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alrapp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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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군가와 대화를 하는데, 상대가 극단적인 사람이라면, 그러니까 더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자신이 지향하는 가치에 너무 극단적이라 어떤 얘길 해도 모든 것이 그쪽 방향으로 치닫는다면 대화는 거의 불가능하다. 왜냐, 어떤 얘길 해도 어차피 그쪽으로 흘러갈 테니까. 그렇다면 어떤 대화의 시도도 거의 무의미하며, 그러므로 대화는 곧 단절된다. 뭐 그런 가치는 정치적 이념일 수도 있고, 종교일 수도 있고, 흔치는 않지만 문학, 특히 시일 수도 있겠다. 그런데 만약 상대가 지향하는 그 극단적인 가치가 다름 아닌 바로 '나'라면. 나를 향한 맹목적인 사랑이라면. 참 난감할 것이다. 그 난감한 사람 중 하나가 역시 부모라는 존재이다.

엄마를 떠올리자면 뭐 거의 그런 식이지만, 오늘 역시 그랬다. 가족 식사를 마치고, 엄마의 방에 들어가 보니 침대 위에 최근에 출간된 박완서의 에세이 한 권이 놓여 있었다. 다른 장르도 아닌 문학이라니. 나는 엄마가 문학 도서를 읽고 있다는 사실이 반가워, 웬 박완서의 책을 읽고 있냐고 물었다. 그건 순수하게 엄마가 문학을 접하고 있다는 사실이 반갑다는 의미였다. 그러나 역시 돌아오는 답은 그러했다. 생일 선물로 직장 동료에게 받은 거라며, 안 읽었으면 가져가라고 했다. 당연히 나는 그런 의도의 말을 한 게 아니다. 신간 한 권 구해서 읽는 게 내게 어려운 일은 아니지 않은가. 엄마는 내게 자신의 것은 다 주고 싶다.
언제부턴가는 엄마의 물건 중 생소한 것이 보여도 그것에 대해 묻기가 조심스럽다. 돌아올 말은 뻔하니까. 가지고 싶으면 가져가라. 해준 음식을 먹을 때 칭찬하기도 두렵다. 싸줄 테니 가져갈래? 가져갈 상황이 여의치 않으면 곤란할 뿐이다. 뭐 뻔한 말이 돌아올 것을 역시 뻔히 알고 있지만, 그래도 말한다. 맛있다. 그래도 그것이 부모의 기쁨인 것을 잘 아니, 퉁명스레 대하기도 어렵고, 내내 거절하기도 힘들고, 여러모로 엄마와의 대화는 힘들다. 부모와 순수하게 대화를 하는 것은 불가능한가. 뭐 그렇지 않고 자연스런 대화가 가능한 부모자식들도 많겠지만, 우리 집안의 문제로만 따지자면 대화의 부재가 곧 이런 상황을 만들었을 거라 생각한다. 그러니 이것은 엄마의 잘못만도 아니고, 나의 잘못이기도 하다. 결국 해결책은 많은 대화를 시도하는 것일 뿐이다. 역시 가장 어려운 관계는 부모자식이다. 언젠가 어버이날에 그런 글을 쓴 적이 있다. "오늘은 시도하는 모든 것이 불효다."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불효가 될지라도 관계를 위한 많은 시도가 있어야 결국 친밀감을 형성하고, 미약한 효라도 끌어낼 것이다. 오월은 여러모로 쉽지 않은 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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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한 주 끝. 