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0shelter
5,000+ Views

영국의 만행, 아이슬란드의 패기

역사를 좋아하는 사람이면 아마 제목만 들어도 알 법한 이야기이다.

영국의 만행과 아이슬란드의 패기 - 대구 전쟁 이야기이다.
생선 대구 맞다. 입 밑에 수염 달린 듯하게 생긴 그 물고기.
<대서양 대구>

이 물고기가 어떻게 전쟁의 주역이 되었느냐 하면, 역시 영국 때문이다.

19세기. 그러니까 금융경제도 관광업도 없던 시절. 소프트웨어 산업은 몇 백년 더 기다려야 하던 시절. 
자윈도 공업도 없고 심지어 농사도 잘 되지 않는 북쪽의 척박한 섬나라 아이슬란드는 당연히 가난한 소국일 수밖에 없었다.
그나마 사람들을 먹여살려주는 건 차가운 바다에서도 잘 활동하는 대서양 대구뿐. 덴마크 식민지 시절 아일슬란드의 슬픈 기억.

문제는 아이슬란드 남쪽에 영국이 있었다는 것이었다.

바로 옆에 있는 섬나라 이웃 아일랜드처럼 영국의 짓밟힘을 당하지는 않았지만, 영국의 탐욕 가시권에 든 건 사실이었다.

산업혁명으로 도시 인구가 늘어나 값싼 튀김요리 수요가 늘어난 영국은 아이슬란드 해역에서 대구들을 잡기로 한다.
덴마크는 페로 제도에서 50해리까지 외국 어선은 들어오지 말라는 조치를 내렸으나, 영국은 영국답게 쌩깠다.
<아이슬란드, 페로 제도, 영국의 위치. 빨간 원 안이 페로 제도. 왼쪽 위가 아이슬란드 왼쪽 아래가 영국(스코틀랜드) 이다>

거기에 양아치 조약까지 채결하는데 아이슬란드 해안가에서 3해리까지만 덴마크/아이슬란드의 것으로 인정해 주겠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영국답게 그 3해리조차도 침범해 해안가의 대구까지 싹 쓸어간다.
참고로 1해리가 1852미터이다. 그러니까 영국은 해안가에서 5.5km 까지만 영해로 인정해 준 후 그것마저 어겼다는 것이다.

아이슬란드가 대구에 집착하는 잉글랜드 양아치로부터 잠깐이나마 자유로웠던 기간은 두 번의 세계대전 뿐이었다.
잠깐 자유롭게 대구를 잡아 먹고 지내던 아이슬란드인들은 2차대전이 끝나자 영국의 대구 집중공세에 시달려야 했다.
여기서 잠깐. 왜 영국이 전쟁이 끝나자마자 대구잡이에 열을 올렸냐고? 이거 때문이다.
<대구 간 기름을 줄 서서 받아먹는 영국인 아이들>

이거 먹겠다고. 식량난이 겹치고 대구 간 기름의 비타민이 좋다고 믿은 영국 정부는 아이슬란드의 대구를 삥뜯어 영국인들에게 먹이려고 했다.
4면이 바다인 섬나라인데 굳이 북쪽의 대구를 먹겠다고 난리를 치는 영국을 아이슬란드는 또 다시 막아야 했다.

1. 1차 대구 전쟁
1945년 대륙붕 (수심 200미터 이내의 완만한 해저 지형) 의 자원은 그 나라의 것이라는 미국의 트루먼 선언에 끼어들어,
아이슬란드는 기존 영국과 체결했던 바다 조약을 3 -> 4 -> 큰맘먹고 12해리로 늘린다.
<아이슬란드가 넓히고자 했던 영해 지도>

당연히 영국은 반발해 영국 해군 함정들을 아이슬란드로 파견했다. 아이슬란드는 이에 맞서 경비정을 보냈다.
아이슬란드의 경비정들은 영국 어선의 그물을 잘랐고 영국 어선들은 해군 함정들의 호위를 받았고 좁아서 대구를 잘 못 잡았다.
이 분쟁은 10년이 넘도록 늘어진다. 물론 이득을 본 건 아이슬란드 쪽

이후 출동이 계속되자 영국은 1961년 결국 아이슬란드의 12해리를 인정해준다.
하지만 영국은 이후 분쟁이 발생하면 국제사법재판소로 가자는 조약을 체결한다. 외교력으로 아이슬란드의 차후 확장을 막겠다는 것.
아이슬란드 야당은 반대했지만 지친 아이슬란드는 받아들인다.

2. 2차 대구 전쟁

10년 뒤 1972년. 지난 조약에 반대했던 야당이 정권을 잡자 영해를 50해리로 늘리겠다고 발표한다.
50해리는 위의 대륙붕이 이어진 곳이 50해리까지였기 때문이다. 영국은 반발했지만 아이슬란드는 다음과 같이 답변한다.
1. 지난번 협상은 너희들의 협박이고
2. 어획량 제한 해놓고 가져가겠다는 건 못 믿겠다. 싫다.
3. 그리고 대구 없으면 굶어죽는다고

결국 영국과 아이슬란드는 또 다시 출동하고 아이슬란드는 영국이 계속 괴롭히면 NATO 탈퇴와 국교 단절도 불사하겠다는 카드를 꺼내든다.

