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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고기 먹기를 금하라 (2) - 1896. 1 한양

1896년 1월 18일, 그 해 첫 법령으로 이른바 <포사규칙>이 반포됩니다. 갑오개혁 이후 정부 당국이 반포한 두 번째 근대적 법률이었죠. 첫 번째 반포한 법률은 1985년 3월 반포한 재판소구성법이었습니다. 단순 법률 반포 순서만 놓고 보자면, 뭔지는 몰라도 상당히 중요한 내용이 담겨 있는 법안같지 않나요?

<포사규칙>이 규정한 내용은 딱 잘라 말해 이렇습니다. '이제부터 모든 도축 및 정육점업은 영업허가증을 발급받아 규정에 맞게 운영하고 세금을 내라.' 김이 새는 얘기일지는 모르겠지만, 이 법률의 의의는 이렇게 바꿔 말할 수도 있겠습니다. 그동안 지방관 및 지방 세력가의 자의적 수탈 대상이었던 백정을 이제부턴 국가가 직접 지배한다, 라고요.

세계 여러 문명에서 어떻게 고기를 얻느냐, 하는 문제는 상당히 중요하게 다뤄졌습니다. 이슬람의 할랄이나 유대인의 코셔 전통에서 '무엇이 율법에 따라 올바른 방식으로 얻은 고기인가'를 세밀하게 규정한 것만 봐도 그렇죠. 복잡한 도축 과정과 절차를 거쳐 먹을 수 있는 것과 먹지 못할 것을 구분하고, 나머지 부산물과 폐기물을 어떻게 처리할 것인가, 하는 문제는 먼 옛날 인류가 수렵과 채집 생활을 하던 시절부터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중시되었습니다. 비록 오늘날엔 산업화, 고도화된 도축 및 정육 과정으로 인해 보통 사람들이 자신이 먹는 고기가 식탁에 오르기까지 거치는 과정을 대부분 알 필요가 없게 됐지만 말입니다.

코셔 및 할랄 규정의 일부. 몽골인이나 시베리아 인들에게도 그들 나름대로의 도축 방식이, 아마존 정글의 민족들도 그들만의 규율이 있을 것입니다.

그건 조선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조선 사람들은 소, 말, 돼지, 양, 닭, 개를 육축이라고 해서 민간에서 이를 키우고 잡는 것을 허용했죠. 최근까지도 시골에선 공공연히 민가에서 직접 소, 돼지를 도축하는 일이 벌어지곤 했습니다.

다만 조선 사람들도 소, 말은 민가에서 함부로 잡지 않았다고 합니다. 한양에선 푸줏간이나 약 20개 정도의 도축소, 이른바 '현방'이 있어서 백정들이 그곳에서만 전문적으로 도축, 판매를 맡아 했다고 하죠. 선비들은 '군자는 푸줏간과 부엌에 드나들지 않는 법'이라고 해서 아예 이들과의 접촉 교류를 삼갔습니다.

1896년 포사규칙이 제정된 이후 민간 도축은 규제가 더 강해졌습니다. <포사규칙>에서 포사란 조선시대 정육점을 말합니다. 즉, 법률의 이름 자체가 정육점에 대한 규칙, 이란 뜻이죠. 포사는 본래 잡은 고기를 판매하는 가게만 의미했지만, 당시엔 현실적으로 도축과 육류 판매가 엄밀하게 분화되지 않았습니다. 때문에 법령 내에서도 육류 판매뿐 아니라 도축업에 대해서도 규제했죠.

법령에 따라 정육점, 도살장업은 지방관청을 통해 신고하고 면허료를 지불해 영업허가증을 받기만 하면 누구나 할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정작 도살 자체는 백정들에게만 나오는 도축자격증인 빙표를 가진 사람만이 가능했습니다. 따라서 영업허가를 취득한 업주가 도축자격을 가진 백정을 고용해 영업을 해야 했죠. 소를 도축해야 할 때, 업주는 1마리에 80전 세금을 백정에게 전달합니다. 그러면 백정은 그 세금을 군청에 납부하고 영수증을 받아 오죠. 이 영수증 없이 도축을 할 경우 백정은 도축자격을 잃고 거처에서 추방됩니다. 또 해당 백정을 고용한 업주는 영업허가가 취소될 수 있었죠.

세금은 영업장 규모에 따라 물렸습니다. 도축장을 매일 1마리 이상 도축하는 1등지부터 5일에 한 마리 정도를 도축하는 5등지까지 구분한 후, 매월 말 영업장이 무는 세금에 등급별로 차등을 뒀죠. 영업장 규모는 도축하는 소 두수만을 기준으로 했기 때문에, 돼지나 개는 부수적인 수취 대상이었다고 합니다. 이 영업세를 포사세라고 하는데, 정부는 포사세 징수를 위해 군 단위까지 포사위원과 포사파원을 임명했죠.

1897년 독립신문은 당시 전국적으로 연간 2만 7천 여 마리 소가 도살된다고 했습니다. 이건 공식적인 수치로, 민간에서 자행되는 밀도축 수를 뺀 수치였죠. 조선 후기 소 도축이 이렇게까지 활성화된 이유는 두 가지로 꼽습니다. 하나는 조선후기 민간의 생산력이 증가하면서 주류 및 육류 소비가 증가한 것, 또 다른 하나는 무역이 성황을 이루면서 주요 수출 품목인 소가죽의 가치가 높아진 것이죠. 이로 인해 일부 지배층이 백정을 사사로이 고용해 소가죽을 수집하고 고기를 팔아 부정축재를 하기도 했습니다.

