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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동산 허위매물의 성지

요즘은 허위매물 없는 줄 알았는데 동네마다 다른 거였군요
정말 이런 짓 하지 맙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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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팔이 폰팔이 집팔이 참 🐏아치들만 그런 걸까? 🐏아치들이 그런 직업을 택하는 걸까?
중국 욕할일이 아니다. 한국의 그지같은 사기꾼 새퀴들은...
허위매물 이런 낚시를 기본으로 해대니 신뢰할 수 있는 거래는 멀기만하군요. 참 실망스럽다.
진짜 신대방~서울대입구, 낙성대쪽 전부 허위매물판임... 몇몇 군데 빼고 신림 공인중개사들은 다 허위매물로 장난치는 양아치들임.. 다 망했으면
진짜 공감하고 갑니다. 예전에 노량진근처로 방구하고 싶어서 x방 보고 간적이 있었는데 무슨 흑석동일대가 재개발 중이여서 그 일대는 방이 없다고 아직 시공이 끝나지도 않은 방이나 터무니 없는 방 보여주면서 강매 비슷하게 하려해서 노량진에 있는 다른 부동산에 가서 찾으니까 바로 원하는 조건의 방을 찾아주시더군요. 또 작년에 서면근처로 방구하는데 시세를 몰라서 앱으로 참고만 하다가다 좋은 방이 있어서 혹시나 하고 연락하면 허위매물에 이상한 방들만 보여주고 해당 방 얘기하면 다 허위매물이고 그렇게 안올리면 연락안와서 어쩔 수 없이 올리는거라고 하는데 어이가 없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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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한국인 50대 게이 이야기 (2탄)
1탄은 여기서 https://www.vingle.net/posts/5922045 “저 H대 갑시다”, 헉 왠 학교, 이거 가서 무슨 괴상한 실험대상 되는거 야냐, 뭐 그런거 있잖아, 호모의 사고방식 고찰, 아님, 호모 심층분석 등등, 그래 “학교엔 왜가요” 했더니, “사무실에 놔두고 온 것이 있어” 하데. 그래, 이이가 교순가 아님, 서무실 직원인가 하는 머릴 굴리며, 그냥 따라 갔잖아, 뭐 학교서 무슨일 생길까 해서, 택시서 내려 교문을 지나 가는데 수위가 나오더니 “아이고 X선생님 이 야밤엔 학교엔 왠일” “아 사무실에 뭘좀 놓아두고 와서요”, 하구 총총총 그이와 걸어 들어간 곳은 그이의 연구실, 그이가 교수란 걸 알곤, 그냥 49점을 더 주었잖아, 양복 넥타이에 대학교수, 뭘 더 바라겠어, 바랄게 있다면, 그냥 그이 손잡고 웨딩 마치 울리고, 저 푸른 초원위에 집짓고, 사랑하는 우리님과 한 백년 사는거지 뭐. 연구실을 들러서 차를 한 잔 마시고 나와, 둘이 청진동 가서 해장국을 먹고 하는데 시간이 자정이 훨 넘었더라구. “집에 가셔야지” “아니 좀더 얘기좀 하다가” 그날 늦게 까지 둘이서 놀았지, 그리고 새벽녁 해어지면서, 우리 또 만나기로 했잖아, 난생 첨으로 내가 집 전화 번호를 날렸고, 그이도 그이 학교 사무실 전화 번홀 내게 주었고. 그이와 헤어진 시간이 거의 3시쯤 되었었나봐, 시간을 보니 집에 갔다 교회 갈려면 시간이 넘 촉박하데, 내가 주제꼴에 교회 일부예밸 한번 도 빼먹은 적이 없거든, 교회서 쫓아내기 전 까진. 교회 다녀와 낮잠을 마악 자는데, 전화가... “나 형인데” 하는 목소릴 들으니 그이더라구, 어휴 기뻐! 그래 전활 하는구나 하는 생각으로, 엄마 쳐다 보며 “엄마 고마워!” 했지. “저녁에 뭐하니, 밥먹을래 같이?” “예” “뭐 먹을까?” “형 나 생선회 먹구 싶은데” 그래 그날 명동 동서화랑서 만나 차를 마시구, 대만 대사관 앞에 있던 미락 가서 회도 먹고, 늦게까지 형이랑 졸라 놀았잖아. “나랑 사귀어 볼래? “저 한 번도 남자 사귀어 본적 없는데요” 그렇게 그이랑 나랑 사귀게 되었잖아. 그렇게 시작된 우린 일년여 동안을 사귀였구, 그 형과의 낭만으로 인해 난 엄말 협박해(대학 졸업도 앞두고 취업 문제도 있고 하는 식의 개수작으로) 내 방에 전용 전화선도 싸악 깔아 놓고, 미국에 있는 형에게 부탁해, 근사한 응답전화기도 하나 설치, 그땐 삐삐도 없었거든, 그러니 그이나 나나 서로 연락 할려면, 전화 밖에 없었으니까, 엄마가 혹시 청소라도 하시다 응답기 만지실까 응답기에 비밀번호도 달고. 우린 일주일에 작으면 두번, 많으면 세번을 만났고, 몇 달후엔 형이 날 집에 데리고 가 아주 친한 동생으로 소개해, 자연히 형네 집도 드나 들고 하는, 형을 만난 이후로 난 극장도, 공원도, 딱 끊고, 아주 정숙한 생활을 시작했잖아. 87년 여름 방학땐, 우린 우리 둘만의 신혼 여행으로, 일본, 대만 홍콩을 놀러 다녀 왔잖아, 정말이야, 그 땐 세상서 부러운게 없더라구. 난 엄마 한테 세상구경, 그 형은 어학 답사란 말도 안되는 핑곌대고. 난 정말 그형이 넘 좋았어, 따스하고, 작은것에 신경 잘쓰고, 내가 좋아 한다면 뭐라도 구해 올라구 노력하구. 또 만나면, 밥 먹고 헤어질때 까지 꼭 자기 가슴에 안고, 도란 도란 이런저런 얘기히며 “형이 정말 많이 사랑 하는거 알지” “으응 형 나두 형 많이 사랑해” 둘이서 신혼 여행이랍시라구, 해외 여행을 다녀온후, 나 취직 되었잖아. 복학 하구나서, 교수의 추천으로 모 신문사서 하는 대학 논문 경연 인가 하는데에다 글을 냈는데, 글쎄 그게 당선이 되고, 기쁜 마음에 상금을 받으러 갔는데, 거기 심사위원중 한명이 나한테, 올림픽 조직위원회 일해 볼 의향이 없냐고 하데, “아직 학생인데요” 했더니 “조직위서 일하면 학교는 한달에 한번만 가도 된다고” 하데. 서울시서 학교에 뭘 보낸데나 뭔갈 해서. “에잉 공부 하기도 싫은데, 일도 하고 돈도 벌고,학교도 안가고”, 그래서 그냥 일을 시작했잖아. 그렇게 낮에는 열심히 일하고, 밤엔 형이랑 열심히 데이트를 하는 아주 이상적인 게이 생활을 열심히 하고, 정말 세상에 남 부러울게 없는 그런 날들.... 형은 우리 사랑 변치 말자고, 내게 반지를 하나 주었구, 둘이 만나고 일년이 거의 다 되어갔나. 올림픽 개막식을 앞두고 정말 졸라 바빳어, 거의 맨날 사무실서 자구 먹구, 왠 일이 그리 많은지, 일에 치여 거의 죽어 가는데, 날이 가면 갈수록 형이 전화가 뜸하드라구. 내가 전화 하면, 조교가 어디 가셨는데요, 전화 달라구 메모 남겨 놓으면 전화두 안오고. 그래 내 생각엔 집에 무슨 일이 있나 하는 생각만 했지. 우리 사랑 변치 말자구 반지 준 남자가, 우리 사랑 변치 말자고 내가 준 혁띠 찬 남자가 바람을 피리라곤 생각을 못했지. 그래 무슨 일이 있긴 있는데 하는 생각만 있지, 일이 바빠 시간이 없으니, 어찌 해볼수가 없잖아. 