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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의 성녀 마르가리타

안티오키아의 성녀 마르가리타.
천주교의 14구난성인 중 한 명으로
굉장히 유명한 순교자 중 한 명이다.

그녀는 원래 이교의 사람이었으나,
믿음 있는 자였던 유모 덕에 카톨릭의 믿음을 전파 받는다.
이후 신실한 마음을 가지고 아름다운 여인으로 성장한다.
누군가에게 있어 아름다움은 축복이었겠지만,
마르가리타에게 아름다움은 독이었다.
안티오키아 지사로 임명된 올리브리오가 그녀의 아름다움을 보고 한 눈에 반해버렸기 때문이다. 

추악한 욕망에 찌든 올리브리오는 
아름다운 마르가리타에게 청혼을 한다.
심지어 그는 이미 결혼한 몸이었는데,
아내와 이혼할 테니 자신과 결혼해달라고 요청한다.

하지만 마르가리타는 이를 거절하고
자존심이 상한 올리브리오는 분노에 미쳐 날뛰게 된다.

이후 그는 마르가리타가 금지된 그리스도교 신앙을 가지고 있다는 이유로 지하 감옥에 가둬버린다. 
이후 고문과 회유가 반복되는 끔찍한 감옥 생활이 이어진다.
하지만 신실했던 마르가리타는 믿음으로 이를 이겨낸다.

그러던 어느 날, 어두컴컴한 어둠에 
그녀를 유혹하기 위한 악마가 찾아온다.
악마는 기괴한 용의 모습을 하고 있었다.
악마는 마르가리타에게 찾아와 유혹하기 시작한다.

마르가리타, 마르가리타.
불쌍한 소녀여.
네 신은 너의 고난을 보고도 아무 대답도 해주지 않는다.
왜 그럼에도 너는 신을 믿는가?
신을 저주해라
그리고 믿음을 버려라.
세상 모든 걸 원망해라......!!!

감옥에 갇혀 죽을날만 기다리고 있던 마르가리타에게 악마의 유혹과 위협은 크나큰 고난이었다.

마르가리타는 악마를 마주한 채.....
가슴에 품고 있던 신앙심이 깃든....
망치를 꺼낸다.
그것도 존나 크고 아름다운.
안 그래도 별 거지 같은 이유로 감옥에 갇혀서 고문 당하느라 빡쳐 있던 마르가리타는 눈에 뵈는게 없었다.
왜 어째서 감옥에 갇혀 있던 성녀가
가슴에 망치를 품고 있었는지는 묻지 말자.

중요한 건, 
사탄이 안 그래도 빡쳐 있던 성녀의 콧털을 건드렸다는 거다.
정설에 의하면, 
성녀 마르가리타는 그 말을 들은 즉시 사탄의 머리끄댕이를 붙잡고 망치로 뚝배기를 후려갈겼다고 한다.

그래서 마르가리타를 그린 그림을 보면 유독 사탄의 머리를 잡고 침착하게 망치를 내리 치는 모습이 많다.
그냥 울먹이면서 망치를 휘두르는 그런 나약한 모습은 상상하지 말자.
나사렛의 몽키 스패너의 믿음을 이은, 안티오키아의 정의로운 장도리는 그런 것 따위는 없다
머리 채를 잡고 정확히 망치를 후려 갈기는, 숙련된 자세로 악마를 퇴치하셨다.
망치로 악마를 때려잡는 그림이 성모마리아라는 오해가 있는데 자애로우선 성모님은 망치로 악마의 머리를 때리는 일은 하지 않으신다.
그 분은 그냥 주먹으로 갈긴다.
도구 따위에 의지하지 않으신다.
오해 없길 바란다.
아무튼 이렇게 악마를 때려잡자 갑자기 하늘에서 빛이 내려왔고 많은 사람이 그걸 보고 기적이 일어났다고 생각해 놀라워 하면서 그리스도교의 믿음이 전파되었다고 한다.

하지만 성녀 마르가리타는 그 이후로 고난을 받다가 결국은 참수형으로 세상을 떠나게 된다. 참수형도 칼로 10번 이상을 내리쳤을 정도로 고통스럽게 사망했다고 한다.
이후 성인의 반열에 들었지만,
문제는 당시 카톨릭에서는 망치로 악마를 때려잡는 성녀를 그릴 수가 없어서 믿음과 기도로 악마를 물리치게 했다는 장면으로 순화시킨다.

