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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상, 한국인의 얼골
이채, : 조선 후기 유학자. 전우, :유학자, 호는 간재 :전북 전주 출신으로 호남 기호학과 거장이자 항일운동가였던 간재 전우(1841-1922)의 70세 초상화. 최익현, :유학자 이자 항일의병장 . :면암 최익현(1833-1906)의 74세의 모습. : 1905년 을사조약이 체결되자 노년의 몸으로 의병을 일으켜 싸우다 체포되어 유배지인 쓰시마 섬에서 생을 마쳤다. 황현, : 매천야록의 저자, 호가 매천 : 경술국치 후 음독자결. '나는 조정에 벼슬하지 않았으므로 사직을 위해 죽어야 할 의리는 없다. 허나 나라가 오백 년간 사대부를 길렀으니, 이제 망국의 날을 맞아 죽는 선비 한 명이 없다면 그 또한 애통한 노릇 아니겠는가? 나는 위로 황천에서 받은 올바른 마음씨를 저버린 적이 없고 아래로는 평생 읽던 좋은 글을 저버리지 아니하려 한다. 길이 잠들려 하니 통쾌하지 아니한가. 너희들은 내가 죽는 것을 지나치게 슬퍼하지 말라.' 얼을 담은 골 ; 얼골 얼굴, 얼굴에는 얼이 담긴다 하여 그림에도 정성을 기울였다. 조선시대 초상화 제작과정 초상화 제작 단계를 기준으로 초본과 정본 으로 크게 나눌 수 있다. 초본은 초상화의 시작단계에서 인물을 묘사하는 밑그림을 말하며 정본은 초본의 단계에서 수정과 보완을 거친 후 이를 바탕으로 완성된 초상화를 말한다. ​ 초상화를 제작하는 방법은 도사,모사, 추사 세가지로 나눌 수 있다. 도사는 화가가 직접 인물을 보면서 초본을 그린다. 모사는 기존의 초상 위에 종이를 올려 놓고 초본으 베끼고 추사는 참고 할 초상화가 없으므로 상상하여 초본을 그린다. 비단 정본제작 나무틀에 비단을 고정하여 물감이 번지지 않게 하기 위해 녹인 아교(접착제)를 칠한다.이를 아교포수라고 한다. 완성된 초본 위에 나무틀에 묶은 비단을 얹여서 초본의 먹선을 따라 비단 위에 먹선을 그린다. ​비단 뒷면에 배채를 한다. 비단앞면에서 음영을 넣고 색과 선을 마무리하여 완성하다. ​
스압) 조선 유교, 성리학, 붕당정치 총정리
아무생각없이 재밌어서 가져온 건데 넣고 나니 엄청 길다오. 각오하고 보시오. 하지만 알아두면 피가 되고 살이 되는 지식에다 꿀잼이기까지 하니 읽어서 나쁠 것 1도 없소. ___ 우선 성리학의 탄생부터 시작해 봅니다. 유학은 춘추시대 탄생한 이래 한나라를 거치며 준종교 형태의 중앙집권적 정치 수단 발전했고 사실상 국가 통치이념으로 활용되던 시기가 있었습니다. 이를 정리한게 동중서란 인물입니다. 동중서의 유교사상을 간략히 정리하면 백성이 황제에게 복종하는 것이 하늘의 뜻인 천명에 순응하는 것이고 그로인해 천하가 태평해진다. 이게 어찌 설명되냐고요? 바로 충,효를 통해 이뤄집니다. 지금도 우리에게 익숙한 부모에게 하는 효와 국가에게 하는 충을 상호 연결한 '충효사상'이 이때 만들어진 것이죠. 우리가 흔히 유교를 이야기하면 공자, 맹자, 논어를 생각하기 쉬운데 유교 경전중에서 최초로 경"經"전이 된 책은 다름이 아닌 '효경'이란 책입니다. 공자의 수많은 제자 중에 하나에 였던 증자는 유학이 다시 부흥하는 과정에서 증자의 제자들 세력이 유학 교단에서 급성장 하면서 다수가 되었고  공자의 다른 제자와 학파를 모두 꺽으며 주류 정통으로 자리잡았고 스승 자"子"를 붙인 독보적인 성인의 반열에 올르게 됩니다. 공자-증자-맹자로 이어지는익숙한 유학의 계보가 이때 만들어졌죠. 그가 쓴 '효경'을 통해 우리가 접하는 오늘날의 '유교'가 정립되었습니다 효경이 말하는 바는 간단합니다 너를 낳아 준 부모에게 효도하듯 너를 돌봐 주는 군주에게 충성하라 부모와 자식의 관계는 인간의 가장 원초적인 윤리입니다. 누군가 가르쳐서 아는게 아니라 삶으로 깨우치는 직관적인 가치죠 원래 공자는 효의 의미를 "부모가 너를 낳아주고 아기에서 걸을때 까지최소 3년을 붙어서 보살펴 주었는데 부모님이 돌아 가신 후 우리도 부모 은혜를 최소 3년은 생각해야 하지않겠냐" 라고 인간에 대한 예의와 의리라는 관점에서 가르쳤다면   증자는 이를 절대적인 예법으로 만들었습니다.  부모님의 상은 무덤 옆에서 3년을 치뤄라 효는 인간에게 가장 중요한 가치다 봉양과 제사는 그 어떤 예법보다 중요하다. 라고 좀 단순 무식하게 정리했습니다   그 영향은 어마어마 했죠 진나라가 멸망한 후 들어선 한나라는 기존의 법치를 대신할 국가이념으로 유학의 효경을 국교로 채택했습니다. 백성이 국가를 이해하고 복종하게 하는데 법가의 폭력과 형벌을 제외한다면 자발인 복종을 이끌어야 하는데 왜? 황제에게 복종해야 하는지 설명하는건 보통 매우 어렵죠. 이 한나라 시기에 유학의 증자 일파가 효경을 통해 이를 해결한 것입니다. 효경은 인간의 가장 작은 가족에서 시작해 궁극적으로 국가 전체에 모두 적용 가능한 논리를 세웁니다. 가족에서 효를 통해 부모에게 복종하고 사회에서 예를 통해 어른에게 복종하고 국가에서 충을 통해 황제에게 복종해라  지금 우리가 충,효 라는 윤리가치로 너무나 익숙한 개념 동양의 수직적 계급 구조를 본격적으로 정립한 경전입니다. 지금 대다수가 거의 물과 공기처럼 공유하고 너무 익숙하죠 충효忠孝사상 공자의 제자인 증자가 정리 한 유교의 이념이자 지대한 영향을 끼친 사상이죠 유교라는 종교의 신은 가족과 국가입니다. 공동체 그 자체인 것이죠. 서구인들은 쉽게 이해를 못하지만 동아시아 한,중,일 베트남 등 유교 문화권 국가들에게선 너무도 익숙하고 당연한 가치관입니다 서구가 18세기에 이르러서야 국민국가를 성립하고 만든 애국주의, 민족주의란 개념은 제국주의 시대를 거치며 본격적으로 세계로 전파되었지만 그것이 동아시아에 알려졌을 땐 그 어떤 문화권 보다 빠르고 또 매우 강력하게 흡수되었습니다. 공동체 중심의 가치관은 따로 교육해서 알 필요가 없는 지난 2천년 간 채득한 개념이거든요 때문에 유교문화권 국가들의 특징은 국민국가 근대화로의 전환이 가장 빠르고 자본주의 조직문화에 적응과 발전이 무섭도록 빠르게 수용했단 특징이 있습니다. 일본-한국,대만,홍콩,싱가포르-중국,베트남으로 이어지는 국가의 급속한 산업화와 경제성장을 논할 때 막스베버의 이론인 프로테스탄티즘과 자본주의 개념을 차용하여 유교 자본주의 개념을 주장하는 것도 바로 이런 이유 때문이기도 합니다. 다시 돌아 이런 유교의 정립과 포교는 전반적인 사회 안정을 가져와 한 제국을 400년 간 이끌었지만 그런 번영도 결국 한 나라의 멸망과 함께 그 수명을 다하게 됩니다 후한 말에 이르게 되면 효-충으로 연결되는 국가 통치의 정점에 있는 황제라는 존재는 철저히 부패하여 한 영제와 같은 멍청한 황제가 나오고 그 권력을 휘두르는 십상시가 나오고 시스템이 박살이 납니다   또 권력을 휘두르는 권신들 (망탁조의)로 황제=천하라는 개념은 무너지죠 가장 기본이 되는 가족 공동체들은 극심한 기근과 전란으로 모두 붕괴하면서 유랑민이란 이름으로 개인과 개인 단위로 이탈해 흩어졌습니다 그런 난세의 시대에 접어들자 백성과 국가는 단절되면서 개인들이 각자 구원을 찾았고 무용지물이 된 유교의 공백을 형이상학 종교가 대체를 하게 됩니다 인도에서 전래된 불교가 이런 새로운 형이상학의 개념을 알렸습니다. 형이상학을 기반으로 한 고등 종교가 동아시아에 등장한 것이죠 불교는 후한 초기 처음 전래되어 빠르게 퍼지면서 유교를 대체한 이념으로 점차 민중들에게 알려졌습니다. 유교에 그 위상을 내어 주며 민간신앙으로 도태했던 도가 학파 또한 이 불교의 영향으로 빠르게 종교화 되었습니다. 도가사상은 중국 토속민간 신앙과 죽음 이후의 초자연을 설명하며 도교라는 종교로 발전하게 됩니다. (* 한국은 도교를 사상으로 수용했고 종교로 받아 들인게 아니기에  도교 사원인 도관이나 도사들이 없죠) 도교라는 종교가 본격적으로 알려진 것은 황건적의 난으로 유명한 태평도와 한중 지역에서 유행한 장노의 오두미도입니다. 태평도는 황건의 난이 평정되며 사라졌지만 한중의 오두미도는 조조에 투항한 후 지속적으로 전파 발전하였고 오늘날의 도교로 성장하였습니다. 모두 후한 시기에 일어난 현상으로 한나라의 멸망과 함께 유교가 한계점을 보이며 동아시아에서 사회적 종교적 영향력을 불교와 도교에 내어주었던 시기입니다. 원시 유교가 가지는 근본적인 한계는 형이상학 철학의 부재입니다. 죽음 이후의 세계, 진리라는 가치를 관념적으로 설명하지 못하는 학문이죠. 이런 결정적 단점으로 인해 유교는 정치 예법이자 규율로 제한적 활용만 될 뿐 사회의 백성들에게 윤리적 지침은 불교와 도교가 역할을 담당하게 됩니다. 당나라 시기에 이르면 노자의 성과 당황실의 성이 같다며 국교로 우대한 도교와 민중들의 신앙으로 절대적으로 자리잡은 불교가 상호 결합하여 불교사상에 도교적 깨달음의 개념을 넣은 선불교禪佛敎가 탄생하게 됩니다. 불교는 정착한지 수백년이 지나며 크게 성장한 상황이었습니다. 삼장법사의 서유기 전설로 대표되는 2번에 걸친 불교경전의 수집이 당나라 시기 완료가 되자 불교사상에 대해 완전히 이해했다는 자신감을 바탕으로 동아시아에서 불교를 독자적으로 발전 시키는 단계에 이른 것이죠 불교는 더이상 경전의 내용이 뭔지 정확히 해석하는 단계를 넘어 도교와 결합하여 동아시아 특유의 철학사상을 가진 발전 된 종교로 성장합니다. 오늘날 한,중,일 현대 불교의 주류는 모두 이 시기 선불교를 이어받았습니다 이렇게 당나라 시기를 거치며 불교가 선불교로 거듭나며 그 영향력을 확대 할 때 동시대 함께 성장한 새로운 신분 계층이 있으니 사대부라는 학자,정치인들입니다 수나라 당나라는 동아시아 최초로 과거제도를 도입한 왕조입니다. 그 목적은 위진남북조 시대 군림한 문벌귀족을 견제하고 황제에게 충성을 할 신하들을 새로 양성하기 위함이었습니다. 때문에 문벌귀족이 아닌 충효를 중시한 유교를 학습한 이들을 시험으로 뽑았고 당연히 시험 과목도 유교 경전이었습니다 이렇게 유교 경전을 심도 있게 학습 한 새로운 신분 계층들이 양성 됨에 따라 당나라 말기에 이르면 본격적으로 이들이 기득권 세력으로 자리를 잡기 시작했고 송나라 시기엔 완전한 정치 권력화 이룹니다 이들을 사대부 계급이라 부릅니다. 