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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동인, 조선의 라스푸틴 (3) - 1881

1881년 4월 1일, 조선 주재 하나부사 공사는 일본 외무경에게 서한을 보냅니다. 서한 말미에 그는 당시 조선 동향과 분위기를 엿볼 수 있는 보고를 함께 올리죠. 이만손의 개항 불가 상소, 김홍집의 근신과 수신사 임명, 인천 개항 확대를 반대하며 상복을 입고 도끼 그린 종이를 등에 짊어진 채 궁궐 앞에 엎드린 남자 얘기 등등 모두 정부의 개화 정책에 반대하는 위정 척사파의 움직임에 대한 것이었죠.

그 기록 가운데에 이동인에 대한 단편적인 기록 또한 있습니다.

하나. 참모관 이동인은 근래 민영익의 집에 동거하여 매우 기세가 좋았지만, 이만손 상소 이후에 자주 걱정하여 특히 3월 초순부터 10일 전후에는 몇 차례 공사관에 와서 공사가 위태로우니 호위를 증가하라고 충고하였습니다. 그 무렵에는 같은 충고를 하는 자도 있었지만, 공사관으로서는 별다른 방법이 없었기 때문에 그대로 내버려두었습니다. 그런데 이동인은 위의 사건과 관련하여 신변이 위태롭다고 생각했는지, 3월 중순경부터 민 참판 댁을 떠나 종적을 알 수 없는 중에, 주상이 갑자기 본인을 불렀는데 도망쳐 달아나 부재하자 분노를 일으키시고 "변변치 못한 소인이 지금 형세의 어려움을 보고 헛되이 그 몸을 숨기고 자전의 계책을 삼았다. 혹시 원래 일본인인데 우리말에 통해 거짓으로 조선인이라 칭한 것이 아닌가!"라고 꾸짖으시면서부터, 조정의 백관도 일찍이 그 가볍고 말이 많음을 꾸짖고 있는 중이었기 때문에, 그의 소행을 이해하기 어렵다고 말하는 이가 많습니다. 주상께서는 더욱 역린하시어 '그는 산천에 은거한 것이 아니라 필시 원산진에 몸을 숨기고 일본으로 도망가려 할 것이다. 신속히 추포하여 오라'는 상의가 있어 잡으러 갔다고 합니다.
이만손이 올린 영남만인소. 이만손은 <조선책략>을 읽고 분개해 고종에게 이 책 주장의 불합리함을 알리는 상소를 올렸다고 합니다. 하나부사의 서신에는, 이만손이 당시 70여 세 노인으로 수백 명의 유생들을 데리고 궁궐 앞에 엎드려 무려 일주일 동안 시위를 했다고 적혀 있죠. 상소의 내용은 민씨 세력을 삭감, 인천 개항 불허, 외교 불허, 김홍집 귀국 이래 국가 규범이 바뀐 것을 책망, 무위소 개혁 등 그때까지 추진되었던 개화 정책을 모두 백지로 돌리고 김홍집을 탄핵하라는 것이었다고 합니다. 고종은 이 상소를 읽고 매우 분노했고, 민씨 측에서도 몰래 소수에게 돈을 먹여 진정시켰다고 하네요. 나중에 그는 다시 한 번 상소를 올리려다 강진으로 유배를 가게 되었고, 임오군란 이후 대원군이 집권하자 풀려났다고 합니다.

서신에서 하나부사는 이동인이 실종되었고, 그 행방을 조선 정부 측에서도 알지 못하는 듯 적었습니다. 그로부터 시간이 흘러 5월 9일, 승려 오쿠무라 엔신은 포교일기에 '밤에 총영사에게서 동인이 암살당했다는 소식을 들었다'고 적었습니다. 이동인이 암살당했다고 여긴 건 일본측 인사들뿐만이 아니어서, 5월 3일 주일영국공사관 어네스트 사토우는 자기 일기에 탁정식이 찾아와 이동인의 소식을 알려줬다고 합니다. 탁정식은 이동인이 척사파에 의해 희생당한 게 아니라면 어딘가 살아 숨어있을 것이라고 했죠. 또 고종은 대원군을 의심했다고도 말했습니다. <조선불교통사>란 기록에는 어느날 민영익의 양부 민태호가 이동인을 불러냈고, 이후 이동인의 종적이 사라졌다고 했죠. 대체 이동인에게 무슨 일이 벌어졌던 걸까요?

