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alrapp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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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요일은 월요일이구나.

오늘은 물을 3리터 넘게 마셨다. 늘 2리터만 마시는 편인데 3리터도 크게 힘들지는 않았다. 요즘은 그저 그런 생각으로 물을 마신다. 아니, 물을 몸 안에 들인다. 내 몸에 들어가서 어서 일해! 나는 물을 고용한 악덕 업주 같다.

아, 시를 써야 하는데 어떤 시를 쓴담. 매번 같은 생각이다. 나뿐만 아니라 대개의 시인이 시를 쓸 때마다 이런 생각을 하는데, 오늘은 잡지에 실린 두 시인의 대담을 보다가, 그중 한 시인이 이렇게 말하는 것을 보았다. 시를 써나가는 것이 마치, 게임을 하면서 겨우 한판을 깨고 나면 훨씬 더 깨기 어려운 다음 판이 기다리고 있는 그런 느낌이라고. 그래, 그렇기도 하다.

지난 주말에는 남은 피티 횟수가 끝나면 연장하지 않고, 센터에서 혼자 운동을 하자는 쪽으로 마음이 많이 기울었다가, 오늘 코치님과 이런저런 얘길 나누면서 또다시 반대쪽으로 기울기도 했는데, 우선은 계속 고민해봐야겠다. 뭐가 됐든 설레발 치지 말고 고민은 신중히.

4월 중순에는 친구와 캠핑을 하러 가기로 했다. 사실 예전과 다르게 많은 거리가 생긴 친구지만, 뭐 큰 기대를 하고 가는 것은 아니고, 순전히 기분 탓으로 먼저 가자고 얘기했다. 구체적인 날짜를 대면서. 사실 먼저 제안했다기보다는 그 전부터 친구가 지속적으로 캠핑을 제안했는데 내가 내내 거절해온 터였다. 아내와 이혼을 하고, 딸이 하나 있으며, 술을 먹고 내 앞에서 울던 그 친구 놈이다. 여튼 기분 탓에 수락한 것이다. 순전히 기분 탓에. 솔직히 대화가 잘 이루어질 거라 기대하지도 않지만, 더 심한 말로 우리의 관계가 기한을 이미 넘겼다는 생각도 하지만, 함께 타오르는 불을 보며 옛 생각에 잠기는 것도 나쁘지는 않겠지.

버릴 것도 없는데 가끔은 다 버리고 도망가고 싶다. 방심하는 틈에 내 안에 가시 같은 미움이 싹틀까 두렵다. 별다른 문제 없이 거리에는 꽃이 피고, 바람은 불고, 모든 것이 무사한 가운데 그런 생각이 나를 비집고 나오려는 것을 간신히 욱여넣는 기분이기도 하고, 이것을 시로 쓸까 그런 생각도 하고. 그깟 시 언제라도 때려치우면 그만이라는 생각도 하고.

돌아오는 주말 일정은 아무래도 접어야 할 것 같다. 우천 시 취소.

삭신이여. 월요일은 월요일이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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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별의 김포공항> 박완서
<이별의 김포공항> / 박완서 저 (지극히 주관적인 제 생각을 쓴 글입니다.) 사실 박완서 작가의 소설은 처음이다. 언젠가 작품을 읽어봐야겠다는 생각은 계속해 왔지만 다른 작가들의 작품 중 읽고 싶은 게 너무 많아서 살짝 미뤄놓은 상태였다. 그러던 차에 민음사 패밀리데이 때 쏜살 문고 시리즈 중 박완서의 단편집이 있는 걸 발견해서 바로 구매했다. 다른 책들을 읽는 사이 하루 정도 짬을 내서 읽을 수 있을 정도의 분량이었기 때문이다. 저번 주말에 카페에서 커피 한 잔을 시켜놓고 읽기 시작했는데 도중에 나도 모르게 중얼거렸다.(나도 모르게 중얼거렸다는 말이 소설 속에서나 나오는 말 아닌가 생각했었는데 실제로 나도 모르게 중얼거려보고 나니 충분히 현실성 있는 말이라는 걸 깨달았다.) 진짜 잘 쓴다 하고. 읽는 도중에 그런 말을 한 소설은 이 작품이 처음이다. 두 시간 만에 앉은자리에서 엉덩이 한 번 떼지 않고 전부 읽어버렸다. 박완서라는 이름이 가지는 무게가 조금 과장된 것 아닌가 생각했는데 그런 생각이 깨지는 데는 처음 몇 페이지면 충분했다. 