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콜드 체인, 세상을 바꾼 냉기의 혁명(4)

남들 한 번 가기도 꺼리는 군대를 두 번 가겠다고 자원한 누메로 얘기를 하고 있었습니다. 혹시 캡틴 아메리카 시리즈 첫 영화 <퍼스트 어벤저>를 보신 분들은 기억하실까요? 영화 초반에 비쩍 마른 주인공이 군대에 자원했다가 퇴짜맞는 장면이 있었죠.

1차 대전 발발 즈음엔 젊은이들 사이에서 군에 자원하는 것이 의무이자 일종의 모험 같은 것으로 여겨진 모양입니다. 낯선 유럽 대륙에 가서 군에서 선전한 것처럼 안전하고 안락한 참호에 틀어박혀 적을 노려보며 몇 개월쯤 있다보면 어느새 예정된 주둔 기한이 끝나 무사히 고국으로 돌아갈 수 있다. 다소 과장되긴 했지만 당시 군에 지원한 청년들이 전쟁에 대해 가진 인식은 그런 정도였죠. 그 전쟁이 수년이 넘게 이어지고 전세계 열강이 참전하는 국제전이 될 거라곤 아무도 상상하지 못했습니다.

<퍼스트 어벤저> 영화 트레일러. 영상 가장 앞부분에 주인공이 군에 지원했다 퇴짜맞는 장면이 나옵니다. 물론 실제에 비하면 신병 지원소가 만화처럼 과장되게 표현되긴 했지만요.

어쨌거나 누메로도 캡틴 아메리카처럼 호기롭게 군에 자원하러 일부러 워싱턴까지 옵니다. 막 설립한 회사 운영이 아직 채 본궤도에 오르기도 전이었는데도 말입니다. 결과적으로 그 선택이 누메로와 프레데릭에겐 전화위복이 됩니다.

워싱턴에서 누메로는 우연히 육군이 가진 고민을 알게 됩니다. 미 육군은 유럽 대륙으로 보낼 장병들을 위해 각종 보급품을 안정적으로 수송해야 했죠. 그 보급품들 가운데는 물론 식료품이나 의약품 따위도 포함되어 있었습니다. 도중에 상하거나 훼손되지 않고 신선하게 목적지까지 물품을 수송하자면 무엇보다도 향상된 냉동 기술이 꼭 필요했죠. 마침 누메로에겐 그들의 고민을 해소해 줄 기술이미 있었습니다.

이 사실을 깨닫자, 누메로는 군에 자원하겠다는 계획을 접고 다시 서모컨트롤 사로 돌아옵니다. 프레데릭이 개발한 냉동차 유닛을 군 사양으로 개량해 생산하기 위해서였죠. 완성해 군에 납품한 냉동 장비는 현장에서도 고장 없이 잘 작동했습니다. 미군은 정식으로 서모컨트롤 사 제품을 군 장비로 채택하기에 이르죠. 곧 미군의 식수부터 혈장에 이르기까지 온도에 민감한 모든 품목이 서모컨트롤 사의 냉동 트럭으로 미군이 진출한 모든 전역에 배송됩니다. 유럽과 아프리카, 심지어 태평양 전선에서도 누메로와 프레데릭이 개발한 냉동차가 수송을 맡았죠.

군과 협력하면서 서모컨트롤 사는 비로소 두각을 보였습니다. 프레데릭이 완성한 기술은 단순히 트럭을 개선할 뿐 아니라, 야전병동과 병기창, 심지어 B-29 폭격기의 조종석과 엔진에까지 적용되었죠. 전쟁 동안 서모컨트롤 사가 미군과 계약한 금액은 천만 달러를 넘었습니다.

2차 대전이 끝났을 때, 서모컨트롤 사는 더 이상 작은 회사가 아니었죠. 1949년 기준 직원 200명에 매출 400만 달러 이상을 달성한 회사는 냉동 기술 훈련 학교를 자체 설립해 보유했고, 미 대륙과 중동, 유럽까지 진출해 제품을 판매했습니다. 프레데릭은 대전 후 기차, 배, 트럭 등으로 쉽게 옮겨 실을 수 있는 냉장 컨테이너를 개발했고, 동업자 중 하나인 Myron Green은 전국 유통 및 서비스망을 구축해 회사의 기틀을 세웠죠. 때맞춰 1950년대 새로운 산업이 등장해 급속히 성장합니다. 바로 오늘날 우리가 잘 아는 냉동 식품과 슈퍼마켓 산업이죠.

프레데릭은 이 이후로도 다양한 기술을 연구해 특허를 내고 신제품을 출시했습니다. 1955년 버스용 에어컨을 최초 개발했고, 58년에는 기존 가솔린 엔진보다 훨씬 뛰어나 장거리 수송에 적합한 디젤 엔진 냉동차 설비를 만들어냈습니다. 그가 생전 제출한 특허만도 60개가 넘죠. 그 분야도 냉동 설비에만 국한하지 않고, 엑스레이와 엔진, 음향 설비등 다양한 영역에 걸쳐 있습니다.

1944년 프레데릭은 미국 최초로 냉동 엔지니어 협회 회원이 된 흑인이었습니다. 누메로는 계속 프레데릭과 다른 동업자들 도움을 받아 회사를 키웠죠. 50년대 중반에 서모컨트롤 사는 사명을 변경, 써모 킹Thermo king coperation 사로 바뀝니다. 현재도 전세계에서 검증된 기술력과 우수한 품질로 트럭용 냉동기뿐 아니라 다양한 냉동 수송 기술이 필요한 분야에 진출해 있는 기업입니다.

써모 킹 사가 1960년에 발표한 NWD 62 모델. 현재 써모 킹 사의 냉동 트레일러 제품들의 기본 틀이 된 모델입니다. 냉동차 이외에도 프레데릭 존스는 화물 열차의 냉동 차량, 군에서 혈장이나 약물 따위를 수송할 수 있는 휴대용 냉장 장치 등도 발표했습니다. 써모 킹 사가 발표한 상품 가운데는 심지어 우유 냉각기나 골프 카트 따위도 있습니다.

자신의 발명이 세상을 바꾸어놓은 것을 본 후, 1961년 2월 프레데릭 존스는 폐암으로 사망합니다. 미네소타는 1977년 그의 공로를 인정해 시 명예의 전당에 이름을 올리죠. 고아로 자라나 흑인이란 이유로 차별받던 그가 마지막엔 어느 누구도 그 공헌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는 위인이 된 겁니다.

