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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루함에 돌아버린 이탈리안 전쟁포로 3인방, 케냐산에 오르다

케냐산을 오른 이탈리안 탈주병들

독일 산악병은 그 동네 최고봉에 오르라는 명령을 받고 거기 올랐음. 
하지만, 이탈리안 전쟁포로 3인방은 수용소 생활의 지루함에 몸부림치다 케냐산에 올라갔다 왔음. 

미리 간단 요약하자면 
1. 포로수용소 생활 개 지루하네 2. 근데 저기 보이는 저 산, 올라가보면 재밌겠는데? 3. 동료를 모으자. 물자도 모으자. 4. 수용소 탈출! 5. 산에 오르자. 6. 수용소에 되돌아가자.

완전 똘게이들 그 자체임. 그럼 시작하겠음.

이탈리아 국기를 획득한 남아프리칸 병사들. 1941년.

역사상 포로수용소라는 곳들은 영 몹쓸 곳이었음. 
굶어 죽고, 강제근로하다 죽고, 고문당하다 죽고. 
하지만 모든 포로수용소가 그랬던 건 아님. 
2차대전 중 케냐(당시 영국 식민지)의 포로수용소는 먹을 만한 밥도 줬고, 고문도 안 했고, 주거환경도 괜찮았음.

다만 유일한 문제는 굉장히 지루했다는 거.
지도 중앙의 Nanyuki가 예의 3인방이 갖혀있던 포로수용소 위치임.

Giovanni Balletto, Vincenzo Barsotti, and Felice Benuzzi. 
이탈리안 3명은 난유키의 캠프345에 있었음. 

지루함에 몸부림치던 이들은 수용소를 탈출해서 저기 보이는 산에 올라갔다 오기로 했음.

Nanyuki에서바라본 케냐산. 1936년

해결해야 할 문제는 다음의 3가지였음.
첫째, 수용소를 탈출해야 한다는 거.
둘째, 적국 영역+케냐의 광활한 자연(사자, 코끼리, 아프리카 들소, 코뿔소, 독사)을 거쳐 케냐산에 도착해야 한다는 거.
셋째, 케냐산을 오르는 것. 

케냐산은 해발 5199미터로 아프리카에서 2번째로 높은 산임. 
전문등반가에게도 어려운 도전인데, 3인방은 그조차 아니었음.

케냐산.

이 똘게이적 아이디어를 가장 먼저 떠올린 사람은 펠리스임. 
전문적인 등반능력을 가진 동료 포로에게 이 아이디어를 논의해 봤지만, 그 동료는 비전문 등반가가 등반용구 하나 없이 케냐산을 오르는 건 불가능한 일이라며 말렸음. 

하지만 이런 상식적인 답변을 듣고도 펠리스는 이걸 해내겠다고 굳게 마음 먹었음.

그 다음 펠리스가 접근한 건 지오반니와 빈센조임. 
둘다 탐험에 굶주려 있었음. 지오반니는 펠리스와 마찬가지로 알프스에서 아마츄어 등반 경험이 있었고, 빈센조는 그조차 없었지만 모험을 갈구하고 있었음.

이런 야망찬 계획을 실행하기 위해서는 철저한 준비가 필요했음. 
그래서 3인방은 그 준비에만 8개월을 들였음.

잡동사니를 주워모아서 각각의 배낭을 만들고, 수용소 작업장에서 망치를 획득(!)해서 그걸로 아이스 픽을 만들고, 쓰레기를 뒤져서 아이젠을 만들고, 침대를 분해해서 코드를 엮어 등산용 로프를 만들었음.

영국군에 잡힌 이탈리안 포로 행렬.

등산용구만으로는 부족했음. 당연히 탐험 도중에 먹을 양식이 필요했음. 
그래서 수용소 탈출 예정일 몇 주 전부터, 삶은 계란, 소고기 통조림, 말린 과일, 쿠키들을 쟁겼음. 
이 중 일부는 3인방이 보급받은 식량에서 떼어낸 거고, 나머지는 동료 포로들에게 구한 거임. 
어떻게? 이제껏 피우던 담배를 끊고, 매주 보급 받은 담배로 거래에 나섰음.