이 책에는 네 편의 단편이 실려 있다. 차례로 <이별의 김포공항>, <지렁이 울음소리>, <카메라와 워커> 그리고 <부끄러움을 가르칩니다>인데 네 편 모두 감탄하면서 읽었지만 그중에 더 좋았던 걸 고르라면 <이별의 김포공항>과 <지렁이 울음소리>를 꼽겠다. <이별의 김포공항>은 미국에 있는 막내딸의 집으로 가게 된 할머니가 손녀와 나들이를 다녀온 뒤 한국을 떠나는 내용이다. 이 짧은 이야기 속에 온갖 것들이 담겨있다. 사대주의, 그로부터 기인한 한국에 대한 멸시와 연민과 동정, 한국을 떠난 이들과 한국에 남은 이들 간의 관계, 문화의 우열, 노인과 젊은이의 심리에 대한 묘사 등등. 이외에도 너무 많은 것들이 담겨 있어서 이 단편을 몇 줄로 요약하는 게 가능한지 잘 모르겠다. 소설의 초반부에 손녀가 삼촌과 할머니와 아빠와 엄마가 싸우는 과거를 회상하는 장면이 있다. 할머니는 해외로 나가려는 삼촌이 쓸데없는 데 돈을 쓰고 있다고 구박하는 아빠와 엄마를 향해 소리치고 아빠는 삼촌의 미국에 가겠다는 헛짓거리에 대해 화를 내며 엄마는 아빠를 거들어 할머니와 삼촌을 향해 비아냥대고 삼촌은 자신의 처지를 비관하며 분노한다. 이 부분을 읽는 순간 나는 연극 무대를 눈앞에서 보고 있는 것 같았다. 그만큼 생생하고 현실적이어서 이것이 박완서의 소설이구나 하고 감탄했다. 마지막에 노인이 비행기에 타고 나서야 자신이 한국을 얼마나 사랑하는지 깨닫는 부분도 인상적이었지만 가장 기억에 남는 부분은 연극과도 같은 네 인물의 대사와 행동, 그리고 그것을 지켜보는 손녀의 시선이었다. <지렁이 울음소리>는 세상이 정해놓은 행복의 틀에 딱 맞는 삶을 살고 있음에도 전혀 행복을 느끼지 못하는 한 여성의 이야기이다. 분명히 행복한 상황이 맞는데도 행복을 느끼지 못하는 주인공은 그 울타리를 벗어나려 하지만 동시에 그것을 두려워한다. 그래서 그녀는 과거 자신의 국어 선생님이었던 남자를 만나 과거의 그의 모습(체제에 반항하고 자유를 부르짖는)을 찾아 대리 만족을 느끼려 하지만 그가 이미 그때의 모습을 잃어버렸다는 것만 깨닫게 된다. 마지막에 주인공은 자신이 과거의 국어 선생과 불륜이 아니었음에도 불륜으로 알려져 자신이 사회의 울타리 밖으로 내쳐지기를 바라면서도 그것이 남편의 귀에 들어갔다고 착각한 순간 정해진 틀에서 벗어남으로써 물밀듯이 몰려들게 될 자유를 두려워한다. 인간의 실존에 대한 작가의 통찰이 깊게 스며들어 있는 소설이다. 주인공이 자신에게 사회가 정해준 삶을 의문 없이 살아가다가 문득 그 부조리에 눈을 뜨게 되고, 정처 없이 그 속을 방황하면서도 자신이 모든 것을 선택하고 또 그 모든 것을 책임져야 하는 무한한 자유가 두려워 사회의 틀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모습은 카뮈와 사르트르가 생각나게 한다. 이 단편에서 가장 인상적인 건 첫 시작이었다. 주인공은 남편이 군것질하는 모습, 단 것을 맛있어하는 모습을 연속극을 보는 모습에 빗대어 남편이 연속극을 맛있어하더라고 말한다. 아무 생각 없이 단 맛에, 연속극의 자극에 몸을 맡기는 것은 두뇌나 심장이 전연 가담하지 않은 즐거움이기에 둘에 차이가 없다는 말이다. 사르트르의 <구토>에 나온 부빌의 시민들이 딱 그렇다. 자신이 이런 삶을 사는 이유, 자신이 단 것과 연속극을 좋아하는 이유에 대해 전혀 생각하지 않고 그저 즐거움만 느낄 뿐인 인간은 생의 부조리에 걸려 넘어질 일이 없다. 당연함이라는 허상을 뛰어넘어 이것이 왜 맛있는가, 이것이 왜 즐거운가를 생각할 수 있는 인간만이 부조리라는 돌조각에 걸려 넘어지고 마는 것이다. 나는 이 단편이 해외의 명단편들과도 견줄 수 있는 소설이라고 생각한다. 나처럼 아직 박완서의 소설을 읽어보지 못한 사람이 있다면 이 책을 추천하고 싶다. 110 페이지 가량 되는 책이라 금방 읽을 수 있고 실린 단편들의 수준도 매우 높다. 본격적인 박완서의 장편들로 들어가기 전에 읽으면 좋은 완벽한 입문서다. 