다급해진 NATO 는 73년 10월 2일 중재에 나섰고 영국 정부는 결국 50해리를 인정하고 물러나야했다.
<50 해리 지도>

3. 3차 대구 전쟁

하지만 대구 전쟁은 3차까지 이어진다.

1973년 개발도상국 34개국이 모여서 배타적 경제수역을 200해리까지 과감하게 늘리자고 했는데
아이슬란드도 여기에 동참하게 된다.
여기에는 몇 가지 이유가 있다. 단순히 넓으면 좋다! 이런 건 아니고,
74년도부터 아이슬란드 해역의 대구 수가 급감하고 있어 비상이 걸린 참에
오일 쇼크까지 겹친 아이슬란드는 주변 바다의 대구를 모두 잡아야 국민들을 겨우 먹여살릴 수 있는 처지에 내몰린다.
<200해리 지도>

결국 200해리 넓히겠다고 하고, 영국이 어김없이 태클을 걸고 들어왔다.
이 때 아이슬란드는 갈등이 또 지속될 기미를 보이자 초강수를 둔다.

아이슬란드: 영국이 ㅈㄹ을 멈추지 않는다면 소련에 붙겠다.

나토: 아이 싯팔!

나토 미국 그리고 영국을 제외한 나머지 국가들은 이 초강수에 비상이 걸렸다.
북대서양 한복판에 있는 국가가 소련에 붙어버리면 어떻게 되는가?
미국 유럽이 물리적으로 절단나는 것은 물론이요, 만약 소련이 아이슬란드에 레이더 기지는 기본으로 깔고 거기에 대서양 한폭반에 핵미사일과 잠수함 기지까지 박아놓을 수 있다는 것이었다.
만약 정말로 이런 일이 벌어진다면 냉전의 균형추는 소련 쪽으로 급격하게 기우는 셈이었다.

여기에 더해 아이슬란드는 200해리 퇴거 명령 불응 시 영국과 국교 단절이라는 조건도 다시 걸었지만 상황의 심각성은 모르고 대구에 미쳐버린 영국은 불응했다.

결국 1976년 2월 19일을 기해 아이슬란드는 영국과의 국교를 단절했다.

하지만 국교를 단절했다고 분쟁이 끝나는 것은 아니어서 아직도 아이슬란드 해역에서 아이슬란드 경비정 vs 영국 해군 마찰은 지속되었고 한 편 미국 의회와 유럽 의회 (당시 EU 가 아니라 EC) 는 200해리를 인정해 주는 법안을 통과시켰다.

여기까지 오자 영국 내부에서는 고작 대구 좀 먹겠다고 아주 ㅅㅂ 막 나가냐는 목소리가 나왔고 미국과 유럽도 니들의 맛 대가리 없는 피시 앤 칩스 때문에 자유주의 진영이 통으로 몰락할 위기에 처했다고 비판했다.

결국 1976년 6월 노르웨이의 오슬로에서 양국의 국교가 정상화되면서 아이슬란드의 요구를 모두 수용한다.
(200해리 내에서 최대 24척이 5만톤 이하로 대구 잡기. 하지만 24척 가지고는 3만톤도 못 잡았다.)

결국 대구 전쟁은 아이슬란드의 완승으로 끝난다.

하지만 영국과 기타 유럽국가 + 미국은 아이슬란드가 막을 수 없는 방법으로 기어코 아이슬란드에게 엿을 먹였다.

<지구 온난화와 바다 수온 상승>

대구는 차가운 바다 물고기이다.


*번외

야 니들도 우리처럼 볼락 먹고 대구는 좀 줄여봐

ㅈ까

ㅂㅅ


*(독일은 볼락을 더 좋아해 아이슬란드와 일찍히 평화롭게 협상을 마무리했다. 그리고 영국에게 볼락을 더 먹지 그러냐는 설득을 공식적으로 해봤지만 까였다.)

그리고 영국이 그렇게 목숨 걸었던 대구로 만든 그들의 요리


대.단.하.다. 논.영!



