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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것이 알고싶다에서 파헤친 고종의 비자금의 진실

그것이 알고싶다 767회분
'고종 황제의 비자금은 어디로 갔는가'
1900년대 초반,
일본의 내정간섭이 심해지자 
고종은 내탕금(황실이 사용하는 재정)을 통해 
비자금을 마련하려고 합니다.


 1907년에 100만마르크 정도의 금액을 독일은행에 비자금을 만들게 되는데 
현시가로 따져보면 약 500억에 달하는 금액입니다.



고종이 쓴 비자금의 용도는



일본 영사 보고서에 따르면
여러사람의 항일운동 자금줄이라

명확히 표현하고 있습니다.


비록 야사를 기록한 책이지만 한국야담사화에서도 

독립운동가(우당 이회영 선생)에게 자금 하사
상하이임시정부 설립
밀사 파견을 기록했으며
그 외 도쿄보다 2년 일찍 전차 설립도 고종의 내탕금으로 했다는 사실이 밝혀졌습니다.


1907년 고종황제는 폐위를 당한 후, 


고종은 러시아에 이범진 영국에 이한우
미국에 헐버트를 파견하여 을사늑약의 부당함을 알리고자 하는데
이런 부분들도 전부 고종 비자금, 
즉 내탕금으로 해결하고자했습니다. 


그래서 헐버트에게 위 자금을 
찾아와달라고 부탁을 합니다.


호머 헐버트(1863-1945)는 조선 후기 한국 최초의 근대식 공립교육기관인 
육영공원에서 외국어를 가르치던 선교사로,
한국인보다 한국을 더 사랑한 문명화의 선구자이자 
독립운동가였습니다. 

죽을때도 한국에 와서 죽었고
고향보다 한국에 묻히길 원했다고 합니다.

그 이유는? 고종황제 비자금을 받아서 한국사람들에게
돌려줘야 한다는 사명감 때문이라고 하네요.


그런데....


어찌된 영문인지, 헐버트가 도착했을 때는
이미 상하이에 있던 비자금을 '나베시마'라는 인물이 빼내가버렸습니다.
(노어이...)

그알 팀이 이 부분에 대해 자세히 조사를 했는데..


1. 본사건물이 철거되면서 도이치 뱅크에 자료가 없다는 점
2. 1923년, 독일이 전쟁 배상금으로 많은 화폐를 찍어내면서 화폐개혁을 통해 10억마르크가 1마르크로 변했다는 점
3. 상속채권과 같은 채권의 재산권행사는 30년이라는 점
4.1952년 독일채권회의가 열렸지만, 우리는 한국전쟁이라는 특수한 상황으로 인해 참여하지 못하여 권리가 없다는 점

이런 저런 이유들을 들어 손댈수가 없게 되었다고 합니다.


그럼, 일전에 50만 마르크를 빼간 일본에게서는 법적인 책임이 없을까요?




나베시마. 그는 이토 히로부미의 최측근 인사로써, 외교관으로 활동한 인물로, 통감부의 공을 크게사 후에 외무총감까지 지낸 인물입니다.


통감부래안을 살펴보면 '이토 히로부미'는 고종의 비자금 실체를 알고 고종의 명령서를 위조하여 '덕화은행'의 돈을 인출해 간 것입니다.


그리고 이 돈을 이완용 부자에게 주었습니다. 이것은 사인한 사람이 이윤용(이완용의 형)이라는 점에서 알 수 있습니다.
씹빨...


요즘 1905년 을사조약이 무효라는 증거들이 하나둘씩 발견되면서, 일본에게 배상을 청구할 수도 있지만
1965년 일본과의 협상에서 청구권의 관한 부분의 포기를 선언하였기 때문에 국제법상으로도 불리합니다. 

고종이 독일에 보낸 서한 내용입니다
본인에게는 아직 2천만의 신민이 있습니다....

절박함이 보이지만


이미 일본이 열강들과의 조약을 맺으며 동맹관계를 형성해왔기 때문에 실패로 돌아갔습니다.


이 일에 관해 
서울대 역사학과 이태진 명예교수님 의견.



경기대학교 안창모 교수님의 의견.



