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asaubon
100+ Views

패션 레닌그라드

동독 패션모델에 대한 짤막한 묘사(참조 1)를 한 적이 있는데, 동독이 저정도로 만들었다면, 동구권의 본진, 소련의 패션은 어땠을지도 생각해보셔야 한다. 지금 쏟아져나오는 자료들을 보다 보면, 의외로 소련 또한 패션강국이었음을 알 수 있는데, 이를테면 짤방의 사진들이 좀 궁금하실 수도 있겠다. 척 봐도 알 수 있다. 모즈룩은 소련에까지 영향을 끼쳤다(참조 2).

사진은 1960년대 소련의 패션지, "레닌그라드 패션(Ленинградская мода)" 모음이다. 다만 이름이 일관적이지 않아서 검색할 때 좀 조심하셔야 한다. 사진에는 모두 "МОДЫ Ленинград"라고만 나와 있다.

하필이면 모스크바도 아니고 어째서 레닌그라드(혹은 상트페테르부르크)인가? 옛부터 러시아 도시 중 가장 (서)유럽화가 많이 된 도시이기도 했고 세계대전 중, 레닌그라드를 탈환하자마자 소련 당국이 이 도시에 "레닌그라드 패션모델하우스(Ленинградский дом моделей одежды, 약어는 ЛДМО)"를 설립한 이유도 있었다. 전쟁 직후 분위기 쇄신을 위해 당국이 일부러 패션진흥을 기획하고 추진한 것이다.

그래서 모든 것이 중앙집권화되어 있던 소련의 레닌그라드는 일종의 "패션 수도" 역할이었다. 게다가 강철의 대원수도 "후진" 패션을 혐오했다고 한다. 게다가 대조국전쟁에서 승리했잖았던가? 파시스트를 물리친 위대한 인민은 그에 걸맞는, 이제는 일상의 회복과 행복을 느낄 의복을 입어야 한다는 것이 스탈린의 방침. 그래서 레닌그라드 패션모델하우스는 더더욱 힘을 받았고, 서유럽의 패션잡지도 구비할 수 있었다! 많은 걸 배운 패션모델하우스는 정보 안내를 위해 잡지를 내기 시작한다.

이렇게 디자이너와 모델, 비평가 등등 온갖 관련 업계 종사자들과 관련 점포들까지 레닌그라드에 모이니까? 자연스럽게 패션수도가 된 것이다. 나름 오뜨 쿠튀르(высокая мода 혹은 그냥 그대로 써서 откутюр)도 만들고, 대중용 의복도 제작했는데, 가격대가 장난 아닌 거라. 그래서 "Смерть мужьям, тюрьма любовникам"라는 슬로건(참조 4)이 나온다. 직역하자면 "남편에게는 죽음을, 연인에게는 감옥을"이다. 고급의류가 엔지니어 평균 연봉을 뛰어넘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남편에게 죽음을"이라는 이름의 숍은 실제로 존재했었다(참조 5). 아니 지금도 존재한다. 그러나 당연히 공산주의 국가인지라 당시로서, 정말 고급 옷가게였던 이곳 방문 예약만 하더라도 며칠이 걸리고, 주문하려면 60%를 선금으로 내야 하며, 언제 완성품이 올지 기약이 없었다. 그리고 개혁개방과 체제전환 이후로... 소련 고유의 유명 브랜드는 기억나는 게 없는 처지가 되어버렸다(참조 6). 그래도 빛났던 잡지는 여전히 경매 사이트 곳곳에 존재하고 있다.

----------

참조

1. 동독의 패션모델(2020년 10월 30일): https://www.facebook.com/minbok/posts/10158663937409831

2. 모즈와 로커(2020년 12월 15일): https://www.vingle.net/posts/3491773

3. Модный Ленинград: история советской столицы дизайна(2018년 7월 4일) : https://spbvedomosti.ru/news/ekonomika/novaya_moda_iz_nbsp_starykh_zhurnalov/


4. 짤방은 모두 여기서 가져왔다. Ленинградский стиль(2020년 8월 26일): https://zen.yandex.ru/media/id/5ef60b741f32265015905148/leningradskii-stil-5f452ed11f431927991134cb

5. Магазин "Смерть мужьям"(2011년 5월 18일): https://www.etovidel.net/sights/city/saint-petersburg/id/magazin_smert_mujiam

6. 1992년 러시아에 부가가치세(НДС/VAT)가 도입되면서 모든 직원들이 지분을 갖고 있던 회사의 형태가 거의 해체되는 상황에 이르는데, 이건 별개의 주제로 다뤄야 할 것 같다.

