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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왕비 최초로 후궁에게 매질을 한 사람 .jpg

인현왕후

인현왕후는 당시 종4품 숙원이었던
장씨에게 매질을 했다는 실록이 있는데
이는 조선 왕비 최초로 기록된 매질사례임

이유는


숙종이랑 장씨가 나잡아봐라 하면서 놀다가

장씨가 중궁전 앞마당에 뛰어 들어서
중전마마 저를 살려주시옵소서 꺄르륵

하다가 쳐맞았다고 함

야사나 뇌피셜이 아니라
숙종실록에 실제로 기록되어 있는 사건

곤장 말고 회초리인게 다행..
이건 숙종도 쉴드불가...



이건 진짜 ㅋㅋㅋㅋㅋ
멋모르고 뛰노는것도 열받는데
우리집 앞마당에서 그러고 있으니 누구 보라고 하는것도 아니고!!!
열받을만합니다
인정
2 Comment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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ㅋㅋㅋ 쌤통이다ㅋㅋㅋ
쳐맞을만했구만ㅋ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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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 시간 전에 뜬 네이트판 역대급 하객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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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이라는게 진짜 준니 하드코어하구나.. 를 느낀 일화들 잼나는 것도 있고 안타깝고 씅나는 내용도 있고 재밌어서 퍼옴 ㅇㅇ 어진을 찾을 수 없는 왕들은 걍 뭐 대충,, 상상의 나래를 펼쳐보자 태종 1. 직업정신 투철한 사관이 따라다니며 일 거수 일 투족을 다 기록해서 태종이 걷다 헛발질한 것도 적었다. 태종이 그건 제발 지워달라, 창피하다 애원까지 했는데도 사관은 끝까지 '왕이 길을 걷다 헛발질하다. 헛발질한 것을 적지 말라고 말한 것은 적지 말라 명하셨다' 라고 적었다. 2. 하도 사관이 쫓아다녀서 못 쫓아오게 멀리까지 사냥을 나갔는데 사관이 거기까지 말 타고 쫓아와 사냥기록을 적었다고 한다. 3. 태종은 아들 양녕대군이 너무 사고를 치고 돌아다니자 속이 상해 밤새 울어 목이 쉰 적도 있다고 한다. 그런데 더 재미있는 점은 양녕대군의 아들인 이혜는 아버지인 양녕대군보다 더 많은 사고를 쳐 양녕대군의 속을 썩혔고 결국 왕자의 아들의 직위인 '군'의 작위를 깎여 서산군에서 서산윤으로 강등당했다. 결국 이혜는 스스로 목숨을 끊기 위해 자살시도를 하였고 이틀 뒤 후유증으로 사망하였다. (이혜는 사람을 때려 죽이라고 시키기도 하였고 직접 사람을 죽이기도 하였으며 남의 첩을 빼앗기도 하고 시전에서 종친들과 패싸움을 하였고 과격한 놀이판을 벌이다 놀이 중 사람이 죽어나가게 하기도 하였다. 실록에서는 이혜가 망가진 원인을 사랑했던 첩을 아버지에게 빼앗기고 난 후에 울화병이 생겨 이리 되었다고 한다.) 4.태종은 운명론자가 아닌 현실론자였는데 태종이 세종에게 양위한 어느날은 우연히 하급관리 두명의 토론을 듣게 되었다. 한명은 부귀영화는 모두 임금에게서 나오는것이라고 하였고 도 한명은 하늘이 정하는 것이라고 하였다. 현실론자였던 태종은 부귀영화가 임금에게 나온다고 주장하는 사람에게 한품계를 올려주려 하려고 그 관리에게 '지금 가는 아무개에게 한 품계를 올려주도록 하시오'라는 종이를 세종에게 전해주라고 하였다. 그러나 그 관리는 갑작스러운 복통으로 운명론자인 관리에게 대신 종이를 전해주라 하였고 결국은 그 관리가 진급을 하였다. 5. 조선왕들중 가장 많은 자식을 가진 왕으로 12남 17녀, 29명의 자식을 가졌다. 세종 1. 세종대왕은 좋아하던 후궁에게 신하들 몰래 따로 불러서 말없이 귤 하나를 쑥- 내밀어 준 얘기도 있다. (그 당시 귤이 귀한 것이었다.) 2. 친경한다고, 소 끌고 밭 갈다가 갑자기 비가 내리자 배고픔을 못 견뎌, 밭 갈던 소를 때려잡아서 국 끓여 먹은 적도... 3. 명재상 황희는 청백리가 되고 싶어서 된 게 아니었다. 임금이 사람을 붙여 철저하게 감시하고 너무도 기분 나쁘게 점검하는 바람에 ‘내참 더러워서 뇌물 먹지 않으리라’ 결심한 케이스다. 4. 훈민정음 반포식을 축하하는 잔치 행사에는 집현전 학사 절반이 참석하지 못했다. 대부분이 살인적인 과중한 업무와 임금의 요구사항에 시달리다 못 견뎌 병석에 누운 탓이었다. 성군의 캐치프레이즈는 “신하가 고달파야 백성이 편안하다”였다. 5. 세종은 부하들을 휘몰아치는데 도가 튼 인물이었다. 아침 조회 격인 새벽 4시 상참에서부터 과업 달성이 부진한 부하들을 닦달하였다. 밤낮으로 시달리다 못한 김종서의 경우 임금 곁에 있다가는 제명에 못살 것 같아, 스스로 궁궐을 떠나 삭풍이 몰아치는 북방을 개척하겠다고 손을 들고 나섰다. 정인지는 임금이 너무 독촉하고 소위 ‘갈궈 대는’ 바람에 모친 3년 상을 핑계로 상소를 올리고 낙향하려 했으나, 임금은 법령까지 바꿔서 그를 다시 붙잡아다 오히려 일을 더 시켰다. 6. 양녕대군이 평안도를 유람하게 되어 세종은 형인 양녕대군에게 ‘제발 여색을 조심하라’고 당부한다. 몰래 평안도 관찰사에게 명하기를 “만일 양녕대군이 기생을 가까이하거든 즉시 그 기생을 역마에 태워 서울로 올려 보내라” 라고 하였다. 양녕은 세종과의 약속도 있고 하여 가는곳마다 기생의 수청을 물리치고 근신하였으나, 그가 평안북도 정주에 이르렀을 때 그만 양녕의 마음을 사로잡는 절세의 미인이 나타났다. 양녕은 그날로 동침하고 귀신도 모르리라 자신했다. 그래서 시를 지어 하룻밤 풋사랑을 읊기를 “아무리 달이 밝다하나 우리 두사람의 베게를 들여다 보진 못할것이다. 그런데 바람은 어이해서 신방을 가린 엷은 휘장을 걷어 올리는가” 라 하였다. 