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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와 몽골의 연관성

나는 요즘 몽골 밑 아시아의 역사나 문화에 푹 빠져있다. 몽골음악을 자주 듣기도 하고 또 중국국적의 네이멍구(내몽골)의 호르친초원에서 태어난 어떤 소수민족출신 가수도 참 좋아한다. 그러다 보니 자연스럽게 중국의 좋은 노래들도 알게 되고....그러다 보면 또 재미있는 문화나 민족들에 얽힌 스토리들이 그림처럼 떠오른다. 몽골에게 고려인들이 혹은 많은 국가들이 참 많이 약탈당하고 괴롭힘을 당해와서 혹은 몽골인들이 종종 저지른 야만적인 행태들때문에 싫어하시는 분들도 있겠지만 그것 또한 과거에 힘의 논리로 땅땅먹기를 하던 좀 모자랐던 국제관계속에서 발생할 수 밖에 없는 슬픈 일들이라고 생각하며 이것이 싫다고 무조건적으로 배척을 하면 상대국가의 훌륭한 점들을 배우지 못하고 중요한 것들을 놓칠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 또한 몽골인들이 세운 국가들도 힘이 약할땐 다른 타국가들에게 지배받고 괴롭힘 당할 수밖에 없던 시대였다. 또한 앞으로 문명화된 국제사회에 진보된 우리 후손들이 그런일이 안일어나게 힘쓰고 노력하면 된다고 생각하는 바이며 무조건적인 배척은 그러한 끔찍한 일의 반복을 멈출 수 있는 방법이 아니라 생각한다.


자 그러면 내가 생각하는 고구려와 몽골의 간단한 몇가지 유사성들을 한번 적어보도록 하겠다.

1. 과거 북방의 유목민족들은 그 최초의 발원지가 파미르고원이라고 한다. 파미르고원은 현재 신장위구르자치주이다. 이 옛 파미르고원의 위구르족들은 고구려를 모쿠리 라고 불렀다고 한다. 그런데 같은 시기에 위구르족들이 몽골 역시도 모쿠리라고 불렀다고 한다.

2.몽골에 샤먼의 성지인 어느 호수의 이름은 '홉스굴'이다. 그런데 고구려의 최초의 대도시였던 도시 이름이 '홀승골'이다. 이는 몽골의 홉스굴이라는 발음이 음차하여 한자를 가져다 붙인 것으로 추정하기도 한다고 한다.


3. 몽골을 세운 최초의 칸이었던 칭기스칸의 어릴적 이름은 테무친이다. 그런데 고구려의 3대 왕은 대무신왕이다. 이 대무신이란 발음은 칭기스칸의 어릴적 이름인 테무친을 음차하여 한자의 뜻을 가져다 붙인 것일 가능성이 있다고 한다.(설명을 반대로 해서 교정 들어감. 대무신왕의 이름이 음차되어 칭기스칸이 테무친이란 이름을 가지게 되었을 가능성이 있다.)
칭기스칸의 어릴적 이름 테무친 - 고구려 3대왕의 이름 대무신은 관련이 있다.

4. 고구려를 세운 주몽은 몽골에서 온 호칭일 것이라고 한다. 또한 주몽 역시 몽골인. 주몽은 한 사람이 아닌 민족전체를 통틀어서 주몽이라고 보는 견해도 있으니 그렇게 따지면 즉 고구려를 세운 주몽은 몽골인과 같은 유목민족들. 때문에 말과 활을 아주 잘 다룬다.

몽골인들은 유목민족답게 말을 아주 잘탄다. 말은 몽골인들의 식량이기도 하며 훌륭한 이동수단이자 전투용 무기였다.
고구려인들이 말을 타고 사냥하는 모습을 그려놓은 무용총 수렵도 - 이와 같이 고구려인들은 발걸이를 만들어 발걸이에 발을 고정시키고 말 위에서 고삐를 놓고 등뒤로 활을 쏠 수도 있었을 만큼(배수법) 말을 다루는 솜씨가 뛰어났다.

고대 여러 국가들의 사서에 보면 주몽을 '추몽'혹은 '추모'라고도 표기하는데 이는 몽골 남자아이의 애칭 혹은 왕을 일컫는 '철먼'을 음차해서 발음한 것일 가능성이 높다. 철먼은 우리 말로 '금성'이라는 뜻이다. 그러면 왜 몽골에서 왕에게 금성이라고 불렀을까?
몽골에선 하늘에 떠있는 태양을 태양신 즉 양기를 상징하는 아버지로 여겼고 달을 여왕 혹은 여신 즉 음기를 상징할 때가 있었다고 한다.(때에 따라 반대로 달을 양기로 그리고 태양을 음기로 보는 곳도 있다고도 한다. 이건 각 민족의 해석이나 상황에 따라 달라지기도 한다.)
그리고 지구는 종종 일식현상이 일어나는데 이 때 지구의 관점에서 보면 태양과 달과 지구가 일직선상에 겹친다. 이 날을 태양신인 아버지와 여왕인 달이 만나 섹스를 하는 날이라고 믿었다고 한다. 그런데 이 때 태양과 달이 만나서 어두워졌다가 다시 서서히 분리되는 시점에 태양과 달 사이로 금성이 살짝 보인다고 한다. 이것을 태양신과 여왕이 합궁을 하여 낳은 자식별이라고 믿었다. 때문에 하늘의 아버지와 달인 어머니의 기운을 받아 태어난 즉 하늘의 기운을 받아 태어난 금성을 왕의 칭호로 정한 것이다.
그리고 이 때 금성이 뜨는 위치는 동쪽이라고 한다. 새벽에 동쪽에서 뜨는 밝은 샛별이 금성인데 이러한 금성의 특성때문에 주몽의 이름 앞에 '동명성왕'이라는 칭호가 붙었을 것이라고 한다.

