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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서야 부모님 기분을 이해한 요즘 젊은이들.jpg

ㅇㄱㄹ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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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도... 아오 티비만틀면 트로트여
솔직히 즐기기 않는 장르라 이제 슬슬 지겨워지기 시작
트로트를 즐기지는 않지만, 저 Top7들이 부르는 노래는 좋아요😄 그리고, 최애는 이번에 뽑힌 3대 팬텀싱어들~🤩🤩😍😍🥰🥰 라포엠, 라비던스, 레떼아모르 이 3팀 정말 팬심 활활~🔥🔥🔥🔥🔥
요즘예능 트로트 아님 먹는거
@coolra 더 나아가 트롯맨들의 먹방 또는 다이어트ㅎㅎ
트로트가 ㅙ케 인기인지 잘 모르는 1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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막장드라마 특) 기억상실증 걸린 사람이 한국말은 정확하게 구사함
여느 때와 달리 왠지 일찍 일어난 아침, 목마른 속을 달래러 거실로 나온 당신은 빨래를 하는 엄마 옆에서 홀린 듯이 일일연속극 ‘내 딸 주영이’를 본다. 예나, 주영이 딸이예요! (주-륵) (주르륵) (찰싹) 쾅 ... 어머 주영아… 의사쓰앵님, 우리 주영이한테 무슨 일이 생긴 건가요? 어…하필이면…총알이…아니 차가 영 좋지 않은 곳을 스쳤어요. 잘 알아두세요. 이제 주영씨는 앞으로… 이전에 있었던 일을 전혀 기억하지 못합니다. 다시말해서, 기억상실증에 걸렸다 이말입니다. 아... 머리야, 여긴 어디지? 주영아, 기억 안 나니? 내가 누군지 알겠어? 난 누구죠? 여긴 어디죠? 아줌마는 누구예요? (이 막장을 실시간으로 지켜보는 내 모습) 여기서 궁금한 점이 하나 생긴다. “아무것도 기억하지 못하는데 어떻게 저렇게 말을 잘 구사하지? 기억을 못하면 아무런 지식도 없어야 하는게 아닌가?” 나는 일일연속극 고인물이신 어머니께 여쭤봤지만 속 시원한 답을 듣지는 못했다. 상식적으로, 만약 기억상실증으로 어떠한 일도 기억하지 못한다면 우리가 배웠던 지식도 모두 알지 못하는 것 아닐까? 이에 대한 해답은 심리언어학자들의 연구에서 찾을 수 있다. 가장 유명한 사례는 1953년 뇌수술로 해마를 잃었던 27살 청년 헨리 몰리슨(1926~2008)이 그 주인공이다. 그는 수술 후 세상의 변화를 인지하지 못하고 평생 그가 수술을 받은 27살의 기억 속에서만 살아갔다. 하지만 그가 언어를 구사하거나 새로운 개념을 이해하는 것은 문제가 없었다. 즉 인간의 개인적인 기억과 개념적인 기억은 구조적으로 다른 기억으로 분류된다는 것이다. 이를 심리학에서는 일화기억(Episodic Memory)과 의미기억(Semantic Memory)이라고 구분한다. 이 둘의 명백한 차이점은 ‘주관적 경험으로 기억이냐’의 가부이다. (이미지 출처: tulving 중다 기억체계 모형/1985) 즉 만약 ‘내가 3년 전에 제주도에서 애인이랑 했던 첫키스’는, 물론 이 글을 읽는 많은 독자에겐 없는 기억이겠지만 일화기억이다. 