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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고기 먹기를 금하라 (3) - 1925년, 숭인동

때는 일제강점기, 경성부 관리들은 고민에 빠져 있었죠. 그들이 고민하는 원인은 지은지 고작 8년 된 부립 도축장때문이었습니다. 1914년 건설한 경성부립도축장은 한일합방 후 본래 아현동, 신설동에 있던 관립도축장, 그리고 현저동, 이태원의 사설도축장 등 여섯 곳을 통폐합해 근대적 위생 규격에 맞게 지은 관영 도축 시설이었죠. 문제는 이 시설이 처음 요망 조건을 다 채우지 못했다는 데 있었습니다. 오죽하면 설비가 부족하고 비위생적이기까지 하다는 평가까지 들었을까요.

이전 구한말 제정된 포사규칙은 민간업자를 규제하는 데 그 초점이 있었습니다. 근대적 공공위생 차원에서 도축 장소와 방식을 규정하는 법률은 1900년을 넘어서부터 차례차례 제정되었는데요. 러일전쟁 후 일제가 통감부를 설치하면서 이러한 법률 제정은 더 탄력이 붙었습니다. 기존 분리되지 않았던 도축장과 고기를 판매만 하는 정육점을 나누어 규정한 <도수장 및 수육판매규칙(1905.9)>, 도축장을 관영화, 허가제 운영한 <도수규칙(1909.8)> 등이 이 때 만들어지죠. 이에 따라 기존 도축업에 종사하던 백정들의 지위 역시 흔들렸습니다. 부유한 일부 백정은 허가를 얻어 점포를 냈지만, 대다수는 관영 도축장에 소속된 고용노동자 신세로 전락했죠.

1908년 8월, 서대문 밖 합동에 서부도축장이 문을 엽니다. 하지만 불과 3개월만에 부지 협소 등을 이유로 새 시설 부지를 탐색하게 되죠. 그 결과 아현동, 신설동에 대한도수장이란 관영 도축장이 들어섭니다. 아현동 시설이 돼지를 통째로 삶아 털을 제거하는 탕박 시설을 갖춘 방면, 신설동 시설은 철저히 소 도축에만 집중했죠. 한일합방 후 일제는 이들 시설을 총독부 내무부 위생과로 배속합니다. 이것을 나중에 한성부가 생기면서 넘겨받게 되죠. 그 뒤는 맨 처음 문단에서 설명한 대로입니다. 일제는 관리 효율을 명분삼아 기존 관영 및 민간 시설을 통폐합해 부립도축장을 조성합니다. 위치는 서대문형무소 남쪽 현저동 도축장이었죠.

1917년 현저동 경성부립도축장 모습. 대부분 나무 구조물이어선지, 시설은 빠르게 낡아버렸습니다. 거기다 수도 및 배수 시설이 형편없어서 핏물과 오물이 고여 여름마다 곤욕을 치뤘다고 합니다. 무엇보다도 시설은 기대만큼 효율적이지 못했는데, 도축 작업을 하는 백정들이 손에 익은 과거 방식 그대로 작업을 수행했기 때문이었죠. 시카고의 도살장이 포드에게 컨베이어 벨트 제조 공정의 영감을 줄 정도로 효율화, 고도화된 산업 시설이었던 것과 비교되는 대목입니다.
현저동 시설에 문제가 많았기에, 결국 경성부는 지은지 8년 된 부립도축장을 버리고 새 시설을 세우기로 결정합니다. 선정된 부지는 숭인동 동묘 근처였죠.

아직 서울이 지금처럼 규모가 크지 않을 때입니다. 동묘 인근은 서울 외곽이라 민가와 멀리 떨어져 있고, 청계천 하류와 가까워 배수 조건도 서대문 시설보다 나았습니다. 무엇보다도 이곳엔 이미 1923년 조성된 가축시장이 있었죠. 주요 산지인 강원도 등지에서 소가 들어오면, 동묘 시장을 거쳐 경성부 일대 주민들에게 공급했습니다. 숭인동은 도축장이 들어서기에 최적의 입지처럼 보였죠.

