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alrapp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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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는 늦은 새벽까지 술을 마셨다. 글 쓰는 것도 잊은 채. 이제는 세계관이 너무도 달라진 두 친구들과 마음껏 웃기도, 언성을 높여가며 싸우기도, 적당히 생각을 접으며 어쩌면 표면적일, 표면적일 수밖에 없을 사과를 하기도 했다. 한 친구는 고개를 푹 숙이며 울었다. 자신의 인생을 쓸쓸히 관조하듯. 예정된 울음이었을지도 모르겠다. 그의 쓸쓸한 모습이 최근 나에게 더없이 많이 포착되었기 때문이다. 툭 건드리면 쏟아져 버릴 것 같던 그 슬픔들. 다른 친구는 우는 친구를 다독이며, 또한 자신의 슬픔을 털어놓으며 함께 울었다. 자신들의 잘못도 아닌데, 울었다. 문득 각자의 잣대를 들이대며 서로 가치관을 줄다리기하는 것이 무의미하다고 느껴졌다. 이제 내게는 다소 벽처럼 느껴지는 그들 안에서 각자의 고난들이 울컥울컥 요동치는 것을 그저 바라보기만 했다. 그의 어깨를 조용히 두드렸지만, 그것은 어떤 것도 불러낼 수 없는 빈 노크에 불과해서 나는 다독임마저 곧 멈추었다. 짧은 잠을 자고 일어나, 식사를 하고 우리는 공원을 잠시 걸었다. 그리고 이십여 년 전의 어느 봄날처럼 벤치에 앉아 시간이 흘러가는 것을 무기력하게 바라만 보고 있었다. 우리는 지난밤 무슨 일이 있었냐는 듯 싱거운 농담을 던지며 웃었지만, 아무리 해도 그 언젠가의 투명한 평안이 겹쳐지지는 않았다. 어떤 슬픔도 잠시간 덮어놓을 수 있을 듯 더없이 따사로운 일요일 오후였지만, 보기 흉하게 얼룩져버린 슬픔을 아주 지울 수는 없었다. 우리는 각자가 걸치고 있는 슬픔들을 눈감아주기로 한 듯, 악수를 나누고 웃으며 헤어졌다. 봄이 오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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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결이 매섭다. 여름인가 싶더니 아직인가 보다. 지난 금요일 썼던 시의 매듭을 좀처럼 짓지 못하고 있다. 제목도 아직 정하지 못했다. 집에 가고 싶다. 포털사이트에 다채로운 인터넷 뉴스들이 쏟아지고 있다. 시사 란을 제외하고는 댓글 창 자제가 사라진 것에 대해 단적으로 어떤 입장을 취하기는 어렵지만, 분명 더 좋은 대안도 있지 않았을까 싶다. 왜냐면 댓글의 순기능이 분명히 있기 때문이다. 순기능이라 함은 기사에 대한 여러 반응을 통해 기사를 입체적으로 볼 수 있고, 기사의 배후에 깔린 생략된 정보를 얻을 수도 있으니까. 인터넷 기사에 직접 댓글을 달아본 적은 아예 없다시피 하지만, 댓글을 보는 재미를 솔직히 무시할 수는 없었는데. 악플의 잔인한 위력을 당장 막을 방법으로는 어쨌든 아예 없애버리는 것이 급선무였겠지만, 법적 제재를 가할 악플의 기준을 구체적으로 명시해서 나쁜 것은 처벌하고, 좋은 기능은 살릴 수 있는 방안을 나중에라도 세웠으면 좋겠다. 뭐 어떻게 해도 편법은 생겨나고, 우회하여 나쁜 짓을 저지르는 사람들은 있겠지만, 그렇다면 법 또한 그에 맞춰 부지런히 진화해가는 방향을 모색하면 어떨까. 절차의 복잡함을 너무도 모르고 떠드는 소리일까. 어쨌든 이미 경험해버린 세계를, 그것이 절대적으로 악하기만 한 것이 아니라 분명 양가적인 가치를 지닌 세계를, 원천봉쇄하고 그것이 없던 때로 무작정 돌리는 것은 다소 시대착오적이고 폭력적이라는 생각이 든다.