조선 말 개항지를 통해 외국으로 향하는 주요 수출품 가운데서 소가죽과 소뿔 등은 항상 빠지지 않고 포함되었습니다. 특히 일본 상인들이 자국 가죽 산업 발달을 위해 필수적인 조선 소가죽을 확보하려고 눈에 불을 켜고 다녔습니다. 일본에서 수입한 소가죽 가운데 약 7, 80%가 조선산일 때도 있을 정도였죠. 1824년 일본에 수출한 우피만 1만 5천 장 이상이었고, 이후로도 매년 거의 이 수치를 유지했습니다. 청과 기타 외국에 수출하는 우피 량까지 고려하면 당시 조선 내에서 연간 약 5만 마리 이상 소를 도축하지 않았나 추정하고 있답니다. 자연히 징수한 포사세 또한 늘어야 했죠.

현실은 그렇지 못했습니다. 소 5만 마리면 포사세만 약 4만 원이 걷혀야 하지만, 1898년 실제 포사세 징수액은 고작 1305원 20전에 불과했죠. 단순 계산으로도 추산한 세수의 약 3~4%만이 실제로 걷힌 셈입니다. 이유는 있었죠. 일부 지배층이 공공연히 자행한 밀도축, 지방관과 포사파원 등의 횡령 문제는 물론이고, 일부 포사파원은 업자 및 백정들과 결탁해 멋대로 포사세를 인하하거나 아예 징수세액 자체를 탕감했습니다.

각급 관청간 마찰도 문제였습니다. 포사세 징수를 별도로 임명한 포사파원에게 맡기자, 지방관이 이들과 갈등을 빚었죠. 중앙은 중앙대로 포사세의 운영을 놓고 농상공부와 내장원이 대립했습니다. 포사파원을 파견하면서 그들에게 지급할 운영비를 제대로 주지 못해 포사파원들이 자의적인 수탈 횡령을 벌일 핑계가 생겼죠. 또 지방 세력가와 지방관들은 예전과 다름없이 각종 명목으로 소고기를 정기적으로 상납받았습니다.

<포사규칙>과 포사세를 둘러싼 난맥상은 당대 조선 사회 체계가 얼마나 심각하게 망가져 있었는지를 느끼게 해줍니다. 게다가 이 모든 혼란 속에서 정작 주체인 백정들은 소외당했습니다. <포사규칙>과 현존하는 시행세칙 그 어디에도 백정들의 처우나 급료 따위에 대해서는 규정한 바가 없습니다. <포사규칙>을 제정한 지배층의 관심사는 오로지 세금 부과와 징수에 있을 뿐, 그 밖의 문제엔 아예 눈을 감았습니다. 백정들의 처우는 사회적으로도 경제적으로도 개혁 이전과 다를 바 없었던 거죠.

1900년이 넘어가면 도축업에 대한 보다 더 자세한 규정들이 세워집니다. 안타깝게도 이 절차를 진행한 건 대한 제국 뜻이 아니었죠. 러일 전쟁을 거치면서 세계 열강으로부터 한반도의 지배권을 사실상 인정받은 일제는 바로 이 시기부터 본격적으로 내정 간섭과 침탈을 자행합니다.