왜냐면 ‘내’가 직접 경험했던 것이니까. (나도 아직 경험해본 적 없다.ㅠㅠ) ‘내가 3년 전에 제주도에서 애인이랑 했던 첫키스’는, 물론 이 글을 읽는 많은 독자에겐 없는 기억이겠지만 일화기억이다. 하지만 ‘제주도 몽돌해수욕장이 무엇인가?’는 의미기억이다. 특정 시간이나 장소와 결부된 경험과 연결되지 않기 때문이다. 이것이 보통 우리의 지식을 형성하는 기억들이다. 기억 상실증이란 의미기억이 아닌 일화기억의 상실을 의미한다. 즉, 기억 상실증과 한국어 구사 능력에는 서로 큰 영향이 없는 것이다. 일화기억을 잃어버린 헨리 몰리슨의 경우 자가 인지적 의식(autonoetic consciousness)이 결함됐다. 그는 주관적으로 경험한 시간을 인지하지 못했다. 죽을 때까지 미래에 대한 걱정없이 27살로 살다가 죽었다. 과거를 빼앗긴 그는 시간이라는 철로에서 탈선해 헛바퀴를 돌고 있는 열차와 같은 삶을 살다 간 것이다. 헨리 모리슨의 사례를 보면 우리의 자의식은 우리의 경험에 기반한다고 볼 수 있다. 바꿔 말하면 우리가 가진 최초의 기억의 시점이 우리의 자의식이 처음으로 형성된 시기다. 나의 경우 막 기어다닐 무렵 우리집에 도둑이 들어 새벽 내내 일어났던 소동이 기억난다. 그 때 반지하 전셋방의 쾌쾌한 냄새와 새벽녘의 서늘한 빛과 공기가 기억이 난다. 나의 의식은 누군가의 도둑질로 말미암아 생겨났다고 볼 수도 있겠다. (출처: 기생충 반지하집 볼수 있을까/ 한국일보) 말미에 글이 매우 늘어졌는데, 헨리 모리슨 외에도 여러 뇌손상 환자들의 케이스를 살펴보면 약간의 씁쓸함도 든다. 가깝게는 치매 걸린 할머니부터 차에 치여 뇌를 다친 30대 아저씨까지 모두는 의식에 미로에 갇혀 길을 헤메고 있는 미아들이다. (출처: 판의 미로) 우리가 지키고 사랑하던 모든 것은 작은 충격이나 노화로 사라지기 쉬운 기억에 의존한다. 만약 저들처럼 기억을 잃어버린다면 우리는 무엇일까, 하고 조용히 생각해보는 저녁이다. 참, 혹시 이 글을 읽고 흥미가 있었다면 자신의 최초의 기억을 한번 떠올려봐 달라. 그리고 만약 기억이 난다면 언제였고 어떤 상황이었는지 밑에 댓글로 써주길 부탁드린다.^^
가짜뉴스가 빚어낸 나비효과, 서동요가 베를린 장벽 붕괴에 '미친 효과'
시험기간이다. 원래 글을 쓸 시간에 공부를 한자 더 해야 하지만 원래 꺼지기 전의 촛불이 더 밝게 타오른다고 하지 않던가? 잡담은 이정도로 하고 탈모썰보다 더 말도 안되는 뇌피셜을 가져왔다. 바로 서동요가 독일 통일에 미친 영향이다. 다들 서동요 전설에 대해서는 알고 있을 것이다. 서동요는 백제 무왕이 신라의 선화 공주와 결혼하기 위한 음모를 위해 만든 노래다. 백제 무왕은 어린 시절 ‘서동’이라고 불렸는데, 이 서동이란 ‘마를 캐는 아이’라는 뜻이다. 마는 감자처럼 생긴 뿌리 음식인데, 이런 걸 캤다는 걸로 먹고 살았다는 것으로 봐서 그는 몰락한 왕족으로 묘사되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는 신라 진평왕의 셋째 딸 선화공주가 절세미인이라는 소리를 듣고 (지금은 하늘의 별이 된 설리가 드라마 서동요의 선화공주 역으로 나왔었다...