«Мы все равно будем тянуться к красивому». Интервью с Лидией Орловой, главным редактором «Журнала мод» и «Московского стиля»(2020년 4월 10일): https://www.buro247.ru/fashion/interview/10-apr-2020-lidia-orlova-interview.html
casaubon
3 Likes
2 Shares
Comment
Suggested
Recent
Cards you may also be interested in
러시아의 1917년 성평등 혁명
여성의 날 특집, 러시아 혁명이다. 보통 러시아 혁명 하면 1917년에 두 차례(2월과 10월) 있었던 혁명만을 기억하지만, 한 가지가 더 있었다. 성 혁명이다. 결코 간과해서는 안 될 점이, 20세기 초의 시각에서 볼 때 정식으로 여군을 조직하고 그에 따른 지원태세를 국가적으로 갖춘다는 생각을 다른 나라들은 별로 안 했기 때문이다. https://www.calvertjournal.com/features/show/8302/revisiting-revolution-sea-change-female-sailors-gender-1917 이게 무슨 말이냐, 당시 막 태어났던 사회주의 러시아는 케렌스키(Александр Фёдорович Керенский)의 명에 따라 러시아군, 심지어 해군 내에 여군으로 이뤄진 부대의 설치를 해낸다. 러시아에 여군이 없었던 바는 아니다. 이미 예카테리나 시절에도 여군으로 이뤄진 중대가 1787년 설립됐다고는 하지만 오래가지는 못 했었다. 제1차 세계대전 당시에도 자원 형식으로 수 많은 여군이 전선에 참여했었다. 즉, 이 정도 했으니 정식으로 군대에 여자를 받아들여도 되겠다는 인식이 당시 소련 사회에 있었다는 의미다. 그래서 여군을 위해 바지 착용도 허용된다. 비슷한 시기 자전거를 타는 여자들의 바지 착용도 프랑스 사회에서 문제삼았음(참조 1)을 아시면 놀라울 정도인데 당시 러시아는 해군 군복을 사이즈만 좀 조정해서 그대로 여군용으로 만들었었다. 얼핏 보면 남녀가 구분이 안 갈 정도였다. (휘장/cocardes과 견장/epaulette만 안 달았다고 한다.) 이들은 지금도 러시아 북방함대 기지가 있는 북극 근처의 콜라 만(Кольский залив)으로 배치됐는데, 일단 대중의 호기심을 받은 덕분에(?) 전문 기자가 배치되어서 이들의 일거수일투족을 다행히 사진으로 남겼다. 그런데 이건 좀 사연이 있었다. 다른 해군 기지들이 여군을 안 받으려 했기 때문에, 만성적으로 자원자가 부족한 북극 근처로 보낸 것이다. 하지만 바로 그해 10월에 일어난 볼셰비키 혁명 때문에, 여군에 대한 지속적인 지원은 불가능했다. 케렌스키에서 레닌으로 정권이 바뀌었으며, 기존의 여군은 유니폼을 반납하고 비서나 잡역, 요리사가 되었다. 그래도 한 가지는 증명됐다. 여군을 훈련시켜서 군대에 배치하는 실험이 성공했다는 점이다.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소련이 여군을 얼마나 잘 활용했는지는 잘 아실 것이다. 공산당이 정권을 접수한 1920년대 이후, 소련은 정식으로 여군을 해군 사관학교에서도 받기 시작했고 실제로 그들을 함선이나 해군항공기 조종사로 배치시켰다. 이들은 공산주의가 애초에 그렸던 “여성의 아름다움”과도 맞았다. 남자의 옷차림과 같은 패션 및 헤어스타일도 인기를 끌었었다. 짧은 머리에 자유롭고 속박되지 않은 스타일, 모자, 가슴을 가리는 두툼한 재킷, 허리를 잘록하게 하는 가죽 허리띠… 그렇다. 그래도 20년대 소련 여자들이 치마만은 포기하지 않았다. 게다가 한 가지 더 있다. 1917년 러시아 혁명이 일어나면서 같은 해 동성애를 형법에서 폐지한 것이다. 심지어 정보 및 비밀경찰을 맡았던 소련 국가정치총국(ГПУ) 직원 중에, 남자 직원으로 등록해 들어온 여자 직원도 있었다. 그녀는 1918년부터 비밀경찰에 복무하면서 남자 옷을 입고 남자처럼 얘기했으며 동료들 중 누구도 그녀의 성을 의심하지 않았었다고 한다. 심지어 1922년에는 한 여자와 결혼하고 입양아도 한 명 들인다(참조 2). 게다가 불륜까지 저지르고, 여자인 점이 발각나서 “자연에 거스르는 죄”로 소송까지 당했지만, 당시 소련 법원은 이를 인정하지 않고 결혼도 그대로 유지시킨다. 그녀는 술을 입에 대기 시작하고, 여러 여자들을 괴롭힌 죄로 체포도 여러 번 당한다(뭔가 러시아 남자스러운 결말이다). 여담이지만 동성애의 경우 스탈린이 다시 형법 안에 포함시켜서 유죄로 만들었고, 1991년 옐친 때 이르러서야 다시 형법상 죄에서 사라진다(참조 3). 즉, 1917년에서 스탈린이 집권하기 전까지, 여자는 물론 동성애 커뮤니티에서도 짧다면 짧다 할 수 있는 ‘혁명’ 기간을 거친 셈이다. ------------- 참조 1. 여성을 해방시킨 자전거의 힘(2019년 10월 18일): https://www.sisain.co.kr/news/articleView.html?idxno=40415 2. https://books.google.co.kr/books?id=kF-CDAAAQBAJ&pg=PA121&lpg=PA121&dq=Evgeniya+Fedorovna&source=bl&ots=eUVq_I8noE&sig=ACfU3U2_EoDLQ7GnBcxpuph86KuYnY877A&hl=ko&sa=X&ved=2ahUKEwiY0Y_QnYroAhWJE4gKHWN5CakQ6AEwA3oECAoQAQ#v=onepage&q=Evgeniya%20Fedorovna&f=false 3. 1917 Russian Revolution: The gay community's brief window of freedom(2017년 11월 10일): https://www.bbc.com/news/world-europe-41737330
