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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훈구의 일본영화 경제학/ 전시체제5...조선영화(1)
1935년 최초의 토키영화 '춘향전'(이명우 감독). 이 ‘춘향전’을 시작으로 남북한을 통틀어 가장 많이 리메이크, 멜로드라마의 대명사가 되었다. 사진은 한국영화 100년 영화 포스터 전시회장. 식민지 조선은 대만과는 사뭇 달랐다. 어차피 민중들의 의사와 상관없이 대한제국의 황실과 몇몇 친일인사들의 야합으로 이뤄진 병탄이었던 까닭에 식민지배는 늘 난항을 거듭할 수밖에 없었다. 조선의 민중 저항운동이었던 ‘동학농민전쟁’ 역시 명성황후 민비정권이 외세를 끌어들여 무자비한 진압을 했고 강제합병의 조건에서 빠지지 않는 게 ‘이왕직 보존’이었음을 감안 할 때 민족주의자들의 독립운동은 총독부의 고민이었고 가혹한 방법으로 진압하였다. 이러한 정치적 상황은 영화산업을 활발히 전개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일본은 조선에 영화라는 ‘이미지’를 통해서 자연스럽게 일본어와 문화를 조선에 이식시키려했지만 반대로 조선의 영화인들은 혹독한 검열에도 불구하고 민족의식을 고취시키기 위한 수단으로 영화를 제작했던 것이다. 그러나 일본이 먼저 영화를 받아 들이고 기술적 진보를 가져온 까닭에 조선의 영화인들은 그 영향력에서 벗어 날 수 없었고 20세기가 지나가고 21세기에 접어들었을 때에도 여전히 일본식 현장문화와 잔재가 남아 있었다. 다만 흥미로운 것은 일제치하에서나 현재까지도 일본인들에게는 조선, 지금의 한국배우들에 대한 평가가 매우 후하다는 점이다. 지금까지 일본의 영화계에서 재일한국인 배우들에 대한 선호도가 높고 각 시대의 미남, 미녀를 기준 하는 일이 반복되고 있는 것을 보면 무승부의 싸움이라고 볼 수도 있겠다. 1910년대 경성(京城)에 극장가가 형성되고 1920년대 전국적인 영화 상영이 이루어지면서 영화는 조선민중들의 중요한 오락거리가 되었다, 1907년에 주승희가 발의하고 안창묵과 이장선이 합자하여 2층 목조 건물로 세워진 반도 최초의 극장인 ‘단성사’가 일본인의 손에 넘어갔다가 광무대 경영자 박승필이 인수하여 상설 영화관으로 개축하였다. 이후 조선극장 ·우미관(優美館)과 더불어 북촌의 조선인을 위한 공연장으로 일본인 전용 영화관인 희락관(喜樂館) 등과 맞서 단성사는 우리 민족과 애환을 함께 해 왔고 영화역사의 100년을 함께 해 왔다. 1919년 10월 최초로 조선인에 의해 제작된 연쇄활동사진극(連鎖活動寫眞劇) ‘의리적 구투(義理的仇鬪, 의리의 복수)’를 상영하였는데 1910년대 일본에서 크게 유행하던 연쇄극 형식을 따른 것으로 신파의 영향을 받았음을 알 수 있다. 또한 1924년 초 단성사 촬영부는 7권짜리 극영화 ‘장화홍련전’을 제작, 상영함으로써 최초로 조선인에 의한 극영화의 촬영·현상·편집에 성공했다. 이러한 성과에도 불구하고 신파의 영향력은 오늘날까지도 깊이 뿌리 내리고 있는데 심지어 조선 시대의 구전 예술인 판소리, 유행가에도 스며들어 ‘한국형 멜로드라마’로 이어진다. 조선총독부 역시 대만과 마찬가지로 계몽영화를 기획하여 당시 대중 연극계의 리더격인 윤백남(尹白南)에게 저축 장려 영화인 ‘월하의 맹세’(月下─盟誓, 1932)를 ‘조선총독부 체신국’에서 제작하는데 조선 최초의 극영화(劇映畫)로 경성호텔에서 신문기자와 관계자 100여 명을 초대하여 시사회를 가졌으며 약 1년간 경성과 경기도 일대에 선을 보이고는 1924년 2월부터 지방순회상영을 하였다. 이월화가 배우로 데뷔하였고, 각본·감독·연기를 모두 조선인이 맡았으나 촬영과 현상은 일본인이 맡았다. 1924년 일본인이 조선키네마 주식회사를 설립하여 총포 화약상인 다카사 간조를 사장으로 내세우고 일본에서 기술자들을 데려와 ‘해의 비곡’(1924)을 내놓자 이에 대항하여 조선인들이 설립한 독립제작사가 줄을 이었다. 이 시기는 교토에서 독립 제작사가 줄줄이 탄생한 것과 같은 시기인데 일본이 조선에 영화사를 세운 것은 일본영화산업이 번창하는 만큼 조선도 번창할 것이라는 계산이 있었기 때문이다. 이면에는 1923년 하야카와 마쓰지로(早川孤舟)감독의 ‘춘향전’의 성공이 자극제가 되기도 했다. ‘춘향전’은 당시 인기변사였던 김조성과 개성 기생 한명옥이 이몽룡과 춘향 역으로 출연했다.식민지 조선에서 처음으로 제작된 완전체 영화(이전에는 ‘연쇄극’이라 하여 연극 공연중에 짧은 필름을 상영하는 형태를 띠고 있었다)로 실제 조선인 배우를 캐스팅하고 남원에서 올로케이션 촬영을 했으며 제작, 감독 및 각본, 촬영 등 주요 역할은 일본인 스태프들이 담당해 흥행했다. 한국 영화 100주년 영화 포스터 전시회장. 이러한 흥행 성공이 결국 ‘조선 키네마 주식회사’ 설립의 근거가 된다. 그러나 민족고유의 이야기인 ‘춘향전’을 일본인이 제작했다는 사실에 많은 조선의 영화인들에게는 자극제가 된 것으로 본다. 하지만 ‘춘향전’은 일본의 ‘주신구라’와 비슷하게 국민영화가 되어 1935년 최초의 토키영화로 이명우(李明雨) 감독의 ‘춘향전’을 시작으로 남북한을 통틀어 가장 많이 리메이크되어 멜로드라마의 대명사가 되었다. 여기서 언급할 인물은 윤백남이다. 그는 경성으로 올라와 황금정(지금의 을지로 5가)에 제작사‘윤백남 프로덕션’을 차리고 첫 작품으로 ‘심청전’을 제작했다. 조선인의 자본에 의해 만들어진 최초의 영화 제작사였으며, 조선영화에 대한 결집된 열망으로 만들어졌고 윤백남, 이경손, 주삼손, 나운규, 김태진, 주인규, 김우연 등 멤버들이 참여 했다. 이에 윤백남은 이경손(李慶孫) 감독, 니시카와 히데오(西用秀洋)를 촬영감독으로 하여 일본에서 사온 중고 카메라(당시 350원)로 촬영하여 1925년 봄 조선극장에서 개봉했다. 당시 심청 역을 맡은 이는 조선 키네마의 최덕선이었고, 심봉사 역에는 나운규였다. 신인으로서는 파격적인 기용이었지만 심봉사의 외모에 가장 잘 어울렸다는 것이 이유였는데 그는 아예 장님을 방문하기도 하고 열정적으로 대본을 외우면서 성격파 연기 배우로 발돋움했다. 관객들은 나운규의 연기를 두고 천재라는 찬사를 보냈지만 불행히도 일본 측 투자자의 약속이 어그러져 제작비 부족으로 인한 어려움을 여실히 드러냈다. 이경손의 연출력도 도마에 올랐지만 심청 역의 최덕선의 연기도 수준미달이었으며 특히 허술해 보이는 용궁 세트나 인당수를 재현한 마포나루에서 인형을 떨어뜨린 점 등이 지적되며 흥행에 실패 하고 만다. 이후 이경손은 이광수 원작의 ‘개척자’를 통해 다시 영화계에 복귀한 후 계림영화협회와 손잡고 일본의 오자키 고요(尾崎紅葉)가 쓴 ‘금색야차(곤지키야사, 金色夜叉)’를 번안한 ‘장한몽(長恨夢)’으로 화제를 불러일으켰다. 지금도 ‘이수일과 심순애’ 혹은 ‘김중배의 다이아몬드 반지’로 회자되는 작품으로 매일신보 출신 기자 조일재는 원작을 조선의 실정에 맞게 번안했다. 그 결과 이수일과 심순애가 탄생하게 된 것인데 두 사람의 애틋한 만남과 헤어짐은 관객들의 사랑과 찬사를 받으며 극장을 눈물바다로 만들었다. 그러나 영화의 이면에는 뒷담화가 무성했다. 심순애역을 맡은 여배우 김정숙은 뛰어난 미모를 지녔지만 선천적으로 말더듬이었다고 한다. 배우로서는 부적합했지만 타고난 미모를 이용, 윤백남 프로덕션의 ‘심청전’에 출연한 것이 계기가 되어 ‘장한몽’의 여주인공으로 발탁되었다. 무성영화시대였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이수일 역을 맡은 이는 일본인 주삼손이었는데 미남형 배우였기에 전격 캐스팅되어 촬영에 돌입했다. 그러나 자신을 캐스팅 하지 않은 것에 대해 앙심을 품은 나운규 감독이 돌연 주삼손을 빼돌리고 촬영 방해를 하는 바람에 대체된 배우가 등장하는데 바로 심훈(沈薰)이다. 훗날 소설 ‘상록수’로 유명해진 인물이지만, 당시에는 조선일보 기자였는데 신극 연구단체 극우회(劇友會)의 회원이었기에 전격 출연을 했다. 그러나 관객들은 이인일역(二人一役)의 영화를 매우 어리둥절해 했다고 한다. 이후 이경손은 이내 상하이를 거쳐 방콕으로 망명의길을 택한다. 한편 1926년 나운규(羅雲奎)의 민족영화 ‘아리랑’은 조선영화의 황금시대를 열었다는 평가를 받는데 영화사 연구에 의하면 나운규가 감독을 맡았다는 설과 일본인 쓰무라 슈이치(津守秀一) 감독을 맡았다는 두 가지 학설이 전해오기는 하지만 항일운동을 한 경력이 있는 나운규가 감독, 각본, 주연을 맡았다는 것만으로도 이슈가 되었고 특히 변사의 애드립으로 조선총독부의 간담을 서늘케 했다. 주인공 미치광이 청년이 여동생을 괴롭히는 관리의 앞잡이를 살해하고 감옥에 간다는 스토리를 담고 있는데 변사가 항일운동을 하다가 고문을 당한 후유증이라고 설명하자 관객들이 크게 흥분하였고 이에 입회하고 있던 경관이 상영중지를 선언했다. 상영이 끝날 때쯤 가수가 일어나서 창작민요인 주제가 ‘아리랑’을 선창하면 관객들은 함께 불렀다. 1928년 나운규는 ‘벙어리 삼룡’을 감독했다. 이 영화는 나도향의 원작소설을 각색한 문예영화였는데 이 영화를 통해 주연 여배우였던 류신방과 연인 사이로 발전하기도 했다. 나운규는 17편의 작품을 남기고 35세의 나이에 요절한다. <미국 LA=이훈구 작가> http://www.japanoll.com/news/articleView.html?idxno=476 저작권자 © 재팬올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출처 : 재팬올(http://www.japanoll.com)
#115 수식이 필요 없는 장면들, 스튜디오 지브리
2013년 장편 애니메이션 제작에서 은퇴를 선언 했던 ‘미야자키 하야오’ 감독이 최근 다큐멘터리에서 복귀에 대한 의사를 밝혔습니다. 그의 오랜 팬이라면 반가운 소식이 아닐 수 없는데요. 그는 “아무것도 안하고 죽는 것보다, 하고 있는 와중에 죽는 편이 차라리 낫다”라고 덧붙이기도 했습니다. 미야자키 하야오 감독에 대해 이야기 하고자 할 때, 그가 설립부터 함께했던 ‘스튜디오 지브리’를 빼놓고 이야기할 순 없을 것 같은데요. 오늘 일일영감에서는 ‘스튜디오 지브리’의 애니메이션 속 장면과 일러스트를 소개해드리고자 합니다. 1985년 6월, <바람계곡의 나우시카>를 제작한 회사를 모체로 설립된 스튜디오 지브리는 <이웃집 토토로>, <모노노케 히메>,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등 많은 사랑을 받았던 작품들을 다수 제작했으며, 국내에서는 지난 2014년 <스튜디오 지브리 입체조형전>이라는 이름으로 전시를 진행하기도 했습니다. 일상의 풍경과 상상 속 장면을 구현해내는 데에 그치는 것뿐만이 아니라 누구나 느낄 수 있는 지브리만의 감성이 녹아 들어 있다는 점이 가장 큰 매력이 아닐까 싶습니다. 스튜디오 지브리는 철저하게 수작업을 고수했던 이전과 달리 최근 CG애니메이션 시작 단계임을 밝혔는데요. 이전과 다른 작업 방식을 택하여도 지브리의 다음 작품이 기대되는 것은 당연한 사실이 아닐까 싶습니다. *<귀를 기울이면>, <바다가 들린다>, <코쿠리코 언덕에서>, <마녀 배달부 키키>, <이웃집 토토로>, <천공의 성 라퓨타>,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 <하울의 움직이는 성>의 이미지가 첨부되어 있습니다. 스튜디오 지브리의 공식 사이트, > http://www.ghibli.jp
허저 중강 (許褚 仲康) A.D.? ~ ?