그알에서 예전에 다뤄줬던 고종황제 비자금편인데
이 실화를 바탕으로 예전에 그림자 살인이라는 영화가 나왔었다고 하네요.
3 Comment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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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희비자금은?????
이래저래 또 끓는다끓어‥😤😡😡😡
그림자살인에 고종황제 나오지 아 유익한 카드입니다 저거 본편보고싶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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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한족 왕조 역사상 유목민에게 완전히 멸망해 대륙에서 사라진 2개의 왕조가 있으니 몽골에게 멸망한 송나라와 여진에게 멸망한 명나라입니다. 그리고 두 왕조의 최후는 전혀 달랐죠 (몽골 군의 남송 공격루트) *나름 유명한 글이죠 https://pgr21.com/pb/pb.php?id=freedom&no=73040 '세계최강 제국에 맞선 지상 최강의 장벽' 이란 글에 남송의 대몽항쟁 과정이 잘 묘사되었습니다. 남송 멸망 과정은 위 글을 참고했습니다. 남송 최후의 방어선인 양양성을 함락 했을 때 사실상 남송의 운명은 끝장이 났습니다. 과거 삼국지 시대 사마씨 서진이 오나라를 멸망 시킬 때 형주를 접수하자 '파죽지세' 라는 고사성어를 만들며 오나라를 단숨에 멸망 시켰듯 세계 최강의 몽골군 역시 중요 방어선이 무너진 남송을 파죽지세로 깨트리며 수도 임안으로 파도처럼 진격했죠 이제 남송이 멸망 하는게 기정사실이 되었고 몽골군이 진격하는 과정에서 송나라 방어군은 모래처럼 무너졌습니다  그럼에도 남은 송나라 장군은 단 한 사람도 투항하지 않았습니다. 모두 싸우다 전사했습니다.  (간신 가사도) 심지어 매국노이자 간신으로 그 악명이 높은 남송의 가사도 조차도 몽골군이 송나라 수도에 이르자 최후의 송나라 방어군 13만 병력을 이끌고 나아가 몽골군과 전투를 벌였습니다. 물론 모두 허망하게 전멸하였지만 생각해 보면 기괴한 일이죠. 한국으로 치면 매국노 이완용 조차도 마지막에 이르러서는 군대를 이끌고 한양성 앞에서 일본군과 전투를 했단 뜻입니다. 그렇게 송나라 수도 임안이 몽골군에게 함락되고 황제인 공제는 포로가 되어 비참하게 끌려갔습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송나라는 멸망한게 아니었습니다!!! 승상 육수부를 비롯한 송나라 신하들은 살아남은 황족을 모아서 다시 새로 황제를 옹립한 뒤 남쪽으로 피신하였습니다. 오늘날의 홍콩 부근인 애산까지 도망을 가서 항전을 계속 했죠 그 과정에 송나라 신하가 몽골에 거짓투항을 하여 목숨을 바쳐가며 도망칠 시간을 벌기도 했습니다. 머나먼 남쪽 애산이란 지역에 모여 최후의 저항을 벌이던 마지막 송나라 조정의 모습은 애잔하면서 비장하기까지 했습니다 이들을 총 지휘하는 승상 육수부는 밖에서는 항상 의연하고 단호한 모습을 보였습니다. 하지만 막사로 돌아와 혼자 있을 때에는 어린 황제와 20만에 달하는 관병과 백성들의 힘겨운 모습을 보며 애통해 하며 울었다고 합니다. 결국 나라가 멸망할 것임을 직감적으로 알았던 것이죠.  그리고 이때 남송 최후 항전에서 과거 송나라 조광윤에게 황위를 선양했던 전 왕조 후주의 시씨 가문의 일족도 함께 참여했습니다. 송나라가 전 왕조의 황족인 후주의 시씨 가문을 300년간 보호하고 우대해 준 의리를 지킨 것이죠   (애산 전투 지도, 이걸 보면 몽골이 고려 강화도를 함락 못 시킨게 아니라 안 한거 같죠)  몽골군은 최후의 일격을 앞두고 항복한 송나라 장수를 장홍범을 통해 최후의 저항군을 이끌던 장군 장세걸의 투항을 권유합니다. 둘은 친척이었습니다 하지만 장세걸은 거절했습니다 이렇게 말합니다. "나 역시 항복이 무슨 말인지 안다. 생명의 귀중하다는 사실 역시 모르는 사람이 아니다. 단지, 주군을 위해 죽음을 각오하고 변심하지 않으려는 것 뿐이다." 몽골군은 포로로 사로잡은 송나라 관료 문천상에게 최후의 저항군들에게 항복을 하게 권유 하라고 편지를 쓰게 시킵니다. 그러자 문천상은 다음과 같은 짧은 시한 편을 대신 써 줬습니다. "예로부터 누구나 인생은 한번 죽는 법.  단지 일편단심 보존하여, 역사에 길이 남겨야 할 뿐"  회유책을 쓰려고 해도 협조도 안되고 그저 시간만 끌리며 통하질 않으니 어쩔 수가 없습니다. 결국 몽골군은 총공세를 하여 최후의 송나라 저항군을 궤멸 시킵니다. 애산에서 포위 당한 송나라 병사들이 그야말로 처절하게 싸웠습니다. 전투 중 물이 떨어져서 결국 바닷물을 마시고 구토를 하면서까지 저항했지만 소용이 없었죠 송나라 최후의 멸망이 다가 오고 패망이 확실 시 된 순간입니다. 그때 승상 육수부는 7살의 어린황제에게 마지막까지 역사를 가르치고 있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최후에는 어린황제를 안고 바다에 뛰어 들어 함께 자결했습니다. 