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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는 종 9품을 무시하지마라

참고)
암행어사들이 자주 실종되었다, 이런 얘기도 있는데 말도 안되는 소리입니다
암행어사들은 기본이 종3품인데다가 마패나 명령서를 왕이 직접내려줬습니다
걸어다니는 인맥이죠. 자기가 인맥에 관심없어도 이정도면 그냥 파벌이 알아서 찾아옵니다
얘네가 지방 내려갔다가 실종되었다? 그 곳 관료들은 일단 그랜절 상태로 한양으로 굴러와야합니다



그러니까 대단하신 분들이라 이거예요!
당시의 우리는 과연...
8 Comment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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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이선생님 이쪽동네위인이지만... 나빳네... 9년간 장원길을 막아논거네 ㅋㅋㅋ-ㅋ
@shank9933 헐 ㅋㅋㅋ 더나빳네요 ㅋㅋㅋㅌ 양민학살
@mandoojoa 3년에 한번씩 시행한걸로 알고 있어요
@geon707 ㅋㅋㅋㅋㅋㅋㅋ 위인이 아니라 고인물이네요 ㅋㅋㅋㅋㅋ 진짜 나빳다 ㅋㅋㅋㅋ 27년간 장원은 없는건데 재난있으면 패스한다면 거의 35년 이상 은 장원은 없는거였을듯 ..
과거시험 고인물들의 프로듀스48
장원을 9번? 허.... 사극드라마에서 꼴랑 시험 한 번 보고선 암행어사 출두요~ 하는건 개뻥이구만 그럼 춘향이 이도령은 뭐지? 몇 년을 기다린거야? 탐관오리ㅋㅋㅋㅋㅋㄱ
암행어사가 조선초기무렵에 종종 실종되는 일이 있었던것으로 압니다. 여말의 혼란에 남으로는 왜구가 날뛰고 북으로 적호들이 설쳤으니 사회상 오죽 혼란스러웠겠고 산에는 산군과 낭랑들이 설쳤을테니 아주 없는 소리는 아닌듯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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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의 만행, 아이슬란드의 패기
역사를 좋아하는 사람이면 아마 제목만 들어도 알 법한 이야기이다. 영국의 만행과 아이슬란드의 패기 - 대구 전쟁 이야기이다. 생선 대구 맞다. 입 밑에 수염 달린 듯하게 생긴 그 물고기. <대서양 대구> 이 물고기가 어떻게 전쟁의 주역이 되었느냐 하면, 역시 영국 때문이다. 19세기. 그러니까 금융경제도 관광업도 없던 시절. 소프트웨어 산업은 몇 백년 더 기다려야 하던 시절.  자윈도 공업도 없고 심지어 농사도 잘 되지 않는 북쪽의 척박한 섬나라 아이슬란드는 당연히 가난한 소국일 수밖에 없었다. 그나마 사람들을 먹여살려주는 건 차가운 바다에서도 잘 활동하는 대서양 대구뿐. 덴마크 식민지 시절 아일슬란드의 슬픈 기억. 문제는 아이슬란드 남쪽에 영국이 있었다는 것이었다. 바로 옆에 있는 섬나라 이웃 아일랜드처럼 영국의 짓밟힘을 당하지는 않았지만, 영국의 탐욕 가시권에 든 건 사실이었다. 산업혁명으로 도시 인구가 늘어나 값싼 튀김요리 수요가 늘어난 영국은 아이슬란드 해역에서 대구들을 잡기로 한다. 덴마크는 페로 제도에서 50해리까지 외국 어선은 들어오지 말라는 조치를 내렸으나, 영국은 영국답게 쌩깠다. <아이슬란드, 페로 제도, 영국의 위치. 빨간 원 안이 페로 제도. 왼쪽 위가 아이슬란드 왼쪽 아래가 영국(스코틀랜드) 이다> 거기에 양아치 조약까지 채결하는데 아이슬란드 해안가에서 3해리까지만 덴마크/아이슬란드의 것으로 인정해 주겠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영국답게 그 3해리조차도 침범해 해안가의 대구까지 싹 쓸어간다. 참고로 1해리가 1852미터이다. 