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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요, 한 잔 더!” - 이영승 (기업인, 오너쉐프)

가게는 변해도 손님은 변하지 않는다  콧잔등에 솜털이 보송보송할 무렵부터 호프집이란 곳을 출입했다.  내가 기억하는 호프집이란 곳의 scene은 칸막이가 답답하리만치 빽빽하게 둘러싸이고 조명은 어둑하니 상대방 모습을 확인하기 충분하게끔만 연하게. 어찌 보면 음침하고 무언가 어른들만이 하는 행위들을 해야만 할 것 같았던.  예전의 그런 기억들을 품고 다시 호프집을 찾으면 어떤 집은 요새 트렌드에 맞춘다며 여러 가지 세련된 시도를 하는 곳도 있고 어떤 집은 생맥주와 치킨, 감자튀김 등만을 팔며 이전의 모습을 간직하려는 집도 있는.  전자나 후자나 내가 느끼는 호프집이란 분위기는 예전과 그리 다르지 않았다. 여전히 낮은 백열 조명에 고삐리부터 술 취한 아저씨들까지 그저 간단히 2차 또는 3차의 여흥을 즐기러 온 사람들. 가게는 변해도 손님은 변하지 않는다.   고교시절 방과 후, 친구가 불러 나간 호프집에는 친구녀석 두세 명과 첨 보는 여자아이들이 있었고, 두꺼운 생맥주 잔이 부딪히고 통성명이 난무하는 지루함이 계속되었다.   늘봄 호프집, 가든 호프집  고교시절 방과 후 집으로 돌아와 책가방 던져놓고 아무 생각 없이 침대에 몸을 던진 채 천장만 물끄러미 쳐다보고 있으면 침대맡 전화기가 울리고 받아보면 늘 그렇듯 친구녀석의 지겨운 목소리.  나가기 싫다 해도 다그치듯 나오라는 녀석 목소리가 참 귀찮았다. 편한 복장으로 갈아입은 뒤 쓰레빠 끌고 나간 호프집에는 친구녀석 두세 명과 첨 보는 여자아이들. 두꺼운 생맥주 잔이 부딪히고 통성명이 난무하는 지루함이 계속.  젊은 남녀들이 서로를 더 밀착시키기 위해 웃기고 웃어주는 걸 구경하며 땅콩이나 줏어 먹다 궁뎅짝이 일찍 근지러운 나는 화장실 간단 어수룩한 핑계를 던진 뒤 호프집을 나왔다. 나오며 생각한 것은 왜 저 호프집 이름이 늘봄일까.  저 건너편 호프집 이름은 또 왜 가든일까. 되도 않은 추리를 골몰하며 집으로 돌아오는 동안 담배는 딱 한 대만 피웠다.  맥주 500 한 잔과 담배 두 대  군대 첫 휴가를 나와 어설픈 까까머리를 야구모자로 열심히 감추고 나간 강남역엔 민간인들이 신기하게도 참 많이 다녔다. 세련된 느낌의 맥주 펍에서 간만에 만난 친구녀석들은 군 생활은 어떠냐며 귀를 쫑긋 세우고 들어주는 척을 해줬다.  물론 자기들도 이제 가야 할 처지이기에 궁금하기도 했겠지만. 허나 내가 주섬주섬 말하는 군대 이야기는 별로 공감이 되지 않는 눈치였고 한잔 두잔 두꺼운 500잔이 비워지는 동안 한 녀석은 여친 만나러 가고 한 녀석은 가게 보러 간다고 일어서고.  집 가는 방향이 같은 녀석과 둘이 남아 남은 맥주를 들이킨 뒤 택시를 타고 가다 남은 이야기는 집 앞 공원에서 마저 나누고 들어갔다. 녀석의 고민을 들어주는 동안 담배는 딱 두 대만 피웠다.    내가 주섬주섬 말하는 군대 이야기는 별로 공감이 되지 않는 눈치였고 한 잔 두 잔 두꺼운 500잔이 비워지는 동안 한 녀석은 여친 만나러 가고 한 녀석은 가게 보러 간다고 일어섰다.   