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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선엽 장군

제 친구가 동창들 방에 올린 글 하나 전달합니다. 백선엽 장군에 대한 추모톡이 어제 올라온 후, 행여 우리 동문 선후배님들 중에 백선엽 장군의 친일행적으로 인해 다소 거북함을 느끼시는 분들이 계실 것 같아 역사를 공부했던, 특히 독립운동사에 대해 연구했던 입장에서 한 말씀 올리고자 합니다. 임관전에 국사 교생실습을 나갔다가 우리 고교생들이 청산리 전투가 1940년대에 일어난 것으로 이해하는 것을 보고 깜짝 놀랐습니다. 사실 청산리전투나 봉오동 전투같은 독립군들의 큰 전투들은 1920년을 마지막으로 다시는 벌어지지 않았습니다. 바로 1921년 6월 발생한 '자유시 참변'으로 만주와 연해주 지역의 독립군이 '전멸'했기 때문입니다. 자유시 참변을 설명하려면 꽤 복잡한 배경까지 설명해야 하지만, 간단히 말하면 소련의 볼세비키 혁명 세력이 만주와 연해주의 우리 독립군 세력을 학살한 사건입니다. 기록마다 사상자가 다르지만 학계에서는 980여명이 학살당하고 1800명이 소련군에 의해 포로로 끌려갔다고 합니다. 이 사건 이후로 만주(간도)지역 독립군은 그야말로 씨가 말랐습니다. 간신히 탈출한 일부 독립군들은 그후 중국내륙으로 들어가 장개석의 국민당군에 합류하거나 모택동의 팔로군에 가담합니다. 백선엽, 박정희 소위가 관동군 장교로 임관하던 1940년대의 만주는 독립군을 찾아볼래야 찾아보기 힘든 그런 시기였습니다. 오히려 '항일'이란 이름을 단 산적들이 일본인뿐만 아니라 중국인, 조선인들까지 약탈하고 아녀자들을 겁탈하고 있었습니다. 북한의 김일성은 소련군 88여단에 가담하기 전까지 바로 이 산적 중 하나였습니다. 그런데 이런 역사적 사실은 학교에서 안가르칩니다. 대학의 사학과 수업에서도 다루지 않습니다. 이걸로 논문을 쓰려고 하면 교수들이 거부합니다. 백선엽 장군이 관동군 장교로 임관한 것은 사실입니다. 우리 모두 장교로 임관했었으니 아시겠지만 기껏 소위 혹은 중위가 무슨 큰 권력이 있고 지휘권이 있습니까. 왜 탈영해서 독립군 혹은 광복군에 합류하지 않았나라는 비판은 가능하지만, 일제 식민지에서 태어난 이들에게 왜 일본군 장교가 되었는가라고 낙인 찍는 것은 무리가 있습니다. 그래서 학계에서조차 이런 직업선택까지 친일의 기준으로 삼는 것은 문제가 있다고 하여 이들 일본군 장교출신들은 친일파라 단정하지 않습니다. 일제시절 관공서에 근무한 공무원이라 해서 모두 친일파라 부르지 않듯이 말입니다. 그러나 좌파 사람들은 마치 백선엽이나 박정희가 독립군 때려잡기 위해 혈안이 된 가증스런 매국노처럼 묘사합니다. 역사적인 사료나 사실을 입증할 증거도 없습니다. 그냥 일본군 장교였으니 친일파라는 것입니다. 그런 식이라면 1960년대, 70년대 장교로 임관한 사람들은 유신의 앞잡이고, 80년대 임관한 장교들은 군부독재의 앞잡이가 되는 셈입니다. 저도 역사를 공부하기 전에는, 장교로 임관하고 운좋게 공부를 계속하기 전에는 그들처럼 백선엽을 친일파로 알고 살았습니다. 그러나 역사적 사실과 객관적 논리를 바탕으로 얻어낸 진실은 '백선엽의 친일논란은 사실이 아니다.' 입니다. 사상논쟁이나 정치적인 이슈를 만들어 공론화하고픈 생각은 추호도 없습니다만, 전공자의 입장에서 사실이 아닌 것을 기반으로, 어떤 목적을 가지고 가공된 한 인물의 왜곡된 평가가 바로 잡혔으면 하는 마음에서 이 글을 올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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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신있는 글 잘 읽었습니다 따르는 정당과 이념을 지지할땐 항상 객관성을 유지하는 자세를 길러야 겠습니다