그렇게 해서 지킨 것이 피시앤칩스라니
아아 대영제국이여!
Comment
Suggested
Recent
Cards you may also be interested in
모 동물보호 단체에서 터진 논란 + 결과
지난 주 있었던 일 : 노부부가 키우는 비숑이 더운 낮에 베란다에 나와있었다고 한 동물보호단체가 학대로 생각되어  벨 누르고 들어가서 다시 강아지를 돌려준다는 말을 하며 포기각서를 쓰게 함  적절한 환경이 주어지면 다시 돌려보내준다는 내용이었고  병원에 데려가서 검사해보니까 비숑은 건강상에 문제가 있었고 (심장사상충) 관련 영상을 유튜브에 올림 그런데 동네 주민분들이 베란다에 나와있던건 강아지가 평상시에 자주 들락날락 했었고 베란다에 나간건 강아지의 의사대로 해준거였고 노부부가 매일같이 줄을 매고 산책나가는 것을 봤다는 증언도 있음 댓글에 해당 강아지를 자주 미용해주었던 애견미용사도 학대는 아닌 것 같다 털 상태가 항상 좋았는데 비숑 특성상 털 관리 해주는게 쉽지 않다고 언급함 여러 의견에도 해당 단체는 강아지를 임시보호 조치를 취하고 학대가 아니라는 다른 사람들의 주장에 아몰랑 반응 밑에는 해당 영상 댓글들  밑에는 견주 노부부의 따님분 인스타 그리고 그저께, 해당 동물 단체에서는 어떠한 해명이나 설명 없이 저 영상을 비공개로 돌려버렸고 부랴부랴 따님 인스타를 찾아가보니 라도는 무사히 가족들 품으로 돌아갔다고 합니다 다행이야ㅠㅠㅠㅠㅠ 아니 저 단체는 대체 왜 그러는 걸까여ㅠㅠㅠㅠㅠ 동네 사람들도 다 아는 사정을 좀 알아보고 뭘 했어야지...
이탈리아 패션의 부상(浮上)
주말에는 역시 논문 특집이죠. 생각해보면 궁금한 주제가 한 두 가지가 아닌데, 어째서 하필이면 이탈리아가 프랑스 외의 패션 대국으로 떠올랐냐 하는 것이다. 첫 번째 사진부터 얘기를 하자면 이탈리아 패션 디자이너 중 하나인 엘리오 피오루치(Elio Fiorucci, 1935-2015)의 “패션 읽는 법/Come leggere la moda”이며, 밀라노 트리엔날레에서 촬영했다. 사실 이 사진에 이탈리아 초기 패션사가 다 들어 있습니다. 사진 자세히 보면 미국과 영국의 유명인사들이 정가운데 배치되어 있기 때문이다. 한 마디로 국가로서 이탈리아 패션 산업을 일으킨 곳이 미국이었습니다. 하지만 프랑스를 어쩌면 능가할 수도 있었을 이탈리아가 그냥 프랑스의 경쟁국에 머물고 만 것은 스스로의 분열에 있었다. 문제의 논문은 아래 링크에 있다. Exploring the marriage between fashion and ‘Made in Italy’ and the key role of G.B. Giorgini(2020년 9월 30일) : https://www.tandfonline.com/doi/abs/10.1080/09654313.2020.1833842 내용은 이러합니다. 그 시작은 무솔리니다. 그의 파시즘이 갖는 핵심이 민족주의이고, 그에 따른 산업의 이탈리아화 관점에서 패션 부흥이 시작됐기 때문이다. 무솔리니는 프랑스만 쳐다보고 있는 이탈리아 패션계를 바꾸기 위해 1932년 Mostra Nazionale Permanente della Moda (EAMNPM, 국립패션위원회.. 정도로 번역할 수 있겠다)를 토리노에 설립하고 각 패션 업체들에게 만드는 옷의 25% 이상이 “이탈리아”스러워야 한다면서 사진과 패브릭 샘플을 제출하도록 명령한다. 정부가? 옷 사진과 패브릭을? 판단해? (대충 김성모의 그 짤) 무솔리니 정부는 나름 오뜨 쿠튀르 업체들에게 금장(marca d’oro)도 주고 했지만 업체들이 순순히 따를리 만무했고, 이탈리아 업체는 물론 잡지들은 여전히 최신 파리 패션 동정을 보고 배우고 보도했었다. 그래도 이런 노력 덕택인지 조금씩 패션 스타일의 국산화가 시작된 것도 사실이기는 하다. 때마침 페라가모(미국에서 이탈리아로 역이동한 특이 사례이다)와 구찌, 푸치(Pucci)와 같은 브랜드들이 지명도를 쌓기 시작한다. 그리고 전쟁 직후, 원래 EAMNPM이 있던 토리노는 민관이 합작하여 이탈리아패션위원회/Ente Italiano Moda(EIM)을 세운다. 