)과 궤를 맞춰야 한다는 개혁파가 내전에 가깝게, 아니 내전을 시작한다. 보수파는 16세기 이후 존재한 적 없었던 보수적 스페인을 다시 세우려 했었고 예수회를 다시금 불러들였다. 이들 카를리스타(Carlista, 보수파)와 이사벨리노(Isabellino, 리버럴)의 싸움은 20세기 초 스페인 내전으로도 이어진다. 한 마디로, 19세기 내내 싸웠다. 식민지 사정도 스페인을 돕지 않았다. 나폴레옹에게 한 번 무너진 이후로 스페인 식민지들은 본국을 우습게 여겼고, 본국보다 더 순수한 스페인 혈통(멕시코)을 주장한다거나, 압제받는 남미인들을 위한(시몬 볼리바르 등) 혁명 등으로 대부분 독립해버린다. 이 또한 스페인에게 결코 유리한 상황이 못 됐다. --------- 19세기 스페인의 사회적 우연성, 사회구조가 산업화를 막았다. 스페인에서 그나마 산업화가 된 지역을 보면 북서쪽의 바스크와 북동쪽의 카탈루니아/발렌시아이다. 왜 하필 프랑스에 붙은 지역들만 발전했는지의 이유는 세 번째인 지역적 우연성하고도 겹치는데, 사회적인 이유로 얘기를 하자면 이들이 카스테야노(즉 마드리드)로부터 영향력이 약했다는 점을 들 수 있겠다. 카스티야의 정체성은 오로지 정치와 집권이었다. (유대인과 아랍인을 내쫓은 배경도 다 거기에 있었다.) 마드리드의 왕족 계층과 경화벌열(京華閥閱, 서울경기 지방의 양반들)은 농업 지대를 추구했으며, 이들의 정책도 결국은 농자천하지대본(農者天下之大本)이었다. 따라서 온갖 혁명과 데모, 혹은 노예(…)를 통해 산업화를 이룬 영국과 프랑스 등과 달리, 스페인에서는 일할 만한 노동자들이 배출되지 않은 것이다. 그 증거? 19세기-20세기 스페인 철도는 서유럽 국가들로 연결된 것이 아니었다. 모두 마드리드를 중심으로 스페인 국내 통치를 위해 연결된 철도망이었다. 이는 자연스럽게 지리적 이유로 연결된다. --------- 19세기 스페인의 지리적 우연성, 태어난 곳이 여기인 걸. 앞서 북서쪽 바스크와 북동쪽 카탈루니아/발렌시아가 공업지대라고 했다. 그게 이유가 있다. 프랑스와 인접해 있고 해양 운송이 가능하며(각각 빌바오와 바르셀로나), 짤방에 나오지만 그나마 철과 석탄 산지가 가까이 있었기 때문이다. 지도를 보면 대부분 석탄 및 철광 산지와 연결된 지역, 그러니까 서유럽에서는 벨기에-프랑스-독일 접경지대가 산업화 지역임을 아실 수 있을 것이다. 동유럽에서는 실레지아, 그러니까 체코를 중심으로 한 지역이다. 게다가 위에서 언급했지만 철도망이 자원을 실어나르는 망이 아니었다. 즉, 내부는 경제성이 낮았고, 바스크와 카탈루니아 역시 프랑스 등 서유럽이 그 대상이었다. 또한 투자 자본도 마드리드가 아닌, 다른 서유럽 국가들로부터 들어왔다. 스페인 내부적으로는 산업화를 위한 충분한 자본을 형성시키지 못했다. --------- 물론 유럽에 위치해 있고 프랑스 바로 밑에 있었으니 스페인도 20세기부터(바로 마드리드 모던 걸의 배경이다) 그럭저럭 산업화를 시작하기는 했지만 그것도… 스페인 내전과 프랑코 독재를 만나면서 기회를 완전히 잃는다. 세계대전 후 마샬 플랜의 지원도 못 받았고 말이다. 같은 위도에 위치한 이탈리아랑 비교하면 더 그렇다. Spain is different!, 1960년 프랑코 시절 스페인의 관광홍보 슬로건(참조 3)이다. 여러모로 사실이다. -------------- 참조 1. 