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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에 포로로 끌려간 내가 일본 주자학의 아버지?

오늘의 주인공은 강항(1576~1618)

임진왜란이라는 대사건 속에서 기구한 삶을 살다 갔지만 알게 모르게 일본에 큰 영향을 끼치고 간 사람이었다

강항은 임진왜란 도중인 1593년에 문과에 급제했고 4년만에 형조 좌랑까지 올랐다

전쟁이 소강상태가 되자 잠시 휴가를 얻어 고향인 영광에 내려와 있었는데 정유재란이 터지는 바람에 휴가가 쫑나고 군량수송임무를 수행했다

강항한테는 비교적 사소하지 않은 문제가 있었는데
당시 수군통제사가 이순신 장군이 아니라 원균이었다는 점.

칠천량 해전 패배의 여파로 일본군의 공세에 직면하게 된 강항은 간신히 영광으로 도망쳐 의병을 모았다
(?? : 님아 ㅈㅅ)

하지만 사방에서 몰아닥치는 일본군의 공세 앞에 의병이 제대로 모일리가 없었고 기껏 모은 한줌의 의병도 도로 흩어졌다

이순신이 수군 통제사로 돌아왔다는 소식을 들은 강항은 이순신에게 가려고 가족들과 배를 타고 가던 중 일본군에게 포로로 잡히게 된다

그리고 강항이 문관 고위직이라는 사실을 알게 된 일본군은 강항을 일본으로 보내버렸다

일본으로 가는 길은 매우 힘들었는데 아들과 딸이 죽었으며 병에 걸린 조카가 일본군에 의해 산채로 수장되기도 했다

강항 본인도 가족들이 죽어나가는걸 보고 자살을 시도했지만 실패했다

처음에는 일본 에미헤현에 감금되었는데 탈출 시도가 적발된 후 수도인 교토로 이송되었다

강항에게는 천만다행인게 교토에는 말이 통하는 지식인들과 접촉할 수 있었다

후지와라 세이카와의 국적을 초월한 만남이 이때 성사된다
강항이 기록한 세이카는 매우 파격적이었는데

'두뇌가 총명하고, 옛글을 잘 쓰며, 책을 많이 읽는 성품이 바른 사람으로 다른 일본인들과는 다르다'라며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세이카는 학구열이 높은 사람으로 성리학을 독학으로 공부하였으나 아직 일본에 성리학이 제대로 전수되지않아 배움에 어려움이 많았는데

조선에서 장원급제한 '성리학 마스터'가 고위직 포로로 끌려왔으니 그야말로 동경하던 아이돌이 옆집에 이사온 꼴이었다

서로 의기투합한 두 사람은 자주 만나며 이야기를 많이 나누었는데
강항은 조선 정부의 시스템과 과거 제도, 여러가지 성리학 해석을 가르쳐주었고 세이카는 승려의 신분을 버리고 유학자로 갈아탔다

강항이 포로 생활로 힘들어할때 세이카는 강항에게 은전을 주어 생활비로 쓰게 하였으며 강항은 세이카에게 사서오경 일본식 해설집을 만들어주기도 했다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죽자 강항이 조선에 돌아갈 수 있게 힘을 써준 것도 세이카였다

임진왜란에서 드물디 드문 국경을 초월한 우정.

1600년 조선 땅을 밟은 강항은 한양에 올라가 일본에 대하여 자세한 보고를 올렸고 기록을 모아 '간양록'을 지었다

이후 벼슬을 버리고 고향에 내려가 후학을 양성하다 1618년 51세의 나이로 사망한다

도쿠가와가 일본을 재통일하고 군사적인 필요가 없어진 사무라이들을 문신으로 바꾸기 위해 유학을 주입하는데 이때 후지와라 세이카를 불러 대학에서 유학을 가르치게 했다

그렇게 일본에 주자학과 성리학이 자리잡게 되었는데 세이카의 제자 하야시 라잔은 도쿠가와의 개인유학 교사인 '시강'이 되었다

100년도 지나지않아 17세기 후반이 되면 조선 주요 수출품에 성리학 서적이 포함되고 조선통신사들이 일본에 오면 일본유학자들이 이들을 잡고 학문과 정치를 논했다 하니 전쟁포로였던 강항이 쏘아올린 작은 공이 마냥 작지만은 않았던거 같다
일본에는 강항 헌창비가 있는데
일본인들이 여기에 '일본 주자학의 아버지, 유학자 강항'이라고 적어놓았다

피를 피로 씻는 임진왜란이었지만 강항과 세이카처럼 동화 같은 이야기도 있었다구....

강항의 기록에는 재밌는게 많은데

"우리나라 사람들은 조선이 일본보다 크다고 하는데 믿을만한 일본인(세이카)이 보여준 기록을 보니 일본이 우리보다 더 큰거 같아요"

"일본 군인들은 수백, 수십년 묵은 오래된 검(원문은 천년, 수백년)은 챙겨가는데 최근 만들어진 검은 안 좋다고 그냥 버려요"

"조선에서 돌아온 일본애들이 자기들은 한두걸음 칼싸움을 잘하는데 조선애들은 수백걸음 밖에서 활을 쏴서 힘들었다고 하네요"

"일본은 세금을 너무 거두어서 백성들이 힘들어하고, 군인으로 끌려가는 애들은 충성심이 아니라 먹고 살려고 따라다닐 뿐이니 이전에 항복한 왜인들을 잘 품어주었으면 좋았을것 같네요"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출신에 문제가 많고 지식인들 중에서는 알음알음 천하가 뒤집어졌다(신분제가 아작났다)라는 불만이 나오곤 해요"

