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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것이 알고싶다 시청자들이 마지막에 눈물바다된 이유.jpg

먹먹해지네요...ㅠ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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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베라는 남자'가 생각나네요 ㅠ
진짜 틀딱이라는 혐오 단어 어떤새끼가 만들었냐? 보나마나 일베새끼들이겠지? 지들은 평생 안늙을줄아나? 지들이 그런말 쓰면 남들도 지네 부모한테 틀딱소리한다는걸 알아야지. 나이들어서 귀가 안들리고, 안들리니 목소리 커지고, 말도 느려지고 자연스러운거다. 지들이 젊다고 개무시하고 대중교통 양보도 안하던데 그럴수록 점점 더 배려없는 사회되고 본인들한테 돌아갈거다
아버지 돌아가시고 투정이 많아진 엄마에게 때론 귀찮아서 성의 없는 대화와 의례적인 안부를 묻곤 했었는데 반성하겠습니다..
😭
우리네 모든 인간사가 같음을 왜 그때는,지금은 알지 못했고 알지 못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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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고기 먹기를 금하라 (1) - 1923. 5. 13 진주
1923년 5월, 진주의 일반 농민 2500여 명이 한 자리에 모여 무언가를 모의합니다. 이 자리에서, 그들은 이하 다섯 개 조의 결의를 내놓죠. 1.형평사와 관계 있는 자들에 한해 백정과 동일하게 대우한다 2. 소고기를 반드시 불매운동한다 3. 진주청년회가 형평사와 절대 관계 없도록 한다. 4. 노동단체에서는 형평사와 절대 관계하지 말게 한다. 5. 형평사를 배척한다. 대체 무슨 이유로 이들은 그 좋다는 소고기도 끊겠다고 굳게 다짐한 걸까요? 형평사가 도대체 무슨 일을 했기에 청년회와 노동단체까지도 이를 배척하게 한 걸까요? 형평사는 백정들이 자신들의 사회적 처우 개선을 추구하여 설립한 사회 운동 단체입니다. 잠깐, 그렇다면 왜 노동단체가 그들과 관계하지 말아야 한단 걸까요? 노동단체란 본래 부당한 처우를 받는 노동자들이 조직하는 것 아닌가요? 같은 약자인 백정들에게 어째서 노동자들마저 등을 돌리고 만 걸까요? 이번 글은 조선에서 가장 천한 계급이었던 백정들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1894년, 김홍집 내각은 갑오개혁이라고 알려진 일련의 개혁 조치들을 내놓았습니다. 당시 세상을 떠들썩하게 한 동학 농민 운동을 어느 정도 잠재우는 타협안을 제시하면서, 이제 막 내정간섭을 개시한 일제의 요구에도 맞춰 주어야 했죠. 여하간 정부는 1894년 7월 2일 그전까지 이어진 신분제를 폐지하는 선언을 내놓습니다. 1. 신분을 가리지 않고 인재를 선발할 것. 2.공사노비법 일체 혁파, 사람을 매매하는 것을 금지. 3. 역노비, 광대, 가죽공인 등 천인을 면천함. 