러일 전쟁 당시 러시아 해군의 진군로. 러시아는 일본 해군을 상대하기 위해 말그대로 지구를 반 바퀴 돌아 대한해협까지 진출했습니다. 그 과정에서 적국인 영국 등의 견제를 받아가며 보급과 피로 등 온갖 문제에 시달린 건 물론입니다. 전쟁 결과 러시아가 한반도를 둘러싼 열강들의 경쟁에서 완전히 이탈하고, 조선은 일본에 더욱더 예속되고 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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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고보면 도축업자들을 보는 시선이 달라진 게 매우 최근인 것 같군요. 7-80년대를 배경으로 한 영화만 봐도 그러하니...
@uruniverse 1960년에 한 육사 생도가 4학년때 백정 출신인게 밝혀져 퇴학처분당한 일이 있었더라고요. 말씀하신 바대로 차별이 꽤 오래 이어진 모양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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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고기 먹기를 금하라 (3) - 1925년, 숭인동
때는 일제강점기, 경성부 관리들은 고민에 빠져 있었죠. 그들이 고민하는 원인은 지은지 고작 8년 된 부립 도축장때문이었습니다. 1914년 건설한 경성부립도축장은 한일합방 후 본래 아현동, 신설동에 있던 관립도축장, 그리고 현저동, 이태원의 사설도축장 등 여섯 곳을 통폐합해 근대적 위생 규격에 맞게 지은 관영 도축 시설이었죠. 문제는 이 시설이 처음 요망 조건을 다 채우지 못했다는 데 있었습니다. 오죽하면 설비가 부족하고 비위생적이기까지 하다는 평가까지 들었을까요. 이전 구한말 제정된 포사규칙은 민간업자를 규제하는 데 그 초점이 있었습니다. 근대적 공공위생 차원에서 도축 장소와 방식을 규정하는 법률은 1900년을 넘어서부터 차례차례 제정되었는데요. 러일전쟁 후 일제가 통감부를 설치하면서 이러한 법률 제정은 더 탄력이 붙었습니다. 기존 분리되지 않았던 도축장과 고기를 판매만 하는 정육점을 나누어 규정한 <도수장 및 수육판매규칙(1905.9)>, 도축장을 관영화, 허가제 운영한 <도수규칙(1909.8)> 등이 이 때 만들어지죠. 이에 따라 기존 도축업에 종사하던 백정들의 지위 역시 흔들렸습니다. 부유한 일부 백정은 허가를 얻어 점포를 냈지만, 대다수는 관영 도축장에 소속된 고용노동자 신세로 전락했죠. 1908년 8월, 서대문 밖 합동에 서부도축장이 문을 엽니다. 하지만 불과 3개월만에 부지 협소 등을 이유로 새 시설 부지를 탐색하게 되죠. 그 결과 아현동, 신설동에 대한도수장이란 관영 도축장이 들어섭니다. 아현동 시설이 돼지를 통째로 삶아 털을 제거하는 탕박 시설을 갖춘 방면, 신설동 시설은 철저히 소 도축에만 집중했죠. 한일합방 후 일제는 이들 시설을 총독부 내무부 위생과로 배속합니다. 이것을 나중에 한성부가 생기면서 넘겨받게 되죠. 그 뒤는 맨 처음 문단에서 설명한 대로입니다. 일제는 관리 효율을 명분삼아 기존 관영 및 민간 시설을 통폐합해 부립도축장을 조성합니다. 위치는 서대문형무소 남쪽 현저동 도축장이었죠. 1917년 현저동 경성부립도축장 모습. 대부분 나무 구조물이어선지, 시설은 빠르게 낡아버렸습니다. 거기다 수도 및 배수 시설이 형편없어서 핏물과 오물이 고여 여름마다 곤욕을 치뤘다고 합니다. 무엇보다도 시설은 기대만큼 효율적이지 못했는데, 도축 작업을 하는 백정들이 손에 익은 과거 방식 그대로 작업을 수행했기 때문이었죠. 시카고의 도살장이 포드에게 컨베이어 벨트 제조 공정의 영감을 줄 정도로 효율화, 고도화된 산업 시설이었던 것과 비교되는 대목입니다. 현저동 시설에 문제가 많았기에, 결국 경성부는 지은지 8년 된 부립도축장을 버리고 새 시설을 세우기로 결정합니다. 선정된 부지는 숭인동 동묘 근처였죠. 아직 서울이 지금처럼 규모가 크지 않을 때입니다. 동묘 인근은 서울 외곽이라 민가와 멀리 떨어져 있고, 청계천 하류와 가까워 배수 조건도 서대문 시설보다 나았습니다. 무엇보다도 이곳엔 이미 1923년 조성된 가축시장이 있었죠. 주요 산지인 강원도 등지에서 소가 들어오면, 동묘 시장을 거쳐 경성부 일대 주민들에게 공급했습니다. 숭인동은 도축장이 들어서기에 최적의 입지처럼 보였죠. 그리하여 일제 강점기 내내 서울 시민들이 먹는 고기는 이곳 숭인동에서 도축해 공급했습니다. 시간이 흐르면서 일제 역시 경성부 인구 증가에 맞춰 도시 계획을 수립하고 시가지를 확대하려 했죠. 자연히 도축장은 숭인동 아닌 다른 곳으로 또다시 옮겨야 했습니다. 