이후 그림을 보면
성녀 마르가리타는 망치 대신 십자가를,
눈 부릅 뜬 얼굴에서는 자애와 편안함이 머문다.
그리고 그녀를 위협했던 용 역시 그냥 불쌍한 애완동물처럼 그려진다.
하지만 정교회는 그런거 없어서
그냥 마르가리타가 빡쳐서 망치 들고 악마 패는 모습을 적나라하게 그린다.

아무튼 후에 천국에 간 성녀는 
먼 훗날,
신의 부름을 받은 또 다른 성녀 앞에 나타나
위대한 주님의 뜻을 전한다.

그리고 마르가리타로부터 계시를 받은 그 성녀가 바로....
예수초즌, 잔다르크다.

성녀 잔다르크는
성녀 마르가리타의 환시를 받고
영국군의 대가리를 깨버린다.




어쩐지 마르게리타 맥주와 마르게리타 피자가 맛있더라니
다 뚝배기 맛이었군
2 Comment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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뚝배기맛ㅋㅋ
좋은 정보 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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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건 이무기) 요즘이야 소설이나 영화에서 부르면 튀어나오는게 동양 용이지만 사실 용은 일반적인 괴물이랑 격이 다름 용은 요물이 수행 끝에 신이 되었거나 물신이 용으로 변하는 경우가 많아서 격이 높은 신으로 취급되었고 용한테 제사까지 지내는 등 민간에서는 제대로 된 신 대우를 해줬다 어떤 지역에서는 용신의 격이 너무 높다보니 그 밑의 존재인 이무기한테 딜을 거는 이야기도 전승되고 있음 뱀이나 물고기 -> 이무기 -> 용 단계를 밟아서 올라오므로 인간보다 낮은 동물 출신인데 가장 마지막까지 제대로 된 신 대우를 받았으니 한반도 동물 신앙의 마지막 잔존이었다 문무대왕도 용이 되겠다며 바다에 장사지내달라고 했고 그렇게 수중릉이 만들어졌음 왕이 죽어서 되겠다는 존재일만큼 용은 한국 신앙에 차지하는 비중이 컸고 단순한 요물이 아니라 신과 가까운 존재였다는걸 보여주고 있다 용신 신앙은 삼국시대에 불교가 들어오기 전까지 여러 사람들의 주 신앙이었는데 불교가 점차 퍼지면서 용신 신앙이 조금씩 밀려나게 되었음 원래 그리스 신화에서도 각 지역의 신들이 제우스라는 타지역의 신 밑으로 들어가게 된 것처럼 용신 신앙도 불교에 밀리다가 결국 흡수되었는데 부석사 무량수전 이야기가 이 과정을 보여주는 단서 중에 하나이다 부석사는 지을때 스님에게 반한 여자가 용으로 변해서 따라오고 그 용이 절 짓는걸 도와주고, 도적들까지 물리친 다음 돌로 변해서 절 뒤에 앉게 되었다 주신이었던 용이 절을 짓고 스스로 그곳의 수호물이 되었다는 이야기가 암시하는 바가 크다 선운사 이야기는 더 노골적인데 이쪽은 아예 못에 살던 용을 스님이 쫓아내고 그 자리를 메꿔서 절을 지어버렸음 신이었던 용은 이렇게 영물이자 수호자로 밀려나게 되었다 하지만 용이 가진 힘과 권능은 여전해서 (그리스 신화에서도 다른 신이 제우스 밑으로 깔려도 신성을 유지한거처럼) 용은 왕을 수호하는 영물의 자리를 차지했고, 해변 지역에서는 여전히 그 신앙을 유지할 수 있었음 일본의 경우에는 한국이나 중국보다 용신 신앙이 길게 지속되었는데 특유의 신화관과 바다와 가까운 생활에 큰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인다 동양의 용은 본래 미물이었지만 수행과 선행을 쌓아 신으로 변한 