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kfktoa
500+ Views

<화전가> 배삼식

<화전가> / 배삼식 저
(지극히 주관적인 제 생각을 쓴 글입니다.)

민음사 유튜브에서 이 책을 처음 접하고 민음사 온라인 패밀리 데이에 충동적으로 구매했다. 배삼식 작가가 쓴 희곡인 <화전가>는 제목처럼 경북 안동에 있는 한 집안의 여성들이 4월의 봄에 꽃놀이를 가는 내용이다. 희곡은 글로 완성되는 것이 아니라 무대에 선 배우들의 말로 완성되는 문학이다. 언뜻 같다고 착각하곤 하는 글과 말이지만 <화전가>를 읽어보면 글과 말의 다름을, 그리고 말로 언어를 내뱉을 때만 표현되는 독특한 아름다움을 느낄 수 있다.

경북 안동에 있는 한 집안에는 여성들 밖에 남아있지 않다. 1950년 4월, 한창 이념과 진영이 국토를 휩쓸며 거대한 내전을 앞두고 있던 그때, 남성들은 이념에 의해 빨갱이로 몰려 감옥에 갇혀 있거나 감옥에 갇히지 않기 위해 숨거나 그도 아니면 행방이 묘연한 상황이다. 여성들만이 집안을 지키고 있는 상황에서 집의 안주인, 김씨의 환갑을 축하하기 위해 서울에서 공부를 하던 김씨의 막내딸 봉아가 내려오고 대구로 시집간 둘째 딸 박실이도 집을 찾아와 오랜만에 집안이 북적대기 시작한다. 마침 밤을 새우며 귀신을 쫓는다는 경신야(庚申夜). 밤이 지나는 동안 여인들은 봉아가 가져온 초콜릿과 커피를 나눠먹고 술잔을 기울이며 이야기꽃을 피운다. 그 와중 흥이 오른 여인들은 다음날 화전놀이를 가기로 하며 밤을 지새운다. 다음날 화전놀이를 다녀온 여인들이 헤어지는 것을 마지막으로 막이 내린다.

암울한 상황이다. 집안의 남자들은 전부 감옥에 있거나 행방을 알 수 없고 전 국토가 이념의 소용돌이에 휘말려 불안정하다. 그 와중에 여인들이 웃고 떠들며 즐기는 하룻밤은 꿈만 같다. 오랜만에 얼굴을 보며 기뻐하는 여인들의 모습을 보면 이념과 진영, 전쟁은 다른 나라 이야기처럼 느껴진다. 끝없이 혼란스러운 시대의 어느 한 구석에서 펼쳐지는 여인들만의 즐거운 경신야와 화전놀이가 영원히 끝나지 않았으면 하는 생각이 책을 읽는 내내 들곤 했다. 그래서 마지막에 헤어지는 여인들의 모습이 슬프다. 김씨는 두 달 뒤에 6.25 전쟁이 벌어지리라고는 생각도 하지 못한 채 봉아와 박실이, 홍다리댁을 보내고 며느리인 장림댁에게는 친가에 다녀오라며 귀한 치마와 가락지를 싼 보자기를 쥐어준다. 그렇게 헤어진 그들은 아마 다시 만나지 못했을 것이다. 두 달 뒤 벌어진 전쟁이 모두를 갈라놓았을 것이다. 이념이 무엇이고 진영이 무엇이기에 그녀들을 갈라놓았는지, 이념과 진영과 전쟁에 그녀들의 만남과 이야기와 화전놀이를 막을 권리가 있는지에 대해 생각해보게 된다.

희곡은 배우들의 말과 행동을 위해 쓰인 문학이다. <화전가> 속 글들은 글만으로는 완전하지 않다. 배우들의 입에서 말로 변환되어야만 완전해진다. <화전가>의 배경이 1950년 4월 경북 안동인만큼 그 당시 경북에서 쓰이던 사투리가 계속해서 튀어나온다. 도저히 이 문장이 무슨 의미인지 알 수 없는 문장들도 수두룩하다. 아무리 글자를 들여다봐도 도무지 뜻을 알 수가 없다. 그렇게 한참을 읽다 포기하려고 할 때쯤 이 책이 희곡이라는 것을 새삼 상기하고 글을 소리 내어 읽기 시작했다. 그러자 이해가 되지 않던 문장의 뜻이 마법처럼 떠오르는 것이다. 글로는 이해되지 않던 문장이 입을 열어 말로 꺼내는 순간 이해가 되는 신기한 경험이었다. 그 뒤로 잘 되지도 않는 경상도 사투리 억양을 흉내 내가며 책을 소리 내어 읽었다. 혹시 <화전가> 속 사투리를 이해하는 데 어려움을 겪는 독자가 있다면 소리 내어 문장을 읽어보기 바란다.

화전가 뒤표지에 적힌 박민정 소설가의 추천사는 이렇게 시작한다. "<화전가>에는 대문자 역사에 기록되지 않은 슬픔과 투쟁, 그럼에도 불구하고 살아나가려는 사람들의 놀이가 회화처럼 담겨 있다." 1950년 6월 25일에 일어난 전쟁은 모두가 알고 있으나 1950년 4월의 어느 날 경북 안동 한 집안의 여성들이 화전놀이를 갔다는 사실은 그 누구도 모른다. <화전가>는 전쟁에 가려져 있던 일반인들의 삶을 끄집어내 우리 앞에 보여준다. 이것이 문학의 의의다. 알려지지 않은, 가려진 자들의 이야기를 발굴하고 들춰내 테이블 위에 올려놓는 것. 화전가와 같은 희곡이, 또는 문학이 더 많아져야만 한다, 반드시.

책 속 한 문장

김씨   그래, 무신 생각을 그래 장하게 했노?
봉아   인생, 인생에 대해서.
김씨   (터지려는 웃음을 겨우 참으며) 생각해 보이 어떻드나?
봉아   머 빌거 없는데.
김씨   없는데?
봉아   빌것도 없는 인새이 와 이래 힘드노?