ㅠㅠ) 서라벌(지금의 경주)로 기어들어가 아이들에게 마를 나눠주며 (마는 생으로 먹을 수 있는 간식이기도 했다) 아래와 같은 향가를 퍼트렸다고 한다. 선화공주님은 남몰래 통정해 두고 맛둥 도련님을 밤에 몰래 안고 간다. 선화공주님은 남 몰래 시집 가서 서동이를 밤이면 안고 간다. 선화공주님은 남 몰래 짝 맞추어 두고 서동방을 밤에 알을 안고 간다. 이게 아이들이 부를 노래의 내용인가? 사실상 혼전정사를 다룬 이야기다. 실제로 사람들 입에 어떻게 오르내렸는지 생각해보자. “선화공주님이 어떤 사람이랑 00했대요~ 00했대요~” 이 말을 듣는 학부형들은 억장 와르르 멘션이 되어 그들에게 물어본다. “누가 그런 말 하디?” “누가 그러던데요? 근데 나만 들은 게 아니예요. 다 그러던데?” 원래 사람은 한 명이 한 말은 개소리로 치부하고 두 명이 한 말은 의심하지만, 세명이 동시에 주장하면 믿기 마련이다. 학부형들은 다음날 일터에서, 시장에서 이런 이야기를 서로에게 확인하며 이를 사실로 받아들이기 시작했다. 이를 밴드웨건 효과라고 부르는데, 바로 대다수가 동조하는 여론에 편승해 무비판적으로 그 여론을 지지하는 현상을 뜻한다. 마치 ‘피리부는 사나이’처럼 출처없는 이런 정보는 우후죽순 백성들의 입에 오르내리기 시작하며 기정사실이 된다. 결국 진평왕은 이런 여론을 잠재우기 위해 선화공주를 귀양 보내기에 이르고(알 수 없는 당시 성감수성…;;) 그 기회를 놓치지 않고 서동은 선화공주를 돌보며 결혼하기에 이른다. 정말 지금 생각하면 <삼국유사>에 거론된 서동은 말도 안되는 쓰레기이긴 하지만 실제로 이런 설화는 그가 가지고 있던 정치적 입지를 비유적으로 이른 것으로 보인다. 선대왕인 법왕의 자식이지만 정치적 기반이 없던 서자였기에 해당 설화로 자신의 업적과 신라와의 커넥션을 정당화했던 수단이지 않을까? 각설하고 이런 가짜뉴스를 퍼트려서 실제로 그 뉴스가 실현되도록 하는 작전을 ‘서동요작전’이라고 하자. 이 작전이 1989년 11월 19일에 일어났던 베를린 장벽 붕괴에 쓰였다면 믿으시겠는가? 1989년 11월 9일 저녁 동독 정부는 여행자유화에 대한 정책을 발표하는 기자회견을 한다. 당시 서독과 동독은 아래 그림처럼 반으로 갈라져 서로 교류가 그나마 가능한 상태였지만 베를린 장벽으로 제한적인 교류만 가능했다. 하지만 당시 여행자유화를 요구하는 시위가 거셌고 이를 무마하기 위한 형식적인 발표를 할 예정이었다. 하지만 정부 대변인인 샤보브스키는 휴가로 인해 새 정책 내용을 알지 못한 상태에서 뇌피셜에 가까운 담화를 발표했다. 기자들은 벌떼처럼 달려들어 그에게 여행자유화에 대한 내용을 물어봤고 그중 한 이탈리아 기자가 정책이 언제부터 유효한지 물었다. "온제부터 가능합니꽈?" (하, 시X 몰라 대충 말하고 맥주나 마셔야지) "지금부터!!" , 독일 말에 익숙하지 않던 이탈리아 기자들은 이것을 국경 개방으로 이해했다. 그리고 그는 전무후무한 오보를 이탈리아 방송사에 보낸다. “베를린 장벽이 무너졌다” 어찌보면 문학적인 표현이었지만 당시 전보로만 정보를 알 수 있던 시대였음을 감안했을 때 이탈리아 방송계는 이 내용을 여과없이 문자 그대로 국제 뉴스에 내보냈다. 그러자 이 이탈리아 뉴스를 이제는 서독의 TV가 그대로 인용해서 보도했다. 