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alrapp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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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전 근무만 마치고 샵에 가서 운동을 했다. 낮에 와보는 샵은 그 느낌이 또 달랐다. 돈 많은 백수가 된 기분이었다. 돈 많은 백수가 되고 싶다. 코치 님은 연휴 동안 먹지 말라는 말은 하지 않겠다고 했다. 다만 연휴 동안 집에서 할 수 있는 운동을 가르쳐주었다. 너무나 신이 났다. 실컷 먹어야지! 어차피 점심을 포함해 한 끼도 먹지 않고 운동을 하고 난 뒤라서, 또 하필 맞은편에 이마트가 있어서 구경도 할 겸 가보았다. 충동구매는 하지 말자 다짐하면서. 다행히 선방한 편이고, 적당히 장을 봐 와 먹었다. 그리고 마지막 우편 발송. 우체국에서 돌아오는 길에는 정말 오랜만에 아이스크림을 좀 사왔다. 나는 생각보다 군것질을 하지는 않는 편인데, 막상 군것질거리를 사서 먹고 있다 보면, 내가 군것질에 크게 중독되지 않는 것이 신기할 정도다. 잘 몰라서 그렇지 디저트 세계에 입문하면 빠져나오기가 정말 어렵다는데, 그걸 십분 이해할 것 같으면서도 일부러 찾지는 않고 있다. 디저트까지 섭렵한다면 아마 나는 온종일 운동만 해도 모자를지 모른다. 어느 순간부터는 믹스 커피도 사실상 거의 마시지 않는 편이다.
5년 전쯤에 담배를 끊었었는데, 주변 사람들은 정말 대단하다고 했다. 그리고 나도 정말 잘한 일이라고 지금까지 생각한다. 또 재작년에는 평생 끊을 생각으로 금주에 들어갔다가 꼬박 1년을 채우고, 결국 실패하고 말았는데 어쨌든 한번 독한 금주를 실행하고 난 뒤라서 그전만큼은 술을 마시지 않게 되었다. 더구나 지금은 운동 중이라, 술을 마시지 않고 있다. 술은 다시 기회를 봐서 끊어볼까 한다.
그런데 곰곰 생각해보면 술이나 담배를 끊는 것이 꼭 대단한 일이라고도 할 수 없는 것은, 그것이 원점에서 플러스 요인이 되는 것이 아니라, 애초에 마이너스 상태를 원점으로 돌리는 것밖에 되지 않기 때문이다. 하지만 우리가 흔히 문제를 풀어나갈 때 정답을 찾기 위해 오답을 하나씩 지워가듯이, 몸에 좋은 습관을 들이기 위해서는 우선 나쁜 습관부터 버리는 것이 선행돼야 한다고 생각한다. 술은 사실 과음만 아니라면 가끔은 괜찮을 수도 있겠다. 그러나 남에게 피해를 주는 수준까지 마셔버린다면, 또 그 빈도가 높아진다면 술은 끊어야 한다. 좋은 사람들과 가끔 좋은 술자리를 갖는 것은 좋지만, 그것이 내 생활에 지장을 초래할 정도라면, 그래서 나에게 피해를 줄 정도라면 끊는 것도 괜찮다.
그리고 살아가며 체득하면 좋은 습관들이 무엇무엇이 있는지 계속 알아보고 있다. 내가 해볼만 한 것인지. 천천히. 그러나 꾸준히. 이렇게 말하니 내가 무슨 개츠비라도 된 것 같지만, 그렇지는 않다. 우선은 나를 계속해서 실험무대에 올릴 것이다. 어쩌면 인생은 죽기 전까지 무언가를 습득하기 위해 끊임없이 연습하는 일들로 채워지는 것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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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이 동물원> 켄 리우
<종이 동물원> / 켄 리우 저 (지극히 주관적인 제 생각을 쓴 글입니다.) <종이 동물원>, 꽤 두꺼운 켄 리우의 단편집이다. 총 열네 편의 소설이 들어있으며 열네 편 전부 SF 혹은 판타지적 요소가 가미된 소설들이다. 작가의 이름에서도 알 수 있듯이 켄 리우는 중국인이다.(물론 어릴 때 미국으로 이민을 가긴 했지만) 그러다 보니 소설 속에서도 중국의 문화, 역사,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가 많이 나오는데 사실 동아시아 역사에서 한, 중, 일을 서로 떼 놓고 얘기할 수는 없지 않은가. 자연스럽게 한국, 조선에 대한 이야기들도 군데군데 출현한다. 어려운 과학적 설정이나 원리 같은 것도 그다지 없어서 한국 독자가 처음 SF 소설을 읽을 때 추천할 만한 소설집이라고 생각한다. 우리(한국)의 이야기가 나오는 만큼 몰입하기 쉬울 테니 말이다.(두껍긴 하지만 단편집이라서 시간 날 때 한편씩 읽기 딱 좋다) 켄 리우의 소설은 지난번에 리뷰했던 테드 창의 소설과는 또 다른 결을 가지고 있다. 테드 창의 소설이 소설을 빙자한 과학적 시뮬레이션(?)에 가깝다면 켄 리우의 소설은 Science "Fiction"이다. 켄 리우의 소설 속에서 과학은 Fiction의 설정이자 배경으로 사용될 뿐이다. 그의 소설에서 중요한 것은 과학을 바탕으로 한 배경 속에서 어떤 이야기가 펼쳐지는가라고 할 수 있다. 켄 리우의 소설에서 중요한 것은 Science가 아니라 Fiction이므로 <종이 동물원>에 실린 소설들에는 SF가 아닌 소설도 많다. 심지어 표제작인 <종이 동물원>부터가 SF가 아니라 판타지 소설에 가깝다. 다른 수록작들도 마찬가지다. <상태 변화>는 현대 판타지이고 <파자점술사>는 중국의 전통적 주술 문화, 파자점이 이야기의 주춧돌이 되며 <즐거운 사냥을 하길>에서는 중국의 요괴와 SF적 요소가 뒤섞여 매력적인 이야기를 이끌어낸다. 이게 켄 리우라는 작가의 강점이라고 생각한다. 그는 SF 작가도 아니고 판타지 작가도 아니며 장르문학 작가라고 한정 짓기도 꺼림칙하다. 그는 장르의 경계나 영역에 얽매이지 않는다. 자신이 하고 싶은 이야기에 SF적 요소가 필요하다면 SF를, 판타지적인 배경이 필요하다면 판타지를, 역사나 신화적 요소가 필요하다면 그 또한 거리낌 없이 소설 속으로 끌어들인다. 정통 SF 소설만을 애정하는 독자라면 이 소설집에 오히려 실망하지 않을까 싶을 만큼 그의 소설에는 경계도 제한도 없다. 개인적으로 켄 리우라는 작가가 이렇게 다양한 소재와 배경을 바탕으로 장르의 경계를 넘나들며 소설을 쓰게 된 데에는 그의 삶이 한 몫하지 않았을까 생각한다. 그는 중국에서 태어나 중국에서 어린 시절을 보내고 청소년기에 미국으로 이민을 오게 된다. 많은 혼란과 의문이 그의 청소년기를 뒤덮었을 것이다. 나는 누구인가. 중국인인가 아니면 미국인인가. 나는 어디에 속하는 것일까. 이렇듯 수많은 의문 끝에 그는 이런 결론을 내리지 않았을까? 내가 어디 속하는지 혹은 어느 집단의 일원인지가 아니라 나 자신이 어떤 사람인지가 중요하다는 결론을. 작가가 된 켄 리우는 마찬가지 생각으로 소설을 써 내려갔을 것이다. 중요한 것은 내가 쓰는 소설이 SF인지, 판타지인지, 역사나 신화 소설인지가 아니라 내가 쓰는 소설이 담고 있는 이야기라는 생각으로. "나는 판타지와 SF를 구별하는 데에는 별 관심이 없다. 관심이 없기로는 '장르 문학'과 '주류 문학'을 구분하는 것 역시 마찬가지이다." 켄 리우는 머리말에서 위와 같이 이야기한다. 그의 소설들을 한편씩 읽어나갈 때마다 계속해서 위의 문장이 떠올랐다. 나는 저 문장이 켄 리우의 소설들에 새로움과 놀라움을 부여했다고 생각한다. 언제나 경계가 허물어질 때, 구분이 사라질 때, 전혀 다르다고 생각했던 것들이 합쳐질 때 새로운 것들이 태어나기 마련이니까. SF를 사랑하는 사람들에게는 <고급 지적 생물종의 책 만들기 습성>과 <상급 독자를 위한 비교 인지 그림책>, <모노노아와레>를, 환상과 판타지를 좋아하는 독자들에게는 <즐거운 사냥을 하길>과 <송사와 원숭이 왕>, <파자점술사>를, 소설 속 드라마를 느끼고픈 이들에게는 <종이 동물원>과 <레귤러>, <역사에 종지부를 찍은 사람들>을 권하고 싶다. 만약 그냥 재미있는 이야기를 읽고 싶은 독자가 있다면 소설집 전체를 앞에서부터 차례차례 읽어나가길 바란다. 소설 속 한 문장 이것이야말로 정상적인(regular) 세상의 모습이다. 명쾌함도, 구원도 없다. 모든 합리성의 끝에는 그저 결정을 내려야 할 순간과 품고 살아가야 할, 그러면서 견뎌야 할 믿음뿐이다.
