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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캔들 중심에서 보석을 외치다 - 윤성원 (주얼리 컬럼니스트, 주얼리 마케팅 컨설턴트)

[윤성원의 보석과 스토리 #2] 이 글을 쓰고 있는 오늘(2월 27일)은 엘리자베스 테일러의 생일이다. 살아 있었다면 어느덧 83세가 됐을 그녀. 누구에게는 우상이자 롤모델이었지만, 호사가들에게는 스캔들의 여왕이었다. 그런데 나에게 그녀란 러브 스토리의 강도에 비례하는 수많은 보석으로 ‘주얼리란 지극히 감성의 산물’임을 확인 시켜준 존재다. 모든 주얼리에는 크든 작든, 구매하고, 선물하고, 착용할 때의 스토리가 있다. 심지어 이를 연구하는 나 같은 사람에게도 영감의 원천으로 또 하나의 스토리를 엮어주니 진정한 스토리텔링의 보고(寶庫)라는 생각이다. business_min20140305_1338.jpg 윈저공 부인(좌)와 엘리자베스 테일러(우), 두 사람은 상당히 친한 사이였지만 보석에 있어서 만큼은 경쟁자이기도 했다.   엘리자베스 테일러와 윈저공 부인의 보석과 사랑  보석과 스토리 두 번째 편은 세기의 주얼리 아이콘으로 꼽히는 엘리자베스 테일러와 윈저공 부인의 보석과 사랑에 대한 이야기다. 세계 경매시장에서 개인 주얼리 컬렉션 사상 1, 2위를 놓지 않고 있는 두 사람은 생전에 꽤 가까운 사이였다. 그러나 보석에 있어서 만큼은 치열한 경쟁 구도에 놓여 있었다. 테일러의 방대한 주얼리 컬렉션도 유명하지만, 윈저공 부인은 특히 주얼리를 보는 안목과 심미안, 스타일링 감각이 뛰어났다. 그녀들에겐 스캔들 메이커라는 공통점도 있었다. 테일러가 잦은 결혼과 이혼, 그리고 불륜으로 시끄러웠다면, 윈저공 부인은 ‘미국인 이혼녀’의 신분으로 영국 에드워드 8세의 왕위를 포기하게 만든 강력한 한 방이 있었다. 스캔들은 언제나 흥미롭게 우리의 눈과 귀를 자극하지만 로맨틱한 보석이 포함되었을 때 한층 더 흥미로운 법. 테일러는 7명의 남편 중 리처드 버튼과 가장 많은 에피소드를 남겼는데, 그는 어떤 구실을 만들어서든 테일러에게 보석 선물하는 것을 즐겼다고 한다. “나는 그녀에게 맥주를, 그녀는 나에게 불가리를 소개했다”에서 알 수 있듯이 버튼은 불가리로 시작된 테일러를 향한 보석 공세에 지칠 줄 몰랐다. 결혼 후에는 까르띠에의 자연산 진주 ‘라 페레그리나(La Peregrina)’를 비롯 ‘테일러 버튼(Taylor-Burton)’ 다이아몬드, ‘크룹(Krupp) 다이아몬드’ 등 희소성 높은 최고의 보석들만 안겼다. 로마에서 영화 <클레오파트라>를 찍으면서 시작된 이들의 사랑은 결국 두 번의 결혼과 두 번의 이혼으로 마무리됐다. 그러나 이렇게 세상의 보석을 다 가진 듯한 테일러도 손에 넣지 못해 안달 난 주얼리가 있었다. 바로 윈저공 부인의 ‘Prince of Wales’라는 다이아몬드 브로치다. 브로치를 구성하고 있는 세 개의 깃털 모티브는 웨일즈의 왕세자를 상징하는 것으로, 어떤 고난 속에서도 그녀를 왕비로 맞겠다는 윈저공의 의지가 담겼다. business_min20140305_1314.jpg 두 여인이 공동으로 소유했던 Prince of Wales 브로치 그런데 이 브로치를 향한 테일러의 열망이 얼마나 컸던지 리처드 버튼은 윈저공 부인에게 똑같은 브로치를 제작해도 될지 허락까지 구했다고 한다. 결국 모조품은 제작되진 않았지만, 그 브로치는 윈저공 부인이 세상을 떠나자마자 테일러의 소유가 되고 만다. 1987년 윈저공 부인의 주얼리 경매에서 그 브로치를 손에 넣은 사람이 바로 테일러였기 때문이다. 