토리노를 이탈리아 패션의 수도로 만들기 위해서였다. 피에몬테가 그렇게 한다 이거지? 롬바르디아도 가만히 있을 수 없다. 즉, 밀라노도 이탈리아패션센터/Centro Italiano Moda(CIM)를 만든다. 다만 토리노가 먼저 선빵을 날렸으니, 밀라노에게는 우군이 필요했다. 로마다. 그래서 CIM은 첫 패션쇼를 밀라노가 아닌 로마에서 1949년 4월에 하고 그 외에는 1950년 4월에 취리히에서, 1950년 9월에 베네치아에서 개최한다. 이러니 로마는 생각했다. 우리도 하나 만들면 되겠네? 지금도 그렇지만 당시부터 로마는 미국 영화 스타들의 결혼 장소였다. CIM이 패션쇼를 개최한지 딱 한 달 뒤, 로마는 이탈리아 패션위원회/Comitato della Moda (CM)을 설립한다. 이때 어지러운 이탈리아 천하를 통일한 영웅이 홀로 나타나시니… Giovanni Battista Giorgini (1898–1971) 후작이다. 원래 토스카나의 물건들을 미국 백화점에 수출하는 일을 하던 그는 1951년 피렌체 패션쇼를 기획하면서, 토리노나 밀라노, 로마도 아닌 피렌체(토스카나에 있다)를 패션 수도로 삼고 외세를 불러온다. 미국이다. 그는 이탈리아가 미국에 수출할 수 있는 종목이 패션이라 생각했다. 그래서 피렌체에서 기획한 패션쇼에 뉴욕과 샌프란시스코, 몬트리올의 거물들을 이탈리아로 초청했고, 이탈리아에서 지금도 보기 쉽지 않은 거의 완벽한 영어 가이드를 제작했으며, 여기에 참여하는 이탈리아 의류 업체들에게 조건을 붙였다. 이탈리아 전통에 맞는, 프랑스 풍을 찾을 수 없는 스타일만 주문한 것이다. 1952년 피렌체 패션쇼 후, 바이어들이 드레스를 살펴보고 있다. 출처, POLIMODA CELEBRATES THE 70TH ANNIVERSARY OF THE FIRST ITALIAN FASHION SHOW :https://www.polimoda.com/70-years-ago 피렌체 시와 토스카나 지자체 또한 적극적으로 그를 돕는다(뭔가 당연하게시리 이탈리아패션 피렌체 센터Centro di Firenze per la Moda Italiana도 설립된다.. 게다가 미국 패션 언론들도 잔뜩 모셔온 그는 이탈리아 패션에 대한 호의적인 여론을 조성하는 데에 성공한다. 그 결과가 아무래도 1952년 라이프 지의 이탈리아 패션 특집일 것이다. 오뜨 쿠튀르만이 아니라 부티크 장르(프레타 포르테와 오트 쿠튀르의 사이쯤?)를 내세운 것도 특히 주효했다. 1952년 4월 미국 라이프 지, 이탈리아 패션 특집이었다. 출처, Life Magazine, April 14, 1952 - Italian fashions :https://oldlifemagazine.com/april-14-1952-life-magazine.html 당시 때마침 미국에서 프랑스 패션이 너무 고가인지라 가격대가 좀 더 저렴하면서도 고급스러운 패션을 원했기 때문이다. 게다가 도시 어디를 가도 근본이 있어 보이는 이탈리아이고, 피렌체 하면 메디치 아니겠나. 본인이 귀족이기 때문에(만초니 가문과 관련 있다) 귀족 자제들을 모아서 별도의 이벤트나 패션쇼를 하니, 근본 있는 귀족 좋아하는 미국은 이탈리아와 사랑에 빠지지 않을 수 없었다. 그리고 다시 말하지만 가격 경쟁력이 중요했다. 가령 당시 오트 쿠튀르 한 벌을 파리에서 맞추면 500 달러 정도 할 텐데, 이탈리아에서 맞추면 90에서 150 달러 정도밖에 안 했다고 한다. 가뜩이나 디오르가 미국에서도 옷을 제작하는 바람에 자기가 남편 비서와 비슷한 옷을 입을까봐 두려워한 미국 사모님들이 이탈리아 옷을 사재기 시작했다. 결과가 그대로다. 1960년이 넘어가면 미국에 대한 패션업 수출량에 있어서 이탈리아는 프랑스를 두 배 가까지 추월한다. 그러나 그 영광은 잠시 뿐이었습니다… 이탈리아답게(…) 다시금 도시들 간 내전에 돌입하기 때문이었다. 패션업계 길드(!)가 차례로 성공하는 걸 본 이탈리아 다른 도시(가령 팔레르모나 나폴리)들도 패션센터를 만들기 시작했고, 토리노는 피렌체로부터 왕좌를 빼앗기 위해 밀라노와 연합한다. EIM과 CIM이 합세하여 피렌체를 몰아내기 위해 해외 업체/언론과 직접 연락하기 시작했고, 피렌체 패션쇼에 각자 소속 업체들이 불참하도록 독려한다. 