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냉혹한 시대착오의 세계.armor

1차대전은 그야말로 망가전성시대였다 
물론 manga가 아니고 MG를 말하는 거다
아직 현대전의 개념이 확실히 잡히지 않았고 일단 줄맞춰 닥돌하는게 보병전술의 기초였던 시절이라 망가놈들이 그야말로 양학을 할 수 있던 시절이었다

그래서 이 시대는 최초로 진지하게 방탄복에 대해서 고려한 시대기도 했음
근데 결과물이 요즘 보기엔 진지하지 않다는게 문제지
나중에 나치로 진화하는 독일 제국 새끼들이 만든 방탄복은 생긴건 좀 그럴싸했다
문제는 이게 앞만 가려준다는 거랑 통짜 금속으로 만들어서 뭐같이 무거웠다는 거다

얼마나 무거웠냐면 이거 입고 나면 소총도 제대로 못 겨눌 정도였다고 하니 이거 똥같은 장비다 문제는 화력이 -50정도 된다는 거지

이렇다보니 실전에 투입될 때는 빨리 움직여야 하는 공세부대에는 지급하지도 않았다
잠깐 존나 이상하지 않냐 기관총한테 뚝배기 들이밀어야하는 부대가 공세부대말고 도대체 어딨다고
그래도 독일새끼들은 와꾸라도 좀 괜찮아보이지 딴 나라 놈들 같은 경우엔 와꾸마저 끔찍하게 파멸적이었다

이 걸어다니는 오스트리아 소화기를 보자
머리까지 보호하겠다는 야심찬 계획은 좋은데 니들 저런 소화기 뒤집어쓰고 조준사격 할 자신 있음? 어찌저찌 서서쏴까지는 가능하다 쳐도 문제는 엎드려쏴 자세였음

저게 고개를 들어올릴 수 있는 구조가 아니라 땅바닥에 엎드리면 엎드려쏴는 커녕 앞을 보지도 못했음
더 코미디인게 뭐냐면 저게 개같이 무거워서 한번 엎드려버리면 투구 무게 때문에 일어나지 못하는 경우도 빈번했단 거임

이게 개병신같은 거란걸 깨달은 오스트리아군은 또 이상한 시도를 함
무거운게 문제면 입고다니는게 아니면 벗고다니면 되잖냐는 아이디어였음
이 갑옷은 평상시엔 이렇게 목에 걸고 앞치마같이 입고 다니다가
총격을 받으면 이렇게 접어서 땅에다 설치하고 방탄판까지 세운 다음 뒤에서 엎드려쏘는 일종의 개인용벙커였음

아예 입고다니는 용도가 아닌걸로 설정했기 때문에 좆같이 무거워도 어느 정도 참을 수는 있었고 실제로 방탄성능도 있었음
게다가 밑에는 바퀴를 달 수 있게 개량한 버전도 있어서 밀면서 앞으로 전진도 할 수 있었다

아이디어도 괜찮고 실용성도 있어보이지?
근데 옆에서 보면 생각이 좀 달라질걸

일단 막아주는 영역이 존나게 쫍아터졌다
정면에서도 어깨가 노출되면 퍽퍽 터져나가면서 오 마이 뻐킹 숄더를 외치게되는데다가 옆에서 총격이 날아오면 두말할 것도 없이 즉사임

거기다 1차대전은 진짜 지랄맞게 수류탄이랑 포탄이 쏟아지는 동네라서 이런거엔 아무쓸모도 없었다
그래서 실전에서 활약한 기록도 거의 없음
가장 기상천외한 아이디어는 바로 아이언맨이었다
해저탐사할 때 쓰는 금속제 잠수복을 보강해서 전쟁터에 밀어넣자는 아이디어가 나온 거임
와! 빅대디!

물론 당연히 실현되지는 않았는데 물속에서도 뭐같이 무거워서 존나 움직이기 힘든 이 고철덩이를 육지에서 움직일 수 있을거라 아무도 생각하지 않았기 때문임
실현되었다면 정말 개간지였을거 같아서 아쉽긴 하다
존나 멋있었을 텐데
뭐 결국 기관총 막으면서 돌격하자는 아이디어는 갑옷을 만드는게 아니라 탱크를 만들면서 겨우 실현되게 된다
그 전까지는 그냥 망가에 들이대면서 신나게 녹아나야만 했다

전쟁은 참 뭐같네



쓸모없지만 아이언맨 겁나 멋있네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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