사대부 계급은 본질은 유학자들입니다 오랜 기간 정치 예법으로 사용 된 유교를 보다 깊게 공부한 학자들이고 유교 생활을 문화적으로 수용한 계층이죠  이 사대부라는 학자들을 통해 유교는 보다 발전하여 불교, 도교와 결합을 진행했으니 유교는 송나라를 거치며 기존의 한계를 극복하고자 하는 유교의 형이상학화 운동이 벌어집니다. 즉 유교의 철학화 종교화를 시도하게 됩니다. 이때가 송나라 시대죠 당시 불교는 시골의 촌부조차도 금강경의 구절을 줄줄이 암송할 정도로 지대한 영향을 끼쳤고(오늘날 초등 학생도 예수의 탄생인 성탄절을 알고 아담과 이브의 천지창조를 알듯 말이죠.) 당연히 사대부들은 유교의 철학화 과정에서 이를 설명하는 방법으로 불교를 차용했습니다 유교를 통해 철학을 논하고 형이상학을 이야기 하려면 불교를 빌어 오는 수 밖에 없죠. 간단히 말해 과거 정치예법에 불과했던 유교의 이념을 불교식으로 설명을 시도한 게 바로 성리학입니다. 송나라 때 발생한 유교의 형이상학화 경향운동이죠. 이것을 완성한 건 남송 시기 주자 라는 인물이고 때문에 주자학이라고도 합니다. 성리학, 주자학, 신유학 모두 같은 말입니다. 전혀 감흥 없는 구호 춘추시대로 돌아가자?? 따위나 공허하게 외치고 나와 상관 없는 정치 관료들의 예법에 불과 하던 그런 죽은 사상이 된 유교를 되살리기 위해 유교를 종교화 시킨 것 정확히는 선불교화를 시켰던 것이 바로 성리학인 것이죠 . 간단히 알수 있는 게 불교에서 누구나 부처가 될 수 있다 라는 주장은 성리학에서 누구나 군자가 될 수 있다 로 그 용어만 바뀌었을 뿐입니다. 불교가 깨달음, 참선, 수행으로 부처가 되는 것을 가르친다면 성리학은 공부와 수신제가로 군자가 되는 것을 가르칩니다 여기서 역사를 좋아하는 분들은 어라? 하는 생각이 들죠 성리학을 숭배한 조선의 경우 불교를 철저히 탄압했죠. 이슬람-기독교, 카톡릭-개신교처럼 자기와 닮은 이들를 결코 용납 못하는 것이 '종교'의 일반적 특징이 아닌가 합니다 정치란 기본적으로 인간이 인간을 대하는 방식을 제도화한 시스템이니 그 정치의 기본은 "그 인간이 어떤 존재인가를 설명" 하는 것에서 출발합니다. 이것이 춘추시대 성선설과 성악설 논쟁의 본면입니다. 유교는 이런 논쟁에서 성선설을 통해 정치시스템을 구축한 학문입니다. 성선설을 바탕으로 한 인간의 본성이 무엇인가를 보다 철학적 의미로 설명한 게 이와 기의 상호작용을 논하며 장황한 썰을 풀었던 주자의 본성론이고 이것을 이론화 시킨 것이 이=성, 기=정 즉 성리학을 말합니다. 인간의 본성에 대한 논의를 고담준론으로 어렵게 철학으로 말한 이론이다, 간단히 정리 하심 되죠 (고려에 성리학을 전파한 안향) 송나라의 이런 유교를 변형한 신학문은 고려에도 전파되었고 과거 유학을 배운 지식인층에게 영향을 주며 한국도 고려말에 사대부계급을 양성하게 됩니다. 정치의 철학화라는 것은 이념을 종교적 신념의 수준으로 국가에 적용하고 구축하고자 하는 강렬한 경향을 내포합니다. 학문 또는 사상이 철학화 종교화 된다라는 게 어떤 의미인지 감을 잡아 보자면 현대의 극단적인 이데올로기들을 떠올리면 됩니다. 공산주의.나치즘, 와하비즘, 뉴라이트, 티파티 등등 실질적 효용이나 학문적 가치를 이미 넘어 일종의 신념의 영역이 되는 것을 말하죠 한반도의 성리학 역시 단순 학문, 정치이념을 넘어 기존의 질서를 바꾸고자 열망을 품었고 고려 말에 이르면 사대부 계급을 중심으로 새로운 국가를 개창하고자 급진화되죠. 고려말 성리학을 받아들인 사대부들은 이런 새로운 이념을 바탕으로 정치시스템을 재구축하고자 국가를 개혁하려고 시도 합니다. 고려말 이런 혁명가 지식인 그룹을 신진사대부 라고 부릅니다. 그것을 이루기 위한 방법으로 온건파와 강경파가 나뉘어지는데 온건파는 정몽주로 대표되는 사림으로 고려왕조를 기본으로 개혁을 통해 바꾸어 나가자는 입장이고 강경파는 정도전으로 대표되는 관료층으로 불교국가인 고려왕조에서 이상을 펼치는 것은 한계가 있으니 고려를 무너뜨리고 신왕조를 개창해 뿌리부터 새로운 국가를 만들자는 입장입니다. 유교의 이념과도 연계하는데 맹자의 역성혁명 사상을 보듯 기본적으로 신왕조의 개창이 명분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고려의 군왕이 맹자의 지적처럼 무도한 혼군과 폭군이 아닌 이상 이를 거부하는 것은 충효의 가치와 강상의 질서를 교란하는 도리를 넘어선 과한 행위가 됩니다. 유학 자체가 원래  국가의 개혁을 상당히 보수적인 입장에서 보는 시각이기 때문이죠 성리학을 어떻게 적용하는가에 대한 고민을 두고 사대부들이 갈라진 것입니다.   강경파의 경우 조선을 개창하며 공신이 되어 훈구파가 되었고 온건파의 경우 고려를 옹호하며 은거하여 조선 정계진출을 거부하였기에 사림이 됩니다. 때문에 조선 초기 세종 연간에도 사림에서는 여전히 조선의 건국을 반역으로 보는 시각이 강했습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조선 건국 100년이 지나 고려의 재건이란게 사실상 불가능한 시점에 이르고 실제 조선의 통치가 안정적으로 자리잡아 가며 신국가의 새로운 체제가 정립 되자 사대부 온건파 즉 사림에서도 100여 년의 은거를 풀고 조선정계에 진출 하고자 시도를 합니다. 이미 연산군 조에 들어 서게 되면 소수의 공신들이 권력을 독식하는 것에 대한 왕권의 견제가 나타나게 되고 지방에서 오랜 기간 학문을 연구하며 기본에 충실한 인재들이 다수가 양성되는 가운데 사림의 제자들이 중앙 정계 새로 진출해 기존의 훈구파 권력을 잠식해 들어가게 됩니다. 결국 훈구파 - 사림파 간에 중앙 권력을 두고 갈등이 발생합니다. 이 대립 상황 속에서 훈구파들이 자신들의 위협을 제거하고자 극단적으로 반응한게 바로 조선 초 벌어진 사화(士禍)라는 것입니다. 이미 세조 연간부터 사림은 중앙정치에 영향을 끼치기 시작했습니다. 연산-중종 연간에 이르러 사림의 진출이 본격화 되자 이들에 대한 극단적인 폭력을 가한 것으로 훈구파의 주도로 이뤄진 무오사화, 갑자사화,기묘사화로 일컬어지는 사림 숙청들입니다. 이유는 다양한 사연이 있지만 기본 골격은 조선 건국 100년을 거치며 사대부들이 양반 계급으로 성장해 조선왕조라는 권력을 두고 쟁탈전을 시작했단 뜻 입니다. 조선이란 국가는 매우 특이한 왕조입니다. 중세시절 다른 문화권에서 찾기 힘든 매우 정교한 학문기반 정치를 시스템화한 국가입니다. 이런 나라에서 중앙 권력을 양성하는 방식이 유교란 학문과 이념을 명분으로 한 이상 정치 시스템상에서 권력쟁탈의 명분과 도구도 학벌과 학문적 역량 투쟁이 됩니다. 과거제를 도입한 국가의 특징이기도 한데 당나라의 경우에도 비슷한 패턴이 있었습니다. 위진남북조를 내려온 혈통 중심의 문벌귀족과 과거제를 통해 진출한 사대부간의 갈등이 있었고 궁극적으로 사대부가 문벌귀족을 대체했죠 유교 문명권의 중앙집권적 국가는 그 지배층이 일반적인 혈통, 공적 중심의 봉건적인 귀족 권력이 아닙니다. 이들 기득권 계급은 그 기반이 공부죠, 특이하게도 학문적 역량과 그 성과를 중시합니다. 유교 중앙집권 국가는 문인 학자 층이 정치 권력이 되는 구조이죠 때문에 유교 문화를 가진 국가에서는 공부와 학벌이 곧 신분상승, 출세와 동급이란 개념으로 자리잡아 거의 본능적으로 공부를 중시하는 문화를 가지게 되었죠  교육열이 종교적 수준으로 매우 강하고 덕분에 인력 수준이 우수하단 장점이 있습니다 모두 역사적 경험의 결과물입니다. 조선이 이런 유교를 국시로 건국 한 국가인 이상 심도있는 유교 학문과 이론을 철저하게 무장한 사림의 진출은 더이상 강제 억제할 수 있는 대상이 아닌게 되어 버린 것이죠 조선 명종 연간을 거치며 왕권과 훈구파 권력에 큰 영향을 끼치던 문정왕후 섭정 기간이 끝나자 마지막 훈구파도 전부 숙청되어 소멸해버렸고 사실상 조선 정치의 대세는 사림으로 넘어가게 됩니다. 15세기~16세기는 전 세계적으로 천재가 가장 많이 등장한 시대였습니다 조선에서도 천재들이 등장했죠 천원 아재 퇴계이황, 오천원 아재인 율곡 이이입니다 이황은 에도시대 일본 성리학의 성립에 영향을 준 천재 사상가이고 이이는 9번 장원급제했다 하여 '구도장원공'이란 별칭이 있죠. 23살에 쓴 '천도책' 이란 어마어마한 시험 답안지가 지금도 전해집니다. 내용은 어차피 봐도 우린 몰라요. 이 같은 천재적인 유학자의 등장은 조선의 성리학을 보다 심화시켜 나갔습니다. 영남학파로 상징되는(영남좌도 학파) 이황의 경우 주자의 이기이원론을 기본 골격으로 그 역시 이기이원론을 주장하며 주리론으로 발전시킨 사상가입니다. 사실 성리학의 내용은 복잡한 형이상학 수사가 많아서 바로 이해하기 힘듭니다. 이는 오늘 날 머리가 뽀개지는 우리 뿐만 아니라 조선시대에도 마찬가지 였습니다. 때문에 이황은 성학십도라는 그림 책을 청년시절 평범한 군주인 선조를 위해 보고 좀 제발 배우라는 뜻에서 써줬고 성리학을 친절히 그림으로 설명한 바 있습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우린 저 성학십도 조차도 봐봐야 여전히 이해 못 하죠. 그냥 저런 그림이 있단 장도만 알면됩니다. 대신 좀 더 간단하게 생각하면 됩니다. 사실 일상에서도 쉽게 사용하는 용어와 단어이기도 하죠 "저 사람은 본성은 착한데 기질이 나빠서 문제야" "저 사람의 기질이 저러하니 ㅉㅉ " 이런 무심코 쓰는 용어가 성리학이 일상화된 흔적입니다. 이는 즉 성으로 인간의 본성을 의미합니다 기는 즉 정으로 본성을 감싸고 있는 기질을 의미합니다. 이가 인간의 본성으로 불변의 성질이라 한다면 기는 이것을 감싸고 외부에 나타나는 표면적인 성향이란 말이죠. 맹자의 4단 측은지심(위험한 아기를 구하고자 하는 인의 마음) 시비지심(틀린 것과 옳음을 구분하고자 하는 마음) 수오지심(악한 것을 미워하는 마음) 사양지심(부끄러움을 아는 마음) 이것들은 어떤 교육과 경험으로 아는 것이 아니라  인간이라면 누구나 기본적으로 가지고 있는 인간 본성의 영역입니다. 사이코패스가 아닌 정상인인 이상 따로 교육하지 않아도 인간이 때문에 가지는 품성이고 맹자는 이렇기 때문에  인간의 본성이 선하다는 증거라 주장했습니다. 이 4단이 바로 의미하는게 "이"라는 즉 본성 "성" 불변하는 인간의 본성입니다. 