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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출처 : shuttertock http://insight.co.kr/content.php?Idx=915&Code1=006 지난 글에서는 한국 교육의 문제가 무엇인지를 다뤄보았습니다. 한국 교육은 입시를 최우선으로 삼고 있으며 이로 인해 각종 문제들이 실타래처럼 엉켜서 나타나고 있습니다. 첫째로, 입시 시험 위주로 교육이 이뤄져서 학생들이 지나치게 스트레스를 받고 사교육비 문제가 생깁니다. 둘째로, 입시 시험 위주로 교육이 되다보니 학생들의 창의성을 높이는 것보다는 지식 암기와 문제풀이의 반복만이 교육의 전부입니다. 모두가 알고 있으나 변하지 않는 것 그런데 거의 모든 사람들이 이를 다 알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교육이 안 바뀌고 있다는 점이 더 큰 문제일 것입니다. 왜 다들 아는데 교육이 바뀌기는커녕 문제가 점점 더 심해지고만 있는 것일까요? 제도적인 문제도 물론 있겠지만 우선 ‘우리’의 삶을 먼저 돌아보고자 합니다. 다들 한국 교육에 문제가 있다는 것을 알면서도 현실적인 이유로 결국엔 외면하고 있습니다. 사진 : 연합뉴스 우리는 교육에 대해 여러 가지 태도를 취합니다. 한국 교육의 문제에 대해 깊이 공감해서 자녀가 대안학교에 가는 것을 적극적으로 권장하고 지지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런가 하면 한국 교육에 비판적이지만, 현실적으로 입시 경쟁에서 살아남아 적어도 인서울 대학에 들어가지 않으면 사회적 천대를 받을 것이라는 걸 우려해 자신의 자식만큼은 입시 공부에 매진하길 바라는 사람도 있습니다. 사교육에 반대하면서도 다른 아이들이 다 하는 걸 보고 자녀가 뒤처지는 것을 우려해 결국엔 사교육 시키는 사람도 있고요. 한국 교육에 문제가 있다는 것을 인지하고 있으면서도 이야기하는 것을 쉬쉬하며 남들이 하는 대로 시류를 적극적으로 따라가는 사람들도 있지요. 더 나아가 이제는, 냉소를 흘리며 어차피 현실은 변하지도 않는데 괜한 고생만 하지 말고 차라리 그 시간에 스펙을 쌓아 네 앞길을 챙기라고 ‘철부지’를 꾸짖는 사람도 있지요. 학교가 단순히 취업 혹은 입시를 위한 것이 아니라는 말은 교과서에나 나올 법한 순진한 이야기로 치부되고, 현실을 잘 모르는 소리로 조롱을 받는 모습도 여기저기서 보입니다. 즉, 다들 한국 교육에 문제가 있다는 것을 알면서도 현실적인 이유로 결국엔 외면하고 있는 것이지요. 마르크스주의의 이중성과, 지배세력의 지배의식 이런 현상은 흔히 이상주의와 현실주의 사이에서의 갈등으로 설명됩니다. 그러나 페터 슬로터다이크는 『냉소적 이성 비판』에서 이를 한층 더 깊게 들어가서 근대의 계몽주의에서 파생된 냉소주의로 분석합니다. 슬로터다이크에 따르면 한국의 교육에 대한 대다수의 태도는 단순히 단편적인 갈등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라 현대 사회에 전반적으로 퍼져 있는 현상 중 하나이며, 이는 근대에서부터 지금까지 주류적 사상의 하나로 자리하고 있는 계몽주의로 인해 비롯된 것이지요. 계몽주의란 근대의 특징적인 사상적 조류로, 겉으로 보이는 것이 아니라 숨겨져 있는 내면의 현상이나 규칙 등을 이성의 비판적·반성적 작업을 통해 알아내려는 사상적 경향입니다. 근대 이후로 체계적으로 정비되고 행해진 공교육 시스템 하에서 배우는 학문들은 거의 대부분 이런 행위를 포함하지요. 