마드리드 모던 걸: https://www.netflix.com/title/80100929 2. Speech Crossed The Atlantic for the First Time 100 Years Ago This Week (2015년 10월 22일): https://time.com/4081211/transatlantic-speech-transmission-1915/ 3. «Spain is different!», el eslogan que cambió para siempre la imagen de España(2015년 3월 27일): https://www.abc.es/espana/20141221/abci-spain-diferent-201412181821.html 4. 짤방 출처: https://europeanlit.weebly.com/introduction.html
스페인 사람들이 밤 10시에 저녁식사를 하는 이유는?
스페인의 식사시간은 우리나라의 식사시간과 다소 차이가 있습니다. 한국의 식사시간에 맞춰 12시에 점심을 먹으려고 식당을 찾으면 문을 연 식당을 찾아보기 힘들고, 마찬가지로 7시에 저녁을 먹으려고 하면 점심 식사를 제공하고 남은 재료로 만든 음식을 먹는 불상사를 겪을 수도 있습니다. 스페인 여행 시 좀 더 효율적으로 식당을 찾고 식사 계획을 세우기 위해 RedFriday에서는 스페인의 식사시간 및 식사문화를 알아보겠습니다. 1. 아침 식사 7:00 ~ 9:00 스페인에서는 아침식사를 매우 간단하게 먹습니다. 보통 커피 한 잔과 빵 한 조각을 먹는 것이 일반적입니다. 커피는 카페 콘 레체(cafe con leche, 에스프레소에 우유를 넣은 것)를 주로 마시며, 크루아상, 츄러스, 올리브오일과 토마토 소스를 곁들인 바게트빵(pa amb tomaquet) 등을 주로 먹습니다. 2. 아침 간식 10:30 ~ 11:00 ‘almuerzo'라고 불리는 아침 간식 시간은 또 하나의 아침 식사 시간 (또는 점심 식사 전에 간단히 간식을 먹는 것)입니다. 스페인 사람들은 아침식사와 비슷한 메뉴로 허기진 배를 채웁니다. 여행객들은 이 때 아침 식사를 하시는 것도 나쁘지 않은 생각입니다. 이 시간에 카페에 앉으신다면 스페인의 직장인들과 신문을 읽는 노인들의 모습을 배경삼아 여유로운 아침식사를 할 수 있을 것 입니다. 3. 점심 식사 2:00 ~ 3:30 Menu del Dia를 찾아라! 2시부터 시작되는 점심 식사는 하루 중 스페인 사람들이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식사입니다. 그만큼 점심식사 시간에는 '음식 천국'이라고 불릴만큼 합리적인 가격에 만족스러운 식사를 할 수 있습니다. 만약 스페인을 여행 중이시라면 'menu del dia(오늘의 메뉴)'라는 간판이 있는 곳을 주목해보세요. 9유로~14유로 정도의 가격에 첫번째 코스(샐러드 등의 애피타이저), 두번째 코스(고기, 또는 생선), 와인 또는 맥주, 커피 또는 디저트를 모두 즐길 수 있습니다. 4. 오후 간식 5:30 ~ 7:30 ‘merienda'라고 불리는 이 시간은 '먹는 것 '보다는 사람들과 '어울리는 것'에 중점을 두는 시간입니다. 친구들과 만나서 커피도 한 잔 하고, 나이가 지긋하신 분들이 카페에서 만나 이야기도 나눕니다. 이 시간에 스페인 사람들은 아이스크림, 초콜렛 크루아상, 초콜렛 츄러스 등 특별히 달콤한 것을 먹거나, 하몽, 초리소, 치즈 등이 들어간 샌드위치를 먹습니다. 이 시간에는 주로 술은 먹지 않습니다. 만약 스페인으로 여행을 가신다면 이 시간에 현지인들이 줄 서 있는 길거리 음식이나 빵집을 공략해보세요. 실패 없는 간식을 먹을 수 있을 것 입니다. 5. TAPAS HOUR 8:30 ~ 10:00 스페인의 저녁식사는 비로소 8:30이 되어서야 시작됩니다. 8:30 이전에는 문을 연 식당도 별로 없을 뿐만이 아니라, 만약 열었다 하더라도 관광객을 대상으로 한 '그저 그런' 식당일 가능성이 많습니다. 