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년필 구매기 -라미 CP1 56
만년필을 샀다. 8만원이 약간 넘는 금액이 들었다. 입문용으로는 비싼 것 같지만 몇 해 전부터 꼭 갖고 싶었던 모델이라 큰맘 먹고 구매했다. 사실, 만년필에는 별로 관심이 없었다. 만년필은 보통 재력이 있고 엘레강스한 지식인들의 전유물이라 생각하고 있었다. 지금은 저가형들이 많이 나와 있지만 필자가 어렸을 때만 해도 만년필은 구경하기도 힘들 뿐더러 상당한 금액을 호가하는 제품들만 있었다. 만년필에 관심이 생긴 것은 대학에서 평소 좋아하던 교수님을 통해서였다. 웃긴 이야기지만 교수님께서 만년필을 사용하시던 모습이 멋있어 보였다. 장난을 좋아하셔서 평소 방정맞게 강의하시던 모습과는 달리 만년필을 꺼내 쓰실 때면 뭔가 고급지고(고풍스럽고) 학자다운 면모가 느껴지는 듯 했다. 속어로 표현하자면 템빨효과가 느껴졌다. 지금은 학부전공과는 상관없는 일을 하고 있지만 공부를 그만두고 일을 시작할 때의 첫 마음은 이전에 읽던 책들을 계속 놓지 않고 조금씩이나마 계속 읽는 것이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이런 저런 이유들로 책들을 자꾸 손에서 놓게 되는 것 같아 만년필을 구매하게 되었다. 구체적인 동기는 크게 두 가지다. 첫 번째는 만년필이 학부생때 선망하던 모습들을 기억시켜주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었고, 두 번째는퇴근하고 책상위에 앉아 만년필을 보고 있으면 괜스레 뭔가 써보고 싶어지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뭔가 쓰려면 다시 뭔가를 읽어야 하기 때문에 자연스레 다시 책을 잡게 되는 것이 내가 심중에 계획한 의도였다. 겸사겸사 악필도 교정되었으면 하는 바램도 있었다. 주문한 만년필은 '라미'라는 브랜드에서 판매하는 CP1 56 이라는 모델이다. 얇고 작지만 필자의 눈에는 그런 맛에 세련되 보이는 멋이 있었다. 아직까지는 만년필에 대해 잘 모르기 때문에 제품을 평가할 수는 없지만, 그냥 개인적인 소감으로 이야기 해본다면 아직 펜촉이 길들여지지 않아서인지 기대했던 것 만큼 필기감이 좋지는 않다. 필기감은 앞으로 사용할수록 좋아지리라 생각하고 있다. 큰 차이는 없겠지만 앞으로 필자만의 필체에 맞게 길들여질 것이라고 생각하니 별것도 아닌 것에 괜히 설렌다. 본래 구매의도였던 필기의욕도 상당히 고취 되고 있다. 만년필을 매니아틱하게 좋아하는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이왕 사용 하는 것 무턱대고 사용하기 보다는 조금이나마 기초지식이라도 알고 사용하는 것이 좋을 것 같아 여기 저기서 알아봤다. 좀 찾아보니 역시나 만년필의 종류와 깊이는 상당했다. 글로만 봐서는 이해하기 어려운 부분들이 많아 그냥 넘어갔다. 아직은 입문자 수준이기에 기초적인 것이라 생각되는 것들만 챙기기로 했다. 1. 만년필의 아버지: 워터맨 현대 만년필의 시초는 1883년 워터맨 브랜드에서 출시한 '더 레귤러(The Regular)' 라는 제품이다. 이 제품 이후로 모든 만년필은 브랜드를 떠나 예외없이 워터맨의 레귤러 모델의 방식을 사용하게 되었고 이 방식은 지금까지 사용되고 있다. 