위성을 훔쳐라
주말은 역시 소련이죠. 주말 특집, 저 위성을 훔쳐라이다. 이게 무슨 비유법처럼 뭔가 다른 의미가 있는 문장이 아니다. 말그대로 인공위성을 훔친다는 이야기인데, 때는 1950년대 냉전 시기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미국은 소련의 인공위성을 훔쳤다. 말그대로. 도대체 이게 무슨 이야기인가, 폰 브라운 등등이 미국에 건너가서 우주개발을 해 준 것 아니었느냐라 할 수 있을 텐데 2019년까지는 다들 그렇게 알고 있었다. 드디어 기밀 해제가 되어(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직 불명확한 부분이 많이 있다) 세상에 알려졌고, 그 내용을 MIT Technology Review에서 보도했었다. 한 마디로, 인공위성을 훔친 덕분에 미국은 우주 개발에서 중대한 진전을 거둘 수 있었다. 기사 링크(구독자 전용이다) , Lunik: Inside the CIA’s audacious plot to steal a Soviet satellite(2021년 1월 28일): https://www.technologyreview.com/2021/01/28/1016867/lunik-cia-heist-steal-russian-satellite-space-us-ussr/ 1957년 스푸트니크 1호(Спутник-1)가 성공한 이래 미국은 우주개발에 있어서 계속 죽을 쑤고 있었다. 사건이 있었던 1959년 그 해에도 달 탐사선, 루나-3호(Луна 3)가 달로 가서 달 뒷면 촬영 사진 17장을 보내오는 것까지 성공시켰었다. 이제 막 대기권에 위성 띄우는 것 정도만 성공했던 미국은 계속 패배감으로 지켜볼 수밖에 없었고 말이다. 아이젠하워 대통령은 … 공포에 사로잡혔다고 한다. 50년대 말 미국 시각으로 볼 때, 소련이 저렇게 자유자재(?)로 위성을 쏘고 한다면 결국 자유자재로 하늘에서 미국 본토를 폭격할 수 있지 않겠냐는 두려움이었다. 경보음이 울리면 책상 밑으로 몸을 숨기는 훈련을 하던 시절임을 기억하시라. 그런데 루나의 결과가 자랑스러웠던 소련은 위성을 갖고, 전세계 순회 전시회를 개최하기로 결정한다. 당연히 미국도 들리는 일정이었으며, 미국에서 전시했을 때, 이들이 전시한 “루나” 위성이 진짜임을 CIA가 확인했었다고 한다. 그러나 차마 미국 땅에서 위성을 훔칠 생각은 CIA도 못 했었다. 그러나 다음 행선지가? 멕시코였다. -------------- 멕시코라면 작전을 벌일만 하지. 당시 멕시코는 미소 양국 사이에서 줄타기를 하던 중이었으며, 따라서 미소 둘 다 스파이를 잔뜩 보내는 국가였다. 소련은 또한, 사회주의 소련의 위대함을 전시하기 위해 망치와 낫(…)은 물론 가죽코트, 현미경, 핵발전소와 가속기 모형(!) 등 온갖 물건을 다 갖고 왔었다. 그렇다면 어떻게 소련에게 발각되지 않은 채 인공위성을 훔치느냐… 당시 필름 카메라 플래시 기술에 문제가 있었기 때문이다. 어두운 곳에서의 촬영을 위해 강력한 플래시를 사용해야 하는데, 당시 플래시는 한 번 촬영을 하고 나면 30초 정도는 기다려야 다음 촬영을 할 수 있었다. 즉, 발각되지 않은 채 돌려주려면 밤-새벽 동안 확보해서 촬영을 여유있게 한 다음에 돌려주는 편이 최선이었다. 소련측은 전시회가 끝나는 마지막 날 밤에 호텔에서 성공 파티를 할 계획이었다. 그래서 CIA는 여기에 일단 미녀들을 단체로 투입, 칵테일에 집어넣을 LSD도 조달했다. 그러고나서 인공위성을 나르는 트럭을 납치해야 했었다. 다른 화물 트럭과 떨어뜨리기 위해? 일부러 교통체증을 유발시켜서 트럭을 납치했다. 소련 병사들은? 미녀들이 있는 호텔 파티장에 있었다. 성공리에 납치한 루나 우주비행체를 이제 대기하고 있던 CIA 엔지니어팀이 분해하기 시작했다. 유압기나 전자 시스템, 밸브, 유류 등등 그들이 연구해야 할 분야가 한 둘이 아니었다. 발자국을 남기지 않기 위해 그들은 신발을 벗고, 올라섰다. 촬영을 마친 필름은 대기하고 있던 자동차로 옮겨져서, 대사관으로 바로 향했다. -------------- 문제는 엔진실이었다. 플라스틱 실에 소련 도장이 박혀 있었던 것, 이건 현장의 CIA가 그 시간에 급조해낸다. 그들은 그날 사진 280장을 현상했고, 밸브 60개 정도를 훔쳐낸다. 유류 샘플도 남아있던 것을 확보했다. 서서히 아침이 밝아온다. 재조립에 확인까지 마친 그들은 트럭을 돌려보낸다. 아침 7시, 창고를 지키고 있던 소련 병사들은 운전사에게 왜 이제서야 가져오느냐 물었고, 운전사는 지시받은대로 병사들이 호텔로 놀러가버리는 바람에 창고가 문닫혀서 기다렸을 뿐이라 답했다. 그런데? 추가 질문 없이 그냥 트럭이 들어갔다! 대성공이었다. 대사관에서는 곧바로 자료를 챙겨서, 주멕시코 미국 대사가 직접 개인용 제트기를 타고 텍사스로 갔다. 이 작전?은 “루닉 납치(Kidnapping of the Lunik)”로 알려졌으며, CIA는 이를 납치라 부르지 않고 대여(borrowing)이라 부른다. 미국이 이 작전으로 얻은 것은 상당했다. 로켓 최상단부와 위성의 내부를 속속들이 알게 됐기 때문이다. 즉, 이 비행체를 분해하고 조사하면서 소련 ICBM에 대한 대략적이지만 구체적인 추정을 할 수 있었다는 의미다. 이 조사 이후에서야 CIA의 CORONA 정찰위성 계획은 첫 성공을 거둔다. 그리고 예상치 못하게, 국방부(공군)의 대대적인 예산 증액 요구(소련에 대적할 미사일 수만 기가 필요하다!)를 깎아버리는 근거로도 사용됐다. CIA가 “내가 뜯어봐서 아는데…”를 말하니 공군의 증액 요청이 힘을 잃은 것. -------------- 참조 1. 