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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탄 테러범에 분노한 야갤러들.jpg

진지하게 보다가 야갤러들 반응에 빵터짐 ㅋㅋㅋㅋ
근데 사실 이 내용도 매우 과장된 거라고 함 ㅋ

나무위키에 따르면
"정작 테드 카진스키 본인은 이 드라마를 보지는 못했지만 편지를 통해 스토리를 알게 되었다고 하며, 드라마 대부분의 내용이 허구이며, 특히 머레이 교수와 MK울트라 실험에 관한 내용이 "단 한 차례 30분 정도 차분히 진행된 실험을 심하게 과장한 허구"라고 평했다.# 카진스키가 하버드대 재학 시절 당했다는 CIA의 심리실험은 시청률에 목마른 언론들이 자극적으로 과장했을 가능성이 크다. 따라서 실험과 관련된 언론보도들은 적당히 걸러들을 필요가 있을 것이다."

그냥 카진스키가 폭탄테러를 한 건 약간 타노스적인 발상이었는데
기술이 발전함에 따라 사람들은 인간성을 잃고, 빈부격차가 매우 커지면서 평범한 사람들이 평범한 삶을 영위하는 것 조차 힘들어질 것이기 때문에 엘리트계층을 집중공략한 테러를 한 거였음
사실 엘리트계층이 무슨 잘못이 있겠냐만은
카진스키 말로는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고 함
이거 ㄹㅇ 타노스 아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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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세기에 군대나온 예비역과 민방위들은 2년~3년을 쌍욕만 쳐먹었을 뿐만 아니라 쳐맞기도 했는데 테러는 무슨 ᆢ 그땐 요즘 군대에서처럼 반찬투정도 못했다 ᆢ 애냐? 반찬투정하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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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족 최대 아웃풋.jpg
1. 1934년 중국 길림성에서 조선족의 자녀로 태어남 2. 조선족 최초로 베이징대 아랍어학과 입학 및 수석 졸업, 중국 최초 ‘국비장학생 1호’가 되어서 이집트 카이로대에서 아랍 문학 전공, 그 이후에는 모로코 중공 대사관에서 서기관으로 근무  3. 60년대에 갑자기 민족주의에 물들어서 북한으로 귀화 신청 (참고로 귀화 요청하자, 당시 외무부장이랑 싸우고 이래도 안 해주니까, 저우런라이한테 직접 편지써서 귀화 허가 받아냄)  4. 60년대가 중국에선 문화대혁명 기간이라서 많은 조선족들이 북한으로 넘어갔으나, 북한에서도 50년대부터 김일성 제외한 나머지 종파 세력들 정리하고 있어서, 이때 넘어간 조선족들도 대다수가 숙청 당했는데, 저우런라이 허가증 들고 있어서 숙청 피함  5. 북한으로 귀화한 후 1974년까지 평양 국제관계대학 교수와 평양외국어대 동방학부 아랍어학과 교수로 재직, 마지막에는 아랍어과 학과장까지 맡음. 아랍 대표단이 북한에 올때 김일성 통역도 맡음  6. 언어 실력과 이국적인 외모 때문에 북한 노동당이 스카웃, 4년 5개월에 걸쳐 간첩 교육을 받으면서 남파 간첩으로 변신 7. 노동당 지령받고, 전쟁으로 혼란스럽던 레바논에 가서 현지 도움으로 레바논 국적 획득 8. 레바논 국적으로는 남한에서의 활동이 힘들다는 판단, 튀니지로 가서 대학원 석사 학위를 따고 사회 경제 연구소 연구원으로 일하면서 기회를 모색. 