대학의 철학, 사회학, 물리학 등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리고 계몽주의는 도덕주의, 마르크스주의를 포함하고 있기도 합니다. 그런데 이런 계몽주의가 서서히 현대에 들어 냉소주의적인 모습을 보이기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계몽주의자들은 사회적 문제에 대해 인지하고 있고 이에 대해 어떻게 대처해야 하는지도 알면서 현실의 여러 가지 이유들로 인해 행하지 못하게 된 것이지요. 종국에는 과거에 비판적이던 자신의 모습을 비웃는 냉소주의자가 되기도 하였고요. 페터 슬로터다이크는 이를 계몽주의, 특히 마르크스주의의 자체적인 이중성과, 계몽주의가 연구를 소홀히 한 지배세력의 지배 지식으로 인해 일어난 현상이라고 설명합니다. 페터 슬로터다이크는 마르크스주의의 자체적인 이중성과, 계몽주의가 연구를 소홀히 한 지배세력의 지배 지식으로 인해 일어난 사회 현상이라고 이야기합니다. 사진 출처 : Flickr 전자를 간단하게 설명드리자면, 마르크스주의는 한편으론 특히 자유를 지향하여 계급론적인 해방을 외치는 반항아이자 비판자로서의 실존주의자의 모습을 지니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현실 정치에서의 승리를 위해 단결과 복종을 요구하는 사실주의자로서의 군주의 면모를 가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둘은 굉장히 모순적이어서 결합될 수가 없으니 마르크스주의는 결국 분열증을 앓게 되는 것이죠. 자체적으로 분열증을 앓고 있으니 스스로에 대한 회의에 빠져 문제에 제대로 대처하지 못하고 무기력해진 것입니다. 후자는 이렇게 설명될 수 있습니다. 지배 지식은 권력의 행동 규칙을 위한 것과 보편적 의식의 규범을 위한 것으로 구성됩니다. 지배세력은 이러한 이중적인 지식 구조를 통해 자신들에게 비판적인 계몽주의에 대해 나름의 방해 내지는 자기 보호 공작을 펼친 것이지요. 프리드리히 2세나 비스마르크가 대표적인 예가 될 수 있습니다. 특히 프리드리히 2세의 경우 계몽 군주로 자처하면서 지배 세력 하에 계몽주의를 포섭해버림으로써, 비판적인 목소리를 효과적으로 잠재울 수 있었습니다. 계몽주의자의 역할을 군주가 흡수해 버려 그들이 설 자리를 가져가버린 것입니다. 이것이 점차 진행되면서 현대 국가가 ‘계몽된 사람들의 목을 꺾어 관료로’ 만드는 것까지 가능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 관료들의 각종 비도덕적인 행위로 인해 계몽주의의 도덕주의적인 근간이 무너지게 된 것입니다. 현대 사회에 만연해 있는 냉소주의는 계몽주의가 낳은 의도치 않은 결과라고 할 수 있지요. 이러한 페터 슬로터다이크의 논지는, 물론 면밀히 따져보면 서구 유럽과 다른 점은 있겠으나, 현재 한국 사회에도 충분히 적용될 수 있습니다. 현대 한국의 교육제도는 일본을 통해 들여온 독일의 근대적인 혹은 계몽주의적인 교육제도를 기반으로 하고 있습니다. 이런 교육제도 하에서 형성된 우리의 인식으로는, 한국 교육이 지금과는 달라져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학교는 단순히 입시나 취업이 아닌 공적인 기능을 담당하는 곳이고, 학생들은 학교에서 지식뿐만 아니라 삶의 지혜를 배우고 행복한 삶을 찾아가는 방법들을 익혀야 합니다. 지식을 배우더라도 단순 암기와 문제풀이의 반복이 아니라 창의적인 사고를 가능하게 하는 방식으로 배우는 게 더 좋을 것입니다. 