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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드거 앨런 포 단편선> 에드거 앨런 포

<에드거 앨런 포 단편선> / 에드거 앨런 포 저
(지극히 주관적인 제 생각을 쓴 글입니다.)

처음 읽어 본 에드거 앨런 포의 책이다. 총 열네 편의 중단편 소설이 실려있다. 단적으로 감상을 먼저 말하자면...... 아주 별로였다.(적어도 나에게는)

장점을 꼽자면 건조한 문장과 문체, 그리고 그로테스크한 묘사들에서 풍겨지는 분위기를 들 수 있겠다. 추리 소설, 고딕 소설, 호러 소설 등에 큰 영향을 미친 작가인만큼 글에서 느껴지는 분위기는 매력적이었다. 음울한 모습의 거대한 고성이라는 배경과 그 느낌을 그대로 이어받아 펼쳐지는 이야기는 꽤나 음침하고 어찌 보면 찝찝하기까지 한 묘한 분위기를 자아내고 어김없이 일어나는 누군가의 죽음, 이해하기 힘든 인물들의 행동과 비현실적인 사건들은 궁금증을 이끌어낸다.

그러나 그 외에 이렇다 할 매력을 찾지 못했다. 소설에서 풍겨지는 분위기(심지어 이러한 분위기도 이후 많은 작가들에 의해 발전되어 굳이 지금 시대에 포의 소설을 찾아 읽을 이유가 될지는 의문이다. 물론 그러한 분위기의 소설을 창시한 작가나 다름없으며 그 당시에는 혁신적이었다고 하면 할 말은 없지만.) 외에 서사, 캐릭터 등 소설의 여러 가지 요소에서 나에게 큰 매력을 느끼게 하는 부분은 없었다. 물론 모든 소설이 그런 것은 아니었다. 구덩이와 추, 도둑맞은 편지, 윌리엄 윌슨 등의 작품은 서사가 매력적이었고 흡입력도 좋았다. 그러나 그 외의 작품은...... 흠. 특히 포의 대표작이라고 일컬어지는 리지아나 검은 고양이, 아몬티야도 술통과 같은 작품은 재미도 없고 의미도 없고 감동도 없었다.

위의 세 작품에서 공통적으로 내게 거슬렸던 것은 소설에 나오는 인물의 행동에 대해 전혀, 무엇 하나도 공감하거나 이해할 수 없었다는 점이다. 리지아에서 주인공은 첫 번째 부인, 리지아를 너무나 사랑한 나머지 죽은 첫 번째 부인의 환영이 두 번째 부인의 시신에서 부활하는 것을 목격한다. 이건 당연하게도 주인공의 환각일 것이다. 그런데 그 과정이 전혀 공감이 되지 않는다. 주인공은 계속해서 첫 번째 부인의 아름다움, 지성, 기품을 예찬하는 말을 끝없이 늘어놓는데 뭐 어떡하라는 건지. 결국 그냥 얼빠였다 이건가?(이렇게 리지아를 사랑했다는 놈이 리지아의 성도 모른다.) 아무리 주절주절 말로 예찬을 늘어놓는다 한들 주인공이 첫 번째 부인을 얼마나 사랑하는지에 대한 일화라던가 사건이라던가 눈 앞에 보여주는 무언가가 없으니 주인공의 리지아에 대한 사랑이 와 닿지 않고 그러니 당연하게도 두 번째 부인의 시신에서 부활하는 리지아의 환영을 목격하는 주인공의 정신상태 이상이 전혀 피부에 와 닿지 않는다. 그냥 뭐 저런 미친놈이 다 있나 라는 생각뿐.

검은 고양이나 아몬티야도 술통도 마찬가지다. 두 단편에서 주인공은 이유가 없다시피 한 잔인한 살인을 저지른다.(이유가 있을지라도 그것이 소설 내에서 독자에게 설명되지 않는다.) 심지어 검은 고양이의 주인공은 자신이 아끼던 검은 고양이의 한쪽 눈을 생으로 파내기까지 한다. 검은 고양이에서는 알코올 중독과 타락에 빠져들고 싶어 하는 인간의 본성(법이 있기에 그것을 어기고 싶어 하는 본능과 비슷한 느낌이다.)이 주인공을 미친놈으로 만들었다고 설명되며 미친 주인공은 아내를 끔찍하게 살해한 후 벽 안에 넣고 회반죽을 발라 살인을 은폐한다. 아몬티야도 술통에서는 독자에게 설명되지 않는 어떤 이유(친구가 자신을 무시하고 업신여겼다는 이유이나 자세한 내막은 설명되지 않는다.)로 주인공은 아몬티야도 포도주를 빌미로 꾀어낸 친구를 산 채로 아무도 찾아올 수 없는 지하묘지 벽안에 가둬버린다.

그래, 그냥 주인공들이 미친놈이라고 치자. 인간의 광기와 타락하고 싶어 하는 본성을 보여주는 인간들이라고 생각하면 이해 못할 것도 아니다. 그런데 살인이나 살인까지 이르는 과정이 전혀 흡입력이 없으며 재미도 없다. 주인공은 그냥 미친놈들이며 살인에 있어서 어려움은 하나도 없다. 뭔 놈의 사람 죽이는 게 이렇게 쉬운지. 편의점에서 컵라면 사는 것처럼 사람을 죽이는데 그렇다고 그 이후의 과정이 스릴 넘치느냐 하면 그것도 아니다. 멍청한 경찰들과 멍청한 친구는 누가 봐도 이상한 상황에서 주인공을 의심할 생각 하나 제대로 못하는 인물들이고 심지어 검은 고양이의 주인공은 객기를 부리다 아내의 시체와 함께 자기도 모르게 묻은 고양이의 울음소리로 인해 살인을 들킨다. 멍청한 경찰에 멍청한 주인공이다. 포의 소설은 인간의 내면과 심리를 치열하게 탐구한 소설이라고 하는데 그것도 영...... 사건과 서사를 떠나서 생각해봐도 인물들의 심리가 내면까지 치열하게 탐구되고 파헤쳐져 묘사되어 있는지 의문이다. 주인공이 멍청하다는 것과 정신이 이상하다는 것 외에 딱히 인간 내면의 심리와 본성에 대해 감탄하거나 고뇌해볼 만한 부분은 내게는 보이지 않았다.

유명한 작가고 많은 이들이 애정 하는 작가라는 것은 충분히 알고 있다. 그러나 소설이란 어디까지나 주관적 견해의 기호품인 만큼 나에게는 매력을 느끼기 힘든 작가였다. 위에서도 썼듯이 지극히 주관적인 나의 견해를 적은 글이므로 나와 정반대로 포의 소설에 흠뻑 빠지는 사람들도 많을 것이라는 건 충분히 알고 있다. 이 글은 재미로 읽어주셨으면 한다. 이렇게 생각하는 사람도 있구나 하며.

소설 속 한 문장

수학적 공리는 결코 일반적 진리의 공리가 아닌 것이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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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인 조르바' / 니코스 카잔차키스 저 (지극히 주관적인 제 생각을 쓴 글입니다.) 그리스인 조르바. 이 소설 속 알렉시스 조르바의 모델은 작가 니코스 카잔차키스가 실제로 만났던 기오르고스 조르바스라는 인물이다. 작가는 이 책이 소설이라기보다 조르바스에 대한 추도사에 가깝다고 말한다. 그만큼 조르바스는 작가에게 엄청난 영향을 준 인물이었다. 이 소설이자 추도사 속에는 빛나는 삶을 살아가는 조르바의 모습이 그대로 담겨 있었고 나는 니코스 카잔차키스가 왜 그에 대한 이야기를 이토록 긴 글로 써 내려갈 수밖에 없었는지 깨달았다. 소설 속 화자이자 주인공인 '나'는 늘 책을 읽고 고뇌하며 이상을 추구하는 지식인이지만 어느 순간 자신이 구체적인 삶의 현장 속으로 뛰어들어본 적이 없다는 것을 깨닫는다. 삶의 치열함 속에서 무언가 얻을 것이 있으리라고 생각한 '나'는 고향인 크레타 섬으로 돌아가 갈탄 광산을 운영하기로 결심한다. 피레우스 항구에서 크레타행 배를 기다리던 '나'에게 갑자기 한 늙은 노인, 조르바가 다가와 다짜고짜 자신도 크레타 섬으로 데려가 달라고 말한다. 어떤 일이든 잘 해낼 자신이 있으며 수프 하나는 기똥차게 잘 만드니 자신을 요리사로라도 고용하라는 조르바. 그의 거침없는 말과 행동거지에 '나'는 왠지 모를 호감을 느끼고 결국 조르바와 함께 크레타 섬으로 향한다. 조르바와 함께 늙은 마담 오르탕스의 집에 머물게 된 '나'는 갈탄 광산의 현장 책임자로 조르바를 고용한다. '나'와 조르바는 하루 일과를 마치면 저녁을 먹으며 늘 함께 이야기를 나눈다. 조르바의 인생 이야기에는 책에만 파묻혀 있던 '나'는 알지 못하는 생동감이 넘쳐났고 '나'는 갈탄 광산이 아니라 조르바와의 대화, 저녁 식사에 점점 빠져들게 된다. 거침없는 말과 행동, 책 속에서 해답을 얻지 못했던 인간과 신, 여러 인생의 문제들의 핵심을 꿰뚫는 경험에서 우러난 통찰력, 평범한 것도 항상 새롭게 바라보는 시각 등 '나'는 조르바에게서 많은 것을 배운다. 책 속의 글자에서는 배울 수 없었던 인생의 경험에서 우러난 날카로운 이야기들을 조르바는 아낌없이 풀어놓는다. 갈탄 광산의 일이 잘 풀리지 않아 돈을 날리게 되었지만 '나'는 조르바와의 대화를 통해 잃은 돈보다 훨씬 많은 것들을 얻게 된다. 하지만 결국 갈탄 광산의 일이 실패하며 둘은 각자의 길을 가게 된다. 가끔씩 조르바를 회상하던 '나'에게 몇 년의 시간이 지나 조르바의 부고가 날아온다. '나'는 그때야 비로소 자신이 알고 있는 조르바에 대한 모든 것을 글로 쓰기로 결심한다. 그 글이 바로 이 '그리스인 조르바'인 것이다. 이 소설은 니코스 카잔차키스의 자전적인 소설이다. 실제로 작가의 행보가 소설 속 화자와 많은 부분에서 겹치고 기오르고스 조르바스라는 소설 속 조르바의 실존 모델이 존재한다는 점도 그렇다. 소설 속 이야기처럼 실제로 니코스 카잔차키스도 조르바스에게 커다란 영향을 받은 듯하다. '나'는 조르바와 많은 대화를 나누며 큰 충격을 받는다. 수없이 많은 책을 읽고 철학자들의 사상을 공부하고 인간이라는 존재에 대해 끝없이 고뇌하던 '나'의 물음들을 조르바는 단숨에 해결해버린다. 자신의 내면이 원하는 대로 슬플 때 슬퍼하고, 기쁠 때 기뻐하며 그 순간의 감정들을 아낌없이 표현하는 조르바는 늘 행동보다 고민과 생각이 앞서는 나를 질책한다. 그놈의 책을 다 불태워버리면 삶을 좀 더 이해할 수 있을 거라고 말하고 똑똑한 두뇌란 이것저것 재고 이익과 손해를 따지는 '영원한 식료품 상인'이라 말한다. 이것저것 생각하느라 진정한 삶을 살지 못하게 만든다는 것이다. 이렇듯 조르바는 '나'가 끊임없이 고민하는 문제들을 이성적 고민이 아니라 그 순간 자신의 감정과 내면에 대한 충실함, 그리고 직관을 통해 마치 알렉산드로스 대왕이 고르디우스의 매듭을 풀듯이 단칼에 잘라내 버린다. 복잡하게 엉켜있는 문제를 하나하나 고심하느라 생각이 앞서 매듭에 손조차 대지 못하고 있던 나에게 매듭을 칼로 잘라버리는 조르바의 대답은 신선한 충격을 안겨준다. 이 소설 속에서 지속적으로 반복되는 메시지는 삶의 순간들에 대한 충실함이다. '나'가 철학적 물음과 고민에 빠져 어떤 것도 행동으로 옮기지 못하고 죽음으로 달려가고 있는 삶을 허비하고 있는 사이, 조르바는 매 순간 떠오르는 해의 찬란한 빛, 바람에 흔들리는 꽃의 모습, 검푸른 바다의 철썩거리는 파도 소리를 마치 처음 경험하듯 환희에 가득 차 바라보며 삶의 아름다움과 기쁨을 만끽하고, 식사 시간이면 자신의 배고픔을 해결해주는 음식의 맛과 향과 포만감에 집중해 육체를 활동할 수 있도록 가득 채우는 데 전념하고, 아름다운 여자를 보면 그 여자에게 사랑을 말하고 기쁨을 줌으로써 자신과 그녀의 육체적, 정신적 행복을 채우기 위해 최선을 다한다. '나'는 그런 조르바를 바라보며 언젠가 죽음으로 끝나게 될 삶을 충실히 살아간다는 것, 자신의 내면에서 자신의 삶이 진정으로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알아내는 법을 배우며 현실과 동떨어진 물음들에 매몰되어 책 속에만 파묻혀 있던 지식인의 모습에서 점점 변화해 간다. 조르바의 모습은 니체가 말하는 '초인'에 가깝다. 신에 기대어 자신의 나약함을 초월적 존재에 의지하려고만 하는, 스스로를 신의 노예로 만드는 자. 신을 부정하며 허무주의와 맞닥뜨려 인간이란 존재의 의미를 찾을 노력도 하지 않는, 스스로의 삶에 충실하지 않고 삶을 긍정하지 않는 자. 조르바는 그러한 단계를 뛰어넘은 인간이다. 인간은 언젠가 죽는다는 것을 완전히 인지하고 있고, 인간이 초월자에 의해 어떤 사명을 띠고 지구 상에 나타나 인간의 존재가 태어나는 그 순간 살아가야만 하는 의미가 부여되어 있는 것이 아님을 알고 있다. 그럼에도 조르바는 인간이란 무의미하고 그저 태어나 죽을 뿐인 어떤 가치도 없는 존재라는 식의 허무주의에 빠지지 않는다. 스스로 자신의 삶에서 아름다움과 기쁨을 찾아내고 태어난 이래로 죽음을 향해 달려가고 있음에도 지금 이 순간 태양과 바다와 공기와 꽃의 향기를 느낄 수 있다는 사실에 충실하며 그곳에서 오는 자신의 육체적, 정신적 충만감을 만끽하는 자가 바로 조르바다. 스스로 삶의 가치를 만들고 긍정하는, 초월한 자(초인)인 것이다. 소설 속에서 과부가 살해당하는 장면을 보면 조르바와 '나', 그리고 군중의 차이가 확연히 드러난다. 군중은 과부가 남자들을 홀린다는 이유로 하느님의 이름을 외치며 과부를 죽이려 든다. '나'는 과부를 죽이려는 군중들을 바라보며 그것이 잘못되었다고 인지는 하고 있으나 적극적으로 끼어들어 말리지는 못하고 관망할 뿐이다. 조르바는 군중의 광기에 휩쓸리지 않고 귀를 뜯기면서도 과부를 죽이려는 사람들들을 막아선다. 군중은 하느님의 이름을 외치며 과부를 갈 곳 잃은 분노의 희생양으로 결정한다. 그 군중 속에는 과연 이 일이 맞는 것인가 스스로 자문하며 옳고 그름을 규명하려는 자가 없다. 그저 잘못 해석되고 비틀린 기독교적 윤리관을 맹목적으로 믿는 자들, 주변의 열기와 광기와 휩쓸려 스스로 판단하려는 노력조차 하지 않고 과부에게 칼날을 들이미는 자들 뿐이다. '나'는 군중보다는 낫지만 적극적으로 사태에 끼어들어 과부를 구해내지는 못한다. 