이때 승상 육수부와 어린황제만 자결한게 아니었습니다. 송나라 방어군이 전멸하는 패망의 대혼돈 속에서 황태후는 겨우 구출되어 살았습니다. 하지만 이내 황제가 자결을 했는데 살아서 무엇하냐며 다시 바다로 몸을 던져 자결을 하였습니다. 그리고 이하 황족들과 신하들 역시 뒤를 따라 자결했습니다. 살아남은 대장군 장세걸은 가까스로 패잔병을 다시 수습하였지만 이미 황제가 자결하였단 소식을 듣게되죠. 장세걸은 그럼에도 저항을 포기 안하고 지금의 베트남으로 후퇴해서 다시 한번 저항을 이어가고자 했습니다 근데 이때 태풍이 불어와 패잔병의 배를 덮치게 됩니다. 폭풍우 속에서 마지막을 직감한 장군은 비통한 심정으로 하늘에 외칩니다. "신이 조 씨를 위해 힘쓸 일은 이제 다 끝나고 말았습니다. 정녕 이것이 하늘의 뜻입니까? 하늘이 만약 송을 망하게 하려는 것이 그 뜻이라면, 신 역시 이 바다에 잠겨 죽게 해주소서." 그리고 풍랑이 배를 삼켜버렸습니다. 남송 최후의 저항은 그렇게 진짜 끝났습니다.  세계 최강 군대 몽골에 지구상에서 가장 오랫동안 저항한 송나라는 말 그대로 처절하고도 비장한 항전을 끝까지 하다 황제, 황태후, 황족, 재상, 대장군, 신하 모두가 순국을 하며 그 최후를 맞이했습니다. 후대에 송나라의 최후를 이렇게 묘사합니다 "역대 이래 몸을 던지며 나라에 순국한 자는 유독 송나라 말에 많았다. 패망을 구하진 못했다고 해도, 요컨대 나라가 사대부를 양성한 보람이 없었다고 할 수 없다." - 청나라 문인 조익 이십이사차기 - 13세기 몽고 기병이 폭풍처럼 유라시아를 석권할 당시, 그들은 오직 남송에서만 가장 격렬하고 지속적인 저항을 받았다. 1235년 원나라 군대가 처음 송을 공격했을 때 부터, 1279년 광동 애산에서 남송 최후의 승상 육수부가 어린 황제를 등에 업고 바다에 뛰어내릴 때 까지 남송은 장장 40여년간 전쟁을 벌여 몽케 칸 또한 합주 조어성에서 전사하였다. 장원 급제 출신 재상 문천상을 중심으로 한 사대부들이 최후의 궁지에서도 혈전을 벌이며 송 황실을 위해 목숨을 바친 일은, 조송(趙宋)의 제실(帝室)이 300년간 사대부를 우대한 것에 대한 최선의 보답이었으며, 송대 문관 정치가 거둔 유종의 미 그 자체였다. -중국 과거 문화사 中- 참고로 이때 애산 전투에서 살아남은 송나라 병사 중에 한명이 훗날 명나라를 건국하는 주원장의 외할아버지입니다. 애산 전투에서 송나라는 패전했지만 그때 참전한 병사의 후손이 훗날 몽골을 결국 멸망 시켰습니다.  그럼 명나라의 최후는 어떠했을까요. 명나라 말기 농민반란은 사실상 막을 수 없는 지경에 이릅니다. 들불 처럼 일어나 전 국토를 쑥대밭으로 만든 농민 반란이 급기야 명나라 역대 황릉도 파괴하는 지경에 이릅니다. 명나라 조정은 막대한 비용을 지불해 관군으로 겨우 진압을 했음에도 거의 진압했다 싶으면 항상 작은 불씨가 남았죠. 그럼 불씨는 다시 어마어마한 규모의 들불이 되어 또 번지고 반란은 자꾸만 커졌습니다.  농민반란에는 농민만 참여한게 아니였거든요. 농민들 뿐만 아니라 급료를 받지 못한 실직관료, 군인까지 무기를 거꾸로 들고 명나라에 반란했습니다 (이자성에게 사로잡힌 복왕 주상순) 방어 요충지인 양양성을 함락하여 양왕 주익명을 참살하더니 급기야 중원의 최요충지인 낙양을 함락해 복왕 주상순을 삶아 죽여 버렸습니다. 그냥 삶아 죽임을 당한게 아니라 먹혔습니다. 180키로가 나가는 거구였던 복왕 주상순을 사로잡아 복록연이라는 것을 열어서 삶아 죽이고 사슴고기와 함께 나눠 먹었죠  명나라 최후의 방어군 관병이라 할 수 있는 동관에 주둔한 손정전까지 패사시키자 더이상 중원에서는 반란군을 상대할 명나라 정규군이 사라지게 됩니다.  반란군 이자성은 곧장 장안에 입성하여 대순 황제로 즉위하였습니다. 그리고 산해관에서 청나라와 대치하느라 발이 묶여 구원을 못하는 명나라 주력군을 비웃으며 바로 북경으로 진격을 시작하게 됩니다. 이미 방어군이 궤멸된 명나라 조정은 이를 막을 군대가 더이상 없었으니 끝장이 난 것입니다.   그리고 300년간 천하를 다스린 대명국의 최후라고는 볼수 없을 정도로 너무도 허망한 광경이 벌어졌습니다. 이자성의 군대가 북경성 앞에 나타나자 명나라 황제 숭정제는 환관으로 하여금 긴급사태를 알리고 소집령을 내리죠. 북경 성내에 거주하는 친왕들과 문무대신을 부르는 종을 미친듯 울렸지만 단 한명도 조정에 나오는 이가 없었습니다. 평소 조정에서 공자님의 말씀 맹자님의 말씀 등 성현의 명언을 나열하며 충의를 논하던 고명한 대신들과 언제나 비분 강개하여 역적의 강경 토벌을 주장하던 열정 넘치던 신하들은 이미 전부 도망을 쳐버렸거든요 거짓말 처럼 텅~비어버린 거대한 궁궐 자금성에 오직 환관 왕승은만 초라한 황제 옆에 있었을 뿐입니다. 북경의 수비를 결국 환관들이 나서서 막아 본다고 발악했으나 결국 외성의 수비를 맡은 환관 조화순 역시 이자성에게 투항해버립니다. 그렇게 입성한 이자성에게 어제까지 조정에 나와 명나라 황제 만만세를 외치던 관료들은 돌변하여 대순황제 만만세를 외치며 맞이했습니다 자금성으로 몰려오는 농민반군을 지켜보던 숭정제는 진짜로 혼자 궁궐에 남겨진 믿겨지지 않는 비참한 광경을 보았습니다. 