한편 사장인 조셉 누메로는 평생을 함께 한 파트너가 사망한 후, 회사를 웨스팅하우스 일렉트릭 사에 팝니다. 1963년까지 그는 계속 사장으로 자리를 지킨 후, 동업자였던 마이론 그린Myron Green에게 넘기고 스스로는 명예 회장으로 물러납니다. 회사는 60년대 극심한 파업을 여러 차례 겪지만 흔들리지 않았죠. 하지만 66년, 써모킹 사는 결코 잊을 수 없는 참사를 겪게 됩니다.

때는 1966년 3월. 회사는 우수 딜러와 직원들을 뽑아 포상 여행을 보내 주었습니다. 샌프란시스코 공항에서 출발해 하와이 호놀룰루, 일본 하네다를 거쳐 홍콩 카이탁 공항으로 향하는 영국해외항공 소속 911편 비행기에 75명의 임직원이 몸을 싣죠. 회사는 이들에게 17일간의 동양 여행 패키지를 제공할 계획이었습니다. 하지만 여행 도중 모든 계획이 물거품이 되어버립니다.

호놀룰루에서 도쿄 하네다로 향하던 중, 비행기는 기상 악화로 후쿠오카 공항으로 회항합니다. 후쿠오카에서 하루 대기한 후, 비행기는 다음날 원래 계획했던 하네다 공항에 착륙하죠. 기상 상황은 좋아서 후지산이 뚜렷이 보일 정도로 맑았다고 합니다. 지상에서 비행 계획을 브리핑한 후, 모든 준비를 마치고 이륙한 비행기는 예정대로 홍콩을 향해 날아갔죠.

그러다 문득 기장은 기수를 잠시 돌려 후지산 정상으로 향합니다. 물론 비행기 고도는 충분히 높아서 산 정상에 부딪칠 우려는 없었습니다. 탑승객들에게 하늘에서 보는 후지산 정상 풍경이라도 보여주려 했던 걸까요? 하지만 정상 즈음에서 비행기는 난기류를 만나 견디지 못하고 동체가 공중분해되어 버립니다. 날개를 잃은 항공기는 후지산 동쪽 6킬로 떨어진 숲에 뿌연 연기를 내며 추락하죠. 써모킹 임직원 75명을 포함해 당시 탑승객과 승무원 124명은 모두 사망합니다.

사망한 임직원 가운데엔 임원급이 3명, 주요 딜러가 35명이나 포함되어 있었습니다. 사망한 임원 가운데엔 부사장 랄프 포터도 있었죠. 또 회사에서 보내주는 포상 여행이었기에, 부부 동반으로 참석한 경우가 총 52명이나 되었습니다. 이 바람에 63명의 아이가 부모를 잃었죠. 써모 킹 사 입장에선 창사 이래 최악의 참사를 경험한 것입니다.

BOAC 911편 추락 사고. 피해자 중엔 일본인, 한국인도 소수 있었지만 대부분이 써모 킹 사 임직원과 같이 외국인들이었습니다. 이 사고 이후 난기류에 대한 주의 대응이 강화되었다고 합니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회사는 이후로도 건재했습니다. 모기업 웨스팅하우스가 어려움을 겪을 때도 그룹 내에서 유일하게 좋은 성적을 내어 알짜 기업 노릇을 톡톡히 해냈죠. 1991년 누메로가 사망할 당시엔 이미 회사는 수백만 달러 규모 사업체가 되어 있었습니다. 전 세계에서 2700여 명을 고용하고, 도미니카나 아일랜드, 스페인에도 공장이 있었죠. 1993년엔 일본 시장 거의 절반을 점유했고, 이듬해에는 동유럽, 아시아 지역에서 딜러망이 36%나 신장했습니다.

1991년, 미리 적은대로 조시 부시 대통령이 백악관 로즈 가든에서 조셉 누메로와 프레데릭 존스에게 훈장을 수여하는 행사가 있었습니다. 프레데릭 존스는 이미 사망한 뒤여서 직접 훈장을 전달받지는 못했지만, 그 미망인이 행사장에서 대신 수령했죠. Medal of Technology & Innovation이 흑인에게 수여된 건 프레데릭 존스가 최초였습니다. 두 사람에게는 냉동 운송 기술을 개발해 선적과 식료품 시장을 완전히 뒤바꾸어놓은 공로가 인정되었죠.

Medal of Technology & Innovation. 1985년 레이건 행정부에서 처음 수여한 이래, 역대 대통령들이 산업계에서 가장 뛰어난 업적을 세운 사람들을 선정해 표창했습니다. 듀폰 사나 빌 게이츠, 3M 등도 같은 상을 수상한 바 있습니다.