형이랑 놀면서 여기저기 많이 다녔거든, 술집도 가끔가고, 여기저기 드라이브가 밥도 먹고. 형이 술집 가끔 갔는데, 자연스레 나도 거기 사장, 일하는 형들과도 알게 되고 했지뭐. 하룬 출장을 잠실로 갔다가, 사무실로 가는길에, 땡땡일 좀 쳐볼요량으로 신세계 백화점엘 갔잖아. 형이 뭐가 섭섭해서 연락이 없나 하는 아주 여린 맘으로 형에게 줄 선물이나 하나 사려고. 정말 이야, 첨 해본 사랑이라 깨진다는건 생각도 못했고, 그저 그냥 그형만을 사랑하면서, 일생을 이렇게 보내도 행복하다 하는 자세였거든 그땐. 그날 나 뭐샸나구? 논노 마르시아노서 양복 샀잖아, 내가 형 양복 사이즈를 잘 알고 있었거든, 그래 선물로 주면 바지 기장은 그냥 논노서 줄여 주니까. 아주 이쁜 감청색으로, 돈도 많이 못 버는데, 졸라 큰맘 먹고 신세곌 나오는데, 입구에서 형이랑 몇번 갔던 술집 사장을 만났잖아. “에이 서방 바꼈다구 단골 끊구 미워잉” 그소릴 듣는데 그을쎄, 아주 아주 큰 돌덩이가 뒷 머릴 그냥 때리는 것 같은거야. “무슨 말이야, 우리 아직 잘 지내는데” 그 소릴 듣더니 사장이, 무슨 낌새를 챘는지 날 바로 옆 다방으로 끌고 가더라구. “정말이나 니네 둘 아직 사귀니?” “응, 근데 형이 요즘 행동이 좀” “그놈이 결국 결국 어린애 가슴에 못을 박는구나” 띵, 띵, 띵 이 내 머릴 스치고 “뭔소리 나 반지도 받았느데” “그놈 한테 반지 받은 놈이 너 하나 뿐일줄 아니, 그놈이 돌린반지들 모아 팔면, 파싸롱 하난 채리지” 하는 소릴 하는데, 그냥 눈물만 졸라 나더라구. 믿고 싶지도 않구. 그냥 앉아서 눈물만 흘리구, 세상이 무너져도 솟아날 구멍이 있다고 했는데, 내게 아무것도 안 보이는거야. 사장이 내가 넘 불쌍했는지, 내 손을 붙잡고 롯데백화점에 있는 섬마을에 가 초밥을 사주더라구. 내가 눈물만 흘리고 있으니까 “야, 세상에 남자가 그놈 하나니, 너두 게이 생활 좀 더함, 사랑하다 차이구 걷어차구 할꺼니까, 빨리 먹고 힘내” 하데. 근데 말루만 듣고는 정말 믿질 못하겠는거야. 동경서 둘이 우동 먹으며 얼굴에 묻은 후리가께 닦아주며 행복했구, 타이페이서 콩빙수 먹으며 서로 이빨에 낀 콩 껍질 빼주며 실실 웃고, 홍콩서 배타고 아경 보며, 둘이 손 꼭 잡고 “우리 내년에 또 오자” 했던 그형이 그형이.... “솔직히 나 내 눈으로 보기 전엔 믿을수 없다” 하며 내가 사장한테 사무실 전화랑 집 전활 번호 쥐여주고, 그 날을 사무실 안가고 그냥 졸라 울었잖아(물론 그 담날 사무실가서 졸라 혼났음). 그날 혼자 기차타고 춘천가 이디오피아에 앉아서 커피 한잔에, 담배 한갑 놓고, 한숨쉬고, 세상 태어나 첨 으로 가슴이 아픈 경험을 하고 있는 그런날 들을 보내는데, 가끔씩 형이 전화가 와 저녁을 먹자 해도 “형 나 오늘 넘 바빠” 일부러 피하구. 전활 끊구 또 울구, 또 울구. 하룬 밤에 집에서 벽에 머리 기대고, 둘이 다니며 찍은 사진들을 보며, 울고 있는데, 형이 전활 하데 “무슨일 있니?, 요즘 얼굴두 자주 못보구, 아직 형 사랑하지?” “으응 많이 사랑해” 그렇게 전활 끊구, 넘 속상해, 궁상과 음악을 들으며 있는데, 갑자기 머리를 스치는게 꼭 전활 어디 술집 같은데서 한 것 같은거야, 음악 소리두 들리구, 사람 소리두 배경으로 들리구, 혹시 하는 생각에 집을 나와 택시를 타고 갔잖아, 그 형이 자주 가던 그 술집에. (3부) 뜨윽 들어갔더니, 마담, 형들, 또 단골 형들이 주욱 둥그런 테이블 주위에 모여 앉아 있고, 그을쎄 그 형이, 구석 테이블에 아주 어린놈과 둘이 앉아 아주 다정히 맥주를 조지고 있더라구. 형은 날 보더니 아주 놀라며 “왠일이야 여긴 이밤에” “형은 여기 왠일” 하니까 머뭇 머뭇 “어 후배랑 술이나 한잔 할려구” 하더라구. 후배, 정말 밉고 못나 보이더라, 그 길로 반지를 뺐잖아 내 손가락서. “형 새 반지 사지 말구, 이 반지 줘 그리구 그 쪽두요, 이 반지 받았다 나중에 돌려 드려요, 이 형이, 이놈저놈 데리구 노느라 돈도 많이 없을거니까” 하구 반질 탁자에 던지구 나오는데, 형이 쫓아 나오며 “오해야, 내 말좀 듣고 가” “형 지금 무슨 소릴 해도 귀에 안들어와, 그냥 갈께” 그 담 날 부터 일만 넘 열심히 했지, 그냥 피곤하게 굴리고, 집에가 가슴 아플 시간도 없이 넘 피곤해 그냥 잠들고, 하는 날들, 그런데, 사건이 있고 며칠이 지난후 집에 와보니 소포가 와 있는거야. 반지도 들어 있고 편지도 있고. “넘 보고 싶다, 미안해 형이 가슴 아프게 한거, 왜 그랬는지 몰라, 용서해 준다면” 그러면서 몇월 몇일에 수유리 419 탑 근처에 있는 아카데미 하우스에 방을 잡고 기다릴테니, 꼭 오라는 말과 함께. 반질 보고, 편질 읽으니 맘이 확 무너 지는거야. 넘 기뻐서, 넘 따스해서. 거기다, 내가 서울서 제일 좋아 하는 아카데미 하우스에서 날 기다려, 하는 생각에 맘이 설레데. 나 정말 아카데미 하우스 구름의 집서 밥 먹고 차 마시는 것 넘 좋아 했거든(아직도 서울에 있는지). 또 다른 쪽으론 한 번 바람난 인간은 바람기 재우기가 불가능하다는데 하는 생각으로 “나가지마 나가지마” 하고 또 다른 한쪽은 너 아직 그 사람 넘 사랑하잖아 “나가 나가”. 그날, 만나자고 한 날이 토요일 이였는데, 하루 종일 똥마려운 강아지 처럼 안절부절 못하다, 갔잖아. 그 형이 넘 좋아서, 그 형을 넘 사랑해서. 호텔가서 “바람둥이 형 만나러 왔는데요” 했더니 방번홀 가르쳐 주데. 방으로 걸어 가는데 방으로 걸어 가는데, 넘 많이 설레어, 거의 숨을 못 쉬겠더라구. 방 앞에 서서 똑똑 했더니, 방문이 열리는데, 형이, 내가 사랑하는 형이, 하얀 백양삼각빤스 하나만 달랑 입고 문을 열더라구. 나 그냥 쓰려 졌잖아, 그 형품에, 그형의 따스한 가슴에. 우린 다시 그렇게 시작 했구, 형은 내가 섭섭하지 않게 전화도 잘하구, 일이 있어 못 만날것 같으면 미리미리 연락주구, 난 다시 행복해 졌잖아. 세상에 부러울게 없더라구, 사랑을 다시 찾은 게이가 뭐가 더 필요해. 날 잡아 형 데리구 신세계가 바지도 줄여 주어야지 하면서. 하루는 형이 “오늘 학회가 있으니 못 만난다 우리 낼 보자” 하데 그래 일찍 집에가, 엄마랑 밥먹고 연속극 보고 있는데, 전화가 찌리링 오데. “여보세요” “형이다, 술집 형” “으응 웬일이야” “글쎄 지금 네 애인이 어떤 놈 이랑 시시덕거리는 걸 봤단다” 그냥 나가서 택실 탔잖아, 종로3가 까지 가는데, 손이 벌벌 떨리고, 마음은 벌렁벌렁. 손에 쥐여든 마르시아노 양복 가방위로 눈물이 또 뚝뚝 떨어지고. 파고다 학원 뒤쪽에 있던 술집 앞에 서서 있는데, 아무것도 안보이는거야. 사람이 지나가도, 차가 지나가도, 세상에 꼭 나 혼자인 기분. 한 삼십분 기다렸나. 그 형이, 내 사랑 형이, 어떤 놈이랑 어깰 마주하고 거의 키스를 하다시피 얼굴을 맞대고 술집 밖으로 걸어 나오는데. “세상에 사랑은 없었구나” 하는 생각이 머릴 뒤집고 들어 오더라구. “형 학회 잘했니” 하며 있는힘을 다해 귓방맹이를 한대 올려 쳤잖아. 