그러나 이튿날 정주수령은 이 기생을 역마에 태워서 서울로 보냈다. 세종이 기생에게 명하기를 “너는 양녕대군이 읊은 시를 노래로 불러 익혀두라” 하였다. 양녕은 이런 사실도 모르고 유유히 서울로 돌아와 세종을 알현하였다. 세종: 잘 다녀오셨습니까. 제가 신신 당부한 말씀을 잘 지켜주셨는지요? 양녕: 물론입니다. 어찌 어명을 어기겠습니까? 한 번도 여색을 가까이 한 일 없습니다. 세종: 얼마나 수고가 많으셨습니까. 제가 형님의 노고를 덜어 드리고자 가무를 준비하였습니다. 양녕은 기생이 나와 노래하는 것을 보고 처음에는 누군지 몰랐다. 그런데 가사를 들어보니 자신이 지은 시구가 아닌가. 깜짝 놀란 양녕은 그 자리에서 땅에 엎드려 용서를 빌었다. 세종을 웃으며 뜰에 내려와 형님의 손을 잡고 위로하면서 그날 밤 그 기생을 양녕댁에 보냈다. 7.양녕대군과 세종은 원래 우애가 깊지 않았다. 태종은 양녕과 효령과는 별로 친하게 지내지 않았지만 유독 충녕, 즉 세종을 편애 하였다. 게다가 세종은 알려진것과 같이 머리가 아주 좋았고 공부를 좋아했다. 태종이 충녕에게 나중에 '너는 할일이 없으니 놀아라'라고 하며 글씨,그림, 비파등을 마련해준 때가 있었다. 그 때 양녕은 충녕에게 비파를 배우며 서로 친해졌고 다른 면에서 보면 자신의 경쟁자였던 충녕이 공부를 포기 했기 때문에 위기의식을 느끼지 않았기 때문일것이다. 그 후로는 양녕대군도 공부에 열심이었다. 그러나 세종은 비파, 글씨 등에 관심이 있지 않았고 언젠가부터 다시 학문에 관심을 가지고 양녕에게 많은 충고를 하였다. 양녕은 열등감으로 인해 방황하였고 다시 비행에 빠져들게 되어, 결국 세자 자리에서 쫓겨나게 되었고 그 자리는 세종이 차지하게 됬다. 8. 나라에 큰 일이 있어, 모두 고기를 먹지 않는 기간이었다. 태종은 특별히 세종에게는 삼시 세끼 고기를 챙겨먹도록 하였는데… 그것은 충녕(세종)이 고기가 없으면 밥을 먹지 않았기 때문이다. 문종 1. 수염이 매우 풍성하여 관운장과 같은 풍모를 냈었고, 얼굴 또한 매우 잘생겼다고 전해진다. 임진왜란 이후 폐허가 된 궁을 정리하는데 타다 남은 왕의 어진이 한 장 나왔다. 수염이 길고, 풍채도 당당하여 신하들은 인종의 어진이라고 생각했지만, 한 사람만은 수염이 길다는 말만 듣고 문종의 어진이라고 주장했다. 나중에 어진을 조사하다가 보니 어진 구석에 문종대왕의 어진이라는 기록이 나왔다고 한다. 2. 학식, 외모 모든 것이 완벽했다. 그에게 부족한 것은 단 하나.. 건강 세조 1. 술 먹고 신하 팔 꼬집고 신하한테 '너도 나 꼬집어라' 라고 시키자 신하는 세조를 꼬집었다. 그 뒤 자기 혼자 열 받아서 혼내주려다 그냥 넘어갔다. +세조의 팔을 꼬집은 것은 신숙주다. 정확히 말하면 꼬집은 게 아니라 팔씨름하다가 세조의 팔을 두 손으로 넘겼다. 그래서 세조가 신숙주 죽이려고 했다가, 술 취한 것을 감안하여 넘어갔다. 2. 세조는 후궁이 단 한 명뿐이고 평생 중전인 정희왕후와 금슬이 좋았는데, 국사를 논할 때도, 국가의 모든 행사에도 꼭 정희왕후를 대동했으며 사냥을 할 때도 둘이 나란히 말을 타고 사냥에 나갔다. 3. 신숙주가 영의정었을 때 구치관이라는 사람이 좌의정이 됐다. 이때 세조가 신숙주하고 구치관을 불러서 "내 오늘 경들에게 질문을 할 테니 대답을 잘 못하면 벌을 줄 것이요"라고 하였다. 그리고 세조가 "신 정승!"하고 부르니까 신숙주가 대답했는데 세조가 "나는 새로 된 정승을 불렀는데 경은 대답을 잘못했소"하면서 벌주를 먹였다. 그리고 "구 정승!"하고 부르니까 구치관이 대답하니 그리고는 "나는 옛 정승을 불렀는데 경은 대답을 잘못했소"하면서 구치관한테도 벌주를 먹였다. 그러고 다시 "구 정승!"하고 부르니까 이번에는 신숙주가 대답했다. 근데 이번에는 "나는 성을 불렀는데 경이 대답을 잘 못하는구료" 하면서 또 벌주를 먹였다. 그러고서 또 "신 정승!"하니까 구치관이 대답하는데 구치관한테도 "나는 성을 불렀는데 경은 잘못 대답하였소" 하고 벌주를 먹였다. 그러다가 이번에는 "신 정승! 구 정승!" 하고 부르니까 둘다 대답을 하지 않았다. 그러니까 임금이 부르는데 신하가 대답을 안하는건 예의가 아니라면서 또 벌주를 먹였다고 한다. 성종 성종은 후추 중개무역으로 돈을 벌기 위해 후추 씨앗을 구하려고 백방으로 알아보았지만 결국 후추는 구하지 못 하고 주변국에 성종이 후추를 좋아한다는 소문이 나 계속해서 조공으로 후추가 들어오는 바람에 창고에 후추가 가득히 쌓여, 예쁜 비단 주머니에 담아 조정 관리들에게 다 하사하였다. 연산군 1. 성종과 연산군이 오랜만에 밖에 바람 쐬러 나와서 성종이 ‘융아, 좋지 않으냐?’ 하니 연산군이 소떼를 보며 ‘아바마마 저 송아지도 어미 소가 있는데 저는 왜 어미가 없습니까’ 라고 말했다. 2. 또 다른 야사에서는 연산이 동궁이었을 때 어느 날 성종에게 거리에서 나가 놀고 싶다고 하여 성종이 허락하였다. 저녁에 동궁이 궁궐로 돌아오자 성종이 “오늘은 밖에서 무엇을 보았느냐?” 하고 묻자 연산은 “구경할만한 것을 없었습니다. 다만 송아지 한 마리가 어미 소를 따라가는데 그 어미 소가 울면 송아지도 따라 우니 그것이 가장 부러운 일이었습니다.” 하여 성종이 가여워 눈물을 흘렸다는 일화가 전해짐. 3. 공부하는 걸 엄청 싫어하여, 왕자를 훈육하는 학자들이 엄청 고생을 했다고 한다. 매일 꾸중 듣고 야단맞아, 폐비 윤씨 사건이 일어났을 때 모두 죽여버렸다. 4. 춤을 잘 췄다고 한다. 5. 모후인 폐비 윤씨와 고려 공민왕의 비인 노국대장공주의 얼굴이 비슷하게 생겼다는 이유로 관공서에 노국대장공주의 초상화를 수집하게 한 일도 있었다. 6. 엄청난 꽃미남이었다고 한다. ++ 보너스 연산군에 대한 잘못된 사실들 연산군이 정치를 잘 하지 못하고 폭군의 모습을 다소 보인점은 사실이지만, 몇가지 왜곡된 사실들이 있다. 1.연산군은 궁궐 담장 아래 백척 내에 있는 민가들을 철거하여 쫓아냈다. - 하지만 이것은 원래 불법주택들이였다. 선왕, 후궁들의 모습이 민간에 노출되어서는 안된다는 법도에 의한 것들이였다. 