사람 보는 안목도 훌륭했고 용인술도 뛰어났으며 철저한 능력 위주의 인재기용 방식을 추구한 실리주의자 "조조"의 휘하에는 모두가 알다시피 삼국시대 당시 가장 많고 두터운 인재풀을 자랑한 삼국시대의 레알 마드리드 라고 할 수 있었고 응당 그런 조조 아래에는 뛰어난 무장들도 참 많았다. 여러모로 뛰어나거나 조조와 코드가 맞아 신임을 얻은 장수들도 여럿 있었지만, 사료를 살피고 그 모든 것들을 토대로 볼 때 조조에게 '인간적인 애정'을 가장 많이 받았다 느껴지는 장수가 하나 있었으니 그가 바로 "허저"였다. 오늘의 주인공은 이 진짜 "스트롱맨"인 이 인물로 간다. 오늘 날, 중국 안후이성 보저우시 출신인 허저는 난세가 영웅을 만든다며 당시 온갖 히어로들.. 그중에도 특히 범인을 훌쩍 초월하는 피지컬과 신체능력을 자랑하는 차이니즈 슈퍼히어로들 중에서도 가히 압도적인 진짜 '스트롱맨'이였음이 기록에 나온다. 삼국지연의에도 등장하는 허저 관련 에피소드들 중 허저가 조조 휘하로 임관 전... 고향에 살 당시 1만 여명 이상의 대규모 도적떼가 허저의 고향에 침공했고 대치에 지친 양측이 휴전을 합의하며 도적들의 곡식과 허저측의 소를 물물교환 하는 와중, 소가 놀라 달아나자 그 소의 꼬리를 한 손(!?!)으로 잡고 백여 걸음을 끌고 갔다는 이 말같잖고 믿기지 않는 스토리가 엄연하게도 위서의 허저전에 실려있다.... 당시 후한말에 일반적으로 사육하던 소의 품종, 암수(♂♀)여부, 소의 연령, 소의 영양상태 등은 알 수 없다. 그러나 품종여부 떠나 소라는 동물 자체가 원체 크고 암수의 무게차도 상당하지만 암컷인들 일반인에게 끌어 당겨질 무게는 아니며 어린 송아지 또한 지금 이 글 쓰는 나, 읽는 댁들이 힘으로 해볼 수준을 가뿐히 넘어서고 당시 허저측이 처한 환경이 열악해 사람도 제대로 못 먹어 오죽하면 도적떼에게 고기를 주고 곡식을 받아오려는 시도까지 한 점등 비추면 소인들 제대로 먹어 평소의 몸상태는 아니였겠으나 그렇다한들 소는 소인지라 어쨌건 사람이 일신의 용력만으로 한 손끌이를 할 생물이 절대 결코 아님은 명백하다. 게다가 소의 꼬리를 잡아끌었다는건 소 또한 순순히 끌려가지 않고 그러지 않으려 끌려가는 반대방향으로 가려고 용을 썼다는 이야기인데... 전 중국 및 전인류사에서 최강의 파워맨이라 일컬어지는 항우가 이런 허저보다 힘 좋았을까 싶을만큼 여간 대단한 힘이 아니다. 위서에 의하면 신장도 "여덟 자 남짓" 이라 하는데, 당시 후한 말 기준의 여덟 자가 현대 기준의 거의 190cm에 가깝고 '남짓'이라는 표현은 여덟 자를 좀 넘는다는 뜻. 게다가 후한 말 관련 모든 역사서들 중 유일하게 허저는 허리둘레에 대한 언급이 있다. 당시 단위로 "10위"나 되는 허리둘레를 지녔다고 나오며 이 역시 현대기준 무려 115cm(45inch가 넘는다!!)라는... 당장 이 수치는 체격이 작은 편은 아닌 내 가슴둘레를 넘어선다.. 아마도 위에 언급된 인간계 끝자락급의 파워를 볼 때 엄청난 근육질이였을 것으로 보이며 저런 피지컬까지 지닌 것으로 보아, 대략 상상해보면 '브록 레스너'나 '밥 샙' 정도 되는 체구를 가졌을 것으로 추측되며 그런 거구들은 지금도 길에 지나가면 사람들이 다들 쳐다볼만큼 눈에 띄는 엄청난 거한들인데, 성인남성의 평균신장이 146cm 가량 정도였을 후한 말의 중국에서는 그야말로 단순 거인을 넘어서, 방금 화장실 다녀왔더라도 마주하면 소변을 지릴 괴물이였음이 분명하다. 이런 엄청난 신체조건 + 신체능력을 지닌 초인 허저는 조조가 허저의 고향 일대를 점령하자 자신을 따르던 무리들을 이끌고 조조휘하로 가는데, 당시의 조조 또한 허저의 체구를 보고 심히 놀랐다는 기록이 있고 이 당시 "실로 나의 번쾌가 될만하다!!" 라며 감탄했다고 한다. 조조는 허저와 그가 이끌고 온 장정들을 고스란히 자신의 근위대 즉, 최측 호위대로 임명했다고 하는데 당시같은 난세에 당시 조조가 듣보잡이 아니였음에도 그런 새로 갓 합류한 이들에게 자신의 신변경호를 맡긴 것을 보면 허저를 굉장히 좋게 보고 신뢰했던 모양인데, 이때부터 조조는 허저에게 반한 듯 싶고 조조의 알음알음 허저 챙기기가 시작되었던거 같다.ㅎㅎ 허저는 생김이나 체구, 그 압도적인 신체능력 등을 갖추고도 전혀 그에 어울리지 않는 샤이가이였다.. 사람들 앞에 나서는 것도 좋아하지 않았고 눈에 띄는 것도 싫어해서 조조가 장수들을 집결하면 가장 구석이나 뒷편에 숨겨지지도 않는 체구를 한껏 움츠려 섰다고 한다. 조조는 장수들이 군공을 세우면 많은 이들 앞에서 당사자를 불러내 크게 칭찬하는 방법으로 당사자를 띄워주고 다른이들도 분발을 유도했는데, 부끄럼쟁이 허저는 간혹 공을 세우고도 이런 수 많은 사람들 앞에 불려나가 주목을 받고 추켜지는 것에 상당히 큰 부담을 갖고 있었고... 조조가 그를 앞으로 호명해도 못 들은체 딴청을 부리고 밍기적대다 거듭 그를 불러도 쌩까는 허저를 조조가 호통을 쳐 부른 후에야 마지못해 나가는 경우가 많았다. 성격이 저런 사람이다보니 말도 거의 없었던 듯. 그러나 할 말은 하는 편이였던거 같고 하루는 형주방면 총사령관이던 조인이 급한 보고를 위해 허창으로 갔는데 당시 조조가 바쁜 정무 중이였고 조인은 맡은 중책이 중책인지라 조조를 기다릴 겨를은 없어 허저에게라도 메모를 전달하려 허저를 불렀다. 허저는 조조의 인척이자 최측근이고 방면군 사령관인 조인의 부름을 거절할 수는 없어 조인에게 갔는데.. 조인 : 아, 허중강! 나 지금 쫌 급한데 말 좀 전해줘! 허저 : 기다리시면 전하 곧 나오십니다.. 이러고는 조인의 대꾸도 듣지 않고 바로 휭~ 조조에게 돌아갔고 이날 이후 조인은 허저를 벼르기 시작한다. 조인은 다시 정욱을 불러 이 일을 이야기했고 정욱이 듣고 놀라 허저에게 가서 물었다. 정욱 : 중강! 사회생활 참 못하네.. 조장군 성격 몰라? 전하의 친척에 측근에 개국공신인데 왜 그러셨대? 허저 : 암만 그래봐야 저 사람은 방면 맡는 바깥사람이고 난 전하의 신변경호를 맡았는데 내가 왜 전하의 허락없이 외부인을 만납니까... 이 에피소드가 조조의 귀에 들어가자 안그래도 이쁨받던 허저는 더욱 조조의 사랑을 받았다. 허저와 조조는 아무래도 주군과 호위관이다보니 서로 붙어있는 시간이 길었는데, 허저는 종종 옷매무새가 허술하거나 한 경우 조조가 이를 먼저 보면 직접 옷매를 다시 챙겨주기도 했고, 조조가 식사시에 조조곁에 서서 조조의 식사를 지켜보는 허저에게 같이 식사를 권해서 허저가 응하면 함께 먹기도 했다. 허저는 자신이 좋아하는 찬이 있으면 응했으나 그렇지 않은 경우는 자신의 임무를 수행해야 한다며 응하지 않았다.... 허저가 체격이 체격인지라 허저가 타는 말은 금새 지쳐 여러 마리를 번갈며 탔는데, 허저가 탈 말은 조조가 직접 선별해 골라줬고 경우에 따라 자신이 타고 있는 말과 바꿔타기도 했는데, 주군이 신하와 말을 바꿔 타는 것은 당시 "말"이라는 동물의 군사적, 물질적 가치를 고려하면 대단한 호의를 베푸는 것이였다. 게다가 당시의 조조가 타는 말이 예삿말들도 아니였고.. 이는 마치 내가 새로 간 회사 사장님이 외근 나가며 업무용 레이를 타는 내게 자신의 아우디 Q7을 타고 가라며 바꿔 주는 것이나 진배 없는 것이다. 조조의 경호실장이면 거의 대부분 조조의 가장 근처에 있다보니 전장에 나가 지휘를 맡은 적이 드물지만 없진 않다. 양에서의 장수와 전투 당시 돌격대를 맡아 돌진하여 적의 기세를 꺾었던 적도 있고, 관도대전과 원소 사후, 원소의 잔당들을 정벌하는 중 업군 포위전 당시에도 소수나마 병력을 이끌고 나선 적 있다. 하지만 사람을 적재적소에 잘 쓰는 조조가 그를 호위관으로만 거의 중용하고 전장에 내보낸 횟수가 다섯 손에 꼽히는 걸 보면 통솔능력은 별 볼일 없었던 것 같다. 삼국지연의를 보면 종종 허저의 일기토 내용들이 나오던데 올뻥이다. 허저는 누군가와 1vs1로 전투에서 맞붙은 적이 없다. 전위와 조조의 경호패키지로 묶음처리 되기도 하지만, 놀랍게도 둘은 연의에서처럼 서로 맞붙은 적도 없고 심지어 둘이 얼굴을 마주한 적조차 없다. 왜냐 하면 실제 역사에서는 전위가 이미 사망한 후에 허저가 조조휘하에 들어갔기 때문이다. 삼국지연의의 내용 및 이를 토대로 캐릭터들의 능력치를 데이터화시킨 코에이의 삼국지 게임 내의 허저 어빌리티만 보면, 왠지 자기 이름이나 쓸 수 있을지.. 1부터 10까지 숫자는 셀 수나 있을런지 싶을 힘 쎈 바보로 그려지지만 절대 그런 사람은 아니였다. 조조에게 임관 전에도 고향에서 도적떼를 상대로, 또 조조에게 임관 하면서도 자신을 따르던 적잖은 무리들이 있었던 점 등으로 봐서 아주 근본도 없는 사람이 아니였고 정사나 위서, 그의 열전 등 어딜 봐도 '허저는 빠가였다'는 식의 언급은 진짜 1도 없다. 다만... 워낙 별 말이 없고, 게다가 이게 좀 치명적인데 허저는 평상시에 입을 약간 벌린 눈도 촛점없는 멍한 어딜 보는지 모를 표정을 짓고 있는 경우가 많았다. 바로 이 표정 탓에 그의 별명은 "호치(虎癡)"가 된 것.. 