그리하여 일제 강점기 내내 서울 시민들이 먹는 고기는 이곳 숭인동에서 도축해 공급했습니다. 시간이 흐르면서 일제 역시 경성부 인구 증가에 맞춰 도시 계획을 수립하고 시가지를 확대하려 했죠. 자연히 도축장은 숭인동 아닌 다른 곳으로 또다시 옮겨야 했습니다. 하지만 이 계획은 결국 일제 시대 내에는 실현되지 못합니다. 숭인동 가축시장과 도축장이 마장동으로 옮긴 건 광복 후 50년대 후반에서 60년대 초반이 되어서야 가능했죠.

시카고 도축장 작업 과정. 시카고에선 이미 1867년부터 기계화된 공정을 도입해 도축에서 최종 제품까지 고도로 분업화된 하나의 라인에서 처리했다고 합니다. 각 단계에는 비숙련공이 투입되어도 충분히 제 몫을 해낼 수 있었다네요. 일부 몰양심한 육가공업체들이 물의를 일으키는 일도 종종 있었지만요.

이렇듯 도축 관련 법령이 발달하고 시설이 개선될수록 백정들의 처지는 나아지긴커녕 더욱 악화되었습니다. 신분 차별은 일제 시대에도 없어질 조짐이 없었죠. 1922년 대구 백정들이 야유회를 가면서 기생들을 불러 끼고 놀았는데, 양민들이 그걸 보고 혀를 차며 기생들을 비난하는 일이 있었습니다. 그 결과 대구 기생 조합이 해당 연회에 참가한 기생들을 제명해 버렸죠. 그 뒤로는 백정들이 아무리 불러도 기생들이 백정들 자리에 참석하는 일은 없었습니다.

하다못해 경제적으로라도 나아지면 기를 펴겠는데, 그것도 아니었습니다. 이전에 백정들은 도축 작업을 한 후 쇠기름같은 부산물을 자기 몫으로 주장할 수 있었죠. 그같은 부산물은 일종의 가외 수입처럼 여겨졌습니다. 하지만 임금 노동자가 된 후로는 그마저도 어려워졌죠. 백정들이 가내 수공업으로 행하던 가죽 공예도 근대화된 공장에서 찍어내는 물건들과 경쟁하기 힘들었습니다.

어쩌다 돈을 벌어 부자가 되어도 사회의 시선은 따가웠습니다. 어떤 백정들은 자기 자식만이라도 공립, 사립학교에 보내려고 부탁도 넣고 기부도 했지만 입학을 거절당하거나 아이가 차별을 못이겨 중퇴하는 일을 거듭했습니다. 또 어떤 백정은 일본으로 건너가 메이지 대학에 입학할 정도로 뛰어났지만, 도중에 학업을 중퇴하고 귀국한 뒤 총독부에서 일자리를 구하려다 포기했습니다. 백정은 총독부에서 받아주지 않는단 걸 뒤늦게 알아서였죠.

3.1운동이 일어나고 민족 운동이 활발해지는 와중에도 여전히 백정들은 식민지 속의 영원한 을이었습니다. 사람들은 일제의 가혹한 식민 정책 아래서 우리 민족이 독립하길 꿈꿨지만, 백정들이 오랫동안 겪어 온 차별과 억압에서 해방되어야 한다고 생각한 사람들은 적었습니다. 결국 백정 사회 스스로 이 모순을 해결할 새 움직임이 대두하죠.

무대는 이제 1923년 경남 진주로 넘어갑니다.
4 Comment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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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 다음편 기대 되네요!
이제 형평사 운동이 시작되겠군요...
혹시 도민준교수님이세요?