숭정제는 능욕당하여 비참하게 최후를 맞이 할께 뻔한 황후와 장공주를 칼을 들어 직접 죽인 후 자금성 뒤 경산에 올라 목을 메어 자결을 했습니다. 지금도 북경 자금성 관광을 가면 코스로 가보게 되는 장소가 북경 자금성 뒤편에 있는 경산공원입니다. 명나라 마지막 황제 숭정제가 자금성 궁궐로 몰려드는 농민반군을 지켜보며 홀로 비참하게 목을 메달아 자결을 한 장소죠 (지금 북경 경산공원에 있는 숭정제가 목을 매달은 나무입니다. 제가 방문했을 땐 숭정제 시절 그 나무라고 설명을 들었죠. 근데 조까 중국에 그딴게 남아 있을리가 없죠. 진짜 나무는 문화대혁명 때 잘려졌고 지금 있는 것은 복원된 나무입니다. ) (그 나무에서 바라보는 자금성 전경) 숭정제가 자결했다는 그 나무 위치에서 보면 자금성 전체가 위 사진 처럼 전부 보입니다.  아내와 딸을 자신의 손으로 죽이고 황궁인 자금성이 반군에 유린당하며 나라가 멸망하는 장면을 전부 지켜보다 숭정제는 스스로 목을 매었던 것입니다. 숭정제는 죽기전에 유조를 세상에 남겼는데 다음과 같습니다. "...그러나, 모든 신하들이 짐을 망쳤다." 죽기전에도 신하들 때문에 망했다고 얘기하는 것은 한편으로는 스스로는 잘못한 게 없다는 고집스런 성격을 대변하기도 하지만, 또한 실망의 심정도 담고 있다고 할 것이다. 너희 신하들이여, 대대로 국가의 은혜를 입었으면서...가장 너희들이 필요할 때 한 사람도 보이지 않는구나, 헛되히 너희를 먹여살렸구나." -명사 장열제 본기 이때 보통 사실상 명나라가 망했다고 평가합니다만 사실 망한게 아니었죠. 아니 당시 명나라는 멸망하는게 말이 안되는 상황이었습니다. 명나라는 중국 최초로 양자강 이남에서 건국하여 천하를 통일한 왕조입니다. 주원장이 건국한 원래 수도는 북경이 아니라 남경이었습니다. 때문에 영락제 시절 북경으로 수도를 이전 한 이후에도 옛 수도인 남경에는 작은 조정과 작은 정부를 만들어 운영했습니다 (북경함락 이후 남명정부 세력 이자성 세력 판세) (화북 상실 후 남송, 그리고 화북 상실 후 남명 형세)  때문에 북경이 함락이 되었다고 한들 남경에 정부가 이미 있고 재건할 기반도 충분히 있습니다. 당연히 역사적으로 서진이 망하고 동진이 세워지고 북송이 망하고 남송이 세워졌듯 남명이 세워지는게 자연스런 이치인 것입니다. 어쩌면 지금 중국의 모습과 현대사가 전부 바뀌었을지도 모르죠 다만 명나라는 이전의 국가들과 다르게 나라가 완전 개씹 막장 개판이라는 엄청난 차이가 있었습니다. 일단 남경 정부에서 새로 황제를 옹립하고자 하는데 그 유력 후보가 복왕 주유승입니다. 이전에 낙양에서 농민반군에게 잡혀서 삶아 죽임을 당한 복왕 주상순의 아들입니다. 황위 계승서열이 가장 높아서 옹립을 해야하는데 신하들의 가장 큰 고민이 생깁니다. 그 아버지 복왕 주상순이 탐욕스러운 돼지였듯 아들 복왕 주유승 역시 멍청한 새퀴였단 것입니다 나라가 풍전등화인데 당연히 똑똑한 노왕을 옹립해야 한다. 아니다 나라가 위기일 수록 정통성 있는 복왕 주유승을 옹립해야 한다. 이미 망한 나라의 피난 정부 신하들이 그와 중에 당파로 나뉘어 당파싸움을 하고 자빠집니다. 그러다 결국 복왕 주유승이 남경에서 즉위하게 되니 남명 홍광제입니다. (남명 정부 시절 세력 이동) 사실 아버지의 원수를 갚아야 한다는 사명이 있으니 사람이라면 당연히 정신차리겠지라는 그런 소박한 희망을 품을 법합니다. 신하들도 제발 그러길 빌었고 그럴거라고 여기며 옹립하게 된 것이죠.  하지만 그럴리가요.. 홍광제가 즉위하자 하는 짓이 놀라운 광경을 보여줍니다. 지금 나라가 망하고 겨우 남경에서 연명하는 처지죠. 아니 당장 북쪽에 아버지의 원수 이자성의 농민 반군 있고 청나라 군대가 산해관을 돌파해 남하하는 급박한 그 와중 입니다  기가막히게도 후궁을 왕창 뽑고 궁궐에서 술판을 벌이며 쳐 놀기 시작을 합니다. 이 짓거리를 남경이 함락되는 그날까지 하죠 (나라도 막장인데 황제는 더 막장인 것은 명나라 후기의 전통인듯) 홍광제의 술판에 대한 아름다운 고사가 전해집니다. 나라가 망했는데 임시정부에서 옹립한 황제가 매일 술판을 벌이니 신하 유종주가 통곡을 하며 술을 먹지 말라고 간언합니다. 진심어린 충언을 듣자 홍광제가 반성한다고 위로한 후 그럼 한 잔씩만 마시겠다 하죠 이후 금으로 커다란 술잔을 만들어 한잔씩 먹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반만 마시고 아직 한잔이 안되었다며 첨잔하여 마시니 주량이 더욱 늘었다고 합니다. 이런 비슷한 술잔 농담 이야기는 이전 중국왕조에도 있었고 조선시대에도 있습니다. 하지만 다른 시절의 술잔 늘리기는 평시에 일어난 해프닝 정도인 반면 당시 남명은 당장 나라가 망하는 중이었단 차이가 있죠 그럼 신하들은 정신을 차렸는가? 아니 나라가 망했는데 무슨 가질 권력이 남아 있다고 그 와중에 권력 쟁탈전이 벌어집니다. 최전선에서 주력군을 이끌고 양자강을 방어하는 장군 좌량옥과 남경의 신료 마사영간의 권력 다툼이 발생했죠 급기야 좌량옥이 양자강 수비군을 이끌고 남경을 공격하는 지경에 이릅니다. 결국 이를 막는다고 싸우다 양자강 방어군 태반이 증발해 버렸습니다. 사실 장군들도 쓸모 없기는 매한가지 입니다. 