그리고 학생들은 지금보다 행복할 수 있어야 합니다. 학생들의 자살률이 높다는 것은 무언가 잘못되었다는 것을 의미하며, 그 이유가 밝혀져야 하고(다들 그 이유가 무엇인지는 어렴풋이 알고 있지요) 이것이 시정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교육과도 관련 있는 학벌주의는 극복되어야 할 한국 사회의 고질적인 병폐입니다. 우리는 냉소를 흘리면서도 어딘가 행복하지 못하고 우울한 상태에 빠져있는 현명한 우울증에 빠지게 됩니다. 사진 출처 : shutterstock 현명한 우울증에 빠진 우리들 그러나 이 모든 것을 다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선뜻 행동하지 못합니다. 주류적인 삶의 방식에서 벗어나는 것에 대한 두려움 때문이죠. 현실의 구조적인 문제는 내가 맞서 싸우기에는 너무나 강력합니다. 특히 내 자녀가 관련되어 있기 때문에 쉽사리 행동하기가 어렵지요. 더군다나, 정작 학벌주의를 비판하는 우리도 사람을 볼 때 학벌로 성실성과 능력을 가늠하는 이중적인 모습을 갖고 있기도 합니다. 슬로터다이크가 명시적으로 말한 바는 없으므로 맥락상으로 추측해보건대, ‘보편적 의식 규범으로서의 지배 지식’이란, 사회적으로 불가피하며 더 나아가서는 필요하며 옳다고 보편적으로 생각되는 어떤 사회적 경향 혹은 제도, 규범 등을 포함한 지배층의 지식을 의미할 것입니다. 그리고 그 지배 지식은 결과적으로 볼 때 지배층의 힘을 증대 및 유지시켜주는 것이겠지요. 즉, 사회적으로 능력 혹은 인격의 측정을 위해서 학습 수준의 등급화는 불가피한 것이며, 그렇기 때문에 학력에 대한 경쟁이 나타나는 것은 어쩔 수 없다는 의식이 한국 사회에 보편적인 것으로 자리 잡고 있다는 것입니다. 학교 공부에 충실하고 시험을 잘 보는 것이 학생의 미덕으로 굳혀져 있고요. 이 보편적 의식 규범이 지닌 가장 강력한 힘은, 그 규범 자체가 현 상황에 비추어 볼 때 일면 타당하다는 점일 것입니다. 학교가, 기업이 자신들이 원하는 인재를 한정적으로 뽑아야 하는 상황에서 인재를 가려낼 기준을 세우는 것은 불가피한 일입니다. 그러나 불이 인간에게 있어 아주 필요하다는 것을 알더라도 우리 삶을 파괴하는 화재까지 긍정할 필요는 없습니다. 관건은, 그 불을 어떻게 다룰 것이냐는 점입니다. 우리가 고민해야 할 것이 바로 이 점이지요. 과연 그 기준으로 학력이나 학벌이 적용되는 것은 타당한가에서부터 SKY 입학 및 대기업 입사를 위해 지나치게 경쟁하는 것이 ‘나’에게 행복한 일인가 혹은 나의 행복을 위한 길인가까지, 불을 다루기 위해서는 많은 것들을 생각해 봐야 합니다. 그러나 이것저것을 생각해보다가도 지배 세력의 힘은 너무나 강력하다는 것을 상기하게 됩니다. 나는 차마 용기가 없고 여건이 안 되어 행동하지 못하고, 다른 사람들은 어떤지 살펴보기도 하지만, 그들도 마찬가지인 것 같습니다. 그때부터 웬만해선 이런 사회는 쉽게 변하지 않을 것이라는 음울한 메아리가 귓가에 서성이게 됩니다. 말과 삶이 유리되고, 결국엔 말까지 변하게 되는 것을 겪게 되지요. 우리는 그렇게 ‘현명한 우울증’에 빠지게 됩니다. 냉소를 흘리면서도 어딘가 행복하지 못하고 우울한 상태에 빠져있는 것입니다. 마치 늪에 다리 한쪽을 빠뜨린 것처럼 말이지요. 게다가 지식인들 혹은 정치인들의 계몽주의는 지배 지식의 담론과 냉소주의를 타파할 만한 뚜렷한 대안을 찾지 못해 역시 무기력증과 우울증에 젖어 있습니다. 진보적인 교육 운동에 꼬리표처럼 달려 있는 빨갱이 담론, 대안학교의 재정적 어려움, 학벌주의와 같이 단번에 변화시키기엔 너무나 강력한 사회적 인식 등의 문제들이 그들을 놀리는 듯이 눈앞에 광활하게 펼쳐져 있습니다. 