@acemarioshin ㅋㅋ 교수님께 실례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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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후 일본의 구세주들 (1) - 해체 위기에 선 일본호
일본에 철강산업 따윈 필요 없겠지요. 기껏해야 연간 300만 톤 정도 있으면 되나요? 그 정도는 미국에서 공급하면 되지요. 전후 일본을 사실상 점령 통치한 연합국 사령부, 일본에서 GHQ라고 부르는 미군정부 인사 하나가 패전 직후 일본 관료들 앞에서 했다는 얘기입니다. 거꾸로 뒤집어 얘기하면, 앞으로의 일본에선 제철소 단 하나도 구경할 일 없을 거란 뜻이나 다름없었죠. 그 자리에 있던 일본측 인사들 안색이 어떠했을지는 안 보고도 짐작이 갑니다. 맥아더의 GHQ는 애초 일본을 완전히 이등 국가로 만들 작정이었습니다. 1945년 9월 미 국무부가 쓴 <항복 후 미국의 초기 대일방침>엔 이런 언급이 있었죠. 일본의 군사력을 지탱하는 공업시설 등 경제적 기초는 파괴되어 재건하지 못한다. 일본인의 생활 수준은 그들이 침략한 아시아 각국의 생활 수준보다 높지 않도록 한다. 미군정이 내놓은 조치들은 과감하고 상당히 진보적이었습니다. 전통적 재벌 그룹을 해체하고 그 중심에 있던 지주회사들을 폐쇄했고, 몇몇 산업체를 팔아치워 전쟁 배상금을 확보하려 계획했죠. 또 농지개혁을 통해 전통적 소작제를 붕괴시켰습니다. 경찰을 지방 자치 조직으로 분권화했고, 사법부에서 검찰 조직을 떼내어 권력을 나누었죠. 노동자들에게는 노조 결성과 파업의 자유를 제공했고, 공산당을 합법화한 것도 맥아더의 군정부였습니다. 또 전통적, 봉건적 가족제도를 보장해온 민법상 규정들을 뜯어고치면서 여성에서 참정권을 주었죠. 새 헌법과 내각도 사회당 중심의 혁신 내지 중도주의 노선이 주도하도록 미국의 입김이 미쳤습니다. 오죽하면 같은 GHQ 내에서도 민정국이 일본을 공산화하려 한다는 볼멘소리가 나왔을까요? 2차 대전 직후 미국의 동아시아 구상에서 가장 중요한 파트너로 여긴 건 처음부터 일본이 아니었습니다. 장제스가 통치하는 중화민국이 중국 대륙을 여전히 통치하고 있었으니까요. 소련의 바로 턱밑에 강력한 우방이 있다면 미국에게도 무척 든든했을 겁니다. 중화민국이 이 지역에서 중요한 동맹이 된다면, 일본을 지금처럼 재무장할 필요도 없었겠죠. 당시 일본은 침몰하는 배나 마찬가지였습니다. 인구의 3, 4%에 이르는 사상자들, 국부의 1/3을 상실했고, 한반도 등 식민지에 의존해 온 식량 공급망이 붕괴하면서 미군 식량 원조에 의존할 수밖에 없는 형편이 되었죠. 젊은 판사가 아사하고, 메틸 알콜을 섞은 싸구려 술과 암시장이 공공연히 돕니다. 인플레이션으로 인해 물가상승률은 한때 539%라는 믿기지 않는 수치를 찍었고, 매춘과 저질 오락 잡지인 가스토리 잡지가 성행했죠. 사카구치 안고가 '타락론'을 발표하는 등 일본 퇴폐주의가 등장하는 것도 바로 이 시점입니다. 하지만 중국에서 국공내전 결과 중국 공산당이 승리하고 중화민국이 타이완으로 밀려나면서 상황이 달라집니다. 