위대한 개츠비
'위대한 개츠비' / F. 스콧 피츠제럴드 저 (지극히 주관적인 저의 생각을 쓴 글입니다.) 읽어보지는 않았더라도 누구나 제목은 아는 소설이다. 위대한 개츠비. 그만큼 유명하고 많은 사람들에게 영향을 끼친 소설이며 개츠비적(Gatsbyesque)이라는 신조어까지 만들어낸 소설. 처음 이 소설을 읽어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던 건 무라카미 하루키의 노르웨이의 숲을 읽고 나서였다. 노르웨이의 숲 안에서 위대한 개츠비라는 책이 여러 번 언급되는데 시간이 꽤 지나서야 읽게 되었다. 대략적인 줄거리를 알고 있었고, 현대인이 읽기에는 조금 지루할 수도 있는 고전임에도 필자는 꽤 재밌게 읽었다. 그리고 왜 그렇게 대단한 소설로 불리는지에 대해서도 약간은 알 수 있었다. 이 소설은 처음부터 끝까지 닉 캐러웨이라는 인물의 시선에서 쓰였다. 닉은 소설의 등장인물이자 관찰자의 역할을 고루 수행하며 때로는 이야기의 밖에서, 때로는 안에서 이야기를 서술한다. 닉을 제외한 주요 등장인물은 개츠비, 데이지, 톰이다. 개츠비는 닉의 옆집인 엄청난 대저택에 사는 인물이다. 매일 본인의 저택에서 호화롭고 사치스러운 파티를 열어 사람들을 초대하지만 그 누구도 개츠비의 정체에 대해서는 제대로 아는 바가 없고 왜 이런 파티를 매일 여는지에 대해서도 알지 못한다. 톰과 데이지는 웨스트 에그(닉과 개츠비가 사는 곳) 맞은 편의 이스트 에그에 살고 있는 부부이다. 데이지는 닉의 친척이며 어릴 적부터 부유한 집안에서 살아온 여성이고 톰은 대학생 시절 유명한 미식축구 선수에 마찬가지로 부잣집 출신이다. 이렇게 세 인물에 닉까지 네 인물이 벌이는 이야기가 위대한 개츠비의 주 내용이다. 소설의 스토리는 간단하다. 개츠비는 5년 전 데이지와 서로 사랑했으나 가난했던 그는 결국 데이지와 이어지지 못하고 데이지는 부잣집 도련님에 유명한 미식축구 선수였던 톰과 결혼하게 된다. 그러나 데이지를 잊지 못했던 개츠비는 자신의 가난함이 데이지와의 사이에 걸림돌이었다고 생각해 5년간 온갖 불법적인 일들에 손을 대 엄청난 부를 쌓는다. 부자가 된 개츠비는 데이지가 살고 있는 이스트 에그와 만 하나를 사이에 두고 있는 웨스트 에그에 대저택을 지은 후 매일매일 호화로운 파티를 벌인다. 언젠가 데이지가 이 파티에 와서 자신을 보게 되기를 바라며. 그러던 차 옆집에 살던 닉이 데이지와 친척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고 닉을 통해 데이지를 만나 다시 한번 사랑을 확인한다. 하지만 데이지는 결국 톰과 개츠비 사이에서 갈팡질팡하다가 톰을 선택한다. 그리고 개츠비는 데이지의 죄를 뒤집어쓴 채 죽음을 맞이하고 데이지와 톰은 죽은 개츠비를 뒤로 하고 도망친다. 가장 먼저 느낀 건 개츠비의 순수함이었다. 5년 전의 사랑을 잊지 못하고 그녀와 어울리는 사람이 되기 위해 엄청난 노력으로 부를 쌓았지만 데이지의 앞에 직접 나타나지도 못하고 그저 계속해서 호화로운 파티를 여는 개츠비. 한 번이나마 데이지가 자신의 저택에서 뿜어지는 화려한 불빛들을 봐주기를 바라며 파티를 열던 개츠비에게 5년 동안 모든 것을 바쳐 사랑했던 여자는 점점 커져갔다. 닿을 수 없는 꽃처럼. 그러나 다시 만난 그녀는 상류층의 지위와 위치를 버릴 수 없는 여성이었고 하류층인 데다 불법으로 돈을 쌓아 올린 개츠비를 결국에는 저버린다. 그런 그녀의 죄를 뒤집어쓰고 죽게 된 개츠비. 너무나 순수하고 열정적인, 그래서 언제든지 쌓아 올린 부를 데이지를 위해 던져 버릴 수 있는 그이기에 스콧 피츠제럴드는 위대한을 개츠비의 앞에 붙이지 않았나 생각한다. 이 소설은 1920년대 미국의 모습을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감당할 수 없는 경제 호황과 그로 인한 호화롭고 사치스러운 생활이 이어지는 나날들. 물질주의가 넘쳐흐르고 그에 다른 모든 것들이 잠겨버린 사회. 그 당시의 미국 사회를 그대로 대변하는 인물이 톰과 데이지이고 작가가 제시한, 우리가 지켜야 할 것들을 보여주는 인물이 개츠비가 아닌가 생각한다. 톰은 극단적인 인종차별주의자이며 데이지를 두고 다른 여인과 외도를 하고 있고 마지막에는 결국 개츠비가 죽도록 만든다. 부잣집 도련님에 상류층의 인물이지만 부도덕하고 추잡한 인간성을 가진 인물이다. 데이지 또한 남편의 외도를 알고 있고 그를 경멸하지만 결국 상류층의 지위를 버릴 수 없기에 개츠비를 저버리고 톰을 선택한다. 심지어 자신의 잘못까지 개츠비에게 떠넘겨 버린다. 그러나 개츠비는 그들과 달랐다. 톰과 데이지가 추구하던 돈, 물질, 육체적인 쾌락, 상류층의 지위와 권력보다 중요한 것이 그에게는 있었다. 5년 전에 자신이 느꼈던 데이지에 대한 사랑, 그것을 위해 개츠비는 모든 것을 바친 것이다.  그 당시의 미국 사회는 전체가 물질주의에 찌들어 있었기에 오히려 톰과 데이지가 일반적인 보통 사람이라고 볼 수 있다. 물질과 쾌락이 모든 것에 앞서는 시대이니 말이다. 한 개인이 사회의 흐름을 거스르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하지만 그 흐름을 거슬러 자신만의 가치를 발견한 개츠비이기에 위대한 개츠비인 것이다. 이 소설 속의 개츠비는 당시 사람들에게 지금 미국 사회가 얼마나 잘못되어 있는지, 지금 사회가 잃어버린 것이 무엇인지 깨닫게 만드는 경종이 되었을 것이고 그 점이 바로 이 소설을 위대한 고전의 반열에 올려놓지 않았나 생각한다. 100년이 지났음에도 재미있는 소설이다. 어떻게 보면 연애소설로 볼 수도 있기에 접근하기도 좋고 현대인에게도 통하는 부분이 있다. 고전을 읽고 싶어 하는 사람들에게 추천할 만한 소설이다. 다 읽어갈 때쯤 어느새 개츠비에게 이입해 있는 자신을 볼 수 있을 것이다. 소설 속 한 문장 : 개츠비는 여전히 두 손을 호주머니에 찌른 채 억지로 아주 편안한 척하며, 심지어는 좀 따분하다는 듯 벽난로 장식에 몸을 기대고 있었다. (리뷰를 원하시는 책을 댓글에 적어주시면 직접 읽고 리뷰해보도록 하겠습니다.)
