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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고기 먹기를 금하라 (4) - 1923년, 진주

1923년 5월, 탁윤환이라는 사람이 백정들이 자주 모이는 형평사 근처 주막을 찾습니다. 자리를 잡고 앉아 술을 시키는데 때마침 술이 다 떨어졌던 모양입니다. 그냥 조용히 물러났으면 아무 일 없었을 것을, 이 사람 돌연 목청을 높여 따지고 들었죠.

'백정 놈들에겐 밥을 팔더니 나에게는 술이 왜 없다 하는가?'

대놓고 백정들을 깔보는 언사에, 주막에 있던 형평사 직원들이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습니다. 아니나다를까, 탁윤환은 그 자리에서 형평사 직원들에게 흠씬 두드려 맞고 쫓겨나죠. 하지만 문제는 그 다음부터였습니다. 자신이 한낱 백정에게 폭행당했단 사실에 눈이 돌아간 탁윤환이 패거리를 끌고 형평사를 습격했거든요. 동서고금 깽판의 전통인 '사장 나와'를 시전한 패거리는, 소동에 나온 형평사 사장 강상호를 붙잡아 멱살을 잡고 뺨을 때리며 모욕했습니다.

사실 형평사 사원들에게 이같은 일은 비일비재했습니다. 1923년 4월 25일 백정들의 차별 문제를 해소하겠다고 출범한 조직이 형평사였지만, 여전히 많은 사람들이 백정들과 형평사를 아니꼽게 여겼죠. 이번 시리즈 맨 처음 글에서 소고기 불매 운동 얘기를 잠깐 썼는데, 그것 역시 이러한 맥락에서 발생한 사건이었습니다.

1924년 5월 8일 장날엔 형평사원이 장에 소고기를 팔러 갔다가 행상 하나에게 무례하게 쳐다본다고 욕을 먹었죠. 그가 지지 않고, '백정 놈은 사람이 아니오?' 라고 맞받아치자 갑자기 일대 행상들이 우르르 몰려들어 이 상황에 끼어들었습니다.

'아직까지 백정은 백정 놈이오, 양반은 아니니 무슨 소리냐!'

형평사원은 수십 명 행상들에게 일방적으로 난타를 당했죠. 우연히 그걸 본 다른 형평사원들도 역시 떼거지로 몰려와 행상과 패싸움을 벌였습니다. 이런 식으로 형평사원들이 상인이나 농민들과 충돌한 사례가 매년 평균 50건 넘게 있었다고 하네요.

어처구니없는 건 당시 일제 경찰의 태도입니다. 당시 진주경찰서장은 형평사와 반형평사 사이 충돌에 대해 이렇게 논평했다고 합니다.

'일본에도 에타라고 하는 것은 평민과 같은 대우를 하지 않을 뿐 아니라 그들도 무엇 하나 성공한 일이 없다. 이번 형평사도 그것과 같은 일이기 때문에(...) 백정에게 잘못이 있으니 내가 곧 해산시킬 생각이다.'

문명 개화론자들이 선망하던 일본 관리의 맨얼굴이 이러했습니다. 이렇듯 형평사 운동에 참가한 백정들은 일본인에게, 심지어 같은 조선인에게도 차별당했습니다.

주목할 대목은 진주경찰서장이 잠시 언급한 '에타'란 말입니다. 평민과 같은 대우를 하지 않았다 했으니, 그들 또한 백정 못지않은 불가촉천민이었겠죠. 대체 그들은 어떤 사람들이었을까요?

1920년대 초, 일본에서 13살 어린아이가 기차에 뛰어들어 자살했습니다. 소학교에서 교사에게 에타 출신이라고 모욕을 당한 것이 너무 분해서 투신한 것이었죠. 다른 지역에선 소학교 교직원이 신분을 속인 게 들통나 면직됐습니다. 또 다른 곳에선 에타 출신이 신분을 속이고 혼인을 했다면, 그 사실을 이혼 사유로 삼는 것이 정당하다는 판결이 나왔죠.