등등

몇 안되는 고위직 포로의 신분으로 그 당시 일본 상황을 총망라한 보고서여서 당시 일본을 이해하는데 도움이 되는 자료가 많다




저게 바로 한류인가
K-성리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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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게 진정 역사죠. 개인에겐 환난의 시대였겠지만 지나오고 나니 큰 영향력의 시작이었더라는^^ 고맙습니다. 오늘 새로이 안 한일간 세계사에 감동이 훅 들어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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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나라 북부 아무르강 유역에는 청나라한테 몇번 두들겨 맞은 후 복종하는 여러 소부족들이 살고 있었다 하지만 뇌제 이반 4세가 동쪽으로의 확장을 시작한 이후 러시아에서 온 개척단은 1649년 이 지역까지 진출하게 되었고 소부족들에게 복종을 요구하며 인적, 물적 자원을 강요하기 시작한다 몇번이나 쌩까보지만 러시아 개척단이 폭력적으로 대응하자 소부족들은 청나라에 도움을 요청했고 러시아의 급격한 확장이 만주까지 영향을 줄까 두려웠던 청나라는 1651년 병력을 보내 이들을 돕게 한다 문제는 이때까지만 하더라도 남명의 잔당 세력이 살아있었으며 청나라는 중국을 재패하기 위해 이들을 뿌리뽑는데 온 힘을 다하고 있었다 이 때문에 청나라 구원군은 화약을 주로 사용하는 한족팔기(녹영병)가 아니라 냉병기로 무장한 여진팔기와 몽골팔기가 중심이 된 600명의 지원군이 만들어졌다 청군 600명은 부족민 1500명과 함께 206명의 러시아 개척단과 전투를 벌이는데 와장창 포로 생포에 집착한 청지휘관의 무모한 작전과 구식대포 6문, 총기 30개 밖에 없는 빈약한 화력 때문에 러시아군 10명이 죽을동안 청군은 676명의 전사자가 나온다 이 패전의 책임을 지고 지휘관 하이써는 소환당해 처형당한다 후임으로 보내진 샤르후다는 화약병기에 능숙한 녹영군을 보내달라 요청하지만 남명을 뿌리뽑는데 사력을 다하던 순치제(강희제의 아버지)는 이를 들어줄 여유가 없었고 고민 끝에 근처에 사는 조선에 포수를 빌려달라 요청한다 하필 조선의 왕은 병자호란의 복수, 보오오오옥수!를 외치며 눈을 빙글빙글 돌리고 있던 효종이었다 효종은 청나라를 정벌해 복수하겠다는 명분으로 군비를 늘려 병사의 양과 질을 늘리고 있었고 병자호란 이후 흔들리던 왕권과 통치체계를 다시 다져왔는데 (그래서 학자에 따라서 북벌이 진짜 청을 치려는건 아니었고 이를 핑계로 병자호란의 패배로 땅에 떨어진 조선왕조의 위상을 다시 세우려는 정치적 명분일 뿐이었다는 주장도 있다) 떨떠름하게 청을 치려고 양성하던 부대 중 일부를 청을 돕기위해 보내준다 청나라는 그렇게 간절히 바라던 화약딜러를 100명 요청했고 조선은 포수 100명에 하급무관 50명을 딸려보냈다 조-청 연합군 1000명이 연합하여 북상하기 시작했고 러시아는 개척단을 보강해 400명으로 늘어났고 강에 대형범선을 배치하는 등 방어를 준비하고 있었다 원래 청군은 조선군을 시작으로 순차적으로 강을 넘어 상륙할 생각이었지만 자신들이 가진 작은 함선으로는 상륙 전에 대형범선에게 차단당할 것을 눈치채고 작전을 바꾼다 청군은 강 건너편에서 나무벽과 참호를 파게한 후 고지대에 조선포수와 청 기병대를 배치하고 정면에 청나라와 부족민을 배치했다 전투가 시작되고 청군이 시선을 끄는 사이 조선 포수들은 참호에서 나와 러시아군에게 사격하기 시작한다 마침 조선군의 위치는 러시아군보다 높았기에 유리한 환경에서 사격을 가할 수 있었다 높은 곳에서 날라오는 사격에 러시아 군은 큰 피해를 입었고 견디다못해 조선군에게 화력을 돌리자 조선포수들은 참호와 나무벽 뒤에 숨어버렸다 조선 포수를 제거하지 않으면 화력에서 밀릴거라는 생각으로 러시아군은 강을 건너 상륙해 조선군과 육박전을 벌이려고 했지만 이를 대비해 조선 포수 옆을 청 기병대가 지키고 있었고 러시아군은 조선군의 근거리 조준사격과 청 기병의 역습 때문에 아무런 피해를 주지 못하고 시체만 남기고 퇴각한다 (이 날만은 예쁜 개새끼) 적의 주력 딜러를 제거하지 못했고 청의 본대도 쌩쌩하게 살아있자 결국 러시아군은 배에 올라타 강 상류로 도주하기 시작한다 4일동안의 추격전 끝에 범선이 요새 안으로 들어가면서 추적은 끝나고 조-청 연합군은 승리했다 러시아 측의 카자크인들은 조선군의 챙이 큰 모자와 화력에 깊은 인상을 받았는지 총을 잘 쓰며 머리가 큰 '대두인'이라고 부르며 무서워했다 조선은 단 한명의 전사자도 내지않고 집에 돌아왔고 효종은 북벌 정책이 처음으로 가시적인 성과를 낸것에 만족하며 1차 나선정벌은 막을 내렸다 그러니까 방진 옆에서 핸드거너가 계속 쏴서 모랄 터지니까 근접 붙여서 쫒아낼려고 하는데 옆에서 대기타던 치킨한테 역으로 털렸다는거지? (출처) 대두인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원주민들을 인간으로 만든 이야기