하지만 이 계획은 결국 일제 시대 내에는 실현되지 못합니다. 숭인동 가축시장과 도축장이 마장동으로 옮긴 건 광복 후 50년대 후반에서 60년대 초반이 되어서야 가능했죠. 시카고 도축장 작업 과정. 시카고에선 이미 1867년부터 기계화된 공정을 도입해 도축에서 최종 제품까지 고도로 분업화된 하나의 라인에서 처리했다고 합니다. 각 단계에는 비숙련공이 투입되어도 충분히 제 몫을 해낼 수 있었다네요. 일부 몰양심한 육가공업체들이 물의를 일으키는 일도 종종 있었지만요. 이렇듯 도축 관련 법령이 발달하고 시설이 개선될수록 백정들의 처지는 나아지긴커녕 더욱 악화되었습니다. 신분 차별은 일제 시대에도 없어질 조짐이 없었죠. 1922년 대구 백정들이 야유회를 가면서 기생들을 불러 끼고 놀았는데, 양민들이 그걸 보고 혀를 차며 기생들을 비난하는 일이 있었습니다. 그 결과 대구 기생 조합이 해당 연회에 참가한 기생들을 제명해 버렸죠. 그 뒤로는 백정들이 아무리 불러도 기생들이 백정들 자리에 참석하는 일은 없었습니다. 하다못해 경제적으로라도 나아지면 기를 펴겠는데, 그것도 아니었습니다. 이전에 백정들은 도축 작업을 한 후 쇠기름같은 부산물을 자기 몫으로 주장할 수 있었죠. 그같은 부산물은 일종의 가외 수입처럼 여겨졌습니다. 하지만 임금 노동자가 된 후로는 그마저도 어려워졌죠. 백정들이 가내 수공업으로 행하던 가죽 공예도 근대화된 공장에서 찍어내는 물건들과 경쟁하기 힘들었습니다. 어쩌다 돈을 벌어 부자가 되어도 사회의 시선은 따가웠습니다. 어떤 백정들은 자기 자식만이라도 공립, 사립학교에 보내려고 부탁도 넣고 기부도 했지만 입학을 거절당하거나 아이가 차별을 못이겨 중퇴하는 일을 거듭했습니다. 또 어떤 백정은 일본으로 건너가 메이지 대학에 입학할 정도로 뛰어났지만, 도중에 학업을 중퇴하고 귀국한 뒤 총독부에서 일자리를 구하려다 포기했습니다. 백정은 총독부에서 받아주지 않는단 걸 뒤늦게 알아서였죠. 3.1운동이 일어나고 민족 운동이 활발해지는 와중에도 여전히 백정들은 식민지 속의 영원한 을이었습니다. 사람들은 일제의 가혹한 식민 정책 아래서 우리 민족이 독립하길 꿈꿨지만, 백정들이 오랫동안 겪어 온 차별과 억압에서 해방되어야 한다고 생각한 사람들은 적었습니다. 결국 백정 사회 스스로 이 모순을 해결할 새 움직임이 대두하죠. 무대는 이제 1923년 경남 진주로 넘어갑니다.
슈발리에 데옹
주말 특집, 18세기의 트랜스섹슈얼, 슈발리에 대옹(Chevalier d’Éon, 1728-1810)이다. 베르사이유의 장미에 나오는 오스칼의 일부는 이 캐릭터를 본따지 않았을까 싶기도 한데, 무척 흥미로운 삶을 살았던 “여성”이다. 외교관이자, 기사이자, 작가이면서 칼로 여러 남자들을 쓰러뜨렸다. 여자 옷을 입은 채로 말이다. 때는 루이 15세 시절이다. 루이 15세는 자신에게만 충성하는 정보조직을 하나 만들기로 하고 이름을 “국왕의 비밀(Secret du roi)”로 정한다. 왕비의 자선관(참조 1)인 Fleury 추기경을 수장으로 하는 이 국왕의 비밀은 32명의 요원으로 시작됐다. 뭔가 파이브스타스토리의 미라쥬 기사단을 떠올리게 하는 이 조직은 나중에 루이15세의 서거로 해체된다고 한다. (이렇게 표현하는 이유가 있다. 소수가 남아서 계속 활동을… 읍읍) 이 국왕의 비밀이 거둔 업적은 꽤 많다. 7년전쟁(1756-1763) 당시 러시아를 끌어들이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고, 폴란드 국왕을 이른바 택군(擇君)했으며, 루이 16세 때는 미국 독립운동에 결정적으로 개입한다. 그리고 영국을 침략할 계획을 세운다… 슈발리에 데옹이 이 비밀스러운 집단에서 제일 잘 알려진 인물인데, 그럴만한 이유가 있다. Chelsea Manning(1987-현)과 상당히 유사한 행태를 보였기 때문이다. 자신의 비밀 임무를 많이 폭로한 까닭이다. -------------- 태어날 때부터 곱게 태어나고 여리여리했던? 슈발리에 데옹은 한 가장무도회에서 루이15세의 눈에 띈다. 너무나 아름다운 여자로 나타났기 때문이다. 국왕은 그를 곧바로 고용, 러시아로 보낸다. 차리나 옐리자베타(Елизавета Петровна, 1709-1762. 참조 2)의 주변에 접근하기 위해서였다. 여자 황제였기 때문에 여장을 해서 보낸다는 계획이었다. 이 전략은 멋지게 들어맞았다. 물론 객관적으로는 프로이센이 더 커지는 것을 막기 위해서라는 이유가 있기는 하지만 슈발리에 데옹이 옐리자베타의 마음을 사로잡았던 것. 옐리자베타의 별난 취미 중 하나가, 남자는 여자 옷으로, 여자는 남자 옷으로 입혀서 무도회를 개최했었다고 하는데, 여기서 남자 옷을 입은 데옹은 너무나 여성스러웠기에 모두들 모습에 홀렸다는 전설이 있다. 