<체호프 단편선> 안톤 체호프
<체호프 단편선> / 안톤 체호프 저 (지극히 주관적인 제 생각을 쓴 글입니다.) 현대 단편소설의 아버지, 안톤 체호프의 단편선이다. 사실 현대의 작가들이 쓰는 단편 소설은 거의 전부 안톤 체호프의 영향 아래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작품 수만큼이나 다양한 형태의 단편 내지는 엽편을 써낸 체호프. 그 이후에 나온 모든 단편들은 거칠게 나누자면 두 종류로 평가될 수 있다. 체호프의 계보를 잇는다는 평가를 받거나 체호프와 이런 점이 다르다고 평가를 받거나. 그만큼 체호프는 현대의 작품들이 어떤 식으로든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는 작가인 것이다. 개인적으로 체호프의 소설을 읽는 동안 웃기다는 느낌을 받는 경우가 많았다. 한마디로 상황을 비트는 유머가 들어가 있는 작품이 꽤 많은데, 예를 들면 단편선의 첫 작품 <관리의 죽음> 같은 경우 결말을 보고 예전에 유행하던 허무 개그를 들은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 그러나 그 희극성은 체호프의 작품 속에서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한다. 단순히 독자를 웃기겠다는 목적이 아니라 그 속에 인간사의 진실이 녹아있다. 갑작스럽게 다가오는 죽음, 이성에 대한 호감으로 가득 차 있다가 고백을 받는 순간 식어버리는 사랑, 과할 정도로 묘사되는 아름다움과 그것을 찬양하는 인간. 이런 장면들은 어이없는 실소와 희극성을 자아내지만 또 그것이 인간이 사는 현실이다. 죽음은 언제나 예고 없이 갑작스럽게 다가오며, 누군가에 대한 호감은 사소한 무언가를 계기로 한순간에 사라져 버리기도 하고, 겉모습이란 고작 살가죽에 불과함을 알면서도 인간은 홀려버리고 마는 것이다. 체호프는 가난한 집안에 생활비를 보태기 위해 대학에 다니면서 싸구려 잡지와 신문에 콩트, 유머 단편 등을 기고했다. 거기서 받는 적은 원고료라도 집안에 보태야 할 만큼 경제적 상황이 좋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 시절 생활고에 시달리며 닥치는 대로 써 온 작품들에 담겨있던 유머가 뒤에 체호프가 본격적인 작가로 발돋움한 뒤에 유감없이 발휘된 것이다. 돈을 벌기 위해 썼던 글들로 인해 훈련된 희극성이 체호프의 작품 속에서 웃음과 함께 인간세상에 대한 통찰을 그려내는 모습을 보고 있으면 아이러니한 느낌도 든다. 굉장히 짧고 간결한 문체로 인간세상에 대한 통찰력을 보여주며 심지어 읽기에도 재미있는 작품을 여럿 써낸 작가가 바로 안톤 체호프다. 소설에 관심이 있다면 한 번쯤 꼭 읽어봐야 할 작가다. 안톤 체호프 단편선은 출판사마다 여러 종류의 책이 나와 있는데 각 출판사별로 담겨 있는 작품들의 목록이 조금씩 다르니 잘 비교해보고 사는 것이 좋다.(이번 리뷰는 민음사에서 나온 <체호프 단편선>을 읽고 썼다.) 개인적으로 추천하고픈 단편은 <관리의 죽음>, <티푸스> 그리고 <베로치카>다. 소설 속 한 문장 그리고...... 죽었다.
