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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세 유럽을 공포에 빠트린 인류의 적
그거슨 늑대였고요 늑대의 생태를 자세히 뜯어보면 1. 넓은 영역을 가지고 2. 고도로 발전된 무리 생활을 하며 3. 주변 동물들을 무리 사냥한다 는 특징이 있는데 이는 원시 인류와 아주 비슷한 생활 양식이었다 필연적으로 늑대는 인간과 경쟁할 수 밖에 없었으며 생존을 위한 전쟁을 치룰 수 밖에 없었다 늑대와 인간의 경쟁은 인간의 도구가 발달하고, 늑대와 동등한 능력을 가진 배신'견'들이 인간 쪽에 붙으면서 전세는 점차 인간 쪽으로 기울어갔고 고대가 되자 늑대들은 인간이 오지 않는 숲이나 오지로 도망치게 되었다 (인간과 늑대의 경쟁에서 큰 변수를 만든 무시무시한 배신자.jpg) 하지만 유럽은 중세까지만 하더라도 인간이 개척한 마을과 도시보다 숲이 더 넓었고 숲 속에서 늑대들은 무리를 만들고 사냥하거나 인간이 키우는 양을 공격하기도 했다 영역의식 때문인지 오랜 전쟁에서 패배하고 얻은 교훈인지 늑대들은 자신의 영역에 침범한 인간은 공격하되 인간의 영역을 적극적으로 공격하지는 않았지만 극심한 겨울이 오거나 사냥감이 부족해지면 늑대들도 조직적으로 인간 영역을 공격해왔다 늑대들이 도시나 농촌을 공격했다는 사례가 지금까지도 전해져 오는데 소설로도 만들어진 1450년, 늑대의 파리 공격이 유명하다 파리는 큰 도시여서 외부가 벽으로 둘러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굶주림을 참지 못한 늑대 무리가 벽의 틈새를 넘어와서 사람들을 공격했고 늑대들이 시내를 점거하면서 파리는 혼란과 공포에 빠져버린다 지금처럼 통신이 발달하거나 드론을 띄울 수도 없었던 시기였기에 군대라고 뭐 딱히 뾰족한 수가 없었는데 파리 시민들과 숙련된 사냥꾼들이 미끼를 놓아 늑대를 모으고 우두머리를 잡아버리면서 늑대들은 파리에서 도망쳤다 늑대 우두머리의 시체는 대성당 옆에 전시되었는데 이 늑대는 사람을 40명이나 죽였기에 사람들이 지나가면서 시체에 돌을 던졌다고 한다 1765년 파리 북부 수이송에서도 늑대 무리가 마을을 공격해서 임산부와 아이같이 약한 사람을 골라 사냥했고 사람들은 희생자들의 시체를 모아 미끼로 두어서 늑대들을 모은 다음 포위해서 공격하기도 했다 늑대 일부가 포위망을 뚫고 도망쳤지만 지역 민병대원이 추적 끝에 죽이는데 성공했고 이 소식을 들은 루이 15세는 이 민병대원에게 용기에 대한 포상으로 300 리브스의 상금을 주었다 이렇게 도시나 마을을 공격하는 사례도 드문드문 있었지만 영역이 모호한 중세의 길은 늑대들의 습격이 잊을만하면 나왔다 프랑스에서는 16세기 ~ 19세기까지 늑대의 공격으로 5000명 가까이 희생자가 나왔고 러시아 제국에서는 1871년 한해동안만 164명이 늑대의 공격으로 죽었다 (사람의 머리부터 먹으려는 흉폭한 늑대) 인류가 총이라는 강력한 도구를 얻었지만 늑대는 여전히 무서운 존재였다 1차 대전 때 민스크의 굶주린 늑대 무리는 러시아와 독일군을 공격했고 이로 인한 피해가 커지면서 양측 군대가 일시적으로 