대륙에서 파트너를 잃은 미국은 새삼 동아시아에 밀려오는 공산화 물결에 겁을 집어먹었죠. 그들 눈엔 흡사 오래전부터 가설로만 존재했던 도미노 이론이 실재로 작동하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소련, 그리고 중국. 그 다음엔 남한과 일본이 공산화될지도 몰랐죠. 그렇게 되면 미국은 동아시아에서 아무런 영향력도 행사하지 못하게 될 겁니다. 그 결과 GHQ는 정책 방향을 선회했습니다. 일본을 재무장시켜 최소한 유사시 미군의 보급 기지가 될 수준까지 만들고, 동아시아에서 공산주의가 더이상 확산되지 못하도록 막아야 한다란 의견이 점차 힘을 얻었죠. 미국에겐 일본을 통치할 체제를 아예 백지부터 새로 세울 여유가 없었습니다. 식량 부족으로 인한 사회 불안, 노조 운동의 과격화, 5월 수립된 사회당내각 등으로 인해 미 군정부는 만약 일본 경제 재건에 실패한다면 일본 또한 공산화될 거라고 우려했죠. 미국의 정책목표는 '민주적 일본이 스스로 힘으로 지탱할 수 있는 무역 파트너로서 자유세계에 참여토록 준비시키는 것' 1948년 10월 <미국의 대일정책에 관한 권고>에는 위와 같은 내용이 적혀 있습니다. 불과 3년 사이에 일본에 부여한 역할이 완전히 바뀐 셈이죠. 침몰하던 일본호는 이때 완전히 구사일생으로 되살아나게 됩니다. 하지만 일본이 진정으로 회복하기까진 여러 우여곡절이 있었습니다. GHQ의 무리한 정책, 종전 후 최대 정재계 비리 사건, 또 GHQ가 일본에 이식한 미국 기술의 싹이 어떻게 일본 토양에서 왕성하게 자라났는지 등. 이번 시리즈에서 할 얘기는 1970, 80년대 황금기 일본을 탄생시킨 체제와 거장들의 이야기입니다.
호랑이...아니 노예굴에 끌려가도 정신만 차리면 인싸된다
아유바 슐레이만 디알로는 세네갈의 금수저 노예상인이었다. 노예가 아니라 노예상인이라는데 주목 30살에 a4용지 좀 사고 겸사겸사 노예 두명도 팔려고 시장갔다가 집으로 돌아오다 다른 아프리카 부족에게 납치 당해서 노예상인에서 노예로 다운그레이드를 당했다 저런! 사실 흑인 노예 무역은 상당수가 부유한 흑인이 가난한 흑인을 납치하거나 사들여서 되팔렘하는 식으로 이뤄졌는데, 뭐 이걸로 노예무역을 정당화하진 말구 노예제와 인종차별은 둘 다 굉장히 나쁜 짓인거에오. 흑인노예는 우사스 침대 위에 묶여있는 사이가 하나로 충분해 아무튼 30세의 아유바씨는 노예라는걸 나타내기 위해 머리가 빡빡 밀린후 팔려나갔다. 이 와중에 우리집은 금수저라 내 몸값 낼 수 있다고 열심히 설득했다. 노예가 노예주한테 애원해도 씨알도 안 먹히는게 정상인데 인싸력이 워낙 좋았는지 집에 우편까지 보내는데 성공했다! 근데 정작 배달부가 농땡이를 까느라 늦어서 몸값 가져오기 전에 노예 핫플레이스 미국으로 팔려가고 말았다. 끌려간 곳은 메릴랜드의 담배농장이었다. 저런! 금수저 엘리트로 일하다가 담배나 따게된 아유바씨였지만 기죽지 않고 특유의 인싸력을 발휘하기 시작해 주목을 받았다. 담배 말기를 개못해서 외양간에서 근무했는데 유식하고 성격이 개인싸라 많은 백인들의 호감을 샀다. 