어제는 봉준호의 <괴물>을 다시 보았다. 오래전에 보았던 영화를 다시 보는 재미가 쏠쏠하다. 오래전 그 영화를 보았던 나와 지금의 나는 다른 사람이기 때문이다. 또한 그것은 일종의 공공재로서의 타임캡슐이기 때문이다. 2006년 <괴물>의 개봉 날짜만 기다렸다가 개봉 첫날 보러 갔던 기억이 난다. 영화 초반 한가로운 한강공원에 괴물이 드디어 화려하게 모습을 드러냈을 때 탄성마저 질렀던 기억이 난다. 와아! 그리고 내가 만든 영화라도 되는 양 나직이 읊조렸다. 아, 천만 관객은 그냥 넘겠구나. 그리고는 천만을 넘어 한동안 꽤 오랫동안 가장 많은 관객을 동원한 한국 영화로서 기록을 유지했던 것으로 안다.  당시로써는 아주 어마어마한 제작비가 CG에 쓰인 것으로 아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금 시각에서 볼 때는 아주 어설프기가 그지없다. 그런데 봉준호가 그걸 몰랐을 리가 없다. 어설픈 CG로라도 모험을 감행한 봉준호에게 정말 감사할 지경이다. 그렇다.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현재로서는 다소 어설픈 테크닉이라도 그것을 통해 뭔가를 도모해볼 수 있다면 시도해야 한다. 저곳을 오르면 무언가가 보일 것 같은데, 아주 허약한 사다리밖에 없으니 조금 더 견고한 사다리가 만들어질 때까지 기다려보자는 게 아니라, 이 허약한 사다리라도 딛고, 위험을 감수하며 가보는 거다. 봉준호는 많은 것을 미리 내다봤다. 한강에 괴물이라니, 이 지극히 한국적인 사회에 벌어진 괴생명체 스토리라니. 이러한 황당무계한 설정은 할리우드나 되어야 수긍이 가던 시대였다. 지금이야 한국 영화가 우주까지 나아갔지만, 정말로 그때는 이런 설정이 모험에 가까웠던 것이다. 미국인들이 이끌어가는 이야기가 아니라, 한국인들이 한국인 특유의 방식으로, 한국인 특유의 유머로, 이제까지의 한국 영화에 없던 새로운 상황에 던져지는 것. 개인적인 생각이지만 홍상수 역시 어떤 점에서 유사한 지점을 보여준 적이 있다. 그를 한 단계 더 도약시킨 작품 가운데 <생활의 발견>이 그렇다. 모든 작품이 그런 것은 아니지만, 홍상수는 프랑스의 에릭 로메르 감독과 상당히 비슷한 문법을 구사할 때가 있는데, <생활의 발견> 역시 그렇다. 그런데 문제는 그 방식이 홍상수만의 것이 아닌 에릭 로메르의 것이라고 해도, 공간 자체가 한국이며 그 공간을 점유하고 있는 사람들이 한국인이다. 또한 한국의 전설을 그대로 시나리오에 활용한다. 한국이라는 재료로 만드는 에릭 로메르 풍의 영화. 그것은 이미 로메르 풍을 넘어선다. 전혀 새로운 것이 돼버리는 거다. 이것은 굉장히 영리한 방식이다. 아이러니하게도 홍상수는 그렇게 에릭 로메르의 동양식 아류가 아니라 홍상수 그 자체가 된다. 가장 개인적인 것이 가장 창의적이라는 말과 유사한 방식으로, 가장 한국적인 것이 가장 세계적인 것이다. 다른 이가 아닌 바로 우리가, 지금 가지고 있는 우리의 사고방식으로 새로운 상황에 스스로 던져지는 것. 그것이 꼭 성공한다는 보장은 없어도, 성공할 확률은 가장 높다고 생각한다. 지금 볼 때 <괴물>에서 가장 인상적인 연기를 펼친 사람은 변희봉이었다고 생각한다. 