Voyo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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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청나게 화려했던 엘리자베스 여왕의 대관식

-버킹엄궁에서 웨스트민스터 사원으로 출발하는 여왕 , 화려한 대관식 마차

대관식 (임금이 즉위한 뒤 처음으로 왕관을 써서 왕위에 올랐음을 일반에게 널리 알리는 의식)

아버지의 갑작스런 죽음으로
하루아침에 여왕이 됨

여왕이 된지 1년여후에 대관식을 올림
이미 왕으로서의 지지를 한몸에 받고있던 중이라 국민들의 축하가 대단했음

시기가 대영제국이 막을 내리고 있던 때였음
여왕의 탄생에 엘리자베스1세,빅토리아 여왕처럼 영국의 전성기를 다시 이끌어달라는 국민들의 기대를 받음

-유럽 왕실 처음으로 TV생중계를함
옆에 보좌하는 귀족가 시녀들


- 2KG 달하는 왕관의 무게 때문에 저때 너무 힘들었다고함


- 버킹엄궁으로 돌아와 발코니 인사
꼬맹이 찰스 왕세자도 보인다


- 여왕이 들고있는것  도덕적 권위와 군주의 힘


- 왕홀에 달려있는 다이아몬드는 컷팅된 무색 다이아몬드중 가장 큰것


사진 끝나고 박수


대관식이 지루한 찰스왕세자


발코니 인사전 시녀들과 히히덕


세금안내는 옆나라 입장에선 대관식 보는재미 있네


Voyou
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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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항에서 재입장이 힘든 이유를 알아보자
공항에 가본 사람들은 알겠지만, 공항에선 수하물 찾고선 나갈때 다시 들어올 수 없다고 엄중히 경고한다 왜 그럴까? 여기에는 비하인드 스토리가 있다 시간을 잠시 돌려 1999년대로 가보자 이사람의 이름은 니시자와 유지 흔한 항덕이었지만, 사정이 안되서 철도회사에서 일하게 되었지만, 그마저도 안되어 자살할 결심으로 회사를 나가게 되지만, 실패하게 되어 히키코모리가 된다 히키코모리였던 당시 그가 주로 했던게임은 플라이트 시뮬레이터였다 그는 1000회 이상 무사고 비행을 했으며 도쿄의 레인보우 브릿지를 통과하는 것을 즐겼다고 한다 그렇게 히키생활을 하던 와중 항덕이었던 니시자와는 어느날 하네다 공항 단면도를 보다가 경비시스템의 사각을 발견하게 된다 그것은 바로 1층에서 수하물을 찾고 2층으로 올라가 환승을 할때, 검문을 받지 않고 탈 수 있다는 점이었다! 개쩌는 보안 취약점을 발견한 니시자와는 관련회사에게 여러가지 정보를 취합하여 이 보안 취약점을 이력서와 함께 보내서 자신을 경비원으로 취직 시켜달라고 요구했다 오우! 그렇게 해서 재입장이 불가능 해진거구나! 만일 그랬으면 이 이야기는 여기서 끝이겠지만 아무래도 현실은 좀더 각박했어 관련회사는 무슨 생각이었는지 모르겠지만, 니시자와의 편지를 그냥 무시해버렸던거야 칙쇼...감히 무시를 해? 좋아. 날 무시한 댓가를 톡톡히 치러주겠어!!!! 그렇게 그는 범죄의 길로 빠지게 된다... 1999년 7월 23일 오전 6시 45분 니시자와는 하네다공항에서 오사카의 이타미공항에 가는 티켓을 사게 된다 니시자와는 또 하나의 보안취약점을 이용하는데 기내 수하물을 맡기면 X레이 검색대에 들어가지만 위탁 수하물은 X레이 검색대를 통과하지 않는다는 점을 이용하여 가방에 칼을 넣고 공항을 떠나게 된다 8시 50분 그는 다시 이타미공항에서 하네다공항에 가는 비행기를 타게된다 또 다시 가방을 위탁수하물에 맡겨 검문에 당하지 않고 흉기를 넣고 하네다공항으로 오게된다 10시 7분 하네다 공항에 도착한 그는 오전 11시에 출발하는 ANA 61편을 목표로 행동에 돌입하기로 한다 우선  위탁 수화물을 찾은 후 화장실로 가서 가방은 휴지통에 버리고 칼은 작은 가방에 넣고 약간의 변장을 한다 그리고 그는 내렸던 1층을 다시 역주행해서 2층으로 올라가게 된다 이렇게 올라갔던 그는 X레이 검문소를 통과하지 않고 흉기를 반입한 채 목표물인 ANA 61편에 탑승하게 된다 이륙 2분후 칼로 승무원을 위협하여 기장실을 열라고 협박했다 기장도 바보는 아니었는지라 조종실로 들어오기전에 하이잭당한 사실을 관제소에 알렸다 이후 니시자와는 비행기를 요코스카쪽으로 돌리라고 지시했다 원래 이 비행기는 훗카이도로 가는지라 기존에 보이면 안되는 후지산이 보여 승객들도 사태의 심각성을 깨닫게 된다 이후 요코스카를 통과하자 이즈오시마 섬으로 가라고 지시했다 그다음 요구는 아주 미친짓이었는데 10000피트에서 비행하던 항공기를 3000피트로 비행하라고 지시한다 참고로 3000피트는 900m이며 가장 높은 빌딩인 부르즈 할리파가 828m니까 얼마나 낮게 나는지 대충 짐작이 갈거다 얼마나 낮게 날았던지 근처 아마추어 야구장에서도 비행기를 육안으로 볼 수 있었다고 한다 고도를 낮추고 부기장을 내쫓고 문을 걸어잠근 후 니시자와는 꿈에 그리던 비행기 조종을 시도한다 실제로 전문용어까지 쓰면서 했다고 함 그러나 비행기는 니시자와 뜻대로 제대로 움직이지 않았다 왜그랬을까? 