시간을 파는 상점
'시간을 파는 상점' / 김선영 저 (지극히 주관적인 저의 생각을 쓴 글입니다.) 시간을 파는 상점이라는 제목 자체가 호기심을 자극했다. 저 제목 하나에서 무궁무진한 이야기가 나올 수 있을 것 같은 느낌이 드는데 과연 어떤 방향으로 뻗어나갈까 알아보자는 생각으로 집어들고 읽기 시작했다. 모르고 읽기 시작했지만 청소년 문학상 수상작이었는데 필자가 항상 청소년 문학을 읽을 때마다 느끼지만 왠지 모르게 청소년 문학에는 마음이 따뜻해지게 만드는 마법이 있다. 이 소설도 필자가 처음 상상했던 방향과는 달랐지만 다 읽고 책장을 덮을 때에는 가슴 한쪽이 따뜻해졌다. 주인공 백온조는 소방관인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어머니와 둘이 살아가고 있다. 고등학생인 온조는 스스로 돈을 벌기 위해 아르바이트를 시작하지만 번번이 실패하고 만다. 그러다 아르바이트생이 받는 시급에 대해 생각하던 온조는 아예 자신의 시간을 파는 것은 어떨까 생각하다 인터넷 카페를 통해 시간을 파는 상점을 열게 된다. 온조 자신의 시간을 이용해 의뢰자가 원하는 부탁을 들어주는 상점이다. 거기에는 몇 가지 원칙이 있다. 1. 자신의 능력 이상은 거절할 것. 2. 옳지 않은 일은 절대 접수하지 않을 것. 3. 의뢰인에게 마음이든 뭐든 조금의 위로라도 줄 수 있는 일을 선택할 것. 4. 무엇보다 시간이 돈이 될 수 있다는 것을 확실히 보여줄 것. 이상의 네가지 원칙을 가지고 시간을 파는 상점은 운영하게 된 온조는 여러 의뢰자들의 부탁을 받고 그것을 해결해나가며 시간이란 무엇인가에 대해 점점 깊게 생각하게 된다. 하지만 악플, 주변인의 시선, 이것이 도덕적으로 맞는 일인가에 대한 스스로의 의문 등 여러 가지가 겹치며 상점의 운영에 위기를 겪게 되는 온조가 성장해가는 이야기가 소설의 주된 내용이다. 사실 필자가 처음 생각했던 소설의 내용은 실제로 시간을 파는 약간의 판타지가 가미된 내용이었다. 누군가가 바꾸고 싶은 과거의 시간을 다시 팔거나 하루 24시간이 부족한 이들에게 추가적인 시간을 팔거나 하는 상점의 이야기를 생각했다.(물론 거기에는 대가가 따를 테고 그 대가가 소설의 주된 이야기가 되지 않을까?) 하지만 이 소설은 어디까지나 현실에 바탕을 둔 소설이었다. 주인공 온조가 직접 자신의 시간을 팔아 의뢰인의 부탁을 들어주는 것. 어떻게 보면 별 것 아니기도 한 이야기를 가지고 이 소설은 시간이라는 심오한 개념에 대해 생각하게 만든다. 시간이란 건 누구에게나 한정되어 있다. 부자도, 가난한 사람도 하루에 24시간 밖에 사용할 수 없다. 그렇다면 모든 사람에게 시간의 가치는 같을까? 그건 아니라고 생각한다. 시간을 가치 있게 쓰는 사람이 있는 반면 아닌 사람이 있고 24시간도 부족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는 반면 24시간이 차고 넘친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이 소설에 나오는 혜지라는 아이를 보면 엄마와 아빠의 실에 묶여 자신이 하고 싶은 것은 무엇 하나도 제대로 하지 못한다. 동화를 쓰고 싶지만 결사 반대하는 부모님 밑에서 하기 싫은 공부를 하루 종일 해야하는 그 아이는 부모님의 감시 아래 친구도 본인 마음대로 만들지 못한다. 그런 아이에게 시간이란 어떤 의미가 있을까. 자신에게 주어진 시간을 자신이 하고 싶은 일에 쓰지 못하는 아이에게 시간이란 그저 흘러가는 것일 뿐이다. 현대의 청소년들 중에는 그런 아이들이 많을 것이다. 자신에게 주어진 시간을 오롯이 본인에게 쓰는 것이 아니라 부모님의 소망을 이루기 위해 사용하는 아이들. 그런 아이들에게 시간을 올바로 쓰는 법을 알려줘야 하는 것이 부모님과 어른들의 의무가 아닐까. 강토와 할아버지의 이야기에서는 시간이 가진 치유의 힘에 대해 생각하게 만든다. 혼자 쓸쓸하게 돌아가신 할머니와 그런 할머니를 찾아뵙지도 않는 아버지. 그리고 그런 아버지에게 유학 비용을 돌려내라는 소송을 청구한 할아버지. 그 사이에서 어린 강토는 씻지 못할 큰 상처를 받았을 것이다. 자신이 사랑하는 가족들끼리 서로 칼을 들이대는 상황이란 끔찍할 테니까. 그러나 시간이 지날수록 계속해서 쓰라릴 것만 같던 상처도 아물어 가고 할아버지와 아버지 간의 날 선 감정도 서서히 무뎌져 간다. 결국 시간이 필요한 것이다. 서로를 용서하고 이해하고 다시 얼굴을 마주보기 위해서는. 아마 거의 모든 사람들이 시간을 통한 치유를 겪어보았을 것이다. 정말 다시는 얼굴도 보고싶지 않던 가족이나 친구도 시간이 지나면 그 감정이 옅어지듯이 시간이란 서로의 상처를 치유하는 힘을 가지고 있지 않나 생각해본다. 따뜻한 소설이다. 인물들 하나하나가 통통 튀고 시간에 대해 인물들의 입을 통해 말하는 작가의 이야기는 시간이란 개념에 대해 다시 한 번 생각하도록 만든다. 특히 청소년들을 주인공으로 펼쳐지는 이야기인만큼 독자들의 학창시절을 생각나게 하고 이는 저절로 독자들의 시간을 과거로 되감아 마음이 따뜻해지도록 만든다. 삶이 조금 버거울 때 읽어보면 좋은 소설이다. 소설 속 한 문장 : "시간이 필요하겠지. 내게 시간이 필요한 것처럼 강토에게도 말이야."