행동하지 못하는 자가 바로 '나'이다. 옳다고 느끼는 자신에게 즉시 충실하지 못하고 일의 합리성과 옳음에 대한 판단에 너무나 많은 시간을 허비하며 자신의 결정을 늘 의심한다. 그런 '나'가 할 수 있는 일은 옆에 있는 양치기에게 그녀에 대한 자비를 베풀라고 말하는 것뿐이다. 그러나 조르바는 군중과도, '나'와도 다르다. 조르바는 과부를 죽이려는 자들을 보자마자 뛰어들어 그들을 막아선다. 귀가 뜯기는 부상을 당하면서도 과부를 구하기 위해 최선을 다한다. 결국 과부가 죽고 난 뒤 조르바는 '슬플 때는 진짜 눈물을 뚝뚝 흘리고, 기쁠 때는 고운 형이상학의 체로 걸러 내느라 기쁨을 잡치는 법이 없는 그런 사내의 고통'을 겪는다. 조르바는 군중들이 과부를 죽이는 일이 옳지 않다고 판단하자마자 몸을 던져 그들을 막기 위해 노력한다. 군중의 광기에 휩쓸려 자신을 잃어버리지도 않고 '나'처럼 방관하지도 않는다. 그 순간 자신이 옳다고 생각하는 일을 행하고 그 일이 좌절되어 과부가 죽은 후에는 온전히 슬퍼하고 고통스러워하는 것이다. 주변의 행동이나 시선, 종교적 윤리적 제도와 가치에 휩쓸리지 않고 자신만의 가치를 스스로 만들고 결정하고 판단하는 자, 순간순간에 충실하게 행동하는 자, 고통도 기쁨도 슬픔도 고뇌도 그대로 받아들이고 체험하며 외면하지 않는 자, 인간은 태어나면서부터 죽음으로 달려가고 있다는 것을 알면서도 지금 살아있는 자신의 모든 것을 긍정하는 자, 그런 사람, 초인이 바로 조르바인 것이다. '신은 죽었다'라고 말하는 니체의 무신론적 실존주의의 관점에서 이 소설은 책과 먹물 속에 파묻혀 삶과 동떨어져 있던 '나'가 초인 조르바의 영향을 받아 변화해가는 과정을 그리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이성과 정신의 세계에서 꿈꾸듯 이상만을 그리며 살아가던 '나'가 자신의 '실존' 즉, 자신이 관념의 세계가 아닌 이 시간, 이 장소, 이 현실 세계에 존재하고 있다는 것을 조르바를 통해 온 몸과 정신으로 체감하며 순간의 삶을 사는 인간으로 변화해 가는 과정은 마치 '나'가 새로운 인간으로 다시 태어나는 듯했다. 특히 소설 후반부, '나'가 생각과 합리와 이성을 거쳐 나온 언어, 말로는 도저히 표현할 수 없는 어떤 것을 표현하기 위해 조르바에게 그의 언어, 춤을 가르쳐달라고 하며 둘이 함께 춤을 추는 모습은 드디어 '나'가 먹물과 책으로 둘러 싸인 한 세계를 깨고 나온 듯한 느낌을 주었다. '실존은 본질에 앞선다' 무신론적 실존주의 철학자 장 폴 사르트르의 말이다. 조르바는 무엇보다도 자신의 존재를 철저히 감각하고 느끼는 자다. 그에게는 지금 내 앞에 있는 여자와 자신이 행복해지는 것, 지금 맛있는 음식과 달콤한 포도주를 마시는 것, 지금 풍겨오는 레몬과 오렌지 나무의 향기를 맡는 것, 지금 느껴지는 슬픔과 기쁨을 온전히 온몸으로 체험하는 것을 통해 자신이 살아있음을 자각하고 자신의 삶을 살아나가는 것이 그 무엇보다 중요하다. 한 번뿐인 삶은 한 번 뿐이기에 소중하고 한 번 뿐이기에 온전히 경험해야만 한다. 삶을 살아가는 이유가 무엇인지 알고 싶다면 조르바의 인생을 보고 그의 이야기를 들어라. 그는 오롯이 그 자신만으로 삶을 긍정하고 인간의 존재 가치와 의미를 찾아내는 자다. 조르바에게 "제가 살아가야 하는 이유는 무엇일까요?"라고 물으면 아마도 이렇게 대답하지 않을까 싶다. "저 푸른 바다를 보게. 어찌 저렇게도 일렁이는지. 너무나 아름다워 눈물이 날 것 같지 않은가?" 소설 속 한 문장 "보스 양반, 돌멩이들과 꽃과 비가 하는 말을 알아들을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글쓰는 습관을 기르고 싶을 때 읽으면 좋은 책
글의 정의를 넓혀 생각하면 우리 모두는, 누구나 제법 오랜 시간, 많은 글을 써왔다고 할 수 있습니다. 숙제처럼 매일 써야 했던 일기나 교과서나 참고서 내용을 베껴 적었던 과정 모두가사실은 글쓰기라는 거죠. 하지만 그것만으로 충분히 납득할만한 글을 썼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거의 없습니다. 모두가 글을 쓰지는 않지만 누구나 자신만의 생각을 갖고 있고 표현하고자 하는 바람을 품고 살아 갑니다. 글 쓰는 습관을 만들고 싶은 분들을 위한 책을 소개합니다. 뭔가를 시작하려고 할 때 꼭 장비와 도구를 먼저 갖추어 준비가 완벽해야만 한다고 생각하는 때가 있습니다. 물론 준비는 필요합니다만 모든 게 준비되지 않았다고 해서 무한히 유예하는 게 좋은 습관은 아니죠. 글쓰기도 그렇습니다.  이 책은 글을 써야겠다고 마음 먹고 글 쓰는 기술 혹은 요령을 배우려고 하거나 다른 사람의 흉내 내기를 시도하다 지쳐서 그만두는 사람들을 위한 이야기를 담고 있습니다. 처음부터 잘 쓰려고 욕심부리기 보다 매일 그냥 쓰는 과정을 통해 자신의 마음을 알고, 자기 글을 알아가라고 하죠.  자신에게 엄격한 글, 더 완벽한 글을 쓰려다 보면 글쓰기는 재미 없고 힘든 일이 되어 버립니다. 재미도 즐거움도 없이 억지로 쓴 글은 읽는 이에게도 비슷하게 읽히기 마련이고요. 노력은 중요합니다. 하지만 노력만 하는 사람은 즐기는 사람보다 오래, 멀리 가기 어렵다는 사실, 잊지 마세요. 날마다! 그냥!! 이라는 마음으로 시작하면 어떨까요? 날마다 그냥 쓰면 된다 자세히 보기 >> https://goo.gl/s2yDzC 어린 시절 잠이 들라치면 어머니는 “일기는 썼니?”하고 묻곤 하셨습니다. 부랴부랴 엎드려 몇 줄 적다 잠든 날도 많았죠. 그때는 그렇게 생각했습니다. 일기는 하루를 마치고 잠들기 전에 쓰는 게 당연하다고 말이죠.  이 책은 일기는 밤이 아니라 아침에 쓰는 거라고 이야기 합니다. 하루에 활력을 더하고, 희망을 불어넣을 이야기를 상상하게 하는 거죠. 예를 들어 오늘 중요한 발표가 있다고 하면 불안과 기대가 복잡하게 얽힌 아침일 겁니다. 아침 일기가 도움이 되는 건 바로 그 순간입니다.  머리 속으로 생각하던 불안함이 글로 실체를 보이는 순간 우리는 무엇을 두려워하는지 알게 됩니다. 몰라서 생긴 불안이 해소되는 순간이죠. 희망과 기대를 적음으로써 용기를 북돋을 수도 있습니다. 어제 속 상했던 일이 아침에 보니 아무 것도 아님을 깨닫고 웃게 되기도 하죠. 복잡한 나날을 보내고 있다면, 시작해보세요. 아침 일기. 하루 5분 아침 일기 자세히 보기 >> https://goo.gl/2dZn5R 많은 작가와 더 많은 작가 지망생들이 공통적으로 갖고 있는 습관이 있다고 합니다. 바로 ‘필사’죠. 수업 시간에 선생님, 교수님의 말을 받아 적거나 필사하듯, 인상 깊고 완성도 높은 작가의 문장을 따라 쓰면서 자신의 문장을 단련 하는 과정을 거치는 겁니다.  이 책은 좋은 문장을 쓰고 싶지만 처음이라 어떻게 하면 좋을지 모르는 사람들을 위해 베껴쓰기를 소개합니다. 베껴쓰는 과정을 통해 문장과 단어, 조사 등 요소에 대한 이해와 활용을 배우는 거죠.  문장은 쇠와 비슷하다고 합니다. 쇠를 달구고 두드리기를 계속해서 단단하게 단련하듯 단련할 수록 좋아진다는 거죠. 쇠를 다루는 대장장이가 같은 쇠로 다양한 연장을 만들어내듯 글쓰기도 꾸준한 연습과 단련으로 능숙해질 수 있습니다. 베껴쓰기로 연습하는 글쓰기 책 자세히 보기 >> https://goo.gl/ctsdQs 글쓰기는 읽기와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습니다. 읽다 보니 쓰고 싶고, 쓰려니 더 읽게 되는 효과가 생기는 거죠. 그런데 우리의 기억력에는 유통 기한이 있습니다. 오늘 읽은 문장에서 느낀 감정과 생각이 내일까지 남아 있으리라는 보장이 없죠.  이 책은 읽기의 연장이자 완성이라고 할 수 있는 쓰기, 그 안에서도 서평 쓰는 방법을 이야기 합니다. 서평이란 무엇이며, 왜 쓰는지를 짚어보고 쓰는 연습으로 나아가게 하는 거죠. 읽으면서 느꼈던 감정과 의문에 논리적으로 묻고 답할 수도 있고, 자기만의 결론을 내고 결론을 뒷받침할 생각을 구체화할 수도 있습니다.  서평에는 단순한 기록 이상의 의미가 있습니다. 같은 책을 읽고도 다른 결론에 닿을 수 있기에 생각의 변화나 내면의 성장을 확인하는 기회를 얻을 수도 있으니까요. 기록은 단순한 과거가 아닙니다. 과거와 현재의 대화입니다. 서평 쓰는 법 자세히 보기 >> https://goo.gl/N9r3QV 글을 쓰다 보면 욕심이 생기기도 합니다. 얼마간의 재능이 있고, 글 쓰는 게 즐거울 때 욕심이 커지죠. 하지만 전업 작가로서의 삶은 만만하지 않다고 합니다. 아무리 좋아하는 것도 생계가 되고, 일이 되면 대하는 마음이 변할 수밖에 없으니까요.  이 책은 글을 써서 밥을 먹고 사는 사람들, 밥벌이로써 글을 쓰는 작가들의 경험을 담고 있습니다. 예상하고 계신 것처럼 “책을 썼더니 처음부터 잘 팔렸다, 당신도 열심히 써서 나처럼 되길 바란다.”같은 이야기는 아닙니다. 오히려 어려움과 위기, 계속 써나가는 고충과 같은 냉엄한 현실이 있죠.  글로 생계를 유지하는 사람들, 작가는 예술인 중에서도 몹시 가난한 축에 든다고 합니다. 좋아하고, 계속 하고 싶어도 현실과 이상 사이에 갈등이 있을 수밖에 없죠. 그럼에도 쓰고 싶다면 꼭 도전하시길 응원합니다. 그 모든 과정이 또 다른 이야기가 되어 이어지고 전해질 테니까요. 밥벌이로써의 글쓰기 자세히 보기 >> https://goo.gl/1pMv24 글을 쓰는 데는 많은 도구가 필요하지 않습니다. 펜과 종이, 스마트 폰 메모장이나 글쓰기 앱, 공간과 방법은 얼마든지 있죠. 습관이 된다는 건 부담 없이, 꾸준히 해나간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처음부터 장편 소설을 쓸 생각이 아니라면 짧은 낙서, 일상의 기록을 남기는 일에서 시작해보면 어떨까요. 정기배송 자세히 보기 >> https://goo.gl/BjCm9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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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시인들과 평론가를 만났지만, 난 또 취해버렸지. 심지어 핸드폰을 잃어버렸다. 이런. 핸드폰을 몇 번째 잃어버리는 건지 모르겠다. 찾을 수 없겠지. 구글을 통해 위치 추적, 동선 파악을 모두 해보았더니 어제 우리가 모인 그 일대이기는 하다. 그러므로 택시에 두고 내린 건 아니다. 누군가가 습득을 하기는 한 건지, 아니면 길바닥 어딘가에서 혼자 고이 누워있는지 알 길이 없다. 전화를 걸면 신호는 가는데 받지는 않는다. 이런, 이런. 어제 만난 평론가는 내 시집의 해설의 써준 이다. 그는 나보다 어리지만, 그리고 상당히 귀여운 면모가 있지만, 아주 예리하고 단단한 평론을 쓴다. 그가 내 시집에 글을 보태주기로 정해졌을 때 얼마나 기뻤는지 모른다. 나는 그러한 마음도 숨김없이 전했다. 나는 그에게 감사의 표시를 하기 위해 와인 한 병을 샀고, 사는 김에 함께 마실 와인도 두 병 더 샀다. 어제 우리를 초대한 시인은 집에 이미 맥주를 준비해놨기 때문에, 술이 섞였고, 그 덕에 취해버렸지. 시적 고민이나 문단의 세태 등 깊은 얘기들이 오갔고, 나는 그것을 듣는 것만으로도 좋았다. 무엇보다 그이들의 문학적 고집이 좋았다. 나는 시로부터 도망갈 궁리만 하고 있는데. 나는 시에 취하지는 못하고, 술에만 잔뜩 취해버렸다. 아 참, 고양이 ‘밤’이도 함께였다. 아기에게 젖병을 물리듯 나는 밤이에게 츄르를 먹였다. 까만 고양이 밤이는 털이 고왔고, 그 윤기가 흡사 말 같기도 했다. 밤이는 귀엽고, 나는 취해버렸지. 아, 어째야 할까. 어째야 해. 남의 핸드폰을 습득했으면 돌려주는 것이 인지상정 아닌가? 대체 왜 이러한가. 내가 잃어버리고 남 탓하기. 내가 지금 두려운 것은, 내 핸드폰 안에 지금 내가 인지하지 못하고 있는 중요한 뭔가가 들어 있는 것은 아닌지, 모르겠다는 거다. 그리고 난 취해버렸지. 역시 술이 웬수다. 아니다. 마신 놈이 웬수지 술이 무슨 죄가 있겠나. 근데 내일도 술 약속. 이번 주 만나는 사람들은 모두 시 쓰는 사람들이다. 내일 만나는 사람들은 시인들은 아니지만 시인이 되기 위해 고군분투 중인 사람들이다. 그중 한 사람은 사실 아직 등단을 안 했을 뿐, 어지간한 시인들보다 시를 잘 쓴다. 그 친구의 시는 개인적으로 상당히 내 취향을 저격한다. 그에게도 말했지만, 그는 아마 잡문을 써도 시적일 것이다. 그런 사람들이 있다. 태생적으로 시가 내재된 사람들. 또 한 사람은 시에 대한 열정이 상당한데, 그의 말에 따르면 그는 언젠가 교수님이 보여준 어떤 좋은 시를 읽고 그 앞에서 펑펑 운 적도 있다고 한다. 그도 다른 의미로 그 안에 이미 시인이 들어가 있는지도 모르겠다. 나는 이런 친구들은 절대 이길 수 없을 것 같다. 나는 좋은 시인이 되지는 못할 것 같다. 그래서 어제 그렇게 취했나? 그렇지, 취해버렸지. 나는 취해버렸다. 내일을 마지막으로, 술 약속은 당분간 없는 걸로.