5. 몽골샤먼들은 하늘의 탱그리를 숭배하는 사상과 제의식을 올린다. 그리고 스스로를 투르크인들이라고도 한다. 그런데 이 탱그리는 단군이다. 단군을 중앙아시아식 발음으로 '탱그리'로도 발음하며 그것 말고도 다양한 음차발음이 있다. 그 중 하나가 우리 말의 '단군'이다. 우리 역시 단군을 숭배하며 한국인들은 투르크인들과 아주 밀접한 관련이 있다. 우리가 터키인들과 형제국가라고 하는데 turkey... 이 국가명은 turk족들이 세운 국가이기 때문에 지어진 이름이다. 그런데 이 turk는 돌궐이다. 서쪽으로 간 투르크 즉 돌궐족들이 터키인들이고 동쪽으로 가서 지금의 한반도에 정착한 투르크인들의 일부가 바로 한국인들이다. 즉 따지고 보면 중앙아시아인들은 웬만하면 전부 같은 아시아땅에 살며 연방체계를 구성하고 공유하며 이동생활을 했던 같은 투르크 계열의 유목민족이란 이야기이다.

6.북방의 유목민족은 생김새가 우리에게 매우 친근하고 또 어느정도 중앙아시아 민족들의 부족이나 족보를 알고 있는 이들은 얼굴만 보고도 어느정도 어떤 국가의 어떤부족의 사람인지가 구분이 가능하다고 한다. 한국인들도 북방유목민족들의 얼굴형태를 가진 사람들이 많기 때문이다. 유튜브에서 내가 자주 보는 어떤 몽골가수가 있다. 커다란 체구의 한 남성과 어린아이이다. 그런데 이 큰 체구의 남성을 보자마자 바로 번뜩 떠오른 사람이 있다. 우리가 아는 어떤 사람과 참 많이 닮았다. 누구일까? 바로 김정은. 고구려인들의 후예는 북한사람들이다. 김정은 역시도 북방의 유목민족계열의 얼굴형과 체형이다. 아마 내가 보던 그 거구의 남자가수는 김정은과 같은 족보일듯 하다. 이런 역사를 알고 몽골이나 중앙아시아의 문화를 접하면 참 재미있고 보이는 것들이 많다.
4 Comment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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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무신 왕이 테무진보다 천년전의 사람인데 어떻게 테무진의 이름을 음차해서 대무신이 되나요...;;; 반대겠죠.
@freesoulman 아 찾아보니 정말 그러네요. 교정 감사드립니다! 대무신의 이름이 테무친으로 음차되었을 수 있겠군요.
이런 좋은 글이 무플이라니 참을 수 없어! 잘 봤습니다. 앞으로도 좋은 글 계속 부탁하는 맘으로 꿀팁 선물 하나 놓고 갑니당
@commentbot ㅋㅋㅋㅋㅋㅋㅋ 기다려봐 이년아 - 완성ㅋㅋㅋㅋ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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퍼오는 귀신썰) 톡방에서 가져온 이야기 모음.jp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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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차대전 당시 광기와 학살에 맞선 10명의 의인들
오스카 쉰들러 이 분야 최고 네임드. 흔히 선한 인간의 아이콘으로 여겨지나 실상은 부패한 기업인이자 외도를 일삼고 나치독일을 위해 간첩질까지 했던 기회주의자였다. 사실 나치독일은 협조적인 기업인, 쉰들러에게 강제노역 자원으로 유대인을 제공했던 것이다. 그러나 본래 공짜 노동자로 유대인을 이용해먹으려던 쉰들러는 점차 유대인을 보호해주기 시작하더니, 나중엔 아예 유대인들을 집단으로 빼돌려 학살로부터 구했다. 이 과정에서 그는 게슈타포에게 대량의 뇌물을 먹였고, 유대인을 살릴 음식과 물자를 암시장을 통해 몇 배나 비싼 값에 사야했으며 전쟁 말엽에는 자신의 거의 모든 재산을 유대인 보호에 소모하기에 이르렀다. 결국 그는 전쟁 이후 사업 실패까지 겹쳐 파산, 설상가상으로 심장병에 걸린다. 이때 그가 살려주었던 1200명의 유대인들이 쉰들러의 생활비와 병원비를 댔으며 오스카 쉰들러는 1974년 사망 후 이스라엘 예루살렘에 묻혔다. 현재까지 이스라엘에 묻힌 유일한 나치 당원 출신이다. 소사 멘데스 2차대전 당시 프랑스에 주재하고 있던 포르투갈의 외교관. 포르투갈은 중립을 표방하면서도 유럽최강이 되어가던 독일의 환심을 사고자 했고 독일의 침공을 피해 오는 난민들에게 비자를 내주지 말 것을 명령했다. 그러나 독일이 프랑스를 침공하자 프랑스 내 유대인, 집시, 반파시즘 지지자 등은 여전히 중립국인 포르투갈로 도주하고자 했다. 이에 본국의 명령인지, 양심인지 고민하던 멘데스는 결국 양심의 손을 들기로 결정. 72시간동안 밤을 새워 미친듯이 비자를 찍어냈고 그 비자를 받아 포르투갈로 도주에 성공, 목숨을 구한 이들이 3만명에 이르렀다. 이후 본국으로 돌아간 멘데스는 책임을 지고 파면조치되었고 명예는 사라지고, 돈도 없는 궁핍한 여생을 살다가 1954년에 죽었다. 