존재여서 '하찮은 사람도 교육을 통해 성인이 될 수 있다'는 공자의 가르침과 통하는 면이 있었기에 불교나 도교에 거부감을 가지던 유학자들도 친숙하게 받아들일 수 있던 동물이었음 용은 대체적으로 선하고, 타락하더라도 가르침을 받아 다시 신성을 되찾는 이야기가 많아서 철저하게 절대악인 드래곤과 여러가지로 비교되는 친구 서양의 드래곤은 동양의 용과 너무 다른데 서양 문화의 근본 중에 하나인 성서에서 대놓고 드래곤 = 악마들의 대장인 '사탄'으로 그리고 있다 그 이전에도 드래곤에 관한 이야기가 존재하지만 전례 되어오는 서양의 드래곤은 99.8%가 성경의 드래곤에서 가져왔다 머리 일곱 달린 붉은 용은 하느님과 대적한 사탄이 스스로 선택한 모습이었는데 신 앞에서도 인간을 헐뜯으며 동시에 인간을 유혹해서 타락시키는 권능을 가졌고 꼬리로는 별을 떨어트리는 힘을 가졌다고 한다 붉은 용은 천상에서 난을 일으키지만 천사들한테 패배해서 쫓겨났고 인간계로 내려와 인간을 유혹하고 자신의 세력을 불려 전쟁을 준비하고 있는 존재로 알려져있다 뱀의 경우처럼 사탄이 모습을 빌렸던 동물을 안 좋은 이미지가 엄청나게 달라붙게 되는데 그렇게 용은 짐승의 모습을 한 악마, 절대악 이미지가 굳어지게 되었고 특히 사탄이 지상에서 엄청난 힘을 휘두른다는 것을 따와 대단히 강력한 마물로 나타난다 (실제로 그리스도교에서 사탄은 정말 ㅈㅇㅇㅇㅇㅇㅇㅇㅇㄴ 강한 존재로 그린다 크든 작든 죄를 지으면 좋든 싫든 사탄의 종속 안으로 끌려들어가는 구조여서 인간은 이길 수가 없는데 하느님이 밸붕급 치트키를 써서 사탄 물 먹이고 인간을 구원하는 이야기가 신약이다 이 관계를 판타지풍으로 풀어낸 이야기가 나니아 연대기 -사자, 마녀, 옷장-) 일단 영웅이 잡아야하고, 사탄 밑에 있다는 점 때문에 중세 이야기에서는 머리 하나로만 그리는 경우가 많지만 현실에 존재하는 가장 강한 존재인 만큼 작으면 도시, 크면 국가를 뒤흔드는 마물로 그려져왔다 성 게오르기우스의 이야기처럼 드래곤을 잡는건 성인(Saint)나 고귀한 기사의 역할이었는데 드래곤은 가장 강력한 생물의 모습을 빌린 악마였으므로 악마를 죽일만큼 강하다 = 이 자는 신의 축복을 받는 존재다! 라는 공식이 성립되기 때문이었다 드래곤은 매우 강하고, 절대악이며, 사탄의 부하라는 점에서 중세 민담과 여러 이야기에서 드래곤은 보스로 삼기 완벽한 존재였고 특히 성인의 이야기와 기사무용담에서 죽을 고생 끝에 잡히는 존재로 자리잡았다 드래곤을 가르치거나, 우정을 쌓거나, 수호신으로 삼는 민담은 멸종급으로 찾아보기 힘든데 드래곤 = 악마였기 때문에 교리상 철저하게 분쇄하여 물리친다라는 선택지 말고는 별다른 선택지가 없었기 때문이다 톨킨의 드래곤은 매우 강하고, 수많은 죄악을 지었으며, 사람들을 괴롭히고, 동시에 타락시키는 힘까지 지녔다는 점에서 전형적인 서양식 드래곤(=악마)와 부합한다 엘더스크롤의 드래곤 파서낙스처럼 전형적인 드래곤처럼 성질이 더럽지만 수행으로 이를 극복한다는 동양의 용을 가미한 퓨전 드래곤도 나오고 있다 비교적 최근 판타지에서는 우호적인 드래곤이 인간을 돕거나 힘을 빌려주는 이야기가 많이 나오는데 서양 드래곤의 하드웨어에다가 동양 용의 소프트웨어를 이식한 동서양 혼합체라고 볼 수 있다 (햄탈워의 드래곤도 이런 혼합물에 가깝다) 문화교류 만만세 (출처) 갱생 서양 용들은 결국은 문화교류의 산물이었구만 ㅋㅋㅋ
선교사가 쏘아올린 큰 대포 (feat.음력)