제목의 Lunik은 당시 미국 언론이, 소련의 루나 프로젝트의 성공이 가짜뉴스라면서 “루나”를 거짓말의 뉘앙스를 가진 “루닉”이라는 멸칭으로 불렀던 유래를 갖고 있다. 소련은 미국 언론의 보도가 나오자 기다렸다는 듯이 달 뒷면 사진을 타스 통신을 통해 뿌렸다. 2. 이 작전에 참여한 사람들은 대부분 사망했으며, 가족들은 뉴스에 공개된 정보가 나오기 전까지 그때 그양반이 멕시코에 갔는지도 모르고 있었다고 한다. 또한 한 핵심인사의 아들은, 미국 최초(1961년)의 우주비행사였던 앨런 셰퍼드가 자기 아버지에게 어째서 서명된 사진을 줬는지 몰랐었다고 한다. 3. 소련도 어느 시점에서는 깨달았던 모양이다. 미국인지, 멕시코인지, 다음 목적지인 쿠바인지 소련도 처음에 헷갈렸을 수 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당시 주멕시코 소련의 서기관이 당시 멕시코 측 스파이를 1963년 한 공항에서 우연히 만나 말한 것이 있다. 결국은 뭐 다 알았으리라. “모스크바 광장에서 네 목을 매달 날을 기다릴 거다.” 4. 짤방은 1959년 당시 성공을 기념해서 나온 소련의 우표 출처 : https://ru.wikipedia.org/wiki/%D0%9B%D1%83%D0%BD%D0%B0-3
소련의 마지막 흔적, .su
https://www.inverse.com/article/8672-the-bizarre-afterlife-of-su-the-domain-name-and-last-bastion-of-the-ussr?fbclid=IwAR0P9wAMznxW2COywsfR3ZZVPou0UfNXOZTUL300OyaX13kBDaXTlinFaiw 역사는 이상한 방식으로 그 흔적을 남기기도 한다. 이번 주말 특집은 지금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 국가, 소련의 최상위 인터넷 도메인 .su의 이야기이다. 나라 이름에 따른 인터넷 주소는 국제인터넷주소관리기구(Internet Corporation for Assigned Names and Numbers, ICANN) 산하 Internet Assigned Numbers Authority (IANA)에서 지정한다. 이 IANA는 1988년에 설립됐으며, 곧바로 여러 나라들에게 이 주소 저 주소를 할당하기 시작했었다. 그래서 소련도 1990년 9월 19일, .su 주소를 받는다. 당연히 소비예트 유니온의 준말이다. 소비예트 유니온의 준말이라니, 차라리 .ussr이 낫잖을까 싶기도 한데, 애초에 .su 도메인을 제안했던 인물은 소련인도 아니고 19살 먹은 한 핀란드 대학생이었다고 한다(참조 1). 그런데… 그로부터 15개월 후, 소련이 분리되어버린다. 정말 막바지까지 그 강대한 제국이 무너질지는 아무도 예상치 못 하던 차였다. 그런데 이 su 주소는 끈질기게 지금도 살아남아 있으며 실제로 작동은 물론 새로운 주소 등록도 받고 있다(참조 2). 잠깐, 그때 무너진 국가는 소련만이 아닐 텐데요? 좋은 지적이다. 유고슬라비아는 .yu, 동독은 .dd(독일민주공화국의 약자다, 서독은 참고로 독일연방공화국), 체코슬로바키아는 .cs였다. 이들 모두 사라졌으며, 신규 등록을 받지 않고 있다. 그렇다면 도대체 .su 도메인은 어떻게 살아남은 것일까? 러시아의 음모일까? 의외로 살아남은 이유는 행정지체(…) 및 저항(!)이었다. 러시아의 도메인인 .ru가 1994년이나 되어야 등장했기 때문이다. 즉, 소련 붕괴 이후 인터넷 사이트를 만들려는 구-소련계 주민/법인들은 어쩔 수 없이(?) .su 도메인을 이용해서 등록해야 했으며, 이왕 살아 있으니 계속 살려야 한다는 IANA 내 러시아계 직원들의 저항 때문이었다. 게다가 러시아 내 인터넷 주소 할당을 위해 2001년부터 활동한 러시아공공네트워크연구소(Российский научно-исследовательский институт развития общественных сетей (РосНИИРОС))는 .ru는 물론 .su도 관리하기 시작했다. 그래서 현재 .su를 사용하고 있는 인터넷 주소는 119,423개소가 있다고 한다. 그렇다면 나라도 없는데 누가 이 .su를 사용하고 있느냐, 쏘오련에 대한 향수를 갖고 있는 이들인가(참조 1의 .su 도메인), 아니면 우크라이나 동부의 친-러시아 단체의 웹사이트인가(참조 3), 그것도 아니면 푸틴을 옹호하는 외곽 청년조직, “우리들(Наши, 참조 4)”인가? 수많은 사이버 범죄단체들이 이 주소를 사용하고 있다(참조 5). 스팸과 DDoS 공격, 인터넷 사기범들이 사용한다는 얘기다. 이들의 활동은 단순 사기에 그치지 않고 미국 선거 개입도 한 모양(참조 5). 가령 Exposed.su는 트럼프와 밋 롬니, 미셸 오바마 등의 신용 내역을 누출했다고 한다. (사이트는 현재 사라졌다.) 물론 그렇다고 하여 .su 주소가 사라지는 일은 러시아가 있는 한, 없을 것 같다. 생각해 봅시다. 발해 부흥운동은 거의 200년을 갔었다. 영국인들의 .eu 도메인 요구 또한 20년은 더 갈 수 있으며(참조 6), 소련에 대한 향수는 분명 대를 넘길 것이다. -------------- 참조 1. Юбилей Рунета: 10 лет назад финн Петри Ойала зарегистрировал домен .su(2000년 9월 19일): https://web.archive.org/web/20140102191207/http://netoscope.narod.ru/news/2000/09/19/312.html 애초 소련의 유닉스/데모스(ДЕМОС) 망은 중립국(!) 핀란드를 통해서 서방과 연결됐었고, UUCP(전송프로토콜)을 이용해서 소련과 세상을 이어준 것이 바로 핀란드 대학생, Petri Oyala였다. 참고로 실제 관여자들의 증언은 다음의 사이트에 자세히 나온다. (.su 도메인!) 

