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isfect
1,000+ Views

소고기 먹기를 금하라 (3) - 1925년, 숭인동

때는 일제강점기, 경성부 관리들은 고민에 빠져 있었죠. 그들이 고민하는 원인은 지은지 고작 8년 된 부립 도축장때문이었습니다. 1914년 건설한 경성부립도축장은 한일합방 후 본래 아현동, 신설동에 있던 관립도축장, 그리고 현저동, 이태원의 사설도축장 등 여섯 곳을 통폐합해 근대적 위생 규격에 맞게 지은 관영 도축 시설이었죠. 문제는 이 시설이 처음 요망 조건을 다 채우지 못했다는 데 있었습니다. 오죽하면 설비가 부족하고 비위생적이기까지 하다는 평가까지 들었을까요.

이전 구한말 제정된 포사규칙은 민간업자를 규제하는 데 그 초점이 있었습니다. 근대적 공공위생 차원에서 도축 장소와 방식을 규정하는 법률은 1900년을 넘어서부터 차례차례 제정되었는데요. 러일전쟁 후 일제가 통감부를 설치하면서 이러한 법률 제정은 더 탄력이 붙었습니다. 기존 분리되지 않았던 도축장과 고기를 판매만 하는 정육점을 나누어 규정한 <도수장 및 수육판매규칙(1905.9)>, 도축장을 관영화, 허가제 운영한 <도수규칙(1909.8)> 등이 이 때 만들어지죠. 이에 따라 기존 도축업에 종사하던 백정들의 지위 역시 흔들렸습니다. 부유한 일부 백정은 허가를 얻어 점포를 냈지만, 대다수는 관영 도축장에 소속된 고용노동자 신세로 전락했죠.

1908년 8월, 서대문 밖 합동에 서부도축장이 문을 엽니다. 하지만 불과 3개월만에 부지 협소 등을 이유로 새 시설 부지를 탐색하게 되죠. 그 결과 아현동, 신설동에 대한도수장이란 관영 도축장이 들어섭니다. 아현동 시설이 돼지를 통째로 삶아 털을 제거하는 탕박 시설을 갖춘 방면, 신설동 시설은 철저히 소 도축에만 집중했죠. 한일합방 후 일제는 이들 시설을 총독부 내무부 위생과로 배속합니다. 이것을 나중에 한성부가 생기면서 넘겨받게 되죠. 그 뒤는 맨 처음 문단에서 설명한 대로입니다. 일제는 관리 효율을 명분삼아 기존 관영 및 민간 시설을 통폐합해 부립도축장을 조성합니다. 위치는 서대문형무소 남쪽 현저동 도축장이었죠.

1917년 현저동 경성부립도축장 모습. 대부분 나무 구조물이어선지, 시설은 빠르게 낡아버렸습니다. 거기다 수도 및 배수 시설이 형편없어서 핏물과 오물이 고여 여름마다 곤욕을 치뤘다고 합니다. 무엇보다도 시설은 기대만큼 효율적이지 못했는데, 도축 작업을 하는 백정들이 손에 익은 과거 방식 그대로 작업을 수행했기 때문이었죠. 시카고의 도살장이 포드에게 컨베이어 벨트 제조 공정의 영감을 줄 정도로 효율화, 고도화된 산업 시설이었던 것과 비교되는 대목입니다.
현저동 시설에 문제가 많았기에, 결국 경성부는 지은지 8년 된 부립도축장을 버리고 새 시설을 세우기로 결정합니다. 선정된 부지는 숭인동 동묘 근처였죠.

아직 서울이 지금처럼 규모가 크지 않을 때입니다. 동묘 인근은 서울 외곽이라 민가와 멀리 떨어져 있고, 청계천 하류와 가까워 배수 조건도 서대문 시설보다 나았습니다. 무엇보다도 이곳엔 이미 1923년 조성된 가축시장이 있었죠. 주요 산지인 강원도 등지에서 소가 들어오면, 동묘 시장을 거쳐 경성부 일대 주민들에게 공급했습니다. 숭인동은 도축장이 들어서기에 최적의 입지처럼 보였죠.

