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alrapp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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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어제는 취중에 헛소리를 써놨구나. 이럴 수가.

시 원고를 조금 전 겨우 넘겼다. 그런데 뭔가 계속 찝찝함이 남아있다. 영 마음에 차질 않는다. 원고는 넘겼지만 퇴고는 계속 이어갈 예정이다. 시라는 것이 무작정 앉아서 원고를 붙들고 있는다고 되는 건 아니다. 약간의 시차를 두고 봐야 고칠 곳도 보이는데, 그럴 시간은 없었다. 이런 식으로 시를 발표해도 될지 원. 두 편의 시 모두 장시에 가까울 정도 분량이 길다. 성의는 보였다고 생각하지만, 내 시를 읽을 사람들을 생각하니 부끄럽기 그지없다. 6월에 마감인 시는 지금부터 부지런히 써야겠다. 충분한 시간을 두고 퇴고하기로.

그러나 텅 빈 시를 보내느니, 성의 있는 잡설이라도 하는 것이 낫다는 결론이었다. 그것으로 위안을 삼기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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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생활, 인간관계 조언 18가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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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문학 단편선 - 플래너리 오코너> 플래너리 오코너
<세계문학 단편선 - 플래너리 오코너> / 플래너리 오코너 저 (지극히 주관적인 제 생각을 쓴 글입니다.) 플래너리 오코너는 1925년 미국 남부 조지아 주에서 태어나 서른아홉 살에 루푸스 합병증으로 죽었다. 두 편의 장편소설과 여러 단편소설들을 남겼다. 그리 많지 않은 작품 수에도 그녀의 이름을 딴 문학상이 생길 만큼 플래너리 오코너가 미국 문학계에 끼친 영향은 적지 않다. 현대문학에서 나온 플래너리 오코너 단편선은 방대한 분량(700페이지가 넘어가는)을 자랑한다. 총 서른한 편의 중, 단편소설이 실려 있다. 서른한 편 중 몇 편은 좋았고 몇 편은 굉장히 좋았으며 그중에서도 몇 편은 뭐라 말하기 힘들 정도로 뛰어났다. 좋지 않은 소설은 없었다. 미국 문학을 많이 읽는 편은 아니지만 플래너리 오코너의 소설에는 레이먼드 카버, 줌파 라히리 등의 소설이 주는 것과 비슷한 느낌이 있다. 명확하게 콕 집어서 이야기할 수는 없지만 소설 속에서 인간의 인식과 세계가 확장되는 어떤 지점이 주는 삶과 동떨어진 듯한, 일상 너머의 진실을 조금 엿본 듯한 순간이 바로 그것이다. 플래너리 오코너의 소설에서 그러한 계시(플래너리 오코너 단편선 옮긴이의 말을 빌리자면)의 순간은 그녀가 경험해 온 미국 남부의 시대상, 가톨릭 신앙과 겹치며 독특한 울림을 자아낸다. 단언할 수 있는 것은 나는 그 울림을 지금까지 읽어온 소설 중 오로지 플래너리 오코너의 작품에서만 경험할 수 있었다. 오코너의 소설은 대부분 미국 남부에서 가치관이 뒤바뀌는 시대를 배경으로 한다. 노예제가 폐지되고 법적으로는 흑인과 백인이 동등하지만 여전히 남부에서는 암묵적인 인종 분리가 행해지고 과학과 이성이 점점 종교와 신앙의 자리를 침범하며 미국 북부에서 인종과 종교, 합리를 대하는 관점과 남부에서 그것들을 대하는 관점 사이의 틈이 걷잡을 수 없이 벌어진 시대. 오코너의 소설들은 그 시대의 다양한 인간 군상들을 주인공으로 내세운다. 과거의 영광에 사로잡힌 늙은 군인도 있고 백인과 흑인이 서로 평등하다는 것을 도저히 받아들이지 못하는 백인 또는 흑인도 있으며 종교에 충실한 인물이나 종교 따위는 믿지 않고 과학과 이성을 맹신하는 사람도 있다. 오코너의 소설은 자신의 세계에 갇혀 있던 인물들이 어떤 사건을 통해 가치관과 인식의 흔들림을 경험하고 진실을 대면하는 순간을 보여준다. 독자는 소설 속 인물과 그 순간을 함께 경험함으로써 지금까지도 통용되는 진실의 일부를 엿보게 된다. 그때의 감각은 말로 설명하기 힘들다. 벗어날 수 없고 피할 수 없는 어떤 존재 앞에서 인간의 무력함을 체감하는 느낌과 약간은 비슷하다고 해야 할까. 그 경험만으로도 이 단편선을 읽을 가치는 충분하다. 개인적으로 추천하는 작품은 <제라늄>과 <행운>, <인조 검둥이>다. 소설 속 한 문장 "나는 같은 말을 두 번 하지 않아요." 남자가 말하고 창문을 떠났다.