양복을 집어 던지고 등을 돌렸는데, 잡지를 않더라구. 그렇게 미워 하는데도 난 맘 속으로 “한번 잡아주지, 한번만 더 미안 하다고 하지 그럼 다시 사랑할수 있는데”, 그런데 잡지 않더라구. 난 그 길로 파고다 극장에 갔잖아, 그때 까지만 해도, 파싸롱이 새벽 4시까지 했거든, 심야상영인가 뭔가 하면서. 극장에 앉아 있는데, 싸구려 극장 화면도 울고, 나도 울고. 그렇게 그렇게, 난 첫 서방을 여의었지. 죽는 날 까지 사랑하고 잡던 그형, 좋은 걸 보면 제일 먼저 생각 나던 그형... 그러던 어느날 일요일, 그날도 어김없이 성경이랑 찬송 챙겨, 교회에 갔다가 발걸음도 가벼이 파고다 공원으로 향했지, 지금은 탑골공원인가, 두근두근, 벌렁벌렁 하는 맘을 다스리면서, 그런데 어떤 외국인이 나한테 말을 붙이는 거야. 나 정말 그때만 해두, 양놈은 에이즈, 에이즈는 양놈 이란 아주 후진 생각이 머리속에 꽉 차있는 그런 순진한 게이였거든. 그래 이리저리 도망을 다니는데, 아니 이눔의 양키가 자꾸 쫓아 오면서 말도 걸구, 실실웃구, 웃는건 좋아서 웃는거고, 씨이발, 말은 뭔말을 하는지 모르겠더라구. 영어만 좀 하믄 “야 방세야 날 좀 그냥 놔둬” 했을텐데, 그냥 말도 못하고 벙어리 냉가슴으로 여기저기 도망을 다니는데, 아아니 글씨 그이가 기냥 마악 따라오구, “Home”두 나오구, “go out”두 나오구 또 “come” 소리두 나오구 하는게, 혹시 “너 우리집 갈래?” 하는소리가 아닌가 싶드라구. 포기하지 않구 자꾸 끼작끼작 하는거야. 그래서 “Let’s go”를 했잖아. 그 한마디가, 그 “렛츠고” 한 마디가, 내 게이 인생을 화악 바꾸어 놓을 줄이야 증말 누가 알았겠어. 둘이 나와서, 그의 차를 타고 북악터널 근처 올림피아 호텔 뒷쪽에 있던 그이의 집엘 갔는데, 왠 남자 혼자 사는 집이 그리고 깨끗하고, 잘 정돈이 되어 있는지, 그이의 깔끔함이 눈에 사악 들어오데. 주스를 꺼내오구 하면서 뭐라구 씨부렁거리는데, 뭔소린질 알아 들을 수가 있어야지, 중1때부터 줄창 끼고 산게 영어 자습서 인데도, 뭐 그냥 백치 아다다 됬잖아 그냥 나, 뭔소린지도 알아 듣지도 못하는게, 그냥 실실웃고, “yes” 만 졸라 남발 했잖아. 자기 얘길 막 하는데, 내가 전혀 알아 듣지 못하니까, 지도도 꺼내오고, 한영사전도 가지고와, 마악 단어를 보여주고 하는데, 지도를 집는 것을 보니 캐나다 퀘백에 손가락을 뜨윽 올려 놓는 것을 보니, 아마도 퀘백서 왔다는 것 같단 소릴 하는 것 같애. “퀘백은 프랑스말 한다는데, 그럼 얘가 지금까지 불어를 씨불인건가” 하는 생각도 들고. 그렇게 놀다 그이의 손을 잡고 침실로 들어 갔는데, 침대 옆 테이블에 작은 전축이 하나 달랑 있는데, 그 옆에 민해경 테이프. 그래 내가 용길 내 물어 봤잖아 영어로 “Do You like 민해경” 했더니, 마악 웃더라구. 자는데 내등을 그 사람 배위에 사알작 데고 자는데, 또 다른 깊은 맛이 있는 것 같더라구. 전 남편이랑 여행도 가구 해서 같은 침대서 잠도 서너번 짭짤이 잤는데, 그인 항상 등을 돌리구 잤더든, 근데 이 양키 그인 내 뒤에서 날 꽉 껴안구 자는데, 좋더라. 늘어지게 자구, 아침에 일어 났는데, 글쎄 그이가 보이질 않데. 그래 빤스만 덜렁 입구 겨나와 보니까, 글쎄 그이가 부엌서 아침을 만들고 있드라구. 등치는 산더미만 한게, 부엌서 후라이팬 들고 설치는걸 뒤에서 보는데, “참 귀엽다” 하는 생각이 들고, 그으래 양키들 무서워만 할게 아니구나 하는 생각도 들고 하데. 그렇게, 그렇게 그이와 사귀게 되었잖아, 영어 한마디 못하며,둘이 만남 영어사전 팍팍 찾아가며 말도 안되는 대화졸라 하구, 내가 그때 대학 4학년 이였는데, 공부에 관심 없는 놈이, 대학 4학년이라구, 뭔 걱정있었겠어. 나 대학 4학년 초에 종로 3가에 있던 요리학원 취미반 다녔잖아, 두달동안, 엄마한텐 취업준비 한다고 학원 간다고 돈받아, 요리학원 등록 했잖아, 왜냐구? 게이로 혼자 살 생각하니까, 밥도 할줄 알아야, 맛있게 먹고 놀거 아니야, 그래서 요리학원 취미반을 두달 동안 열심히 다니며, 열심이 배웠잖아, 보다 낳은 내 게이 인생을 위해. 참 좋더라구, 첨엔 양키라 무서워서, 걱정 했는데, 사귀고 보니까, 좋은 점이 더 많더라구, 집에서 편히 놀수 있다는 것…. 그이는 소공동서 사무실을 운영 했는데, 가죽옷 밍크 같은 것들을 캐나다에 수출하는 오파상 비스므리 한 일을 했었고(그이의 설명듣고도 못알아 듣고, 사무실 놀러가 직원이 설명해 주어서 알았지), 나인 30대 후반, 그이가 내 학교 시간푤 알고 있어(내가 보여줬지), 학교가는 날은 수업 마치는 시간엔 여지없이 그이가 차를 끌구와 벙실벙실 웃으며, 차에서 날 기다렸고, 난 친구들에게 “나 요즘 영어공부 하잖아, 취업할람 영어좀 해야지” 하는 개소릴 남발하며, 그이와 데이틀 즐겼지. 말도 안통하고, 서로 할줄아는 것은 바디 랭귀지 박에 없었지만, 나 그이 사랑했잖아. 그이도 날 사랑하는 눈치였고, 매일 만남 내게 영어 가르쳐 준다고, 집에서 둘이 식탁에 않아 책 펴놓고, 몇 마다 하고 그렇게 맨날 노는데, 그이가 전활 집으로 하면, 내가 내방서 되지두 않는 영어로 전활 받음 엄만 날 쳐다 보시며 “참 아들 하난 똑똑 하게 났다니까 내가, 미국가 공부 안해 보구두, 우리 앤 저렇게 영어 잘하니” 대견스러워 하시면서, 그냥 내가 엄마 “영어학원” 소리만 나면, 그냥 학원빌 팍팍 주시구. 그렇게 놀며 2학기가 시작되었고, 남들은 다 취업 준비다 뭐다 해, 도서관서 밤을 세는데 난, 그이 만나 놀랴, 일주일에 삼일 용산 미군부대에 있는 버거킹서 알바하고. 거긴 무슨 줄이 있어야 취직이 되는 곳이었는데, 그이가 아는 사람 소개로 날, 그때 아마 알바로 한 시간에 700원 인갈 주었거든 서울서, 근데 거긴 한시간에 삼불오십센트주데, 거기다 보너스가 일년에 600프로구. 아 행복한 나날들, 학교 잘다녀, 그이가 맬 학교로 아님 용산으로 차끌고 데리러와, 또 많은 돈은 아니지만 돈도 좀 벌구, 매일 매일 행복했지 뭐. 그렇게 그이랑, 한 일년이 조금 안되는 시간을 사랑했구, 시간이 지날수록 영어로 똥오줌 가릴지도 아는 수준이 된 어느날, 그이가 하얏트 호텔에 가서 밥을 먹자고 하데, 그이가 하얏트에 있는 헬스 크럽을 다니고 있었거든.., 그래 둘이가서 밥을 먹고 커필 마시며 앉아 있는데. 왠 아저씨가 오데, “아 왠일이세요” 알고 봤더니 그이 사무실서 일하는, 그이 사무실 직원들이 그이가 게이인걸 다 안 관계로 난 저절로 그냥 커밍아웃 했었잖아 그이 사무실 직원들에게. 그 아저씨랑, 셋이 앉아서 얘길 하는데, 알고 봤더니 그 아저씨가 통역을 하러 놔왔드라구. 쪽팔려! 일년을 넘게 데이트하구, 만나구 했는데, 말이 안 통해 삼자가 나와서,, 휴우… 그 아저씨왈... 