데드 하트
'데드 하트' / 더글라스 케네디 저 (지극히 주관적인 저의 생각을 쓴 글입니다.) 더글라스 케네디의 책을 좋아하는 편이다. 빅픽쳐는 물론이고 템테이션, 스테이트 오브 더 유니언, 파리5구의 여인, 비트레이얼까지 늘 재미있게 읽었다. 이번에 읽은 데드 하트도 흥미진진했다. 더글라스 케네디 소설의 특징은 술술 읽히는 가독성과 빠른 스토리 진행, 그로 인해 지루할 틈 없이 긴장감을 유지할 수 있다는 점인데(필자가 개인적으로 느끼는 특징이다.) 데드 하트도 고스란히 그 특징들을 가지고 있었다. 비슷한 개성의 주인공들과 스토리 전개가 단점일 수도 있지만 그걸 뛰어넘어서 늘 재미있는 소설을 써낼 수 있다는 것이 부러울 뿐이다. 데드 하트의 주인공인 닉은 지방 신문사를 전전하며 먹고사는 기자다. 특이한 점은 10년이 넘는 기자 경력에도 대형 신문사에는 절대 지원하지 않고 소규모 지역 신문사들, 그것도 한 신문사당 2~3년 간격으로 옮겨가며 취직을 한다는 것이다. 보스턴의 신문사로 직장을 옮기려던 닉은 우연히 호주의 지도를 보고 아무것도 없는 야생의 땅, 호주로 떠나기로 한다. 그렇게 호주의 최북단 다윈에서부터 밴을 타고 아래로 내려가기 시작한 닉은 앤지라는 여성을 만나게 되고 그녀가 살던 마을로 납치당한다. 앤지가 약을 투여해 의식이 없는 상태로 강제 결혼을 하고 마을 사람들의 시선에 의한 감금생활을 하게 되는 닉. 앤지가 사는 울라누프라는 마을은 호주 지도에도 없는, 네 가족이 마을 구성원의 전부인 마을이고 그곳에서 앤지의 아빠인 대디는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두른다. 황무지 한가운데, 마을을 가장한 감옥에 갇힌 닉은 그 구성원 안에서 유일하게 대화가 통하는 크리스탈과 함께 마을을 탈출하기로 한다. 처음 황무지를 횡단하는 닉의 모습은 힘들고 피곤해 보이기도 하지만 한편으로는 평화롭다. 그런 스토리는 앤지를 만나 납치당해 울라누프라는 마을에 당도하게 되면서 스릴러로 바뀐다. 그때부터 급격하게 진행되는 닉의 탈출을 위한 처절한 노력은 손에 땀을 쥐게 만든다. 항상 느끼지만 이 작가는 빠른 서사 진행으로 긴장감과 속도감 있는 글을 참 잘 쓰는 것 같다는 생각을 한다. 책이 그리 얇지도 않은데 읽다가 정신을 차려보면 어느새 마지막 페이지를 넘기고 있으니 말이다. 어디에도 소속되지 않고 책임도 지지 않고, 되는대로, 자신이 편한 대로 살아가면 그만이었던 닉은 울라누프에서 탈출을 시도하면서 그동안 자신이 낭비해왔던 삶이란 것이 얼마나 소중한지 깨닫는다. 하루하루 아무 의미도 없고 목적도 없이 감시당하며 사는 울라누프에서의 시간이 닉에게 탈출과 삶에 대한 열정을 끊임없이 불태우도록 만든 것이다. 인간이란 참 미련하다. 가지고 있던 것을 잃어버리고 나서야 자신이 가지고 있던 것이 얼마나 소중하고 간절한 것인지 깨닫게 된다. 주체적으로 자신의 삶을 살아가야 하는 이유를 모든 자유와 의지를 박탈당한 그때에야 온몸으로 절절히 느끼게 되는 것이다. 과연 나는 지금의 삶을 후회 없이 살아가고 있는지 생각하게 만드는 책이었다.  한편으로는 카뮈의 이방인이 생각나기도 했다. 뫼르소가 죽기 직전에서야 삶에 대한 자신의 감정을 이해하고 한껏 터트린 가까스로 울라누프를 탈출해 자신이 앞으로 어떻게 살아갈지 생각하는 닉의 모습과 비슷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데드 하트를 한 줄로 말하자면 '이야기 속에 빠져 정신없이 읽고 나면 삶의 의미에 대해 생각하게 되는 책'이다. 소설 속 한 문장 : 마침내 나는 나의 고독, 나의 뿌리가 없다는 사실이 두려워졌다.
<오리엔트 특급 살인> 애거서 크리스티
<오리엔트 특급 살인> / 애거서 크리스티 저 (지극히 주관적인 제 생각을 쓴 글입니다.) 생애 두 번째로 읽은 애거서 크리스티의 소설이다. 첫 번째는 중학교 시절에 처음 읽었던 <그리고 아무도 없었다>인데 읽고 나서 굉장히 충격을 받았던 기억이 있다. 어떻게 이런 트릭을 생각해내지?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엄청난 결말이었다.(사실 그 이전에 추리소설을 별로 읽은 적이 없어서 더 충격이 컸던 것 같긴 하지만 그럼에도 명작은 명작이다. 애거서 크리스티 소설에 입문하고 싶다면 <그리고 아무도 없었다>로 해보는 걸 추천한다.) 그 뒤로 한동안 추리소설과는 멀어진 채 지내다 오랜만에 읽게 된 게 바로 이 소설, <오리엔트 특급 살인>이다. 사실 이 소설을 읽기 전에 영화로 만들어진 <오리엔트 특급 살인>을 봤었다. 그래서 결말을 어느 정도 알고 있기에 재미가 덜하지 않을까 생각했는데 전혀 아니었다. 역시 손에 꼽히는 애거서 크리스티의 소설 가운데 하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스토리는 간단하다. 폭설로 도중에 멈춰버린 기차 안에서 한 남자가 살해당한다. 그것도 밀실에서. 그런데 하필 기차에는 위대한 탐정 에르퀼 푸아로가 타고 있었고 그는 명석한 두뇌로 승객들의 증언, 그리고 증거를 통해 놀랄만한 추리를 해 나간다. 폭설에 갇힌 열차 안에서 도망갈 수 있는 사람은 없으니 승객 중에 범인이 있을 것이 자명한 상황. 푸아로의 추리를 따라 진범에 도달하는 과정이 소설의 전부다. 사실 추리 소설에서 중요한 건 명석한 두뇌의 탐정이 증거와 증언을 통해 놀라운 추리를 완성해 나가는 과정을 목격하는 것이다. 그런 면에서 볼 때 이 소설은 매우 뛰어난 추리소설이다. 먼저 모든 증언과 증거를 독자들에게 던져주고 충분히 그것을 통해 진범을 추리해 볼 시간을 준다. 그러나 물론 대부분의 독자는 그것들에서 진실을 찾아내지 못한다. 혹 증거나 증언의 모순을 찾아내더라도 그것을 해결할 수 있는 진실에 도달하는 것은 매우 뛰어난 논리력과 추리력, 심리를 파악하는 능력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그렇게 독자의 궁금증은 최고조에 이르게 되고 그때 우리의 회색 뇌세포, 에르퀼 푸아로가 등장해 단 하나의 진실을 낱낱이 드러내는 추리를 보여준다. 