(마테오 리치, 주인공 아님) 이탈리아 출신의 마테오 리치는 매우 영특한 인재로 학문에 관심이 많고 무언가를 배우는걸 좋아했다고 한다 로마에서 법학을 전공한 마테오는 선교사의 길을 택하고 예수회 교육기관에 들어가 천문, 수학, 과학, 기계를 공부한 후 중국으로 향했다 1577년 중국에 도착한 마테오 리치는 선교를 위해서는 그 나라의 문화를 빠삭하게 공부해야한다는 생각으로 중국어와 중국 문화, 유교, 도교, 불교를 공부했으며 특히 유교는 중국 사대부와 토론이 가능할 정도로 공부했다 10년의 노력 끝에 그는 중국 황제의 눈에 들었으며, 사대부들과도 친밀한 관계가 되었고 사대부들에게 기술을 전파하고, 더 나아가 천주교 신자로 개종시키는데 성공했다 마테오 리치가 죽자 사대부들과 선교사들은 황제에게 상소를 올려 베이징 인근의 그의 무덤을 만들어 주었고 학식이 높은 사람에게 주는 '자'를 붙여 '이자'라 불러주었다 (공자, 맹자처럼) 마테오 리치는 천주교 교리를 중국 문화와 관련지을 수 있게 많은 연구를 했고 동양에 널리퍼져있는 옥황상제 신앙으로 천주교를 이해시키려고 했는데 서양의 GOD을 '천주'로 번역하여 동아시아 사람들에게 천주교 허들을 낮추는 공로를 세웠다 ('천주'교의 '천주'를 이분이 퍼트린거다) 번역 하나로 문화적인 거부감을 확 줄여버렸으니... 마테오 리치는 파격적으로 유학의 극에 달하면 천주교의 가르침에 닿는다는 학설을 주장하였고 많은 유학자들이 유학 연구의 연장으로 천주교를 공부하는 계기가 되었다 마테오 리치의 영향으로 조선에 처음 천주교가 넘어올때도 유학과 관련된 학문으로 소개되어 유학자들 사이에서 퍼져나간다 아무튼 마테오 리치는 오랫동안 중국에 살면서 농업을 중시하는 중국의 역법이 후진적인 것을 알고 당황한다 그리고 예수회 본부에 연락을 넣어 중국인들은 역법을 중요하게 여기니 역법에 빠삭한 선교사를 보내달라 부탁한다 그렇게 오늘의 주인공인 독일인 '아담 샬'이 중국으로 오게 되었다 (아담 샬, 진주인공) 아담 샬은 마테오 리치의 친구이자 공동 연구가로 활약했던 천주교 신자이자 중국 사대부인 서광계와 파트너가 되었고 서양식 역법에 기초한 '숭정역법'을 만들어내어 명 황제에게 인정받게 된다 이즈음 서광계는 서양의 화포인 홍이포의 위력을 알아보고 이를 대량배치하면 외적의 침입을 쉽게 막으리라 생각했다 서광계는 아담 샬의 중개로 포르투갈 상인에게 30문의 홍이포를 구입하는데 성공했고 이 중 11문이 영원성 전투에서 누르하치 군대를 곤죽으로 만들어버리며 대히트를 치게 되었다 홍이포의 위력에 고무된 명나라는 서광계를 중책에 앉히며 홍이포를 복제하라는 명령을 내렸는데 서광계는 아담 샬을 초청해 기술적 자문을 얻으며 빠르게 복제에 성공했고 1년만에 900문을 찍어내는 대륙의 기상을 보여준다 명이 망하고 청이 집권했을때 아담 샬은 여전히 수도에 머물렀는데 청나라는 그의 재능을 알아보고 그에게 흥천감의 감정 벼슬을 내리고 역법을 만들게 했다 아담 샬은 이전에 만들었던 숭정역법을 보완해서 시헌력을 만들었고 이로 인해 청 황제에게 인정받게 된다 그가 만든 시헌력은 조선에 넘어와서 오늘날 '음력'이라는 이름으로 아직까지 살아있는데 지금 청학동에서 제사지낼때나 토정비결에서 생일을 계산할때 쓰는 음력을 만든 사람이 서양에서 온 천주교 선교사인거다 제위에 올랐을때 나이가 어렸던 순치제(일명 소년천자)는 아담 샬을 개인적으로 매우 좋아했는데 광록대부라는 높은 명예직까지 내리면서 파격적인 승진을 시켜주고 인간에게 절을 하기 어렵다는 천주교인 아담 샬의 부탁을 들어주어 삼궤구도두를 하지않고 황제를 만날 수 있는 특혜를 내려주었다 1656년과 57년, 2년만 세어봐도 순치제는 아담 샬의 집에 24번이나 놀러갔고 거기서 황제의 생일도 축하하기도 