[토박이말 살리기]나물과 남새
#토박이말바라기 #이창수 #토박이말 #살리기 #나물 #남새 #푸성귀 #야채 #채소 #터박이말 #숫우리말 #순우리말 #고유어 [토박이말 살리기]나무과 남새 지난 두날(화요일) 배움이들과 봄나들이를 갔습니다. 때가 때인 만큼 멀리 가지는 못했고 배곳(학교) 둘레에 좋은 곳이 있어서 그곳을 한 바퀴 돌고 왔지요. 배움이들을 데리고 나가기 앞서 가 볼 곳에 가서 살펴보고 왔습니다. 나가 보니 여러 가지 풀이 있었는데 이름을 아는 것도 있고 모르는 것도 있었습니다. 그래서 제가 아는 것은 알려드리고 모르는 것들은 함께 찾아보기도 했습니다. 그 자리에서 어떤 것은 이름에 ‘풀’이 붙어 있고 어떤 것에는 ‘나물’이 붙어 있는데 어떻게 다른지를 알려드렸는데 오늘은 그 이야기를 해 드리겠습니다. 우리 둘레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것 가운데 ‘광대나물’이 있습니다. ‘광대나물’이라는 이름은 꽃의 생김새가 광대가 춤을 추고 있는 모습을 닮았다고 그런 이름이 붙었다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그런데 그것이 어릴 때 부드러운 것을 데쳐서 무쳐 먹으면 아주 맛있답니다. 우리 할아버지 할머니들께서는 그렇게 사람이 먹을 수 있는 것에 ‘나물’을 붙여 놓으셨습니다. 그리고 또 우리가 흔히 볼 수 있는 것으로 ‘애기똥풀’이 있습니다. ‘애기똥풀’은 잎이나 줄기를 꺾으면 노란 물이 나오는데 그 빛깔이 애기똥 빛깔을 닮았다고 그런 이름이 붙였다고 합니다. 그런데 이 풀에는 독성이 있어서 먹지 않는 것이 좋다고 합니다. 이처럼 사람이 마음 놓고 먹을 수 없는 것에는 그냥 ‘풀’이라는 이름을 붙여 놓으신 거죠. 우리 할아버지 할머니들의 슬기가 엿보이는 이름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그 다음에는 우리가 고기를 먹을 때 곁들여 먹기도 하고 몸이 튼튼해지려면 많이 먹으라고 하는 ‘채소’와 ‘야채’와 아랑곳한 이야기를 해 드렸습니다. 흔히 상추나 당근, 양파, 배추 같은 것들을 똑똑히 가리지 않고 ‘야채’ 또는 ‘채소’라고 부르는데, 이 둘은 다른 것이랍니다. ‘야채’는 들에서 나고 자라나는 것을 베거나 캔 것을 뜻합니다. 들이나 메에서 뜯어온 쑥, 고사리 들이 여기에 들겠죠. ‘채소’는 사람이 손수 밭에서 키워 거둔 것인데, 우리가 흔히 먹는 무, 상추, 시금치, 오이, 깻잎 같은 것들입니다. ‘채소’는 중국식 한자고 ‘야채’는 일본식 한자라고 설명하는 사람도 있고, ‘야채’라는 한자말이 세종실록, 성종실록에도 나온다고 아니라는 사람도 있습니다. 어떤 풀이가 맞는지 틀린지를 따지기 앞서 이 말을 가리키는 토박이말을 먼저 챙겨 썼으면 좋겠다는 겁니다. ‘채소’를 가리키는 토박이말은 옛날에 시골 어른들이 많이 쓰다 보니 사투리라고 생각하기도 하는 말, ‘남새’입니다. 이 말을 알면 ‘남새밭’이라는 말도 그 뜻을 바로 알 수 있어 좋습니다. 말집(사전)에 찾아봐도 ‘채소’와 ‘남새’가 같은 뜻이라고 되어 있는데 쓰는 사람들이 많지 않아 아쉽습니다. 그래서 저는 ‘야채’를 가리키는 말로는 토박이말 ‘나물’을 쓰고, ‘채소’를 가리킬 때는 ‘남새’를 쓰면 좋겠습니다. 