자, 그럼 수용소를 탈출할 준비도 해야잖음? 펠리스는 수용소장의 텐트에 몰래 들어가서, 타르로 게이트 키를 본 떠왔음.
그리고 메케닉인 동료 포로의 도움을 받아 복사 열쇠를 손에 쥐었음. 
3인방은 그 열쇠를 써서, 몰래 수용소를 빠져나가, 식량과 등산용구를 수용소 바깥에 파뭍어 두었음.

수용소 탈출 예정일은 1943년 1월 24일이었음. 케냐에선 여름이 한창인 때임. 
3인방은 열쇠를 써서 수용소 정원에 딸린 작은 장비 창고에 숨어 들어갔음. 
거기서 밤이 되길 기다렸다가, 슥 빠져나갔음.

3인방의 부재는 이후에 발각되었음. 
그리고 수용소장이 "우리 모험 좀 다녀올께. 이거 마치면 꼭 돌아올 것임을 약속함.
-수용소장에게 펠리스가"라고 쓴 쪽지를 발견함으로써 3인방의 수용소 탈출이 확실해졌음.

3인방은 가는 길에 영국군의 추격을 피하기 위해 케냐산 북서능선의 대나무 숲을 질러서 이동했음. 
이들이 가지고 있는 지도란 건 쓰레기더미에서 찾은 빈 식료품 깡통에서 벗겨낸 케냐산의 사진 뿐이었음.

이 모든 곤경을 넘어서서 3인방은 며칠 만에 케냐산에 도착해서 오르기 시작했음. 
골초였던 빈센조는 숨이 차올라서 해발 4257미터 지점에서 더 이상의 등반을 포기했음. 
게다가 이들은 눈폭풍에도 후두려맞고 있는 중이었음. 
펠리스와 지오반니는 그 와중에도 정상에 도전하기로 함.

이 둘은 목표를 거의 이뤘음. 이들은 해발 4999미터까지 올라가고야 말았음. 
정상까지는 고도 198미터가 남은 지점임.
거기에 자신들이 만들어온 작은 이탈리아 국기를 꽂고, 메시지를 넣은 병을 남긴 다음, 발길을 되돌려 내려왔음.

4800미터 지점.

3인방은 탈출한 지 18일 만에 수용소에 되돌아 왔고, 곧 수용소 경비들에게 발각되었음. 
허락을 받아 샤워를 하고 따뜻한 음식을 먹은 다음, 탈출에 대한 벌로 독방형에 처해졌음. 
처음에는 독방형 28일이 내려졌으나, 이들의 대담한 계획과 제발로 돌아왔다는 것에 감명을 받은 수용소장이 독방형 7일로 낮춰주었음.

이후 영국 등반가들이 해당 지점에서 이탈리아 국기와 메시지가 든 병을 발견했음. 
이로써 도무지 믿기 어려운 이야기가 사실이라는 게 확인되었음. 
임시변통으로 만든 등산용구, 부족한 등반경험, 제대로 된 지도 없이 이탈리안 전쟁포로 3명이 아프리카에서 2번째로 높은 케냐산의 정상에 매우 근접했다는 것 말임.