그러나 연산군은 오히려 봄까지 기다려주고 주택의 등급을 나눠 무명을 보상으로 주고 대토 와 거주지까지 마련해 주었다 2.궁을 짓기 위해 열한 고을의 백성들을 내쫓았다 - 백성들을 내쫓은것은 사실이지만 그 수는 500여호에 불과했고 열한고을은 사관이 의도적으로 과장해서 쓴것이다. 또 지나가는 자는 죽여서 시신을 구경시키는 형을 내린다고 했으나 무덤이 있는 자들에게 명절 출입을 허가했으며 불법주택에도 보상을 해준 연산군이 보상을 안해줬을 가능성은 적다. 게다가 궁은 큰집 50칸으로 몇몇 사대부들의 99칸 집들보다도 작은 크기였다. 3.연산군은 음란했다. -연산군이 비구니를 간음했다는 일화가 있다. 그러나 연산군은 기생의 출입도 소문이 두려워 꺼렸던 인물인데 늙은 비구니를 몽둥이로 쫓고 젊은 비구니들을 간음했다는것은 말이 맞이 않는다. -연산군이 여성 음악인들을 혼음했다는 이야기가 있다. 그러나 연산군에게 그들을 예술가들였을뿐이며 오히려 여성 음악인들은 사대부들에겐 첩을 들이는 통로였다. 사대부들은 연산군에게 연산군이 남성음악인들만 잔치때 내려주자 불만을 갖고 여성음악인들 을 내려달라는 주장을 하기도 했다. - 좋은 왕으로 묘사되는 성종은 16남 21녀를 가졌으나 그의 아들 연산군은 4남3녀만을 두었다. - 연산군이 백모인 월산대군 부인 박씨를 강간했다는 주장이 있다. 그리고 그녀가 죽자 임신을하고 약을 먹고 죽었다고 하였다. 그러나 그녀의 나이를 추측해보면 그 때는 이미 쉰세살에서 쉰다섯으로 당시에 그나이엔 잉태가 불가능했다. 4.정치는 하지않고 사냥을 즐겼다 -연산군은 군사력 강화를 원했던 왕이다. 연산군 5년 여진족이 백성들을 사로잡자 연산군은 정벌에 나서려 했으나 그때마다 신하들은 반대했다. 그 이유는 그들의 노비들이 부역에 나가는것을 원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사냥은 군사력 강화를 위했던것이고 이것이 신하들의 반대로 무산된 결과가 임진왜란이다. 5.폐비 윤씨사건으로 폭군이 되었다 - 완전히 틀린말은 아니지만 연관인들의 처형은 신하들을 무력화 시키려는 의도였기도 하다. 그러나 훈구파를 무너트렸으면 사림을 불러들였어야 하는데 사림들조차 적으로 만들었으니 그를 보호할 사람은 없었다. 결국 연산군은 백성들에게는 폭군은 아니였지만 모든 사대부들에게는 적이였다. 그 결과 사관들에 의해 폭군으로 기록되었으며 그 기록이 지금까지 많은 사람들에게 믿어지고 있다. 명종 1. 다른 사람들은 다 물러가 있거라 하고 노래 잘 부르는 내관이랑 둘이서 내관은 노래 부르게 하고 명종은 그에 맞게 춤추며 2인조 가수 못지 않게 퍼포먼스를 선보였다. 2. 꾀병 부려서 총애하는 내관의 극진한 간호를 받았다. 3. 위의 내관은 동일인물로 남자이다. 4. 내시와 있는 시간이 너무 좋았던 명종은 몸이 아프다고 꾀병을 부려 경연을 취소하고 내관들과 놀러 다니기 일쑤였다. 5.조울증을 가지고 있었다. 명종에게는 손빈이라는 총애하는 환관이 있었는데, 그에게 집과 많은 값비싼것을 하사했으면 원하는것들은 모든지 들어줬다고 하였다. 그러나 그는 장령을 만났을때 말에서 내리지 않았다는 사소한 이유로 명종으로부터 모든 재산을 몰수당하고 벼슬길도 막혔다. 명종의 조울증에 관환 일화는 이밖에도 많으며 아침에 파면했다가 저녁에 회복시켜주는 일들도 많았다. 중종 1. 자식 사랑이 남달라서 공주, 옹주랑 왕자들이 오랜만에 문안 오면 눈물을 흘리며 버선발로 뛰어나갔다. 2. 또 중종은 동궁 전에서 불이 나자 맨발로 달려 나와 훗날의 인종을 애타게 부르며 울었다. 3. 또한 효정옹주의 남편(부마)가 바람을 피우고 다니자 철거지악이었던 질투를 하지 않는다고 딸을 꾸짖은 적도 있었다. 결국 효정옹주가 남편의 구박을 견디지 못 하고 죽자 직접 부마를 잡아와 친국을 하기도 했다. 4.연산군을 폐위할 때, 중종을 보호하려 군사들이 오자 중종은 자기를 잡으러 온줄 알고 놀라서 자결 하려고 했다. 다행히도 그의 부인 신씨가 말려서 중종은 살아서 왕이 되었다. 5. 중종이 연산군 폐위후 왕위에 즉위했을때, 위에서 말한 신씨는 당연히 왕비책봉이 될 줄 알았다. 그러나 반정때 그녀의 아버지 신수근을 죽였는데 보복이 올줄도 모른다는 이유로 조강지처였던 신씨를 중종은 '조강지처'라는 말 한마디의 저항을 딱 한번 하고는 출궁시켰다. 중종 11년 3월 28일,ㅡ 그는 고려사를 공부하게 되었다. 그가 배운 부분은 최충헌 최충수가 명종을 폐위하고 신종을 옹립하는 부분이였다. 최충수는 배필이 있던 태자에게 자신의 딸을 태자비로 들이려고 신종을 협박했다. 신종은 완강하게 저항했지만 결국 눈물을 흘리며 태자비를 폐출시켰다. 이 부분을 읽으며 중종은 울먹거리며 책을 제대로 읽지도 못했다고 한다. 인종 인종은 모후인 장경왕후가 자신을 낳고 7일만에 죽자 중종의 계비인 문정왕후의 손에 자란다. 하지만 문정왕후는 어린 인종을 끈임 없이 못살게 굴었다. 하루는 밤에 쥐의 꼬리에 불을 붙이고 인종이 잠을 자고 있는 궁 안에 들여 보냈다. 인종이 창문을 보니 문정왕후가 웃으며 빨리 불이 타오르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하지만 빈궁만 내보내고 자신은 문정왕후에게 효를 행하기 위해 불 속에서 죽으려 했다. 빈궁과 인종이 어쩔 수 없이 불을 바라보며 울고 있는 그때, 밖에서 중종의 목소리가 들렸다. 인종은 죽는 것이 문정왕후에게는 효가 되지만 중종에게는 불효가 되므로 곧바로 나왔다. 그 후 인종은 불을 지른 장본인을 알고 있으면서도 중종에게 고하지 않았다. 선조 1.임진왜란 이후 선조는 의주까지 도망을 하는데, 의주에서 어느 백성에게 생선이 올려진 상을 접대 받았다. 그 생선이 너무 맛있어서 인조가 생선의 이름을 묻자, 백성은 '묵'이라 대답하였다. 선조는 생선의 이름이 그 맛에 비해 별볼일 없다 생각하여 '은어'라 명했다. 나중에 궁에 돌아와 그 생선을 먹었으나.. 맛이 전 같이 않아 '도로 묵'이라 하게 하였는데, 바로 여기서 '말짱 도루묵'이라는 말이 생겨났다. 2. 임진왜란 당시 일본군이 파죽지세로 평양까지 밀어오는 바람에 의주로 도망하였으나 그에 만족하지 않고 명에 혼자 도망가기 위해 망명을 요청하였다. 