결말의 추리에서 독자는 지적 카타르시스를 느끼게 된다. 연관성이 없어 보이는 증언들 사이의 숨겨진 다리를 찾아내고, 여러 증거와 증언들의 모순을 단번에 깨버리는 논리적 설명을 보여주며 결국 단 하나의 진실에 다가가는 푸아로의 추리가 마치 논리 문제나 어려운 퍼즐을 해결하는 듯한 느낌을 주는 것이다. 이 소설은 그러한 추리소설의 목적을 탁월하게 구현하며 독자에게 즐거운 독서를 제공한다. 하나 더 이 소설의 장점을 꼽자면 캐릭터 구성 능력이다. 소설 속에는 객차의 승객 열두명과 차장들, 주인공 푸아로, 의사인 콘스탄틴, 그리고 기차 회사의 중역 부크가 등장한다. 보통 이렇게 많은 인물이 등장하면 서로 헷갈리거나, 비중이 적은 인물은 기억을 하지 못하기 마련인데 이 소설은 그렇지 않다. 각 인물들의 외모, 성격, 나이, 국적 등이 전부 특색 있고 대부분의 인물이 성격에 따라 서로 다른 말투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대화만 봐도 어떤 인물이 말하는지 바로 알 수 있을 정도다. 이렇게 많은 인물이 각각의 매력을 가지도록 만드는 건 정말 어려운 일이다. 그러나 애거서 크리스티는 그걸 해냈다. 추리와 진실의 놀라움과 별개로 이 소설이 가지는 또 하나의 놀라움이다. 아쉬운 점을 꼽자면 국가나 인종에 대한 편견이 소설 속에 그대로 반영되었다는 점과 서술 상에서 너무 많은 인물의 시점을 왔다 갔다 하기 때문에 어떤 인물의 시점인지 헷갈리는 부분이 있다는 점을 들 수 있다. 물론 당시 시대 상황을 생각해보면 국가나 인종에 대한 편견이 지금보다 훨씬 강했기 때문에 어느 정도 이해할 수 있겠지만 현대의 독자가 읽을 때 아쉬운 부분인 것은 확실하다. 독자가 읽을 때 인물의 시점이 헷갈리는 부분이 있다는 점은 소설로써의 완성도를 조금 떨어트리는 요인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물론 그런 부분이 많지는 않지만 존재하고 있다는 것이 아쉬울 따름이다. 훌륭한 '추리'소설이자 추리'소설'이다. 추리의 재미와 놀라움도 확실히 잡았고 독자에게 질문을 던지고 생각을 하게 만드는 소설의 면모도 충분히 갖췄다. 애거서 크리스티의 소설에 관심이 있지만 아직 읽어보지 못한 독자라면 <오리엔트 특급 살인>을 추천하고 싶다.(물론 <그리고 아무도 없었다>도 추천한다.) 소설 속 한 문장 "그렇다면 두 번째 추리를 내놓아야겠군요. 하지만 첫 번째 추리를 너무 성급하게 포기하지는 마십시오. 나중에라도 그것에 동의하게 될지 모르니까요."
설(창작 단편)
한 노인이 툇마루에 앉아 털신에 발을 집어넣는다. 오래되어 겉이 반질반질하다. 한참을 씨름하다 겨우 두 발을 신에 집어넣고 마당으로 내려선다. 마당에 선 노인은 무릎이 시린지 손을 무릎에 대고는 가만히 서 있다. 입에서는 오메 하는 소리가 흘러나온다. 무릎에서 손을 뗀 노인은 구부정한 허리에 한 손을 대고 걸음을 옮긴다. 산책을 나가는 건가 싶어 아까부터 안절부절 못하던 마당의 하얀 똥개 한 마리가 결국 웡웡 짖어 대기 시작한다. 노인이 다가가니 똥개가 배를 드러내고 드러눕는다. 노인이 헥헥대며 꼬리를 흔드는 개의 배를 긁는다. “복실아. 오늘은 이 할미가 무릎이 아픈께 산책은 나중에 가자잉.” 노인이 손을 떼고 일어나 대문으로 향한다. 말을 알아들었는지 복실이는 짖는 걸 멈추고 조용히 낑낑댄다. 노인이 나가고 파란 철문이 철컹 소리를 내며 닫힌다. 철문을 나선 노인이 논두렁을 따라 걷는다. 중간중간 아픈 무릎을 부여잡고 쉬어가며 2~30분쯤 걸었을까, 저 앞에 버스 정류장이 보인다. 아무도 없는 정류장, 노인은 아이고 소리를 내며 파란색 페인트가 다 벗겨진 의자에 앉는다. 추운 날씨에 노인의 귀가 빨갛다. 의자에 앉아서도 노인은 연신 무릎을 두드린다. 한참 무릎을 만지작거리며 추위를 견디던 노인의 귀에 버스 엔진소리가 들린다. 노인은 목도리를 고쳐 메고 자리에서 일어나 고목 같은 손을 흔든다. 버스가 노인의 앞에 멈추고 문을 열자 노인은 조심스럽게 계단을 오른다. 노인이 올라서기 무섭게 문이 닫히고 버스가 출발한다. 버스가 시장 앞에 서고 문이 열리자 노인이 천천히 내려선다. 문이 닫히고 출발하는 버스를 뒤로 하고 노인은 시장 안으로 걸음을 옮긴다. 설이 얼마 남지 않았지만 근처에 생긴 마트 때문인지 사람이 별로 없다. 노인이 한 옷가게 안으로 들어선다. 뽀글거리는 파마를 한 아줌마가 노인을 맞는다. “아이고, 우리 어머니 어떤 거 사러 오셨어?” 노인이 가게를 휘휘 둘러보더니 한쪽을 가리키며 말한다. “쩌그 있네. 내복 사러 왔는디 요즘 애기들은 어떤 걸 좋아한당가?” “애기가 몇살인디?” 아줌마의 말에 노인의 얼굴에 주름진 미소가 번진다. “손주가 7살이고 손녀가 5살이여. 지 애비랑 애미 똑 닮아가지고 을매나 잘생기고 이쁜디. 게다가 우리 변호사 아들 내미 머리를 물려받아갖고 머리들이 비상혀.” “오메, 아들이 변호사여? 부러워 죽겄네. 우리 아들은 스물 여덟이나 먹었는디 아직도 백수여, 백수.” 한숨을 내쉬며 내복들을 뒤적거리던 아줌마의 손에 파란색과 분홍색 내복이 들려 올라온다. “요즘 애기들이 제일 좋아하는 만화 캐릭터 그려진 내복이여. 5살, 7살이면 이게 좋을 것 같은디?” “박스 열어봐도 된당가?” 아줌마가 고개를 끄덕이자 노인이 박스를 열고 꼼꼼하게 내복을 살핀다. 바느질이 성긴지, 천은 좋은 걸 썼는지, 색은 빠지지 않을지. 한참 내복을 만지작거리던 노인이 박스를 닫고 건넨다. “이걸로 줘. 얼마여?” 아줌마가 능숙하게 박스를 포장한다. “원래 이만원씩인디 그냥 두 개에 삼만 오천원만 줘요. 포장도 해줄게.” 노인이 바지 주머니를 뒤적거리더니 만원 짜리 세 장을 꺼낸다. “삼만원 밖에 없는디 좀만 깎아줘. 다음에 또 팔아줄텐께.” “아이고, 안돼요 어머니. 삼만 오천원도 엄청 깎은 거에요. 남는 것도 없어.” 