만약… 옐리자베타가 좀더 오래 살았다면 7년전쟁의 유럽 전선은 프로이센의 멸망으로 이어졌을지도 모르겠다. 7년전쟁은 어떻게 보면 근대 이후 첫 세계대전(참조 3)이라 부를 정도로 중요한 전쟁이었다. 하지만 옐리자베타 사후의 러시아는 프로이센으로 편을 바꿨고, 슈발리에 데옹은 이제 영국으로 파견된다. 7년 전쟁 종료 후의 협상을 조금이라도 유리하게 이끌기 위해서였다. 런던에서도 슈발리에 데옹의 매력이 빛났다고 한다. 영국측 협상 담당자를 꼬셔서 음식과 입담으로 한껏 흥분시킨 다음, 그가 갖고 있던 문서를 훔쳐냈기 때문이다. 이 문서는 영국측의 종전 협상 전략이 들어있었다고 한다. 물론 슈발리에 데옹의 자서전에 나온 이야기이기 때문에 전부 신뢰할 수는 없겠지만 국왕의 연금이 늘어난 걸 보면 뭔가 얻기는 얻어냈던 모양이다. 그래서 국왕은 이번에 그/녀에게 아예 영국 침략 계획을 기안해 보라 시킨다. 7년전쟁 결과로 인해 해외식민지를 대거 빼앗긴 프랑스로서 뭔가 복수가 필요했기 때문이다. 게다가 마침 주영 프랑스 대사 자리가 비었고, 그/녀는 임시로 대사를 맡는다. -------------- 아마 그때가 그녀의 전성기였을 것이다. 리셉션이 매일같이 열리고 국왕 조지3세를 비롯하여 영국 친구들이 끝없이 늘어났다. 그러나 예산 지출이 너무나 많아서인지 결국은 제동이 걸린다. 정식으로 대사를 임명하여 그녀를 차석으로 떨어뜨린 것이다. 그 다음에는 아예 직위해제까지 해버렸다. 덤으로, 영국 침략 계획도 포기했다. 결국 그녀는 자기가 갖고 있던 비밀서류 몇 가지를 폭로하고, 영국 내에서 소송도 제기한다. 신임 프랑스 대사가 자기를 납치하고 죽이려했다고 말이다. 이 또한 과장이 있기는 해도 증언도 있고 해서 어느 정도는 사실이었던 듯 하다. 둘의 사이는 워낙 견원지간이었기 때문인데, 영국 정부와 경찰은 그녀를 보호했다. 이때부터는 영국 내 일반 대중에도 유명해졌다. 여자인데 기사이고, 외교관이고, 결투도 한다고 말이다. 프랑스 정부로서는 괴로운 일이었다. 남자인 거 다 아는데 이제 좀 그만 하라고 말이다. 하지만 그녀는 오히려 의사들의 진단서를 증거로 자기가 여자라고 주장하기 시작한다. 원래 여자인데, 상속 때문에 아버지가 잠깐 남자로 키웠을 뿐이라고 말이다(오스칼?). 결국은 14개월에 걸친 협상이 시작된다. 관련 문서를 다시 프랑스 정부로 넘기고, 데옹은 프랑스 귀국을 조건으로 하고 말이다. 이때 프랑스 정부에 내민 슈발리에 데옹의 조건은? 법적으로 자기를 여자로 인정하라였고, 프랑스 정부는 쿨하게 ㅇㅋ한다. 다만 입국하면 여자 옷을 입고 다녀라고 했으며, 심지어 Rose Bertin(참조 4)이 그녀에게 드레스를 제공했다. -------------- 자서전을 쓴 후 그녀는 1785년 다시금 런던으로 돌아왔는데, 런던을 떠나있는 8년 동안 집세가 밀려있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이건 좀 과장 같다). 순식간에 빚쟁이가 된 그녀는 남은 인생을 펜싱 결투로 돈을 벌기 시작한다. 짤방(참조 5)도 거기서 나온 것. 시합은 대부분 그녀의 승리였다고 한다. 때마침 일어났던 대혁명에 대해 그녀는 찬성, 아무래도 왕실과의 인연이 지긋지긋했던 모양이다. 합스부르크를 상대로 자기가 여자들로 구성된 부대를 이끌겠다고 혁명의회에 제안했으나 의회 내 군사위원회는 이 제안에 대해 아무런 조치를 취하지 않았다. 그래서 결국은 가난에 허덕이다가(국왕 조지3세가 허용한 연금밖에 없었다), 1810년 런던에서 사망한다. 그런데 영국 의사회가 기어이 그녀의 성별을 사망 후에 확인하고 말았다. 남자라고 발표해버린 것이다. 그래도 대영박물관이 그녀의 작품들을 전시(참조 6)하고 있기는 하다. 물론… 유달리 프랑스 근세를 좋아하는(참조 7) 일본도 그녀를 놓치지 않았다. 만화와 아니메, 슈발리에(シュヴァリエ 〜Le Chevalier D'Eon〜, 참조 8)를 내놓기는 했는데 아마 너무 사실에 근거해서 그려서 인기는 별로 없었던 모양이다. -------------- 참조 1. 백성에게 직접 보조금을 제공한다 하여, 자선관(aumônier, 영어로는 almoner)이라고는 하지만 실질적인 역할은 왕실 살림을 관리하는 최고 종교 관계자이다. 영국 왕실은 지금도 이 제도를 운영하고 있으며, 현재 성공회 주교, John Inge(1955-현)가 맡고 있다. 2. 어떻게 보면 예카테리나 대제의 시어머니 격이라 할 수 있겠다. 2019년 나왔던 HBO 드라마, Catherine the Great (2019)에서 잘 묘사된다. https://youtu.be/bNSacMPj1tE 3. 유럽은 물론 북미 대륙과 인도에서 전쟁이 났다. 물론 해외에서의 전쟁은 주로 영국과 프랑스, 유럽에서의 전쟁은 주로 프로이센 vs. 