한때 비판적인 계몽 세력의 주축이었던 학생운동이나 비교적 강한 어조의 마르크스주의도 한물 지나간, 유별나고 이상한 ‘정치꾼들’의 모임으로 인식되고 있고 힘도 많이 약해졌습니다. 물론 촛불집회나 대자보 ‘안녕들 하십니까’ 등 새로운 형태의 활동들이 등장하긴 했지만, 이러한 움직임이 실질적인 변화를 이뤄내지 못하고 다시 냉소주의로 빠지기를 반복하는 게 아닌가 하는 우려가 여기저기서 계속 들리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이 냉소주의로부터 빠져나와 상황을 변화시킬 수 있을까요? 사실은 이것이 가능하기는 할지조차 걱정이 됩니다. 쉽게 상황이 변화될 것 같지는 않기 때문이지요. 한국인들의 행복에 관한 인식이 달라져야 입시 경쟁에 매달리지 않는 교육이 가능해질 것입니다. 사진 : 연합뉴스 한국의 교육 문제는 단순히 제도적 차원에만 머무르는 것이 아니라 한국인들의 사고방식이나 문화와도 연결되어 있습니다. 창의적인 교육이 가능하기 위해서는 권위나 질서를 중시하는 수직적 관계보다는 자유를 중시하는 수평적 관계와, 토론 문화가 바탕이 되어야 합니다. 그리고 한국인들의 행복에 관한 인식이 달라져야 입시 경쟁에 매달리지 않는 교육이 가능해질 것입니다. 한국인들은 자신의 욕망을 모르는 경우가 많습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돈, 학벌 등과 같은 타인들의 욕망으로 자기 욕망의 자리를 채웁니다. 다른 사람들이 하는 것을 따라가면 자신도 행복할 수 있으리라고 생각하는 것이지요. 교육이 출세와 성공을 위한 간판을 얻기 위한 것인 이상, 어떤 제도를 도입해도 부작용만 낳습니다. 구조적으로 다른 행복을 꿈꿀 수 있도록 여건이 마련되어야 하겠지요. 이러한 변화를 요구하는 것들은 단순히 대입 제도나 입사 시험 유형만 바꾼다고 해서 한국에 정착될 것들이 아닙니다. 제도 개혁에서부터 시작하기에는 시간이 너무나 많이 걸릴 것이고, 제도 개혁으로 모든 것을 해결하려고 하다가는 제도와, 문화 혹은 인식 사이의 괴리로 인해 부작용이 일어날 지도 모를 일이지요. 따라서 우리는 다른 방법을 모색해 봐야 합니다. 페터 슬로터다이크가 정의한 계몽주의 자체를 벗어나는 건 거의 불가능할 것입니다. 계몽주의를 벗어나려면 우리가 지금 학문 혹은 이성적인 활동이라고 일컫는 것 자체를 포기해야 할 테니까요. 저는 우리가 어떻게 사느냐를 고민함으로써 이에 대한 하나의 실마리를 얻을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우리의 존재 방식을 변화시켜보는 것이죠. 외부의 구조가 아니라 나 자신에게로 돌아와서 삶을 행한다면 달라질 수 있지 않을까요? 미셸 푸코[Michel Foucault. 1926.10.15.-1984.6.25.]는 예술작품처럼 자기(soi)를 가꾸는 존재가 된다면 권력 혹은 구조에 저항할 수 있을 것이라고 보았습니다.  다음 글에서는 푸코의 미학적·윤리적 존재에 대해 알아보며, 이러한 존재 방식을 통해 어떻게 한국의 교육을 변화시킬 수 있는지를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이인아 칼럼니스트】 http://insight.co.kr/content.php?Idx=915&Code1=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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