7정이라 하여 喜怒哀懼愛惡欲 기뻐하는 마음  화나는 마음 슬퍼하는 마음 두려워하는 마음 사랑하는 마음 미워하는 마음 욕심이 드는 마음 이런 감정은 외부로 표출되는 인간 감정 성향으로 사람을 교육하고 다스리는 정도에 따라서 기쁘나 내색하지 않을 수 있고 화가 나나 자제할수 있으며 슬프나 억제할수 있고 두려워하나 견딜수 있으며 사랑하나 감출수 있고 미워하고 참고 욕심이 드나 다스릴수 있습니다. 통제가 가능한 외부에 표현되는 감정과 양태들 이것이 바로 "기" 이며 "정"이라는 것입니다. 이황은 성학십도에서 표현하길 본성이 그 중심에 있고 이런 기질이 외부를 감싸 안으며 나타 난다고 합니다. 흔히 "본성은 착한데 기질이 탁하다" 라는 말은 그 사람의 본성은 바른데 잠깐 나타난 성질 때문에 겉으로 안좋게 보여 질 뿐이라고 완곡하여 누군가를 평가하는 방식이죠. 그러니까 사람이 배우는 것도 가려진 본연의 착한 본성이 드러나도록 기질을 다스리고 맑게 하여 본성을 드러내는게 바로 유교가 말하는 수신 즉 배움의 과정이 됩니다. 이황은 본성과 기질은 서로 다른 존재이며 서로작용하여 나타난다 이기호발설 이것이 나타나는 방식으로 본성은 변하는 것이 아님으로 본성이 이끌고 나가며 기질이 뒤따른다 이발기수설 설령 기질이 앞선듯 보이지만 이가 이를 타며 나타난다 기발이승설 이런식으로 인간의 본성을 주장하였습니다. 다시 더 쉽게 풀면 현대 서양 철학 용어에 우린 더 익숙하죠. 성리학에서 말하는 "이" "성" 이라는 것이 우리가 흔히 말하는 그 "이성" 이고 "기"는 "감성"의 영역입니다. 오늘날 우리가 접하는 서양 철학과 서구의 철학 용어를  번역할 때 쓴 게 바로 성리학 용어입니다 완벽하게 같은 개념은 아니지만 칸트의 순수이성 기독교의 절대신. 이데아 등등이 성리학이 말하는 '이'의 영역이며 현실의 양태, 시뮬라르크와 같은 모방 자연상태의 경험과 감정이 '기'의 영역입니다 흥미로운 게 16세기를 기점으로 서구 철학도 관념론, 형이상학을 탈피해 경험과 현상의 중시 영역으로 나아갔듯 성리학은 명나라 시절 양명학이란 개념으로 '기'의 개념을 더욱 중시한 학문으로 나아갑니다 서양철학까지 이야기하는게 풀기는 커녕 더 꼰거 같아 보인다면 걍 ㅇㄱㄹㅇ 하고 넘어가면 됩니다  이거 알아봐야 사는데 전혀 쓸데 없죠 그냥 이런 흐름이다 이런 느낌이다 정도만 알면 됩니다. 스압 보면 알지만 앞으로 볼 내용은 더 많거든요... 그리고 위에 설명한 내용은 이황과 기대승이 서신으로 논쟁을 하며 서로 나눴던 성리학의 논쟁이기도 합니다. 당시 기대승은 막 과거에 급제한 관리였고 이황은 영남학파를 이끄는 거두이자 성균관 대사성으로 있던 대유학자였죠. 오늘날로 치면 9급 공무원 시험 합격 한 청년이 서울대학교 총장에게 이멜을 보내서 키배를 뜬 경우입니다 그럼에도 이황은 편지에 하나 하나 진지하고 성실하게 답변하였고 심지어 논쟁을 수년 간 지속했습니다. 인터넷 키배는 체력전이고 정신력 싸움이죠. 하루 밤새 머리끄댕이 잡았다고 쉽게 포기하며 정신승리 시전하는 요즘 풍조를 보면 우리 조상님들의 진지하고 성실한 키배 자세를 배울 수 있는 대목이죠 그리고 이런 성리학의 논쟁은 더욱 발전하여 조선 중기 성리학은 주리론 <=> 주기론으로 분화되어 논쟁하게 됩니다. 즉 이성이 가장 중요하다는 주리론의 입장을 요약하면 본성과 기질은 다른 것이다 라는  이기이원론의 입장에서 겉으로 표현되는 것 보다는 본성, 본질이 더욱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서구식으로 따지면 현상 너머에 있는 진리가 더욱 중요한 가치라 여기는 것이니 철학에서 보면 연역적 사고와 관념적 추론을 중시한 대륙의 관념론적 철학 사조 입장과 매우 유사하다고 생각하시면 됩니다. 반대로 이이의 경우 이에 반박을 하며 주기론 이기일원론을 주장합니다. 이와 기는 서로 따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함께 섞여서 존재하는 것이며 이황이 말하는 사단과 칠정으로 구분하는 것은 논리적으로 모순된다고 주장했죠. 즉 이와 기의 구분이라 설명한 4단과 7정은 따지고 보면 7정의 선한 부분만 골라서 구분한게 4단에 불과하다 어디서 밑장 빼기냐? 이거죠  구체적으로 모든 물체는 양면성을 가지며 존재함으로 선함과 악함 음과 양을 공유한다는 것입니다. 때문에 이와 기는 구분되는 대립의 개념이 아니라 하나의 존재가 각기 다른 형태로 표현된 동일한 양상에 불과하다 주장합니다. 이걸 뽀대나게 이기일원론 이라 합니다 어떤 존재가 나타나는 것이 바로 기라는 것이고 그것이 나타나는 이유가 이라는 것이므로 기가 발하여 이가 타는 것은 가능하나 이를 발하고 기가 뒤 따르는 것은 불가능하다 설명합니다. 때문에 양자가 결국 같은 존재를 다르게 구분하는 것에 불과하다면 결국 궁극적으로 한 대상의 본질을 알기 위해 탐구해야 할 부분은 본성이나, 이의 영역이 아니라 표면적으로 나타나는 기의 영역이고 그게 중요하다는 것을 의미하게 됩니다. 즉 현실의 영역을 어찌 다스리는가가 곧 인성을 결정하는 중요한 부분이됩니다. 그래서 다른 말로 주기론이라 부르죠. 이는 서구식의 경험론의 입장에서 겉으로 나타나는 행태와 결과를 보다 면밀히 보며 귀납적인 방식으로 기를 통해 발현된 현실의 문제가 중요하다는 주장입니다. 더 간단히 말하자면 성리학이라는 정치에 적용한 인간의 본성에 대한 부분을 가지고 조선식 언어로 관념론-경험론의 관점에서 상호 논쟁을 한 내용인것이죠 아니 왜 이딴 논쟁을 쓸데없이 하는가? 문득 궁금해지는데 바로 인간이란 정체가 뭐냐? 라는 논쟁이고 정치라는 것은 인간을 다스리는 것이니 이걸 규명해야 정치에서 정책을 집행 할 때 그 방향성을 잡을 수 있다입니다.  이걸 오늘날의 정치 사회 언어로 바꿔서 재차 설명드려보자면 오늘날의 언어로 사회와 국가를 통치할 때 주리론 주기론의 입장에서 어찌 되는지 용어를 바꾸면 이런식의 분류가 만들어지게 됩니다. 크게 한 국가의 가치, 법률 제도의 영역을 '리' 사회현상과 산업의 영역을 '기' 라고 하면 다시 그 법률 제도 역시 주리론에서 중시하는 "리"의 영역을 공적인 정의, 윤리라고 보고 주기론에서 중시하는 "기"의 영역을 사적인 이익, 사익이라 봅니다 주리론의 입장에서는 한 사회의 국가는 공익에 충실하고 올바른 가치에 따라 운영을 하면 자연히 생산력 발전과 사회 안정이 따라 온다. 사익과 사회를 잘 제어해서 공적인 정의가 실현되도록 해야 한다 주기론의 입장에서는 국가의 운영인 법률, 제도와 하부 경제인 산업은 유기적인 관계로 경제 생산양식에 변화에 따라 법률과 제도가 바뀌는 것이다. 사익에 따라 사람들이 움직이며 공적인 정의는 이를 제어할 뿐이지 주체가 될 수 없다. 즉 국가를 운영하는이념적 가치의 기준이 뭐냐? 논쟁이 되는 것입니다. 고담준론으로 싸우며 주기론이니 주리론이니 이기일원이니 이기이원이니 당최 뭔 소리인지 알 수도 없는 괴상한 용어로 논쟁할 때는 그딴걸 왜 하나 싶은데  실체는 결국 오늘날 진보와 보수 사회주의-시장주의 간의 논쟁과 비슷한 논쟁입니다. 그 용어를 지칭하는 단어가 다를 뿐이죠. 이제 알게 됩니다. 조선의 정치는 기본적으로 철학을 바탕으로 한 학자들이 인간의 심성이란 이런 것이다. 인간의 성향이 이런 것이다. 각자의 이론으로 연구를 하며  어떻게 백성을 교화를 시키고 어떤 이론으로 국가를 다스리는게 더 나은 정치인지 공부하는 학문적 열정과 마인드로 국가를 통치한 시대입니다. 조선 특유의 학문 기반의 정치 시대였기에 가능한 논쟁이기도 했습니다. 조선의 관료들이란게 사실 따지고 보면 철학과 교수들과 비슷한 존재들로 각 대학의 경제학자, 정치학자, 철학자들이 공무원이 되어 한자리에 모여서 이론이 어쩌네 이념이 어쩌네 하며 서로 논쟁하고 정치하던 시대인 것이죠 이런 퇴계 이황, 남명 조식의 주리론을 바탕으로 학파를 만들고 제자를 양성하며 이런 인맥들과 이런 철학을 바탕으로 만들어진 정치사상으로 정계에 나간 이들이 바로 동인이란 사림집단이고 이런 율곡 이이, 성혼의 주기론을 바탕으로 학파를 만들고 제자를 양성하며 이런 인맥들이 이런 철학을 바탕으로 만들어 진 정치사상으로 정계에 나간 이들이 바로 서인이란 사림집단입니다. 앞서 언급하였듯 명종 말 선조 연간을 거치며 훈구파는 정계에서 완전히 소멸하게 되었습니다. 위의 논쟁을 잠깐 봐도 알지만 무려 100년간 저딴 공부하며 철저히 이론으로 무장한 뒤 잔뜩 이를 갈고 조정에 나온 사림들이니 이새키들을 말빨로 이길 수가 없죠. 사림 집단이 정치판에 나왔을 때 그저 묵묵히 현실 정치만 하며 공을 세웠다며 자랑하는 훈구파를 또 얼마나 무시했을지 한번 생각해 보시면 됩니다 실제로 실록 기록을 보면 사림이 관료가 되자 훈구파를 대놓고 소인배, 무식한 놈이라 모욕합니다. 너무 빡쳐도 막상 맞다이 뜨려해도 훈구파가 말빨로 이길 수도 없죠, ㅡㅡ; 조선 초기 각종 사화의 정체는 말로 안되니 너무 빡쳐서 폭력을 쓴 것이라 볼 수도 있습니다   아무튼 조선 선조 연간은 조선의 붕당 정치가 본격적으로 개막 된 시대입니다. 사림이 동인 서인으로 갈려진 계기는 이조전랑이라는 자리를 놓고 나온 학파 간 다툼 때문입니다. 김효원의 집이 동쪽에 있어 후배 사림들이 동인이라 불리워 지고 심의겸의 집이 서쪽에 있어 선배 사림들이 서인이라 불리워 졌다고 하나 본질은 앞서 훈구파와 사림이 장장 150년을 투쟁한 이유가 한정 된 관료직을 두고 경쟁한 것 때문이듯 이제 사림이 완전 장악한 조선의 정계에서 다시 밥그릇 싸움이 나는게 지극히 자연스런 현상이기도 합니다. 단지 관직과 언로가 연계 된 청요직인 이조전랑 관직이 빌미가 된 것 이죠 이조전랑이 왜 중요한지는 조선이란 국가의 시스템을 봐야 알 수 있습니다. (현대의 삼권 분립과 비교해도 그 역할이 비슷합니다) 조선은 상당히 특이하며 또 매우 정교한 관료제 국가입니다. 장장 500년을 버티게 한 힘이 바로 우수한 관료 견제 시스템 덕분이기도 하죠 이조전랑은 6부에 속한 하급 관직으로 육부와 의정부 등 고관들의 지시를 받지만 이들은 삼사의 임명권을 가진 직위입니다 이조 하급관직이 임명한 그 삼사는 고위관료를 탄핵 할 권력이 있으며 또 왕권을 견제할 힘이 있죠. 중추 권력이 상호 견제를 거미줄 처럼 얽혀서 물리는 관계가 조선 관직 시스템의 구조입니다. 