미국 북장로교 선교사 사무엘 무어 목사는, 이때 백정들이 기뻐하기가 마치 링컨의 노예 해방령에 흑인 노예들이 기뻐하는 것보다 더했다고 말합니다. 심지어 백정들 가운데는 너무나 기쁜 나머지 밤낮없이 갓을 머리에 쓰고 지낸 이도 있다고 하죠. 이전까지 백정들이 받은 차별 대우를 놓고 보면 그들이 이렇게 기뻐하는 것도 이해할 만 합니다. 조선 왕조 내내 백정들은 다른 사람들과 확연히 구별되도록 온갖 제약을 받아왔죠. 지붕에 기와를 얹을 수 없고, 옷에는 명주를 쓸 수 없다. 갓, 탕건, 털모자 등을 쓸 수 없고 두루마기, 가죽신을 입거나 신을 수 없다. 외출할 때는 봉두난발에 패랭이를 써서 식별 가능케 하는데, 갓끈은 종이나 새끼줄로 한다. 여성은 비녀를 쓸 수 없다. 일반인 앞에서 음주, 흡연, 연회 등을 할 수 없다. 관혼상제시 상여를 쓸 수 없고, 묘지는 일반인과 구분해 쓰며, 혼례에 말과 가마를 쓸 수 없고, 머리에 쪽을 이거나 상투를 틀 수 없다. 집안의 가묘를 쓸 수 없고 풍수를 볼 수 없다. 백정은 상대가 어린아이라도 평민이면 복종하고 자신을 소인이라고 칭해야 하며 평민과 나란히 걸을 수 없다. 공공집회에 출입할 수 없고 일반인 집에 함부로 드나들 수 없다. 거주지는 일반인과 구분해 교외 일정 지역에 집단거주한다. 특정 성씨만 사용 가능하며, 이름에 충, 효, 인, 의 네 글자는 넣을 수 없다. 조선 시대 백정들이 생활 속에서 받은 각종 규제가 이 정도입니다. 1809년 개성의 한 백정은 결혼식 예복으로 관복을 입었다가 사람들에게 폭행당하고 집이 박살난 일도 있었죠. 뿌리 깊은 차별은 정부가 신분제를 폐지한 후로도 쉽게 사라지지 않고 계속되었습니다. 아니, 사실은 정부 또한 신분제 문제를 진정으로 해결할 마음이 없어 보였죠. 1896년 9월 조선은 호구조사규칙과 호구조사세칙을 시행합니다. 이 결과 지금까진 배제되던 백정 역시 호적에 등재될 수 있게 되죠. 그러나 실제로는 이 과정에서도 차별이 공공연히 자행되었습니다. 승려와 백정은 일반인과 별도 호적에 등재되었죠. 또 백정은 호적에 빨간 글씨로 '도한'이라고 기록되었습니다. 도한은 즉 도축업을 하는 사람, 백정을 뜻합니다. 마치 빨간펜으로 이름 쓰면 죽는다는 속설처럼, 호적에 빨간색으로 신분이 적힌 백정을 사람들은 얼마나 꺼림칙하게 여겼을까요? 이런 차별은 일제강점기에도 똑같이 일어났습니다. 1922년 일제가 조선호적령을 시행할 때도 백정은 그 본적에 도한으로 기록되었거든요. 1897년 3월 내부의 훈령에 기초해 경무청고시가 발표됩니다. <서울 5개 경찰서 내에서의 금지조항>이란 제목의 고시엔 '천역하던 사람이 분수를 넘어 강상을 범하여 행패하는 것을 금함'이라고 명시되어 있었죠. 한 번 백정이면 끝까지 백정. 국왕의 칙령이 있은 후에도 사회적 차별의 꼬리표는 여전히 떼어지지 않고 따라 붙었습니다. 역설적이게도 이 백정이란 꼬리표는 사실 처음부터 차별의 의미를 담고 있지는 않았습니다. 1423년 세종 5년, 병조에서 이런 제안을 합니다. '재인, 화척은 본래 양인인데 직업이 천하고 호칭이 달라 백성들이 다른 족속으로 보고 혼인을 꺼리니 이를 백정으로 고쳐 부르자.' 그전까지 백정 및 그와 유사한 천민들은 재인, 화척 등으로 불렸습니다. 오히려 고려에선 백정이 일반 백성을 뜻하는 말이었죠. 