그녀는 다이아나 왕세자비에게 선물하기 위해 대리 입찰 중이던 찰스 황태자도 꺾는 기염을 토했다. 당시의 낙찰가가 $623,327였는데, 테일러가 세상을 떠난 후 2011년 크리스티 뉴욕 경매에서 그 브로치는 $1,314,500에 또 다시 새 주인의 품에 안겼다. 그녀들이 소유했던 보석들의 가치는? 이쯤에서 사후(死後) 경매를 통한 두 여인이 소유한 보석의 금전적 가치를 살펴보자. 테일러의 2011년 크리스티 경매의 주얼리 매출 총액은 $137,235,575 로 역대 1위의 자리를 지키고 있다. 한편 그 뒤를 잇는 윈저공 부인의 1987년 소더비 주얼리 경매는 $50,300,000의 매출을 기록했다. (윈저공 부인 컬렉션은 이후 2010년 소더비 경매에서 $12,500,000를, 2013년 경매에서는 $1,000,000를 기록했다). 물론 시간적 간극은 있으나, 35년간 한 남자와의 결혼 생활에서 남긴 주얼리와, 8번의 결혼과 7명의 남편 사이에서 획득한 전리품의 차이로 볼 수도 있다. 윈저공 부인에 비해 비교적 최근까지 생존했던 테일러의 컬렉션은 17세기 앤틱 피스부터 JAR 같은 컨템포러리 디자이너의 작품까지 보다 폭넓은 구성이다. 모두 그녀들의 유명세만큼 풍성한 스토리가 담긴, 객관적으로도 더 없이 환상적이고 찬란한 보석이다. 사실 ‘남성들의 공공의 적’을 자초한 그들의 보석 공세 덕분에 우리는 당대 최고의 하이 주얼리를 구경하는 재미가 쏠쏠해진 셈이다. business_min20140305_1330.jpg 윈저공 부인과 윈저 공작(좌), 엘리자베스 테일러와 리처드 버튼(우). 한 남자와 35년을 살았던 윈저공 부인에 비해 엘리자베스는 7명의 남편에게 수많은 보석을 선물 받았다. 그렇다면 이렇게 어마어마한 금액이 거래되는 2차 시장에서 보석의 가치는 어떻게 산정되는 것일까? 귀보석과 귀금속으로 만들어진 파인 주얼리의 가장 큰 장점으로 보통 원재료의 환금성을 꼽는다. 그런데 이 소재적 가치에 ‘시간’이 더해지면 ‘빈티지’나 ‘앤틱(최소 100년 이상)’의 이름으로 역사라는 오라(aura)를 얻는다. 물론 서명이 있는 유명 브랜드이거나 사용된 보석이 희소성을 지닌다면 추가 프리미엄이 붙기 마련이다. 그런데 이와 더불어 주얼리의 가치를 이루는 또 다른 중요한 요소가 바로 ‘provenance(출처 또는 소장 기록)’다. 누구의 손을 거쳤고, 누구의 소유였는지를 뜻하는 이 ‘주얼리의 족보’ 역시 큰 영향을 미치는 것. 이름난 수집가나 영화배우, 부호가 소유했었다는 사실은 곧 ‘소장 가치’와 ‘진품’을 상징할 뿐 아니라 소장자만의 특별한 ‘스토리’가 따라오기 때문이다. 그래서 전형적인 희귀 보석에 대한 열망만큼, 꿈과 희망을 자극하는 유명인의 스토리가 담긴 주얼리에 사람들은 열광할 수 밖에 없다. business_min20140305_1152.jpg 윈저공 부인과(좌) 엘리자베스 테일러는 동일한 브로치를 착용했다. 같은 보석이지만 착용하는 사람에 따라 전혀 다른 분위기를 자아낸다. 오늘 이야기의 주인공인 테일러와 윈저공 부인의 주얼리가 바로 대표적인 경우다. 영화 같은 삶을 살았고, 패션 아이콘으로서도 깊은 족적을 남긴 그녀들에겐 주얼리가 대중과 소통하는 매개체였다. 그녀들의 삶과 사랑이 고스란히 스며있는 주얼리를 통해 생전의 열정적인 에너지를 느끼고, 절정의 순간을 담은 우아함과 클래식한 매력을 추억할 수 있으니 말이다. 사랑 앞에서 자신의 왕위까지 포기한 윈저공과 그를 사로잡은 카리스마 넘치는 윈저공 부인. 또 이혼과 결혼을 거듭하며 수많은 에피소드와 어록을 남긴 엘리자베스 테일러와 리처드 버튼. 혹여 그들의 보석이 지나치게 화려함에 진정성이 없다고 폄하해서는 안될 일이다. 그녀들이 보석을 선물 받은 시점은 그들의 최고 순간이었고, 그 사랑의 정점을 찍던 찰나를 보석을 통해 나눈 것일 테니…. 