1881년 음력 1월 5일, 조선 정부는 이동인을 통해 일본 공사 하나부사에게 무기와 기선 구입 계획 등을 알리도록 합니다. 다만 자금이 부족해 일본에서 100만원을 빌릴 수 있을지 여부를 하나부사에게 타전하죠. 하나부사는 정부가 보증을 선다면 가능하다고 화답합니다. 이후 음력 1월 10일, 하나부사는 일곱 개 조항의 조약안을 조선 측에 제시하죠. 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

1. 일본이 타국과의 관계 중재(이른바 거중조정)
2. 부산포 절영도를 조차해 둔재소로 삼음
3. 일 군함이 조선 선박을 만나면 반드시 힘써 보호
4. 조선 선박, 사인이 외국에 나가면 그 나라 주재 일본 영사가 각국과의 정규 의거 힘써 보호
5. 조선 해육군제 확장, 공업진흥 위해 교사, 기술자가 필요할 시 일본 정부가 보응
6. 조선 군, 공업 등 기술 전수받을 사람들을 일본에 파견할 필요가 있어 선발해 보낸다면 일본 정부가 적당한 학교로 보내 열심히 교수. 소요 학자금을 본국 전수성원들과 동일하게 할 것.
7. 조선이 필요로 하는 총포, 전함 등을 일본이 구입을 주선해 일본정부가 스스로 사용하는 물품 구입가격으로 구입할 수 있게 도움.

조선 정부는 이상 7개 조항 중 2조 이외 나머지는 약간 자구수정만 해서 대부분 수용합니다. 또 그와는 별개로 일본에 신사유람단을 파견하고 아울러 포함 무기를 구입하기 위해 교섭단을 보내는 일도 차곡차곡 추진중이었죠. 일본 공사관에 공병 소위를 파견 요청해 교련병대인 별기군 창설을 도모하는 한편, 혹시나 모를 일본측 불법 점거를 차단하기 위해 절영도에 진을 설치해 방어태세를 갖추기도 했습니다. 특히 시찰단 파견 문제는 국내외 반발을 우려해 일본 측에조차 공식 통보를 하지 않고 비밀리에 추진합니다. 다만 이러한 움직임은 이동인을 통해 계속해 하나부사 공사에게 전해지죠.

이동인은 '나는 그 전권을 맡았으므로 우리 정부에서 일본 정부에 알리는 것으로 공증을 삼으려 한다. 각하 또한 도와주십시오.'라고 하였습니다. 하나부사는 '진실로 이와 같이 하면 믿기에 충분할 것이다. 그렇지만 공사는 여기 있으면서 아직 조선 정부로부터 의뢰하는 말을 한 번도 듣지 못했다. 이와 같다면 공사가 이를 도와줄 방법이 없다. 공사가 만약 공식적인 보고를 결여하면 일본 정부가 믿으려 해도 믿을 수 없다.'라고 하였습니다. 이동인은 '반드시 강수관이 의뢰할 것입니다. 다만 이 몇 가지 일은 모두 손바닥 안의 비밀스런 일로 우리 당의 몇 명 외에는 절대로 아는 이가 없다. 망령되이 타인에게 알리기 어렵기 때문에 우리들이 출발한 후가 아니면 강수관도 이를 말하기를 꺼려 미정이라고 하면서 말하지 않는다. 아마 2품, 3품의 귀인 7,8명일 것이다.(...)'

이동인은 그 후 몇 차례 더 일본 공사관을 찾아와 신사유람단으로 파견될 인물 구성이나 성향 등을 알려주다가 음력 1월 말이 되어서야 비로소 출발한다고 알려옵니다. 이때 갑자기 공사관을 찾은 이동인이 순도 100%은 60냥과 호피 20매를 가져와 여비로 쓸 물품이라며 하나부사 공사가 부산까지 옮겨달라고 의뢰하죠. 하나부사는 늦어도 지장없다면 처리해주겠다고 하고 맡습니다. 하지만 이후에도 이동인은 공무 사정으로 지연된다고 하면서 한참을 더 서울에 머물렀죠. 또 돈을 빌려 총포, 군함 등을 사는 일이 내부 반대로 처리가 지연되고 있단 사실도 은연중에 알립니다. 하나부사는 이동인이 일본과의 관세 교섭 준비 때문에 떠나지 못하는 걸로 짐작하죠.