한참을 실랑이하더니 결국 삼만 이천원에 합의를 본다. 꼬깃꼬깃 접혀 있는 천원 짜리 두 장을 주머니에서 꺼낸 노인이 삼만원과 합쳐 지폐 다섯장을 건넨다. “어머니 다음에 꼭 오셔서 더 팔아줘야 돼요. 진짜 내가 손해 보면서 드린거야.” 노인이 내복이 담긴 봉지를 받아 들며 말한다. “걱정하덜 말어. 이번 설에 아들 내미랑 손주들 오면 꼭 데리고 올텐께.” 노인이 두 손에 묵직한 비닐을 든 채 파란 철문을 열고 집으로 들어선다. 엎드려 있던 복실이가 벌떡 일어나 꼬리를 흔들며 노인의 뒤를 따른다. 툇마루에 비닐 봉지 두 개를 올려놓은 노인이 오메오메 소리를 내며 허리와 무릎을 연신 두드린다. 얼핏 보이는 비닐 봉지 안에는 곶감과 과자, 내복 등 여러 가지가 어지럽게 쌓여 있다. 시간이 지나 허리와 무릎에서 손을 뗀 노인이 비닐 봉지를 들고 집 안으로 들어간다. 주방으로 들어간 노인은 과일과 과자, 곶감들을 냉장고와 찬장에 가지런히 정리하고는 빈 비닐 봉지를 주방 한 구석 비닐 봉지가 가득 들어 있는 박스 안에 구겨 넣는다. 정리를 끝낸 노인의 귓가에 따르릉 거리는 전화 벨소리가 들린다. 노인은 내복 두 개를 들고 안방으로 향한다. 노인은 들고 온 내복 두 개를 펴져 있는 이부자리 위에 조심히 올려 놓고 유선 전화의 수화기를 집어 든다. “여보세요.” 노인의 얼굴이 꽃처럼 활짝 피어난다. “오메, 둘째냐. 잘 있냐잉?” 수화기 너머로 “잘 지내시죠 어머니” 하는 남자의 목소리가 얼핏 들린다. 노인이 다시 입을 연다. “그래 잘 있제. 너가 이번 설에 손주들이랑 며느리랑 내려온다고 해서 니 좋아하는 곶감이랑 애기들 선물도 다 사놨다. 니 형은 이번에 일이 바빠서 못 오고. 근디 언제쯤 내려오냐? 미리 방도 좀 뎁혀 놓고 해야된께.” 수화기에서 남자의 목소리가 조금씩 들린다. 꽤 길게 이어지는 말을 듣고 있던 노인이 대뜸 말한다. “괜찮은께 걱정 말어. 못 올수도 있제. 변호사가 오죽 바쁘겄냐. 다음에 보면 된께 엄마 걱정은 하덜 말고 일 열심히 혀. 니가 잘되는 것이 엄마한테 효도하는 것이여.” 노인이 입을 다문다. 가만히 있던 노인이 다시 입을 연다. “그려. 일 잘하고 항시 몸 건강하고. 다음에 시간 되면 내려오그라잉.” 노인의 얼굴에 피어났던 꽃은 어느새 흔적도 없이 시들었다. 수화기를 내려놓은 노인은 몸을 일으켜 이부자리 위에 있는 내복 두 개를 집어 든다. 자개로 된 옷장 문을 열자 한 구석에 무언가 쌓여있다. 어린이들이 입을 법한, 캐릭터들이 그려진 내복 박스 여러 개가 먼지가 쌓인 채 조용히 자리를 지키고 있다. 노인은 쭈글쭈글한 손으로 위에 쌓인 먼지를 슥슥 쓸어내고 그 위에 새로 산 내복 두 개를 올려놓는다. 노인은 옷장 문을 잡고 한참을 가만히 서서 내복들을 바라본다. 늙은 고목처럼 구부정한 모습으로 쌓인 내복들을 응시하던 노인이 천천히 옷장 문을 닫는다. 노인이 툇마루에 나와 앉는다. 앉아 있는 노인의 옆으로 복실이가 천천히 다가오더니 풀쩍 뛰어올라 노인에게 몸을 기대고 눕는다. 노인은 마디가 불거진 마른 손을 들어 복실이의 하얀 털을 쓰다듬는다. 가만히 앉아서. 하염없이.
<세계문학 단편선 - 플래너리 오코너> 플래너리 오코너
<세계문학 단편선 - 플래너리 오코너> / 플래너리 오코너 저 (지극히 주관적인 제 생각을 쓴 글입니다.) 플래너리 오코너는 1925년 미국 남부 조지아 주에서 태어나 서른아홉 살에 루푸스 합병증으로 죽었다. 두 편의 장편소설과 여러 단편소설들을 남겼다. 그리 많지 않은 작품 수에도 그녀의 이름을 딴 문학상이 생길 만큼 플래너리 오코너가 미국 문학계에 끼친 영향은 적지 않다. 현대문학에서 나온 플래너리 오코너 단편선은 방대한 분량(700페이지가 넘어가는)을 자랑한다. 총 서른한 편의 중, 단편소설이 실려 있다. 서른한 편 중 몇 편은 좋았고 몇 편은 굉장히 좋았으며 그중에서도 몇 편은 뭐라 말하기 힘들 정도로 뛰어났다. 좋지 않은 소설은 없었다. 미국 문학을 많이 읽는 편은 아니지만 플래너리 오코너의 소설에는 레이먼드 카버, 줌파 라히리 등의 소설이 주는 것과 비슷한 느낌이 있다. 명확하게 콕 집어서 이야기할 수는 없지만 소설 속에서 인간의 인식과 세계가 확장되는 어떤 지점이 주는 삶과 동떨어진 듯한, 일상 너머의 진실을 조금 엿본 듯한 순간이 바로 그것이다. 플래너리 오코너의 소설에서 그러한 계시(플래너리 오코너 단편선 옮긴이의 말을 빌리자면)의 순간은 그녀가 경험해 온 미국 남부의 시대상, 가톨릭 신앙과 겹치며 독특한 울림을 자아낸다. 단언할 수 있는 것은 나는 그 울림을 지금까지 읽어온 소설 중 오로지 플래너리 오코너의 작품에서만 경험할 수 있었다. 오코너의 소설은 대부분 미국 남부에서 가치관이 뒤바뀌는 시대를 배경으로 한다. 노예제가 폐지되고 법적으로는 흑인과 백인이 동등하지만 여전히 남부에서는 암묵적인 인종 분리가 행해지고 과학과 이성이 점점 종교와 신앙의 자리를 침범하며 미국 북부에서 인종과 종교, 합리를 대하는 관점과 남부에서 그것들을 대하는 관점 사이의 틈이 걷잡을 수 없이 벌어진 시대. 오코너의 소설들은 그 시대의 다양한 인간 군상들을 주인공으로 내세운다. 과거의 영광에 사로잡힌 늙은 군인도 있고 백인과 흑인이 서로 평등하다는 것을 도저히 받아들이지 못하는 백인 또는 흑인도 있으며 종교에 충실한 인물이나 종교 따위는 믿지 않고 과학과 이성을 맹신하는 사람도 있다. 오코너의 소설은 자신의 세계에 갇혀 있던 인물들이 어떤 사건을 통해 가치관과 인식의 흔들림을 경험하고 진실을 대면하는 순간을 보여준다. 독자는 소설 속 인물과 그 순간을 함께 경험함으로써 지금까지도 통용되는 진실의 일부를 엿보게 된다. 그때의 감각은 말로 설명하기 힘들다. 벗어날 수 없고 피할 수 없는 어떤 존재 앞에서 인간의 무력함을 체감하는 느낌과 약간은 비슷하다고 해야 할까. 그 경험만으로도 이 단편선을 읽을 가치는 충분하다. 개인적으로 추천하는 작품은 <제라늄>과 <행운>, <인조 검둥이>다. 소설 속 한 문장 "나는 같은 말을 두 번 하지 않아요." 남자가 말하고 창문을 떠났다.