아마도 두 사람 중 어느 누구도 자신이 이러한 영광을 누릴지는 생각지 못했을 겁니다. 하나는 대공황으로 완전히 파산하고 학점이 모자라 법대 졸업을 하지 못한 청년이었고, 다른 하나는 자신만의 경주용 차를 가지고 대회에 나가길 바랐던 극장 영사기사였죠. 그들에겐 기회가 있었고, 기회를 붙잡을 능력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 무엇보다도 오늘날 우리가 편의점과 마트에서, 혹은 인터넷 쇼핑몰에서 그들이 남긴 유산으로 혜택을 누릴 수 있게 된 건, 1930년대 누메로와 프레데릭 두 사람이 서로를 알아보고 손을 맞잡은 그 때 덕이란 생각이 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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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10 동인(기인)에게 염주와 경전 한부를 본산에서 주었다(...)' 이동인이란 이름이 기록에 등장하는 건 이때부터입니다. 이동인이 보았을 것으로 추정되는 일본 해군 군함 히에이. 1878년 2월에 취역한 콘고급 코르벳함입니다. 일본은 이 전함을 3500톤급 미만 함선인 삼급함으로 분류했고, 청일전쟁과 러일전쟁 등에도 참전시켰죠. 측량선 등으로 1908년까지 쓰다가 1912년 매각되어 나중에 해체됩니다.함선명은 그 이후 1914년 취역해 1, 2차 대전에 참전하는3만 6천톤급 순양전함 히에이가 물려받게 됩니다. 이동인이 방문한 히가시혼간지 부산 별원은 사실 일본 정부와 밀접한 관계가 있는 절이었습니다. 히가시혼간지는 막부 후원을 받아 급성장한 곳으로, 개항 이후 일본이 막부파와 천황파로 나뉘어 사실상 내전에 돌입하자, 막부에 군사비를 지원하는 것은 물론 스스로 승군을 조직해 참전하기까지 하죠. 하지만 이건 잘못된 결정이었는데요. 막부의 우두머리인 쇼군이 정권을 천황에게 전격 돌려주는 대정봉환이 일어나기 때문이죠. 이후 막부파 잔존세력이 1860년대 말 무진전쟁으로 완전히 소탕되면서 히가시혼간지는 정치적 입지가 악화됩니다. 게다가 메이지 정부는 고대 천황제에 입각해 제정일치와 충효일본을 국시로 내세우고 신토를 국가종교로 채택하는 일련의 정책을 채택하죠. 그 결과 민간에서조차 불교의 영향력은 악화하여 불교 사원들의 폐쇄 혹은 합사, 신사 내 불교유물 파괴 등 폐불훼석 현상이 일어납니다. 일본 불교는 이런 움직임에 대응해 이후 정부 시책에 적극 동조하게 되죠. 도쿄 히가시혼간지. 혼간지는 한때 켄뇨가 오다 노부나가와 대립해 무장 투쟁에 나설 정도로 위세가 대단했지만, 결국 노부나가에 항복합니다. 켄뇨 사후 두 아들을 중심으로 노부나가에 대한 강경파와 화평파가 대립하면서 교단이 둘로 쪼개지죠. 이때 히가시혼간지는 도쿠가와와 손을 잡고 그 후원을 받는 반면, 니시혼간지는 교토에서 천황과 정부 관료들의 후원을 받았다고 하네요. 강화도 조약 후인 1877년, 일본 정부 내무경 오쿠보와 외무경 데라지마가 히가시혼간지 법주 곤뇨에게 조선 포교를 의뢰합니다. 여기에 응해 같은 해 9월, 오쿠무라 엔신이 부산에 파견되죠. 그는 파견 이후에도 조선에 주재한 하나부사 일본 공사, 마에다 겐키치 부산관리관 등과 긴밀히 연락을 주고받았고, 이후 원산항과 인천항 개항에 맞춰 각 개항지에 부산별원의 지원을 설립하고 포교를 했다고 합니다. 그는 그의 절에 호기심으로, 혹은 배움을 구하고자 찾아오는 조선 승려와 양민들에게 <진종교지>라는 책을 선사했는데요. 이 <진종교지>란 진종의 수행법인 진체와 세속의 왕법에 순응하는 속체가 하나를 이룰 때 완전한 교의가 성립한다는 진속이체론을 순한문으로 해설한 책이라고 합니다. 예컨대 신라 때의 호국불교사상과 비슷하려나요? 히가시혼간지 광주본원. 현 부산 대각사로, 도심 한복판에 경내가 있는 절입니다. 지금도 일본범종 등 창건 당시 흔적이 있는 듯합니다. 이 절을 창건한 오쿠무라 엔신의 선조가 오쿠무라 죠신인데, 그는 1585년 조선에 건너와 고덕사를 세우고 일본 정토진종을 포교하려 시도합니다. 이게 정토진종에서는 첫 해외 포교 기록이라네요.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죠신은 전사자를 위령하겠다며 종군합니다. 한편 엔신은 히가시혼간지 10대 주지로부터 5.5cm짜리 황금불과 아미타여래 외 24개 품목을 받고 조선포교를 명받아 1877년 히라노 케이스이와 함께 조선으로 건너오죠. 여기서 엔신은 포교사 육성을 위한 어학사, 부인회 조직, 채소 키우는 법 교육 등 활발하게 사회 활동과 포교 활동을 겸합니다. 어쨌든 히가시혼간지 부산 별원의 엔신과 꾸준히 교류를 주고받던 이동인은, 1879년 8월 중순 급한 일로 본산에 갔다가 돌아온 엔신에게 일본에 가겠다는 뜻을 밝힙니다. 당시 조선은 허락없이 백성들이 외국에 나가는 것을 금지해서 이동인이 일본에 가려면 밀항하는 수밖에 없었죠. 엔신은 그가 일본에 가는 것을 돕기로 하고 그 내역을 이렇게 기록했습니다. 동인은 원래 승려인데, 항상 나라와 호법을 걱정해왔다. 최근 조선국의 국운과 쇠퇴하고 종교는 이미 땅에 떨어지고 있었다. 이 때, 혁명당 박영효, 김옥균 등이 국가의 쇠퇴한 운명에 분개하여 크게 쇄신하려고 하였다. 또한 동인도 뜻을 같이하였으므로 박영효, 김옥균이 동인을 불러들여 중용하게 되었다. 