quandoquando
5,000+ Views

슬픈 한본어의 역사

놀라지 마세여 여러분 +_+
지금부터 보실 글은 리얼루 해방 3년 후 한국 사람들이 사용하던 언어를 기록한거라구 해여. 전 엄청 충격이었는데... 놀라서 나무위키 뒤져서 내용 좀 발췌해 왔으니까 같이 읽어보실래여? 그리구 몰랐던 내용들도 아래 캡처본으로 같이 첨부합니다!

-------------------

일제강점기라는 36년 세월이 지난 직후, 한국인의 언어생활에는 상당 부분 일본어가 흡수되어 있었다. 따라서 정말 자연스럽게 한본어가 흘러나오는 경우가 많았다.
위 내용은 1948년 엄흥섭이 거리에서 학생들이 나눈 대화 내용을 채록한 것이다. 72년 남짓 지났을 뿐인데 대부분의 현대 한국인 화자들은 알아듣는 것이 거의 불가능할 정도로 한국어가 '한본어화'된 것을 볼 수 있다. 번역하자면 다음과 같다.

말 한마디 서로 주고받을 때 보면 한국말, 일본말, 영어가 한데 섞여 뒤범벅이 되어 나온다. 그 심한 예시를 몇가지 참고하여 인용한다.
"얘, 정숙인 이번 일요일 결혼 한다는데 아주 괜찮은 옷감이 많더라"
"정숙이가 얼간이인데도 신랑이 OK했다지?"
"신랑이 반한 게 아니라 정숙이가 반했대"
"과연 새로운 뉴스인데"
이것은 필자가 최근에 어떤 여학생들이 가두에 서서 주고받았던 회화의 한마디를 사생한 것이다. 또 한가지 예시를 인용한다.
"어이 너 너 가케우동 한턱 내라"
"이 자식아 '해브 노(Have No)'다"
"나도, '졘기 녜트(деньги нет)'다"
"얘, 너 콘사이스 영일사전 헌책방에다 팔아서 단팥죽(ぜんざい) 사먹자!"
이것은 17, 8세의 중학생들이 하숙방에서 하는 대화의 한마디를 따온것이다.

해방 직후에 여고생 = 태나어났더니 이미 합병된지 20년. 민족 말살 통치 시기에 내선일체, 신민화 교육받고 살아옴. 일본인에 동화되도록 인식형성과 교육받음.

해방 직후에는 '나라가 망했는데 왜 어른들이 기뻐하지?' 라고 의아해 하는 학생도 많았고,
민족 최고 지성들 조차 태극기가 어떻게 생겼었는지 가물가물 해서 기억을 더듬어 가면서 일장기 위에 태극무늬를 덫그리고 건곤감리를 그렸다는 이야기가 있는거 보면 일제가 10년만 더 식민지배 했으면 큰일 났을듯

일본인들 중에도 내 고향은 충청도인데 왜 고향을 버리고 가야하나요? 라고 생각하던 일본인도 있던거보면 그 세대의 일본인 한국인 모두 혼란스러웠던 듯.