명은 일국의 왕이 백성들을 버리고 어찌 그럴 수 있냐며 거절하지만 그에 굴하지 않고 계속적으로 명에 끊임없이 압록강을 건너겠다고 시위를 했다. 결국 명은 그렇게 오고싶으면 개처럼 네발로 기어서 북경까지 건너오라고 무안을 줬고 선조는 그제서야 망명을 포기했다. 이후 이여송이 이끄는 명 지원군이 선조앞에 도착했고 이여송은 선조가 보는 앞에서 조선의 대신들의 싸대기를 후려치면서 어찌 나라를 이지경까지 만들었냐며 타박을 주었으나 선조는 아무말도 못하였다. 광해군 선조가 세자를 가리기 위해 여러 왕자를 시험하였는데 “반찬을 만드는 것 중 무엇이 제일이냐?”라는 질문에 광해군이 “소금이옵니다” 라고 대답하였다. 임금이 그 이유를 묻자 “여러 가지 맛을 조화시키려면 소금이 아니면 안 됩니다.” 라고 답하여 그 현명함을 인정받았다. 이에 선조가 “너희에게 부족한 것이 있느냐?” 라고 묻자, 광해군은 “어머니가 일찍 돌아가신 것이 가장 애통하옵니다” 라고 답하였다. 효종 1.나르시즘에 빠져, 항상 거울을 볼 땐 스스로 만족에 차 웃음이 끊이질 않았다고 한다. 2.효종의 얼굴에 난 종기의 치료를 놓고 침으로 피를 빼내어 독기를 제거하자는 신가귀와 그에 반대하는 유후성이 싸웠다. 이에 왕이 가귀의 의견을 취하여 침을 놓았는데, 침구멍에서 피가 쏟아져 왕이 "이제 정신이 좀 든다. 가귀가 아니면 큰일날 뻔했다"라고 말했는데 침이 혈락(血絡)을 범하여 과다출혈로 사망. 어의 가귀는 조사결과 수전증 있는걸로 밝혀졌다. 현종 유일하게 후궁을 두지 않은 왕이다. 숙종 1.신하들이 따뜻한 온돌방에서 꾸벅꾸벅 졸자 온돌을 빼버리고 얼음장에서 일하게 하였다. 2.관우의 팬이였다고 한다. 인조 1.소현세자는 손톱밑이 시커멓게 변하고 얼굴은 검게 변하며 죽었다. 전혀 확인되지 않은 병이었다. 독살이라는 소문은 퍼져나갔지만 인조는 이것에 대한 조사를 피하려 했으며 어의를 처벌하지도 않았다. 2.자신의 몸과 봉림대군의 몸이 아프자, 소현세자의 아내가 저주를 내려서 아프다고 하여 사약을 내리고 가족들을 모두 죽였다. 소현세자를 죽일 때 11살과 6살이던 아들들도 다 죽이고 임신했던 세자빈까지 죽였다. 영조 1.연애소설을 좋아하여 가끔 자신의 글에서도 소설을 인용하기도 하였다. 성품이 근검하여 백성들에게 사치를 금하라는 뜻으로 금주령을 내리기도 하였다. 2. 영조의 어진에 나와있는 쌍꺼풀지고 길쭉한 눈과 오뚝한 코에 조그마한 입술은 조선의 남성들이 추구하는 최고의 미인상이었다. 왕실에서는 이런 외모를 천하다 하여 기피하였으나, 영조의 어머니 숙빈 최씨가 양반 사대부가 출신이 아닌 무수리 출신에서 정1품 빈까지 신분상승 한 것을 감안할 때, 숙빈 최씨는 굉장한 미인이지 않았을까. 3. 영조가 왕위에 등극하기 전, 연잉군이었던 시절, 달성 서씨 집안의 규수(정성왕후)를 아내로 맞이하여 첫날밤을 치를 때의 일이다. 영조가 아내의 손을 잡고 ‘손이 참으로 곱다.’ 면 서 칭찬을 하자, 연잉군부인이 무심코 ‘궂은 일을 해본 적이 없어 그렇다’고 했더니 영조가 그날로 부인을 소박하며 그 다음부터는 멀리하였다. 아마, 무수리로 고생했던 어머니의 거친 손과 발을 생각한 게 아닌가 싶다. 4. 영조의 계비인 정순왕후가 간택에서 아버지의 이름이 쓰인 방석에 앉지 않자, 그 이유를 물으니 “자식이 어찌 아버지의 존함이 쓰인 방석을 깔고 앉겠습니까." 라고 답하였다고 한다. 또 ‘고개 중에는 어떤 고개가 제일 넘기 힘드냐’ 묻자, 강원도에서 온 규수가 대관령고개라 답하고 경상도에서 온 규수가 추풍령고개라 답하였다. 헌데 김규수는 보릿고개라 대답하였다. 보릿고개라! 겨울 양식이 봄이 되자 다 떨어지고 그렇다고 햇보리는 아직 나오지 아니한 때 세끼, 아니 두 끼, 심지어 한끼를 채우기가 그 얼마나 난감한가. 이것이 보릿고개인데 김규수가 넘기 힘든 고개가 바로 보릿고개라 하니 얼마나 명답인가! 다음으로 꽃 중에 제일인 꽃을 묻자, 김규수는 목화 꽃이 제일이라 답하였다. 이유를 물으니, “목화 꽃이 다른 꽃들보다 화려하지도 예쁘지도 않지만, 핀 연후 사람에게 혜택을 주는 면에서는 다른 꽃이 따라올 수 없을 정도로 유익한 꽃이니, 바로 목화가 백성의 옷감이 되어서 예절도 지키고 품격도 살리고 추울 때 보호하여 주기 때문입니다.” 라고 답하였다. 정조 1. 정조가 말하길, “매양 취침하기 전에 두 발바닥의 가운데를 마주 문질러 비비면 기운이 절로 퍼진다. 내가 밤마다 시험해 보았는데, 처음에는 힘이 드는 듯 했으나 오래도록 계속 했더니 신통한 효험이 있다.” 2. 연애소설을 비롯한 소설을 무척 싫어하여 영조가 죽고 왕이 되자마자 서고에 있던 모든 소설을 불태웠다. 또한 숙직을 하던 규장각 학자들이 몰래 연애소설을 읽고 있다 들켜서 정조에게 혼이 났고 벼슬을 삭탈했다. 그들은 정조에게 다시는 소설을 안 보겠다는 반성문을 쓰고 나서야 벼슬길을 다시 열어주었다. 3. 영조는 근검하여 백성이 먹을 쌀이 없어진다는 이유로 금주령을 내렸지만 정조는 개인적으로 술을 너무 좋아해서 영조가 죽고 왕이 되자마자 금주령을 없앴다. 4. 공부 못하는 신하한테 공부하라고 끈임 없이 시키며, 숙제를 내고 제대로 하지 못하면 망신을 주고 술을 마시지 못하는 신하에게 술을 강요하여 기절할 때까지 마시게 하고, 활을 못 쏘는 신하에게 끊임 없이 연습을 시켰다고 한다. 5. 술을 무진장 좋아하여, 정약용에게 필통에 술 한가 득 부어 원샷! 하기를 강요하여 정약용은 술을 싫어했다고 한다. 그때 당시 필통에 술 붓기라면, 요즘 사발에 소주를 들이붓는 거와 맞먹는다고 한다. 6. 정조 20년, 이정용이라는 유생이 술에취해 늦은밤 궁궐 담장 아래에서 잠에 들었다 잡혀간적이 있었다. 그러나 술을 좋아했던 정조는 요즘 유생들은 술을 잘 마시지 않는데 술을 좋아한다고 칭찬을하였다. 그리고 많은 유생들이 숙박하던 잡촌과 집춘영은 벽을 맞대고 있으니 이정용은 잡촌에서 잤던거라는 궤변을 펼쳐서 오히려 상까지 주어서 보냈다. 헌종 1. 이 헌종이 그렇게 미남이었다고 한다. 