경이롭다는 느낌마저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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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쩌다 보니 오은영이 쓴 육아 관련 서적을 읽고 있다. 여러 상황에서 아이에게 해줄 만 한 적합한 말들을 가르쳐준다. 나는 자식도 없는데. 모르겠다. 문득 궁금해졌다. 육아 관련 서적이지만 나이 불문하고 인간 보편에 적용될 만한 심리 서적으로 볼 수도 있지는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이 책이 실제로 얼마나 도움이 될지는 더 읽어봐야 할 것 같다. 이제 두 챕터를 읽었을 뿐이다. 사람들을 대하다 보면, 어떤 문제가 있는 사람들을 볼 때 왜 저런 문제가 생겼을지 유추해보곤 하는데, 그런 응용 데이터를 갖고 싶다는 생각을 하고는 한다. 그래서 나는 내 문제들도 돌이켜보며 내가 왜 그런지, 혹은 오래전에 왜 그랬었는지 유추하기를 즐기며, 예상외로 납득할 만한 근거들을 찾아내기도 했다. 사람의 마음을 공부하고 싶다면 나 자신은 아주 좋은 실험 대상이다. 내게 결핍된 것은 무엇인지, 내가 취약한 지점은 어떤 것인지, 나의 진짜 욕망은 무엇인지. 이건 좀 다른 얘긴데 무턱대고 갑자기 육아 서적이 읽고 싶었던 것은 아니고 계기가 있었다. 책 욕심이 조금 있는 사람이라면 경험해봤을지 모르겠는데, 어느 날은 지하철을 타고 가다가 어떤 여성분이 책을 읽고 있기에 무슨 책일까 하고 유심히 쳐다본 적이 있는데, 물론 대놓고는 아니지만, 간신히 표지를 보게 되었고 바로 지금 내가 읽고 있는 그 책이었다. 지하철에서 책을 읽는 사람이 흔치 않은 것은 사실이다. 그렇다 보니 어쩌다 책 읽는 사람을 발견하면 어떤 책을 읽는지 호기심이 인다. 웃기게 들리겠지만 그 책이 내가 읽은 책일 경우, 뭐야, 그 책을 이제 읽는다고? 풋. 이러거나 반대로 내가 읽지 않은 책일 경우, 으 분하다, 나도 읽고 말 테다. 이러며 도서관 홈페이지에 들어가 도서 검색을 하기도 한다. 정신에 문제가 온 듯 혼자만의 싸움을 이어나가는 거다. 또한 내가 읽지는 않았지만 너무 유치한 책을 읽고 있을 경우, 저런 책은 줘도 안 읽는다. 싶기도 한데, 뭐 오해는 없으시길 바란다. 나 스스로가 괜한 책 욕심만 많은 초보 독서가이기 때문이다. 책을 읽는 낯선 이들을 보면, 그가 고른 도서를 통해, 독서 취향을 통해 그가 어떤 사람일지 상상해보곤 한다. 이 역시 어차피 지나갈 사람이니 일종의 상상 훈련을 해보는 것일 뿐이다. 책을 선택하는 데는 여러 이유가 있을 수 있다. 그것이 꼭 그의 독서 취향이라고 치부해버릴 수는 없는 일이다. 육아 서적을 읽는 내가 아이의 양육자는 아니듯이.
[옛배움책에서 캐낸 토박이말]끼니 버릇 나쁜