뭔가 너무 슬프네여. 태어났을 때 이미 일본땅이라 나라를 뺏기고 말고의 개념도 없어서 해방했는데도 '나라가 망했다'고 생각했던 우리 학생들 ㅠㅠ
2 Comments
Suggested
Recent
와 진짜 한번도 생각해보지못했는데 고향이한국인 일본인들이나 일제시대태어난 한국인들이나.. 지금도 살아계시면 거의 백살.. 무튼 혼돈의세대겟군
글 읽다 울컥했네여 혼란그런 글만 봐도 정체성 찾기 어려웠을것 같아요
Cards you may also be interested in
구글 입사 제의 받은 디시인의 포트폴리오.jpg
워 이정도는 되야 구글에 입사하는건가 ㄷㄷㄷ 일단 창의력이 어마어마한데 예술을 자기만의 걸로 해석하고 표현하는게 대단함 일에 대한 집념까지 갖추셨네 + 원글쓴이가 말하는 포폴팁 저는 이렇게 쓸데없는 짓을 많이 하는 편인데요,  이런 쓸데없는 짓이 저를 부지런하게 만드는것 같아요.  저는 개인적으로 일 외엔 따른 취미생활이 없어요. 게임도 안하고 티비도 안봅니다.  그냥 일하는게 제일 재미있는것 같아요.  그래서 이런 쓸데없는 개인작업을 많이 하는 편인데,  이런 돈도 안되고, 또 실제 프로젝트에 사용하기에는 힘든 기술과, 디자인이지만,  이런걸 만들어봄으로써 배우는게 참 많은것 같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배웠던 것들이 나를 성장 시키고 실제 프로젝트에도 유용하게 쓰였던 적이 많았어요.  그리고 이 작업을 보고 구글에서 입사제의가 와서 지금까지 구글에서 일을 하고 있는데요.  만약에 제가 이런 개인 작업을 하지 않고 회사 일만 했었다면,  세상 누구도 내가 어떤 디자이너인지, 뭐를 잘하는지 몰랐을 겁니다.  나는 어떤 일을 하고싶어 라고 말로만 하기보단,  내가 하고싶은 디자인을 개인작업으로라도 포트폴리오를 계속 쌓는게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그렇게 쌓은 포트폴리오는 나라는 디자이너를 정의하는데 아주 중요한 역활을 합니다 :) 움직이는 모습과 더 자세한 내용은 영상에서 보실 수 있습니다 :)
고기 풍미를 확 끌어올려주는 세계 스테이크 시즈닝 레시피 10
스페니쉬 • 천일염 2 테이블 스푼  • 구운 파프리카 1 테이블 스푼  • 오렌지 2개 즙과 제스트  • 파슬리 다진 것 2 테이블 스푼 브라질리안 • 마늘 6쪽  • 다진 고추 1개  • 엑스트라 버진 올리브유 2 테이블 스푼  • 천일염 2 테이블 스푼  • 후추 1 테이블 스푼 소이소스 마리네이드 • 간장 소스 1/4 컵  • 설탕 3 테이블 스푼  • 참기름 2 테이블 스푼  • 양파 반 개  • 마늘 1 테이블 스푼  • 파 1줄기  • 흑 후추 1/4 테이블 스푼  • 깨소금 1 테이블 스푼 말레이시안 • 새우 페이스트 1 테이블 스푼  • 생강(3cm 길이) 간 것  • 강황(1.5cm 길이) 간 것  • 라임(2개) 제스트  • 코코넛 설탕 1/2 테이블 스푼  • 레몬그라스 줄기 다진 것  • 마늘 2쪽  • 말린 고추 1개 노던 어메리칸 • 칠리 파우드 2 테이블 스푼  • 하리사 페이스트(harissa paste) 1 테이블 스푼  • 소금 2 테이블 스푼  • 올리브 오일 1 테이블 스푼  몬트리올 • 파프리카 가루 2 테이블 스푼  • 후추 2테이블 스푼 • 꽃소금 2테이블 스푼 • 다진 마늘 1테이블 스푼 • 다진 양파 1테이블 스푼 • 다진 고수 1 테이블 스푼  • 딜(dill) 1 테이블 스푼  • 다진 고추 1 테이블 스푼 텍사스 멕시칸 • 칠리 파우더 1 컵  • 구운 파프리카 가루 1 컵  • 오레가노 1 테이블 스푼  • 머스타드 가루 3 테이블 스푼  • 말린 고수 3 테이블 스푼  • 커민(중동 향신료) 1 테이블 스푼  • 소금 1 테이블 스푼  • 후추 1 테이블 스푼  • 라임(2개) 제스트 정통 멕시칸 • 소금 1 테이블 스푼  • 후추 간 것 1 테이블 스푼  • 커민(중동 향신료) 2 테이블 스푼  • 칠리 파우더 2 테이블 스푼  • 말린 안초(ancho) 고추 간 것 2 테이블 스푼  • 말린 오레가노 2 테이블 스푼  • 마늘 2쪽  • 라임 1개  • 고수 1/4 컵4  • 흑맥주 4 테이블 스푼  잉글리쉬 펍 • 수프용 소고기 육수  • 올리브오일 56g  • 천일염 1 테이블 스푼  • 마늘 1쪽  • 샬롯1개  사천식 쿵파오 • 해선장 소스 2 테이블 스푼  • 스리라차 소스 1.5 테이블 스푼  • 참기름 1 티스푼  • 마늘 2쪽  • 다진 부추  • 식초 56g  어떤 고기든 훠얼씬 존맛탱으로 만들어 주는 레시피라고 합니다! 빙글러들 이번 주말엔 홈스테이크 도저언~~!!?