휴전하고 늑대를 사냥하기도 했다 T-34가 굴러다니고 핵폭탄이 떨어지는 2차 대전 때도 동부전선에서 군인들은 늑대들의 공격을 받았다 인간과 비슷하면서 가장 오래 싸워온 적이다보니 늑대는 고대부터 지금까지 여러가지 이미지가 더해져왔다 늑대에 물렸다가 간신히 살아난 사람이 광견병에 걸려서 이상하게 변한걸 보고 늑대인간 신화가 만들어졌으며 동화에서는 폭력적이고 잔인한 악당으로 등장한다 인간과 비슷하게 무리 생활을 하면서 인간이 살지 않는 땅을 지배한다는 신비한 이미지로 여러 국가에서 숭상받기도 했는데 로마의 로물루스, 레무스도 늑대 젖을 먹고 살아났으며 독일에서는 자연신의 모습으로 늑대가 나타나기도 한다 몽골은 늑대를 조상신으로 여겼다 (늙은 양치기의 상주 - 영국의 동물화가 '에드윈 린드시어') 사촌 형은 공포의 괴물이나 신비한 신령의 이미지가 박혀버렸지만 그래도 댕댕이는 인간의 가장 가까운 친구 P.S. 참고한 논문은 2009년에 나온 The prehistoric and preindustrial deforestation of Europe 어제 늑대글 올리고서 "그때 왜 숲 안밀어버림?"이라는 내용의 댓글이 달렸는데 유럽 전역을 덮고 있는 숲을 개간하는건 엄청난 노동력을 필요로 하는 일이었기에 손대기 어려운 일이었다 그리고 자연도 가만있지는 않아서 숲을 개간하더라도 거기에 사람이 살지 않으면 수십년 후에는 다시 어린 숲들이 올라왔다 (버려진지 수십년 밖에 안된 도시-체르노빌-도 외곽부터 숲과 야생동물들이 깃발 꼽고 있다) 그래서 숲 개간은 인구증가에 따라서 인간이 천천히 숲을 밀어내는 형식으로 서서히 진행되었다 지도를 보면 고대에는 로마와 그리스 같이 인구가 많고 도시 문명이 발달한 곳에서 빠르게 개간이 나타났고 기원후 350년부터 1000년까지는 숲개간이 느리게 진행되었다가 다시 1500년부터는 개간이 빨라졌다 산업혁명 직후인 1850년 때는 숲 개간이 엄청나게 가속화되었다는걸 알 수 있다 카오스 게이트가 열리고 인간들이 거기로 이사가게 된다면 아마 200년 정도만 지나면 기원전 1000년 숲 지도로 돌아갈거임 숲 개척하고 유지하는건 문명의 힘하고 비례하는거여서... 그나저나 식목일을 다시 공휴일로 만들어주면 안되나? (출처) 댕댕이 이 배신자들ㅋㅋㅋ
일본에 포로로 끌려간 내가 일본 주자학의 아버지?
오늘의 주인공은 강항(1576~1618) 임진왜란이라는 대사건 속에서 기구한 삶을 살다 갔지만 알게 모르게 일본에 큰 영향을 끼치고 간 사람이었다 강항은 임진왜란 도중인 1593년에 문과에 급제했고 4년만에 형조 좌랑까지 올랐다 전쟁이 소강상태가 되자 잠시 휴가를 얻어 고향인 영광에 내려와 있었는데 정유재란이 터지는 바람에 휴가가 쫑나고 군량수송임무를 수행했다 강항한테는 비교적 사소하지 않은 문제가 있었는데 당시 수군통제사가 이순신 장군이 아니라 원균이었다는 점. 