지구에서 한아뿐
'지구에서 한아뿐' / 정세랑 저 (지극히 주관적인 제 생각을 쓴 글입니다.) 제목부터 지구에서 한아(하나)뿐이다. 달달한 사랑 이야긴데 그 달달함이 조금 이상하다. 달달하긴 한데 지구인과 외계인의 러브스토리고 정말 달달하긴 한데 보다 보면 과연 나는 얼마나 환경을 생각하며 살았는지 곱씹게 된다. 조금 희한하긴 하지만(?) 마음이 따뜻해지는 소설이다. 소설의 주인공 한아는 지구를 사랑하는 의류 리폼 디자이너다. 망가져가는 환경을 안타까워하고 지구에 인간이 너무 많다고 불만을 토로하는 한아는 못 쓰게 된 옷들을 다시 리폼해주는 '환생'이라는 작은 옷 수선집을 운영하고 있다. 그녀의 남자 친구 경민은 자유분방이란 말이 어울리는, 여행을 사랑하는 사람이고 한아를 놔둔 채 늘 어딘가로 떠나버리곤 한다. 이번 여름에도 캐나다로 유성우를 보겠다며 떠난 경민. 경민이 떠나고 며칠 뒤 뉴스에 캐나다에 운석이 떨어졌다는 소식이 나온다. 한아는 바로 경민에게 연락하지만 경민은 연락이 되지 않는다. 애타게 경민을 기다리며 마음 졸이는 한아. 다행히 경민은 무사히 돌아오고, 연락이 안 되는 경민에게 잔뜩 나 있던 화는 막상 경민을 보자 여름날의 눈처럼 스르륵 사그라든다. 그런데 시간이 지날수록 한아는 돌아온 경민이 무언가 이상하다는 걸 느낀다. 전보다 너무 다정해졌고 어딘가로 훌쩍 떠나지도 않는다. 팔에 있던 커다란 흉터가 사라졌고 못 먹던 가지무침도 맛있다며 먹더니, 급기야 경민의 입에서 초록빛이 뿜어져 나오는 걸 목격한 한아. 경민은 진짜 외계인인 걸까? 그렇다면 원래의 경민은 어디로 간 걸까? 이 소설은 누가 뭐래도 달달한 사랑 이야기다. 한아를 만나러 2만 광년 떨어진 지구까지 날아온 외계인과의 러브스토리라니. 오직 한아를 만나기 위해 커다란 빚을 지고 엄청난 거리를 넘어온 외계인. 그 노력만 해도 지극정성인데 그 외계인이 한아를 대하는 모습을 보면 100점짜리 남자 친구다. 늘 한아를 배려하고 생각하고 사랑하고 존중해주는 남자 친구. 유일한 단점은 외계인이라는 것뿐. 한아는 외계인이라는 사실, 그리고 그 외계인이 경민의 겉모습을 쓰고 있다는 사실에 거리감을 느끼지만 점점 자신을 진심으로 사랑해주는 외계인에게 자신도 사랑을 느낀다. 경민의 탈을 쓰고 있지 않아도, 초록색 돌덩어리인 본모습이라도 사랑할 수 있겠다고 생각할 정도로. 초록색 돌덩어리라도 사랑할 수 있어. 한아의 말에서 우리는 사랑의 본모습을 발견할 수 있다. 사랑에는 아름다운 외모, 외계인이라는 사실, 성별의 유무, 나와 전혀 다르게 생긴 모습, 그 무엇도 중요치 않다. 상대방을 아끼고 배려하고 생각하고 존중하고 사랑하는 마음 자체가 중요할 뿐. 