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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르면 그냥 지나치는 문화재 레전드

경상북도 문화재자료 제226호
조령 산불됴심 표석

모르고 보면 그냥 산불 조심하라고 세워둔거같지만

정조 때 별장이 잡인의 통행을 단속할 때와 관방유지를 위해 서민이 잘 알 수 있도록 한글비를 세운 것으로 추정된다. 한국 최초의 자연보호 표석이며 조선 후기에 한글을 새겨 넣은 보기드문 표석이다.

백셩들아 산불 됴심햇 ><
2 Comment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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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경새재인데 그냥 지나쳤네요
@riwdream 뭐든 알고 봐야 보이는거같아요ㅎ저도 그냥 옛날 맞춤법이네 하고 있었거든요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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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견되면 중국의 최고보물 가능 VS 불가능
-전국옥새(傳國玉璽)- 84부작 삼국지 드라마에서 재연한 전국옥새 삼국지 세계관의 절대반지 게임 '토탈워-삼국' 트레일러에서 재연한 전국옥새 중국 역대 황제들의 정통성을 상징하는 국새 원래는 초나라 땅 형산에서 발견된 커다란 보옥을 가공한 '화씨지벽(和氏之璧)' 이 화씨지벽은 이후 조 혜문왕에게 흘러들어가 조나라의 국보가 된다. 진나라 소양왕이 15개의 성과 바꾸자고 요청할 정도로 춘추전국시대 최고의 보물이었으며 훗날 진시황이 조나라를 멸망시키고 가장 먼저 챙길 정도로 집착했었다. 진시황은 천하를 통일한 이후 이 화씨지벽으로 자신의 옥새를 만들라는 명을 내린다. 그리고 옥새가 완성되자 진나라의 재상이던 이사는 그 인장의 서문을 지었는데 '수명우천, 기수영창(受命于天, 旣壽永昌)' 이라는 문구였다. 이 뜻은 "하늘에서 명을 받았으니, 그 수명이 영원히 번창하리라." 라는 의미 ※ 위의 인장은 '전서(篆書)로 쓰여진 전국옥새의 서문' 을 추정복원한 것 -이후 전국옥새의 행보- 1. 진나라의 3세 황제 자영의 항복으로 전국옥새는 유방의 손에 넘어감 2. 유방의 천하통일 이후로도 전국옥새는 한나라의 국새로 이용 3. 전한 멸망 후, 왕망의 찬탈당시 태후가 집어던져 모서리가 약간 깨짐 4. 이후 경시제-적미군의 손을 거쳐 광무제 유수가 환수 5. 광무제가 깨진 모시리 부분을 금으로 땜질하고 후한의 국새로도 계속 이용 6. 낙양대화재 당시 우물에 버려져 행방불명, 이후 손견 or 원술이 찾아내었다고 알려짐 7. 원술이 이걸 바탕으로 칭제, 원술 세력이 멸망 후 후한 조정으로 다시 반환 8. 후한 멸망후 조위(曹魏), 서진(西晉)의 국새로 계속 이용 9. 서진 멸망 후 전조 유총(劉聰)이 획득 10. 이후 후조의 석륵(石勒)과 염위(冉魏)를 거쳐 동진(東晉)으로 다시 반환 11. 이후 유송-남제-양나라 등 남조의 국새로 이용되다 내란으로 인해 북제(北齊)로 넘어감 12. 북제 멸망 이후에도 북주-수-당의 국새로 이용 13. 당 멸망 이후 그 소유권은 후량-후당에게 차례대로 넘어감 14. 937년, 후당 최후의 황제 이종가는 석경당(후진 초대 황제)의 군대가 수도 낙양까지 처들어오자 전국옥새를 끌어안고 현무루에 불을 질러 자살 진 제국부터 5대 10국 시대까지 무려 1,200년에 가까운 시간동안 수많은 왕조들에게 대물림된 '천명' 의 상징 발견되면 중국의 최고보물이다 VS 아니다 VS 아니면 '그 혁명' 당시 있었는데 없어졌다. 1200년 넘게 대물림됐는데 사라짐ㅋㅋㅋㅋㅋㅋ 어디갔을까 진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