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50. 나는 그의 세컨드였다.
‘양수정.’ 그에게서 들었던 ‘수정’이란 이름이었다. 저번에 팔을 다쳐 병원에 잠깐 입원했을 때도 기태가 누군가와 통화를 하며 ‘수정’이란 이름을 내뱉었다. 그리고 수정이란, 그 여자 역시 자신의 앞에서 눈물을 보일 때, 남자친구와 헤어질 뻔 하였다고, 그런데 헤어지지 않고 잘 풀었단 그 얘기를 한 적 있었다.
모든 것이 그제야 제자리를 찾아 맞춰지는 느낌이었다. 무엇인가 정리되지 못한 그 느낌, 흩어져 있는 것만 같았던, 마치 퍼즐 조각 같은 것들이 이제야 하나 둘, 자리를 찾은 듯했다.
“오호라…왜 울어, 갑자기.”
도헌은 화들짝 놀라며 자리에서 일어나 로라의 어깨를 감쌌다. 로라는 애써 울음을 참으려 입술을 꾹 깨문 채 괴로운 듯 이마를 짚었다.
“내가…내가 잘 못 한 것 같아…”
자신이 잘 못한 것 같다며 터져 나오는 울음을 애써 꾹꾹 참으며 괴로워하는 로라였다. 도헌은 갑자기 왜 이러는 것인 지, 어리둥절한 채로 로라의 어깨를 감싸다, 이내 자신이 쭈그리고 앉아 고개를 푹 숙이고 있는 로라와 눈을 맞추었다.
“누나…무슨 일인데, 말해 봐.”
“구도…발.”
로라는 눈물을 줄줄 흘리며 힘겹게 고개를 들어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도헌을 바라보았다.
“니 말대로…”
“…어?”
“차 선생님….”
“……?”
“여자 친구가…있었나 봐.”
* * *
“일단 물어 봐, 누나.”
여전히 진정하지 못한 채, 몸을 파르르 떨며 제대로 걷지도 못하는 로라를 부축한 채 도헌은 힘겹게 그 말을 내뱉었다.
집 근처, 벤치에 나란히 앉은 둘. 로라는 여전히 갈피를 잡지 못한 채, 하염없이 눈물만 흘리며 땅바닥을 쳐다보았다. 도헌은 그런 로라가 안쓰러워 한숨만 푹, 푹 내쉬었다.
“뭐라고…뭘…어떻게 물어봐야…하는데.”
“당장 정리할 수 있어? 여자 친구가 있는 것 같단, 그 누나의 추측 하나로.”
“…….”
“그렇게 좋아하는 벤츠남을 다 정리하고 빠이빠이, 할 수 있느냐고.”
현실적인 도헌의 말에, 로라는 다시 한 번 가슴이 콱, 막히는 듯했다.
“그 여자의 연애중이란, 그 세 글자에 그 남자의 모든 걸 정리할 수 있느냐고.”
“…….”
“대답해 봐.”
도헌의 물음에…, 로라는, 어떠한 대답도 할 수가 없었다. 마음이 너무 아파왔다. 가슴이…찢기는 듯한 격한 고통이 밀려왔다. 로라는 다시금 얼굴을 감싸고 엉엉, 목 놓아 울어버렸다.
“뭘…어떻게 하라는…거야, 대체…흐윽…나더러…나더러 어쩌란 거야…”
“어쩌라는 게 아니라!”
“…흐윽”
“바보 같이 울기만 하지 말고! 당장 그 자식한테 전화를 걸어서! 물어보라고.”
“…뭐라고 물어봐! 그러니까! 내가 세컨드냐고?! 여자 친구 있었느냐고?! 그렇게 내가! 우스웠느냐고?!”
“오호라…”
“그동안 내가! 얼마나! 바보 같았냐고?! 그만큼 내가! 만만했냐고?!”
그렇게 소리치며 로라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러곤 줄줄 흐르는 눈물을 손등으로 벅벅 닦아내며 휘적휘적 앞서 걸었다.
“누나!”
“따라 오지 마.”
“…어디 가는데요!”
“따라 오지 말라고!”
애꿎은 도헌에게 그렇게 화를 내고서 로라는 휘적휘적 정처 없이 앞서 걸어 나갔다. 도헌은 한숨을 푹 내쉬며 정신도 없이 두고 간 로라의 가방을 챙겨 들곤 터덜터덜 로라의 뒤를 따라 걸었다. 로라는 자신의 뒤를 도헌이 따르는 지도 모른 체, 연신 손등으로 눈물만 벅벅 닦아내며 하염없이 걸었다.