그의 명예는 1988년이 되어서야 포르투갈 정부에 의해 회복된다. 하인트 지크프리트 하이드리히(우측) 사진의 두 소년은 우애가 깊었던 하이드리히 형제로, 모두 독일의 군인이었다. 형인 라인하르트 하이드리히는 무뚝뚝한 성격이었으나 동생과 조카들에게는 한없이 자상했다고 한다. 그러나 라인하르트는 전쟁 중 체코 망명정부와 영국정부에게 암살당했고 형의 유품을 정리하던 동생 지그프리트는 형이 무슨 일을 하고 있었는지 알게된다. 사실 라인하르트는 게슈타포를 만들어 민간인 사찰 및 학살을 일삼고 힘러와 함께 홀로코스트를 주동한 인물로, 그야말로 인간 백정이었던 것이다. 이를 깨닫고 엄청난 충격을 받은 지그프리트는 죄책감에 시달렸고 형의 죄를 속죄하고자 유대인 구출을 시작한다. 그는 유대인둘의 신분증을 위조해 탈출시키거나 수용소에서 빼돌려 중립국에 풀어줬다. 그러나 2년째 이 작업을 하던 1944년, 지그프리트는 게슈타포가 자신을 수사하고 있다는 정보를 입수하게 된다. 그리고 체포와 대한 두려움과, 고문으로 유대인들의 정보를 털어놓게 될 것을 우려해 그는 권총으로 자살하는 길을 택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종전 후 밝혀진 바에 따르면 게슈타포의 수사는 단지 사소한 문제로 인한 것이었을 뿐 지그프리트가 유대인을 돕고 있다는 사실은 알지 못했다고 한다. 라울 발렌베리 스웨덴의 외교관. 1944년, 히틀러는 나치독일과 동맹은 맺었으나 비협조적이었던 헝가리 정권을 갈아치웠고 이에 헝가리의 유대인들이 그대로 학살 위기에 내몰렸다. 발렌베리는 이때 스웨덴 대사관의 이름으로 2만명의 유대인들에게 가짜 서류와 비자를 발급했고 사비까지 털어가며 1만 3천 명의 유대인들에게 은신처를 마련, 더 나아가서는 독일군을 협박해 7만명의 유대인의 목숨을 추가로 구했다. 이는 발렌베리의 가문이 유럽 제일의 재벌 가문이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나치독일은 발렌베리를 암살하려고 했으나 실패했고 헝가리는 소련에게 점령되면서 독일군은 퇴각하게 된다. 하지만 1945년, 유대인 문제를 논의하고자 소련군을 찾아간 발렌베리는 실종됐고 현재까지도 명확한 그의 행방을 알 수 없다. 가장 유력한 설은 그를 스파이 취급한 소련에게 끌려가 감옥에 갇혔다가 1947년에 처형당했다는 설로, 스웨덴 정부도 이 설을 정설로 받아들이고 있다. 욘 라베 중일 전쟁 당시 독일의 재벌 기업 지멘스의 중국 담당 간부. 그는 나치당에 가입한 나치 당원이었다. 하지만 당시는 나치의 본격적인 전쟁 및 확장 이전이었고, 더군다나 독일 본토를 떠나 회사의 해외지부 생활 30년 째였던 욘 라베에게 히틀러는 힘들었던 조국의 경제를 살리고 1차대전 패전의 상처를 딛고 일어선 지도자였으리라 추측된다. 중일전쟁 당시 일본군이 난징을 점령하고 무차별 학살을 시작하자 욘 라베는 자신이 평생동안 모은 재산을 모조리 털어 안전지대를 구축했다. 그러나 이 안전지대는 어떤 울타리도 없이 그냥 도로가 경계였고 욘 라베와 그를 도운 외국인들은 온몸으로 일본군의 안전지대 진입을 막아야 했다. 이조차도 욘 라베가 일본의 동맹국인 독일시민이자 나치당원이었기에 가능했다. 결국 안전지대까지 위태로워지자 그는 히틀러에게 편지를 써 학살을 막아달라고 호소했다. 독일은 중일전쟁 이전까지는 중국과 우호적이었으며, 적어도 그에게만큼은 히틀러는 합리적인 지도자로 인식됐기 때문이다. 동맹국 지도자의 압력이면 이 미친 학살을 막을 수 있을 거라는데 마지막 희망을 걸었으나 독일 본국은 그의 편지를 당연히 묵살했다. 종국에는 일부 일본군이 안전지대까지 뚫고 들어와 학살과 강간을 일삼았지만 결국 욘 라베는 20~30만이 죽은 난징 학살의 현장에서 20만에 달하는 목숨을 구했다. 안타깝게도 그는 귀국 후 동맹국 군사작전 방해를 이유로 게슈타포에 체포되었고 종전 후에는 나치 당원이었다는 이유로 연합국에 체포, 난징에서의 일과 재판으로 전재산을 날렸다. 욘 라베가 가족 부양마저도 어려운 처지에 몰렸다는 소식을 들은 난징 시민들은 2차대전 때 도시가 초토화되고 이어진 국공내전으로 재건도 못하던 1948년, 돈과 물자를 긁어모아 욘 라베에게 전달했지만 당시 중국 경제가 너무도 어려워 큰 지원은 못됐다. 결국 1950년, 욘 라베는 여전히 가난한 생활 속에서 사망하였다. 1997년 그의 묘지는 난징으로 이장되었고, 현재 난징에는 그가 살던 집이 기념관으로 남아있다. 허펑산 오스트라아에 주재하고 있던 중화민국의 외교관. 1938년, 독일이 오스트리아를 합병하면서 유대인들의 목숨이 위험해지자 그들을 구했다. 당시 오스트리아은 내륙국이었으므로 유대인들은 탈출을 위해 반드시 다른 나라를 경유해야 했는데, 어떤 나라도 그들에게 비자를 내주지 않았다. 오스트리아 내 32개 대사관이 모조리 유대인에 대한 비자 발급을 금지하고 있을 무렵 허펑산은 한 가지 아이디어를 떠올린다. 