http://news.demos.su/private/demos.html 2. 새로운 su 주소 등록, 1년에 PayPal로 $29.95 밖에 안 한다!: https://www.register.su 3. 새로운 로씨야! https://novorossia.su 4. 원래는 http://www.nashi.su 이지만 사이트는 현재 사라졌다. 열람을 원하시면 아카이브를 통해서 보셔야 한다. https://web.archive.org/web/20120313181921/http://nashi.su/ 5. USSR's old domain name attracts cybercriminals(2013년 5월 31일): https://phys.org/news/2013-05-ussr-domain-cybercriminals.html 6. UK citizens might lose .EU domains after Brexit(2018월 3월 30일): https://www.engadget.com/2018/03/30/europe-brexit-eu-domains/
레닌그라드 카우보이와 소련 군악단
https://youtu.be/0lNFRLrP014 화요일은 역시 냉전이지. 이 영상 설명부터 하겠다. 핀란드 그룹인 레닌그라드 카우보이즈가 붉은 군대 앙상블과 함께, 미국 노래, 그것도 SWEET HOME ALABAMA를 부르는 영상이다. 스윗 홈 앨러배마가 연상시키는 온갖 질 낮은(…) 농담은 잠시 접어두도록 하자. 보통 붉은 군대 앙상블, 정식 명칭은 알렉산드로프 앙상블(Ансамбль Александрова)인 이 군악단은 이름처럼 알렉산드로프(Александр Васильевич Александров, 1883-1946)가 창단했는데, 알렉산드로프가 누구냐, 바로 그 장엄한 소련 국가(Гимн СССР)를 만든 장본인이다. 그 후 이 소련 군악단은 세계적으로 유명해진다. 여기에 1991년 개혁개방 이후 접근한 그룹이 바로 옆나라 핀란드의 레닌그라드 카우보이즈였다. 1986년에 창설되어 지금도 이어지고 있는 이 그룹은 퐁파두르 머리(위로 뾰족하게 세운다)를 하고 주로 커버송을 부르는데, 노래를 부르려고 만든 것이 아니라 영화 감독, 아키 카우리스매키(Aki Olavi Kaurismäki, 1957-현)가 소련을 놀리기 위해 바에서 즉석으로 만든 그룹이었다. 카우리스매키는 아예 뮤직비디오도 만들고 영화, “레닌그라드 카우보이, 미국에 가다(Leningrad Cowboys Go America, 1989)”도 찍는다. 그 후 이 그룹은 정말로 음악 그룹으로 변모했고, 1993년에는 헬싱키에서, 1994년에는 미국 뉴욕에서 알렉산드로프 앙상블과 함께 공연한다. 가만… 트럼프 대통령 헤어스타일이 혹시 여기서?
소련의 애플파크
공산주의자 놈들이 애플파크도 먼저 지었던 것이다… 애플 파크는 스티브 잡스와 조너선 아이브가 직접 고안하고 Norman Foster와 함께 만든 거대한 원형 건물이다. 그러나 오늘의 주말 특집, 이 사진(참조 1)을 보시라. 거대한 원형 건물이 모스크바에 이미 있었고, 1972년부터 1974년까지 두 채나 만들어졌다. 모스크바 서부에 있는 이 아파트는 원형 형태이기 때문에 “부블리크 집(дом-бублик)”이라는 별명을 갖고 있다. 부블리크(бублик)는 이를테면 러시아와 동유럽 지방에서 나오는 베이글이라 생각하시면 된다. 소련도 여느 나라와 마찬가지로 전후 아파트 건설이 활발했는데, 1980년에 모스크바에서 올림픽을 개최하기로 했네? 그렇다면 올림픽을 기념하여 원형 건물을 다섯 채 지어보는 건 어떨까? 소련의 건축가 예브게니 스타모(Евгений Стамо)와 알렉산드르 마르켈로프(Александр Маркелов)는 생각했다. 사각형으로 짓지 않고 블럭을 약간 틀어지게 하여 둥그런 건물을 지을 수 있잖을까(참조 2)? 이제 옛날 일이라서 그런지, 올림픽 때문에 이런 아파트를 지었다는 건 소문일 뿐이라는 의견도 물론 존재한다(참조 3). 나름 이유가 있다. 원형 아파트가 점유하는 토지가 너무나 거대하다. 그래서 생각보다 비용절감이 안 됐다는 의미인데, 건설 비용도 만만치 않았던 모양이다. 하지만 누가 뭐래도 당에서 좋아하면 하는 겁니다? 소련 당국은 이 10층(러시아식으로는 9층)짜리 원형 아파트에 대해 대단히 흡족해했다고 한다. 1972년에 건설된 첫 번째 “반지(кольцо)”는 입주한다는 사실 자체가 인생의 성공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영화 촬영도 이 아파트에서 했었다. 우리나라에도 개봉됐었던(참조 4) “모스크바는 눈물을 믿지 않는다(Москва слезам не верит, 1979)”의 로케가 바로 여기였다고 한다. 그러니까 70년대 말 최신예 아파트였다는 이야기인데 원형이라는 구조로 인해 아파트 안의 각 방들이 사각형이 아니었다. 거의 사다리꼴 모양의 방이었는데, 입주하고 나니 이게 단점으로 부각되는 것이었다. 가구 배치도 힘들고 배치해 놓고 보니 뭔가 좀 이상했다. 막혀 있는 안뜰에서는 물론이고, 맞은편 아파트도 보이니 프라이버시 문제도 있었다. 소련에도 프라이버시가 있… 또한 안뜰에서는 구조 때문에 난기류가 만들어져서 바람이 거세어졌고, 소음 문제가 좀 컸다고 한다. 누군가 발코니에서 재채기를 하면 아파트 전체가 알게 된다는 의미다. 그리고 일조량이 비대칭적이었다. 지금 서울에서야 북향이 인기라지만, 저 추운 모스크바의 북향은 문제가 많았다. 일조량이 확 떨어지는 구역이 있다는 얘기다. 따라서 쉽게 곰팡이가 슬었다. 제일 큰 문제는, 워낙 덩지가 큰 바람에 외부인이 정확한 위치를 알기 매우 어려웠다는 점일 것이다. 어느 출구가 맞을지 한참 헤메기 일쑤였고 한 번 잘못 들어가면, 바른 주소를 찾아가는데 시간이 너무 많이 걸렸다. 또한 1층을 상업시설로 해서(그렇다, 주상복합이다) 그런지 주차 공간도 충분하지 않았었다. 그래서 이 원형 아파트는 두 동만 건설되고 그 이상은 만들어지지 않았다. 그래도 대형 주상복합 아파트라는 점 때문에 인기가 아예 없지는 않은 모양이다. 어지간하면 아파트 내부에서 다 처리할 수 있다는 편의성 때문이라고 한다. 해마다 이 아파트를 재개발한다는 루머가 있다고는 하는데, 아직은 아닌 것 같다. 부동산 사이트를 보면(참조 5), 대략 3억원 정도면 매매가 가능한 것 같다. 물론 층이나 위치에 따라 가격대가 많이 바뀐다. -------------- 참조 1. 출처 : https://ru.wikipedia.org/wiki/%D0%9A%D1%80%D1%83%D0%B3%D0%BB%D1%8B%D0%B5_%D0%B4%D0%BE%D0%BC%D0%B0_%D0%B2_%D0%9C%D0%BE%D1%81%D0%BA%D0%B2%D0%B5 2. Кто и зачем построил в Москве круглые дома(2016년 2월 20일): https://moslenta.ru/city/round.htm 3. 바로 위키피디어의 설명이 그러하다. 링크는 참조 1의 링크 4. 소련 영화 잇달아 국내 상륙(1988년 8월 24일): https://news.joins.com/article/2269517 https://youtu.be/gE7f0IRKBw8 5. https://www.007dom.ru/street/dovghenko-ul/40044/