콩키스타도르가 신민지를 정복한 이후 신대륙에는 보호와 교육을 대가로 세금과 노동력을 받는 일종의 장원 제도인 엔코미엔다가 활발하게 늘어난다 스페인 왕가는 특정 유럽인들에게 원주민들을 분배했고 정복자들의 욕구를 충족시키면서 해적으로부터 원주민을 지키고 '스페인화'시키며 원만하게 신대륙에 스페인의 지배를 확립하고자 했다 하지만 신대륙의 지배자가 된 유럽인들은 원주민들을 인간으로 생각하지 않았는데 그동안의 전쟁으로 인한 적대심과, 인신공양과 유아살해 같은 남미 문화에 질려버려 원주민들을 인간 이하의 존재로 여기게 되버린 군인들이 많았고 천주교도 전도를 활성화하고 악마 숭배를 종결시킨다는 명분으로 이들의 정복에 정당성을 부여해주었으며 원만하게 부를 축적하기보다는 이들의 노동력을 착취해서 크게 한탕 벌고 유럽에 돌아가 풍족하게 사는걸 원하는 사람이 많았다 유럽인들은 원주민들을 가혹하게 착취하였으며 이로인해 원주민 인구가 급감하기 시작한다 예를들어 원주민들은 이미 수은으로 은을 정제하는 법을 알았음에도 건강을 이유로 이를 사용하지 않았는데 생산성을 위해 수은 정제법을 강요하면서 많은 원주민들이 중독사한다 이렇게 얻은 귀금속과 희귀한 자원들은 유럽으로 가는 배에 실렸는데 물건을 운반하는데만 200명이 더 사망하는 등 원주민들은 가축처럼 다뤄졌다 생산량을 채우지 못한 경우에는 가족을 해치거나 팔을 자르는 엽기적인 형벌로 한 마을 전체가 노동력을 상실해 비참하게 사라지는 지옥 같은 광경이 펼쳐진다 이 사태를 냉정하게 판단하고 본국과 교황청에 보고한 것은 현지에 파견된 선교사들이었다 선교사들은 이 사태에 뒤집어졌고 원주민들은 인간이며 노동에 대한 정당한 대우와 가혹한 대우를 개선하라고 요구한다 하지만 엔코미엔다들은 이익의 극대화를 위해 이들은 인간 이하의 가축이며 인간처럼 다루는 것이야말로 신의 뜻에 어긋난다 주장했다 정복자들과 선교사들은 이전의 남미 원주민 국가를 무너트리는데까지는 협력했지만 정복자들은 정복과 경제적 이익이 목표였다면 선교사들은 '저들은 아이처럼 순수하니 저들이야말로 신의 나라에 가까운 자들이다'라는 생각으로 접근했다 목표가 달랐던 두 세력은 곳곳에서 충돌하게 된다 전도해야하는 원주민들이 파리목숨처럼 죽어나가자 선교사들은 각 지역을 돌아다니며 원주민 노예노동의 실상을 조사하려고 했고 엔코미엔다들은 그런 선교사들을 매질해서 쫒아내거나 으슥한 곳에서 죽인 후 원주민의 공격으로 위장하기도 한다 선교사들이 조사한 남미의 실상과 원주민의 급감은 마침내 스페인 왕가와 교황청으로 전달되었고 대충 짐작은 하고 있었지만 물증이 없었던 스페인 왕가와 교황청이 조사원을 파견하게 만들었다 마침내 스페인의 카를로스 1세는 모든 사태의 핵심인 '남미 원주민들은 사람인가 가축인가'를 해결하라는 토론을 지시하고 1550년 스페인 서북부, 바야돌리드에서 양 세력의 챔피언들이 격돌한다 엔코미엔다 측은 스페인의 유명한 르네상스 인문주의 학자인 '후안 히네스 데 세풀베다'였는데 아리스토텔레스 저서의 상당수를 라틴어로 번역한 아리스토텔레스 철학의 권위자로 유명했다 선교사 측은 크리스토퍼 콜로버스와 함께 남미로 건너간 이후 종군신부와 선교사, 주교로 남미에서 오랫동안 살았던 66세의 '바르톨로메 데 라스 카사스'였다 그는 오래전부터 스페인에 남미의 실상을 알려왔으며 엔코미엔다의 세습을 막는 법안을 통과시킨 적이 있었다 이 토론은 각국의 관심을 끌었으며 교황청도 심판이자 최종결정권을 가진 전권 특사를 보냈다 세풀베다의 논리는 '정복의 권리'와 '아리스토텔리스의 자연적 노예 상태', '성 아우구스티누스의 죄에 대한 징벌'이었고 그 근거로 식인풍습과 인신공양 등 '자연에 반하는 죄들'을 제시한다 반면 라스 카사스는 고대로마와 켈트, 게르만을 근거로 과거 유럽인 역시 인신공양과 식인을 하는등 야만적이었으나 예수와 사도들, 선교사들의 사랑과 희생으로 교화되었으며 그들은 명백한 문명을 가지고 있기에 이들의 재산권을 법과 교회의 이름으로 보호해야한다고 주장한다 라스 카서스는 여기서 더 나아가 교황과 그리스도교 군주라는 칭호만으로 타문명에 대한 정복의 근거가 될수없으며(!) 개종하지 않은 원주민의 생명권을 지켜야한다고 강조한다 마지막으로 무력은 오직 전도를 적극적으로 막는 악의 무리에게 한정적으로 사용되어야한다고 주장했다 길고 긴 토론을 거쳐 양쪽 모두 자신의 승리를 주장하였지만 교황 특사는 라스 카서스의 편을 들어 남미 원주민들 역시 인간이라는데 동의했고 그 타협으로 아프리카 흑인 노예를 아메리카로 보낸다는 결정을 내리면서(?) 