[옛배움책에서 캐낸 토박이말]끼니 버릇 나쁜 오늘은 4285해(1952년) 펴낸 ‘과학공부 5-2’의 53쪽부터 54쪽에서 캐낸 토박이말을 보여드립니다. [우리한글박물관 김상석 관장 도움/토박이말바라기 이창수] 53쪽 첫째 줄에 52쪽부터 이어져서 ‘여러 가지로 섞어서 먹도록 하자,’가 나옵니다. 이 말은 요즘에는 ‘골고루’라는 말을 많이 쓰다 보니까 쓰는 사람이 없지만 얼마든지 쓸 수 있는 말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혼식(混食)’이라고 쓰지 않은 것이 더 반갑고 좋았습니다. 둘째 줄에 ‘하루 세 끼’와 ‘끼니마다’라는 말이 나옵니다. 요즘도 ‘1일 1식’, ‘1일 2식’, ‘1일 3식’과 같은 말을 쓰는 사람들이 있는데 ‘하루 한 끼’, ‘하루 두 끼’, ‘하루 세 끼’라고 하면 참 쉽고 좋을 것입니다. 그리고 ‘매 끼니마다’라는 말을 쓰는 사람도 있던데 ‘매(每)’에 ‘마다’의 뜻이 있기 때문에 뜻이 겹치는 말이니까 안 쓰는 게 좋겠습니다. 넷째 줄부터 다섯째 줄에 걸쳐서 ‘영양소를 얻을 수 있도록 차려 보아라.’가 나옵니다. 이 말도 요즘에 쓰는 말로 바꾸면 ‘영양소를 섭취할 수 있도록 차려 보아라.’가 될 것입니다. 이것을 보면 우리가 ‘섭취하다’를 쓰지 않고 ‘얻다’로 갈음해 쓸 수 있음을 잘 알 수 있습니다. 여섯째 줄부터 여덟째 줄에 걸쳐서 나온 “건강을 지니려면 우리는 어떠한 버릇을 붙여야 하는가?”는 ‘건강’을 빼면 모두 토박이말로 되어 있어 좋았습니다. 그런데 열셋째 줄과 열넷째 줄에 “몸을 튼튼히 하기에 좋은 여러 가지 버릇을 이야기해 보아라.”는 토박이말이 아닌 말이 하나도 없어 더 좋았습니다. 이것을 보고 위의 월을 “몸을 튼튼히 하려면 우리는 어떠한 버릇을 붙여야 하는가?”로 바꿨으면 더 좋았지 싶었습니다. 또 ‘습관’이 아닌 ‘버릇’이라는 토박이말과 열째 줄에 ‘잘 씹어 먹고 몸에 알맞은’이라는 말도 쉬운 말이라서 반가웠습니다. 열여섯째 줄에 있는 ‘나쁜 박떼리아’에서 ‘박떼리아’를 요즘에는 ‘박테리아’라고 한다는 것과 요즘 많이 쓰는 ‘유해(有害)’도 ‘나쁜’으로 갈음해 써도 된다는 것을 잘 알 수 있었습니다. 54쪽 첫째 줄부터 둘째 줄까지 ‘때로는 돌림병에 걸리는 수도 있다.’가 나오는데 ‘전염병’이 아닌 ‘돌림병’이라는 말이 반가웠지만 ‘돌림앓이’라고 했으면 더 좋았을 것 같다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셋째 줄에 있는 ‘사람 몸에 박떼리아가 들어가서’에서 ‘들어가서’도 ‘침입하여’가 아니라서 좋았습니다. 다섯째 줄부터 일곱째 줄에 걸쳐 있는 “박떼리아는 공기 속, 흙 속, 물 속, 사람의 몸이나 똥 속, 들 없는 곳이 거의 없다.”는 월도 ‘박떼리아’와 ‘공기’ 말고는 모두 토박이말로 되어 있으며 ‘흙’, ‘물’, ‘몸’, ‘똥’과 함께 '등'을 뜻하는 ‘들’이 나와서 더 좋았습니다. 아홉째 줄부터 열째 줄에 걸쳐 나오는 ‘여러분 집에서는 음식물이 상하지 않도록 하는 데에’에서 ‘않도록 하는 데에’는 요즘 많이 쓰는 ‘않도록 하기 위해’를 갈음해 쓸 수 있는 말임을 알 수 있었습니다. 이처럼 한자말이나 다른 나라말을 토박이말로 바꿀 수 있는 것이 있다는 것을 아는 것도 좋지만 말을 풀어서 다르게 쓸 수 있다는 것을 알게 해 주는 것도 옛날 배움책이 우리에게 주는 손씻이(선물)가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듭니다. 4354해 온여름달 열닷새 두날(2021년 6월 15일) 바람 바람 #우리한글박물관 #김상석 #토박이말바라기 #이창수 #토박이말 #살리기 #쉬운배움책 #교과서 #터박이말 #참우리말 #숫우리말 #순우리말 #고유어 *이 글은 경남일보에도 보냈습니다.