사실 비행기는 기장과 부기장 두개가 서로 연동되어 움직이는 시스템이었다 그니까 어느 한쪽이 안움직이고 버틴다면 잘 움직이지 않는 시스템이다 즉, 기장이 니시자와가 개짓거리를 할까봐 조종간을 꽉 붙잡고 있었던것! 실로 영웅적인 행동이 아닐수가 없다 결국 원인을 알아낸 니시자와는 기장에게 컨트롤을 넘기라고 했으나... 당시 납치된 ANA 61편 기장 : 좆까 난 승객을 지켜야해 너같은 병신에겐 맡길수없어 결국 빡친 니시자와는 기장의 목을 칼로 찔러서 살해해버린다 그렇게 더이상 장애물이 없는 니시자와는 11시 55분 혼자서 단독으로 비행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이미 비행기가 힘을 많이 잃어버려 주택가로 급강하 하게 된다! 이대로라면 수천 수만의 무고한 시민들이 죽게 되는 절체절명의 상황이 벌어지게 되는데!! 경보음이 쉴새없이 울려대고 자동항법장치까지 꺼지자 보다 못한 부기장과 기타 사람들이 이래죽나 저래죽나 하는 심정으로 문을 박살내고 니시자와를 끌어낸다 웃기게도 이 고생을 하고 니시자와가 수동으로 비행한 시간은 단 2분밖에 안되었다고 한다 승객중에 있던 파일럿과 부기장이 가까스로 고도를 상승시켜 비행기를 안정시킨다 몇분만 늦었어도 하치오지 주택가에 떨어져 천문학적인 피해가 날뻔한 위험천만한 사태였다 12시 14분 비행기는 다시 하네다공항으로 회항하여 무사히 착륙한다 니시자와는 곧바로 붙잡혔지만, 칼에찔린 기장은 골든타임을 놓쳐 끝내 과다출혈로 사망하게 된다 사망한 기장과 부기장은 승객을 안전하게 보호한 것을 인정받아 민간항공사에서 줄 수 있는 최고의 상인 폴라리스상을 받게 된다 그리고 니시자와는 2005년 항소없이 무기징역을 받게 된다 범행 전에도 공항에 전화를 걸어 보안취약점에 대해서 조치해달라고 했던 점 그리고 범행동기가 요미우리 신문에 까발려지게 되면서 하네다 공항은 개쪽을 당하면서 공항 전체의 보안을 재검토를 하게 되었고 이를 계기로 공항에선 내린후에 다시 역방향으로 재입장을 하지 못하게 되었다고 한다 공항에 쓰인 경고문의 대부분은 피로 쓰여진거다 (출처) 아니 근데 어이없네 아무도 몰랐던 (또는 신경쓰지 않았던) 취약점을 적어서 낸 이력서를 무시하다니 하다못해 그 취약점 개선도 안하다니
충격적이라는 샤넬 한국 매출.jpg (법개정으로 최초 공개)
관련 법 개정으로 (유한회사의 500억 이상 자본금, 매출 발생 시 감사보고서 의무화) 그간 베일에 꽁꽁 싸여있던 명품 브랜드들의 국내 매출이 속속 공개되는 가운데, 에르메스와 함께 아예 한국 진출 당시부터 유한회사로 진출하여 지금껏 매출을 공식적으로 공개한 적이 없었던 샤넬의 국내 연매출이 사상 처음으로 공개됨. 샤넬의 2020년 국내 연매출은 매출 9300억 원 영업이익 1491억 원 순이익 1069억 원. 이는 모두의 예상을 깬 상상 이상의 성적. 그런데 이는 심지어 감소한 수치라고(...) 2019년에는 1조 639억 원을 올리면서 당시 루이비통 매출(7864억 원)마저 넘어선 압도적 1위. 2020년 매출은 2019년에 비해 하락하였으나 영업이익과 순이익은 30% 이상 폭증함. 이게 얼마나 충격적인 수치냐면, 샤넬 전 세계 매출 중 무려 '10%'에 해당하는 수준임. (작년 전 세계의 오프라인 리테일이 마비되었기에 한국 매출 비중은 더욱 커졌을거라 예상됨) 일정 수 이하의 매장만 오픈하는 '매장 총량제'로 인해 10개도 안되는 백화점 매장에서 저 정도의 매출을 올리는 샤넬은 정말 경이로운 수준. '샤넬은 매장당 매출이 1000억이다'라는 우스갯소리가 이젠 정말 우스갯소리가 아니게됨... 다른 브랜드의 순위를 보자면 1위 루이비통 1조 467억 원 2위 샤넬 9296억 원 3위 에르메스 4191억 원 4위 디올 3285억 원 5위 프라다 2714억 원 (미우미우 등 프라다 그룹 브랜드 포함) 6위 롤렉스 2329억 원 7위 불가리 1840억 원 8위 보테가베네타 1581억 원 9위 몽클레르 1499억 원 10위 생로랑 1470억 원 11위 발렌시아가 1090억 원 12위 페라가모 1056억 원 13위 펜디 787억 원 14위 로로피아나 605억 원 15위 막스마라 488억 원 16위 골든구스 440억 원 17위 발렌티노 387억 원 18위 쇼메 325억 원 19위 토즈 313억 원 20위 부쉐론 244억 원 21위 휴고보스 212억 원 3월 결산이라 아직 공개되지 않은 버버리의 경우 2019년 매출이 2490억 원이라는 점을 감안하면 최소 6위권 내에는 들것으로 보이고, 역시나 3월 결산인 리치몬트 코리아는 (까르띠에, IWC, 바쉐론 콘스탄틴, 피아제, 몽블랑 등) 2019년 기준 매출이 1조 이상. 