그러니까 영국은 해안가에서 5.5km 까지만 영해로 인정해 준 후 그것마저 어겼다는 것이다. 아이슬란드가 대구에 집착하는 잉글랜드 양아치로부터 잠깐이나마 자유로웠던 기간은 두 번의 세계대전 뿐이었다. 잠깐 자유롭게 대구를 잡아 먹고 지내던 아이슬란드인들은 2차대전이 끝나자 영국의 대구 집중공세에 시달려야 했다. 여기서 잠깐. 왜 영국이 전쟁이 끝나자마자 대구잡이에 열을 올렸냐고? 이거 때문이다. <대구 간 기름을 줄 서서 받아먹는 영국인 아이들> 이거 먹겠다고. 식량난이 겹치고 대구 간 기름의 비타민이 좋다고 믿은 영국 정부는 아이슬란드의 대구를 삥뜯어 영국인들에게 먹이려고 했다. 4면이 바다인 섬나라인데 굳이 북쪽의 대구를 먹겠다고 난리를 치는 영국을 아이슬란드는 또 다시 막아야 했다. 1. 1차 대구 전쟁 1945년 대륙붕 (수심 200미터 이내의 완만한 해저 지형) 의 자원은 그 나라의 것이라는 미국의 트루먼 선언에 끼어들어, 아이슬란드는 기존 영국과 체결했던 바다 조약을 3 -> 4 -> 큰맘먹고 12해리로 늘린다. <아이슬란드가 넓히고자 했던 영해 지도> 당연히 영국은 반발해 영국 해군 함정들을 아이슬란드로 파견했다. 아이슬란드는 이에 맞서 경비정을 보냈다. 아이슬란드의 경비정들은 영국 어선의 그물을 잘랐고 영국 어선들은 해군 함정들의 호위를 받았고 좁아서 대구를 잘 못 잡았다. 이 분쟁은 10년이 넘도록 늘어진다. 물론 이득을 본 건 아이슬란드 쪽 이후 출동이 계속되자 영국은 1961년 결국 아이슬란드의 12해리를 인정해준다. 하지만 영국은 이후 분쟁이 발생하면 국제사법재판소로 가자는 조약을 체결한다. 외교력으로 아이슬란드의 차후 확장을 막겠다는 것. 아이슬란드 야당은 반대했지만 지친 아이슬란드는 받아들인다. 2. 2차 대구 전쟁 10년 뒤 1972년. 지난 조약에 반대했던 야당이 정권을 잡자 영해를 50해리로 늘리겠다고 발표한다. 50해리는 위의 대륙붕이 이어진 곳이 50해리까지였기 때문이다. 영국은 반발했지만 아이슬란드는 다음과 같이 답변한다. 1. 지난번 협상은 너희들의 협박이고 2. 어획량 제한 해놓고 가져가겠다는 건 못 믿겠다. 싫다. 3. 그리고 대구 없으면 굶어죽는다고 결국 영국과 아이슬란드는 또 다시 출동하고 아이슬란드는 영국이 계속 괴롭히면 NATO 탈퇴와 국교 단절도 불사하겠다는 카드를 꺼내든다. 다급해진 NATO 는 73년 10월 2일 중재에 나섰고 영국 정부는 결국 50해리를 인정하고 물러나야했다. <50 해리 지도> 3. 3차 대구 전쟁 하지만 대구 전쟁은 3차까지 이어진다. 1973년 개발도상국 34개국이 모여서 배타적 경제수역을 200해리까지 과감하게 늘리자고 했는데 아이슬란드도 여기에 동참하게 된다. 여기에는 몇 가지 이유가 있다. 단순히 넓으면 좋다! 이런 건 아니고, 74년도부터 아이슬란드 해역의 대구 수가 급감하고 있어 비상이 걸린 참에 오일 쇼크까지 겹친 아이슬란드는 주변 바다의 대구를 모두 잡아야 국민들을 겨우 먹여살릴 수 있는 처지에 내몰린다. <200해리 지도> 결국 200해리 넓히겠다고 하고, 영국이 어김없이 태클을 걸고 들어왔다. 이 때 아이슬란드는 갈등이 또 지속될 기미를 보이자 초강수를 둔다. 아이슬란드: 영국이 ㅈㄹ을 멈추지 않는다면 소련에 붙겠다. 나토: 아이 싯팔! 나토 미국 그리고 영국을 제외한 나머지 국가들은 이 초강수에 비상이 걸렸다. 북대서양 한복판에 있는 국가가 소련에 붙어버리면 어떻게 되는가? 미국 유럽이 물리적으로 절단나는 것은 물론이요, 만약 소련이 아이슬란드에 레이더 기지는 기본으로 깔고 거기에 대서양 한폭반에 핵미사일과 잠수함 기지까지 박아놓을 수 있다는 것이었다. 만약 정말로 이런 일이 벌어진다면 냉전의 균형추는 소련 쪽으로 급격하게 기우는 셈이었다. 여기에 더해 아이슬란드는 200해리 퇴거 명령 불응 시 영국과 국교 단절이라는 조건도 다시 걸었지만 상황의 심각성은 모르고 대구에 미쳐버린 영국은 불응했다. 결국 1976년 2월 19일을 기해 아이슬란드는 영국과의 국교를 단절했다. 