이게 인생영화, '그린북' 솔직후기/리뷰/해설 (약스포주의) [5분영화겉핥기]
안녕하세요, 재리입니다. 최근 화제인 작품이 있습니다. 작품에 대한 찬사는 물론 각종 시상식에서 상을 휩쓸고 있는데요. 왜 이걸 이제서야 봤나 싶습니다. 오늘의 영화는 인물들의 환상적인 케미를 자랑하는 영화 '그린북'입니다. 정말 이 조합을 어찌 사랑하지 않을 수가 있을까요. 왜 그렇게 모든 이들이 작품에 대한 칭찬을 아끼지 않는지 드디어 직접 눈으로 똑똑히 확인했습니다. 이 둘의 조합으로 말할 거 같으면 자유로운 유대인과 섬세한 흑인의 만남입니다. 어딘가 이상하지 않은가요? 셜리는 흑인이지만 힙합이 아닌 클래식을 연주하는 천재 음악가입니다. 토니는 이탈리아계 유대인이지만 찬송가가 아닌 주먹을 날리는 백인입니다. 보통의 편견에서는, 흔한 작품에서 보이는 흑인과 유대인의 이미지와 사뭇 다릅니다. 이렇게 고개를 갸우뚱하게 만드는 어색한 조합이지만 이는 실화를 바탕으로 한 작품이라는 점에서 또 다른 놀라움을 선사하게 됩니다. 하지만 영화를 본 사람들은 공감할 거예요. 돌직구의 유대인과 생각이 많은 흑인이라는 이 두명의 조합은 우월주의에 빠져있는 백인 둘의 조합을 월등히 뛰어넘는다는 사실을요. '을'과 '을'의 만남 처음부터 이 둘이 어울릴 거라 생각하는 사람은 많지 않습니다. 심지어 토니는 보수적이고 인종차별적인 성향이 짙었다고 볼 수 있는데요. 하지만 돈을 준다기에 흑인의 운전기사를 자처하게 되죠. 애초에 맞지 않는 퍼즐을 끼워놓은 모양새였습니다. 그런데 영화를 계속보다 보면 이 둘이 서로를 비슷하게 바라보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둘은 모두 백인사회에서 '을'에 해당하기 때문입니다. 셜리는 돈 많고 유명한 피아니스트지만 단지 '흑인'이라는 이유로 홀대 받습니다. 토니는 백인이지만 이탈리아계 유대인이면서 클럽 문지기나 하는 입장이기 때문에 알게 모르게 자격지심을 키워왔습니다. 무엇보다 이 둘은 자신을 차별하는 백인을 위해 일하는 역설적인 위치에 놓여있다는 공통점이 있었습니다. 서로 다른 듯 같은 모습을 느껴가며, 둘은 어느새 상대방을 진정으로 이해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었는지도 모릅니다. 서로를 향해 나아가는 진심 티격태격하던 이 둘도 시간이 지나며 서로에게 진심을 느끼기 시작합니다. 인물들의 서로 영향을 주고 받으며 변화하는 모습은 절로 웃음이 새어 나오죠. 예를들어 토니가 자신의 아내 돌로레스에게 안부차 편지를 쓰는 장면이 있습니다. 교양 있는 셀리는 내용을 더 로맨틱하게 바꿔주는데요. 처음에는 투박한 내용에서 시간이 흐를수록 감정이 풍부해지는 덕에 돌로레스는 감동까지 받습니다. 처음에는 적응하지 못했던 토니의 수다력에 셜리는 어느새 적응을 하고 있었고, 주먹으로 화를 삭이던 토니가 셜리의 침착함에 폭력을 멈추기도 합니다. 겉만 보면 분명 인정하기 힘들었던 이 둘의 조합은 그렇게 서로에 대한 진심으로 변화하고 있었습니다. 단순한 인종차별을 말하는 영화가 아니다 이 작품은 단순히 인종차별만을 비판하는 작품이 아닙니다. 서로에 대한 이해의 결핍을 가장 큰 문제점으로 지적합니다. 제가 눈물을 흘린 장면이 있는데요. 그 장면에서 영화가 제시하고 싶은 문제의식이 노골적으로 드러난 부분이기도 했습니다. 상대방을 알고 있다고 생각했지만, 그것은 오만한 편견이었고 또 다른 차별일 수 있죠. 차별 받는 누군가는 스스로 차별을 극복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 과정에서 어느 진영에도 확실히 소속될 수 없었던 '애매한' 입장을 얻게 됩니다. 결국 자신의 정체성마저도 의심해 버리는 상황이 문제인 것이죠. Who Am I 나는 누구인가, 어디에 속해 있는 사람인가 의심이 든 적 있나요? 누군가는 매일 하는 고민일지 모릅니다. 타인의 배려도 공격으로 느껴지고 스스로를 괴롭히는 지경에 이르죠. 이는 서로에 대한 진정성 있는 이해에 부족때문입니다. 영화는 상대를 아는 척하는 일이 얼마나 위험한지를 보여줍니다. 대표적으로 돈 셜리로 대표되는 인물을 통해 전달되는데요. 그는 차별을 각오하고도 백인들 앞에서 아무렇지 않은 척 계속해서 공연을 합니다. 굳이 차별을 마주하는 이유는 그에게는 남들과 다른 '용기'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려면 바로 그 용기가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또 다른 용기 하지만 토니도 용기가 없는 인물은 아닙니다. 토니는 토니만의 가치관이 있고 '을'로서 살며 강인하게 박힌 철학이 있었습니다. 어쩌면 셜리와 토니가 가진 용기가 서로 다른 유형의 용기였기에 둘의 만남은 운명적이지 않았나 싶습니다. 토니는 차별에 대항하는 법을 몰랐습니다. 오로지 주먹이 먼저 나가 상대방의 입을 틀어막기 바빴죠. 대신 그는 자신의 소중한 사람들을 지킬 줄 아는 남자였습니다. 그래서 차별에 저항할 줄 알지만 외로움을 자처하는 셜리를 만나 서로에게 절실히 필요한 존재로 거듭나게 됐다고 봅니다. 결론적으로 이 둘의 조합은 완벽할 수 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인내심을 가져야 승리한다? 작중에서 셜리는 인내심을 가져야만이 차별에서 승리할 수 있는 길이라고 말합니다. 본인이 여지껏 참고 버텨왔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작품은 다른 길을 제시합니다. 전통적인 백인 식당에서 인종차별을 당하고 식사를 할 수 없게 되자 둘은 흑인들이 주로 식사하는 식당으로 향하는데요. 융통성 없이 배척만 하는 백인사회와 달리 경계하지만 이내 받아들이는 흑인사회가 대비되기도 하는 부분이었습니다. 흑인사회가 우월하다는 뜻이 아니라 '화합'이 정답이라고 봤습니다. 서로를 진정으로 이해하고 받아들인다면 진정한 승리로 가는 길이 아닐까요? 사람의 진심은 숨기려해도 드러남을 알려주는 작품이었으니까요. 'Get Out' 'Liberty Heights' without 'GreenBook' 왜 차별이 나아졌다고 생각하는 지금까지도 이런 작품들이 많이 나오는 걸까요? 왜냐면 차별이 줄었다고 생각하는 우리들의 생각조차도 '아는 척'에 불과하니까요. 직접 차별을 당하고 고통받는 사람들을 진정으로 이해하지 못하고 있으니까요. 그린북이 없이도 리버티헤이츠를 나가 화합을 향해 아무렇지 않게 나갈 수 있는, 모두가 조화롭게 어울러 살 수 있는 세상은 언제쯤 올지 모르겠습니다. 그래도 분명한 건 60년전이나 지금이나 더 편견 없는 세상을 향해 나아가고 있다는 점이겠죠. 그 긴 여정에 큰 한 발자국을 남긴, 영화 '그린북'이었습니다.
