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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이 수백년동안 눈독들였던 우리나라 문화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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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쪽바리 쐐이들‥😤
저거 만들때 얼마나 정성 들였는지 알면 달라 소리가 쉽게 안나올텐데 몰염치한건 예나 지금이나 똑같았네
지들것이 아닌데 왜 눈독을 들이고 탐을내? 어이없어 암튼 상식이 진짜 ㄹㅇ 없어
매일 기록 갱신중인 이순신장군님 어록
생각이 없고 지들만 아는건 예나 지금이나 똑같네 어쩜그리 변화가 없냐.. 아니 발전이 없는거냐? 인간도 발전을 해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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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을 질투한 일본의 역대급 사기극
70만년 전 구석기인에게 주먹도끼란 최첨단 도구 주먹도끼는 하나를 가지고 다양한 용도로 사용이 가능한데 1. 가죽 찢기 2. 사냥 3. 나무 가공 등등등등 오늘날로 따지면 맥가이버 칼과 같음 즉 당시 기술의 집합체가 주먹도끼라는 것 그런데 이 주먹도끼가 유럽, 북아프리카, 중동에서 출토됨 동아시아에서는 발굴이 안됐었음 이것이 정설로 내려오고 있었음 여자친구가 우리나라 사람이였음 상미씨! 고고학자였던 그렉고웬은 데이트 중 발견한 돌을 보고 "원래 동아시아에는 주먹도끼가 없는데 내가 한반도에서 발견한 것 같다" 그래서 정밀검사를 요청함 그동안 쓰여졌던 논문도 다 바꿔야 하는 동아시아권의 역사를 뒤바꾸는 위대한 사건이 됨 그렉과 상미씨는 결혼했다고 함♥ 다니던 회사까지 때려치우고 구석기 유물을 찾으러 다님 고고학 전공도 아님 이 시간은 시기했던게 음~~ 이쯤에서 구석기시대인들이 살았을 것 같다 해서 파보면 뭔가 쑥하고 나옴 그래서 80년대 초반에 일본의 구석기시대 역사를 널리알리게 됨 그러나 오랜 기간 땅에 묻혀있었으면 축축해야 하는데 냄새가 나~ 느낌이 있어~ 자기자랑하기 바빴음 그래서 기자는 이 이후에 국제 고고학 학술대회가 있었는데 겨우 참석한 학술제에서도 꿀먹은 벙어리로 있었다고 함 여기서 우리가 알 수 있는건 70만년전의 이야기가 국격과 이어지는 문제로 전쟁처럼 이어지고 있다는 것 관심좀 주세요.. 귀찮으실까봐 댓글 달아달라고 못하는데 클립과 하트 정말 좋아해요...♥
시대에 비해 너무나도 강력했던 무기
맥심 건 19세기 말 1883년에 개발된 최초의 자동발사 기관총 물론 그전에 개틀링 기관총이 있긴 했지만 수동으로 총열을 돌려야 발포되는 불편함이 있었고 자동으로 돌리려면 타 장비가 필수적이었음 이를 극복하고 완전히 자동으로 발사되는 기관총의 시조가 이 맥심 건 250발의 탄띠와 500rpm , .303 british(7.7mmx56mm) 의 힘으로 2발이상 맞는순간 전투불능까지 이어지는 흉악한 무기였음 대신 27kg이나 하기 때문에 보통은 다가오는 적들을 그야말로 갈아버리는데 쓰였음 그당시 동일시기에 쓰여진 총들이 헨리 라이플같은 래버액션이나 마티니-헨리 소총같은 단발형이었음을 생각하면 이론상 1분에 500발씩 때려박는 미친 총 앞에서는 나설 수가 없었지 이를 대표적으로 보여준게 바로 마타벨레족과 영국군의 전쟁임 영국의 식민지였던 남아프리카, 그중 마테벨레족은 8만명의 창병과 2만명의 