만년필이 나오기 전까지 필기구의 역사는 토판에 새기거나 파피루스나 양피지(가공한 양가죽)에 깃털펜으로 필기하는 것이었다. 필기를 할 때마다 깃털펜의 펜촉에 잉크를 묻혀야 했다. 그후 1540년대부터 금속펜에 대한 연구가 조금씩 진행되다 18세기 산업혁명이 시작되면서 영국에서 본격적으로 대량생산을 하게 된다. 이후 19세기에 들어 잉크 저장장치를 탑재한 펜들이 등장하게 되고 형태가 일정한 양식으로 통일성을 갖추기 시작한다. 지금 우리가 사용하는 만년필의 형태는 이 시기에 틀이 잡힌 것이다. 지금의 만년필의 원형은 '프레더릭 폴슈' 라는 사람이 1809년 5월에 특허받은 제품이라 한다. 금속으로 된 필기구와 잉크를 펜에 저장하는 기술이 발명됬지만 아직 여러 가지 문제들이 있었다. 제일 고질적인 문제는 잉크의 흐름이 원활하지 않았던 것이다. 워터맨 이전의 만년필들은 캡(뚜껑)을 열고 바로 필기 하는 즉필이 어려웠다. 만년필을 사용하기 위해서는 만년필을 여러 번 흔들어 달래며 잉크가 나올 때까지 기다리거나 나오더라도 흘러나오는 양이 일정하지 않아 잉크가 터져버리는 경우가 종종 있었다. 이 문제를 해결하며 현대 만년필의 시초가 된 것이 워터맨이 개발한 만년필이다. 뉴욕에서 보험회사 일을 하던 '루이스 에드슨 워터맨'은 잉크가 원활하지 않았던 만년필로 인해 큰 계약건수를 놓치게 되어 만년필을 연구하기 시작한다. 계약서명란에 서명하는 과정에서 만년필의 잉크가 나오지 않아 한 두번 흔들었는데 그렇게 해도 잉크가 나오지 않다가 결국 잉크가 갑자기 쏟아져나와 서류를 잉크범벅으로 만들어 계약을 놓쳤다는 일화다. 이후로 워터맨은 '모세관 현상'을 이용해 필기시 일정한 잉크가 흘러나오도록 만년필을 만들고 1884년 2월에 특허를 등록한다. 사건의 자세한 내막은 모르지만 솔직히 필자는 계약서명에 불편함이 있었었다는 이유만으로 계약이 파기되었다는 일화는 신빙성이 낮아보인다. 더군다나 원흉이 되었던 만년필의 문제도 당시에는 고질적인 문제로 종종 있는 일들이었기 때문이다. 뭔가 다른 내막이 있을 것 같지만 어찌 되었건 워터맨이 개발한 만년필이 획기적인 개선을 했던 것은 분명하다. 2. 만년필의 꽃: 필기감 -'금'과 '이리듐'으로 제작된 펜촉 *만년필 '닙' (잉크에 부식되지 않도록 금을 포함하여 제작하거나 이리듐으로 제작한다.) 금속펜이 처음 등장했을 때 잉크의 흐름이 원활하지 않은 것과 함께 가장 문제가 되었던 것들 중 하나는 펜촉이 잉크의 산성에 쉽게 부식된다는 것이었다. 당시의 잉크는 산성이 강했기 때문에 금속으로 된 펜촉이 쉽게 부식되었다. 그렇게 해서 탄생된 것이 금촉이다. 내식성이 강한 금은 펜촉의 내식성을 상당히 향상시켜 주었다. 금촉에 사용되는 금의 순도는 14K가 기본이지만 24K까지도 있었다고 한다. 하지만 금은 무른 성질 때문에 물리적인 내구성이 그리 강하지 않은 관계로 금으로 된 펜촉 끝(펜 포인트)에 다시 강한 내식성과 단단하기로 유명한 이리듐이라는 금속을 붙이게 된다. 금과 이리듐을 용합하는 기술은 1830년대에 아이작 호킨스라는 영국인이 처음으로 개발했다고 한다.(하지만 호킨스는 이리듐의 높은 가격으로 사업이 어려워 특허권을 판매하게 된다.) *만년필 '펜 포인트' ('팁'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만년필의 필기감을 결정하는 것 중에 하나가 '펜 포인트'라는 부분이다. 