까르띠에 매출은 리치몬트의 40%라고 잡아도 에르메스와 비등한 수준이었을 것으로 예상됨. 법 개정에 맞춰 유한책임회사로 전환해 끝끝내 매출 공개 의무를 피한 구찌의 경우, 세계 시장에서 루이비통과 매출 비율이 5:3 정도임을 감안하면 적어도 6000억 가량의 매출을 올렸을 것으로 보여 3위권은 확정적. 또한 디올, 펜디의 최근 인기세를 힘입은 상승세가 눈에 띔. 그리고 역시나 (...) 매출이 공개되니 명품 브랜드들의 한국 시장에 대한 인색한 사회 기여와 책임도 수위에 올라 비판선에 오르고 있음. 한국, 특히 서울의 명품 부티크 밀집도는 세계적인 수준으로 3대 명품을 유치한 백화점과 시내 면세점이 이 정도로 밀집한 도시는 세계적으로도 몇 안되는 유일무이한 수준이며, 명품 브랜드의 부티크들은 인구 대비로 보거나 1:1 비교로 보아도 도쿄나 뉴욕, 홍콩 등 전통적인 명품 산업 핵심 도시들과 맞먹거나 넘어서는 정도. 이를 증명하듯 서울은 아시아에서 도쿄와 함께 3대 명품의 플래그십 스토어가 입점한 유일한 도시이고, 전 세계 30여 개 남짓한 고야드의 매장이 3개나 위치, 포레르빠쥬와 같은 매우 희소한 명품 브랜드들의 부티크까지 보유함. 당장 위 순위로 보아 연매출 1000억 원이 넘는 브랜드들이 무려 12개나 된다는 점도 한국 명품 시장이 상상 이상으로 얼마나 커져가고 있는지를 반영하고 있는데, (아마 병행 수입, 직구 등으로 안 잡히는 매출까지 포함하면 더욱 어마어마 해질 것) 파는 가격과 올리는 매출에 비해 참으로 야박한 인심이라는 것을 부정할 수 없을 정도의 수치들이 속속 공개되고 있어서 씁쓸... 적어도(양심이 있다면) 한국 소비자들을 위해서 플래그십 스토어 오픈하는 성의라도 보여주길. 출처 요즘들어 명품 진입장벽 자체가 많이 낮아진 것 같아요 화폐가치가 떨어져서 그런가...
조선시대 사극에서 의외로 지켜지지 않는 고증.jpg
바로 조선의 왕실 호칭 흔히 잘 알고 있는 폐하-전하-저하-합하-각하-...는 중국식 황실 예법에서 나온 것. 조선에서는 이 중국식 체계와 조선에서만 쓰는 예법이 혼용되었음. 여기서 얘기하려고 하는 것은 조선에서만 쓰던 왕실 호칭 1. 마마 : 왕, 왕비, 상왕, 대비, 세자를 부르던 호칭 오직 이런 분들에게만 마마라는 호칭이 허용됨 원 간섭기에 들어와 한반도에 자리잡은 말임 따라서 원 간섭기 이전 시대 왕실에서 마마라는 호칭을 사용하거나 세자가 아닌 왕자, 왕녀, 후궁에게 마마라고 부르면 안 됨. 2. 마노라 : 처음에는 마마와 같은 의미로 쓰이다 조선 후기에는 세자빈을 일컫는 말이 됨. 1600년 계축일기에 처음 등장 조선 중기에는 "대비 마노라" "대전 마노라"처럼 마마와 동급으로 쓰이다 조선 후기에는 세자빈 전용 호칭이 되고, 20세기에 이르러 아내나 중년 여성에 대한 속칭으로 격하됨(마누라) 마노라의 어원은 불분명해서 몽골발설, 마루 밑을 뜻하는 말루하에서 유래했다는 설(이 경우 섬돌 밑을 뜻하는 폐하, 궐 밑을 뜻하는 전하 등과 맥락을 같이 함), 고유어설 등 다양한 설이 병립함. 3. 자가 : 왕녀나 정 1품 이상의 빈을 이르는 호칭 왕녀(공주, 옹주) 그리고 정 1품 이상의 빈들은 뒤에 자가가 붙음. 세자가 낳은 군주•현주도 포함 정1품까지 승격한 후궁, 간택되어 처음부터 무품빈이었던 후궁 등이 해당함. ※세자빈이었다가 세자가 죽어서 봉호를 받은 빈들도 존재하는데 이들에 대한 호칭이 어땠는지는 모르겠음 4. 마마님 : 정1품 미만 후궁 및 상궁을 이르는 호칭. 한 글자 차이지만 많이 다름. 5. 대감 : 왕의 적자인 대군(무품), 왕의 서자나 손자, 방계왕족인 군을 이르는 호칭 조선이 망해갈 무렵 이런 호칭체계가 무너졌다고는 하지만, 그 이전을 다루는 사극을 볼 때 어딘가 불편하게 느껴지기는 함. 끊임없이 대군마마를 찾는 신채경 인터넷 기사에서도 마찬가지 이런 조선의 궁중 호칭을 잘 살린 드라마로는 해품달이 있음 출처
움짤) 스압) 나약하면 죽던 시절.gif