마티니-헨리 소총으로 무장한 전사들로 맥심건으로 수비하던 영국군을 공격하기 시작했음 이때 영국군은 고작 400명이 사망했지만 마테벨레족은 무려 5만명이 사망하면서 완전히 괴멸돼버림 물론 마테벨레족이 헨리-마티니 소총을 잘 활용하지 못한 탓도 있지만(가늠쇠의 기능을 아예 모르고 있었음) 1:125의 비율이라는 처참한 비율로 완전히 갈려나가버렸음 또한 영국의 식민시였던 수단에서 일어난 마흐디 전쟁에서도 마흐디군이 약 5만명의 병사들로 공격을 감행했지만 맥심건 및 근대화된 무기로 단련된 연합군에게 상대도 안됐음 영국군은 47명이 사망하고 마흐디군은 1만명이 사망하며 1:200이라는 미친비율로 완전히 영국이 압도해버림 이를 본 서구열강과 일본도 맥심 건을 따라 기관총을 개발하고 독일의 MG08 , 러시아의 PM M1910 , 맥심-토카레프 , 빅커스 기관총, 일본의 호치키스 M1897등 파생형들이 늘어나게 됨 맥심건의 의의는 기존의 식민지-서구열강의 전쟁에서 점차 보급된 근대화 무기로 서구열강에 대해 저항하던 식민지 세력을 완전히 묻어버리게 만든 무기라고 볼 수 있음 기본적으로 이게 있는 한 전진할 수가 없었으니... 식민지 저항 세력들은 이후 완전히 전멸했지만 이제 진짜 문제는 이 총이 유럽인들끼리 싸우게 되면서 발생함 바로 세계1차대전임 세계 1차대전이 터지고 보병들의 전투의 중심은 바로 '병사 개개인의 강력한 화력'이었음 강력한 맥심건과 점점 발달한 무기등으로 인해 서로가 화력이 너무 강해진탓에 병사들이 앞으로 전진 할 수가 없었음 왜냐? 돌격하는 순간 갈려나가니까 그 때문에 결국 지옥과도 같은 참호전이 시작됨 참호전이 뭐냐? 서로 참호를 파고, 사전포격이 끝나면, 일제 돌격하는 전술임 이 구멍들이 다 사전포격의 흔적들임 사전포격이 며칠동안 이뤄지고(이 당시는 정밀한 포격이 불가능했기 때문에 사실상 아군참호 앞을 싹 갈아버리는 방식을 사용함) 그 후 참호에 숨어있던 병사들이 일제히 돌격하는 방식이 쓰였지만 막는 쪽에서도 며칠동안 참호 속에서 폭격을 버티면서 상대 병사들이 돌격해오면 빠르게 중기관총을 배치해서 이를 막아내야 했음 그리고 이걸 막아내는데 성공하면 그대로 다시 막던 쪽에서 일제히 돌격하는거지 이 지랄같은 전쟁을 무려 4년을 해야했음 며칠동안 머리위로 포격이 떨어지고 돌격하던 사람들이 눈앞에서 갈려나가는걸 보고 전우가 총맞아 참호속으로 굴러떨어지는걸 4년을 봐야했다는 말임 심지어 땅을 파서 만든 참호기에 당연히 위생상태가 좋을리 없어서 쥐 벼룩 등이 창궐하고 포격으로 개박살난 땅에 비라도 오면 물난리가 나는데다 포격때문에 물자배송도 어려워서 굶는등 그냥 생지옥이었음 결국 참호전을 돌파하기 위해 곡사포와 박격포, 공군, 독가스 ,전차등이 개발되고 병사 개개인의 화력보다 전술적 타격이 중요해짐에 따라 그제서야 참호전은 역사속으로 사라지게 됨 참호전의 중심이 수비에 있었다는걸 생각하면 기관총이 얼마나 무시무시한 무기였는지 짐작이 갈거임 개발자인 하이럴 맥심은 맥심 건을 개발하면서 '전쟁을 하지 못하게 할 무기'를 위함이라고 말했음 이는 상호확증파괴에 대한 예언이라고 볼 수 있음 이런 상호확증파괴 이론은 결국 핵무기 까지 가서야 효과를 발휘했지만 세계1차대전까지 수만명의 목숨을 앗아간 맥심건을 생각하면 다이너마이트의 개발자 노벨을 떠올리게 하는 참 씁슬해지는 인물이라 볼 수 있다 물론 하이럴 맥심은 영국인임 일단 19세기에 무슨일이던 사고나면 영국놈들이다 이 싯팔 (출처) 1. 군인이 많이 죽는다. 어떻게 줄일 수 있을까? 2. 군인 1명이 총알을 단시간에 많이 쏠 수 있으면 군인을 적게 투입해도 된다 3. 군인이 적게 죽는다 이 논리로 만든거지만 물론 군대는 더 커지고 화력만 더 세져서 결과적으론 정 반대 됐음 저런
오프너는 누가 개발했을까?