어찌 보면 오글거리기도 하고 뭐 다 알고 있는 거 아니야 하겠지만 사랑이라 불리는 많은 것들 중에 저 단순한 문장을 만족시키는 것이 얼마나 있을까? 어떤 사랑은 상대의 존재가 아니라 상대의 능력, 외모, 재력이 사랑의 조건이 되기도 하고 어떤 사랑은 저 단순한 문장을 한없이 만족시킴에도 사랑으로 인정받지 못하기도 한다. 그저 같은 성별을 사랑한다는 이유만으로. 우리는 한아와 경민의 사랑을 좀 본받을 필요가 있다. 이 소설에서 다른 하나의 큰 축을 차지하고 있는 것은 환경에 대한 내용이다. 한아는 지구와 환경을 사랑하는 환경주의자고 외계인 경민이 한아에게 반한 이유도 한아가 환경을 사랑하는 모습과 맞닿아 있다. 고래형 외계인들이 지구의 바다 오염에 힘들어하는 고래들을 도와주는 에피소드나 얼음별에 사는 무당벌레 모습을 한 외계인들이 점점 더워지는 별의 환경 때문에 멸종되어가는 모습, 지구를 동경한 한 부자 외계인이 지구를 본떠 만든 어딘가 부족한 제2의 지구, 광합성인들의 행성을 그 모습 그대로 보존시켜주겠다는 우주의 약속 등, 소설 속 우주의 모습들은 지구의 여러 단면들을 떠오르게 한다. 환경오염에 힘들어하는 고래들의 모습은 지구에서 실제로 일어나고 있는 일이고, 무당벌레 외계인의 멸종은 지구 온난화와 멸종 위기종들의 모습을, 제2의 지구에서 고통받는 만들어진 생명체들의 일화는 인간이 만든 동물원의 모습을, 광합성인들의 행성을 보존시켜주겠다는 약속은 아마존 열대우림 보존에 관한 첨예한 대립을 생각나게 한다. 실제로 수많은 동물들이 멸종되었고 멸종 위기 상태에 있으며 인간의 즐거움을 위해 동물원에 갇힌 동물들은 엄청난 고통과 스트레스를 받는다. 심지어 동물원에서는 인간의 유희를 위해 백호나 백사자 같이 자연 상태에서는 거의 생겨나지 않는 동물들을 강제로 만들어내기도 하며 아마존의 보존과 개발에 관해서는 지금도 논쟁이 일어나고 있는 상황이다. 이 소설 속에 나오는 우주의 모습을 통해서 우리는 지구의 모습을 보고 지구의 환경에 대해 생각해보게 된다. 한아의 말대로 지구에 인간이 너무 많은가? 하는 생각을 하면서. 본격 환경친화적 외계 로맨스 소설 되시겠다. 환경은 환경대로, 로맨스는 로맨스대로, 외계인과 우주라는 양념을 적절히 쳐서 비볐더니 이토록 다채로운 모습을 가진 소설이 나왔다. 삶이 힘든 사람에게, 다 때려치우고 싶은 사람에게 이 소설을 권하고 싶다. 환경 문제도, 사랑에 대한 고민도 너무나 다정하고 따뜻하게 바라보는 이 책은 충분히 당신의 삶을 두텁게 감싸 안아준다. 책을 다 읽고 마지막 장을 덮을 때면 작가가 건네는 말이 들리는 듯 하다. 당신은, 지구에서 한아뿐이라고. 소설 속 한 문장 소리 없이, 먼 우주의 휘어진 빛들이 두 사람의 저녁에 내려앉았다.