대단히 무모하지만 순수한 도전
그리고 성공ㅋㅋㅋㅋㅋ
셋의 여정을 상상하니까 왜 이렇게 웃긴 건지 ㅋㅋㅋㅋㅋㅋ
2 Comment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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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탈리아 애들이 좀 똘끼 넘치는 일들 있는듯. 세상 어떤 전쟁포로들이 저런생각을 할까.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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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참조 1)을 보면 완전 보스의 풍모이다. 중앙의 인물은 당연히 마를레네 디트리히, 1930년 5월 21일에 촬영했으며, 옆에 있는 사내들은 경찰들이었다. 어째서 경찰들이 마를레네 디트리히를 수행했을까? 자세히 알아보면 수행은 아니었다. 기억하실지 모르겠는데, 2012년에 폐지됐던 여성 의복에 대한 법률(L'interdiction du port du pantalon pour les femmes, 참조 2)이 하나 있었다. 말을 달릴 때 혹은 자전거를 탈 때를 제외하고서 여자들은 바지를 입지 말라는 내용인데, 이미 용도폐기됐던 법률을 실제로 집행하려 할 때가 바로 저 현장이었기에 더 인상깊은 사진이 됐다. 당시 마를레네 디트리히는 미국에서 프랑스로 왔었고 배에 탔을 때부터 하얀색 남성정장(...)을 입고 있었다(참조 3). 디자이너는 Travis Banton(1894-1958), 이를테면 헐리우드 황금기의 퍼트리샤 필드(Patricia Field, 1942-현, 참조 4)라고 이해하시면 좋겠다. 바지를 입었지만 체포되지 않았던 디트리히는 파리에서 애인도 만나 따로 바도 차려주고(참조 5), 미국으로 돌아가 제2차 세계대전부터는 적극적으로 미군 위문공연을 다녔었다. 그래서 그런지 고국 독일에서 적대적인 군중을 맞이하기도 했었다. "고국의 배신자(Vaterlandsverräterin, 이 건은 독일어판 위키피디어에 자세히 나와있다)"라는 함성과 함께 계란 세례도 받았던 것, 그래서 독일보다는 미국과 프랑스가 그녀에게는 더 편했을 것이다. 당연히 그녀의 남성 복장은 이브 생 로렁의 "르 스모킹(Le Smoking, 참조 6)"에 큰 영향을 줬다 봐야 할 텐데, 사실 마를레니 디트리히를 생각하다 보면 레니 리펜슈탈(참조 7)도 생각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리펜슈탈 역시 "바지"를 입고 활발하게 활동(참조 8 )했기 때문이다. 세상은 바지를 입고 "보스"처럼 활동했던 디트리히만 기억하지, 리펜슈탈을 기억하지는 않고 있다. ---------- 참조 1. 출처는 게티이미지, https://www.gettyimages.com/detail/news-photo/schauspielerin-dmit-ehemann-rudolf-sieber-auf-dembahnhof-in-news-photo/541065821?adppopup=true 2. 여자와 자전거(2015년 7월 30일): https://www.vingle.net/posts/973669 3. The Bracelet Dietrich Received for Her Defiance(2018년 4월 15일): https://theadventurine.com/culture/celebrity/the-bracelet-marlene-dietrich-received-for-her-defiance/ 4. 대표적으로 "Sex in the city"와 "The Devil Wears Prada"의 의상을 맡았었다. 최신작은 "Emily in Paris" 5. 모노클(2021년 6월 12일): https://www.vingle.net/posts/3779748 6. Saint Laurent(2014년 5월 19일): https://www.vingle.net/posts/347093 7. 디트리히와 리펜슈탈(2015년 12월 6일): https://www.vingle.net/posts/1258789 8. 가령 이 이미지를 보시라. 1936년 베를린 올림픽 때의 촬영이다. https://www.gettyimages.com/detail/news-photo/german-film-maker-leni-riefenstahl-and-cameraman-walter-news-photo/51116340?adppopup=true