저녁에 이 뉴스를 본 군중들은 베를린 장벽으로 집결해 닥치는 대로 베를린 장벽을 부수기에 이른다. 깡! (feat. 화려한 조명) 아까무엇을설명했던가, 밴드웨건효과, 그렇다. 말 그대로 베를린의 모든 시민들이 베를린장벽에 붙어서 망치와 포크레인으로 장벽을 처부수고 있는데 군인들이 이것을 어떻게 막을 것인가? 그들에게는 명분이 없었다, 명분이. “아, 안됩니다! 베를린 장벽을 훼손하면 안돼요!” “이 양반아! 오늘 뉴스 안 봤어? 정부에서 깨부수래!!” 결국 이로 인해 베를린 장벽은 무너지고 정확히 1년 후 독일은 재통합을 하기에 이른다. 고의가 아닌 것을 빼면 정확히 서동요 과정과 완벽하게 맞아떨어지는 ‘가짜뉴스의 실제화’가 일어난 것이다. 해당 사건은 아마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가짜뉴스를 만든 언론이 기레기 소리를 듣지 않은 사건으로 기억될 것이다. 또한 이것으로 한가지 명심해야 할 점 : 뉴스에 있는 내용이라고 그냥 믿지 말고 실제 정보를 직접 찾아보자, 우리가 언제 서동요에 현혹된 눈먼 군중이 될지 알 수 없는 것 아닌가? 위키백과- 서동요https://ko.wikipedia.org/wiki/%EB%AC%B4%EC%99%95_(%EB%B0%B1%EC%A0%9C) 뉴데일리 ”오보가 독일 통일 시켰다.” - newdaily.co.kr/site/data/html/2010/10/03/2010100300029.html
일본의 명령 하나에 우리나라에 대머리가 생겨버린 사건을 아시나요?
탈모, 남자들에게는 암보다 무서운 질병이다. 생기는 순간 제아무리 원빈이라고 해도 매력이 비트코인 그래프 떨어지듯 추락하게 되는 무서운 질병이다. 만약 마트 바닥에서 떼쓰는 아이에게 “민수는 마트에 살아, 엄마는 집에 갈 거야!”라는 뻔한 협박이 안 먹힌다면, “너 그러다가 탈모걸린다?”라고 말해보라. 아이는 조용히 일어나 공손히 손을 모으고 “먼저 가시죠, 어머니.” 점잖게 이른 뒤 당신 뒤를 따라올 것이다. 나 역시 군 제대를 한 뒤 머리를 기르다가 깜짝 놀랐다. 2년 전에는 몰랐던 그 허전함이 2020 내 머릿속을 헤집는 그 기분, 샤워를 하고 머리를 넘길 때 뭔가 맥아리가 없는 그 기분을 느끼자 내 삶의 질은 땅바닥으로 곤두박질쳤다. 좋다는 탈모샴푸 머리를 감고, 검은콩을 먹었지만 현대인의 질병 탈모가 나에게 미친 영향은 꽤나 지대하다. 그러다가 문득 뜬금없는 생각이 들었다. 뇌피셜에 가까운 상상이지만, 왜 단발령 당시 조선의 사대부들과 백성들이 하나되어 들고 일어났는지 말이다. 단발령은 1895년 당시 김홍집 내각이 주도해 상투의 위생을 문제시하여 모두 상투를 자르도록 한 명령을 지칭한다. 시대상으로 을미사변(1895)이 일어난 직후에 실시한 명령으로 전백성의 분노를 샀으며, 특히 유교의 ‘신체발부 수지부모’에 위배되기에 “차라리 내 목을 쳐라”며 격렬히 저항하던 양반들도 많았다. 하지만 조선의 복장 양식을 바꾸려는 시도는 1894년 변복령에서부터 조짐이 있었다. 따라서 급작스러운 단속 명령이 아니었다. 