머리가 얼마나 똑똑했는지 신앙을 지키기 위해 두꺼운 꾸란을 기억만으로 처음부터 끝까지 배껴서 썼다고 한다. 무슐림이다보니 노예 주제에 하루 다섯번 꼬박꼬박 기도타임을 지켰는데 들켜도 인싸력으로 어떻게든 넘겼다 3년동안 하얀불알친구들을 만든 아유바씨는 불알친구들을 꼬셔서 헬메리카를 탈출해 영국으로 건너갔다. 영국에서도 상류층과 어울리면서 또 불알친구들을 잔뜩 만들면서 친목질을 했다. 백인 친구들이 아유바씨를 기독교인으로 만들려고 여러번 시도했는데 그때도 인싸력으로 요 프렌즈 난 프렌즈를 배신하지 않듯 알라도 배신하지 않아 와썹 대충 넘겼다. 가끔 신앙인들과 토론배틀을 뜨기도 했는데 다시 말하지만 이 인간 지금 노예임 얼마나 인싸였단 말인가. 맨 위의 초상화도 이때 그렸는데 영국옷이 아니라 고향옷을 입고 찍었다 아무튼 그렇게 아유바씨는 영국에서 3개월 정도 지내면서 돈 많은 인싸친구들을 잔뜩 만들었고 친구들이 60파운드나 되는 거금을 모아준 끝에 탈노예에 성공했다 인싸친구들과 씬나는 작별파티를 즐긴 후에 대서양을 건너 당당하게 집에 돌아왔다. 겨우 4년 걸렸다. 집에 돌아왔을 때는 세네갈이 전쟁에 초토화됐고 아빠도 죽었고 아내들은 다 아유바가 죽은줄 알고 재혼한 상태여서 살짝 마음이 아팠지만 또 인싸력을 발휘해서 금방 금수저로 복귀하고 신나는 노예탈출기를 책으로 써서 돈을 많이 벌었다. 아유바가 쓴 책은 굉장히 인기있어서 영국이랑 프랑스어로 번역되기도 했다. 인싸는 노예굴에 끌려가도 4년이면 충분하다 인싸 강해! (출처) 인싸 대단해
어마어마하게 뒤끝 쩔어줬던 미군 장교.history
1905년 상반기  일본, 요코스카시 장갑순양함 USS 신시내티가 일본에 잠시 정박해 있는 동안 승조원들이 일본 관광을 하고 있었고, 그 중 한 소위가 가마쿠라 불상을 구경하고 있었다. "오, 불상 꽤나 멋있네."  "이 지갑은 이제 제 겁니다!"  그런데 불상에 정신이 팔린 그의 지갑을 어느 소매치기가 훔쳐갔다.  "야, 야 이 새끼야 내 지갑 내놔, 어이 거기 순사님 저 새끼 좀 잡아봐요!"  "귀찮은데스" "이 시발년이" 그렇게 그 소위는 경찰을 포함해 다수의 현지인들에게 도움을 요청했으나 그 누구도 협조해주지 않았고 결국 지갑을 잃어버리고 말았다.  그렇게 그는 두 번 다시 일본은 쳐다보지도 않기로 결심한다.  애석하게도 일본인들이 그렇게 좆같이 취급한 소위는 바로 어니스트 킹 (Ernest J. King) 2차 대전 당시 미 해군 총사령관이자 동시에(!) 해군참모총장이 되시는 리히, 니미츠, 홀시와 함께 유일한 미 해군 원수가 되실 몸이었다. 킹은 이 사건 이후로 일본에 대해 악감정을 많이 품고 내내 일본 욕을 해댔으며, 미 해군이 일본 본토 공격에 찬성하자 태평양함대 최고사령관 체스터 니미츠 제독은  "이제 40년 전에 잃어버린 지갑의 복수를 하러 가시겠군" 이라고 농담을 날렸다고 한다. 출처 뒤끝 쩌네 ㅋㅋㅋ 하지만 적이 같으므로 나는 참 싱글벙글 ㅋㅋㅋㅋ 이거 보니까 또 생각나는 현대인 내한했을 때 공항에서 어떤 팬이 싸인받으려고 가져온 매직으로 노엘이 아끼는 자켓에 그만... 하지만 노엘은 한국을 매우 사랑하지 싱글벙글
추석이 민족 최대의 명절이 된 이유는?