1961년, 머리카락을 가발 공장에 팔기 위해 줄을 선 여성들의 모습  울음을 터뜨리는 소녀를 같이 온 어머니가 달래고 있다. 1961년, 당시 서울역 플랫폼 모습. 한복을 입은 사람들이 눈에 띈다 6.25 전쟁을 겪지 않은 첫 세대인 1954년생이 초등학교 (당시 명칭 국민학교)에 입학했다  한복을 차려입은 어머니들의 손을 잡고 교정으로 향하는 모습 1962년 경상남도의 장날 풍경 짐을 머리에 이고 장터로 향하는 사람들 강원도 춘천에서 삼베를 말리는 주민의 모습과 초가집들 1962년, 대구에서 열린 우시장 1962년, 모내기가 한창인 서울시 성동구 논현동 (현재 서울특별시 강남구 논현1동, 논현2동) 1963년, 평범한 남해 어촌의 풍경 방과 후 초등학생들이 들판으로 소를 끌고 나가 풀을 먹이고 있다. 집의 재산인 소를 배불리 먹이고 잘 데리고 오는 일을 수행하는 것이 당시 어린 학생들에게는 중요한 임무였다고 한다. 1964년, 초등학교 4학년 학생들의 턱걸이 연습이 한창인 교정  하나라도 더 해내려는 모습의 학생. 달리기를 겨루며 체육 활동을 하는 어린이들의 모습이 방영되었다. 고무신이 닳을까봐 맨발로 운동장을 달리는 학생들과 응원하는 친구들. 영유아사망률 1000명 당 218명. (2021년 세계 최악의 영아사망률을 기록하는 우간다의 2.3배) 신생아 5명 중 몸이 약한 1명은 첫돌을 넘기지 못하고 죽는 시대였다.  아이들에게 야외 활동을 장려하여 체력과 면역력을 기르자는 표어가 방송되었다. 1964년, 한국전력 직원들이 경상북도 영양군에 전봇대를 설치하고 있다. 전기의 혜택을 받지 못하던 가정까지 전기가 들어가는 모습이 방영되었다. '보릿고개 넘기기 운동'이 한창인 시골의 분주한 모습 역사적으로 늘상 문제가 되었던 쥐떼 해결을 위해 '쥐잡기 운동'이 시작되었다. 잡힌 쥐를 보고 속이 시원한듯 웃는 어른들 전국적으로 문맹 퇴치를 위한 운동이 시작되었다. 경북 영덕군에 내려온 대학생들이 글을 모르는 주민들을 모아 읽고 쓰는 법을 가르치고 있다. 1965년, 춘천 수력 발전소가 완공되었다. 산 능선에 올라선 시민들이 이를 지켜보고 있다. 당시 고등학교의 수업 모습 포이어바흐의 유물론과 마르크스, 엥겔스 자본론에 대한 비판 수업이 이루어지고 있다. 교련 시간에 M1 총기 분해조립, 맨손으로 쇠봉 타기 연습을 하는 고등학생들 전국에 큰 비가 내렸다. 잠긴 집과 들을 보고 망연자실한 사람들, 머리를 다친 동생을 돌보는 형의 모습이 카메라에 담겼다. 중부지방에서 피해가 가장 극심했던 청주 시민들이 힘을 합쳐 복구에 나서고 있다. 흙을 퍼내는 아버지들과, 갓난아이를 내려놓고 삽을 들어 복구를 돕는 어머니들 범람 위기의 청주 무심천에서 청주공업고등학교 학생들과 교사, 시민들이 힘을 합쳐 제방을 손보고 있다. 교복을 입은 청주중학교 1학년 학생들이 삽을 들고 수해 복구를 지원하고 있다. 1인당 국민소득에서 필리핀이 2배 이상 앞서던 시절,  거액을 들여 초빙한 필리핀 경제사절단이 내방했다. 일렬로 도열한 한국 관료들의 90도 인사와 환대에 경제사절단 단장인 필리핀 농림상 로드리게스와 필리핀 사절단이 흡족하게 웃고 있다. 1965년 1월, 뉴스에서 가장 중요한 소식으로 다루었던 첫 1인당 국민소득 세자리 돌파 (110달러) 1961년 70달러로 세계에서 두번째로 낮았던 1인당 국민소득의 증가를 새해 첫 뉴스로 꼽았다.  지나치게 과장된 그래프가 어이없지만 당시에는 매우 큰 소식이었던 모양이다. 1965년, 한국은 방글라데시를 2달러 차이로 처음으로 제쳤다.   파독 광부 예비소집에 모인 인원들이 진지한 표정으로 설명을 듣고 있다. 서독 탄광으로 떠나기 위한 광부 모집에 최종 합격한 20대의 젊은 광부들 독일로 떠나기 전 마지막 밤. 배웅하는 가족, 지인들을 향해 거수경례를 올린 파독광부들이 태극기를 앞세우고 독일 프랑크푸르트행 비행기에 몸을 싣고 있다 한복을 입고 가족들을 향해 손수건을 흔드는 파독 간호사들 이륙 준비를 하는 여객기. 공항에 모인 시민들과 가족들이 파독 광부, 간호사들의 무사귀환을 바라며 손을 흔들고 있다.  독일에 도착한 파독 간호사들이 거동이 불편한 독일 환자들을 돌보고 있다. 40도가 넘는 온도, 지하 1200미터가 넘는 탄광의 끝자락에서 11시간의 작업을 끝마치고 나온 파독 광부들 당시 파독 광부 평균연령은 25세, 파독 간호사 평균연령은 23세였다.  (출처 : 한국직업건강간호학회) 국군의 남베트남 파병이 결정되었다. 만 38세의 나이에 맹호부대 사단장 겸 주월한국군 사령관으로 임명된 채명신 소장(당시 38세, 6.25 참전)이 수통과 탄띠를 착용하고 출발 전 현충원에 묵념을 올리고 있다. 수도사단 맹호부대 사단장 - 소장 채명신 (당시 38세, 6.25 참전) 제9보병사단 백마부대 사단장 - 소장 이소동 (당시 38세, 6.25 참전) 해병 제2여단 청룡부대 여단장 - 준장 이봉출 (당시 39세, 6.25 참전) 1965년, 파병을 위해 도열한 수도기계화보병사단 (맹호부대) 병력 전선으로 떠나는 제 9보병사단 (백마부대) 장병들의 결연한 표정 부동자세의 해병대 수색대 병사들 서울 시가지를 통과하는 파병 장병들을 향해 기도를 올리는 노인과 부채질을 해 주는 아주머니의 모습이 카메라에 담겼다. 