제임스가 캐나다에 돌아 가야 하는데, 나랑 같이 가고 싶다는 내용을 통역을 해 주시데, 정말 할말이 한 마디도 없두라구, 해외라구 해봤자, 일본 동남아 서너나라 가본거, 대학 일학년때 미국 한번 가본거(엄마랑, 누나, 형 만나러) 밖에 없는데. 나 정말 제임스 좋아 했는데, “으익 씨이발 또가”하는 생각이 들며, 참 많이 속상하드라. 아니 팔자가, 왜 이꼴인가 하는 생각이 마악 들구, 첫 서방은 난봉꾼이요, 둘짼 졸라 좋아 할만 하니깐 간다 그러구. 씨이발 소리가 막 나는 거야. 많이 속상하더라, 한국 사람이 아니어서, 언젠간 갈줄 알았는데, 너무 빨리 간단 소리가 나오니, 눈물도 나구, 마구 마구 가슴도 아프구, 그이가 사무실 정리하느라 바쁘구, 난 졸업이 코앞에와 , 공부도 못하는게 논문 쓰느라 죽을똥 살똥 하구. 일하랴, 졸업논문쓰랴, 그이랑 이별준비 하랴, 그런 날들을 보냈지. 결정을 못하겠더라구, 세상 태어나 첨으로 누군가가 날 좋아해, 같이 가서 살자는 얘길 했는데, 선뜻 결정을 못하는 내가 넘 밉더라구, “에이 일본만 되두, 갈수 있는데” “아니 미국만 해두 나 가는데” 이런 생각이 마구 들고, 생각을 해봐, 캐나다에 서방하나 달랑 믿고 갔다가, 깨지기라도 함, 캐나다서 집에 올람 좀 멀어, 일본이야 현해탄 건너 수영이라도 해 서울에 돌아오지, 미국은 형이랑 누나 한테 감 되지 하는데, 캐나다.. 그이는 가는게 싫었구, 난 보내는게 싫었구, 그래 둘이는 시간만 남 같이 죽자사자 했잖아. 난 거의 학굘 그이의 집에서 다니구, 둘다 친구두 안 만나구, 간다는 말이 나온뒤 시간이 정말 잘 가데, 한것없이 시간은 가구, 난 결정을 못내리구, 그이는 내가 부담가질까봐 조르지도 못하구. 그날, 괴상한 트럭이 와서 그이의 짐을 실어낸 날, 나 그냥 주저 앉아서 넘 많아 울었잖아. 그의 집 베란다에 앉아서 줄줄 눈물 흘리는데, 그이가 와서 날 뒤에서 껴안으며 축축한 눈물을 흘리는데, 그 큰 남자가 눈물을 내 목위에 뿌리는데, 가슴이 무너지데. 그냥 둘이 서로 얼굴 마주보며 “I love you” 소릴 수십번 하구, 둘이 부둥켜 안구 그냥 울었지 뭐, 용기 없어 님 못 따라 가는 주제에 뭐 할말이 있었겠어. 가자구 떼 못쓰는 용기없는 그이가 무슨 할말이 있었겠어. 그리구 나서 사일을 소공동에 있는 프라자 호텔서 지냈잖아, 난 일두 안하구, 학기말인데 학교두 안가구, 둘이서 걷구 또 걷다 치치면, 그냥 주저 앉아서 얼굴만 쳐다보구, 할말은 많은데, 난 영어를 못해 표현도 못하고, 그인 한국말을 몰라 못하구. 그이가 떠나기 바로 전 날, 나한테 편지 한통을 주데. 그 편질 전해 주는데, 그이 제임스 눈이 버얼게 지며, 날 쳐다 보는데, 심정 같아선 “썅 그냥갈까. 주제에 이런 님 어디서 만날려고” 하는 생각이 가슴을 쥐어짜고. 편질 열어 봤더니, 대한항공 표드라구, 뉴욕을 들려서 퀘벡 까지 오고가는, 오는날 가는날도 없이 그냥 달랑 표한장 이랑, 편지. 이런 내용의 “자기야, 자구 있는 애기람, 그냥 달랑 안고 갈텐데, 말 못하는 동물 이라면 그냥 비행기에 실어 데리구 갈텐데, 사는 마지막 날 까지 사랑하고 싶은 사람을 만났는데, 그 사람과 같이 갈수 없는게 넘 슬프다” 얼추 이런 내용의. 나두 편지가 있었거든, 그이가 짐 싸기 시작할 때부터 짧은 영어로 개발 세발 쓴게. “자기야, 갈수있는 용길 내지 못하는 내가 정말 밉다, 캐나다가 내 모든걸 버리고 가기엔 넘 생소하구, 멀기두 하구, 자기랑 같이 못가는 나 미워하지 말구, 둘이 보낸 추억만 잘 간직하구 살다, 또 만나자” 얼추 이런 내용의 편질. 가는 그이에게 난 민해경 이름이 들어간 모든 테이프랑 판을 선물 했잖아, 유달리 뭔 소릴지도 모르며, 민해경의 목소릴 좋아 했던 그이였거든, 시내를 다 뒤져, 민해경 이름이 들어가 있는 것은 다, 그리구 그인 나에게 방학하면 꼭 자기 보러 오라구 날짜 없는 비행기표를 주구. 그이가 떠나 던 날, 참 신기하게 하루종일 하늘이 어둡데, 비도 오지 않는게 구름이 낮게 끼구, 날씨두 춥구, 마음도 춥고. 공항을 가는 택시 안에서, 나 정말 안 울을라구, 졸라 노력했는데, 제임스가 내손을 꽉 잡구 코를 벌렁 벌렁 거리며, 눈물을 흘리더라구, 그걸 보니까 물터진 뚝방 처럼 내 눈에서두 눈물이 줄줄 또 흐르구, 둘이서 택시안에서 손 잡구 우는데, 운전사 아저씨가 흘끔 흘끔 뒤를 보며, “꼴갑들 하네” 하는 시선을 보내구. 그이가 보딩패스를 받구 나니까, 정말 이별이 눈에 보이기 시작하데. 이별은 눈에는 안보이구, 가슴만 아프게 하는것인줄 알았는데, 이별이 보이데. 둘이서 공항 구석에 주저 앉아, 꼭 손을 붙잡고, 아무말도 못하고, 서로의 눈만 쳐다보며, 난 그이에게 안녕을 고하구, 제임슨 나에게 안녕을 고하구. 그이가 비행기 타러 들어갈 시간이 됬는데, 넘 슬퍼 눈물도 않나구, 넘 가슴아파, 아픔도 안 느껴지구, 그렇게 비행기 표 보여주고 들어 가는 입구에 서있는데, 그이가 “wherever I am, whatever I do, you will be right here in my heart” 하면서 내 손을 자기 가슴에 가져다 대드라구, 참으려 노력 했던 눈물이 솟구, 그이가 그 많은 사람들 앞에서 나에게 아주 큰 뽀뽀를 하더라구. 여기 저기서 “으잉, 망측, 왠 제수, 흉해” 소리가 막 들리구, 난 아랑곳 하지 않구 그냥 그이랑 마지막 뽀뽀를….. 그렇게 제임스는 가구, 눈물이 마를 때까지, 난 공항 밖에서 울다 택시를 탔지. 제임슨 가구, 난 마지막 방학을 했구, 제임슨 가서 거의 매일을 빼지 않구 전활하구, 난 전화만 끊고남, 베개 껴안고 혼자 울구 또 울구. 방학 하자 마자 나 뭐 했냐구, 대한항공에 갔잖아, 제임스가 준 비행기표 들구, “이걸루 캐나다 갈수 있나요” 그래서 나 갔잖아, 캐나다에, 제임스랑 편지랑 전화로 주고 받은 계획이 뉴욕서 만나 놀다, 뉴욕서 캐나다로 가는 걸구 하구서. 아주 추운 1월 어느날 뉴욕 캐네디 공항에 도착 했는데, 그 산더미만 한 그이가, 나보다 머리가 하나는 더 큰 그이가, 벙실 벙실 웃으며, 날 기다리드라구. 날 번쩍 안아 들면서 넘 기뻐 하는 모습을 보며, 나두 기뻤구, 둘이서 뉴욕을 마악 쏘아 다니면서, 노는데 넘 행복하드라. 그이가 한국을 떠나구, 내가 그일 만나러 뉴욕에 올 때까지 정말 생각이 많았거든, 둘이는 알구 있었구, 이미 서로 편지로 얘길해서, 뭐냐면 내가 캐나다로 와 살수 없다는 걸. 그럼 왜 갔냐구? 그냥 둘이 좋아서, 그냥 둘이 정이 넘쳐서. 그렇게 뉴욕서 놀다, 캐나다 퀘벡가서, 제임스 가족도 만나구 놀다가, 돌아오는데, 그 땐 별로 많이 안 슬프드라구, 그냥 둘이 현실이 무언지, 둘이 같이 살수 있는 방법이 없는걸 확실이 인식을 하고 있었으니까. 그래두 나 쪼금 울었지, 공항서. 그래두 섭섭해서. 제임스랑 사귀며 넘 뼈져리게 느꼈지. 그래서, 난 캐나다서 돌아오자 마자 영어 공부 시작했잖아. 별다른 재주도 없고, 취직 면접 제출 불가능 판정의 성적증명서를 받은 내가, 먹구 살라면 영어라두 하는 생각으로. 