그리하여 일제 강점기 내내 서울 시민들이 먹는 고기는 이곳 숭인동에서 도축해 공급했습니다. 시간이 흐르면서 일제 역시 경성부 인구 증가에 맞춰 도시 계획을 수립하고 시가지를 확대하려 했죠. 자연히 도축장은 숭인동 아닌 다른 곳으로 또다시 옮겨야 했습니다. 하지만 이 계획은 결국 일제 시대 내에는 실현되지 못합니다. 숭인동 가축시장과 도축장이 마장동으로 옮긴 건 광복 후 50년대 후반에서 60년대 초반이 되어서야 가능했죠.

시카고 도축장 작업 과정. 시카고에선 이미 1867년부터 기계화된 공정을 도입해 도축에서 최종 제품까지 고도로 분업화된 하나의 라인에서 처리했다고 합니다. 각 단계에는 비숙련공이 투입되어도 충분히 제 몫을 해낼 수 있었다네요. 일부 몰양심한 육가공업체들이 물의를 일으키는 일도 종종 있었지만요.

이렇듯 도축 관련 법령이 발달하고 시설이 개선될수록 백정들의 처지는 나아지긴커녕 더욱 악화되었습니다. 신분 차별은 일제 시대에도 없어질 조짐이 없었죠. 1922년 대구 백정들이 야유회를 가면서 기생들을 불러 끼고 놀았는데, 양민들이 그걸 보고 혀를 차며 기생들을 비난하는 일이 있었습니다. 그 결과 대구 기생 조합이 해당 연회에 참가한 기생들을 제명해 버렸죠. 그 뒤로는 백정들이 아무리 불러도 기생들이 백정들 자리에 참석하는 일은 없었습니다.

하다못해 경제적으로라도 나아지면 기를 펴겠는데, 그것도 아니었습니다. 이전에 백정들은 도축 작업을 한 후 쇠기름같은 부산물을 자기 몫으로 주장할 수 있었죠. 그같은 부산물은 일종의 가외 수입처럼 여겨졌습니다. 하지만 임금 노동자가 된 후로는 그마저도 어려워졌죠. 백정들이 가내 수공업으로 행하던 가죽 공예도 근대화된 공장에서 찍어내는 물건들과 경쟁하기 힘들었습니다.

어쩌다 돈을 벌어 부자가 되어도 사회의 시선은 따가웠습니다. 어떤 백정들은 자기 자식만이라도 공립, 사립학교에 보내려고 부탁도 넣고 기부도 했지만 입학을 거절당하거나 아이가 차별을 못이겨 중퇴하는 일을 거듭했습니다. 또 어떤 백정은 일본으로 건너가 메이지 대학에 입학할 정도로 뛰어났지만, 도중에 학업을 중퇴하고 귀국한 뒤 총독부에서 일자리를 구하려다 포기했습니다. 백정은 총독부에서 받아주지 않는단 걸 뒤늦게 알아서였죠.

3.1운동이 일어나고 민족 운동이 활발해지는 와중에도 여전히 백정들은 식민지 속의 영원한 을이었습니다. 사람들은 일제의 가혹한 식민 정책 아래서 우리 민족이 독립하길 꿈꿨지만, 백정들이 오랫동안 겪어 온 차별과 억압에서 해방되어야 한다고 생각한 사람들은 적었습니다. 결국 백정 사회 스스로 이 모순을 해결할 새 움직임이 대두하죠.

무대는 이제 1923년 경남 진주로 넘어갑니다.
4 Comments
Suggested
Recent
오 다음편 기대 되네요!
이제 형평사 운동이 시작되겠군요...
혹시 도민준교수님이세요?
@acemarioshin ㅋㅋ 교수님께 실례에요!