소련의 토요노동
이거 왠지 익숙한 느낌이다. 우리나라 학교들도 90년대 초?까지는 공휴일 노동 동원이 일상적이었기 때문이다. 물론 현재도 자원봉사 점수를 미끼로 행사에 학생들을 동원하는 경우가 (꽤?) 있지만 말이다. 제목은 "학교의 토요일", 1970년대 TASS 통신의 사진(작가는 보리스 카바슈킨, 참조 1)이다. 출처 : https://www.facebook.com/kulturologia/photos/a.432637776784841/3862857430429508/ 그래서 코멘트란을 보면, 이게 포토샵으로 "조절"을 좀 한 것인지에 대한 논쟁이 좀 있고, 실제 경험담도 있다. 그렇다. 1970년은 레닌 탄생 100주년이었던 것이다. 이를테면 소련의 각급학교는, 예전의 우리나라에 있던 교련과 유사한 느낌의 "노동(труда)" 수업이 있었고, 소련 당국은 1970년 레닌의 날을 기념하여 4월 22일을 "지구의 날(День Земли, 참조 2)"로 정했었다고 한다. 당연히 우리들은 지구의 날을 미국 활동가들이 제안해서 만들어진 날로 알고 있었다. 레닌의 날을 기념해서 소련이 정했다는 것이 말이 될까? 이건 음모론의 영역(참조 2)인지라 확실하지는 않다. 그렇다면 소련의 각급 학교는 토요일에 뭘 했다? 사진에서 보이듯 학교 정원을 가꾸고, 쓰레기도 치우고, 환경 보호를 위한 단체 시위도 조직하고 했었다. 그런데 말입니다. 러시아어를 좀 아신다면, 저 "토요일(суббота)"이라는 단어에 주목하셔야 한다. 관점을 달리 해서 보면, "학교의 토요일"이라는 번역 자체가 틀린 번역일 수 있기 때문이다. 적절한 번역은 아마, "학교에서의 토요노동". 왜냐 하면, 레닌이 10월 혁명을 일으킨 이후, 토요일에는 시민들이 공동체를 위해 "봉사"해야 한다면서, 거리 청소나 대규모 시위, 공공시설 개보수 등에 사람들을 무임금(!) "동원"시켰기 때문이다. 이런 행위 자체를 수보트닉(Субботник, 참조 3)이라 불렀으며, 1919년 4월 12일부터가 시작이었다. 그리고 1920년 5월 1일(!)에는 레닌 그 자신이 직접 수보트닉에 나서서 크렘린의 쓰레기를 줍는다. 줄줄이 밑으로 동원될 수밖에. 따라서... 토요일! 하면 왠지 모르게 "노동!"이 연상되고, 각 학교에서 토요일에 저런 노동을 하는 것이 소련 시절에는 매우 자연스러웠다는 이야기입니다(지금은 물론 아니다). 뭔가 당연하게 국민들의 자원봉사 정신을 이어 받은 한반도와 일본 열도가 그 뿌리를 명확히 인지하고 있을지는 잘 모르겠다. 그걸 다 알고 하는 게 부자연스럽다는 이야기... 아 아닙니다. ---------- 참조 1. Борис Кавашкин, 소련의 유명한 사진기자다. 가령 아래 사진을 보시라. https://twitter.com/sovietvisuals/status/1031118142364364801 2. 실제로 당시 FBI는 환경운동이나 "지구의 날" 관련 시위를 소련 사주를 받은 이들의 책동으로 간주하고 있었다. MUSKIE SAYS FE SPIED AT RALLIES ON 70 EARTH DAY(1971년 4월 15일): https://www.nytimes.com/1971/04/15/archives/muskie-says-fbi-spied-at-rallies-on-70-earth-day-tells-senate-that.html 3. https://en.wikipedia.org/wiki/Subbotnik
체르노빌/Chernobyl(2019)
체르노빌에서 일어난 일을 그대로 그려낸 영화나 드라마가 아직까지 없었다는 점이 좀 의아하기는 했는데, 다시 생각해 보면 이해할 수 있는 일이기도 하다. 워낙에 인류 전체의 비극적인 사건 중 하나였기 때문이다. 차라리 괴물이 나오는 게임이나 영화로 하는 편이 더 마음이 편해지지 않았을까. 물론 나도 체르노빌의 상황은 콜오브듀티 모던 워페어의 잠입 미션으로 배웠… 이, 이게 아니고 HBO가 이 드라마를 매우 잘 만들었다. 고증 오류가 물론 없지는 않은데(참조 1, 2), 이 복잡한 사건을 그나마 알아볼 수 있게 해 준 공이 크다. 뭣보다 우리가 이렇게 아무 생각 없이 살아가는 것을, 가능하게 해 준 영웅들이다. 이를테면 그냥 불 끄는 게 일이니까 달려갔다가 화를 당한 소방수와 그를 끝까지 쫓아가 임종을 지켜봤던 그의 아내, 펌프를 작동시키겠다면서 자살 행동임을 알고 발전소 하부에 진입하기를 지원한 세 명의 엔지니어들, 자기가 직접 보고 태도를 바꿔서 모든 걸 지원했던 고위 간부, 묵묵히 옥상에 나아가 폐기물들을 40초 동안만 해치웠던 “바이오 로봇”들. 그리고 뭣보다 과학자들의 활약이 돋보인다. 물론 주연급의 울랴나 코뮤크(Ulana Khomyuk/Ульяна Хомюк)는 실존 인물이 아니지만 당시 레가소프(Валерий Алексеевич Легасов)를 도왔던 수 많은 과학자들을 상징하며, 또 여성이기도 하다(참조 3). 학자들의 양심이 레가소프의 마음을 더 움직인 것은 분명할 수 있겠다(참조 4). 의외의 인물로, 마지막화에서 검찰 역할을 했던 배우(Michael McElhatton)가 반가웠다. 왕좌의 게임에서 볼튼 가문의 수장을 맡았던 그 배우다. -------------- 참조 1. 가령 광부들 장면에 대한 오류는 아래와 같다. Chernobyl: The real-life heroes of nuclear disaster watch TV hit(2019년 6월 4일): https://news.sky.com/story/chernobyl-the-real-life-heroes-of-nuclear-disaster-watch-tv-hit-11734773 광부들의 보드카 음용 -> 보드카는 언제나 업무 후에 마심 광부들의 나체 -> 몇몇 사례는 있지만 전체는 아님 총을 겨누고 광부를 모집 -> NO. 2. 그 외에도 꽤 많은 오류가 있기는 하다. 당사자의 직접 증언을 들어 보자. 