꼬박 6개월을 하루에 15시간 씩, 하루도 빼놓지 않구 집에서 공부 했잖아, 엄마 한테 “너 제정신이니” 소리들어가며, 테이프 듣구, 쓸데없는 영어잡지 읽구, AFKN 졸라 보며, 하루두 안 빼고 6개월을 방에서만 보냈잖아. 영어 잘해야, 행복하게 잘 산다라는 생각하나, 영어 잘해야 취직 할수 있다 하는 생각으로. 정확히 6개월을 그렇게 방구석서 보냈지. 그리고 취직을 했는데... (4부, 마지막회) 신기해 사는게, 그렇게 놀다 와서 취직을 했는데, 글쎄 내가 영얼 몇마디 한다구 회사서 필리핀 마닐라에 있는 지사로 날 보낸 것 있지. 그래서 필리핀서 일년반 살았잖아. 필리핀에서 일을 할 때, 마카티라는 동네서 살았는데, 회사서 아파트를 준비해 거기서 한국서 같이간 과장이란 놈이랑 함께 살았잖아, 결혼두 하구, 자식도 있는 사람이였는데, 그렇게 여잘 밝히드라구, 하여간 퇴근만 하면 맛사지, 술집 등등, 자칭 변강쇠, 그래 이 핑계, 저 핑계대구, 혼자서 놀기를 시작 했지, 혼자서 마비니(서울의 이태원쯤) 가서 세이키스 피자가서, 라이브루 음악 들으며, 피자먹구, 맥주 마시구, 그리구 토요일엔 웨스틴 호텔 로비가서, 맥주 마시며, 라이브 음악듣구, 그렇게 자꾸 혼자 노니까, 이 과장이란 사람이, 삐진 것 같드라구. 말두 시큰둥하게 하구, 괜히 아무일두 아닌 것 가지구, 집에서 삐지구, 생난릴 치는데, 뭐 내가 할말이 있었겠어, 그래두 상산데, 까라문 까야지. 정말이야, 첨엔 해외근무라구 해서 마악 좋았었는데, 막상 필리핀서 사니까 재미가 넘 없드라구, 정말 혼자서 노는 것두 하루, 이틀이지, 하루저녁, 과장이랑 아리스토크랏 이라는 식당엘 갔는데, 밥을 먹다가 과장이 “자네 호모지” 하데. “왜요?”그냥 긍정두 부정두 안하구 답을 했잖아. “맛사지도 안가구, 혼자서 마비니 가서 놀구….” “혼자 마비니 가서 놀문 다 호몬가요?” 하믄서 아무 말을 안했잖아. 그리구 그 과장두 더 이상 말이 없데. 과장은 3개월에 한 번씩 한국에 다녀 왔는데, 하여간, 필리핀 간지 약 9개월 만에 첨으루다 서울에 다니러 왔는데, 본사 남자 직원들이 날 보는 눈빛이 곱지가 않더라구, “아하 방세들, 신입인 내가 필리핀을 가서 부러워서, 후진것들” 이렇게 자위 하며, 놀다 다시 마닐라에 왔구, 뭐 별루 과장 이란 인간두 내게 신경 쓰는 것 같지두 않구, 내 사생활이 어떻건, 그 사람한테야 상관 없는 일이잖아. 내가 뭐 자길 좋아한다구 한것도 아니구, 하여간 정확히 일년 반 동안 필리핀서 일하구, 서울 본사로 왔는데. 날이 감 갈수록, 나랑 놀아주는 남자 직원들이 없는거야, 넘 신기하데. “으윽, 내가 뭐 잘못했나, 내가 넘 잘생겨서, 이놈들이 질투를” 회식을 하구, 어딜 놀러가두 지네끼리 쏘옥 가구, 나랑 당구 졸라 치던, 직원애들두, 당구 한 번 치잔 소릴 않하구. 내가 왕따 당하는게 피부루 콱콱 느껴지데. 하루는 친하게 지내던 여직원 한명이 “저 오늘 저녁줌 사주시면 안돼요” 하데 그래 둘이서 저녁을 먹구, 차를 한잔 마시는데 “대리님 넘 속상하시겠다..” “왜? 뭐 때문에?” “모르세요” “뭘” “어머머 정말 모르세요, 김과장이 회사에 좌악, 대리님 호모라구 소식 전하구 다닌 것”, 엄마야, 졸라 황당하데, 지가 무슨 증거루다가, 설상 지가 무슨 증거가 있어두, 개인 사생활을 지 맘대루 떠들구 다니나, 하는 생각 때문에. 그 얘길 듣구 나니, 정말 회사 출근 자체가 힘들어 지드라구, 일도 손에 안잡히구, 그 김과장 새끼만 보믄, 손이 부들부들 떨리구 “저 새끼 집에가 확 다 불어, 그 개새끼가 필리핀서 어떻게 살았는지” 하는 생각만 졸라 들구. 너무 속상하구, 분해서, 더 이상 출근을 못 하겠더라구, 맘 같아서야 이런일루 지면, 게이인생 끝이다 하는 생각두 굴뚝 같았는데, 그렇게 하기두 싫구. 그래서 사표를 냈잖아. 사표를 내가 낸다는 소문이 돌자, 정말 모든 남자 직원들의 얼굴에 안도감이 도는 듯 하데 “다행이야, 변태 새끼가 없어지다니, 아휴 저 찝찝한 것 때문에 힘들었었는데” 하는 그런 표정들 있잖아. 너무 화가 나구, 분해서, 정말 몇일을 잠두 잘 못자구, 밥두 잘 못먹구 하다, 마지막 날 책상을 다 정리하구 나오면서, 회사 곳곳에 편지를 붙이구 왔잖아. “여러분 호모 대리는 갑니다, 김 과장님 넘 감사드리구요, 제 입으루 말하기 힘들걸 대신 다 해주셔서. 근데 세상에 호모는 저 만이 아닙니다, 여러분의 가족중에두 있을수 있구, 여러분의 자식중 한명이 호모 일수두 있습니다. 세상에 10%가 호몬데, 여러분 가족중에 한 명이 호모람, 제게 한 것 하지 마시구, 잘 감싸 주시구, 이해해 주세요, 싸우지 못하구, 내 권리를 찾지 못하구, 그냥 퇴사 하는 제가 미울 뿐입니다”라는 편지를. 물론 사장실에두 한 통을 전하구. 엄만 이핼 못하시구, 내가 회사 그만 둘걸 넘 속상해 하시드라구. 엄마한테 “엄마, 나 호모라구 회사에 소문나 그만뒀잖아” 소릴 못하겠데. 그렇게 퇴사를 하구 나니까 정말 한국이 싫어 지더라구, 어디감 또 그런일 안 생기겠어 하는 생각에. 그래 마음도 달래구, 좀 놀 겸, 미국에 갔잖아, 엄마 한테 미국에 있는 조카들이 넘 보고 잡아 하는 핑계를 … 그리구 다시 취직을 했잖아, 그리구 차두 사구. 서울서 길 뛸람 젤 필요한게 차드라구, 그래 장안동 가서 중고 콩코드를 샀잖아. 차 사구 나니까 남 부러운게 없데, 토요일 아침 서울서 출발해, 대구 가서 바 뛰구, 정말 졸라 놀구, 대구 한일극장 건너편에 있던, 자칭 원조 따로국밥집서, 밥먹구, 거기서 부산가 보림극장 뛰구, 데레사여고 들어가는 골목 근차에 있던 게이 술집가서, 말빨이 정말 넘어갈 정도루 쎈 부산 문딩이 형들이랑 놀다, 부산 역전 아리랑 호텔 가서 자구, 그러다 피터를 만났잖아, 일본 후쿠오카 사는 피터를, 태어나긴 덴마크서 태어나, 어려 미국이민와, 일본서 교수하던 피터를 파고다 공원서 만났잖아. 일년에 서너번은 다니러오구, 피터가 첨엔 날 살살 피하더라구, 그래도 뭐 내가 미모가 있으니까, 다 넘어 오더라구, 경국지색 뭐 그런 말들 있잖아. 사실 내가 생긴 건, 씹다 버린 장아찌 같지만, “흥 내 미모가 파고다 최고다” 하면서, 얼굴 빳빳이 들구 다녔거든 그래서 또 피터를 사귀게 됬잖아, 그것두 아주 오래 동안. 난 한번 누구 좋아함, 정말 졸라 좋아 하거든, 눈에 보이는 것두 없고. 피터는 날 좋아 하면서도, 일본에 산다는 이유로, 내게 많은 자유를 줬고, 둘이 거의 매일 통화하구, 편지두 자주 주고 받고, 한 달에 한번 꼴루 일본엘 갔잖아, 나중엔 공항서 여권에 도장 찍어주는 직원이랑, 인사를 할수 있는 지경이 될 정도루 일본을 갔잖아, 뭐 후쿠오카야, 말이 국제선이지, 거의 제주도 가는거잖아 금요일 저녁 뱅기를 탈람, 사무실서 늦어두 4시엔 도망을 나와야 하는데, 어휴 참 많이 힘들었네, 말이 한 달 한번이지, 왕복 뱅기삯, 이박 호텔비 또 먹는것, 쓰는것 등등, 돈두 졸라 들두라구, 연휴란 연휴는 다 일본서, 휴가는 일본가서.. 