소설 속 한 문장 그는 그냥 맛있어하고, 맛있음을 그냥 즐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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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도 어제 얘길 해야 할 것 같다. 어제는 영화 <랑종>을 보았다. 관객들의 혹평 세례가 이어지고 있어 다소 우려했지만, 개인적으로 실망할 수준은 아니었다. 공포 체험을 확실하게는 시켜준다. 애초에 나홍진에 대한 믿음이 있었다. 그가 연출한 것은 아니지만 어쨌거나 제작자이고, 시나리오의 원안을 썼으니 감독인 반종 피산다나쿤과 세계관을 공유하고 있을 것이었다. 관객들이 실망한 몇 가지 이유가 있겠으나, 내가 생각하기에 그 중 한 가지는 바로 선과 악의 대결장이 일종의 기울어진 운동장이라는 것이다. 살아있는 자들에 대한 죽은 자들의 원한이 곧 악을 만든 것이어서, 핍박받는 인간 쪽이 꼭 절대적인 선이라고 할 수는 없겠지만, 굳이 나눈다면 그렇다는 거다. 이 영화는 끝날 때까지 인간들의 무력함이 이어진다. 악에 대항해 뭔가 해보지만 사실상 손 쓸 도리가 없다. 관객들은 공포를 느끼다 못해 다소 지치게 되는 거다. 영리한 영화는 악당에 공을 들인다. 악당이 너무 약하면 영화가 망작이 되기 쉽지만, 악당이 너무 비할 데 없이 강하기만 하면 그것도 문제다. 선과 악의 팽팽한 대립이 긴장감을 만드는 것인데, 악이든 선이든 어느 한쪽이 너무 강하고, 다른 한쪽이 한없이 무력하다면 관객들은 맥이 빠지기 마련이다.   몇 년 전에 보았던 <빙의>라는 한국 드라마가 떠오른다. 사실 이 드라마를 보고 나서 굉장히 충격을 받았는데, 그 충격의 원인이 뭔가 하면 이 작품 역시 악의 일방적인 우세에 있었다는 거다. 게다가 이 영화는 <랑종>과는 다르게 코메디의 지분이 꽤 높았는데, 어떠한 명분도 없이 그 유쾌한 인물들의 밑바닥을 다 드러내 버리고, 갑자기 모두 말살시킨 후 전혀 다른 장르로 둔갑시킨다. 이 작품은 결국에는 악을 처단하기는 하지만 패배에 가까운, 요령부득의 작위적인 승리를 끌어낸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 드라마는 작가가 너무 감당할 수 없는 수준까지 악을 키워놓은 후 수습하지 못한 꼴이다. 그때 나는 단순히 작가의 무능이라고 치부하고 덮어놓을 수가 없었다. 조금 진지하게 말하건대 그건 작가가 작품의 인물들을 살해한 것이나 다름없다. 그런 기분은 처음이었다. 그건 무능을 넘어 무책임이다. 작가는 인물들을 마음대로 살리고 죽일 수 있는 사람이 아니다. 인물들이 스스로 말하고 움직이는 수준으로 만들어주어야 하는데, 그래야 명분이 생긴다. 모든 작품이 팽팽한 대립을 선사할 필요는 없다. 다만, 어느 한쪽이 그렇게까지 일방적이려면 그에 대한 명분 또한 갖추고 있어야 한다. 다행히, 그리고 나홍진 감독의 전작들에 대한 신뢰를 통해 보자면 어쩌면 당연히, <랑종>은 <빙의>와는 다르게 그렇게까지 일방적일 수밖에 없는 나름의 명분을 영화 마지막에 밝혀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너무 맥이 빠진다고 하면 할 말은 없지만 설득이 되는 측면은 있다. 지금부터는 스포일러가 섞여 있다. 이 영화가 알려주고 싶은 것은 사실 믿음에 대한 질문이 아닐까. 결국 하고 싶은 말을 무당 '님'을 통해 밝히고 있는 것이다. 무당 '님'은 신내림을 받은 후 바얀 신을 평생 섬기며 살아왔지만, 또 조카를 어떻게든 살리고 싶어 하지만 그렇게 될 거라고 섣불리 희망하지 못한다. 심지어 바얀 신이 정말로 존재하는지 모르겠다고까지 고백한다. 바얀 신이 선일지 악일지 그것도 인간은 알 수 없다. 믿음이라는 것이 결국 그런 것은 아닐까. 정말로 뭔가를 느껴서가 아니라 뭐라도 믿고 살아야 버텨지는 삶. 그 믿음을 저버리는 순간 끝도 없이 추락할 수도 있는 게 인간은 아닐까. 그것을 증명이라도 하듯 '님'은 바얀 신에 대한 흔들리는 믿음을 토로하고, 얼마 뒤 미궁의 죽음을 맞이한다. 인간이 원혼들에게 그토록 무력하게 짓밟히던 그 모든 장면이 조금은 이해가 되는 순간이었다.