스페인에서는 점심식사를 가장 거나하게 먹고, 저녁식사는 간단한 '타파스(Tapas)'와 맥주 또는 와인 한잔으로 해결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타파스는 하나에 1유로~4유로 정도로 가격이 저렴하고 양이 적으며 지역에 따라 그 종류가 수백 수천가지가 됩니다. 6. 저녁 식사 9:00 ~ 11:00 스페인 사람들은 저녁식사에 큰 의미를 두지 않습니다. 우리의 생각으로는 저녁 11시까지 식사를 하고 어떻게 잠자리에 들지 걱정을 하지만 스페인 사람들의 저녁식사는 샐러드, 햄이나 치즈 몇 조각, 수프 한 그릇 등으로 매우 소박합니다. 그러나 여행객들의 경우는 다소 다를 수 있습니다. 여행을 하며 클래식한 스페인 전통 정찬을 즐기고 싶다면 9시부터 저녁식사를 하는 것을 추천합니다. 8시 30분 부터 간단한 타파스와 맥주 한 잔으로 저녁을 먹을 준비를 하고 9시 부터는 빠에야, 크로켓, 스페인식 오믈렛 등을 주문해 저녁식사를 즐기시면 됩니다. 한국 처럼 여러가지 요리를 시켜서 나눠 먹는 문화가 있으므로, 식당에서 여러개의 음식을 주문하여 일행들과 함께 즐길 것을 추천합니다. # 원문 출처 : https://redfriday.co.kr/88 # 많이 본 컨텐츠 # 매일 업데이트되는 생활꿀팁과 알아두면 도움되는 이야기를 팔로우 하셔서 쉽게 구독하세요. # ‘좋아요’ 와 ‘공유하기’ 많이 부탁드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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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1년, 머리카락을 가발 공장에 팔기 위해 줄을 선 여성들의 모습  울음을 터뜨리는 소녀를 같이 온 어머니가 달래고 있다. 1961년, 당시 서울역 플랫폼 모습. 한복을 입은 사람들이 눈에 띈다 6.25 전쟁을 겪지 않은 첫 세대인 1954년생이 초등학교 (당시 명칭 국민학교)에 입학했다  한복을 차려입은 어머니들의 손을 잡고 교정으로 향하는 모습 1962년 경상남도의 장날 풍경 짐을 머리에 이고 장터로 향하는 사람들 강원도 춘천에서 삼베를 말리는 주민의 모습과 초가집들 1962년, 대구에서 열린 우시장 1962년, 모내기가 한창인 서울시 성동구 논현동 (현재 서울특별시 강남구 논현1동, 논현2동) 1963년, 평범한 남해 어촌의 풍경 방과 후 초등학생들이 들판으로 소를 끌고 나가 풀을 먹이고 있다. 집의 재산인 소를 배불리 먹이고 잘 데리고 오는 일을 수행하는 것이 당시 어린 학생들에게는 중요한 임무였다고 한다. 1964년, 초등학교 4학년 학생들의 턱걸이 연습이 한창인 교정  하나라도 더 해내려는 모습의 학생. 달리기를 겨루며 체육 활동을 하는 어린이들의 모습이 방영되었다. 고무신이 닳을까봐 맨발로 운동장을 달리는 학생들과 응원하는 친구들. 영유아사망률 1000명 당 218명. (2021년 세계 최악의 영아사망률을 기록하는 우간다의 2.3배) 신생아 5명 중 몸이 약한 1명은 첫돌을 넘기지 못하고 죽는 시대였다.  아이들에게 야외 활동을 장려하여 체력과 면역력을 기르자는 표어가 방송되었다. 1964년, 한국전력 직원들이 경상북도 영양군에 전봇대를 설치하고 있다. 전기의 혜택을 받지 못하던 가정까지 전기가 들어가는 모습이 방영되었다. '보릿고개 넘기기 운동'이 한창인 시골의 분주한 모습 역사적으로 늘상 문제가 되었던 쥐떼 해결을 위해 '쥐잡기 운동'이 시작되었다. 잡힌 쥐를 보고 속이 시원한듯 웃는 어른들 전국적으로 문맹 퇴치를 위한 운동이 시작되었다. 