칠천량 해전 패배의 여파로 일본군의 공세에 직면하게 된 강항은 간신히 영광으로 도망쳐 의병을 모았다 (?? : 님아 ㅈㅅ) 하지만 사방에서 몰아닥치는 일본군의 공세 앞에 의병이 제대로 모일리가 없었고 기껏 모은 한줌의 의병도 도로 흩어졌다 이순신이 수군 통제사로 돌아왔다는 소식을 들은 강항은 이순신에게 가려고 가족들과 배를 타고 가던 중 일본군에게 포로로 잡히게 된다 그리고 강항이 문관 고위직이라는 사실을 알게 된 일본군은 강항을 일본으로 보내버렸다 일본으로 가는 길은 매우 힘들었는데 아들과 딸이 죽었으며 병에 걸린 조카가 일본군에 의해 산채로 수장되기도 했다 강항 본인도 가족들이 죽어나가는걸 보고 자살을 시도했지만 실패했다 처음에는 일본 에미헤현에 감금되었는데 탈출 시도가 적발된 후 수도인 교토로 이송되었다 강항에게는 천만다행인게 교토에는 말이 통하는 지식인들과 접촉할 수 있었다 후지와라 세이카와의 국적을 초월한 만남이 이때 성사된다 강항이 기록한 세이카는 매우 파격적이었는데 '두뇌가 총명하고, 옛글을 잘 쓰며, 책을 많이 읽는 성품이 바른 사람으로 다른 일본인들과는 다르다'라며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세이카는 학구열이 높은 사람으로 성리학을 독학으로 공부하였으나 아직 일본에 성리학이 제대로 전수되지않아 배움에 어려움이 많았는데 조선에서 장원급제한 '성리학 마스터'가 고위직 포로로 끌려왔으니 그야말로 동경하던 아이돌이 옆집에 이사온 꼴이었다 서로 의기투합한 두 사람은 자주 만나며 이야기를 많이 나누었는데 강항은 조선 정부의 시스템과 과거 제도, 여러가지 성리학 해석을 가르쳐주었고 세이카는 승려의 신분을 버리고 유학자로 갈아탔다 강항이 포로 생활로 힘들어할때 세이카는 강항에게 은전을 주어 생활비로 쓰게 하였으며 강항은 세이카에게 사서오경 일본식 해설집을 만들어주기도 했다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죽자 강항이 조선에 돌아갈 수 있게 힘을 써준 것도 세이카였다 임진왜란에서 드물디 드문 국경을 초월한 우정. 1600년 조선 땅을 밟은 강항은 한양에 올라가 일본에 대하여 자세한 보고를 올렸고 기록을 모아 '간양록'을 지었다 이후 벼슬을 버리고 고향에 내려가 후학을 양성하다 1618년 51세의 나이로 사망한다 도쿠가와가 일본을 재통일하고 군사적인 필요가 없어진 사무라이들을 문신으로 바꾸기 위해 유학을 주입하는데 이때 후지와라 세이카를 불러 대학에서 유학을 가르치게 했다 그렇게 일본에 주자학과 성리학이 자리잡게 되었는데 세이카의 제자 하야시 라잔은 도쿠가와의 개인유학 교사인 '시강'이 되었다 100년도 지나지않아 17세기 후반이 되면 조선 주요 수출품에 성리학 서적이 포함되고 조선통신사들이 일본에 오면 일본유학자들이 이들을 잡고 학문과 정치를 논했다 하니 전쟁포로였던 강항이 쏘아올린 작은 공이 마냥 작지만은 않았던거 같다 일본에는 강항 헌창비가 있는데 일본인들이 여기에 '일본 주자학의 아버지, 유학자 강항'이라고 적어놓았다 피를 피로 씻는 임진왜란이었지만 강항과 세이카처럼 동화 같은 이야기도 있었다구.... 