강북 4진이라 불리워지는 남경을 수비하는 중요 방어거점의 장군들은 땅을 수복할 생각은 전혀 없었죠. 나라가 망하는 그와중에 재물을 탐욕하며 남경 정부에 돈을 보내달라 식량을 보내달라 보채기만 할 뿐이었습니다. 남명 정부가 지원을 안보내 준 것도 아닙니다. 1년치 군량이 240만섬인데 1년 반치 군량인 340만섬을 보냈습니다. 그것도 단 4개월만에 전부 쏟아 부어서 지원해 주었죠. 근데 돌아오는 건 탐욕에 쩔은 장군들이 전투도 안하면서 돈만 계속 달라 하니 미치는 노릇입니다.  이 와중에 가장 중요한 거점인 양주를 수비하는 사가법 장군만 다행히도 제정신을 가진 정상인이었습니다. 묵묵히 청나라 군대를 온전히 혼자 막으며 버티었을 뿐입니다 아니 그럴수 밖에 없는게 양주가 함락되면 바로 남경이 함락되는 상황이라 못 막느면 진짜 나라 망하거든요. 그야 말로 필사적으로 수비했던 것이죠 남경에 구원군을 보내달라고 매일 애타게 부르짖으며... 그리고 남경 정부는 구원병을 안보냅니다...??? 좌량옥 처럼 전방 장군들의 군사력이 강해지면 위험하다는 이유입니다. 그 다급한 와중에 정치질하며 사가법을 견제하고 자빠지는 위엄을 보여주죠 정말 미치고 환장할 노릇인데 아득바득 수십 일을 버티다 결국 양주성이 함락되고 사가법은 순국하였습니다.  당시 청나라 군대는 엄청난 피해를 주며 항전한 양주성에 10일간 대학살을 벌여 보복을 합니다. 자그만치 80만명이 살육을 당했고 훗날 양주십일기라고 이때 학살을 담은 무시 무시한 기록이 남죠 그리고 당연한 수순으로 남명 정부가 끝장이 납니다. 사가법의 양주성은 남경을 방어하는 목숨 줄과 같은 성이었습니다. 가장 중요한 방어선이 사라졌으니 나라는 망한거고 곧 남경성으로 청군이 들이닥친 것이죠  홍광제는 다른 사람들에게 알리지 않고 환관들과 몰래 남경을 빠져나와 도망을 쳤습니다. 그러다 무호 라는 지역에 이르는데 그곳을 지키던 장군 황득공을 만납니다. 또 다행이 그도 정상인이라 목숨을 바쳐 황제를 보호하고 항전을 하겠다 다짐하였는데 그게 통할리가요... 그 부하장수 전유승과 마득영이 황제를 사로잡아 투항하면 큰 포상을 받을 것이라 여겨 상관인 황득공을 뒤에서 죽여 버립니다. 그리고 홍광제를 산채로 잡아 청나라에 투항합니다. 홍광제는 전유승과 마득영에게 울고불고 사정하며 제발 살려 달라고 빌고 또 빌었는데 전혀 먹히질 않죠. 큰 보배를 잡았는데 행여 도망칠까봐 마치 돼지를 잡은 것 처럼 통나무에 손과 발을 묶어 매달아 끌고 갔다고 합니다. 그렇게 홍광제는 청나라에 끌려가 북경에서 비참하게 참수 당했습니다.   그럼 황제가 몰래 도망간 남명 왕조의 수도 남경성은 어찌 되었을까요? 북경성에서 벌어진 장면이 똑같이 재현이 됩니다. 청나라 군대가 도착하자 성문을 열고 백관이 나와서 향을 사르며 성에 입성하는 청나라 군대를 환영한 것이죠. 바로 얼마 전까지 남명 조정에서 권력쟁탈전을 벌이고 누가 충성이니 누가 반역이니 하며 싸우던 신하들입니다. 그 고명하신 고관대작들은 이제는 청나라 군대를 환영하며 청나라 황제 만만세를 불렀습니다.  그 어이없고 치욕스런 장면을 두고 이를 지켜보던 남경성의 한 거지만이 비분강개해 외쳤으니 "사대부를 삼백년 간 길렀다는 나라인데 내가 비록 거지로 천한 신분이라지만 이런 치욕을 어찌 볼 수 있느냐!!" 관리와 사대부들을 욕하는 말을 남기고 다리에서 몸을 던져 자결을 했습니다 남명 정부가 세워지고 홍광제가 즉위한지 딱 1년만의 일입니다. 이전 왕조의 후손 조차 목숨으로 의리를 지키며 충성을 다한 송나라 일개 거지 조차 치욕스러워 했을 정도로 너도 나도 나라를 팔아먹은 명나라 끝. 펌) 출처 두나라의 끝이 이렇게 다르다니. 명은 추함이 눈을 뜨고 보기 힘들 지경인 반면 송의 마지막은 안타깝기 그지없구려. 몽골의 힘은 정말...!
알면 알수록 빡치는 훈민정음 해례본 상주본 미스테리
2008년 7월 문화재청 게시판에 '집에 고서하나가 나왔는데 문화재로 신청하고싶다'는 글이 올라 옴 전문가들을 통해 검증한 결과, 훈민정음 해례본 진본인 것으로 밝혀짐 이때 상주본 출처에 대해 배익기 씨는 '집수리를 하다가 발견했다'고 답함 현장조사에 직접 참여했던 전문가의 말에 따르면 연구자가 직접 쓴 주석까지 달려있어 학술적 가치가 매우 높다고 함. 그런데.. 이때 안동에서 골동품을 판매하는 조씨가 등판함 그의 입장은 이러했음. 훈민정음 해례본 상주본을 본인의 골동품 가게에 두었는데 가게에 방문한 배씨가 다른 책들에 슬쩍 끼어 훔쳐갔다는 것. 가게에 둔 이유는 판매용이 아닌 본인이 따로 알아보기 위함이었다고 함. 조씨는 배씨를 절도죄로 신고함 근데.. 님은 이책 어디서 남? 조상 대대로 우리집안에 내려온 것임 재판결과 대구지검은 골동품점 주인인 조씨에게 소유권이 있다고 판결함 배씨는 훈민정음 해례본 상주본을 조씨에게 반환하라는 판결에도 불복했을 뿐만 아니라 문화재청의 현장조사 요청 또한 거부했음 혹시라도 문화재가 손실될까 애가 타는 문화재청은 배씨의 집을 두차례나 수색했지만 찾을 수 없었음 문화재청은 문화재보호법 위반으로 배씨를 고발했고 형사재판이 시작됨 형사재판 중.. 또 한번 놀라운 반전을 맞이함 도굴꾼인 서씨가 1999년 안동 광흥사의 대웅전 나한상 토불들을 부수고 훔친 복장유물 중 해례본이 있었고 훔친 해례본을 골동품점 조씨에게 팔았다라는 증언을 했기때문 훈민정음 해례본의 표지가 어떻게 생겼는지 진술했는데 상당부분 일치함 대환장 파티가 열림.. 