따라서 열국의 공법 등을 알기 위해 우리 종문에 들어 일본에 건너가려고 하였다. 동인은 박영효로부터 받은 순금봉 4개(길이 2촌여, 둘레 1촌여)를 나에게 보여주며 이것으로 여비로 써 달라며 건네주었다. 이에 와다씨 및 총영사관 마에다 겐키치씨와 상의하여 본산에 보내기로 하였다. 이것은 한국개혁당 일본에 건너가는 처음시도라. 동인이 일본에 도착하여 나에게 편지를 보내왔다. 여기서 우리에게도 익숙한 이름들이 나옵니다. 박영효, 김옥균은 개화파 가운데서도 급진적인 개화를 기도한 인물들이고, 나중에 갑신정변의 주역들로도 알려져 있죠. 또 엔신은 이들을 '혁명당', '한국개혁당'이라고 칭해 이들이 이미 일정한 세력을 갖춘 조직처럼 언급하고 있습니다. 이동인은 소위 혁명당으로부터 지원을 받았고, 일본 불교뿐 아니라 열국 공법, 즉 국제법 등을 알고자 했죠. 또 이동인의 일본 밀항을 돕기 위해 히가시혼간지뿐아니라 일본 총영사관 측으로부터도 협조를 얻습니다. 이동인은 어떻게 박영효나 김옥균 등과 알게 됐을까요? <김옥균전>에는 이동인을 북한산 기슭 산사 암주라고 하면서, 하나부사 영사의 통역을 맡은 가에데 겐데쓰를 통해 일본 불교를 접하고 일본어를 배웠다고 합니다. 한편 개화파의 스승인 백의정승 유대치는 평소 불교에 관심이 많았는데요. 이동인이 유대치에게 불경을 가르치려고 그의 문하를 드나들다가 김옥균을 만났고, 김옥균은 이동인의 식견과 품성, 일본인들과의 교우 관계 등을 높이 사서 그를 일본에 보냈다고 합니다. 또 일본 개화파의 거두인 후쿠자와 유키치가 운영하던 <시사신보>에선 김옥균이 애초에 일본에 갈 뜻이 있었는데, 국법 때문에 함부로 건너가지 못하고 대신 일본에 갈 사람을 구하다가 이동인을 우연히 알게 되어 극진히 대접해 친해졌다고 썼죠. 이동인의 이름은 서재필 회고록에서도 발견할 수 있다고 합니다. 이동인은 부산서 입수한 <만국사기>나 세계 각국 도시, 군대 규모를 찍은 사진, 만화경 따위를 김옥균 등에 보여주고 환심을 샀다고 하네요. 당시 그런 서학 서적들은 불온서적 취급을 받아 가지고 있는 것만 발각되어도 처벌을 받을 수 있었는데, 그래서 개화파 인사들은 한곳에 머물며 책을 읽지 못하고 이절 저절 옮겨다니며 이동인이 보유한 책들을 읽었다고 합니다. 조선에서 최초로 성냥을 소개한 게 언제인지 아시나요? 1879년에서 1800년 사이 이동인이 이들 개화파에게 성냥을 선보인 게 아마도 최초일 거라고 합니다. 이동인은 이러한 서양 문물을 모두 부산을 드나들면서 구했던 모양입니다. 김옥균은 이동인에게 이러한 것을 더 구할 수 있는지 물었다고 하죠. 어쩌면 서양 문물을 구하는 것 역시 이동인이 일본으로 건너가게 된 목적 가운데 하나였을 겁니다. 유대치, 본명 유홍기는 역관 집안 출신의 한의사로, 역관인 친구 오경석이 중국에서 <해국도지>, <영환지략>, <박물신편> 등을 가져오자 이 책들을 읽고 개화사상에 눈뜬 인물입니다. 이후 1860년대 셔먼호 사건이나 병인양요, 신미양요 등 외침 사건들을 보고 당시 서구 열강들의 동양 침탈로 초래한 위기가 조선에도 닥쳤다고 보죠. 1869년 박규수가 한성판윤에 전임되어 상경하자, 유대치는 박규수에게 개화파를 형성해 혁신정치를 실현해야 한다고 제안해 의견이 일치합니다. 그 결과 1870년대 초부터 박규수의 사랑방에서 박영교, 김윤식, 김옥균, 박영효, 홍영식, 유길준, 서광범 등 다수 양반자제들이 개화사상을 교육받죠. 특히 김옥균은 유대치의 지도와 영향을 받아 불교 신앙을 갖기도 했습니다. 이렇듯 유망한 개화파 청년들이 모두 유대치를 스승으로 모시자, 세간에서 그를 백의정승이라고 칭하게 됩니다. 개항 후 유대치 역시 정부 개화정책 추진을 돕기 위해 1882년 설치한 감생청의 종9품 부사용에 임명되는데요. 이후 정9품 사용직까지 오르지만 수구파의 반발로 감생청이 1년만에 폐지되면서 그 역시 공식 직함을 맡을 수 없게 됩니다. 이후 임오군란, 청의 내정 간섭, 갑신정변 등을 두루 겪다가 갑신정변 진압 후 행방이 묘연하게 되죠.(위 사진은 1884년 갑신정변 주요 인물들이 함께 찍은 것입니다.) 이동인은 일본 옷을 입고 벙어리 흉내를 내면서 부산에 출장나온 승려 와다 엔쥬의 도움을 얻어 교토로 도항하는 데 성공합니다. 그 후 교토에 약 10개월간 체류하며 일본어를 익히죠. 1879년 8월 28일 도쿄 니치니치 신문은 오사카일보를 인용해 이 도항 경위를 설명합니다. 여기 따르면, 이동인이 혼간지 본산에 교파 가입 청원을 했고, 혼간지 본산은 외국인을 함부로 받아들이는게 좋지 않다 여겨 거부했지만 그가 간절하게 재요청하자 받아들였다고 합니다. 그리하여 8월 4일 이동인의 거류 사실을 관계 당국에 신고했다고 했죠. 1880년에 이동인은 득도식을 통해 정식으로 정토진종 승려로 인정받습니다. 이후 도쿄로 건너와 아사쿠사 별원에 머물며 어학을 습득하죠. 그는 도쿄에서 학문뿐 아니라, 여러 인물과 교류를 갖기도 합니다. 이를테면 조선인 최초로 일본 개화사상의 대표적 인물인 후쿠자와 유키치를 만난 것도 바로 이동인이라고 하죠. 또 4월 25일에는 일본 외무성에서 하나부사 공사와 회담을 갖기도 합니다. 하나부사는 이 자리에서 이동인에게 들은 내용을 <동인문서>라고 하는 기록으로 남기는데요. 여기서 다룬 내용들이 또 의미심장합니다. 개화당 중심은 홍문관 교리 김옥균으로 29세에 불과하지만 고위 참판의 가문 출신으로 재덕을 갖춰 사람들을 잘 이끈다. 역관 오경석과 함께 유홍기(유대치)에게 가르침받았다. 