그러던 중 3월 15일 전후로 이동인은 흔적도 없이 사라집니다. 일본측, 개화당, 조선 정부, 영국 등 이동인과 안면이 있던 그 어느 인물도 그가 어디로 가서 어떻게 자취를 감췄는지 알 수 없게 되죠.

위에서 잠시 언급했지만 몇몇 의심가는 정황은 있습니다.

1. 이동인이 본래 일본인 첩자이다
이동인이 사라지자 고종이 화를 내며 그가 본래 일본인이 아니냐고 했죠. 또 지난번 소개한 <나암수록>에선 이동인은 본래 서양술 하는 왜승이라고 했죠. 그의 출신이나 기록에 등장하기 전 그의 이력 등을 전혀 알 수 없기에 이같은 의문을 더하는 것 같습니다. 정말 그는 임무를 마치고 아무도 모르게 사라져서 일본으로 되돌아간 걸까요?

2. 대원군 측 인물이 살해했다.
이동인이 고종의 밀명을 받고 일본으로 건너가 청국 공사 하여장을 만나고 돌아왔을 때, 유대치가 이동인에게 대원군을 주의하라고 경고했습니다. 그가 이동인을 매국노로 규정해 체포하려 한다면서요. 당시 대원군은 권좌에선 물러났지만, 여전히 정부 안팎에서 영향력을 행사했습니다. 심지어 하나부사가 파악하길 조정 내 개화파는 소수이고, 나머지는 전부 척사파로 대원군이 그 수장이라고까지 했으니까요. 1881년 8월 대원군 추종 세력이 대원군의 서장자인 이재선을 보위해 군사 정변을 일으키려다가 발각되는 일도 있었고, 결국 1882년 6월 임오군란으로 대원군이 잠시 재집권하기도 했죠. 탁정식도 이동인이 대원군 혹은 김홍집과 이조년 두 사람에게 모살당했다고 추정했습니다.

3. 개화파 내 분열로 살해당했다.
탁정식은 당시 개화파 내부에 의견 차이가 있었다고 했습니다. 특히 이동인은 그 성격 때문에 남의 말을 듣지 않고 자기 멋대로 결정해 처리하는 것이 심해서 걸핏하면 김홍집을 능가하려 했다고 했죠. 두 사람이 견해 차이를 보인 것은 외교 문제였던 모양입니다. 김홍집과 이조년은 <조선책략>에서 보듯 일, 청의 의견도 있으니 미국이나 독일과 결속해야 한다고 주장했지만, 이동인은 무슨 이유에선지 영국과 친하여야 한다고 끈질기게 주장했다는 거죠. 심지어 이동인의 주장은 어느 누구에게도 지지받지 못한 모양입니다. 탁정식은 이것 때문에 이동인이 영국인과 사통한 자가 아닌가 김홍집의 의심을 받았다고 했습니다. 일본에 있을 때 그가 영국인과 친하게 교제한 이력을 문제삼은 거죠.

이외에도 일본 등 외국에서 이동인을 암살했다고 하는 주장도 있는 모양입니다. 하나 확실한 건 그가 평소 적이 많았고, 남 눈치도 보지 않고 제가 옳다고 믿는 행동을 하는 인물이었다는 점입니다. 그는 조선이 자력으로 문명 개화를 이룰 수 없다고 믿었고, 고종이 개화 정책을 추진하는 와중에도 일본과 영국 등에 접촉해 군함과 병사들로 위협해 강제로 문호를 열어야 한다고 했죠. 친교 관계를 이용해 외국 외교관들과 자주 마나 조선 내정에 대한 정보를 주었고, 특히 일본 공사와 친밀했습니다.