인사극비, 혹은 일본의 부락. 일본 부라쿠민은 더러운 일을 하는 자(에타)나 인간이 아닌 자(히닌)으로 불렸습니다. 1975년에 폭로된 부락지명총람 사건은, 각 기업의 인사담당자나 결혼 상대를 알아보려는 자녀 부모가 상대방 출신지를 보고 그가 부라쿠민인지 아닌지 구분해 은밀하게 차별하는 일이 관행처럼 이루어졌다고 해서 논란이 되었습니다. 사건 이후 차별이 사라졌다면 좋았겠지만, 2000년 들어서 후쿠오카시에서 한 설문을 보면 응답자의 40%가 부라쿠민과의 결혼은 반대한다고 답했다네요.

당시 차별대우에 불만을 품은 에타들은 1922년 신분 해방 단체인 수평사를 조직합니다. 오늘날도 활동 중인 부락해방동맹의 전신이 된 단체죠. 이들은 상상치 못했겠지만, 수평사가 조직됐단 소식은 식민지 조선에 전해져 반향을 일으킵니다. 바로 그들과 마찬가지로 차별받는 백정들에게 말이죠.

경남 진주에는 당시 3, 400명 가량 백정이 살고 있었습니다. 이들 중에서 사회의 차별에 불만을 품은 일부 부유한 백정들과 그런 백정들의 처지를 안타깝게 여긴 양민들이 손을 잡았죠. 이들 개개인의 역할과 비중에 대해서는 문서마다 얘기가 조금씩 다릅니다. 될 수 있는 한 충돌이 없게 소개를 해보겠습니다.

우선 총독부 경무국에서 지목한 주동자는 이학찬입니다. 백정 출신 자산가이고, 3.1운동 이후 불어닥친 교육 열기를 보고 자녀 교육에 투자해야겠다고 결심한 사람들 중 하나죠. 그는 자식을 어느 공립 혹은 사립학교든지 넣어 보려고 수 차례나 문을 두드렸습니다. 하지만 학교 측에서 매번 거절하거나, 혹 허가를 받아 등교해도 금방 출신이 알려져서 반억지로 쫓겨나곤 했죠.

이학찬은 우연히 일본에서 수평사 운동이 활발하단 소문을 듣게 됩니다. 자신과 마찬가지로 차별 받는 타국의 사람들에게 동변상련이라도 느낀 걸까요? 그는 친구들을 찾아가 백정들의 아픔을 호소했습니다. 이때 이학찬이 만난 사람들이 형평사를 설립한 주요 인물들이 됩니다.

우선 신현수와 천석구, 강상호는 백정이 아닌 양인이었습니다. 신현수는 조선일보 진주 지국장이었다고 하고, 천석구는 진주 자작농회 간부였다고 하죠. 또 장지필이라는 백정도 이들에게 가담했는데, 그는 한때 일본 유학을 해 메이지 대학에 들어갔지만 가정 형편으로 인해 3년만에 중퇴하고 식민지 고국으로 돌아온 자였죠.

형평사 초대 사장을 지내기도 한 백촌 강상호. 그는 진주에서 면장을 지낸 아버지 밑에서 부유한 생활을 했지만, 일찌감치 국채보상운동, 3.1 만세 운동 등 민족운동에 가담해 수감되기도 한 인물이었죠. 6개월 옥살이를 마치고 나온 그가 주목한 건, 다름아닌 백정들의 신분 해방 문제였습니다.