<종이 동물원> 켄 리우
<종이 동물원> / 켄 리우 저 (지극히 주관적인 제 생각을 쓴 글입니다.) <종이 동물원>, 꽤 두꺼운 켄 리우의 단편집이다. 총 열네 편의 소설이 들어있으며 열네 편 전부 SF 혹은 판타지적 요소가 가미된 소설들이다. 작가의 이름에서도 알 수 있듯이 켄 리우는 중국인이다.(물론 어릴 때 미국으로 이민을 가긴 했지만) 그러다 보니 소설 속에서도 중국의 문화, 역사,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가 많이 나오는데 사실 동아시아 역사에서 한, 중, 일을 서로 떼 놓고 얘기할 수는 없지 않은가. 자연스럽게 한국, 조선에 대한 이야기들도 군데군데 출현한다. 어려운 과학적 설정이나 원리 같은 것도 그다지 없어서 한국 독자가 처음 SF 소설을 읽을 때 추천할 만한 소설집이라고 생각한다. 우리(한국)의 이야기가 나오는 만큼 몰입하기 쉬울 테니 말이다.(두껍긴 하지만 단편집이라서 시간 날 때 한편씩 읽기 딱 좋다) 켄 리우의 소설은 지난번에 리뷰했던 테드 창의 소설과는 또 다른 결을 가지고 있다. 테드 창의 소설이 소설을 빙자한 과학적 시뮬레이션(?)에 가깝다면 켄 리우의 소설은 Science "Fiction"이다. 켄 리우의 소설 속에서 과학은 Fiction의 설정이자 배경으로 사용될 뿐이다. 그의 소설에서 중요한 것은 과학을 바탕으로 한 배경 속에서 어떤 이야기가 펼쳐지는가라고 할 수 있다. 켄 리우의 소설에서 중요한 것은 Science가 아니라 Fiction이므로 <종이 동물원>에 실린 소설들에는 SF가 아닌 소설도 많다. 심지어 표제작인 <종이 동물원>부터가 SF가 아니라 판타지 소설에 가깝다. 다른 수록작들도 마찬가지다. <상태 변화>는 현대 판타지이고 <파자점술사>는 중국의 전통적 주술 문화, 파자점이 이야기의 주춧돌이 되며 <즐거운 사냥을 하길>에서는 중국의 요괴와 SF적 요소가 뒤섞여 매력적인 이야기를 이끌어낸다. 이게 켄 리우라는 작가의 강점이라고 생각한다. 그는 SF 작가도 아니고 판타지 작가도 아니며 장르문학 작가라고 한정 짓기도 꺼림칙하다. 그는 장르의 경계나 영역에 얽매이지 않는다. 자신이 하고 싶은 이야기에 SF적 요소가 필요하다면 SF를, 판타지적인 배경이 필요하다면 판타지를, 역사나 신화적 요소가 필요하다면 그 또한 거리낌 없이 소설 속으로 끌어들인다. 정통 SF 소설만을 애정하는 독자라면 이 소설집에 오히려 실망하지 않을까 싶을 만큼 그의 소설에는 경계도 제한도 없다. 개인적으로 켄 리우라는 작가가 이렇게 다양한 소재와 배경을 바탕으로 장르의 경계를 넘나들며 소설을 쓰게 된 데에는 그의 삶이 한 몫하지 않았을까 생각한다. 그는 중국에서 태어나 중국에서 어린 시절을 보내고 청소년기에 미국으로 이민을 오게 된다. 많은 혼란과 의문이 그의 청소년기를 뒤덮었을 것이다. 나는 누구인가. 중국인인가 아니면 미국인인가. 나는 어디에 속하는 것일까. 이렇듯 수많은 의문 끝에 그는 이런 결론을 내리지 않았을까? 내가 어디 속하는지 혹은 어느 집단의 일원인지가 아니라 나 자신이 어떤 사람인지가 중요하다는 결론을. 작가가 된 켄 리우는 마찬가지 생각으로 소설을 써 내려갔을 것이다. 중요한 것은 내가 쓰는 소설이 SF인지, 판타지인지, 역사나 신화 소설인지가 아니라 내가 쓰는 소설이 담고 있는 이야기라는 생각으로. "나는 판타지와 SF를 구별하는 데에는 별 관심이 없다. 