만약 이동인이 갑자기 자취를 감추지 않고 신사 유람단 파견 및 조미수호조약 채결에 기여했다면 어땠을까요? 어쩌면 그는 고종의 신임을 받아 더 많은 외교 및 개화 정책에 개입했을지 모릅니다. 그때는 정말 러시아의 라스푸틴같은 인물이 되어 더 선명한 족적을 남겼을수도 있죠. 어쩌면 외세의 개입을 방조 혹은 찬동해 이완용보다 더한 매국노가 되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그 예상은 누구도 하기 어렵겠죠.

이동인의 짧은 행적을 보는 내내 이것이 마치 1884년의 갑신정변으로 한순간 정권을 잡는 개화파의 운명을 상징하는 듯한 착각도 들었습니다. 이동인과 관계를 맺었던 김옥균, 박영효 등 개화당은 김홍집 등 온건 개화파의 정책에 반발해 그동안 포섭한 각계각층 인사를 총동원해 정변을 일으키고 고종을 옹립해 자신들의 정책을 펼치죠. 하지만 불과 3일만에 청군이 개입하면서 개혁은 실패로 돌아갑니다. 거기다 이들의 정변을 계기로 청군과 일본군이 조선에 주둔하게 되면서 앞으로 일어날 청일전쟁의 불씨가 형성되죠. 이동인이 고종의 신임을 얻은 그 짧은 순간은 묘하게 김옥균의 3일 천하를 상기시킵니다. 결국 실패할 수밖에 없는 혁명이란 부분이 둘의 연관성을 떠올리게 하는 걸까요?
이동인의 사진. 구한말 근대 문명 개화에 눈뜬 그와 같은 개화승들은 이동인 외에도 몇 명이 더 있었던 듯합니다. 하지만 이동인처럼 뚜렷하게 인상을 남긴 인물은 또 없죠. 각국 외교 인사들과 교류하며 친분을 쌓고 견문을 익힌 인물이었지만, 한편으로는 조선시대 천하게 여겼던 승려란 신분 탓에 국가 전면에 나설 수는 없는 한계도 있었습니다. 앞서 적었듯 의심스러운 정체와 성향, 독불장군 식의 성격도 문제가 되고요. 실제로는 어떤 인물이었을지, 여러모로 상상해볼 수 있는 여지가 많아 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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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조 -  할아버지 영조대왕께 왕좌를 물려 받은지 4년, 할아버지 3년 상이 끝나서 그런지  슬슬 대신들이 신경 긁네... 대신들 - 전하! 오늘 올라온 상소문 입니다! 어서 살펴보시고 명을 내려 주십시오! 이 상소는 무엇이오? 내 분명 이 안건에 관한 결정을 이미 하였거늘! 임금의 잘못이 있다면 쓴 소리를 하는 것이 신하의 도리! 부디 통촉하여 주시어... 쓴소리? 잘못? 좋소! 그럼 다시 써 오시게 네? 아니, 거기 이미 상소문이 있는데 왜 다시 써오라는 말씀 이신지... 문장이 다 틀렸어 네? 문장이 다 틀려요? 푸흡! ㅋㅋ 이거 누가 적은 상소문임?? 시경에서 취했다는 부분의 글은 여기 쓰는게 아닌데? 주자의 뜻 위에 만들어진 나라에서 경전의 말을 틀리다니ㅋㅋ 누구임?? ㅋㅋ ..... ㅋㅋㅋ 경전을 공부하여 나라를 운영해야 하는 자들의 수준이 이러니 뭘 하겠냐? 오늘은 공부나 하자 정승들 밑으로 점심 시간 지나고 경연이나 참여하도록! (하씨...  개 쪽팔리네) (경연 중) 정조 - 아니지! 해화만맥 이라 함은 만가지 복을 받을 좋은일 한가지를 말하는데 만가지 일이라니! 경복궁 이름 지을 때도 취한 경전 구절 아닌가! 대신들은 유학자란 자들이 이것도 모르나? 대신들 - ..... 아니 왜들 벙어리 처럼 있으시오ㅋㅋ 임금이 가르침을 받는 자리인 경연인데 말이 없으시면 어쩌란 말이오ㅋㅋ (....