설국
'설국' / 가와바타 야스나리 저 (지극히 주관적인 저의 생각을 쓴 글입니다.) 최근에 '책, 이게 뭐라고'라는 팟캐스트를 열심히 듣고 있다. 장강명 작가님과 가수 요조님이 진행하는 팟캐스트인데 여러 가지 책을 쓴 저자 분들을 매회마다 모셔서 이야기도 나누고 책에 대한 생각도 듣는 라디오라고 생각하면 좋을 듯 하다. 그 곳에 김연수 작가님이 나오셨을 때 설국에 대한 이야기가 잠깐 나왔었다. 김연수 작가님이 자신의 경험을 이야기하면서 처음 설국을 읽었을 때는 그 유명한 설국의 첫 문장이 거짓이라고 생각하셨다고 한다. 그런데 어느 날 차를 타고 긴 터널을 지나자 지나기 전에는 내리지 않았던 눈이 내리고 있는 걸 보고 아, 정말 사실을 있는 그대로 쓴 글이구나 라고 느끼고 본인도 사실을 쓰는 작가가 되어야겠다는 마음을 먹으셨다고 한다. 장강명 작가님도 마찬가지로 설국을 처음 읽었을 때는 주인공 시마무라의 도덕적으로 잘못된 행동들이 눈에 들어왔지만 나중에 다시 읽었을 때는 문장과 묘사의 아름다움에 빠졌다는 이야기를 하셨다. 그만큼 문장과 묘사의 아름다움, 글의 미학을 느끼기에 좋은 작품이 바로 이 설국이었다. 소설의 스토리는 사실 간결하다. 시마무라 라는 남성이 눈이 많이 내리는 일본의 한 지방에서 고마코라는 게이샤를 만나 사랑과 비슷한 감정을 느끼며 함께 지내다가 요코라는 또 다른 여성에게 뭔지 모를 끌림을 느낀다. 시마무라라는 남성과 두 여성 사이의 오묘한 관계와 감정이 소설의 전부이다. 서사적으로 보면 빈약하고 재미가 부족한 소설일 수도 있겠지만 이 소설의 가치는 바로 문장과 묘사, 글 그 자체의 아름다움에서 나온다. 어쩌면 세상에서 가장 유명한 소설 속 첫 문장이라고 할 수 있는 설국의 첫 문장을 보자. [국경의 긴 터널을 빠져나오자, 눈의 고장이었다. 밤의 밑바닥이 하얘졌다. 신호소에 기차가 멈춰 섰다.] 글만 읽어도 그 곳에 들어가 있는 듯한 느낌이 든다. 기차를 타고 어둠 속의 긴 터널을 빠져나오자 눈이 오고 있었다. 쌓여서 빛나는 눈에 밤의 밑이 하얘지고 이윽고 천천히 신호소에 기차가 멈춰선다. 단순히 그 당시, 그 곳의 풍경을 저렇듯 아름답게 묘사한 것만으로 읽는 독자들을 그 자리에, 그 시간에 있는 듯이 느낄 수 있도록 만드는 문장이다. 이 문장에서는 그 뿐 아니라 그 풍경을 보고 있는 소설 속 인물의 감정까지도 고스란히 전해져온다. 떨어지는 눈송이들과 소복하게 쌓여있는 눈, 그 차가우면서도 따뜻한 풍경 너머 보이는 신호소 앞으로 천천히 멈춰서는 기차. 일본의 눈 오는 시골에서 보이는 경치에서 고즈넉함과 편안함, 이 시간이 끝나지 않았으면 하는 감정들이 앞다투어 다가온다. 이 첫 문장뿐만 아니라 소설 속의 모든 묘사들이 매우 탁월하다. 게이샤 고마코의 눈 위로 드리운 촘촘한 검은 속눈썹 때문에 눈을 반쯤 감은 것처럼 보인다는 문장, 술을 마신 고마코의 모습에 대한 묘사, 눈 오는 일본 시골 지방의 때묻지 않은 모습, 기차에서 시마무라가 보는 차창의 거울 속에 비치는 풍경. 사실 그냥 책 아무데나 잡고 펼쳐도 그 속에 있는 문장과 묘사가 머릿속에 저절로 현실처럼 펼쳐질만큼 아름다운 소설이다. 작가가 얼마나 문장을 쓰는 데 고심하고 심혈을 기울였는지 알 수 있다. 아마 몇십번이나 지우고 쓰고 지우고 쓰고를 반복했을 것이다. 필자는 이 소설을 번역본으로 읽어야 한다는 것이 안타까웠다. 한글도 마찬가지지만 글이 다른 언어로 번역되는 과정에서 어쩔 수 없이 손실되는 것들이 있기 마련이다. 과연 저 첫문장을 내가 일본어로 읽을 수 있다면 어떤 느낌을 받을까. 이 소설의 문장들이 작가가 처음 쓴 일본어로는 어떤 뉘앙스로, 어떤 감정으로, 어떤 모습으로 읽혀지는지가 궁금해서 일본어를 좀 배워볼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소설의 서사와 스토리의 재미를 좋아하는 독자들에게는 심심하고 재미없는 소설일 수 있다. 하지만 과연 아름다운 문장이란 무엇인가, 글이란 것을 잘 쓴다는 건 어떻게 쓰는 것인가를 보고 싶다면 이 소설을 한 번 꼭 읽어보기를 권한다. 소설 속 한 문장 : 그 곳은 삼나무숲으로 이어지는 언덕 중턱인데, 창 바로 밑의 밭에는 무, 고구마, 파, 토란 같은 평범한 야채가 아침해를 받아, 제각기 다른 이파리 색깔들이 마치 처음 보는 듯 새로웠다.