담배는 딱 세 대만 피웠다  군대 말년이 되어 나가면 무얼 할지에 관하여 끊임없는 상상과 희망의 나래를 폈다. 그토록 풍운의 꿈을 가슴에 품고 제대를 한 뒤 이쪽 저쪽을 다녀봐도 생각했던 것과는 달리 내 신변에 대단한 변화가 일어나지는 않았다.  그저 늘상 친구녀석들이나 만나 술집이나 전전하며 친구녀석이 운영하는 포켓볼 클럽에서 죽이나 때리고 끝나면 술 또 술... 집으로 돌아와 대충 씻고 몸을 누이면 다음날 한나절이나 되야 눈이 떠졌다.  눈곱도 떼지 않은 채 냉장고 열어 냉수 한 바가지 퍼 마신 후 소파에 주저앉아 리모콘이나 뒤적거리다 해가 기울기 시작하면 자동적으로 전화가 울리고 어디서 만나기로 약속을 한 뒤 옷 훌렁 벗어 던지고 씻으러 욕실에 들어가 거울을 쳐다보면 제대할 때의 탄탄한 모습은 어느새 온데간데없고 축 늘어진 뱃살만이.  그래도 나름 꽃단장 한답시고 지난 주말 로데오에서 산 옷들 골라 입고 귀때기에 향수 살포시 뿌려준 후 깔끔하게 닦은 구두 신고 나가면 남들이 어찌 봐주건 간에 내 기분이 참 그럴듯했다.  압구정 단골 카페에 들어서면 나와 같은 한량들이 수두룩. 옹기종기 앉아 오늘의 할 일을 토론해봐도 별 볼일이 없어 아는 클럽이나 가서 푸싱 테이블이나 받고 번쩍거리는 라이트에 귀가 터질 것 같은 굉음의 일렉트로닉 사운드는 오래 앉아 있기 참 불편했다.  바지 춤에서 울리는 진동을 느끼고 전화를 받으면 반가운 녀석 목소리가 저 너머에 들리고. 같이 간 선배 형, 친구들에게 미안하다 말하고 나와 달려간 곳은 녀석이 있다던 호프집. 반년만에 휴가를 나와 눈 밑이 때꾼해진 녀석은 참 반가웠다.  항상 그랬듯 첫 잔은 손목 무겁도록 1,000cc로 들이키고 서로의 근황을 주거니 받거니 하다 보면 화장실 서너 번은 다녀와야 했다. 눈꼬리가 쳐져 “여기요, 한 잔 더!”를 외칠 동안 담배는 딱 세 대만 피웠다.  그저 늘상 친구녀석들이나 만나 술집이나 전전하며 친구녀석이 운영하는 포켓볼 클럽에서 죽이나 때리고 끝 나면 술 또 술...   격세지감  감자튀김. 이전엔 하도 먹어 얼굴이 찡그려졌는데 세월이 한참 지나 간만에 호프집에 들르니 이게 먹고 싶어졌다. 대학 선후배 상견례 같은 걸 하면 늘 가던 호프집에서 테이블에 깔리는 건 늘 그렇듯 골뱅이소면 아니면 감자튀김.  어차피 그런 자리에서 안주 찾아 먹으려고 있는 건 아니었기에 꼴에 선배랍시고 애기들 술 따라주고 한 바퀴 돌다 보면 급하게 들이킨 술들이 머리꼭지 근처로 꽤 올라왔다.  어디 가서 항상 오야지 노릇을 해야 직성이 풀리는 허접한 성미였기에 그렇게 한참을 떠들고 나면 이미 필름은 안드로메다로 사라진 지 오래.  다음날 학교에 가면 수줍게 인사하는 녀석들이 알고 보니 어제 인사한 후배들이라고. 당장 해장국이나 한 그릇 들이키고 잠이나 퍼 자고 싶지만 술 사달란 강철 간뎅이를 가진 후배녀석들 덕분에 오후 나절부터 다시 호프집에서 술질을 할 수밖에 없었다.  물론 감자튀김 한 접시 덩그러니 놓은 채. 그때 새파랗던 녀석들이 이제는 결혼을 한다며 애기 첫돌을 한다며 연락들을 하는 통에 격세지감을 피부로 느낀다.  