이화여대 총장 김옥길 여사와 이화여자대학교 학생들이 파병 장병들을 위해 쓴 환송사가 방송되었다. '조국 떠나 만릿길 온 겨레의 마음이 그대들의 방패가 되리 아세아 (아시아)의 최정예 우리 국군 가는 길 오직 승리뿐이다.' 베트남 전선으로 향하는 국군 수송을 위해 36개편의 열차가 동원되었다. 수송 열차가 지나는 역, 마을 어귀마다 장병들을 향해 손을 흔드는 시민들 대구역에서 잠시 정차한 수송열차 국군 장병을 위해 기차역에서 먹을 것을 나누어주는 중년 여성 한 병사가 역까지 배웅을 나온 어머니의 손을 붙잡고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부산항에서 승선 전, 부하들을 향해 악수하는 중대장을 바라보는 해병 소위 이학철 (당시 23세) 파월 1진 해병 청룡부대 제3대대 9중대장 김종세 대위 (중앙, 당시 28세), 박준교 상병 (왼쪽, 당시 22세), 정명국 일병(오른쪽, 당시 21세)이 인터뷰를 하고 있다. 김종세 대위: "월맹 정규군 (북베트남 정규군)이 밀림에서 미군도 위협할 만큼 맹위를 떨치고 있고, 국군 장병들에 대해서 '단 한 사람도 살아서 돌아가지 못 할 것'이라고 비방하고 있지만 산악에서 단련된 소부대 전술, 체력과 같은 신체능력, 실제 전투에서의 호전성은 우리 병사들이 크게 앞선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결코 두렵거나 하는 마음은 들지않습니다." 마지막 승선 인원인 맹호 혜산진부대 소속 소대장 소위 최정길(당시 24세)이 부산시 부시장을 비롯한 환송 인원들과 악수를 나누고 있다. 당시 국내 최대의 여성단체 한국 부인회 회원들이 맹호부대 장병들을 환송하고 있다. '맹호' '환송' '이겨서 돌아오라' 떠나는 장병들을 환송하는 부산 시민들과 수송선 난간을 가득 메운 장병들 출항하는 수송선. 부산 시민들의 응원에 군가로 화답하는 장병들 멀어지는 부산항을 바라보는 해병 병사의 모습 1인당 국민소득 110달러의 농업국가, 38세의 사령관이 20대 초반의 병사들과 전선으로 향하던 날. 성대한 위문공연도, 거창한 위문품도 없었지만 국민들은 장병들의 무사귀환을 진심으로 빌어주었다. 첫 국내 기술로 만든 라디오가 시판되었다. 납땜질에 열중하는 어린 여공들 '벌거벗은 산에 나무를 심자' 식목일에 나무를 심기 위해 산으로 향하는 국민들과 민둥산에 나무를 심는 모습이 방영되었다. 가을날, 고등학생들이 전교생이 지켜보는 가운데 운동장 흙바닥 위에서 유도 대결을 펼치고 있다. 1967년, 제2회 전국학생씨름대회. 씨름 프로대회가 존재치 않던 시절, (씨름 프로대회는 80년대)  전국 고등학교에서 힘 좀 쓴다는 학생들이 모였다.  다른 지역 학생들의 경기를 살펴보는 서울 고등학생들. 치열한 결승전, 경북 영신고등학교 학생이 우승을 차지했다. 강원도 삼척시에 유례없는 폭설이 내렸다. 지붕에 쌓인 눈을 치우는 주민들. 생활 체육으로 나날이 인기를 더해가는 씨름이 소개되었다. 씨름 대회를 구경하는 수많은 인파들. 국군 장성들이 베트남 전선을 방문했다. 전쟁터에서 경계근무 중인 해병 병사의 덥수룩한 수염을 만지며 웃는 육군참모총장 주월 맹호부대 병사들이 시멘트로 만든 역기로 밀리터리 프레스를 하며 체력 단련을 하고 있다. '웃지않는 한국 해병들' - 미국 UPI 통신 보도 1967년, 짜빈동 전투에서 중대 병력으로 월맹 정규군 정예 1개연대 병력과 (호치민 휘하의 월맹군 제2사단 1연대) 맞붙어 승리한 해병 11중대 장병들이 미군의 초청을 받아 계단 위에서 미군의 위문 공연을 지켜보고 있다.  선글라스를 낀 정경진 대위 (당시 28세, 중대장)와 김용길 중사 (좌측, 당시 26세), 중앙에서 카메라를 노려보는 어느 청룡부대 11중대 병사가 카메라에 담겼다. 대다수가 임관과 동시에 베트남 전선으로 파병될 ROTC 5기생 생도들이 대간첩작전에 참여한 경력이 있는 교관으로부터 산악 게릴라전 교육을 듣고 있다. 서울 운동장을 가득 메운 시민들. 복싱 세계 주니어미들급 챔피언인 '철권' 김기수 (당시 27세)가 도전자 프레디 리틀 (미국)과 15라운드까지 맞붙고 있다. 이를 악물고 덤비는 김기수의 분위기에 밀리는 프레디 리틀 기립박수로 환호하는 시민들 타이틀 방어에 성공한 김기수(당시 27세)의 기념촬영 1968년, 부산시 풍경 1968년, 서울의 모습 하늘에서 본 1968년 서울 첫 개통한 아현고가의 모습. 자전거와 자동차가 함께 다니고 있다. 1969년, 한강철교 복구공사가 시작되었다. 작업에 열중하는 현대건설 노동자들의 모습 서울과 부산을 잇는 한반도 최초의 고속도로, 경부고속도로 공사 현장의 모습. 부족한 중장비 대신 인부들이 달라붙어 바위를 깨고 길을 닦고 있다. 1969년, 나룻배까지 동원되어 경부고속도로 낙동강 방면 공사에 쓰일 석재를 운반하고 있다. 1969년 연말, 포항 영일만 앞바다에서 '포항제철소' 공사가 시작되었다. 허허벌판인 영일만의 모습 1970년 1월 1일, 영일만 앞바다에 떠오르는 일출  삼천만이 힘을 합치면 역사는 바뀐다는 내용의 표어가 방송되었다. '우리도 할 수 있다. 삼천만 하나된 힘, 역사를 바꾸리라.' 한국 평균 나이 22.9세 시절 (출처) 길고 많지만 흥미로워서 가져와봤습니다 재밌네 ㅋ 평균 나이 22.9세 시절
