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neeckim
6 years ago1,000+ Views
텅 빈, 그리고 모딜리아니. 유난히 호기심도 많고 싫증도 금방 내던 아이였던 내가 그나마 진득하게 오래 붙어 있던 곳은 화실이었다. 숲을 그리라면 썩은 브로콜리 세 그루를 덜렁 그려 놓고 좋다고 검사 맡으러 가서는 "세상에서 가장 힘든 아홉살 내 인생" 타령 따위를 해대며 작업실 한 켠에 맘대로 눌러 앉았다. 다행히 머리에 피도 안 마른 꼬맹이가 인생 타령을 하는게 귀여우셨는지, 선생님께선 그 낯 뜨거운 땡깡을 모두 다 받아 주셨다. 작업실 벽엔 항상 이상한 아줌마 그림들이 큼지막히 붙어 있었는데 머리 색만 다르지 다 비슷 비슷하게 생기고 하나 같이 눈동자에 초점이 없었다. 하루는 선생님께 이 그림들 좀 떼시면 안되냐고 물었다. "왜? 선생님이 제일 좋아하는 작가인데?" "무서워요. 눈에 하나 같이 초점이 없고. 왠지 모르게 기분이 나빠요." "에이, 초연이 다 큰줄 알았는데. 아직 모르는 것도 있구나." "?" "혹시 공허함이라고 아니?" "공허함이요?" "응. 텅 빈, 새하얀 방 한 가운데에 나 혼자 서 있는 것 같은 느낌. 그게 공허함이거든." 연신 고개를 갸웃 거리는 내게 샘은 웃으며 말씀하셨다. "하긴. 아직은 알 나이가 아니지. 알아선 안될 나이인가?" "에이! 그런게 어딨어요!!" "기다려봐. 초연이도 차차 알게될꺼야. 좀 더 키도 커~지고 생각도 커~지면, 알기 싫어도, 어쩔 수 없이 알게 되는 날이 올꺼야." ... 그렇게 키가 세 뼘씩 커지고 생각이 자라날 동안 모딜리아니의 텅 빈 눈동자는 잠시 잊혀져 있었다. ... 얼마만인걸까. 어제 참 오랫 만에 미술관엘 갔다. 시간의 여유는 있어도 마음의 여유를 가질 수가 없었다는 건 그럴 듯한 핑계이자 변명이겠지. 언제나처럼 인상파 쪽으로 발걸음을 옮기다가 얼음보다 차가워 보이는 한 눈동자에 시선이 머물렀다. 그 텅 빈 시선에 걸려 발걸음이 멈추어졌다. 피 튀기는 일상 속에서 간신히 찾은 여유, 그 자유로운 시간 속에서 문득 혼자인 나를 발견했을 때. 미술관을 가득 채운 군중들 속에서 나 혼자 한 그림 앞에서 얼음처럼 굳어 있을 때. 그때 처음 느꼈다. 아. ... 이 느낌이구나. 공허함. 텅 빈 하얀 방 한 가운데에 홀로 서 있는 듯한 느낌. 바삐 스쳐 지나가는 인파 속에서 나 혼자만 멈추어 선 이 느낌. 갑자기 화실 선생님께서 바람처럼 지나가듯 말씀하셨던 그 알기 싫어도 결국엔 알게될 그 날이, 나에게 아무런 마음의 준비도 예고도 없이 불쑥 찾아온 것 같아서, 아주 잠시 동안 눈이 멀고 마음이 얼어 붙어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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왠지 아련해지는 글이네요... 잘 읽었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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