그러니까 병조의 뜻은, 과거 재인 화척으로 천대받던 사람들을 이른바 '신백정', 즉 새로 백정 양인이 된 사람으로 고쳐 불러 융화시키자는 의도였을 겁니다. 다만 그 이후로도 백정들은 실록상 재인, 화척, 양수척 등 백정 이외 다양한 이름이 혼용되어 쓰입니다. 또 신백정에서 새로울 신, 한 자가 빠지면서 그냥 '백정'으로 불리게 되지요. 유기장, 고리백정, 갓바치, 도축업자 등 사회에서 천시받는 일을 하던 백정들은 조선 시대 내내 사회 최하층집단을 이루었습니다. 이들에 대한 차별이 어찌나 심한지, 외국 선교사들은 백정들의 처우를 보고 곧장 인도의 카스트 최하층 불가촉천인을 떠올리곤 했답니다. 갑오개혁 후 신분제가 법제적으로 폐지된 후에도 차별은 공공연히 이루어졌습니다. 1900년 2월, 진주군 등 16개 군 백정들이 진주 관찰사에게 소를 넣습니다. 갑오개혁 때 칙령에 따라 백정도 관을 쓰고 의복을 갖춰 입을 수 있게 되었으니, 자신들도 칙령에 따라 관을 쓰고 싶다는 내용이었죠. 나랏님 말씀을 따르겠다고 하는 거니 별 문제가 없을 듯도 하지만, 진주 관찰사는 그렇게 생각지 않았던 모양입니다. '정 백정들이 갓을 쓰고 싶다면 갓끈은 소가죽으로만 해라!' 소청을 하러 온 백정들 앞에서 이렇게 일갈한 후, 관찰사는 백정들을 관청 밖으로 내쫓았습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얌전히 물러날 백정들이 아니죠. 이제껏 얼마나 차별당해왔는데 겨우 이 정도로 물러날 수 있습니까? 백정들은 중앙 정부에 상소를 넣어 부당함을 호소합니다. 결국 해당 관찰사에게 백정을 천대하지 말라는 지령이 내려오죠. 하지만 같은 해, 진주에서 백정들이 갓, 도포를 쓸 수 있게 되었단 소식을 들은 양민들이 수백 명 떼를 지어 백정들 마을을 습격하는 사건이 일어났습니다. 가옥이 여러 채 파손될 정도로 그 수위가 심각했다네요. 백정 및 천민들의 상징이나 다름없던 패랭이.A.K.A. 평량립. 재미있게도 <연려실기술> 등에서는 임진왜란 당시 천민뿐 아니라 일반 대중에게도 이 패랭이가 잠시 유행한 얘기가 적혀 있답니다. 왜군들이 갓을 쓴 양반이 보이면 잡아가지만, 패랭이를 쓴 천민을 보면 극빈자라 해서 놓아줬다나요? 1898년 시흥에서는 패랭이 대신 갓을 쓰게 해달라는 백정들 요청에 지방관이 생 소가죽을 백정에게 덮어씌워 모욕한 사례가 있습니다. 1901년 예천에선 백정 3인이 백정 신분을 면하게 해 주겠다며 돈을 요구한 군수에게 저항하다 수 개월간 투옥당한 일이 있었죠. 문경의 백정 하나가 이 소식을 듣고 서울까지 가서 이 같은 작패를 모두 금하라는 훈령을 들고 돌아왔는데, 문경군수가 이 사람을 옥에 가두고 재산을 강탈했습니다. 이를 알게 된 서울 백정들이 중앙 정부에 호소해 이들을 풀어주고 재산을 돌려줄 것을 청했죠. 백정들도 이런 차별이 하루아침에 사라지진 않을 거란 사실을 잘 알았습니다. 때문에 그들 역시 자신들의 사회적 지위를 높이기 위해 다양한 시도를 했죠. 1898년 만민공동회 연사로 백정 출신 박성춘이 나서는가 하면, 당시 부유한 백정들이 지역 학교 설립에 기부하기도 했습니다. 국채보상운동에선 충북 지역 백정들이 성금을 내고, 심지어 의병 운동에 직접 백정들이 뛰어들기도 했죠. 의병장 최익현 영정. 