예전부터 ‘설’과 ‘추석’ 중 어느 명절이 더 민족 최대의 명절인지 궁금했답니다.  여러분은 그러지 않았나요? 전혀, 네버, 안 궁금하셨다고요?^^ 우선 추석이 설날과 함께 민족 최대의 명절이 된 건 가짜 오리지날, 즉 ‘가리지날’입니다.  추석이 이렇게 큰 명절이 된 건 100년이 채 되지 않았습니다. 예전 조선시대에도 관청에선 휴일 규정이 있었습니다.  조선 조정의 관료들은 음력 1, 8, 15, 23일이 쉬는 날로 정해져 있었다죠.  당시 동양엔 요일 개념이 없었는데도 7일 간격으로 놀았습니다. 하늘에서 붙박이로 있는 별(항성)을 제외하고 태양 - 달, 5개 행성(화성 - 수성 - 목성 - 금성 - 토성) 등 7개 천체만 움직이기 때문에 7을 신성시 여겨 날짜 간격 단위를 7로 했기에 서양과 동일한 현상이 나타난 겁니다.   그러던 것이 1894년 갑오개혁 때 서양식 요일 개념이 적용되면서 기독교 세계처럼 일요일을 휴일로 정하게 되었지요. 당시 조선이 일본을 통해 서구식 요일 제도를 받아들임에 따라 일본이 번역한 대로 일 - 월 - 화 - 수 - 목 - 금 - 토 순으로 해와 달, 다섯 행성이름으로 요일명을 정했는데요.  중국은 이와 달리 평일 5일을 1 - 2 - 3 - 4 - 5 요일로 달리 명명해 부르고 있습니다. 이렇게만 보면 조선시대 휴일이 현재보다 적어 보이지만, 항상 예외가 있는 법.  춘분, 동지 등 24절기에 해당 하는 날도 놀았습니다.  (한 달에 두 번) 그 외에도 임금님 생일, 선대왕 기일 등 별도의 임시공휴일도 있었기에 한 달에 최소 6~7일 이상 휴일이 있었던 건데요.  그래서 연간 100일 정도 휴일이 있었다고 하니……, 주 5일제 시행 전 대한민국 직장인보다 더 많이 쉬셨습니다. 대신 노는 날과 절기일이 겹치면 그냥 하루 손해 보는 거였지요.  대체휴일 제도가 생기기 전엔 일요일과 명절이 겹치면 그냥 하루 손해 보던 것과 동일하지요. 특히 세종 당시엔 당직 개념이 있어서 궁인들이 휴일에 근무하면 평일 대체 휴무가 가능했고, 아이 출산 시 관노이더라도 출산 여성에겐 90일, 남편도 15일 의무 휴일을 주었다는 겁니다. 다만, 당시 조선의 국립대학인 성균관 유생은 매달 8, 23일 이틀만 휴일이었다네요.(예나 지금이나 학생들은 공부하느라 고생이네요. ) 그 외에 조선시대 당시 휴일로 지정된 명절은 네 가지가 있었습니다.  설(1월 1일), 정월대보름(1월 15일), 단오(5월 5일), 추석(8월 15일).  흔히 정월대보름 대신 한식이라고 알지만, 그래서 그런지 요새 5대 명절 운운하는 경우도 있더군요.  그나마도 고려시대 9대 명절에 비해 대폭 줄어든 것이라고 하죠. 그런데 이들 명절마다 쉬는 기간이 달랐으니, 설날은 7일 연휴(오~. 스케일 크신 조상님들. ), 정월대보름과 단오는 각 3일간 쉬었지만, 추석은 딱 하루만 쉬었다고 합니다.  따라서……, 설 > 정월대보름 = 단오 > 추석 순으로 그 비중이 달랐던 겁니다. 이는 당시 상황상 설, 정월대보름, 단오 등의 시기는 겨울이거나 여름이어서 날도 궂으니 집에서 쉬라는 따뜻한 배려인 반면(특히 1월의 경우엔 거의 절반 가까이 휴일이었어요.) 한창 수확을 하는 가을철인 추석은 열심히 일해야 했기 때문에 그리 했을 겁니다.  실제로 일부 영남지역에선 음력 8월 15일엔 아직 벼가 여물지 않아 음력 9월 9일인 중구에 차례를 올리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지금에 와선 정월대보름, 한식, 단오 등 타 명절은 그냥 넘어가는데 왜 추석은 갑자기 설과 함께 ‘민족 최대의 명절 2 TOP’으로 격상되었을까요? 