산의 중국인 괴담
개인적으로 괴담은 별로 관심없는데 해석이 흥미로워서 가져와봤음 봅시다 --- 아버지에게 전해들은, 우리 할아버지 이야기다. 할아버지는 호쿠리쿠 지방 출신이셨다. 할아버지가 40대일 무렵, 산나물을 캐러 산에 가셨었단다. 그런데 저녁 무렵 새파랗게 질린 얼굴로 돌아오더니, 신발도 벗어던지고 [산의 중국인한테 들켜버렸다!] 라고 말하더라는 것이다. 집안 사람들은 다들 무슨 소리인지 알아듣질 못했다. 그 지역 산에 중국인이 산다는 이야기도 없었고, 본 사람도 없었으니까. 애시당초 시골이라 외국인 자체가 드물었다. 할아버지는 젊은 시절 대만에서 지낸 적이 있었기에, 아버지는 그것과 무슨 관계가 있는지도 모른다고 말하셨다. 다음날부터 할아버지는 집 문단속을 꼼꼼히 하고, 항상 나무꾼이 쓰는 낫 비슷한 칼을 가지고 다니게 되었다. 최대한 외출을 꺼리는 모양새였지만, 밭일을 해야하니 안 나갈 수는 없으니까. 또한 해가 떨어지면 외출하지 않고, 가능한 한 다른 사람과 행동을 함께 하며 절대 산에는 가질 않으셨다고 한다. 그렇게 2주일 정도 지났을까. 논에 세워둔 허수아비에, 검붉은 액체가 끼얹어지는 사건이 발생했다. 할아버지가 찾아냈지만, 논 안에까지 흘러들 정도로 엄청난 양이 부어져 있었다고 한다. 아마 짐승이나 인간의 피일거라고, 할아버지는 단정지었다고 한다. 그 사건 이후 할아버지의 정신 상태는 악회되어, 한밤 중 갑자기 일어나서는 식칼을 휘두르는 일마저 있었다고 한다. 얼마 지난 어느날, 아버지가 아침에 일어나 집밖으로 나왔더니 명패에 피가 잔뜩 끼얹어져 있었다. 피로 더러워진 문에는 한자로만 써진 부적 같은게 붙어있었다고 한다. 아버지에게는 너무 어려워 읽을 수가 없었다. 아버지는 곧바로 할아버지에게 그 사실을 알렸고, 문을 보자 할아버지는 뭔가 결심한 듯 대나무 장대에 식칼을 묶어 창 비슷한 걸 만들었다고 한다. 그리고 가족들의 만류에게 불구하고, 주먹밥을 싸들고 산으로 들어가셨다는 것이다. 하지만 밤이 되어도 할아버지는 돌아오지 않았다. 집안 사람들은 마을 사람들에게 이 사실을 알려, 다음날 마을 사람들이 총동원되서 대대적인 수색에 나섰다. 집 근처와 산에서는 발견되지 않았다. 그날 늦게서야 가까운 골짜기 물가, 큰 나무에 묶여 죽어있는 할아버지의 시체가 발견되었다. 다리만 위쪽 가지에 묶여 거꾸로 매달린 채, 예리한 칼날로 내장이 완전히 도려내져 있었다고 한다. 나무 주변에는 부적이 잔뜩 흩어져 있었다. 마을 순경 가지고는 조사도 힘든 일이었다. 현 경찰서에서 경찰이 나와 수사했지만, 전혀 단서는 없었다. 가족들은 모두 경찰서에 불려가 시달렸지만 끝내 범인은 잡히지 않았다고 한다. 당시 지역신문에도 실릴 정도로 엄청난 사건이었다고. 아버지는 그 후 성인이 되고서도 "산의 중국인" 이 무엇인지 계속 조사를 해왔다지만, 무엇을 알아냈는지는 내게 가르쳐주지 않았다. ================== 본래 괴담은 여기서 여기서 끝입니다. 그러나 제 나름대로 추측을 해봤습니다. 일본괴담은 실제 역사적 배경을 가진 것들이 많기에, 파헤치면 상당히 재미있는 부분들이 나오지요. 우선 중점에 둬야 하는 건, 할아버지가 젊은 시절에 근무했던 지역입니다. 대만이랬죠. 그리고 '산의 중국인'이라고 했습니다. 대만과 산의 중국인... 언뜻 보기에는 연관점이 전혀 없어 보입니다만... 놀랍게도 두가지는 엄청나게 강한 연관성이 있습니다. 뭘까요? 바로 대만 토착원주민들인 '고산족'입니다. 말 그대로 높은 산에 사는 민족이라는 명칭이죠. 이들은 당시 일본이 보기에 상당히 야만적인 종족이며(토착부족들끼리 서로 전쟁을 벌여서 많은 적을 참수시킨 전사를 영웅으로 모심. 이 외에도 그 참수시킨 머리를 집에 가져와서 보관함.), 굉장히 멸시를 받았습니다. *이 외에도 민간신앙에 심취해서 부적 등을 좋아했다는 썰이 있는데, 정확한 것은 아닙니다. 