외로움을 달래드립니다. 3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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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적인 나로서는 코로나가 가져다준 여러 불편들이 사실 감수할 만하다. 하지만 아쉬운 것은 즐겨 찾던 장소들이 정말 많이 폐업하여 사라졌다는 것이다. 이건 아쉬운 걸 넘어 좀 서글픈 수준이다. 며칠 전부터 드라마 <커피프린스 1호점>을 보기 시작했다. 다시 보는 게 아니라 처음 보는 거다. 이 드라마는 2007년 7월에 첫 방송됐다. 당시에 어쩌다 못 보게 됐는데, 어서 시간을 내서 봐야지 하고 마음을 먹다가 거의 15년이 돼버렸다. 그런데 보다 보니 다소 억지스러워 보이는 관계 설정들이 눈에 띈다. 뭐 시간이 지났으니 그럴 수 있다. 억지 설정이 있다고 해도 그 시절 생각이 나서 좋기는 한데, 이 억지 설정이라는 것이 생각해보니 옛날 드라마라서 작법이 견고하지 못했다는 것이 아니라, 애초에 시대 감수성이 달라져 버린 것이 아닌가 싶은 거다. 저렇게 좋은 사람들이 정말로 존재한다고? 이런 생각. 뭐랄까. 이제는 어지간해서는 가능해 보이지 않는, 사람들의 순수한 호의 같은 것이 억지스러워 보인다는 거다. 시대가 달라진 것인가, 시대를 바라보는 내가 달라진 것인가. 드라마에 푹 빠져있다 나오면 당최 이 시대는 어떤 시대인지, 어떤 시대적 감수성으로 흘러가고 있는지 감이 오질 않는다. 이쯤에서 뻔한 생각이 다시 도출된다. 당시에 그걸 봤다 해도 그때는 지금과 같은 생각이 들지는 않았을 거라는 것. 어차피 다 지나온 것이니 아름다워 보일 수도 있다는 것. 정말 그런 걸까. 지금 느끼지 못하는 이 시대의 감수성은 또다시 15년 정도가 흐른 뒤에 새삼 아름다워 보일까. 나는 또 그런 것이 서글퍼지는 것이다. 지나고 나서야만, 되돌릴 수 없을 때가 돼서야만 나는 그것을 애정할 수 있게 되는 것인가. 이론적으로는 이와 같은 무수한 시행착오를 겪어왔으므로 현재를 사랑하면 될 것을, 깨달은 대로 행하면 될 것을, 왜 도무지 그렇게 하지를 못 하는 것인가. 몰라서가 아니라, 알고 있는데도 왜 거듭 하지 못하는가. 왜 매번 깨닫고도 나는 언제나 우매한가. 깨닫고도 하지 못하는 것은 무지보다도 더한 어리석음 아닌가. 언젠가 꿈에 동자승이 나와 내게 아리송한 말을 남겼다. 나는 내내 어리둥절했었는데, 그 말인즉슨 이렇다. 깨달음을 깨달아야 한다지 않습니까.
외로움을 달래드립니다. 4화
서윤이와 눈이 마주치는 순간, 시간이 멈추는 듯 했습니다. 그녀는 말없이 커진 눈으로 나를 바라보다, 이어, 꽁꽁 얼어붙은 눈이 햇볕에 서서히 녹아들 듯 점차 측은한 눈으로 나를 바라보았습니다. 둘만이 느낄 수 있는 고요한 바람이 불어왔고, 그 바람은 왠지 모르게 아늑했습니다. 마치 그리운 서로가, 그간 잘 지냈냐는 안부를 대신하는 것처럼. 그렇게 아무런 말 없이, 아련한 눈빛으로 그저 서로를 바라만 보았습니다. 홍감독: "뭘 그리 뻔히 보고있어. 둘이 아는 사이인가?" 홍감독의 물음에 쉽사리 답하지 못하는 서윤이가 보입니다. 나: "그럴리가요. 안녕하세요. 처음 뵙겠습니다." 서윤: "안녕하세요..." 파도가 몰아쳐도 서윤이를 지켜줄 방파제가 되고 싶고, 온갖 비바람과 오물이 튀어도 대신 맞아줄 우산이 되어주고 싶었습니다. 홍감독: "그래? 아님 됐고. 슬슬 시작하지." 떨떠름한 분위기 속, 초점없는 눈으로 생각에 잠긴 서윤이가 보입니다. 불청객의 난입으로 얼마나 혼란스러울까요. 두꺼운 콘티가 하나씩 앞에 놓여지고, 홍감독님의 주관으로 회의가 진행됩니다. 다들 콘티와 시나리오를 유심히 읽고 있네요. 시계 초침 소리와 페이지 넘기는 소리만 들려옵니다. 원래 회의가 이렇게 진행되는 건가? 5분여간 지났을까요. 제작부로 보이는 관계자가 입을 엽니다. "몇번을 봐도 이 시나라오는 참.." 그러자 옆에 있던 분들도 동의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입니다. "그러게 말이에요." 순간 죄인이 된 것 같았습니다. 아무리 그래도 내 앞에서.. "뭐가 이리 세세해. 