때문에 조선의 정치에서는 어느 일방이 권력을 독점하는게 불가능한 구조가 만들어집니다. 왕권과 신권이 경쟁하고 신권과 신권이 경쟁하며 고관과 언관이 경쟁하죠 이조전랑은 삼사의 임명권을 가진 관직으로 이 자리를 가진 붕당은 조정에서 고관 대작을 탄핵할 수 있습니다. 하급 관리이면서 권력의 최상층부를 저격하며 견제할 수 있는 자리 입니다. 정말 아이러니한 직책이죠. 조선왕조 500년 동안 붕당싸움의 중심이 된 직책입니다 동인의 경우 이황과 조식의 학풍을 배운자들이 뭉쳤고 서인의 경우 이이와 성혼의 학풍을 배운자들이 뭉쳤죠. 선조의 경우 초창기에는 양 붕당을 잘 조절하며 서로 예우도 하고 그 과정에서 왕권을 강화하는 나름의 수완도 보였습니다. 개인적으로 조선에서 가장 안타까운 왕이 선조입니다. 어려서 이황이 성학십도를 바치며 부디 성군이 되기를 희망한 군주였고 그야 말로 천재적인 성리학자들이 대거 나오던 중흥기에 즉위한 군주로 선조의 치세는 신권과 왕권이 조화를 이루던 성리학의 절정기였기에 솔까말 선조는 가만히 닥치고만 있어도 태평성대를 이끌었다 후한 평가 받았을 왕이었죠 근데 이때 터진게 임진왜란이고 본인 자체도 그닥 영리한 왕이 아닌지라 워낙 컴플렉스가 쩔어서 가만히 아닥하던 왕도 아녔죠.... (수능, 공뭔 시험 준비할 때 피를 토하며 암기하는 조선 붕당 계보도..) 일단 동인의 학풍을 이끈 두 명의 학자를 보면 퇴계 이황과 남명 조식입니다. 동인 즉 영남학파의 경우 다시 영남 좌도학파와 영남우도 학파로 나눠집니다. (주의 : 한양에서 보았을 때 좌우 개념입니다. 영남 우도가 낙동강 서쪽이고 영남 좌도가 낙동강 동쪽입니다.) 인간의 본성 심성론으로 정교한 이론체계를 세운 이황이 있는가 하면 기본적으로 이황과 같은 주리론을 인정하며 진리의 추구를 학풍으로 삼지만 남명 조식은 심성론만이 아닌 보다 현실적인 도덕과, 의리에 입각한 도덕론을 주장한 학자입니다. 때문에 임진왜란이 터지자 남명 조식의 휘하에서 공부한 곽재우와 같은 의병장들이 나왔습니다. 임진왜란 대부분의 의병과 강경파가 동인 남명학파에서 배출되었죠. 군왕에 대한 의리와 충절을 중시하며 대의를 위해 싸우자는 정파입니다  이런 선조 연간 동인-서인으로 학문적으로 경쟁하던 때 붕당정치에서 결정적인 사건이 터지니 정여립의 모반 사건입니다. 원래는 정여립은 서인이자 이이와 성혼의 제자로 총명하기 이를데 없어 율곡도 천재라고 칭찬한 인재입니다. 워낙 잘나서 기개도 있고 똑똑한 인물인지라 이황이 그림 그려가며 성리학을 가르친 지극히 평범한 군왕 선조에게 눈을 부라리며 똑바로 간언했죠. 심지어 학풍을 초월해 서인에서 동인으로 넘어가기도 했습니다. 조선시대는 학풍과 스승을 중시하던 시절이지라 서인에서 동인으로 변절한 것은 놀라운 입니다. 컴플렉스 쩔었던 선조는 이런 행위를 두고 똑똑한데 스승을 배신하는 소인배라 경멸했습니다. 그런 정여립이 모반을 했다고 황해도에서 고변이 있게 됩니다. 이때 서인의 영수 정철을 중심으로 정여립이 대동계를 조직해 모반을 꾸몄다 탄핵한 뒤 대대적인 역적 청산 정확히는 동인 숙청이 진행되게 됩니다. 기축옥사입니다. 요점은 동인과 서인이 학문적으로 티걱 태걱하며 논쟁한 정도나 이조전랑 관직을 두고 성품이 인성이 어쩌네 다툼을 하던 시절을 지나 서인 정철이 역모사건을 이유로 반대파인 동인을 대대적으로 살육해 숙청한 사건입니다. 문학책에서 등장하는 관동별곡, 사미인곡 같은 예쁜 문장을 쓴 바로 그 송강 정철 아재가 서인의 영수로 정여립의 모반사건을 추국했는데 이때 정철은 역모에 연루 된 동인 인사 1천명을 죽였습니다 왕조시절 반역이라 함은 당사자는 참수되고 그 일가 친척은 역적 가문이 되어 전부 노비로 전락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무시무시한 죄명이죠. 단지 학문적으로 대립하던 시절에 동인 인사들 1천명을 죽였다는 것이 얼마나 큰 충격이고 파장인지 생각해 보면 됩니다 이때 부터 조선 붕당의 투쟁이란 것은 단순이 이론이니 학문적 이견을 말로 싸우는게 아닌 상대방을 실제 죽여버리고 나아가 가문의 멸족이 달린 생사의 투쟁으로 변질 되게 됩니다. 시작은 예법이니 문장의 내용이니 학문 사상이니 지극히 온건하고 단순한 이유로 발단이 되지만 그 종국에 숨은 목적과 결과는 역모 관련으로 엮어 일가족 모두를 멸족하해 버리는 무시무시한 붕당 정치식 정적 제거가 등장한 것입니다. 이에 대하여 선조의 자작극설도 있고 정여립이 실제 모반을 했다는 설도 있죠. 신권이 급부상하던 시기 좀 멍청하고 컴플렉스 쩌는 선조는 유능하고 똑똑한 동인 서인 신하들의 관직 투쟁을 보다 자극적으로 지휘해서 부수적으로 왕권을 강화하는 수단으로 이용했습니다. 정여립 사건도 이런 성향에서 평소 맘에 안들던 인물을 정쟁에 활용했다는 주장으로 정철의 옥사가 정철의 의도가 아닌 선조의 지시라는 것이죠(조선 후기 숙종의 극단적인 탕평도 생각해 보심되죠.). 기축옥사로 서인의 집권이 단행 되었지만 이 또한 오래가지 못했습니다. 고작 몇년 지나지 않아 기축옥사로 많은 이들이 죽어가며 한을 품었던 동인에서 반격을 한 사건이 건저의 사건 입니다 세자책봉과 같은 문제는 왕권과 직결된 사안으로 신하가 함부로 건드려서는 안되는 영역입니다. 하지만 선조 자체가 방계 출신이고(컴플렉스의 근원이고) 세자도 없으므로 왕통이 불안하죠 동인 이산해를 비롯 동인 유성룡, 서인 정철 3정승이 선조에게 세자책봉을 건의하자 상호 합의를 합니다. 이때 동인 측에서 뒷 작업을 하여 선조가 의중을 두고 있던 신성군을 정철이 제거하려 한다고 악의적인 소문을 낸 다음 막상 경연자리에서 세자 책봉을 건의 할 때 이산해는 출석하지 않았죠 이미 뒤로 이런 내용을 들은 선조는 정철이 면전에서 세자책봉을 언급하자 대노하며 정철을 축출하게 됩니다. 그렇게 뒤통수 거하게 후드려 맞은 서인의 집권이 막을 내리게 되었었습니다 다시 동인이 정권을 잡자 기축옥사에서 정철에게 한을 품었던 이들이 원수같은 정철과 서인의 처우문제를 두고 강경파와 온건파로 또 나뉘게 됩니다 이 때 강경파가 특히 피해가 많았던 바로 남명 조식과 서경덕의 제자들로 이들이 강경파로 서인들 다 죽여 버리자 했으니 강경파 북인이 되고 온건파는 이황의 제자들로 살길을 열어줘야 한다 했으니 이들이 온건파 남인이 됩니다 이들 북인은 학파 특유의 의리와 명분을 중시하는 경향을 바탕으로 임진왜란 거치며 조선에서 주전론의 중심으로 전란 중에 정계에서 활동하였고 학파의 제자들 역시 전국의 의병장으로 활약을 하여 막대한 공훈을 세웠기에 임진왜란 이후 정국의 주도권을 북인이 잡게 되었습니다. 임진왜란 이후 북인이 정국을 주도한 가운데 선조의 후사 문제가 대두되자 다시 의리와 명분을 기본으로 삼는 북인이 또 갈라졌습니다  임진왜란 기간 이미 세자로 책봉되어 분조(전란 기간 조정을 2개 만드는 것)를 이끌고 항전하며 공을 세운 광해군을 지지하자는 이들이 대북이 되었고, 선조도 방계로 혈통에서 취약한데 또다시 서자를 후사로 세우면 문제가 된다는 논리로 명분상 적통인 영창대군을 지지한 이들이 소북이 되었습니다 여기서 선조의 레알 병맛 스러움을 알수 있는데 장성하여 성인인 세자인 광해군이 멀쩡히 살아 있고 심지어 그 광해군은 임진왜란 기간 평양성 방어를 비롯해 분조를 이끌며 명성이 높았는데 선조 놈은 적통 왕자라고 낳은 아직 갓난 아기에 불과한 왕자를 책봉하며 그 작호 이름을 무려 영창"永昌"대군이라 했습니다 네 진시황의 전국옥새에 새겨진 명문 "수명어천 기수영창" 할 때 바로 그 영창입니다. 즉 영창대군이 천명을 받은 전정한 군주이자 적통이다 선언한 것이죠. 선조가 아닌 어떤 군왕도 천명을 받은 왕자라는 이름의 왕족을 옆에 두고 온전히 임금 노릇을 할 수 없습니다 광해군은 적통도 임금도 아니란 뜻이거든요. 그리고 선조는 뒤져버립니다. 광해군이 어린 아이 영창대군을 살리고 싶어도 왕 노릇을 하고 싶으면 도무지 살릴 수가 없는 상황이 된 것입니다. 넌 가짜임금이고 쟨 진짜 임금이라는데 영창대군을 신하로 어케 부려요. 조만간 역모가 필연적인 상황에서 영창대군을 죽인 건 선조임금이나 다름없습니다 광해군이 즉위하며 영창대군을 언급한 소북은 자연히 축출되었고 쫓겨난 이들 소북을 두고 대북이 또 나눠서 칭하길 비록 쫓겨났지만 강직한 기풍을 유지한 이들을 청북 나머지를 탁북이라 부르기도 했습니다. 광해군 연간 집권한 대북의 경우 또 다시 분파하게 되는데 앞서 언급했지만 같은 동인이라 하지만 남명 조식, 서경덕의 제자들로 구성된 북인은 그 학풍이 어떤 일관된 성리학 학문의 이론에 중심을 둔 것이 아니라 도덕론, 의리론, 명분론이 대표적인 것을 보듯 명성이 높은 스승에 따라 학풍이 난잡하게 갈려지는 다소 복잡한 정치세력이기도 합니다. 때문에 대북 내부에서도 각각의 스승과 학파에 따라 또 갈려지며 육북, 골북, 중북 이란 이름으로 구분하였다고 하지만 사실 이런 구분은 광해군 집권기에 스스로 칭한게 아닙니다 그냥 통칭해 북인이라 했죠 이후 광해군을 축출하고 집권한 서인이 대북의 난잡한 학풍을 성토하며 붕당을 이토록 많이 작당했다고 비판 한 훗날 서인들이 지어준 이름입니다. 새로 편찬 한 수정 실록의 기록을 바탕으로 한 내용이기도 합니다 그 실록 이야기를 잠깐 하면 참고로 유교라는 학문은 죽음 이후 내세를 믿는 종교가 아닙니다. 오늘날 우리가 각 집안 마다 제사를 지낼 때 통상 조상님을 위로 5대조 까지 지낸다고 하죠. 이후에는 혼은 승천하고 백은 땅으로 꺼져 혼백이 모두 흩어 진다고 여깁니다. 다만 영웅, 군왕 같이 혼백이 강력한 경우에는 혼백이 영원히 살기에 제사도 영원히 드리죠 이게 무슨 뜻인가 하면 유교에서 죽음이란 곧 끝이고 인간 생과 사의 의미는 후대의 후손이 그 사람의 인생을 기억하는 그 순간까지만 그 사람은 살아 있다 라는 뜻입니다. 지극히 현실적인 종교죠  5대를 넘어 가면 통상 그를 기억하는 후손이 더이상 없으니 제사를 안지내는 것이고 영웅이나 위인 군왕은 역사에 남겨져 사람들이 기억하게 되니 영원히 제사 지내는 것이죠. 남아 있는 사람들의 기억과 삶에 죽음의 가치를 둔 종교입니다 때문에 유교에서 가장 중요한게 바로 역사입니다. 내가 후대에 후손에게 기억되는 수단은 바로 역사라는 것 뿐이고 이 역사를 어찌 쓰는가 청사에 이름을 어찌 남기는가? 