또한 부모님이 주신 몸의 일부이기에 머리를 자를 수 없다는 주장 역시 대외적인 근거일수밖에 없는 것이, 상투의 머리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원형탈모 마냥 상투 속 머리를 쳐내는 ‘배코치기’를 해야 했기에 조선에서 머리를 자르는 것이 영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물론 을미사변으로 인한 여파도 존재했겠지만, 나는 이 역사적 비극의 기저에 내 망측한 상상을 더해보고자 한다. 혹시, 상투를 풀 경우 자신이 대머리였던 것을 들켜서 아닐까? 아까 ‘배코치기’에서 설명했듯, 상투의 모양새를 유지하는 것은 속머리가 아닌 주변부 머리다. 그리고 보통 탈모는 M자 탈모와 원형탈모가 주된 유형인데, 두 유형 모두 주변부 머리에는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 즉 탈모가 와도 헤어스타일을 유지하는 것은 아무런 문제가 없다는 것이다. 하지만 단발령으로 머리를 서양식으로 칠 경우 노령의 사대부들은 상투머리에서 대머리가 되는 격렬한 수치심을 느끼게 된다. 생각해보자, 우리가 고등학교 시절에 배운 수많은 지체 높은 양반들 중에 대머리였던 사람이 있던가?(구글링을 해봐도 조선의 위인 중에는 존재하지 않는다.) 고고한 양반들이 이런 수치를 겪으려고 할까? 대한민국 군필들이라면 모두 공감할 것이다. 순식간에 빡빡이가 되는 그 공포를. 차라리 군대는 나를 비롯한 수천명이 모두 빡빡이었다. 하지만 조선시대에 자신의 주변에 자신만이 대머리가 된다면, 그것만큼 슬픈 일이 어디있을까? 나라를 빼앗긴 것만해도 서러운데 대머리라니. 일본은 이런 공포에 덜 민감한 것이, 그들은 이미 기본 머리가 빡빡이였다. 얘네에게는 개화스타일이 투블럭 12미리에서 6미리로 바뀌는 정도의 충격밖에 없었던 것이다. 일본인들은 진작에 노화로 인한 대머리를 피하기 위해 국가적 헤어스타일을 빡빡이로 만드는 명예로운 죽음, 아니 탈모를 선택한 것이다. ‘패션 탈모’라고나 할까? 마찬가지로 중국의 유명한 헤어스타일 변발 역시도 나는 ‘패션 탈모’라고 생각한다. 변발은 여진족의 풍습으로 청나라가 중국을 통치하면서부터 중국의 대표적인 머리스타일로 자리잡았다. 꺼무위키에 따르면 변발은 전쟁 시 머리가 뜨거워지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서라고 하는데, 물론 그런 이유도 있겠지만 그렇다면 왕권이 안정된 청나라 때 왜 계속 변발을 유지했을까? 결국 지배층이 자신의 노쇠의 증거를 감추기 위한, 사회적 합의였다고 생각한다. 그 근거로 중국은 개화 때도 변발을 한 남자가 성숙하다고 생각해 변발을 유지한 남자가 많았고, 현재도 대머리에 관대한 편이라고 한다. 즉, 역사적으로 남성의 헤어스타일은 탈모를 감추거나, 사회적인 합의를 통해 아예 패션의 일환으로 만들려는 노력이 존재했고, 곧 닥쳐올 탈모의 충격에 대비하기 위해서는 빡빡이라고 놀리기보다 탈모를 질병이 아니라 패션의 일환으로 만드는 노력이 시급하다. 개인적으로 제발 지디가 노년에는 빡빡이 헤어스타일을 유지해줬으면 좋겠다. 유행되게. 출처 : 조선왕조실톡 135화 (https://comic.naver.com/webtoon/detail.nhn?titleId=642598&no=157) 매일중국어 공식블로그 중국변발 (https://blog.naver.com/everydaycn/220934420019) 한국민족대백과사전(https://encykorea.aks.ac.kr/Contents/Item/E0013579) 이미지출처 : https://blog.naver.com/0724sh/220613657282 http://tcafe2a.com/bbs/board.php?bo_table=free&wr_id=4380832 외 다수