튀니지는 호적관계법이 잘정비되어 있어 국적을 취득하기 힘들다고 판단. 말레이시아 대학 이슬람 아카데미 강사(1982.7)를 거치는 등 호주, 파푸아뉴기니, 인도네시아, 말레이시아 등의 국적 취득 기회를 모색하였으나 모두 실패. 1983년 4월 필리핀에 입국, 1984년2월에 필리핀 아버지와 레바논 어머니 사이의 아들인 '무하마드 깐수'로 국적 세탁하고 한국에 입국 9. 위장을 위해서 연세대 어학당에 들어와서 한국어 배움. 그러다가 단국대 사학과 박사 과정 밟아서 박사 학위를 취득. 동서 문명 교류사와 실크로드학의 권위자로 1990단국대 사학과 초빙교수, 1994년에는 조교수로 임명. 이 기간에 간호사 출신 아내 만나서 결혼도 함 10. 1984년 6월부터 라디오를 이용해 1996년 7월까지 161차례에 걸쳐 북한의 지령을 수신.  11. 1996년 3월부터 팩스로 전송 수단을 바꾸는 바람에 잡힘. 12. 안기부에서 전향시키려고 했으나, 북한에 남아있는 처자식들 때문에 거부. 그리고 남한에서 만난 아내한테 자기 잊어달라고 했으나 매달 찾아와서 면회하자 맘 흔들리고 전향. 13. 원래는 사형 내려졌는데, 연구 성과, 전향 의사, 북한에 넘긴 자료가 단순히 언론 보도 자료만 넘겨줘서, 국가 기밀 위협 혐의가 없다 판단하여 징역 12년으로 최종 판결 14. 이후에 광복절 특사로 4년 만에 출소. 2003년에 특별 사면, 복권 돼서 학계로 복귀 참고로 이 분이 최초로 처용 이슬람인 도래설 주장했고, 쿠란 표기법 종결시킴 고오급 인력 키워서 남조선에 헌납한 북조선 (출처) 무려 자기가 연구한 학문 혹시 도움될까봐 북한에 보냈는데 이런 거 보내지 말라고 해서 서운하셨다고 ㅋㅋㅋ
중세 유럽을 공포에 빠트린 인류의 적
그거슨 늑대였고요 늑대의 생태를 자세히 뜯어보면 1. 넓은 영역을 가지고 2. 고도로 발전된 무리 생활을 하며 3. 주변 동물들을 무리 사냥한다 는 특징이 있는데 이는 원시 인류와 아주 비슷한 생활 양식이었다 필연적으로 늑대는 인간과 경쟁할 수 밖에 없었으며 생존을 위한 전쟁을 치룰 수 밖에 없었다 늑대와 인간의 경쟁은 인간의 도구가 발달하고, 늑대와 동등한 능력을 가진 배신'견'들이 인간 쪽에 붙으면서 전세는 점차 인간 쪽으로 기울어갔고 고대가 되자 늑대들은 인간이 오지 않는 숲이나 오지로 도망치게 되었다 (인간과 늑대의 경쟁에서 큰 변수를 만든 무시무시한 배신자.jpg) 하지만 유럽은 중세까지만 하더라도 인간이 개척한 마을과 도시보다 숲이 더 넓었고 숲 속에서 늑대들은 무리를 만들고 사냥하거나 인간이 키우는 양을 공격하기도 했다 영역의식 때문인지 오랜 전쟁에서 패배하고 얻은 교훈인지 늑대들은 자신의 영역에 침범한 인간은 공격하되 인간의 영역을 적극적으로 공격하지는 않았지만 극심한 겨울이 오거나 사냥감이 부족해지면 늑대들도 조직적으로 인간 영역을 공격해왔다 늑대들이 도시나 농촌을 공격했다는 사례가 지금까지도 전해져 오는데 소설로도 만들어진 1450년, 늑대의 파리 공격이 유명하다 파리는 큰 도시여서 외부가 벽으로 둘러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굶주림을 참지 못한 늑대 무리가 벽의 틈새를 넘어와서 사람들을 공격했고 늑대들이 시내를 점거하면서 파리는 혼란과 공포에 빠져버린다 지금처럼 통신이 발달하거나 드론을 띄울 수도 없었던 시기였기에 군대라고 뭐 딱히 뾰족한 수가 없었는데 파리 시민들과 숙련된 사냥꾼들이 미끼를 놓아 늑대를 모으고 우두머리를 잡아버리면서 늑대들은 파리에서 도망쳤다 늑대 우두머리의 