물론 호락호락 당할 피렌체는 아니었으나, 결정적인 한 방은 로마로부터 나왔다. 로마가 토리노-밀라노 연합에 합류한 것이다. 이쯤 되면 피렌체가 동탁이 되어버렸다. 로마의 오뜨 쿠튀르 업체들(좀 알려진 곳이라면 폰타나 시스터즈/LE SORELLE FONTANA와 시모네타/Simonetta?)이 별도로 이탈리아하이패션협회/Sindacato Italiano Alta Moda(SIAM)를 설립한다. 이들이 어떻게 피렌체를 공격한다? 피렌체 패션쇼에 참석한다고 해놓고서는 이틀 전에 자기들끼리 패션쇼를 로마에서 개최하니 어떻게 보면 더 영악하다. 밀라노는? 1955년부터 피렌체에 불참했다. 사실 밀라노도 매우 중요했던 것이, 밀라노의 패션 업계 뒤에는 텍스타일을 공급하는 산업단지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이들도 피렌체와 커넥션을 끊으니, 피렌체의 이탈리아 패션 수도 역사는 10년을 못 갔다. 결국은 이탈리아 중앙정부 주도로 1962년 국립패션협회/Camera Nazionale della Moda (CNM)가 설립되고, 지오르지니는 여기 협회장으로 들어간다. 이렇게 되어 결국 하이 패션/오뜨 쿠튀르는 로마로, 프레타포르테 혹은 부티크는 토리노/밀라노로 갈라지게 되고, 이 인식이 지금까지 유지되고 있다. 그래서 현재 로마의 패션위크가 “Alta Roma/하이 로마”로 불리는 것이다. 다만 오트 쿠튀르의 비중이 적다는 점을 감안할 때, 이탈리아 유일의 패션 수도 왕좌는 이제 밀라노가 가져가게 됐다. 로마의 Fernanda Gattinoni 아틀리에의 모습, 오드리 헵번이나 마를레네 디트리히 등 유명인사들이 애용했던 오트 쿠튀르이다. 출처, C’è ancora spazio per la moda a Roma?(2022년 7월 15일):https://www.nssmag.com/it/fashion/30407/moda-roma-valentino/image:419469 그래도 피렌체가 남긴 것이 있지 않느냐… 당연히 있습니다. 이탈리아 스타일을 강조한다는 점, 그리고 해외, 특히 미국을 위주로 한 언론과 기업들을 챙긴다는 점이다. 이탈리아가 1950년대 패션업을 하나의 도시 위주로 크게 뭉쳤다면 이야기가 달려졌을 수 있겠지만, 이탈리아가 그럴리가 없… 여담 1) 여러 다른 큰 나라들을 볼 때, 중앙집중과 한 도시에서 모든 걸 해결한다는 측면으로 본다면 프랑스나 영국 외에 어디가 있을지 잘 모르겠다. 그나마 한국 아닐까 싶다. 여담 2) 전기자동차를 생각하면 자동차 부문에서 우리나라가 일본을 뛰어넘는 게임체인저 역할을 전기차가 하고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다. 해외 수출을 위주로 해서 경쟁력 있는 제품을 비교적 비싸지 않은 값에 제공하기 때문이다. 위와 같은 사례를 볼 때, 우리나라는 (국가든 기업이든) 중앙집중이니 아마 일본을 분명 넘어갈 수 있을 것 같다.
가디언지 - "곧 세계는 알아볼 수 없을 것"
온난화 기후재앙 이야기 가디언지에 좋은 기사 있어서 가지고 와봄 영어 되면 그냥 읽고 안돼도 ㄱㅊ  밑에 요약함 - 런던대 교수 빌 맥과이어의 논설 모든 기후학자들의 주장은 아님 - 재앙을 돌이킬 수 있는 임계점은 이미 넘었다 다른 기후학자들 대부분이 '아직 멈출 수 있다'고 주장하는 건 일종의 유화정책(appeasement)같은 것 그러니까 공적인 자리에서 사람들 들을 때 쫄지 말라고 하는 말이고 사석에서는 훨씬 공포어린 분위기에서 말이 오간다 - 책 쓰다가 영국에서 40도 깨졌다는 이야기 들어서 다시 썼음 겨우 평균 1도 올랐는데 이지경인거 봐라 초기 기후모델 예측보다 지금은 훨씬 온도가 가파르게 오르는 중인데 앞으로는 어떻게 될 것 같음? - 21년엔 cop26 회의에서 2030년까지 탄소 배출량 45% 줄여야 한다고 결론지음 (cop26 = 파리협정 후에 자세한 내용 정하는 회의. 