가족 버리구. 그럼 어때, 좋아 하는 사람 만나 행복 하믄 되지 하는 생각으로 현해탄 건너 다니는 짓을 글쎄 96년 8월 호주로 야반도주 하기전 까지 했잖아. 후쿠오카 도착해, 시내 들어가, 조금 있으면, 피터가 오구, 늦은 저녁 먹구, 그이가 단골로 가끔 가던 옥터보 숏바 가서 술두 한잔 씩 하구, 난 혼자서 빠찡고두 하구, 그러다 나중엔 술집 주인이랑 넘 친해져, 그 술집 주인이 호텔비 아깝다고 몇번 재워줬잖아. 넘 좋은 날들 이였다고 생각해,,, 그 때가 피터는 첨 날 만날땐, 사랑에 빠지지 않을려고 노력을 했는데, 한 번 불이 붙으니까 넘 뜨거워 지더라구, 날이 가구 서로 정도 깊어 가면서 방방 뜨던 그이 입에선 쓸데 없이 기다리란 소리만 졸라 하구. 신기한건, 낼 나랑 함께 살것 같이 행동하던 사람의 입에서, 기다려 달라는 말만 자꾸 하는데, 듣는 내 입장선 기분이 별로 안 좋드라구. 뭐 내가 같이 살아달라구 빈것두 아니구, 매일밤 물떠 놓고 정성 들인것두 아닌데, 자꾸 그인 나한테 그런 기분이 들게 만들드라구. 속만 타구, 죄책감만 들구. 그렇게 시간은 가구, 결정된건 하나두 없구,,,, 그러다 둘이서 시드니로 96년 6월에 휴가를 갔잖아. 그때, 난 이미, 이이랑은 정리를 해야지 하는 생각이 머리속에 있었고, 그인 그냥 좀만 더 기다림 하는 소릴 달구 살구. 시드닌 두번째로 간건데 그때, 공항서 내려, 시내로 들어가는 길에 넘 괴상한 기분이 들더라구, 아주 친근한 기분, 한 번 밖에 다녀가지 않았는데 꼭 오랫만에 고향에 돌아온 기분, 아주 따스한 기분이 드는게, 신기하게 전혀 서먹 하지가 않데... 한국에 돌아와, 그이는 후쿠오카로 돌아가구, 나 짐싸기 시작 했잖아. 호주루 이사 갈라구. 그때 정말 한국서 사는게 정말 피곤해 지구 있었거든. 숨어 게이생활 하는것두 넘 피곤하구, 매일 결혼 소리 듣는것두 싫구... 내가 호주로 이살 간다 하니까, 친구는 방방뜨구, "가긴 어딜가 이놈아, 니가 거기에 남자가 있니 가족이 있니" 하면서 걱정하구. 내가 게이인걸 아는 친구 놈들은 "정말 갈꺼니 하며" 걱정의 눈빛만 보내구. 휴가 다녀와 거의 한달만에 사표내구, 짐정리 하구, 호주로 도망 가는데 까지 채 3개월이 안 걸리데. 집에서 다들 뒤집어 지시구, 특히 엄만, 은근히 내가 미국가 살길 원하셨는데, 갑자기 호주 소리가 나오니까 "너 제 정신이니" 소리만 하시면서두, 말려봐야, 힘만 낭비 하시는걸 넘 잘아시니까 말리지두 못하시구, 그냥 걱정만 하구. 전세루 살던 아파트, 전세 빼달라구, 누나에게 부탁하구, 거의 준비 다하구 난 그이보러 후쿠오카에 갔잖아. "나 호주간다, 살러" "으잉, 왠 자다가 봉창 뚜드리는 소리, 좀 만 기다림..." "기약없이 기다리는 것두 싫구, 진짜루 게이답게 살아 보구두 싶구, 그래서 나 가. 그러니 잡지마" 했더니. 그이가 마악 화를 내데,,, 둘이서 보낸 시간이 얼만데, 니 때문에 내가 얼마나 힘들었는데 등등 소릴 하면서, "난 너한테 하나두 바란게 없잖아, 내가 언제 나랑 살잔 소릴 했니, 아님, 니가 죽도록 좋으니까, 죽는 날까지 너만 기다릴께 한 적도 없구, 사랑한 만큼, 내가 행복하길 원하는 만큼, 그냥 내가 행복하게 그냥 보내줘". 그랬더니, "니가 좋아 하는 차 사줄께 가지마" 하데. 나 정말 사브 차를 넘 좋아 했거든, 중학교 때 엄마 따라 일본가서 한번 보구, 그래 저 차다 하는 생각으루, 정말 한땐 돈 벌어 사브 사는게 소원일 정도루. 근데 너무 싫더라, 내가 몸 파는 것도 아니구.. "내가 너 한테 몸 팔았니, 좋아서 사랑했는데, 좋아서 번 돈 다버리며 물건너 다녔는데, 행복해라 소린 못하구, 차 사줄게 가지말라니..“ 넘 실망 스럽구, 속상하드라구. 얼마나 내가 가는게 속상해 그런 말을 했을까 하는 생각이 들면서두 넘 싸구려가 된것 같아, 많이 속상 했잖아. 그렇게 한국을 떠났잖아. 밤 비행기 타구, 혼자서 혼자서 외로이 "내 인생은 나의것" 을 외치며... 가방 하나 달랑 들구, 아무도 연고가 없는, 그 먼 시드니루 비자두 관광비자 하나 달랑 들구.... 게이처럼 살아 볼라구, 좋아 하는 사람 만나 손잡구 길도 걸어 보고, 정말 좋음, 결혼도 해볼라구. 나 정말 센가봐. 다른 게이들은 힘들어두, 눈치가 보여두, 한국서 지지고 볶으며 잘 사는데 그렇게 혼자 한번 벅차게 살아 보겠다구, 그 먼나라에 갔으니. 시드니에 도착해 한 달 반쯤 걸렸나봐, 취직하구, 정착 하는데. 잘 살았잖아 시드니서, 행복하구, 데이트두 질리게 하구 차이구, 차기두 하구, 결혼 하자구 청혼두 받아보구... 기냥 맨 땅에 헤딩 하듯이 그냥 그렇게. 근데 사는데 무서운게 없는것 같아, 어디가든 좋은 사람들이, 나쁜 사람들 보단 훨 많은것 같구, 피부색이 틀려두, 머리색이 틀려두, 좋은 사람들은 항상 따스하고, 싸가지 없는 것들은 어디가나 다 똑같구. -- 이 이야기는 여기서 끝. 뒤에 더 있었는데 보관하지 못함. ㅠㅠ 사이트는 사라짐. 원덬이 10년 전에 퍼다 보관하고 있던 글이야. 아마도 글쓴 분은 1960년대 초 태생으로 추정되며 (현재 50대 후반) 지금은 시드니를 거쳐 샌프란시스코에 애인과 살고 계신다고 함. 악플이 너무 달리니까 그 이후로 글을 그만 쓰더라구. 원덬은 자기 과거사를 남기지 못한 게이 윗세대에게서 들을 수 있는 몇 안되는 구술사료격으로 생각하고 보관하고 있었음... 그리고 이건 근황이래요
[맥주 이야기]: 세계 1티어 자연 발효 맥주 드리 폰타이넌(3 Fonteinen) ABC 모음집 -1편
'람빅'이라는 단어를 들을 때 먼저 어느 양조장이 생각나시나요? 가장 많이 언급되는 곳은 칸티용,드리 폰타이넌, 분 등등 정말 많은 양조장/블랜더리가 언급될 것입니다. 솔직히 말하자면 저에게는 드리 폰타이넌 양조장 맥주가 가장 먼저 생각이 나는데요. 아무래도 저의 첫 람빅이 바로 드리 폰타이넌의 람빅이었고 여러모로 가장 큰 인상을 주었기 때문인데요. 벨기에 Lot 마을 외교에 위치한 드리 폰타이넌 양조장은 이미 다양한 라인업은 보유하고 있는데요. 오늘 그 라인업을 한번 간단히(?) 정리해봤습니다. 참고로 드리 폰타이넌 라벨은 2017년에 이미지 디자인을 업데이트하여 종이 라벨에서 작은 원형 라벨과 뒷면 라벨이 있는 실크스크린 '3'으로 변경했습니다. 눈길을 사로잡는 병의 흰색 '3' 숫자는 잊을 수 없는 추억을 불러일으킬 정도로 람빅 양조장 중에서도 독특하고 선구적인 디자인을 보여주기도 했는데요. 예전에 유럽에서 맥주를 마실 때, 제가 혼자서 유유히 칸티용, 드리 폰타이넌 2병을 오픈했을 때, 옆에 현지분들이 저 ‘3’은 뭐냐고 수없이 들었던 기억이 나네요 ㅎㅎ. 다만, 2020 겨울 세트 출시와 함께 새로운 이미지가 소개되었습니다. 이번에는 뒷면 로고가 원래 원형 로고와 숫자와 결합되었습니다. "3"은 동일한 종이 라벨에 결합되어 내용을 작성할 공간 (네덜란드어와 프랑스어뿐만 아니라 영어 설명이 들어감)이 눈에 띄었습니다. 