@sasunny 간단한 유투브 영상으로 보충합니다! [지식의 칼 2020. 7. 15 유투브에서 보기] 백선엽 장군 친일파 논란, 이 하나의 영상으로 정리한다! https://youtu.be/E1pb6iLClPs
진짜... 기본적인 상식을 가집시다. 독립군을 잡아 죽이지 않았기 때문에 친일파가 아니다? '관동국'에 속한 '관동군'이라는 군사조직 자체가 러시아를 견제하고 중국을 엿보고 조선독립군의 활동을 억압하려는 목적을 두고 만들어진 조직인데, 독립군이 한창 활동할 시기에 몸 담았던게 아니니 친일파가 아니다? 그럼 바꿔 물어봅시다. 아무리 만약은 없다지만, 광복군 국내진공 작전이 차질없이 진행되었다면 백선엽이 탈영해서 합류했겠습니까? 아니면, 그들을 쏘아죽여 공을 세우려 했겠습니까? 탈영할 사람이었다면 애시당초 몸담질 않았겠지요. 독립운동을 했겠죠. 제발.. 제발 부탁인데 여러분들.. 정상적인 사고방식을 가져갑시다. 상식적으로 생각해요. 주어진 지문만 보고 판단하지 말고, 여러 경우의 수도 대입해보구요.
@eastpillar88 어서 어서 친일파 프레임에서 벗어나야 할 듯 합니다!
네 공부 좀 하셔야겠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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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업선택까지 친일의 기준으로 삼는 것은 문제가 있다고 하여 이들 일본군 장교출신들은 친일파라 단정하지 않는 학계는 어느 학계인가요?
@Skella 학계는 들먹일 필요가 없지요! 년대가 맞지 않는다는 이야기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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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 귀족 자제들이 주로 가는 영국 최고 명문사학 중 하나인 이튼칼리지 출신 중에서 제1차 세계 대전에서는 5,619명이 참전해 1,157명이 전사했고, 제2차 세계 대전에서는 4,690명이 참전해서 748명이 전사했다고 합니다. 영국 엘리자베스 여왕은 1차 세계대전 중 고작 15세의 나이에 차량 정비 장교 보직을 맡았었고, 여왕의 차남 앤드류 왕자는 포클랜드 전쟁에 전투기 조종사로 참전했습니다. 우리도 삼국 시대, 신라의 귀족 자제로 이루어진 화랑은 전쟁터에서 항상 가장 위험한 곳에서 목숨을 걸고 싸워야 했습니다. 김유신의 아들 김원술은 당나라와의 전투에서 패배했을 때 죽음을 각오하고 마지막 전투에 뛰어들려는 것을 부하 장수들이 김원술의 말고삐를 잡고 퇴각하여 살아 돌아올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아버지 김유신은 병사들의 죽음을 뒤로하고 살아 돌아온 아들을 용서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대한민국에서 존경받는 독립운동가 김구 선생님의 차남 김신 전 공군참모총장을 비롯하여, 손자 김양 전 공군 보훈처장과, 공군 장교로 입관한 증손자 김용만 씨 까지, 김구 선생님의 후손은 3대에 걸쳐서 공군 장교로 임관하면서 나라와 국민을 위해 일했습니다. 이들은 왜 더 어렵고 힘든 일을 택했을까요? 