이 당시 중국 상하이는 국제 조계지라 비자 발급에 어떠한 조건도 필요가 없었다. 이를 간파한 허펑산은 오스트리아 내 유대인들이 상하이를 거칠 수 있는 서류들을 찍어내기 시작한다. 나치 독일은 즉시 중화민국 영사관 건물을 박탈, 허펑산을 탄압하려 했으나 그는 근처 임대아파트에 숨어서 계속해서 서류를 발행했다. 결국 독일과의 관계 악화를 우려한 중화민국이 그를 강제 송환하기까지 그는 4천 명의 유대인들이 상하이를 거처 호주나 홍콩 등지로 도망칠 수 있도록 하였다. 본국으로 송환 당한 허펑산은 크게 질책 당했지만 이후 중국과 전쟁 중이던 일본이 미국에 선전포고 하고, 독일도 미국에 선전포고 하면서 어찌됐건 적을 엿먹인 셈이라 계속해서 외교관으로 활동할 수 있었다. 그는 중화민국이 대만으로 밀려난 이후에도 외교관으로 일했고 1997년 샌프란시스코에서 천수를 누리고 죽었다. 조르조 페를라스카 이 이탈리아인은 인생 자체가 다이나믹했다. 젊은 시절 뼈 속까지 파시스트였던 그는 무솔리니를 맹신하며 따랐다. 심지어 외국, 스페인의 내전에까지 파시스트로 참전했으며 거기서도 미친놈처럼 싸웠다. 얼마나 광신적이었는지 후일 스페인의 독재자가 되는 프랑코를 직접 만나 "귀하는 이태리인이지만, 위급한 일이 생기면 스페인 사람으로 대우하겠다."는 서류를 받을 정도였다. 스페인 내전에서 귀국한 이후에는 또 2차대전에 참전, 헝가리에서 이탈리아 군으로 복무했다. 그러나 1943년, 이탈리아가 항복하면서 그의 인생은 급변하기 시작한다. 무솔리니는 거꾸로 메달려 처형당했고, 헝가리는 연합군에 항복한 이탈리아의 군인들을 구금했다. 이에 페를라스카는 탈옥을 감행, 즉시 스페인 대사관으로 뛰어갔고 위에서 언급된, 프랑코에게 받은 서류를 내밀었다. 간신히 목숨을 구한 그에게 스페인 대사는 함께 유대인을 구출하자고 제안했고 학살에는 반대하는 파시스트였던 페를라스카가 이를 승낙한다. 그는 스페인 사람으로 위장, 곳곳에서 유대인을 빼돌린 후 돌봐줬고 심지어 아이히만이 보는 앞에서 유대인을 빼돌린 적도 있다고 전해진다. 라울 발렌베리와도 협력했던 그는 소련이 헝가리를 해방시키자 이탈리아로 돌아갔다. 그는 40년 간 지인, 친구, 가족 등 그 누구에게도 자신이 한 일을 말하지 않았다. 1987년이 되어서야 은혜를 갚고자 그를 수소문하던 유대인들에 의해 행적이 알려졌고 이탈리아, 스페인, 헝가리, 이스라엘 등으로부터 훈장을 받으며 세계의 영웅이 됐다. 이후 1992년 82세의 나이로 편안하게 눈을 감았다. 알베르트 괴링 나치독일의 2인자, 헤르만 괴링의 친동생이다. 이 형제는 오늘날에도 대표적인 역사의 아이러니로 꼽힌다. 형은 나치당 창설 초반부터 참여, 나치독일의 기틀을 만들고 이끈 2인자였으나 동생은 처음부터 나치의 폭력성을 혐오하는 반나치주의자였다. 그는 2차대전 이전부터 반나치 운동을 하고 반나치 인사들을 국외로 빼돌렸다. 2차대전 발발 이후엔 형의 배경을 이용, 나치독일의 군수공장을 맡게 되었는데 그는 이 공장들을 이용해 유대인들을 노동자로 쓴다는 명목으로 빼돌렸다. 심지어 유대인들의 파업을 독려, 생산도 제대로 안했으며 체코의 레지스탕스들을 지원하고 소련군 포로들도 수용소에서 빼내 중립국에 풀어줬다. 너무 대놓고 반나치였던만큼 몇 번씩이나 체포되었지만 그때마다 형의 이름을 팔아 풀려나거나, 심지어 형인 헤르만 괴링이 직접 구해주기도 했다. 헤르만 괴링은 알게 모르게 동생의 이러한 행동을 도우며 동생을 보호했다. 전후 형이 전범으로 체포되자 이번엔 자신이 형을 구하고자 형이 자신을 도왔음을 근거로 필사적으로 구명했지만 결국 헤르만 괴링은 사형을 선고, 면회에서 만난 동생에게 "가족을 부탁한다"는 말을 남기고 자살했다. 이때 알베르트 괴링은 굉장히 슬퍼했다고 한다. 전후 '괴링'이라는 이름이 혐오의 대상이 되어 힘들고 가난하게 살았음에도 그는 결코 자신의 이름을 개명하지 않았다. 홀몸임에도(혼외 자식이 있었지만 41년 전사) 결혼하지 않고 형의 가족을 돌봐주었다. 또 그는 자신이 전쟁 중 한 행동을 알려 유명세를 타려고 하지도 않았다. 1966년, 남편이 죽으면 아내에게 남편의 연금이 제공된다는 사실을 알게된 그는 힘들었던 자신 곁을 수년 간 지켜준 가정부와 혼인신고를 하고 일주일 뒤 병사했다. 빌헬름 호젠펠트 나치 독일의 군인. 초반에는 나치를 옹호하고 지지했으나 반유대주의, 반가톨릭 정책에 실망했다. 이어 폴란드에 부임한 그는 나치가 폴란드에서 저지르는 학살을 목도하며 경악했고 사상적 전향을 하게 된다. 그는 폴란드어를 배워 폴란드인 포로들과 소통했다. 또 직권으로 포로들이 가족과 만날 수 있도록 배려하고 인간답게 대우했다. 나아가 수감된 폴란드인들을 형기보다 빨리 내보냈으며 자신이 부임하는 곳마다 폴란드인들과 유대인들에게 위조 신분증을 주고 고용해 학살로부터 지켰다. 그는 나치독일 정부에 공식적으로 학살을 멈추라며 반항하기도 했다. 또 호젠펠트는 전쟁 막판 한 폴란드계 유대인을 살려주는데 그 사람이 영화 피아니스트로 각색되는 이야기의 주인공, 불라덱 슈필만이었다. 