다크나이트 텀블러 지붕 질주씬 디오라마 작업기:)
toy & art 전시 출품 :) 전속사에서 요청하여 3일만에 후딱 작업해야했던 녀석입니다. 사실 전시 일정이 잡혀있는 상태에서 계약을 하고 들어간 상태라.. 급한 작업들이 많겠구나 생각은 했지만 3일만에 구도를 잡고 제작을 완성해야하는 상황이 되다보니.. 머리가 대략 하얗게 떠버리는 상황. 촌음을 아껴서 작업해야겠다는 생각과 동시에 작업시작. 시간이 시간인지라..단 한번의 착오나 수정도 용납되지 않습니다. 개인 창작활동의 일환이지만 결국은 기업측에 들어가야할 타입이다보니 디테일 보다는 전체적인 느낌만 살짝 들어간 상태로 마무리하는 것이 좋겠다고 생각했습니다. 텀블러 (배트카)가 지붕을 질주하는 씬이라는 컨셉만 듣고 바로 작업에 들어간 상태라 디테일한 고증이나 채색과정에 힘을 주기보다는 말 그대로 느낌만.. 사용될 제품이 워낙 큰 녀석이다보니 디오라마 베이스 판 크기만 1미터가 훌쩍 넘어갑니다. 파편을 붙이기전에 텀블러를 올려두고 잠깐 구도를 봅니다. 보다 역동적인 느낌을 위해선 평면보단 사선으로 누워있는 형태로 구도를 완성하는 것이 좋겠다고 생각했어요:) 얼추 느낌이 나쁘지 않게 구도가 잡혔으니 준비한 파편들을 붙여나갑니다. 텀블러의 질주방향을 고려하여 붙여야함은 너무나 당연한 이야기니 설명은 패스 파편을 붙여나가봅시다. 깨진 지붕 파편과 베이스판의 느낌이 떠버리면 어색해집니다 :) 둘을 묶어주려면 톤을 맞추는 과정이 필요한데.. 시간을 생각하면 대충 훑어지나가야하는데 하다보면 부족한 부분들을 채워야 직성이 풀리니까.. 이거 참 난감했습니다. 3일이 아니라 일주일이었다면... 다시 생각해도 이 부분은 참 아쉽습니다. 붙여놓고 보니 느낌은 그럭저럭 나쁘지 않네요:) 3일 밤낮을 꼬박 ... 지루한 과정의 연속이었지만 잠깐이라도 "이걸 3일만에 어떻게 해..."라는 마음을 먹으면 :) 할 수 있는 일도 하기 어려워진다는 것을 잘 알기에 시간보다는 작업공정 그 자체에 집중하여 마무리했던 것 같습니다. 결과적으론 행사진행측과 의뢰처 , 전속사 모두 만족하고 넘어가셨으니 성공이라면 성공일까요:).. 다만 스스로에겐 아쉬움이 많이 남는 작업물 중 하나입니다. 단 하나의 작업물도 빠짐없이 만드는 과정들에 사연이 있다보니 , 부족함이 느껴져도 결국은 아픈 손가락처럼 마음이 갑니다. 부족한 자식에게 더 마음이 가는 부모의 마음이랄까요. 결국 자신을 의심하지말고 묵묵히 주어진 만큼 해내가면 반드시 해낼 수 있다. 위대한 일도 결국은 소소하고 하찮은 일들의 집합체 인 것. 별 거 아닌 작업물 하나에서도 세상의 이치를 깨닫는답니다. 늘 재밌게 즐겨주셔서 감사합니다. -AJ- www.instagram.com/aj_cust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