금릉위 박영효는 20세로 일품관이며 재능이 있고 뜻을 품은 사람이다. 강위는 유대치와 함께 개화당이 선배로 우러러보는 인물이다. 조선정권은 이처럼 중대한 시기에 세도를 할 사람이 없다. 국왕, 명성왕후, 영의정 이최응, 왕비의 오빠 민태호 4인의 합의가 겨우 세도를 하는 정도이다. 서양인은 타인이나, 일본인은 형제다.(...)나는 위급할 때 의지할 수 없는 타인에게 이익을 얻게 하기보단, 형제 사이인 일본인과 항상 이익을 나누고 싶다. 개혁의 모범을 얻기 위해 동지 중 십수인을 동반해 가서 육해군이며 외무며 회계며 권업 등의 사업과 제도의 대체를 모두 조사토록 해야 한다. 이동인은 이처럼 자신이 아는 정보를 일본 영사인 하나부사에게 줄줄 털어놓은 것처럼 보입니다. 거기에 일본인과 같은 아시아인으로서 유대감을 강조하는 한편, 후일 실현되는 신사유람단 같은 구상을 거리낌없이 내놓기도 하죠. 하나부사 역시 평소 조선인들을 일본에 보내 유학할 수 있게 해야한다고 주장했던 모양입니다. 그가 일본에 체류하면서 만난 건 외무성 관료들뿐만이 아니었습니다. 5월 12일, 주일영국공사관 서기관 어네스트 사토우를 찾아간 그는, 아사노라는 일본식 가명을 쓰면서 자신이 동포를 계몽하러 일본에 왔다고 털어놓습니다. 그러면서 사토우에게 동포들에게 보여줄 유럽 건물, 기계 사진, 무엇이든 충격을 줄 만한 물건을 요청합니다. 또 매일같이 찾아와 사토에게 조선어를 가르쳐주기까지 했다네요. 사토는 그런 그를 자기 일기에 '나의 조선 친구'라고 칭했고, 영국 공사관도 이동인을 신임해 비밀 요원 자격을 주었다고 합니다. 어네스트 사토. 일본 개항 직후 일본의 혼란상과 메이지 유신, 중국 의화단 운동과 청일전쟁, 러일전쟁을 모두 지켜본 영국인입니다. 일본어를 배워 통역관 역을 했을 뿐 아니라 일본에 대해 개인적으로 애정도 있었던 걸로 보입니다. 1880년 8월, 이동인은 또 한번 운명적인 만남을 갖게 됩니다. 조선 정부에서 2차 수신사로 일본에 파견한 사절단이 도쿄로 와서 일본 정부가 숙소로 마련한 아사쿠사 별원에 머물게 된 거죠. 먼저 얘기했다시피 이 절에는 이미 이동인이 머물고 있었습니다. 곧 그는 일본 땅에서 조선에서 온 수신사 김홍집과 마주앉게 됩니다. 과연 이것은 정말로 우연한 만남이었을까요?
많은 사람들이 척박한 곳이라고 오해하는 지역.jpg
북쪽에 위치하고 우리나라 현대문학이 간도로 이주한 사람들의 고달픈 삶을 묘사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우리나라 사람들은 '만주' 하면 우리의 고토, 고구려, 여진족, 유목, 황무지, 독립군 등을 떠올리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만주의 땅은 상당히 양분이 풍부한 옥토이기 때문에 기후 대비 곡물 생산량이 많으며 헤이룽장성의 삼강평야는 우크라이나 흑토지대 수준으로 비옥하다고 한다. 때문에 만주국이 설립된 30년대부터 정부 주도로 대규모 농지개간이 시작되었으며 공산당 정부는 수많은 인민군의 목숨을 갈아가며 이곳을 개간해 만주를 중국의 대표적인 식량공급처로 만들었다. 특히 중국에서 쌀은 헤이룽장성 우창시의 '우창다미'를 최고로 쳐준다. 헤이룽장성의 쌀은 중국 지도층들이 거주하는 베이징 중난하이에 공납될 정도로 그 품질을 인정받고 있다. 하지만 그 유명세만큼 중국답게도 시장에서 가짜 우창다미가 공급되는 일이 많기에 수시로 단속의 대상이 되고 있다. 대학시절 만주로 유적답사를 떠났을 때 이 우창다미를 맛본 적이 있었는데 맛이 좋다고는 느꼈지만 그게 진품인지는 지금도 알길이 없다. 중국에서 가장 큰 곡물기업 중 하나인 베이다황 그룹도 헤이룽장성의 베이다황 시에 있는데 한때 CJ그룹과 쌀에서 단백질을 추출해 가공하는 사업을 합작했던 적도 있었던 회사다. 헤이룽장성 외에도 만주에 위치한 지린성과 랴오닝성 또한 토지가 비옥하기에 중국에서 콩과 옥수수의 주요한 공급처 역할을 하고 있다. 게다가 만주는 중국 최대의 유전중 하나인 다칭유전이 위치한 지역이기도 하다. 다칭 유전 하나만으로 중국은 1990년까지 석유를 자급자족할 수 있었으며 지금도 다칭 시는 중국에서 소득이 가장 높은 도시 중 하나라고 한다. 번외)오늘날 만주의 경제위기 석탄, 철광 등이 풍부하고 일찍이 만주국 정부의 주도로 군수공장이 다수 지어졌던 덕분에 만주는 중국에서 가장 일찍 산업화가 이루어졌던 지방이다. 일각에서는 국공내전에서 공산당이 승리할 수 있었던 이유 중 하나로 만주의 공업단지를 꼽기도 한다. 개혁개방 이전 동북3성의 별명은 共和国长子(공화국의 맏아들)이었는데 이는 그만큼 중국이 만주의 중공업을 소중히 여겼음을 의미한다. 하지만 개혁개방 이후 중국 경제의 중심이 무역에 유리한 동남 지방으로 옮겨지면서 상대적으로 낙후된 시설과 시스템을 갖춘 동북지방은 많은 공장들이 문을 닫거나 부실대출로 인한 부작용을 겪고 있다. 이로 인해 동북지방의 출산율은 중국에서 가장 낮으며, 젊은 사람들은 허베이, 산둥성 등 비교적 가까운 외지로 빠져나가고 있다. 때문에 동북3성의 기업과 지방정부는 중앙정부의 지원에 의존하는 일이 많은데 중국에서는 이런 현상을 동북병(東北病), 동북현상 등으로 부르고 있다. 낙후된 경제상황으로 인해 동북3성 사람들은 중앙정부에 대한 불만이 많은 편인데 중국이 국제사회의 비난을 감수하고 북한과 교역을 유지하는 이유 중에는 교역 중지가 동북지방의 불만을 키울 수 있다는 이유도 있다. 출처