청일전쟁에서 승리한 일본군은 대만을 점령합니다. 상당히 우수한 화기로 무장한 일본군답게, 고산족과 한족들의 저항을 물리치고 식민지배를 진행합니다. 당시 일본은 뛰어난 행정력으로 식민지배를 하였으나... (한국과 달리 대만은 보는 눈이 많아서 온건하게 통치함. 예를 들자면 한국은 군인들이 총독으로 부임했으나, 대만은 문관과 같은 행정공무원들이 총독으로 부임했음.) 영화 '워리어스 레인보우'에 표현된 것처럼, 고산족들을 잔혹하게 부려먹죠. 결국 차별을 겪다가, 결혼식장에서 일본순경에게 아들이 구타당한 '모우나 루나' 족장이 반란을 일으킵니다. 당시 300명의 부족전사들이 칼과 창, 노획한 화기 등으로 무장하였고 운동회 날 고위관료, 일본인들이 모이는걸 노려서 습격합니다. (우서사건) 흐릿해서 잘 안보이지만, 주위에 하얀옷 입고 두건쓴 애들이 다 원주민들입니다. 이 원주민들은 일방적으로 대량학살을 저지릅니다. * 영화에서는 원주민 학생들이 평소 자신들을 구타하던 일본인 교사를 단체로 난자해서 죽여버린다던지, 자신들을 고깝게 대하던 일본인 학생의 어머니를 단체로 찔러서 죽여버리는 묘사가 나옵니다. 당연히 운동회에서는 고위관료보다는 학생, 그리고 학부모들이 많이 모이죠. 이때 134명의 일본인(관료+민간인), 2명의 대만인(아마도 기모노를 입어서 일본인으로 오인당한듯)이 참수됩니다. 결국 빡돌은 일본군 2000명의 군대, 독가스, 전투기를 동원하고 해당 원주민들과 적대관계인 부족을 회유해서 토벌에 내세웁니다. 원주민들은 노획한 화기로 1200명 가량이 무장하여 싸웠으나... 결국 중과부적으로 패배합니다. 이 과정에서 항복한 원주민 900명이 학살당했고 거의 씨가 마를 정도로 죽어나갔다고 하네요. 아마 위의 "산의 중국인"은 이 토벌 중에 사망한 원주민, 혹은 그 원주민의 가족이나 지인이 '일본군'으로서 자신들을 죽인 할아버지에게 복수를 한 그런 내용이 아닐까 싶네요. (출처) 그냥 보면 영문 모르고 넘어갈 괴담이지만 역사적 배경을 알고 보면 이렇게 달리 보일 수 있군 꿀잼 그리고 결국 자업자득
우리나라 역사상 가장 아찔했던 순간
다부동 전투   1950년 8월, 경상북도 칠곡군 가산면일대에서 발생한 전투로써 6.25전쟁 중 가장 위대하고 치열했던 전투로 기록되고 있다. 다부동 전투는 국군과 유엔군이 낙동강 방어선을 형성항 직후부터 반격으로 전환할 때까지 대구 북방의 왜관과 다부동 일대에서 8.15 광복행사는 반드시 대구에서 하겠다는 계획으로 집중 공세를 펼치기 위해 제105전차사단으로 증강된 북한군 제2군단(제3,13,15사단)과 우리나라국군 제 1사단과 한미연합군 등이 "이 곳마저 뚫리면 완전히 끝장이다"라는 다짐하에 북한군의 8월공세에 저지하여 27일간에 걸쳐 저지한 방어전투이다.   이 전투에서 국군 제1사단은 적 3개 사단의 집요한 공격에도 불구하고 328고지-수암산-유학산-741고지의 방어선을 확보하고 다부동-대구 접근로를 방어하여 대구 고수에 결정적으로 기여하였다.  허나 10,000명의 한미연합군 사상자를 내는 등 막심한 피해를 입고 말았다.   다부동 전투로 북한군은 낙동강 전선의 돌파가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인식하게 되었고, 국군 제1사단과 미 제1기병사단은 공세 이전의 계기를 포착하여 다른 유엔군 부대들과 함께 반격작전으로 이행하게 되었다.  낙동강방어선은 우리나라 국군의 최후의 방어선이였으며. 만약 이 방어선이 뚫렸으면 지금의 우리는 있지도 않았을 것이다. (출처) 저 낙동강 전선 지도를 보면 정말 아찔하지 않나요? 정말 적화통일 될 뻔 했지 뭡니까. 저 때 미국 정부는 낙동강 방어선이 무너질 경우에는 대한민국 정부를 한반도 밖, 그러니까 제주도 또는 태평양의 어느 섬으로 옮겨서 후일을 도모하려는 계획도 세웠었다고. 너무 무섭네요. 목숨을 바쳐 싸워주신 참전용사분들께 다시 한 번 감사드립니다. 참전용사분들 이제 연세도 많으실텐데 지금이라도 제대로 된 대우를 해드리면 좋겠네요..ㅠㅠ 이전에 폐지 줍고 계시는 분도 본 것 같은데 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