여기서부터 재미가 시작됩니다. 새로운 제품이 계속 출시되고 라벨에 정말 다양한 영어 알파벳 같이 글자의 종류가 다양해지는데요. 처음에 저는 어지러울 정도로 다양한 제품을 보며 다른분들도 첫 번째 궁금증으로 기본적으로 '이 모든 다른 글자들은 무엇을 의미할까'일지도 모르죠. 그러면 오늘 이 알파벳을 따라가면서 알아봅시다. A 네덜란드어로 "딸기"를 뜻하는 아드베이 - Aardbei. 이 술은 2020년 7월에 출시된 특정 딸기 세트에서 나온 술로, 알파벳 A라는 글자로 작품에 표시한 것은 이때가 처음입니다. 둥근 라벨의 바이오 아드베이(Bio Aardbeien)는 EU 인증 유기농 딸기를 사용했음을 의미하며, 배럴 모서리 라벨은 오크통에서 과일 숙성이 이루어졌음을 의미합니다. [사진 제공 Matthijs B.] 아드베이(Aardbei)는 이 술인에 드리 폰타이넌 자체 베이스 원주를 100% 사용하며, 최종 과일 비율은 1리터당 658그램입니다. 과거 경험으로 볼 때 이것은 매우 높은 비율인데요. 병입 전에 어린 람빅을 다시 혼합하지 않았지만 과일의 잔류 당이 병에서 약한 2차 발효를 이끌어냈습니다. 아드베이/크릭(Aardbei/Kriek)는 딸기와 체리를 첨가한 과일 람빅입니다. 딸기를 먼저 람빅에 첨가하여 침식 및 발효시킨 다음 일정 시간이 지난 후 체리를 첨가하여 최종적으로 병에 담습니다. 이 와인은 스펠링 반 헤트 로트(Speling van het Lot) 제품군에서 출발한 람빅으로 약간의 실험작 느낌이 듭니다. 이는 드리 폰타이넌이 이 실험적인 작품에 매우 만족하고 있다는 뜻이겠죠. 동그란 라벨 아래의 바이오 아드베이엔(Bio Aardbeien)은 이 람빅에 사용된 딸기가 EU 기준에 따라 유기농임을 나타내며, 그 옆에 있는 작은 통 모양의 라벨은 오크통에서 과일 숙성이 이루어졌다는 사실을 나타냅니다. 드리 폰타이넌의 과일 람빅의 경우 과일의 모든 숙성이 배럴에서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며 람빅의 상당 부분을 스테인리스 스틸 탱크에서 먼저 처리한 다음 오크통으로 옮깁니다. 이 방식은 오크통을 보호하기 위한 것이기도 합니다. B 알파벳 B에는 블루베리, 블랙베리, 블랙베리 람빅의 세 가지 유형이 있습니다. 블라우베 보스베스(Blauwe Bosbes) 블루베리 람빅은 스웨덴산 야생 블루베리를 몇 달 동안 어린 람빅에 담근 후 약간의 맥아즙과 혼합한 제품입니다. 병 라벨에는 스웨덴 수입업체 브릴(Brill)이 추가되어 스웨덴 국기가 그려져 있습니다. Braambes 브람스 블랙베리 람빅(블랙베리의 왕)은 엄선된 블랙베리를 람빅으로 침식 및 발효시킨 제품으로, 공급업체 페르메 프람부스(Ferme Framboos)의 블랙베리를 사용했습니다. 2019년은 드리 폰타이넌에서 블랙베리를 사용한 람빅이 처음 출시된 해이며 그 이전에는 스펠링 반 헤트 로트(Speling van het Lot)의 실험 버전으로 출시되었습니다. 병 라벨 하단의 Oogst 2018은 과일 수확 연도가 2018년임을 의미합니다. 오른쪽 하단의 작은 원형 라벨은 오크통에서 과일 숙성이 이루어졌음을 의미합니다. 브람베스(Braambes) 블랙베리와 달리 브람스 블랙베리 람빅(Bramenlambik)은 한 곳에서 나온 끓인 맥어즙을 사용하여 만들고 나중에 어린 람빅을 추가하지 않았기 때문에 이론적으로 병에서 2차 발효가 일어나지 않아 기포가 미미합니다. 이 람빅은 플랑드르의 아름다운 마을 훌덴버그(Huldenberg)에 위치한 페르메 프람부스(Ferme Framboose) 과일 과수원에서 생산된 블랙베리로 만들어집니다. 드리 폰타이넌에서 직접 만든 단일 탱크 맥즙을 식혀 작은 오크통에 넣은 후 과일을 넣어 약 4개월 동안 침식 및 발효시킨 후 병에 담았습니다. 이 람빅의 과일 농도는 와인 1리터당 645그램입니다. 이것은 새로운 라벨로, "3"을 포함한 모든 단어가 종이에 인쇄되었으며 더 이상 실크 스크린으로 된 "3"이 없음을 보여줍니다. 한 시대가 끝나고 새로운 시대를 알리는 거 같네요. C 알망 앤 가스통 스페셜(이하 알망)은 드리 폰타이넌에서 생산된 1년, 2년, 3년산 람빅을 블렌딩한 술입니다. 본질적으로 알망은 괴즈입니다. 시중에는 어지러울 정도로 다양한 빈티지와 배치의 알망이 판매되고 있지만, 사실 알망드의 첫 번째 병은 불과 7년 전에 생산되었습니다. 2016년 6월, 드리 폰타이넌은 750ml와 375ml 용량의 첫 번째 알망을 출시했습니다. 그 후 1.5L 매그넘 병에 채워진 매그넘 버전은 2018년이 되어서야 출시되었으며, 나중에 알망드 & 가스통 스페셜 리저브(빈티지)로 알려지게 되었습니다. 아르망은 드리 폰타이넌을 대표하는 아르망 드벨더(Armand Debelder)의 이름이며, 가스통은 아르망의 아버지인 가스통 드벨더(Gaston Debelder)의 이름으로 그의 아버지를 기리는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드리 폰타이넌은 여러 곳에서 베이스 원주를 구매하지만, 아르망 & 가스통 스페셜에 포함된 모든 베이스 와인은 드리 폰타이넌 자체에서 생산됩니다. 현재까지 50가지가 넘는 버전의 알망이 출시되었으며 앞으로 그 수는 더 늘어날 것입니다. 드리 폰타이넌의 마스터가 되고 싶으신가요? 알망의 모든 배치를 모으는 것부터 시작하세요! D D는 네덜란드어로 '포도'를 뜻하는 단수형과 복수형인 드루이프/드루이븐(Druif/Druiven)의 줄임말입니다. 오늘날 람빅 포도는 드물지 않으며, 칸티용 양조장의 람빅 중 람빅 다우니스(Lambic D'Aunis), 돈키호테(Don Quijote), 성찬 기념 람빅인 빈 산토(Vin Santo) 등 많은 람빅도 피노 누아, 피노 그리스 같은 포도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지금까지 판매된 람빅 중 가장 비싼 람빅 중 하나인 돈키호테] 드리 폰타이넌은 포도 람빅에 대한 시도를 비교적 안하는 양조장인데요. lambic.info에 따르면 1996-98년 샤르도네 람빅을 제외하고 드리 폰타이넌은 2000년경 말바시아 로소(Malvasia Rosso), 피노 누아 람빅(Pinot Noir Lambic), 그리고 아직 어떤 포도를 사용했는지 알 수 없는 드루이븐 괴즈(Druiven Geuze) 등을 생산했습니다. 드리 폰타이넌은 2020년 겨울 세트에 덴펠트 품종인 도른펠더(Dornfelder )와 블루 머스캣 품종인 머스캣 블뢰(Muscat Bleu) 두 가지 포도 람빅을 준비했습니다. 머스캣 블뢰(Muscat Bleu) 포도 람빅에 사용된 토종 포도는 플랑드르의 빈도마인 호엔스호프 (Wijndomein Hoenshof)에서 공급받았습니다. 드리 폰타이넌의 람빅 베이스 원주를 사용하여 병입됩니다. 머스트를 채취하여 약 5개월 동안 다른 배럴에서 베이스 람빅과 함께 발효시킨 다음 서로 혼합한 후 젊은 람빅과 블렌드를 진행합니다. 