Comment
Suggested
Recent
Cards you may also be interested in
<우주보다 낯설고 먼> 김연경
<우주보다 낯설고 먼> / 김연경 저 (지극히 주관적인 제 생각을 쓴 글입니다.) 공간을 이동할 수는 있지만 시간을 이동할 수는 없다. 유일하게 허락된 시간의 이동은 앞으로 흘러가는 것뿐이다. 그렇기에 과거는 우주보다 낯설고 멀다. 우주에 도달하는 것은 물리적으로 가능하지만 과거에 도달한다는 것은 물리적으로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어떤 경우 우리의 정신이 과거에 닿는 때가 있다. 물론 그것이 물리적 과거 자체는 아니다. 그것들은 과거가 내 몸과 정신에 남긴 흔적과 잔향에 가깝다. 어떤 사소한 것을 계기로 우주보다 낯설고 먼 그것들은 불쑥 깨어나 도달할 수 없는 과거의 그림자 속으로 우리를 데려간다. 쉽게 일어나는 일은 아니다. 현실이 힘들고 바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책은 우주보다 낯설고 먼 과거의 그림자 속으로 너무나도 쉽게 독자를 끌고 들어간다. 그것도 아주 깊숙이. 우리 집은 아들만 셋이다.(아들 셋을 키운 어머니에게 경의를 표한다. 크고 나서 우리가 어릴 때 했던 짓들을 생각해보면 세 명 다 무사히 성인이 된 것이 놀라울 따름이다.) 그중에서도 장남인 나는 그나마 얌전했고 부모님 말을 잘 듣는 편이었으며 공부도 잘했다. 우리 집은 그렇게 넉넉한 편이 아니었다.(지금도 그렇다.) 그러나 그 와중에도 부모님은 나를 학원에 보내고 피아노와 영어를 가르치며 많은 기대를 걸었다. 네가 잘돼야 동생들도 다 잘 된다는 말을 귀에 딱지가 얹도록 들었다. 어찌어찌 좋은 성적을 유지해 좋은 고등학교와 좋은 대학교에 들어갔고 지금은 박사학위를 따기 위해 열심히 대학원 생활을 하는 중이다. 나는 이 생활에 만족하고 있지만 부모님은 어떤지 모르겠다. 내가 동생들이 자연히 잘 될 만큼 충분히 잘됐다고 생각하고 계실까? 넉넉하지 않은 집의 삼 형제 중 장남으로 살아온 나는 소설 속에서 연수의 이야기가 나오지 시작하자마자 과거로 쑥 끌려들어 갔다. 삼 남매(삼 형제보다는 그나마 낫지 않을까.) 중 장녀인 연수는 두 동생들을 돌보는 믿음직스러운 맏이이며 공부도 잘한다. 책을 좋아하고 아이답지 않게 어른스러우며 부모님이 안 계실 때면 동생들의 엄마 역할을 하는 연수. 내 어릴 때와 너무 똑같아서 놀라울 정도였다. 공부에 욕심이 있는 것도, 손에서 책을 놓지 않는 것도, 어른스러운 척하는 아이인 것도, 부모님이 안 계실 때면 엄마이자 아빠가 되어 동생들의 손을 씻기고 밥을 먹이고 숙제를 봐주는 것도 어릴 때의 내 모습이었다. 아빠가 매일 술을 마셨던 것도, 엄마가 불쌍하다고 생각했던 것도, 잘 사는 집 아이들과 그 집 책장에 꽂혀있던 수많은 책들이 부러웠던 것도 모두 내 머릿속에 남아있다. 나는 연수가 집에서 늘 맡았던 냄새를 잘 알고 있다. 볕이 들지 않는 반지하 집의 그 쿰쿰하면서도 손에 잡힐 듯한 묵직한 냄새를. 검은 얼룩처럼 보이는 곰팡이가 핀 벽지와 낮게 깔려있는 축축한 공기와 창문 밖으로 보이는 사람들의 신발과 가로등이 켜지면 불투명한 창문을 통해 번지던 별 모양의 주홍색 불빛을 나는 기억하고 있다. 연수도 아마 기억하고 있을 것이다. 이렇듯 <우주보다 낯설고 먼>은 넉넉하지 않은 한 가정의 과거를 시작부터 끝까지 충실하게 묘사한다. 너무나도 충실한 묘사는 독자들이 사실은 갈 수 없는 과거에 도달한 것처럼 느끼게 만든다. 이 소설을 읽다가 어느 순간 정신을 차려보면 자신이 과거로 돌아와 있음을 깨닫게 된다. 그만큼 이 소설 속에 그려진 과거는 너무나 현실적이고 생생하며 보편적이다. 그것이 <우주보다 낯설고 먼>이 우주보다 낯설고 먼 과거에 독자를 데려다 놓는 비결이다. 이 소설의 놀라운 점은 충실한 재현에 무언가를 더 첨가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소설은 허구의 이야기를 쓰는 장르고 작가는 늘 유혹에 시달린다. 놀라운 사건을 넣고 싶다거나 충격적인 비밀 혹은 반전을 만들고 싶다거나 대단한 철학을 논하고 싶다거나 하는 유혹들에. 그러나 이 소설에는 그런 것이 없다. 작가는 그러한 유혹들을 버텨내고 과거의 보편적인 한 가정의 모습을 따라가며 자세히 기록하고 꼼꼼히 재현하는 것으로 소설을 완성했다. 그렇기에 독자들은 사건의 해결 혹은 반전의 충격에 매몰되거나 철학적 질문에 답해야 하는 부담 없이 각자 자신의 과거 속으로 빠져들어간다. 그들은 잊고 있던 과거를 떠올리고는 스스로에게 각자의 질문을 던질 것이다. 나는 어떻게 이런 사람이 되었나. 나는 어떻게 살아왔고 또 어떻게 살아가고 있는가. 지금까지 이렇게 살아왔다면 앞으로는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가. 과거는 연수, 연희, 형우 삼 남매에게 각각의 흉터를 남겼다. 나에게도 과거가 남긴 흉터가 있다. 오른쪽 허벅지에 길게 그어진 흉터가 하나 있고 눈썹에도 짧은 흉터가 하나 있다. 그래서 지금도 눈썹의 일부가 자라지 않는다. 흉터, 상처, 고통, 슬픔, 기쁨...... 그동안 내가 겪어온 모든 것이 모여 지금의 내가 되었다. 좋은 것만 추릴 수 있다면 좋겠지만 할 수 없는 일이다. 전부 안고 가는 수밖에. 나는 항상 그렇게 자라 왔다. 소설 속 한 문장 연희는 엄마 목을 한 번 끌어안고 볼에 뽀뽀를 해주었다. 습기와 곰팡이 때문에 이불 한 채가 고스란히 썩어버린 음침한 반지하 방에는 참 어울리지 않는 장면이기도 했다.
<멋진 신세계> 올더스 헉슬리
<멋진 신세계> / 올더스 헉슬리 저 (지극히 주관적인 제 생각을 쓴 글입니다.) 워낙 유명한 책이라 따로 설명은 필요 없을 듯하다. <1984>와 함께 디스토피아 소설의 양대산맥으로 꼽히는 소설이 바로 <멋진 신세계>이니 말이다. 개인적인 생각으로는 <1984>보다 <멋진 신세계> 속 디스토피아가 지금과 더 가깝지 않나 생각한다.(<1984>를 아직 못 읽었다는 건 비밀이다.) 참고로 이번 리뷰에는 스포일러가 있으니 아직 안 읽으신 독자 분들은 조심하시길. <멋진 신세계> 속 사회는 말 그대로 멋진 신세계다. 질병도 가난도 불행도 고통도 없는 세계. 행복만이 가득한 세계. 그러나 모든 사람의 행복을 위해 인간의 자유는 억압되어야만 한다. 세뇌 교육으로 모두가 각자에게 주어진 일을 행복을 느끼며 수행하는 사회에서 자유란 존재할 수 없다. 자유가 주어진다면 인간들은 각자 본인이 하고 싶은 일을 선택할 테고 그러면 직업의 균형이 무너지고 말 것이기 때문이다. 자유를 억압하려면 인간의 사고를 억압해야 하고 그로 인해 많은 것들이 금지된다. 철학, 종교, 예술 등이 사라지고 그 자리는 쾌락을 추구하는 촉감 영화(지금으로 치면 4D 영화쯤 되려나)와 첨단 스포츠, 향기 오르간이 대신한다. 그에 만족하지 못하는 자들이 자유를 넘본다면 소마를 주면 된다. 부작용이 없는 완벽한 마약 소마를. 그렇게 멋진 신세계는 모든 이가 각자 주어진 일을 하며 행복을 느끼고 촉감 영화와 스포츠, 향기 오르간으로 즐거움을 소비하며 완벽한 마약 소마로 쾌락을 맛보면서 끝없이 이어진다. 다음 세대로, 또 그다음 세대로. 영원히 같은 것들을 반복하며. 자유가 없지만 모두가 행복한 이 세계를 헉슬리는 멋진 신세계라고 표현했다. 당연히 반어적인 의미를 담고 있다. 책을 읽어보면 알겠지만 자유 없이 모두가 행복한 세계, 인공적으로 인간을 탄생시키고 세뇌하여 완벽한 사회구조를 지탱하는 세계, 철학과 예술과 종교 대신 급속한 쾌락의 도구들이 그 자리를 채우는 세계에 우리는 본능적인 거부감을 느낀다. 불행하고 고통받는 사람이 단 한 명도 없음에도 그 세계는 뭔가 잘못되었다는 느낌을 받게 되는 것이다. 내가 소설을 읽는 내내 생각한 건 도대체 그 거부감의 합리적인 근거는 무엇인가 였다. 나는 분명 소설을 읽으며 그 속의 세계에 대해 거부감을 느꼈지만 도무지 그 거부감의 합리적인 근거를 찾지 못했다. 