한때 대원군의 개혁 정책을 지지했지만, 대원군의 서원 철폐와 경복궁 중건 등 실정을 규탄하며 고종 친정을 이끌어낸 인물이고, 일본 및 서양과의 문호 개방을 끝까지 반대한 위정 척사파의 대표 인물로 알려져 있습니다. 1906년 전북 태인에서 의병을 일으켰지만, 관군과 싸우지 않기를 고집해 포위당합니다. 이때 인근 백정 김경철이란 자가 관군의 포위를 뚫고 와 의병대에 가담하길 청했다네요. 승패가 갈린 상황에서 패배가 확정된 편에 선다고 결심했을 때, 그는 과연 어떤 생각을 했을까요? 기독교나 천도교 같은 종교 단체는 백정들의 편을 들어줬습니다. 기독교 선교사들은 백정과 양민을 중재해 함께 예배를 보게 하려 노력했죠. 천도교는 처음부터 모든 인간은 평등하다는 교리를 내세워 천민들에게도 인기가 있었습니다. 동학 농민 운동 당시에도 패랭이 쓴 무리가 동학군 중에 가담해 있었다고 합니다. 패랭이가 백정 천민의 상징 같은 것임을 놓고 볼 때, 굳이 백정 외 다른 양민이 그것을 일부러 골라 쓰진 않았을 듯합니다. 이렇게 백정들은 자력으로 , 또 사회 각계의 응원으로 차별 편견을 극복하려 애를 썼습니다. 그러나 차별은 그들 생각보다도 훨씬 끈질기고 집요하게 백정들을 괴롭혔습니다. 백정들이 뒤집어 쓴 사회적 경제적 굴레는 그리 쉽게 벗길 수 없는 것이었죠. 1896년 1월, 조선 정부는 백정들을 직업적, 경제적으로 규제하는 <포사규칙>을 선포합니다. 갑오개혁 후 밀어닥친 근대화의 물결은 이제 백정들에게도 지금까지 없던 새로운 멍에를 씌우려는 것입니다.
펌) 1년 넘게 사귄 남자친구가 저 몰래 저번주에 다른 여자와 결혼을 하였습니다.
안녕하세요. 말그대로 2년 안되게 사귀던 "도중" 남자친구가 저몰래 "며칠전" 다른여자와 결혼했습니다. 어제만 해도 사랑한다고 했던 남자친구가. 다른 여자와 결혼했습니다. 저와 남자친구는 대전 광주 장거리 연애 중이었습니다. 저희 둘다 학생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연애 도중에도 적어도 1주일에 한 번 이상은 봤고 제 지인들도 다 알고 있는 누가 봐도 행복한 커플이었습니다. 엊그제 오후까지만 해도 행복했었죠. 사랑한다. 보고싶다. 안고자고 싶다 등. 다음주 주말에도 저를 보러 온다고 약속했었고 만날 때마다 스킨십은 물론, 사랑이 넘치는 커플이었습니다. 연애 전선에도 아무런 문제가 없었고 서로 결혼얘기까지 오갔던 사람이었습니다. 남자친구도 애를 낳으면 율,담으로 짓자 그리고 우리 같이 부동산 공부도 해서 우리 자산 불려서 행복하게 살자, 저런 아파트 같이사려면 우리 둘이 대출 얼마 받으면 되겠다 이런말도 오가서 당연히 미래도 함께 할줄 알았습니다. 이정도로 좋은 사람은 없고 잘할 사람은 없을것 같았거든요. 하지만 저번주 일요일, 그 전 주말 느낌이 이상했습니다. 저번주부터 평소 아프시다던 외삼촌 간병에 너무 매달려있는 느낌이었습니다. 남자는 외삼촌 간병때문에 주말에 못보니 광주에서 대전으로 일 끝나고 평일에 넘어오겠다 했습니다. 알고보니 외삼촌 간병한다고 한 날에, 그 남자는 다른 여자와 결혼을 하고, 자기 친구들 모두 모아 그 결혼한 여자와 파티를 했더라구요. 이 사실을 알게된건 엊그제 일요일 밤, 제가 인스타그램 구경을 하다 그 사람 친구 sns를 우연히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근데 놀랍게도 그 사람이 신랑 예복을 입고 있는 사진이 있었습니다. 