안녕하세요~ 오늘은 술에서 빠질 수 없는 '오프너'에 대해서 얘기해볼까 하는데요. 와인, 맥주, 위스키 등 우리가 술을 구매하면서 한번쯤 ‘오프너’를 접하게 될 겁니다. 우리에게 오프너는 술을 사면 그냥 선물로 주는 거, 혹은 마트에서 1 만원 정도에 살 수 있는 물건으로 생각되는데요. 이렇듯, 오프너는 우리에게 너무나 흔하고 친숙한 물건이지만, 연말 가족 파티 때 오프너를 사용하면서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어요. ‘오프너는 누가 발명한거지?’ 그때 생각해봐도 누가 만들었는지 어떻게 만들었는지 기억이 안나더라고요. 오프너는 다양한 모양으로 존재하지만, 오늘은 코르크 마캐를 오픈하는 ‘와인 오프너’라고 불리우는 코르크 스크루 오프너를 중심으로 얘기해보겠습니다. 모든 것에 시초는 항상 ‘썰’로 시작하듯 아직까지 누가 언제 어디서 어떻게 ‘오프너’를 발명했는지에 대한 자료가 명확하지 않습니다. 현재 문서로 기록되어 있는 것 중 가장 현대 시기에 남아있는 기록에 따르면 영국의 사무엘 헨쉘(Samuel Henshall)이라는 사람이 1795년에 최초로 코르크 스크루 특허를 낸 기록이 존재합니다. 해당 코르크는 특이하게 스크루가 너무 깊게 들어가지 않도록 제한하는 동전 모양의 철판이 덧대어져 있고, 옆에 코르크 가루를 털어낼 수 있는 솔이 붙어 있는 것이 특징인데요. 생각보다 디테일이 가득한 디자인이 눈에 띠었습니다. 현재 적지 않는 사람들은 이것이 세계 최초 현대 코르크 오프너라고 말합니다. 그래서 그런지 런던 교회의 위치하고 있는 사무엘 헨쉘(Samuel Henshall) 묘비에는 세계 최초로 코르크스크루를 개발한 사람이라고 써져 있습니다. 비록, 당시 특허 인식이 부족해 특허 비용도 얼마 못 받아 편안한 인생을 보낸 건 아니지만 지금까지도 세계 코르크스크루 중독자 연합(International Correspondence of Corkscrew Addicts, ICCA)에서는 몇 년에 한 번씩 Samuel Henshall의 무덤에 모여 목사 복장을 하고, 코르크스크루를 들고 “사람의 마음을 기쁘게 하는 포도주(Wine that maketh glad the heart of man, 시편 104장 15절)”라는 구절을 읊는다고 한다고 합니다. 다양한 오프너의 디자인 그리고 당시 유럽 특허 법에 제한을 받지 않는 미국을 중심으로 Henshall 최초의 스크루가 등장한 직후부터 수많은 개선을 거치거나 자신만의 아이디어를 적극 활용한 스크루가 등장했습니다. 물론, 미국뿐만 아니라 영국 독일 등 유럽 각지에서도 개선을 하고 특정 병에 특화된 오프너를 발명하기도 했습니다. 조심스럽게 오픈할 때 쓰이는 일명 '날개형 오프너' 1888년 영국 Al Heeley는 날개형 코르크 오프너를 발명했으며, 1981년에는 토끼형 코르크 오프너가 나오기도 했죠. 오프너가 이런 발전 과정을 통해서 자연스럽게 유리병의 발전과 표준화도 이루어졌습니다. 물론 현재는 코르크 마개, 크라운 캡 등 정말 다양한 방식으로 유리병을 밀봉하는데요. 이에 따라서 다양한 기능을 갖춘 오프너들이 세상에 모습을 드러냈습니다. 우리에게는 너무나 익숙하고 매번 다양한 ‘뚜껑’을 열어주던 ‘오프너’, 특히 코르크가 부서질 까봐 항상 조심스럽게 코르크를 빼냈었는데요. 다음에는 코르크를 오픈하면서 사무엘 헨쉘(Samuel Henshall)을 기억해보는 것은 어떨까요?