“하…내가 이럴 줄 알고…그렇게 말렸던 건데…하…진짜.”
도헌은 한숨만 푹, 푹, 내쉬며 로라의 뒤를 말없이 따르기만 했다. 대체 어딜 가는 거야, 도헌은 비틀거리며 걷기만 하는 로라의 뒷모습을 바라보다, 이내 이건 아니다 싶어 휘적휘적, 앞서 걸어가는 로라를 잡아 세웠다.
“오호라.”
“…헤어져야하는 게 맞잖아.”
“…네?”
“이제 난…선생님하고 헤어져야 하는 게…맞잖아.”
“…누나.”
“그런데 진짜…나도…이런 내가 싫은데…”
“…….”
“이 마음이…왜…그런 나쁜 새끼인 걸…알면서도…알아버렸으면서도…”
“……”
“말처럼 쉽게…돌아서질 않는 거냐. 어떡하냐, 나.”
로라는 눈물로 화장이 번진 얼굴로, 도헌을 올려다보았다. 도헌은 그런 로라를 말없이 바라보다 이내 자신도 모르게 와락, 로라를 끌어안고 말았다.
“오호라…그만 울어라.”
“흐윽…그래야…하잖아…흐윽…끝내야 하잖아…”
“…….”
“근데…왜…나는…아프기만 해…? 헤어지잔 말이…왜 억장이 무너져서 나오질 않냐?”
로라의 말에 도헌은 한숨을 푹 내쉬며 신경질 난다는 듯, 두 눈을 질끈 감아 버렸다.
“누나 아닐 수도 있잖아. 연애 중, 차마 헤어지고도 못 내린 걸 수도 있잖아.”
“…….”
“누나 말대로 그 프로필 사진도, 벤츠남이랑 둘이 얼굴 보이게 찍은 것도 아니니, 옛 연인일 수도 있고…미처 여자 쪽에서 정리하지 못한 걸 수도 있잖아.”
“…용기가 나질 않아.”
“…뭐?”
“물어 볼…용기가…이젠 나지가 않아…”
“…….”
“어차피…답은 정해져 있잖아.”
도헌은 로라를 품에서 놓아주며 걱정스런 얼굴로 로라를 내려다보았다. 로라는 여전히 아픈 얼굴로 눈물만 흘리고 있었다.
“여자 친구가 설령 있다고 해도…내게…있다고 얘기를 할 사람일까?”
“…….”
“있는 걸 숨기고 날 만난 사람인데…이제야 내가 알아챘다고 해서 이실직고 할까?”
“…….”
“이실직고 한다고 한들, 뾰족한 수는 뭐야? 결국 헤어짐이잖아?”
“…….”
“내가 그 남자의 세컨드로…남을 것도 아닌데.”
“…….”
“그럼…전 여자 친구라고 해도…내 마음이 편할까?”
“…….”
“여자 쪽에서 미처 정리 되지 못한 것이라고 해도…내 마음이…이 모든 걸 납득할 수가 있을까?”
“…누나.”
“결국 헤어짐이잖아. 결국…그것뿐이잖아.”
“…….”
“결국 그것뿐인데…내 마음이…그 결국을.”
“…….”
“못 받아들인다잖아!”
로라는 한숨을 내쉬며 그대로 주저앉고 말았다. 믿었던 사람, 내가 진심으로 좋아했던 사람, 나를 진심으로 좋아해 주었던 사람. 모든 것은 부질없었다. 부질없다는 것을 로라는 애초에 알고 있었다. 다른 사람들은 다 아니라고 해도 이 남자만은 다를 것이다, 내가 바꿀 수 있을 것이다, 그 미련함에 배신을 당하고도 로라는 또다시 믿어 버린 것이었다.
“누나.”
자신을 두고도 양다리를 걸쳤던 자신의 구 남친, 이현우 역시 그녀에게 그렇게 큰 배신과 아픔을 주었지만, 이번은 달랐다. 그땐 이현우가 바람피우는 것을 알아챘을 땐, 니가 감히?, 황당함과 당황함이 먼저였고 어떻게든 그 뻔뻔한 낯짝을 면전에 두고 욕이라도 한 바가지 퍼부어 주어야 겠다, 벼르고 벼리었지만. 이번은 달랐다. 이번은…그냥 너무도.
“너무…너무 아프다…도헌아….”
“…….”
“내가…그 사람의…세컨드…였다는 게…믿었던 그 사람의…세컨드 였다는 게…”
“씁. 그런 말 하지 마. …입에 담지도 마요.”