기록을 보면 여색을 즐기는 왕 때문에 궁궐 내 용모가 예쁘다고 하는 궁녀들은 거의 승은을 입었다고 한다. (덕분에 후궁첩지도 아무나 내리지 못했음. 딸을 낳은 궁인 김씨도 첩지를 받지 못했다.) 왕 자체가 너무 미남이라 젊은 궁인들이 참 많이 유혹을 했다고 한다. 하지만 너무 어린 나이부터 가진 잦은 성관계 때문에 건강이 악화되어 죽기 직전에는 피가래까지 토하며 고생하다가 23살이라는 어린 나이에 요절한다. 궁녀들이 유혹을 할 정도였으니 엄청난 미남이 아니었나 한다. 2. 헌종은 어린 나이에 아버지를 잃었으므로 늘 아버지의 얼굴을 기억하지 못하는 것에 마음 아프게 여겨 한 신하에게 늘 물었는데, “진전에 모신 수용이 오히려 매우 닮으신 전하의 용안에 미치지 못합니다.” 하니 헌종이 거울을 보고 눈물을 줄줄 흘렸다고 한다. 고종 1. 고종 황제가 행차하다가 땀을 뻘뻘 흘리며 테니스 라켓을 휘두르는 미국인들의 모습을 보고 “어찌 저런 일을 하인들에게 시키지 않고 귀빈들이 하느냐”고 안타까워 했다. 2. 명성황후가 죽고 나서 끝까지 재혼을 하지 않았지만 아끼던 후궁이 있었는데 명성황후가 부리던 상궁이었다고 한다. 명성황후는 그녀를 곁에 둔 이유가 못생겨서 고종이 쳐다도 안 볼 것이라고 생각하고 곁에 두었는데 나중에 사람들이 말하기를 그녀는 명성황후와 똑같이 생겼다고 말했다. 3.당시 1887년대, 전신(전보총국)의 등장과 함께 최초 궁궐에 가설된 전화를 경험한 고종은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아무리 멀리 떨어져 있어도 성음을 들을 수 있군" 이 생각에 고종은 상당한 고액의 전화를 경기도 남양주시 금곡동 141-1번지 홍릉에 설치한다. 그 곳은 고종의 부인 명성황후(민씨)의 무덤. 전화의 설치가 끝난 직후 고종은 아침마다 그 곳으로 통화를 걸어 말을했다. "여보, 어제는 춥지 않았소?" 고종은 매일아침 홍릉으로 전화를 걸어 죽은 민씨에게 안부를 전했고 매일아침 울었다고 한다. "아무리 멀리떨어진 사람의 목소리를 들을 순 있어도 저승까지는 못 하는구나." 그럼에도 고종은 매일아침 홍릉으로 전화하는 걸 잊지 않았고 일제에 의해 강제퇴위를 당하는 그 날에도 전화를 걸었다고 한다.
"웬즈데이, 위안부 문제에서 우리가 알아야 할 사실을 넣은 게임"
겜브릿지 신작 <웬즈데이> 관련, 도민석 대표 인터뷰 그 어떤 날보다 깊이 기억돼야 할 수요일, 위안부 문제를 다룬 겜브릿지 신작 <웬즈데이>가 오늘(1일) 드디어 출시했다. 게임의 명칭은 처음으로 위안부 문제가 알려진 날, 첫 위안부 집회가 열린 날인 '수요일'을 뜻한다. <겜브릿지>는 고 김복동 할머니의 "내가 과거로 돌아갈 수 있다면, 친구들을 구하고 싶어"라는 말에서 출발했다. 첫 공개 당시, 겜브릿지 도민석 대표는 TIG와 인터뷰에서 '위안부 문제=일본이 사과해야 하는 문제'로 치부될 것이 아니라 우리가 몰랐던 사실들에 대해서도 게임을 통해 조금 더 관심 가져 주기를 바랐다고 밝혔다. 겜브릿지는 당초 '기림의 날'인 8월 14일 출시가 목표였으나, 코로나19로 인한 개발환경 변화에 따른 적응, 그리고 게임성 퀄리티 향상을 위해 부득이하게 연기를 택했다. 과정에서 CBT를 진행하며 스토리 부분에서 높은 만족도를 이끌어 냈다. 텀블벅 크라우드 펀딩도 상위 0.1%에 해당하는 3,551명이 후원하며 약 9,553만 원의 금액을 달성하기도 했다. 도민석 대표는 <웬즈데이>가 겜브릿지의 대표작으로 기억됐으면 좋겠다는 바람을 밝혔다. 미래세대와 더불어 전 세계 시장에 출시해 위안부 문제가 국제적인 문제임을 분명히 인지시키고, 교육이나 역사 등 전 세계 여러 분야 관계자와 함께 사회적 가치도 높일 것이라고 밝혔다. / 디스이즈게임 정혁진 기자 겜브릿지 도민석 대표 # 소수 인원에서 16명으로, 코로나 환경 대비 효율적 협업 준비도 마쳐 디스이즈게임: 약 1년 만에 다시 만난다. 그동안 어떻게 지냈나. 게임 출시도 얼마 남지 않아 바쁘게 지낼 것 같다. 도민석 대표: 다시 만나서 반갑다. 알다시피 <웬즈데이> 개발, 출시에 전념하고 있었다. CBT 이후 버그나 부족한 것도 보충했다. 스팀 페이지도 완성했고. 게임을 완성시키기 위해 8월 이후부터 인재를 영입하고 제작비도 확충했고. 텀블벅 펀딩도 마쳤다. 만날 때마다 회사가 조금씩 성장하고 있다. <시미>와 같은 인디게임을 퍼블리싱하기도 하고. 어느 정도 규모가 늘어났나. 개발팀 인원이 2배 정도 늘어났다. 현재 16명이다. 마케팅, 경영지원 등 나를 포함한 5명을 빼고는 11명 모두 개발진이다.  코로나19로 지난 2월부터 전원 재택근무를 하며 효율적 협업을 위한 준비도 거쳤다. 협업을 위해 실력 있는 경력직 인재도 참여해 겜브릿지에서 리드 PM 역할과 사업 운영 총괄을 맡아 개발팀을 성장시켰다. 당시 인터뷰에서 <애프터 데이즈> 이후 후속작 <웬즈데이>를 개발 중이라고 밝혔다. 그리고 1년이 지나 12월 1일 출시를 맞이했다. 기분이 어떤가. 2018년 이맘때 <웬즈데이>의 주제에 대해 고민한 기억이 있는데, 벌써 이렇게 게임을 출시할 수 있게 되니 참 신기하다. 우여곡절도 많았고, 코로나19로 환경이 변하는 과정에서 좋은 분들을 계속 만나 많은 도움을 받았다. 다시 한 번 감사드린다. 출시가 한 차례 연기됐다. 코로나19 때문도 있겠지만 어떤 사정이 있었는지 궁금하다. 원래는 위안부 할머니들의 피해를 기리는 날에 맞춰 출시하는 것이 목표였다. 제일 큰 연기 사유는 '퀄리티 이슈'다. 추가 개발을 해야 하는데 아무래도 재택이나 원격근무가 처음이다 보니 거기에 적응하는 것에도 시간이 필요했다. 인재를 영입, 적응하며 개발 관리도 해야 했고. 그러다 보니 계획한 기간에 출시하면 문제가 생길 것 같다는 판단이 들었고 출시를 연기하기로 했다. 그러나 올해는 넘기지 말자는 생각이 있었다. <웬즈데이>를 얼마나 많은 분이 즐겨줄 지 모르겠지만 출시 후 퀄리티가 안좋으면 탄생과 동시에 많은 비난을 받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우리의 의도도 잘 전달되지 않을 것 같더라. 