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olah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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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000년전 바빌론 점토판을 해석 해보니...😆😆

3 Comment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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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따 잔소리 만랩‥😑
옛날이나 지금이나 똑같네 ㅋㅋ😁
우리할아버지가 돌아가실때까지 아버지에게 하시던말씀이, 아버지가 제게 귀아프게 하시더니, 얼마전에 제딸에게 했던말임.ㅠ 우리딸은 지 애한테 안하겠죠.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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콜드 체인, 세상을 바꾼 냉기의 혁명(3)
프레데릭 존스에게도 다른 위대한 발명가들처럼 영감이 불현듯 찾아온 순간이 있었습니다. 어느 여름날 밤, 호숫가에 차를 세워두고 잠시 운전석에 앉아 시간을 보낼 때였습니다. 창문을 열자 선선한 밤바람이 차 안으로 불어들어왔죠. 문제는 그 다음이었습니다. 열린 창문으로 불청객도 들어왔거든요. 모기가 들어와 윙윙거리자, 프레데릭은 짜증이 나서 창을 닫아 버렸습니다. 그러자 차 안은 금새 참을 수 없을 정도로 더워졌죠. 창을 열자니 또 모기가 들어올 것같고, 그렇다고 창을 계속 닫고 있자니 더워서 견디기 힘들었습니다. 이 때에 프레데릭에게 한 영감이 찾아옵니다. 바로 차량용 에어컨을 만들어 팔자는 생각이었죠. 그는 자기 상사이자 파트너인 누메로를 찾아가 자기 아이디어를 이야기했습니다. 이런 걸 만드는 회사는 어디에도 없으니, 분명 성공할 거라고요. 누메로의 반응은 어땠을까요? 놀랍게도 누메로는 프레데릭의 아이디어에 대해 시큰둥하게 굴었습니다. 어째서 누메로가 새 아이디어를 받아들이지 않았는지는 모릅니다. 더군다나 당시 회사는 새로운 사업 분야를 찾아야 할 처지였는데도 말이죠. 누메로의 회사에서 개발한 극장용 음향 시스템 설비는 미 중서부 전역에서 팔려 나갔습니다. 곧 선발주자인 웨스팅하우스와 RCA가 그 존재를 의식하게 되죠. 치열한 경쟁과 소송전이 거듭되었습니다. 상대는 미 전역에 먼저 진출한 대기업들이죠. 누메로의 회사가 저렴한 가격과 품질로 승부를 거는 데도 한계가 있었습니다. 누메로에겐 대안이 필요했죠. 프레데릭의 아이디어가 묻히나 싶자, 곧 다른 방향에서 기회가 돌아옵니다. 1983년, 누메로는 골프 친구들과 경기를 하며 친목을 다지고 있었습니다. 개중 한 친구가 우연히 누메로가 듣는 앞에서 불평을 늘어놓죠. '요전번에 시카고에서 닭고기를 잔뜩 사들였는데 말야, 트럭이 길에서 퍼지는 바람에 고기가 다 상해버렸다고. 손해가 이만저만이 아니야.' 당시 운송용 냉각 시스템은 초보적이었고 취약했습니다. 트럭의 진동 때문에 민감한 장비는 쉽게 고장났고, 그나마도 차체와 독립된 동력원이 없는 경우가 비일비재했죠. 때문에 육류나 상하기 쉬운 상품을 육지에서 수송하는 데는 한계가 따랐습니다. 누메로는 친구 말을 듣고 농담조로 이렇게 말하죠. '혹시 그 문제, 전문가가 해결 못 하면 까짓거 내가 해 버리지.' 누메로에겐 농담이었지만 친구에겐 아니었습니다. 이제 누메로가 기댈 사람은 딱 한 명뿐이었죠. 자신이 운영하는 영사 기기 회사에서 수석 엔지니어를 맡은 프레데릭 존스가 아니면 이런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습니다. 