경북 영덕군에 내려온 대학생들이 글을 모르는 주민들을 모아 읽고 쓰는 법을 가르치고 있다. 1965년, 춘천 수력 발전소가 완공되었다. 산 능선에 올라선 시민들이 이를 지켜보고 있다. 당시 고등학교의 수업 모습 포이어바흐의 유물론과 마르크스, 엥겔스 자본론에 대한 비판 수업이 이루어지고 있다. 교련 시간에 M1 총기 분해조립, 맨손으로 쇠봉 타기 연습을 하는 고등학생들 전국에 큰 비가 내렸다. 잠긴 집과 들을 보고 망연자실한 사람들, 머리를 다친 동생을 돌보는 형의 모습이 카메라에 담겼다. 중부지방에서 피해가 가장 극심했던 청주 시민들이 힘을 합쳐 복구에 나서고 있다. 흙을 퍼내는 아버지들과, 갓난아이를 내려놓고 삽을 들어 복구를 돕는 어머니들 범람 위기의 청주 무심천에서 청주공업고등학교 학생들과 교사, 시민들이 힘을 합쳐 제방을 손보고 있다. 교복을 입은 청주중학교 1학년 학생들이 삽을 들고 수해 복구를 지원하고 있다. 1인당 국민소득에서 필리핀이 2배 이상 앞서던 시절,  거액을 들여 초빙한 필리핀 경제사절단이 내방했다. 일렬로 도열한 한국 관료들의 90도 인사와 환대에 경제사절단 단장인 필리핀 농림상 로드리게스와 필리핀 사절단이 흡족하게 웃고 있다. 1965년 1월, 뉴스에서 가장 중요한 소식으로 다루었던 첫 1인당 국민소득 세자리 돌파 (110달러) 1961년 70달러로 세계에서 두번째로 낮았던 1인당 국민소득의 증가를 새해 첫 뉴스로 꼽았다.  지나치게 과장된 그래프가 어이없지만 당시에는 매우 큰 소식이었던 모양이다. 1965년, 한국은 방글라데시를 2달러 차이로 처음으로 제쳤다.   파독 광부 예비소집에 모인 인원들이 진지한 표정으로 설명을 듣고 있다. 서독 탄광으로 떠나기 위한 광부 모집에 최종 합격한 20대의 젊은 광부들 독일로 떠나기 전 마지막 밤. 배웅하는 가족, 지인들을 향해 거수경례를 올린 파독광부들이 태극기를 앞세우고 독일 프랑크푸르트행 비행기에 몸을 싣고 있다 한복을 입고 가족들을 향해 손수건을 흔드는 파독 간호사들 이륙 준비를 하는 여객기. 공항에 모인 시민들과 가족들이 파독 광부, 간호사들의 무사귀환을 바라며 손을 흔들고 있다.  독일에 도착한 파독 간호사들이 거동이 불편한 독일 환자들을 돌보고 있다. 40도가 넘는 온도, 지하 1200미터가 넘는 탄광의 끝자락에서 11시간의 작업을 끝마치고 나온 파독 광부들 당시 파독 광부 평균연령은 25세, 파독 간호사 평균연령은 23세였다.  (출처 : 한국직업건강간호학회) 국군의 남베트남 파병이 결정되었다. 만 38세의 나이에 맹호부대 사단장 겸 주월한국군 사령관으로 임명된 채명신 소장(당시 38세, 6.25 참전)이 수통과 탄띠를 착용하고 출발 전 현충원에 묵념을 올리고 있다. 수도사단 맹호부대 사단장 - 소장 채명신 (당시 38세, 6.25 참전) 제9보병사단 백마부대 사단장 - 소장 이소동 (당시 38세, 6.25 참전) 해병 제2여단 청룡부대 여단장 - 준장 이봉출 (당시 39세, 6.25 참전) 1965년, 파병을 위해 도열한 수도기계화보병사단 (맹호부대) 병력 전선으로 떠나는 제 9보병사단 (백마부대) 장병들의 결연한 표정 부동자세의 해병대 수색대 병사들 서울 시가지를 통과하는 파병 장병들을 향해 기도를 올리는 노인과 부채질을 해 주는 아주머니의 모습이 카메라에 담겼다. 이화여대 총장 김옥길 여사와 이화여자대학교 학생들이 파병 장병들을 위해 쓴 환송사가 방송되었다. '조국 떠나 만릿길 온 겨레의 마음이 그대들의 방패가 되리 아세아 (아시아)의 최정예 우리 국군 가는 길 오직 승리뿐이다.' 베트남 전선으로 향하는 국군 수송을 위해 36개편의 열차가 동원되었다. 