하지만 국교를 단절했다고 분쟁이 끝나는 것은 아니어서 아직도 아이슬란드 해역에서 아이슬란드 경비정 vs 영국 해군 마찰은 지속되었고 한 편 미국 의회와 유럽 의회 (당시 EU 가 아니라 EC) 는 200해리를 인정해 주는 법안을 통과시켰다. 여기까지 오자 영국 내부에서는 고작 대구 좀 먹겠다고 아주 ㅅㅂ 막 나가냐는 목소리가 나왔고 미국과 유럽도 니들의 맛 대가리 없는 피시 앤 칩스 때문에 자유주의 진영이 통으로 몰락할 위기에 처했다고 비판했다. 결국 1976년 6월 노르웨이의 오슬로에서 양국의 국교가 정상화되면서 아이슬란드의 요구를 모두 수용한다. (200해리 내에서 최대 24척이 5만톤 이하로 대구 잡기. 하지만 24척 가지고는 3만톤도 못 잡았다.) 결국 대구 전쟁은 아이슬란드의 완승으로 끝난다. 하지만 영국과 기타 유럽국가 + 미국은 아이슬란드가 막을 수 없는 방법으로 기어코 아이슬란드에게 엿을 먹였다. <지구 온난화와 바다 수온 상승> 대구는 차가운 바다 물고기이다. *번외 야 니들도 우리처럼 볼락 먹고 대구는 좀 줄여봐 ㅈ까 ㅂㅅ *(독일은 볼락을 더 좋아해 아이슬란드와 일찍히 평화롭게 협상을 마무리했다. 그리고 영국에게 볼락을 더 먹지 그러냐는 설득을 공식적으로 해봤지만 까였다.) 그리고 영국이 그렇게 목숨 걸었던 대구로 만든 그들의 요리 대.단.하.다. 논.영! (출처) 그렇게 해서 지킨 것이 피시앤칩스라니 아아 대영제국이여!
2차 대전 극한의 컨셉충
윌리엄 밀린 노르망디 상륙작전에서 백파이프 병으로 차출되어 백파이프를 불며 진격함 윌리엄은 총 한 발 안 맞았는데, 독일군 포로가 전하길 미친놈인 줄 알고 안 쐈다고 함 아래는 백파이프로 가장 많이 연주되는 용감한 스코틀랜드라는 곡이다 내 생각엔 전곡 들어야 해서 안 쏜 듯 번역기 돌린 거라 문맥이 이상할 수도 있음 이름은 앨리슨 디그비 타담 워터 최종 계급 소령 애비가 11살때 1차대전 당시 가스때문에 죽고 그 충격인지 영국왕립군사학교에 입학하고 1937년 중위계급으로 졸업하고 초기 인도주둔영국군으로 복무했는데 1942년 동생이 엘 알 라메인에서 죽은걸 듣고 공수부대에 자진입대함. 이사람은 뭔가 영국군인의 전통을 중시하는사람이라 전투가 있을때마다 우산을 가지고 다님. 무전기를 잘 믿지못해서 나팔로 통신하는법을 가르치고 실전에서도 나팔로 통신하기도함 마켓가든 작전 당시 풀숲에 숨어있다가 장갑차가 지나가자 튀어나와 장갑차 시야구멍에 우산을 찔러넣어 장갑차를 세우기도했음. 아마 이게 젤 쩌는 듯. 중간에 고급장교를 만났는데 장교가 자신에게 탄약이 없다고 하자 디그비는 "탄약걱정은 하지마십시오.저에겐 우산이 있습니다" 라고 말하고 우산으로 고급장교를 호위하며 후송하기도했음. 쨌든 철모안쓰고 붉은베레모 쓰면서 여기저기 우산들고 전투하다가 포탄파편에 맞아 부상입음. 우산이 비는 맞아도 포탄파편은 못막은듯. 포로로 끌려가 세인트 엘리자베스 병원으로 갔지만,치료 도중 동료와 같이 창문 깨고 탈출하고 자신옷의 단추와 바늘로 간이 나침반을 만들어 근처 네덜란드 마을로 가서 레지스탕스 도움을 받으며 몸을 숨김. 여기서 그의 위장술이 발현되는데, 청각장애인 네덜란드인 페터 젠센이란 이름으로 가짜 신분증을 만들며 오토바이로 거리를 활보하여 흩어진 연합군 낙오자및 포로 150명을 모았지만, 독일군 그 누구도 귀머거리 페터 젠센이 앨리슨 디그비라는 영국군인걸 눈치못챔. 위장술이 너무 쩐 나머지 진흙에 빠진 독일군 장교 차를 미는 것도 도와주기도했음. 쨌든 이렇게 모은 150명을 데리고 연합군 후방으로 갔는데 이를 페가수스 작전이라고 불렀음 사망자 1명빼고 나머지 모두 무사히 귀환시켰고. 영국 본토에서 Distinguished Service Order훈장을 수훈받음. 그리고 종전후 1993 75세 나이로 사망함 출처 그리고 그는 킹스맨의 모티브가 되었다고 합니다. 극한의 컨셉충이지만 능력자 만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