괴담) 6.25때 할아버지가 겪으신 이야기
6.25 한창 전쟁중일때 할아버지는 피난가는 배를 같이 못타서 잠깐 갈라지고 할아버지 혼자 어린 외삼촌 데리고 남쪽까지 한참 내려가서 혼자 사는 친척할머니 집에서 머무르고 있었다고함 근데 그 마을 뒷산에 나이 지긋한 무당할머니가 살고계셨는데 친척할머니랑 자매같은 관계기도하고 그 무당할머니가 할아버지한테 워낙 잘해주셔서 할아버지가 밥도 자주 가져다드리고 먹을거 생기면 제일 먼저 주고 그래서 무당할머니가 할아버지랑 외삼촌을 엄청 예뻐했다고함 그렇게 한 한달보름 정도 얹혀사는데 어느날 무당할머니가 한밤중에 불러내서 마을 강 어귀에 데려가더니 강 급류 끝나는 쪽을 가리켜면서 저기를 매일 밤 찾아가서 달이 떠도 달이 안비치면 그 다음날 해질녘에 저기에 가족들 다 데리고 그 물에 들어가서 해질때까지 절대 나오지 말라고 말한 다음에 할아버지를 집에 돌려보내셨는데 그 다음날부터 무당할머니가 흔적도없이 사라져 버리셨다고 함 집안 가재도구며 뭐며 싹 다 그대로고 부뚜막에 시커멓게 탄 밥들 그대로 있었어서 이건 그냥 어디간거나 도망간게 아니고 그냥 그대로 사라져 버렸다고 하는게 맞을정도로 기묘하게 사라지셨다고함 할아버지는 어쨌거나 무당할머니가 알려준말이 맘에 걸려서 매일 그 강에 갔는데도 달은 비쳐있으니까 그냥 가지말까 하다가 보름쯤 뒤에 보름달이 뜨는 날에 뭔가 느낌이 이상해서 그 강어귀로 가봤는데 과연 달빛 때문에 주변이 다 보일 정도로 보름 달이 뜬 날이었는데 그 강어귀만 달이 안비치더라고함 할아버지가 그거보고 불안해가지고 가야하나마나 고민하다가 해질녘 다 되어서 친척할머니한테 말했는데 그거 듣고 할머니가 깜짝 놀라시더니 무당할머니네로 얼른 가보자해서 두분이 무당할머니네 집으로 내달렸다고함 둘이 가보니까 어제까지만해도 방치되있던 집이 싹 다 정리되어 있고 내부는 사람 살만큼 멀쩡한데 겉은 폐가처럼 헐어있었다고함 그리고 마루에 피 묻은 옷 세벌만 곱게 개어져 있었는데 그거보고 할머니랑 할아버지랑 징조가 심상치않다고 느껴서 그 옷 입고 외삼촌이랑 셋이 피묻은옷 입고 홀린듯 강 어귀로 뛰어가셨다고 함 그리고 뛰어가다가 불현듯 뒤를 돌아보니까 저 멀리 마을쪽에서 불길하고 타는 연기가 보이더라고함 그렇게 세명이서 어찌저찌 강어귀 도착하니까 시신들 피투성이로 둥둥 떠서 급류에 떠밀려와서 걸쳐진채로 엮여있는거 그거보고 세명이서 기지를 발휘해서 강에 뛰어들어 시신인척하고 있는데 한 10분쯤 뒤에 못알아들을 말씨 하는 사람 몇명이 뛰어와서 시신들 뒤척거려보다가 갔다고함 그리고 나서 일어나서 도망가려고하는데 불현듯 무당할머니가 해질때까지 기다리라고 한말이 생각나서 일단 해질때까지 기다렸다고함 그러고 해가 지니까 아무소리도 안나던 강 윗쪽에서 급히 어디론가 뛰는 군화들 소리가 엄청많이 나더니 멀어지고 소리가 안들릴쯤 되니까 무당할머니가 강 윗쪽에서 부르시더라고함 그리고는 어디 