국제적인 탈메탄 서약 / 석탄 단계적 감축 합의됨) (물론 1.5도 달성 시나리오와는 거리가 멈 그러려면 석탄발전부터 완전히 멈춰야 할텐데 그럼 얼어죽을 사람 많기도 하고 중국 인도가 반대해서 무산) 하지만 배출 감축이 정말 완벽하게 이뤄지는 가장 희망적인 경우에서도 지구는 결국 2.4도~3도 오를거라고 예측됨 하지만 이대로면 2030년까지 배출량은 줄기는커녕 이대로면 14% 넘게 증가할거임 10년 뒤 1.5도 상승? 그보다 전에 1.5C 가드레일은 개박살날것 - 세계가 좆같이도 늑장부리는 이유를 맥과이어는  무식해서/타성에 젖어서/형편없는 통치력탓에/말귀를 쳐 못알아먹어서/기후변화 부정론자의 거짓말이 방해공작을 형성했고 그 짓이 인류가 1.5도 가드레일 앞으로 0.5도 안까지 몽유병 환자마냥 걸어오게 만들었다고 생각함 - 이런 상황에서 '기후 붕괴'는 피할수 없음 대신 온실세계에 적응하고 악화를 막기 위해 조치가 시급함 빌 맥과이어는 여전히 재앙은 불가피하지만 멸종은 막을수 있다고 봄 - 빌 맥과이어가 보기에 이건 전시상황 수준임 모두의 노력이 필요하다는 뜻 그러니까 부디 1. 어디 갈거면 전기차/대중교통/걷기/자전거타기 2. 고기 덜 먹기 3. 비행기 타지 말기 4. 지역/국가의 대표자에게 탄원 5. 기후 비상사태에 대해 논의하는 정치인에게 투표하기 - 물론 그래도 우리는 좆될것이다 조금이라도 덜 좆돼보자 이거지 3줄 요약) - 학자들은 사석에선 더 암울한 이야기를 나눈다 - 우리는 이미 좆됐고 노력하지 않으면 그보다 더 좆될 것이다 - 덜 좆되기 위해서라도 최선의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 아마 이건 2040년쯤에 우리가 쌀밥에 백김치라도 얹어서 먹을지  아니면 풀죽과 단백질블록이라도 배급받아 먹을 수 있을지 그도 아니면 다 타죽게 될지를 결정하는 문제일 것 (출처) 원래라면 8월 말에 와야 했을 두번째 장마가 지금 이렇게 큰 단위로 덮친 것도 기후 변화의 한 부분이죠. 멸종까지 논할 정도로 큰 위기라고 합니다. 나 하나 노력한다고 뭐가 달라지겠냐는 생각이 들 수도 있겠지만 나 하나가 모이다보면, 기술이 우리를 살릴 수 있을 경지까지 갔을 때 조금이라도 유의미한 버팀이 될 수 있지 않을까요.
일본 가부키에 등장 하는 조선 요괴ㄷㄷㄷ
일본 에도시대는 그 시절 브로드웨이 라고 할수있는 가부키(연극)가 유행했는데 그 중에 조선 요괴 '모쿠소 호간' 이 여러 이야기에 등장한다 일본군이 산에서 머물다 가려하면,  갑자기 커다란 괴물이 솟아나서 일본군을 잡아먹는다는 것이 주된 내용이다 매우 두려운 존재로 묘사된다 이 모쿠소 호간이 바로  진주 목사 김시민 이다 임진왜란 당시 왜군은 김시민의 이름을 직책인 목사로 착각 했고, 목사의 일본 발음인 '모쿠소' 라고 부르게 되었다.  (호간 역시 직책인 판관의 일본 발음이다. '목사 판관' -> '모쿠소 호간'이 되었다) 또한 18세기에 일본에서는 지라이야라는 두꺼비 요술사를 다룬 텐지쿠 도쿠베 이국 이야기(天竺德 兵衛韓)라는 소설과 가부키가 유행했었다 이 지라이야의 정체가 바로 '조선의 악마 모쿠소 호간의 아들' , 즉, 김시민 장군의 아들이 아버지의 원수를 갚기 위해 일본에 나타난 복수의 화신인것이다 참고로 이 두꺼비 술사는 뱀에 의해 요술이 파괴되고  결국 복수는 미완에 그치게 된다  (이야기에는 뱀,달팽을 다루는 술사들도 등장한다) 충무공 김시민은 조선시대 무과에 급제한후 1583년 여진족인 나탕개의 난 진압에 참여 했으며, 1592년 임진왜란 당시 1차 진주성 전투(진주대첩) 에서 왜군을 격퇴해냈다. 임진왜란 발발 하자 진주목사(정3품) 이경이 지리산으로 도망가고 김시민이 진주목사로 임명되었다 김시민은 취임하자 곧바로 염초 150여 근과 총통 70여 병을 만들고 정병을 뽑아 사용법을 연마하게 하는 등 성을 지키는 방책을 강화하였다. 왜군의 진주성 공략이 시작되자 김시민은 두려움에 도망치려는  부하 장수들과 군민을 너른터에 모아놓고 싸울 것을 호소하였다. 