저 허저의 유명한 닉네임 호치의 호는 범 호, 다시 말해 전장이나 임무수행 및 조조곁을 지킬 때의 그의 호랑이같은 무시무시한 기세를 뜻하는 것이지만 문제는 뒤에 붙은 저 '어리석을 치(癡)' 인데... 저 치가 바로 허저의 그런 평상시 표정 탓에 붙은 것이였다. 그치만 허저입장에서 이것도 좀 억울한게, 조조곁에 있거나 전장이거나 뭐 그러면 모르지만 진짜 아무일없는 평상시에 조조가 내전에서 업무 보거나 천자를 알현, 또는 자거나 등등 그럴 때의 허저는 혼자 긴 시간을 문앞에 서 있어야 하는데 이 당시에 무슨 스마트폰이 있어서 허저가 유튜브나 빙글을 볼 수 있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어쨌건 근무시간인데 이어폰끼고 음악 들을 것도 아니고, 진짜 할 수 있는거 없이 서 있는데 누군들 표정이 저리 멍해지지 않았을까 싶다. 그렇다고 영국 왕실근위병들처럼 뭐 교대를 하는 것도 아니였을 것이고.... 당연히 허저는 본인의 저 별명을 싫어했고 위나라 내부에도 감히 허저앞에서 저 별명을 입에 담을 수 있을 힘과 용기를 지닌 자도 없었지만 어쨌건 허저가 기피하던 저 닉네임은 훗날... 동관에서 마초, 한수와 마주할 때 마초가 바로 달려가 조조를 개 때려잡듯 하려다 조조가 데려간 허저의 비쥬얼을 보고 짐짓 쫄은 마초가 "조공에게는 호후(虎侯)가 있다는데, 어디에 있습니까?" 라고 말해준 후부터 "호후(虎侯)"로 격상된다. 삼국지연의에서 업을 함락 후, 깐죽대는 허유를 빡친 허저가 죽이는 씬이 나오지만 허구다. 저런 일 자체가 없었고, 허저의 성격상 단지 저렇게 깝친다고 하여 아무나 썽큼썽큼 죽이는 스타일이 아니였다. 일에 있어서는 더할나위없이 용맹무쌍했지만 평상시도 거칠고 격한 그런 사람이 아니였다. 평소에는 온순하니 풀 뜯지만 맹수가 다가오면 날뛰는 아프리카 물소같은 타입이였던듯 싶다. 조조가 죽자 탈진하여 쓰러질만큼 울부짖었으며 어찌나 심신이 상할만큼 슬퍼했는지 각혈까지 했다고 한다... 조비 또한 허저를 근위로 삼았는데, 조조가 허저를 자신의 최측에서 경호하는 소수의 경호대를 이끄는 경호실장역을 시켰다면, 조비는 황실전체를 경호하는 황실근위대를 이끄는 근위대장같은 직책을 맡겼다. 허저는 생몰연대가 명확히 사료에 나와있진 않지만 조조의 죽음에 이어 그 아들 조비의 죽음도 봤다. 물론, 조비가 그리 오래 못산 탓도 있으나 아무튼 주군부자의 죽음을 모두 겪고 조조의 손자인 조예대에 사망한다. 여러 정황들 볼 때, 조예재위기에는 사실상 은퇴상태로서 원로예우를 받았던거 같고, 조예 재위 후 그리 오래지 않아서 사망한 듯. 사인에 대한 별 다른 언급도 없고 정확한 나이는 알 수 없으나 사망당시의 허저나이가 상당한 고령이였음으로 추정되기에 그냥 노환에 의한 병사였을 듯 싶다. 사실... 주군의 최측근 경호는 그리 공을 세우기가 쉽지 않은 자리다. 그럼에도 허저를 아끼던 조조는 그런 허저가 혹여라도 기가 죽을까, 늘 그가 있음에 자신이 마음 편할 수 있고 이것이야말로 큰 공이라며 그를 치켰고. 가끔은 허저를 전장에도 내보냈다. 허저가 근위대장임에도 몇 차례 전투에 나섰고 비록 몇 차례 안된다고는 해도 어쨌건 모두 승리했는데 추측해 보건데 이는 조조가 허저를 장수로서의 공을 세울 수 있도록 별 다른 지휘통솔능력이 없어 대병을 이끌기는 무리인 그가 소수병력을 이끌고나마 충분히 승리할 법한 전투에 가려 보내 허저로 하여금 주워 먹게끔 했던 배려로 보여진다. 허저 또한 박식똘똘이까진 아니여도 자신을 아끼는 그런 조조의 마음씀씀이를 캐치할 정도는 충분히 되었고 조조를 깊게 공경해 따랐으며 심지어 조조가 그에게 휴식을 명해도 허저는 이를 따르지 않고 거의 자는 시간을 제하면 조조의 지근거리에서 머물렀다. 삼국지 등장인물들 중 통틀어도 손 꼽힐만한 막강한 피지컬과 그에 따른 용맹과 괴력을 겸한 그가 전장을 휘젓고 싶지 않았을리가 없다. 하루종일 자신의 엄청난 신체를 서 있는데 써야함이 실로 괴로웠거나 자괴감이 들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는 오로지 책임감과 충성으로 묵묵히 해냈다. 비록 자신의 능력과 적성에 맞지 않는 일을 부여받더라도 이를 최선 다해 충실히 해내는 프로패셔널. 그렇기에 조조는 늘 자신 곁에 시립해 서 있는 그를 대함에 있어, 외지의 수만 병력을 이끌고 요충지를 지키는 사령관, 전장에서 대규모 전투를 승리한 개선장군들에 못지 않게 대했던 것이다. 어찌보면 허저 본인도 그런 자신의 성품 덕에 그 험한 난세에서 난전이나 내부적 정치싸움에 휘말림없이 내내 인정받다 천수를 누렸는지도 모르겠다. 다들 즐거운 주말 잘 보내시고 사전투표 안하신 분들은 돌아오는 화요일에 꼭! 잊지 마시고 투표 하시길 바랍니다ㅎ 자신의 정치적 신념과 대의명분에 입각해 각자가 생각하는 최선의 후보분께 소중한 한 표를 반드시 행사하세요! 사려깊은 문후보님, 구여우신 홍후보님, 총명하신 안후보님, 기개있는 유후보님, 혁신적인 심후보님 모두 화이팅 하시길. 그리고 누가 대권 잡건 부디 국가와 국민을 진정으로 위하는 참지도자 되길 기원합니다... 얼마나 좋은 기회입니까ㅎ 무슨업적도 필요없이, 앞 둘이 워낙 10년 깽판이라 평타만 쳐도 성군소리 들을 각인데...
제갈량 공명 (諸葛亮 孔明) AD.181~234
"삼국지"가 큰 영향력 갖는 동아시아 3개국인 한국, 중국, 일본에서 가장 인기있는 인물 꼽으라면 중국은 관우, 일본은 조운, 한국은 바로 "제갈량"이다. (예로부터 문을 숭상한 전통기조 탓인지...) 이 칼럼의 첫 포문도 그래서 제갈량으로 준비했다.. 여러분이 읽었던 삼국지에는 잘 나오지 않은 소제들 위주로 갈테니 다들 Focus! 고향은 서주 낭야현.(지금의 장쑤성 쉬저우) 조조가 부친 잃은 빡침으로 서주 제노사이드 자행 시 부친 제갈규가 형주로 거처 옮길 때 함께 이주. 부친 사후 숙부 제갈현 슬하에서 자란다. 3남2녀 중 넷째였고 당시 기준으로 신장이 무려 189cm가량으로 전란과 기근 탓에 성인남성의 평균신장이 140cm중후반이던 3세기 중국 기준 가히 거인이나 진배없던 장신에 용모도 잘 생겼단 기록이 남아있고 마른 체형이였다고 한다. 당시의 선비들의 주류 학업스타일은 토시 하나까지 달달달 외우던 방식이였는데, 제갈량은 그런 암기 위주가 아닌 요약정리 방식으로 공부를 했다고 한다. 여담으로 후한 마지막 천자인 헌제와 동갑인데다 사망한 해도 같았다. 그 유명한 유비와의 "삼고초려"는 나관중의 각색이 들어가긴 했으나, 실제로 사료에도 유비가 세 번 찾아간 끝에 제갈량을 만났다고 남아있다. 연의에서처럼 제갈량이 유비를 피한건 아니였고 정말 서로 타이밍이 안맞았으며, 휴대폰도 없던 시절 이다보니 당시로서는 어찌보면 다짜고짜 찾아가서 마침 딱 만나는것도 쉽진 않았기에 그랬던듯 싶다. 그는 딱히 유비를 따를 마음은 없었으나, 임관하여 모실 마땅한 군주가 없던데다 당시 절친이던 서서의 권유도 있고 해서 유비를 모신다. 대기업 서류전형에서 컷트되던 유망주가 입사제의 하는 중소기업 들어간 꼴. 연의내용과 달리 모친이 인질 잡혀 서서가 조조에게 가기 전까지 한 동안 제갈량과 서서는 유비 휘하에 있었고 방통과도 인척 관계였는데, 제갈량의 누나 중 한 명이 방통의 숙부의 아내.. 즉 숙모였다. 유비에게 임관 후부터 관우, 장비 형제의 그에 대한 텃새는 여간 버거운 일이 아니였다. 장비는 성격도 시원시원하고 재사를 공경하는 편이라 제갈량이 일정 수준 능력을 보인 후로는 그닥 태클이 없었으나, 유비 다음은 자신이라 자부하던 관우의 견제와 경계는 제갈량으로서도 관우 사망시까지 참 벅찬 일이였다. 상명하복이 투철한 전형적인 군인이라 제갈량의 지시도 잘 이행하여 케미가 잘 맞은 덕에 제갈량이 가장 의지하던 무관은 "조운"이였다. "마량"과도 코드가 맞았는지, 사석에서는 호형호제 하던 사이였다고 한다. 촉빠에 제갈량빠던 나관중에 의해 가장 주인공버프 크게 받은 인물 중 하나인 제갈량이였기에 소설 속 모습은 거의 닥터 스트레인지에 가깝게 묘사되나 그도 사람인지라 완벽의 면모만 있던건 아니고...ㅋ 분명 단점도 있었고 매사에 뛰어난건 아니였다. 우리에게 그는 탁월한 전략가의 이미지가 강한데, 실제로 전장에서의 전략과 전술, 병법에 능했던건 맞으나 당시 그 분야의 최강자는 사실 아니였다. 당대의 평가 등과 커리어들을 볼 때, 그는 전략가보다는 오히려 정치가로서의 실적이 압도적으로 많았고 업적도 그쪽이 훨씬 많았다. 전체적 판세를 파악하는 전략적 면모는 오히려 주유, 조조가 앞섰고.. 전투에서의 전술적 재량은 방통, 법정에 뒤졌으며.. 후방보급에서는 순욱도 결코 제갈량 못지 않았고 심리전에 있어서는 가후나 정욱이 더 나았고 방어전술은 사마의가 우위였다는 평가가 지배적. 특히 중국에서의 책략,전략가로서의 자질을 따질 때 큰 척도로 삼는 것은 기책.. 