수송 열차가 지나는 역, 마을 어귀마다 장병들을 향해 손을 흔드는 시민들 대구역에서 잠시 정차한 수송열차 국군 장병을 위해 기차역에서 먹을 것을 나누어주는 중년 여성 한 병사가 역까지 배웅을 나온 어머니의 손을 붙잡고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부산항에서 승선 전, 부하들을 향해 악수하는 중대장을 바라보는 해병 소위 이학철 (당시 23세) 파월 1진 해병 청룡부대 제3대대 9중대장 김종세 대위 (중앙, 당시 28세), 박준교 상병 (왼쪽, 당시 22세), 정명국 일병(오른쪽, 당시 21세)이 인터뷰를 하고 있다. 김종세 대위: "월맹 정규군 (북베트남 정규군)이 밀림에서 미군도 위협할 만큼 맹위를 떨치고 있고, 국군 장병들에 대해서 '단 한 사람도 살아서 돌아가지 못 할 것'이라고 비방하고 있지만 산악에서 단련된 소부대 전술, 체력과 같은 신체능력, 실제 전투에서의 호전성은 우리 병사들이 크게 앞선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결코 두렵거나 하는 마음은 들지않습니다." 마지막 승선 인원인 맹호 혜산진부대 소속 소대장 소위 최정길(당시 24세)이 부산시 부시장을 비롯한 환송 인원들과 악수를 나누고 있다. 당시 국내 최대의 여성단체 한국 부인회 회원들이 맹호부대 장병들을 환송하고 있다. '맹호' '환송' '이겨서 돌아오라' 떠나는 장병들을 환송하는 부산 시민들과 수송선 난간을 가득 메운 장병들 출항하는 수송선. 부산 시민들의 응원에 군가로 화답하는 장병들 멀어지는 부산항을 바라보는 해병 병사의 모습 1인당 국민소득 110달러의 농업국가, 38세의 사령관이 20대 초반의 병사들과 전선으로 향하던 날. 성대한 위문공연도, 거창한 위문품도 없었지만 국민들은 장병들의 무사귀환을 진심으로 빌어주었다. 첫 국내 기술로 만든 라디오가 시판되었다. 납땜질에 열중하는 어린 여공들 '벌거벗은 산에 나무를 심자' 식목일에 나무를 심기 위해 산으로 향하는 국민들과 민둥산에 나무를 심는 모습이 방영되었다. 가을날, 고등학생들이 전교생이 지켜보는 가운데 운동장 흙바닥 위에서 유도 대결을 펼치고 있다. 1967년, 제2회 전국학생씨름대회. 씨름 프로대회가 존재치 않던 시절, (씨름 프로대회는 80년대)  전국 고등학교에서 힘 좀 쓴다는 학생들이 모였다.  다른 지역 학생들의 경기를 살펴보는 서울 고등학생들. 치열한 결승전, 경북 영신고등학교 학생이 우승을 차지했다. 강원도 삼척시에 유례없는 폭설이 내렸다. 지붕에 쌓인 눈을 치우는 주민들. 생활 체육으로 나날이 인기를 더해가는 씨름이 소개되었다. 씨름 대회를 구경하는 수많은 인파들. 국군 장성들이 베트남 전선을 방문했다. 전쟁터에서 경계근무 중인 해병 병사의 덥수룩한 수염을 만지며 웃는 육군참모총장 주월 맹호부대 병사들이 시멘트로 만든 역기로 밀리터리 프레스를 하며 체력 단련을 하고 있다. '웃지않는 한국 해병들' - 미국 UPI 통신 보도 1967년, 짜빈동 전투에서 중대 병력으로 월맹 정규군 정예 1개연대 병력과 (호치민 휘하의 월맹군 제2사단 1연대) 맞붙어 승리한 해병 11중대 장병들이 미군의 초청을 받아 계단 위에서 미군의 위문 공연을 지켜보고 있다.  선글라스를 낀 정경진 대위 (당시 28세, 중대장)와 김용길 중사 (좌측, 당시 26세), 중앙에서 카메라를 노려보는 어느 청룡부대 11중대 병사가 카메라에 담겼다. 대다수가 임관과 동시에 베트남 전선으로 파병될 ROTC 5기생 생도들이 대간첩작전에 참여한 경력이 있는 교관으로부터 산악 게릴라전 교육을 듣고 있다. 서울 운동장을 가득 메운 시민들. 