도망갈 생각말고 자기 집에서 초승달이 다시 초승달 될 때까지 숨어 있으라고 말하고는 다시 그대로 어디론가 삭 사라지셨다고함 할아버지는 당연히 하라는대로 폐가로 도망가서 그 안에서 사는데 어쩌다가 주변에 북한군이 올라올때가 있긴 했는데 겉이 폐가니까 사람 안산다고 생각해서 그냥 쓱 보기만하고 해코지는 안했다고함 그렇게 한달쯤 살다보니까 다시 우리나라군이 마을까지 올라와서 원래 집으로 돌아갔는데 살아서 같이 돌아온 마을 사람들 얘기 들어보니까 마을에 같이 살던 사람중에 살아서 도망간 사람들은 도망가다가 걸려서 죽거나 도망가도 빨치산으로 오인받아서 고문받고 불구되고 그랬었다고함 뻘하게 나는 얘기 들으면서 무당 할머니는 어디까지 알고계셨을지 존나 궁금했음 할아버지가 얘기해주신것중에 문득문득 생각나는대로 써봄 출처 --- 무당할머니 덕분에 살았네요.. 진짜 다행이다 ㅠㅠ 그나저나 할머니가 말씀해 주신 거는 바다가 떠내려온 시체 때문에 달빛을 반사하지 못하기 때문이었나 보네요... 전쟁은 너무 슬프고 무서워 ㅠㅠ
소고기 먹기를 금하라 (2) - 1896. 1 한양
1896년 1월 18일, 그 해 첫 법령으로 이른바 <포사규칙>이 반포됩니다. 갑오개혁 이후 정부 당국이 반포한 두 번째 근대적 법률이었죠. 첫 번째 반포한 법률은 1985년 3월 반포한 재판소구성법이었습니다. 단순 법률 반포 순서만 놓고 보자면, 뭔지는 몰라도 상당히 중요한 내용이 담겨 있는 법안같지 않나요? <포사규칙>이 규정한 내용은 딱 잘라 말해 이렇습니다. '이제부터 모든 도축 및 정육점업은 영업허가증을 발급받아 규정에 맞게 운영하고 세금을 내라.' 김이 새는 얘기일지는 모르겠지만, 이 법률의 의의는 이렇게 바꿔 말할 수도 있겠습니다. 그동안 지방관 및 지방 세력가의 자의적 수탈 대상이었던 백정을 이제부턴 국가가 직접 지배한다, 라고요. 세계 여러 문명에서 어떻게 고기를 얻느냐, 하는 문제는 상당히 중요하게 다뤄졌습니다. 이슬람의 할랄이나 유대인의 코셔 전통에서 '무엇이 율법에 따라 올바른 방식으로 얻은 고기인가'를 세밀하게 규정한 것만 봐도 그렇죠. 복잡한 도축 과정과 절차를 거쳐 먹을 수 있는 것과 먹지 못할 것을 구분하고, 나머지 부산물과 폐기물을 어떻게 처리할 것인가, 하는 문제는 먼 옛날 인류가 수렵과 채집 생활을 하던 시절부터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중시되었습니다. 비록 오늘날엔 산업화, 고도화된 도축 및 정육 과정으로 인해 보통 사람들이 자신이 먹는 고기가 식탁에 오르기까지 거치는 과정을 대부분 알 필요가 없게 됐지만 말입니다. 코셔 및 할랄 규정의 일부. 몽골인이나 시베리아 인들에게도 그들 나름대로의 도축 방식이, 아마존 정글의 민족들도 그들만의 규율이 있을 것입니다. 