자신이 기껏 제안한 차량용 에어컨 아이디어를 걷어찬 고용주가, 뒤늦게 와서는 세상에 없는 차량용 냉각 설비를 발명해 내라고 합니다. 프레데릭은 과연 어떤 생각으로 이 프로젝트를 맡았을까요? 그의 생각이야 어쨌건, 프레데릭은 자신이 맡은 일을 충실히 해냅니다. 1938년 최초의 육상 운반용 냉동장치 모델 A의 특허를 발표하죠. 1938년 발표된 모델 A는 냉각용 핵심 부품이 차체 하단에 설치되었습니다. 이것이 도로 사정에 따라 손상을 입는다는 사실을 알자, 프레데릭은 해당 유닛을 트레일러 상부로 옮깁니다. 무게가 2200파운드나 나갔던 초기 모델도 나중에는 950파운드까지 경량화하죠. 비록 우연히 이뤄진 개발이었지만, 누메로는 이 냉동 트레일러가 곧 자기 미래라고 판단을 내린 모양입니다. 그는 곧 자신이 운영하던 극장 설비 회사 Ultraphone과 보유하고 있던 음향 설비 특허, 티켓 발권 기계 특허를 RCA에 팔아치워 정리해 버립니다. 여기에 자신의 생명보험을 담보로 1만 달러를 빌려 자금을 융통하죠. 이 돈을 가지고 누메로는 몇몇 동업자와 함께 써모컨트롤 컴패니Thermo control company를 설립합니다. 자신이 가진 모든 것을 프레데릭이 개발한 냉동 트레일러에 올인한 거죠. 하지만 초기 반응은 그리 호의적이지 못했습니다. 이전에도 냉동 트레일러 기술이 여럿 소개된 바 있지만, 사용자들이 원하는 대로 작동한 경우가 아직 없었던 거죠. 누메로는 고민 끝에 한 가지 아이디어를 냅니다. 육류 포장 체인인 Amour 사와 접촉한 그가 담판을 짓습니다. '저희와 거래하시죠. 처음 트럭 두 대는 아무 비용 청구 없이 설치해 드리겠습니다. 혹시나 우리 장비가 고장나면 그로 인한 모든 손실도 보상해 드리죠. 어떻습니까?' 상대방 입장에선 손해보는 것이 없는 거래였습니다. 상대편 사장은 누메로의 제안을 받아들이죠. 얼마 지나지 않아, Amour 사는 트럭 8대를 추가 구매합니다. 누메로와 프레데릭의 상품이 비로소 시장에 인정을 받은 것입니다. 겨우 첫 시작을 끊었지만, 회사 경영은 여전히 순탄치 못했습니다. 거기에 곧 세계 2차 대전이 발발하죠. 이때 회사 사장인 누메로는 진지하게 자원 입대를 고민했습니다. 이미 한 번 군대를 다녀왔는데도 말입니다. 마치 그 결심이 허풍이 아니란 듯, 누메로는 지원을 하러 워싱턴 DC로 훌쩍 떠납니다. 그가 모든 것을 걸어 이제 막 반석을 닦아놓은 회사는 다시금 표류할 처지에 놓인 것입니다.
콜드 체인, 세상을 바꾼 냉기의 혁명 (2)
지난 글에선 냉동선의 등장에 대해 잠깐 다뤘습니다. 그 내용을 잠시 보충할까 합니다. 냉동선이 개발되기 전까지, 호주나 남미 등지 국가들은 염장이나 통조림 등으로 가공해 고기를 수출했습니다. 당연히 그 품질은 만족스럽지 않았죠. 양은 양모를 생산하고 남는 고기는 폐기하기가 다반사였습니다. 장기 보존 기술에 대한 특허만도 200여 건이 넘게 쏟아질 정도로 관심도 높았죠. 1800년대 영국은 산업 혁명과 과학 혁명을 겪으며 인구가 폭증하고, 동시에 식량 생산은 원할하지 못한 형편이었습니다. 1850년 2800만인 인구가 1880년 3500만까지 증가합니다. 이 30여 년간 영국내 육류 가격은 두 배 이상 폭증했죠. 이런 추세에 따라 영국의 식민지인 호주와 뉴질랜드에선 소와 양의 사육이 증가합니다. 1851년 소 6만 8천 두, 양 23만 두를 키우던 게, 1880년 소 70만 두, 양 1300만 두로 급증했을 정도로요. 자연히 육류 수송 문제가 각국에서 큰 고민거리가 된 겁니다. 최초 냉동 선박에서 냉매로 채택된 건 암모니아 가스였습니다. 첫 항해는 순탄치 않았지만, 가능성을 본 사람들은 이제 세계 각지에서 고기와 과일을 배에 실어 날랐죠. 호주에선 스트라스레븐 사가 영국으로 고기를 실어 나릅니다. 다른 회사인 뉴질랜드호주랜드 사는 양고기와 돼지고기 500두를 싣고 98일만에 런던에 도착합니다. 그 결과 싣고 온 상품을 현지보다 두 배 이상 이익을 올렸죠. 수익성 있는 사업엔 자연히 투자가 따라붙기 마련입니다. 