이를테면 집 안의 동물들을 쏘는 장면은 극화를 위해 만들어졌다. What HBO got wrong: Chernobyl general gives hit TV show a reality check(2019년 6월 8일): https://www.rt.com/news/461348-chernobyl-disaster-tarakanov-hbo/ 3. Ulana Khomyuk From 'Chernobyl' Is Not Based On A Real Person, But Emily Watson's Character Is Important All The Same: https://www.bustle.com/p/ulana-khomyuk-from-chernobyl-is-not-based-on-a-real-person-but-emily-watsons-character-is-important-all-the-same-17304139 당시 화학 쪽 Ph.D.의 여성 비율이 소련은 40%에 육박했다고 한다. 마지막 화에 나온, 소련 과학 아카데미 학자들이 모인 재판장에서도 보면 대략 4:6 정도의 비율이다. 4. 다만 레가소프의 자살 원인은 좀 불명확스러운 부분이 있다(참조 2). 드라마에 나온대로 왕따가 된 것은 맞는데, (BBC 다큐멘터리에 따르면) 그의 주장/제안에 따라 소련식 원자로의 흠결을 당국이 인정하고 수정에 나서기는 했기 때문이다. 게다가 드라마에는 나오지 않은 아들의 문제(사람을 죽였다)도 겹쳤고 해서 상당히 불안한 심리 상태였던 것만은 분명할 것이다. 실제로는 오디오테이프를 숨기지 않았고 그냥 남겼으며, 자살한 장소에 대해서는 (정확한 경찰 기록이 없어서인지) 논란이 좀 있다. 5. 사진은 아래 사이트에서 가져왔다. 옥상의 핵폐기물을 치우는 liquidator(ликвида́тор)들의 모습이다. 70만 명이 동원됐다고 한다. Chernobyl, remembering brave Firemen and forgotten heroes(2019년 4월 18일): https://www.emergency-live.com/news/chernobyl-remembering-firemen/
처형당한 엔지니어의 유령
소련 사회가 어떻게 돌아갔는지에 관심이 많고 소련스러운 아름다움(?)을 좋아하기는 하지만, 100년도 못 버텼던 소련은 분명 실패한 국가였다. 국가의 기본적 기능이 전혀 작동하지 않아서였는데, 그런 나라치고는 당당히 당시 초강대국 미국과 냉전을 벌인 주인공이기도 했었다. 13일의 금요일은 역시 독서지. 이 “처형당한 엔지니어의 유령”은 정말 거대한 생각거리를 안겨다주는 좋은 논픽션이다. 소련 초기(스탈린 집권 초기이다), 기술과 사회 사이에서 합리적이고 정의로운 “제대로 일하기”를 강조하다가 재판을 받지도 못하고 처형당한 엔지니어, 표트르 팔친스키(Пётр Иоакимович Пальчинский)의 일대기이다. 그러고 보면 공산권 국가, 소련의 지도자들이 어째서 대부분 엔지니어 출신(참조 1)인가 하는 점이 궁금했었다. 공산주의가 특히 과학기술을 좋아해서? 틀린 답은 아닐 테지만, 책을 보니까 알겠더라. 두 가지 이유가 있었다. 인문 사회계는 일단 반동분자가 될 가능성이 매우 높기도 하고(…) 대체로 공산주의 저작물 외에는 거의 교육이 없기도 했었다. 전공자들에게 일종의 “유리 천장”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공계는 실질적으로 필요하다. 다만 이공계 전공자들이 반동분자가 될 가능성이 없지는 않으므로, 이들을 공학자로 키우기보다는 정말 세부적인 전공만 가르쳐서 엔지니어로 육성하고, 그들을 당 내부에서 승진시켰다. 엔지니어들도 그를 알기에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다. 얼마나 세부적인 전공만 하냐면, 저자의 경험담을 들어보는 편이 나을 것이다. “마침내 어느 날 모스크바 근교로 소풍을 나갔는데 자신을 엔지니어로 소개하는 젊은 여성을 한 명 만났다. 어떤 유형인지 물었더니 제지 공장용 볼 베어링 엔지니어라 답했다. 그래서 내가 기계공학 엔지니어군요, 라고 묻자, 그녀는 자신이 제지 공장용 볼 베어링 엔지니어라 다시 답했다. 믿을 수 없어서 설마 ‘제지 공장용 볼 베어링 학위’를 받았냐고 물어보니, 그녀는 그 학위를 받았다고 답했다.” (p121-122) 대단히 편협한 교육을 받은 것이다. 이런 교육을 받은 테크노크라트들이 당 지도자로 성장했다(참조 2). 위에도 얘기했지만 이들은 상부에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다. 오로지 생산량 목표 달성/초과에만 신경썼다(참조 3). 엄한 곳에서만 자본주의식 경쟁을 부추긴 것이다. 그렇지만 “엔지니어식” 사고방식이 지배했기 때문에 소련이 실패했다고 보기에는 너무 구차하다. 당연히 소련 실패의 핵심은 오로지 영광만을 보이려 하고, 실패나 실수를 용납하지 않으며, 실무자들 의견과 전혀 관계 없이 상층부의 정치적 판단만이 절대적으로 옳았던 점에 있었다(참조 4). 팔친스키가 숙청된 이유는 다름 아닌 팩트 폭력을 너무 많이 휘둘러서였기 때문이리라. 바로 이러한 실패의 요소들이 비단 소련에만 있었을까? 이게 바로 이 책을 읽으면서 들었던 의문점이다. 소련이라는 단어를 지우자. 오로지 잘 된 것만 보여주고 싶고, 실패나 실수를 위에서 용납하지 않으며, 실무자 의견은 도외시되고 윗분의 판단만 그대로 따른다… 소련과 그리 멀지 않은 방식으로 운영되는 곳이 여기저기 보일 것이다. P.S. 주석을 보면 이 책의 주인공, 팔친스키의 영문 표기에 대한 해명(?)이 나온다. 미국의 경우 의회도서관의 러시아어 음역 표기법에 따를 경우 오히려 영어권 독자들에게 혼란감을 줄 수 있다는 지적이 나온다. 이른바 “표준” 표기법은 세계 어디서나 환영받기 힘든 법. -------------- 참조 1. 군 출신이었던 체르넨코, 신학교를 갈 뻔 했던(…) 스탈린 빼고는 모두 다 엔지니어들이었다. 그런데 그 전통을 고르바초프가 깬다. 고르비는 법학도였고 최측근이 사학자였다. 2. 1986년 소련공산당 정치국에서 기술 교육을 전공으로 한 사람들의 비중이 89%였다고 한다. 최고위층이 그냥 다 엔지니어들 모임인 셈이다. 물론 미국도 엔지니어 출신 대통령이 없진 않았다. 허버트 후버. (당시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다들 아실 것이다.) 3. 소비에트 인테르니옛(2018년 7월 8일): https://www.facebook.com/minbok/posts/10156397441474831 "최초의 글로벌 컴퓨터 네트워크는 협조적인 사회주의자처럼 행동하는 자본주의자들 덕분에 태어났다. 경쟁 위주의 자본주의자들처럼 행동하는 사회주의자들이 낳은 것이 아니었다." 4. 달착륙에서 소련이 진 것도 결국 같은 이유다. 소련은 어째서 미국에게 우주개발을 뒤졌는가(2019년 8월 8일): https://www.facebook.com/minbok/posts/10157359906059831