나머지였으며, 이때 프로이센이 멸망했다면 영국은 결코 종전협상에서 북미대륙이나 인도를 전부 얻지 못 했을 것으로 보인다. 이 또한 대체역사의 훌륭한 시작. 4. 로즈 베르탱(1747-1813)은 마리 앙투아넷에게 드레스를 만들어준, 요새 개념으로 보면 오뜨 쿠뛰르를 착안해낸 최초의 패션디자이너라고 봐도 과장이 아니다. 그녀의 인생도 흥미로운 부분이 많다. 5. 1789년, 생조르주와 슈발리에 데옹의 펜싱 결투를 묘사하고 있다. 출처는 위키피디어. https://fr.wikipedia.org/wiki/Charles_d%27%C3%89on_de_Beaumont 6. 사후 조사를 기록한 그림도 있다. 대영박물관: https://www.britishmuseum.org/collection/term/BIOG52143 7. 40년만의 베르사이유의 장미(2019년 10월 7일): https://www.vingle.net/posts/2680244 8. https://youtu.be/Vlz_eDIfNFI
주기적으로 문화를 포멧한 나라.jpg
분서갱유 (진나라, 기원전 212년) 의약 점술 농업 의학에 관련된 책을 제외한 모든 사상서적(경서)와 시문, 진나라의 역사를 제외한 모든 춘추전국시대의 역사서를 불태움 그래서 고대 중국 역사책은 거의 다 불에 타서 사라지고 몇 안되는 남은게 공자의 <춘추>를 비롯한 저서들임. 이건 당대 유학자들이 책을 통으로 암기해서 살아남음. 우리가 알고있는 유학의 사서오경도 주역 빼면(점치는 책이라고 살아남음) 다 나중에 암송해서 새로 쓴거임. 문자의 옥 (청나라, 17세기 후반~18세기 초) 대륙을 지배한 만주족이 한족의 반청의식을 꺾어버리기 위해 벌인 사건. 청나라 강희제~건륭제 시기 대대적으로 사상과 학문의 자유를 박탈하고, 글자 하나하나 트집잡아서 지도때도 없이 팔족까지 죽여버림. 이러니까 무서워서 아무도 현실비판이나 연구를 안함. 그래서 지금은 이 사건으로 인해 중국이 서양에 결정적으로 뒤쳐지게 되었다는게 정설임. 문화대혁명 (중화인민공화국, 1966~1976) “의심할 여지 없이, 무산계급 문화대혁명 중에 무산계급 신사조, 신문화, 신풍속, 신습관이 반드시 지주들과 기타 착취 계급의 구사상, 구문화, 구풍속, 구습관 이런 부패한 것들을 대체할 것이가. 위대한 마오쩌둥 사상으로 무장하여 떨쳐 일어선 중국 인민은 반드시 온갖 잡귀신을 쓸어버릴 것이다.” 가장 잘 알려진 조직적 국가적 문화파괴 사례. 4천년 이상의 중국 문화가 최소한 수백년 수준으로 리셋된 사례. 더 말해 무엇하리 그리고 역사는 늘 그렇듯 반복된다. 주기가 점점 짧아지고 있으니.... 그게 지금일지도 출처 : 이토렌트 왜 지들 문화는 자꾸 리셋시키면서 다른 나라 문화는 자기꺼라고 우기는지.. 참 알 수 없는 민족입니다..... (문화는 리셋되는데 왜 저 인간은 리셋이 안 될까요)
행주산성 산책
점심 먹고 산책 다녀왔어요 첨 와봐서 높지 않아 별 생각없이 올라가는데 ㅎㅎ 넘 더웠어요 ㅎㅎ 올라가는 길에 충장사 먼저 들려봤어요 토성은 다음 번에 가보려구요~~ 충장사 가려면 문 지나가야 되요 역광이라서 내려 올 때 문 찍었어요 문은 닫혀있고 청솔모가 반겨줬어요。^‿^。 그늘은 선선하고 풀내음 가득해서 오랜만에 산책하니 좋았어요 반쯤 올라온듯 해요 대첩비 올라오는 길 탁 트여 뷰 넘 시원했어요 덕양정 방향으로 조금만 올라가면 정상 생각보다 가파른 언덕코스 입니다 쩌~~기 멀리 보이는거 서울이더라구요 남산이랑 롯데타워가 보이는게 아니겠어요?!?(°∀°)b 63빌딩도 보였어요 ㅎ 정상이 코앞이네요 구름 한점 없이 맑은 하늘 볕는 뜨겁고 바람은 시원해서 대첩비각 옆 그늘에서 좀 쉬다가 내려 왔어요 대첩비각 귀퉁이서 아니 참외가 뙇 ㅎ 어떻게 참외가 자라나는가 엄마랑 얘기하다 누가 먹다 뱉은 씨가 자랄 수 있나?!?!? 유추하다 자라나는 참외 넘나 귀여워 사진 찍었네요 ㅎ 올라갈 땐 한참 걸였는데 내려오는 건 금방인듯 했어요 호수공원가서 스템프 하나 찍고 차에 둔거 기억나서 ㅎ 2번째로 행주누리길 4코스 찍었어요~o(^▽^)o 깜짝 잊고 물 안들고 올라가 어찌나 물이 마르던지 바로 카페 검색해 근처 카페 기와 방문하고 시원하게 음료 마시고 왔어요 오늘은 푹 잘 수 있을 것 같아요
안전규정은 피로 쓰여진다