는 가장 중요한 유교의 가치가 되죠 유교의 춘추필법은 이런 중요한 역사를 서술하는 원칙을 말합니다 1. 사건의 대의명분과 옳고 그름을 남긴다 2. 서술하되 없는 것을 창작하지 않는다 절대 명제이자 원칙이죠. 때문에 아예 기록을 피하거나 삭제하는 경우는 가끔 있을지언정 전혀 없던 사실을 판타지로 만들어 내는 역사 왜곡은 유교 사상에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유교의 존재 이유가 걸린 매우 중대한 사안이기 때문이죠 조선 왕조실록이 바로 이런 유교식 역사서술의 끝판 왕인 책입니다. 디테일하게 모두 적으며 평가까지 했죠. 만약 처음 부터 하나씩 읽는다면 읽는데만 7년이 소요되는 어마어마한 양입니다. 그런 조선왕조 실록의 위엄을 알수 있는게 선조수정실록입니다 광해를 반정으로 몰아낸 후 대북까지 모조리 죽인 서인들은 인조를 왕으로 옹립했죠 당연히 광해 시절에 만든 실록이 맘에 안들었습니다. 그래서 역사를 다시 서술했는데 그 방식은 광해군 시절의 실록을 고쳐서 만든게 아닙니다. 쫓겨난 광해가 만든 역사도 그대로 전하고 서인들이 새롭게 쓴 실록은 그대로 전하죠. 수정실록 이라 새롭게 이름을 지어서 각기 다른 버젼의 2개의 역사책을 모두 후대에 전했습니다. 역사에 대한 평가는 후손들이 알아서 해라는 의미죠. 조선이 그런 나라였습니다. 이런 북인의 집권이 끝낸 인조반정은 조선 후기에 큰 분기점이죠. 연산군 시절의 반정은 훈구파들의 작품이고 인조반정은 사림의 집권이 시작된 이래 사상 최초로 일입니다. 사림들의 손으로 왕이 아예 갈려진 반정이 성공함에 따라 북인은 사실상 절멸하게 되었습니다. 인조반정의 공을 세운 서인이 권력을 독점하는 형세가 만들어집니다.  서인 즉 기호 학파라는 것은 율곡이이와 성혼의 사상을 계승한 학풍입니다. 경기도, 충청도, 황해도 호남지방을 중심으로 서부 평야 지역에 사는 양반들 학풍을 말합니다 영남학파는 영남의 산지가 많은 분지 지방에 서원을 만들고 조용히 형이상학적 철학에 매진하며 심도 깊은 학풍을 길러 온 다소 원리주의적 성향을 가진 것과 대조적으로 기호학파는 과전법의 대상인 경기도와 한계지 인근 토지인 황해도 충청도 지방에서 지주로 경제적 기반을 만들며 정치에도 참여 한 경험적이고 현실적인 정치세력이죠 이들이 인조반정으로 정국을 주도하게 되었고 이 과정에서 서인 내부에서도 분화됩니다  인조반정에 가담하며 공을 세운 공서 신하가 왕을 몰아 내는데 가담하지 않았다 하여 청서 또 정계를 주도한 인조반정의 공신 인물을 중심으로 원평 부원군을 원두표를 중심을 모인 서인을 원당 낙평 부원군 김자점을 중심으로 모인 당을 낙당 송시열을 중심으로 모인 당을 산당 김육 등 왕실과 인척관계를 맺은 당으로 한강 이북에 주로 거주한다 하여 한당 원당,낙당,산당,한당이 4당이 구성되어 인조 연간 서인 천하 정파를 결성했습니다. 이 중에 다시 공신들인 공서의 김류가 쫓겨난 북인의 잔당 중에 소북의 영수였던 남이공이 광해군 시절에 탄압받은 소북 인사이고 학문적으로도 업적이 많음을 이유로 대사헌이 임명하려 하자 서인의 소장파들이 반발을 하며 이를 인정한 이들이 노서 소장파 서인을 소서라 구분하기도 했죠. 기본적으로 인조반정으로 서인들이 정국을 독식한 상황에서 나온 형세입니다 공신들이 이합 집산한 4당의 분파는 효종 연간 송시열이 통합을 시도하며 서인으로 다시 하나로 뭉치게 됩니다. 조선 후기 송시열의 등장은 서인 계보에서 특히 중요한데 서인의 통합을 이룬 것도 그러하고 조선 후기 서인의 입장에서 성리학 사상을 정리한 인물이기도 합니다. 조선 후기 성리학의 주요 논제였던 의리론이 그러하고 사회개혁의 방향과 한계를 이이의 변통론에서 찾아 선을 그은 것이 그 업적이죠  (만동묘: 명나라 만력제와 숭정제를 모신 사당 성리학의 상징과 같은 곳으로 어떤 왕도 이 곳을 감히 못 건드렸습니다) 의리론은 대명 의리론을 말하는 것으로 임진왜란의 도움을 입은 명나라가 지금은 망했지만 조선의 입장에서 청나라는 잠시 힘에 굴복했을 뿐 예법으로 섬기는 사대의 대상이 아님으로 조선은 명나라에 대한 의리를 지키며 중화의 명맥을 이어가야 한다라는 이념입니다. 또한 명나라가 사라졌으므로 남은 중화는 조선뿐이다. 성리학을 수호해야 한다는 이념이죠  정치적으로 보면 송시열과 서인의 주도로 효종 연간 북벌론이 대두된 것도 이러한 이유때문인데 이는 사상적으로 보면 성리학은 더이상 단순한 학문이니 사상의 영역을 넘어 중화를 반드시 지켜야 한다는 절대적인 종교로 변질함을 말합니다 감히 건드릴 수 없는 만동묘의 존재를 보아도 사실상 국가권력 이상의 절대적 이념으로 조선 후기 성리학이 변질되는 과정입니다 (그 만동묘를 철폐한게 바로 흥선대원군이죠) 이때의 상황은 보다 이해하기 위해 비유해 보면 당시의 명나라는 오늘날의 미국과 같은 존재입니다. 그 누구도 고작 수십만에 불과한 여진족이 명나라를 멸망 시킬거라 상상조차 못 했듯 만약 지금 공산주의 중국이 갑자기 성장해 미국을 멸망 시켜 버린다면 이 예상 못한 충격과 공포의 반작용으로 한반도에 강력한 반공주의 이념이 성장하는 것도 당연합니다. 오직 우리 대한민국만이 민주주의를 수호하는 유일한 국가다! 라는 강력한 이념이 탄생하는게 전혀 이해 못 할 상황이 아니죠 이는 변통론과 또 연계하여 살펴보면 율곡 이이의 경우 앞서 서술하였듯 이기일원론을 주장하며 이와 기는 하나일 분이고 양면의 발현이라 하였죠. 주기론의 사상 하에서 기는 표현의 대상인 동시에 변화가 가능한 영역입니다. 주역의 말을 빌어 궁하면 변하고 변하면 통하며 통하면 오래 지속된다는 말로 바꿀 수 있는 것과 없는 것이 있지만 바꿀수 있다면 변화 즉 변통을 지속하여야 한다는 이론입니다. 여기서 바꿀 수 없는 것은 본질이죠. 왕도, 인정, 삼강 같은 유교의 기본 원리는 불가능하지만 이와 수반되어 나타난 부수적 현상은 개혁의 대상입니다. (이는 두루 통하고 기는 국환된다의 이통기국론도 이와 같은 논리입니다.) 더 쉽게 말해 비유하자면 중국이 아무리 개혁 개방을 해도 공산주의 정신을 포기 못한다 이런 정신과 비슷하다 보면 됩니다. 자본주의 시장 개혁은 가능하지만 공산주의는 본질이자 불변이므로 결코 공산당 이외를 용납할 수 없다 이런 개념이죠. 이는 정조의 개혁을 보면 참고가 됩니다. 정조대왕 시절은 조선의 르네상스 시기로 사회개혁의 중요성을 논하고 다양한 사상과 학문을 수용하며 변화를 꾀하던 중요한 시기였습니다 하지만 정조는 도학군주일 뿐이죠. 그의 치세에 성리학은 영원 불변의 사상이라는 전제가 있습니다. 서학(천주교)은 사학(邪學)이라며 이를 배격하고 철저하게 성리학을 수호한 군주입니다. 사회의 변화에 따라 필요에 따라 개혁은 진행하지만 봉건 질서, 성리학 질서는 결코 건드릴 수 없다는 절대 가치관입니다. 조선 후기의 개혁의 방향과 그 한계를 이론화 한 것으로 조선 후기 성리학 체제가 왜 이토록 지속 될 수 있었는지 설명이 가능한 동시에 조선 후기 성리학이 왜 화석화 되었는지 알수 있는 부분이기도 합니다 후대의 역사적 관점에서 보면 심각한 부작용을 주었죠. 폐단이 존재하면 보통 개혁과정에서 체제가 갈려 버리는 것이 자연스런 흐름입니다. 조선은 이게 좋은건지 나쁜건지 알수 없지만 그게 안 일어 납니다. 조선 왕조는 정말 특이하게 개혁을 하지만 본질이 변화하지 않는 독특한 변화를 조선후기에 지속적으로 하며 그 수명을 꾸준히 연장하는 기염을 토합니다. 흥선대원군이 개혁도 당장 만동묘를 파해쳤음에도 보수개혁으로 다시 이어지며 개혁을 하면서 동시에 후퇴를 하죠 이른바 조선식 개혁운동의 방향성도 가늠하게 합니다 간단히 말하면 보수적 가치관을 절대적으로 지키면서 급한 부분 심각한 부분만 고친다입니다. 서인의 주기론의 입장 이기일원론은 이미 명나라 시기를 거치게 되면 기의 중요성 즉 현실의 발현 실사 구시의 중요성을 논한 기의 총체로 사물을 보는 경향 양명학의 대두와 함께 성리학의 본고장 중국에서도 새로운 학문으로 나아가는 중이었습니다 임진왜란 시기 명나라 장수의 참전과 함께 조선에도 양명학 등 신학문이 꾸준히 전파되었지만 송시열의 대명의리론, 변통론으로 조선의 성리학 중심 소중화체제를 정비함에 따라 성리학은 조선 후기 완전히 화석화되어 절대 종교화 되버리죠. 성리학 이외는 사학일 뿐 이미 절대화된 성리학이 자리잡은 조선에서 모두 이단에 불과하게 됩니다 좋게 말하면 전란 이후 피폐하고 혼란해 진 조선사회를 안정화 시킨 보수운동의 성공이고 나쁘게 말하면 조선 후기 사회를 정체된 보수사회로 만들어 버린 원인이죠 모두 송시열이 정립한 사상체제입니다 송시열 말년에 이르러 서인이 분파되며 노론과 소론을 이루는 과정에서 이런 송시열의 이론을 반대한 이들이 소론으로 집결하게 되고 소론의 인사들 중에서 소수의 일부가 실사구시를 중시한 양명학을 일부 수용하기도 하였지만 조선에서 더이상 뿌리내릴 수 없는 학문이 되었습니다  한편 임진왜란 이후 주전파 북인이 정국을 주도 하며 영남의 서원에서 조용히 찌그러져 살던 남인이 재등장 하던 시기가 인조 연간이기도 합니다 기본적으로 인조반정을 옹호하며 정국을 주도한 서인들 틈세에서 공신들의 전횡을 견제하고 서인 소장파를 옹호하며 정국에 참여하던 남인들은 북인의 잔당을 흡수하며 차츰 역량을 정비 하더니 효종 사후 현종 연간 이른바 상복을 몇년 입어야 예법에 맞는가? 라는 얼핏 지극히 쓸데없어 보이지만 예법을 중시한 유교국가 조선에서는 왕실의 정통성과도 연계한 매우 중요한 논쟁 그 유명한 예송논쟁에서 서인을 누르는데 성공하게 됩니다. 예송논쟁은 간단히 말하면 조선이란 나라에서 왕과 신하의 관계는 무엇이냐? 복종하는 수직적인 관계냐 상호 동급인 수평적인 관계냐? 이 것에 대한 논쟁입니다. 상복을 몇년 입어야 하는가 논쟁은 그 기준이 왕과 신하의 예법이 같냐 의미로 왕도 사대부의 일부인가 아닌가 물어 본다는 뜻을 말합니다. 전통적인 왕조국가에서 군왕은 그 말이 곧 법이죠. 이런 세계관에서는 옷을 10년을 입던 20년을 입던 군왕의 심경 변화가 곧 법일 뿐입니다. 사실 매우 불안정한 원칙이며 혈통에 의존하여 모든 도박을 하는 후진적 정치 체제의 특징이기도 합니다 과거 송나라 시절 사대부들이 이런 왕의 권력에 이의를 제기해 비슷한 논쟁을 시도 하다 박살난 적이 있습니다. 