그것은 자신만을 위해 부와 명예를 사용하는 것이 얼마나 무의미한 것인지를 너무도 잘 알았기에 자신의 욕망보다 주어진 명예와 헌신을 더욱 소중하게 여겼기 때문입니다.   어려운 사람들을 위해 끝없이 베풀면서도 만석꾼의 집안을 지켜온 부자들의 귀감이라 불리는 경주 교동 최 부자집. 서울대학교 의과대학의 전신인 경성 의학전문학교를 마치고 일본 나고야대학에서 의학사학위를 받은 엘리트였지만 평생 아프고 힘든 환자들을 위해 살다간 장기려 박사. 독립운동가로 일하고 나라를 위한 사업가로 살다가 당시 407억 원, 지금으로 따지면 6천억 원이 넘는 재산을 사회에 환원한 유일한 회장. 이렇게 자신의 명예를 지킬 줄 아는 위인들의 모습을 통해 이 세상이 바르게 흘러갈 수 있는 것 같습니다.   # 오늘의 명언 명예롭지 못한 성공은 양념하지 않은 요리와 같아서, 배고픔은 면하게 해주지만 맛은 없다. – 조 파테이노 – =Naver "따뜻한 하루"에서 이식해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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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상 수많은 천재들이 세상을 더욱 풍요롭고 편리하게 발전시켜왔습니다. 그중 상대성 이론으로 유명한 알베르트 아인슈타인은 천재의 상징처럼 많은 사람들에게 각인되어 있습니다. 20세기 물리학 발달에 일대 충격이라고 일컬어지는 혁신적인 발견을 이룬 아인슈타인은 많은 사람에게 큰 영향을 끼쳤습니다. 아인슈타인의 연구들은 산업 전반과 병기 공학, 광학, 군사전술, 원자력 발전과 같은 현대인의 삶과 밀접한 분야들의 핵심이 되었고 인류의 삶을 변화시켰습니다. 수많은 학생과 학자들이 그처럼 위대한 과학자가 되기를 소원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아인슈타인의 강의를 듣던 한 학생이 질문했습니다. “교수님같이 위대한 과학자가 될 수 있는 비결이 무엇입니까?” 그 질문에 다른 학생들도 눈을 빛내며 귀를 기울였습니다. 그런데 아인슈타인은 학생의 진지한 질문에 웃으며 짧게 대답했습니다. “입을 적게 움직이고 머리를 많이 움직이게”   사람이 태어나서 말을 배우는 데는 보통 2년이 걸리지만, 침묵을 배우기 위해서는 60년이 걸린다는 말이 있습니다. 지혜로운 사람은 함부로 말하지 않으며 현명한 사람은 말하기 전 한 번 더 생각합니다. 그리고 성공하는 사람은 말보다는 실천이 앞섭니다.   # 오늘의 명언 실천이 말보다 낫다. – 벤저민 프랭클린 – =Naver "따뜻한 하루"에서 이식해옴.....
신라 장군 이사부는 우산국을 어떻게 정벌하였을까?
혹시 이사부 장군의 성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이사부 장군이니 당연히 이씨라고요? 그것도 경주 이씨? 이사부(異斯夫)는 《삼국사기》에는 김씨, 《삼국유사》에 는 박씨 성으로 나옵니다. 즉, 김이사부이거나 박이사부. 우리가 지금 그분을 성을 빼고 이름만 막 부르는 거예요. 이런 실례가……. 《삼국사기》에선 내물왕의 4세손이 김이사부로 나오는데, 태종이란 이름도 있었다네요. 《삼국유사》에선 이상하게도 동일 인물인데 박이종(朴伊宗)이라고도 나옵니다. 또한 《일본서기》에선 ‘이질부례’ 로 적혀 있다네요. 실제로 신라의 충신 박제상도 《삼국사기》의 기록이고, 《삼국유사》에서는 김제상으로 기술되어 있는 것을 보면, 일연 스님이 본 옛 사서에 문제가 있었거나 신라 왕위를 서로 주고받은 박, 석, 김씨 왕 족 가문이 상호 혼인하는 과정에서 아버지와 어머니 성씨를 혼용해서 썼을 수도 있다고 여겨지지요. 