마토라 호는 냉기 전달 방식을 개선해 에너지 효율을 높였죠. 1890년대에 이르면 선박도 범선에서 증기선으로 바뀝니다. 1902년에 설립된 유나이티드 후르츠 사는 바나나를 운송했는데요. 바로 지난 글에서 자메이카산 바나나를 미국인들에게 소개했던 선원, 로렌조 베이커가 이 회사의 공동 창립자입니다. 냉동선은 과일과 육류로 전 세계를 연결했지만, 다국적 기업과 독재자의 유착 행태를 낳기도 했습니다. 과테말라 독재자 호르헤 유비코는 유나이티드 후르츠 사 등 외국 기업이 자국 농지를 사들여 농장을 여는 것을 허용했고, 이 때문에 자국민 농부들이 이들 외국 기업의 농장에 고용되어 일하는 신세로 전락하고 맙니다. 1902년은 또 다른 기념비적인 발명이 있었던 해입니다. 바로 윌리스 캐리어가 에어컨의 원리를 발명한 해죠. 처음엔 인쇄소를 위해 이 기술을 발명했다는 얘기는, 빙글에서 이미 다른 분이 올려 주신 바 있죠. 1906년 공기조절장치 특허로 업계에 인정받은 캐리어는, 1915년 여섯 명의 동업자와 십시일반 돈을 모아 캐리어 사를 설립합니다. 이게 지금도 우리가 잘 아는 바로 그 캐리어 사죠. 백화점에 설치된 세계 최초 터보 냉동기(1922년), 극장 내에 에어컨 설치(1925년), 20년대 말 발표한 소형 에어컨에 고층건물 냉방 공조 설비 발명(1939년)에 이르기까지, 캐리어는 정말로 오늘날 우리에게 많은 것을 남겼습니다. 캐리어 사가 에어컨 기술로 명성을 떨치고, 유사 기술을 가진 업체들이 속속 등장하기 시작했을 때 아직 이 글의 주인공은 무대에 오르지도 않았습니다. 하지만 곧 이 두 사람은 캐리어 못지않게 세상을 바꿔놓을 참이죠. 캐리어가 세계 최초 에어컨을 내놓은 후 한참이 지나 1929년, 조셉 누메로라는 한 청년은 곤경에 처해 있었죠. 상당한 엄친아 기질이 있던 그는, 일찌감치 부동산과 제조업, 금융업 등에 뛰어들어 25세가 되자 잠시 은퇴를 해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돈은 이미 벌 만큼 벌었으니, 못해본 공부를 해보자는 마음이 불현듯 든 거죠. 미네소타 대에 들어가 법학 공부를 한 끝에, 그는 졸업 시험에는 합격합니다. 하지만 이수 학점이 살짝 부족한 게 발목을 잡죠. 설상가상 1929년 대공황으로 미국 주식 시장이 붕괴하면서 그 역시 파산에 이릅니다. 고민 끝에 그는 졸업을 포기하고 학교를 나옵니다. 다시 사업에 뛰어들려던 그에게 한 친구가 좋은 사업 아이템을 소개해 줍니다. 그가 알려준 건 이제 막 대중에 소개되기 시작한 유성 영화 사업이었죠. 당시 업계 선두인 웨스턴 일렉트릭(호손 공장 운영하던 걔네 맞습니다), 그리고 RCA 두 회사는 비싼 영화 장비를 극장에 파는 대신 이를 빌려주고 임대료를 받는 식으로 사업을 운영했습니다. 누메로는 이들 제품보다 덜 비싸고 품질이 나은 극장 설비를 개발한다면 승산이 있겠다고 여겼죠. 그렇게 해서 새 회사인 울트라폰 사운드 시스템 사가 설립됩니다. 야심만만한 누메로에게 가장 필요한 건 실력 있는 기술자였죠. 그 무렵, 미네소타의 Hallock이라는 지역에선 한 재능 있는 영사 기사에 대한 소문이 극장가에 파다하게 퍼졌습니다. 정식으로 배운 적은 없지만 독학으로 기술을 익힌 실력 있는 기사였죠. 게다가 창고에 있는 잡동사니만으로 당대 무성 영화 장비를 유성 영화용으로 업그레이드 할 수 있는 실력자라나요? 소문을 들은 누메로가 대번에 그를 미니에폴리스에 있던 회사로 초청할 만도 합니다. 하지만 소문난 기술자에겐 한가지 지울 수 없는 흠이 있었습니다. 기술자 프레데릭 존스의 아버지는 아일랜드인이었지만, 어머니는 아프리카계 미국인이었죠. 1930년대까지도 미국에서 인종 차별은 극심했습니다. 캔터키 코빙턴에서 어린 시절을 보낸 그는, 어머니가 일찌감치 가출해 아버지 손에서 7세까지 자랐습니다. 그가 7세가 되던 해, 아버지는 캔터키의 한 사제에게 보내 버렸죠. 2년 후 아버지마저 사망하자, 그에겐 기댈 곳이 없어졌습니다. 