그건 조선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조선 사람들은 소, 말, 돼지, 양, 닭, 개를 육축이라고 해서 민간에서 이를 키우고 잡는 것을 허용했죠. 최근까지도 시골에선 공공연히 민가에서 직접 소, 돼지를 도축하는 일이 벌어지곤 했습니다. 다만 조선 사람들도 소, 말은 민가에서 함부로 잡지 않았다고 합니다. 한양에선 푸줏간이나 약 20개 정도의 도축소, 이른바 '현방'이 있어서 백정들이 그곳에서만 전문적으로 도축, 판매를 맡아 했다고 하죠. 선비들은 '군자는 푸줏간과 부엌에 드나들지 않는 법'이라고 해서 아예 이들과의 접촉 교류를 삼갔습니다. 1896년 포사규칙이 제정된 이후 민간 도축은 규제가 더 강해졌습니다. <포사규칙>에서 포사란 조선시대 정육점을 말합니다. 즉, 법률의 이름 자체가 정육점에 대한 규칙, 이란 뜻이죠. 포사는 본래 잡은 고기를 판매하는 가게만 의미했지만, 당시엔 현실적으로 도축과 육류 판매가 엄밀하게 분화되지 않았습니다. 때문에 법령 내에서도 육류 판매뿐 아니라 도축업에 대해서도 규제했죠. 법령에 따라 정육점, 도살장업은 지방관청을 통해 신고하고 면허료를 지불해 영업허가증을 받기만 하면 누구나 할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정작 도살 자체는 백정들에게만 나오는 도축자격증인 빙표를 가진 사람만이 가능했습니다. 따라서 영업허가를 취득한 업주가 도축자격을 가진 백정을 고용해 영업을 해야 했죠. 소를 도축해야 할 때, 업주는 1마리에 80전 세금을 백정에게 전달합니다. 그러면 백정은 그 세금을 군청에 납부하고 영수증을 받아 오죠. 이 영수증 없이 도축을 할 경우 백정은 도축자격을 잃고 거처에서 추방됩니다. 또 해당 백정을 고용한 업주는 영업허가가 취소될 수 있었죠. 세금은 영업장 규모에 따라 물렸습니다. 도축장을 매일 1마리 이상 도축하는 1등지부터 5일에 한 마리 정도를 도축하는 5등지까지 구분한 후, 매월 말 영업장이 무는 세금에 등급별로 차등을 뒀죠. 영업장 규모는 도축하는 소 두수만을 기준으로 했기 때문에, 돼지나 개는 부수적인 수취 대상이었다고 합니다. 이 영업세를 포사세라고 하는데, 정부는 포사세 징수를 위해 군 단위까지 포사위원과 포사파원을 임명했죠. 1897년 독립신문은 당시 전국적으로 연간 2만 7천 여 마리 소가 도살된다고 했습니다. 이건 공식적인 수치로, 민간에서 자행되는 밀도축 수를 뺀 수치였죠. 조선 후기 소 도축이 이렇게까지 활성화된 이유는 두 가지로 꼽습니다. 하나는 조선후기 민간의 생산력이 증가하면서 주류 및 육류 소비가 증가한 것, 또 다른 하나는 무역이 성황을 이루면서 주요 수출 품목인 소가죽의 가치가 높아진 것이죠. 이로 인해 일부 지배층이 백정을 사사로이 고용해 소가죽을 수집하고 고기를 팔아 부정축재를 하기도 했습니다. 조선 말 개항지를 통해 외국으로 향하는 주요 수출품 가운데서 소가죽과 소뿔 등은 항상 빠지지 않고 포함되었습니다. 