무장집안에서 태어난 정치력 만렙 아들 = 태종 이방원
아들 많은 무장집의 다섯째 아들 동복형제 중 실질적 막내 이성계 아들은 다 무장의 피를 이어서인지  줄줄히 아버지를 따라 무장을 누볐음  다섯번째 아들 이방원만이 고려과거 급제 출신   이성계는 이방원이 문과 급제자인게 큰 자랑이었다고 해 무려 17살에 7등 [태조 이성계 어진] 거두절미하고 이방원은 상황판단 + 결단력 + 포섭하는 능력에 월등함 보통 결단력과 포섭력은 둘 중 하나를 갖기 마련인데 이방원은 둘 다 잘했음 예를 들어 정몽주에 대한 일 [정몽주] 이방원의 상황판단:  -정몽주는 포섭 당할 인물이 아니다  -자신은 다섯번째 아들이다 결단: -드러내놓고 머리를 침  [개성 선죽교] 이게 잔인해보일지는 몰라도 다른 어떤 대안보다도 효율적으로 일을 해낸 것임  실제 정몽주는 죽는 와중에도 돌아서지 않았으니까 회유될만한 인물이 아닌 거 맞았음 = 상황판단 정확  개국시기에 회유되지 않는 사람을 기다리는 것처럼 무용한 일이 없음  시간이 흐르면 그 사람을 구심점으로 사람이 모이고 더 큰 피를 흘려야만 막을 수 있게 됨 [꼬리자르기] 이방원은 자신이 다섯번째 아들인 걸 알아서 장기말을 자처함.  (왜 대놓고 했을까? 조용히 자객을 보내면 아버지가 의심받으니 아예 드러내고 단독 소행으로 감) 만약 형이 그랬다면 차기 통치자에게 흠결이 생김 하지만 다섯번째 아들은 꼬리자르기가 됨 등극할 아버지에게도, 차기 군주에게도 크게 누가 되지 않을 수 있음.  실제로 이일은 이방원이 이성계의 눈 밖에 나면서 일이 일단락됨. 대조되는 사례를 보면 더 명확함 비슷한 시기 명나라 영락제는 방효유를 끝까지 회유하려다가 실패했거든  그러자 이미 소식자체가 거대해졌고 그냥 한사람 죽이는 걸로는 될 일이 아니었음  -> 방효유의 9족과, 10족을 죽임 Q: 친인척 9족은 알겠는데 10족은 뭐야?  A: 없는 개념을 만들어 죽인 것임   알고지낸 사람, 동문, 스승, 친구 이런 사람들 10족이라면서 처형해버린거.   불필요한 피를 엄청 흘렸지 선죽교까지만 해도 형들에게 세자자리를 줬으면 이방원은 수긍하고 안 나섰을 거야 척살도 자기가 전면에 섰잖아. 형을 내세우면 형이 나가리 되었겠지. 그럼 본인에게 기회가 생기는데 그런식으로 하진 않았어.  여기서 이성계와 정도전의 패착 - 이복동생이었던 어린 이방석에게 세자자리를 줌 이방원에게는 명분이 생겼고 이걸 안 놓침 왕자의 난 이지란 : 이성계 측근이지만 방관했음 알다시피 이성계는 명장이고 측근이 전장 누빈 장수들임 당시 이성계 측근이 기를 쓰고 방석이 편이 들었다면 승부는 모를 일이지 사실 이방원은 선죽교 사건이후로 경계를 받아서 권력 아사 직전이었음 근데도 성공한 이유는 이성계 최측근들이 이방원 저러는거에 설득되어 버린거야 이지란은 정말 이성계 최즉근임. 이성계 의동생이었고 실제 이방원이 숙부라고 할 정도로.  -> 포섭당함.   !도모를 같이 했던 건 아님!   하지만 왕자의 난 와중에 내 편 들어달라고 설득이 된거야. 이방원을 막지 않고 이방석을 도와주지 않도록 했단 거지   이성계가 이거 알고 상심이 컸다고 함  자기 의형제인데 자기말보다 << 이방원말에 설득  이방원이 무서운 부분은 오히려 저런 부분임  아버지의 최측근이라면 당연히 아버지 말을 따를것 같지만 이방원 말을 들어줬고  1차 왕자의 난에서 이복동생을 죽였지만   2차 왕자의 난을 겪었어도 동복형제는 죽이지 않았어. 