프레데릭은 11살 되던 해 사제에게서 도망쳐 신시내티로 갔죠. 원래 재능이 있었는지, 아니면 부지런히 노력했는지는 알 수 없습니다. 불과 11세에 홀로 도시로 온 아이는 16세가 되자 이미 신시내티 한 자동차 수리점의 십장이 되었죠. 가게 주인은 자동차 경주에 관심이 많았는데, 프레데릭은 고용주를 위해 경주용 자동차를 디자인하고 개발했습니다. 그 자신도 언젠가 자신만의 경주용 차를 갖는 게 꿈이었죠. 하지만 곧 흑인은 자동차 경주에 나갈 수 없단 걸 알고 맙니다. 상심한 나머지 그는 일을 그만두고 다른 여러 수리공 일을 전전하며 생계를 이어갔죠. 미네소타 Hallock의 한 농장에서 그는 30만 에이커 규모 농장 내 모든 장비를 수선하는 일을 맡았습니다. 여기서도 그는 더트용 레이싱 카를 만들 기회가 있었죠. 한발 더 나아가 초기형 설상차를 개발하기도 했습니다. 어쩌면 그에겐 자동차에 남다른 열정과 집착이 있었던 건지도 모르겠습니다. 1차 대전이 발발하자, 프레데릭은 기계공, 전기공으로 프랑스에서 복무하다 1919년 귀국합니다. 군대에서 익힌 기술에 폭넓은 관심까지 더해져, 그는 이후로도 잡지 등을 참고하며 독학으로 실력을 쌓습니다. 그런 그에게 어느날 기회가 찾아오게 되죠. 당시 영화관들은 기존에 설치된 무성 영화 장비를 새 유성 영화 설비로 바꾸는 데 어려움을 겪었습니다. 이때 영사기사로 일하던 프레데릭이 자기가 문제를 해결해보겠다고 나섰죠. 가죽 벨트 부품 등 여러 잡동사니를 이용해 그는 정말로 음향과 영상을 동시 상영 가능한 시스템을 구축해냅니다. 이후 기술 변화에 따라 그때 그때 적절하게 대응해 준 건 덤이었죠. 막 유성 영화 산업에 뛰어든 누메로에겐 프레데릭 존스야말로 반드시 필요한 인재였습니다. 흑인이라서, 당대 만연한 인종 차별에 어려움을 겪었지만 결국 누메로의 회사에서 프레데릭은 수석 엔지니어 자리를 꿰차죠. 하지만 누메로도 프레데릭도 새 파트너가 평생을 함께할 사이인 줄은 꿈에도 상상하지 못 했을 겁니다. 1991년 조지 부시 대통령은 조셉 누메로와 프레데릭 존스에게 National medal of Technology & Inovation을 헌정합니다. 특히 프레데릭 존스는 이 상을 받은 최초의 흑인으로 기록되었죠. 1930년 두 사람의 만남은 그 정도로 중요했습니다. 조셉 누메로와 프레데릭 존스. 오늘날 우리가 사철 신선한 음식을 마트나 슈퍼마켓, 심지어 온라인 쇼핑몰에서 구할 수 있는 건 바로 이들 덕분입니다.
그것은 참호전이었다1914-1918
제1차세계대전을 모르는 사람은 없겠죠... 하지만 그 끔찍함을 아는 사람은 또 드물것 같아요. 피난처라고 생각했던 그 참호가 바로 그들의 묘지가 될줄 그들은 몰랐겠지요... 이책의 출판사인 서해문집에서 나온 자크 타르디의 또다른 작품 그래픽노블 파리 코뮌을 본적이 있는데 특이하게 세로가 아닌 가로로 길쭉한 책이라 지금도 책장에 꽂아놓으면 혼자 불쑥 튀어나와 있답니다. 이 이상한 사진이 뭘까 했는데 책의 마지막 즈음에서 알게됐습니다. 제1차세계대전에 참여해 안면부상을 입었던 65,000명중 한명의 사진이라는 것을요... 예전이나 지금이나 전쟁은 평범한 사람들이 선택할 수 없는것... 남편은 전장에서, 부인은 군수공장에서... 그들이 바라는 것은 단지 평온한 일상인것을... 사망자 1천만명...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진흙속에 묻혔을까... 제목처럼 그것은 참호전이었으니... 진흙속에 묻히지 않았을뿐 이들의 앞으로의 삶도 분명 순탄치는 않아 보인다. 진흙속에 묻히는게 낫다고 생각할수도... 적군에게 죽임을 당하는게 차라리 나았을수도... 군율을 세운다는시범케이스로 총살당한 군인들은 나가도 죽고 나가지 않아도 죽고... 그 쓰레기들을 위해서 당신들이 목숨을 바치다니 ㅡ..ㅡ
영국사람들은 길에 쓰레기를 버리지 않지.jpg