고을 안에 사는 백성은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전부 성으로 들어오게 하고  여자는 모두 남장을 하라고 명령을 내린뒤 싸움에 임했다. 이후 6일동안 이어진 치열한 혈투 끝에 결국 왜군을 격퇴 하였다 진주대첩은 이순신의 한산도대첩, 권율의 행주대첩과 함께 임진왜란 3대 대첩이다 다른 두 대첩에 비해 대중적인 인지도는 조금 떨어지는 감이 있지만 사실 진주대첩은 임진왜란 전체를 통틀어 전쟁의 판도에 가장 큰 영향을 끼친 전투이다. 다른 두 대첩은 하루동안 싸웠지만 진주대첩은 무려 6일동안 싸웠다 전쟁 초기 일본은 바다와 달리 육지에선 큰 피해를 입은적이 없었고, 진주성에의 패배는 육군 최강이라 자부했던 왜군에 대단한 충격을 주었다. 이후 왜군은 김시민을 모쿠소라고 부르며 두려워했었다. 만약 진주성이 뚫려 전라도가 점령 당했다면 곡창지대를 내주는것과 더불어  이순신의 수군 전력까지 큰 위험에 빠졌을것이다 거시 안목으로 볼때 임진왜란을 사실상 조선의 승리로 결정지은 대단히 중요한 전투인 것이다. 3만에 달하는 일본군을 4천 정도 규모의 조선군이 분투 끝에  극복한 것 자체로도 명량 해전 못지 않은 성과라 할수있다 일본이 명과 강화 협상할때도 진주에서 너무 많은 피해를 입어  철수 못한다 라고 까지 말할정도였다. 얼마나 사무쳣는지 후에 2차 진주성 전투에는 모쿠소를 잡겠다고(이미 김시민은 죽었지만 왜군은 몰랐다), 10만에 가까운 대군을 동원하고 당시 일본 최고 네임드 장수였던 다테 마사무네까지 참전 하며 장수진을 올스타급으로 꾸려서 온다 진주대첩(1차 진주성 전투)은 조선군의 승리로 끝났지만 당시 38세였던 김시민은 전투 중 치명상을 입고 전사하고 만다 왼쪽 이마에 총탄을 맞고 9일간 사경을 헤매다 조용히 눈을 감았다. 임진왜란 이후 일본에서 가장 유명한 조선 장수는 김시민이었다. 당시 일본은 이순신의 존재를 전쟁 내내 몰랐고, 나중에 징비록이 일본에 퍼지면서 이순신을 알게되었기 때문이다. 이종격투기카페 펌
'속절없이 당했다' 초토화된 강남역.news
9일 강남역 네거리 일대에 고급 승용차가 따릉이 주차장위에 주차돼있다. 침수된 차량으로 교통이 통제된 강남역 네거리. “조금만 일찍 오지, 여기 차들이 물에 둥둥 떠다녔는데…” 전날 내린 폭우로 피해가 극심한 지역 중 하나가 강남역 일대다. 9일 강남역 일대에서 취재를 하던 기자에게 한 시외버스 기사는 위와 같이 말했다. 덩그러니 쓰러진 오토바이. 전날 침수된 도로에서 차량을 몰고 가던 사람 중 일부는 차량을 버려야만 했다. 물이 너무 차올라 엔진까지 침수된 차량이 부지기수. 넘어진 오토바이, 인도에 있어야 할 벤치까지 도로에 보였다. 인도의 벤치가 도로로 내려와있다. 사진에서 보듯이 차량들은 주차된 방향이 제각각이다. 심지어 화단이나 보도블록, 건물 앞 화단에 까지 걸쳐진 차들을 볼 수 있었다. 차량 가격이 비싸기로 유명한 B사 차량도 견인될 예정이다. 이러한 침수된 차 때문에 이 지역 일대는 극심한 교통체증을 보이고 있다. 버스를 견인하기 위해 대형 견인차까지 동원되었다. 대형버스가 견인을 앞두고 앞 범퍼를 제거한 모습. 주차된 방향이 제각각인 차량들이 교통 흐름을 방해하고 있다. 하지만 대중없이 차량들이 멈춰선 데다, 견인을 위한 공간도 협소에 복구 작업은 더디게 진행되고 있다. 미국의 T사 차량이 건물 화단에 걸쳐져 있다. 화단에 올라가고, 인도에 걸친 침수 차량들. 최현규 기자 frosted@kmib.co.kr 출처 : 피해가 굉장히 크네요... 정말 아수라장 그 자체... 갑자기 든 생각인데 당분간 중고차 매매는 좀 피하는 게 나을 것 같네요..
터키는 튀르키예! 우크라이나 수도 키예프는 어떻게 표기?