쉽게 말해 창의적이고 상대의 허를 찌르는 임기응변 더 쉽게 풀어 전술적 "에드립"여부였는데, 제갈량은 앞서 말한 책사들에 비해 이 부분이 특히 좀 빠지는 편이였다. (중국 역사상 이 분야의 갑은 바로 "한신") 역사기록에서나, 소설에서나 제갈량 전술의 주요패턴은 지형 및 기후 등의 사전정보 철저 숙지를 베이스로 한 정석 응용이였던 범생 스타일. 그의 임기응변 부족론에는 반론도 있었는데, 사실 유비를 처음 섬기는 순간부터 오장원에서 숨 거둘 때까지 그는 남만정벌같은 일부를 제하면 대부분 조조~위를 상대하며 늘 열악한 자원과 인력으로 압도적인 적을 맞이했고.... 그가 이끄는 것은 유비세력 & 촉의 거의 전부였기에, 성공하면 대박이지만 실패시의 리스크가 큰 기책을 선뜻 쓰기는 무리였다는 반론이 그것. 정치적인 치적은 소설에는 잘 안나오는데, 그는 촉의 경제발전 및 과학기술 개발과 심지어 사법제도 개편 및 군의 현대화 등 여러 분야의 내정에서 눈부신 업적들을 이뤄냈다. 당시 서천지방의 대표적 특산물은 "비단"이였는데 이 비단의 생산량과 퀄리티를 높이고자 다양한 개량을 시도했고, 이 비단사업의 대성공 덕에 촉한의 비단재벌들은 중원의 어지간한 부호들 싸닥션을 날릴 수준의 부를 축적했다고 한다. 농지개간과 경작법도 많이 손봤고 천연가스 시추에 성공했으며, 내륙이라 소금이 금값이던 그때에 암염이라는 바위에서 소금을 추출하는 방법도 개발, 놀라운 건 당시로는 의심만 받아도 목이 날아가고 삼족 멸하는건 우습던 위나 오와 달리 전문 수사관 시스템을 도입하여 증거와 증인심문 등 통한 체계적 수사시스템을 구축했던 것도 제갈량이였다. "인간" 제갈량은 친절하고 예의바른 성격이였고, 상당히 도덕적이였으며 청렴했음은 물론, 매사에 꼼꼼을 넘어 깐깐한 완벽주의자로 자신이 직접 일을 처리하지 않으면 안심 못 하는 스타일로서... 지금으로치면 국무총리, 국방부장관, 비서실장, 외교부장관, 행정부장관, 산업경제부장관, 감사원장, 국정원장, 경찰청장, 대법원장, 검찰총장을 합친 것보다 많고 다양한 업무들을 일일히 서류 뒤적이며 직접 처리했다. 이런 사람이 부하라면 더할 나위 없지만 직위가 황제 바로 아래인 일인지하 만인지상인 승상이였기에 이런 사람이 상관이면 아랫것들 여럿 죽어나가는거 일도 아니였다... 제갈량 본인도 끝내 과로사했지만, 위, 촉, 오 통틀어 촉의 고위관료 과로사 비율이 가장 높은건 결코 우연이 아니였다. 참고로 그는 유비 사후 그냥 승상이 아닌, 황태자와 동급에 왕보다 높은 "상국"의 지위였으며, 그의 사후 승상직 자체가 영구 결석 처리되어... 촉한 역사상 유일한 승상이였다. 어벙띠리하기 그지 없던 유선도, 부친 유비의 유조도 있었고 제갈량의 영향력과 충심이 워낙에 굉장했던터라 제갈량을 부친처럼 대했고 꼬박꼬박 경어를 썼으며 제갈량의 말에 전적으로 동의 및 토를 달지 않았다고 한다. 거의 입헌군주제 수준이였으며, 오너는 따로 있으나 전반적 경영은 제갈량이 일임하는 전문 경연인체제의 C.E.O.나 다름 없었다. 지금까지만 보면 퍼펙트같은 제갈량의 단점은 사람 보는 "안목"이 그닥이였다는거다... 촉에서 사람 잘 보는 분야의 최고수는 "유비"였는데, 이에 반해 제갈량은 그 뛰어난 여러 분야에도 불구.. 사람 보는 안목은 별로였다. 그가 발탁한 이들의 대표적인 케이스를 보자면.. 장완 - 결과적으로 훌륭했으나 대체로 직무태만인 스타일로서 제갈량이 뒤봐주지 않았다면 유비에게 밉보인 그로서는 진즉 Fired... 마속 - "읍참마속"이란 고사를 만들어 낸 대표적인 실패작으로서 전투경험 전무에 글로 전투 배우고 나대다 끝내.....-_-;; 이엄 - 제갈량이 평하길, "육손에 견줄만 하다!"라고 하였으나, 결과적으로 육손 근처도 못 감. 양의 - 업무능력에 대해 제갈량이 치켜세웠으나 인성 쓰레기에, 제갈량 사후 위연과의 불화로 위연의 사망을 초래. 위연 - 제갈량이 발탁하진 않았으나, 유비는 잘만 활용한 최고의 맹장이건만 제갈량은 내내 겐세이만 줬고 결국 위연과 양의의 불화의 단초를 제공하는 계기를 줌. 강유 - 능력과 인성은 좋았으나, 근자감에 휩싸여 끝없는 북벌시도로 촉한을 멸망으로 가는 특급열차에 태운 일등공신. 마량 & 비위 - 능력 자체는 대단들 했으나 단명. 오에서 마지막에 대장군 직위까지 오른 친형, "제갈근"과는 서로 모시는 주인이 달랐고 둘 다 각자의 소속집단의 중역이였기에 볼 일이 거의 없어 주로 편지를 주고 받았고 막상 만나도 비즈니스적인 이야기만 했다고 한다. 마흔 후반대에 들어 유일무이한 자식(제갈첨)을 하나 얻었고 꽤나 예뻐했는지, 제갈근에게 어린 첨의 자랑으로 가득 채운 편지를 보낸 기록이 있다. 위, 촉, 오는 모두 이민족(그들 기준 오랑캐) 문제가 난제였는데 무력으로 굴복 시키거나 축출 일변도였던 위나 오에 비해 제갈량의 남만정벌은 비록 무력으로 제압은 했으나 이후 먼저 교섭 시도 후, 이민족들로 하여금 지금으로보면 "자치구"개념의 자율통치권을 인정하여 삼국 중 가장 성공적이고 모범적인 대이민족 대응법을 보여줬다. 고기를 그리 좋아하지 않았고, 맵고 짠 음식도 좋아하지 않았으며 편식이 좀 있었던거 같다. 그리고 식사도 정해진 때에, 정해진 장소에서 먹기 보다 대강대강 챙겨서 이런저런 일들을 보며 아무곳에서나 먹었다고 한다.(가정교육이...ㅋ) 이건 정확한 건 아니지만, 무릎이나 고관절 쪽이 좋지 않아서 장년 이후 휠체어 비슷한 작은 의자형 수레를 타고 다녔다는 설이 있다. 적벽대전 앞두고 오에 가서 그곳의 재사들의 다구리를 말발로 역관광 시킨 이야기는 허구다. 짚단을 실은 배를 타고 노숙과 함께 조조군 진영으로 가서 화살 10만 개를 슈킹해온 일화도 허구다. 과로사는 분명해 보이지만, 정확한 사인으로는 "폐결핵"설과 "위암"설이 팽팽하다. 워낙 불규칙한 식습관과 수면부족 및 극도의 스트레스, 과로 등 암 발병에는 최적이긴 했다. 첫 칼럼인데, 두서도 없거니와 일단 너무 양 많고 내가 봐도 지루하다.... 그래도 뭐 읽을 사람들은 읽겠지 T-T 피드백 괜찮으면 앞으로도 여러 인물들과 사건들에 대해 위와 같은 방식으로 대중적이지 않은 스토리 위주로 갈 예정. 삼국지 관련 궁금증에 대한 질문이나 다뤄줬으면 하는 인물이나 사건에 대한 신청도 받음.
하후돈 원양 (夏侯惇 元讓) A.D.? ~ 220
이 칼럼에서 앞서 다뤄진 인물들은 거의 대부분, 나아가 삼국지연의에서 등장한 인물들이 대부분, 본래의 생애와 인물됨이 평가절하 내지는 너프를 잔뜩 받거나 또는 버프를 이빠시 받은데 비해... 버프or너프를 떠나 그 실제와 소설 속의 이미지 차이가 확연한 대표적인 사례 중 하나가 오늘의 주인공인 "하후돈"이다. 오늘날 중국 안휘성 보저우시인 "패국 초현" 출신이며 조조와 동향이고 여기는 당시 서주의 소패 인근인데, 그때의 이 곳은 전한의 수도였던 장안과 후한의 수도인 낙양, 그리고 업과 허창과 함께 후한의 5대 도시 중의 하나인 꽤나 잘 나가는 동네였다. 도시남자 하후돈은 어려서부터 터프가이의 싹수를 뽐내며 자란 대개의 무장들과 다르게 어린시절부터 학문을 배우던 나름 곱상한 유년~청소년기를 보냈고 대체로 학당에 나가 공부하고 교육받던 당시의 학생들과 달리 집으로 스승을 모셔 배우는 '과외'를 받았다는 사실을 보면 은근 좀 사는 집 아들이였던거 같다. 하기사, 파탄에 가까운 후한 말의 배곯는게 일상인 여느 백성들에게 교육이 사치였던 시절, 공부를 했다는 자체가 중산층 이상은 되었다는 반증.(올~~) 그러던 돈이가 14세 때.... 어떤 이가 그의 스승을 하후돈 앞에서 모욕하자, 그 자리에서 패죽였다는 기록을 보건데 단순 중2병을 넘어 이미 그 나이 때부터 완력도, 의기도 남달랐던 슈퍼청소년이였던거 같다. 지금 만약 어떤 중학생이 누가 지네 담임 흉본다고 그 사람을 때려 죽이면 바로 소년원이지만, 당시에는 그런 하후돈이 강직하다며 사람들이 그의 의로움을 칭찬한걸 보면..... 진짜 후한 말 중국이 개판은 개판이였던 모양.ㅋ 어릴 때부터 조조를 쫄래쫄래 따라다니며 체구가 작고 근력도 그냥저냥이던 조조의 주먹 노릇을 했던 하후돈은 그 시절부터 죽는 순간까지도 조조가 거느렸던 숱한 인물들 중 가장 드높은 충성을 바친 맹목적인 조조빠였고 조조 역시 자기 휘하의 문무에서 날고 기던 무수한 쫄자들 중 하후돈을 가장 아꼈기에 그런 하후돈은 그래서인지 항상 본인의 능력 이상의 직위와 직책을 맡았었다. 연의에서는 물불 안가리고 무예와 용맹이 대단하여 조조세력의 초창기, 전투에 앞장서는 맹장으로 그려지나 사료에는 그의 군공이 거의 없다시피 하다. 