강항의 기록에는 재밌는게 많은데 "우리나라 사람들은 조선이 일본보다 크다고 하는데 믿을만한 일본인(세이카)이 보여준 기록을 보니 일본이 우리보다 더 큰거 같아요" "일본 군인들은 수백, 수십년 묵은 오래된 검(원문은 천년, 수백년)은 챙겨가는데 최근 만들어진 검은 안 좋다고 그냥 버려요" "조선에서 돌아온 일본애들이 자기들은 한두걸음 칼싸움을 잘하는데 조선애들은 수백걸음 밖에서 활을 쏴서 힘들었다고 하네요" "일본은 세금을 너무 거두어서 백성들이 힘들어하고, 군인으로 끌려가는 애들은 충성심이 아니라 먹고 살려고 따라다닐 뿐이니 이전에 항복한 왜인들을 잘 품어주었으면 좋았을것 같네요"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출신에 문제가 많고 지식인들 중에서는 알음알음 천하가 뒤집어졌다(신분제가 아작났다)라는 불만이 나오곤 해요" 등등 몇 안되는 고위직 포로의 신분으로 그 당시 일본 상황을 총망라한 보고서여서 당시 일본을 이해하는데 도움이 되는 자료가 많다 (출처) 저게 바로 한류인가 K-성리학
황제가 직접 일기토 뜬 이야기
오늘의 주인공은 오스만 제국의 영토를 크게 확대시켜 부흥기의 초석을 깐 정복황제 마호메트 2세가 되시겠다 이 사람의 업적으로 가장 유명한건 콘스탄티노플을 기어코 함락시켜 비잔틴 제국의 숨통을 사실상 끊은건데 누구나 그렇듯 엄청난 군사적 업적 뒤에는 여러 실패가 있었다 이제 이야기해볼 일기토도 그런 실패 중 하나이다 마호메트 2세는 콘스탄티노플 점령 후 1년만에 세르비아의 수도이자 헝가리 남부의 숨통을 쥘 수 있는 핵심도시인 베오그라드를 공격한다 세르비아는 기독교 국가임에도 오스만의 눈치를 보며 콘스탄티노플 공방전 때 기병들을 지원해준 적도 있었는데 완전히 통수를 맞아버렸다 마호메트 2세는 10만의 대군과 300문의 대포, 황제 본인이 직접 이끄는 근위대이자 정예보병인 예니체리까지, 작정하고 병력을 끌어모았으며 이는 최강의 성벽이라는 콘스탄티노플을 함락시킬때의 병력과 비슷한 수준이었다 이에 질린 헝가리 왕은 사냥을 핑계로 도망쳐버렸고 군주가 부재한 상황에서 봉건의무가 있는 귀족들도 절반정도 소집에 응하지 않았다 이때 헝가리의 명장 후녀디 야노시가 국왕의 부재를 대신해 병력을 지휘하기 시작했고 교황 칼릭토스 3세도 추기경을 보내 국왕을 대신하는 정통성을 주어 '기독교의 방패'를 지원하게 한다 이때 추기경의 대처가 매우 훌륭했는데 교황의 전권대사로 독립된 지휘권을 가지고 있었음에도 사실상 후녀디 밑으로 들어가 그의 부탁(을 가장한 명령)을 충실히 따르면서 지휘 혼란을 처음부터 틀어막아주었다 덕분에 후녀디는 짧은 시간만에 본인이 가진 1만의 정예병에 4만명의 지원병을 모을 수 있었고 오스만을 상대로 방어해볼만한 병력을 가지게 된다 이렇게 총 5만명의 기독교 구원병은 왕에게 버림받고 포위된 베오그라드로 진격한다 기독교군이 도나우 강까지 이르렀을때 오스만 해군이 이들을 저지하려고 했지만 이를 돌파했고 뚫린 포위망 사이로 들어가 베오그라드로 입성하는데 성공한다 따끈따끈한 지원병 + 유능한 지휘관이 들어와 공성전이 새 국면에 진입한 것에 당황한 마호메트 2세는 콘스탄티노플에서 성공했었던 대포로 성벽을 뚫고 정예병인 예니체리를 중심으로 하는 보병을 밀어넣어 틈을 벌리는 작전을 사용한다 깡화력과 고급 보병의 힘을 빌린 이 작전으로 베오그라드 성벽이 돌파당하고 예니체리가 성 안에 진입하는데 성공하지만 이를 예상했던 후녀디는 돌파된 성벽 근처에 불을 질러 천연성벽(섭씨 1500도)을 만들고 고립된 오스만 보병대를 역포위해 공세를 밀어내는데 성공한다 후녀디는 적의 대공세를 막은거에 만족하고 한숨 돌리려고 했는데... 