바야돌리드 논쟁은 막을 내린다 교황청의 결정은 유럽 각국에 퍼졌으며 30년이 지난 후에도 프랑스의 철학자 몽테뉴가 이 토론을 언급하며 유럽인들은 남의 죄악을 찾으면서 자신의 악을 찾지 못한다고 한탄할만큼 큰 충격을 주었다 유럽은 잠시나마 자성의 시간을 가졌고, 남미 원주민의 대우는 조금이나마 개선되었다 역사적으로는 아프리카의 흑인 노예들이 신대륙으로 끌려가는데 큰 영향을 끼쳤다 일평생을 남미를 위해 봉사했으나 정복자들에게 차이며 주교자리까지 박탈당했던 라스 카서스는 유럽에서 집필에 몰두했으며 원주민의 문화와 스페인의 범죄를 상세하게 소개한 '인디오의 역사'를 서술했고 1566년 선종한다 만약을 위해 변호를 덧붙이면 나중에 흑인노예들의 참상을 알게 된 라스 카서스는 그 결정을 평생동안 후회했다고 한다 그의 책은 유언대로 1562년에 일부가, 1602년에 완전히 출간되었으며 영국과 프랑스는 이 책을 근거로 스페인을 비난하기도 했다 라스 카서스는 유럽의 지식인들에게 긍정적인 평가를 받으며 유럽의 양심으로 인정받았는데 정작 인종주의, 파시즘이 떠오르던 19세기 말 ~20세기 초에 뒤늦은 비난을 받기도 했다 멕시코에는 그의 이름을 기려 만든 '산 크리스토발 데 라스 카사스'라는 도시가 있다 정복자들은 자신의 경제적 이익과 권력을 위해 원주민들을 인간으로 여기지 않았는데 그들을 인간으로 만들기위해 선교사들이 피흘려 싸웠던 역사도 있었다 R.I.P --- 깨끗한 사람들에게는 모든 것이 깨끗하나 더럽고 믿지 않는 자들에게는 아무것도 깨끗한 것이 없고, 도리어 그들의 마음과 양심이 더럽혀져 있느니라 디도서 1장 15절 --- (출처) 그래서 흑인을요?????
선교사가 쏘아올린 큰 대포 (feat.음력)
(마테오 리치, 주인공 아님) 이탈리아 출신의 마테오 리치는 매우 영특한 인재로 학문에 관심이 많고 무언가를 배우는걸 좋아했다고 한다 로마에서 법학을 전공한 마테오는 선교사의 길을 택하고 예수회 교육기관에 들어가 천문, 수학, 과학, 기계를 공부한 후 중국으로 향했다 1577년 중국에 도착한 마테오 리치는 선교를 위해서는 그 나라의 문화를 빠삭하게 공부해야한다는 생각으로 중국어와 중국 문화, 유교, 도교, 불교를 공부했으며 특히 유교는 중국 사대부와 토론이 가능할 정도로 공부했다 10년의 노력 끝에 그는 중국 황제의 눈에 들었으며, 사대부들과도 친밀한 관계가 되었고 사대부들에게 기술을 전파하고, 더 나아가 천주교 신자로 개종시키는데 성공했다 마테오 리치가 죽자 사대부들과 선교사들은 황제에게 상소를 올려 베이징 인근의 그의 무덤을 만들어 주었고 학식이 높은 사람에게 주는 '자'를 붙여 '이자'라 불러주었다 (공자, 맹자처럼) 마테오 리치는 천주교 교리를 중국 문화와 관련지을 수 있게 많은 연구를 했고 동양에 널리퍼져있는 옥황상제 신앙으로 천주교를 이해시키려고 했는데 서양의 GOD을 '천주'로 번역하여 동아시아 사람들에게 천주교 허들을 낮추는 공로를 세웠다 ('천주'교의 '천주'를 이분이 퍼트린거다) 번역 하나로 문화적인 거부감을 확 줄여버렸으니... 마테오 리치는 파격적으로 유학의 극에 달하면 천주교의 가르침에 닿는다는 학설을 주장하였고 많은 유학자들이 유학 연구의 연장으로 천주교를 공부하는 계기가 되었다 마테오 리치의 영향으로 조선에 처음 천주교가 넘어올때도 유학과 관련된 학문으로 소개되어 유학자들 사이에서 퍼져나간다 아무튼 마테오 리치는 오랫동안 중국에 살면서 농업을 중시하는 중국의 역법이 후진적인 것을 알고 당황한다 그리고 예수회 본부에 연락을 넣어 중국인들은 역법을 중요하게 여기니 역법에 빠삭한 선교사를 보내달라 부탁한다 그렇게 오늘의 주인공인 독일인 '아담 샬'이 중국으로 오게 되었다 (아담 샬, 진주인공) 아담 샬은 마테오 리치의 친구이자 공동 연구가로 활약했던 천주교 신자이자 중국 사대부인 서광계와 파트너가 되었고 서양식 역법에 기초한 '숭정역법'을 만들어내어 명 황제에게 인정받게 된다 이즈음 서광계는 서양의 화포인 홍이포의 위력을 알아보고 이를 대량배치하면 외적의 침입을 쉽게 막으리라 생각했다 서광계는 아담 샬의 중개로 포르투갈 상인에게 30문의 홍이포를 구입하는데 성공했고 이 중 11문이 영원성 전투에서 누르하치 군대를 곤죽으로 만들어버리며 대히트를 치게 되었다 홍이포의 위력에 고무된 명나라는 서광계를 중책에 앉히며 홍이포를 복제하라는 명령을 내렸는데 서광계는 아담 샬을 초청해 기술적 자문을 얻으며 빠르게 복제에 성공했고 1년만에 900문을 찍어내는 대륙의 기상을 보여준다 명이 망하고 청이 집권했을때 아담 샬은 여전히 수도에 머물렀는데 청나라는 그의 재능을 알아보고 그에게 흥천감의 감정 벼슬을 내리고 역법을 만들게 했다 아담 샬은 이전에 만들었던 숭정역법을 보완해서 시헌력을 만들었고 이로 인해 청 황제에게 인정받게 된다 그가 만든 시헌력은 조선에 넘어와서 오늘날 '음력'이라는 이름으로 아직까지 살아있는데 지금 청학동에서 제사지낼때나 토정비결에서 생일을 계산할때 쓰는 음력을 만든 사람이 서양에서 온 천주교 