이재명, 황강댐 무단방류 北에 유감…"사전 통보 해달라"
CBS노컷뉴스 윤철원 기자 이 지사 5일 묵 황강댐 무단방류 관련 성명서 발표 "홍수 예방은 정치나 군사 문제와 무관한 일" 이재명 경기도지사. (사진=이한형 기자) 이재명 경기도지사가 5일 북한의 황강댐 무단방류에 대해 깊은 유감을 표하고, 황강댐 방류시 남측에 사전 통보해 줄 것을 촉구했다. 이 지사는 이날 성명서를 통해 "임진강 수위가 급속히 상승함에 따라 저지대 주민 대피명령을 권고했다"고 밝혔다. 파주시장과 연천군수는 파주시 파평면, 적성면 58세대 110명과 연천군의 군남면 등 6개 면 주민 462세대 980명에 대해 각각 대피명령을 내린 상태다. 이 지사는 이어 "5일 16시 현재, 연천 필승교 수위는 10.99m로 접경지역 위기대응 주의단계인 12m에 육박했고, 같은 시각 군남홍수조절지 수위도 37.15m로 계획홍수위 40m에 근접했다"며 "이번 수위 상승도 북측이 남측에 알리지 않고 댐을 방류했기 때문으로 추정된다"고 설명했다. 지난 3일 오전 경기도 연천군 군남댐에서 임진강 상류 물이 흘러나오고 있다. (사진=연합뉴스) 그러면서 "(북측의 무단 방류가) 사실이라면 깊은 유감을 표한다"고 강조했다. 이 지사는 또 "남북을 가로지르는 임진강의 관리는 남북간 협력이 필수"라며 "북측이 상류의 황강댐에서 방류를 하면 하류인 연천과 파주쪽 수위가 급격하게 높아지며 위험을 초래할 수 있다"고 지적했다. 그는 이어 "실제로 2009년 9월 6일, 북측에서 황강댐 방류 사실을 알려주지 않아 남측 민간인 6명이 숨지는 사건이 발생했다"며 "북측이 남측에 방류사실만 제때 알려줬어도 충분히 피할 수 있었던 안타까운 사건"이라고 덧붙였다. 마지막으로 이 지사는 "홍수예방을 위한 남북협력은 정치나 군사 문제와 무관한 일"이며 "자연재해로부터 무고한 이들의 인명피해를 막는 것은 사람된 도리이자 같은 민족으로서 지켜야 할 최소한의 도의"라며 북측의 현명한 대응을 거듭 촉구했다. psygod@cbs.co.kr
약 5천대 침수차가 중고차 매물로 쏟아진다. 침수차 구별법
최근 전국에 집중호우가 며칠째 지속되면서 전국적으로 수천대의 침수차가 유통될 것으로 예상됨 (약 5천대 이상). 7월달만 3천건 접수. 자차 보험 안들고 운행하시는 분들이 40%. 그렇다면 실제로 최소 4천대~5천대 침수차들이 쏟아질 예정. 침수차들이 물론 폐차장으로 가기도 하지만, 악덕딜러들한테도 가게됨. 중고차를 구매하려는 선량한 사람들이 속아서 침수차를 사지 않도록 침수차 구별법을 공유하고자 함. *전문가들도 실제로 침수차 구별을 어려워 한다고 함. 1. 냄새로 구별 차 내부가 굉장히 깨끗해보임 첫번째 냄새를 맡아볼 것 곰팡이가 많이 핀 꿉꿉하고 습한 냄새가 남 침수된지 몇년 된 차에서도 냄새가 남 냄새를 완벽히 제거하기란 어려움 그리고 좌석을 자세히 보니 하얀거 = 곰팡이 물기가 말랐다 할지라도 차 안에 곰팡이가 핌 차 안에 좌석에 곰팡이를 발견했다 ? 침수차 확률이 높으니까 도망가 🏃‍♀️💨 2. 안전벨트로 구별 안전벨트를 끝까지 잡아당겨 보면 흙탕물 자국같은게 남아있음 흙 자국 흙이 덕지덕지 소름.. 근데 요새 이런 침수차 구별법이 돌아다니면서 안전벨트를 통째로 갈아버린다 함 앞좌석 안전벨트는 교환이 쉬운데 뒷자리는 교환이 어렵기 때문에 안전벨트 확인은 뒷좌석을 해볼것 만약 안전벨트가 다 깨끗하다 그러면 교환된건지 확인해볼것 뒷좌석 밑으로 쭉 내려오면 만약 안전벨트가 다 깨끗하다 그러면 교환된건지 확인해볼것 뒷좌석 밑으로 쭉 내려오면 맨 아래쪽에 라벨이 있음 제조일자가 10년 4월 4일이라 써있는데 안전벨트 라벨의 제조일자와 차의 연식이 같아야 함 일치 하지 않으면 침수차일 확률이 높으니 무조건 도망가 🏃‍♀️💨 3. 트렁크 확인 침수차들은 보통 트렁크가 깨끗함 (침수차 아닌 척 해야하니까) 트렁크 안에 커버를 들어보면 1차로 뭔가 느낌에 쎄함... 그리고 주변에 물웅덩이가 보임 침수차는 아무리 닦아도 또 생긴다고 함 차 안에 말도 안되는 물웅덩이가 있다 ? 도망가 🏃‍♀️💨 커버 하나 더 들면 타이어가 있는 자리가 보임 보면 진흙이 많은데 흙자국이 많은 차들은 침수차지만 반대로 이 안이 엄청 깨끗한 차도 있음 사람들이 평소 굳이 이 곳을 열어서 세차를 하진 않음 만약에 이 곳이 지나치게 깨끗하다? 도망가 🏃‍♀️💨 또 하나 트렁크 양 옆 사이드에 사진 부분처럼 뜯어서(쉽게 뜯김) 확인해보기 안쪽에 진흙, 나뭇잎 등이 있는지 확인. 있으면 침수차 😭 4. 차량 앞쪽(보닛) 열어 퓨즈박스 확인 사진을 보면 굉장히 더러운데 저건 정직한 침수차라 그런거고 우리가 보러간 중고차는 이미 청소를 해서 깨끗한 상태. 사진처럼 오른쪽 끝에 네모박스가 퓨즈박스인데 침수차는 이게 교환이 되어 있음. 퓨즈박스 뚜껑 열어서 (쉽게 열림) 볼트만 확인 볼트(빨간 네모박스) 가 녹이 슬거나 까진 게 보인다? 교체한 증거니 도망가🏃‍♀️💨 5. 웨더스트립 뜯어서 확인 고무패킹 확인 노란거 = 진흙 아래쪽 진흙 자국 확인 안에 틈안까지 진흙이 있다? 침수차니까 도망가🏃‍♀️💨 출처
펌) 코뿔소 얼라이언스 이야기.hordeisnothing