그러나 호젠펠트의 최후는 오늘 다루는 그 어떤 이들보다 잔혹했다. 그는 폴란드에 들어온 소련군에게 포로로 잡혀 사형을 선고받았다. 어찌보면 당연했다. 포로수용소장이었으며, 독일의 포로수용소에선 온갖 범죄들이 행해졌으니까. 그가 구해준 유대인, 폴란드인들이 떼지어 호젠펠트는 그런 사람이 아니라고 탄원했으나 사형을 25년 형으로 감형받는데 그쳤고, 소련은 그를 가두고 고문했다. 너무 심한 고문에 뇌졸증을 여러 번 겪던 그는 종국에는 지능도 7세 수준으로 퇴화, 자신이 왜 고문받는지도 모르는 채로 사망했다고 한다. 그렇게 잊혀진 호젠펠트는 1990년대가 되어서야 슈필만에 의해 재조명됐고 10년에 걸친 조사 끝에 아무런 죄가 없는 것으로 판명, 2009년 훈장이 추서되고 명예가 회복됐다. 니콜라스 윈턴 2차대전 당시 영국의 은행원이었다. 그는 휴가로 스위스에 갔다가 친구가 보여준 나치독일의 체코의 수용소를 보고 충격을 받았다. 이후 자신도 뭔가를 해야겠다고 마음 먹고 친구들과 계획을 논의하기 시작한다. 당시 영국을 비롯한 서방에서는 외국의 유대인 아이들을 입양해 독일로부터 구하는 인도적 운동이 한창이었다. 윈턴은 이를 이용해 체코에서 유대인 아이들을 빼내 영국에 입양보낸다는 계획을 세웠다. 그는 재산을 털어 경비를 마련했고, 나치 장교들에게 뇌물을 먹였다. 결국 그는 여러 번의 위기 끝에 669명의 아이들을 입양보내는데 성공한다. 하지만 더 이상은 위태로워 마지막으로 250명을 입양보내기로 하고 모든 절차를 밟은 뒤 영국으로 돌아왔으나 그에게 들려온 소식은 기차를 나치독일이 강탈, 250명의 아이들이 실종당했다는 소식이었다. 전쟁 후 밝혀진 바에 따르면 이 250명 중 전후 생존한 유대인은 2명 뿐이었다. 이들을 구하지 못한데 엄청난 죄책감에 짖눌린 윈턴은 자신이 한 일들을 발설하지 않았다. 1988년이 되어서야 그의 아내가 창고에서 아이들의 목록을 발견하였고 윈턴은 이것도 태워버리려고 했지만 아내가 설득해 그의 선행이 비로소 알려지게 되었다. 그가 구한 669명의 아이들은 6천명의 가족으로 불어나있었고 감동적인 재회 후 윈턴은 기사작위를 수여받았으며 106세까지 천수를 누렸다. 그는 가족이 지켜보는 가운데 잠을 자다가 편안히 숨을 거두었다. 참 잘된 일이지만, 호젠펠트와 비교하면 뒷맛이 좀 씁쓸하기도 하다. 싱글벙글지구촌갤러리 ㅇㅇ님 펌
피루스의 승리
BC 3세기, 그리스 북부에 피루스라는 왕이 있었습니다. 그는 전쟁 전문가로 주변에 많은 나라를 정복한 풍부한 경험과 강한 군사력을 가지고 있어 로마에도 전쟁을 선포했습니다. 하지만, 피루스의 신하인 키네아스는 로마와의 전쟁이 국력을 크게 소모할 것으로 생각해 왕을 찾아가 말했습니다. “폐하, 로마와 전쟁을 해서 이긴 다음에는 무엇을 하실 것입니까?” “우리가 로마 전체를 지배하게 된다.” 그리고 왕은 시칠리아, 아프리카 북부 카르타고에 이어 마케도니아 전역을 지배할 수 있게 된다며 흥분하며 말했습니다. 대답을 들은 뒤 키네아스는 ‘그다음에는?’이라는 질문을 던지자 왕은 말했습니다. “키네아스, 주변의 나라들을 모두 정복하면 우린 정말로 편히 앉아서 인생을 즐길 수 있을 거라네.” 모든 정복에 성공한 뒤에야 편히 쉬겠다는 왕의 대답에 키네아스는 답했습니다. “폐하, 원하는 것이 그것이라면 전쟁할 필요가 없습니다. 우린 지금도 그렇게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피루스 왕은 키네아스의 말을 듣지 않고 2만 5,000명의 군인과 20마리의 코끼리를 이끌고 로마를 침공했습니다. 격렬한 전쟁이 끝난 후, 피루스 왕은 승리를 얻었지만, 코끼리는 다 죽고 군인들도 4분의 3이나 죽어 남은 병력이 얼마 되지 않았습니다. 패배나 진배없는 승리를 표현할 때 ‘피루스의 승리’라고 합니다. 무모하게 계속되는 전쟁은 아무리 노력하고 수고해도 결국 돌아오는 것은 패배뿐입니다. 매우 소중한 것으로 생각했던 승리의 전유물이 사실은 아무 쓸모없는 것으로 판명 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인생에서 무엇이 헛되고 참된 것인지 깨닫고 분별하는 지혜가 필요합니다. # 오늘의 명언 물을 빤히 바라보는 것만으로는 바다를 건널 수 없다. 스스로 헛된 바람에 빠지지 않도록 하라. – 존 포웰 – =Naver "따뜻한 하루"에서 이식해옴..... #지혜#무모함#인생#삶#명언#영감을주는이야기#교훈#따뜻한하루
당신이 몰랐던 영화 <트루먼 쇼> 속 디테일들.jpg