왜 인간은 자유가 없으면 안 되는가, 자유가 없어도 모두가 행복하다면 충분한 것 아닌가, 철학과 종교와 예술이 없으면 안 되는 이유는 무엇인가, 부작용 없는 완벽한 행복을 소마가 가져다준다면 그것이 인간이 스스로 무언가를 성취하며 얻는 행복과 다른 점은 무엇이며 소마의 복용으로 느끼는 행복에 대해 내가 느끼는 거부감을 설명 가능한 어떤 근거가 있는가. 사실 이것들에 대한 합리적인 이유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 내가 내린 결론이었다. 인간에게 자유가 있어야 할 이유도, 철학과 종교와 예술이 반드시 존재해야만 하는 이유도, 소마로 인한 행복이 잘못된 이유도 존재하지 않는다. 인간은 이유 없이 태어나 존재하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나는 이 소설이 종교의 세계에서 과학의 세계로 넘어가는 인류가 겪는 인간이란 무엇인가 라는 질문을 던지는 소설이라고 생각한다. 과학 이전의 신이 존재하던 종교의 세계에서 인간의 존재 이유는 신을 통해 보장되었다. 신이 인간을 이 땅에 내려보냈고 인간은 신의 뜻을 받들어 죽은 뒤 신에게 가기 위해 이승의 삶을 살아가는 존재라는 것이 종교의 세계가 말하는 인간의 존재 이유였다. 그러나 과학의 세계로 넘어오며 신은 사라졌고 과학은 아직 인간이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고 어디에 도착하는지 설명할 수 있을 만큼 성장하지 못했다. 인류는 존재 이유를 잃어버린 것이다. 인류가 존재하는 데 아무 이유도 없다면 인간다운 것도 존재하지 않는다. 우리는 <멋진 신세계>를 읽으며 소설 속 세계가 잘못되었다고, 인간은 저렇게 살아서는 안 된다고 느낀다. 그러나 그 거부감을 점점 파고들어 가다 보면 그것을 설명할 어떤 합리적인 근거도 없음을 깨닫게 된다. 그냥 느끼는 것이다. 이유는 없지만 잘못되었다고. 이 소설은 과학의 발전이 가져올 디스토피아를 보여주면서 그 위험성을 경고하는 동시에 인간을 인간답게 만드는 것은 무엇인가를 깊이 생각해보게 만드는 철학적 질문을 함께 던진다. 그 질문에 인간이 답을 찾는 날은 매우 멀거나 혹은 오지 않을 수도 있다. 그러나 신은 죽었고 과학은 답을 주지 못하고 있는 상황에서 우리는 끊임없이 인간다움에 대해 질문을 던지고 생각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길은 두 가지뿐이다. 이미 죽은 신에게 기도하거나 과학이 답을 줄 것이라 맹목적으로 믿으며 멋진 신세계를 만들거나. 마지막 결말에서 자살한 존은 원시인의 세계(종교의 세계)에서 현대인의 세계(과학의 세계)로 넘어온 인물이다. 그는 두 세계를 모두 겪고 난 뒤 목숨을 끊는다. 목을 맨 존의 발은 방향을 잡지 못하는 나침반처럼 갈피를 잡지 못하고 흔들린다. 인류가 처한 상황을 정확히 보여주는 탁월한 결말이다. 흔들리는 나침반으로는 방향을 잡을 수 없다. 인류는 흔들리는 나침반을 버리고 스스로 자신의 길을 개척해야만 한다. 그 끝이 어디일지 궁금해진다. <멋진 신세계> 일지 <1984> 일지 성경으로의 회귀일지 혹은 전혀 다른 어떤 곳일지. 소설 속 한 문장 천천히, 아주 천천히, 느긋한 두 개의 나침반 바늘처럼 두 발은 전혀 서두르지 않고 오른쪽으로 돌면서 북쪽, 북동쪽, 동쪽, 남동쪽, 남쪽, 남남서쪽을 가리켰다. 그러더니 잠깐 멈추었고, 몇 초가 지난 다음에 서두르지 않고 다시 왼쪽으로 돌았다. 남남서쪽, 남쪽, 남동쪽, 동쪽......
<나는 슈뢰딩거의 고양이로소이다> 원종우
<나는 슈뢰딩거의 고양이로소이다> / 원종우 저 (지극히 주관적인 제 생각을 쓴 글입니다.) 이 책은 아무런 사전 정보 없이 제목만 보고 집어 든 책이다. 공대생으로써 도저히 지나칠 수 없는 제목이었다. <나는 슈뢰딩거의 고양이로소이다>라니. 나쓰메 소세키의 대표작과 물리학계에서 가장 유명한 사고 실험인 슈뢰딩거의 고양이를 섞어놓은 제목만으로도 내 지갑을 열게 하는 데 부족함이 없었다. 그 기대만큼이나 즐겁고 재미있게, 마치 놀이를 하듯이 순식간에 읽어버린 책이다. 이 책은 짧은 SF 소설 여덟 편으로 이루어져 있다. 특이한 점은 소설의 앞과 뒤에 각각 소설 속에 나오는 과학적 내용과 아이디어에 관한 간단한 설명이 앞설과 뒷설이라는 이름으로 엮여 있다는 사실이다.(+저자의 농담과 유머도 함께 들어있다.) SF 소설 속에 나오는 과학적 내용에 대해 어려움과 거부감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 SF라는 장르에 입문하기에 아주 좋은 구성이다. 저자는 많은 사람들이 SF에 대해 가지고 있는 오해를 풀어주고 싶었던 것 같다. 과학을 모르면 SF 소설을 읽을 수 없고 이해하지 못할 것이라는 오해 말이다. 그러나 SF 소설을 실제로 몇 편 읽어본다면 전혀 그렇지 않다는 걸 알 수 있다. 스파이가 나오는 소설을 읽을 때 스파이에 대해 빠삭하게 알고 있어야만 소설을 즐길 수 있는 게 아닌 것과 마찬가지다. 저자는 여러 가지 과학적 소재들을 서사와 엮어 풀어놓았다. 제목에 나오는 슈뢰딩거의 고양이부터 시작해서 인간의 노화, 인공지능과 튜링 테스트, SF라면 빠질 수 없는 광속 우주선과 외계인에 대한 이야기까지. 현대 과학이 끊임없이 도전하고 있는 과제들이 이루어졌을 때 어떤 일이 일어나게 될지 미래의 한 단면을 날카롭게 캐치해서 보여준다. 이번에 <나는 슈뢰딩거의 고양이로소이다>를 읽으면서 다시 한번 느꼈지만 SF 소설은 Science Fiction이라는 이름을 달고 있음에도 흔히 생각하는 Science와는 거리가 먼 어떤 지점들을 건드린다. 무한한 삶이라는 욕망이 충족되었을 때 인간은 어떤 행동을 하는가, 혹은 과학의 발전, 문명의 발전을 위해 인류가 아닌 종의 생명을 희생시켜도 되는가 등등. 세상의 작동 원리를 파악한다는 어찌 보면 순수하기까지 한 과학의 의미 자체와는 거리가 한참 멀어 보이는 인간의 내면 깊은 곳에 자리한 욕망과 윤리와 가치 판단의 기준들을 꺼내 뒤흔든다. 현재는 맞닥뜨릴 일이 없는, 그러나 언젠가는 반드시 인류가 맞닥뜨리게 될 중대한 선택의 기로에서 인간이 인간으로서 내려야 할 결단을 미리 경험하고 체험하도록 만든다. 과학계에 종사하고 있지만 가끔 잊어버린다. 과학이 사실 너무나 많은 것들과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는 사실을. 과학은 경제, 정치, 사회, 문화, 윤리, 산업 전반에 걸쳐 인간의 삶과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이번 코로나 사태만 봐도 생명 과학 기술로 만들어진 키트 하나가 정치, 외교, 경제 곳곳에 커다란 영향을 끼치고 있다.) SF 소설은 바로 그 부분을 선명하게 보여준다. 과학은 인간이 있는 이상 세상의 작동 원리를 파악하는 순수한 학문으로써 남을 수 없다는 부분을 말이다. SF 소설에서 과학이 인간의 다양한 욕망을 드러내는 소재로써의 역할을 훌륭하게 수행할 수 있는 이유다. 이 소설집에 한 가지 아쉬운 점이 있다면 앞설이다. 짧은 단편에서 마지막에 나타나는 반전은 커다란 재미이자 묘미인데 앞설에서 저자가 설명한 내용이 오히려 소설의 마지막 반전을 예상하게 하는 역할을 하고 말았다. 차라리 앞설의 내용을 뒷설에 더하는 것이 좋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했다. 그 하나의 아쉬운 점을 제외하면 SF 초심자도 즐겁게 읽을 수 있는 좋은 SF 소설이다. 소설 속 과학에 대한 설명도 읽을 수 있으니 일석이조다.(어디 가서 튜링 테스트 얘기 나왔을 때 아는 척 하기 충분한 설명이 들어있다.) 가볍고 즐겁게, 또 과학에 대한 두려움을 깨고 SF에 입문하고 싶은 독자들에게 추천하고 싶다. 소설 속 한 문장 이상입니다. 나의 전례 없는 대규모 파괴 행위가 과연 저들이 자신들의 행성에 저지른 일과 다름없는 잔인한 범죄인지 아닌지는 현명한 집정관 여러분이 판단해 주시기 바랍니다.