나는 마음 놓고 죽었다
'나는 마음 놓고 죽었다' / 임선경 저 (지극히 주관적인 저의 생각을 쓴 글입니다.) 필자는 이 소설을 밤의 고속버스 안에서 읽었다. 마지막에 연이 엄마, 정순, 숙이 엄마 셋이 문방구집 아줌마와 드잡이질을 하는 걸 보고 그때서야 마음을 놓았다. 아, 연이는 자기를 아껴주는 사람들 사이에서 무럭무럭 사랑을 배우며 자라나겠구나. 그래서 연이 엄마가 마음 놓고 연이의 곁을 떠날 때, 나도 마음 놓고 책을 덮을 수 있었다.(사실 후반부에는 눈물이 나서 훌쩍대며 읽었다.) 이 소설은 이미 죽어서 귀신이 된 연이의 엄마의 눈으로 1970년대의 풍경을 생생하게 보여준다. 필자는 그 뒷세대에 어린 시절을 보낸 사람이지만 그때의 정서는 아직 1970년대와 통하는 부분이 있었기에 필자의 경험에 빗대어 이 소설을 이해하며 읽을 수 있었다. 그때는 집 앞에 나가면 언제나 같이 깡통차기를 할 아이들이 있었고 아이들이 놀고 있는 곳 옆의 정자에는 할머니, 아줌마들이 삼삼오오 모여 이야기를 하며 쉴 새 없이 무언가를 하고 있었다. 우리 집 앞에는 항상 할머니가 비닐 위에 말려놓은 빨간 고추가 있었다. 그 고추는 무슨 맛일까 궁금했었던 기억이 난다. 조금 잘 산다는 아이의 집 책장에는 소년소녀 세계명작이나 위인전집이 1번부터 순서대로 쭉 꽂혀있었고 가끔 책 방문 판매원이 오면 엄마는 항상 주스를 한 잔씩 드렸었다. 소설 속에서 언뜻언뜻 필자의 어린 시절을 찾을 때마다 점점 더 이야기에 빠져들 수밖에 없었다. 이 소설이 좋았던 점은 소설 속에 나오는 등장인물들이 어린 시절 필자의 주변에 실제로 있었던 사람들이라는 것이다. 숙이 엄마처럼 목소리 크고 드센 아줌마도 있었고 희철이처럼 괜히 주변 사람에게 짓궂게 굴고, 문방구에서 도둑질하다 걸리던 아이도 있었다. 숙이 아빠처럼 물건을 척척 고쳐주는 아저씨나 매일 술에 취해 들어오는 아저씨도 기억 속에 남아 있다. 책을 방문 판매하는 기석이나 딸 낳았다고 며느리를 타박하는 미호댁, 반에서 잘 사는 공주님 같은 소영이와 사별한 남자와 재혼한 정순, 아빠와 떨어져 할머니, 할아버지와 살다가 아빠가 재혼하면서 다시 아빠와 새엄마와 살게 된 연이까지. 이 책의 모든 등장인물들이 필자의 어린 시절 어디선가 보았고 경험했던 사람들이다. 그런데 어떻게 이 소설에 빠져들지 않고 버틸까. 어린 시절의 내 이야기인데. 연이 엄마는 연이에게 못해준 것, 엄마로서 부족했던 것만 기억에 남아 죽고도 연이의 곁을 떠나지 못한다. 귀신인 연이 엄마는 귀신을 무서워한다. 피 흘리는 기괴한 모습 때문이라기보다는 다른 귀신들이 너는 그다지 대단한 원한도 없고 이유도 없으면서 뭔데 이 이승에 붙어있느냐고 따질까 봐 그렇다. 연이 엄마가 마음 놓고 이승을 떠나기에는 연이 주변에 온통 연이를 못살게 구는 사람뿐이다. 연이의 새엄마 정순은 물론이고 주인집 숙이 엄마도 왠지 연이를 못마땅해하며 희철이는 연이를 무시한다. 그런 사람들 사이에서 연이의 아빠, 사람 좋은 기석에게 연이를 맡기고 떠나기에는 기석도 그다지 미덥지 않다. 그래서 연이 엄마는 연이의 곁을 떠나지 못한다. 그래도 연이는 혼자 씩씩하게 살아간다. 어느새 글도 혼자 깨우쳐 읽을 줄 알게 되었고 혼자서 잠도 잘 자며 자신의 엄마는 죽었다고 당당하게 이야기한다. 희철이가 무시해도 혼자 마당에서 사방치기를 하며 놀고 학교 입학식 날에도 일어서서 선생님 이름 석 자를 읽었다. 그런 씩씩한 연이를 보면서도 연이 엄마는 끝내 마음이 놓이지 않는다. 그러던 어느 날 연이가 길을 잃고 만다. 오후반 학교를 땡땡이치고 뒷산에 올라가 놀다가 깜빡 잠들었는데 산에서 내려오니 처음 보는 동네였다. 영영 집을 못 찾을 뻔한 연이를 연이 엄마가 물 없는 우물에 사는 노파 귀신에게 애원해 큰 길가로 데려가자 마법처럼 희철이가 나타났다. "야, 홍연!" 내내 연이를 찾아다녔는지 먼지 투성이다. 그 뒤를 이어 단추도 제대로 채우지 못한 웃옷 자락을 펄럭이며 숙이 아빠가 나타나 연이를 업고 집으로 향한다. 집에서는 숙이 엄마도, 찬이를 업은 정순도 자리에 앉지 못하고 서성이고 있다가 연이가 들어오자마자 정순이 달려들어 연이를 껴안고 숙이 엄마는 아이고, 관세음보살을 외친다. 기석은 넥타이가 풀어헤쳐진 채로 땀을 뻘뻘 흘리며 뛰어들어와 연이를 감싸 안은 찬이를 업은 정순을 감싸 안고 희철이와 희철이의 엄마, 아버지는 마당에 서서 그 모습을 지켜본다. 연이를 무시하던 희철이도, 연이와는 이야기 한 번 제대로 해본 적 없는 숙이 아빠도, 연이를 못마땅해하던 숙이 엄마도, 아직 연이에게 진짜 엄마 노릇을 해주지 않고 있는 것만 같던 정순도, 정순과 연이 사이에서 중심을 못 잡고 있던 기석도 연이가 사라진 순간 정신없이 모두 함께 연이를 찾는다. 그 시절에는 그런 어디서 생겨난 건지 알 수 없는 연대가 있었다. 사이가 좋지 않았던 동네 사람들 사이에서도 어떤 집에 안 좋은 일이 생기면 서로 발 벗고 나서 도와주고 일이 해결되면 마치 자기 일이 해결된 듯 기뻐하곤 했다. 도대체 어디서 나타났는지, 언제부터 시작됐는지 알 수 없는 그런 연대가 그때에는 있었다.  그제야 연이 엄마는 마음을 놓는다. 사라진 연이를 애타게 찾아주는 많은 사람들 사이에서 연이가 얼마나 사랑받고 있는지 깨달은 연이 엄마는 드디어 이승을 떠날 수 있게 된 것이다. 그렇게 떠나는 연이 엄마와 함께 독자도 연이에 대한 걱정을 놓고 책을 덮을 수 있게 만들어주는 결말은 투박하고 따뜻했다. 참 좋은 소설이다. 이렇게 빠져들어서 읽었던 소설이 얼마만이고 또 읽으면서 눈물이 나왔던 소설이 얼마만인지 모르겠다. 자신 안의 어린아이를 찾고 싶은 독자에게 권하고픈 소설이다. 소설 속 한 문장 : 나는 진심으로 고마웠다. 진심으로 울고 진심으로 화내는 이 엄마들에게 고마웠다. 희숙이 엄마, 찬이 엄마가 그냥 나처럼 느껴졌다.