너무 놀라서.. 제가 본게 맞나? 싶어서 그 사진을 찍어 남자친구에게 보냈습니다. 처음엔 자신이 결혼한 것이 아니라고 부인했습니다. 결혼 안했다고. 아무리 봐도 제 남자친구고 느낌이 이상해서 남들에게 물어보면 알 수 있다고, 얘기를 해달라고 이렇게 말하니 자신이 결혼한 사실이 맞다고 실토했습니다. 하..... 이게 정말 일어날수 있는 일이라고 생각하시나요? 바람을 피운 것도 아니고.. 결혼이라니요. 다음주에 같이 놀러가자고 했던 제 남자친구가. 다른 여자와 결혼이라니요? 결혼이 장난인가요? 저의 1년 반 남짓했던 그 행복했던 시간들이 모두 무너져 내리는 것 같았습니다. 그동안 이상하고 의심스러웠던 모든 상황들이 퍼즐처럼 맞춰지는 모습이었습니다. 그 사람이 친구들과 만날 때  나도 같이 만나고 싶다고 하면, '오늘은 그 모임에 문제가 있어서 힘들거 같아.', 혹은 '니가 너무 예뻐서 남자들 사이에 두는게 좀 그래' 이런 말들을 하며 그런 모임에 저를 데려가는 것을 주저하더군요. 제가 이 사실을 안 이후로, 그 인간은 이제서야 앞으로 벌어질 일들이 무서운지 저에게 계속 전화를 걸며, '미안하다, 정말 사죄하고 싶다.'며 카톡을 남겨 놓았더라구요 그리고 비슷한 류의 사과 같지도 않은 메세지를 계속 보내왔습니다. 저와 지냈던 시간은 장난이 아니라는 말과 뻔뻔한 말도 함께요. 계속 오는 전화에도 저는 전화 끝까지 받지 않았습니다. 저에게 그런 상처를 주면서, 자신은 아이들을 가르치며 부인과 행복하게 살고자 했을까요? 너무 억울하고 화가 나고 분통이 터져 견딜 수 없었습니다. 그날 밤 저는 한 숨도 자지 못했습니다. 그리고 그 사람과 했던 대화, 그리고 커플사진 이런 것들 모두 정리하였습니다. 그 부인이 근무하고 있는 곳을 수소문하여 연락해 이메일 주소를 받았습니다. 그리고 그 메일 주소로 저는 그동안의 대화와 커플사진 모두 보냈습니다. 알고보니 지난 주 내내 신혼여행 기간이었으며 신혼여행 기간 내내에도 곧 본다는 말, 보고싶다는 말을 일삼고 있었습니다. 매일 아침 출근길에 저와 자주 전화를 하곤 했었는데, 그날은 유독 전화를 받지 않았었습니다. 그리고선 학교에서 일이 있어 바쁘다, 이따 전화할게 그러고 자기 오늘은 급식 먹었는데 너무 맛있다 이런 말을 뻔뻔하게 저에게 했더라구요. 저는 뻔뻔한 거짓말들을 바보같이 믿고 있었던 거였습니다. 그 이후 저는 일을 하다가 눈물이 나고, 감정이 너무 감당할 수 없을 정도인 상태가 되어 그 날은 조퇴를 쓰고 집에 왔습니다. 딱 그 시점 그 남자에게 전화가 와서 받지 않았고, 곧 이어 그 사람의 부인되는 여자분에게 전화가 와서 받았습니다. 그 여자분은 오히려 저에게 굉장히 화가 난 말투로 말하더라구요 저는 그쪽이랑 제 남편 관계정리를 시키려 전화했다고..... 아니 잘못 한 사람은 제가 아닌데 왜 저에게 화를 낼까요? 그 남자가 대체 자기 부인 되는 사람에게 무슨 말을 했던 것일까요? 저는 그쪽 남편이랑 다시 잘해보고 싶다는 마음은 추호도 없고 같은 여자로써 알고 있는것이 좋을것 같다고 연락드렸다 했습니다. 그러자 그 여자분은  다시는 연락하진 말라고 저에게 화내며 전화 끊더라고요. 네.. 