트루먼이 (역할상) 엄마 집을 방문했을 때 있던 앨범 속에 어렸을 적 트루먼 사진 위에 쓰여있는 문구 'My little clown(나의 작은 광대)' 우주복 입은 우주비행사로도 볼 수 있지만, 안테나 두 개가 달린 텔레비전으로도 볼 수 있음 책상 위에 놓여있던 비타민D, 결국 트루먼이 사는 세상은 진짜가 아닌 햇빛이 없는 촬영장(돔)이라는 말 트루먼의 행동이 수상해지기 시작하자, 감시하는 사람이 LA 타임스 구직 광고를 보기 시작함 트루먼이 메릴과 씨헤븐 아일랜드를 떠나려고 할 때 다리 옆 표지판에 적혀있는 "Are you sure it's a good idea?(이게 좋은 생각이라고 생각합니까?) 트루먼이 하는 대사 "Good morning, and in case I don't see ya: Good afternoon, good evening, and good night! (좋은 아침입니다. 그리고 만약을 위해 미리 인사할게요. 좋은 하루 보내시고 좋은 밤 되세요.)" 는 다른 전 세계에서 이 방송을 보고 있을 수도 있음을 내포 트루먼이 해변가에 앉아있을 때 벼락이 치는데 동시에 달도 빛나는 것을 볼 수 있음 우리가 보는 평범한 달은 아니라는 것 신문지 발행번호를 보면 Vol.XXIX(29), No.10,765(29년 6개월) 즉, 트루먼이 태어나면서 같이 시작된 신문이라는 뜻 트루먼이 여행사 업체에 방문했을 때 화장하느라 늦게 온 이 사람 왜냐하면 평소에는 출근할 일이 없었기 때문에 얼마나 당황+바쁘게 화장하고 왔으면 목에 묻지말라고 대놓은 것도 빼는 걸 까먹음 참고로 뒤에 브로셔가 꽂혀있는 곳 제일 위에   있는 검은 동그라미는 카메라 맨홀 뚜껑 위에 있는 벽, 이 말인즉슨 이 벽은 쇼를 위해 지어졌으며 아무런 실용성이 없는 것 추가로 닭 그림 포스터 위의 동그란 검은색 원형도 역시 카메라 생각 이상으로 영화 곳곳에서 발견하기 쉬운 카메라의 흔적 이런 트루먼을 구하고자 하는 실비아가 TV 인터뷰를 하려고 전화한 곳은 '헤이그' 네덜란드의 헤이그에는 반인도적 범죄에 대한 재판을 다루는 국제사법재판소의 법원이 있음 트루먼 쇼가 제작되는 씨헤븐 스튜디오센터의 게이트에 적혀있는 문구는. 'UNUS PRO OMNIBUS, OMNES PRO UNO' 영어로 하면 One for all, all for one(하나는 전체를 위해, 전체는 하나를 위해) 트루먼이 사라지고 나서 나중에 찾기 어려워했던 이유, 예전에 역할상 아빠로부터 받았던 카메라가 달린 반지를 나중에 재회하면서 다시 그 아빠에게 돌려줬기 때문 자신의 존재에 대해 자각한 트루먼이 스튜디오를 탈출하기 위해 탔던 보트의 이름은 산타마리아 콜럼버스가 탔던 배와 같은 이름으로 "새로운 세상을 발견"하기 위함
콜로세움과 동물들
다들 알다시피 콜로세움 시합에는 수많은 동물들이 동원되기도 했는데 다들 영화속에서 검투사 한마리 던져두고 사자 네다섯 풀어서 싸우는 이미지를 떠올릴 것이다.. 하지만 실제는 그 규모가 어마어마 했던 것..ㄷㄷㄷ 콜로세움이 완공되고 벌어진 첫 오픈 행사에서는 9천마리 이상의 동물들이 동원되었는데, 이 때 동원된 동물들이 모두 죽을때까지 대학살 게임이 벌어졌고, 이 시합 이후로 나일강 근처의 하마들이 씨가 말랐다고 한다. 당시 로마 근처에는 바바리 사자 라는 사자들이 살고 있었는데, 콜로세움에서 사용할 동물들을 찾던 중 어? 근처에 사자들이 살고있네? 하면서 눈에 들어온 이후 대부분이 포획되었고, 콜로세움에 동원되며 개체수가 급감. 이후 극소수가 숨어살다가 1900년대에 멸종하고 말았다. 최근에는 모로코의 술탄들이 과거에 선물받아 동물원에서 존속시키고 있던 개체들이 유전적으로 바바리 사자의 후계로 인정받아 20마리 정도가 생존해있다고 보는 추세라고 한다... 그도 그럴것이 BC 55년 폼페이 제독이 벌인 시합에서는 무려 사자 600마리 VS 코끼리 18마리 드림 매치가 벌어지기도 했기 때문이다... 한니발의 코끼리로도 유명한 북아프리카 코끼리도 콜로세움의 주요 피해자 중 하나이다.. 그나마 소수가 수십년간 버텨왔던 바바리 사자와는 달리 얘네는 진짜 콜로세움 때문에 멸종했다... 동물 싸움 이외에도 당연히 짐승 VS 인간 경기에도 수십마리가 동원되었고 로마시대 검투사들은 코끼리들이랑 창과 방패를 들고 싸워야 했다... 코뿔소도 원정까지 가서 수십 수백마리를 잡아와 동원하였으며 아프리카까지 원정가서 기린도 수백마리를 공수해와 경기를 벌였다 타조들도 한 경기에 수백마리씩 투입시켰고 ㄷㄷㄷ 해전에는 악어들이 수십마리씩 동원되기도 했다. 경기장 중앙에 물과 성곽을 세워 해전 이벤트가 벌어지기라도 하는 날에는 검투사들은 악어들 때문에 물에 빠지지 않기 위해 혼신을 다했다고...ㄷㄷ 그것조차 질리면 인간들끼리의 전투 시합을 벌이다가 보유하고 있던 모든 굶주린 맹수들을 풀어 난전을 벌이게 하기도 했다.. 이처럼 경기장의 동물 소모 속도가 무시무시했기 때문에 더이상 로마 근처에서 쓸 만 한 야생동물들을 찾아볼 수가 없게 되었고 이 때문에 해외에서 잡아다 공수하기 시작했으며 맹수들을 직접 사육하여 경기에 쓰기 위해 사육장들이 많이 건설되었고, 경기가 벌어지기까지 맹수들을 관리하는 것에 비용이 많이 들어갔기 때문에 맹수들을 활용한 동물 쇼가 이 때부터 성행하기 시작했다.... 기록에 따르면 북극곰까지 콜로세움 전투에 끌려왔다는 내용이 있다고 한다... ㄷㄷㄷ 인간이 미안하다!!ㅠㅠㅠㅠㅠ 싱글벙글지구촌갤러리 펌