Cards you may also be interested in
전후 일본의 구세주들 (1) - 해체 위기에 선 일본호
일본에 철강산업 따윈 필요 없겠지요. 기껏해야 연간 300만 톤 정도 있으면 되나요? 그 정도는 미국에서 공급하면 되지요. 전후 일본을 사실상 점령 통치한 연합국 사령부, 일본에서 GHQ라고 부르는 미군정부 인사 하나가 패전 직후 일본 관료들 앞에서 했다는 얘기입니다. 거꾸로 뒤집어 얘기하면, 앞으로의 일본에선 제철소 단 하나도 구경할 일 없을 거란 뜻이나 다름없었죠. 그 자리에 있던 일본측 인사들 안색이 어떠했을지는 안 보고도 짐작이 갑니다. 맥아더의 GHQ는 애초 일본을 완전히 이등 국가로 만들 작정이었습니다. 1945년 9월 미 국무부가 쓴 <항복 후 미국의 초기 대일방침>엔 이런 언급이 있었죠. 일본의 군사력을 지탱하는 공업시설 등 경제적 기초는 파괴되어 재건하지 못한다. 일본인의 생활 수준은 그들이 침략한 아시아 각국의 생활 수준보다 높지 않도록 한다. 미군정이 내놓은 조치들은 과감하고 상당히 진보적이었습니다. 전통적 재벌 그룹을 해체하고 그 중심에 있던 지주회사들을 폐쇄했고, 몇몇 산업체를 팔아치워 전쟁 배상금을 확보하려 계획했죠. 또 농지개혁을 통해 전통적 소작제를 붕괴시켰습니다. 경찰을 지방 자치 조직으로 분권화했고, 사법부에서 검찰 조직을 떼내어 권력을 나누었죠. 노동자들에게는 노조 결성과 파업의 자유를 제공했고, 공산당을 합법화한 것도 맥아더의 군정부였습니다. 또 전통적, 봉건적 가족제도를 보장해온 민법상 규정들을 뜯어고치면서 여성에서 참정권을 주었죠. 새 헌법과 내각도 사회당 중심의 혁신 내지 중도주의 노선이 주도하도록 미국의 입김이 미쳤습니다. 오죽하면 같은 GHQ 내에서도 민정국이 일본을 공산화하려 한다는 볼멘소리가 나왔을까요? 2차 대전 직후 미국의 동아시아 구상에서 가장 중요한 파트너로 여긴 건 처음부터 일본이 아니었습니다. 장제스가 통치하는 중화민국이 중국 대륙을 여전히 통치하고 있었으니까요. 소련의 바로 턱밑에 강력한 우방이 있다면 미국에게도 무척 든든했을 겁니다. 중화민국이 이 지역에서 중요한 동맹이 된다면, 일본을 지금처럼 재무장할 필요도 없었겠죠. 당시 일본은 침몰하는 배나 마찬가지였습니다. 인구의 3, 4%에 이르는 사상자들, 국부의 1/3을 상실했고, 한반도 등 식민지에 의존해 온 식량 공급망이 붕괴하면서 미군 식량 원조에 의존할 수밖에 없는 형편이 되었죠. 젊은 판사가 아사하고, 메틸 알콜을 섞은 싸구려 술과 암시장이 공공연히 돕니다. 인플레이션으로 인해 물가상승률은 한때 539%라는 믿기지 않는 수치를 찍었고, 매춘과 저질 오락 잡지인 가스토리 잡지가 성행했죠. 사카구치 안고가 '타락론'을 발표하는 등 일본 퇴폐주의가 등장하는 것도 바로 이 시점입니다. 하지만 중국에서 국공내전 결과 중국 공산당이 승리하고 중화민국이 타이완으로 밀려나면서 상황이 달라집니다. 대륙에서 파트너를 잃은 미국은 새삼 동아시아에 밀려오는 공산화 물결에 겁을 집어먹었죠. 그들 눈엔 흡사 오래전부터 가설로만 존재했던 도미노 이론이 실재로 작동하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소련, 그리고 중국. 그 다음엔 남한과 일본이 공산화될지도 몰랐죠. 그렇게 되면 미국은 동아시아에서 아무런 영향력도 행사하지 못하게 될 겁니다. 그 결과 GHQ는 정책 방향을 선회했습니다. 일본을 재무장시켜 최소한 유사시 미군의 보급 기지가 될 수준까지 만들고, 동아시아에서 공산주의가 더이상 확산되지 못하도록 막아야 한다란 의견이 점차 힘을 얻었죠. 미국에겐 일본을 통치할 체제를 아예 백지부터 새로 세울 여유가 없었습니다. 식량 부족으로 인한 사회 불안, 노조 운동의 과격화, 5월 수립된 사회당내각 등으로 인해 미 군정부는 만약 일본 경제 재건에 실패한다면 일본 또한 공산화될 거라고 우려했죠. 미국의 정책목표는 '민주적 일본이 스스로 힘으로 지탱할 수 있는 무역 파트너로서 자유세계에 참여토록 준비시키는 것' 1948년 10월 <미국의 대일정책에 관한 권고>에는 위와 같은 내용이 적혀 있습니다. 불과 3년 사이에 일본에 부여한 역할이 완전히 바뀐 셈이죠. 침몰하던 일본호는 이때 완전히 구사일생으로 되살아나게 됩니다. 하지만 일본이 진정으로 회복하기까진 여러 우여곡절이 있었습니다. GHQ의 무리한 정책, 종전 후 최대 정재계 비리 사건, 또 GHQ가 일본에 이식한 미국 기술의 싹이 어떻게 일본 토양에서 왕성하게 자라났는지 등. 이번 시리즈에서 할 얘기는 1970, 80년대 황금기 일본을 탄생시킨 체제와 거장들의 이야기입니다.