심지어 여포가 활개치던 시절에는 조조와 여포의 전투에서 여포군의 사항계에 속아 인질로 잡히는 수모까지 겪었는데, 하후돈을 득템하여 몸값을 요구하던 적들에게 당시 조조휘하의 '한호'라는 하후돈의 부장이 협상 그런거 없이 인질범들을 그대로 공격했고 하후돈은 그 혼란을 틈타 탈출하여 간신히 목숨을 부지했다ㅋㅋㅋ 물론, 한호 입장에서는 인질극에 휘둘리다 군세가 꺾이고 군법이 문란해져서는 안된다는 판단에서 그랬고 후에 조조 또한 한호를 매우 치하하는 한편, 이를 계기로 앞으로 그 어떤 인질극에서도 절대 상대와 타협없이 인질의 생존과 구출여부 떠나 공격하라는 메뉴얼을 정했다는... (하후돈 지못미;;;) 하후돈은 이 당시 여포와의 전투에서 인질로 잡히는 것도 모자라, 화살에 왼쪽 눈을 다쳐 애꾸눈이 되며 "장애인"이 되는 오지게 재수 잡치는 일까지 당하고 만다는.... T-T 우리가 알고 있는 애꾸간지폭발의 하후돈은 바로 이 때부터라고 할 수 있고, 삼국지연의에서는 적장이 쏜 화살에 왼눈을 직격 당하자 화살을 뽑아, 딸려 나오는 안구를 씹어 먹으며 "이 눈은 아버지의 정(精)과 어머니의 피로 이루어진 것인데 어찌 함부로 다룰 수 있겠느냐" 라고 외치고는 그대로 말달려 자기 눈에 활을 쏜 고순의 부장인 조성을 한 창에 꿰어 죽이는 그야말로 개간지의 카리스마를 뿜는 장면이 나오지만.... . 이건 진정 개소리 of the 개소리가 아닐 수 없고 하후돈이 받은 역대 최고최강의 버프라 할 수 있다. 실제로는 전투 중 누가 어디에서 쏜지도 알 길 없는 난전이 어딘가에 맞고 원바운드 되어 눈으로 튀었거나 또는 아슬아슬히 눈가를 스쳤거나 해서 다쳐 그리 된 것. 실제로는 눈에 화살을 맞으면 거의 즉사하거나 쌔뻑좋게 살아도 어마무시한 통증과 출혈에 의한 쇼크로 그대로 의식을 잃는다.... 아무튼 저무튼간에, 하후돈은 이렇게 한쪽 눈의 시력을 잃고 요즘 기준으로 시각장애 6급에 해당하는 "단안실명 시각장애인"이 된다. 참고로 단안실명은 시각장애 중 유일하게 운전면허를 취득할 수 있다고...ㅋㅋ 애꾸관련 이야기를 더해 보자면, 일단 한 눈이 저리되면 당장 원근감과 남은 눈의 시력도 크게 떨어지며 일상에서 남은 눈의 피로도 쉽게 온다. 저 당시의 전투는 거의 대개 칼과 창이 맞붙는 백병전! 사지 멀쩡해도 사소한 삑사리 한 번에 죽거나 병신이 되기 십상인 와중에 시야각이 크게 제한되는 애꾸는 엄청난 핸디캡이 아닐 수 없다. 설령 하후돈이 진짜 혼자 무쌍난무를 찍는 무력깡패라 할지라도 저 시점부터는 전투력이 급감했을 것이며, 실제로 하후돈은 저 시점부터 전투의 전면에 나서는 지휘관보다 주로 후방지원이나 방어전에 투입되었다. 각종 미디어에서는 닉 퓨리처럼 검은 안대를 차고 나와 궁예간지를 자랑하지만, 역사기록에는 안대착용에 관련된 언급이 없기에 아마 그냥 드러내고 다녔을걸로 추측한다. 하후돈이 삼국지연의나 그 후의 여러 매체들에서 맹장으로 묘사되는 이유도 "외눈"에서 오는 어딘가 모를ㅎ 오히려 강하고 거칠어 보이는 이미지에서 착안된 것. 동서양 막론, 예나 지금이나 외눈 + 검은안대는 강력한 악당보스의 뉘앙스를 갖고 있어서 지금도 영화나 만화보면 외눈들은 약국이나 안과에서 주는 하얀안대가 아닌 어디서 샀는지 꼭 검은안대를 했고 그 대상들은 해적선장, 빌런, 주인공의 동료라도 나중에 배신 때리거나 또는 악당이였다 어떤 계기로 주인공 일행되는 놈들이 많다. (하긴, 같은 애꾸라도 하얀안대 끼면 바로 환자이미지) 애꾸 이야기가 길어졌는데, 어쩔 수 없는 게..ㅋ "애꾸눈"이미지는 정사나 연의나 솔직히 별반 그리 눈에 띄는 업적이 없음에도 하후돈이 조조측의 빼놓을 수 없는 장수 중 하나로 각인되는데 크나큰 기여를 했기 때문이고.. 당시에야 빡치고 우울했을 하후돈 본인이겠지만 눈 하나를 내준 덕에 거의 2,000년 가까이 지난 현세에서도 하후돈을 조조측의 메이커 장수가 되게 해줬으니 너무 억울해 할 건 없지 않나 싶은ㅎㅎㅎ 훗날, 후한 최고의 아가리파이터이자, 모두까기 인형으로 유명한 "예형"이 하후돈을 "완체장군(完體將軍)"이라고 깠는데, 저 말 뜻 그대로는 완벽한 육체를 지녔다는.. 이는 애꾸인 하후돈을 비꼬아 놀리는 말이다. 혹자는 비쥬얼이 좋았던 하후돈을 허우대만 멀쩡하다며 놀리는 한편, 나름 외모는 인정한다는 말이였다고도 하는데, 사료의 원문과 예형의 스타일 및 당시 분위기를 고려 시... 그냥 비꼬고 놀린 것 이상의 의미는 없다. 위에서 살짝 언급되었지만, 당시 기준에 하후돈은 용모가 꽤 먹어주던 모양인지 외모의 훈훈함, 멋짐을 짧막하게나마 언급된 자료들이 있다. 성격도 대단히 좋은 양반이였던 걸로 전해진다. 조조따라 거병 후, 줄곧 조조진영에서 고위직을 맡았고 훗날 무관직의 정점인 대장군에 올랐음에도 생애동안 청렴하고 검소하여 물욕을 부리지 않았고 간혹 어쩌다 포상을 받아도 자신의 부장들과 병사들에게 배분 해줬으며, 애꾸가 된 다음 하후돈이 지나가면 종종 병사들이 "맹하후(盲夏侯/장님하후돈이란 뜻)"라며 수군대고 놀려도 앞에서는 모른체하고 막사에 들어가 혼자 분풀이를 했다고 한다. 부장들이나 간혹 병사들과도 가벼운 농담을 주고 받고 웃으며 떠들기도 하여 병사들에게는 위엄 서린 어려운 지휘관이라기보다 친근한 형님 타입이였고 한중정벌 당시 소수의 병력만 이끌고 순찰 중 예상 못한 코스에서 장로의 병사들과 마주해 난전을 벌이던 생사위기에 처했을 때, 부장 하나가 "장군! 에워싼 적병의 수를 헤아릴 수가 없습니다!" 라고 다급히 외치자, "다행히 내 눈에는 적병이 반만 보이니 괜찮네!"라며 위기상황에서도 농을 치는 헐리우드 액션 스타일 조크도 날릴 줄 아는 나이스가이였다. 장수들에게는 군법을 엄정히 적용했으나 일반 병사들에게는 비교적 널럴히 대하여 큰 중죄가 아니라면 되도록 너그럽게 봐주는 편이라 누가 조조에게 소원수리라도 긁었는지, 조조에게 불려가 군기강 해이유발 관련으로 지적을 받은 일도 있다. 군중에도 학자를 초빙해와 가르침을 받을만큼 학구열도 대단했고, 그래서인지.. 단지 야전임무뿐 아니라 다양한 군사관련 행정처리도 탁월했다고 한다. 토목에도 소질이 있는지, 진류태수 시절에는 가뭄이 들자 병사들 동원해 저수지를 만들었고 그때 본인도 같이 작업복을 입고 흙을 짊어 날랐다. 위에 나열된 사례들을 보면 알겠지만, 병사들과 가까움 + 후방보급임무 위주 + 군무행정탁월 + 공사에 능함 이런 특징들이 어우러져, 삼국지 좀 아시는 분들 사이에서 불려지는 하후돈의 별명 중 하나인 "행보관" 타이틀이 생겨난 것. 실제로 군사적 업적이 거의 없음에도 조조가 그를 여러 기라성같은 명장, 맹장들의 윗자리에 앉혔던 것도 조조 역시 충성심이 드높고 관리력이 준수하며 훌륭한 인품으로 후배장수와 병사들을 아우르는 큰 형님 역할을 기대했기 때문이였다. 그리고 또 그게 다행히 하후돈의 적성에도 맞았다. 조조 휘하의 장수들은 출신을 떠나 거의 대부분 하후돈을 잘 따르는 편이였고 전형적 무장임에도 책사들과도 곧잘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며 편하게 지냈던 걸로 보여진다. 서황과 장료가 조조휘하로 들어왔을 때 다른 기존 장수들에게 그들을 인사시키며 빠른 적응을 도운 것도 그였고 장합과 고람이 원소측에서 투항했을 때도 관도대전 마친 후 환영한다며 잘 해보자는 서신을 보낸 것도 그였다. 대체적인 이미지처럼 맹장은 비록 아니였으나 무장임에도 뛰어난 보급과 행정능력 및 부하나 후배들을 잘 아우름과 동시에 변함없는 조조를 향한 충성과 겸손, 청렴을 갖춘 듬직한 하후돈을 조조는 매우 아껴, 무슨 일이 있건 좋은일의 포상에서는 항상 하후돈을 챙겼고 수시로 그에게 필요한건 없는지 살폈으며 하후돈이 눈을 다쳤을 때, 하루동안 잠도 안자고 하후돈 곁을 지켰으며 하루에 세 번씩 하후돈의 부상상태에 대한 보고를 받았다고 한다. 경우에 따라 부득불 하후돈을 꾸짖은 후에도 몰래 하후돈에게 사람을 시켜 선물이나 술, 고기 등을 보내 하후돈을 뒤로 달랬고 공식석상에서는 직위로 부르며 군신의 예로 대했어도 사석에서는 조조가 이름을 부르며 격의없이 대한 몇 안되는 인물이였다. 그런 아낌을 받아서인지.... 조조의 죽음이 임박한 무렵 크게 상심하여 본인도 병을 얻어 앓기 시작하다, 끝내 조조가 사망하자 슬픔 속에 지내다 결국 병상에 누웠고 조조 사후 즉위한 조비가 그를 위로하고 그간의 공로를 기려 대장군에 봉했지만 이미 병이 깊어 골골대던 하후돈은 대장군 임명 후 몇 달 뒤 사망한다. 완력에서는 허저나 전위에 비할 바 아니였다. 무예가 뛰어나 장료나 하후연처럼 전술적 활용도가 뛰어난 것도 아니였다. 장합이나 서황같이 우수한 지휘관도 아니였다. 후방에서 서포트를 잘했다한들, 행정처리가 탁월했다한들, 무수한 조조 아래의 먼치킨 문관들에 비하면 부족했다. 뭐 하나 유별난 게 없이 이도저도 아니라 할 수도 있는 그였지만 주군에 대한 깊은 충정, 부장들은 물론, 당시로서는 소모품으로 여겨지던 병사들에 대한 너그러움과 관대함 그리고 고위직임에도 늘 청빈했던 참공직자의 자질이 충분했던 그였기에 자신보다 뛰어난 숱한 이들을 제치고 철저한 능력지상주의자였던 조조의 총애를 받은 그의 행보는 그 시대는 물론, 지금도 귀감이 된다. 장애를 딛고 오로지 성실함과 인성으로 대장군이 된 하후돈의 성공스토리가 부디 여러분들에게도 시사하는 바가 크기를 바라며 지금껏 다음 칼럼까지 세월아~ 네월아~ 하며 연재하던 것을 이번은 무리해서 바짝 당겨 연재해봤다는.....ㅎㅎㅎ . 나라 망친 아줌마 투톱의 뿌리가 뽑힌 기념비적인 현시국의 첫 주말을 부디 다들 즐겁고 알차게 보내시길!