특히 일본 상인들이 자국 가죽 산업 발달을 위해 필수적인 조선 소가죽을 확보하려고 눈에 불을 켜고 다녔습니다. 일본에서 수입한 소가죽 가운데 약 7, 80%가 조선산일 때도 있을 정도였죠. 1824년 일본에 수출한 우피만 1만 5천 장 이상이었고, 이후로도 매년 거의 이 수치를 유지했습니다. 청과 기타 외국에 수출하는 우피 량까지 고려하면 당시 조선 내에서 연간 약 5만 마리 이상 소를 도축하지 않았나 추정하고 있답니다. 자연히 징수한 포사세 또한 늘어야 했죠. 현실은 그렇지 못했습니다. 소 5만 마리면 포사세만 약 4만 원이 걷혀야 하지만, 1898년 실제 포사세 징수액은 고작 1305원 20전에 불과했죠. 단순 계산으로도 추산한 세수의 약 3~4%만이 실제로 걷힌 셈입니다. 이유는 있었죠. 일부 지배층이 공공연히 자행한 밀도축, 지방관과 포사파원 등의 횡령 문제는 물론이고, 일부 포사파원은 업자 및 백정들과 결탁해 멋대로 포사세를 인하하거나 아예 징수세액 자체를 탕감했습니다. 각급 관청간 마찰도 문제였습니다. 포사세 징수를 별도로 임명한 포사파원에게 맡기자, 지방관이 이들과 갈등을 빚었죠. 중앙은 중앙대로 포사세의 운영을 놓고 농상공부와 내장원이 대립했습니다. 포사파원을 파견하면서 그들에게 지급할 운영비를 제대로 주지 못해 포사파원들이 자의적인 수탈 횡령을 벌일 핑계가 생겼죠. 또 지방 세력가와 지방관들은 예전과 다름없이 각종 명목으로 소고기를 정기적으로 상납받았습니다. <포사규칙>과 포사세를 둘러싼 난맥상은 당대 조선 사회 체계가 얼마나 심각하게 망가져 있었는지를 느끼게 해줍니다. 게다가 이 모든 혼란 속에서 정작 주체인 백정들은 소외당했습니다. <포사규칙>과 현존하는 시행세칙 그 어디에도 백정들의 처우나 급료 따위에 대해서는 규정한 바가 없습니다. <포사규칙>을 제정한 지배층의 관심사는 오로지 세금 부과와 징수에 있을 뿐, 그 밖의 문제엔 아예 눈을 감았습니다. 백정들의 처우는 사회적으로도 경제적으로도 개혁 이전과 다를 바 없었던 거죠. 1900년이 넘어가면 도축업에 대한 보다 더 자세한 규정들이 세워집니다. 안타깝게도 이 절차를 진행한 건 대한 제국 뜻이 아니었죠. 러일 전쟁을 거치면서 세계 열강으로부터 한반도의 지배권을 사실상 인정받은 일제는 바로 이 시기부터 본격적으로 내정 간섭과 침탈을 자행합니다. 러일 전쟁 당시 러시아 해군의 진군로. 러시아는 일본 해군을 상대하기 위해 말그대로 지구를 반 바퀴 돌아 대한해협까지 진출했습니다. 그 과정에서 적국인 영국 등의 견제를 받아가며 보급과 피로 등 온갖 문제에 시달린 건 물론입니다. 전쟁 결과 러시아가 한반도를 둘러싼 열강들의 경쟁에서 완전히 이탈하고, 조선은 일본에 더욱더 예속되고 맙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