정약용의 행정능력.txt
정조가 아버지 사도세자의 현륭원 식목 사업을 마무리 짓고 신하들에게 물었다. “지난 7년간 인근 8개 고을에서 나무를 심었다. 이제 논동행상을 하련다. 심은 나무가 모두 몇 그루냐? 어느 고을이 나무를 가장 많이 심었는가?” 하지만 아무도 대답을 못했다. 관련 공문을 실어오게 하니 소가 끄는 수레 하나에 차고도 넘쳤다. 나무를 심을 때마다 각 고을에서 올라온 공문이었따. 정조가 다산에게 말했다. “네가 좀 정리해 다오. 대신 분량이 책 한 권을 넘으면 안 된다.” 이후 정약용의 작업 과정은 이랬다. 아전을 시켜 공문을 고을 별로 분류한다. 여덟 덩어리 묶음이 나왔다. 묶음마다 날짜 순으로 정리했다. 정리가 끝나자 연도별로 작은 묶음을 구분. 다산은 아전에게 고을별로 빈 도표가 그려진 종이를 내줬다. 세로 칸은 날짜를 적고, 가로 칸은 나무 종류를 적었다. 공문 한 장을 보고 빈칸을 채우고, 그 다음 장을 보고 그 다음 칸을 채웠다. 1년 단위로 집계를 냈다. 짧은 시간내에 지금의 엑셀 작업하듯 고을 별로 여덟 장의 집계표가 나왔다. 다시 다산은 종이 한 장을 내밀었다. 세로 칸은 연도를 적고, 가로 칸은 고을 이름을 적었다. 앞서 만든 집계표를 연도별, 고을별로 옮겨 적으니 수레 한 대분의 공문서가 한 장의 표로 정리되어 나왔다. 다산은 달랑 그 표 한 장을 들고 정조에게 보고했다. 정조는 “책 한 권 이내로 하라 했더니 종이 한 장으로 정리했구나. 기특하다.”고 칭찬했고 표의 결과에 따라 논공행상을 했다. 정약용의 합리적이고 창의적인 생각 덕분에 불과 2~3일 만에 모든 작업을 마쳤다. 출처: 디씨 모야ㄷㄷ 개쩌누.. 정약용 알고보니 엑셀 고수였네... 인간 피벗...아전....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폐하, 전하, 각하 등 호칭 이야기
(하나라, 상나라 시절 궁궐 상상도) 옛날 처음 나라가 세워지던 시절 상나라, 주나라는 결국 도시국가 였습니다. 천하를 통치하는 왕이 존재하지만 왕이 직접 다스리는 지역은 도성과 그 주변 일부 지역일 뿐이고 나머지는 제후들이 다스렸죠 왕은 자그만한 성을 쌓아 도시를 세웠고 그 안에 궁궐을 지었으니 그것이 나라 국 (國)입니다 이 시대 국인이란 말은 곧 성안에 거주하는 백성만을 지칭했죠 성 밖에 살면 야인이라 했습니다.  이런 작은 나라들이였다고 하나 그렇다고 왕이란 존재가 나름 하늘의 대리자인 천자라고 하는데 아무렇게나 널부러져서 노숙하고 밥먹을 수는 없죠 왕이 사는 공간과 그 주변을 배치하는데 나름 법도와 예의가 있었습니다 그래야 좀 뽀대가 나거든요 (청나라 시대 궁궐 배치 예법, 궁중 예법은 주나라 시대 정비된 주례를 기준으로 모든 왕조가 따랐습니다) 왕이 사는 집의 안쪽에는 육궁이라 하여 왕비와 후궁이 거주하고 왕이 휴식을 취하며 생활하는 공간은 내조와 연조라 부릅니다 내조의 주변에 담장을 두르고 왕의 침전을 함부로 넘어오지 못하게 