그런 사진 많이 보셨잖아여, 쓰레기로 엉망인 길 사진...ㅋ 우리나라도 정말 심한 편이져. 우리가 보기에도 싫은데 관광객들이 보면 또 어떻겠어여. 뭐 버리지 마라 버리지 마라 한다고 또 안버리는건 아니잖아여. 근데 영국에서는 이걸 해결하기 위해 재밌는 캠페인을 시작했어여. 이름하야 #깨끗한거리만들기 캠페인 지금 보여드릴 것은 그 캠페인들 중 하나인데, 넘나 똑똑한것ㅋ #1 담배꽁초로 투표하세요! 긍깤ㅋㅋㅋㅋㅋㅋㅋㅋ 이런건거져 Q. 다음 중 누가 세계 제일의 축구선수인가? 왼쪽 : 호날두 / 오른쪽 : 메시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호날두가 이기고 있네여 호우!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여러분도 우리형 투표할건가여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그래도 전 메시.........) #2 껌을 붙이면 답이 나와요! Q. 길바닥에 붙은 껌 처리하는데 매년 얼마의 비용이 들까요? 답을 알고 싶으면 x표시 위에 껌을 붙여 보세요! 그래서 다 붙이면 5천6백만 파운드라는 답이 나오네여... ㄷㄷㄷ... 이건 역시, x표 위에 껌을 계속 붙이다 보면 이 동네 유명인사의 얼굴이 나오나 봐여 +_+ 이건 또 재밌게 문제로 맞춰보라고도 하네여. 물론 공짜문자 +_+ 이 외에도 뭐 쓰레기를 버리면 노래가 나오는 쓰레기통도 있다고 해여. 지금도 계속 여러 시도를 하고 있다고...ㅋ 서로 기분 좋은 재미난 시도들 참 좋은 것 같아여. 이거 보니까 그거 생각나네여. 밟으면 소리나는 계단! 소리도 나면서 기부도 되는... 고터였나 서울역에 있었던것같은데...ㅋ 그래서 저 일부러 거기 가게 되면 에스컬레이터 안타고 계단 타거든여. 생각해보면 우리나라는 쓰레기통 자체가 길에 잘 없는 것 같긴 하네여 근데 ㅋㅋㅋ 저기 쓰레기통좀 설치해 주세여 ㅋㅋㅋㅋㅋㅋㅋ 출처 : 다른 시도들도 여기서 볼 수 있다고 합니다 +_+
마녀의 역사 2부 - 마녀 사냥 광기의 첫 시작, 하인리히 크레머와 말리우스 말리피카룸
우리가 이해하고 알고 있는 대부분의 마녀의 개념은 책 한 권에서 출발합니다 바로 "Malleus Maleficarum" 혹은 마녀의 망치나 마녀 사냥꾼의 성경으로도 불리는 이 책 한 권 말이죠 아마 성경을 제외 한다면 인간 역사상 가장 큰 영향을 끼친 서적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1486년 하인리히 크레이머 라는 독일의 성직자이자 이단 심문관이었던 그는 카톨릭 교회의 공식적인 마녀와 마법에 대한 입장을 대변하기 위해 서술했습니다. 책은 3가지 분류로 나눠질 수 있는데 1부는 마녀의 개념 2부는 마녀의 능력  그리고 3부는 마녀를 처벌하기 위한 처벌 방식으로 정리 될 수 있습니다. 이 책은 약 300년간 전 세계에서 가장 유통이 되던 책이었습니다. 독일의 대중을 목표로 쓰여진 책이었으나 프랑스, 스페인 그리고 이탈리아 등에서 엄청난 효과를 봤으며 이후 개신교도들 또한 법률과 교회의 법률 모두 이 책을 기반으로 처벌 하게 되었습니다. 그로 인해 300년 동안 수 만 명이 죽는 대 참사가 일어나고 말았죠 책은 또한 매우 매우 여성 혐오적입니다. 이 책에 쓰여진 문장을 인용하자면 "여성이란 무엇인가, 그저 우정의 적이 아닌가" "피할 수 없는 죄악이며" "필요 악이자" "자연의 유혹이며" "매혹적인 재난이고" "가정의 위협이며" "즐거운 해로움이고" "자연의 악마가 자신의 뜻 대로 만들어낸 것이기에 죄악임에도 불구하고 여성과 이혼 해야하는 상황이라면 바람을 펴서라도 그녀와 이혼을 성사 시키는 것이 매일 그녀의 죄악을 견디는것 보다 낫다" 라고 서술한 바가 있습니다. 그래서 초기 마법은 모두 마녀와 마법사였으나 이 책의 출간 이후 마법을 부리는 자는 여자로 특정 되었던 것이죠. 