지금 우리가 유교적 관점에서 바라보기에 이해가 안 되지만, 일본에는 지금도 데릴사위를 들여 자녀들이 어머니 성씨를 따르는 경우가 종종 있으니 그럴 개연성이 높다고 하겠습니다. 어쨌거나 여기서는 《삼국사기》 버전으로 표기할게요. 김이사부 장군은 우산국(울릉도와 독도)을 정복해 독도까지 우리 땅으로 만드신 위인으로 유명한데, 어떻게 우산국을 정복했는지는 다들 잘 모릅니다. 먼저, 김이사부 장군은 내물왕의 4대손이니 금수저 왕족 출신이었습니다. 생년이 정확치는 않으나 505년 실직성(삼척) 군주(軍主)로 처음 임명된 것으로 보아 485년경 출생했다고 여겨지므로 512년(지증왕 13년) 27~28세 젊은 나이에 지금의 강릉인 하슬라(또는 아슬라) 군주로 부임합니다. 그 두 지역은 신라의 고구려 방어 최전선이자 신라 수군의 중요한 군사항구였어요. 이처럼 당시에도 중요하게 여겨진 강릉은 그 후로도 번성해 조선 시대 지방 행정구역을 팔도로 개편할 때에도 강원도의 첫 글자로 쓰일 정도로 큰 고을이었고, 지금도 강원도에서 원주와 함께 가장 인구가 많은 도시입니다. 참고로, 원주 역시 통일신라 5소경 중 하나였으니, 강원도의 대도시 두 곳은 역사가 매우 오래되었네요. 하지만 당시 동해 바다에는 우산국(울릉도)과 대마도 해적들이 날뛰고 있어 어선을 공격할 뿐 아니라 때때로 상륙해 주민들을 납치해 가고 있었고 신라 수군은 패배를 거듭했다고 합니다. 이처럼 평생 해적질로 단련된 섬사람들과 맞상대해선 이기기 힘들겠다고 여긴 김이사부 군주는, 수군과 백성들에게 다음과 같이 공표합니다. 김이사부 : “친애하는 백성 여러분. 나 쫌 보이소. 이번 주말에 ‘라이온 킹’ 영화를 단체 관람하면서 사자를 자세히 관찰한 뒤 각자 나무로 사자를 하나씩 조각해 오이소.”  주민과 수군 : “엥. 저기요? 군주님. 아침에 뭐 잘못 드신게 아니요?”  김이사부 : “이번에 우산국 해적 글마들을 무찌를 신의 한 수이니 쫌 만 기다려주시요.”  주민과 수군 : “어째 새파란 젊은이가 군주라고 오더니 분위기가 좀 쌔하드래요.” 왜 갑자기 사자가 등장했느냐면, 당시로선 아주 힙한 인도산 종교 불교가 전래되면서 ‘부처님이 고함을 치면 사자의 울음소리로 커져서 상대를 제압할 수 있다’는 이야기가 마치 21세기 마블 유니버스 세계관 마냥 알려지던 때인지라 글로벌 얼리어답터 김이사부 장군은 일반 백성들로서는 세상 처음 보는 인도 사자를 이용한 심리전을 구사하기로 한 것입니다. 그런데 이 사자와 관련해서 잠깐 삼국의 불교 전파에 대해 먼저 언급을 해야겠네요. 당시에는 인도 에서도 역시 불교가 체계화되지 않았는데, AD 1세기에 중국 후한 (後漢)에 전래되면서 황실에서 크게 환영받게 됩니다. 원래 초기 불교는 개인의 자기 수양을 중요시했는데, 불교의 윤회사상에 따르면 덕을 쌓은 이일수록 더 높은 신분으로 태어난다는 점에 착안해 중국에서는 왕즉불(王卽佛), 즉 왕이 곧 부처라는 사상으로 변질되었습니다. 즉 귀족이나 백성들보다 왕 자신이 전생에 더 덕을 쌓았기에 황제로 태어났다고 강조함으로써 감히 반역을 꿈꾸지 못하게 하는데 요긴하게 이용됩니다. 이후 중국 위촉오 삼국시대와 5호 16국시대의 혼란기를 거치며 백성들도 어려운 현실을 극복하고자 불교에 의존하게 되고, 남북조 각 왕실마다 한자로 번역된 불경을 보급함과 동시에 중국식 불당과 불상, 불탑 등 지금 우리에게 익숙한 체계를 정립하지요. 이처럼 300여 년간 중국에서 숙성한 불교는 우리나라로 전래되는데, 우선 372년 중국 북조 전진(前秦)에서 고구려로 순도 스님이 찾아오고, 뒤이어 394년 중국 남조 동진(東晉)에서 인도 출신 마라난타 스님이 백제로 오면서 불교가 전래됩니다. 당시 마라난타 스님이 도착한 곳이 지금의 전남 영광군 법성포(法聖浦)라네요. 