이 새키 티베깅 쩌네) ㅋㅋㅋ 거참! 말들 없으시니 점심 경연은 여기까지 하고 4시간 뒤 저녁 경연에서 봅시다. (또 한다고??) 전하! 공부의 뜻이 있으신건 좋으시지만 건강을 해칠까 두려워.... 아냐 아냐 나 건강해 대신들이 공부해서 올 동안 활쏘기랑 무예나 연습하고 있을께 임금이 무예를 중시 하시다니! 무예는 잡기에 해당하는..... 경연과는 다르신 언변이시구만. 아까 경연에서도 말을 그리 잘하지 그랬어? ..... (~~~~~얼마 후~~~~~) 이번 안건은 통과하면 안되는데 혹시 반대 상소문 올리실분? (눈치 게임 시작) 진짜 이거 통과되면 안돼요! 상소 적으실분 없어요? (나이 들었다고 경연 덜 끌려가는 정승들) 적었다가 문장이라도 하나 틀리면 개쪽 당하고 경연가서 갈굼 당하는데 누가 나서겠나.... 그냥 포기하고 편해 지게나 .... 우리 신진 사대부! 자존심이 있지 그리는 못한다! 다들 모여 봐! 개 쩌는 상소문 간다!!! ㅋㅋㅋㅋㅋㅋ 야, 이 상소문 적은 사람 누구냐ㅋㅋㅋ 이 놈 주자학 경전을 공부한거 맞냐ㅋㅋㅋ (....ㅈ됐네) 점심 시간 까지 정승 밑으로 경연장에 모여 있어라 주자학 참교육 간다! (ㅠㅠ 무서워서 뭘 하질 못하겠네) ㅋㅋㅋ (출처) 아 상소 올리고 싶으면 공부하고 오라구
어마어마하게 뒤끝 쩔어줬던 미군 장교.history
1905년 상반기  일본, 요코스카시 장갑순양함 USS 신시내티가 일본에 잠시 정박해 있는 동안 승조원들이 일본 관광을 하고 있었고, 그 중 한 소위가 가마쿠라 불상을 구경하고 있었다. "오, 불상 꽤나 멋있네."  "이 지갑은 이제 제 겁니다!"  그런데 불상에 정신이 팔린 그의 지갑을 어느 소매치기가 훔쳐갔다.  "야, 야 이 새끼야 내 지갑 내놔, 어이 거기 순사님 저 새끼 좀 잡아봐요!"  "귀찮은데스" "이 시발년이" 그렇게 그 소위는 경찰을 포함해 다수의 현지인들에게 도움을 요청했으나 그 누구도 협조해주지 않았고 결국 지갑을 잃어버리고 말았다.  그렇게 그는 두 번 다시 일본은 쳐다보지도 않기로 결심한다.  애석하게도 일본인들이 그렇게 좆같이 취급한 소위는 바로 어니스트 킹 (Ernest J. King) 2차 대전 당시 미 해군 총사령관이자 동시에(!) 해군참모총장이 되시는 리히, 니미츠, 홀시와 함께 유일한 미 해군 원수가 되실 몸이었다. 킹은 이 사건 이후로 일본에 대해 악감정을 많이 품고 내내 일본 욕을 해댔으며, 미 해군이 일본 본토 공격에 찬성하자 태평양함대 최고사령관 체스터 니미츠 제독은  "이제 40년 전에 잃어버린 지갑의 복수를 하러 가시겠군" 이라고 농담을 날렸다고 한다. 출처 뒤끝 쩌네 ㅋㅋㅋ 하지만 적이 같으므로 나는 참 싱글벙글 ㅋㅋㅋㅋ 이거 보니까 또 생각나는 현대인 내한했을 때 공항에서 어떤 팬이 싸인받으려고 가져온 매직으로 노엘이 아끼는 자켓에 그만... 하지만 노엘은 한국을 매우 사랑하지 싱글벙글
로마인들은 무엇을 보고 웃었을까?
주말 특집, 로마인들은 뭘 보고 웃었을까요? 당연히 로마인들도 유머를 즐겼다. 카이사르(짤방도 아래 영상에서 가져왔다)가 대폭소를 할 때가 마냥 유머스러운 상황은 아니었겠지만 말이다. (참고로 아스테릭스의 저자들은 드골을 카이사르에 빗대 풍자했었다. 참조 1) https://youtu.be/NOvBBqDkQbs 여기에 대해 로마 희곡 전공자가 잘 설명한 글을 발견했다(참조 2). 