선교사인거다 제위에 올랐을때 나이가 어렸던 순치제(일명 소년천자)는 아담 샬을 개인적으로 매우 좋아했는데 광록대부라는 높은 명예직까지 내리면서 파격적인 승진을 시켜주고 인간에게 절을 하기 어렵다는 천주교인 아담 샬의 부탁을 들어주어 삼궤구도두를 하지않고 황제를 만날 수 있는 특혜를 내려주었다 1656년과 57년, 2년만 세어봐도 순치제는 아담 샬의 집에 24번이나 놀러갔고 거기서 황제의 생일도 축하하기도 했다 순치제가 천연두로 오늘내일 할때도 황제의 넋두리와 후계자 고민을 들어주었다 순치제는 23세의 젊은 나이로 요절하고 그 8살 아들인 강희제가 황제가 되자 아담 샬도 다시 원래 직위였던 흥천감의 감정으로 돌아왔다 3년 후 아담 샬은 지금까지 관찰과 연구로 다시 보완된 새로운 역법을 강희제(11살)에게 바치며 자신있게 이 역법은 무려 200년간 쓸 수 있다고 말했는데 청나라 역법사 양광선이 이 말을 꼬투리 삼아 청나라가 200년 밖에 안 간다는 저주를 내린 역적이라 모함했고 아담 샬과 선교사들은 감옥에 갇힌 후, 천주교를 사교라 여긴 청나라 대신 '오보이'에 의해 사형을 선고받는다 불행 중 다행으로 아담 샬이 조카딸을 치료해준 이후 뒤에서 아담 샬을 후원해주었던 강희제의 할머니 효장태후가 개입한 덕분에 선교사들은 다음해 감옥에서 풀려나게 되었다 그러나 75세의 노구에 닥친 감옥살이와 심문으로 골병이 나버린 아담 샬은 한해동안 고생하다가 1666년 선종하게 된다 모함으로 아담 샬의 자리를 뺏은 청나라 역법사 양광선은 뒤떨어진 옛 역법에 집착하다가 잘못된 예보를 남발하고, 급기야 황제가 참석하는 행사까지 잘못 예보하며 1669년에 결국 쫒겨났고 흥천감의 감정 자리는 아담 샬을 도와주었던 벨기에의 예수회 선교사 페르비스트(1623~1688)에게 돌아갔다 선교사들에게 사형을 선고한 청나라 대신 오보이도 훗날 강희제한테 반란을 일으키다 진압당한다 아주 개판이다 아담 샬이 수도에 있을때 소현세자도 포로로 잡혀있었는데 아담 샬이 그의 기록에서 소현세자를 조선의 왕으로 서술하는 실수를 하기에 직접 만나거나 깊은 관계를 맺지는 않은것 같지만 그 사회의 엘리트 계층에게 접근해 학문적, 기술적으로 전도한다는 예수회의 방침을 고려하면 부하 선교사를 보내거나 물건을 보내주는 등 간접적으로 소현세자와 접촉했을거라는 주장은 신빙성이 있다 소현세자가 보답과 함께 아담 샬에게 보냈다는 편지가 라틴어로 번역되어 전해지고 있다 -------------- 어제 당신이 보내주신 천주상ㆍ천구의(天球儀)ㆍ천문서 및 그 밖의 여러 양학서(洋學書)등은 반갑게 받았으며 이에 깊이 감사를 드립니다. 나는 먼저 그중 두서너 가지 책을 읽었습니다. 정신을 수양하고 인격을 가다듬는데 관한 참으로 높고 먼 교리임을 알았습니다. 우리나라는 오로지 어둡고 깨지 못하여 이것을 모르고 있었으니, 이 교리는 우리들의 지식의 빛이 될 것입니다. 천주상은 벽에 매달아 놓았으니 보는 사람의 마음에 평화를 줄뿐더러 이 세상의 더러운 티끌을 씻어 내리는 것 같아서 여러 가지로 느껴지는바 많습니다. 천구의와 여러 가지 책들은 이제까지 이 세상에 이러한 것들이 있었음을 몰랐습니다. 이런 것을 받으니 꿈과 같습니다. 우리나라에 있는 역법은 수백 년 동안 하늘의 움직임과 맞지 않아서 헛된 것이라고 여겨 왔습니다. 이제 참으로 보기 드문 물건을 얻었으니, 무엇이 이보다 더 반가우리요. 내가 우리나라에 돌아가면 궁중에서 쓰게 하고 책을 많이 박아서 글 보는 사람들에게 펴려고 합니다. 그리하면 사막과 같이 메마른 우리나라가 학문의 전당으로 화할 것입니다. 사랑과 은총을 받은 우리 국민은 서양 사람의 과학에서 배운 것을 모두 감사할 것입니다. 당신과 나는 다 같이 외국인으로서, 큰 바다를 건너 낯선 땅에 와서, 서로 만나 즐거이 사귐이 핏줄기를 같이 한 가족들과 같으니, 천리(天理)의 깊고 깊음에 놀라지 않을 수 없습니다. 생각컨대 사람의 마음이란 비록 멀리 떨어져 있다 하더라도 지식을 사랑함으로써 서로 알아내고 합할 수 있는 것입니다. 나는 서양의 서적과 천주상을 우리나라로 가져가고 싶은 마음은 간절하지만 우리나라에는 아직 천주교를 아는 사람이 없기 때문에 그릇된 나쁜 종교라고 천주의 높고 귀함을 더럽힐까 두려워하는 바입니다. 그러므로 천주상을 당신에게 돌려보내고 실수함이 없게 하고자 합니다. 나도 당신에 대한 감사의 뜻은 나타내는 갚음으로 우리나라의 귀한 물건을 보냅니다. 그러나 당신이 베푼 은혜에 비하면 만분의 일도 못되옵니다. 삼가 말씀드립니다. -------------- 편지의 내용을 보면 정확한 역법과 여러가지 신기한 것을 준 것에 감사하지만 천주상만은 돌려보내면서 선을 그었다 홍이포도 그렇고 음력도 그렇고 조선에 많은 영향을 끼친 선교사. (출처) 아니 뭐야 음력이 made in 동양이 아니었다니 ㄷㄷ 진짜 많은 걸 주고 떠났네요 선교사들은 정말 여러모로 대단하신 분들인듯 대단해
중세 유럽을 공포에 빠트린 인류의 적