반면 영국의 경우 귀족들의 이런 요구가 즉 권력 견제가 성공했죠. 성공하여 양피지에 명문으로 군왕의 권력을 기록하였고 그것이 권리장전이란 이름으로 훗날 입헌주의 기초가 됩니다.  조선 역시 후기에 이르며 비슷한 양태의 정치변화가 일어난 것이라 보면 됩니다. 왕이 신하들에게 쫒겨나는 반정이 성공하고 옹립한 왕이 즉위하자 조선의 왕도 이제는 사대부의 일원으로 사대부의 예법을 따르라는 매우 도발적인 논쟁을 벌인 것입니다. 단순하게 보면 이런 현상이 왕권의 약화로 보이고 신하는 악당이 되죠. 하지만 다르게 보면 신권 왕권의 견제와 그 권력의 한계를 논하는 것입니다. 근대적인 권력 분립의 양태이기도 합니다. 조선왕조에서 왕의 정통성을 결정하는게 혈통이 아니라며 그 부정의 이유가 성리학의 대원칙임에 있음을 주장하며 견제를 한 것이죠.  이 때 남인이 주장한게 군왕의 예법은 따로 있다, 즉 왕권을 강력히 옹호하는 주장을 합니다. 1차 전에선 강력한 서인 권력에게 막혔지만 2차 전에서 군왕과 남인이 서인을 누르는 것에 성공한 것이 예송논쟁입니다. 그 결과물이 조선후기 역사를 관통하는 중요한 정통성 기준이 세워집니다. 효종의 가계는 조선 왕조의 정통이자 침범 불가능한 절대왕권이라 인정 한 것이죠. 이때의 결과물로 정립 된 효종혈맥은 조선 후기 숙종, 영조, 정조 철종까지 이어지는 조선 후기 왕조에서 왕권 정통성의 상징이 됩니다. 경종이 아우 영조를 끝까지 살린 이유도 영조가 사도세자의 아들 정도를 살린 이유도 바로 조선 후기 왕실의 정통성의 상징인 효종혈맥의 보존을 위해서입니다. 인조반정 이후 서인 주도 정국에서 이들 남인들이 최초로 정권 교체에 성공하자 이제 남인들은 서인과 대치하는 세력으로 조선 후기 정국의 주요 정파를 형성하게 됩니다 사실 초기 남인과 서인의 논쟁은 붕당 정치의 꽃이라 불리워 지는 시기로 상호 견제하며 정국을 이끄는 지극히 품위있는 논쟁과 견제의 모범이기도 했습니다. 그 대표적 사례인 예송논쟁은 오늘날을 기준으로 보아도 매우 수준 높은 국가 정체성, 정통성 논쟁이죠 하지만 이런 시기는 그리 오래 안갔습니다. 풍운아 숙종이 즉위 하면서 전혀 새로운 세상이 열리고 극단으로 치닫게 됩니다 조선은 기본적으로 신권과 왕권의 견제와 조화를 바탕으로 한 국가입니다. 그런 조선 왕조의 역사에서 신권이 강해 질 때 마다 몇몇 군왕은 좀 극단적인 방식으로 신하들끼리 피를 보게 하여 반사효과로 왕권을 강화 하려는 경향이 종종 있죠. 앞서 선조도 그러했고 숙종도 그러했던게 아닌가합니다 예송논쟁에서 결국 왕권과 효종혈통의 승리로 끝났죠. 그리고 조선 왕조에서 전무후무한 왕이 등장합니다. 최초로 태어나자 마자 원자(元子)로 봉해지고 다시 세자(世子)로 봉해 졌다가 결국 왕으로 즉위를 한 유일한 케이스가 등장합니다. 말 그대로 혈통 정통성 끝판 왕인 숙종이 즉위한 것입니다. 조선후기 왕조에서 숙종의 위엄이 어느정도 인가 하면 간단히 숙종은 3대 독자입니다...경쟁 가능한 왕족이 없습니다. 숙종의 통치 시기는 역모라는게 일어나는게 불가능한 시기입니다. 이 시기 조선이란 나라에서 숙종이 아니면 왕이 될 사람이 없죠 태어나자 마자 왕으로 점지 되어 모든 정통성 예법을 전부 통과한 유일한 존재로 이런 군왕은 조선왕조 전체에서도 최초일 정도로 완벽한 왕이었기에 누구도 정통성 끝판 왕인 완벽한 왕권에 감히 이의를 제기할 수 없죠 바로 이런 왕의 치세에 나름의 탕평책인지 아니면 왕권의 무서운 위엄을 신하들 뼈속 깊히 각인 시킬 생각이었는지 군왕의 주도로 신하들 정파를 아예 제거하는 살육 정치, 매우 극단적이고 잔인한 방식으로 남인 또는 서인에게 정국을 독식하게 하는 극단적인 정권교체 행태가 처음 등장하게 됩니다.  이른바 환국의 시대입니다 주요 이유는 인현왕후 장희빈의 이야기처럼 군왕의 로멘스가 명분이지만 그 결과는 환국으로 이어져 반대파는 죄다 역적으로 몰려 죽어 버리는 마치 선조 연간 기축옥사처럼 매번 수 천명이 도륙당하고 가문이 노비로 전락하는 비극이 노론, 남인 정파에 주기적으로 일어나게 됩니다 레알 무시무시한 시대죠 이때 환국이 남인과 서인을 사이좋게 번갈아 오고 가며 3번이나 발생합니다. 예법이니 학풍이니 이론이니 철학이니 상호간 논쟁하는 것도 대화로 풀 때 가능하지 당사자 혹은 스승, 친구, 동문, 일가 친척, 지인들이 한 다리 건너 한번씩 상대방 정파의 보복으로 죽거나 도륙되어 멸문의 화를 당하거나 하면 더이상 정상적인 상호 경쟁이란게 성립하기가 힘들게 됩니다 마지막으로 벌어진 환국을 통해 서인이 정권을 잡게 되자 당연한 수순으로 남인의 씨가 완전 말려졌습니다 서인을 통합한 영수 송시열은 서인 가문에서는 뛰어난 학자로 존경하며 "송자"라고 스승 자子 자를 존호로 올리며 동양의 대유학자라 불렀지만 남인의 가문에서는 집에서 키우는 개의 이름으로 붙이곤 했다죠. 숙종 연간을 지나며 양반이 수 천명씩 갈려 죽어 나간 상황에서 멀쩡한 양반 집안이 없을 지경이 됩니다. 특히 마지막에 숙청 된 남인은 말 그대로 씨가 말려져 온전한 가문을 찾기 힘들 지경이 되죠 장희빈 사건으로 남인이 축출 된 후 장희빈의 아들인 경종이 즉위하자 절멸한 남인을 대신하여 집권 세력인 서인이 두개로 갈려지며 경종을 지지한 소론과 이를 거부한 노론으로 나뉘게 됩니다. 경종을 지지한 소론 훗날의 영조인 연잉군을 지지한 노론인데 과거 서인에서 숙종 연간 남인이 정국을 잡았을 때 서인을 강경하게 다 죽여버리자는 탁남, 서인을 온건하게 처리하자 청남으로 분파되었듯  똑같이 경신환국으로 서인이 정국을 잡게 되자 남인을 강경하게 다 죽여버리자 노론, 남인을 온건하게 처리하자 소론으로 나뉘었던 분파이기도 합니다 남인에 온건하게 대한 정파로 소론은 남인이 내세운 장희빈과 그 아들인 경종을 두고 어찌하였건 군왕임으로 충성해야 한다는 입장이었던 반면 노론은 그 존재 자체가 서인의 위협이므로 연잉군을 왕세제로 내세운 것이죠 사실상 아무리 신권이 강하다 한들 젊은 군왕이 살아 있는데 후사를 기다려야지  왕의 자식이 아닌 다른 왕자를 왕세제로 임명하라 주장하는 것 자체가 역모의 성향이 매우 큰 대담한 주장이기도 합니다. 결국 노론이 경종의 병약함을 이유로 대리청정을 주장하는 무리수까지 두자 소론이 이를 문제삼아 충역의 문제로 비화시켰고 왕의 역린을 자극하여 노론 4대신을 처형하며 신임옥사를 일으키게 되었습니다. 아무리 신권이 강해도 조선은 왕의 나라죠.   하지만 그런 반격도 잠시 경종이 2년만에 갑자기 승하하자 노론의 강력한 지지를 받는 영조가 즉위하였고 이번에는 노론이 반격해 소론 4대신을 처형하며 소론은 절멸하게 되었습니다. 조선 후기 시절에 관직 생활은 말 그대로 목숨 걸고 하던 시절입니다 영조는 즉위 기간도 매우 길었지만 탕평책으로 유명하죠. 아버지 숙종이 워낙 다이나믹하고 극단적으로 정치를 하는 바람에 소론, 남인이 씨가 말라있는 상태에서 양자를 균등하게 기용하여 한쪽에 쏠려 주지 않는게 탕평이라는 논리로 살아 남은 남인을 찾고 찾아 기용하며 정국의 균형을 맞추고자 하였습니다 영조의 이런 선택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생각을 해야 합니다 경종이 간장 게장을 먹고 다음 날 죽은 사건을 두고 독살설을 주장하는 사람이 지금도 있는데 이는 당시에도 소론과 남인은 간장게장을 먹지 않는다는 말로 영조가 경종을 시해하고 즉위했다 여기는 음모론이 공공연히 유포될 정도였죠 아니 영조가 즉위 하자 마자 일어난게 반란입니다. 바로 이인좌의 난이었습니다. 영조의 경종 독살을 공개적으로 비난하며 대놓고 터진 역모 반란 사건이죠   이때 소론과 남인들이 반란에 대거 참여했고 그 근거지인 영남에서 주로 터졌기에 영조가 이인좌의 난을 평정하자 영남에 세운 비석이 평영남비입니다. 경상도는 역모의 땅임으로 앞으로 이를 경계하며 등용하지 않겠다, 즉 영남을 근거지로 한 남인을 기용하지 안겠다는 뜻이죠 영조가 즉위하자 마자 노론을 견제 할 유일한 반대 정파는 활동은 커녕 관직 임용조차 하는게 금기가 되었을 정도로 극심히 대립하던 때입니다. 영조가 탕평책을 선언한 건 이런 정국에서 자신을 왕으로 만들어 준 노론을 견제하기 위해 모든 금기와 과거의 사건을 잊고 다시 영남지역의 남인을 기용하며 탕평을 외친 것입니다 그토록 왕권을 강화 하고자 한 의도가 더욱 큼을 의미합니다. 영조의 탕평책은 숙종 연간에 이미 나온 붕당론에 기초한 것으로 붕당의 대립이라는 것이 결국 한정된 관직을 바탕으로 각 학파의 인물들이 경쟁하는 과정에서 나온 것이라면 북인 남인 노론 소론을 구분하지 말고 모두 기용하여 정국을 이끌자 즉 탕평책을 이론으로 내세우며 등장한 것입니다 영조는 서로 잘하고 잘못한 것을 주고 받았으니 문제 삼지말고 다 기용하자 라는 논리인데 그 실질적인 실천은 노론 소론을 외척을 골고루 기용하며 이들로 하여금 이른바 탕평당을 만들었습니다. 노론, 소론, 남인이 아닌 군왕의 친위정파인 탕평당이 정국을 주도하자 이거죠. 영조 연간 외척을 중심으로 이뤄진 완론(온건파)탕평 정치를 말합니다. 노론과 소론의 온건파를 군왕의 측근으로 끌어들여 군왕을 위한 정치 세력화를 시키는 작업이죠. 명목은 탕평정치의 이상을 실현하는 것이고 내용은 노론, 소론 온건파를 친위세력화 하는 것입니다. 문제는 탕평책을 써가며 정국을 주도한 시도는 노론의 우위를 인정해야 한다는 논리에 막혀 왕권의 한계를 직시하게 하였고 균형이 어려움을 이유로 양자의 완전한 균형이 어렵다면 절충을 통해 그리고 주요인물들을 외척화 하여 이를 안정화 시키려 했지만 그 결과는 노론의 입지가 더욱 강화되며 비대한 외척세력이 형성하게 됩니다 더 큰 문제는 왕실에 있었습니다 이런 각종 어려움에 직면 한 영조를 대신하여 차후 역경을 모두 극복하고 몇 안되는 소중한 효종혈맥과 왕권을 안정 시켜야 할 숙명을 가진 그 세자가 미친놈이었단 것입니다. 영조는 어렵게 낳은 아들이자 막중한 일을 해야 하는 세자였기에 매섭게 교육하여 훈계하였고 그 정신적 압박 때문인지 사도세자는 결국 정신병에 걸립니다. 옷을 제대로 못 입는 의대증과 폭력적인 살인 경향을 보이게 됩니다. 사도세자의 기록이 모두 세초되어(사료를 모두 폐기한 것) 자세한 내막은 전해지지 않지만 사도세자가 죽인 사람만 비빈을 포함해 그 인원이 100명이 넘습니다. 