이 책은 마녀의 박멸을 주장했고 동시에 여성의 박멸을 주장한 셈과 다름 없었습니다 하인리히 그레이머 라는 인물에 대한 초기 삶은 정확하지 않습니다 1476년에 하인리히는 타이롤, 보헤미아, 잘츠부르크 그리고 모라비아 지방의 이단 심문관으로 처음 자신의 뜻을 시작했으며 철학과 역사 그리고 신학에 대한 깊은 이해도와 사람을 사로잡는 연설 능력으로 존중 받는 인물로 성장했었습니다. 그로 인해 그는 잘츠부르크의 추기경과 교황 그리고 하느님을 제외하면 그 위의 사람은 없을 정도로 위치가 올라갔죠. 1484년, 그의 문학에 대한 깊은 이해도로 아리스토텔레스, 성 아우구스티누스와 성 토마스 아퀴나스 등의 유명인을 인용하며 마녀 사냥의 대규모 추진을 진행했죠,  이유는 그 때 까지만 해도 이 모든건 지방 사법에 의해 관리 되었지 교황청 법률에 의해 관리 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하인리히는 출애굽기 22장 18절인 "너는 마녀를 살려두지 말라" 구절을 인용하여 독단적으로 마녀를 사냥하려고 했죠. 그러나 당시 중세 사람들은 생각보다 멍청하지 않았고 독일의 지방 법원은 이에 격렬하게 반대 했습니다. 1258년 알렉산더 4세의 교황청 공문을 무시하려 한다는 이유였죠. 그래서 하인리히는 간단하게 로마로 돌아가 당시 교황이었던  이노첸시오 8세에게 자신의 계획을 말헀고 그는 이를 허용했습니다. 이노첸시오 8세는  "Summis Desiderantes Affectibus(수미스 데시데렌테스 에펙티부스)" 라는 공문을 발표하며 1258년 알렉산더 4세의 공문을 무효화 시킴과 동시에 마녀는 이단이라고 규정했고 이단 심문관에게 이러한 마녀를 색출, 처형할 수 있는 모든 권리를 허용하게 됩니다. 이렇게 교황의 설득까지 성공한 하인리히는 다시 독일로 귀환하지만 이미 밉보인 인물로 정치를 악용한 아싸로 간주 되었습니다. 그리고 돌아온 하인리히는 헬레나 슈베른이라는 한 여인을 인스부르크에서 만나게 되며 첫 대규모 마녀 사냥의 스타트를 끊게 됩니다. (출처) ____________ 이런 계획을 용인해 준 저 교황은 대체 무슨 생각이었던 건지... 곧 3부 가져오겠습니다.
펌) 인종계급젠더에 대해서는 얘기하지 말자 우리를 분열시키고 있잖아
"인종이니 계급, 젠더에 대해서는 얘기하지 맙시다. 우리를 분열시키고 있잖아요."  아, 그런가요? 백인은 말하자면 기본default위치에 있었습니다. 굳이 드러낼 필요가 없었죠.  자신이 백인이라고 알릴 필요가 없었다고요. 당신이 지배적이라면 그걸 굳이 공표할 필요가 없습니다. 모든 게 그래요. 당신이 어떤 일을 하면 그건 그냥 그런 겁니다. 역사를 찾아보면 인종을 발명해낸 건 백인들일 겁니다.그런데 이제 뜻대로 통제가 안 되니까, 할 이야기를 잃어버린 거예요.  흑인들은 인종을 만들지 않았습니다. 유색인들도 인종을 만들지 않은 건 마찬가지고요. 여성들 역시 젠더를 만들지 않았죠.  인종은 지배적 문화가 만들어낸 산물입니다. 여러 집단의 요구에 의해 지배적 문화가 만들어낸 거라고요. 다시 말하면 지배적 문화가 다른 문화를 지배하기 위해 어떤 요구를 해서 이루어진 것이 인종의 발명입니다. 가부장제는 어떨까요? 가부장제는 남성의 독점적 시점을 제시하기 위해 만들어진 산물입니다. 비난이 시작되자, 그 게임을 만들어낸 장본인들이 해당 게임을 통제할 수 없다며 화를 내는 겁니다.  하지만 게임을 만들어낸 건 바로 그들입니다. 모노폴리 보드게임을 만들었는데 게임 판에서 돈이 떨어지자 화가 난 거예요.  글자 그대로 그들이 인종이라는 개념을 만들었는데, 이제 와서 통제를 넘어서고 더 이상 이점을 누릴 수 없게 되니까 불평을 하는 겁니다. 심지어 (자신들이) 희생자가 됐다며 과장하든가요. 우리의 집단 정체성은 우리에게 억지로 떠맡겨진 것입니다.우리는 개인으로 여겨지지 않았어요. 예를 들어, 내가 '백인' 소년이었다면 하지 않았을 방법으로 나에게 총을 쏜다는 거죠. 그건 절대 나를 개인으로 대우하지 않고 있는 겁니다.  백인들은 특권에 관해 '눈송이'(자신이 특별하다고 믿고, 모욕이나 공격에 극도로 민감하며, 정치적 올바름의 감각을 지녔다고 믿는 백인 조롱표현) 같이 굴고, 난리법석을 떨고, 투덜거리며, 불평을 하죠. "뭐요? 