복싱 세계 주니어미들급 챔피언인 '철권' 김기수 (당시 27세)가 도전자 프레디 리틀 (미국)과 15라운드까지 맞붙고 있다. 이를 악물고 덤비는 김기수의 분위기에 밀리는 프레디 리틀 기립박수로 환호하는 시민들 타이틀 방어에 성공한 김기수(당시 27세)의 기념촬영 1968년, 부산시 풍경 1968년, 서울의 모습 하늘에서 본 1968년 서울 첫 개통한 아현고가의 모습. 자전거와 자동차가 함께 다니고 있다. 1969년, 한강철교 복구공사가 시작되었다. 작업에 열중하는 현대건설 노동자들의 모습 서울과 부산을 잇는 한반도 최초의 고속도로, 경부고속도로 공사 현장의 모습. 부족한 중장비 대신 인부들이 달라붙어 바위를 깨고 길을 닦고 있다. 1969년, 나룻배까지 동원되어 경부고속도로 낙동강 방면 공사에 쓰일 석재를 운반하고 있다. 1969년 연말, 포항 영일만 앞바다에서 '포항제철소' 공사가 시작되었다. 허허벌판인 영일만의 모습 1970년 1월 1일, 영일만 앞바다에 떠오르는 일출  삼천만이 힘을 합치면 역사는 바뀐다는 내용의 표어가 방송되었다. '우리도 할 수 있다. 삼천만 하나된 힘, 역사를 바꾸리라.' 한국 평균 나이 22.9세 시절 (출처) 길고 많지만 흥미로워서 가져와봤습니다 재밌네 ㅋ 평균 나이 22.9세 시절
스페인 공대 삼총사, 일본 호러 게임을 한국에 들고 오다
[연재] 멜봇 스튜디오 백장미 대표의 스페인 게임 이야기 BIC 페스티벌은 스페인 인디 개발자에게 꽤 인지도가 높은 이벤트다. 해마다 여러 참가자가 핑계 삼아 한국을 방문했다. 하지만 올해는 시국이 시국인지라 한국행 비행기에 오르지는 못하고 온라인으로 참가한 스페인 인디 개발사를 소개한다.    똑 부러지는 디자인 담당 라우라, 게임 이야기를 할 때 눈에서 빛이 나는 프로그래머 길롐, 그리고 그 둘을 자랑스럽게 쳐다보는 아티스트 이반. 이렇게 세 친구들이 뭉쳐서 작년에 설립한 개발사가 '엔드플레임' 이다. 공대 친구인 이 세 명은 <이카이>라는 게임을 개발하려 뭉쳤다. <이카이>는 심리 호러 PC 게임이다. 게임은 일본 공포 영화의 느낌을 준다. 그러니까 스페인 공대 친구들이 일본풍 호러 게임을 한국의 인디 게임쇼에 출품한 것이다. 나는 이 친구들과 이야기를 나눴다. "이렇게 어리고 청순한 친구들이 하필 공포 게임을 만들지?"라는 의문을 품게 되어서 여러 번 물어보았다. 이유는 단순했다. /편집= 디스이즈게임 김재석 기자 이반 길롐 라우라 # 왜 스페인 개발자들이 일본 호러 게임을? <이카이>(IKAI, 異界)는 1인칭 공포 게임이다. 일본 민간에서 전해져오는 어두운 이야기를 소재로 한다.  플레이어는 무녀가 되어 각종 공포 현상에 마주하게 된다. 고전적인 심리 공포 게임에서 영감을 받았기에 플레이어는 쉴 새 없이 도망다니면서 사건의 진실을 파헤쳐야 한다. 글보다 트레일러가 훨씬 설명을 잘 해줄 것이다. 왜 스페인 출신의 개발자가 일본 에도 시대를 배경으로 한 게임을 만들었는지 궁금했다. 이 사람들은 일본 문화에 대해 얼마나 많이 알고 있을까?  이들은 진지한 자세로 세밀한 연구 과정을 거쳤다고 답변했다. 게임에서 볼 수 있는 작은 소품, 의자 하나도 모두 조사를 거쳐 집어넣은 것이라고 한다. 얼마 전에 이들은 데모를 플레이한 일본 게이머에게 이메일을 받았다고 한다. 아주 정중하게 게임을 평가하면서, 동시에 에도 시대에 대한 설명을 해줬다고 한다. 게임에 나오는 건물의 붉은색을 조금 더 우디(woody)한 톤으로 각색해줄 것을 요청했다고. 에도 시대에는 나무에 그런 색을 입히지 않았다는 보충 설명도 담겨있었다. 개발진 중 라우라는 6년 동안 일본어를 학습 중이다. 