초크맨
'초크맨' / C.J. 튜더 저 (지극히 주관적인 저의 생각을 쓴 글입니다.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저번에 읽었던 스티븐 킹의 미스터 메르세데스 이후로 인터넷을 찾아보다 스티븐 킹이 강력 추천한다는 평가가 있는 소설을 발견했다. C.J. 튜더 라는 작가의 데뷔작인 초크맨이라는 소설이었는데 저번 스티븐 킹의 소설을 매우 재밌게 읽었던 차에 주저없이 책을 집어들고 읽기 시작했다. 감상부터 말하자면 재미도 있고 나쁘지 않은 소설이지만 작가의 다음 작품을 찾아 읽을 생각이 들지는 않았다. 이 소설은 에디라는 주인공의 어린 시절과 학교 교사가 된 성인 시절이 교차되어가며 진행된다. 어린 시절 늘 네명의 친구, 개브, 미키, 호포 그리고 니키와 함께 다니던 에디는 마을 여기저기서 의문스러운 일들을 마주한다. 그 사건들의 마지막을 장식한 살인 사건은 당시에는 약간의 미심쩍은 점을 남긴 채로 종결되고 만다. 그렇게 세월이 흘러 나이가 든 에디는 학교 교사로 평범한 하루를 보내고 있던 와중에 어릴 적 친구 미키가 찾아와 과거 일어났던 살인사건의 진범을 알아냈다고 하며 그걸 토대로 글을 쓰려고 하니 도와달라고 요청한다. 그렇게 미키와 저녁을 먹고 헤어진 다음 날 미키는 강에 빠져 죽은 채로 발견된다. 어린 시절 죽은 미키의 형과 똑같이. 뭔가 이상함을 느낀 에디는 미키의 흔적을 찾다가 점점 어린 시절 일어났던 살인 사건의 진상에 다가가게 된다. 일단 이 소설의 좋은 점을 이야기하자면 초반부 스토리가 흥미진진하다는 점이다. 미스터리 소설이자 스릴러 소설인만큼 의뭉스러운 일들이 여기저기서 일어나고 10대 소녀 일라이저의 살인 사건이 일어나며 그 정점을 찍는다. 게다가 그 사건들의 주위를 끊임없이 떠돌아다니는 초크맨 그림은 계속해서 호기심을 불러일으킨다. 호포의 개를 죽인 사람은 누구지? 미키의 형은 정말로 발을 헛디뎌 강에 빠진걸까, 타살은 아닐까? 갑자기 나타난 하얀 분필의 초크맨 그림은 도대체 누가 그린 걸까? 일라이저를 죽인 범인은 누구고 왜 토막을 냈을까? 일라이저의 사라진 머리는 도대체 어디에 있는 걸까? 이렇듯 수많은 의문점들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진다. 그러한 어린 시절의 사건을 수십년이 지난뒤 성인이 된 주인공이 해결해나간다는 점도 흥미로웠다. 그리고 전혀 다른 시간대의 같은 인물을 번갈아가며 이야기하면서도 전혀 어색하지 않았고 오히려 그 두 시간대의 에디가 서로를 통해 사건을 해결해가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그렇지만 단점이 너무 명확하다. 앞에 수없이 뿌려놓은 사건들의 진상이 드러나는데 그 진상들이 그다지 납득이 되지 않는다. 초크맨의 특징은 앞에서 일어난 사건들의 범인이 각각 모두가 다른 인물이라는 것이다. 호포의 개는 그때부터 이미 치매 증상이 조금씩 보였던 호포의 어머니의 실수에 의해 죽었고 미키의 형이 강에 빠져 죽게 된 것은 그의 자전거를 강에 빠뜨린 개브 때문이었다. 하얀 분필의 초크맨 그림은 에디가 그린 것이었고 일라이저를 죽인 범인은 자신이 임신시킨 여학생과 일라이저를 착각한 니키의 아빠, 마틴 목사의 짓이었으며 일라이저의 사라진 머리는 에디가 몰래 가져왔다. 이렇듯 마치 누군가 한 명의 일관된 범행으로 보였던 것들이 사실 각각 다른 사람들의 소행이었다는 것은 한 명의 범인을 상상하고 있던 독자들을 깜짝 놀라게 할 수도 있지만 반대로 각각의 사건들에 대한 모든 논리를 납득할만하게 제시하지 못하면 독자들이 결론을 받아들이기 힘들게 되고 마는 것이다. 그 모든 사건들의 진상이 정교하게 맞아들어가며 감탄을 불러일으키는 것이 아니라 결국 "아, 뭐야. 그냥 다 각자 다른 이야기고 결국 살인 사건은 목사가 착각해서 죽인 걸로 끝이잖아?" 라는 생각이 든다고 해야할까. 살인 사건에 얽힌 진상을 하나하나 파헤치고 그 속의 복잡한 관계를 해체해가며 얻게 되는 카타르시스가 부족한 느낌이었다. 그러한 부분에는 소설에서 주요 용의자로 몰고 가던 헬로런 이라는 인물의 너무 이른 죽음도 한몫하지 않았나 싶다. 이러한 스릴러 소설에서 너무 범인처럼 묘사하는 인물은 당연히 범인이 아니라는 것은 알지만 그래도 마음 한켠에 혹시나 진짜 저 사람이 범인인가 하는 생각이 들면서 소설의 긴장감을 유지시키는 역할을 한다. 그렇지만 그 인물이 너무 이른 타이밍에 죽어버리면서 당연히 다른 누군가가 범인이겠지 하는 생각을 확고하게 만들었고 이는 소설의 긴장감을 떨어뜨리고 말았다. 조금 더 살려두었으면 지금보다 흥미진진한 소설이 되지 않았을까. 재미있는 소설이다. 하지만 초반부의 흥미로움에 비해 후반부에서 진실을 알게 되었을 때 오는 놀라움과 스릴러 소설 특유의 그 뒤통수를 제대로 얻어맞은 듯한 얼얼한 느낌은 부족하다. 다른 스릴러 소설과 다른 이야기 진행과 사건의 진상이 이 소설의 장점이자 단점인 듯 하다. 전형적인 스릴러 소설에 지쳐있다면 한번쯤 읽어볼만 하지 않을까. 소설 속 한 문장 : 예단하지 말 것. 모든 것에 의문을 제기할 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