그리고 저는 집에 와서, 제가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인지 계속 생각해보았습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렇겠지만, 저는 이런 경험, 이런 상황이 처음이라.... 제가 할 수 있는 것들이 무엇인지 잘 모르겠습니다 그 사람과 행복했던 시간들이 자꾸 떠오르며, 아직도 그 사람이 결혼했다는 사실이 믿겨지지가 않습니다. 한 때 제가 정말 사랑했고 결혼까지 생각했던 그 사람이 다른 여자와 십일 남짓 전에 결혼했다는 사실도요. 우선 정신과에 다녀왔습니다. 의사선생님은 병이 아니고 이 정도 상황을 겪으면 어떤 누구도 버틸 수 없을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당장 부모님께 알리라고 조언해주셨습니다. 하지만 엄마한테 말할 엄두가 도저히 안난다고 말씀드렸더니 의사선생님꼐서 직접 알리겠다고 하셔서. 엄마는 그렇게 알게되고 어제 밤. 타지에서 제가 있는 대전까지 오셨습니다. 엄마를 볼 자신이 없어 침대에 누워 있었습니다. 가족 얼굴 볼 면목이 없었거든요. 저....어떻게 해야할까요... 앞으로 그 사람이..... 받을 수 있는 모든 죗값 받게 하고 싶습니다. 도와주세요... 밑에는 그 인간이 저에게 신혼여행 간동안 거짓말 한 내용과 그에 대한 대화입니다. 지금은 자기가 일하는 지역에서 자기가 피해자라고 하고 다닌다네요 그래서 마지막 카톡 내용 첨부합니다. (원본 링크) 주작이라기엔 이미 남자분 신상 다 털렸고 학교 난리났다고 하네여 ㄷㄷ 그리고 댓글에 와이프 등판 7년 사귀고 결혼한 거니까 와이프분도 심정이 어떨까여...
코로나도 나도 파리도 여름을 맞았다
https://youtu.be/vQYVVy9TrtA 4개월 만에 파리의 중심가를 걸었다. 지난봄의 시작, 이동제한 실시를 며칠 앞둔 금요일의 오후 지금으로서는 상상하기 힘든 두툼한 외투를 걸친 채 튈르리 정원의 벤치에 앉아 기분 좋은 봄햇살을 팔로 안아 담으려 할 때, 그때만 해도 이렇게나 오랫동안 우리가 이 길들을 걸을 수 없게 되리라 생각하지 못했다. 그날 활짝 목련 아래에 정원사분들이 정성껏 심으시던 꽃들은 사람의 관음도 방해도 받지 않고 온전히 자기의 이유만으로 피었다가 지었을 터. 4개월 만에 찾은 센 강은 어느 날에 내린 비로 인해 물이 제법 불어나 있었고 어딘가에서 쓸려온 나뭇가지들이 강둑을 끊임없이 노크하고 있고 있었다. 강둑은 대답이 없었다. 아니 대답할 사람이 없었다. 둑 위에는 늘 보이던 조깅을 하는 사람도 나란히 앉은 커플들도 몰려다니는 여행객들도 없었다. 무척이나 불안해했던 지하철은 오전이라 그런지 사람들이 그리 많지 않았고 소문과는 달리 다들 마스크를 끼고 있었다. 역의 플랫폼에서 지하철을 기다리는 사람들 중에 동양인은 나와 엠마 밖에 없었다. 샤틀레 역까지 가는 동안 우리의 객차 안에 타고 내리는 이들 중에서도 우리 외에 동양인은 없었다. 대중 속으로 숨을 수 없다는 부담감과 두려움이 컸지만 다행히 운이 좋은 이날만큼은 우리를 특별한 눈으로 바라보는 이는 내 앞에 앉은 흑인 꼬마 밖에 없었다. 이동제한이 해제되고 며칠 후, 우리는 한국행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4월에서 6월로 연기가 되었던 가족의 행사가 더는 변경되지 않는다는 소식에 우리는 부랴부랴 한국행 티켓을 알아보기 시작했다. 