만년필 펜촉의 금속부분을 '닙'이라고 부르고, '닙'의 말단에서 잉크를 내보내는 부분을 '펜포인트' 또는 '팁' 이라고 부른다. 펜촉은 만년필의 심장과도 같다. 만년필의 거의 모든 핵심기술은 펜촉에 집중되어 있다. 만년필의 필기감은 종이나 잉크에도 영향을 받겠지만 주로 펜포인트에 의해 결정되는데 펜포인트의 재질과 정밀도에 따라 결정된다. 펜촉을 자체제작 할 수 있는 회사들은 그리 많지 않다. 워터맨과 파커, 몽블랑, 쉐퍼, 오로라, 파이로트, 플래티넘, 세일러 정도다. 다른 회사들은 모두 자체제작이 가능한 업체에 의뢰하여 만년필을 제작한다. 한 예로 펠리컨에서 제작한 만년필의 펜촉은 몽블랑에서 제작된 펜촉이다. 펜촉의 굵기는 세분화할수록 많은 단계가 있지만 보통 6단계로 구분한다. 1. EF: 가는 촉, 2. F: 가는 촉, 3. M: 보통 촉, 4. B: 굵은 촉, 5. BB: 많이 굵은 촉, 6. BBB: 아주 굵은 촉 이다. 가는 촉으로 갈 수록 펜포인트가 종이에 닿는 면적이 적어지고 필기감이 떨어진다. 반면, 굵은 쪽으로 갈수록 필기감이 좋아지지만 펜 포인트가 큰 관계로 잉크가 많이 흘러나오기 때문에 일정 굵기를 넘어서면 오히려 필기감을 저하시킨다. 펜포인트는 가운데가 갈라져 있는데 육안으로는 확인이 어렵지만 갈라진 양쪽의 대칭이 좋아야 좋은 물건이라 한다. 3. 만년필 잉크 만년필 잉크는 유성잉크가 없다. 만년필의 생명은 펜촉에서 잉크가 잘 흐르는 것인데 유성잉크를 사용하게 될 경우 잉크가 잘 굳을 뿐더러 한 번 굳어서 막히게 될 경우 유성잉크는 다시 길을 낼 방법이 없기 때문이다. 수성잉크의 경우 한동안 만년필을 사용하지 못해 잉크가 굳더라도 뜨거운 물에 녹이는 방법으로 다시 길을 내어 사용할 수 있다. 이런 이유로 만년필 잉크는 유성잉크를 사용하지 않는다. 단점으로 만년필로 필기한 기록물은 물에 지워질 수 있다는 점이 있다. 이에 대한 보완으로 각 만년필 브랜드마다 내수성 잉크를 판매한다. 내수성이 강할수록 점도가 높고 잉크가 굳기 쉽다. 검은 색 잉크로는 오로라와 오마스, 플래티넘, 펠리칸에서 나오는 잉크가 내수성이 좋은 편이고 그 다음으로는 파이로트와 파커, 쉐퍼도 대체로 내수성이 조금 강한 편이라고 한다. 파란 색 잉크로는 파이로트 잉크가 내수성이 가장 좋고 그 다음이 오로라이고, 그 뒤로는 대부분의 브랜드들이 비슷하다고 한다. *만년필 잉크는 평상시에는 파란 색을 사용하고 서명할 때에도 원본과 사본의 구분을 위해 파란 색을 사용한다. 공적인 문서를 작성할 때는 검은 색을 사용하는 것이 통례다. 만년필은 보통 사적인 메모나 업무용으로 평상시 사용할 때는 파란 색 잉크를 주로 쓰는 것이 통례다. 의외로 공식적인 서명을 할 때에도 파란 색을 사용하는 것도 통례다. 검은 색 잉크는 공식적인 서류를 작성할 때에만 사용한다. 이유는 정확히 모르겠지만 여러 가지 의견들이 있다. 서명을 파란 색으로 하는 이유는 원본을 복사했을 때 명도가 다르기 때문에 원본과 사본을 구분할 수 있다는 것이다. 평상시에 사용하는 잉크를 파란 색으로 하는 이유는 만년필이 유일한 필기구였던 옛날에는 검은 색 잉크보다 파란 색 잉크가 더 구하기 쉬웠기 때문에 파란 색을 주로 사용하였고 그 모습이 지금까지 내려오는 것이라는 것이다. 사실인지는 모르겠다. 