“…구도헌.”
“누나 잘 못 아니야. 당연히 그 개자식 잘 못 이지. 누가 세컨드래.”
“…….”
“누가 누구 세컨드야. 그런 더러운 단어 입에 담지 마. 그런…생각…하지도 마요.”
도헌은 로라를 다시금 따스하게 안아 주었다.
* * *
“오빠 배고프지? 어디 들러서 저녁이라도 먹고 들어갈까?”
“피곤하다. 바로 어머님 별장으로 가자.”
기태는 넥타이를 느슨하게 풀곤 눈을 감았다. 운전을 하며 슬쩍 기태의 표정을 살피던 수정은 한숨을 내쉬며 라디오의 볼륨을 높였다.
기태는 온통 로라의 생각뿐이었다. 낮에 잠깐 보았을 때, 표정이 좋지 않았는데 무슨 일이라도 있는 것일까. 아직까지 전화도, 문자도 한 통 없는 그녀가 걱정이 되기 시작했다. 기태는 눈을 떠, 휴대폰을 꺼내 보았다. 여전히 그녀에게선 연락 한 통 없었다.
“하…”
“뭐 기다리는 연락이라도 있는 거야?”
“알 거 없잖아.”
기태는 신경질적으로 그렇게 말을 내뱉으며 대체 왜 연락이 한 통 없는 것인 지, 무엇 때문에 이러는 것인 지, 평소와 같지 않는 로라의 행동에 걱정과 답답함이 밀려왔다. 기태는 창문을 열어젖히며 담배 한 개비를 꺼내 물었다.
“오빠, 옛날엔 내 앞에서 담배 꺼내지도 않더니…요샌 아무렇지 않게 핀다?”
수정의 말에 대꾸도 않은 채, 기태는 담배에 불을 붙였다. 마음이 심란했다. 자신이 먼저 문자라도 보내볼까, 메시지 창만 수십 번도 더 열었다, 닫았다 반복한 그였다. 그런 낯선 기태의 모습에 수정은 모든 걸 다 알면서도 입술만 꾹 깨문 채, 아는 체 하지 않았다.
그에게 여자 생겼다는 것을, 그리고 그 여자가 누구인지는 모르겠지만 기태는 지금 그 여자에게 단단히 빠져 있다는 것을. 지금껏 기태에게서 보지 못했던 모습을, 이 여자는 아무렇지 않게 보이게 하고 있다는 것을.
- 띵동.
그때, 잠잠하던 기태의 휴대폰에 메시지가 한 통 도착하고 동시에 기태와 수정의 시선은 휴대폰으로 향했다.
- 선생님, 통화 가능 할까요?
로라였다. 통화 가능하냔, 로라의 물음에 기태의 심장은 철렁 내려앉았다. 동시에 눈두덩 이처럼 불어나던 걱정이 사르륵, 녹고 말았다. 그런 자신의 모습에 기태는 피식, 헛웃음이 터져 나왔다.
“요 앞 휴게소에 잠시 들리자.”
* * *
곧, 기태에게서 전화가 걸려왔다. 로라는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 문자를 보낸 지, 채 10분도 지나지 않았는데. 울리는 로라의 휴대폰 벨소리에 덩달아 도헌의 심장도 철렁 내려앉았다.
“뭐라고…하려구요.”
오히려 로라보다 더 사색이 된 얼굴로 도헌은 로라의 팔을 쥐었다. 로라는 무슨 생각을 하는 지, 굳은 얼굴로 말없이 휴대폰만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러더니 이내 결심이라도 한 듯, 입술을 한 번 꾹, 깨물곤.
“선생님.”
도헌은 어쩐지 힘들어 보이는 로라를 바라보고 있기 힘들어 슬그머니 자리에서 일어났다.
“네, 로라씨. 무슨 일 있어요?”
한없이 다정한 사람. 어제와 다를 것 없이, 자상한 사람.
로라는 두 눈을 질끈 감아버렸다.
“저…술 마신 것도 아니구요.”
“네?”
“맨 정신인데요…제가 원래 뭐 하나든, 마음에 못 담아 두고 있어서요. 담아두고 지내지를 못하는 성격이라 서요. 꼭…물어보고 싶은 게 있거든요.”
“네? 저한테요?”
조금은 울음 때문에, 떨리는 로라의 목소리. 도헌은 심란한 마음에 멀찌감치 떨어져서 담배를 한 개비 입에 물었다.
“선생님.”
“네, 말씀하세요, 로라씨.”
“…혹시.”