워낙 인물이 눈에 띄는 활동을 보여선지, 강상호가 일본 수평사 얘기를 듣고 이학찬 등에게 형평사 설립을 권했다는 이야기도 있지만 사실 관계는 불확실합니다. 어쨌거나 위 인물들이 형평사의 첫 중앙위원이 된 건 사실이죠. 이들 중 이학찬, 장지필 두 사람만 백정이고 나머지는 모두 이들 뜻에 동참한 양민들이었습니다. 이들은 진주 청년회관에서 창립 축하회를 열고 사회 각지에서 보낸 축전 속에서 앞으로의 활동에 결의를 다졌죠. 이 자리에는 진주노동공제회 간부가 축사를 했고, 일본의 재한유학생 단체인 북성회가 축전을 보냈습니다. 심지어 일본 수평사까지 설립에 축하 인사를 전해 왔죠. 출발은 그렇게 순조롭게 보였습니다. 하지만 곧 반형평사 운동이 각지에서 일면서 형평사 회원들과 충돌하게 되죠.

1923년 6월, 군산의 한 보통학교 설립에 형평사 분사 회원들이 십시일반 돈을 모아 기부했습니다. 그러나 군산청년회 측에서 이 기부를 거절했죠. 이들은 형평사 회원들이 내놓은 돈이 '더러운 돈'이라며 받지 않았습니다.

제도적 차별도 따랐죠. 백정 자녀들은 보통학교 입학원서에 반드시 신분을 기입해야 했습니다. 또 경찰은 백정들의 주소, 성명, 연령 등을 조사해 장부를 만들어 감시를 강화하는 조치를 했죠. 순사가 백정 아내가 잠시 혼자 보고 있는 가게에 찾아와 왜 남편 명의로 허가를 받고 아내가 파느냐, 형평사를 꾸미는 백정 년놈들이 언제든지 경관 명령은 어긴다, 등 폭언을 하며 폭행한 사건도 있었습니다.

이윽고 1925년 예천에서 대형 사건이 터졌습니다. 예천 형평분사 2주년 축하 기념 행사장에서 축사를 위해 연단에 올라간 예천청년회장이 폭탄 발언을 해버린 거죠.

'지금 새삼스럽게 형평사를 내세워 행동하는 것은 오히려 시대에 뒤떨어진 것이니 그보다 백정들의 실질적 향상에 힘쓰는 것이 타당하다.'

'백정을 압박하는 것이 하등의 죄악이 될 것이 없다. 어느 시대 국가를 막론하고 국법이 있는데, 그 국법을 어기다가 백정이 된 것이다. (...) 또 조선 왕조 500년은 그와 같은 압박을 받았지만은, 지금은 좋은 시대를 만나 형평운동이 일어나기 전부터 칙령으로 차별을 철폐하였으니 형평사는 조직할 필요가 없다. 아무쪼록 돈을 많이 모아 공부만 잘하면 군수도 될 수 있다.'

번지수를 한참 잘못 찾은 발언에 행사장 안 분위기는 싸늘해졌습니다. 그게 무슨 뜻이냐며 항의하거나 반박하는 목소리도 있었죠. 그때 행사장 구경을 하러 모인 일반 시민들 가운데 누군가 선동을 시작했습니다.

'백정들이 요새 너무 건방지다!'

이걸 시작으로 다수 패거리가 우르르 몰려들어 형평사 회원들을 공격했습니다. 이들은 형평사 분사 또한 습격해 회원들을 무차별 폭행했죠. 폭동은 수천 명 규모까지 커졌고, 며칠에 걸쳐 형평사 분사 및 형평회원들 집이 공격당했죠. 형평사 가입을 결의한 신흥청년회는 이른바 '신백정'을 잡아 죽이겠다고 난동을 부리는 사람들 등살에 시달렸습니다. 신백정이란, 형평사 운동에 가담한 양민들을 백정과 다름없이 대하겠다는 사람들이 부르는 멸칭이었죠.