<종이 동물원> 켄 리우
<종이 동물원> / 켄 리우 저 (지극히 주관적인 제 생각을 쓴 글입니다.) <종이 동물원>, 꽤 두꺼운 켄 리우의 단편집이다. 총 열네 편의 소설이 들어있으며 열네 편 전부 SF 혹은 판타지적 요소가 가미된 소설들이다. 작가의 이름에서도 알 수 있듯이 켄 리우는 중국인이다.(물론 어릴 때 미국으로 이민을 가긴 했지만) 그러다 보니 소설 속에서도 중국의 문화, 역사,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가 많이 나오는데 사실 동아시아 역사에서 한, 중, 일을 서로 떼 놓고 얘기할 수는 없지 않은가. 자연스럽게 한국, 조선에 대한 이야기들도 군데군데 출현한다. 어려운 과학적 설정이나 원리 같은 것도 그다지 없어서 한국 독자가 처음 SF 소설을 읽을 때 추천할 만한 소설집이라고 생각한다. 우리(한국)의 이야기가 나오는 만큼 몰입하기 쉬울 테니 말이다.(두껍긴 하지만 단편집이라서 시간 날 때 한편씩 읽기 딱 좋다) 켄 리우의 소설은 지난번에 리뷰했던 테드 창의 소설과는 또 다른 결을 가지고 있다. 테드 창의 소설이 소설을 빙자한 과학적 시뮬레이션(?)에 가깝다면 켄 리우의 소설은 Science "Fiction"이다. 켄 리우의 소설 속에서 과학은 Fiction의 설정이자 배경으로 사용될 뿐이다. 그의 소설에서 중요한 것은 과학을 바탕으로 한 배경 속에서 어떤 이야기가 펼쳐지는가라고 할 수 있다. 켄 리우의 소설에서 중요한 것은 Science가 아니라 Fiction이므로 <종이 동물원>에 실린 소설들에는 SF가 아닌 소설도 많다. 심지어 표제작인 <종이 동물원>부터가 SF가 아니라 판타지 소설에 가깝다. 다른 수록작들도 마찬가지다. <상태 변화>는 현대 판타지이고 <파자점술사>는 중국의 전통적 주술 문화, 파자점이 이야기의 주춧돌이 되며 <즐거운 사냥을 하길>에서는 중국의 요괴와 SF적 요소가 뒤섞여 매력적인 이야기를 이끌어낸다. 이게 켄 리우라는 작가의 강점이라고 생각한다. 그는 SF 작가도 아니고 판타지 작가도 아니며 장르문학 작가라고 한정 짓기도 꺼림칙하다. 그는 장르의 경계나 영역에 얽매이지 않는다. 자신이 하고 싶은 이야기에 SF적 요소가 필요하다면 SF를, 판타지적인 배경이 필요하다면 판타지를, 역사나 신화적 요소가 필요하다면 그 또한 거리낌 없이 소설 속으로 끌어들인다. 정통 SF 소설만을 애정하는 독자라면 이 소설집에 오히려 실망하지 않을까 싶을 만큼 그의 소설에는 경계도 제한도 없다. 개인적으로 켄 리우라는 작가가 이렇게 다양한 소재와 배경을 바탕으로 장르의 경계를 넘나들며 소설을 쓰게 된 데에는 그의 삶이 한 몫하지 않았을까 생각한다. 그는 중국에서 태어나 중국에서 어린 시절을 보내고 청소년기에 미국으로 이민을 오게 된다. 많은 혼란과 의문이 그의 청소년기를 뒤덮었을 것이다. 나는 누구인가. 중국인인가 아니면 미국인인가. 나는 어디에 속하는 것일까. 이렇듯 수많은 의문 끝에 그는 이런 결론을 내리지 않았을까? 내가 어디 속하는지 혹은 어느 집단의 일원인지가 아니라 나 자신이 어떤 사람인지가 중요하다는 결론을. 작가가 된 켄 리우는 마찬가지 생각으로 소설을 써 내려갔을 것이다. 