시체는 대성당 옆에 전시되었는데 이 늑대는 사람을 40명이나 죽였기에 사람들이 지나가면서 시체에 돌을 던졌다고 한다 1765년 파리 북부 수이송에서도 늑대 무리가 마을을 공격해서 임산부와 아이같이 약한 사람을 골라 사냥했고 사람들은 희생자들의 시체를 모아 미끼로 두어서 늑대들을 모은 다음 포위해서 공격하기도 했다 늑대 일부가 포위망을 뚫고 도망쳤지만 지역 민병대원이 추적 끝에 죽이는데 성공했고 이 소식을 들은 루이 15세는 이 민병대원에게 용기에 대한 포상으로 300 리브스의 상금을 주었다 이렇게 도시나 마을을 공격하는 사례도 드문드문 있었지만 영역이 모호한 중세의 길은 늑대들의 습격이 잊을만하면 나왔다 프랑스에서는 16세기 ~ 19세기까지 늑대의 공격으로 5000명 가까이 희생자가 나왔고 러시아 제국에서는 1871년 한해동안만 164명이 늑대의 공격으로 죽었다 (사람의 머리부터 먹으려는 흉폭한 늑대) 인류가 총이라는 강력한 도구를 얻었지만 늑대는 여전히 무서운 존재였다 1차 대전 때 민스크의 굶주린 늑대 무리는 러시아와 독일군을 공격했고 이로 인한 피해가 커지면서 양측 군대가 일시적으로 휴전하고 늑대를 사냥하기도 했다 T-34가 굴러다니고 핵폭탄이 떨어지는 2차 대전 때도 동부전선에서 군인들은 늑대들의 공격을 받았다 인간과 비슷하면서 가장 오래 싸워온 적이다보니 늑대는 고대부터 지금까지 여러가지 이미지가 더해져왔다 늑대에 물렸다가 간신히 살아난 사람이 광견병에 걸려서 이상하게 변한걸 보고 늑대인간 신화가 만들어졌으며 동화에서는 폭력적이고 잔인한 악당으로 등장한다 인간과 비슷하게 무리 생활을 하면서 인간이 살지 않는 땅을 지배한다는 신비한 이미지로 여러 국가에서 숭상받기도 했는데 로마의 로물루스, 레무스도 늑대 젖을 먹고 살아났으며 독일에서는 자연신의 모습으로 늑대가 나타나기도 한다 몽골은 늑대를 조상신으로 여겼다 (늙은 양치기의 상주 - 영국의 동물화가 '에드윈 린드시어') 사촌 형은 공포의 괴물이나 신비한 신령의 이미지가 박혀버렸지만 그래도 댕댕이는 인간의 가장 가까운 친구 P.S. 참고한 논문은 2009년에 나온 The prehistoric and preindustrial deforestation of Europe 어제 늑대글 올리고서 "그때 왜 숲 안밀어버림?"이라는 내용의 댓글이 달렸는데 유럽 전역을 덮고 있는 숲을 개간하는건 엄청난 노동력을 필요로 하는 일이었기에 손대기 어려운 일이었다 그리고 자연도 가만있지는 않아서 숲을 개간하더라도 거기에 사람이 살지 않으면 수십년 후에는 다시 어린 숲들이 올라왔다 (버려진지 수십년 밖에 안된 도시-체르노빌-도 외곽부터 숲과 야생동물들이 깃발 꼽고 있다) 그래서 숲 개간은 인구증가에 따라서 인간이 천천히 숲을 밀어내는 형식으로 서서히 진행되었다 지도를 보면 고대에는 로마와 그리스 같이 인구가 많고 도시 문명이 발달한 곳에서 빠르게 개간이 나타났고 기원후 350년부터 1000년까지는 숲개간이 느리게 진행되었다가 다시 1500년부터는 개간이 빨라졌다 산업혁명 직후인 1850년 때는 숲 개간이 엄청나게 가속화되었다는걸 알 수 있다 카오스 게이트가 열리고 인간들이 거기로 이사가게 된다면 아마 200년 정도만 지나면 기원전 1000년 숲 지도로 돌아갈거임 숲 개척하고 유지하는건 문명의 힘하고 비례하는거여서... 그나저나 식목일을 다시 공휴일로 만들어주면 안되나? (출처) 댕댕이 이 배신자들ㅋ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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