나물과 남새를 싸잡아 가리키는 말인 ‘푸성귀’도 함께 말입니다. 온 나라 사람들이 하루하루 살기에 바빠 챙기지 못하고 지나치는 이런 풀과 나무 이름을 우리 아이들은 알고 쓰며 살도록 해 주면 삶이 더 넉넉해질 거라 믿습니다. 4354해 무지개달 열닷새 낫날(2021년 4월 15일 목요일) 바람 바람 *이 글은 경남일보에도 보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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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료와 분식집에서 점심을 먹고 있었다. 치즈라면과 참치김밥. 이 집이 이 근방 로컬 맛집이라는 소식을 뒤늦게 접하고 얼마 전부터 가끔 찾게 되었는데, 젊은 부부가 운영하는 소규모의 가게였다. 남편은 주로 주방을 담당하고, 홀과 김밥 말기 정도는 아내가 담당하는 형태의. 라면은 아직 나오기 전이고, 동료와 나는 홀 담당 사장님이 말아준 김밥을 먼저 먹고 있었다. 나는 출입구를 등지고 식사 중이었는데, 손님 한 명이 들어온 것 같았다. 돌아보지는 않았지만 가게에 들어서자마자 주문을 하는 목소리가 들려왔던 것이다. 앳된 여성의 목소리였다. 돌솥비빔밥 하나 주세요. 우렁찬 목소리는 아니었지만 나는 분명히 들었다. 그러나 서빙을 담당하는 사장님은 그 말을 잘 알아듣지 못한 것 같았다. 차라리 아예 제대로 듣지를 못해서 네? 하고 재차 물어봤다면 좋았겠지만, 잘못 알아들은 메뉴를 대며 확인했다. 쫄볶이 한 개요? 젊은 여자 손님은 아뇨, 돌솥비빔밥이요, 했다. 나는 처음부터 알아들었기에 이번에도 다시 분명하게 들었다. 돌솥비빔밥이라고. 그러나 서빙 담당 사장님은 그렇지 못한 것 같았다. 확인 차원에서 쫄볶이 하나요? 하고 되물었지만, 예, 라는 대답이 돌아오지 않고 뭐라고 다시 대답을 하니, 이번에도 쫄볶이 한 개요? 라고 차마 묻지는 못하고, 잠시 침묵한 채로 망설이는 기색이 역력했다. 분명 쫄볶이라고 한 거 같은데, 쫄볶이가 아닌가? 그런데 아무리 들어도 쫄볶이인 걸, 하고 생각하는 듯했다. 그러나 그렇게 영영 침묵할 수는 없는 것이기에 네? 하고 다시 물었다. 여자 손님은 다시 말했다. 돌솥비빔밥 하나요. 물론 이번에도 나는 분명히 들었다. 심지어 내 앞의 동료도 들은 듯이 회심의 미소 같은 것을 짓고 있었다. 뭔가가 재미있게 돌아간다는 듯. 세상에. 사장님은 이번에도 잘못 알아들은 것 같았다. 그러나 쫄볶이에서 벗어나지는 못했다. 그녀를 구원해줄 사람은 정녕 없단 말인가. 그녀의 남편은 주방에서 동료와 나의 라면을 끓이느라 여념이 없어 보였다. 하필 가게에는 여자 손님을 제외하고는 동료와 나뿐이었고, 오지랖이라거나 뭐 그런 것이 넓은 그런 종류의 다른 손님은 없었다.  잠시 나라도 대신 다시 말해주는 것이 현명한 처사일까 그것이 모두를 행복하게 하는 일일까 생각하며 망설이는 사이, 홀 담당 사장님은 기지 비슷한 것을 발휘했다. 그녀는 확신에 차 여자 손님에게 말했다. 아아, 쫄볶이 포장이요? 홀 담당 사장님이 뱉은 방금 그 말에는 아주 여러 가지의 의미가 함축된 느낌이 있었다. 그래, 내가 잘못 알아들은 게 아냐, 나는 너의 말을 아주 잘 알아들었지만 쫄볶이 뒤에 포장이라는 단어 하나를 못 알아들어서 이 사달이 난 것뿐이야. 