말이 살인이지 연쇄살인을 넘어 살인귀 수준이죠 급기야 임금이자 부친인 영조를 죽이려하자 생모인 영빈 이씨가 결국 고변을 하였고 사도세자를 처분할 것을 생모가 요청하기에 이릅니다. 하지만 이는 쉽게 해결할 문제가 아닙니다 이때 사도세자를 처벌하거나 죄를 시인하고 자결을 하면 이는 사도세자가 역적의 죄가 있단 뜻이 되어 버리니 그의 아들인 세손 정조도 연좌제로 역적의 아들이자 역적이 됩니다. 역적이 왕통을 계승할 수는 없으니 효종혈맥이 끊어지는 것이죠 세손인 정조의 신분을 보존하려면 사도세자는 자연적으로 죽어야만 합니다. 그래서 사도세자는 뒤주에 같혀서 죽은 것입니다. 처벌도 자결도 아닌 방법으로 말이죠 이는 이런 탕평당을 이끄는 군왕이 가족 문제로 당쟁에 휘말리는 과정에서 사도세자를 지지하는 시파와 이에 반대하는 벽파의 분쟁이 발생합니다. 시파는 시류에 따르는 파라는 뜻이고 벽파는 간사한 파라는 뜻입니다. 임오의리의 문제라 하여 사도세자의 죽음을 놓고 양분하게 된 것인데 그 이름을 봐도 그냥 알수 있습니다 시파가 주류고 벽파는 탄압 받는 비주류죠 영조의 뒤를 이어 즉위한 정조 연간 이런 임오의리의 문제를 두고 시파와 벽파의 대립이 극명하게 되었음은 유명하죠. 각종 드라마에서는 벽파의 음모로 사도세자가 탄압을 받아 억울하게 죽고 세손이 목숨을 위협 받는 스토리가 다이나믹하게 나오곤 하는데 그럴듯한 드라마일 뿐 역사적 사실은 아닙니다. 사실 생각해 보면 간단합니다 영조 즉위 기간 후계자인 사도세자는 효종혈맥의 적통입니다. 그 누구도 건드릴 수 없고 장차 왕이 될 신분이죠. 사도세자가 노론을 얼마나 증오하던지 간에 아니 소론을 사랑하던 남인을 사랑하던지 간에 조선에서 감히 그를 건드릴 사람은 사실 없습니다. 대체할 왕족이 없거든요 사도세자가 그토록 살인을 저지르는데 과연 신하들과 비빈들이 몰랐을까요. 알면서 모두기 쉬쉬한 것이고 그 미침의 정도가 군왕 시해란 역모에 이르자 더이상 용납할 수준을 넘었기에 참고 참던 비밀이 공개된 것이죠 이런 사도세자가 죽임을 당하고 그의 혈육인 세손을 어찌대했는지 봐도 알죠. 영조의 강력한 보호로 그 신분을 보호하고자 조선왕조에 전례가 없는 실록의 세초(사료 삭제)까지 해 가며 세손의 지위를 지켰습니다. 정조 역시 대체할 다른 왕족이 없는 굳건한 혈통을 지닌 인물이죠. 역시 감히 건드릴 사람이 없습니다 정조 연간에 시파, 벽파 투쟁의 실체는 왕권에 충성하는 즉 시류에 순응하는 시파가 대다수인 가운데 과거 임오의리라는 이름으로 군왕의 친부를 구명하는데 소홀했던 영조의 탕평당 외척과 일부 노론이 존재할 뿐이죠. 조만간 죽어야 할 간사한 벽파란 뜻입니다. 당연히 전부 숙청 대상이고 실제 정조가 즉위한 후 군왕의 노여움으로 전부 숙청되었습니다. 그래서 벽파입니다. 살고 싶으면 이젠 노론, 남인, 소론 구분없이 그냥 전부 시파가 되야 합니다. 왕을 중심으로 모두가 시파가 되어 충성을 다하자 이게 정조 시대의 탕평입니다. 정조는 영조의 탕평정치를 이어간다는 명분으로 탕평책을 선언했지만 그 전에 비대해진 영조 연간의 완론탕평당 즉 사도세자를 구명하는데 소홀했던 구 외척 세력을 척결하고(홍봉한 같은 인물이 그러하죠) 보다 강화된 친위 세력을 키우고자 또 다른 탕평을 시도합니다 남인과 청류 노론까지 흡입하여 장용영이란 군사력까지 가미한 강력한 군주의 지원하에 탕평당을 만들죠. 준론(강경파) 탕평정치의 시대입니다.  영조, 정조의 통치시대는 카리스마 넘치는 강력한 군주의 주도하에 왕권의 강화와 더불어 다양한 사회개혁도 함께 진행된 시기입니다. 이른바 실학이 등장한게 그러하죠 주로 정계에서 불쌍하게 쫓겨나길 반복하며 지방의 농지에서 살았던 남인들 계열에서 중농학파가 많이 나왔고 주로 정계에서 있으며 청나라도 다녀 오고 도시에 살았던 노론들 계열에서 북학파와 같은 중상학파가 많이 나왔습니다 이탈리아가 메디치 가문의 강력한 권력과 그 안정적인 지원으로 르네상스가 꽃피웠듯 조선도 현명하고 카리스마 넘치는 영명한 군주의 안정적인 통치로 각종 개혁과 문물이 꽃을 피운 시기입니다. 조선 후기 영조-정조의 시기를 빛나는 르네상스의 시기라 부르죠 그리고 한편으로 이런 강력한 군주의 빛나는 통치는 빛과 그림자 처럼 조용히 치명적인 부작용을 잉태하였습니다   정조의 강경한 탕평책  시파-벽파의 논쟁은 겉으로 보면 왕권과 신권의 권력투쟁 문제를 해결한 태평성세의 안정 된 시기로 보이지만 사실 조선을 유지해 온 견제와 균형이란 오랜 정치 시스템이 강력한 군주의 등장으로 점진적으로 해체되는 과정이기도 합니다. 탕평책이라는 이름으로 말이죠   정조 연간에는 소수의 친위 세력이 모든 정국을 주도하는 풍조가 일반화 됩니다. 명분도 붕당을 억제하고 군주에게 충성하며 탕평을 한다는 것으로 영조 시기 시작 된 이런 조치는 정조 연간에는 보다 급진적으로 시행되었고 조선시대 붕당 특유의 정치 풍조인 당파 간 견제와 균형은 물론 붕당 내부에서도 상호간 권력 견제의 여유를 남기는 관행 조차 점점 위축되기에 이릅니다 그리고 그 결정적인 조치가 붕당정치의 핵심이자 정쟁 다툼의 빌미가 된다는 이유로 선조 연간 동인-서인 붕당의 단초로 유명한 이조전랑 직위를 폐지해 버린 것입니다. 그 명분은 아름답습니다 탕평을 장려하고 중앙에서 불필요 한 정쟁을 없애고자 앞으로 국왕이 공정하게 임명하겠다 하지만 그 결과는 조선왕조 500년을 유지한 중앙의 관료 견제 시스템이 증발해 버린 것이죠. 신권-신권 간 상호 경제 시스템이 완전히 무너진 것입니다. 하급관료는 삼사를 견제 못하고 삼사는 관료조직을 탄핵 못 하며 관료 조직은 상호 견제를 못하게 됩니다. 그리고 권력은 오직 인사권을 모두 가진 강력한 왕권과 소수의 친위 세력에 모든 중앙 권력이 집중되었죠 또한 정조는 개혁의 과정에서 지방 향약을 지방관이 통제하도록 함에 따라 지방 사림의 언로와 학파 기반도 함께 무너지게 됩니다. 당장은 지방 학파가 정쟁으로 나뉘지 않아 강화된 왕권으로 나타날지 모르지만 이 결과로 과거와 같이 지역별로 영남이니 기호학파니 구분이 사실상 의미 없어집니다. 한양에 거주하며 관직을 독점하는 한양 양반과 관직을 얻지 못하는 지방 양반으로 조선 후기 양반사회는 철저하게 양극화 됩니다. 중앙관료 조직, 지방 사림 모두에서 정치 견제 시스템이 사라진 것이죠 정조 대왕의 빛나는 치세는 역설적으로 정치가 종말을 향하던 시기였습니다 이런 패턴은 중국에서도 일어난 일입니다 유교식 정치체제의 근본적인 취약점은 정치 시스템의 견제와 균형을 지나치게 사람에게 의존하는 경향이 크다는 것이죠 지난 역사를 보면 신권이 강하게 되면 권신이 제위를 찬탈을 하거나 장군들이 정국을 주도하며 권력을 잡아 군왕을 허수아비로 만든 사례가 있죠. 이런 역사의 교훈을 배운 영명한 군왕이 등장하면 종종 오바질을 하게 됩니다. 대표적으로 명나라 태조 주원장은 신권의 강화를 우려해 황제의 권한을 극단적으로 강화했습니다. 황제가 6부를 총괄하며 재상직 조차도 모두 없애는 조치를 통해 극강의 독재 시스템을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주원장은 매우 성실하고 부지런 했던 제왕으로 또 매우 잘 운영했던 전례를 남겼죠. 마치 황제권을 강화하는 것이 영명한 군주의 의무라는 의식을 심어 주었습니다. 실제 역사를 배운 군주가 종종 지향하는 모범적인 정치체제였습니다 문제는 이런 강화된 왕권의 정치는 현명하고 부지런한 군왕의 통치기간에는 매우 신속하고 효율적이 정치가 될 지 모릅니다. 하지만 반대로 평균 이하의 군왕이 즉위하는 순간 시스템이 전부 무너지는 엄청나게 위험한 약점이 있는 제도입니다 죽을 때까지 밤새 정무를 보았던 영명한 개국군주 명태조 주원장과 카리스마가 넘치는 유능한 군주 영락제가 사라진 이후 명나라에 평범한 군주가 즉위하자 그 격무를 못 이기고 황제가 정치와 업무를 방치하며 방탕해져 환관정치로 퇴보 한 사례나 똑같은 강력한 독재체제를 구축 한 청나라의 경우도 강희, 옹정, 건륭 3명의 현명한 황제가 왕조에서 사라지자 곧 태후가 국정의 중심이 되어 국정을 망치는 외척 정치로 나아간 것이 그런 사례죠 흔히 세도정치를 두고 500년 간 대립한 신권과 왕권의 다툼에서 신권 즉 노론이 승리하여 나라가 망한거라 일부에서 평하는데 자세히 보면 500년 간 조선왕조는 신권과 왕권이 투쟁한 것이 아니라 애초 조선이라는 나라는 성리학적 유교 정치를 이상으로 한 국가로 신권과 신권이 대립하고 왕권과 신권이 상호 견제를 통해 상호 견제와 균형을 이루는 일종의 정당 정치로 국정을 운영한 나라입니다 이런 견제와 균형이라는 정국에서 왕이 똑똑한 신하들 속에서 소외됨을 느끼는 경우나 때로는 자신이 현명하다 느끼는 영명한 군주가 종종 등장하며 인위적으로 신하들의 경쟁을 극단적으로 부추기는게 강요된 역사죠 연산군이 그러하고 중종이 그러하고 선조가 그러하고 광해군이 그러하고 인조와 숙종이 그러하고 영조와 정조가 그러합니다. 이런 극단적인 대립이 종국에는 신권-신권의 견제와 균형이라는 붕당자체의 기반이 무너짐에 따라  그 누구도 견제를 못하는 그런 최악의 시스템 붕괴가 벌어지게 된 것입니다. 소위 세도정치가 탄생하게 된 것입니다.  안동 김씨 김조순은 갑자기 등장한 세도가문이 아닙니다. 정조 대왕이 그토록 아낀 외척으로 탕평당의 핵심이자 시파였죠. 그 권력을 준 인물은 다름 아닌 가장 총명하다는 정조 였습니다 조선 후기 막장 정치라는 세도정치의 기반이 만들어진 건 자세히 따지고 보면 모두 정조의 통치 기간 완성된 구조입니다. 정조는 왕권을 강화하려는 시도를 했으나 강한 외척 세력을 양성하는데 그침으로써 정조의 갑작스런 승하로 이들을 제어할 보루인 강력한 왕권조차 사라진 시점 조선 왕조에 강력한 군주가 아닌 유약한 어린 군왕 순조가 즉위하게 되자 졸지에 외척 안동 김씨, 풍양 조씨등이 어부지리 최대 수혜자로 등장하며 견제할 세력이 전혀 없는 절대권력을 얻게 되죠 견제와 균형의 이상을 지켜 온 조선왕조에 그 견제와 균형을 담당한 안전장치인 붕당이 완전 사라진 세상 조선의 암흑기 세도정치 시대가 개막하게 됩니다 끝. 펌) 출처 흥미진진. 외우기만 했던 역사가 이렇게 보니 이해가 확실히 되는구려. 당장은 답답할 수 있어도 멀리 봐야 했을텐데...