2022년 러시아의 우크라니아 침략 이후 각 언론 매체가 우크라이나 측의 요청을 받아 그동안 러시아 식으로 부르던 지명을 우크라이나 현지 발음으로 고쳐 부르기 시작했지요.  그래서 우크라이나 수도 표기가 ‘키예프’ 대신에 ‘키이우’로 변경되었습니다. 우크라이나의 경우, 아직 우크라이나어 표기법 원칙이 없다 보니 러시아어를 기준으로 표현해오다가, 이번 침략 전쟁을 통해 현지 발음대로 일단 일부 지명 표기만 바꾼 것인데, 당초 우크라이나 대사관에서는 ‘크이우’가 더 유사한 표기라고 했는데 왜 ‘키이우’라고 했는지 모르겠네요.  우크라이나 지명 표기에 대해서는 더 고민이 필요해 보입니다. 입장 바꿔 생각해보면, 외국 어느 나라에서 우리나라 지명을 표기하는데 한국어 표기법이 아직 없다고 옆나라 일본어 표기를 적용해 ‘한국’을 일본어 발음인 ‘간고꾸’라고 표기하고 부른다면 기분이 어떨까요? 이건 우크라이나만의 문제가 아닙니다.  실제로 외국어 표기 원칙시 표기의 일관성을 위해 파열음 표기에 된소리는 쓰지 않는 것이 원칙이어서, 과거에는 국제영화제로 유명한 프랑스 남부 도시를 ‘깐느’라 주로 표기하다가 이제는 ‘칸’으로 쓰고는 있지만, 현지 발음상 ‘깐느’가 더 유사하긴 해요. 반면 태국의 유명 관광지 ‘푸켓’은 동남아 해일 사태 이후 동남아 발음 특성이 반영되어야 한다는 여론이 생기자 현지 발음에 맞게 ‘푸껫’을 허용하긴 했는데, 여전히 남부 유럽어(이탈리아어, 스페인어, 포르투갈어)의 된소리 표기는 또 허용이 안 되는 상황이에요. 또한 ㅈ, ㅊ 다음에는 ‘ㅑ, ㅕ, ㅛ, ㅠ’ 이중모음을 쓸 수 없게 규정을 바꿔서 ‘주스’, ‘레이저’, ‘텔레비전’으로 표기해야 합니다. 이처럼 외국어 표기에 대해 된소리 불가, 이중모음 불가 등 실제 발음과 동떨어진 규칙을 정하니, 해당 외국어 학자들로서는 납득하기 어려운 거죠.  왜 ‘이탈리아’는 되고 ‘이딸리아’는 안 되는지요?  ‘달러’라고 쓰면서도 [딸라]라고 발음하는 현실에서요.  세상의 거의 모든 소리를 담을 수 있는 한글을 가지고, 영 엉뚱한 표기를 하게 강제하는 것이니까요. 반면 일본어에 대해서는 또 지나치게 전문가 관점으로 접근해 정작 토요타 자동차 회사는 한국 내 법인명으로 ‘토요타, TOYOTA’라고 쓰는데, 우리나라의 일본어 표기법에서는 ‘と’ 가 단어 첫 초성 발음에서 '도' 에 가깝게 들린다며 ‘도요타’로 표기하도록 하고 있어요. 그러면서도 오랫동안 써온 관용적 표기라고 해서 white shirts는 ‘와이트 셔츠’가 아니라 ‘화이트 셔츠'를 인정하고, 격한 소리와 된소리가 많아지면 사회가 각박해진다며 ‘까스, 뻐스, 땜, 써비스’는 안 된다면서도 ‘껌’은 오랫동안 사람들이 발음해왔기에 허용하고, 그래서 결국 ‘짜장면’도 ‘자장면’과 함께 2011년에 복수 표준어로 인정하는 등, 혼란스러운 상황입니다.  그런 논리라면, ‘코’도 예전처럼 ‘고’라고 쓰라고 하고, 일본에서 유래된 ‘짬뽕’은 ‘잠봉’으로 순화시켜줘야 하는거 아닙니까? 게다가 국가나 지명은 더 혼란스러운 것이, 예전 구한말부터 쓰던 서구 국가 명칭 중 다수는 여전히 중국이나 일본식 표현을 따라 미국, 영국, 독일, 호주 등으로 쓰고 있어 해당 국가 사람들이 보기에는 당혹스러울 거예요.  반면에 불란서는 프랑스, 서반아는 스페인, 노서아는 러시아, 토이기는 터키(최근, 터키는 자국명을 ‘튀르키예’로 바꾸기로 결정했죠. 자기네 국가는 칠면조가 아니라면서…….)로 그 나라 발음 비슷하게 바꿔줬으니, 이 역시 기준이 뭐냐는 거죠. 또한 비영어권 국가 명칭을 영어 발음 위주로 표기하다 보니 스페인어 발음으로 ‘메히코’임에도 ‘멕시코', 현지 발음으로는 ‘로므니아’에 가까운데 ‘루마니아’, 해당 국가에서는 ‘에스파냐’라고 부르는 데도 영국, 미국에서 여전히 옛날 국호로 부른다며 ‘스페인’으로 표기하고 있지요.  정작 ‘아르헨티나’는 영미권에선 ‘알젠티나’라고 하는데, 제대로 된 스페인어 발음으로 표기해주고 있고, 포르투갈과 브라질 간 발음 차이는 또 잘 반영해주고 있네요.  그러니 각국 대사관에 어떻게 표기해주는 것이 맞는지 일괄적으로 문의해서, 그들이 원하는 방식으로 표기해 주는 것이 맞다고 생각됩니다. 출처. <알아두면 쓸데 있는 유쾌한 상식사전> -우리말 우리글 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