만년필을 구매하면 포장 케이스에 여분의 카트리지를 같이 동봉해주는데, 보통 파란 색인 경우가 많다. 아마 이런 이유에서 파란 색을 넣어주는 것이 아닐까 싶다. 주의해야 할 점이 있는데 보라색과 빨간 색 잉크 등 색채가 강한 잉크들은 착색위험이 크기 때문에 투명한 만년필에는 가급적 사용하지 않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한다. *조문갔을 때에는 만년필을 쓰는 것은 아니라는 말도 있는데 우리나라에서는 크게 신경쓰지 않는 편이라고 한다. 하지만, 조심해서 나쁠 것은 없기 때문에 되도록 사용하지 않는 편이 좋으리라 생각한다. 우리나라에서는 보통 윗사람이 아랫사람에게 성공을 기원하는 마음으로 만년필을 선물했다고 한다. 하지만, 요즘에는 윗사람이 아랫사람에게 준다는 의식보다는 성공을 기원한다는 의식에 초점이 더 맞추어져 아랫사람이 윗사람에게 선물해도 크게 상관없다고 한다. 만년필의 기능과 역할은 중요했다. 인류의 기록문화는 말할 것도 없고, 특히 계약서명과 같은 최종 의사결정을 확증하는 중요한 순간에 잉크가 터져버리거나 하는 일이 생기면 어색한 상황이 연출되기 때문이다. 때문에 중요한 계약이나 서명이 필요한 경우에는 따로 만년필을 골라내어 준비했다. 대표적으로는 2차세계 대전의 종전협상 서명에서 파커의 만년필이 사용된 것이 화제가 되었었고 나름의 홍보효과도 보았다고 한다. 이렇게 역사적인 조약이나 조인시에도 사용되며 시대를 풍미했던 만년필은 1920-40년대에 황금기를 맞다가 40년대에 볼펜이 등장하면서 쇠퇴기를 맞는다. 볼펜은 1938년 헝가리에서 '비로 라슬로 요제프'라는 사람의 특허가 상용화되면서 등장하기 시작했다고 한다. 하지만, 볼펜도 따라잡지 못하는 만년필의 필기감과 소모품이 아니라는 점에서 오는 애착은 지금도 많은 애호가들을 만들고 있는 것 같다. 오글 거리는 말이긴 하지만 어떤 이들은 만년필은 소모품이 아닌 세월을 함께 하는 동반자 라고도 한다. *만년필은 소모품이 아니다. 만년필의 애착은 펜촉에서 시작되는데 자신에게 맞는 필기감을 찾고 길들이면서 쓰다보면 자기도 모르게 애착이 생긴다고 한다. 이 애착이 대를 거쳐 내려오는 경우도 있다. 이런 만년필들은 각자의 에피소드들을 담고 있어 수집가치로도 인정받는다. 만년필의 사용법이나 구조, 명칭 등은 인터넷에서 조금만 검색해도 쉽게 알 수 있기 때문에 정리하지 않았다. 이외에도 더 깊이 들어가면 닙의 종류와 잉크 충전방식인 필러의 종류, 피드의 종류 등 어마어마한 매니아의 세계가 열린다. 아직은 그쪽 세계에 발을 디디기에는 부답스러워 지금은 일단 만년필을 사용해보면서 천천히 맛을 들여볼 생각이다. 하지만, 더 깊이 들어가게 된다 하더라도 검은 색 잉크를 구하기 어려운 시대도 아닌데 파란 색 잉크를 주로 사용해야 한다는 통례 등을 굳이 따르고 싶지는 않다. 이제 글을 정리했으니 악필교정 연습좀 할겸 만년필을 써보다가 자야겠다. 종이 위에서 연필을 댄 듯 안 댄듯 미끄러지는 필기감이 기다려진다. 참고자료들을 찢지 않고 들썩거리는 어깨에서 참을성있게 기다리며 지켜봐준 소망이에게 감사인사를 전합니다. 무엇보다 새로 구매한 만년필이 하루만에 망가지지 않도록 자비를 베푸시고 지나가주심에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