플라우투스(Titus Maccius Plautus, BC254-BC184)와 테렌티우스(Publius Terentius Afer, BC195/185-BC159)의 희곡을 바탕으로, 로마 공화국 시절(카이사르 이전을 의미한다) 희곡에서 볼 수 있는 4가지 공식이 현대의 유머에도 통한다는 이야기이다. 한 번 들어가 봅시다. 첫 번째, 모름지기 모든 것은 이름부터이다. 이름부터 추측하기 쉬운 캐릭터가, 역시나 스테레오타입대로 행동하는 것이다. 사실 우리가 그리스/로마식 이름에 익숙하지 않아서 망정이지, 직역하면 웃기는 이름이 한 두 가지가 아니며 고전으로 갈수록 그게 더 심했다. 물론 지금도 없지는 않다. 가령 포켓몬스터를 보면 주인공 이름 사토시는 똑똑하다의 의미이고, 한국어판 이름인 한지우는 똑똑한(智) 친구(友)의 의미로 넣었다. 미국판은? Ash Ketchum인데, 이게 “캐치”의 의미가 있다. Catch’em을 저렇게 쓴 것이다. 두 번째는 펀치라인이다. 뭔가 궤가 안 맞는 문장과 이어지는 어색한 정적, 뒤이은 해설이 주는 유머 감각이다. 플라우투스의 희곡에 나오는 한 주인공이 청중에게, “musca est meus pater”라 말하는 장면이 나온다. “내 아버지는 파리라오.” 그리고 잠시의 정적이 흐른 다음, “아버지로부터 아무 것도 숨길 수 없기 때문이지” 하는 식이다. 내가 상당히 좋아하는 코메디언인 캐서린 라이언의 공연(참조 3)도 봅시다. 사실 캐서린 라이언은 자기가 공연에서 했던 이야기들을 집대성하여 넷플릭스 드라마(참조 4)를 만들기도 했는데 다음 시즌이 나올지는 잘 모르겠다. 구성은 같다. 도발적인 말을 먼저 꺼내고, 그걸 서서히 풀어가면서 청중을 웃기는 방식이다. 세 번째는 게임이다. 두 번째에 해당하는 펀치라인이 계속 반복되면서 게임처럼 흘러가는 유머이다. Key & Peele의 이 에피소드를 봅시다(참조 5)? 선생이 출석을 부르는데 계속 통상적이지 않은 발음으로 이름을 부르고, 그 대상은 모두 다 중산층 백인 학생들이다. 이 의도적인 이름 잘못 부르기는 계속 이어지고, 학생들은 이름 발음을 고쳐주려 하지만 선생은 분노한다. 그런데 맨 마지막 흑인 학생만은 이름을 제대로 부르면서 끝난다. 다만 아무래도 제일 눈에 띄는 것이 이 네 번째, 제4의 벽 깨기인데, 우리나라 마당놀이에서 보듯, 청중과 커넥션을 유지하면서 극을 진행하는 구조다. 코메디는 아니지만 BBC/넷플릭스 드라마, 하우스 오브 카드(참조 6)을 보셨다면 알아차리실 것이다. 아마 이 구조를 적극적으로 차용한 현대적인 코메디는 BBC/아마존의 Fleabag이 아닐까(참조 7)? 따라서 결론은, 로마인들의 코메디 또한 현대의 코메디와 별 다를 것이 없다입니다? 물론 2천년의 세월 때문에 더 이상 용납되지 않는 내용도 많이 갖고 있다. 로마 시대의 희극 스폰서 절대 다수가 귀족 남성들이었기 때문에 그들의 시각에 치우친 것은 요즘 시대에 받아들이기 힘들 것이다. 귀족 남성들이 희극의 주요 스폰서였음에도 불구하고 당시 언제나 농담의 대상이었던, 부자이지만 나이가 많고 우둔한 로남(…)들이 스스로를 심각하게 여기는 건 예나 지금이나 아주 잘 먹힐 것 같다. 무대에서, 시장에서 그런 게 먹힌다는 걸 모두들 알고 있었으니까 말이다. -------------- 참조 1. 아스테릭스(2021년 6월 5일): https://www.vingle.net/posts/3769061 2. NO LAUGHING MATTER? WHAT THE ROMANS FOUND FUNNY : https://antigonejournal.com/2021/08/what-romans-found-funny/ 3. Katherine Ryan Live at the Apollo (2017년 12월 31일): https://youtu.be/FybyRaScHrI?t=105 4. 