서씨의 증언이 사실이라면 훈민정음 해례본의 원 소유주는 골동품가게 조씨가 아닌 광흥사의 것이 되는 상황 조씨는 도굴꾼 서씨의 말을 극구 부인했음 그리고 얼마 후 상주본의 소유권을 문화재청에 기증함 이후 배씨는 1심에서 징역 10년을 선고 받았으나 항소심에서 증거불충분으로 무죄 받음.. 풀려난 뒤 그는 지금 내놓으면 도둑 누명을 못 벗기때문에 소유권부터 되찾고 내놓겠다 이미 훼손됐대도 어쩔수없다며 황당한 소리를 지껄임.. 여기까지만봐도 속터지져? 근데 아직 환장 파티 시작도 안함^^ 해례본이 숨겨져있을 것으로 추측되는 이 인간 집에 불이남... 훈민정음 해례본 잘있는지 제발 한번만 보여주라 제발ㅠㅠ "이미 불탔을수도 있고ㅋ 아닐수도있고ㅋ 탔어도 어쩔 수 없고~~~" 이런 식의 말장난만 치면서 끝끝내 보여주지않고 버팀 그리고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무소속으로 국회의원 선거에 출마.. 결과는 당연히 낙선~ 떨어지고 한번 더 출마함 이때 재산 신고한것도 환장.. 자신의 재산을 1조4800만원이라고 신고하려함ㅋㅋㅋㅋㅋㅋㅋ 이유는 문화재청에서 훈민정음 해례본을 1조 이상의 가치가 있다고 해서^^ 선거결과는 당연히 낙선~ 낙선 후 잠잠하더니 다시 어그로를 끄는데.. 갑자기 불에 타 훼손된 해례본의 모습이 담긴 사진을 공개함; 갑툭튀한 이유는 자신이 당선되면 책을 공개하려했으나 소장자라는 것을 믿지않는 사람이 많아 공개했다함.. 사진에 공개되지않은 다른 부분들의 상태는 어떨지 그것도 미지수 이 지저분한 싸움은 지금까지 현재진행 중임.. 조사한 바에 따르면 배씨가 조씨의 골동품 가게를 두번 방문했는데, 첫번째 방문 시 한장을 몰래 찢어와 진본인지 확인하고 두번째 방문 때 훔친 것이라 함. 또 다른 골동품점 주인에게 훈민정음 한장을 확보했는데 300만원을 줄 수있냐고 거래를 시도했던 정황도 나옴 이런 인간 설득하려고 문화재청에서 45번이나 만났다함ㅠ 강제로 회수하고싶으나 정말 불에 다 타버린건지 아무도 모르는 곳에 꽁꽁 숨겨둔 건지 행방을 전혀 알 수없는 상황임.. 아예 다 타서 없다고 속시원히 말이라도 해주면 문화재 훼손죄로 감방이라도 갈텐데ㅠ 출처 소드 모야 왜저래;; 뭘 믿고 저렇게 뻔뻔하냐 나이값을 하시오 우리 소중한 역사고 문화잖아 아 제발 이 이야기 볼 때마다 너무 빡치고 열받아서 무슨 욕을 해야될지도 모르겠음ㅠ;;
초상, 한국인의 얼골
이채, : 조선 후기 유학자. 전우, :유학자, 호는 간재 :전북 전주 출신으로 호남 기호학과 거장이자 항일운동가였던 간재 전우(1841-1922)의 70세 초상화. 최익현, :유학자 이자 항일의병장 . :면암 최익현(1833-1906)의 74세의 모습. : 1905년 을사조약이 체결되자 노년의 몸으로 의병을 일으켜 싸우다 체포되어 유배지인 쓰시마 섬에서 생을 마쳤다. 황현, : 매천야록의 저자, 호가 매천 : 경술국치 후 음독자결. '나는 조정에 벼슬하지 않았으므로 사직을 위해 죽어야 할 의리는 없다. 허나 나라가 오백 년간 사대부를 길렀으니, 이제 망국의 날을 맞아 죽는 선비 한 명이 없다면 그 또한 애통한 노릇 아니겠는가? 나는 위로 황천에서 받은 올바른 마음씨를 저버린 적이 없고 아래로는 평생 읽던 좋은 글을 저버리지 아니하려 한다. 길이 잠들려 하니 통쾌하지 아니한가. 너희들은 내가 죽는 것을 지나치게 슬퍼하지 말라.' 얼을 담은 골 ; 얼골 얼굴, 얼굴에는 얼이 담긴다 하여 그림에도 정성을 기울였다. 조선시대 초상화 제작과정 초상화 제작 단계를 기준으로 초본과 정본 으로 크게 나눌 수 있다. 초본은 초상화의 시작단계에서 인물을 묘사하는 밑그림을 말하며 정본은 초본의 단계에서 수정과 보완을 거친 후 이를 바탕으로 완성된 초상화를 말한다. ​ 초상화를 제작하는 방법은 도사,모사, 추사 세가지로 나눌 수 있다. 도사는 화가가 직접 인물을 보면서 초본을 그린다. 모사는 기존의 초상 위에 종이를 올려 놓고 초본으 베끼고 추사는 참고 할 초상화가 없으므로 상상하여 초본을 그린다. 비단 정본제작 나무틀에 비단을 고정하여 물감이 번지지 않게 하기 위해 녹인 아교(접착제)를 칠한다.이를 아교포수라고 한다. 완성된 초본 위에 나무틀에 묶은 비단을 얹여서 초본의 먹선을 따라 비단 위에 먹선을 그린다. ​비단 뒷면에 배채를 한다. 비단앞면에서 음영을 넣고 색과 선을 마무리하여 완성하다. ​
사극에 나오는 홀(笏), 규(圭) 지팡이 이야기.