잔칫집에 잠깐 들러 봉투를 집어 넣고 간만에 만난 친구, 선후배 인사한 뒤 물끄러미 행사 순서 구경하다 밥 주면 밥 먹고 옹기종기 모여 있는 아이들에게 인사하고 가려다 어디 가느냐고 잡힐라칠 땐 그냥 슬쩍 웃어주면 잡힌 손이 놓아졌다.  감자튀김. 이전엔 하도 먹어 얼굴이 찡그려졌는데 세월이 한참 지나 간만에 호프집에 들르니 이게 먹고 싶어졌다.   비어 없어지면 물밀듯이 밀려오는 공허함  이젠 어딜 가서 대장 노릇 하기도 힘에 겹고 그렇게 막무가내로 대할 아이들도 너무 컸다.  어떤 녀석은 나보다도 더 늙어 보이는 녀석들도 있고 벌써부터 머리가 빠진다며 가발 쓰고 나온 녀석도 있는가 하면 자기만치 큰 아이를 자식새끼라며 데려온 녀석은 참 징그러웠다.  간만에 먹기에 맛있을 줄 알았던 감자튀김은 맛이 없었다. 정확히 얘기하면 감자튀김이 맛이 없었다기보다 내가 맛이 없어졌다.  이젠 뭔가를 더 많이 신경 써야 그걸 맛있다고 느끼는 좁아진 내 자신을 느끼면서 그 옛날 동네 호프집 테이블 위에 얌전히, 학교 앞 선후배 상견례 하느라 정신 없던 호프집 테이블에도, 그리고 그 옛날들을 떠올리며 우적우적 집어먹던 이날도 분명 감자튀김이 있었다.  간과하기 쉬운 것들이 많은데 내가 짧은 생을 사는 동안 나와 오랫동안 시간을 보내주는 친구들이 꽤 많았다. 이 친구들은 나의 기호에 맞는다는 장점을 가졌고 날 항상 즐겁게 해준다는 걸 정작 내 자신은 모르고 지나치는 경우가 많았던.  사람도 마찬가지로 내 곁에서 항상 함께 해준 사람들은 그 고마움을 모르고 지나치게 되지만 막상 그 자리가 비어 없어지면 공허함이 물밀듯이 밀려온다. 그래서 있을 때 잘하란 말이 있지만 또 그러지 못하는 게 사람 맘이다.  좋은 줄 알면서, 고마운 줄 알면서도 앞에선 그런 내색하기 싫고 외려 더 퉁명스럽기 짝이 없는, 청개구리는 특별한 캐릭터가 아닌 모든 이들이 가지고 있는 성격의 일부분이 아닐런지.  내 곁에서 항상 함께 해준 사람들은 그 고마움을 모르고 지나치게 되지만 막상 그 자리가 비어 없어지면 공허함이 물밀듯이 밀려온다.   생맥주, 감자튀김 그리고 자괴감  내가 아주 어렸을 적엔 거울이란 걸 보고 이게 내 모습이라고 느껴지지 않았다. 내가 보이는 세상에서 사람들은 저렇게 생겼고 나는 그 사람들을 바라보는 눈이 내 전부인 듯 느껴졌던.  항상 눈은 자신이 아닌 남을 바라보기 때문에 통상 사람들은 남 이야기들을 많이 한다.  정작 내가 하는 행동이나 내가 느끼는 생각들을 이야기하는 기회가 많지 않은데 가끔은 내 자신도 많이 쳐다보고, 그렇다고 거울 보고 미친 사람처럼 혼잣말하란 얘기가 아니라, 내 처지를 바로 새기고 내가 어떤 행동을 앞으로 해야 할지를 다듬어 보는 게 중요하지 않나 싶은…  앞으로 얼마나 더 많이 호프집을 찾을지 모르지만 거품 가득 담겨진 생맥주를 몇 번은 더 마실 테고 한 접시 푸짐하게 담긴 감자튀김을 몇 번은 더 줏어 먹을 것이며 그때마다 점점 약해져 가는 정신과 몸뚱이를 느끼며 싼티 나는 자괴감을 느낄 게 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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