과거 필름(영화, 엑스레이 등)엔 니트로셀룰로오스가 들어갔으나 불이 너무 잘 붙어 화재가 자주 발생했고, 결국 니트로셀룰로오스를 넣지 않는 쪽으로 개발됨 국내 건축법은 원래는 허용응력 설계법으로 건물을 설계했었으나 삼풍백화점 참사가 벌어진 이후, 건물이 최대 버틸 수 있는 정도를 알아보고 설계하는 극한강도 설계법, 한계상태 설계법을 사용 스페인서는 위험물질 운반 차량은 밤에만, 것도 인구 밀집지역은 피해가도록 법적으로 정해졌는데 과거 LPG 탱크로리가 캠핑장 인근에서 전복 후 폭발하는 바람에 217명이 사망하는 참사가 벌어진 이후 바뀜 1903년 미국 이로쿼이 극장서 화재가 발생 603명이 사망 비상구가 잠긴 곳이 많았고, 열린 곳도 여는 방법조차 안알려졌단 얘기가 오고갔고 이후 비상구에 저렇게 가로로 큰 잠금장치를 달아 누구나 쉽게 열수 있도록 함 1942년 미국 코코넛 그로브 클럽서 화재가 발생 출입문이 모두 회전문이었는데, 이 때문에 대피가 제대로 이뤄지지 못해 492명의 사망자가 발생 이후 회전문 옆에는 반드시 일반문을 설치하게 됨 일본 하네다 공항서 재입장을 해도 쉽게 잡지 못한다는 헛점을 발견한 사람이 비행기를 납치한 사건이 벌어진 이후 모든 공항에서는 재입장을 금지하게 됨 과거 미국서 음주운전 차량과 정면충돌한 스쿨버스서 화재가 발생 불길 때문에 맨 앞의 문으로 탈출 못해서 맨 뒤 비상구로 탈출하다 지연되 27명이 사망하는 사태가 벌어진 이후 연료통은 충격에도 안전하게 중앙으로 이동 후 케이지 설치, 비상구는 9개로 늘어남 독일서 고속철도 탈선 사고 후 101명이 사망 열차가 너무 튼튼해서 구겨진 차체 내의 사람들을 구조하기 힘들었다는 얘기가 나왔고(급하면 공구 들고와서 차체 잘라다 구조하는데 그걸 못함) 열차 내에 안전망치와 쉽게 깨지는 부분을 설치, 비상시 깨고 탈출하도록 됨 우리나라는 대구 지하철 방화사건을 겪은 이후 출입문 비상계패장치를 비롯해 지하철 위기 상황시 탈출법을 지하철 곳곳에 적어둬서 시민들이 기억하게 함 인도항공 182편 폭파 사건, 로커비 테러 등 주인없이 짐만 실린 여객기서 폭탄테러가 몇번 발생한 이후 항공기엔 반드시 주인 없는 짐을 빼도록 법적으로 규정됨 9.11테러 당시 항공기 내부 보안에 대한 지적이 상당했고 이후 공구를 가져오지 않는 한 외부에서 쉽게 열지 못하도록 항공기 설계가 바뀜 저먼윙스 자살 추락 사건으로, '만약 파일럿이 나쁜 마음을 품으면 아무도 막지 못한다.' 는 사실이 알려진 후 항공기 조종석에는 반드시 최소 2명 이상, 한명이 화장실 가더라도 정해진 승무원이 대신 들어가도록 바뀜 대한항공 007편이 항로를 벗어났다가 격추 당한 이후 군사용으로만 쓰던 GPS가 민간에도 보급, 항로를 젓어나는 일이 없도록 함 영국항공투어 28M편에서 화재가 일어나고, 55명이 사망 연기가 너무 자욱해 앞이 안보이고, 내부가 너무 좁았다는 얘기가 나온 뒤 통로는 19cm 더 늘어났고, 바닥에 비상시 켜지는 등을 설치해 승객들의 대피를 돕도록 함 1955년 르망 24 레이스 당시, 레이싱카 한대가 전복 후 관중석으로 날아간 뒤 폭발해 레이서 포함 84명이 숨진 이후 관중석에는 안전펜스를 붙여 차량이 쉽게 날아오지 못하도록 됐고, 또 관중석과 트랙 사이에 일정 공간을 넣음 ㄹㄹㅇ 펌 첫번째를 보면서 시네마 천국에서 필름에 불이 붙어 불나던 장면이 떠오르더구려. 많은 안전 지침들이 여러 사람들의 피로 쓰여졌다오...
백린탄을 끌어안아 훈장 받은 남자
제2차 세계대전 당시 52 폭격 대대 소속 B-29 로스엔젤레스호에서 무전사로 근무하던 헨리 E. 어윈 선임부사관(staff sergeant)의 사연. (표현방법 등을 수정했습니다.) 1945년 4월 12일 사건 당일 선두기체로서 표적용 백린탄을 떨어뜨리기 위해 핀을 뽑고 발사대에 넣는 순간 결함으로 일찍 터져 기체안으로 튕김. 백린탄이 튕기면서 어윈의 얼굴을 강타해 눈과 코를 잃음 백린탄 연기가 기체 안에 차면서 조종사가 시야를 잃고 B-29는 급강하 그 순간 어윈은 손으로 백린탄을 더듬어서 위치를 찾은 후 팔로 백린탄을 가슴팍에 안고 기체 앞쪽으로 기어서 감 중간에 항해사 책상이 길을 막고 있었는데 그것도 자기손으로 치운 후에 창문 열라고 소리치며 부조종석 창문까지 감 그리고 녹아버린 손으로 창문을 더듬어서 찾은 후에 창문 밖으로 백린탄을 던짐 (백린으로 불타오르는 어윈 보고 멘붕한 부조종사 장교한테 경어로 "excuse me sir"하고 캐니스터를 내던졌다고...) 그 후에야 어윈은 바닥에 쓰러졌고, 동료들이 불붙은 어윈의 몸을 소화기로 꺼줌 수직강하하던 로스엔젤레스호는 불과 300피트에서 급상승해서 구사일생했고 어윈의 치료가 기능한 이오지마에 착륙함 의사들이 4시간동안 눈에 묻은 백린들을 제거하는 수술 등을 했는데 놀랍게도 어윈은 계속 의식이 있었다고 함 백린은 산소만 만나면 타는데 4시간동안 눈이 타는 고통을 당한것. 이 사실을 보고받은 르메이 커티스(석기시대 매니아 맞습니다.)는 새벽 5시에 워싱턴에다가 명예 훈장(Medal of Honor)추천을 했고, 부관을 진주만에 파견해서 '이 용감한 군인이 죽기 전에 무슨 일이 있어도 명예 훈장을 가져오도록' 라고 명령함. 태평양에 있는 명예 훈장이 하와이 호놀룰루의 진열대에 딱 하나 있었기 때문에 호놀룰루로 특별 수송기가 파견되어 훈장을 가져옴. 