누군가에게 고마운 사람이 되자
오래전 초등학생 시절 때 있었던 일입니다. 학교 수업 중 갑자기 배가 아파지기 시작했고 양호실에 다녀온 이후 조금 나아졌지만 그래도 집에서 쉬는 게 좋을 것 같다면서 선생님은 조퇴를 권유했습니다. 그런데 집으로 가는 길에 갑자기 배가 다시 아프기 시작했고 한 발짝도 걸어갈 수 없었습니다. 급한 마음에 택시를 세우려 했지만 쉽게 잡히지 않았습니다. 그러던 중 택시 한 대가 제 앞에 섰습니다. 택시 기사 아저씨는 땀을 뻘뻘 흘리며 배를 움켜쥔 저를 보고 깜짝 놀라 물었습니다. "집이 어디니? 어디가 아픈 거니?" 아저씨는 얼마쯤 달리다가 한 약국 앞에서 갑자기 차를 세우고 약을 사 들고 나왔습니다. "얘야, 일단 이 약을 먹어보렴!" 그리고 저를 집까지 태워다 주셨습니다. 택시 기사님이 저의 엄마에게 미리 전화해 놔서 엄마는 집 앞에서 걱정스러운 얼굴로 저를 계속 기다리고 계셨습니다. 저는 택시 아저씨께 감사하다는 말도 못 하고 방으로 들어가자마자 푹 잠에 빠지게 되었습니다. 한참을 자다가 잠에서 깨어난 저는 엄마로부터 택시기사 아저씨가 걱정을 많이 하고 돌아갔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순간 어린 시절임에도 저는 따뜻함으로 마음이 가득 찼습니다. 성인이 된 지금까지 그때의 고마움을 잊지 못하고 있으며 저도 그때의 택시 아저씨처럼 누군가에게 고마운 사람으로 남도록 노력하며 살고 있습니다. 갑자기 어려움을 겪는 사람을 보고 그냥 지나치는 이들도 있지만, 여전히 우리 주변에는 이를 외면하지 않고, 기꺼이 도움을 주는 사람들이 훨씬 많이 있습니다. ​ 누군가에게 '참 고마운 사람'으로 마음 깊이 간직되는 사람이 계속해서 많아졌으면 좋겠습니다. ​ 그리고 그 고마운 사람이 바로 '당신'이 되길 바랍니다. ​ ​ # 오늘의 명언 다른 사람을 대할 때, 그 사람의 몸도 내 몸같이 소중히 여겨라. 그리고 네가 다른 사람에게 바라는 일을 네가 먼저 그에게 베풀어라. - 공자 - ​ =Naver "따뜻한 하루"에서 이식해옴.....
칭찬 잘하는 법 10가지 베스티 팁
♣칭찬 잘하는 법 10가지 베스티 팁♣ 칭찬 잘 하시나요? 칭찬 잘 하는 비결이 있다고 하는데요.  오늘 마냥좋은글과 함께 칭찬의기술을 배우고 칭찬노하우 배워보아요.  칭찬을 할 때도 잘 해야 한다고 합니다. 고래도 춤추게 한다는 칭찬 오늘 마냥좋은글에서는 칭찬을 잘하는 법에 대해서 상세히 알아봅니다. 자~ 그럼 마냥좋은글과 함께 칭찬의 세계로 떠나보아요^^ 01. 소유가 아닌 재능을 칭찬하라. "넥타이가 참 멋있어요?" 라는 말보다 "역시 과연 감각이 탁월하시네요."라고 02. 결과 보다는 과정을 칭찬하라. "1등을 했다면서요?" 보다 그동안 얼마나 피눈물나는 노력을 했겠어요." 라고 03. 타고난 재능보다도 의지를 칭찬하라. "머리 하나는 타고 났어요." 보다는 "당신의 성실성을 누가 따라가겠어요." 라고 04. 나중 보다는 즉시 칭찬하라. "참. 지난번에??"라는 과거의 칭찬 백번보다 "오늘 이러저러 하셨군요?" 라고 05. 큰 것보다는 작은 것을 칭찬하라. 별 것 아닌 일에도 "음~"과 "와우~~!" 같은 감탄사로 06. 애매한 것 보다 구체적으로 칭찬하라. 막연히 "참 좋은데요." 보다 "넥타이 색깔이 가을 분위기에 잘 어울려요." 07. 사적보다 공개적으로 칭찬하라. 칭찬할때는 혼자보다는 적어도 셋 이상의 자리가 낫다. 특히 장본인이 없을 때 남긴 칭찬은 그 호응 가치가 2배가 된다. 08. 말로만 그치지 말고 보상으로 칭찬하라. 언어적 수단에만 머물지 말고 물질적 보상이 따르는 순간 명품칭찬이 된다. 09. 객관적인 것보다 주관적으로 칭찬하라. "참 좋으시겠어요." 보다 동감의 뜻으로 "제가 더 신바람나더라구요." 10. 남을 칭찬하면서 가끔 격조있게 자신도 칭찬하라. 자신을 업신 여기면 누구도 나를 높이 생각하지 않는다. "이번엔 정말 멋있었어. 나도 잘했지?“ 꽁짜로 책 요약해주는 곳 무료 책 핵심 내용들 정리! 하루 10분, 한 권 책 읽기 세상의 모든 북 다이제스트 https://bit.ly/3ieIQMz << 오늘의 추천 마냥 좋은글 >> '암(癌)'을 극복할 수 있는 희망적 소식! https://bit.ly/3hPt5LR 매일 마늘 한쪽씩 먹으면 일어나는 기적같은 변화 6가지 https://bit.ly/3hPt5LR 보약보다 좋은 누룽지의 효능 3가지 https://bit.ly/3hPt5LR 매일 커피를 마시면 일어나는 놀라운 변화 7가지 https://bit.ly/3hPt5LR 아침 공복에 먹으면 보약보다 '좋은음식' 몸에 독 '나쁜음식' https://bit.ly/3hPt5LR 몸이 죽어가는 위험 신호 20가지 https://bit.ly/3hPt5LR 얼려 먹으면 몸에 더 좋은 의외의 음식 5가지 https://bit.ly/3hPt5LR 면역력을 높일 수 있는 간단한 방법 11가지 https://bit.ly/3hPt5LR 간기능 이상 신호 18가지 증상 https://bit.ly/3hPt5LR 눈이 건강해지는 의외의 습관 10가지 https://bit.ly/3hPt5LR 쉽게 간과하면 큰 코 다치는 건강 적신호 8가지 https://bit.ly/3hPt5LR 이것 즐겨 먹으면 장수하는 7가지 이유 https://bit.ly/3hPt5LR 뇌건강을 강화하는 확실한 방법 50가지 https://bit.ly/3hPt5LR #마냥좋은글 #건강정보 #건강상식 #건강관리 #건강음식 #건강식품 #건강유의 #건강식사 #건강하게사는법 #잘사는법 #행복해지는법
89세 피자 배달 할아버지, 깜짝 팁 1400만 원에 눈물
아흔이 다 된 고령으로 피자를 배달하며 근근이 살아가는 할아버지에게 온정의 손길이 답지했다. 25일(현지시간) CNN은 미국 유타주의 한 마을에서 피자 배달일을 하는 데를린 뉴이(89) 할아버지의 사연을 소개했다. 뉴이 할아버지는 유타주 웨버카운티 피자 가게에서 배달원으로 일하고 있다. 여든아홉 나이에 주 30시간 노동을 하기란 여간 힘든 일이 아니었지만, 생계를 이어가려면 달리 방법이 없었다. 할아버지는 “사회보장연금만으로는 먹고살 수가 없었다”고 털어놨다. 백발이 성성한 노인이 피자를 들고 오니 손님들은 놀라기 일쑤였다. 카를로스 밸디즈와 그의 아내도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고된 노동을 감당하면서도 할아버지는 늘 밝은 미소로 일터를 누볐다. 그런 할아버지가 인상 깊었던 밸디즈는 늘 할아버지가 일하시는 가게에서 피자를 주문하곤 했다. 그는 “절대 제일 맛있는 피자집이어서가 아니었다. 할아버지가 일하시는 가게라 일부러 시켜 먹었다. 배달원도 늘 할아버지로 지정했다”고 밝혔다. 노인을 배달원으로 쓰는 걸 손님들이 싫어한다, 매출에 지장이 있다는 소리가 나올까 봐 조마조마해서였다. 배달 때마다 할아버지와 함께 영상을 찍어 자신의 SNS 계정에 공유하는 일도 시작했다. 사람들은 할아버지가 피자 배달을 다니는 이유를 궁금해하며 걱정을 쏟아냈다. 밸디즈 역시 “그 연세에 이렇게 고된 일을 하셔선 안 된다”는 의견이었다. 밸디즈와 그의 5만 팔로워는 한 가지 묘안을 짜냈다. 십시일반 할아버지에게 팁을 모아주는 것이었다. 큰 기대는 하지 않았다. 단돈 10만 원이라도 모이면 성공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예상은 보기좋게 빗나갔다. 22일 아침 할아버지는 여느 때처럼 활기찬 발걸음으로 밸디즈 집에 피자를 배달했다. “좋은 아침입니다 친구, 잘 지냈죠?”라며 문을 열고 들어온 할아버지에게 밸디즈는 1500만 원에 달하는 거액이 담긴 봉투를 내밀었다. 밸디즈와 그의 팔로워가 모은 성금이었다. 총 1만2069달러(약 1416만 원)에 달하는 ‘팁’을 받아든 할아버지는 어안이 벙벙해 말도 제대로 잇지 못하다 결국 울음을 터트리고 말았다. 할아버지는 “뭐라 감사해야 할 지 모르겠다. 그저 고맙다는 말 말고는 아무 말도 생각나지 않는다”며 눈물을 쏟았다. 밸디즈는 “할아버지의 미소는 모든 이의 마음을 훔쳤다”면서 “친절이 얼마나 값진 것인지를 증명하는 사례”라고 기뻐했다. 너무 감동이네요 이런 생각을 한 유튜버도, 팔로워들도 그리고 열심히 사시는 할아버지도 다 그저 감동...
우주 최후의 문명이 우리일지도 모른다는 가정
일반적으로 생명체가 한 행성에서 번성하게 되면 공간은 제한되어 결국 외부로 진출하게 되려는 본성이 있음 결국에는 특정한 종족이 충분한 기술적 발전을 이룬다면 행성 외곽으로 진출하고 최종적으로는 행성계와 은하로 진출할 수도 있을것임 하지만 현재까지 광활한 우주에 500억개 이상의 행성과 그 중 10억개 이상의 지구형 행성들이 있음에도 어디서도 외계문명은 커녕 고등외계생명의 흔적도 찾아 볼 수 없음. 마치 공허하고 비어있는 공간인 것 마냥. 어쩌면 이는 외계에 생명체들이 존재한다고 가정시, 어떠한 이유로 생명이 문명을 이룩하기 위해 넘어야 하는 특정한 단계들에 도달하지 못하는 장벽이 있을 수 있고 이를 '대여과기'라고 함. 인류에 대해서는 인류가 대여과기를 이미 진작에 지난 매우 운좋게 번성한 문명생명체일 것이라는 가정이 있고, 또 하나는 결국 우리도 언젠간 극복못할 대여과기를 기다리는 존재일 뿐이라는 이론이 있음. 만일 대여과기를 우리가 이미 거쳐왔다고 가정할 경우, 인류가 문명을 이룩하기까지 겪은 여러 단계는 사실상 다른 생명체들이 지나오기엔 너무나도 각박하고 힘든 일일 수 있음. 생명 자체가 만들어지는 순간 낮은 수준의 생명체가 고등한 생명체가 만들어지는 순간 이 순간을 넘어야만 하는데 여기를 통과하지 못하면 생명체 자제가 존재하지 못하거나 박테리아 수준에만 머물러야 함 설령 지성을 가질 정도의 고등생명체로 진화한다손 치더라도 그 종이 행성을 지배할 수 있을만한 우세한 종이 되기까지 온갖 외부요인에서 살아남을 수 있느냐도 문제 또는 인류에게는 대여과기가 아직 닥치지 않았다고 가정할 경우, 이미 우리보다 훨씬 태초에 앞선 문명들이 있다고 하더라도 그 특정한 대여과기를 견디지 못하고 이미 절멸해버렸을 가능성이 있음 유형은 다를지라도 자신들의 기술의 발전이 어느 순간 종말을 자초할 만큼의 수준과 사건을 초래하는 것 또는 그정도로 과격한 사건이 아니더라도 의도하든, 의도하지 않든 서서히 자신들이 살기에 적합하지 못한 환경으로 계속 바꿈으로 인해서 멸망할 가능성도 있음. 만일 대여과기를 아직 인류가 거치지 않았다고 한다면, 되려 외계문명의 잔재를 발견한다는건 우리도 언젠간 그 대여과기를 버티지 못할 가능성이 높음 대여과기를 우리가 이미 지났건, 또는 아직 우리의 뒤에 놓여있건 어느 상황을 가정하더라도 두 케이스 모두 우리와 비슷한 또는 앞선 외계문명을 접하거나 관측할 수 없을 것이라는 결론에 다다름. 그나마 인류의 입장에서는 어디에도 멸종한 외계문명이 발견되지 않는 것이 다행일지도 모름(대여과기를 이미 지났다는 가설의 가능성이 높아지므로.) (출처) 흥미롭네요. 가설일 뿐이지만 지금은 제일 그럴싸한 가설을 세울 수밖에 없으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