예천 사건은 여전히 뿌리 깊은 차별 의식 현황을 보여주는 일이기도 했지만, 한편으론 여론이 형평사를 주목한 계기가 되기도 했습니다. 여러 사회 단체가 형평사의 활동에 주목했고 지원하기 시작했죠. 1926년 11월, 전북 형평사 대회에서 경찰들이 차별적 행태를 보인 데 항의하려고 형평사 간부들이 전북도청을 찾았습니다. 그 자리에서 전북 경찰부장은 작지만 유의미한 변화를 이들에게 보입니다.

'지금껏 차별 대우가 있었다면 유감천만이다. 차별 철폐가 이루어지도록 노력하겠다.'

그들의 오랜 투쟁에 비로소 결실이 맺히는 걸까요?

반형평사운동도 형평사 운동에 대한 여론의 변화도 모두 형평사운동의 빠른 성장이 없었다면 일어나지 않았을지도 모릅니다. 형평사는 창립 1년만에 12개 지사, 64개 분사를 가진 조직으로 성장하죠. 창립 직후부터 형평사는 백정 여성들도 운동에 참가해야 한다며 여성 100여 명을 참여시켰습니다. 1926년 전국대회와 28년 정기총회에선 여성문제가 정식 의제로 올랐고, 1928년에는 여성 대의원이 탄생하기도 했죠. 끊임없는 차별 편견에도 형평사는 꾸준히 신분 차별 철폐란 자신들의 목표를 밀어붙였습니다. 일반 학교에 다니지 못하는 자녀들을 위해 학교와 야학, 기숙사를 운영하기까지 했죠. 잡지와 신문 등을 편찬해 내부 교육과 사회 계몽도 꾸준히 추진했습니다.

하지만 모든 일이 다 잘 풀리지만은 않았죠.
여타 당대 민족운동들이 모두 그랬듯, 형평사 역시 얼마 가지 않아 분열 위기를 겪게 됩니다. 대내외 위기를 극복하고 단속하는 과정을 거쳐 최종적으로 그들은 어떤 결과에 이르렀을까요?

이후 결말은 어쩌면 조금 씁쓸할지도 모릅니다.