“…….”
“여자 친구…있으세요?”
결국, 묻고 말았다. 떨리는 목소리로 힘겹게 그 말을 내뱉고 나자, 로라는…이내 후회가 밀려 왔다.
“네…? 그게 무슨.”
황당하다는 듯, 그게 무슨, 하고 답하는 기태의 목소리도 조금은 떨렸다. 괜한 질문을 한 것인가. 무슨 대답을 들으려고…결국 이 질문을 하고 만 것일까. 마치 열어서는 안 될 판도라의 상자를 열어버린 듯, 로라의 심장은 바짝바짝 타들어 갔다.
“질문 그대로예요. 선생님…여자 친구…있어요?”
“하하하하.”
로라의 질문에, 기태는 그만 호탕하게 웃고 말았다. 로라는 여전히 굳은 표정으로 파르르 떨리는 오른 손을 꾹, 주먹 쥐었다.
“아, 웃어서 미안해요.”
“…….”
“너무 진지한 것 같아서요, 로라씨가.”
“…….”
“있죠, 당연히.”
있죠, 당연히. 란 그의 대답에 로라의 심장은 땅 끝까지 떨어지고 말았다. 정신이 아득해졌다. 멀리서 도헌이 걱정스런 얼굴로 로라를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었다.
“네?”
“있죠. 무슨 질문이 그래요.”
“…선생님.”
“로라씨가 제 여자 친구잖아요.”
“…….”
“무슨 일 있었어요? 목소리가 너무 안 좋다.”
결국…결국 이거 구나. 로라는 피식, 허탈한 웃음이 터져 나오고 말았다. 그러곤 이내 정신이 나간 사람처럼 고개를 끄덕끄덕, 거리다 고개를 푹 숙이고 말았다.
“제가…선생님 여자…친구라구요.”
“네?”
“그것 말곤…정말…없어요?”
“어디서…무슨 소리라도 들은 거예요? 왜 그래요, 갑자기.”
기태의 표정은 그제야 굳고 말았다. 혹시 로라가 수정과 자신의 관계를 눈치 채기라도 한 것은 아닐까, 자신도 모르게 주먹에 힘이 들어갔다. 저 멀리 수정이 커피를 사들고 이쪽으로 걸어 오고 있었다. 기태는 반대편으로 몸을 돌려 버렸다.
“아뇨. 무슨 소리를…들을 게 어디 있어요. 그냥요.”
“네?”
“선생님하고…만나기 시작했을 때부터.”
“…….”
“아니, 그 전부터.”
“…네.”
“선생님께 여자 친구가 있느냐고, 한 번도 제대로 물어 본 적도.”
“…….”
“그리고 대답도 제대로 들어 본 적도 없는 것 같아서요.”
“이제 와서…그 질문을…하기엔 좀…늦은 감…있지 않을까요?”
기태는 입술을 꾹 깨문 채 로라에게 물었다. 전화기 너머의 로라의 목소리는 조금 떨리고 있었고, 선뜻 자신의 질문에 대답을 내뱉지 못하는 것이 못내 마음에 걸렸다. 무슨…일이라도 정말 있는 것일까.
“네. 그렇죠.”
“…….”
“조금이 아니라…많이 늦었죠.”
“…….”
“그래도 이제라도 그 대답이 듣고 싶어서요.”
“갑자…기…말입니까?”
기태는 자신도 모르게 목소리가 굳어지고 말았다. 어느덧 수정은 기태의 뒤에 와 서 있었다.
“솔직하게 말해 주세요, 선생님.”
“…네.”
“정말…그게 다예요?”
정말 그게 다냐는, 로라의 질문에 기태는 한숨을 내쉬며 자신의 뒤에 서 있는 수정을 한 번 바라보았다.
“네. 그게 다입니다. 없습니다.”
수정은 아무것도 모른 체 사들고 온 커피를 기태에게 내밀며 싱긋, 웃어 보였다.
“그럼 선생님…마지막으로 하나만 더…물어볼게요.”
로라는 입술을 꾹 깨문 채, 자신의 왼쪽 뺨을 타고 흐르는 눈물을 손등으로 문질렀다. 그의 뻔뻔한 대답에, 이제 로라는 눈물조차 흐르지 않는 듯 했다.
“네. 말씀하세요.”
“…절 진심으로, 사랑하시는 거예요?”
그리고 로라의 진지한, 그리고 꽤나 무거운 그 질문에 기태는 1초의 망설임도 없이 대답했다.
“네. 진심으로. 많이.”
“……?”
“사랑하고 있습니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