지금은 뿔뿔이 흩어져 다른 주인을 만났지만, 그 보석이 존재하는 한 그 안에 깃든 특별한 관계가 사라진 것은 아닐 것이다. 그나저나 두 여인의 사랑을 흠뻑 받았던 내공 가득한 그 브로치의 새 주인은 누구였을까? 후문에 의하면 낙찰자는 ‘Mei-Mei’라는 크리스티의 중국계 직원을 통해 전화 입찰한 사람이었다고 한다. 보통 전화 입찰은 동일 언어를 구사하는 직원이 대행하는 관례로 볼 때, 그 브로치는 지금 아시아 어딘가에서 또 다른 로맨스를 덧쓰고 있을 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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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든살 노인에게 몰래카메라를 시전한 BBC
1988년 영국. 윈턴 여사는 집 다락방에서 무언가를 발견한다. 수백명에 달하는 어린아이들의 사진과 이름, 명부 등이 수록된 스크랩북이었다. 남편인 니콜라스 윈턴이 구한 669명의 유대인 명부가 세상에 밝혀지는 순간이었다. 유대계 영국인인 니콜라스 윈턴은 29세이던 1938년, 휴양차 갔던 체코에서 유대인 수용소의 실상을 알게 된다.  당시 영국에선 독일에서 핍박받던 유대인의 아이들을 입양하는 방식으로 데려오곤 했는데 도움의 손길이 체코에는 미치지 못했던 것이다. 그는 나치 장교에게 뇌물을 주는 등 사비를 털어 669명에 달하는 아이들을 영국으로 보낼 수 있었다. 하지만 2차대전 발발로 탈출시키던 나머지 250명의 행방이 묘연해지자 니콜라스 윈턴은 실의에 빠져 영국으로 돌아왔고 50년간 이 일을 묻어둔채 지냈다. 심지어는 아내가 찾아낸 명부를 파기하고자 했다. 결국 윈턴 여사는 남편을 설득, 이 명부를 방송국에 제보한다. 곧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모른채 담담한 표정의 니콜라스 윈턴. 스크랩북을 펼쳐보인 진행자 윈턴 씨가 자신이 구한 아이와 찍은 사진도 있다 "뒷면을 살펴보면 (구조된) 모든 아이들의 명단이 있습니다." 그 중에서 사회자가 지목한 한 이름 베라 디아맨트 베라의 어릴적 사진이 지나가고 "그리고 베라씨가 오늘 이 자리에 나와 있습니다. 안녕하세요. 그리고 이 말씀을 꼭 드려야겠네요. 베라씨는 지금 윈턴씨 옆에 앉아있습니다." 띠용? 니콜라스 윈턴은 50년전 자신이 구해준 꼬마가 이제 중년이 다 되서 자신의 바로 옆 자리에 앉아있으리라곤 상상도 못했다. 반가움과 고마움을 담아 포옹하는 베라, 그리고 박수로 응원해주는 청중들 아직 몰카는 끝나지 않았다. 이번엔 윈턴의 왼편에 앉은 여인이 자신도 윈턴의 도움으로 구조됐다면서 문서를 들어보이고 있다. 2번째 띠용 오늘 놀랄 일이 많구먼 ㅎㅎ 몰카는 아직 안 끝났습니다. "혹시 이 중에 윈턴씨 덕에 목숨을 구한 분이 계시면 일어나 주세요." 그러자 윈턴씨 주변에 앉아 박수를 쳤던 청중들 수십명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어리둥절 니콜라스 윈턴이 구한 669명의 어린이는 나중에 각자 성장하고 가정을 이루어 그 수가 6천여명에 달하게 됐다고 한다. 그럼에도 그는 마저 구하지 못한 250명에 대한 죄책감과 체코에 그대로 남은 동료들에 대한 미안함 등으로 이 일을 50년 동안이나 숨기고 살아왔다. 이 공로로 니콜라스 윈턴은 2003년 기사에 봉해졌으며 2015년 106세를 일기로 타개한다. 출처 감동이란 이런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