장합 준애 (張郃 儁乂) A.D.?~231
누차 말했듯... 픽션(허구)이 가미된 "소설"인 삼국지연의는 여러 인물들을 영웅으로 만들기도 했지만, 반면 그네들의 영웅화 ~ 신격화를 위해 숱한 이들을 엿 먹이기도 했음을 부정할 수 없다. 오늘도 역사범죄자 나관중에 의해 너프 당한 또 한 명의 피해자, "장합"에 대해 다뤄 보기로..! 장합은 삼국지정사, 위의 역사록인 위지, 후한의 역사록인 후한서, 본인의 열전인 위서의 "장악우장서전(張樂于張徐傳)"에도 생년기록이 없어서 정확한 사망 당시의 연령을 알 수는 없지만 원소에게서 조조 휘하로 들어갈 당시 대략... 40대쯤으로 추정하고 있다. 덧붙이자면 저 '장악우장서전'은 조조가 자신이 공을 이루는데 그 기여가 으뜸이라며 추켜세운 다섯 장수인, 장료, 악진, 우금, 장합, 서황을 묶어 편찬된 열전이다. 저 다섯을 일컬어 당시에 "오자양장(五子良将)"이라 불렀고, 촉한의 "오호대장군(五虎大將軍)"과 살짝 비슷한 뉘앙스인데, 오호대장군이란 별칭은 그 때는 없었고 후대 사람들이 붙인데 비해 저 오자양장은 당시 사람들이 붙인 것이다. 그래서 엄밀히 말해, 오호대장군같은 저 시절의 '드림팀' 또는 '어벤져스' 느낌의 패키징은 위의 다섯 장수가 원조다. 고향은 당시로는 기주의 하간군 막현(오늘날 중국 허베이성 중남부 인근)이라는 그때 치고도 꽤나 궁한 시골 작은 마을 출신이였다. 참고로 진짜 중국이 겁나 드넓긴 드넓은게... 삼국지 게임 내의 맵에서 기주는 작은 주로 나오나, 조운의 고향인 기주 상산군과 장합의 고향인 기주 하간군의 거리는 무려 166km고, 이 거리는 서울에서 대전까지의 거리보다 멀다..ㅎㄷㄷ 만화, 게임, 책, 기타 여러 미디어물들을 봐도 다른 네임드급 인물들과는 달리, 외형 이미지가 일관적이지 못한 편인데... 이는 사료 어디에도 장합의 외모 묘사가 일언반구도 없고 그를 그린 그림조차 몇 없는데다, 그것들 마저 묘사가 모두 중구난방이다보니 도무지 이미지 통일이 안된 것. 다만, 장합의 리즈시절이 펼쳐지는 것이 조조에게 투항 이후인데 그 당시의 추정 연령이 위의 언급처럼 40대로 보고, 조조세력 합류 후부터도 거의 30년 가까운 세월을 활약하다 전장에서 전사한만큼, 사실상 각종 미디어에서 묘사되는 '젊은'느낌의 장수로 표현하는 것은 어색한 감이 없지 않다. 장합은 조조 휘하 장수들 중 가장 많은 전장에 참전했고, 위의 역사를 통틀어도 가장 전공이 많은 장수였으며, 주/부장을 가리지 않고 크고 작은 여러 숱한 전투에서 닳고 닳은 백전노장이였다. 그러다보니 큰 전장의 주요한 임무는 물론, 작은 전장의 자잘한 임무까지 가림없이 두루 맡았고 야구로 치면 4~5선발과 롱릴리프, 경우에 따라 급하면 불펜으로까지 던지면서 하루 걸러 등판하며 혹사 당하는 노예투수 비슷한 포지션의 장수였다. 그 깐깐한 조조가, 또 당시 휘하에 숱한 명장, 용장, 맹장들이 수두룩 빽빽 채이고 밟히고 널렸던 위에서 저토록이나 빈번히 굴렸다는건 그만큼 능력 있기에 믿고 쓸만큼 훌륭한 장수였다는 증거다. 심지어 백발노인 되어 집에서 손주들 재롱이나 보고 탑골공원가서 장기두며 야쿠르트나 얻어 마실 나이에 전장에서 한창 싸우다 전사하니... 죽어 눈감는 그 순간까지 위의 군밀레에 갈려나간 군돌이였다. 삼국지연의나, 연의를 바탕으로 데이터베이스를 구축한 각종 미디어물들을 보면 장합은 그냥 본인의 무예와 전장에서 구르며 익힌 짬밥으로 밀어붙이는 단순한 장수로 그려지나... 위에서 언급하듯, 저렇게 숱한 전장을 누볐고 또 깐깐깐돌 조조에게 신임받으며 주장으로도 쓰인만큼 사실 전략적 대국안도 상당히 뛰어난 "지략을 갖춘" 장수였다. 본래 기주의 군소 군주인 한복 휘하에 있다가 한복이 패망하자 원소의 세력에 속하게 되는데 이때부터 전장의 시국을 살핀 후 원소나 원소의 책사들에게 여러 전략들을 입안 했으나 거의 다 씹혔다.... 원소는 사람 자체가 선입견, 편견 이런 게 가득한 고지식하고 융통성 없는데다 또 고집은 있는 전형적 꼰대인 우리 회사 김대현 이사님같은 스타일이라 그저 야전에서 뒹구는 장수인 장합의 계책을 귀 담아 들어주질 않았고, 사공이 많으면 배가 산 정상에 올라 야호를 외치는 전형적 예였던 당시 원소의 책사들 역시, 지들끼리도 서로 내가 옳네, 내가 맞네 하기도 바빠 죽겠는데 장합까지 거기 껴서 자기 의견을 제출하니 고스란히 즈려밟아 무시했다. 이렇듯, 자기 아이디어와 의견이 매번 밟히던 끝에, 원소 VS 조조의 관도대전에서도 자기가 낸 계책이 원소의 책사 중 한 명인 곽도에게 씹혔고... 그 전투에서 결국 패하며 장합이 옳았음이 드러나자 곽도가 원소에게 장합을 모함하였으며, 이에 겁 먹은 장합은 결국 원소군 내에서 베프면서 역시 원소의 아쉬운 대우에 불만가득하던 '고람'과 함께 원소군의 망루에 불을 지르고 투항한다. 역사기록에는 이 "방화 후 이적"이 관도대전에서 원소의 패배 전인지, 후인지가 안나와 있으나 어쨌건 장합과 고람이 불 싸지른 망루는 당시로는 적군의 동태를 살피는 '레이더'역할을 하는 중요한 군사시설이였기에 이를 없앤 것 자체는 어쨌건 원소군에게 치명적이긴 했다. 삼국 정립 이후에는 주로 대촉전선에 투입되었고 이유는 조조가 양쯔강을 끼고 있던데다 북진의사가 거의 없는 손권에 비해, 명목상 "한실부흥" 내세워 줄기차게 자신들에 덤벼 오는 유비세력을 훨씬 더 위협적으로 여겼기 때문. 그때 손권과 대립하는 동부전선은 장료와 악진으로 묶어 두고 가용 가능한 네임드 장수들은 대부분 대촉전선에 투입되던 시기였다. 장합은 유비도, 유비 사후의 제갈량도 상당히 껄끄러워 하던 장수였다. 대촉전선의 총사령관 역할을 하던 하후연과 조홍보다 장합의 위치는 아래였으나 이는 위에서의 커리어, 또 하후, 조 두 장수는 조조와의 친인척 관계인지라 그럴 뿐... 장수로서의 자질은 저 둘을 뛰어넘던 장합이였으며 그래서인지 조홍과 하후연은 장합을 꽤나 견제했다. 아무리 자신들의 커리어가 앞서고 조조와 혈족이긴 하다지만 철저히 능력 위주로 사람을 쓰던 조조는 언제던 장합이 더 유능하다 드러나면 속절없이 자기들보다 장합이 더 상전될 가능성이 농후했기 때문... 제갈량의 1차 북벌 당시, 이를 막아낸 위방어군의 총사령관은 연의와 달리 사마의가 아닌 장합이였고, 4차 북벌 때, 목문도에서 유인책 쓰며 거짓 후퇴하는 촉군을 사마의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뒤쫓자며 바득바득 우기고 쫓아가다 기어이 전사하는 연의와 역시 또 달리... 당시 제갈량의 흉계가 의심된다며 추격을 만류하던건 오히려 장합이요, 이에 대해 군령까지 내세워 제갈량을 추격할 것을 밀어붙여 장합을 사지로 내몬게 사마의였다. 이에 대해서도 또 제기되는 설이.... 당시 장합과 사마의는 위의 대촉전선에서 은연중에 경쟁관계였었다. 쟁쟁한 커리어의 백전노장 장합, 그리고 위 군부 신진세력의 주축이던 사마의는 서로 견제하던 관계였으며 당시 직급상 사마의가 높았지만 그렇다해도 사마의에게 장합은 결코 직위로 쉽게 누를 수 있는 상대가 아니였고.... 그런 장합을 이이제이 방식으로 간접 제거 하고자 제갈량의 계책을 눈치채고도 등 떠밀었다는 설이다. 연의에서의 묘사처럼 빗발치는 화살에 벌집이 되어 바로 죽기보다 화살을 여기저기 맞고 후퇴하던 중 과다출혈에 의한 쇼크사였다. 기록에는 허벅지에 맞은 화살로 인한 과다출혈이 결정적 사인이라 나와 있다. 참고로 허벅지는 대동맥을 비롯 여러 혈관 뭉치들이 지나는 곳이라 흉기에 잘못 찔리면 지혈도 힘들만큼 과다출혈이 발생하여, 옛날 야쿠자나 조폭들도 서로 칼부림 당시 오히려 방어하기 좋아 찌르기 여의치 않은 복부나 흉부보다 허벅지를 많이 노렸다고 한다. 동물을 좋아했는지, 직접 먹이를 주며 키우던 개가 있었다는 설이 있고 자신이 타던 말이 힘들까봐 행군하는 경우에는 중간중간 말에서 내려 걷기도 했다는 이야기가 있다.(사료기록은 아니다.) 원소 휘하에서는 고람과만 거의 이야기를 나눴으나 조조에게 투항 후 각기 다른 부대에 배치되며 연이 끊어진 듯... 여러 장수들과 열전이 묶음으로 나온 것만 봐도 알 수 있듯, 신상과 일상에 대한 기록이 그닥 없다. 쉽게 말해 위의 장수로서의 공적인 기록은 좀 있지만 인간 장합으로서의 사적인 기록이 많지 않다.. 장합이 커리어나 능력에 비해 그닥 인기 많은 인물은 아니다보니 왠지 이번편은 반응이 별로일거 같은 좀 불길한 예감이... T-T 그래도 많은 관심과 격려를 부탁 드린다는 ;;;
헷갈리는 브랜드...일본 켄우드와 영국 켄우드
일본 KENWOOD 철자 W에 작은 붉은 역삼각형 영국 KENWOOD 철자 K의 사선 부분이 빨간색 과거 일본의 오디오 시장엔 ‘산・트리・파이’(サン・トリ・パイ)라는 말이 있었다. 앰프는 ‘산스이전기’(山水電気), 튜너는 ‘트리오’(トリオ), 스피커는 ‘파이오니아’(パイオニア) 제품이 최고였던 것이다. 이중 현재까지 건재한 회사는 트리오뿐이다. 이 회사의 브랜드 네임 변천 과정을 살펴봤다. 1947년 나가노현에서 카스가지로(春日二郎) 형제 등 3명이 가족 이름을 따 ‘춘일무선상회’(春日無線商会)라는 코일제조업체를 설립했다. 1950년 춘일무선공업(春日無線工業)으로 이름을 바꾸더니 10년 뒤인 1960년엔 창업자가 3명이라는 뜻을 담아 트리오(トリオ)로 다시 변경했다. 하지만 1972년 형제 둘이 떨어져 나가면서 회사는 반쪽이 되버렸다. 이후 1960~1970년대, 오디오 산업은 비디오의 보급에 밀려 불황 업종으로 전락했다. 트리오 역시 경영에 어려움을 겪었다. 경영재건을 위해 일본은행 이사 출신인 이시자카 카즈요시(石坂一義:1921~2011)가 트리오의 사장에 취임한 건 1980년이다. 그가 오기 전 트리오는 국내용엔 TRIO, 수출용엔 켄우드(KENWOOD)라는 각기 다른 브랜드 명을 사용하고 있었다. 이시자카 사장은 1986년 사업 효율화를 위해 켄우드로 CI를 통합하고 회사 이름도 동일하게 바꿨다. 이는 기업들이 CI 전략의 중요성을 깨닫는 계기가 되었다고 한다. 이후 켄우드는 몸집을 더 키웠다. 2008년 일본빅터(JVC: Japan Victor Company)와 경영통합을 하면서다. 회사는 두 회사의 이름을 각각 합쳐 JVC켄우드(이하 켄우드)는 새로운 이름을 얻었다. 현재 켄우드는 자동차 내비게이션과 카오디오 등 자동차 부문이 주력이며, 매상의 50% 이상이 여기서 창출된다. 켄우드의 브랜드네임과 관련해 흥미로운 사실이 하나 있다. 영어판 위키피디아에서 켄우드(KENWOOD)를 검색하면 “영국 주방가전업체 켄우드 리미티드와 혼동하지 마세요(Not to be confused with the UK-based manufacturer of kitchen appliances, Kenwood Limited)라는 글이 나온다. 영국에도 켄우드라는 회사가 있다는 얘기다. 주방가전 제품의 대명사로 통하는 영국의 캔우드는 1947년 케네스 우드(Kenneth Wood:1916~1997)라는 사람이 만든 회사다. 창업자의 이름을 회사명으로 한 것이다. 케네스 우드는 회사 설립 당시, 기존의 전기토스터를 새롭게 디자인해 빵의 양면을 구울 수 있는 방법을 고안해 냈다고 한다. 현재 일본과 영국의 켄우드는 나란히 영어 대문자(KENWOOD)를 회사 CI로 사용하고 있다. 그럼, 소비자들은 두 브랜드를 어떻게 구분해야 할까? 식별법은 간단하다. 일본의 KENWOOD(글자 전체 블랙)는 철자 W위 에 작은 붉은 역삼각형이 그려져 있다. 반면 영국의 KENWOOD(글자 전체 블랙)의 경우, 철자 K의 사선 부분이 빨간색이다. <에디터 이재우> http://www.japanoll.com/news/articleView.html?idxno=481 저작권자 © 재팬올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출처 : 재팬올(http://www.japanoll.com)
