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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례성의 진실은?

백제가 망하고 삼국사기에 초기 백제의 하남 위례성이 기록된 후 어디인가를 두고 조선 정조때 정약용이 남한산성 언저리 이성산성과 고골 근처를 끌어들여 다수설로 믿어오다 일제 강점기인 1925년 풍납동 발굴로 풍납동이 뜨게되었지만 확증이 되진 못했다네요.
88올림픽 준비할 때 전대통령이 학계의 주장을 받아들여 도로로 끊어진 석촌고분군(한 때 96기가 있었다지만 현재 미발굴 3기에 돌무더기 2곳만 있음)을 복원하고 몽촌토성내 평지에 흩어져 있던 민가를 내보내고 보존한 것이 너무나 잘한 일이고 1997년 풍납동 아파트 건설현장에서 쏟아진 유물들로 풍납토성이 위례성 -> 한성 북성이 주류로 대두되어 김대중 대통령(1998~2003)이 토성내부 사적지 지정 검토를 지시했으나 모장관이 우야무야 개기다 끝내 사적지 지정이 되지 않아 그 후에도 지속적으로 개발이 되었다네요.
이후 위례신도시 때문에 난리가 났었다네요.
충청남도 천안에 백제시대 유적인 위례산성이 있는데 그 쪽 주민들이 자기네 지명을 쓰지말라고 들고 일어났지만 설득으로 물러났대요.
지금의 위례신도시는 송파구와 하남시가 야합하여 낳은 이름만 프랜차이즈한 퓨전 도시예요.
지금까지 정리하자면 초기 위례성은 풍납토성이고 한성은 위례성과 몽촌토성의 두개의 성이다.
하남 이성산성은 통일신라 산성이며 천안 위례산성은 이름만 같은 다른 성이다.
얼마전 팔당팔화 수변공원에 갔을 때 위례강변길, 위례사랑길, 위례역사길, 위례둘레길 을 홍보하는 안내문을 보고 죽은 정약용의 오판이 하남을 먹여살리는 구나 하는 느낌이 들었어요.
맞은편 남양주는 정약용 생가터 마케팅으로 먹고 살고.
한강 북쪽이나 남쪽이나 정약용을 팔아 사네요.
정작 송파구는 입도 안 떼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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