텀블벅 후원자 분들도 "출시일에 연연하지 말고 더 제대로 만들어 나오면 좋겠다"는 얘기를 해주셨다. 도중에 코로나19도 심해져, 개발 여건이 좋지 않았을것 같다. 2월 1일부터 재택 전환했다고 들었는데 현재도 마찬가지인가. 환경에 대한 대처는 앞서 얘기한 송 이사님 얘기로 대체하겠다. 현재 파트와 팀, 개인별 개발 상황을 일일 단위로 트래킹 할 수 있는 수준까지 됐다. 주간 화상회의도 정례화하고 있다. 매주 빌드가 나와 테스트하고 피드백을 반영하는 순서로 운영되고 있다.  이를 경험으로 출시 이후 차기작 개발을 시작하면 훨씬 짧은 시간에 고효율로 작업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일종의 과도기였다. # "우리가 알아야만 하는 사실을 넣었다..." 희망의 메시지 담은 웬즈데이 위안부 할머니들에게도 의미 있는 타이틀이 될 것 같다. 개발 과정에서 이들 자문, 증언을 얻기도 했다고 얘기했다. 혹 게임을 경험해본 적이 있던가? 있다면, 이들의 반응은 어땠나. 아직 게임을 보여드리지는 못했지만, 언젠가 꼭 보여드리고 싶다. 올해 8월 출시를 연기하며 중간에 한 번 보여드릴까 하는 생각도 했는데, 시국이 시국인만큼 직접 뵙기도 어려워 섣부르게 움직일 수 없었다. <웬즈데이> 개발을 알린 이후 대중매체나 콘텐츠 차원에서 위안부 문제를 알리기 위한 노력이 계속 시도되고 있었다. 김금숙 작가의 그래픽 노벨 '풀'은 만화계의 오스카 '하비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영화나 만화 등 다양한 소재로 위안부 문제를 알리는 노력이 결실을 맺다 보니 우리도 많은 용기를 얻었다. 이용수 할머니도 "미래세대에 위안부 문제를 잘 알리고 교육시키는 것이 중요한데, 지금까지의 방식으로는 한계가 있다"는 말씀을 하신 적이 있다. <웬즈데이>가 이런 측면에서 가치가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엔딩 크레딧에 고증자료나 레퍼런스를 다 넣어놨다. 우리의 순수 창작 보다 기존에 있던 파편화된 역사적 자료를 나름의 방식으로 잘 이어붙인 것이 <웬즈데이>다. 제 1000차 수요시위 및 평화비 건립 모습 게임 퀄리티에 대해서도 제법 부담이 있었던 것 같다. 11월 지스타 인디 쇼케이스에서 <웬즈데이>가 소개될 때 채팅창을 봤는데 거기서 "한 끝 차이로 위험한 주제다"라는 얘기를 봤다. 동감한다. 2년 전 <웬즈데이>를 시작하기로 맘먹었을 때부터 이건 '모 아니면 도'라고 생각했다. 첫 느낌에서 '이건 아니다'라는 생각을 주면 게임의 전체 방향성이나 의미는 제대로 전달되지 못하게 되고 결국 <웬즈데이>는 빛을 발하지 못할 것이다. 제작진도 그런 점을 해소하기 위해 많이 노력했다. 스토리 어드벤처다 보니 '스토리'가 제일 중요하다. 담당한 황유정 작가가 맘고생 많이 했다. 다행히 테스트 과정에서도 스토리 만족도가 높았다. 시각적 요소나 만듬새, 사운드, 게임성은 시간과 자본이 많이 투입되면 좋아지는 것은 맞지만 처음부터 그렇게 할 수 없던 상황이다 보니 나름 절충하며 퀄리티를 올렸다. 지금은 <웬즈데이> 만의 독특함이 나온 것 같다. 사운드는 이펙트에 많이 신경 썼다. 텀블벅 후원자 중 작곡가가 계셔서 그분이 스튜디오에서 2곡 정도 제작도 해주셨다. 그 외 다른 분도 OST 작업을 해주셨다. 적은 인원과 한정된 자원으로 각고의 노력을 한 것 같다. 플레이를 했을 때 잘 전달됐으면 하는 바람이다. 역사적인 고증, 그리고 타임리프라는 약간의 판타지 요소를 혼합하기도 했다. 개발과정을 돌아봤을 때, 기억에 남는 에피소드나 개발 일화가 몇 가지 있다면. 오는 8일 열릴 포스트모템에서 얘기도 할 건데, 지금은 그를 위해 파트별 제작 과정을 돌아보는 자료를 만들고 있다. 사업을 총괄하는 입장에서 일단 시작하기 잘했다는 생각은 하고 있다(웃음). 처음부터 게임 제작 경험이 부족하다 보니, 그것 때문에 겪는 시행착오가 많았다. 경력자나 그런 장르의 게임을 만든 경험자와 함께 시작했다면 더 좋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은 든다. 인재를 구하고 개발을 시작하는 첫 단추에서 놓친 부분이 많지 않았나 싶다. 다행히 지금은 개발팀 경험이 많이 쌓여 훨씬 잘 만들 수 있다고 생각한다. 코로나19로 의외 혹은 해결하기 힘든 상황에 놓였을 때 힘들기는 했지만, 전반적으로 좋은 경험을 했다고 생각한다. 개발 일화를 잠시 얘기하면, 이전 인터뷰에서도 얘기했듯 고 김복동 할머니가 "내가 과거로 돌아갈 수 있다면, 친구들을 구하고 싶어"라고 말씀하셨던 것에 착안해 게임의 진행 방식을 설정했다. 순이의 역할은 어떻게 보면 첩보원 같기도 하다. 주한일본대사 앞에서 1인 시위를 하는 모습 고증자료를 보며 느낀 것은, 당시 피해자 분들은 모두 10대였다. 지금처럼 제대로 교육도 받지 못한 상황이고 본인들이 끌려간 곳의 지명도 모른다. 그래서 증언도 제법 분산되어 있다. 일본에서는 이를 두고 '증언의 일관성이 떨어진다'는 이유로 부정하고 있다. 할머니들의 기억이 계속 흐려지고 피해자의 증언만으로 재판을 해야 하는 상황이다. 게임에서는 순이라는 할머니가 구출되고 나서도 친구도 구하지 못한 한에 의해 모아놓은 자료가 서재에 꽉 차 있다. 게다가 과거의 퍼즐이 맞춰지지 않아 정보의 효력도 없다. 우리는 이를 시간이동을 하며 외국어를 듣고 말하는 능력이 생기게 되고 5번의 시간이동을 하며 점점 퍼즐이 맞춰져 이것이 현재에서 다시 해석되는 과정을 만들어냈다. 결국 우리가 알아야 하는 사실을 넣었다. 게임을 플레이 하고 위안부 문제에 좀 더 관심을 가지도록. 플레이를 하며 피해 당시 알지 못한 다양한 단서를 얻을 수 있다. 개발 기간 동안 변경, 개선되거나 추가 된 콘텐츠나 내용이 있다면. 카메라 무빙을 신경 써서 연출씬의 퀄리티를 높였다. 이전에 공개한 자료는 카메라 무빙이 빠져 단편적인 움직임만 보이는 횡스크롤 느낌이었다면, 이제는 좀 더 생동감 있는 연출을 경험할 수 있다. 