'국가부도의 날' 관전포인트, 영화 솔직후기/리뷰 [5분영화겉핥기]
안녕하세요, 재리입니다. 오늘부로 모든 시험이 종료됐습니다ㅎㅎ 당분 간은 영화 많이 보고 후기 남길 수 있겠어요~~어예 시험끝나자마자 바로 영화관 뛰어가서 혼영한 후기 남겨보도록 하겠습니당 오늘의 영화는 '국가부도의 날'입니다. 사실 제가 태어난 후 3년 후에 있었던 일이기에 저는 자세한 사건을 모르기에 항상 궁금하기만 했었는데요. 자세하고 정확하진 않을 수 있으나 영화로나마 그때 그 분위기를 느낄 수 있는 시간이었습니다. 작품은 개봉하고나서 사실왜곡이라는 비판도 받았죠. 저는 자세한 사정은 모르기에 뭐라 말씀도 못 드리고 어디가 잘못됐다 정확히 알지도 못합니다만 문학적 허용이라는 측면을 고려해 보긴 했습니다. 영화이기에 어느 정도의 허구와 소설은 감안을 해야겠어요ㅠ 영화 자체의 관전포인트를 위주로 리뷰를 쓰려해요! 저는 작품을 볼 때 기술적인 측면보다는 영화가 가지고 있는 주제의식, 장면마다의 의미를 해석하려 노력하는 성격입니다. 그런 관점으로 볼 때 가장 먼저 들어오는 부분은 국가가 부도 위기를 맞는 상황에서도 빛을 발하는 고위관리자들의 '무능력'입니다. 이건 뭐 블랙코미디도 아니고 노골적이고도 해학적으로 그들의 무능력을 그려냈습니다. 실소가 터져나올 정도의 부족한 실무능력은 사실도 저러했을까 하는 의문까지 들게 합니다. 그래도 어디까지나 실제모습은 차이가 있으니 무조건적인 일반화는 피해야겠죠? 두 번째 관전포인트는 여성의 사회적 역할입니다. 요즘 이슈를 신경쓰는 영화들은 대부분 여성들의 능력과 여성들이 받은 무시를 작품에 넣는 추세입니다. 이 작품도 그러한데요. 특히나 여성의 대표로서 이번엔 김혜수 씨가 활약했습니다. 연기도 너무 잘하고 너무 멋있더군요. 영화 내내 집중해서 봤습니다. 정말 보는 내내 화가 났던 것은 여성을 20세기 후반이었음에도 여성을 사회적 참여자로 인지를 못하고 있는 모습이었어요. 실제는 더 심각했었을 수도 있겠는데요, 남성의 과도한 비하와 편파적인 시선은 남녀노소 불문하고 분통을 사는 부분입니다. 마지막 관전포인트는 모든 시대를 관통하는 한 가장의 책임감입니다. 가장이 누구든 그 때의 빚을 감당하기에는 누구나 버거운 현실이었죠. 자살률이 그 당시 전년도 대비 42%의 상승은 그때의 국가현실을 가장 선명하게 드러내주는 수치가 아니었나 싶습니다. 착하고 착실하게 살아도 벌을 받아야 하는 비탄스러운 현실에 난간에 몸을 맡기려는 충동은 무거움을 견뎌야 하는 가장에겐 어쩔 수 없는 선택과도 같았을 것입니다. 푼돈이라고는 생각지 못할 돈이 한 순간에 종잇조각이 됐다면, 가족을 부양할 전재산이 하루아침에 예고도 없이 사라진다면 여러분들은 어떨 것 같나요? 영화는 이러한 분위기를 간접적으로나마 체험할 수 있도록 관객들에게 설득을 잘 시켰습니다. 유독 인상 깊은 장면이 있다면 누군가는 위기를 기회로 삼겠다며 미소를 지을 때 누군가는 아무 잘못도 없이 맞이한 처량한 신세를 한탄하는 장면이었습니다. 극 중 한 가족의 가장은 가족들을 신경쓰며 자살을 고민한 그 순간까지도 소리내어 울지도 못하는 모습이 아직도 생생한데요ㅠㅠ 지금은 평범했던 일상도 그 때는 상상하기 어려웠던 시기였습니다. 결과적으로 이 영화는 '의심'의 덕목을 강조합니다. 누군가를 의심하는 것 뿐만 아니라 평범한 지금 이 순간마저도 의심하라고 말합니다. 언제 어떻게 변할지 모르는 순간은 또 오고 있으며 위기란 항상 우리 곁에 상주하고 있음을 자각해야 합니다. 극 중 김헤수 씨의 명언처럼 말입니다. 두번의 같은 패배는 없어야겠죠? 같은 슬픔을 반복하지 않기 위해 같은 배신을 당하지 않기 위해 우리는 스스로 강해져야 함을 느낄 수 있는 시간이었습니다. 이제는 그때와 다름을, 이제는 순진하게 당하지 않음을 보여줄 단계입니다. 영화에 비해 아쉬운 흥행이 안타깝네요ㅠㅠ엉엉 영화 '국가부도의 날'이었습니다.
<우주복 있음, 출장 가능> 로버트 A. 하인라인
<우주복 있음, 출장 가능> / 로버트 A. 하인라인 저 (지극히 주관적인 제 생각을 쓴 글입니다.) 이제 한국에서도 SF 소설을 찾는 사람이 많아졌다. 요즘 주목받고 있는 한국 SF 소설들의 힘 덕분일 수도 있고 자연스러운 유행의 변화일 수도 있지만, 어쨌든 과학계에 종사하는 사람으로서 기쁠 따름이다.(어린아이들에게 SF 소설은 과학자의 꿈을 길러주기 마련이니까.) 점점 발전해가는 한국 SF 소설계의 흐름에 발맞춰 오랜만에 SF 소설을 한 번 읽어볼까 하고 집어 든 책이 바로 <우주복 있음, 출장 가능>이었다. 이 소설의 저자인 로버트 A. 하인라인은 아이작 아시모프, 아서 C. 클라크와 함께 SF 문학의 3대 거장으로 불린다. 이 소설의 가장 뒷부분에 나오는 작품 해설 및 역자 후기 부분을 보면 아시모프는 SF를 통해 박학다식과 위트를, 클라크는 SF에 과학적 엄밀성과 철학적 깊이를 더했고 하인라인은 뛰어난 스토리텔링으로 SF의 재미가 무엇인지 보여줬다고 한다.(아이작 아시모프의 <아자젤>이란 작품을 읽어본 적이 있는데 박학다식은 몰라도 위트 하나는 확실했다.) 그러나 개인적으로 하인라인의 대표작인 <우주복 있음, 출장 가능>을 읽고 가장 먼저 남은 감상은 아쉬움이었다. 그것도 과학적 깊이나 오류에 대한 아쉬움이 아니라 SF의 '재미' 부분에서 다가오는 아쉬움이라 안타까웠다. 소설의 주인공은 킵이라는 남학생이다. 이제 곧 대학을 가야 할 나이의 킵은 달에 가겠다는 꿈을 가지고 달 여행을 상품으로 건 비누 회사의 표어 선발 이벤트에 5,000 여장의 표어를 보내지만 중복 당첨이 발생할 경우 가장 먼저 표어가 도착한 사람에게 달 여행 기회를 준다는 규칙에 의해 달 여행의 기회가 아니라 중고 우주복(실제로 우주인이 우주에서 입었던)을 받게 된다. 언젠가 달에 가겠다는 의지로 우주복을 고치고 닦아 새것처럼 만든 킵은 대학에 갈 돈을 벌기 위해 우주복을 팔기 전 마지막으로 한 번만 입어보자는 생각으로 동네 들판에서 우주복을 입고 교신 장치를 건드리며 논다. 그때 갑자기 잡힌 신호에 반신반의하는 심정으로 응답을 보낸 킵. (이런 소설에서는 으레) 당연하게도 우주선이 착륙하고 킵은 납치당한다. 지구를 지배하려는 외계인 벌레 머리에게. 끔찍하게 생긴 벌레 머리는 엄마 생물이라는 외계인(킵에게 우호적이며 엄마 생물이라는 명칭처럼 가까이 가기만 해도 마음이 포근해지는 생명체다.)과 피위라는 여자 아이도 함께 납치한 상태였다. 킵과 피위 그리고 엄마 생물이 힘을 합쳐 벌레 머리에게서 탈출하는 우주 활극이 소설의 주 내용이다. 벌레 머리에게서 킵과 피위, 엄마 생물이 힘을 합쳐 탈출하는 내용이 소설의 중후반까지 쭉 이어진다. 탈출과 좌절의 반복이 계속되는데 솔직히 말하면 이 부분에서 그리 큰 재미를 느끼지 못했다. 보통 재밌다고 느끼는 장르 소설들의 경우 서사에 이끌려 쉴 새 없이 페이지를 넘기게 되곤 하는데 이 소설은 그런 느낌이 들지 않았다. "자야 되는데 너무 재미있어서 못 덮겠어!"가 아니라 "자야 되니까 덮고 내일 보지 뭐." 하는 느낌이랄까. SF 3대 거장이라 불리는 작가의 대표작이라 너무 기대를 한 탓인가 하는 생각도 든다. 소설의 설정과 묘사는 흥미로웠다. 