이 선을 계산하고 고대로 실행하는게 기가 막힘 오른쪽 정도전 또 정도전 제거하면서 회유 안 될 만한 사람 죽었지만 (ex 남은)  조준처럼 대다수 인사들은 이방원이 그대로 기용했어. 흡수 호로록 사실 정도전은 대단한 학자여서, 사람들은 그의 아이디어에 반한거고 정치센스가 대단해서 득이 된 케이스는 아님 정치센스는 이방원이 컸음 시작은 정도전 줄이었지만 끝내는 이방원이 흡수 심지어 정도전 장남과 정몽주 후손은 조선에서 벼슬을 계속함  연좌제로 박살 났을거 같지만 아니었음 나머지 세력이 "절대 인정할 수 없다" 끝까지 반항하는 그림이 이방원한테는 나타나지 않음  ex) 정진(鄭津) 정도전 장남 왕자의 난으로 좌천 당했지만 고위직 복귀  태종 대 관찰사 - 세종 대 형조판서 - 자연사 - 의정부 우찬성으로 추증. 우의정 바로밑 = 현대 차관급 정도전을 당시 역모죄로 처형했음  그런데도 장남이 살아있었다는거 자체가 신기할 수 있는데 태종은 자주 그럼.  너그럽다고 해석 능력을 알아본다는 해석 포섭력이 대단하는 해석  기용하고서 문제가 되지 않을거라는, 자신이 감당할 수 있다는 자신감으로 해석되기도 함  마지막 관문 이성계 조사의의 난 (태종 2년)  이 난은 아마 이성계가 세팅했을 거란 얘기가 있음  이 난이 집압된 후에  동북면 가별초를 벌하라는 상소가 올라오는데   동북면 군사는 태조가 오랫동안 지휘했던 거고 기반이었어.   조사의가 도와달라고 한다고 해서 움직일 군사조직이 아님.  그리고 태종이 이겼지.  그렇다면 30여년 전장 불패였던 이성계를 이긴 유일한 사람이 이방원이 되는 셈임.   이 난도 재밌는게 처음 며칠은 파죽지세로 조사의가 이겼지만 이방원이 별 조치가 없음  그러더니 직접 이방원이 나가서 별거 안하고 그냥 궁으로 돌아가. 그러자 갑자기 조사의 군영에 관군이 4만이라더라 소문이 퍼져 반란군이 탈영함. (조사의 병력 1 만 vs 관군 4만)  일각에서는 이방원이 이성계있던 곳을 급습해서 데리고 가는 바람에 이성계명을 따르던 병력이 싸울 이유가 없어져서 저렇게 됐다는 말이 있음  너그러운 처벌 화해하는 부자  보통 개국시기에 반란은 처형을 심하게 하는게 동서고금 동일함  개국 후가 취약하니까. 다른 나라로 변경될 위험이 있거든. ex) 궁예->왕건   나라 종속의 문제잖아  그런데 조사의의 난은 처벌이 너그러운 편이었음.   아마 이쯤 이성계 마음을 잡지 않았나  적어도 인정을 얻은게 아닌가 싶음.   이 난은 아버지가 핵심이었으니까 아버지 마음을 잡으면 너그럽게 갈 수 있다봄  이방원에게 반복적으로 보이는 특징임 그는 충동적으로 사람을 죽이는 경우가 없음  - 목적을 달성하는데 유혈사태가 필요없다면 너그럽게 가고 - 결국 일어날 것이라면 가장 효율적으로 해야 직성이 풀리는 사람처럼 보여. 나머진 자기가 포섭하고. 설령 그집 아들이라도 일을 시켜 (정도전 장남)  <사실 태종이 고어덬 쩌는 건 킬방원이라서 오는게 아니라 능력에서 옴 양가적인 능력을 다 가져서 캐릭터성이 쩜> 출처 타고난 정치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