코뿔소는 존나 강하게 생겼고 실제로도 꽤 강한 생물이다 일단 체급도 그 동네에선 코끼리 빼면 제일 크고, 동물 중에서 제일 흉악하게 진화한 공격용 뿔을 가지고 있는데다가 존나 탱커같은 이미지랑 다르게 속도가 시속 55km를 넘음. 인간 중에 제일 빠른 우사인 볼트도 조깅하는 비만 코뿔소한테 시비거는 순간 꼬치구이가 된다.  물론 탱킹을 못한다는 이야기도 아님 다 자란 코뿔소 장갑을 뚫을 수 있는 생물은 코끼리 빼면 없어서 그냥 보행전차다. 근데 모든 생물과 마찬가지로 코뿔소가 무적의 완전생물은 아닌지라 이런저런 신체적 단점이 많이 있음 가장 큰 약점이 두 개 있는데 일단 코끼리와 달리 코로 딸을 못 친다는 거랑 시력이 존나 안 좋다는거임 코뿔소만 그런건 아니지만 일단 눈이 정면을 향한게 아니라 머리 양옆에 붙어있음.  이렇기 때문에 시야각 자체는 넓어도 거리감각은 형편없음. 사실 먹잇감을 정확히 노려야하는 육식동물은 눈이 다 정면에 모아져있고, 거리감각보단 적이 있다는 사실 자체를 감지하는게 중요한 초식동물은 눈깔이 옆으로 퍼지게 진화하는게 유리해서 이렇게 된 거지만 코뿔소는 정도가 존나 심해 왜냐하면 코뿔소는 이름의 유래기도 한 뿔이 얼굴 정면에 달려있단 말야 하나만 달린 것도 아니고 존나 굵직하고 우람한게 두 개 넘게 붙어있는 경우도 많아 그래서 정면을 제대로 보기가 굉장히 힘듬 근데 사실 눈 각도 이전에 시력 자체가 존나 등신임  거의 박쥐 수준인데 사냥꾼이 냄새만 잘 가린다면 5m거리까지 걸어와도 눈치를 못 챔 몸길이가 4m인데 가시거리가 5m도 안 된단 소리다 그래서 코뿔소는 한심한 시력을 만회하기 위해 굉장히 발달된 귀를 가지고 있음  뿔이 워낙 인상적이라 귀가 잘 눈에 안 들어오지만 코뿔소는 귀가 굉장히 큰 생물이다 당끼 수준이지 바니걸한테 갑옷을 입히면 코뿔소걸이 된다 청각이 워낙 뛰어나다보니 코뿔소는 꽤 예민한 생물이기도 함 나뭇가지만 바스락거려도 겁에 질려서 돌진하거든 공포는 공포를 준 대상이 없어지면 사라지니 합리적인 판단이네 아무리 귀가 좋아도 그게 사실상 장님인걸 커버할 수 있냐고? 물론 코뿔소가 아니면 힘들지  근데 코뿔소니까 괜찮아 애초에 청각만 발달시키고 눈은 걍 냅둔 이유는 청각만으로도 살아가는데 전혀 지장이 없었기 때문임. 눈으로 정확히 적을 보고 피할 필요가 없음. 귀로 적들이 오고 있단 사실만 알면 된다. 니가 사자라고 치고 생각해봐 코뿔소는 길이 4m에 몸무게는 3톤이다. 미군이 타고 다니는 험비보다 훨씬 무겁다. 그리고 험비엔 아드레날린도 없고 코죽창도 안 달렸지. 잡을 자신 있음? 야생에선 원딜러 따윈 없다. 무조건 정직하게 근딜로 때려잡아야 된다. 이러니 야생에선 발정난 코끼리랑 만나는 존나 운 나쁜 상황 제외하면 코뿔소는 무적임. 그러니 귀만 밝아도 멀쩡하게 잘 번성할 수 있었지 그러니까 인간이 나타나기 전까진 그랬다는 소리다 추악한 원딜러 새끼들 인간은 지구상의 모든 동물에게 대재앙이었지만 코뿔소한텐 그야말로 완벽한 카운터였음 코뿔소가 살아남을 수 있던 이유는 근딜 한정으로 무적인 피지컬과 적이 오는 방향을 정확히 파악할 수 있는 청각 덕분이었는데 인간은 이걸 두 개 다 씹고 들어왔다. 코뿔소가 감지할 수 있는 범위 까마득한 밖에서 총알이 날아오면 코뿔소가 뭐 어케 할 수 있는게 없다 철판도 뚫고 들어가는 총알인데 코뿔소 가죽이 뭔 소용이고 총성이 들린 순간 이미 쓰러져있는데 청각이 뭔 소용이래냐 2010년도 중반 월탱이 왜 망한지 아냐 다 인간같은 자주포 새끼들이 선량한 중전차 코뿔소들을 일방적으로 학살해서 그렇다 그렇게 인간들이 총기로 무장하기 시작한지 몇십년도 지나지않아 아프리카 평야는 썩어가는 코잘린 뿔소들의 시체들로 가득찬다 오늘날 코뿔소 대부분은 멸종위기 종이다 배고파서 고기 처먹으려고 잡은 것도 아니고 고작 최음제 만든다고 밀렵꾼들이 코를 다 짤라간 결과다. 하여튼 인간들은 가는 곳마다 대형 포유류 전멸시키는 병이 있는데 벌서 수만년동안 이 지랄 중이다. 인간, 인간 네버 체인지. 하지만 인간이 체인지하지 않는다면 코뿔소들이 체인지해야지 코뿔소들은 졸렬한 인간놈들의 원딜에 대응해서 진화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중에서도 가장 놀라운 대응방식이 바로 대인간 동맹군을 만든거임 코뿔소들의 동맹군은 바로 이 쪼끄만한 새다 이 새는 소등쪼기새라는 참 직관적인 이름을 가지고 있는데, 이름 그래도 남 등 쪼면서 살아가는 새다. 주로 코뿔소나 기린 같은 덩치 큰 포유류 등에 앉아서 기생충을 먹으면서 살아간다. 몸 청소해주니 착한 녀석처럼 보이지만 기생충이 없으면 부리로 등짝을 후벼파서 피를 빨아마시기도 하니 마냥 착한 호구는 아니다.  근데 소등쪼기새는 코뿔소 피를 좀 마실만한 자격이 있는게, 오늘날 코뿔소들을 생존시키고 있는 매우 중요한 동맹군이기 때문이다 인간들로부터 살아남은 코뿔소들은 하나같이 공통점이 있는데 소등쪼기새를 최대한 많이 데리고 다닌단 거다. 짤에서 보이는 것처럼 소등쪼기새들은 하루종일 코뿔소 위에 앉아서 살아가는데, 얘들은 새답게 시력이 굉장히 좋음.  그리고 소등쪼기새는 오직 단 하나의 생물이 접근할 때만 세된 비명소리를 질러 코뿔소한테 경고를 해주는데, 물론 이 생물은 인간이다. 참 신기한게 소등쪼기새들은 사자나 표범 같은 좆밥이 접근해도 절대 소리를 안 냄. 그 좆밥들은 자기가 경고 안 해줘도 코뿔소가 알아서 처리할 수 있잖아? 소등쪼기새들은 오직 인간을 감지했을 때만 코뿔소한테 경보를 날린다. 그럼 코뿔소는 새가 경고를 날려준 반대방향으로 도망가는 것이다. 듣기엔 별 거 아닌 공생관계 같아도 이게 수치로 보면 정말 대단함. 