관심이 없기로는 '장르 문학'과 '주류 문학'을 구분하는 것 역시 마찬가지이다." 켄 리우는 머리말에서 위와 같이 이야기한다. 그의 소설들을 한편씩 읽어나갈 때마다 계속해서 위의 문장이 떠올랐다. 나는 저 문장이 켄 리우의 소설들에 새로움과 놀라움을 부여했다고 생각한다. 언제나 경계가 허물어질 때, 구분이 사라질 때, 전혀 다르다고 생각했던 것들이 합쳐질 때 새로운 것들이 태어나기 마련이니까. SF를 사랑하는 사람들에게는 <고급 지적 생물종의 책 만들기 습성>과 <상급 독자를 위한 비교 인지 그림책>, <모노노아와레>를, 환상과 판타지를 좋아하는 독자들에게는 <즐거운 사냥을 하길>과 <송사와 원숭이 왕>, <파자점술사>를, 소설 속 드라마를 느끼고픈 이들에게는 <종이 동물원>과 <레귤러>, <역사에 종지부를 찍은 사람들>을 권하고 싶다. 만약 그냥 재미있는 이야기를 읽고 싶은 독자가 있다면 소설집 전체를 앞에서부터 차례차례 읽어나가길 바란다. 소설 속 한 문장 이것이야말로 정상적인(regular) 세상의 모습이다. 명쾌함도, 구원도 없다. 모든 합리성의 끝에는 그저 결정을 내려야 할 순간과 품고 살아가야 할, 그러면서 견뎌야 할 믿음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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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건인즉슨 이랬다. 그날따라 A씨는 어쩐지 오늘은 운동을 하고 싶지 않다는 생각이 강하게 들었다.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일종의 사소한 매너리즘이라고 생각했을 뿐, 몸에 문제가 있는 것이라고는 생각지 못했다. 건수를 만들어보기 위해, 몇몇 친구들에게 기웃거렸다. 기웃거렸다고밖에 표현할 수 없는 것이, 말을 자꾸 뱅뱅 돌렸기 때문이다. 누구라도 만나고 싶었지만, 먼저 만남을 잡는 것은 자신과의 약속을 스스로 저버리는 것이었기 때문에 일말의 자존심이 허용치 않았던 것이다. 먼저 제안하지는 못하겠지만, 제안이 들어온다면 어쩔 수 없다는 듯 약속을 잡고 싶었던 것이다. 아이참, 어쩔 수 없군. 운동을 해야 되는데 말야. 친구와의 약속도 중요하지, 암.   뭐 이런 식으로. 그러나 소위 낚이는 놈이, 아니 친구가 한 명도 없었고, 공교롭게도 그들은 오늘따라 유독 바쁜지 조만간 보자는 말만 전해왔을 뿐이다. A씨는 그냥 조용히 집에 가서 시체처럼 누울까도 생각했지만, 차마 그러지는 못하고, 운동을 하러 발걸음을 옮겼다. 의지가 너무 없었던 탓인지 체력적으로도 마니 달리는 느낌이었고, 무언가를 너무 하기 싫을 때는 몸조차도 그에 동의하듯 따라주지 않는 것이 인간의 섭리인가, 하는 생각마저 들었다. 겨우겨우 운동을 마치고, 샤워실에 들어갔지만 운동복을 벗는 것조차 힘들었다. 전날 트레이너가 A씨의 삼두근을 집중적으로 운동시킨 것이 화근이었는데, 근육통을 완화시키고자 오늘 그것을 복습했는데도 불구하고 더욱 악화된 것만 같았다. 마치 두 팔에 아무런 감각이 없는 듯한 느낌이었다. 삼두근이 인생을 피폐하게 만들고 있었다. 고작 삼두근이. 