그거슨 늑대였고요 늑대의 생태를 자세히 뜯어보면 1. 넓은 영역을 가지고 2. 고도로 발전된 무리 생활을 하며 3. 주변 동물들을 무리 사냥한다 는 특징이 있는데 이는 원시 인류와 아주 비슷한 생활 양식이었다 필연적으로 늑대는 인간과 경쟁할 수 밖에 없었으며 생존을 위한 전쟁을 치룰 수 밖에 없었다 늑대와 인간의 경쟁은 인간의 도구가 발달하고, 늑대와 동등한 능력을 가진 배신'견'들이 인간 쪽에 붙으면서 전세는 점차 인간 쪽으로 기울어갔고 고대가 되자 늑대들은 인간이 오지 않는 숲이나 오지로 도망치게 되었다 (인간과 늑대의 경쟁에서 큰 변수를 만든 무시무시한 배신자.jpg) 하지만 유럽은 중세까지만 하더라도 인간이 개척한 마을과 도시보다 숲이 더 넓었고 숲 속에서 늑대들은 무리를 만들고 사냥하거나 인간이 키우는 양을 공격하기도 했다 영역의식 때문인지 오랜 전쟁에서 패배하고 얻은 교훈인지 늑대들은 자신의 영역에 침범한 인간은 공격하되 인간의 영역을 적극적으로 공격하지는 않았지만 극심한 겨울이 오거나 사냥감이 부족해지면 늑대들도 조직적으로 인간 영역을 공격해왔다 늑대들이 도시나 농촌을 공격했다는 사례가 지금까지도 전해져 오는데 소설로도 만들어진 1450년, 늑대의 파리 공격이 유명하다 파리는 큰 도시여서 외부가 벽으로 둘러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굶주림을 참지 못한 늑대 무리가 벽의 틈새를 넘어와서 사람들을 공격했고 늑대들이 시내를 점거하면서 파리는 혼란과 공포에 빠져버린다 지금처럼 통신이 발달하거나 드론을 띄울 수도 없었던 시기였기에 군대라고 뭐 딱히 뾰족한 수가 없었는데 파리 시민들과 숙련된 사냥꾼들이 미끼를 놓아 늑대를 모으고 우두머리를 잡아버리면서 늑대들은 파리에서 도망쳤다 늑대 우두머리의 시체는 대성당 옆에 전시되었는데 이 늑대는 사람을 40명이나 죽였기에 사람들이 지나가면서 시체에 돌을 던졌다고 한다 1765년 파리 북부 수이송에서도 늑대 무리가 마을을 공격해서 임산부와 아이같이 약한 사람을 골라 사냥했고 사람들은 희생자들의 시체를 모아 미끼로 두어서 늑대들을 모은 다음 포위해서 공격하기도 했다 늑대 일부가 포위망을 뚫고 도망쳤지만 지역 민병대원이 추적 끝에 죽이는데 성공했고 이 소식을 들은 루이 15세는 이 민병대원에게 용기에 대한 포상으로 300 리브스의 상금을 주었다 이렇게 도시나 마을을 공격하는 사례도 드문드문 있었지만 영역이 모호한 중세의 길은 늑대들의 습격이 잊을만하면 나왔다 프랑스에서는 16세기 ~ 19세기까지 늑대의 공격으로 5000명 가까이 희생자가 나왔고 러시아 제국에서는 1871년 한해동안만 164명이 늑대의 공격으로 죽었다 (사람의 머리부터 먹으려는 흉폭한 늑대) 인류가 총이라는 강력한 도구를 얻었지만 늑대는 여전히 무서운 존재였다 1차 대전 때 민스크의 굶주린 늑대 무리는 러시아와 독일군을 공격했고 이로 인한 피해가 커지면서 양측 군대가 일시적으로 휴전하고 늑대를 사냥하기도 했다 T-34가 굴러다니고 핵폭탄이 떨어지는 2차 대전 때도 동부전선에서 군인들은 늑대들의 공격을 받았다 인간과 비슷하면서 가장 오래 싸워온 적이다보니 늑대는 고대부터 지금까지 여러가지 이미지가 더해져왔다 늑대에 물렸다가 간신히 살아난 사람이 광견병에 걸려서 이상하게 변한걸 보고 늑대인간 신화가 만들어졌으며 동화에서는 폭력적이고 잔인한 악당으로 등장한다 인간과 비슷하게 무리 생활을 하면서 인간이 살지 않는 땅을 지배한다는 신비한 이미지로 여러 국가에서 숭상받기도 했는데 로마의 로물루스, 레무스도 늑대 젖을 먹고 살아났으며 독일에서는 자연신의 모습으로 늑대가 나타나기도 한다 몽골은 늑대를 조상신으로 여겼다 (늙은 양치기의 상주 - 영국의 동물화가 '에드윈 린드시어') 사촌 형은 공포의 괴물이나 신비한 신령의 이미지가 박혀버렸지만 그래도 댕댕이는 인간의 가장 가까운 친구 P.S. 참고한 논문은 2009년에 나온 The prehistoric and preindustrial deforestation of Europe 어제 늑대글 올리고서 "그때 왜 숲 안밀어버림?"이라는 내용의 댓글이 달렸는데 유럽 전역을 덮고 있는 숲을 개간하는건 엄청난 노동력을 필요로 하는 일이었기에 손대기 어려운 일이었다 그리고 자연도 가만있지는 않아서 숲을 개간하더라도 거기에 사람이 살지 않으면 수십년 후에는 다시 어린 숲들이 올라왔다 (버려진지 수십년 밖에 안된 도시-체르노빌-도 외곽부터 숲과 야생동물들이 깃발 꼽고 있다) 그래서 숲 개간은 인구증가에 따라서 인간이 천천히 숲을 밀어내는 형식으로 서서히 진행되었다 지도를 보면 고대에는 로마와 그리스 같이 인구가 많고 도시 문명이 발달한 곳에서 빠르게 개간이 나타났고 기원후 350년부터 1000년까지는 숲개간이 느리게 진행되었다가 다시 1500년부터는 개간이 빨라졌다 산업혁명 직후인 1850년 때는 숲 개간이 엄청나게 가속화되었다는걸 알 수 있다 카오스 게이트가 열리고 인간들이 거기로 이사가게 된다면 아마 200년 정도만 지나면 기원전 1000년 숲 지도로 돌아갈거임 숲 개척하고 유지하는건 문명의 힘하고 비례하는거여서... 그나저나 식목일을 다시 공휴일로 만들어주면 안되나? (출처) 댕댕이 이 배신자들ㅋㅋㅋ