덕분에 장소 섭외 고민은 할 필요도 없겠네." 좋은 의미인가? 어리둥절 할 찰나에 홍감독님이 정곡을 찌릅니다. 홍감독: "김작가, 이거 본인 이야기 맞지?" 달아오른 열기가 서서히 얼굴 전체를 덮어옵니다. 안돼, 티내지마 얼굴아. 나: "아.. 아닌데요?" 홍감독: "아니긴 무슨. 본인 이야기 아니고서야 이렇게 글이 나오겠어?" 나: "아.. 아닌데.." 홍감독: "그나저나 진득하게 좋아했나봐. 궁금하네 그 여자." 눈을 마주치면 혹여 들킬까, 붉어진 얼굴로 저 아래까지 시선을 떨굽니다. 데칼코마니처럼 나와 같은 자세로 고개를 떨구고 있는 서윤이. 오직 둘만 아는 진실이 우리를 작아지게 만듭니다. 열띤 회의가 진행되지만, 공황이라도 온 듯 단 한 음절도 머리에 들어오지 않습니다. 서윤이도 콘티에 시선을 두고있지만, 페이지가 멈춰있는 것을 보아 나와 같은 상태인 것 같네요. 그렇게 제3자에 의해서 우리 이야기가 오고갑니다. 이어 우리의 첫만남이 이루어진 씬에 대해 논하기 시작합니다. 멍하니 얘기를 흘려보내다, 따끔한 정전기가 오른 것처럼 정신이 번쩍 듭니다. 아! 안돼! 홍감독: "다시 봐도 강렬하네 첫만남이. 그럼 이것도 김작가 이야기?" 얼굴이 달아오르다 못해 터질 것 같습니다. 나체로 거리에 내놓인다면 지금 딱 이 느낌일 것 같습니다. 나: "아, 아, 아닌데요, 정말 아니에요. 진짜로." 이유인 즉슨, 우리는 첫만남에서 정신적으로나 육체적으로나 선을 넘었습니다. 단연코 가벼운 만남이 아니었습니다. 그날은 마치 판타지 세상에 빠진 듯 했어요. 강원도 속초의 한 게스트하우스에서 처음 마주치게 되었습니다. 파티가 열리는 게스트하우스가 아닌, 조용한 안식을 얻고 마음의 여유를 주기위한 곳이었죠. 복잡해진 머리를 풀 겸 방문했고, 서윤인 한 눈에 알아볼 수 있었습니다. 누군가에 의해 흐트러진 마음을 추스리러 온 것을. 우연치 않게 창을 마주하는 긴 테이블에, 두칸 정도 띄고 나란히 앉게 되었습니다. 5월의 햇살은 따듯했고, 그 빛줄기는 서윤이의 얼굴을 더욱 하얗게 애태웠습니다. 빛을 받은 눈동자는 연푸른 갈색을 띄웠고, 그 선명한 눈동자는 나를 끌어들였습니다. 명암 진 콧대는 그녀의 이목을 더욱 부각시켰고, 아른하게 빛나는 그녀의 은은한 연분홍빛 입술은 어떠한 채도로, 명도로도 표현해 낼 수 없었습니다. 그녀의 사연이 궁금한 채로, 훔쳐보기를 한 두시간 지났을까요. 따스한 햇살은 그녀의 다른 모습을 보여주고싶었나 봅니다. 하늘은 빛을 닫고, 가랑비를 내리기 시작했습니다. 창에 물방울이 맺히기 시작했고, 그녀는 만지고 싶은 듯 손가락을 맞대었죠. 마치 그녀의 마음을 대신해주는 빗줄기에 위안을 받는 걸까요. 숙연해진 그녀의 얼굴을 보니, 토닥여주고 싶었습니다. 평소라면 결코 하지 못했을 행동. 하지만 그날의 분위기는 어떠한 언행도 용납해줄 것 같았습니다. 따스하게 손을 건냈고, 서로의 가장 깊숙한 곳에 있는 이야기를 풀어놓기 시작했습니다. 그때 이미 그녀에게 마음을 빼앗겨 버렸습니다. 아니지, 더 정확히는 그녀의 옆모습을 훔쳐볼 때 부터죠. 그렇게 우리는 복잡한 '성인'이라는 겉옷을 벗고, 어린 아이의 동심으로 돌아갔습니다. 우산 하나를 챙기고 비를 맞으러 밖으로 향했습니다. 토닥토닥 우산 위로 빗소리가 떨어지고, 우산이라는 작은 그늘 아래 서로를 의지했습니다. 무턱대고 걷다보니 속초 앞바다에 도착했고, 인적없는 아주 고요한 바다였죠. 우리는 그날의 모든 것을 온전히 느끼고 싶었나봅니다. 찰나의 고민도 없이, 신발과 양말을 벗어던지고 우산까지 내던졌습니다. 그리고 그 순간만큼은 현실의 모든 근심을 싹둑 잘라내었죠. 차갑게 내리는 빗줄기를 온몸으로 맞으며, 마음에 젖어든 불순물을 씻겨내렸습니다. 발가락 틈사이로 헤집고 들어오는 질퍽한 모래 마저 간질간질 기분이 좋았습니다. 시간이 멈췄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어요. 그간 내가 알고있던 행복이란 것은 모두 거짓임을 깨달았습니다. 6살 짜리 해맑은 웃음으로 얼마나 뛰어다녔을까요. 하늘은 적막해졌고, 해변가 끄트머리에 있는 큰 바위더미들 앞에 걸음을 멈췄습니다. 바위 틈에 잠시 몸을 숨겨 앉았고, 바다에 비친 푸른 달빛이 보일 듯 말듯 서로를 보여주고 있었습니다. 가쁜 숨소리가 진정되고, 남아있던 웃음도 달아났습니다. 