1930년대 지어진 전주폐가 리모델링 레전드
저는 오래 전부터 기와집에 살아보고 싶다는 막연한 로망을 가지고 있었어요. 그러던 중 우연히 아주 오랫동안 방치되어 있었던 기와집을 보게 되었습니다. 금방이라도 쓰러질 것 같았지만 여기야말로 꿈만 꾸던 그 집을 실현할 수 있다고 생각했어요.  고치겠다는 마음을 먹은 후, 차근히 완성해나간 집을 지금부터 소개해드리겠습니다. 폐허처럼 변해버린 적산가옥 제가 마주했던 첫 모습입니다. 긴 시간을 사람이 거주하지 않고 폐허로 있다보니 무너지기 일보 직전 처럼 보였어요.  어떻게 고쳐야하나 심란한 마음 뿐이였죠. 보시다시피 전문가도 기피할 것 같은 상태여서 골조만 살리고 나머지는 거의 새로 지어야 했습니다. 다시 짓는다고 해도 이 집이 가지고 있던 고유의 느낌은 최대한 살리기로 했습니다. 원래의 모습을 너무 파괴하면 제가 이 집을 선택했던 이유가 없었거든요.  쓸 수 없는 기와는 모두 걷어내고 보수공사를 시작했습니다. 원래 기와와 비슷한 걸 구해 남아 있는 기존 기와와 함께 사용해 지붕을 만들었어요. 16평 주택의 재발견, (직접 그린 도면) 평수로 치면 크지 않는 크기여서 방을 다 오픈해 공간이 전부 이어지도록 미리 스케치한 후 시공을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주거형태 상 겨울엔 추위를 완벽히 막을 수는 없어 이를 감안해 거실엔 냉난방기를 두고 방엔 보일러를 깔아 보온을 최대한 유지하려고 했어요.  나무 자체만으로 오랜 시간을 머금은 듯한 분위기를 풍겨 철거를 하면서 나온 목재들은 버리지 않고 문을 만드는데 사용하고, 문 앞에 놓여 있는 디딤돌도 철거에서 나온 돌을 재활용해 흔적들을 조금씩 남겨두었어요. 문을 열면 드르륵 정겨운 소리가 들릴 것 같은 중문.  시간이 얽힌 거실 거실에서 바라본 마당 모습입니다. 마당 앞 툇마루처럼 생긴 곳엔 옛날 교실 바닥 자재를 깔아 거실과 공간을 분리하면서 통로의 느낌을 더 강조했습니다. 거실 안쪽까지 햇살이 깊숙히 들 수 있도록 큰 창은 철을 사용해 현대적인 느낌을 가미했어요.  살랑거리는 바람을 맞으며 차를 마시기에 딱 좋은 툇마루. 오죽과 감나무를 마당에 심어 겨울이 되면 다니 단 홍시를 먹을 수 있는 재미. 이런 즐거움이 마당 있는 집의 매력인 듯 해요. 사계절을 가장먼저 느낄 수 있는 작은 뜰.  복도 끝에 자리잡은 화장실.  낡은 것들이 모여 편안한 분위기를 주는 거실. 작은 심야식당 지인이 놀러와 얼굴을 보며 요리를 할 수 있도록 11자 형태의 아일랜드 주방으로 시공했습니다. 그리고 공간을 분리하면서도 편히 오갈 수 있도록 식당 주방처럼 싱크대와 테이블 사이에 작은 문을 만들었습니다.  주변과 잘 어우러질 수 있도록 고재를 사용한 주방.  노출 천장엔 인더스트리얼 조명을 달아 스타일리쉬함을 더했다. 거실 큰 창으로는 이곳까지 햇볕이 닿지 않아 주방 천장 가운데를 뚫어 창문을 만들었습니다. 매일 아침 들어오는 아침 햇살과 비가오는 날이면 천장 유리를 통해 들리는 빗소리가 고요한 집 안을 더욱 운치있고 낭만적인 분위기를 들게 해요.  주방에서 바라본 모습.  운치 가득한 사랑방 탁- 트인 시야가 시원한 유리문 너머엔 쉼을 위한 침실입니다. 폴딩도어문을 설치해 공간이 이어진 듯한 느낌을 주었습니다. 날씨가 더운 여름엔 활짝 개방해두고 추워지는 겨울엔 도어를 닫아두어 온도를 최대한 밖으로 나가지 않을 수 있도록 했습니다. 외국에 살았던 기억을 되살려  침실은 아늑하게 꾸몄습니다. 조명은 간접조명으로 대체하고 유리창문을 통해 햇빛이 들어올 수 있도록.  독특해보이는 침대는 나무를 사러 갔다가 얻은 텃밭 상자를 이용해 침대 프레임 만들었습니다.  기성용품이 주는 획일화된 분위기를 좋아하지 않아서 대부분 직접 만들거나 리폼한 가구들이에요.  느긋하게 책을 읽기에 좋은 곳. 자연의 소리가 들리는 곳  작은 휴양지. 낡은 질감의 나무문을 열고 나오게 되면 작은 테라스가 나타납니다. 늦은 점심 은은한 바람과 따뜻한 햇살이 있을 때면 해먹에 누워 낮잠을 자곤 해요. 몸과 마음이 풀리는  개인 야외온천 개인적으로 가장 애정하는 공간 욕실.  평소 반신욕을 좋아해 인테리어를 하면서 욕실에 힘을 가장 많이 주었어요. 꽉 막혀 있는 것 보다 자연풍경이 눈 앞에 보여지면 더 좋을 것 같아 통창을 내고 밖엔 단풍나무를 심었습니다.  