조선형평사 포스터. 1920년대는 민족운동이 다양한 형태로 분화되어 각자 나아갈 길을 모색하던 시기였습니다. 신분 해방 운동 역시 그러한 흐름에서 벗어나지 않은 거겠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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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조가 아버지 사도세자의 현륭원 식목 사업을 마무리 짓고 신하들에게 물었다. “지난 7년간 인근 8개 고을에서 나무를 심었다. 이제 논동행상을 하련다. 심은 나무가 모두 몇 그루냐? 어느 고을이 나무를 가장 많이 심었는가?” 하지만 아무도 대답을 못했다. 관련 공문을 실어오게 하니 소가 끄는 수레 하나에 차고도 넘쳤다. 나무를 심을 때마다 각 고을에서 올라온 공문이었따. 정조가 다산에게 말했다. “네가 좀 정리해 다오. 대신 분량이 책 한 권을 넘으면 안 된다.” 이후 정약용의 작업 과정은 이랬다. 아전을 시켜 공문을 고을 별로 분류한다. 여덟 덩어리 묶음이 나왔다. 묶음마다 날짜 순으로 정리했다. 정리가 끝나자 연도별로 작은 묶음을 구분. 다산은 아전에게 고을별로 빈 도표가 그려진 종이를 내줬다. 세로 칸은 날짜를 적고, 가로 칸은 나무 종류를 적었다. 공문 한 장을 보고 빈칸을 채우고, 그 다음 장을 보고 그 다음 칸을 채웠다. 1년 단위로 집계를 냈다. 짧은 시간내에 지금의 엑셀 작업하듯 고을 별로 여덟 장의 집계표가 나왔다. 다시 다산은 종이 한 장을 내밀었다. 세로 칸은 연도를 적고, 가로 칸은 고을 이름을 적었다. 앞서 만든 집계표를 연도별, 고을별로 옮겨 적으니 수레 한 대분의 공문서가 한 장의 표로 정리되어 나왔다. 다산은 달랑 그 표 한 장을 들고 정조에게 보고했다. 정조는 “책 한 권 이내로 하라 했더니 종이 한 장으로 정리했구나. 기특하다.”고 칭찬했고 표의 결과에 따라 논공행상을 했다. 정약용의 합리적이고 창의적인 생각 덕분에 불과 2~3일 만에 모든 작업을 마쳤다. 출처: 디씨 모야ㄷㄷ 개쩌누.. 정약용 알고보니 엑셀 고수였네... 인간 피벗...아전....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그것이 알고싶다에서 파헤친 고종의 비자금의 진실
그것이 알고싶다 767회분 '고종 황제의 비자금은 어디로 갔는가' 1900년대 초반, 일본의 내정간섭이 심해지자  고종은 내탕금(황실이 사용하는 재정)을 통해  비자금을 마련하려고 합니다.  1907년에 100만마르크 정도의 금액을 독일은행에 비자금을 만들게 되는데  현시가로 따져보면 약 500억에 달하는 금액입니다. 고종이 쓴 비자금의 용도는 일본 영사 보고서에 따르면 여러사람의 항일운동 자금줄이라 명확히 표현하고 있습니다. 비록 야사를 기록한 책이지만 한국야담사화에서도  독립운동가(우당 이회영 선생)에게 자금 하사 상하이임시정부 설립 밀사 파견을 기록했으며 그 외 도쿄보다 2년 일찍 전차 설립도 고종의 내탕금으로 했다는 사실이 밝혀졌습니다. 1907년 고종황제는 폐위를 당한 후,  고종은 러시아에 이범진 영국에 이한우 미국에 헐버트를 파견하여 을사늑약의 부당함을 알리고자 하는데 이런 부분들도 전부 고종 비자금,  즉 내탕금으로 해결하고자했습니다.  그래서 헐버트에게 위 자금을  찾아와달라고 부탁을 합니다. 호머 헐버트(1863-1945)는 조선 후기 한국 최초의 근대식 공립교육기관인  육영공원에서 외국어를 가르치던 선교사로, 한국인보다 한국을 더 사랑한 문명화의 선구자이자  독립운동가였습니다.  