뭐? 우리가 뭘 가졌다는 거요?"  영화 <유주얼 서스펙트>의 카이제 소제가 악마에 대해 한 말이 있죠? "악마가 한 일 중 가장 흥미로운 것은 사람들이 악마가 존재하지 않는다고 믿게 만든 것이다." 백인우월주의가 그렇습니다.   그들은 거의 모든 은행을 경영하고, 대부분의 나라, 대학을 장악해 다스리고 운영합니다. 엄청난 이점을 누리죠. 이건 남보다 먼저 출발하고 앞서간다는 의미예요. 그런데 사람들은 '모든' 백인 남성이 특권을 누린다는 의미는 아니라고 생각해요. 백인이 대부분의 자원을 가졌었어요. 하지만 그게 모든 백인이 자원을 갖는다는 의미는 아니라고요?  아니, 그건 당신이 백인이라면 성공할 가능성이 더 높다는 뜻입니다.  게임에 참여조차 하지 못하는 역경은 어떤 건지 한 번 상상해보세요. 베이브 루스가 홈런 기록을 수립했을 때 그는 모든 최고의 선수들을 상대로 공을 쳐냈던 게 아닙니다. 최고의 '백인' 선수들만 상대했을 뿐이죠.  시작부터 특혜를 받도록 조작되었으면 얼마나 조작되었는지를 알기 어렵습니다.말하자면 3루에서 태어나서 3루타를 친 거예요. 특혜를 받았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백인들은 유색인종과 다른 소수자들이 일구어온 자유를 시기하는 정서가 있습니다.이는 우리가 지식의 깊이를 우리 몸에 들이기 때문입니다.그에 대한 일종의 질투가 있어요.  자, 그러니 백인 여러분, 억울하다고 분개할 건가요? 물론 그렇겠죠. 그런데 그 억울함이 마땅하고 타당한 항의라고 생각합니까? 아니에요. 당신들은 그저 불평하는 거예요. 누구든지 이점을 누리다가 그걸 포기해야 하면 화가 나죠. =================================================================== 마이클 에릭 다이슨이라는 흑인 에세이스트, 목사, 교수가 인종차별에 관해서 말한 것  유색인종이랑 여자들이 무슨 일을 하면 그건 개인이 아닌 그 집단 정체성이 되어버린다는 거랑  백인들은 유색인종과 소수자들이 일구어내는 성과에 질투 느낀다는 것도 존나 공감임 ㅋㅋㅋ  출처 ㅎㅇㄱ
콜드 체인, 세상을 바꾼 냉기의 혁명 (1)
오늘날 에어컨을 발명한 윌리스 캐리어의 업적에 이견을 제기하는 사람은 드물 겁니다. 특히나 요즈음처럼 장마에 무더위가 이어질 한여름철에는 에어컨 없이 지내기가 여간 곤욕스럽지가 않죠. 바깥 열기에 잔뜩 데워진 몸을 끌고 집 안에 들어와서, 벽걸이 에어컨에서 새어나오는 냉기 아래 땀을 말리고 있자면 그제서야 겨우 살 것 같다는 기분이 듭니다. 하지만 이 얘기는 에어컨에 대한 게 아닙니다. 어쩌면 그것보다 중요할, 우리 일상 생활 모습을 완전히 뒤바꿔놓은 또 한 명의 기술자 얘기입니다. 혹은 기술자와 기업가의 이야기일 수도 있겠네요. 혹시 아르헨티나나 브라질같은 중남미 국가들이 세계 대전이 있기도 전부터 각국에 소고기를 수출해 왔단 걸 아셨나요? 미 동부 사람들이 1800년대 후반부터 자메이카산 바나나를 별미로 먹어온 것은 어떤가요? 1870년, 남미 오리노코 강에 금 채굴업자들을 수송해주고 뉴잉글랜드로 돌아가는 와중에 벌어진 일입니다. 복귀 도중 선원들은 배가 침수하고 있단 걸 깨닫죠. 그들은 할 수 없이 가까운 자메이카에 정박해 배 수리를 합니다. 이때 로렌조 베이커라는 남자가 바나나를 보고 한 가지 생각을 떠올리죠. '혹시 이걸 사서 배에 싣고 돌아가면 돈을 벌 수 있지 않을까?' 아시다시피 바나나는 빨리 익고 잘 물러집니다. 배 선창에 잔뜩 싣고 항구까지 운반하는 동안 과연 상태가 멀쩡할지 장담할 수 없었죠. 도박이나 다름없었지만, 베이커는 바나나를 잔뜩 사서 배에 싣고 뉴잉글랜드로 돌아갑니다. 다행이 바나나는 문제 없었죠. 너무 익어서 도저히 내륙에는 옮길 수 없었지만, 적어도 인근 뉴욕, 보스턴 등지엔 팔 수 있었습니다. 그렇게 바나나는 미국인들의 마음을 사로잡습니다. 