엄마 생물이라는 생명체와 그들의 특이한 의사소통 방식, 오스카(킵이 자신의 우주복에 붙인 이름이다.)에 대한 세세한 묘사, 달과 명왕성 등 미지의 행성에 대한 실감 나는 설명 등은 관심을 끌기에 충분했다. 그러나 그것에서 끝이었다. 그 흥미가 서사의 재미로까지 이어지지 않았다. 이 소설의 이야기는 너무나 당연히, 예상 가능하게 흘러간다. 필사의 탈출, 좌절, 또 한 번의 탈출, 좌절, 다시 또 탈출, 좌절......  끝없이 탈출과 좌절의 반복이 이어질 뿐, 무언가 예상하지 못했던 사건이나 긴장되는 순간이 없었다. 그건 아마 이 소설이 60년도 더 된 1958년에 처음 출간된 소설이라 그런 듯하다. 긴 시간 동안 이미 너무나 많은 SF 소설, 영화, 드라마가 만들어졌고 과거에는 너무나 흥미로웠을 서사가 지금은 당연히 예상 가능한 이야기가 되어버린 것이다. 물론 60년도 더 지난 소설에 지금의 시각으로 재미를 찾는 것이 조금은 매정할 수도 있지만 거짓을 말할 수는 없으니 어쩔 수 없이 앞부분은 재미없었다 라고 말하는 수밖에 없을 것 같다. 그러나 중후반을 넘어서서 지루한 탈출 과정을 지나면 상당히 흥미로운 이야기가 펼쳐진다. 스포일러가 될 수도 있기에 자세히 말할 수는 없지만 외계 종족과 인류, 행성과 별의 존망, 생명의 존재 의의와 가치에 대한 이야기들이 갑자기 엮여 나가기 시작하는데 그 상상력과 이야기 진행, 질문을 던지고 생각에 잠기게 만드는 주제 의식은 하인라인이 SF 3대 거장이라고 불리는 이유를 납득시켰다. 후반부가 앞의 탈출 과정에 비해 짧은 것이 엄청나게 아쉬울 정도였다. "뭐야, 이게 끝이야? 킵이랑 피위 지구로 돌려보내지 말고 더 장황하게 써 달라고!" 하고 외치고 싶은 심정이었다. 후반부만큼은 바로 어제 이 소설이 출간되었다 하더라도 충분히 뛰어난 SF 소설의 반열에 오를 수 있을 만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중반부까지의 지루함에 대해 길게 이야기하긴 했지만 솔직히 말하면 60년이 넘은 소설이 이 정도의 감탄을 유발할 수 있다는 사실이 이 소설이 지닌 가치와 생명력의 대단함을 보여준다고 생각한다. (탈출 과정도 재미없어서 덮어버리고 싶은 정도는 아니고 충분히 읽을 만하다. 하인라인의 명성과 내 기대에 비해 아쉬운 정도라고 말하면 되려나.)  좋은 SF 소설이고 60년의 세월을 감안하면 아주 뛰어난 SF 소설이다. 로버트 A. 하인라인의 다른 책도 읽어봐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소설 속 한 문장 "... 당신은 우리에게 예술이 없다고 했습니다. 파르테논을 본 적이 있나요?" "당신들이 전쟁 중에 폭파했지."
<슬픔을 공부하는 슬픔> 신형철
<슬픔을 공부하는 슬픔> / 신형철 저 (지극히 주관적인 제 생각을 쓴 글입니다.) <슬픔을 공부하는 슬픔>이라는 문장은 두 가지로 해석할 수 있다. 슬픔을 공부하는 사람이 느끼는 슬픔을 의미하기도 하고 슬픔이라는 존재가 슬픔에 대해 공부하는 행위를 의미하기도 한다. 하나의 가정이 있다면 두 가지 의미는 하나로 합치될 수 있다. 이 책의 후반부를 읽어갈 때쯤이면 그 가정이 무엇인지 깨닫게 된다. <슬픔을 공부하는 슬픔>은 신형철 평론가가 시, 소설, 에세이, 영화, 음악, 사회의 여러 가지 사건 등에 대해 써 내려간 글이다. 우리가 문학 평론가에게 기대하는 시와 소설에 대한 전문적인 분석 한 움큼, 사회의 여러 사건들에 대한 작가의 개인적인 의견 한 움큼, 작가가 좋아하는 영화와 책, 음악들에 대한 무한한 애정 한 움큼, 주변인들에 대한 사랑과 타인의 슬픔에 대한 애도 한 움큼. 에세이 같기도 하고 평론집 같기도 한 이 한 권의 책으로 신형철이라는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 조금은 엿볼 수 있다. 이 시대 가장 유명한 평론가 중 한 명인만큼 기대했던 대로, 아니 그보다 더 글을 잘 쓴다. 시나 소설에 대한 평론, 묵직한 사회적 사건들에 대한 담론을 다루면서도 글이 딱딱하지 않고 맛이 산다. 문학동네에서 진행하는 팟캐스트, 문학이야기에서 조곤조곤 책에 대해 이야기하던 그의 목소리를 기억하고 있는 나로서는 마치 그 차분하고 담담한 목소리로 그가 내 옆에서 책의 내용을 읽어주고 있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책을 다 읽고 나서 표시해놓은 인상적인 부분을 되짚어보니 무려 스무 곳이 넘었다. 평소 책에 잘 표시를 하지 않는 나로서는 과도하다고까지 할 수 있는 숫자다. 그만큼 이 책에는 내게 인상적인 문장과 사유가 많았다. 제목에서 알 수 있듯이 이 책은 줄곧 슬픔에 대해 다룬다. 책에 나오는 슬픔에 대한 여러 문장들 중 내가 핵심이라고 생각하는 문장은 이것이다. [그러므로 인간이 배울 만한 가장 소중한 것과 인간이 배우기 가장 어려운 것은 정확히 같다. 그것은 바로 타인의 슬픔이다.] 이 책은 <슬픔을 공부하는 슬픔>이다. 여기서 공부되는 슬픔은 자신이 아닌 타인의 슬픔이다. 자신의 슬픔에는 누구나 민감하고 예민하다. 그러나 타인의 슬픔에 예민하고 민감해지는 것은, 그리고 그것에 진심으로 공감하고 애도하는 것은 공부해야만 하고 또 공부되어야만 한다고 이 책은 말한다. 그것이 '인간이 배울 만한 가장 소중한 것'이며 '인간이 배우기 가장 어려운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 책은 계속해서 슬픔을 들쑤신다. 세월호나 용산 참사, 천안함 사건과 같은 슬픔이라는 단어와 동치 될 법한 일들, 누군가 깊은 슬픔을 겪을 수밖에 없는 성소수자에 대한 시각, 슬픔을 논하는 시와 소설과 영화와 음악들까지. 이 책을 읽으면서 우리는 내가 아닌 타인의 슬픔을 읽고 목격하고 듣는다. 그렇게 우리는 <슬픔을 공부하는 슬픔>을 통해서 타인의 슬픔을 공부한다는 것이 무엇인지를 어렴풋하게나마 배우고 또 연습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아무도 타인의 슬픔을 공부하지 않는 세상은 어떻게 될까. 타인의 슬픔이 없는 세상에는 사랑도, 배려도, 공감도 없다. 사랑은 자신이 사랑하는 이를 슬프지 않게 하는 것에서, 배려는 다른 이들이 슬픔을 느끼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 공감은 타인의 슬픔을 이해하는 것에서 시작되기 때문이다. 우리가 인간적이라고 말하는 그것들은 타인의 슬픔에 대한 공부 위에 세워져 있다. 슬픔을 공부해야만 비로소 인간적인 삶을 사는 인간이 될 수 있다. <슬픔을 공부하는 슬픔>의 두 가지 뜻이 하나로 합치되도록 만드는 가정은 이것이다. [인간 = 슬픔]. 사실 인간이 곧 슬픔인지도 모른다. 인간은 자신의 존재 의미를 고민할 수 있는 지능을 가졌으나 그 답을 알지 못한다. 영원히 찾을 수 없는 답을 갈구하는 존재란 얼마나 슬픈가. 책 속 한 문장 그러므로 인간이 배울 만한 가장 소중한 것과 인간이 배우기 가장 어려운 것은 정확히 같다. 그것은 바로 타인의 슬픔이다.