경비초소와 같은 망루를 세웠으니 그것을 궐(闕)이라 합니다 궁(宮 왕의 침전) + 궐(闕 왕의 침전을 지키는 망루) 우리가 흔히 부르는 궁궐이란 말이 여기서 나오죠 왕이 신하들과 만나서 정무를 보는 건물과 그 공간을 치조라 부르며 신하들에게 각자 주어진 업무를 보는 공간을 외조라 부르죠 (상나라 궁궐과 그 앞의 조정) 초기 도시국가 시절에는 이런식으로 치조를 만들고 좌우에 공간을 두어 종묘와 사직을 배치하였으며 가운데 큰 돌로 길을 만들어 지나게 했습니다. 기둥 몇개로 만든 문을 지나면 앞에 신하들이 정무를 보는 공간인 외조가 나오는 수준이죠 사실 그 당시 외조라는 것도 별개 아닙니다. 왼쪽에 느티나무를 3그루를 심어 삼정승이 그늘에 앉아 쉬게 했고 오른 쪽에 가시나무 9그루를 심어 9경이 그늘에 앉아 쉬게 했죠 나무 그늘 아래에서 작은 나라의 실무를 보았으니 나중에 국가의 삼정승을 다른 말로 삼괴 三槐 라고 부르게 됩니다. 정승이 앉아 있는 나무 세그루를 말하는 것입니다. 이런 공간의 개념은 이후 건물의 크기와 배치 숫자의 차이만 있을 뿐 수천년 간 동아시아 궁궐 건축 및 국가 기관 설치의 기본이 됩니다. 유교를 국시로 정한 조선시대에 경복궁 내에 만든 외조와 치조의 구분 또 한양 도성 전체 종묘, 사직단, 광화문 거리와 같은 배치에도 영향을 주죠 (동아시아의 모든 수도 도시 구획, 궁궐 건축의 표준이 됩니다. 조선 한양에 경복궁 앞으로 광화문 광장이 있고 좌우 6조 관아 서쪽에 사직단 동쪽에 종묘가 세워지는 것도 주례 법도에 따른거죠) (상나라 궁궐 복원 건물) 이 시절 나라의 통치를 어찌했느냐? 이렇게 왕이 정무를 보는 치조 건물 앞에 넓은 뜰을 만들어 놓습니다. 이 뜰 가운에 큰 건물에 왕이 서 있고 그 밑으로 신하들이 옹기종기 모이는 것이죠 천자가 정무를 보는 것은 하늘의 뜻을 전하는 것이기에 하늘의 기운을 받고자 해가 뜨는 아침에 모두 모여서 예를 표하고 정무를 시작했으니 아침마다 왕과 신하들이 모이는 뜰을 조정(朝廷) 이라 부릅니다. 사극에서 흔히 말하는 조정에서 어쩌고의 유래입니다 (조선시대 궁궐 앞의 뜰 ) 우리가 청와대에서 어쩌고 하면 행정부의 정책이라 이해하듯 실제 공간을 지칭하던 것이 정부 라는 의미로 넓은 의미를 지니게 된 것이죠 제목은 폐하, 전하 등 호칭에 대한 이야기인데 왜 이리 잡소리가 길어? 싶은데 이제 그 이야기가 나옵니다 (궁궐 정전 앞의 계단과 섬돌 폐(陛)) 왕이 뜰앞에 모여서 신하들과 이야기 할 때 그래도 왕인데 얼굴 마주대고 다이 뜰수는 없거든요 왕은 건물 위에서 내려다 보고 그 위엄을 더 하고자 공간으로 구분했으니 왕이 정무를 보는 건물은 계단을 두어 높힌 후 그 앞에 돌판으로 이쁜 장식을 박아 왕의 위엄을 더하게 합니다. 사진에 보이는 저 돌 계단을 바로 폐(陛) 라고 부르죠 네 우리가 폐하(陛下) 라고 부를 때 그 '폐' 자입니다. 