묘한 정적이 이어졌고, 그녀는 마치 첫사랑의 두근거리는 눈으로 나를 바라보았습니다. 심장은 요동치기 시작했고, 내 목젖은 가만있질 못하고 자꾸만 침을 삼켜냈습니다. 그리고 서서히 젖어있는 그녀의 모습이 보이기 시작했죠. 하얀 티를 입고 있었던 그녀의 검정색 속옷이 천 조각 위로 너무나 적나라게 보였어요. 퍼래진 입술로 떨고있는 그녀의 모습은 가여웠고 그녀를 품지 않고서야 버틸 수 없었습니다. "......" 고요한 파도 선율에 홀린 듯, 몸이 움직이기 시작했어요. 천천히 그녀의 어깨를 부여잡았고, 낯선 손길에 잔뜩 경직된 채로, 가만히 멈춰있는 그녀를 향해 조심스레 다가갔습니다. 그녀의 코를 맞대었고, 이어 천천히 고개를 틀어 내려왔습니다. 서로의 숨결이 느껴질 정도의 아슬아슬한 거리. 그녀의 차가운 입술 위로 내 입술을 포개었습니다. 마주한 입술 사이로 미끌어져 내려오는 빗방울이, 투명한 맛과 함께 서로의 입안을 더욱 촉촉하고 매끄럽게 만들어주었어요. 서로의 혀는 부드럽게 뒤엉켰고, 다시금 가쁜 숨소리를 일으켰습니다. 그녀의 가느다란 목선을 타고, 하얀 티 안으로 흐르는 물방울. 물방울을 따라 시선은 하얀 티 안으로 향했고, 검은색 속옷 가운데 하얗게 옹골진 그녀의 가슴이 보였습니다. 마치 속옷을 벗어도 지금 보이는 예쁜 형태 그대로일 것 같은. 심장과 머리가 일렁일 정도의 자극이 이어졌습니다. 나란히 앉아있던 나는, 무릎을 꾼 채 상체를 일으켰고, 앉아있던 그녀의 고개를 뒤로 휙 져쳐 입맞춤을 이어갔어요. 그리고 물방울을 따라, 아주 천천히 그녀의 티 안으로 손이 홀려들어갔습니다. 내 손길은 그녀의 속옷 안까지 침범했고, 속옷에 닿을 그녀의 가슴이 고스란히 내 손아귀로 대신해서 촉감이 전해졌습니다. 그녀는 조심스러운 숨소리와 함께 나를 꼭 껴안았고, 이어 그녀의 허리춤을 받쳐들었고, 헐렁이는 플리츠 스커트 속으로 손길이 이어졌습니다. 그녀의 허벅지를 시작으로 서서히 올라가기 시작했고, 깊은 곳에 가까워질수록 살결은 점점 더 부드러워졌습니다. 선하게 느껴지는 그녀의 골반. 그 근처에 위태로이 걸쳐있는 실크 느낌의 속옷. 갈고리 처럼 걸친 내 손가락을 따라, 서서히 말려 내려오기 시작했습니다. 벗겨져 내려올수록 점점 더 나를 꽉 껴앉는 그녀. 잔뜩 겁을 먹은 듯한 그녀의 표정은 너무나 소중했고, 윤활제 처럼 나를 더욱 부드럽게 만들었습니다. 마침내 우리는 서로를 온전히 품을 준비를 끝마쳤어요. 그렇게 그녀는 어두운 모래사장의 적막 속에 나에게 몸을 맡겼고, 차갑게 내리는 가랑비를 맞으며, 더욱 본연적인 아름다운 육체의 선을 넘었습니다. 지금 생각해도 생생할 만큼, 가히 현실에선 있을 수 없는 판타지 세상에 있다온 듯 합니다. 그녀를 하얗게 애태웠던 따스한 햇살. 그녀의 사연을 물고 온, 창에 맺힌 물방울. 우리를 씻겨 내려준 가랑비. 우리를 간지럽히던 질퍽이는 모래사장. 우리의 안위를 보살펴준 바위더미. 우리의 내면을 들춰준 적막한 파도 선율. 모든 게 완벽했죠. 물론, 시나리오엔 이렇게 세밀하게 쓰여지진 않았지만요. 음, 나도 모르게 회상이 깊어져 버렸네요. 여튼! 지금은 참아주십쇼. 아니, 마음껏 꺼내도 되니 제발 서윤이 앞에서는 꺼내지 말아주세요. 어디 개구멍이라도 없을까요. 아니 쥐구멍이라도. 홍감독: "한 번 읽었을 때 느꼈던건데 말이야, 정말 서윤씨 캐스팅 잘했어." 서윤: "네, 네?" 홍감독 : "김작가가 묘사한 거나, 분위기나 서윤씨라 해도 믿겠어." 물컵을 들고 홀짝이던 서윤이가 놀랐는지, 콜록 콜록! 연달아 헛기침을 합니다. 홍감독: "김작가, 안그래? 아주 찰떡이야." 기침에 전염이라도 된 듯, 급작스럽게 나도 목이 턱 막힙니다. 이런, 컥 컥. 서윤: "자, 잠시 화장실 좀..." 붉어진 귀를 한 서윤이가 자리를 비우고, 잠시 휴식 시간을 갖기로 합니다. 홍감독의 부름에 담배를 태우러 테라스로 향합니다. 홍감독: "내일 잘 부탁해. 꼭 맞는 배우를 찾아야 영화가 산다." 어딘가 모르게 씁쓸하네요. 그 꼭 맞는 사람 여기 있는데... 나: "네네." 휴식 시간이 지나고, 얼마 지나지 않아 회의가 끝이 납니다. 인사가 오가고, 미팅실을 빠져 나옵니다. 다 같이 엘레베이터를 기다리는데 서윤이는 보이지 않네요. 지금은 차라리 다행이다 싶어요. 낯부끄러워서리... 