<책 한번 써봅시다> 장강명
<책 한번 써봅시다> / 장강명 저 (지극히 주관적인 제 생각을 쓴 글입니다.) 장강명 작가님의 에세이를 연달아 두 편 읽게 되었다. 이번 책은 제목을 보자마자 구매했다. 나는 책을 한번 써보고 싶은 사람이고 이 책의 제목은 그냥 지나치기엔 너무 달콤했다. 장강명 작가님의 책 쓰는 노하우를 담은 에세이다. 책 쓰기에 대해 기본적으로 알아야 할 내용들이 담긴 초반부를 지나면 에세이, 소설, 논픽션을 쓸 때 필요한 노하우들을 담아놓은 중반부가 나오고 마지막에는 퇴고와 피드백, 투고 요령 등이 담긴 글들이 나온다. 그 뒤에는 한 움큼 집어주는 덤처럼 칼럼 쓰는 법이나 글의 소재를 찾는 법 등이 담긴 부록까지 알차게 들어있다. 나는 소설을 쓰고 싶은 사람이라 소설 쓰기에 대한 부분을 집중해서 읽었다. 꽤 직접적인 여러 가지 도움을 받았다. 소설을 쓸 때 개요를 짜야하는지 말아야 하는지에 대한 내용이나 캐릭터가 욕망과 두려움을 가지게 만들라는 조언은 뜬구름 잡는 다른 작법서들의 조언보다는 도움이 많이 될 듯하다. 특히 다짜고짜 시작해서 약간 이르다 싶을 때 마치라는 이야기가 나오는 부분에서는 무릎을 탁 쳤다. 생각해보면 지금까지 읽었던 소설들 중 내가 재미있게 읽었던 소설의 대부분은 다짜고짜 시작해서 여운이 남으며 끝났다. 어렴풋하게만 인지하고 있던 부분을 이 에세이가 정확히 꼬집어주었다. 나는 지방에 살고 있는 대학원생(그것도 공대다)이고 혼자서 소설 비슷한 글을 끄적거리곤 한다. 지금 다시 살펴보니 단행본 한 권 분량은 충분히 넘을 듯하다.(물론 대부분이 단편이라 통일된 주제로 한 책 안에 넣을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말이다.) 글을 쓰고는 있지만 이게 제대로 가고 있는 건지, 맞는 길로 걸어가고 있는 건지 알 수가 없어서 불안하다. 물론 주변 사람들에게 보여주고 조언을 듣기도 한다. 그러나 그들은 소설이나 책을 많이 읽는 사람이 아니며 대부분이 공대생이다.(공대 대학원생의 한계다......) 지방이 아니라 수도권에 살면 소설 강좌라도 들어보고 합평 모임에라도 나가볼 텐데 지방에서는 그것도 쉽지 않다. 전문성을 가진 누군가가 내 글을 보고 잘하고 있어, 이렇게 열심히 쓰면 돼 라고 말해주면 좋겠다는 심정으로  이 책을 사서 읽었다. 많은 도움이 되었고 조금의 위로도 받았다. 써야 하는 사람은 써야 한다. 어쨌든 계속 쓰는 수밖에 없다. 책 속 한 문장 다짜고짜 시작한다.
톡 쓰고 연극 한 편 어때오?
안녕하새오 빙글이애오 여러분의 폭발적인 반응에 힘입어 또 왔어오 빙글러 문화 렙업 프로젝트 2탄! 이번엔 연극 렛미인이애오(후후) 방송 렛미인 아니애오 여러분(긁적) 연극 렛미인은? 뱀파이어 소녀 '일라이'와 결손 가정의 외로운 소년 '오스카'의 잔인하지만 아름다운 사랑을 그린 작품이애오. 더 자세한 연극 정보는 아래 카드를 확인해오~ https://www.vingle.net/posts/1347685 '아시아 최초, 비 영어권 최초' 스코틀랜드 국립 극단에서 제작하여 브로드웨이, 웨스트엔드 공연을 거치며 찬사를 받은 연극 '렛미인' 보고싶다면 얼른 얼른 이벤트 참여해오! *아래 이벤트 방법을 꼭 확인해주새오(공연 일정과 참여방법 꼭 확인!) 이벤트 혜택 연극 <렛미인> 티켓 증정 1인 2매 R석 총 10명 공연 일정 : 2월 12일 (금) 20시 5명 / 2월 14일 (일) 18시 30분 5명 공연 장소 : 예술의 전당 CJ토월 극장 참여 방법 1. 연극 커뮤니티 가입하기! 2. 연극 커뮤니티 톡에 가고 싶은 날짜와 같이 가고 싶은 사람의 사진, 기대평 업로드하기! #연극렛미인 해시태그 추가하면 당첨확률 UP! 참여 일정 참여기간 : 20일~24일 일요일 자정까지 당첨자 발표 : 1월 25일 월요일 당첨확률 높이는 법 스브스 뮤지컬 공식계정 @SBSSHOW 컬렉션 팔로우 하기!
겨울왕국2, ooo가 캐리했다! (영화 솔직후기/리뷰/해설/쿠키영상/관객수예상) [5분영화겉핥기]
안녕하세요! 재리예요 요즘 정말 힘들게 살고 있습니다. 드디어 두려워하던 영화가 개봉하면서 하루도 제대로 못 쉬고 있습니다. 정말 많은 분들이 보러오는 영화입니다. 저도 드디어 봤습니다. 오늘의 영화는 오랜 시간을 지나 돌아온 '겨울왕국2'입니다. 상상은 했지만 그 이상으로 대박의 징조입니다. 오히려 페이스만큼은 1편을 능가하는데요. 같이 일하는 크루들마저도 너무 재밌다고 호평을 이어갔습니다. 더욱더 커진 기대를 안고 저도 드디어 겨울왕국을 보고 왔습니다. 세상 가장 솔직한 재리의 리뷰, 그럼 지금 시작하겠습니다. 여전히 강하다 역시 1편 못지 않게 OST와 비주얼은 확실히 대단합니다. OST는 실망을 하지 않았고 비주얼은 오히려 더 좋았습니다. 새로운 모험과 1편에서의 떡밥을 더 커진 시야를 통해 풀어가는 이야기입니다. 애니메이션과 뮤지컬 형식을 융합한 형식인데요, 처음에는 어색할지 몰라도 보다보면 중독되는 디즈니만의 표현방식입니다. 엘사와 안나는 여전히 매력적이고 주변 인물들 또한 명백한 개성을 보여주는 편이었습니다. 변하는 것, 변하지 않는 것 겨울왕국 2편은 꽤 많은 주제를 담고 있습니다. 그러나 가장 중심이 되는 내용은 역시 '변화'입니다. 시간이 흘러도 변하지 않는 것, 시간에 따라 변해가는 것을 비교해서 보여줍니다. 분명한 건 어느 한 쪽이 옳다 그르다의 시선이 아닙니다. 변하지 않는 건 그대로 있지만, 변하는 건 그대로 변해야만 괜찮다고 말합니다. 반대로 변하지 않는 걸 변화시킨다거나, 변화해야 함에도 억지로 막는 행위는 큰 재앙을 불러오기도 합니다. 1편이 어린이들 을 위한 작품이었다고 보면 2편은 더 어른스러운 이야기를 선보입니다. 디즈니식 운영 정말 전형적인 디즈니 영화입니다. 그래서 저는 이제 모든 스토리가 대충 예상이 갑니다. 전개 - 심화 - 하이라이트 - 해소 - 결말로 이어지는 루트가 너무나 비슷합니다. 어느 부분에서 흥미롭게 의도했는지, 또 어느 부분에서 눈물을 자극하는지 이제는 눈에 훤합니다. 그야말로 디즈니만이 만들 수 있는 내용이며 디즈니이기에 더이상 새롭지 않은 길입니다. 그래서일까요, 너무나 기대를 한 나머지 생각보다 감흥이 줄었습니다. 메인은 단연 올라프입니다. 영화 보자마자 바로 올라프 굿즈 및 인형을 구입했습니다. 노골적으로 캐리를 하고 있습니다. 단적으로 말씀드리면 올라프가 없었다면 중간에 졸았을지도 모릅니다. 그 정도로 작품 전체의 유머, 교훈의 전달, 감동의 주체까지 모두 올라프가 만들고 있습니다. 1편에서는 철저한 감초의 역할이었다면 2편에서는 없어서 안 될 중요한 요소입니다. 이제는 주연이라고 말할 수 있을 정도로 작품 전체를 휘어잡는 역할로 발전했습니다. 