비행기 티켓은 평소의 두배 정도나 가격이 뛰어 있었다. 파리에서 한국으로 가는 직항 비행권은 너무나 비쌌기에 암스테르담에서 환승하는 비행기를 선택했다. 이동제한이 실시된 이후로는 집 근처를 벗어나 본 적이 없었기에 공항으로 가는 길, 공항에서 대기하는 일, 환승하는 일, 비행 동안의 식사와 화장실에 가는 일까지 사소한 모든 단계가 모두 걱정의 대상이었다. 집을 다 정리하고 한국으로 들어왔다가 코로나가 잠잠해지면 다시 가라는 조언도 많이 받았다. 하지만 그간 생겨버린 많은 짐들의 정리와 여러 가지 행정처리를 할 자신도 의지도 없었기에 집을 새집처럼 청소해두고 큰 짐들은 수고스럽게 박스에 다시 담아두는 정도로 마음을 달래곤 여름옷을 담아 올 텅 빈 캐리어를 들고 집을 나섰다. 마스크에 위생장갑까지 두 겹으로 낀 채 조용한 택시에 몸을 싣고 공항으로 갔다. 샤를 드골 공항은 거짓말처럼 고요했다. 이용객들보다 보안요원과 직원들의 수가 더 많았다. 기다리는 줄도 없이 마음먹은 그 순간 체크인을 했다. 하지만 한국에서 요구하는 자가격리 앱을 설치하는 문제로 시간이 조금 걸렸다. 잠시 머무른 스키폴 공항 또한 사람들이 거의 없었다. 상점들과 카페, 음식점들 앞에는 붉은 줄이 쳐져 있었다. 의자가 뒤집혀 있는 공항에 앉아 있는 일이 신기했다. 사람들은 서로를 피해 멀찍이 떨어지는 수고를 마다하지 않았다. 그렇게 서로에게서 멀찍이 떨어져 자리를 잡고 보니 평소에 우리가 서로 얼마나 근접해서 살아왔었는지 실감을 할 수 있었다. 그 닿고 스치는 감각이 이제는 이상하게끔 느껴졌다. 어떻게 그렇게 서로를 안고 살 수 있었을까. 한국에 도착하고는 2주간 격리생활을 했다. 한 달 정도 한국의 체류를 위해 2주를 격리해야 했다. 체온을 서너 번이나 재고 비슷한 서류도 두어 번 작성하고 어머니와 통화까지 하고 난 다음에야 출국장으로 나설 수 있었다. 공항에서부터 통제된 길을 따라 이제는 지내는 이가 아무도 없는 할머니 댁으로 갔다. 거동이 불편해서 요양원에 계시는 할머니가 다시 돌아오시지 못할지 모르는 그 집에서 내가 살게 되었다. 할머니 집에는 시간이 정지되어 있었다. 안방의 달력은 8월에 부엌의 달력은 7월에 멈춰 있었다. 뚝뚝 물방울이 새는 수도 옆에는 20년이 된 하얀 쟁반이 있었다. 어느 신부님의 사제 수품을 기념하는 쟁반이었다. 20년이 된 쟁반 위에다 복숭아를 깎아 먹었다. 할머니가 가시는 날까지 손수 닦았던 타일에다 비누 거품을 묻혔고 30년 전 부녀회 행사를 기념하는 수건으로 몸을 닦았다. 시킨 아귀찜을 먹다 보니 찬장 안으로 할머니보다 20년은 젊어 보이는 할아버지 영정 사진, 머리숱이 많은 엄마 사진 그리고 딱딱하게 젊은 내 사진이 보였다. 이동이 정지되어 있던 곳에서 이제는 시간이 정지된 곳으로 왔다. 관성이 두 번 끊긴 날들 속에서 나는 내가 뛰고 있었는지 걷고는 있었는지 반문했다. 코로나가 휩쓴 시절의 고국에는 내가 쉬이 갈 곳이 없었다. 사람들을 만나기도 편하게 얘기를 나누기도 쉽지가 않았다. 그리고 나는 이미 거의 외지 사람이 되어 있었다. 내가 일을 하던 공간에서는 더 이상 나의 이름이 불리는 일이 없다. 남산에 간 김에 맘껏 부풀곤 했던 학교에 가보았다. 텅 빈 학교는 길고양이들 차지였다. 닫힌 유리문들을 밀어보지도 못하고 도망치듯 붉은 줄을 넘어 나왔다. 