자메이카에서 미 동부로 바나나를 옮기는 건 성공했지만, 남미에서부터 소고기를 옮기는 일은 또 다른 도전일 겁니다. 아르헨티나 정부는 1868년 상금까지 걸고 소고기를 해외로 옮길 방법을 공모했죠. 이전에도 우루과이, 쿠바, 브라질 등에서는 소고기를 해외에 수출했습니다. 단, 소금에 절인 후 건조한 후였죠. 얼음 상자에 보관하는 방법도 있겠지만, 얼음이 긴 항해 동안 무사히 버티려면 아주 많은 양이 필요했습니다. 그러니 오늘날처럼 신선한 고기를 수출하기란 불가능에 가까웠습니다. 아르헨티나는 당대 급속도로 발전해가는 과학기술에 희망을 걸어본 거죠. 사실 액체가 증발하며 열을 빼앗아 기온을 내리는 매커니즘은 이미 규명되어 있었습니다. 단지 상용화된 기술이 아직 없었죠. 1876년, 프랑스 기술자 찰스 텔리에가 아르헨티나 정부가 공모한 프로젝트에 도전합니다. Le Frigorifique라는 배에 고기를 싣고 무려 105일간 항해를 개시하죠. 배가 항구에 도착했을 때, 실린 고기들은 모두 무사했습니다. 세계 최초의 냉장선, reeefers의 등장입니다. Le Frigorifique호. 프랑스 루앙에서 출발한 배는 악천후와 충돌로 인한 손상 등 악조건 속에서도 대서양을 가로질러 아르헨티나에서 유럽으로 육류를 운송하는 데 성공했습니다. 이후 1902년엔 무려 460척의 냉장선들이 세계를 누비며 과일과 육류 등을 운반합니다. 찰스 텔리에의 성공은 곧 과학 기술과 자본의 승리로 여겨졌습니다. 하지만 이건 냉장 역사상 서막에 불과합니다. 현대 냉장 기술을 창안해 세상을 진정으로 바꾸어놓은 건 어느 사업가와 한 천재 기술자가 손을 맞잡은 결과였습니다.
펌) 서구사회에서는 동양인도 기득권 취급받음
제목은 어그로였고  정확히 말하자면 유색인종들 사이에선 일종의 기득권 취급받는다는 거임  흑인, 유색인종들에게 제일 민감한 문제가 교육 못 받고, 범죄율 높다, 이런건데 동양인은 이민 온지 몇십년만에 대학이나 변호사나 의사나 돈 많이 버는건 다 채워버리고, 범죄율도 월등히 낮음  그래서 백인 차별주의자들은 이걸 예시로 들면서 '니들은 노예 해방된지 100년이나 넘었는데 아직도 그 피지컬로 마약 빨고 불법체류하고 총질하냐? 게으른 새끼들아' 하면서 욕하고 빡친 흑인들은 동양인들을 '백인 밑에서 딸랑거려서 콩고물 얻어먹은 2인자' 정도로 봄 그래서 유색인종들이 유독 돈 많고, 교육수준 높은 동양인을 같은 약자로 인식 안하고, 백인들마냥 조롱해도 되는 대상으로 봄 어떤 유색인종들은 동양인 비하나 조롱을 인종차별로 생각 안함. 지보다 기득권이니까, 내가 동양인보다 약자니까, 강자한테는 이렇게 해도 된다고 생각함  미국 아카데미에서 흑인 사회자가 동양인 애 3명 가지고 뭐 나중에 휴대폰 만든다고 놀린게 다 그런 심리임   실제로 흑인들이 LA에서 폭동 일으킬때도, 백인들 거의 공격 안하고 코리안 타운만 ㅈㄴ 공격함  미국 대학내에서는 더 심한게, 인종차별에 대한 사회 불평등 해소하려고 '소수 집단 우대 정책(Affirmative Action)'제도를 만들었는데, 이게 인종에 따라서 합격 숫자 조절하는 제도임 근데 문제는 동양인이 미국 내 인구 6%정도 되는데 얘들이 대부분 공부를 잘해서 백인, 흑인, 히스패닉들이 입학할 자리 다 차지하거든?   그래서 저 제도에 따르면 동양인은 흑인, 히스패닉보다 점수 더 높아야 들어올 수 있음 즉, 동양인이랑 백인학생들을 상위계층으로 보고, 걔네들 자리 뺏어서 흑인이랑 히스패닉한테 넘겨주는거.. 실제로도 대학내 리버럴 학생들이 '기득권층은 대학 뒷문으로 돌아오라'는 정문 막기 시위 한 적 있었는데, 못 지나간게 백인 + 동양인이였음 그래서 서구사회의 유색인종들에겐 동양인도 같은 유색인종이 아니라 기득권이라는거임  관련 여러글 볼수록 92' LA 폭동 사건은 참 여러가지를 시사하는듯 특히 이런 알력관계도 드러나고 ㅇㅇ 홍인 - 흑인 갈등사이에서 도구,희생양으로 이용되는 동양인  출처 ㄷ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