창을 낼 때는 옆집 주변과 시야가 차단될 수 있는 높이를 고려하는게 가장 중요했어요. 여기에 누워 반신욕을 하다보면 가을엔 단풍나무가 겨울엔 소복이 쌓이는 눈을 보면 신기하기도 하고 계절의 변화를 몸소 느끼는 것 같아 너무 좋아요. 야외 온천에 온거 같기도 하고요. 은근한 나무냄새가 베일 것 같은 욕실 벽. 라이프 스타일을 담아,  저는 집을 고치거나 꾸밀때 항상 제가 뭘 좋하하는지 생각하고 저의 라이프 스타일이 어떤지를 생각해서 반영하려고 하는거 같아요. 그래야지 집에 있는 시간이 행복하고 편한거 같아요.  이제는 이사를 생각하는데 이번에는 조금 마당이 넓은 집으로 가고 싶어요. 요즘은 내가 뭘 좋아하고 시간을 어떻게 보내는지를 생각하고 있어요. 이번에 새로 이사를 가면 집에서 시간을 조금더 생산적으로 쓸수 있고 또 좋아하는 걸 하면서 편히 쉴 수 있는 공간을 만들고 싶어요. 출처 와 감각이 대단하시네요 *_* 금손 재능러 저 폐가가 이렇게 다시 태어날줄 누가 알았을 까요 ! 지금은 또 새로운 집으로 거처를 옮기신 것 같은데 인스타 구경 갔다가 저도 모르게 팔로우 하고 왔어요 :) 인스타가 궁금하시다면 여기를 눌러주세요 -
50살 바라보는 남친이 별걸 다 하고싶다네요
자기도 스타벅스에 앉아서 아이스 아메리카노(실은 냉커피라고 했음)쪽쪽 빨며 놋북으로 막 바쁜척 해보고 싶다고 그래서 지금 아침 댓바람부터 주말 늦잠도 못 자고 끌려와 있습니다. ㅜㅜ 며칠전부터 하도 조르길래 주말 아침부터 일찍 일어나기 싫어서 스타벅스에 밀레 등산복 입고 오는 사람은 당신 밖에 없을꺼라고 되도 않는 까지 했는데 기가 죽어 포기할 줄 알았더니 어제 저녁에 백화점 문 닫기전에 얼른 가서 옷 골라달라고 ㅜㅜㅜㅜ 아니.....이 아저씨야..... 뭔 스타벅스가 미슐랭 3스타 레스토랑도 아니고 아니고 옷장만까지 해서 가는 사람이 어딨냐고 어이없어 했더니 자기도 말 안되는거 아는데 저한테 밀레 등산복 얘기를 듣고 나니 정말 평소 자기 스타일이 딱 아저씨 스탈였다는걸 절실히 깨달았다며 옷 고르는거 꼭 좀 도와달라고 어찌나 간절히 부탁하는지 할 수 없이 따라나섰습니다. 백화점 에스컬레이터 타고 올라가는데 저희 바로 앞에 서있는 아가씨 몸매가 진짜 후덜덜했어요 평소엔 그런 아가씨들 보일때마다 남친에게 시선처리 똑바로 하라고 바로 경고 날렸는데 이건 뭐 여자인 제가 봐도 너무 어마어마한 몸매인데 피할 수도 없는 상황이니 차라리 쿨한 척이라도 하자 싶어 남친에게 "어차피 당신은 이번 생에서는 저런 여자 못 델꼬 다니니 다음 생을 기약해요" 라고 했더니 "아니. 난 다음 생에 꼭 저런 여자로 태어나서 세상 남자 다 꼬셔버릴꺼야" 라길래 공공장소에서 그만 남친 등짝을 쳤네요  남성복 코너 가려하니 여기 아니라며 캐주얼층으로 끌고가 딕키스의 레글란 소매 티셔츠를 몸에 대보며 산뜻하지? 세련됐지? 이러는데 지금 나의 사랑을 시험해보는거냐고 진지하게 물어보려다 겨우 참았어요. 어차피 딕키스엔 맞는 사이즈가 없다는걸 알았거든요 겨우 막달 임산부만한 배를 가려줄 티셔츠 한 장 사고서 어찌나 좋아하는지 안쓰러운 마음도 들데요. 오늘 아침 7시반부터 새 옷 입고 제 집 앞에 찾아와 빨리 내려오라고 어찌나 전화를 해대는지 저 지금 몹시 졸립고 피곤해요 ㅜㅜ 이게 뭐라고 그리 해보고 싶었냐고 물으니 얼마전 스타벅스에서 일 약속이 생겨 낮에 갔다가 충격 받았답니다. 놋북이며 태블릿 피씨들 들고와 이어폰 끼고 뭔가 자기 세상에 빠져 있는듯한 젊은 애들을 보니 고1때부터 10년 동안 매일 신문 돌리고 방학마다 막노동을 해도 너무 힘들었던 자기의 대학생활이 갑자기 떠올라 서글퍼졌는데 아직도 매일 새벽에 출근해 전쟁 같은 업무를 치루는 시간에 밖에는 이런 세상도 있었구나 싶어 서럽더랍니다. 대학때 친구들이 테이블마다 전화기 있다는 압구정 카페 다니는 것도 그렇게 궁금하고 한번 가보고 싶었는데 그걸 한번도 못해봤다고 ㅠㅠ 놋북 펴놓고 뭔가 몹시 열중해서 하길래 슬쩍 들여다보니 주간업무일지 밀린거 작성하고 있네요 ㅋㅋ 쩜전에 여기 커피 더 달라면 더 줘요? 라고 두리번 거리며 묻길래 그냥 조용히가서 한 잔 더 사다줬어요. 제꺼 보더니 자기도 회원 가입해서 핸펀에 스벅 어플 넣어달라네요 ㅋㅋ 어쩌면 인생에서 가장 고단한 나이에 만난 인연이어서 그런가..... 피곤과 술에 쩔어있는 아저씨의 모습만 보다가 오늘은 왠지 애잔하고 안쓰럽네요. 평소에 햄버거를 어떻게 만들어야 수제냐고 궁금해하던데  나온김에 점심에 수제햄버거라도 사주면 놀래자빠지겠져 ㅋ 두분 다 사십대라고 하시는데 너모 기여우시네여ㅠㅠ
콜럼버스의 이름