보통 사극 영화나 드라마를 보면 옛날 신하들이 다들 손에 이상한 막대기 하나를 쥐고 있죠 이것을 홀(笏) 이라고 합니다. 벼슬아치들이 왕을 알현할 때 손에 쥐는 판입니다. 한국의 경우 조선시대 규정에 의하면 1품~4품의 고위관리의 경우 상아로 만든 홀을 쓰고 5품~9품의 관리는 나무로 만든 홀을 쓴다고 나옵니다.  생각해 보면 기이하죠 조선시대에 대체 상아를 어서 구할까요 코끼리는 중국, 한국, 일본 어디에도 안 사는 동물입니다. 네 전부 동남아에서 수입한 진짜로 진귀한 물품이죠 그럼에도 쓴 것입니다. 레알 명품이죠 근데 이게 그냥 그런게 아니라 예법에 나오기 때문에 그러합니다. 유교를 신봉하는 동아시아에서 예법은 있으면 지켜야 하는 것입니다 주나라 시절에 예법을 정하여 주례에 박아 넣기를 천자는 옥을 쓰고 제후는 상아를 쓰며 대부는 어문수죽 사(士)는 대나무를 쓴다 이걸 기초로 당나라가 건국 되자 다시 율령을 정비해 한국, 일본, 베트남에 국가의 궁중 제도, 궁중 예법을 알려줬습니다. 지금 우리가 아는 전통이란게 태반이 이시기에 정비되었죠  그 당나라 예법에 따르면  5품이상은 상아를 쓰고 6품 이하는 나무를 쓴다 라고 했죠. 여기서 정해진 상아로 만든 아홀牙笏, 나무로 만든 죽홀竹笏은 그 자체로 신분의 증명입니다 때문에 동아시아에서 관료들이 자신의 품위를 나타내고 예법에 따르고자 너도 나도 이걸 사용하였고 문인들이 쓰는 문구류, 장신구 중에 홀笏이 가장 비싸고 귀했습니다 오늘날 남자들이 시계로 명품을 삼던가요? 슈트의 마무리는 명품시계다 아니면 여자들이 명품백을 옆에 차고 나가서 신분을 과시하곤 합니다 그거랑 비슷하다 보면 됩니다. 관리가 홀을 들었다는건 그 자체가 조정에 나가는 관료라는 상징이며 고귀한 신분을 증명하는 위신제로 일종의 명품이었습니다. 슈트의 마무리가 시계이듯 관복의 마무리는 '홀'이였습니다 "우와 저 남자 손에 아홀牙笏 들었어 쩐다..." 오늘날로 치면 이런 느낌 입니다. 그럼 이 홀笏의 실제 용도는 무엇이었을까요? 주나라 예기라는 책에 이런 말이 나옵니다. 대부가 입조를 하여 천자를 뵐 때는 하루 전날 미리 목욕을 하고 상홀象笏을 들고 천자의 말씀을 거기에 적어 만일 까먹는 것에 대비한다. -예기 옥조편 권13- 천자를 알현 할 때는 손에서 홀을 놓치 않는다 무훗 왕의 앞에서 말할 때는 홀을 사용하고 왕의 명을 받을 때에도 홀을 사용한다. -예기 옥조편- 네 군주와 신하가 만나서 회의할 때 사용하는 수첩 같은 역할을 했습니다. 왜 홀의 재질이 옥, 뼈, 대나무인지 알수 있죠 주나라, 춘추전국 시대에는 종이란게 발명 되지 않았음으로 죽간을 이용해 기록을 하였습니다. 옥이나 상아에 쓰고 나중에 지우면 되고 대나무, 나무는 쓰고 깍아내면 되죠 군기가 바짝 든 신하는 자고로 잘 외워야 합니다 고참인 고위관리는 더 큰 홀을 쓰고 쫄따구인 말단관리는 더 작은 홀을 썼습니다  더불어 누가 신하인지 정체를 알려주는 역할을 합니다 주나라, 춘추시절에 왕과 제후가 만나는 공간은 하늘에 제사를 올리는 장소이거나 조례를 올리는 조정에서 모이게 됩니다 해당 장소는 천자가 공개적으로 나오는 공간이니 함부로 외부 침입자가 있으면 안되죠 "손에서 홀을 놓지 말아야 한다" 는 예법의 뜻은  왕을 위협할 다른 무기를 함부로 들어 선 안된단 말이고 동시에 참석자의 신분을 증명하는 이름표 같은 것입니다 옷에 색깔을 넣는 관복이란게 제정 된 것은 진시황이 천하를 통일 한 뒤 이후 부터입니다. 과거 도시국가 수준의 나라들이 점차 커지고 진나라 통일제국이 되면서 변했죠  중앙조정에 모이는 신하도 많아지니 황제의 입장에서는 들고 있는 홀 따위는 누군지 파악이 안됩니다. 그래서 아예 입고 있는 옷 색깔을 정해 구분하기 시작합니다. 때문에 동아시아에서 관복의 제정은 즉 중앙집권의 강화 국가기구의 확대를 의미합니다.  이전 주나라, 춘추시대에는 들고 있는 홀을 통해서 신분과 지위를 구분을 했습니다 주나라, 춘추시대 실제로 신하의 신분을 확인하고 조정에서 왕과 대화를 하며 수첩으로 쓴 홀笏은 진나라, 한나라, 당나라를 거치며 종이도 발명이 되고 관복 등의 각종 예법이 심화되면서 그 본연의 목적과 용도는 퇴화하여 사라졌고 그 대신 중요하고 예의있는 자리에서 관료의 품위와 정갈함을 보여줄 때 사용하는 격식용 의례용품이 되었습니다 그럼 홀이 신하들이 쓰는거면 왕은 수첩을 뭘 썼을까요? 주나라 시절의 기록에 따르면 왕과 제후가 쓰는 그것을 규(圭) 라고 부릅니다 규라는 한자가 흙토 土 글자 두개가 합쳐진 글자입니다. 왕이 제후에게 땅을 나눠준다는 의미를 담은 형성자에서 유래합니다. 왕과 제후가 쓰는 걸 특별히 규圭 라고 부르고 이걸 홀笏과 구분하게 되는 이유죠. 규는 단순한 도구를 넘어 땅을 다스리는 지위를 상징하기 때문입니다. 의류 명품에도 급이 있어서 보통 회사들 명품 브랜드가 있지만 끝판왕은 그냥 디자이너 이름 그대로 박은 것이듯 신분의 상징으로 자질구래하게 상아니 나무니 구별할 필요가 없이 진짜 최고급은 땅을 그 자체를 상징하는 규(圭)를 들고 있는 것입니다 천자가 사용하는 물건의 명칭은 정이다 일명 대규(大圭)라고 하며 천하를 상징하기 때문에 사각형으로 곧게 만든다 제후가 사용하는 규圭는 똑같이 땅을 상징하여 사각형으로 만들지만 위에 천자가 있음으로 겸양의 뜻으로 윗 부분을 둥글게 만든다 -예기 옥조편 시간이 흘러 대규는 사라지고 천자가 사용하는 규(圭)는 진규(鎭圭)라 부릅니다. 진규란 사방을 제압한다는 뜻이며 다스리는 산하(山河)를 상징하고자 윗 부분을 삼각형으로 만들었죠. 더불어 규(圭)를 들수 있는 신분은 오직 황제와 친왕들 작위를 받은 왕, 황후 또는 공, 후, 백, 자, 남 오등관작에 따라 봉토와 작위를 받은 제후만이 사용합니다. 그 땅에 대한 정당한 통치권과 귄위의 상징으로 쓸 수 있는 것입니다.  