소설)부자(父子)
안녕하세요! 나른한 오후에 인사드리는 optimic입니다. 어제 저녁에 앉아서 제가 지금까지 빙글에 쓴 글들을 하나 하나씩 다 모아봤는데.. 세상에 벌써 a4용지로 90페이지나 나오더라구요! 이만큼이나 글을 쓴 건 모두 제 글을 재밌게 읽어주시는 여러분 덕분입니다. 헤헤 정말정말 감사드려요! 오늘도 짤막한 이야기 하나를 써왔습니다! 재밌게 읽어주세요! ------------------------------------------------------- 병원 1인실. 왜소한 체격의 노인 남성이 누워있다. 몸이 굳은 듯 미동도 없이 부릅뜬 눈으로 천장만 바라보고 있다. 노인의 침대 옆에 서 있는 중년의 남자. 손에는 예리하게 빛나는 칼을 들고 있다. 남자 : 아버지... 노인의 발치로 걸어가는 남자. 노인의 눈은 공포를 담고, 흔들리는 동공으로 천장만 보고 있다. 노인 : 으..으어어..으으... 남자는 칼로 정성스럽게 노인의 발가락 끝부터 발 뒤꿈치까지 얇게 깎기 시작한다. 사각 사각 노인 : 흡!! 노인은 밀려오는 고통에 굳은 몸을 부르르 떨다 핏발 선 눈으로 눈물을 흘린다. 피가 흥건하게 흘러나오는 발끝. 남자가 고개를 들어 노인을 본다. 남자는 기괴하게 뒤틀린 표정으로 눈물을 흘리며 환하게 웃고 있다. 부자(父子) 병실에는 노인이 누워 있고 창 밖으로는 햇살이 따사롭게 병실 안으로 스며들었다. 뻣뻣하게 굳은 노인이 누워있는 침대 옆에는 지난밤의 그 중년 남자와 할머니가 앉아 있었다. 남자는 따뜻하게 웃으며 노인을 향해 입을 열었다. 남자 : 아버지. 노인 : 으..으어어... 노인은 여전히 굳어 있는 눈이지만, 핏발 선 동공을 부르르 떨며 신음한다. 할머니 : 아이구, 여전히 느이 아빠는 너도 못 알아본다. 남자 : 아니에요 엄마. 아버지 지금 눈인사 했어. 못 봤어요? 남자는 노인의 손을 두 손으로 잡고 따뜻한 눈으로 노인을 바라봤다. 뒤에서 그런 남자를 바라보는 할머니의 표정엔 흐뭇함과 안타까움이 뒤섞여 있었다. 똑똑 간호사 : 어머님. 약 받아가세요. 할머니 : 아이구 예. 감사합니다. 할머니는 무릎을 쥐며 일어나 병실 문으로 향했다. 여전히 남자는 따뜻한 눈으로 노인의 손을 잡고 있었다. 문이 닫히고, 둘만 남은 병실. 병실 밖에서 들리는 간호사와 할머니의 말소리. 간호사 : 아드님이 정말 효자에요. 밤낮으로 저렇게 아버지도 돌봐드리고. 할머니 : 맞아. 영감이 자식 복은 있어. 아이구 착한 내 새끼... 따사로운 병실. 남자는 문을 힐끗 바라본 후, 둘만 남은 병실을 슥 둘러봤다. 그리고는 별안간 공포스럽고 기괴한 표정으로 얼굴을 일그러뜨린 채, 노인의 귀에 대고 속삭였다. 남자 : 그럼 이따 저녁에 봐요. 아버지. 남자는 공포스럽게 웃으며 일어나 병실 밖으로 나갔다. 문이 닫히고, 잠시 혼자 남게 된 노인. 남자가 나간 후 닫힌 문을 겁에 질린 눈으로 노려봤다. 움찔 노인의 손이 살짝 움직이기 시작했다. 어느 덧 따사로운 햇살은 자취를 감추고, 서늘한 달빛만이 병실을 옅게 비추고 있었다. 여전히 천장을 바라보며 누워있는 노인은, 조금씩 손가락을 움직이기 시작했다. 드르륵 병실 문이 열리고, 남자가 들어왔다. 낮의 효심 가득한 모습이 아닌, 광기에 물든 표정이었다. 한 손에 칼을 쥔 채 천천히 걸어오는 남자의 모습을 보며, 노인은 어금니를 세게 마주쳤다. 남자 : 아버지. 오늘은 어디부터 해드릴까? 남자는 기괴한 웃음을 짓고 아버지의 팔뚝에 칼을 댔다. 슥슥 하는 소리와 피로 인해 젖어가는 환자복처럼 노인의 몸뚱이도 공포로 젖어가기 시작했다. 노인 : 으, 으아아아!!! 순간, 노인이 일어나며 남자의 손을 거세게 물어뜯었다. 남자 : 아악! 남자는 비명을 지르며 칼을 놓치고 급히 뒤로 물러섰다. 상체를 일으킨 노인의 모습은 온 몸이 상처투성이에 피가 흐르는 모습이었다. 노인 : 니놈이 날 죽이려 들어!? 남자 : 아버지. 정신 차리세요! 절박한 남자의 외침과는 다르게, 남자의 표정은 여전히 기괴하게 일그러진 채 웃음을 띄고 있었다. 노인 : 이놈!!! 퍽! 노인은 침대에 떨어진 칼을 들고 일어나 남자의 얼굴에 휘둘렀다. 그것은 마치 살기 위해 모든 힘을 쏟아내는 듯 했다. 남자 : 으악! 아버지! 제발! 남자는 칼에 얼굴 옆면을 맞고 뒤로 넘어졌다. 정확히 칼을 휘둘렀으나, 베이지 않고 둔기에 맞은 것처럼 퍽 소리를 내며 넘어진 아들의 모습이 순간 이상하다고 생각했지만, 노인은 생존을 위해 본능적으로 움직였다. 퍽 퍽 퍽! 피범벅이 된 몸으로 쓰러진 남자 위에 올라탄 노인은 남자의 칼로 계속 아들의 얼굴을 내리쳤다. 남자 : 아..아버지... 정신...차리... 노인의 밑에 깔려 꿈틀거리던 남자는 서서히 의식을 잃어갔고, 남자의 몸은 이내 축 늘어졌다. 노인 : 하아... 이 호로새끼. 애비를 죽이려고? 노인은 남자 위에 걸터앉은 채로 가쁜 숨을 몰아쉬었다. 탁! 이 때 병실에 불이 환하게 켜졌다. 간호사1 : 빨리 선생님 데려와! 간호사2 : 보호자분. 정신 차리세요! 간호사들 너뎃 명이 와서 남자와 노인을 떼어냈다. 남자 간호사들에게 붙들려 남자와 멀어지는 노인. 이상하게 끌려가는 노인의 몸은 멀쩡했다. 노인의 손엔 둥글게 말린 채로 얼어 있는 얼음찜질용 팩이 들려 있었고, 애초에 그 곳에 칼은 없었다. 얼굴이 피떡이 된 채로 쓰러져 있는 남자. 초점 잃은 눈으로 끌려 나가는 노인과 노인의 침대에 붙은 진료기록부. 이름 김 상 수 병명 복합부위통증 증후군 복합부위통증 증후군 : 외상 후 신체에 극심한 작열통(灼熱痛)과 칼에 베이는 듯한 아픔을 동반하는 신경병성 통증. 우울증을 비롯한 정신적, 심리적 불안정이 동반될 가능성이 높다. -------------------------------------------------- 오늘은 여기까지입니다! 제가 의학적 지식이 전혀 없어서 인터넷에서 찾고 찾아서 글을 쓰긴 했는데... 꼭 이런 주제를 써 보고 싶긴 했는데... 미흡한 점이 많을 거 같네요. 그래도 소설은 소설로 즐겨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ㅎㅎ.. 항상 감사드리고 이 시국에 몸 관리 잘 하세요!
<로쟈의 한국문학 수업 - 여성작가 편> 이현우
<로쟈의 한국문학 수업 - 여성작가 편> / 이현우 저 (지극히 주관적인 제 생각을 쓴 글입니다.) 개인적으로 작가들의 경험을 듣거나 읽는 것을 좋아한다. 작가란 직업이 가지는 신비성과 그들이 쓰는 글의 원천인 경험들이 매력적이기 때문이다. 보통 독자가 작가의 경험을 접하는 방법은 그들이 쓴 에세이를 통해서다. 작가가 직접 자신이 겪은 것들을 글로 펴 내면 독자가 읽게 되는 것이다. 나도 보통 그런 식으로 여러 작가들의 경험을 접했다. 그러나 그 글들에는 작가의 주관이 개입될 수밖에 없다. 그런 면에서 <로쟈의 한국문학 수업>은 새롭고 매력적인 관점을 볼 수 있는 책이다. 누구나 이름 한 번쯤은 들어봤을 법한 국내 작가들의 생애와 그들이 살던 시대상을 객관적인 관점에서 분석하여 그 경험들이 어떻게 그들의 작품에 반영되었고 영향을 미쳤는지를 전한다. 굳이 분류하자면 비평서로 볼 수 있겠지만 전문적인 비평서처럼 일반 독자들이 읽기 어렵거나 난해하지는 않다. 작가의 생애와 작품에 대한 깊이 있는 분석과 통찰을 누구든 쉽게 이해할 수 있는 문장들로 풀어냈다고 보면 정확할 것이다. 서문에서 저자가 '보통의 독자가 책을 통해서 한국 현대문학의 전개과정에 대한 조감도를 그려볼 수 있고, 개별 작품에 흥미를 갖게 된다면 저자로선 더 바랄 것이 없겠다.'라고 말하고 있는 만큼 어디까지나 일반 독자들을 위한 책이다. 한국문학에 관심이 있으나 어떻게 입문해야 할지 모르겠다거나 한국문학의 흐름이 어떻게 진행되어 왔는지 알고 싶은 일반 독자들에게 입문서로 추천하면 딱 좋겠다는 생각이 읽는 동안 여러 번 들었다. <로쟈의 한국문학 수업 - 여성작가 편>은 1960년대부터 각 시대를 대표하는 열 명의 여성 작가를 다루고 있다.(물론 남성작가 편도 따로 있다.) 1960년대에는 강신재, 박경리, 전혜린을, 1970년대에는 박완서를, 1980년대에는 오정희, 강석경을, 1990년대에는 공지영, 은희경을, 2000년대에는 신경숙을, 그리고 마지막 2010년대에는 황정은을 대표 작가로 다뤘다. 노어노문학을 전공한 저자가 세계문학의 흐름과 한국문학의 흐름을 비교하며 분석하는 것이 꽤 흥미로웠다. 전반적으로 세계의 문학은 전근대에서 근대로 나아가는 방향으로 진행해왔다. 계급적 봉건제에서 자본주의로, 종교에서 과학으로, 노동에서 돈으로, 숙명에서 자유의지로, 농업에서 산업혁명으로 나아가는 역사의 방향과 궤를 같이 했다. 그 과정에서 많은 갈등이 생기게 된다. 과학의 합리와 이성을 불신하는 종교인들, 계급이 사라진 사회에서도 여전히 계급주의에 묶여 사는 귀족들과 그에 반발하는 평민들, 숙명적으로 이어져 온 가문의 행로에 반발하며 고뇌하는 젊은이까지 온갖 종류의 갈등이 생겨나게 된다. 근대 소설이 담아내야 하는 것은 바로 그러한 갈등과 그 갈등을 겪는 이들의 다층적인 내면이다. 저자는 이와 같은 관점에서 작가와 작품을 분석하는데 좋았던 건 뻔한 칭찬 일색의 글이 아니라는 점이었다. 때로는 신랄하기까지 한 비판을 가하며 아쉬웠던 점, 부족한 점을 분석한 뒤 거기서 그치지 않고 나아가야 할 길까지 제시한다. 대표적으로 박경리의 소설에 대한 저자의 평은 전근대적 세계관적 생명사상에서 벗어나지 못한 소설이라는 것이다. 박경리의 김약국의 딸들을 보면 근대적 세계관을 거부하고 있다. 자본주의, 돈, 공업과 기계 등을 거부하고 땅과 노동, 생명에 머물러 있다. 근대 소설의 조건에 부합하지 못하는 것이다. 저자의 말에 따르면 근대 소설은 이전부터 있어 왔던 치정, 숙명, 샤머니즘 및 토속적 이야기에서 벗어나 새로운 것들을 써야 한다. 설령 사랑에 대한 소설이라 할지라도 상류 계급의 여성이 하층민을 사랑하게 되면서 전근대적 계급주의와 근대적 평등주의 사이에서 나타나게 되는 갈등을 다뤄야 하는 것이다. 전근대적 소설에도 있던 설정이 아니냐고 할 수 있지만 계급주의가 사라져 가고 있는 근대 소설에서는 체념과 사랑 두 가지 선택지가 모두 가능하며 심지어 사랑도 주위의 비난만 견딘다면 당당하게 쟁취할 수 있다는 차이점이 있다. 그렇기에 두 선택지 사이에서의 갈등의 끈이 팽팽하다.(전근대 소설에서는 사랑을 쟁취하려면 계급을 버리고 사랑의 도피를 하는 수밖에 없다.) 박경리의 김약국의 딸들은 좋은 소설일지는 모르지만 근대 소설의 기준에는 부합하지 못한다. 근대 이전부터 있어 왔던 치정 싸움, 비상을 먹고 죽은 엄마의 자식이라는 액운에서 전혀 벗어나지 못하는 아들의 모습에서 보이는 숙명론적 세계관, 자본과 돈을 통한 성공을 배제하는 서사 등은 저자가 말하는 근대 소설이라고는 볼 수 없는 것이다. 저자는 조강지처를 버리고 새장가를 든 아버지에 대한 박경리의 분노, 제국주의 전쟁에서 남편을 잃은 그녀의 경험 등이 근대적 세계관과 연결되며 그에 대한 거부가 자연스럽게 박경리의 소설에 나타난 것이라고 말한다. 상당히 합리적이고 논리적인 추론이다. 이렇듯 근대 소설이라는 관점을 제시하며 한국 문학의 대표적인 작품들의 흐름을 분석하는 글은 독자들에게 한국 소설을 이해하는 흥미로운 하나의 관점을 제시한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이번 리뷰에서는 박경리에 대한 부분만 이야기했지만 박경리 외의 다른 작가들에 대한 글도 흥미롭다. 작가들이 살던 시대와 생애를 객관적으로 톺아보며 작가들의 소설과 논리적인 연결점을 찾아내 합리적 추론을 해내는 과정이 얼핏 보면 추리 소설을 읽는 것 같기도 해 인상적이었다. 지금은 <로쟈의 한국문학 수업 - 남성작가 편>을 읽고 있는 중이다. 아직 앞부분밖에 못 읽었지만 충분히 읽을 만한 가치가 있어 보인다. 한국 문학, 특히 1900년대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 근현대 한국 문학의 흐름을 전문적이지만 어렵지 않게 배울 수 있는 좋은 한국문학 입문서다. 한국문학을 사랑하는 독자들이라면 한 번쯤 읽어보길 권하고 싶다. 책 속 한 문장 자기의 꿈을 포기하거나 잃어버리는 거세 과정을 통해서 사회적 현실에 안착하는 것이다. (이 리뷰는 출판사에서 제공받은 책을 읽고 작성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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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는 늦은 새벽까지 술을 마셨다. 글 쓰는 것도 잊은 채. 이제는 세계관이 너무도 달라진 두 친구들과 마음껏 웃기도, 언성을 높여가며 싸우기도, 적당히 생각을 접으며 어쩌면 표면적일, 표면적일 수밖에 없을 사과를 하기도 했다. 한 친구는 고개를 푹 숙이며 울었다. 자신의 인생을 쓸쓸히 관조하듯. 예정된 울음이었을지도 모르겠다. 그의 쓸쓸한 모습이 최근 나에게 더없이 많이 포착되었기 때문이다. 툭 건드리면 쏟아져 버릴 것 같던 그 슬픔들. 다른 친구는 우는 친구를 다독이며, 또한 자신의 슬픔을 털어놓으며 함께 울었다. 자신들의 잘못도 아닌데, 울었다. 문득 각자의 잣대를 들이대며 서로 가치관을 줄다리기하는 것이 무의미하다고 느껴졌다. 이제 내게는 다소 벽처럼 느껴지는 그들 안에서 각자의 고난들이 울컥울컥 요동치는 것을 그저 바라보기만 했다. 그의 어깨를 조용히 두드렸지만, 그것은 어떤 것도 불러낼 수 없는 빈 노크에 불과해서 나는 다독임마저 곧 멈추었다. 짧은 잠을 자고 일어나, 식사를 하고 우리는 공원을 잠시 걸었다. 그리고 이십여 년 전의 어느 봄날처럼 벤치에 앉아 시간이 흘러가는 것을 무기력하게 바라만 보고 있었다. 우리는 지난밤 무슨 일이 있었냐는 듯 싱거운 농담을 던지며 웃었지만, 아무리 해도 그 언젠가의 투명한 평안이 겹쳐지지는 않았다. 어떤 슬픔도 잠시간 덮어놓을 수 있을 듯 더없이 따사로운 일요일 오후였지만, 보기 흉하게 얼룩져버린 슬픔을 아주 지울 수는 없었다. 우리는 각자가 걸치고 있는 슬픔들을 눈감아주기로 한 듯, 악수를 나누고 웃으며 헤어졌다. 봄이 오고 있었다.