더체스 다이어리 : https://www.netflix.com/kr/title/80223040 5. Substitute Teacher - Key & Peele(2012년 10월 18일): https://youtu.be/Dd7FixvoKBw 6. 모두 프랜시스 언더우드가 청중에게 이야기하는 장면이다. Best of Kevin Spacey "House Of Cards" : https://youtu.be/xgsQ1-oOZkg 사실 BBC판도 동일하다. 프랜시스 어콰트가 청중을 싱긋 바라보는 장면을 보시라. https://youtu.be/UL9iyYIb_e8 7. 두 시즌동안 우리의 주인공은 제4의 벽을 232회나 깨뜨렸다! Literally Just Every Time Fleabag Looked At Us | Prime Video(2019년 8월 21일): https://youtu.be/YNkKlgzvOHg
숙종이 내가 돼지냐며 송편을 내동댕이 친 이유.txt
숙종은 평소에 신분을 가린 채 궁궐 바깥에 나가 민심을 살피는 것을 즐겨 했는데 그 일화 중 하나입니다. 어느 날 숙종은 밤에 미행으로 남산골을 순시하였다. 밤이 깊은데 어디서 낭랑하게 글 읽는 소리가 나서 소리를 쫓아가 보니 어느 오막살이집에서 흘러나오고 있었다. 들창 사이로 안을 엿보니 젊은 남편은 글을 읽고 새댁은 등잔 밑에서 바느질을 하고 있었다. 젊은 선비 내외의 모습은 비록 가난하지만 귀엽고 흐뭇해 보였다. 얼마쯤 지나 젊은 남편은 책을 덮으며 속이 출출하다고 하였다. 그러자 새댁이 조용히 일어나 벽장 속에서 주발 뚜껑에 담은 송편 두 개를 꺼내 놓으며 드시라고 한다. 남편은 반가워하며 얼른 한 개를 집어먹더니 두 개째 집어 들었다. 그러자 임금은 괘씸한 생각이 들었다. '시장하기는 마찬가지 일 텐데 어찌 혼자서 두 개를 다 먹나?' '인정머리 없는 놈'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웬걸 남편이 송편 하나를 입에 물고 새댁의 입에 넣어주는데 서로 사양하며 즐기는 것이었다. 숙종은 부부의 애정에 감동하며 부러운 마음으로 궁으로 돌아왔다. 다음날 나인을 불러 송편이 먹고 싶다고 하자 수라간이 온통 난리를 치르며 큰 수라상이 들어오고 큰 푼주에 송편을 높다랗게 괴어 전후좌우 옹위를 받으며 요란스럽게 들고 오지 않는가... 눈앞에 아른거리던 어젯밤의 아름다운 광경은 깨어져 버리고 울컥 화가 치민 왕은 "송편 한 푼주를 먹으라니 내가 돼지야?!" 하면서 송편 그릇을 뒤집어엎으며 내동댕이 쳤다. 모두 왕의 심정을 알리 없어 의아해 할 뿐이었지만 그 후 내막을 알게 되고 "푼주의 송편이 주발 뚜껑 송편의 맛보다 못하다"라는 속담이 생겨났다고 한다. 근데 이런데다 담아주니 나라도 씅날듯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모야 성질머리 보소 ㅋㅋㅋㅋㅋㅋㅋㅋ 근데 저 사이즈면 ㅅㅂ 마을잔치 아니냨ㅋㅋㅋ 내가 수라간 궁녀였어도 주상전하께 송편을 대령하라~~~~~~~~~~~~~~ 해서 허겁지겁 다들 모여앉아 500개정도 만들고 그중에 제일 예쁜놈 2~30개만 올린건데 그걸 걷어차시네 ㅇㅇ 현타 오지게 올듯 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