주말 특집, 크리스토퍼 콜럼버스의 이름이다. 어떻게 보면 이건 당연히 무슨 얘기가 나올지 짐작이 가능하다. 콜럼버스라는 이름 자체는 영어식 표기이므로, 실제 이름은 좀 달랐으리라 생각할 수 있을 것이다. 콜럼버스는 생전에 잉글랜드 혹은 영어권 사람들과 교류가 없었으므로, 그런 이름을 본인은 들어본 적 없었을 테고 말이다. 그의 고향은 이탈리아 북서부의 제노바이므로 제노바식 사투리로 말하자면 크리스토파 코롬보(Cristoffa Corombo)이다. 하지만 당시 쓰이던 이탈리아어 표기 방식(참조 1)으로 쓰자면 크리스토포로 콜롬보(Cristoforo Colombo)이다. 그런데 당시 이탈리아는 여전히 분열된 상태였고, 떠오르는 강대국이 하나 있었으니, 오늘날 카탈루니아를 이루고 있는 아라곤 왕국이다. 당연히 카탈루니아어를 사용하니, 여기서 콜럼버스의 이름은 크리스토포르 콜롬(Cristòfor Colom)으로 바뀐다. 여기서 선원으로 일하던 콜럼버스는 동방 무역을 한창 시작하고 있던 포르투갈에 관심을 갖는다. 급진적인 아이디어(서쪽으로 간다!)를 받아들일 만한, 아무래도 당시 유럽에서 원양 항로 전문 국가는 포르투갈이었다. 포르투갈로 향한 콜럼버스의 이름이 이제는 크리스토바웅 콜롱부(Cristóvão Colombo)로 바뀐다. 그러나 이게 웬 걸, 포르투갈은 콜롬버스의 아이디어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이미 희망봉을 통한 항로를 개척해 놓았기 때문에 또 다른 항로를 개척할 인센티브가 별로 없었다. 그리고 원양 항로 전문 국가답게 포르투갈은 서쪽으로 인도에 갈 수 있다는 콜롬버스의 계산이 틀렸음을 이미 알고 있었다. 그러면 포르투갈과 경쟁하던 다른 나라로 가는 편이 합리적이다. 콜럼버스는 카스티야 왕국으로 간다. 오늘날 스페인의 본캐가 바로 여기 카스티야이고, 우리가 흔히 아는 스페인어가 바로 카스테야노(카스티야의 언어)이다. 당시 막 국왕이 된 이사벨라는 대서양을 알카소카스(Alcáçocas) 조약(1479)을 통해 포르투갈과 양분하고 레콘키스타를 마쳤으며 아라곤 왕국과 결혼을 통해 합병까지 했었다. 자, 지금부터는 카스테야노, 그러니까 우리가 아는 스페인어로 불러야 한다. 콜럼버스의 이름은 이제 크리스토발 콜론(Cristóbal Colón)으로 바뀐다. 이미 여러 곳을 선점한 포르투갈과 경쟁을 위해 이사벨라 여왕은 콜럼버스의 아이디어를 받아들인다. 그런데? 신대륙을 발견해버렸네? 지금 기준으로 봐도 인물이라 할 수 있는 이사벨라 여왕은 당시 국제법 해석의 기준이었던 바티칸도 장악해 놓은 상태였다. 이게 무슨 말이냐? 드라마로 더 유명한(…) 보르자 가문이다. 교황 알렉산데르 6세가 아라곤 왕국 출신인지라, 이사벨라의 편이었다. 여기서 탄생한 조약이 바로 토르데시야스(Tordesillas) 조약(1494), 전세계를 포르투갈과 스페인으로 양분한 바로 그 조약이다. 알카소카스가 포르투갈어이고 토르데시야스가 스페인어로 바뀐 걸 알아차릴 수 있을 것이다. 정리해 봅시다. ㅇ 고향(이탈리아) : 크리스토파 코롬보(Cristoffa Corombo) 및 크리스토포로 콜롬보(Cristoforo Colombo)이다 ㅇ 아라곤(카탈루니아) : 크리스토포르 콜롬(Cristòfor Colom) ㅇ 포르투갈 : 크리스토바웅 콜롱부(Cristóvão Colombo) ㅇ 카스티아(스페인) : 크리스토발 콜론(Cristóbal Colón) 크리스토퍼에 들어가 있는 f 발음이 v로, 결국은 b로 변화했다. f와 v, b가 상호 호환되는(?) 발음임을 알 수 있다. 또한 성 끝의 b가 붙거나 떨어지거나 했음이 보인다. 콜럼버스를 프랑스어로 표기할 때 크리스토프 콜롱(Christophe Colomb)인데, 끝의 b가 묵음처리된 이유가 바로 이런 변화에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콜럼버스”는 어디서 나온 것인가? 영어식으로 읽기는 했지만, 사실 그의 라틴어 이름이 크리스토포루스 콜롬부스(Christophorus Columbus)이다. 그리스도를 품은 비둘기(콜롬부스)가 이렇게 다양하게 변주될지는 콜럼버스 자신도 몰랐을 것이다. -------------- 참조 1. 이탈리아 중부의 토스카나 지방의 언어라 르네상스 이후로 거의 표준 이탈리아어처럼 됐기 때문에, 토스카나어(dialetto toscano)로 쓴 표기이다. 단테와 보카치오, 마키아벨리 등의 저작물이 바로 이 토스카나어로 작성됐다. 2. 짤방은 위키피디어에서 가져왔는데, 이탈리아의 판화가 Aliprando Caprioli의 작품을 복제한 것이다. 미국 의회도서관에 있는 콜럼버스… 라틴어 이름으로 표기되어 있다. https://es.wikipedia.org/wiki/Crist%C3%B3bal_Col%C3%B3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