이사직 10년차 직원이 썼다는 엄청난필력👍
"1~2달 전" 1.세탁기는 이사 전 물 빼고, 세제가 자동 투입되는 모델이라면 미리 세제통 비워두세요 물은 비우는데 세제는 은근 통안에 남겨져 있는 경우가 있어요 2.컴퓨터만큼은 직접 따로 챙겨서 미리 따로 챙겨둘 것을 권장합니다 3.안입는 옷 잡화 등은 아름다운가게나 헌옷 수거 하는 곳 많으니 신청하세요 보통 사설에서는 30키로 넘으면 키로당 몇백원씩 쳐줍니다(코로나 수출규제로 단가가 반토막이상 떨어졌다고 하네요ㅠ) 그 이하의 경우에는 무료 수거만 된다고 합니다 그래도 어차피 버릴거였으니 이때 짐 왕창 줄이세요 고민 3초 이상 하는거 다 버릴겁니다.. 그리고 기부를 하더라도 영수증발급하면 소득공제도 가능하니까 그냥 수거함에 버리지 마세요 아름다운가게 http://www.beautifulstore.org "포장이사 선정" 01.추가요금 발생여부 = 사다리차 같은 필수 요소 빼고 식대비,수고비등 보너스?비용이 추가로 발생 되는지 확인하기 이름 없이 사설 냄새가 강한 경우..따로 요구하기도 하니 처음부터 잘 알아보시는게 중요합니다 02.기호에 맞는 포장자재 사용 = 침구와 가전 집기류를 구분하여 포장하는게 전문 업체에요 무조건 뽁뽁이만 싸는 곳은 거릅니다 뽁뽁이 조차 잘 없는 곳도 생각 보다 많아요 다 거름..비싼 돈 주고 산 가구들을 아끼신다면 꼭 체크하세요 03.A/S 가능여부 = 이사 때 이삿짐 분실 및 파손 보험이 들어있는 곳으로 고르세요 04.믿을만한 곳의 포장이사 무료 견적신청 = 사실 추천해줘서 믿을 만한 곳 따윈 없습니다 어디까지나 운이라고 생각해요 주변 소개 해주거나 받아도 조금이라도 시원찮으면 소개 해준 사람과의 사이만 멀어지니 그냥 다 직접 알아보고 잘되면 내탓 안되도 내탓 하는게 제일 속편하고 이웃과 친구와 정답게 지내는 방법입니다 괜히 잘해주네 마네 저울질 하면 스트레스만 솟아 올라요 그렇다고 카페 같은 곳 올려봤자 전부 광고일거구요 다 경험 해보고 얻은 주절주절이에요..그래도 이것 또한 참고만 해주시면 가장 좋은 방법 같아요 아무튼.. 그래서 일단 견적 많이 뽑아보는게 최고입니다ㅎ 제가 금액 알아볼때 우선순위로 거치는 곳의 간략한 특징만 써둡니다 05.유일하게 여기만 사람과 연결되지 않고 웹상으로 금액 확인이 바로 가능합니다 이 메리트만으로 여기부터 찍습니다 www.24story.co.kr/service 06.기본 3곳 알려줘서 평균 비용 계산할때 편함 특히 동네서에서 동네로 갈때 피드백이 가장 빠름 www.day24.com/korean/wemtch 07.입주청소는 사실 정보가 많이 없네요 저도 최근3년간 두번 정도 해봐서 대략적 평균 비용은 평당 1만원인 것 같고 그 외 옵션을 끼냐마냐 인데 저는 기본만 거의 하는거 같아요 둘째 애기도 있어서 화학제품 쓰는지 유무와 첨단장비?를 쓰는지 정도만 확인하고 해요 가사도우미 어플 사용해서도 맡겨 봤는데..전문 장비 있는 곳이 100만배는 깨끗해요ㅎ그렇다고 비용이 많이 나냐 그렇지도 않았어요 물론 케바케이긴 하지만 장비빨? 이란게 있어서 그런지 차이가 많이 났었어요 그리고 가사도움 어플은 시간대비+인건비라 한번 열어서 보시면 금액 차이가 없겠구나 싶을 정도였어요 한..3~4분 고용해야 할걸 한곳에서 더 깨끗이 끝내는 느낌+@장비빨..찾기 어려운 분들 위해 참고용만 남겨요 www.cleanmania.kr/  08.요즘 새집으로 갈때 리모델링을 같이하는 추세더라구요. 요즘 인테리어도 중개 플랫폼이 있다보니 검증된 인테리어 업체들을 선별하여 연결 시켜주는데 시세파악,트랜트,하자 발생등을 사전에 예방할 수 있을거같아서 참고용으로 남겨요 www.tasared.com/zipdoc 09.묵혀둔 에어컨에 먼지가 있다면 보이지않는 먼지와 곰팡이 세균이 있을 수 있는데 최근에는 전문가들이 에어컨 분해 살균 청소를 싹 해주는게 있어서 개인적으로 괜찮은거같아요 www.miso.kr/ac "3~7일 전" 01.도시가스 가스관 막기와 설치하기 = 이사 후 일주일인가? 한달 안에 설치하면 무상으로 가능해요 전입신고 제시 후 무료로 가스관 개통 가능해요 이후엔 2~3만원 받는다고 했었어요 가스관 막을때 이제 남의 집이라 들어가려면 힘드니 이사 당일 막을 수 있게 미리 도시가스 전화해서 요청하시면 친절히 안내 받으실거에요 저는 당일도 오셔서 해주셨는데 하루 전에 신청 하면 된다고 안내 받았었어요 제일 좋은건 최소 3일 전엔 예약하고 이사 하루 전에 미리 봉인 하는게 가장 좋을거에요 봉인하면서 가스렌지를 챙겨야 하니까 신경 써주세요ㅎ "2~1일 전" 01.쓰레기 정리 = 어떻게 보면 이게 가장 중요한건데..마지막에 마지막까지 짐을 버리세요 버리는게 가장 힘들지만 버리고 나면 막상 쓸 일이 없어요 잘버리는 방법이 있다면 "언젠가 쓸 일 있을텐데?" 싶으면 그게 전부 버릴겁니다 과감하게 휴지통 비우기를 해보세요 요샌 미니멀리즘이 대세에요ㅎ 02.