명나라 만력제의 규(圭) 끝이 삼각형이죠 대한제국 융희황제의 규(圭) 대한제국 선포 후 황제의 격식으로 끝이 삼각형인 규를 씁니다 일본 덴노의 규(圭) 일본은 규의 법식을 늦게 받아 들였고 또 변방으로 예법이 심화되지 못했기에 당나라 시절의 옛날 커다란 규를 여전히 사용합니다 이게 신하들이 왕을 알현 할 때 수첩이자 예식용 장식으로 쓰는 홀笏 이고 이게 황제와, 왕, 제후 들이 왕권과 권력의 상징으로 들고 있는 것은 규(圭) 입니다 백옥의 백색 규는 오직 황제만 쓸 수 있고 제후나 세자는 청색의 규를 사용했습니다 그럼 이런 문화가 동양에만 있는 것일까요?  그리고 이건 어디서 많이 보던 상징이죠 서양의 셉터(scepter)를 말 합니다 서양도 똑같이 왕의 권위로 손에 들고 있고 그것을 왕권의 상징으로 사용합니다. 동아시아 문명에서처럼 무언가를 적고 기록하는게 아니라 아무래도 말 안들으면 신하들 후드려 패는? 용도 같은데 기원은 진짜 오래되었죠 수메르르 문명에서 부터입니다. 그 기원은 대사제, 대제사장이 사용하는 왕의 지팡이입니다 '엔키나 인안나의 신화'에서 부터 권위의 상징 지팡이가 나오며 이는 그리스 로마 신화를 가면 더욱 심화되어  신들의 권위 제왕의 귄위의 상징으로 지팡이를 사용하게 됩니다. 이후 그리스 로마의 문화를 이어받은 중세 유럽을 거치며 더욱 퍼졌죠  이런 왕의 지팡이는 일상적으로 쓰는 지팡이와 구분하여 셉터 scepter라는 이름으로 특별히 부릅니다.  아마도 이런게 아닌가 합니다 지금 인디언 문화에서도 흔적을 알듯 고대에는 사람이 오래 장수하고 노인이 되는 것이 매우 희귀하고 어려운 일이었죠. 때문에 그 사회에서 노인은 곧 지혜의 상징이자 변화를 아는 현자로 제사장, 군장의 대우를 받았습니다 그리고 노인들은 지팡이를 썼죠 대부분 노인들이 지팡이를 쓰지만 그 중에 특별함을 인정받은 노인은 대제사장, 대군장의 신분으로 살았고 그 지팡이는 권위와 왕권의 상징이 되었습니다 이는 다른 지팡이와 구분하여 일종의 상징적 의미로 쓰는 물건이니 새로운 단어로 불렀던게 아닌가 합니다  이는 동아시아에서도 나타나는 것으로 고대국가에서 중신이나 원로가 장수하면 황제나 왕은 그 공로를 치하 하며 궤장이란 것을 하사했죠 '궤장'은 노인이 쓰는 지팡이과 의자를 말합니다. 이는 받는다는 건 신하에게 엄청난 영광으로 나라의 원로로 대접하고 황제와 왕이 그 지혜를 배우겠단 의미를 담아 존경을 표한 것입니다 참고로 지금 대한민국에서도 노인들의 연세가 100세가 되면 대통령 이름으로 국가에서 지팡이를 선물로 지급하게 됩니다 이런 지팡이는 과거에 시대에 나름의 문화적 전통에 따라 권위의 상징이 되었고 그 자체로 특별한 물건이 되었습니다 scepter 셉터 그리고 이런 셉터는 특히 성경에 매우 많이 나옵니다. 일단 모세도 사용하고 성경에 나오는 각종 예언자, 지도자 전부 셉터를 들죠 근데 이런 성경의 이야기가 동아시아로 넘어 오면서 작은 헤프닝이 발생했습니다. 성경을 번역해야하는데 거기에 나오는 scepter를 뭔 단어로 바뀌야 하는가? 였죠 당시 동아시아에서 기독교를 수용한 계층은 지식이 해박한 계층이 아니었으며 대부분 국가적 사회적 탄압을 받았으니 예법을 알 수도 없었죠 그래서 이것을 초창기 기독교가 동아시아로 전파되며 성경을 번역할 때 셉터scepter 를 왕홀(王笏) 이라고 번역했습니다 왕(王) + 홀(笏)의 합성어이죠 높으신 나으리들이 평소 손에 무언갈 들고 댕기는데 그게 홀이다. 근데 성경에 보니 거기에도 사람들이 비슷하게 손에 들고 다니더라. 어라? 근데 다른점은 신하나 관리가 아니라 왕이 들고 댕기네? 아하~왕이 쓰는 홀인가 보다~ 하고 '왕홀'이라 번역했지요 사실 오역입니다 동아시아에서 왕이 손에 드는건 위에 이미 설명 드렸듯이 이미 규(圭)라는게 있고 실제 셉터의 의미도 동아시아의 '규' 가 가장 비슷한 왕권과 위엄을 상징하는 역할을 합니다. 홀은 그냥 신하들이 쓰는 장신구거든요 이게 어떤 번역의 느낌인가 하면 영어의 'father'를 번역하며 바로 아버지라고 안하고 삼촌이라 번역한 뒤 나를 낳아준 + 삼촌 ? 친부삼촌? 이딴 단어를 만든 경우입니다. 이후 중국에서는 왕홀을 규圭라고 정정해서 성경 번역을 했으며 한국에서도 최근에 들어서야 다시 규로 고쳐 번역을 하는 중입니다 하지만 언어라는게 한번 사용하고 다수가 쓰면 그 자체가 독자적 의미를 가지는 법이죠 우리가 핸드폰이라는 콩글리시를 쓴다고 이제와서 고치지 않듯 지금 해당 단어를 쓰는 사람들이 그것이 가르키는게 뭔지 알면 언어의 효용은 사실 충분히 다한거죠 왕홀이란 말은 한국, 일본 등에 이미 자리를 잡았고 많이 사용되는 단어입니다 게임에서 이렇게 생긴 물건을 특템하게 되면 왕홀 먹었다! 라고 알게되죠 뭐라 부르고 뭐로 쓰던 특템 잘하고 렙업만 잘하면 되죠 전혀 쓸데없지만 어디선가 한번은 써먹을 법한 홀, 규, 지팡이, 셉터 그리고 왕홀 이야기였습니다. 끝. 펌) 출처 저걸 홀과 규라고 부르는 거였구려! 둘이 다른 이름으로 불린다는 것도 몰랐소. 뭐 이름조차 모르긴 했지만... 알아도 몰라도 상관없지만 재미난 역사 이야기 오늘도 한 번 가져와 봤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