다음날 새벽 추기경 휘하의 지원병 일부가 통제를 거스르고 밖에 나가 오스만 진지를 공격해버린다 어제 큰 피해를 입고, 이른 새벽에 멍때리고 있던 오스만 군대는 오합지졸 자원병들에게 혼비백산나기 시작한다 나중에 종군신부의 수호성인으로 시성되는 카피스트라노 신부는 에라 모르겠다 ㄱㄱ 를 외치며 70대의 노구를 이끌고 선봉에 서서 싸우고 있었다 약 3초간 멍때린 후녀디는 예상치도 못한 찬스를 살려 정예병들을 내보내 대대적인 공격을 가했고 오스만 군은 혼란에 빠져 무질서하게 무너지기 시작한다 지원병이 툭하고 찔러본 새벽기습에 전군이 무질서하게 붕괴되는 판타지를 직접 본 마호메트 2세는 예니체리를 이끌고 전선에 서서 이슬람군의 혼란을 통제해보려고 한다 그리고 전장에서 헝가리 기사에게 결투를 신청해 1 : 1로 싸워서 이기는데 성공하며 사기를 끌어올리는거 같았는데 자신의 존재감을 과시하며 직접 전장에 서고 + 일기토까지 신청해 이기는 건 대놓고 '나 최고지휘관인데 지금 여기 있소!'라는걸 알리는 꼴이었고 얼마안가 헝가리군 화살에 저격당해 의식을 잃는다 그리고 그런 황제를 지키기위해 수많은 예니체리들이 목숨을 갈아야했고 수많은 정예군이 그렇게 새벽이슬로 사라졌다 간신히 몸만 빼온 마호메트 2세는 10만명 중 손실이 7만 5000명, 대포 300개 전부 상실, 그동안 야금야금 먹어온 세르비아 영토 전부 토해냄 이라는 성적표를 받게 된다 24세의 젊은 황제는 음독자살을 시도할 정도로 심신이 박살나버렸고 그렇게 전쟁도 터져버린다 비잔틴 제국을 박살낸 악마의 군대를 상대로 빛나는 승리를 거둔 '기독교의 방패' 후녀디와 종군신부 카피스트라노는 삶의 모든걸 다 태웠다는 듯 공방전 직후 전염병과 노환으로인해 멀리 떠나버린다 후녀디의 장남 라즐로가 그 자리를 대신했지만 권력싸움 끝에 처형당하고 차남 마차시도 감옥에 갇히지만 반란이 일어나 풀려나고 유력귀족들의 지지를 받아 헝가리의 새로운 왕에 오르게 된다 (카피스트라노의 요한은 추기경이 아니라 나중에 성인으로 추앙된 종군신부님이었고 다른 추기경 님이 있었대) ??? : 팩션 지도자 달았으면 일기토 좀 작작하라고;;;;;; (출처) 그래도 총 없어서 목숨은 건졌네 ㄷㄷ
가톨릭의 성녀 마르가리타
안티오키아의 성녀 마르가리타. 천주교의 14구난성인 중 한 명으로 굉장히 유명한 순교자 중 한 명이다. 그녀는 원래 이교의 사람이었으나, 믿음 있는 자였던 유모 덕에 카톨릭의 믿음을 전파 받는다. 이후 신실한 마음을 가지고 아름다운 여인으로 성장한다. 누군가에게 있어 아름다움은 축복이었겠지만, 마르가리타에게 아름다움은 독이었다. 안티오키아 지사로 임명된 올리브리오가 그녀의 아름다움을 보고 한 눈에 반해버렸기 때문이다.  추악한 욕망에 찌든 올리브리오는  아름다운 마르가리타에게 청혼을 한다. 심지어 그는 이미 결혼한 몸이었는데, 아내와 이혼할 테니 자신과 결혼해달라고 요청한다. 하지만 마르가리타는 이를 거절하고 자존심이 상한 올리브리오는 분노에 미쳐 날뛰게 된다. 이후 그는 마르가리타가 금지된 그리스도교 신앙을 가지고 있다는 이유로 지하 감옥에 가둬버린다.  이후 고문과 회유가 반복되는 끔찍한 감옥 생활이 이어진다. 