다시 한 번 올라프의 희생에 감사를 표합니다. 엘사의 히어로화 엘사의 마법이 더욱 강력해지고 더욱 중요해집니다. 전편은 엘사의 고민해결이었다면 2편은 엘사의 정체성 찾기 모험입니다. 작품의 세계관에서 엘사가 가지는 존재감, 그리고 전편에서의 떡밥을 회수해야 하는 목적이 합쳐지면서 이번 겨울왕국이 탄생했습니다. 심지어 이번에는 엘사의 능력을 더욱 강력하게 어필하고 히어로를 연상케 하는 능력을 보여주며 화려한 액션씬까지 보여줍니다. 앞서 말씀드린 점을 종합해보면 액션이면 액션, 스토리면 스토리, 노래면 노래, 감동이면 감동까지 빠짐없이 들어가있지만 왠지모르게 그 조합이 조화롭지는 않았습니다. 1편과 2편 저는 1편이 더 재밌고 좋았습니다. 분명 더 커진 세계와 다채로운 인물들이 이야기를 채우기는 합니다만 1편에서 느낀 감명이 더 좋았습니다. 기대를 너무 많이하면 실망도 큰 법이니까요. 특히 주위 사람들이 너무 칭찬을 많이 하는 바람에 객관적인 판단이 다소 흐려지기도 했습니다. 저에게는 만약 올라프가 없었다면 영화를 끝까지 맨정신으로 볼 자신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더 많은 얘기를 할 필요가 없습니다. 재미가 없다는 뜻이 아닙니다. 다만 생각보다 루즈하고 힘이 적을 수 있다는 얘기입니다. 취향은 개인의 차이니 직접 한 번 확인해보시기 바랍니다! 쿠키영상은 10분 가량의 엔딩크레딧이 모두 올라간 후 하나가 있습니다. 관객수는 단연 천만 이상입니다. 다만 여유롭게 넘지는 못할 거 같습니다. 돌아온 겨울왕국, 생각보다 미미한 존재감, 영화 '겨울왕국2'였습니다.
[토박이말 찾기 놀이]1-9
[토박이말 찾기 놀이]1-9 낮은 하늘에 자주 비가 오는 요즘입니다. 날씨가 흐리면 하늘 높이 만큼 사람들 마음도 가라앉는다고 합니다. 그래서 그런지 요즘 아이들의 다툼이 잦아진 느낌이 듭니다. 입 밖으로 내뱉는 말과 낯빛에 마음이 드러나기 마련이다보니 그것 때문에 다투는 일이 잦은 것이죠. 아이들에게 서로 울타리를 넘지 말고 싫어하는 말과 짓을 하지 말자고 되풀이해서 말을 하지만 쉬운 일만은 아니니 안타깝네요. 아이들 입에서 예쁘고 고운 토박이말만 나오면 다툴 일이 없을 텐데 말이죠.^^ 그런 말음을 담아 토박이말 찾기 놀이를 만들어 봅니다. 오늘은 토박이말 살리기 42-45까지 낱말과 옛날 배움책에서 캐낸 토박이말, 노래에서 길을 찾다에 나온 토박이말을 보태서 만들었습니다. 첫소리 실마리만 알려 드리고 뜻은 밑에 낱말과 함께 알려드리겠습니다. 지난 찾기 놀이 때처럼 낱말을 다 찾으시면 빛깔을 입혀 찍은 다음 글갚음(댓글)으로 달아 주시면 고맙겠습니다. 오늘도 토박이말에 마음을 써 봐 주시고 좋아해 주시며 둘레 사람들에게 나눠 주시는 여러분 모두 고맙습니다. 4354해 온여름달 열여드레 닷날(2021년 6월 18일 금요일) 바람 바람 <찾으실 낱말> 다떠위다, 다붓하다, 단물곤물, 달램수, 살갗, 붇다, 힘살, 들온찔레, 꽃내음, 잎사귀, 꽃송이, 바람길 [낱말 뜻] 다떠위다: 많은 사람이 모여 시끄럽게 떠들며 마구 덤비다 다붓하다: 매우 가깝게(바투) 붙어 있다 단물곤물: 단맛이 나는 물과 푹 삶긴 물이라는 뜻으로 알짜나 잇속을 이르는 말 달램수: 달래서 꾀는 수(수단, 방법) 살갗: 피부 붇다: 살이 찌다 힘살: 근육 들온찔레: 장미 꽃내음: 꽃향기 잎사귀: 낱낱의 잎. 넓적한 잎을 이른다 꽃송이: 꽃자루 위의 꽃 모두를 이르는 말 바람길: 바람이 불어오거나 지나가는 길 #토박이말바라기 #이창수 #토박이말 #살리기 #찾기놀이 #터박이말 #참우리말 #숫우리말 #순우리말 #고유어
82년생 김지영, 조금 예민하고 크게 슬프다 [5분영화겉핥기] 영화 솔직후기/리뷰/해설/쿠키영상/관객수예상
안녕하세요! 재리예요!! 시험기간이 무려 3주째 이어지고 있습니다. 막학기라 그런지 별로 의욕도 없는데 고역입니다. 시간이 남길래 과제를 하려 했으나발길은 역시나 영화관을 향하더군요. 왜냐하면 오늘은 화제작이 개봉을 하는 날이기 때문입니다. 오늘의 영화는 소설원작 '82년생 김지영'입니다. 모두가 사실 리뷰를 쓰기 꺼려하더군요. 특히 저같이 블로그를 하는 사람이나 후기를 주로 작성하는 분들은요. 그 이유는 대부분 아시겠지만 현상의 기폭제 역할을 했으니까요. 저는 소설을 읽어보지 않은 사람으로서 영화만 보고솔직하게 느낀점을 남겨보려 합니다. *본 글은 개인의 솔직한 견해와 의견일 뿐입니다. 영화는 영화로만 일단 영화를 사랑하는 사람으로서 영화는 그냥 작품 자체로서 감상했으면 좋겠습니다. 지금 현상황도 때론 영향을 주고 받기도 하지만 배우가 어쨌다, 이 부분이 어쨌다 미시적인 부분을 크게 부풀리는 해석은 확실히 지양했으면 합니다. 실제로 지금 영화 개봉 1일차임에도 불구하고 사이트 평가글들은 폭발적입니다. 아직 10만명도 보지 않은 영화에 대해 어떻게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반응할 수 있을까 신기하기도 합니다. 영화도 마치 지금 현 상태를 반영하듯 이렇게 말합니다. 본인들의 생각을 말하고 떠드는 건 상관없지만 적어도 피해를 주지는 말아야 하며, 행여나 상처를 줄 말들은 들리지 않게 해야죠. 모두의 이야기 영화는 모두의 이야기를 다루고 있는게 맞습니다. 그래서 본 영화가 어떠한 갈등의 촉매제가 되진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역시 이래서 그랬구나, 역시 누구는 이렇구나 하는 무분별한 일반화는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우리는 싸우려고 영화를 보지 않고, 남에게 피해를 주기 위해 살고 있지 않으니까요. 집안일을 여성인 김지영이 하고 있습니다. 일을 포기한 것도 김지영입니다. 육아를 대부분 맡아하는 것도 김지영입니다. 하지만 반대로 남성일 수도 있고 남편인 대현의 일상일 수도 있는 얘기입니다. 남성과 여성이 바뀐다고 해서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근본적인 원인은 사회입니다. 육아휴직조차 제대로 못 쓰게 하는 직장과 아내에게 일을 편중시키는 가족문화, 남아를 선호하는 전통사고의 잔존은 '성'이라는 문제로 해결되지 않습니다. 우리 모두가 차이는 있지만 가지고 있는 마음의 고통을 다룬 이야기입니다. 조금 예민하고 공격적이다 소설에 비해서는 덜 자극적이라는 평이 많더군요. 원작을 경험하지 못해 비교는 안 됩니다만 저에게는 영화도 날카로웠습니다. 굳이 이런 사건을 보여줬어야 했나? 굳이 저런 멘트까지 나왔어야 했나? 싶더군요. 