나는 손님의 말에 아주 경청을 잘 하고, 실수 따윈 잘 하지 않지. 난 말귀를 못 알아 먹는 사오정이 아니라고. 봐, 내 말투에 확신이 들어차 있는 게 바로 그걸 증명하는 거야. 근데 이번에도 잘못 들은 거면 어떡하지? 설령 그렇다면, 그렇다고 해도 의도는 아니니 이해하길 바라, 정도의 의미가 들어 있는 듯한 대사와 말투로 느껴졌다. 그러나 슬프게도 홀 담당 사장님은 연속된 실수를 기록하고 있었다. 사장님을 제외하고는 우리 모두가 알고 있지 않은가. 쫄볶이가 아니라는 걸. 쫄볶이 포장은 더더구나 아니라는 걸. 여자 손님은 쫄볶이를 시킨 적도 없거니와, 홀에서 먹고 갈 거니까. 왜 이런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생각해보았다. 어째서 신은 홀 서빙 담당 사장님에게 이런 끝나지 않을 것 같은 시련을 주는지. 우선 두 단어의 연관성을 생각해보았다. 돌솥비빔밥. 쫄볶이하나. 발음되는 대로 적어보자면, 돌쏘삐빔빱. 쫄뽀끼하나. 돌쏘삐 쫄뽀끼 아주 흡사한 구조를 가지고 있기는 하다.   어쨌든 여자 손님은 인내라기보다는 오히려 스스로가 더 당황하여, 벌서고 있는 기분을 느끼고 있는 것 같았지만, 그러나 침착을 잃지 않고 말했다. 아뇨, 돌솥비빔밥이요. 먹고 갈 거예요. 정말 안타깝지만 홀 담당 사장님은 이번에도 알아듣지 못했고, 기어코 피날레를 장식했다. ...네? 가여워라. 되묻는 사장님의 말에는 거의 필사적인 자조가 담겨있는듯 했다.  동료와 나는 육성으로 뱉진 않았지만 한마음으로, 여리지만 단호한 여자 손님의 마지막 일격 같은 대답에 힘을 실어 보냈다. 아, 물론 동료도 그랬을지는 사실 잘 모르겠지만, 뭐 그렇다고 치자. 돌. 솥. 비. 빔. 밥. 이요. 아. 드디어 알아들은 홀 담당 사장님의 장탄식이 이어졌다. 나는 기립박수를 치고 싶은 것을 간신히 참으며, 그사이에 나온 감격의 면발 흡입을 이어갔다. 계산을 마치고 돌아본 가게의 풍경은 언제 그랬냐는 듯 고요했다. 핸드폰을 들여다보며 쫄볶이가 아닌 돌솥비빔밥을 먹는 여자와 테이블을 정리하는 사장님, 그리고 아무것도 모른 채 주방에서 분주한 또 다른 사장님. 모든 것이 평온해 보였다. 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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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다음 달에 실릴 원고를 청탁하기 위해 필진들에게 전화를 돌렸다. 그중 한 명의 시인은 요즘 가장 핫한 시인 중 한 명인데, 전과 다르게 의사소통에 다소 애를 먹었다. 한 넉 달 전에도 원고 관련으로 통화를 하다가 안부를 물었는데 그가 문득, 우울증으로 병원에 다니고 있다고 했었다. 물론 우울증으로 병원에 다니는 일이 흉도 아닐뿐더러, 그것이 그냥 지나칠 일이라는 건 아니지만 요즘은 주위에도 생각보다 흔하게 있는 일이어서 크게 신경 쓰지는 않았다. 하물며 시인의 우울이란 놀라울 일도 아니어서, 또 지극히 사무적인 관계에 불과한 내가 특별히 뭔가를 해줄 수 있는 것도 아니니까. 그런데 오늘 통화를 해보니 정서가 많이 불안해 보였다. 그 증거를 일일이 나열할 수는 없지만, 어쩐지 조심스러워졌다. 