이는 구한말 서양 문명과의 만남이 원인이었습니다. 미국 선교사 : “우리 미국엔 조상과 신에게 감사드리는 추수감사절이있다. 조선에도 이 같은 명절이 있는가?” 우리 조상님 : “이 넘들이……. 우릴 뭘로 보고~. 너넨 겨우 1620년부터 그거 했냐? 우리는 1800년 전 신라 유리왕 때부터 한가위란 추수 명절이 있는 뼈대 있는 나라이니라. 에헴~!” 이러면서 추석 자랑을 한 거죠.  이처럼 서구 문명과 접한 동양 3국 모두 미국 추수감사절처럼 중국 중추절(仲秋節), 일본 오봉(お盆) 등 자기네 가을 명절을 온가족이 한자리에 모여 조상께 감사를 표시하는 민족의 대표 명절로 격상시킨 겁니다.(가끔 추석을 중추절이라 부르시는데, 그건 중국 명절 이름이에요.  중국인들은 음력 설날은 춘절(春節), 음력 8월 보름을 중추철이라고 해 두 명절 이름을 대응시키고 있습니다.)  그래서 지금에 이르러 유이하게 설날과 추석이 민족 고유의 명절로서 3일 휴일로 지정된 겁니다.  우리 고유의 명절도 글로벌 경쟁에 따라 그 위상이 바뀌었다는 거, 재밌는 현상이죠? 출처) <알아두면 쓸데 있는 유쾌한 상식사전> -과학 경제 편-
냉혹한 스파이 고양이의 최후
CIA에서 냉전시기 때 실행했었던 프로젝트 스파이 고양이. 말 그대로 고양이를 살아있는 도청기로 만들겠다는 야심찬 프로젝트였음. CIA가 보는 고양이는 완벽한 첩보원이었기 때문이다. 고양이들은 은밀하고, 빠르고, 똑똑한데다, 장애물 돌파 능력도 높아서 어디에나 기어들어갈 수 있고 뭣보다 사람은 고양이를 발견해도 저게 절대 스파이라고 생각하지 않기 때문이란다. 말만 들으면 그럴싸하지. 아무튼 그래서 2천만 달러의 예산이 들어간 스파이 사이보그 고양이가 만들어지게 된다. 가슴 부분에는 동력원과 트랜스미터가 삽입됐고, 귀에는 마이크가 숨겨졌고, 척추를 따라 꼬리 끝까지 안테나가 삽입됐음. 그야말로 인간-도청기, 아니 고양-도청기가 된 것이다 여기까지는 고양이 본인한테야 괴로웠겠지만 쉽게 진행됐음. 그 다음이 문제였음. 고양이는 자기가 사이보그로 개조된게 몹시 좆같았고 몸에 설치된 배선을 밭톱으로 잡아뜯거나 물어뜯어 망가뜨리기 일쑤였다 게다가 고양이 키워 본 사람은 알겠지만 이 새끼들은 사람 말을 죽도록 안 듣는게 특징이다. 사람 말을 듣고 목표 가까이 가서 도청을 해야 목표를 달성할 수 있는데 그 말을 더럽게 안 듣는다. 그리하여 스파이 고양이를 사이보그로 개조하는데는 1년도 안 걸렸지만 고양이를 원하는 위치로 유도하는 훈련을 시키는데는 5년이 들어갔다. 아무튼 5년과 2000만 달러를 들여 탄생한 스파이 사이보그 고양이는 드디어 1960년에 실전을 경험하게 된다. 장소는 워싱턴의 쏘련 대사관이었고, 마침 소련 대사관 앞마당 공원에서 벤치에 앉은 빨갱이 두 명이 대화를 하는 걸 본 CIA는 사이보그 고양이를 출격시켰음. 그리고 2000만 달러와 5년동안의 훈련을 받은 우리의 고양이는 10걸음 정도 걸어가다가 택시에 치여서 카짓 카페트가 됐다. 당연하지만 CIA는 이딴 병신 같은데 돈 쓰지 말라며 쿠사리를 존나 처먹고 계획을 취소했다. + 구라라고 생각하는 사람 있을 거 같아서 당시 작전 계획서임 (출처) 이게 실화라는 게 유우머 어이없네 ㅋㅋ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