주례에 따르면 왕이 정무를 보는 건물에 있을 때 그 계단 밑에는 반드시 왕을 호위하는 신하를 세우라 했으니 그것이 왕의 예법이라고 나옵니다 (고대 조정에서 왕과 신하가 대화하는 구조 ) 때문에 조정에 모인 신하들이 왕에게 어떤 말을 걸때 "야 임마! 일루와바~" 하며 바로 직접 말을 걸어선 안되는 것이죠 예법에 나온 그대로 섬돌 밑에 서있는 사람에게 "~~이러 이러한 일이 있으니 왕에게 아뢰어 주십쇼" 하고 부탁을 하고 그 신하가 대신 말을 전하게 됩니다. 이런식이 되는 거죠 "폐하~(섬돌 아레 서있는 신하를 부르며) 이러 이러한 일이 있습니다" 처음에는 진짜로 섬돌 아레 있는 신하를 불러서 대신 말을 전해 달라고 부르며 쓴 '폐하'라는 말인데 그럼 신하 없이 왕과 직접 대면하게 되면 어찌 될까요. 한번 정해진 법도는 그 것이 예법임으로 불변하게 되는 것이죠 왕에게 바로 직접 말을 거는 것은 결코 안되고 예법도 절대 생략할 수가 없기에 말을 건네어주는 가상의 신하가 있다는 가정 하에 그럼에도 폐하~ 어쩌고 앞에 붙여서 말을 전하게 됩니다. 이 짓거리를 한 수백년을 반복하다 보니 폐하~ 라는 말이 섬돌 밑의 신하를 부르는 용어가 아니라 2인칭으로 왕을 부르는 용어로 대신하여 변하게 된 것입니다. 주나라때 만들어진 이런 예법은 수백년간 점차 변하여 전국시대를 지나면서 그 시기에는 아예 왕을 지칭하는 용어로 자리잡게 되고 진나라 시절에는 진시황을 지칭하는 2인칭 단어로 일상화 됩니다. 사기 진시황 본기에 폐하를 2인칭으로 쓴 이런 기록이 등장합니다 "지금 폐하께서 의로운 군대를 일으켜 나머지 적들을 베고 천하를 통일하셨다" 우리가 지금도 쓰는 '폐하' 라는 호칭의 용법이 이 시기에 완전히 자리를 잡았다고 봅니다. 그럼 '전하' (殿下) 라는 호칭은? 역시 폐하와 비슷한 과정을 통해 2인칭화가 된 것이죠 다만 용법에서 조금의 차이가 있습니다. 춘추전국 시대 시절에만 하더라도 폐하, 전하는 모두 왕을 지칭하는 용어였습니다. (경복궁 근정전 殿) 건축에서 전(殿)은 가장 중요한 건물을 지칭하는 용어입니다. 전하(殿下)라는 호칭에서의 전은 바로 궁전(宮殿)의 전(殿)을 말하는 것이죠 왕이 정사를 보는 근정전, 편전과 같은 치조에 붙이거나 왕이나 왕비가 침소를 드는 건물 같은 중요한 급에만 붙이는 용어죠. 때문에 폐하나 전하나 그 의미는 같은 것이죠 이것이 한나라 시절을 거치면서 황제와 왕의 구분이 명확해지게 되고 용어역시 정리가 되면서 황제가 정사를 보는 건물에 반드시 있는 통치자의 위엄을 상징하는 계단인 폐(陛)가 있는 건물과 구분하여 사용하기 시작합니다 즉 한나라 시기를 거치며 신분예법이 보다 세밀해지자 황제에게만 폐하라는 호칭을 쓰게 되고 황태자, 왕자, 황후, 왕비 등은 다른 중요 건물인 전하라는 표현으로 지칭하게 된 것이죠 그럼 황제와 다른 황족을 구분했으니 신하와도 구분해야 합니다 이 전(殿)이라는 건물은 중요한 건물을 뜻하기 때문에 불교 사찰에도 대웅전과 같은 전이 존재를 합니다. 재상인 승상이 정부를 보는 승상부에도 역시 전(殿)이 있었기에 초기에는 승상에게도 '전하'라는 표현을 썼습니다. 