엘레베이터가 도착하고, 꾸깃 꾸깃 다 같이 탑승합니다. 문이 닫히기 직전. 삐삐삐! 이런, 인원 초과로 닫히지가 않네요. 눈치껏 재빠르게 내리고, 감독님들께 먼저 내려가시라 인사를 드립니다. 곧이어 옆 엘레베이터가 도착하고, 1층을 누른 뒤 구석에 기대어 섭니다. 숨 막히는 분위기가 끝이 나고, 회의 동안 뱉지 못했던 깊은 숨을 뱉어냅니다. 스읍 후~ 엘레베이터 문이 닫힙니다. 별 생각없이 폰을 만지작 거리는데, 거의 다 닫혔던 문이 다시 열리기 시작네요. ...... 문이 열리며 서서히 보이는 여성의 실루엣... 아... 서윤아... 놀란 듯한 서윤이는, 제자리에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동동거립니다. 괜한 곳을 이리저리 둘러보며, 탑승하지 않을 사유를 찾는 듯 합니다. 하지만 있을리가요. 나: "타, 서윤아." 결국 함께 탑승한 채, 문이 닫힙니다. 서로는 약속이라도 한 듯, 양쪽 벽에 바싹 붙어 같은 곳을 응시합니다. 일정한 템포로 내려가는 층수. 9층..  8층.. 부디 이 정막을... 서윤: "......" 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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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는 꿈에 성시경이 나왔다. 이제는 꿈에까지 나온다. 좌식으로 된 어느 식당이었다. 성시경과 나는 마주 보고 있었다. 우리는 이런저런 얘기를 나눴고, 좋아하는 연예인인지라 내가 여러 질문을 했던 것 같다. 그런데 기억나는 건 딱 두 가지다. 기억나는 지점부터는 내가 아니라 이미 성시경이 말을 하고 있는 상황이었다. 앞에 내가 무슨 질문을 하고 난 뒤였던 것 같은데. “정엽 그 양반이 원래 재밌는 양반은 아니라서……” 그렇다. 성시경의 말이다. 내가 무슨 질문을 했기에 성시경은 저런 답변을 내어놓은 것일까. ‘정엽 그 양반’이란 가수 정엽을 얘기하는 것일 텐데, 나는 성시경에게 정엽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물은 걸까. 아니면, 정엽 정말 재미없지 않아요? 라고 묻기라도 한 걸까. 실제 성시경과 정엽의 관계는 물론 나야 전혀 모른다. 그들이 라디오 프로그램 <푸른밤>의 역대 진행자라는 공통점 말고는. 그런데 나는 정엽이 정말 재밌어서 미칠 것 같은 사람이라고 생각하지는 않지만, 정엽이 딱히 재미없는 사람이라고 생각하지도 않는데. 정엽은 가수일 뿐, 개그맨은 아니지 않은가. 그가 꼭 재밌어야 할 이유도 없고. 굳이 기억을 더듬어보자면, 정엽이 <푸른밤, 정엽입니다>를 진행할 때 일부러 찾아 듣기도 했고, 꽤 좋아했으니 특별히 그가 재미없다고 생각한 적은 없다. 물론 당시 <푸른밤>을 찾아 들은 건, <푸른밤>을 앞서 진행한 성시경에 대한 향수였을지도 모르지만, 그래서 정엽이 성시경보다는 재미가 없구나, 라고 잠시 생각했을지언정 ‘정엽은 재미없는 사람이다.’라는 생각을 가지고 살아온 적은 없다. 나는 그런 삶을 살지 않았다. 그리고 다음은 내가 인지하기로 두 번째 질문이자, 꿈에서의 마지막 기억이다. 나는 성시경에게 질문했다. 참고로 나는 그를 형이라고 지칭했던 것 같다. 나는 그에게 질문했다. “그냥 준 거 없이 싫은 사람은 없어요?” 그렇다. 이것은 내가 분명히 의식하고 한 질문이다. 그런데 지금 생각해보면 그것도 좀 이상한 게, 왜 하필 그런 질문을 던졌던가 싶은 거다. 그런 질문을 한다는 것은, 성시경은 마치 성인군자처럼 싫은 사람 얘기를 전혀 하지 않는다는 것이 전제되어야 할 것 같다. 물론 내가 아는 성시경은 적어도 팬들 앞에서 이유 없이 누군가를 험담할 사람은 아니지만, 굳이 그런 걸 숨기는 사람도 아니다. 내가 던진 질문은 마치 인격적으로 훌륭하고 온화하며, 화라고는 낼 줄도 모르고 내 본 적도 없는 사람을 떠보듯이 싫어하는 사람 없냐고 묻는 격이다. 다시 생각해봐도 성시경은 차가우면 차갑지 화낼 줄 모르는 사람과는 거리가 멀다. 그런데 성시경이 대답하기 시작했다. “조석 말야……. <마음의 소리> 조석. 그 양반 만화, 그거는 진짜 아니야…….” 