집에 돌아온 A씨는 너무나 고되다는 생각이 들었다. 단순히 무언가를 하기 싫어서 이렇다기에는 하기 싫은 것이 끝났음에도 불구하고 그 생각이 이어졌다. 가령 그런 것이다. 하기 싫은 것이 없는데, 뭔가가 하기 싫다. 하기 싫은 것의 정체는 대체 무엇인가. 일기 쓰기? 그건 아니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일기를 쓰는 것조차 버겁다는 생각이 들기는 했다. 빨래를 돌리며, 일기는 잠시 누워서 간략하게 쓰자고 생각했다. 그리고. 그러니까 그렇게 기절해버린 거다. 잠이 든 게 아니다. 이것은 기절한 것이다. A씨는 생각했고, 시간을 확인했다. 밤 열시 사십 분이었다.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오늘의 일기를 넘기지는 않았으니까. 조금만 더 기절해있기로 했다. 죽은 척하는 병사처럼. 죽은 척하기는 너무나 쉬웠다. 거의 죽었다고 해도 틀린 말은 아니었으니까. 다시 눈을 떴다. 주위가 고요했다. 이 고요의 정체를 알 수가 없었다. A씨는 다시 시간을 확인했다. 새벽 4시가 되어가고 있었다. 하, 이런. 이럴 수가. 내 몸이 문제가 있었던 것 같다. 그래서 의지박약이었던 것 같다. 그토록 아무것도 하기 싫었던 것 같다. 내 몸이 갑자기 왜 이러나. A씨는 용수철처럼 튀어 올랐다. 아 맞다, 빨래. 아악. A씨는 조용하게 비명을 질렀다. 고요의 정체는 오래전 끝난 빨래였다. A씨는 몇 시간이나 방치된 빨래를 널며, 다시 빨아야 하나, 일단은 널자, 그러고 있었다. A씨가 무엇을 잘못했기에 신은 이런 가혹한 시련을 주는가. A씨는 죄가 없다. A씨는 문득 서러워져 빨래를 널다 말고 주저앉아 흐느끼기 시작한 것은 아니고, 다시 잠자리에 들었다. 자신의 삼두근을 붙잡고. 아니, 그 전에 기절하느라, 기절 상태가 하루를 문득 넘기느라 전날 쓰지 못한 일기에 대한 변명을 적었다. A씨는 죄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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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기를 쓰기 위해 맥주를 딴다. 일기엔 역시 맥주지. 넘버링 300 특집을 했던 게 엊그제 같은데, 벌써 209번까지 내려왔다. 나는 종종 생각한다. 이 넘버링이 과연 맞는지. 혹시나 내가 착각하여 일기를 빠뜨린 날은 없는지, 혹은 정말 희박한 확률이겠지만 하루에 두 번 일기를 쓴 날은 없는지. 그래서 그 사실조차 인지하지 못한 채로 올해 12월 31일에 다다라 일기를 쓰는데, 그날의 넘버링이 1이 아니라 2이거나, 혹은 0에서 -1인 상황에 처하게 되는 것은 아닌지. 이 일기가 내가 아닌 다른 분들에게 최소한 정확한 모래시계라도 되어줘야 할 텐데. 쓰는 나도 인지하기 힘든 터라, 잡아내기가 여간 어렵지 않겠지만 혹시라도 내가 일기를 안 쓰고 넘어가는 날이나, 하루에 두 번 일기를 쓰는 상황을 목도하신다면 누구라도 제보해 주시길 바랍니다. 지난 목요일에는 최종 몸무게가 앞자리 수를 바꿔버리는 데까지 나아갔지만, 역시나 주말 동안 다시 어마어마하게 불어버렸다. 그러나 사실 그렇게 두렵지는 않은 게, 나는 주말 동안 반드시 살이 쪘다기보다는 부은 경향들이 있는 것이다. 