책방 3화 :: 꿈을 좇아 퇴사하려 합니다
안녕하세요:) 책으로 하는 방송, 책방입니다! 책방은 사연을 받아 그 사연에 맞는 책을 직접 골라 소개해드리고 있습니다:) | 📖서점의 추천책 📖|undefinedundefined 오늘은 그림으로 유명한 책을 가져왔습니다.  평범한 40대 가장이었던 주식 중개인 찰스 스트릭랜드가 자신의 포기할 수 없었던 화가라는 꿈을 위해 가정도, 자식도, 부와 명예까지 모든 것을 내팽개치고 꿈을 위해 온갖 어려움을 겪은 끝에 걸작을 완성한다는 이야기입니다. 이 책을 추천하는 첫 번째 이유 많은 사람들은 꿈을 위해 찰스 스트릭랜드가 너무 많은 것을 버렸다고 비난을 하지만 그 비난을 감수하는 그의 노력들은 무시할 수 없습니다. 그는 죽음 직전까지 가는 과정도 불사하죠. 고민자 분도 꿈을 이뤄나가는 과정에서 분명 불안함이 생길 거예요. 지금과 같은 비교적 편안하고 안락한 길은 아니겠지요. 하지만 이 책을 통해 그런 불안함을 좀 덜어드릴 수 있지 않을까 해서 추천합니다. 이 책을 추천하는 두 번째 이유 주인공은 아니지만 '아브라함’이라는 인물이 나옵니다. 이 인물 또한 출세를 포기하고, 자기가 발견한 이상적인 삶을 선택하는 인물입니다. 전도 유망한 의사였고, 최고의 권위를 누릴 수 있는 사람이었는데 그 앞 길을 내팽개칩니다. 그러면서 2인자였던 이가 그 자리를 차지하게 됩니다. 그는 아브라함에 '인격이 없다’고 합니다. 멍청한 선택을 했다는 거죠. 아브라함은 작은 보건국 관리직을 맡으며 늙은 그리스 여자와 병치레를 하는 아이 대여섯과 함께 살고 있으니까요. 하지만 반대로 생각해보면 어떨까요. 아브라함은 알면서도 그런 선택을 했다는 것이기 때문에, 오히려 적지 않은 인격이 필요했다는 것이죠. 그런 노력들이 보이는 작품이었기 때문에 추천합니다.  | 📖클로이의 추천책 📖|undefinedundefined 하루키 하면 떠오르는 몇 가지 키워드들이 있죠. 고양이, 재즈 등등. 그중에서도 달리기를 이야기하는데요. 그러면서 소설가로서 인생을 시작하게 된 이야기를 회고록처럼 쓴 책입니다. 그래서 저도 새해 즈음에 이 책을 읽었는데요, 뭔가 시작하고 싶을 때 읽으면 좋은 책인 것 같아 추천합니다. 하루키도 원래는 직업이 소설가가 아니라, 재즈클럽 사장님이었는데, 전업작가가 되었죠. 때문에 하루키도 굉장히 고민이 많았다고 해요. 새로운 일을 시작했으니까요. 고민이 될 때 이 책을 읽어보시면 용기를 얻을 수 있지 않을까 해서 추천합니다. 어쨌든 나는 그렇게 해서 달리기 시작했다. 서른세 살. 그것이 그 당시 나의 나이였다. 아직은 충분히 젊다. 그렇지만 이제 ‘청년’이라고 말할 수 없다. (중략) 그런 나이에 나는 러너로서의 생활을 시작해서, 늦깎이이긴 하지만 소설가로서의 본격적인 출발점에 섰던 것이다. 33살에 시작을 했고, 꾸준히 포기하지 않았고, 자신만의 길을 쭉 달렸기 때문에 전 세계적인 작가가 되셨듯, 고민자분도 계속해서 가다 보면 어떤 자신의 목표에 당도할 수 있을지 않을까 싶어 추천합니다.  이 분처럼 고민이나 다른 사연이 있으신 분들은 이메일(captaindrop@flybook.kr)또는 댓글로 사연을 남겨주세요. 책방에서 정성스럽게! 책을 추천해드릴게요:) 그럼 다음 책방에서 만나요! 👇유튜브 구독하면 더 빨리 받아볼 수 있어요!👇 유튜브 바로가기 >> https://youtu.be/4VPvT965y0U 플라이북 바로가기 >> https://goo.gl/W8u7Lh
<이반 데니소비치, 수용소의 하루> 알렉산드르 솔제니친
<이반 데니소비치, 수용소의 하루> / 알렉산드르 솔제니친 저 (지극히 주관적인 제 생각을 쓴 글입니다.) 한 편의 블랙코미디를 보는 것 같다. 이 소설은 이반 데니소비치(슈호프)라는 한 인물이 수용소에서 하루를 보내는 모습을 아무런 치장 없이 그대로 그려 내고 있다. 마치 식탐 많은 어린아이처럼 멀건 귀리죽 한 그릇을 놓고 다투는 죄수들의 모습은 웃긴 동시에 슬픔과 분노를 불러온다. 서로 상반된 감정을 한 문장으로 동시에 일으킬 수 있다는 사실이 이 책의 존재 이유를 설명한다. <이반 데니소비치, 수용소의 하루>는 알렉산드르 솔제니친의 실제 경험에서 우러나온 소설이다. 전쟁에 참여해 훈장을 받기도 했던 그였지만 친구에게 보낸 편지에 쓰인 스탈린에 대한 조롱이 문제가 되어 소련의 정치범 수용소 굴라크로 보내져 8년간 수용소 생활을 겪었고 그 기간 동안 보고 듣고 겪은 것을 바탕으로 <이반 데니소비치, 수용소의 하루>, <제1원에서>, <수용소 군도> 등의 작품을 써냈다. 이렇듯 파란만장한 알렉산드르 솔제니친의 인생에 비추어봤을 때 이 소설의 흠잡을 데 없는 현실감과 사실성은 당연한 결과라고 볼 수 있다. 그리 길지 않은 이 소설의 내용은 별다를 것이 없다. 수용소 죄수인 이반 데니소비치가 아침에 일어나 밤에 잠들 때까지 겪은 일들을 시간의 흐름에 따라 보여주고 있을 뿐이다. 하지만 이 하루 동안의 이야기가 솔제니친의 인생과 결부되면 그 무게가 달라진다. 허구의 인물, 이반 데니소비치의 하루에 대한 이야기지만 작가가 8년 동안 수용소 생활을 직접 겪은 인물이라는 것을 알게 되는 순간, 이 소설 속 이야기가 허구를 이용해 현실을 묘사하려는 목적으로 쓰인 작품임을 깨닫게 된다. 그 지점에서 <이반 데니소비치, 수용소의 하루>는 그 무엇에도 비할 데 없는 블랙코미디가 된다. 이반 데니소비치의 행동을 보면 웃음이 피식 새어 나온다. 추운 날씨에 일하기 싫어 어떻게든 핑계를 만들어 의무실에서 쉬고 싶어 하는 모습이나(물론 그 추운 날씨가 영하 40도를 넘나들긴 한다.) 담배 한 개비에 행복에 겨워하는 모습, 어떻게든 멀건 죽 한 그릇을 더 차지해보고자 다투고 아부하고 거짓말하는 장면, 몰래 시트에 숨겨 놓은 빵껍질이 사라질까 불안해하는 모습까지. 특히 그중에서도 멀건 귀리죽 한 그릇을 더 먹게 되자 행복감에 물들어 경건하기까지 한 자세로 죽을 말끔히 해치우는 모습은 마치 사탕 하나를 더 받고 너무나 기뻐하는 어린아이를 연상케 한다. 그러나 이야기가 점점 진행될수록 담배 하나를 얻어 피우고자, 혹은 건더기는 보이지도 않는 죽 한 그릇을 더 먹고자 이반 데니소비치가 기울이는 필사의 노력들을 마냥 유머로 받아들일 수만은 없게 된다. 의문이 들고 마는 것이다. 왜 이들은 이 열악한 수용소에서, 바깥에서는 먹지도 않을 멀건 죽 한 그릇을 먹기 위해서 이토록 필사의 노력을 기울여야만 하는 것인가 하는 의문이. '형식적으로 말한다면, 슈호프가 수용소에 들어온 죄목은 반역죄이다. 그는 그것이 사실이라고, 또 일부러 조국을 배반하기 위해 포로가 되었고, 포로가 된 다음 풀려난 것은 독일 첩보대의 앞잡이 노릇을 하기 위해서였다는 사실도 인정했다. 그러나 어떤 목적을 수행할 계획이었는지는 슈호프 자신도, 취조관도 꾸며낼 수가 없었다. 그래서 그냥 목적이 있었다는 것만으로 결정을 내렸다.' (p.83) 이반 데니소비치는 자신도 이유와 목적을 모르는 반역죄를 뒤집어쓰고 이 수용소에 수감되어 온갖 열악한 환경과 불합리한 대우와 고된 노동을 감수하며 10년의 형량이 끝나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살아남기 위해, 10년의 형량이 끝나고 수용소 밖으로 나갈 날만을 손꼽아 기다리며, 온 힘을 다해 수용소 생활을 견뎌내고 있던 이반 데니소비치. 죽 한 그릇에 거의 목숨을 거는 이반 데니소비치의 모습은 분명 기묘하고 웃기지만 그 행동의 밑바탕과 근원에 깔린 당시 러시아의 상황을 생각해보면 웃을 수도 울 수도 없는 상황이 되고 만다. 독자는 스탈린의 독재 체재 아래 얼마나 많은 이들이 누명을 쓰고 수용소로 보내졌는지, 열악한 수용소에서 죄 없는 이들이 몇이나 죽어 나갔는지, 불합리하고 비정상적이고 말도 안 되는 일들이 현실 속에서 어떻게 자행되어 왔는지를 이반 데니소비치와 수용소 안 인물들의 하루를 통해 들여다보게 되는 것이다. 이 소설이 고전이자 명작으로 평가받는 이유는 독자들이 당시의 러시아 상황을 들여다보게 만드는 방식에 있다. 솔제니친은 자신이 8년간 수용소 생활을 겪었음에도 당시의 분노와 좌절, 복수심을 접어두고 철저히 객관적인 거리에서 이반 데니소비치의 하루를 그린다. 만약 글 속에 스탈린의 독재에 대한 통렬한 비판, 불합리하고 비정상적인 공산주의 독재 체제에 대한 분노, 억울한 수용소 생활에 대한 복수심이 직접적으로 거론되었다면 이 소설은 지금까지도 사랑받는 고전으로 남아 있지 못했을 것이다. 솔제니친은 담담하게 한 수용소 죄수의 하루를 그림으로써 독자들이 스스로 당시의 소련 상황에 대해 생각하고 의문을 제기하고 판단하도록 만든다. 말하자면, 잘못을 저지른 누군가에게 당신이 한 일은 잘못됐다고 날 선 비판의 말을 쏟아내는 것이 아니라 그가 저지른 일로 인해 벌어진 결과를 그대로, 가감 없이 눈 앞에 보여준 것이다. 전자와 후자 중 어떤 방법이 당사자가 자신의 잘못을 돌아보도록 만드는 데 더욱 효과적인지는 누구나 알 수 있듯이 후자이며, 솔제니친은 그보다 더 치명적일 수는 없는 비판을 후자의 품위 있는 방식을 통해 당시 소련의 권력자들, 정치인들, 그리고 스탈린에게 가한 것과 다름없다.(소련 정부와 소련 작가 연맹은 자신들의 잘못을 인정하지 않고 노벨상 수상자로 선정된 솔제니친에게 노벨상을 포기하던가, 아님 전향이나 추방 중 하나를 선택하라고 경고하는 찌질함을 보여준다. 솔제니친은 결국 소련을 떠나 노벨상을 수상한다.) 작가로서 당시 소련 사회에 세련된 방식으로 통렬한 비판을 가한 그의 인생에 박수를 보낸다. 위에 인용한 소설 속 문장을 보면 이보다 더한 블랙코미디가 있을까 싶다. 아무도 반역의 목적을 모르는 반역죄라니. 심지어 죄를 지은 당사자조차도 모른다. 더 웃픈 건 이러한 일들이 고작 100년도 안 된 과거에 수없이 벌어졌다는 사실이다. 그래서 우리는 늘 눈을 뜨고 귀를 열고 주변을 살펴야 한다. 언제 내가, 혹은 당신이 이반 데니소비치가 될지 모른다. 소설 속 한 문장 봐라, 지금 슈호프는 사백 그램의 빵과 이백 그램의 빵을 차지한 것이다. 게다가 침대 시트에 이백 그램짜리 빵이 하나 더 있다. 더 이상, 뭘 더 바랄 것인가? (p.184)