눈이 호강하는 영상미 쩌는 영화들
땀으로 쩔은;; 눈의 피로를 조금이나마 회복시켜드리고자 한 번 보면 절대로 잊지 못할, 아름다운 영상들이 가득한 영화들을 준비해보았어요. 영화 당 2개의 이미지로 준비 했으니 넘겨봐주는 센스! <그랜드 부다페스트 호텔 , 2014> 영화감독보다는 '완벽한 아티스트' 같으신, 언제나 믿고 보는 웨스 앤더슨 감독의 작품이에요. 자로 잰듯한 좌우 대칭구조는 이 영화에서도 잘 보여주고 있구요. 깨알같이 아기자기한 소품들, 빈티지하면서도 세련된 의상, 절묘하면서도 환상적인 색감 등은 그가 왜 아티스트로 불리는가를 여실 없이 증명해 보인답니다. <혐오스런 마츠코의 일생, 2006> 분명 주인공의 혐오스러운 삶과는 달리 배경의 밝고 선명한 색감과 분위기로 인해 영화의 주제가 더 가슴에 와 닿게 해주는 효과를 주었죠. 영화 중 거의 마지막 부분에 해당하는 이 장면 기억하시나요? (2번째 이미지) 별다른 설명 없이 이런 분위기만으로도 의도를 전달할 수 있다는 게 비주얼 영화의 매력이 아닐까요ㅎ <라이프 오브 파이, 2012> 이미 아카데미 감독상, 촬영상 및 4개 부문을 수상한 최고의 영화이지요. 이보다 더 아름답게 바다와 생물들을 보여줄 수 있을까... 싶을 정도로 판타스틱한 장면들이 가득하답니다. 소설을 영화화한다고 했을 때 과연 이 영화를 어떻게....라는 우려를 단번에 불식시켜준 이안 감독님의 센스와 내공에 감탄과 감동을! 3D로 보지 못한 게 오래도록 후회될 영화. <무드 인디고, 2013> 영상의 마술사, 손맛 나는 판타지로 유명한 미셸 공드리 감독의 작품이에요. 스토리가 전개되는 과정을 따라 영화의 색감도 함께 변화하는 방식을 취한 독특한 매력의 작품입니다. <싱글 맨, 2009> 킹스맨으로 유명한 콜린 퍼스가 주연을, 디자이너 톰 포드가 감독을 맡은 영화인데요. 사랑하는 사람을 잃은 남자의 처절한 하루를 그린 내용이지요. 전체적으로 남성적인 느낌의 클래식한 무드이면서도 섬세한 소품 배치로 아기자기한 느낌을 함께 주는 영화랍니다. 주인공의 시선에 따라 색채가 다양하게 변하는 것도 참 신선하더라구요. <그녀, 2013> 컴퓨터 OS와 사랑에 빠지는 설정의 영화로 (내 얘기 아님주의 ㅜㅜ) 스칼렛 요한슨의 매혹적인 목소리 연기가 큰 이슈가 되었었지요. 마치 인스타그램 필터를 입힌듯한 핑크 핑크하고 잔잔한 색감은 우울하고 차가운 현실과 대비되면서 더욱 강렬한 인상을 남겨줍니다. <미드나잇 인 파리, 2011> 파리의 주요 명소들을 보여주는 인트로와 그곳에서 숨 쉬었던 명사들을 다시금 만날 수 있게 해준 것만으로도 가치를 충분히 하는 영화이지요. 물론 OST도 꽤 좋았구요. 파리,라는 도시가 주는 매력을 가장 잘 담아낸 듯한 영화인지라 엔딩크레딧이 올라갈 때 쯤이면 꼭 저곳에 가보고 싶다는 마음이 들게 될거에요. <마담 프루스트의 비밀정원, 2013> 실어증을 앓는 피아니스트 주인공이 마담 프루스트가 제공하는 차와 마들렌을 먹으며 잊었던 기억들을 되찾아 가는 이야기입니다. 프랑스 영화 특유의 원색적인 색감과 분위기를 잘 표현했는데요. 특히 주인공이 프루스트 마담 집을 처음으로 찾아갔을 때의 그 몽환적인 느낌은 아직도 생생하네요. <제인 에어, 2011> 19세기의 고전적인 분위기를 영상에 제대로 담아낸 영화로 유명하지요. 유려한 색감이나 고고한 분위기가 마치 박물관에 걸려있는 한편의 유화 그림을 보는 것 같지 않나요? 다소 음침하고 우울한 원작의 내용을 표현하기 위해 영화 내내 절제된 느낌의 차가운 색채로 영상을 뽑아내었답니다. <윌터의 상상은 현실이 된다, 2013> 실제 유명한 사진 매거진인 '라이프'가 주인공의 직장인지라, 전 세계의 멋진 경관들을 많이 볼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꽤 눈이 호강하는 영화이지요. 여기 출몰하는 장소들만 따로 묶어서 포스팅하고 싶을 정도로 훌쩍 여행을 떠나고 싶게 만드는 영화에요.물론 영화 주제도 최고이구요! 꼭 보시길! 영상미 쩌는 영화들을 좀 모아보려 시작했는데, 팝콘 언니가 본 영화들만 추슬러도 수십/수백편이 될 듯한데요. 그 만큼 아름다운 영상의 영화들이 세상에 가득하다는 의미겠지요. 빙글러 분들이 잊지 못할 아름다운 영상으로 남아있는 영화와 장면들을 댓글로 남겨주시면 다른 분들과 함께 공유할 수 있을 것 같아요. ^.~
야후-라피-조조...손정의의 ‘소프트’한 투자
소프트뱅크의 야후, 의류 쇼핑몰 조조 인수 아마존닷컴-라쿠텐에 대항하려는 포석 차원 손정의, 3월 남미 배달서비스 10억 달러 투자 야후(야후재팬)가 일본 최대 의류전문 온라인 쇼핑몰 ‘조조타운’을 사들였다. 야후는 손정의 회장이 이끄는 소프트뱅크의 자회사다. 야후는 12일 “‘조조타운’을 운영하는 조조(ZOZO)를 자회사화 한다”고 발표했다. 야후는 주식공개매수(TOB)를 통해 조조 주식의 50.1%를 취득한다. 매입가는 4000억엔(4조 4400억원) 규모. 1998년 설립된 조조는 약 800만 명의 고객을 보유하고 있으며, 주로 20~30대 젊은 층 이용자가 많다. 조조 창업자이자 최대주주(주식 37.76% 보유)인 마에자와 유사쿠 (前沢友作) 사장은 이날 자리에서 물러났다. 마에자와는 2018년 9월 발표한 달여행 등 개인 활동에 전념할 것으로 보인다. (마에자와 전 사장이 누구인지 궁금하다면 아래 관련기사를 클릭해 보세요) ᐅ주목! 이 사람/ 일본 18번째 부자의 ‘고상한 취미’ http://www.japanoll.com/news/articleView.html?idxno=94 야후의 모회사인 소프트뱅크(23.1%)는 이동통신시장 점유율에서 NTT도코모(38.7%), KDDI(27.6%)에 뒤진다. 그런 소프트뱅크는 올해 6월 야후(야후재팬)를 자회사로 만들어 몸집을 더 키웠다. 야후의 조조 인수는 아마존닷컴과 라쿠텐에 대한 대항 차원이다. 일본 인터넷 쇼핑몰업계는 미국 아마존닷컴, 라쿠텐, 그리고 야후(재팬)가 3각 구도를 형성하고 있는데, 야후가 순위에서 제일 뒤진다. 니혼게이자이신문은 12일 “야후의 2019년 3월기 그룹 전체 전자상거래 취급액은 2조3000억 엔(25조5000억원)으로, 라쿠텐의 70% 정도에 그친다”며 “아마존은 규모를 발표하고 있지 않지만 야후를 웃돌고 있다”고 했다. 손정의 회장은 올해 ‘소프트’한 곳에 주로 매수, 투자하고 있다. 야후(상거래), 조조(의류쇼핑몰), 라피(Rappi) 등이 그 예다. Rappi는 2015년 콜롬비아에서 창업한 음식 배달(자전거 이용) 서비스 어플이다. 이미 콜롬비아뿐 아니라 멕시코, 브라질 등 중남미 전역으로 영역을 확대했다. (손정의 회장의 글로벌 투자처가 궁금하다면 아래 관련기사를 클릭해 보세요) ᐅ손정의 투자 회사를 보면 미래가 보인다 http://www.japanoll.com/news/articleView.html?idxno=67 올해 3월, 소프트뱅크는 라틴 아메리카 시장에 주목하면서 50억달러 규모의 ‘소프트 이노베이션 펀드’를 설립했는데, 그 첫 번째 투자처가 라피였다. 투자 금액은 10억 달러(11조 9400억원)에 달했다. <에디터 이재우> http://www.japanoll.com/news/articleView.html?idxno=478 저작권자 © 재팬올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출처 : 재팬올(http://www.japanoll.com)
캐논 디자인을 바꾼 루이지 콜라니 떠나다
일본 카메라 메이커 캐논 T90 디자인을 탄생시킨 독일 산업디자이너 루이지 콜라니 Canaon CB10 뭔가 부족했다. 1980년대 중반 일본 카메라 메이커 캐논의 T시리즈가 그랬다. 당시 T80은 미놀타α7000에 완패하면서 한심한 상황이 이어지고 있었다. 뭔가 획기적인 제품이 필요했다. 그런 절체절명의 순간에 등장한 것이 전문가용 수동카메라 T90이었다. 종전까지 캐논 카메라 디자인은 사내 작업을 통해 이뤄졌다. 하지만 1986년 탄생한 T90은 그렇지 않았다. 당시 캐논은 외부 인력으로는 처음으로 독일 산업디자이너 루이지 콜라니(Luigi Colani)와 콜라보를 했다. 콜라니의 독특한 곡선형 디자인을 제품에 접목시킨 것이다. 콜라니는 카메라 손잡이 부분을 둥글게 처리해 사용성과 기능의 조작성을 높였다. 이는 불룩한 손잡이가 달린 카메라의 원조가 되었다. T90은 견고하기도 했다. 사진기자들은 이런 T90을 ‘탱크’라고 불렀다. 이렇게 캐논의 디자인을 바꾼 남자 루이지 콜라니가 16일(현지시각) 향년 91세로 별세했다. 심한 질병 이외에는 자세한 사인은 알려지지 않았다. 콜라니는 평소 자연을 닮은 곡선을 즐겨 사용했다. 이런 콜라니의 방식을 ‘바이오디자인’이라고 부른다. 뾰족한 모서리를 싫어했던 콜라니는 “나의 디자인 세계는 둥글다”(My world is round)고 강조해 왔다. 그런 그는 2017년 12월 한국 동대문디자인플라자(DDP)에서 전시회 겸 간담회도 가졌다. 간담회 도중 돌연 자신을 촬영하던 사진기자를 불러 캐논 카메라를 뺏어들고는 “이게 콜라니 스타일”이라고 외치기도 했다. 자동차 디자이너로 경력을 시작한 콜라니는 산업 디자인으로 영역을 넓혔다. 지금까지 자동차, 항공기, 가구, 주방기구, 의류, 안경 등 4000여 점의 작품을 스케치로 남겼다. 콜라니는 생전 “자신의 서랍에 있던 작품 70%가 사라졌다”고 말하기도 했다. 콜라니의 별세를 전한 매체들은 캐논 디자인에 공헌한 점을 높이 평가했다. 독일 통신사 dpa는 “콜라니가 디자인한 캐논 T90 카메라는 가장 큰 성공 중 하나이며 일본 브랜드 디자인에 큰 영향을 미쳤다”(Colani’s design of the Canon T90 camera was one of his biggest successes and strongly influenced the Japanese brand’s designs)고 보도했다. 사진전문 매체 코스모포토는 SLR의 형태를 바꾼 디자이너(designer who changed the shape of the SLR)라는 제목의 기사에서 “1986년 나온 그의 Canon SLR 제품은 카메라 디자인 역사에서 가장 혁신적인 것 중 하나”라고 했다. 이 매체는 “T90의 매끈한 프레임은 다른 캐논 SLR과 EOS 디지털카메라에 영향을 미쳤다”며 “오늘날에도 여전히 팔리고 있다”고 덧붙였다. <에디터 이재우> http://www.japanoll.com/news/articleView.html?idxno=482 저작권자 © 재팬올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출처 : 재팬올(http://www.japanoll.com)
삼국지에 대한 이해도 높이기 2.