중요한 것은 내가 쓰는 소설이 SF인지, 판타지인지, 역사나 신화 소설인지가 아니라 내가 쓰는 소설이 담고 있는 이야기라는 생각으로. "나는 판타지와 SF를 구별하는 데에는 별 관심이 없다. 관심이 없기로는 '장르 문학'과 '주류 문학'을 구분하는 것 역시 마찬가지이다." 켄 리우는 머리말에서 위와 같이 이야기한다. 그의 소설들을 한편씩 읽어나갈 때마다 계속해서 위의 문장이 떠올랐다. 나는 저 문장이 켄 리우의 소설들에 새로움과 놀라움을 부여했다고 생각한다. 언제나 경계가 허물어질 때, 구분이 사라질 때, 전혀 다르다고 생각했던 것들이 합쳐질 때 새로운 것들이 태어나기 마련이니까. SF를 사랑하는 사람들에게는 <고급 지적 생물종의 책 만들기 습성>과 <상급 독자를 위한 비교 인지 그림책>, <모노노아와레>를, 환상과 판타지를 좋아하는 독자들에게는 <즐거운 사냥을 하길>과 <송사와 원숭이 왕>, <파자점술사>를, 소설 속 드라마를 느끼고픈 이들에게는 <종이 동물원>과 <레귤러>, <역사에 종지부를 찍은 사람들>을 권하고 싶다. 만약 그냥 재미있는 이야기를 읽고 싶은 독자가 있다면 소설집 전체를 앞에서부터 차례차례 읽어나가길 바란다. 소설 속 한 문장 이것이야말로 정상적인(regular) 세상의 모습이다. 명쾌함도, 구원도 없다. 모든 합리성의 끝에는 그저 결정을 내려야 할 순간과 품고 살아가야 할, 그러면서 견뎌야 할 믿음뿐이다.
<오리엔트 특급 살인> 애거서 크리스티
<오리엔트 특급 살인> / 애거서 크리스티 저 (지극히 주관적인 제 생각을 쓴 글입니다.) 생애 두 번째로 읽은 애거서 크리스티의 소설이다. 첫 번째는 중학교 시절에 처음 읽었던 <그리고 아무도 없었다>인데 읽고 나서 굉장히 충격을 받았던 기억이 있다. 어떻게 이런 트릭을 생각해내지?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엄청난 결말이었다.(사실 그 이전에 추리소설을 별로 읽은 적이 없어서 더 충격이 컸던 것 같긴 하지만 그럼에도 명작은 명작이다. 애거서 크리스티 소설에 입문하고 싶다면 <그리고 아무도 없었다>로 해보는 걸 추천한다.) 그 뒤로 한동안 추리소설과는 멀어진 채 지내다 오랜만에 읽게 된 게 바로 이 소설, <오리엔트 특급 살인>이다. 사실 이 소설을 읽기 전에 영화로 만들어진 <오리엔트 특급 살인>을 봤었다. 그래서 결말을 어느 정도 알고 있기에 재미가 덜하지 않을까 생각했는데 전혀 아니었다. 역시 손에 꼽히는 애거서 크리스티의 소설 가운데 하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스토리는 간단하다. 폭설로 도중에 멈춰버린 기차 안에서 한 남자가 살해당한다. 그것도 밀실에서. 그런데 하필 기차에는 위대한 탐정 에르퀼 푸아로가 타고 있었고 그는 명석한 두뇌로 승객들의 증언, 그리고 증거를 통해 놀랄만한 추리를 해 나간다. 폭설에 갇힌 열차 안에서 도망갈 수 있는 사람은 없으니 승객 중에 범인이 있을 것이 자명한 상황. 푸아로의 추리를 따라 진범에 도달하는 과정이 소설의 전부다. 사실 추리 소설에서 중요한 건 명석한 두뇌의 탐정이 증거와 증언을 통해 놀라운 추리를 완성해 나가는 과정을 목격하는 것이다. 그런 면에서 볼 때 이 소설은 매우 뛰어난 추리소설이다. 