게임 속 일본어가 얼마나 정확한지에 대해 일본어 선생님의 도움을 받고 있으며, 게임에 들어간 한자체도 실제 에도 시대에 사용된 글씨체라고 한다. 실제로 서예는 <이카이>에서 굉장히 중요한 요소다. 문화적으로 실수를 저지르지 않기 위해 상당히 공을 들인 모양새다. <이카이>의 주요 타겟은 유럽과, 북미, 일본 게이머들이라고 한다. 정작 <이카이>는 스페인에서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고 있다고. 세 사람은 소재에 연연하지 않고 그저 자기들이 하고 싶은 게임을 만들고 싶은 것 같았다. # BIC가 선택한 공포의 사운드 주인공 나오코는 무녀다. 무슨 사연이 있어 여사제가 되었는지는 게임을 하다 보면 알 수 있다고. 혼자 신사를 지키는 나오코는 구천을 떠도는 귀신들의 한을 풀어줘야 한다. 플레이어는 신사에서 만나는 귀신들과 관련된 물건들을 재배치하고, 부적을 사용해 한을 풀어주게 된다. 공포 장르의 목적인 '깜놀'을 플레이어들이 만끽할 수 있도록 간단한 게임 플레이를 디자인했다고 한다.  게임은 굉장히 느린 흐름으로 진행된다.  어두침침한 신사에서 언제 어디선가 뭔가 불쑥 튀어나올 것만 같아 몸이 굳는다. 여느 호러 어드벤처 장르와 비슷하게 1인칭으로 진행되는데, '깜놀'을 유발하는 오브젝트를 피하기 위해 긴장한 상태로 게임을 진행하게 된다. 그렇지만 뭔가를 찾아내지 않으면 게임이 진행되지 않기 떄문에 계속 두리번거려야 한다.  개인적으로는 스토리도 흥미로웠다. 왜 주인공 나오코는 혼자 신사를 지킬까? 귀신들은 어떤 사연을 품고 있는 걸까? <이카이>의 귀신은 모두가 악령은 아니다. 개중에는 애처로움을 유발하는 캐릭터도 있었다. 개발진은 기존에 있는 미국식 좀비나 슈팅 또는 공상 호러 말고 아직 생소한 일본 호러를 개발하고 싶다고 한다고 이야기했다. <이카이>는 지난 BIC에서 베스트 오디오 상을 수상했다. 내가 다 자랑스러워진다. 아무튼 이 게임 오디오는 진짜 등골을 오싹하게 만든다. # 내년 스팀 출시 예정, 퍼블리셔 찾는 중! <이카이>는 내년 출시를 목표로 개발 막바지를 향해 달려가고 있다. 현재 스팀에서 데모를 다운받아 해볼 수 있다. 스팀에서 위시리스트에 포함 해주는 게 많은 도움이 된다고 하니, 호러 장르를 즐기는 유저들은 꼭 방문해서 '찜'을 눌러주시길. 제작진은 현재 투자자 또는 퍼블리셔를 찾는 중이라고 한다. 관심이 있다면 연락 주시라!
콜럼버스의 이름
주말 특집, 크리스토퍼 콜럼버스의 이름이다. 어떻게 보면 이건 당연히 무슨 얘기가 나올지 짐작이 가능하다. 콜럼버스라는 이름 자체는 영어식 표기이므로, 실제 이름은 좀 달랐으리라 생각할 수 있을 것이다. 콜럼버스는 생전에 잉글랜드 혹은 영어권 사람들과 교류가 없었으므로, 그런 이름을 본인은 들어본 적 없었을 테고 말이다. 그의 고향은 이탈리아 북서부의 제노바이므로 제노바식 사투리로 말하자면 크리스토파 코롬보(Cristoffa Corombo)이다. 하지만 당시 쓰이던 이탈리아어 표기 방식(참조 1)으로 쓰자면 크리스토포로 콜롬보(Cristoforo Colombo)이다. 그런데 당시 이탈리아는 여전히 분열된 상태였고, 떠오르는 강대국이 하나 있었으니, 오늘날 카탈루니아를 이루고 있는 아라곤 왕국이다. 당연히 카탈루니아어를 사용하니, 여기서 콜럼버스의 이름은 크리스토포르 콜롬(Cristòfor Colom)으로 바뀐다. 여기서 선원으로 일하던 콜럼버스는 동방 무역을 한창 시작하고 있던 포르투갈에 관심을 갖는다. 급진적인 아이디어(서쪽으로 간다!)를 받아들일 만한, 아무래도 당시 유럽에서 원양 항로 전문 국가는 포르투갈이었다. 포르투갈로 향한 콜럼버스의 이름이 이제는 크리스토바웅 콜롱부(Cristóvão Colombo)로 바뀐다. 