이렇게 하나하나에 반응하는 스스로에게도 회의감이 들 정도입니다. 전체적으로 남성이 여성에게 주는 상처가 주를 이루며 작품에 등장하는 남성은 대부분은 생각이 없고 무례합니다. 반면에 여성은 대부분 피해자고 희생적입니다. 여성들끼리의 문제를 다루는 부분은 시어머니와 관련한 고부갈등이 전부고 남성의 고통이 나오는 부분은 육아휴직을 고민하는 부분 정도입니다. 그마저도 여성이 남성에게 줄 수 있는 가능성은 고려하지 않았습니다. 영화가 잘 만들어졌고 감동적이나 전반적으로 깔린 의식은 조금 예민하고 남성에게 공격적이라고 생각합니다. 묵직하게 슬프다 눈물이 안 날수가 없더군요. 분명 가족들을 먹여 살리기 위해 일생을 바친 미숙이라는 어머니의 역할을 제대로 이해하기란 힘듭니다. 그런 삶을 살아보지도 않았고 견뎌내지도 못했을 삶이기에 헤아리기란 어렵습니다. 그럼에도 어머니가 느꼈을 고통과 딸에게는 전해주고 싶지 않은 아픔, 그리고 잘 살았으면 하는 걱정이 하나가 되어 커다란 슬픔이 됩니다. 미숙을 연기한 김미경 배우님은 종합적인 감정을 표정 하나에 다 실었습니다. 응축된 감정에 동요하지 않기란 매우 힘듭니다. 덕분에 오랜만에 영화관에서 엄청 고생했습니다. (눈물 닦느라요) 개인의 잘못은 올바르게 돌아가길 전체적인 주제는 김지영의 대사에서 나옵니다. "절 아세요?" 이 한 마디입니다. 우리는 아는 사람보다 모르는 사람과 함께 세상을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런데 요즘에는 너무나 쉽게 모르는 사람에게 상처를 줍니다. 오히려 친하고 소중한 사람들에 대해서는 아는 게 없고, 모르는 사람들에 대해서는 자꾸만 과하게 알려고 파고들죠. 어딘가 이상하지 않나요? 챙길 사람들만 신경쓰고 살기에도 바쁘고 힘든데 왜 굳이 남들까지 신경쓰고 살아야할까요? 그들이 당신에게 얼마나 큰 피해를 주었나요, 아니면 그럴 특별한 이유라도 있는 건가요. 본인의 삶을 남들이 알기 힘든 것처럼, 남들의 삶도 본인이 알기 힘듦을 아는 역지사지의 마음가짐이 절실히 필요한 시기라고 생각합니다. 혹시 누군가의 잘못된 언행이 있다면 그 본인에게 올바르게 돌아가기를 희망합니다. 오발탄처럼 아무에게나 흩날리지 말고 말이죠. 당당하게 맞서다 어딘가에 구속되고 억압받는 삶을 산 김지영은 마침내 온몸을 내리쬐는 태양 앞에서 당당하게 서 있었습니다. 영화는 듣고만 있지 말고, 능동적으로 헤쳐나가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부조리한 상황에서 당당하게 맞서라고 얘기합니다. 기죽지 말고 슬퍼하지만 말고 화내고 당차게 할 말은 하고 살라는 뜻입니다. 의외로 후련하지 않을 수도 있지만 기분이 한결 나아질지 모릅니다. 자랑거리는 아니지만 그게 당연한 반응이니까요. 단, 본인 당사자의 억울함에 한해서입니다. 우리는 타인의 대변인도 아닐뿐더러 세상물정을 다 아는 도사도 아니고 사람의 감정을 통달한 독심술사도 아닙니다. 그러니 우리는 우리 삶에 최선을 다합시다. 우리가 경험한 것에 한해 마음껏 대답합시다. 한 마디로 모두에게 용기를 주고 모두의 슬픔을 이해하는 영화였습니다. 쿠키영상은 없구요, 관객수는 100~200만 예상합니다! 이상 '82년생 김지영'에 대한 솔직한 후기였습니다.
202
다시 한 주 끝. 어제는 봉준호의 <괴물>을 다시 보았다. 오래전에 보았던 영화를 다시 보는 재미가 쏠쏠하다. 오래전 그 영화를 보았던 나와 지금의 나는 다른 사람이기 때문이다. 또한 그것은 일종의 공공재로서의 타임캡슐이기 때문이다. 2006년 <괴물>의 개봉 날짜만 기다렸다가 개봉 첫날 보러 갔던 기억이 난다. 영화 초반 한가로운 한강공원에 괴물이 드디어 화려하게 모습을 드러냈을 때 탄성마저 질렀던 기억이 난다. 와아! 그리고 내가 만든 영화라도 되는 양 나직이 읊조렸다. 아, 천만 관객은 그냥 넘겠구나. 그리고는 천만을 넘어 한동안 꽤 오랫동안 가장 많은 관객을 동원한 한국 영화로서 기록을 유지했던 것으로 안다.  당시로써는 아주 어마어마한 제작비가 CG에 쓰인 것으로 아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금 시각에서 볼 때는 아주 어설프기가 그지없다. 그런데 봉준호가 그걸 몰랐을 리가 없다. 어설픈 CG로라도 모험을 감행한 봉준호에게 정말 감사할 지경이다. 그렇다.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현재로서는 다소 어설픈 테크닉이라도 그것을 통해 뭔가를 도모해볼 수 있다면 시도해야 한다. 저곳을 오르면 무언가가 보일 것 같은데, 아주 허약한 사다리밖에 없으니 조금 더 견고한 사다리가 만들어질 때까지 기다려보자는 게 아니라, 이 허약한 사다리라도 딛고, 위험을 감수하며 가보는 거다. 봉준호는 많은 것을 미리 내다봤다. 한강에 괴물이라니, 이 지극히 한국적인 사회에 벌어진 괴생명체 스토리라니. 이러한 황당무계한 설정은 할리우드나 되어야 수긍이 가던 시대였다. 지금이야 한국 영화가 우주까지 나아갔지만, 정말로 그때는 이런 설정이 모험에 가까웠던 것이다. 미국인들이 이끌어가는 이야기가 아니라, 한국인들이 한국인 특유의 방식으로, 한국인 특유의 유머로, 이제까지의 한국 영화에 없던 새로운 상황에 던져지는 것. 개인적인 생각이지만 홍상수 역시 어떤 점에서 유사한 지점을 보여준 적이 있다. 그를 한 단계 더 도약시킨 작품 가운데 <생활의 발견>이 그렇다. 모든 작품이 그런 것은 아니지만, 홍상수는 프랑스의 에릭 로메르 감독과 상당히 비슷한 문법을 구사할 때가 있는데, <생활의 발견> 역시 그렇다. 그런데 문제는 그 방식이 홍상수만의 것이 아닌 에릭 로메르의 것이라고 해도, 공간 자체가 한국이며 그 공간을 점유하고 있는 사람들이 한국인이다. 또한 한국의 전설을 그대로 시나리오에 활용한다. 한국이라는 재료로 만드는 에릭 로메르 풍의 영화. 그것은 이미 로메르 풍을 넘어선다. 전혀 새로운 것이 돼버리는 거다. 이것은 굉장히 영리한 방식이다. 아이러니하게도 홍상수는 그렇게 에릭 로메르의 동양식 아류가 아니라 홍상수 그 자체가 된다. 가장 개인적인 것이 가장 창의적이라는 말과 유사한 방식으로, 가장 한국적인 것이 가장 세계적인 것이다. 다른 이가 아닌 바로 우리가, 지금 가지고 있는 우리의 사고방식으로 새로운 상황에 스스로 던져지는 것. 그것이 꼭 성공한다는 보장은 없어도, 성공할 확률은 가장 높다고 생각한다. 지금 볼 때 <괴물>에서 가장 인상적인 연기를 펼친 사람은 변희봉이었다고 생각한다. 경이롭다는 느낌마저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