먼저 모든 증언과 증거를 독자들에게 던져주고 충분히 그것을 통해 진범을 추리해 볼 시간을 준다. 그러나 물론 대부분의 독자는 그것들에서 진실을 찾아내지 못한다. 혹 증거나 증언의 모순을 찾아내더라도 그것을 해결할 수 있는 진실에 도달하는 것은 매우 뛰어난 논리력과 추리력, 심리를 파악하는 능력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그렇게 독자의 궁금증은 최고조에 이르게 되고 그때 우리의 회색 뇌세포, 에르퀼 푸아로가 등장해 단 하나의 진실을 낱낱이 드러내는 추리를 보여준다. 결말의 추리에서 독자는 지적 카타르시스를 느끼게 된다. 연관성이 없어 보이는 증언들 사이의 숨겨진 다리를 찾아내고, 여러 증거와 증언들의 모순을 단번에 깨버리는 논리적 설명을 보여주며 결국 단 하나의 진실에 다가가는 푸아로의 추리가 마치 논리 문제나 어려운 퍼즐을 해결하는 듯한 느낌을 주는 것이다. 이 소설은 그러한 추리소설의 목적을 탁월하게 구현하며 독자에게 즐거운 독서를 제공한다. 하나 더 이 소설의 장점을 꼽자면 캐릭터 구성 능력이다. 소설 속에는 객차의 승객 열두명과 차장들, 주인공 푸아로, 의사인 콘스탄틴, 그리고 기차 회사의 중역 부크가 등장한다. 보통 이렇게 많은 인물이 등장하면 서로 헷갈리거나, 비중이 적은 인물은 기억을 하지 못하기 마련인데 이 소설은 그렇지 않다. 각 인물들의 외모, 성격, 나이, 국적 등이 전부 특색 있고 대부분의 인물이 성격에 따라 서로 다른 말투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대화만 봐도 어떤 인물이 말하는지 바로 알 수 있을 정도다. 이렇게 많은 인물이 각각의 매력을 가지도록 만드는 건 정말 어려운 일이다. 그러나 애거서 크리스티는 그걸 해냈다. 추리와 진실의 놀라움과 별개로 이 소설이 가지는 또 하나의 놀라움이다. 아쉬운 점을 꼽자면 국가나 인종에 대한 편견이 소설 속에 그대로 반영되었다는 점과 서술 상에서 너무 많은 인물의 시점을 왔다 갔다 하기 때문에 어떤 인물의 시점인지 헷갈리는 부분이 있다는 점을 들 수 있다. 물론 당시 시대 상황을 생각해보면 국가나 인종에 대한 편견이 지금보다 훨씬 강했기 때문에 어느 정도 이해할 수 있겠지만 현대의 독자가 읽을 때 아쉬운 부분인 것은 확실하다. 독자가 읽을 때 인물의 시점이 헷갈리는 부분이 있다는 점은 소설로써의 완성도를 조금 떨어트리는 요인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물론 그런 부분이 많지는 않지만 존재하고 있다는 것이 아쉬울 따름이다. 훌륭한 '추리'소설이자 추리'소설'이다. 추리의 재미와 놀라움도 확실히 잡았고 독자에게 질문을 던지고 생각을 하게 만드는 소설의 면모도 충분히 갖췄다. 애거서 크리스티의 소설에 관심이 있지만 아직 읽어보지 못한 독자라면 <오리엔트 특급 살인>을 추천하고 싶다.(물론 <그리고 아무도 없었다>도 추천한다.) 소설 속 한 문장 "그렇다면 두 번째 추리를 내놓아야겠군요. 하지만 첫 번째 추리를 너무 성급하게 포기하지는 마십시오. 나중에라도 그것에 동의하게 될지 모르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