그러나 이게 웬 걸, 포르투갈은 콜롬버스의 아이디어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이미 희망봉을 통한 항로를 개척해 놓았기 때문에 또 다른 항로를 개척할 인센티브가 별로 없었다. 그리고 원양 항로 전문 국가답게 포르투갈은 서쪽으로 인도에 갈 수 있다는 콜롬버스의 계산이 틀렸음을 이미 알고 있었다. 그러면 포르투갈과 경쟁하던 다른 나라로 가는 편이 합리적이다. 콜럼버스는 카스티야 왕국으로 간다. 오늘날 스페인의 본캐가 바로 여기 카스티야이고, 우리가 흔히 아는 스페인어가 바로 카스테야노(카스티야의 언어)이다. 당시 막 국왕이 된 이사벨라는 대서양을 알카소카스(Alcáçocas) 조약(1479)을 통해 포르투갈과 양분하고 레콘키스타를 마쳤으며 아라곤 왕국과 결혼을 통해 합병까지 했었다. 자, 지금부터는 카스테야노, 그러니까 우리가 아는 스페인어로 불러야 한다. 콜럼버스의 이름은 이제 크리스토발 콜론(Cristóbal Colón)으로 바뀐다. 이미 여러 곳을 선점한 포르투갈과 경쟁을 위해 이사벨라 여왕은 콜럼버스의 아이디어를 받아들인다. 그런데? 신대륙을 발견해버렸네? 지금 기준으로 봐도 인물이라 할 수 있는 이사벨라 여왕은 당시 국제법 해석의 기준이었던 바티칸도 장악해 놓은 상태였다. 이게 무슨 말이냐? 드라마로 더 유명한(…) 보르자 가문이다. 교황 알렉산데르 6세가 아라곤 왕국 출신인지라, 이사벨라의 편이었다. 여기서 탄생한 조약이 바로 토르데시야스(Tordesillas) 조약(1494), 전세계를 포르투갈과 스페인으로 양분한 바로 그 조약이다. 알카소카스가 포르투갈어이고 토르데시야스가 스페인어로 바뀐 걸 알아차릴 수 있을 것이다. 정리해 봅시다. ㅇ 고향(이탈리아) : 크리스토파 코롬보(Cristoffa Corombo) 및 크리스토포로 콜롬보(Cristoforo Colombo)이다 ㅇ 아라곤(카탈루니아) : 크리스토포르 콜롬(Cristòfor Colom) ㅇ 포르투갈 : 크리스토바웅 콜롱부(Cristóvão Colombo) ㅇ 카스티아(스페인) : 크리스토발 콜론(Cristóbal Colón) 크리스토퍼에 들어가 있는 f 발음이 v로, 결국은 b로 변화했다. f와 v, b가 상호 호환되는(?) 발음임을 알 수 있다. 또한 성 끝의 b가 붙거나 떨어지거나 했음이 보인다. 콜럼버스를 프랑스어로 표기할 때 크리스토프 콜롱(Christophe Colomb)인데, 끝의 b가 묵음처리된 이유가 바로 이런 변화에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콜럼버스”는 어디서 나온 것인가? 영어식으로 읽기는 했지만, 사실 그의 라틴어 이름이 크리스토포루스 콜롬부스(Christophorus Columbus)이다. 그리스도를 품은 비둘기(콜롬부스)가 이렇게 다양하게 변주될지는 콜럼버스 자신도 몰랐을 것이다. -------------- 참조 1. 이탈리아 중부의 토스카나 지방의 언어라 르네상스 이후로 거의 표준 이탈리아어처럼 됐기 때문에, 토스카나어(dialetto toscano)로 쓴 표기이다. 단테와 보카치오, 마키아벨리 등의 저작물이 바로 이 토스카나어로 작성됐다. 2. 짤방은 위키피디어에서 가져왔는데, 이탈리아의 판화가 Aliprando Caprioli의 작품을 복제한 것이다. 미국 의회도서관에 있는 콜럼버스… 라틴어 이름으로 표기되어 있다. https://es.wikipedia.org/wiki/Crist%C3%B3bal_Col%C3%B3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