해당 람빅의 과일 농도는 38.1%에 이릅니다. 머스캣 블뢰(Muscat Bleu) 와인 포도와 테이블 식용 포도를 교배하여 얻은 스위스산 적포도입니다. 이 포도는 향이 비교적 가볍고 아름다운 푸른 껍질을 가지고 있으며 와인과 신선한 음식 모두에 적합합니다. 이 람빅은 빈도마인 호엔스호프(Wijndomein Hoenshof)에서 생산된 도르펠더 포도로 만든 와인으로, 포도를 압착하여 주스를 만든 다음 잠시 침식시킨 후 베이스 원주와 함께 오크통에서 발효시키는 드리 폰타이넌 람빅을 기반으로 합니다. 병입 전에 소량의 어린 람빅을 첨가하여 병에서 2차 발효를 촉진하고 와인에 거품을 더했습니다. 이 와인의 과일 농도는 51.7%입니다. 도르펠더 “Dorfelder”는 짙은 색, 짙은 베리 향과 풍부한 꽃 캐릭터를 가진 독일 적포도 품종입니다. 이 포도는 크고 일관된 수확량을 생산하며 현재 독일의 주요 와인 포도 품종 중 하나입니다. F 프람부스(Framboos) 라즈베리(라즈베리의 왕)는 다양한 원산지의 라즈베리를 람빅 베이스에 첨가한 과일 람빅으로, 프람부스는 프랑스어로 프람부아즈, 영어로 라즈베리에 해당하는 네덜란드어로 2018년까지 모든 라즈베리 과일 람빅은 6% abv로 라벨이 지정되었지만 2018년부터는 각 배치마다 정확한 알코올 함량이 표시됩니다. 라즈베리 람빅은 원래 레스토랑에서 사용하기 위해 적어도 1990년부터 생산되었습니다. 당시에는 특별히 디자인된 라벨이 없었고 라즈베리 람빅임을 나타내는 분홍색 불필 마크만 있었습니다. 종이 라벨이 등장한 후 라즈베리 람빅은 몇 차례 출시되었지만 소량만 출시되었습니다. 파조텐란드(Pajottenland )의 일반 라즈베리 외에도 2018년부터 드리 폰타이넌은 훌덴베르그에 있는 Ferme Framboos 공급업체의 "유기농" 라즈베리를 사용하고 있습니다. 라즈베리 람빅은 이제 일반 제품 라인의 일부가 되었죠. 라즈베리 람빅은 다양한 버전으로 제공됩니다. 둥근 라벨 Oogst 20xx (20xx 년에 수확 한 라즈베리) 외에도 다른 통에서 숙성되거나 신선한 맥아 즙이나 꿀이 첨가 될 수 있습니다. 정확한 버전을 확인하려면 뒷면의 라벨을 읽어야 하는데, 이는 끝없이 흥미로운 정보를 말해줍니다. 드리 폰타이넌의 -lambik 접미사가 붙은 이 과일 람빅은 병에 2 차 발효가 없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병에서 2차 발효를 하면 이산화탄소가 더 많이 발생하여 술에 더 많은 기포가 생기며, 이 카테고리에서와 마찬가지로 -lambik을 마실 때 거품 느낌을 거의 맛볼 수 없음을 의미합니다. 라즈베리 람빅 방법도 매우 고전적입니다. 페르메 프람부스 과일 과수원의 라즈베리를 스테인리스 스틸 통에서 몇 달 동안 숙성시킨 다음 어린 람빅을 첨가하지 않고 병에 담아 병에서 두 번째 발효가 드물고 거품이 거의 발생하지 않습니다. 이 람빅은 2018년 오픈 비어 데이에 처음 등장했으며, 2020년 12월 드리 폰타이넌이 출시한 겨울 패키지에 새로운 라벨과 과일 수확 연도가 표시되어 다시 등장했습니다. G G라는 글자 아래에는 일반 괴즈와 골든 블렌드라는 두 가지 기즈가 있습니다. 많은 설명이 필요 없을 정도로 드리 폰타이넌에서 일반 괴즈보다 더 친숙한 술은 없죠! 드리 폰타이넌의 괴즈는 양조장의 역사만큼이나 오랜 세월인 1950년대부터 만들어져 왔습니다. 괴즈의 제조법은 시대에 따라 조금씩 달라졌지만 1년, 2년, 3년 된 람빅을 블렌딩하고 병에서 두 번째 발효를 거쳐 괴즈가 탄생하는 기본적인 핵심은 크게 변하지 않았습니다. 자체 생산을 위해 여러 양조장에서 공급하는 맥즙을 구입하는 관행은 람빅 양조장들 사이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방식입니다. 대형 양조업체인 분, 린데만스, 지라딘(Girardin)은 모두 드리 폰타이넌에 원액을 공급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드리 폰타이넌 역사상 한 번의 사고가 있었는데, 2009년 숙성을 위해 병을 보관하던 저장실의 온도가 섭씨 60도에 이르렀을 때 온도 조절기가 고장나 히터를 끌 수 없었고, 이는 의심할 여지없이 람빅에게 치명적인 온도였습니다. 이 온도 조절기 사고로 인해 8만 병 이상의 숙성 람빅이 열에 의해 완전히 파괴되었고, 일부는 그 자리에서 폭발하기도 하는 등 그 결과는 심각했습니다. 람빅 제조 장비의 임대 계약이 곧 만료될 예정이었기 때문에 와이너리는 겨울을 재정적으로 버티기 위해 전략을 조정해야 했죠. 그 후 오랫동안 드리 폰타이넌은 자체 람빅을 만들 수 없었고 대신 블렌딩을 위해 외부에서 원액을 구입하는 데 의존했습니다. 2013년 이후 드리 폰타이넌은 자체 람빅 제조를 재개했고 점차 자체 양조 괴즈도 세상에 나오게 됩니다. 2016년 중반부터 후반까지 드리 폰타이넌 괴즈에는 새로운 라벨이 도입되었으며, 지금까지 60여 가지의 다양한 버전이 등장했습니다. 드리 폰타이넌을 알고 싶다면 다양한 버전의 기즈가 여러분을 기다리고 있으니 꼭 드셔보세요! -2편에서 계속
낭만과 성능의 대결! 전함파 vs 항공모함파
사실 일본이 '함대결전사상'을 버리지 못하데에는 다른 이유도 있습니다 바로... 기름이 없었기 때문이죠 부족한 자원과 밀리는 생산량 탓에 어떻게든 한번의 한타로 결정적인 승기를 잡는 것이 중요했던 일본 해군은 함대를 운용할 때 굉장히 소극적이고 조심스럽게 움직였죠 그럼에도 불구, 전쟁 말기에는 굉장한 자원부족으로 고통받게 됩니다 반면 미군은 원하는 곳에, 원하는 양의 함대를 신속하게 전개할 수 있었기에 굳이 함대결전에 목을 맬 필요가 없었습니다 '연합함대 사령장관 야마모토 이소로쿠' 영화의 장면에서 당시 분위기를 살필 수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같은 영화의 한 장면입니다 당시 일본에서도 전함파 vs 항공모함파의 대립이 있었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죠 '야마토를 만들 돈이면 제로센을 천기는 만들 수 있다'는 항공모함파와 '함대결전사상이 일본 해군의 근본이다'는 전함파의 의견이 대사로 나옵니다 야마모토 이소로쿠 또한 과연 진정한 의미로 일본 해군에서 '진보파'였는지도 의견이 갈립니다 이소로쿠가 일본 군부 내에선 그나마 항공모함에 집중한 것도 맞지만 항모 운영에도 미숙한 실수가 계속 발견될 뿐더러 파벌 때문인지 전쟁 끝까지 전함에 대한 미련을 놓지 못하는 모습도 보이기 때문입니다 (어디까지나 미국 제독들과 비교해서) 다만 미군에서도 인정했듯이, 당시 일본 해군 내에서 이소로쿠를 대체할만한 인물이 없었던 것도 사실입니다 (출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