따닷하고 튼튼한 갑옷
보통 갑옷하면 이렇게 금속을 대량으로 쓴 반짝이는 모습을 기대한다 하지만 이런 금속 갑옷은 금속 가공 기술이 뒷받침해줘야 제대로 만들 수 있었고 가격도 비쌌으며, 강철을 대량으로 사용했기에 관리가 어려웠다 사람들은 금속 외에도 가죽이나 천으로 갑옷을 만들어 입었는데 각자 일장일단을 가지고 있었다 여기서는 천 갑옷, 그 중에서도 갬비슨을 araboza. 일단 천 갑옷의 역사가 꽤 길다 군대나 자원봉사로 제초 좀 해본 사람이면 알겠지만 금속제 도구로 풀을 내리쳐도 한번에 잘 잘리지 않고 오히려 날을 상하게 한다는걸 알고 있을거임 고대인들은 식물 섬유을 짜고 여러번 겹치는 방법으로 갑옷을 만들었는데 가벼우면서 어느정도 방호력을 가졌기에 그리스인들, 그리고 알렉산더가 즐겨 사용했다 하지만 이렇게 천을 여러겹 두르는것만으로는 방어력의 한계가 명백했고 가죽 가공 기술과 금속 기술이 발달하면서 주류에서 밀려났다 중세때 천 갑옷이 다시 재조명 받았는데 린넨을 여러겹 겹치고 솜과 양털, 옷조각을 넣어 부풀린 강화형 천갑옷이 등장했고 이 형태의 갑옷을 '갬비슨'이라고 불렀다 딱봐도 두툼한게 아주 깔깔이스럽다 갬비슨은 13세기정도에 전 유럽에 보급되었고 15세기에 정점을 찍었음 재배가 가능한 아마로 만들기 때문에 가죽이나 금속보다 훨씬 가격이 낮았고, 제대로 만든다면 비슷한 두께의 가죽보다 찌르는 힘에 더 잘 저항할 수 있었다고 한다 화살 방호가 높았다고 하는데 학자들은 재질만 인공섬유로 바꾸면 방탄복과 유사해지는 구조 덕분이라고 하더라 금속 갑옷처럼 동물의 지방을 바른다거나, 가죽 갑옷처럼 약품처리한 후 음지에서 말려야하는 등등 다른 갑옷의 유지보수가 번거로운 반면에 갬비슨은 햇볕이 좋은날, 잘 말리는 것으로도 쉽게 관리할 수 있었고 파손되더라도 현장수리가 가능했다 또 상대적으로 가볍고 움직임이 편했기에 누구나 쉽게 입고 싸울 수 있었는데 여성들도 갬비슨 갑옷을 어렵지않게 착용하고, 움직일 수 있었다고 한다 갬비슨은 모든 계층에게 사랑받았는데 기사들은 사슬 갑옷 아래에 갬비슨을 입어서 방호력을 늘렸고, 금속이 살과 마찰을 일으켜 상처가 나거나 짓무르는걸 막았다 금속 갑옷을 구입할 여유가 없는 일반 보병들은 아예 갬비슨만 입고 전투에 나서기도 했는데 철제 투구에 갬비슨을 입은 병사들의 모습은 중세 시대에 보편적인 보병들의 모습이었다 대충 이런 모습. 신분이 높은 사람도 가볍게 훈련하거나, 사냥을 나가거나, 스포츠를 즐길때 갬비슨을 즐겨 입곤했는데 이 때문에 화려한 갬비슨도 종종 볼 수 있었다 15세기 중후반에는 갑옷인 갬비슨이 일상복으로 쓰이기도 할 정도로 보편적으로 사용되었다 (중세 문화를 어느정도 반영한 마운트 앤 블레이드 2 : 배너로드에서는 갬비슨 갑옷을 전투복과 일상복 둘 다 쓰게 해놓은 걸로 고증해놓았다) (영국의 대제독 에드워드 클린톤이 착용한 고급 갬비슨의 모습) 금속갑옷과 함께 사용해 서로를 보완하고 그 자체로도 갑옷으로 쓰인 갬비슨은 더 이상 방호가 힘든 총기가 발달하면서 18세기가 되면 전장에서 사라졌다 갬비슨은 크게 두가지 형태로 나뉘는데 조끼형태로 상의를 보호하는 것과 코트형태로 하의까지 보호하는 것 두가지로 나뉜다 보통 조끼형태는 다른 갑옷과 함께 입은 모델로 기병이나 중보병이 애용했으며 코트 형태는 갬비슨 단일 방어구로 착용할때 쓰이는 물건이고 주로 보병들이 애용했음 중세를 상징한게 사슬, 판금 갑옷이라면 중세를 지배한건 갬비슨 갑옷이어서 그 시대를 다루는 많은 매체에서 등장하는데 위에 잠깐 언급한거처럼 마운트 앤 블레이드에서 갑옷&평상복으로 나오고 위처에서는 '강베송'이라는 불어 발음으로 나온다 그리고 중세하면 빼놓을 수 없는 그분들도 갬비슨을 입고 있음 (출처) 강베송이 겜비슨이었군 진짜 쓸모없지만 알아두면 재밌는 옛날 이야기 ㅋㅋ
용과 드래곤
(이건 이무기) 요즘이야 소설이나 영화에서 부르면 튀어나오는게 동양 용이지만 사실 용은 일반적인 괴물이랑 격이 다름 용은 요물이 수행 끝에 신이 되었거나 물신이 용으로 변하는 경우가 많아서 격이 높은 신으로 취급되었고 용한테 제사까지 지내는 등 민간에서는 제대로 된 신 대우를 해줬다 어떤 지역에서는 용신의 격이 너무 높다보니 그 밑의 존재인 이무기한테 딜을 거는 이야기도 전승되고 있음 뱀이나 물고기 -> 이무기 -> 용 단계를 밟아서 올라오므로 인간보다 낮은 동물 출신인데 가장 마지막까지 제대로 된 신 대우를 받았으니 한반도 동물 신앙의 마지막 잔존이었다 문무대왕도 용이 되겠다며 바다에 장사지내달라고 했고 그렇게 수중릉이 만들어졌음 왕이 죽어서 되겠다는 존재일만큼 용은 한국 신앙에 차지하는 비중이 컸고 