지난번에 이어, 오늘도 삼국지를 보다 쉽고 재미지게 접하는데 도움을 줄만한 팁들을 준비해 봤다. 삼국지를 아직 읽지 않았다면 더 깊게 이해할 수 있고 이미 읽어본 분들 역시 한결 넓게 바라볼 수 있게끔 삼국지에 대한 이해도 높이기 2 Start!! 1. 무기. 삼국지연의 속 장수들은 저마다의 무기들을 쓰고 이 무기들은 곧 그 유져의 캐릭터를 보여주는 분신의 역할을 하기도 하며, 정말 다양한 무기들이 등장한다. 관우의 청룡언월도, 장비의 장팔사모, 손견의 고정도, 전위의 쌍철극, 여포의 방천화극, 정보의 철등사모, 기령의 삼첨도, 서황의 개산대부, 황개의 철편, 유비의 자웅일대검 등등.. 열거하기 귀찮을만큼 많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이 숱한 무기들 중의 대다수는 당시에 실존하지 않았던 것들. 대표적인게 관우의 트레이드 마크인 "청룡언월도". 먼저, '도(刀)'는 한쪽만 날이 있는 칼, '검(劍)'은 양쪽 모두 날이 있는 칼을 뜻한다. '청룡도'는 너비가 넓은 도를 일컫는 말이며, '언월도'는 '월도'라고도 했는데 이는 긴 자루가 달린 도를 일컫는다. 고로, '청룡도 + 언월도 = 청룡언월도'라 함은 긴 자루 달린 청룡도를 말한다. 너비가 넓다보니 일정 수준 이상 부피가 있던 무기인 청룡언월도는 대체로 일반 도검들에 비해 중량이 좀 나가는 무기였고, 찌르기보다 베기용이긴 했다만.. 날카로움으로 벤다기 보다는 무게로 내리찍는 용도의 무기였다. 왜냐하면 당시의 제철수준으로 큰 월도를 날카롭게 제련하는 기술력의 한계가 있었고, 설령 내가 쓰는 질레트 마하3 면도기날처럼 어찌어찌 날카롭게 만들었다 한들... 몇 번만 쓰면 금새 날이 무뎌지기 마련. 게다가 날카로우려면 단면이 얇아야 하고 또 얇게 만들다보면 그만큼 가벼워지니 살상력이 떨어진다. 쉽게 말해, 청룡언월도에 맞으면 영화나 만화처럼 '뎅겅~'하고 썰리는게 아니라, 짓뭉개지며 박살이 나는건데, 심지어 연의에서의 묘사에 의하면 관우가 썼다는 청룡언월도의 무게는 무려 "82근"! 혹자는 한대의 한 근은 지금의 한 근보다 가벼워, 당시의 여든 두 근은 대략 18kg쯤이라고 하는데, 나관중이 명나라 사람이라 명대의 도량형으로 설명 했기에 청룡언월도의 무게는 48kg이 맞다. 그런데 생각해보면... 그 무기 + 그 무기 휘두를 덩치 + 갑옷 + 안장 + 마갑 = 어림잡아도 230kg을 넘어가는데 그럼 말은 도대체 무슨 죄인가? 더구나 아무리 장사여도 저 중량의 무기를 휘두르기 위해 마상균형을 잘 잡아야 하는데, 그 시대에는 말 타며 균형 잡고자 발을 거는 등자가 몹시 어설퍼, 제 기능 발현이 어렵던 시기였다. 일단 송나라 때에나 등장한 청룡언월도를 관우가 썼을 리 없고 정사기록에 "관우가 안량을 찌른 후 목을 베었다"라는 구절을 볼 때, 관우는 '삭'으로 불리는, 당시 기병의 보편적 주무장인 찌르기용 창을 썼다고 본다. 그리고 '여든 두 근'이란 표현도 실제 측량무게가 아닌 관우의 파워의 대단함을 묘사키 위한 나관중의 중국인 종특인 과장의 산물이다. 소설과 인물에 대한 몰입도를 높이기 위해 부여된 일종의 아이템같은 개념이였던 것이다. 장비의 "장팔사모" 역시, 지금 추산 시 5m가량의 기나긴 창으로 묘사되지만 한대에는 그런 긴 창은 쓰지도 않았거니와 동서양 역사에서의 그런 길고 긴 창은 보병의 대기병전용 무장이였지, 말 위에서 휘두르기는 너무 불편한 무기였다. 당시의 백병전은 인정사정 없었고 사소한 실수, 작은 삑사리 하나로 장애인이 되거나 바로 요단강에 발을 담그는 리스크가 될 수 있기에... 여든 두 근 청룡도니, 한 장 여덟 척 장팔사모니 하는 후까시용 무기보다는 그저 실용적이고 쓰기 편한 무기가 답이였다. 여포의 방천화극 또한 그 "방천화극" 자체가 역시 청룡언월도와 마찬가지로 송나라 중엽에서야 등장하는 무기였기에 픽션이며 그냥 찌르기용 '극'을 쓴 것으로 보여진다. 삼국지 등장 장수의 거의 8할이 "찌르기용 창"을 실제로 썼는데, 이는 '베기'보다 '찌르기'가 더욱 적은 에너지와 운동각으로 상대에게 치명상을 입힐 수 있기에 체력소모와 한 번 움직임에서 다음 움직임 까지의 인터벌을 최소화 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생각해보면 베는 창을 쓸 경우, 창을 더욱 높이, 크게 휘둘러야 상대에게 치명상 입힐 수 있는 반면... 빗나갈 경우 오히려 상대에게 역관광을 당하기 제격이다. 그렇다고 적은 각도로 움직이면 운동에너지나 원심력이 제대로 실리지 않아, 상대에게 그만큼 데미지를 많이 주지 못 한다. 놀랍게도 "쌍철극"의 경우, 정사에 전위가 80근의 쌍철극을 휘둘렀다는 기록이 남아 있는데, 이는 그 당시의 사료이므로 한대의 도량형에 따라 지금 기준 약 16~18kg가량의 무기가 맞다. 2. 일기토. 일본어의 "잇키우치(いっきうち, 一騎討ち)"에서 한자어인 '一騎討'만을 우리식으로 발음한 것이다. 기마무사간의 1vs1 대결을 의미한다. 사실 한, 중에서는 거의 안쓰는 한자어인데, 국내에서는 코에이의 삼국지 시리즈 탓에 1대1 결투의 일반대명사가 되어 버렸다. 삼국지연의를 보면 정말 숱하게 등장하는게 바로 저 일기토이지만... 놀랍게도 실제 역사기록에 의하면 삼국시대에 일기토 기록은 열 손 이내 밖에 없다. 192년 "여포 VS 곽사" (장안) 놀랍게도 곽사가 먼저 결투 신청. 그럼 그렇지, 여포의 창에 맞고 죽기 직전에 부하들이 곽사 구출. 196년 "손책 VS 태사자" (곡아) 말 타고 싸우던 중 손책이 태사자의 말을 찌르고 (나쁜새끼), 태사자의 창을 빼앗자, 태사자는 낙마하며 손책쪽으로 넘어지며 손책의 투구를 슈킹. 196년 "학맹 VS 조성" (하비) 여포에게 반기를 든 학맹과 조성이 싸우던 중 고순이 나타나 학맹을 죽임.(읭?) 196년 "마초 VS 염행" (서량) 그 천하의 마초가 염행의 창에 찔려 죽을 위기 맞음. 단, 당시의 마초는 만 19세로 아직은 경험미숙.. 200년 "관우 VS 안량" (백마) 추후 관우편에서 자세히 설명하겠음. 202년 "방덕 VS 곽원" (평양) 방덕이 당시 난전 중에 적병을 그냥 막 죽이던 와중에 곽원도 섞여 죽음.(이건 좀...;;) 208년 "여몽 VS 진취" (강하) 유표군과 싸울 당시 선봉이던 여몽이 적 수비대장 진취와 맞서 싸움. 2011년 "김형수 팀장 VS 이민형 과장" (백림호프) 만취한 이과장이 김팀장에게 반말로 도발하자 이에 격한 김팀장이 숟가락 볼록면으로 이과장의 정수리를 갈겨 단 일 합에 이과장을 처단. 사실, 일기토 자체가 성사 쉽지 않을 수 밖에 없는게, 저건 보는 사람이나 재미있지... 당사자들로서는 자신 뒤의 수 많은 군세의 기세를 책임진 상태에서 사소한 실수 하나로 자기 목숨은 물론, 전술적 승패를 갈음 짓는 1대 1 대결은 실로 무모하지 않을 수 없다. 사실, 이기고 있거나 우세한 군세의 우두머리가 이겨도 본전에 지면 그야말로 대참극의 아비규환을 불러올지 모를 그딴 제안에 응할 리가 없다. 그럼 상대가 응하지 않는데 홀로 싸울 수도 없다. 그리고 어지간한 급의 장수들은 영화나 만화처럼 행군 중이나 군사들간 대치 상황에서 가장 맨 앞에 나와 보란듯이 있지 않았다. 그럴 경우, 상대방의 활에 의한 저격에 피격될 위험성이 높기 때문. 물론, 장수의 화려한 차림새나 그 주위의 대장기를 든 호위대 등으로 분명 눈에는 띄었을 것이나, 가장 선두에 다 보란듯이 나와 있진 않았다고 한다. 솔직히 이게 뭐라고 쓰는데 두 시간 걸린다는.... 쓰고 나면 지치지만 여러분들이 주시는 관심 가득한 피드백들이 그런 피로를 잊게 해줍니다ㅎ 연재가 더디긴 해도 심도깊은 내용으로 차차 다룰 소재들이 매우 많으니 인내를 갖고 기다려 주시길 양해 바라며 타인을 비방하거나 불쾌히 만들 댓글은 자제 부탁 드려요. 궁금하신 점 등은 댓글로 문의 주시면 아는 범위 내에서 최대한 답변 드리고 있습니다! 주관적 견해를 바탕으로 한 논쟁은 도돌이표인 경우가 많고 감정만 상하기 부지기수라 응하지 않습니다. 역사와 삼국지라는 다소 고루하며 남성적인 소제를 다룸에도 예상외로 적잖은 분들의 관심과 기대에 늘 고마움 갖고 정성껏 쓰고자 애쓰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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