<이반 데니소비치, 수용소의 하루> 알렉산드르 솔제니친
<이반 데니소비치, 수용소의 하루> / 알렉산드르 솔제니친 저 (지극히 주관적인 제 생각을 쓴 글입니다.) 한 편의 블랙코미디를 보는 것 같다. 이 소설은 이반 데니소비치(슈호프)라는 한 인물이 수용소에서 하루를 보내는 모습을 아무런 치장 없이 그대로 그려 내고 있다. 마치 식탐 많은 어린아이처럼 멀건 귀리죽 한 그릇을 놓고 다투는 죄수들의 모습은 웃긴 동시에 슬픔과 분노를 불러온다. 서로 상반된 감정을 한 문장으로 동시에 일으킬 수 있다는 사실이 이 책의 존재 이유를 설명한다. <이반 데니소비치, 수용소의 하루>는 알렉산드르 솔제니친의 실제 경험에서 우러나온 소설이다. 전쟁에 참여해 훈장을 받기도 했던 그였지만 친구에게 보낸 편지에 쓰인 스탈린에 대한 조롱이 문제가 되어 소련의 정치범 수용소 굴라크로 보내져 8년간 수용소 생활을 겪었고 그 기간 동안 보고 듣고 겪은 것을 바탕으로 <이반 데니소비치, 수용소의 하루>, <제1원에서>, <수용소 군도> 등의 작품을 써냈다. 이렇듯 파란만장한 알렉산드르 솔제니친의 인생에 비추어봤을 때 이 소설의 흠잡을 데 없는 현실감과 사실성은 당연한 결과라고 볼 수 있다. 그리 길지 않은 이 소설의 내용은 별다를 것이 없다. 수용소 죄수인 이반 데니소비치가 아침에 일어나 밤에 잠들 때까지 겪은 일들을 시간의 흐름에 따라 보여주고 있을 뿐이다. 하지만 이 하루 동안의 이야기가 솔제니친의 인생과 결부되면 그 무게가 달라진다. 허구의 인물, 이반 데니소비치의 하루에 대한 이야기지만 작가가 8년 동안 수용소 생활을 직접 겪은 인물이라는 것을 알게 되는 순간, 이 소설 속 이야기가 허구를 이용해 현실을 묘사하려는 목적으로 쓰인 작품임을 깨닫게 된다. 그 지점에서 <이반 데니소비치, 수용소의 하루>는 그 무엇에도 비할 데 없는 블랙코미디가 된다. 이반 데니소비치의 행동을 보면 웃음이 피식 새어 나온다. 추운 날씨에 일하기 싫어 어떻게든 핑계를 만들어 의무실에서 쉬고 싶어 하는 모습이나(물론 그 추운 날씨가 영하 40도를 넘나들긴 한다.) 담배 한 개비에 행복에 겨워하는 모습, 어떻게든 멀건 죽 한 그릇을 더 차지해보고자 다투고 아부하고 거짓말하는 장면, 몰래 시트에 숨겨 놓은 빵껍질이 사라질까 불안해하는 모습까지. 특히 그중에서도 멀건 귀리죽 한 그릇을 더 먹게 되자 행복감에 물들어 경건하기까지 한 자세로 죽을 말끔히 해치우는 모습은 마치 사탕 하나를 더 받고 너무나 기뻐하는 어린아이를 연상케 한다. 그러나 이야기가 점점 진행될수록 담배 하나를 얻어 피우고자, 혹은 건더기는 보이지도 않는 죽 한 그릇을 더 먹고자 이반 데니소비치가 기울이는 필사의 노력들을 마냥 유머로 받아들일 수만은 없게 된다. 의문이 들고 마는 것이다. 왜 이들은 이 열악한 수용소에서, 바깥에서는 먹지도 않을 멀건 죽 한 그릇을 먹기 위해서 이토록 필사의 노력을 기울여야만 하는 것인가 하는 의문이. '형식적으로 말한다면, 슈호프가 수용소에 들어온 죄목은 반역죄이다. 그는 그것이 사실이라고, 또 일부러 조국을 배반하기 위해 포로가 되었고, 포로가 된 다음 풀려난 것은 독일 첩보대의 앞잡이 노릇을 하기 위해서였다는 사실도 인정했다. 그러나 어떤 목적을 수행할 계획이었는지는 슈호프 자신도, 취조관도 꾸며낼 수가 없었다. 그래서 그냥 목적이 있었다는 것만으로 결정을 내렸다.' (p.83) 이반 데니소비치는 자신도 이유와 목적을 모르는 반역죄를 뒤집어쓰고 이 수용소에 수감되어 온갖 열악한 환경과 불합리한 대우와 고된 노동을 감수하며 10년의 형량이 끝나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살아남기 위해, 10년의 형량이 끝나고 수용소 밖으로 나갈 날만을 손꼽아 기다리며, 온 힘을 다해 수용소 생활을 견뎌내고 있던 이반 데니소비치. 죽 한 그릇에 거의 목숨을 거는 이반 데니소비치의 모습은 분명 기묘하고 웃기지만 그 행동의 밑바탕과 근원에 깔린 당시 러시아의 상황을 생각해보면 웃을 수도 울 수도 없는 상황이 되고 만다. 독자는 스탈린의 독재 체재 아래 얼마나 많은 이들이 누명을 쓰고 수용소로 보내졌는지, 열악한 수용소에서 죄 없는 이들이 몇이나 죽어 나갔는지, 불합리하고 비정상적이고 말도 안 되는 일들이 현실 속에서 어떻게 자행되어 왔는지를 이반 데니소비치와 수용소 안 인물들의 하루를 통해 들여다보게 되는 것이다. 이 소설이 고전이자 명작으로 평가받는 이유는 독자들이 당시의 러시아 상황을 들여다보게 만드는 방식에 있다. 솔제니친은 자신이 8년간 수용소 생활을 겪었음에도 당시의 분노와 좌절, 복수심을 접어두고 철저히 객관적인 거리에서 이반 데니소비치의 하루를 그린다. 만약 글 속에 스탈린의 독재에 대한 통렬한 비판, 불합리하고 비정상적인 공산주의 독재 체제에 대한 분노, 억울한 수용소 생활에 대한 복수심이 직접적으로 거론되었다면 이 소설은 지금까지도 사랑받는 고전으로 남아 있지 못했을 것이다. 솔제니친은 담담하게 한 수용소 죄수의 하루를 그림으로써 독자들이 스스로 당시의 소련 상황에 대해 생각하고 의문을 제기하고 판단하도록 만든다. 말하자면, 잘못을 저지른 누군가에게 당신이 한 일은 잘못됐다고 날 선 비판의 말을 쏟아내는 것이 아니라 그가 저지른 일로 인해 벌어진 결과를 그대로, 가감 없이 눈 앞에 보여준 것이다. 전자와 후자 중 어떤 방법이 당사자가 자신의 잘못을 돌아보도록 만드는 데 더욱 효과적인지는 누구나 알 수 있듯이 후자이며, 솔제니친은 그보다 더 치명적일 수는 없는 비판을 후자의 품위 있는 방식을 통해 당시 소련의 권력자들, 정치인들, 그리고 스탈린에게 가한 것과 다름없다.(소련 정부와 소련 작가 연맹은 자신들의 잘못을 인정하지 않고 노벨상 수상자로 선정된 솔제니친에게 노벨상을 포기하던가, 아님 전향이나 추방 중 하나를 선택하라고 경고하는 찌질함을 보여준다. 솔제니친은 결국 소련을 떠나 노벨상을 수상한다.) 작가로서 당시 소련 사회에 세련된 방식으로 통렬한 비판을 가한 그의 인생에 박수를 보낸다. 위에 인용한 소설 속 문장을 보면 이보다 더한 블랙코미디가 있을까 싶다. 아무도 반역의 목적을 모르는 반역죄라니. 심지어 죄를 지은 당사자조차도 모른다. 더 웃픈 건 이러한 일들이 고작 100년도 안 된 과거에 수없이 벌어졌다는 사실이다. 그래서 우리는 늘 눈을 뜨고 귀를 열고 주변을 살펴야 한다. 언제 내가, 혹은 당신이 이반 데니소비치가 될지 모른다. 소설 속 한 문장 봐라, 지금 슈호프는 사백 그램의 빵과 이백 그램의 빵을 차지한 것이다. 게다가 침대 시트에 이백 그램짜리 빵이 하나 더 있다. 더 이상, 뭘 더 바랄 것인가? (p.18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