이처럼 당시 우리나라 임금들 역시 왕즉불 사상이 권력 안정화에 절대적으로 유리하다는 사실을 깨닫고 불교를 적극적으로 수용합니다. 그러나 중국과 직접 교류가 불가능했던 신라에는 고구려 승려 묵호자를 통해 400년대 초에 전래되지만 곧 격렬한 저항에 부딪힙니다. 당시 3개 성씨의 성골, 진골 왕족뿐 아니라 각 귀족들도 나름의 가문 탄생 신화를 가지고 있었고, 별도의 사당도 운영하던 상황에서 왕만 더 돋보이는 불교는 아무래도 껄끄러웠던 거지요. 그러나 지금으로 치면 대통령 비서실장쯤 되는 사인(舍人) 이차돈이 527년 법흥왕과 모의해 사찰 건립이 늦어지게 했고, 법흥왕이 일부러 신하들 앞에서 “누가 감히 왕의 명을 어기느냐?”고 이차돈의 목을 치게 하자 하얀 피가 솟구치고 꽃비가 내리고 지진이 일어나는 기적을 일으키니, 이를 본 귀족들도 마지못해 불교를 수용하게 됩니다. 그나저나 이 이차돈 역시 이사부 장군처럼 성이 이씨가 아니라 이름이 이차돈이에요. 성은 김 또는 박이고요. 이차돈의 순교 이후 신라는 원효, 의상 등 많은 스님들의 대활약으로 백성들까지 독실한 신자가 됨으로써 오히려 삼국 중 가장 독실한 불교 국가로 거듭나게 되지요. 따라서, 김이사부 장군이 우산국을 정벌하러 가던 512년은 이차돈이 순교하기 15년 전이어서 아직 불교가 신라 왕족들에게만 알려진 상황이었어요. 그러니 신라 백성이건 우산국 사람들은 아직 인도 사자에 대해 잘 알지 못하던 때였기에 이걸 활용한 겁니다. 이에 김이사부 장군은 512년 6월(당시20대), 배마다 사람보다 큰 사자 조각상을 태우고 한달음에 130  km 바닷길을 가로질러 울릉도 앞바다로 몰려갑니다. 따라서 많은 어린이 역사 위인전 그림에 나오듯이 김이사부 장군이 수염을 휘날리며 배를 몰고 가는 할배 장군으로 묘사되는 건 가리지날~. 멀리서 이 광경을 보던 우산국 주민들은 신라 수군 배 앞머리에 괴상한 생물이 떡 하니 앉아 연기를 토해내는 것을 보며 경악하지요. 이때 김이사부 장군 스피커를 켭니다. 김이사부 : “아아, 우산국 아재들요. 나 좀 보입시다. 우리 신라가 해외 직구한 이 인도산 사자를 풀어서 다 잡아 먹어삐리라 할낀데 항복할끼요, 싸울끼요? 우짤란교?” 우산국 우해왕 : “허걱, 저게 뭐꼬? 항복하겠다요.” 울릉도 전설에 의하면 과거 대마도 해적들이 우산국에 수시로 침입해 왔다고 합니다. 그러자 우해왕이 자신의 수군을 이끌고 대마도로 가서 대마도주를 위협해 다시는 침범하지 않겠다는 약조를 받고, 대마도주의 셋째 딸 풍미녀를 아내로 맞아 혼인 동맹을 맺었던 용맹한 인물이었다고 합니다. 하지만 그가 데려 온 풍미녀의 사치가 심해 우산국 백성들의 원망이 치솟고 있었으니 신라로서는 우산국을 제압할 절호의 기회였던 것이죠. 이처럼 재치로 적을 굴복시킨 김이사부 장군은 우산국 자치를 허용하고, 신라에 매년 토산물을 공물로 바치는 속국이 되도록 하는 선에서 타협합니다. 왜냐하면, 당시 한반도 주변 섬들과 대마도, 유구국(오키나와), 타이완, 필리핀까지 그들만의 해상 네트워크가 존재했기 때문에 무력으로 진압을 했다면 위기감을 느낀 이들과 지속적으로 분쟁이 이어질 가능성이 커 이 정도 선에서 절충했다고 여겨집니다. 또한 신라는 중국에만 머리를 숙이고 주변 국가들로부터는 미니 황제국으로 대접받고자 했기 때문에, 탐라국(제주도), 우산국(울릉도), 대마국(대마도) 등 주변 섬들을 직접 지배하지 않고 매년 조공을 받고 금 품을 하사하는 형식으로 자치를 허용했습니다. 어쨌거나 김이사부 장군에게 우산국이 종속을 다짐함으로써 그후 150여 년간 침입 기록이 없었다고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