죽을때도 한국에 와서 죽었고 고향보다 한국에 묻히길 원했다고 합니다. 그 이유는? 고종황제 비자금을 받아서 한국사람들에게 돌려줘야 한다는 사명감 때문이라고 하네요. 그런데.... 어찌된 영문인지, 헐버트가 도착했을 때는 이미 상하이에 있던 비자금을 '나베시마'라는 인물이 빼내가버렸습니다. (노어이...) 그알 팀이 이 부분에 대해 자세히 조사를 했는데.. 1. 본사건물이 철거되면서 도이치 뱅크에 자료가 없다는 점 2. 1923년, 독일이 전쟁 배상금으로 많은 화폐를 찍어내면서 화폐개혁을 통해 10억마르크가 1마르크로 변했다는 점 3. 상속채권과 같은 채권의 재산권행사는 30년이라는 점 4.1952년 독일채권회의가 열렸지만, 우리는 한국전쟁이라는 특수한 상황으로 인해 참여하지 못하여 권리가 없다는 점 이런 저런 이유들을 들어 손댈수가 없게 되었다고 합니다. 그럼, 일전에 50만 마르크를 빼간 일본에게서는 법적인 책임이 없을까요? 나베시마. 그는 이토 히로부미의 최측근 인사로써, 외교관으로 활동한 인물로, 통감부의 공을 크게사 후에 외무총감까지 지낸 인물입니다. 통감부래안을 살펴보면 '이토 히로부미'는 고종의 비자금 실체를 알고 고종의 명령서를 위조하여 '덕화은행'의 돈을 인출해 간 것입니다. 그리고 이 돈을 이완용 부자에게 주었습니다. 이것은 사인한 사람이 이윤용(이완용의 형)이라는 점에서 알 수 있습니다. 씹빨... 요즘 1905년 을사조약이 무효라는 증거들이 하나둘씩 발견되면서, 일본에게 배상을 청구할 수도 있지만 1965년 일본과의 협상에서 청구권의 관한 부분의 포기를 선언하였기 때문에 국제법상으로도 불리합니다.  고종이 독일에 보낸 서한 내용입니다 본인에게는 아직 2천만의 신민이 있습니다.... 절박함이 보이지만 이미 일본이 열강들과의 조약을 맺으며 동맹관계를 형성해왔기 때문에 실패로 돌아갔습니다. 이 일에 관해  서울대 역사학과 이태진 명예교수님 의견. 경기대학교 안창모 교수님의 의견. 그알에서 예전에 다뤄줬던 고종황제 비자금편인데 이 실화를 바탕으로 예전에 그림자 살인이라는 영화가 나왔었다고 하네요.
다리 아래에서 임금 만난 썰
조선 성종은 미복잠행(微服潛行)으로도 유명한 군주였다. 밤이면 편복으로 갈아입고 어두운 한양 장안을 돌아다녔다. 중신들은 만류했으나 성종은 듣지 않았다. 어느 날 밤 성종은 여느 때와 다름없이 운종가(雲從街·지금의 종로)로 나섰다. 광통교 위를 지나는데 다리 아래에 한 사람이 쪼그리고 앉아 졸고 있었다. 나이는 마흔 남짓 돼 보이는데 행색이 매우 초라한 시골 사람이었다. 성종이 가까이 가서 누구냐고 부드럽게 묻자 그는 몹시 반가운듯 바싹 다가오며 “예, 저는 경상도 흥해 땅에 사는 김희동이올시다. 마흔이 넘도록 어진 임금님이 계신다는 한양 구경을 못했지요. 오래 벼르기만 하다가 간신히 노자를 구해 가지고 나섰는데 수십 일 만에 겨우 당도하여 누구에게 물으니까 예가 서울이라 하잖은가요. 이제 막 저녁은 사먹었지만 잠 잘 만한 탄막을 찾지못해 여기서 밤새기를 기다리는 중이오." 서울 장안에도 숯 굽는 움짐이 있는 줄 알고 이렇게 말하는 것 같았다. "댁은 뉘시기에 이 밤중에 나다니시오. 보아하니 생김새도 얌전해 보이시는데 혹시 임금님이 계신 집을 아시거든 좀 가르쳐 주구려” 성종은 속으로 웃으며 사실 어질고 착한 사람은 자신이 아니라 이렇게 자기를 찾아온 시골 백성이라 생각하고, 그의 소박함과 순진함에 감동했다. 성종은 시치미를 뚝 떼고 “나는 동관에 사는 이 첨지라는 사람이오. 임금이 있는 곳을 알기는 하오만, 만일 알려주면 임금에게 무슨 말을 전하려 하오?” 라고 물었다. 