또 작년까지 모션 캡쳐를 안쓰고 키프레임 방식을 썼는데 그러다 보니 제작 일정에 맞춰 퀄리티를 높이기 힘드러다. 그래서 올해 모션 캡쳐를 도입했다. 판교 글로벌 허브센터와 SBA의 VR, AR 제작지원 센터에서 도움을 받았다. UI, UX 측면에서도 게임을 좀 더 편하게 할 수 있는 장치를 넣었다. 게임 내 퍼즐 요소나, 주인공 순이가 일본군 보초를 피해 은신하는 장면의 난이도도 조정됐다. 퀄리티 개선을 거친 <웬즈데이>의 모습 유저는 '순이' 할머니가 되어 현재와 과거를 오가며 역사의 퍼즐을 맞추는 역할을 맡게 된다. 이제 게임이 대중에 공개된다. 게임에 어떤 메시지를 담았나. 스트리머 분들께도 마지막 4, 5챕터는 라이브 방송을 하지 말아주십사 하고 부탁했다. 엔딩 자체가 스포일러니까. 메시지는 뭐 당연한 것이겠지만, '희망'을 얘기하고 싶었다. 결국 지옥같은 시절로 다시 돌아간 이유는 한을 풀기 위해서기 때문이다. 서사적으로 반전도 있을 것이고, 과거와 현재를 오가며 좌절도 많이 할거다. 하지만 모든 것을 거치고 나면 희망적인 메시지를 얻을 수 있을 것이다. 위안부 피해를 당한 그 곳에서, 순이 할머니는 결국 희망의 메시지를 얻게 된다 지난 9월 CBT를 진행했다. 어떤 버전과 목적을 가지고 테스트했는지, 어떤 반응들을 얻었는지 궁금하다. 9월 16일부터 10일 가량 후원자들과 내부 관계자 중 선정된 인원 대상으로 CBT를 진행했다. 대상자는 1,000명 정도였으며 의견을 주신 모든 분들의 의견에 대해 감사드린다. 중복되는 내용도 있지만 전반적으로 유의미한 성과를 거뒀다. 시나리오에 높은 만족도를 얻었다. 부족한 것은 유저 편의성이나 퍼즐 같은 게임 요소다. 개발 중이어서 빼놨던 것에 대한 얘기도 있었다. 버그도 있었고. 파악된 모든 것은 고쳤다. 개발팀이 놓친 것도 있었다. 순이 할머니가 현재 시점에 머무르는 상황에서, 서재 안에 달력이 있는데 여기에 1992년 1월 2일이 평일로 표시되어 있던 것을 2일도 휴일이라고 얘기해주기도 하셨다. 또 인물 대사 중 인도네시아가 열대 우림이니 습해서 자연발화가 안될 것이라는 점에 대해 화학 전공자께서 과학적인 오류가 있다는 얘기를 해주셔서 이 부분도 수정했다. 특히, 인상에 남는 것은 한 후원자가 "본인의 인생에서 가장 잘 한 일 세가지 중 하나"라는 의견을 남겨주셨다. 모든 제작자가 이를 놓고 힘들 때마다 보며 지냈다. 지난 1월 28일부터 3월 3일까지 텀블벅 크라우드 펀딩에도 성공했다. 7월 기준 국내 게임 크라우드 펀딩 사상 최다후원자 수라고 하던데. 과정이 어땠나. 더불어 후원에 대한 소감도 한 마디. 돌이켜 보면 운이 정말 좋았던 것 같다. 마케팅 비용이 많아 홍보를 잘 할 수 있던 상황도 아니었는데, 펀딩 오픈 전날부터 트위터에서 리트윗이 수만 건 이상 이어지며 게임이 화제가 되더라. '온다람'이나 '소련여자' 같은 유튜브 인플루언서도 우리 게임을 소개해주기도 했다. 너무 감사하다는 말씀을 전하고 싶다. 데모 버전 없이 펀딩을 하는 것이 위험 요소가 크기도 했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대 보다 많이 돼서 감사하게 생각하고 있다. (이어) 여전히 투자유치를 받아야 하는 상황이다. 텀블벅 이후 진행 중이거나 계획하고 있는 곳은 있나? 사업적으로 성장하고 인재 유치와 더 많은 성장을 해야 한다. 물론 투자 유치도 계속 노력해야 한다. 올해가 끝나기 전에 투자 유치를 한 차례 더 성사할 수 있다면 좋지 않을까 싶다. <웬즈데이>가 좋은 평가를 받고 차기작을 만들 수 있도록 계속 성장하고 싶다. # <웬즈데이>, 겜브릿지의 대표작으로 기억되었으면 12월 1일 국내 출시했다. <웬즈데이>가 어떤 게임이 되었으면 바라나. 겜브릿지의 대표작으로 기억됐으면 좋겠다. 그와 동시에 정말 많은 노력이 들어갔음을 꼭 알아주셨으면 한다. 물론 부족함도 많겠지만,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했다고 생각한다. 해외 출시도 정말 중요하겠다. 그렇다. 위안부 피해는 우리나라 할머니들만의 문제가 아니다. 인물이나 국적도 다양하다. 네덜란드, 인도네시아, 중국 등... 지역도 인도네시아로 한정된 것이 아니라 태평양 전역에 걸쳐 이루어졌다. 국제적인 문제다. 그래서 텀블벅 펀딩 때도 영어, 중국어, 일본어, 유럽 국가 등 4개 파트로 넣기로 공약했다. 영문 번역이 완성돼야 유럽 파트를 완성할 수 있다. 중국어, 일본어는 번역가를 찾고 있다. 출시 시점에는 한국어 버전을 먼저 선보이고 가능하면 내년 1월 까지 영문 버전을 업데이트 하는 것이 목표다. 텍스트 퀄리티가 체크 되면 내년 3~4월까지 다른 언어도 업데이트 할 것이다. 타깃 국가에도 홍보, 마케팅도 할 것이다. 각종 게임쇼에도 출품할거고. <웬즈데이>의 스토리에 관심을 보이는 제작사도 있다. <반교>의 영화화 같이. 시장 검증이 안됐지만 우리도 그런 사례를 만들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한다. 출시와 함께 국내 영화사나 제작사, 중국 쪽 제작사와 자료를 공유해 시나리오 검토도 요청할 것이다. 타 플랫폼 출시 계획은? 당시 모바일에 대한 생각도 아예 없지는 않아 보였는데. 내년 6월 전후로 모바일 버전을 생각하고 있다. PC 버전에 맞춰졌다 보니 컨트롤이나 그래픽 등 많은 부분을 변경해야 할 것 같다. 앞으로 3~5년 뒤에는 콘솔 차기작도 개발을 해보고 싶다. <웬즈데이>가 닌텐도 스위치에도 들어갈 수 있다면 좋겠지만...(웃음) 다양한 경험을 쌓을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젊은 세대, 서구 사회에 위안부 문제를 올바르게 알리고 싶은 메시지가 있다고 밝혔다. 좀 구체적인 계획을 세워도 좋겠다. 교재로 사용되도록 한다거나. 출시 이후 여러 마케팅, 사회공헌 활동이 계획되어 있다면. 학교 보급도 얘기하고 있다. 게임으로 사회적 가치를 만드는 것을 고민하다가 기부 외 학교에서 역사 시간에 플레이를 하는 것도 좋겠다고 생각했다. 