했다 순치제가 천연두로 오늘내일 할때도 황제의 넋두리와 후계자 고민을 들어주었다 순치제는 23세의 젊은 나이로 요절하고 그 8살 아들인 강희제가 황제가 되자 아담 샬도 다시 원래 직위였던 흥천감의 감정으로 돌아왔다 3년 후 아담 샬은 지금까지 관찰과 연구로 다시 보완된 새로운 역법을 강희제(11살)에게 바치며 자신있게 이 역법은 무려 200년간 쓸 수 있다고 말했는데 청나라 역법사 양광선이 이 말을 꼬투리 삼아 청나라가 200년 밖에 안 간다는 저주를 내린 역적이라 모함했고 아담 샬과 선교사들은 감옥에 갇힌 후, 천주교를 사교라 여긴 청나라 대신 '오보이'에 의해 사형을 선고받는다 불행 중 다행으로 아담 샬이 조카딸을 치료해준 이후 뒤에서 아담 샬을 후원해주었던 강희제의 할머니 효장태후가 개입한 덕분에 선교사들은 다음해 감옥에서 풀려나게 되었다 그러나 75세의 노구에 닥친 감옥살이와 심문으로 골병이 나버린 아담 샬은 한해동안 고생하다가 1666년 선종하게 된다 모함으로 아담 샬의 자리를 뺏은 청나라 역법사 양광선은 뒤떨어진 옛 역법에 집착하다가 잘못된 예보를 남발하고, 급기야 황제가 참석하는 행사까지 잘못 예보하며 1669년에 결국 쫒겨났고 흥천감의 감정 자리는 아담 샬을 도와주었던 벨기에의 예수회 선교사 페르비스트(1623~1688)에게 돌아갔다 선교사들에게 사형을 선고한 청나라 대신 오보이도 훗날 강희제한테 반란을 일으키다 진압당한다 아주 개판이다 아담 샬이 수도에 있을때 소현세자도 포로로 잡혀있었는데 아담 샬이 그의 기록에서 소현세자를 조선의 왕으로 서술하는 실수를 하기에 직접 만나거나 깊은 관계를 맺지는 않은것 같지만 그 사회의 엘리트 계층에게 접근해 학문적, 기술적으로 전도한다는 예수회의 방침을 고려하면 부하 선교사를 보내거나 물건을 보내주는 등 간접적으로 소현세자와 접촉했을거라는 주장은 신빙성이 있다 소현세자가 보답과 함께 아담 샬에게 보냈다는 편지가 라틴어로 번역되어 전해지고 있다 -------------- 어제 당신이 보내주신 천주상ㆍ천구의(天球儀)ㆍ천문서 및 그 밖의 여러 양학서(洋學書)등은 반갑게 받았으며 이에 깊이 감사를 드립니다. 나는 먼저 그중 두서너 가지 책을 읽었습니다. 정신을 수양하고 인격을 가다듬는데 관한 참으로 높고 먼 교리임을 알았습니다. 우리나라는 오로지 어둡고 깨지 못하여 이것을 모르고 있었으니, 이 교리는 우리들의 지식의 빛이 될 것입니다. 천주상은 벽에 매달아 놓았으니 보는 사람의 마음에 평화를 줄뿐더러 이 세상의 더러운 티끌을 씻어 내리는 것 같아서 여러 가지로 느껴지는바 많습니다. 천구의와 여러 가지 책들은 이제까지 이 세상에 이러한 것들이 있었음을 몰랐습니다. 이런 것을 받으니 꿈과 같습니다. 우리나라에 있는 역법은 수백 년 동안 하늘의 움직임과 맞지 않아서 헛된 것이라고 여겨 왔습니다. 이제 참으로 보기 드문 물건을 얻었으니, 무엇이 이보다 더 반가우리요. 내가 우리나라에 돌아가면 궁중에서 쓰게 하고 책을 많이 박아서 글 보는 사람들에게 펴려고 합니다. 그리하면 사막과 같이 메마른 우리나라가 학문의 전당으로 화할 것입니다. 사랑과 은총을 받은 우리 국민은 서양 사람의 과학에서 배운 것을 모두 감사할 것입니다. 당신과 나는 다 같이 외국인으로서, 큰 바다를 건너 낯선 땅에 와서, 서로 만나 즐거이 사귐이 핏줄기를 같이 한 가족들과 같으니, 천리(天理)의 깊고 깊음에 놀라지 않을 수 없습니다. 생각컨대 사람의 마음이란 비록 멀리 떨어져 있다 하더라도 지식을 사랑함으로써 서로 알아내고 합할 수 있는 것입니다. 