하지만 이 역시 구분을 하게 되면서 한나라 시기를 거치며 '전하' 라는 표현은 모든 건물의 전을 지칭하는게 아니라 제한적으로 사용하게 됩니다. 오직 궁전(宮殿)의 전만을 지칭하는 것으로 정해진 것이죠 때문에 전하라는 호칭은 황태자와 왕들 같은 황족과 황후들에게만 사용하는 용어로 바뀌게 됩니다. 이쯤 알게 됩니다 폐하, 전하, 저하, 합하, 각하 등등이 전부 건물과 관련한 호칭이란 것이죠 예를 들어 조선시대 사극에서 많이 나오는 세자를 지칭하는 저하(邸下) 라는 말이 있습니다. (조선 철종의 강화도 잠저) 집 저(邸) 라는 단어는 그냥 평범한 집이 아니라 귀한분이 조용히 거처하는 고귀한 집을 말합니다. 우리가 좋은 집을 저택이라 하죠 그 저택의 '저'자를 말합니다 때문에 본래 왕위 계승자가 아니었으나 반정이나 갑작스런 계승으로 왕이 되어 지존에 오른 경우 이전에 거주하던 민간의 집을 잠저(潛邸) 라 부릅니다.  원래는 황족과, 왕이 아닌 공작 이하 귀족에게 저하 (邸下)라 호칭하였는데 조선의 경우 황제가 아닌 왕으로 칭하며 왕을 폐하가 아닌 전하라 호칭하였으므로 왕의 아들인 세자의 경우 한 단계 아래인 '저하' 라는 호칭으로 부른 것이죠 대원군을 합하(閤下)라 불렀죠 풍신수길의 경우도 합하라 불렀고 고려시대 무신 정권 때 최씨 무신정권의 수장도 역시 합하라고 불렀습니다 합하(閤下)는 정1품의 아주 높은 관료를 지칭하는 용어입니다. 여기서 합(閤)이 말하는 건물은 (경복궁 건청궁 곤녕합 閤) 궁궐의 중요한 건물인 전의 옆에 붙어 있는 부속 건물 합閤을 말합니다. 황제나 제왕급만 거주할 수 있는 궁궐에 붙어 있는 건물이니 매우 급이 높고 귀한 건물을 말하는 것이며 그런 건물에 사는 인물이란 뜻이니 그 신분이 매우 존귀하다는 뜻을 지니게 되죠 때문에 '합하' 라는 말은 곧 왕의 건물인 '전' 바로 옆에 있는 '합' 건물의 주인 황제와 왕을 측근에서 좌지우지 할 정도로 중요한 인물이란 의미를 지닙니다 대한민국에서 대통령 각하라는 용어로 한동안 사용된 적이 있습니다. 각하 (閣下) 라는 말 역시 동일하게 건물에서 유래합니다. (제주목 관아 연희각) 각 閣 이라는 건물은 궁궐의 전, 당과 같은 급의 건물은 아니지만 그 다음 중요한 공식적인 건물을 지칭하는 용어입니다. 관공서의 경우 해당 관청의 수장이 거처하는 건물을 지칭합니다. 중앙의 삼정승, 6조의 수장이 기거 하는 집무실, 각 지방관청의 목사, 부사, 군수 등이 기거하는 집무실 등이죠 즉 각하(閣下) 라는 말은 특정 조직과 부서의 최고위 수장을 지칭하는 말이 됩니다. 