<대성당> 레이먼드 카버 외 5권
<대성당> 레이먼드 카버 외 5권 (지극히 주관적인 제 생각을 쓴 글입니다.) 그간 책은 꾸준히 읽었으나 리뷰를 올리지 못했다. 개인적인 일이 바빴던 탓이다. 리뷰를 쓰는 것은 책을 읽는 일에 비해 생각보다 많은 시간과 노력을 요하는 일이라 잠시 뒷전으로 미뤄두었다. 그러나 읽은 책이 쌓여가고 리뷰는 쓰지 않고 있는 상황에 왠지 모를 부채감이 찾아들어 마음이 싱숭생숭하던 차에 시간이 조금 났고 간략하게라도 그간 읽은 책들에 대한 리뷰를 작성하는 것이 좋겠다는 생각이 들어 글을 쓰게 되었다. 아래의 책들은 읽은 시간 순에 따라 나열했다. 읽을 책을 찾는 이들에게 도움이 되면 기쁘겠다는 마음으로 쓴다. 1. <대성당> 레이먼드 카버 저 레이먼드 카버의 단편집이다. 대성당을 모두 읽고 며칠이 지나고 나서야 왜 레이먼드 카버가 아메리칸 체호프라 불리는지 알게 되었다. 한마디로 말하자면 그의 단편은 평양냉면이다. 처음 먹을 때는 밍밍한 맛에 '도대체 이게 뭐가 맛있다는 거지? 밍밍하고 아무 맛도 안 나는데?' 하는 생각뿐이지만 시간이 지나 곱씹어보면 또 먹고 싶어지는 그런 소설이다. 대성당에 실린 단편들에는 크게 사건이라고 할 만한 일이 일어나지 않는다. 블록버스터 영화들에 길들여진 현대의 독자에게는 이것보다 더 싱거울 수가 있나 하는 전개다. 평범한 사람들에게 일어나는 평범한 일상에 대한 이야기와 그들이 나누는 대화들 뿐. 그러나 대화, 묘사, 서술, 문장 하나하나를 곱씹으면 곱씹을수록 맛이 난다. 대성당에 실린 단편들은 하나 같이 인간과 인간이 서로의 이야기를 듣는 일에 관해 말한다. 대화를 하면서도 서로의 이야기를 듣지 않는 사람들, 이야기를 듣는다는 행위, 대화와 공감의 진정한 의미, 다른 이의 이야기를 듣는다는 그 지나치게 어려운 행위가 마침내 일어났을 때 느껴지는 전율과 나타나는 희망. 추천하고픈 단편은 <보존>, <별것 아닌 것 같지만, 도움이 되는> 그리고 표제작인 <대성당>이다.(참고로 나는 평양냉면을 먹어본 적이 없다.) 책 속 한 문장 [그녀는 남편의 맨발을 내려다봤다. 그녀는 맨발 옆에 고인 물을 쳐다봤다. 이런 이상한 광경을 보는 일은 남은 평생 한 번도 없을 거라고 그녀는 생각했다.] 2. <지하생활자의 수기> 표도르 도스토옙스키 저 <지하생활자의 수기>의 주인공인 지하인은 자신만의 지하에 사는 인간이다. 그는 1부에서 자신이 왜 지하인이 될 수밖에 없었는가를 장황하게 온갖 논리와 의견을 내세우며 설명한다. 그의 논리는 일견 타당해 보이기까지 한다. 그의 과격한 설명을 듣고 있노라면 그는 지하인이 될 수밖에 없는 숙명을 타고난 자인 것처럼 느껴지며, 심지어는 이런 세상에서 지하인이 되지 않은 다른 인간들은 전부 멍청이거나 미련한 자거나 바보인 것처럼 보일 지경이다. 2부에서 그는 자신에게 일어난 한 사건을 서술한다. 거기서 우리는 앞에서 들었던 주인공, 지하인이란 어떻게 생각하는 자이며 어떻게 행동하는 자인지를 엿볼 수 있다. 스스로 생각하는 이상 속의 자신과 현실의 자신 사이에서 생기는 극도의 괴리가 만들어내는 자기혐오와 세상에 대한 불신으로 똘똘 뭉친 자가 바로 지하인이다. 얼핏 사르트르의 <구토>나 다자이 오사무의 <인간 실격> 같은 느낌이 나기도 한다. 그러나 현실의 우리는 지하인과 다르다고  말할 수 있는가. 현실에 존재하는 자신과 이상 속 자신이 완전히 합치된 인생을 살고 있는가. 우리 모두는 그런 인생을 살지 못한다. 단지 그 현실에서 눈을 돌리고 있을 뿐이다. 모든 인간은 지하에 발을 걸치고 있다. 그리고 언제 그곳으로 빠져버릴지 모른다. 책 속 한 문장 [그러나 2X2는 4란 것엔 도저히 참을 수가 없다.] 3. <죄와 벌> 표도르 도스토옙스키 저 <죄와 벌>은 한 살인자의 죄와 벌에 관한 이야기이다. 살인이라는 범죄를 저지른 주인공의 내면을 쭉 따라가며 그 생각의 변화를 지독하리만큼 집요하게 서술한다. 주인공은 고통과 고뇌 속에서 하루에도 몇 번씩 자백과 은폐 사이를 시계추처럼 오락가락한다. 책의 뒤표지에 적힌 '범죄에 대한 심리학적 보고서'라는 문장처럼 이 소설은 주인공의 살인 계획부터 마지막 결말까지 사소한 것 하나도 놓치지 않고 보고서를 작성하듯 서술해 나간다. 이 한 편의 보고서 같은 소설을 읽으면서 독자는 평생 체험해 볼 수 없는 살인자의 깊은 내면까지 침잠하게 된다. 이해할 수 없는 종류의 인간을 체험해보는 일이 이 한 권으로 가능해지는 것이다. <죄와 벌>에 대해 한 가지 아쉬운 점이 있다면 결말이다. 스포일러가 될 수 있기에 자세한 이야기는 하지 않겠지만 무언가와 타협해 버린 듯한 결말이 아쉬울 따름이다. 죄와 벌, 선과 악을 결정하는 기준에 대한 더욱 치열하고 적나라한 고민이 결말까지 이어졌다면 좋지 않았을까. 책 속 한 문장 ["하나의 목숨으로 수천의 생명이 부패와 붕괴에서 구원되는 거야."] 4. <우리는 분위기를 사랑해> 오은 저 리뷰에서 처음으로 다루는 시집이다. 시집을 많이 읽지는 않으나 내가 지금껏 읽었던 시집 중에는 가장 좋았다. 언어유희, 말놀이, 말장난 등으로 불리는 그의 시는 같은 언어가 가지는 다양한 의미에 대해 논의한다. 언어와 실존하는 사물의 관계는 어떻게 말할 수 있을까? 공은 축구공 같은 공이기도 하고 비었다는 뜻의 공이 되기도 하고 공적인 일을 말할 때의 공이기도 하다. 같은 언어로 여러 다른 사물 또는 의미를 지칭한다는 것은 언어가 사물과 동치 관계가 아님을 뜻한다. 그렇다면 언어는 현실과 동떨어진 그저 의미 없는 소리에 지나지 않는 걸까? 그러나 언어는 실제로 사람들을 움직인다. 실재하지 않는 의미 없는 소리가 실재하는 인간들을 움직이고 사물을 지칭하고 의미를 만들어낸다. 이 시집은 언어와 현실의 관계에 대한 치열한 탐구의 결과다. 현실과 같을 수 없고, 완벽할 수 없는 언어에 대한 탐구를 업으로 삼는 시인의 생각을 엿볼 수 있다. 늘 들이마시는 공기처럼 늘 사용되기에 아무도 고민하지 않는 언어. 오은 시인은 남발되는 언어를 재조합하고 재발견함으로써 언어의 생소함을 일깨운다. 당연하게 사용되는 것들을 탐구해 당연하지 않게 만드는 그의 시. 꼭 읽어보길 권하고 싶다. 시원한 초가을, 당신을 시 원하게 만드는 시집일 것이다.(광주에 오셨을 때 직접 뵙고 시집에 사인받은 건 자랑. 다 끝나고 사진 찍는 거 모르고 그냥 가서 아쉬운 건 안 자랑.) 책 속 한 문장 [날이. 또다시 샌 것 같았다. 김도. 빠지는 것 같았다. 기운이.] 5. <돼지꿈> 황석영 저 황석영 작가의 단편집이다. 그 유명한 <삼포 가는 길>뿐 아니라 <돼지꿈>, <객지>등 황석영 작가의 굵직한 대표 단편들이 실려있다. 리얼리즘 문학의 대가인 황석영 작가의 단편들인만큼 시대의 한 단면을 예리하게 날이 세워진 칼로 싹둑 잘라내어 그대로 펼쳐 놓은 듯하다. 어찌나 날카로운 칼인지 문학적 가치는 둘째치고 역사적 가치를 위해서라도 보존해야 할 단편집이 아닌가 생각했다. 과거의 대한민국에서 쓰이던 어휘, 말투, 문장들을 볼 수 있다는 점도 생소하고 새로운 경험이었다. 대한민국의 과거를 눈 앞에서 보듯 생생하게 목격할 수 있는 이 단편집은 지금의 대한민국을 만들기 위해 과거의 대한민국이라는 땅에 살던 사람들이 겪었던 일들을 그린다. 지금 너무나 당연한 것들은 원래 당연하지 않았다. 당연한 당연함을 위해 희생하고 노력했던 이들의 모습을 보면 울컥하기도 한다. 이 소설은 지금의 대한민국이 되기 위해 얼마나 많은 이들이 고통과 어려움을 겪었는지, 또 현재의 우리는 이후의 세대들이 지금보다 한 발 나아간 당연함을 누릴 수 있도록 하기 위해 어떤 일들을 해야 할지 고민하게 만든다. 책 속 한 문장 ["세상에 자기 집이 있는 게 제일 좋은 거야."] 6. <여름의 책> 토베 얀손 저 세계적으로 유명한 무민의 작가 토베 얀손의 소설이다. 섬에 사는 손녀와 할머니가 겪는 에피소드 형식의 짧은 이야기 스물두 편이 엮여 있다. 민음사 유튜브에서 마케터 분이 추천하시는 걸 보고 사서 읽었는데 각박한 현실에서 마음의 안정을 찾기에 좋은 소설이다.(짧아서 부담도 없다.) 책을 펼치면 가장 먼저 할머니와 손녀의 특이한 관계가 눈길을 끈다. 둘의 대화만 보면 이게 할머니와 손녀인지 그냥 친구 둘이 이야기하는 건지 모를 정도다. 심지어 할머니가 손녀에게 삐지거나 짜증을 내기도 한다! 그 둘이 여름의 섬에서 겪는 일들을 차분히 따라가노라면 마음이 평온해진다. 특히 할머니를 할머니라는 역할이 아닌 한 사람으로 보고 그 생각과 생활을 보여주는 것이 좋았다. 대부분의 책에서 노인은 현명한 조언자 정도의 역할로 소비되기 마련이니까. 짧은 에피소드들이 엮인 책이니만큼 자기 전에 에피소드 한 편씩 읽고 자면 딱 좋은, 잠자리가 따뜻해질 만한 책이다. 유럽의 독립영화를 좋아하는 사람들에게 추천하고 싶다. 책 속 한 문장 ["일흔다섯도 안 되었잖아." 할머니가 말했다. "그런데도 마음대로 하고 싶은 건 하고, 하기 싫은 건 안 할 수 없어?"] p.s. 요즘 트위치에서 '으아아우악'이라는 닉네임으로 개인 방송을 시작했습니다. 게임 방송이나(주로 에이펙스 레전드) just chatting 방송을 주로 하는데 재밌더군요. 책 이야기도 가끔 하곤 합니다. 심심하시거나 방송이 궁금하신 분들은 https://www.twitch.tv/sam931107 로 놀러 와 주세요! (월, 화, 목 오후 10시에 정규 방송 시작합니다.)