현재 밀려있는 원고들이 많아서 조금 미룰 수 있는지, 그리고 곧 시집이 나오는데 시집이 나온 뒤 시집에 실린 시를 발표할 수는 없어서 기간이 겹치지는 않을지, 또 시의 형식이 다소 실험적인데, 편집상 무리는 없는지, 뭐 이런 것들을 조율했는데, 설명이 부족한 것 같으면 재차 설명해주었고, 내가 당장 판단할 수 없는 것들은 우선은 다시 검토해보자고도 얘기했다. 아주 힘겨운 통화를 마치고, 문득 걱정이 되었다. 꽤 오래전이지만 몇 번인가 모임에서 직접 본 적도 있고, 그때의 모습들은 지금처럼 불안한 느낌은 아니었다. 그러나 오늘 보여준 모습들은 거의 무관한 나로서도 우려가 되었다. 나 역시 그것을 우울증이라고 해도 좋을지, 단순한 우울감이라고 해야 할지 모를 것들을 오래 겪어본 바로서, 또 당장 지난여름부터 겨울까지만 해도 그런 기분이 극심해져 운동도 하게 된 측면이 있는데, 그때 내가 자주 하던 말과 톤이, 그리고 그것들을 통해 보여지는 느낌들이 그에게서 자꾸 보였기 때문이다. 사실 예전 같으면, 이상한 사람이라고 무시해버릴 만한 것이었을지도 모르겠는데, 그럴 수가 없었다. 그러니까 그에게서 자꾸만 지난날의 내가 보여서. 거듭 말하지만 함께 시를 쓰는 동료라는 것 말고는 그의 삶에서 거의 무관한 내가 해줄 수 있는 것은 없다. 함부로 보탤 말도 없다. 함부로 보태서도 안 된다. 무관하고 사무적인 관계로서 그저 그가 원하는 방향으로 원고를 실을 수 있도록 최대한 조율해보는 수밖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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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까지 마감인 시 원고를 하나 넘겼다. 사실 계속 욕심이 생겨서 고치고 또 고치면서 오래 붙들고 있었다. 그러다 어제는 아예 다른 시가 떠올라 내친김에 한 편을 더 써냈다. 사실 나는 잡지에 발표하는 시에는 크게 미련이 없다. 문학상은 대개 잡지에 발표된 시나 출간된 시집, 혹은 투고 원고 중 하나를 선정해 수여하는 방식으로 분류되어 있는데, 나는 아마도 잡지에 발표된 시에 상을 주는 방식의 문학상은 절대 탈 수 없을 거다. 적어도 당분간은. 어차피 잡지는 내 개인 작품집이 아니라서, 일단 발표하고 계속 퇴고를 거듭해 시집에 실으면 된다, 라는 생각을 한다. 그렇다고 일부러 대충 써낸다는 것은 아니고, 가능하면 나도 좋은 시를 발표하고 싶지만 내 시작 방법이 워낙 고치고 고치는 게 익숙하다 보니, 마감에 쫓기게 돼서 그렇다. 잡지를 구독하는 독자들을 우롱하는 것이 절대 아니다. 그런데 이번에 시를 새로 쓰다 보니, 이제는 최대한 발표 시에도 공을 들여볼까 생각한다. 왜냐면 이전까지는 조금 자신이 없다는 생각이 들었는데, 예전보다는 조금 해볼 만 하다는 생각이 들어서다. 하다못해 소설도 시절을 바투 따라가는 판에, 시를 쓰는 사람이 자꾸 시대와 작품의 시차를 너무 벌리는 것은 게으름 탓이라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시의성을 생각하고 시를 쓰지는 않지만, 또 그것을 크게 지향하지도 않지만, 그래도 그 안에 알게 모르게 당시의 시절이 스며든다고 생각한다. 이제는 조금 용기를 내고, 또 생각을 바꿔 조금 더 책임감을 가지고 시를 써야겠다는 생각이 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