정 2품 이상의 관료에게 지칭하는 호칭으로 왕족이나 최고위 귀족은 아니지만 관료 중에 가장 높은 수장급에게 지칭하는 호칭이 됩니다 일본의 경우 일왕이 임명한 관료나 총독, 장군들에게 각하라는 호칭을 사용 하였고 대한민국의 경우 행정부의 수장인 대통령 또는 장군들에게 각하라는 호칭을 사용한 전례가 있습니다 이는 ~~하의 용법이 아렛사람이 윗사람을 받들며 극존칭으로 사용하는 것임에서 알듯 신분제와 권위주의가 반영된 호칭이죠 대한민국에서는 전 근대적인 용어라고 폐지되었습니다 참고로 건물의 격식의 순서는 전(殿)- 당(堂) - 합(閤)- 각(閣)- 재(齋)- 헌(軒)- 루(樓)- 정(停) 의 순서입니다  전 : 궁궐이나 공식적인 중요 건물에만 붙이는 이름 *민간에서 전이란 이름을 건물에 사사로이 칭할 수 없음 당 : 궁궐급 또는 공식적인 건물에 붙이나 전보다 한단계 낮은 건물 합 : 궁궐의 중요건물에 붙은 부속 건물 각 : 중요건물의 부속 건물 또는 수장급의 인물이 기거하는 건물   재 : 귀한 신분이 기거하는 생활 공간 헌 : 대청마루가 있는 생활 공간 루 : 2층 이상의 구조로 된 휴식공간 정 : 단층 구조의 휴식 공간 건물의 격식은 그 중요도와 크기에 따라 구분됩니다 성균관에 있는 건물을 예를 들어 보면 공자를 모신가장 핵심 건물의 이름은 대성전이고 성균관의 유생들이 공부를하는 건물의 이름은 명륜당이 되죠 창덕궁에 민가의 사대부집을 모방하여 궁궐안에 후궁들이 기거하게 만든 집은 비록 궁궐에 있지만지어진 형태와 목적이 궁궐의 법도가 아니기에 당이 아닌 재라 칭하여 이름이 낙선재가 되는 것이고 율곡 이이를 낳은 강릉의 대저택은 민가의 사택이니 오죽헌이 되는 것이죠 이런 건물의 특징과 그 격식에 따라 건물의 중요도가 달라지듯이 존칭으로 쓰는 호칭도 그에 맞춰서 부르게 되었습니다 동아시아의 예절에서는 상대방을 직접 호칭하는 것을 무례하다고 보죠 때문에 이름을 피하기 위해 왕의 이름은 함부로 적지도 못하게 피휘하였고 일반인들도 호와 자를 지어서 대신 부르곤 했습니다 상대방을 부를 때 역시 사는 지역 또는 사는 집을 지칭해서 부르죠 귀댁에 어쩌고 저쩌고 처럼 말이죠 댁(宅)이 말이야!! 응~ 느그 서장 남천동 살재~ 이건 아니고 사극에서 왕비를 중궁전이란 건물로 부르고 세자를 동궁전이란 건물로 부르는 이유도 그러합니다. 존귀할 수록 더욱 돌려서 기거하는 공간으로 지칭하는 것이 곧 예의였던 시절의 일입니다 마지막으로 족하 (足下)라는 말이 있습니다 지금은 안쓰는 용어인데 과거 제후들 끼리 또는 친구처럼 친근한 사이에 부르던 호칭이죠 춘추시대 진문공이 개자추를 불태워 죽였을 때 극심하게 후회를 하며 그가 죽은 산의 나무로 나막신을 만들어 신고 다녔고 개자추를 족하~ 라고 부르며 한탄했다고 합니다 폐하, 전하가 건물 아레에서 부르는 호칭이듯 족하의 경우 발 아래에서 부른다는 뜻으로 자신이 개자추 발 아래에 있다는 지극히 겸손한 존칭이죠 이것이 수백년 천년의 세월을 지나면서아주 친근하고 친한 사이에 부르는 호칭으로 변질되었고 한국에서는 아예 그 의미가 전혀 바뀌어 사용되게 되었습니다 오늘날 우리가 흔히 쓰는 삼촌이 부르는 '조카' 라는 말이 여기서 나옵니다. 끝. 출처 아주 재밌구려. 다 건물에서 나온 호칭이었다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