시골사람 김희동은 히죽이 웃으며 “무슨 특별한 일이 있겠소? 우리 고을 사람들이 말하기를 임금님이 백성을 사랑하셔서 우리가 걱정 없이 잘 산다지 않소. 내 기왕 올라왔으니 임금님이나 한번 뵈옵고 돌아가자는 거지요. 빈손으로 뵙긴 뭣할 것 같아 우리 고장에서 나는 전복과 해삼 말린 것을 좀 짊어지고 왔지요. 임금님께 이것을 드려 한끼 반찬이나 합시사 하고. 그래 댁이 어디 임금님을 좀 뵙게 해주시구려” 그때 멀리서 무예별감들이 달려왔다. 성종은 그들에게 귀띔하고는 “이 사람들을 따라가면 임금을 만날 수 있도록 해줄 터이니 안심하고 가시오”라고 했다. 김희동은 "서울 양반은 참 인심도 좋구만!" 하며 무감의 뒤를 따랐다. 이튿날 성종은 편복 차림으로 무감의 집에 들렀다. 그러자 희동은 몹시 반가워하며 “이 첨지는 참말 무던한 사람이외다. 처음보는 시골 사람을 잊지 않고 찾아주시니, 그런데 임금님을 뵐 수 있는건가요?" 옆의 무감들은 희동의 언행을 타박하려 했으나 성종이 눈짓으로 말리고는 “당신의 지성은 돈독하오만 벼슬이 없는 사람은 임금을 대할 수 없게 돼 있소. 내가 뵐 수 있도록 주선해볼 테니, 그렇게 꼭 임금을 뵈려 한다면 무슨 벼슬 하나를 청해보시오. 내가 힘써서 되도록 해보겠소”라고 했다. 김희동은 꿈에도 생각지 못한 벼슬을 말하라니 난처했으나 “우리 마을에 충의(忠義) 벼슬하는 박충의라는 굉장한 양반이 있지요. 그 충의란 벼슬 좋습디다만, 댁이 무슨 수로 내게 그런 벼슬을 시켜주겠소. 아무래도 임금님을 뵈올 수 없다면 그냥 돌아갈 수밖에요. 그리고 이왕 온 길이니 임금님께 길이 닿으면 이것이나 전해주시지요” 하고는 해삼, 전복을 싼 보퉁이를 내놓았다. 성종은 웃음보가 터지는 것을 겨우 참으며 “내가 힘써볼 테니 하룻밤만 더 묵고 계시오. 혹시 벼슬이 되면 당신이 직접 갖다 바쳐도 좋지 않겠소” 하고는 입궐(入闕) 후 이조판서에게 명해 그를 충의초사(忠義初仕)로 임명했다. 다음 날 아침이 되자 희동은 영문모를 사모와 관복, 나막신을 받아들였다. "그래 이 첨지는 어디로 갔는지요?" 무감은 아무 대꾸도 하지 않고 그를 대궐로 대려갔다. 희동의 손에는 어김없이 해삼과 전복 짐이 들려있었다. 희동은 전도관(前導官)이 시키는 대로 임금께 세 번 절하고 엎드렸다. 그때 용상에서 “내가 임금이다. 네가 짐을 보러 수백리 길을 왔다지. 겁내지 말고 쳐다보아라”라는 윤음(綸音)이 들렸다. 희동이 머리를 겨우 들고 용틀임하는 붉은 용상에 높이 앉은 임금을 쳐다보니 바로 이틀이나 마주앉아 대하던 이 첨지가 아닌가. 그래서 희동은 “이 첨지가 어떻게 여기 와 있소?”라고 물었다. 그러자 모든 신하의 매서운 눈초리가 법도를 모르는 희동에게 쏠렸다. 그제야 희동은 이 첨지가 바로 임금임을 깨달았다. 그는 황공해서 몸 둘 바를 모르고 벌벌 떨었다. 영문을 모르는 승사 각원들은 엄형을 주장했으나 성종은 희동을 만나게 된 전후 이야기를 해주었다. 희동은 당황한 나머지 가지고 온 해삼과 전복보따리를 떨어뜨리고 말았다. 그때 성종은 자비가 가득한 눈으로 만면에 웃음을 띠면서 그것을 주우라고 말한 뒤 “저 해삼과 전복은 희동이 나를 위해 먼 길을 걸어 갖고 온 것이니 내 고맙게 먹지 않을 수 없다.”고 어명을 내렸다. 그리고 성종은 희동에게 후한 상금을 내려 금의환향하게 하였다. 그 후 희동은 충의벼슬로 걸어서 올라올 때와는 달리 말을 타고 고향에 내려갔다. 출처-이야기 조선왕조오백년사 실록에는 존재하지 않는 야사지만 역시 야사여서 재밌는 것 아니겠소. 야사 개꿀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