소송
"소송" / 프란츠 카프카 저 (지극히 주관적인 제 생각을 쓴 글입니다.) 프란츠 카프카의 장편소설 소송. 웃기고 기괴하고 불편한 한 편의 블랙코미디를 보는 듯 한 소설이다. 90년 전 소설에서 이런 감상을 이끌어 낼 수 있다는 것이 놀라울 따름이다. 은행에 근무하는 직원 요제프 카는 어느 날 아침 갑자기 쳐들어온 사람들에 의해 체포당한다. 희한한 점은 분명히 체포되었지만 감시자가 몇 명 붙을 뿐 딱히 일상생활에 지장도 없고 어떤 죄목으로 체포당한 것인지도 전혀 알려주지 않는다는 것. 카는 이후 진행되는 심리에 출석해서 열심히 자신의 결백을 주장하지만 소송에 별 도움이 되지는 않는 듯 하다. 카는 소송을 위해 변호사를 찾아가지만 변호사도 뭔가 이상하다. 진행 상황에 대해서 물어보면 온갖 어려운 말들과 궤변들을 늘어놓을 뿐 위대한 변호사인 자신이 알아서 할 테니 맡기라는 식이다. 카는 미심쩍은 변호사와의 계약을 파기하고 스스로 돌파구를 찾아보려 하지만 법에 대해서, 법원에 대해서, 카의 소송에 대해서, 하다 못해 카가 어떤 죄목으로 체포되었는지에 대해서조차 제대로 아는 사람이 한 명도 없다. 예심판사, 카를 감시하는 법원의 감시인, 하급 법원의 직원들조차도 그저 자신이 맡은 조그마한 역할만 수행할 뿐 카의 소송에 대해서 정확히 알고 있는 사람은 존재하지 않는다. 거대한 권력을 가진 법 앞에서 카가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고 결국 1년간의 소송을 거쳐 카는 사형당한다. 이 소설을 보면서 가장 먼저 생각났던 건 우리나라의 행정처리였다. A가 알고 싶어서 B부서에 전화하면 B부서에서는 C부서에 연락하라고 말하고 C부서에서는 D부서에 연락하라고 말하고 D부서에서는 E부서에 연락하라고 말하고...... 많은 사람들이 이런 경험을 해 봤을 것이다. 딱 카의 상황과 같다. 카를 체포하는 사람도, 심리를 진행하는 사람도, 변호하는 사람도, 감시하는 사람도 그냥 주어진 역할만 수행할 뿐 카의 소송에 대해 알지도 못하고 관심도 없다. 오로지 자신에게 주어진 역할만 끝내면 된다는 듯이. 그렇게 법원이라는 거대 시스템 하에서 이리저리 휘둘리는 카의 모습을 보면 우리나라 공공기관의 불필요하고 형식적인, 이해와 납득이 불가능한 업무 처리 시스템이 생각난다. 예전에 비해 많이 개선된 부분들도 있지만 여전히 이 서류가 왜 필요한지, 왜 이걸 제출해야 하는지, 왜 산정 기준이 이렇고 지급 기준이 이런지 이해할 수 없는 경우가 수두룩하다. 그렇지만 국가, 정부라는 거대한 시스템은 이미 정해져 있고 아쉬운 것은 일반 시민들이기에 울며 겨자 먹기로 따르는 수밖에 없는 것이다. 개인이 나서서 시스템을 바꾸는 것보다는 시스템을 따르는 것이 편하고 현명하니까. 소설을 보다 보면 카의 행동이 점점 바뀌는 것을 볼 수 있다. 처음에는 죄가 없으니 무조건 풀려 나겠지, 잘 해결될 거야라며 낙관하다 가면 갈수록 소송에 매달리게 된다. 그 이유는 법원과 법이 가지고 있는 절대적인 권위 때문이다. 소설 속에서 법이란 절대적인 권위를 가진 것으로 나오며 그 존재에 대해 의구심을 가지는 사람은 없다. 이 법이 맞는 것인가, 잘못된 곳은 없는가에 대한 논의 자체가 없는 사회인 것이다. 게다가 어느 누구도 법이라는 것에 대해 정확히 알고 이해하는 사람이 없다. 그러한 상황에서 자신이 죄를 짓지 않았다는 이유만으로 무죄가 나올 것이라 낙관하는 게 가능할까? 잘 짜 맞추어진 톱니바퀴처럼 법과 관련된 모든 사람들이 자신의 역할을 하고 있긴 하지만 톱니바퀴가 모여 만들어진 기계 자체(법)에 대해서 이해하고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카의 유무죄에 대한 판결은 그 정체를 알 수 없는 기계에 달려 있는 것이다. 정체도 모르고 이해도 할 수 없는 존재(법)에 의해 삶과 죽음이 결정되는 상황에서 카는 어떻게든, 조금이나마 자신의 무죄를 주장하기 위해 무의미한 노력을 계속한다. 아무것도 하지 않을 수 없기에. 세계는 점점 시스템화 되어 가고 있다. 경제, 사회, 문화의 규모는 계속해서 커지고 시스템은 그에 맞춰 거대해지며 이제 모든 개인은 시스템의 부품으로써 작동한다. 예전에는 구두 장인 한 명이 하던 일을 수많은 단계로 분업화하여 일하게 된 것이다. 누군가는 하루 종일 구두 밑창만 붙이고 누군가는 하루 종일 구두끈만 끼운다. 이렇게 모든 개인이 철저히 시스템의 일부가 된 상황에서는 개인과 개인이 모여 편리함을 위해 만들었던 시스템이 오히려 개인을 억압하게 된다. 시간이 지나 낡은 시스템이 고장 났다면 개인이 아닌 시스템을 고쳐야 하지만 이미 너무 거대해져 버린 시스템을 고치기는 어렵기 때문에 개인에게 불편함을 감수하도록 만드는 것이다. 소송은 소설 속 주인공 카의 모습을 통해 한 개인(요제프 카)이 거대한 시스템(법)의 부조리(죄목조차 알려주지 않음, 법에 대한 의문 제기조차 불가능) 앞에서 어떻게 농락당하고 짓밟히는지 보여준다. 물론 극단적인 면이 없지 않지만 실제로 법과 복지의 사각지대에 놓여 고통받고 있는 사람들을 생각해보면 그리 먼 이야기도 아닌 듯하다. 90년 전에 쓰인 고전에서 현대의 시스템과 관료주의가 가진 문제점을 읽어낼 수 있다는 사실이 놀라울 뿐이다. 카프카가 가진 미래 사회에 대한 뛰어난 통찰력일 수도 있고, 2019년이 1925년의 문제를 그대로 답습하고 있다는 이야기일 수도 있다. 전자이길 희망하지만 후자가 맞을 것이다. 우리는 90년 전 소설가가 그린 곳과 그다지 멀지 않은 곳에서 살아가고 있다. 소설 속 한 문장 "법원은 당신에게서 아무것도 원치 않습니다. 당신이 오면 받아들이고, 당신이 가면 내버려둘 뿐입니다."
위대한 개츠비
'위대한 개츠비' / F. 스콧 피츠제럴드 저 (지극히 주관적인 저의 생각을 쓴 글입니다.) 읽어보지는 않았더라도 누구나 제목은 아는 소설이다. 위대한 개츠비. 그만큼 유명하고 많은 사람들에게 영향을 끼친 소설이며 개츠비적(Gatsbyesque)이라는 신조어까지 만들어낸 소설. 처음 이 소설을 읽어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던 건 무라카미 하루키의 노르웨이의 숲을 읽고 나서였다. 노르웨이의 숲 안에서 위대한 개츠비라는 책이 여러 번 언급되는데 시간이 꽤 지나서야 읽게 되었다. 대략적인 줄거리를 알고 있었고, 현대인이 읽기에는 조금 지루할 수도 있는 고전임에도 필자는 꽤 재밌게 읽었다. 그리고 왜 그렇게 대단한 소설로 불리는지에 대해서도 약간은 알 수 있었다. 이 소설은 처음부터 끝까지 닉 캐러웨이라는 인물의 시선에서 쓰였다. 닉은 소설의 등장인물이자 관찰자의 역할을 고루 수행하며 때로는 이야기의 밖에서, 때로는 안에서 이야기를 서술한다. 닉을 제외한 주요 등장인물은 개츠비, 데이지, 톰이다. 개츠비는 닉의 옆집인 엄청난 대저택에 사는 인물이다. 매일 본인의 저택에서 호화롭고 사치스러운 파티를 열어 사람들을 초대하지만 그 누구도 개츠비의 정체에 대해서는 제대로 아는 바가 없고 왜 이런 파티를 매일 여는지에 대해서도 알지 못한다. 톰과 데이지는 웨스트 에그(닉과 개츠비가 사는 곳) 맞은 편의 이스트 에그에 살고 있는 부부이다. 데이지는 닉의 친척이며 어릴 적부터 부유한 집안에서 살아온 여성이고 톰은 대학생 시절 유명한 미식축구 선수에 마찬가지로 부잣집 출신이다. 이렇게 세 인물에 닉까지 네 인물이 벌이는 이야기가 위대한 개츠비의 주 내용이다. 소설의 스토리는 간단하다. 개츠비는 5년 전 데이지와 서로 사랑했으나 가난했던 그는 결국 데이지와 이어지지 못하고 데이지는 부잣집 도련님에 유명한 미식축구 선수였던 톰과 결혼하게 된다. 그러나 데이지를 잊지 못했던 개츠비는 자신의 가난함이 데이지와의 사이에 걸림돌이었다고 생각해 5년간 온갖 불법적인 일들에 손을 대 엄청난 부를 쌓는다. 부자가 된 개츠비는 데이지가 살고 있는 이스트 에그와 만 하나를 사이에 두고 있는 웨스트 에그에 대저택을 지은 후 매일매일 호화로운 파티를 벌인다. 언젠가 데이지가 이 파티에 와서 자신을 보게 되기를 바라며. 그러던 차 옆집에 살던 닉이 데이지와 친척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고 닉을 통해 데이지를 만나 다시 한번 사랑을 확인한다. 하지만 데이지는 결국 톰과 개츠비 사이에서 갈팡질팡하다가 톰을 선택한다. 그리고 개츠비는 데이지의 죄를 뒤집어쓴 채 죽음을 맞이하고 데이지와 톰은 죽은 개츠비를 뒤로 하고 도망친다. 가장 먼저 느낀 건 개츠비의 순수함이었다. 5년 전의 사랑을 잊지 못하고 그녀와 어울리는 사람이 되기 위해 엄청난 노력으로 부를 쌓았지만 데이지의 앞에 직접 나타나지도 못하고 그저 계속해서 호화로운 파티를 여는 개츠비. 한 번이나마 데이지가 자신의 저택에서 뿜어지는 화려한 불빛들을 봐주기를 바라며 파티를 열던 개츠비에게 5년 동안 모든 것을 바쳐 사랑했던 여자는 점점 커져갔다. 닿을 수 없는 꽃처럼. 그러나 다시 만난 그녀는 상류층의 지위와 위치를 버릴 수 없는 여성이었고 하류층인 데다 불법으로 돈을 쌓아 올린 개츠비를 결국에는 저버린다. 그런 그녀의 죄를 뒤집어쓰고 죽게 된 개츠비. 너무나 순수하고 열정적인, 그래서 언제든지 쌓아 올린 부를 데이지를 위해 던져 버릴 수 있는 그이기에 스콧 피츠제럴드는 위대한을 개츠비의 앞에 붙이지 않았나 생각한다. 이 소설은 1920년대 미국의 모습을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감당할 수 없는 경제 호황과 그로 인한 호화롭고 사치스러운 생활이 이어지는 나날들. 물질주의가 넘쳐흐르고 그에 다른 모든 것들이 잠겨버린 사회. 그 당시의 미국 사회를 그대로 대변하는 인물이 톰과 데이지이고 작가가 제시한, 우리가 지켜야 할 것들을 보여주는 인물이 개츠비가 아닌가 생각한다. 톰은 극단적인 인종차별주의자이며 데이지를 두고 다른 여인과 외도를 하고 있고 마지막에는 결국 개츠비가 죽도록 만든다. 부잣집 도련님에 상류층의 인물이지만 부도덕하고 추잡한 인간성을 가진 인물이다. 데이지 또한 남편의 외도를 알고 있고 그를 경멸하지만 결국 상류층의 지위를 버릴 수 없기에 개츠비를 저버리고 톰을 선택한다. 심지어 자신의 잘못까지 개츠비에게 떠넘겨 버린다. 그러나 개츠비는 그들과 달랐다. 톰과 데이지가 추구하던 돈, 물질, 육체적인 쾌락, 상류층의 지위와 권력보다 중요한 것이 그에게는 있었다. 5년 전에 자신이 느꼈던 데이지에 대한 사랑, 그것을 위해 개츠비는 모든 것을 바친 것이다.  그 당시의 미국 사회는 전체가 물질주의에 찌들어 있었기에 오히려 톰과 데이지가 일반적인 보통 사람이라고 볼 수 있다. 물질과 쾌락이 모든 것에 앞서는 시대이니 말이다. 한 개인이 사회의 흐름을 거스르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하지만 그 흐름을 거슬러 자신만의 가치를 발견한 개츠비이기에 위대한 개츠비인 것이다. 이 소설 속의 개츠비는 당시 사람들에게 지금 미국 사회가 얼마나 잘못되어 있는지, 지금 사회가 잃어버린 것이 무엇인지 깨닫게 만드는 경종이 되었을 것이고 그 점이 바로 이 소설을 위대한 고전의 반열에 올려놓지 않았나 생각한다. 100년이 지났음에도 재미있는 소설이다. 어떻게 보면 연애소설로 볼 수도 있기에 접근하기도 좋고 현대인에게도 통하는 부분이 있다. 고전을 읽고 싶어 하는 사람들에게 추천할 만한 소설이다. 다 읽어갈 때쯤 어느새 개츠비에게 이입해 있는 자신을 볼 수 있을 것이다. 소설 속 한 문장 : 개츠비는 여전히 두 손을 호주머니에 찌른 채 억지로 아주 편안한 척하며, 심지어는 좀 따분하다는 듯 벽난로 장식에 몸을 기대고 있었다. (리뷰를 원하시는 책을 댓글에 적어주시면 직접 읽고 리뷰해보도록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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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동을 시작한 지 한 달이 되었는데, 왜 여전히 아침에 일어나는 게 힘든지 모르겠다. 일찍 잠자리에 들어도 그러하다. 근육은 조금 붙어가는 것 같고, 다이어트의 속도는 느리다. 그래도 괜찮다. 나는 내게 보채지 않는다. 한 달 전 운동을 시작하면서 자연스레 라면을 안 먹게 되었는데, 먹지 않으려고 작정을 했던 것도 아니고 어쩌다 보니 그렇게 되었는데, 오늘은 문득 라면이 무척 먹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본가에서 가져온 김치를 먹으려면 라면이 필요한데 아무래도 며칠 내로 나는 라면에 한번 무너질 것 같다. 밀가루를 끊어보고 싶다는 생각을 아주 잠시 해본 적도 있지만, 그것은 적어도 지금의 나로서는 절대 지킬 수 없는 계획일 테고, 또 그전에 지금 밀가루를 끊는 것이 과연 정말 내 삶을 이롭게만 할 것인가,라는 생각도 해본다. 주변의 지인 중 최근 비건이 되어 실천하고 있는 이가 있는데, 외식을 하려면 아주 협소한 메뉴 선택지만 주어져서 다소 힘들다고 했다. 그러나 비건을 위한 환경들이 조금씩 생겨나고 있는 것 같기는 하다. 채식이 단순히 개인의 건강을 위한 것만이 아니라, 환경을 비롯해 여러 문제로까지 엮여있다는 것으로 볼 때 언젠가는 나도 채식을 진지하게 검토하고, 실행해야 할 날이 올 것 같다. 화요일이 지나가고 있다. 어서 빨리 수요일도 지나가기를. 인생이 흘러가는 것이 아깝다고 생각하면서도 평일의 더딘 속도는 못 견디는 이 아이러니한 어리석음. 인생에 주어진 주말만을 모두 떼어 모아다가 전부 소진해버린 뒤 평일만 남은 인생을 사는 사람을 생각해 본다. 그것은 지옥일 것 같으면서도, 또 의외로 평일 속에서 주말 같은 즐거움을 찾아내려는 노력이, 인생을 알찬 것으로 만드는 기회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과연? 내일은 인생에서의 주말을 모두 소진해버린 사람처럼 수요일을 보내야겠다.