시간과 이동의 관성뿐 아니라 이름의 관성 또한 끊겨 버렸다. 그토록 원했던 무중력의 상태. 난 그만 쓴웃음이 났다. 다시 파리로 돌아오기 며칠 전 이제는 스타가 된 친구에게서 전화가 왔다. 왠지 모를 부담감에 여러 번 거절했던 그의 전화를 이번만큼은 받아보았다. 경포대에 오니까 상석 생각이 난다며 16~17년 전에 경포대에서 함께 했던 일들을 얘기하던 친구의 목소리는 무척이나 젖어 있었다. 내 친구가 심사위원이 된 영화제에 지원했다가 떨어졌다. 그 친구와는 차를 마시면서 7년 전 미국에서 함께 촬영했던 일들을 얘기했다. 매번 하는 얘기들에 또 같은 부분에서 합창처럼 웃었다. 멀어진 것은 내가 파리로 갔기 때문이 아니다. 그 해변과 그 도시들에서부터 우리는 조금씩 서로 다른 어디론가로 걸어가고 있었던 것이다. 이제야 내가 힘들에게서 벗어나게 된 것이 아니었다. 우리는 어느샌가 고독으로 가 닿는 길 위에 선다. 믿고 싶지 않아서 무서워서 남들의 길을 환상으로 불러와 내 옆에 갖다 대는 것은 나의 나약함이었는지도. 다시 프랑스로 가는 것이 맞는지 생각이 많았다. 그곳에서 무엇을 해야 하는지 무엇을 배워야 하는지 무엇을 찍고 무엇을 써야 하는지 확신이 없었다. 애초에 확신 따위는 없었다. 벗어나고 싶은 마음, 보잘것없는 나의 상태에 뒷배경을 바꾸어 보고 싶은 마음만 컸던 것은 아니었는지. 어서 가고 싶던 지난가을과 달리 모든 것이 두려웠던 이번 여름의 파리행. 하지만 안내방송 속의 플리즈들이 실부플레로 바뀌자 나도 모르게 안도감이 느껴졌다. 익숙한 안내표지와 도로를 메운 그라피티. 꽉 막힌 공항 도로 끝에 집으로 향하는 도로를 발견하자 반가웠다. 현관에서 마주친 주민분과 봉쥬흐라고 인사를 나누고 번호키가 아닌 쇠열쇠를 두 번 돌려 “집”으로 돌아왔다. 그동안이 여행으로 이 곳이 집으로 느껴지는 신기한 기분. 다행이었다. 붉게 날리는 LAVAGE 깃발. 내가 좋아하는 바르셀로나 팀의 져지를 입고 차들 사이를 어슬렁 거리는 세차장 주인아저씨. 무엇보다 파란 이곳의 하늘. 두 번째 체류를 준비하게 위해 싱크대를 보수할 실리콘을 사고 석회수에 건조해지는 피부를 진정시킬 크림도 잔뜩 샀다. 간단한 점심을 먹고 보니 마레지구에는 사람들이 꽤 많아졌다. 사람들이 많아지니 마스크를 끼지 않은 사람들도 많아졌다. 다행히 상점들 안에서는 마스크를 끼지 않은 사람들이 거의 없었다. 상점의 입구마다 소독제들도 있었다. 가드가 있는 상점이 많은 파리에서는 실내에서의 마스크 착용과 손 소독이 잘 지켜지는 듯했다. 마레 지구의 예쁜 빈티지 가게들을 마다마다 들리면서 손은 더 건조해졌지만 기분도 그만큼 말라갔다. 무엇을 배우고 무엇을 찍고 무엇을 쓰는 일은 무엇보다 걷는 일에 달려 있다. 그러니 두려움을 조금은 덜고 다시 걷는 일부터 시작해 보자. 무엇을 하려고 걷는 게 아니라 걷다 보니 말을 걸게 되는 거다. 걷는 곳보다 더 잘 말할 능력도 없다. 그러니 나는 무엇이 되겠다는 생각은 말겠다. 이 어려움이 이 번거로움이 사라지면 더 오래도록 더 꺾어 걸어보자. 우리는 퇴근 시간을 피해 지하철에 몸을 실었다. 글, 이미지 레오 2020.07.17 파리일기_두려운 날들이 우습게 지나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