하지만 신실했던 마르가리타는 믿음으로 이를 이겨낸다. 그러던 어느 날, 어두컴컴한 어둠에  그녀를 유혹하기 위한 악마가 찾아온다. 악마는 기괴한 용의 모습을 하고 있었다. 악마는 마르가리타에게 찾아와 유혹하기 시작한다. 마르가리타, 마르가리타. 불쌍한 소녀여. 네 신은 너의 고난을 보고도 아무 대답도 해주지 않는다. 왜 그럼에도 너는 신을 믿는가? 신을 저주해라 그리고 믿음을 버려라. 세상 모든 걸 원망해라......!!! 감옥에 갇혀 죽을날만 기다리고 있던 마르가리타에게 악마의 유혹과 위협은 크나큰 고난이었다. 마르가리타는 악마를 마주한 채..... 가슴에 품고 있던 신앙심이 깃든.... 망치를 꺼낸다. 그것도 존나 크고 아름다운. 안 그래도 별 거지 같은 이유로 감옥에 갇혀서 고문 당하느라 빡쳐 있던 마르가리타는 눈에 뵈는게 없었다. 왜 어째서 감옥에 갇혀 있던 성녀가 가슴에 망치를 품고 있었는지는 묻지 말자. 중요한 건,  사탄이 안 그래도 빡쳐 있던 성녀의 콧털을 건드렸다는 거다. 정설에 의하면,  성녀 마르가리타는 그 말을 들은 즉시 사탄의 머리끄댕이를 붙잡고 망치로 뚝배기를 후려갈겼다고 한다. 그래서 마르가리타를 그린 그림을 보면 유독 사탄의 머리를 잡고 침착하게 망치를 내리 치는 모습이 많다. 그냥 울먹이면서 망치를 휘두르는 그런 나약한 모습은 상상하지 말자. 나사렛의 몽키 스패너의 믿음을 이은, 안티오키아의 정의로운 장도리는 그런 것 따위는 없다 머리 채를 잡고 정확히 망치를 후려 갈기는, 숙련된 자세로 악마를 퇴치하셨다. 망치로 악마를 때려잡는 그림이 성모마리아라는 오해가 있는데 자애로우선 성모님은 망치로 악마의 머리를 때리는 일은 하지 않으신다. 그 분은 그냥 주먹으로 갈긴다. 도구 따위에 의지하지 않으신다. 오해 없길 바란다. 아무튼 이렇게 악마를 때려잡자 갑자기 하늘에서 빛이 내려왔고 많은 사람이 그걸 보고 기적이 일어났다고 생각해 놀라워 하면서 그리스도교의 믿음이 전파되었다고 한다. 하지만 성녀 마르가리타는 그 이후로 고난을 받다가 결국은 참수형으로 세상을 떠나게 된다. 참수형도 칼로 10번 이상을 내리쳤을 정도로 고통스럽게 사망했다고 한다. 이후 성인의 반열에 들었지만, 문제는 당시 카톨릭에서는 망치로 악마를 때려잡는 성녀를 그릴 수가 없어서 믿음과 기도로 악마를 물리치게 했다는 장면으로 순화시킨다. 이후 그림을 보면 성녀 마르가리타는 망치 대신 십자가를, 눈 부릅 뜬 얼굴에서는 자애와 편안함이 머문다. 그리고 그녀를 위협했던 용 역시 그냥 불쌍한 애완동물처럼 그려진다. 하지만 정교회는 그런거 없어서 그냥 마르가리타가 빡쳐서 망치 들고 악마 패는 모습을 적나라하게 그린다. 아무튼 후에 천국에 간 성녀는  먼 훗날, 신의 부름을 받은 또 다른 성녀 앞에 나타나 위대한 주님의 뜻을 전한다. 그리고 마르가리타로부터 계시를 받은 그 성녀가 바로.... 예수초즌, 잔다르크다. 성녀 잔다르크는 성녀 마르가리타의 환시를 받고 영국군의 대가리를 깨버린다. (출처) 어쩐지 마르게리타 맥주와 마르게리타 피자가 맛있더라니 다 뚝배기 맛이었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