내 기억은 거기까지다. 그리고 꿈에서 깼다. 거참 이상하다. 내 무의식의 발현이라고 하기엔, 나는 정엽 그 양반도 싫어하지 않고, 조석 그 양반 만화도 싫어하지 않는다. 어째서 내 무의식은 성시경이라는 거죽을 입고, 정엽 그 양반, 조석 그 양반하며 그들을 격하하는가. 심지어 이제 완결된 <마음의 소리>를 두고. 정말 이상한 양반이다. 이 꿈은 실제 성시경과 정엽과 조석과는 무관하며, 이게 다 내가 꿈을 잘못 키운 탓이다. 성시경과 정엽과 조석의 팬분들은 오해가 없으시길 바란다. 또한 나의 무의식이기는 하지만, 정엽과 조석의 웹툰에 대한 내 취향과도 무관함을 밝혀둔다. 나는 그 양반들 좋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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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이런 기분이었구나. 한글 문서로 글을 쓴다는 것. 아직 조금 어색하기는 하지만. 이제 예정대로 희곡을 조금씩 써봐야겠다. 어디서부터 시작해야 할지는 모르겠지만. 소설도 가능하다면 한편. 혹시나 했는데 역시나 거리두기 4단계 2주 연장이다. 당혹스럽군, 당혹스러워. 변명 같겠지만 일기 쓰기란 것이 사실 어떤 형식도 없는 것이어서 시나 소설을 쓰는 것보다 더 어렵게 느껴지기도 한다. 딱히 형식이 없기로는 수필도 마찬가지이기는 하지만 일기 쓰기는 그와는 또 다르다. 적어도 수필은 생에서 길어낸 어떤 통찰을 담보해야겠고, 또 바로 그것이 수필의 형식이라면 형식이겠지만, 일기 쓰기란 말 그대로 출판을 전제하고 ‘일기’라는 형식에 빗대어 쓰는 다분히 상업적인 일기가 아닌 이상 어떠한 의무도 주어지지 않기 때문에 오히려 나를 움직이게 하는 힘이 좀체 생기지가 않는다. 그러니 어떠한 목적도 없는 일기는 기껏해야 시시껄렁한 소리거나 허무한 일상의 기계적 나열로만 이어진다고나 할까. 제복을 입는 직업군이 제복을 입어야 생기는 어떤 힘이 분명히 존재하듯이, 문학을 하는 작가는 각 장르에 주어진 어떤 형식이라는 제복을 입어야 나름대로의 힘이 생기는 것 같다. 장르의 형식은 작가에게 일종의 제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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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라마 <빈센조>를 오랜 시간에 걸쳐 다 보았다. 개그 스타일이 어쩐지 익숙해서 찾아보니 <열혈사제>와 같은 작가다. 사실 이 드라마는 사랑스러운 캐릭터들이 여럿 있지만, 역시 송중기로 시작해서 송중기로 끝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데, 개인적으로는 <태양의 후예> 이후 송중기의 연기 행보가 썩 달갑지는 않았었다. <태양의 후예>에서의 송중기는 사실 정말 멋졌다. 그러나 그 이후로 그가 계속해서 '나 멋있지?'라고 말하는 듯한 그런 배역들만을 골라서 연기하는 것 같아 금세 질리고 말았던 것이다. 사실 영화 시나리오는 소위 가장 잘나가는 배우가 아닌 이상 전적으로 그 선택권이 주어지는 것도 아니고, 철저히 자본과 결탁되어 골라지는 나름대로 최선의 결과이겠지만, 영화판에서의 송중기의 위치는 그렇다 쳐도 드라마에서는 나름대로 선택의 반경이 넓을 것이라 생각한다. 그러나 이번 <빈센조> 역시 송중기는 어김없이 멋 그 자체의 남주이고, 그냥 멋지다 못해 거의 신격화된 수준의 캐릭터가 아닌가 싶을 정도다. 다행인 것은 이번 역시 잘 해냈다는 것이다. 결국에는 나 역시 극 중 '빈센조 까사노'에 빠져들기 시작했다. 빈센조 까사노는 <태양의 후예>의 유시진을 넘어서 우아하기까지 하다. 그렇다. 어쨌든 배역을 잘 소화했으면 된 것인데, 잘 소화한 만큼 다음 작품을 고르기는 더 힘들 거라는 생각이 든다. 아마 송중기는 배우로서 앞으로의 계획을 잘 세워야 할듯싶다. 벌써 삼십 대 후반인 그가 다양한 연기 스펙트럼으로 배우력을 증명해야 할 때가 곧 오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