단순한 요물이 아니라 신과 가까운 존재였다는걸 보여주고 있다 용신 신앙은 삼국시대에 불교가 들어오기 전까지 여러 사람들의 주 신앙이었는데 불교가 점차 퍼지면서 용신 신앙이 조금씩 밀려나게 되었음 원래 그리스 신화에서도 각 지역의 신들이 제우스라는 타지역의 신 밑으로 들어가게 된 것처럼 용신 신앙도 불교에 밀리다가 결국 흡수되었는데 부석사 무량수전 이야기가 이 과정을 보여주는 단서 중에 하나이다 부석사는 지을때 스님에게 반한 여자가 용으로 변해서 따라오고 그 용이 절 짓는걸 도와주고, 도적들까지 물리친 다음 돌로 변해서 절 뒤에 앉게 되었다 주신이었던 용이 절을 짓고 스스로 그곳의 수호물이 되었다는 이야기가 암시하는 바가 크다 선운사 이야기는 더 노골적인데 이쪽은 아예 못에 살던 용을 스님이 쫓아내고 그 자리를 메꿔서 절을 지어버렸음 신이었던 용은 이렇게 영물이자 수호자로 밀려나게 되었다 하지만 용이 가진 힘과 권능은 여전해서 (그리스 신화에서도 다른 신이 제우스 밑으로 깔려도 신성을 유지한거처럼) 용은 왕을 수호하는 영물의 자리를 차지했고, 해변 지역에서는 여전히 그 신앙을 유지할 수 있었음 일본의 경우에는 한국이나 중국보다 용신 신앙이 길게 지속되었는데 특유의 신화관과 바다와 가까운 생활에 큰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인다 동양의 용은 본래 미물이었지만 수행과 선행을 쌓아 신으로 변한 존재여서 '하찮은 사람도 교육을 통해 성인이 될 수 있다'는 공자의 가르침과 통하는 면이 있었기에 불교나 도교에 거부감을 가지던 유학자들도 친숙하게 받아들일 수 있던 동물이었음 용은 대체적으로 선하고, 타락하더라도 가르침을 받아 다시 신성을 되찾는 이야기가 많아서 철저하게 절대악인 드래곤과 여러가지로 비교되는 친구 서양의 드래곤은 동양의 용과 너무 다른데 서양 문화의 근본 중에 하나인 성서에서 대놓고 드래곤 = 악마들의 대장인 '사탄'으로 그리고 있다 그 이전에도 드래곤에 관한 이야기가 존재하지만 전례 되어오는 서양의 드래곤은 99.8%가 성경의 드래곤에서 가져왔다 머리 일곱 달린 붉은 용은 하느님과 대적한 사탄이 스스로 선택한 모습이었는데 신 앞에서도 인간을 헐뜯으며 동시에 인간을 유혹해서 타락시키는 권능을 가졌고 꼬리로는 별을 떨어트리는 힘을 가졌다고 한다 붉은 용은 천상에서 난을 일으키지만 천사들한테 패배해서 쫓겨났고 인간계로 내려와 인간을 유혹하고 자신의 세력을 불려 전쟁을 준비하고 있는 존재로 알려져있다 뱀의 경우처럼 사탄이 모습을 빌렸던 동물을 안 좋은 이미지가 엄청나게 달라붙게 되는데 그렇게 용은 짐승의 모습을 한 악마, 절대악 이미지가 굳어지게 되었고 특히 사탄이 지상에서 엄청난 힘을 휘두른다는 것을 따와 대단히 강력한 마물로 나타난다 (실제로 그리스도교에서 사탄은 정말 ㅈㅇㅇㅇㅇㅇㅇㅇㅇㄴ 강한 존재로 그린다 크든 작든 죄를 지으면 좋든 싫든 사탄의 종속 안으로 끌려들어가는 구조여서 인간은 이길 수가 없는데 하느님이 밸붕급 치트키를 써서 사탄 물 먹이고 인간을 구원하는 이야기가 신약이다 이 관계를 판타지풍으로 풀어낸 이야기가 나니아 연대기 -사자, 마녀, 옷장-) 일단 영웅이 잡아야하고, 사탄 밑에 있다는 점 때문에 중세 이야기에서는 머리 하나로만 그리는 경우가 많지만 현실에 존재하는 가장 강한 존재인 만큼 작으면 도시, 크면 국가를 뒤흔드는 마물로 그려져왔다 성 게오르기우스의 이야기처럼 드래곤을 잡는건 성인(Saint)나 고귀한 기사의 역할이었는데 드래곤은 가장 강력한 생물의 모습을 빌린 악마였으므로 악마를 죽일만큼 강하다 = 이 자는 신의 축복을 받는 존재다! 라는 공식이 성립되기 때문이었다 드래곤은 매우 강하고, 절대악이며, 사탄의 부하라는 점에서 중세 민담과 여러 이야기에서 드래곤은 보스로 삼기 완벽한 존재였고 특히 성인의 이야기와 기사무용담에서 죽을 고생 끝에 잡히는 존재로 자리잡았다 드래곤을 가르치거나, 우정을 쌓거나, 수호신으로 삼는 민담은 멸종급으로 찾아보기 힘든데 드래곤 = 악마였기 때문에 교리상 철저하게 분쇄하여 물리친다라는 선택지 말고는 별다른 선택지가 없었기 때문이다 톨킨의 드래곤은 매우 강하고, 수많은 죄악을 지었으며, 사람들을 괴롭히고, 동시에 타락시키는 힘까지 지녔다는 점에서 전형적인 서양식 드래곤(=악마)와 부합한다 엘더스크롤의 드래곤 파서낙스처럼 전형적인 드래곤처럼 성질이 더럽지만 수행으로 이를 극복한다는 동양의 용을 가미한 퓨전 드래곤도 나오고 있다 비교적 최근 판타지에서는 우호적인 드래곤이 인간을 돕거나 힘을 빌려주는 이야기가 많이 나오는데 서양 드래곤의 하드웨어에다가 동양 용의 소프트웨어를 이식한 동서양 혼합체라고 볼 수 있다 (햄탈워의 드래곤도 이런 혼합물에 가깝다) 문화교류 만만세 (출처) 갱생 서양 용들은 결국은 문화교류의 산물이었구만 ㅋㅋ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