드럼통 귀신 1
안녕하세요! optimic입니다! -------------------------- 오늘은 간만에 군대 실화로 가져와 봤습니다! 그냥 소소하고 잔잔한 이야기라 별로 무섭지는 않을 거에요! 재밌게 읽어 주세요! 항상 제 글은 실화를 바탕으로 많은 각색과 양념이 들어갔다는 점! 알아주세요! -------------------------- 지난 번부터 쭉 내 글을 봐 오셨던 분들은 아시겠지만, 나는 화천의 모 부대에서 군 생활을 보냈다. 국내 유일 경례 구호가 세 글자인 그 곳. 살면서 '이기자' 라는 말을 가장 많이 했던 그 곳... 그 부대 중에서도, 우리 부대는 구석에 덩그러니 대대 하나만 있는, 어찌 보면 독립되어 하나의 단체를 이루고 있는 대대였다. 우리 대대 안에는 이름 모를 무덤이 하나 있었다. 누가 와서 벌초를 해 주지도 않고, 흔한 비석도 하나 없는. 대대 구석에 덩그러니 놓여있는 무덤이었기에, 대대에서 진지공사 및 제초작업을 할 때 병사들이나 간부들이 가서 벌초를 해주곤 하는 무덤이었다. 궁금증이 도진 우리는 간부들이나 누군가에게 이 무덤의 주인이나 사연에 대해 물어보곤 했는데. -아 저 무덤? 주인 있어. 예전에 우리 대대가 만들어질 때 사유지였는데, 거기서 미처 이장을 못 해서 남아있는 거야. 가족들도 와서 성묘도 하고 그래. 라고 대수롭지 않게 이야기하곤 했지만, 우리는 그게 거짓말임을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다. 왜냐면 군생활 내내 밤낮으로 위병소에서 근무를 서는 동안, 명절에도 단 한 번도 가족들이 성묘를 온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우리 동기들 사이에서는 저 무덤을 두고 의견이 분분했다. - 훈련받다가 죽은 병사 혹은 간부 아닐까? - 븅신아. 가족들이 다 수습해 가겠지. - 아니, 고아였을 수도 있잖아. - 고아여도 군대에서 죽으면 현충원 간다던데? 국가 유공자. - 아 그래? 아 그럼 뭐지 진짜? - 혹시 막 누가 살인하고 몰래 묻은 거 아냐? - 에이. 군대에서 누가 살인을 해. 해도 걸렸겠지. 븅신이냐? - 말이 심하네... 실없는 소리와 함께 그 무덤은 우리에게서 잊혀져갔고, 대대 내에서 하는 훈련 집중 주가 다가왔다. 화기를 다루던 우리 중대는 대대 안에서 훈련을 하게 됐고, 다른 중대원들은 전부 대대 주변 산으로 훈련을 나갔다. 늘 그렇듯, 우리는 커다란 박격포를 짊어지고 대대 구석으로 향했고, 지정된 위치에 포를 설치했다. 어느 정도 다른 대대원들이 저 멀리 산으로 사라지고, 커다란 대대에 우리밖에 남지 않았다. 어느정도 날이 추워지고 스산한 바람소리와 풀벌레 소리들만이 우리를 감싸고 있었을 무렵. -퉁....둥...둥...- 어디선가 이상한 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무언가에 부딪히는 소리 같기도 하고, 뭔가 북 같은 걸 치는 소리 같기도 했다. -뭔 소리야? -어떤 소리 말씀이십니까? 내 옆에 있던 준서가 내게 물었다. -방금 뭔 소리 안들렸냐? -못 들었습니다. -개 단호하네. 너무한 거 아니냐? -강병장님이 말씀하시면 무서워서 그냥 안듣고 싶습니다. -아냐. 들어. 안 들을 거면 포 청소 다 니가 해. -.... 그렇게 시덥잖은 농담을 주고받던 그 때. -퉁.... 둥... 둥...-- -야. 들었지. 이번엔 진짜 확실히 들었지. -드...들었습니다... 근데 이거 그냥 뭐 부딪히는 소리 아님까? -약간 드럼통 같은 거에 뭐가 부딪히는 소리 같기도 하다... 무섭다기보단 뭔가 흥미거리였다. 졸음과 추위를 견디며 무작정 앉아서 대기만 해야하는 우리에게, 불규칙적으로 울리는 그 소리는 온갖 상상을 하게 해 주었고, 우리는 결국 산짐승일 것이라는 결론에 도달한 채 훈련을 마치고 돌아왔다. 그리고 돌아온 직후 우리가 훈련을 했던 그 장소 옆에 무덤이 있었다는 사실을 기억해냈지만, 우린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다. 얼마 후. 당직을 서고 있던 내게 탄약고 근무자들이 근무를 마치고 돌아왔다. - 아이고 고생하십니다. - 아이고 이 새벽까지 고생 많으십니다. - 특이사항이나 보고할 건? - 아, 강뱀. 자꾸 이상한 소리가 납니다. - 뭔 소리가 나? - 막 자꾸 퉁퉁퉁 하는 소리가 납니다. 뭔가를 막 두드리는 소리 같기도 한데... - ...드럼통? - 맞다! 딱 그겁니다. 드럼통 두드리는 소리.. - 진짜 어디 덫에 걸린 동물이라도 있나?? - 아님 막 간첩들이 지들끼리 신호라도 보내는 거 아님까? - 말년에 간첩이라고...? 그 날 새벽, 위병소 근무를 마치고 온 후임들마저 퉁퉁거리는 소리를 들었다고 내게 보고했고, 퉁-퉁-거리는 소리를 내는, 일명 '드럼통 귀신' 은 온 중대에 퍼져나갔고, 며칠 뒤, 당직 준비를 하고 있는 내게 퇴근 준비를 한 중대장이 다가왔다. - 너 오늘 새벽에 탄약고, 위병소 쭉 한바퀴 돌고 와라. - 잘모싼?(잘못들었습니다의 병장 버전) - 드럼통 귀신인지 지랄인지, 뭔 군인들이 통통거리는 소리를 듣고 벌벌 떨어. 니가 가서 싹 확인하고, 원인이 뭔지 알아 와. - 아....알게씀다... 그렇게 중대장은 내게 똥을 투척하고 퇴근을 했고, 그렇게 새벽이 다가왔다. 나는 한껏 무거워진 몸을 억지로 일으키며 밖으로 나왔다. 새벽 두시가 넘은 시간에 초겨울 산길을 순찰한다는 건 썩 즐거운 일은 아니였다. 그렇게 손전등 하나를 손에 쥔 채, 칠흑같은 어둠을 겨우 걷어내며 탄약고로 가는 오솔길을 걸어 올라가기 시작했다. - 퉁--- 아주 작게 또 누군가가 드럼통 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순간 등골이 오싹했지만, 애써 아닐거라 생각하면서 서서히 올라갔다. - 퉁---퉁---퉁 조금 더 커진 소리가 내 귀를 울렸다. 슬슬 무서워지기 시작했다. 온 중대가 들은 이 소리는 대체 무엇일까. 정말 간첩인가, 아니면 동물일까... 여러 가지 생각들로 뒤엉킨 머리를 들고 나는 앞으로 발을 움직였다. --------------------------------- 분량조절 실패로 2화로 이어집니다!
<책, 이게 뭐라고> 장강명
<책, 이게 뭐라고> / 장강명 저 (지극히 주관적인 제 생각을 쓴 글입니다.) 책, 이게 뭐라고 팟캐스트를 열심히 들었던 사람으로서 이 책을 안 읽을 수는 없었다. 뭔가 필수코스 같은 느낌이랄까. 한 챕터씩 읽어나갈 때마다 들었던 팟캐스트들이 떠올랐다. 유튜브로 바뀌어버린 지금의 책, 이게 뭐라고 가 아쉬울 뿐이다. 책, 이게 뭐라고는 귀에 이어폰을 꽂고 진득하니 1시간가량 들어줘야 제맛인데 말이다. 이 에세이에는 장강명 작가님이 책, 이게 뭐라고 팟캐스트를 진행하며 고민했던 생각들이 담겨있다. 짧은 에피소드? 챕터? 들로 구성되어 있는데 각 에피소드의 제목들이 전부 좋았다. 가장 좋았던 제목은 "단 한 사람의 독자와 죽음을 기다리는 병든 짐승"이었다. 모든 제목들이 이처럼 연관성을 생각하기 힘든 두 문장의 연결로 이루어져 있다. 두 문장의 연관성을 전혀 생각지 못한 방향에서 찾아내는 장강명 작가님의 시각이 돋보이게 만드는 좋은 제목들이었다.(한 에피소드씩 읽어나갈 때마다 이번 제목이 의미하는 건 뭘까 하는 궁금증이 치솟는 바람에 자기 전에 읽을 때는 일부러 다음 에피소드 제목을 읽지 않고 책을 덮었다. 제목을 보면 그 챕터를 안 읽고는 잘 수가 없기 때문이다. 참고로 위에서 말한 "단 한 사람의 독자와 죽음을 기다리는 병든 짐승"의 연관성이 궁금하시다면...... <책, 이게 뭐라고>를 읽어보시길 바란다.) <책, 이게 뭐라고>에서 지속적으로 나오는 세계관이 있다. 말하고 듣는 세계와 읽고 쓰는 세계다.(마블 유니버스나 하하 유니버스 같은 세계관과는 결이 조금 다르다.) 말하고 듣는 세계는 일시적이고 짧으며 읽고 쓰는 세계는 지속적이고 길다. 장강명 작가님은 이 두 세계가 적절히 공존할 수 있기를 바라지만 세계는 점점 말하고 듣는 세계로 가고 있다. 읽고 쓰는 세계는 점점 말하고 듣는 세계에 자리를 내주는 중이다. 말하고 듣는 세계를 대표하는 유튜브만 봐도 그렇다. 유튜브는 점점 더 커지고 있고 심지어 이제는 모든 검색을 유튜브에서 하는 시대가 되었다. 유튜브 영상은 점점 더 짧아지고 일시적이 되어 간다. 10분 이상의 동영상에만 달리던 광고는 이제 8분만 넘어도 달 수 있게 되었다. 유튜브에서 길고 진지하게 한 사건의 처음부터 끝을 전부 다루는 영상은 인기가 없다. 사건의 핵심, 예를 들면 어딘가의 모 중학교에서 집단 왕따로 인한 자살이 일어났다는 사실을 1분 내외로 짧게 말해주는 영상의 인기가 훨씬 높다. 거기에는 피해자가 어떤 사람이었는지, 이 안타까운 일이 정확히 어떻게 진행되어 왔는지, 그 대처법과 해결방안은 제대로 모색되고 진행되었는지, 가해자들에 대한 처벌은 어떻게 되었는지에 대한 내용은 들어 있지 않다. 단지 집단 왕따로 피해자가 자살했다는 거짓은 아닌 정보만 들어있을 뿐이다. 이 안타까운 사건에는 수많은 이야기가 얽혀 있을 테지만 유튜브를 보는 사람들에게 그러한 이야기는 전해지지 않고 댓글창은 전쟁터가 된다. 그러나 읽고 쓰는 세계에서는 다르다. 앞에서 말한 가상의 왕따 사건에 대한 르포가 나온다면 거기에는 온갖 것들이 담겨있을 것이다. 거의 모든 관련 인물들의 인터뷰와 사건의 진행 경위, 다양한 시각의 전문가들의 사건에 대한 의견, 이외에 다른 왕따 사건들에 대한 예시와 여러 다양한 주장으로부터 비롯한 해결방안들까지. 이 르포를 읽는 것이 왕따 사건에 대해 훨씬 제대로 이해하고 생각해볼 수 있는 방법이란 사실은 자명하다. 그러나 이 르포가 나올 때쯤 사람들은 이미 다른 일에 열을 올리고 있을 것이다. 르포가 아무리 빨리 나오더라도 적어도 사건의 시작으로부터 몇 년은 걸릴 테니 말이다. 이렇게 읽고 쓰는 세계는 말하고 듣는 세계와의 경쟁에서 패하고 만다. 읽고 쓰는 세계가 더 우월하다는 얘기가 아니다. 말하고 듣는 세계와 읽고 쓰는 세계는 양쪽이 모두 중요하다. 말하고 듣는 세계에서는 즉각적이고 빠르게 정보를 얻을 수 있고 읽고 쓰는 세계에서는 깊이 있는 생각과 일관되고 설득력 있는 논리 체계를 마주할 수 있다. 문제는 세계가 점점 한쪽으로 쏠리고 있다는 사실이다. 빠르게 세상의 정보를 얻는 것도 중요하지만 얻은 정보에 대해 생각하고 고민해보는 것도 중요하다. 그러나 말하고 듣는 세계가 읽고 쓰는 세계를 완전히 장악하는 순간, 세상은 스쳐 지나가는 온갖 정보에 대해 생각하고 고민하기를 포기하고 말 것이다. 읽고 쓰는 세계를 좋아한다. 물론, 말하고 듣는 세계도 좋아한다. 둘 다 사라지지 않았으면 좋겠다. 유튜브만 보면 생각하지 않게 될 것이고 책만 읽으면 세상의 변화에 뒤쳐진 외골수가 될 것이다. 나는 책도 읽고 유튜브도 보고 싶다. 그러니 지금은 약해진 읽고 쓰는 세계에 조금 더 애정을 기울여야겠다. 어느 한쪽이 없어지지 않도록. 책 속 한 문장 그런 동영상들을 보면 털이 다 빠져 맨 가죽과 그 아래 앙상한 뼈를 드러낸 채 쓰러져 죽음을 기다리는 병든 짐승의 모습이 떠오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