관심 있는 학교나 관계자 분들이 계시다면 학교 버전용 스팀 키를 제공할 수도 있을 것 같다. 교육 컨퍼런스에도 출품해서 위안부 문제를 더 많이 알릴 것이다. 내년 7월 '게임즈 포 체인지'에 전 세계 많은 관계자가 올텐데 거기에서 <웬즈데이>를 소개할 것이다. 전 세계 역사 연구가나 교육 기관에도 알리겠다. 출시 이후 바로 확장팩 계획도 얘기했는데. 어떤 내용을 담을 예정인가. 여력이 된다면 게임에 나오는 다른 캐릭터들의 배경 이야기를 다루는 것도 의미 있겠다고 생각하고는 있다. 물론 개발팀의 여력이나 성과가 좋아야 하겠지만. 이대로 끝내기 아쉽다는 내부 의견도 있었고. 출시 이후 반응을 봐야할 것 같다. 현재 회사 규모로 할 수 있는 것도 제법 많아졌겠다. 아직 이르지만, 향후 계획은 어떻게 되나. <웬즈데이>를 만들며 차기작 아이디어도 틈틈이 모았다. 내년 6월 <웬즈데이> 모바일 버전 출시 이후가 되면 우리가 지향하는 임팩트 게임을 개발할 조건이 될 것 같다. 작년 4월부터 내년 12월까지 카이스트 문화기술대학원과 연구개발사업을 진행하고 있다. 어르신과 청소년이 같이 즐길 수 있는 '세대융합형 게임'을 위한 기술을 개발하고 있다. 겜브릿지는 그 기술을 활용한 게임을 개발할 것이다. 아마 내년 하반기 쯤이 될 것 같다. 참고로 <웬즈데이> 수익 일부를 기부할 계획도 가지고 있다. 위안부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작게나마 도움이 되기 위해 만든 게임이기 때문에, 어떤 방식으로 도움을 드릴 수 있을 지에 대해서는 좀 더 고민해 봐야 할 것 같다. 게임 서비스 안정화를 먼저 끝낸 다음 진행하겠다. 게임 출시 이후, 아직은 좀 이르겠지만 잠시 개발 중단한 <애프터 데이즈2> 개발도 이어져야 하지 않겠나 싶다. 추억으로 남겨야 하지 않을까 싶다. 2018년 8월까지 만들고 있었는데, 네팔 분들께 여쭤보니 관광업이 주 수익인 나라여서 지진의 이미지를 벗고 싶다고 얘기해주셨기 때문이다. UN이 제시한 '지속가능발전목표'를 소재로 하는 게임 개발 목표도 있지 않나. 다양한 메시지를 전할 수 있는 장르를 고민하고 있다. <웬즈데이>로 2년 개발 하며 많은 계획이 수정되고 추가되고 있다. 게임의 성과와 팀 아이디어를 보태서 결정해야 할 것 같다. 앞서 얘기한 <시미> 같은 게임의 추가 퍼블리싱 계획은? '퍼블리싱'이라는 표현 보다 좀 더 다양한 임팩트 게임을 만들 수 있는 팀을 많이 찾고 싶다. 회사가 더 커지고 여력이 된다면 경험을 나누고 독특한 임팩트 게임을 만드는 소규모 독립 스튜디오를 발굴, 지원하는 역할도 해보고 싶다. 엑셀러레이터의 역할이랄까. <시미> 처럼 개발 지원도 할 수 있을 것이고. 서울여대 고인돌팀의 <시미> 마지막으로 유저들에게 한 마디 부탁한다. <웬즈데이>는 겜브릿지라는 게임 회사가 좀 더 많이 알려질 수 있는 또 하나의 시작점이 될 것 같다. 이제 좀 더 게임을 잘 만들 수 있는 회사가 된 것 같다는 희망을 가지게 된다. <웬즈데이>를 발판으로 다양하고 재밌으면서 감동 있는 게임을 만드는 개발사로 성장하고 싶다. 3년 뒤에는 우리 팀 외 대학생 팀도 지원할 수 있는 회사로 거듭나겠다.
이집트의 마지막 개또라이왕 이야기
파루크 1세는 이집트의 마지막 왕인데 마지막인 이유를 온몸으로 보여주다 갔다 간단하게 몇 개만 추린 업적은 다음과 같다 1. 목표가 도둑왕이 되는 거였나보다. 왕인데 도벽이 엄청났다. 2. 도둑기술을 전수받기 위해서 이집트 최고의 소매치기를 국왕명령으로 사면시키고 소매치기 비법을 전수받음 3. 이 솜씨로 2차 세계대전 중에 회의하다가 처칠의 손목시계를 훔쳐 도망감. ㅇㅇ 그 처칠 맞음 4. 당연히 처칠은 개빡쳐서 외교문제로 번짐. 하지만 씹었다 5. 좀 더 특이한걸 훔쳐보고 싶어졌음. 마침 이란 왕이 죽어서 시체를 테헤란으로 이동시키던 중이었거든? 밤중에 이란왕 관을 털어서 보검과 보석을 훔쳐감 6. 이란은 당연히 개빡쳤음. 외교문제로 번졌지만 또 씹었다. 참고로 이건 유명한 것만 늘어놓은거고 평민들 물건은 그냥 평소에도 왕창 훔쳐갔다. 7. 도벽 뿐만 아니라 식탐도 존나 심했다. 몸무게가 130kg이었음. 아니 어떻게 도둑질을 한거지 민첩스텟이 제로일텐데 8. 한번은 잠을 자다가 사자한테 습격당하는 꿈을 꿨음. 그 자리에서 일어나서 카이로 동물원에 간 다음에 총으로 사자들을 다 쏴죽였다 9. 성욕도 엄청났다. 파루크가 가지고 있는 포르노 컬렉션은 당시 세계 1위에 해당하는 엄청난 분량이었다. 10. 포르노만 보면 좋겠는데 실제 여자도 존나 많이 건드렸다. 대충 추산한 것만 해도 파루크가 덮친 여자만 해도 5000명이 넘는 걸로 추정 11. 이 중에는 그리스 왕비도 있었다. 이란 왕은 죽어있기라도 했지 살아있는 그리스 왕비를 이집트 왕이 덮쳤다 12. 덮칠 때도 나름 머리 굴린답시고 왕궁 불을 정전시켜서 꺼버린 다음 어둠 속에서 덮쳤는데 그래봤자 냄새 때문에 다 들켰다. 그리스 왕비는 불 꺼지기 전에 문 밖에 서있던 근육헬창이 내 남편인데 마 자신있나 협박을 해서 간신히 정조를 지킬 수 있었다. 13. 한번은 프랑스 여배우를 데리고 캐딜락으로 카이로 시내를 질주하다 속도위반으로 경찰에게 단속됐다. 경찰이 다가오자 권총을 뽑아들어 격퇴 14. 낙찌년들이 폭격을 가할까봐 온 이집트가 불을 끄고 조심하고 있는데 왕궁 주변은 전부 불을 켰다. 왜냐면 어두우면 안 보이니까 15. 참다 참다 빡친 군대가 쿠데타를 일으켜서 나라를 뒤집어 엎었지만 털끝 하나 안 다치고 이탈리아로 탈출 성공. 탈출할 때 타고가는 배에 실려있던건 이집트 최고의 술들과 야동 컬렉션이었음 16. 거기 레스토랑에서 밥 먹다가 심장마비로 45세에 사망 거 앵간하면 민주주의 합시다 (출처) 아니 이렇게 하고싶은 거 다 하고 갔는데 어떻게 큰 외교 문제로 한 번도 안 번진 거지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킬 당해도 한 두 번 당할 정도가 아닌데 지병으로 죽은 게 쩌는 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