소등쪼기새랑 동맹을 맺지 않은 코뿔소는 80%가 도망치지도 못하고 죽음. 하지만 소등쪼기새랑 동맹한 코뿔소는 무려 50%가 생존한다. 그것뿐만 아니라 감지거리도 늘어나는데, 소등쪼기새가 있는 코뿔소는 60m거리에서부터 인간을 알아채고 도망가는걸 시도할 수 있음. 없는 코뿔소는 위에서도 언급했다시피 5m까지 다가와도 눈치 못 챈다. 거기다 무슨 게임 아이템마냥 소등쪼기새가 늘어날 수록 한마리당 약 9m씩 감지거리가 늘어남. 즉 소등쪼기 동맹군이 많을수록 코뿔소의 생존확률도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는 것이지. 이렇게 많은 역할을 해주니 코뿔소들은 새한테 피 내줘도 오히려 고마워해야 할 판국임 사실 소등쪼기새도 인간들한테 원한이 많은 동물인데, 왜냐면 인간들이 기생충을 박멸하기 위해 뿌린 살충제 때문에 소등쪼기새들도 엄청나게 학살당했기 때문임 소등쪼기새들도 엄청 많이 죽었기 때문에 많은 수의 코뿔소들은 동맹군을 제대로 찾지 못하고 홀로 사는 판국이다 그래서 좀 생각있는 사람들은 소등쪼기새를 복원시켜서 코뿔소 숫자를 어떡게든 늘려보려는 시도를 하고 있는 중임 인간한테 대응하기 위해 위기에 몰린 동물들이 동맹을 맺는다는 만화에서나 볼 법한 상황이지만 엄연히 현실인 것이야 원딜충 다 죽어 진짜 (출처) 볼때마다 느끼는 건 인간이 미안하다.. 오늘도 본문에 포함된 욕들은 순화를 거쳤습니다 물론 인간이 동물에게 한 짓을 생각하면 욕이 안나올 수 없지ㅠㅠ
조국, 국대떡볶이 대표 고소…"허위사실 법적 책임 져야"
CBS노컷뉴스 정재림 기자 김상현 대표 "조국, 中 공산당 돈 받아" 주장 조국 "확인되지 않았음에도 법 조롱했다" 조국 전 법무부 장관.(사진=이한형 기자/자료사진) 조국 전 법무부 장관이 자신에 대한 허위사실을 퍼뜨렸다며 국대떡볶이 김상현 대표를 형사고소했다. 2일 조 전 장관은 자신의 페이스북을 통해 "김상현 대표를 허위사실적시 명예훼손으로 형사고소하고 고소인 조사를 마쳤다"며 "유명 기업 대표의 이런 무책임한 행동은 법적 책임을 져야 한다"고 밝혔다. 조 전 장관이 문제를 삼은 내용은 김 대표가 2019년 9월 본인의 페이스북에 올린 글이다. 김 대표는 당시 "조국은 코링크를 통해서 중국 공산당의 돈과 도움을 받았다"라고 주장했다. 이어 "#문재인은 공산주의자, #코링크는 조국 꺼라는 메시지가 더욱 퍼졌으면 좋겠다", "확인이 안 된 거라서 문제가 된다면 저를 고소하라, 감옥에 가야 한다면 기꺼이 가겠다"라는 등의 내용을 올리기도 했다. (사진=조국 전 법무부 장관 페이스북 캡처) 조 전 장관은 이에 대해 "자신의 글이 확인되지 않은 사실임을 인지하고 있으면서 법을 조롱했다"고 지적했다. 그는 또 "저와 제 가족 그리고 선친에 대하여 차마 입에 담거나 글로 옮기기가 주저되는 쓰레기 같은 허위비방 글을 자신의 블로그에 올린 자들과 위와 같은 수준의 허위 수준의 허위 글을 유튜브 첫 화면 및 제목에 배치하고 클릭수 조회를 유도하는 유튜브 운영자들에 대해서도 고소인 조사를 마쳤다"고 덧붙였다.
한국인은 돈 내고 물 마셔라?…日 유명 초밥집의 혐한
CBS노컷뉴스 최원철 기자 日 대형 초밥 체인점, 한국어 메뉴에만 냉수 180엔 부과 재일 교포 A씨, 트위터에 해당 사건 공유해 일파만파 간코스시 신오사카역점의 메뉴판, 한국어 메뉴의 물만 180엔이다. 왼쪽은 일본어 메뉴판(사진=트위터 캡처) 위안부 사죄상 등으로 일본내 혐한 분위기가 고조된 가운데 한 대형 초밥 체인에서 한국어 메뉴에만 부당한 가격을 책정한 사실이 전해지면서 논란이 일고 있다. 일본 내 회전초밥 체인 간코스시 신오사카역점에 방문한 재일 교포 A씨는 식사 마무리에 냉수를 주문하려다 황당한 경험을 했다. 메뉴주문 창 속 냉수에 180엔 가격이 붙어있던 것. 이상하게 생각한 그는 주문창을 다른 언어로 확인해본 결과 한국어 메뉴만 다르다는 것을 확인하고 점원에게 항의했다. 점원은 표기 오류라고 사과했지만 일본내 대형 체인이 한국어 메뉴판 관리를 소홀히 했다는 것에 화가난 A씨는 해당 체인점 홈페이지 고객상담게시판에 이를 지적하는 글을 남겼다. A씨는 트위터에 "일본어 모르고 한국어 메뉴판만 사용하는 사람은 당했겠죠"라며 문제점을 지적했다. 해당 체인은 홈페이지에는 지난 2일 '메뉴 표기에 오류가 있었다'는 제목의 공지사항을 올렸지만 A씨는 "항의글에 대한 답변은 아직 오지 않았다"고 밝혔다. 해당 내용은 '도쿄 한국인 모임(東京韓国人会)' 페이스북 페이지에도 알려지며 혐한에 대한 문제가 제기됐다. 이에 수많은 네티즌들은 해당 내용을 리트윗을 하며 많은 관심을 보였다. 한 네티즌은 "의도하지 않으면 발생하기 어려운 화면이다"며 "메뉴명 등은 언어별 다른 설정이 있겠지만 가격은 하나만 설정한다"고 지적했다. '와사비 테러' 초밥 사진 (사진=온라인 커뮤니티 캡처/자료사진) 이번 한국인을 대상으로 한 일본내 혐한은 과거 오사카에서 벌어진 이른바 '와사비 테러'를 연상시킨다. 한국인 관광객이 많이 찾는 오사카의 한 초밥집은 한국인이 주문한 초밥에만 와사비를 많이 넣는가 하면 와사비를 더 달라는 요청에 야구공만한 크기로 주는 등 혐한 행동을 보여 많은 이들에게 질타를 받았다. 논란이 일자 해당 점포는 "외국인 손님들이 와사비를 많이 넣어달라는 요구를 해서 사전에 확인 없이 서비스를 제공했다"는 해명을 한 바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