가져올 당시 임무에 충실했던 부관은 훈장 재고가 없다는 말을 듣고 박물관에 전시되어있던 훈장을 케이스를 박살내고 탈취해 옴. (새벽 비행기로 도착해서 사람도 없고 정식절차도 밟을 시간도 없었기에 처음부터 훔쳐올 생각이었다고) 그동안 이오지마에서 괌으로 후송된 어윈은 4월 19일 훈장을 수여 받게 됨 그래서 아마도 미국 역사상 가장 짧은 시간 내로 명예훈장이 수여됨. 수여식은 병실에서 바로 진행됨. 어윈은 47년에 제대할때까지 43번의 수술을 받았고 제대 후엔 VA에서 화상환자들을 돕는 일을 했다 함 그리고 2002년 1월 16일에 영면 요약 : 재팬 핫을 위해 폭격기 승무원으로서 비행중 표적 지시용으로 투하할 백린탄이 기내에서 기폭. 모두가 이제 다 뒤졌구나 싶었을 때 헨리 선임부사관이 활활 타오르는 백린탄을 안아들고 뱅기 창문있는 곳 까지 들고감. 들고 가다가 얼굴에 튀고 눈에 튀고 앞을 볼 수가 없어서 손으로 더듬거리면서 걸어감 겨우겨우 뱅기 창문 위치에 다다르자 창문 열고 집어던짐. 어떻게든 죽진 않고 살아남아서 병원에 입원. 폭격도 무사히 폭격성공. 관련영상 그리고..이 글에 달린 댓글 하나 한국이었다고 가정했을 때, 1. 기체 결함을 은폐 축소하는 과정에서 병사 운송 늦어짐 2. 가까스로 목숨을 건진 병사에 대해 국방부, "전례없다"는 이유로 국가유공자 지정 및 훈장 수여 거절 3. 해당 병사에게 천문학적인 금액의 수술비가 청구, 국가 지원은 불과 수백만원에 그침 4. 전역 후 얼마 지나지 않아 병사 사망. 병원 측은 "평소 지병에 의한 사망"으로 진단 5. 유가족 및 시민들에 의한 촛불시위 현장에 국정원 직원으로 보이는 사람들이 나타나 방해 공작 6. 당시 군 병원에서 근무하던 한 인턴, "환자의 회복을 방해하라는 압박 있었다"고 언론에 밝힘 7. 사고 발생 이유에 대해 국방부는 기상악화가 원인이라고 발표했으나, 군납 비리에 의한 기체 오작동으로 드러남 8. 야당과 시민단체의 거센 비난에도 불구, 군 법원에 의해 당시 지휘관 및 관계자들 가벼운 징계에 그침 9. 6개월 뒤 같은 부대에서 똑같은 사고 재발 1차 출처 : 디시 기갑갤러리 http://gall.dcinside.com/board/view/?id=arm&no=1028121&page=2&exception_mode=recommend 2차 출처 : 클리앙 대단하신 분이군.... 하고 읽다가 마지막 댓글에 한숨만 깊게 나오는군요.........
숙종이 내가 돼지냐며 송편을 내동댕이 친 이유.txt
숙종은 평소에 신분을 가린 채 궁궐 바깥에 나가 민심을 살피는 것을 즐겨 했는데 그 일화 중 하나입니다. 어느 날 숙종은 밤에 미행으로 남산골을 순시하였다. 밤이 깊은데 어디서 낭랑하게 글 읽는 소리가 나서 소리를 쫓아가 보니 어느 오막살이집에서 흘러나오고 있었다. 들창 사이로 안을 엿보니 젊은 남편은 글을 읽고 새댁은 등잔 밑에서 바느질을 하고 있었다. 젊은 선비 내외의 모습은 비록 가난하지만 귀엽고 흐뭇해 보였다. 얼마쯤 지나 젊은 남편은 책을 덮으며 속이 출출하다고 하였다. 그러자 새댁이 조용히 일어나 벽장 속에서 주발 뚜껑에 담은 송편 두 개를 꺼내 놓으며 드시라고 한다. 남편은 반가워하며 얼른 한 개를 집어먹더니 두 개째 집어 들었다. 그러자 임금은 괘씸한 생각이 들었다. '시장하기는 마찬가지 일 텐데 어찌 혼자서 두 개를 다 먹나?' '인정머리 없는 놈'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웬걸 남편이 송편 하나를 입에 물고 새댁의 입에 넣어주는데 서로 사양하며 즐기는 것이었다. 숙종은 부부의 애정에 감동하며 부러운 마음으로 궁으로 돌아왔다. 다음날 나인을 불러 송편이 먹고 싶다고 하자 수라간이 온통 난리를 치르며 큰 수라상이 들어오고 큰 푼주에 송편을 높다랗게 괴어 전후좌우 옹위를 받으며 요란스럽게 들고 오지 않는가... 눈앞에 아른거리던 어젯밤의 아름다운 광경은 깨어져 버리고 울컥 화가 치민 왕은 "송편 한 푼주를 먹으라니 내가 돼지야?!" 하면서 송편 그릇을 뒤집어엎으며 내동댕이 쳤다. 모두 왕의 심정을 알리 없어 의아해 할 뿐이었지만 그 후 내막을 알게 되고 "푼주의 송편이 주발 뚜껑 송편의 맛보다 못하다"라는 속담이 생겨났다고 한다. 근데 이런데다 담아주니 나라도 씅날듯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모야 성질머리 보소 ㅋㅋㅋㅋㅋㅋㅋㅋ 근데 저 사이즈면 ㅅㅂ 마을잔치 아니냨ㅋㅋㅋ 내가 수라간 궁녀였어도 주상전하께 송편을 대령하라~~~~~~~~~~~~~~ 해서 허겁지겁 다들 모여앉아 500개정도 만들고 그중에 제일 예쁜놈 2~30개만 올린건데 그걸 걷어차시네 ㅇㅇ 현타 오지게 올듯 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