보석 돈 중요 서류 따로 챙기기 = 신분증,통장,고가품,금고,명품등은 잠금장치 있는 캐리어에 따로 보관해서 본인 차에 따로 보관하세요 금품 잊어버린 적이 있어서 내잘못이려니 하고 그 후부터는 이렇게 합니다 "이삿날" 01.이사가는 집 가구배치 이게 꿀팁입니다 이사시간 1~3시간 가량 단축됩니다 뭐냐하면 팀내에 대빵이 계실텐데 그분께 미리 집의 단면도를 a4용지로 뽑아서 각 가구의 위치를 펜으로 표시 또는 그려서 초반에 드리세요 작은 건 그렇다쳐도 커다란 부피 있는 메인 가구들만이라도 표기해 두세요 안그럼 분명히 갖다 대보고 아니면 위치 바꾸고 그러게 될거에요 사람의 욕심이 끝이 없는지라 고객 진상되는거 순식간이에요 아무리 손발 잘맞는 팀이라도 가구 이리저리 들고 옮기고 바꾸고 왔다 갔다하면...아시죠? 우리도 센스와 매너를 발휘해야해요 02.아파트라면 = 이사가는 집 관리 사무소에서 차량스티커 , 현관 출입,음식 쓰레기 카드와 비번 받기 03.이사가 끝났다면 첫번째로 짜장면....아니고ㅎ 도어락 비번변경 이거 중요하죠 실제로 안바꿨다가 전주인?이 들락날락했던 사례가 있었죠 범죄예방 첫걸음입니다 꼭 하시길! 04.이제 이삿짐들 확인 하셔서 파손,분실 확인하면 끝입니다~ "이사 후" 1.해당 거주지 가스 점검일, 분리수거일 확인은 필수이니 미리 확인해두세요 2.아이가 있다면 전학 순서 밟기 STEP 1. 주민센터에 전입신고를 한다 STEP 2. 전입신고시 초등학생 아이가 있다고 이야기를 하면 취학 통지서를 한장 준다 STEP 3. 배정받은 학교 통지서를 들고 학교 교무실로 간다 한달~2주전에 선생님께 상황 전달하면 경험이 있으시고 센스 있으시면 이것저것 다 알려주세요 경험상 어설프거나 잘 모르는 선생님도 계신데 그땐 그냥 인터넷 뒤져서 다 알아보고 준비해야돼요..첨에 그랬었네요; 날짜 때문에 변수가 많으니 미리미리 날짜 맞춰 발빠르게 움직이시는게 좋습니다 3.이삿날 가는 집의 아랫집이나 옆집에는 시끄러웠으니 작은 정성(케잌,과일,드링크제 음료 등등) 포스팃 메모와 함께 인사드리면 마음이 조금 덜 무겁습니다 이웃과 정답게 지내는 초석이 될 수도 있고 사람 사는 냄새나고 좋으니 해보는게 어떨까 싶네요 저는 과일 음료 많이 챙겨봤습니다 좋은게 좋은거라고 어쨌는 피해를 주고 있으니 참아주시는 분들께 감사의 마음으로 전합니다 "주소이동.폐가전.전입신고.가구배치" 1.우체국 주소이전하기(주거이전서비스) https://service.epost.go.kr/front.RetrieveAddressMoveInfo.postal 예전엔 우체국가서 하나하나 다 변경을 해야했지만요즘은 온라인으로 모든 주소를 한번에 옮길 수 있는 서비스가 있습니다. 이사 후 1~2일 이내에 해당홈페이지 들어가서 옮기시면 되는데 아주 쉽습니다. 2.금융주소 옮기기 https://www.ktmoving.com/ 금융감독원 한국신용정보에서 금융주소를 쉽게 옮길 수 있는 곳이 있었으나 8월에 종료됨으로 새로 생긴 금융주소 옮기는 곳으로 대체합니다 위 사이트 들어가서 한번에 은행사, 보험사, 카드사등등 한번에 일괄 변경 신청하시면 됩니다 (각 은행별로 금융주소 옮기는 서비스가 있으니 주거래 은행에도 확인해보시면 되겠습니다) 3.폐가전 무상방문수거 서비스 http://www.edtd.co.kr/ 큰 물건들은 미리 버려놓는게 편한데요 아시다시피 대형폐기물들은 관할 구청에서 스티커를 받아 해당 크기에따라 돈을 내고 배출해요 근데 여기신청하면 돈도 안들뿐더러 직접와서 박스에 포장까지 해서 갖고가주니 아주 편리합니다.쓸만한 물건은 빈곤층 서민들께 전달되고 고철은 재활용된다고 하네요. 4.가구위치 잡기 https://www.floorplanner.com 가상으로 쉽게 집도면을 그려 배치를 해볼 수 있는 사이트입니다 이사 전 가구위치를 어디에 둘지 동선을 미리 짜두세요 당일날 위치 못잡고 어리벙벙하면 이사 완료 후 더 번거로워 지는 상황이 발생 될 수 있어요. 5.이사갈지역에 가까운업체(한국품질재단인증ok) www.24system.co.kr/start 위에는 아무래도 신뢰성이 보장된 업체를 선정해주고 아래는 이사가는지역에 가까운 업체들을 소개해줍니다. 위는 지역별로 우수업체들 평균비용 알기쉽고, 지역마다 가능,불가능한 업체있다보니 아래에서는 이사갈지역에 평균비용을 알수있어서 참고하기 좋습니다. 6.전입신고 받아두기 http://www.minwon.go.kr 이사 후 14일 이내에 동 주민센터나 인터넷 민원24에 들어가셔서 반드시 신고해야합니다. 안할시 과태료부가이며 18일 이내에도 안하면 전주소지로 다시 돌아가야하는 상황이 발생할 수 있으니 꼭 체크하시길 바랍니다. 7.도어락 비밀번호 변경하기 이사가기 전에 디지털 도어락 비번은 변경해놓으셔야 해요.(다시 연락오는 일이 생길 수도있어요::) 무엇보다 안전이 최고니 조심하시고 조금이나마 도움이 되셨기를 출처:디*매니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