내일부터 다시 식단 관리에 들어가고 운동 루틴에 들어가면 하루 이틀만에 정상 복귀 된다. 그것은 솔직히 쉽다. 그러나, 그러하기에 내 인바디 곡선은 매주 화려한 물결을 탄다. 오르락내리락. 코치님도 말했지만, 매주 붓고, 다시 원상 복귀하는 그 역량이라면, 그 역량을 좀 더 밀어붙였다면 이미 두 배는 빠르게 다이어트에 성공했을 거라고. 뭐 나도 알고 있다. 그러나 어차피 인생 길게 봐야 하지 않겠는가. 빠르게 감량한 만큼 억눌린 욕망이 화려하게 폭발할 가능성도 높기에 나는 내 욕망과 어쩔 수 없는 밀당을 하고 있는 것뿐이다. 그리고 주말에 꼬박꼬박 무너지는 것치고는 상당히 많은 감량을 했고, 몸 상태가 예전에 비하면 꼭 나쁘지도 않다. 근력이건, 모양새건. 조급할 것 없다 이거죠. 그리고 요즘은 확실히 조금 지쳤는데, 어서 다른 센터에 등록해서 이제는 혼자서 운동하고 싶은 마음이 많이 든다. 그만큼 이제 혼자 해도 상관없다는 자만은 아니고, 어차피 앞으로는 혼자 해야 되므로, 어서 스스로의 루틴을 만들어보고 싶은 거다. 이제 월요일로 떠나요,
200
내가 특별히 넘버링 실수를 한 것이 아니라면, 올해가 이제 정확히 200일이 남았다. 뭐 생각하기 나름이겠다. 아직 절반은 안 지났구나, 혹은 벌써 그렇게? 나로서는 양가적인 마음이 든다. 꽤 지난 것 같은데 절반도 넘게 남았구나 싶고, 얼마 남지 않았구나 싶기도. 하나 마나 한 소리 같긴 하지만, 시간이란 게 정말 그렇다. 글쎄, 일수로 따지면 잘 와닿지 않는 감각인지도. 올해가 7개월도 남지 않았다고 생각하면 어떤가, 아니면 겨우 30주 정도 남았다는 감각은? 지나고 보면 금방이었다는 생각이 들지만 곰곰이 생각하면 1년은 생각보다 정말 길다. 그러니, 아무 의미도 없이 보내면 정말 아깝다는 생각이 든다. 그 긴 시간을 날려 먹은 기분이니. 넘버링 300을 막 지났을 때, 일기 쓰기를 시작한 것에 대한 소회를 밝혔었다. 그때 나는 다소 후회스럽다고 적었다. 정확히 말하자면 매일 쓰기에 대한 후회보다는 매일 공개에 대한 후회라고 했었는데, 그 기분은 사실 지금도 여전하다. 신나는 바보 대행진의 느낌. 거기에 추가적으로 후회되는 이유가 하나 더 확실히 생겼는데, 생각보다 훨씬 더, 성실한 글쓰기가 되지 못했다는 것이다. 어쩔 수 없는 것이기도 하지만 겨우겨우 볼품없는 몇 줄을 써서 올리는 날의 자괴감은 상당하다. 그러나 여기까지 와버린 것을 어쩌겠는가. 이 글을 읽어주는 이들에게 확실한 모래시계라도 되어주자 싶었는데, 이제는 뭐가 됐든 스스로에게도 모래시계 역할이 되어주고 있다. 실시간(?)으로 흐르는 시간 목도하기. 넘버링 300에서 200인 오늘까지의 시간과 오늘 200부터 100까지의 시간은 어쩐지 그 감각이 좀 다를 거라는 생각이 든다. 물론 오늘부터 100까지의 날이 훨씬 더 빠른 느낌일 거다. 아마도 그런 착각이 들 것이다. 가능할진 모르겠으나, 넘버링 100이 되는 날 실제로 그런지, 그런 기분이 확실히 드는지 그 감각을 한번 비교해보기로 한다. 축하한다. 넘버링 200을. 당신과 나를. 100일 더 늙은 우리를. 함께 하염없이 인생의 수면 위를 떠내려가고 있는 우리를. 그럼 다시 넘버링 100까지 달려가 보기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