나는 서양의 서적과 천주상을 우리나라로 가져가고 싶은 마음은 간절하지만 우리나라에는 아직 천주교를 아는 사람이 없기 때문에 그릇된 나쁜 종교라고 천주의 높고 귀함을 더럽힐까 두려워하는 바입니다. 그러므로 천주상을 당신에게 돌려보내고 실수함이 없게 하고자 합니다. 나도 당신에 대한 감사의 뜻은 나타내는 갚음으로 우리나라의 귀한 물건을 보냅니다. 그러나 당신이 베푼 은혜에 비하면 만분의 일도 못되옵니다. 삼가 말씀드립니다. -------------- 편지의 내용을 보면 정확한 역법과 여러가지 신기한 것을 준 것에 감사하지만 천주상만은 돌려보내면서 선을 그었다 홍이포도 그렇고 음력도 그렇고 조선에 많은 영향을 끼친 선교사. (출처) 아니 뭐야 음력이 made in 동양이 아니었다니 ㄷㄷ 진짜 많은 걸 주고 떠났네요 선교사들은 정말 여러모로 대단하신 분들인듯 대단해
원주민들을 인간으로 만든 이야기
콩키스타도르가 신민지를 정복한 이후 신대륙에는 보호와 교육을 대가로 세금과 노동력을 받는 일종의 장원 제도인 엔코미엔다가 활발하게 늘어난다 스페인 왕가는 특정 유럽인들에게 원주민들을 분배했고 정복자들의 욕구를 충족시키면서 해적으로부터 원주민을 지키고 '스페인화'시키며 원만하게 신대륙에 스페인의 지배를 확립하고자 했다 하지만 신대륙의 지배자가 된 유럽인들은 원주민들을 인간으로 생각하지 않았는데 그동안의 전쟁으로 인한 적대심과, 인신공양과 유아살해 같은 남미 문화에 질려버려 원주민들을 인간 이하의 존재로 여기게 되버린 군인들이 많았고 천주교도 전도를 활성화하고 악마 숭배를 종결시킨다는 명분으로 이들의 정복에 정당성을 부여해주었으며 원만하게 부를 축적하기보다는 이들의 노동력을 착취해서 크게 한탕 벌고 유럽에 돌아가 풍족하게 사는걸 원하는 사람이 많았다 유럽인들은 원주민들을 가혹하게 착취하였으며 이로인해 원주민 인구가 급감하기 시작한다 예를들어 원주민들은 이미 수은으로 은을 정제하는 법을 알았음에도 건강을 이유로 이를 사용하지 않았는데 생산성을 위해 수은 정제법을 강요하면서 많은 원주민들이 중독사한다 이렇게 얻은 귀금속과 희귀한 자원들은 유럽으로 가는 배에 실렸는데 물건을 운반하는데만 200명이 더 사망하는 등 원주민들은 가축처럼 다뤄졌다 생산량을 채우지 못한 경우에는 가족을 해치거나 팔을 자르는 엽기적인 형벌로 한 마을 전체가 노동력을 상실해 비참하게 사라지는 지옥 같은 광경이 펼쳐진다 이 사태를 냉정하게 판단하고 본국과 교황청에 보고한 것은 현지에 파견된 선교사들이었다 선교사들은 이 사태에 뒤집어졌고 원주민들은 인간이며 노동에 대한 정당한 대우와 가혹한 대우를 개선하라고 요구한다 하지만 엔코미엔다들은 이익의 극대화를 위해 이들은 인간 이하의 가축이며 인간처럼 다루는 것이야말로 신의 뜻에 어긋난다 주장했다 정복자들과 선교사들은 이전의 남미 원주민 국가를 무너트리는데까지는 협력했지만 정복자들은 정복과 경제적 이익이 목표였다면 선교사들은 '저들은 아이처럼 순수하니 저들이야말로 신의 나라에 가까운 자들이다'라는 생각으로 접근했다 목표가 달랐던 두 세력은 곳곳에서 충돌하게 된다 전도해야하는 원주민들이 파리목숨처럼 죽어나가자 선교사들은 각 지역을 돌아다니며 원주민 노예노동의 실상을 조사하려고 했고 엔코미엔다들은 그런 선교사들을 매질해서 쫒아내거나 으슥한 곳에서 죽인 후 원주민의 공격으로 위장하기도 한다 선교사들이 조사한 남미의 실상과 원주민의 급감은 마침내 스페인 왕가와 교황청으로 전달되었고 대충 짐작은 하고 있었지만 물증이 없었던 스페인 왕가와 교황청이 조사원을 파견하게 만들었다 마침내 스페인의 카를로스 1세는 모든 사태의 핵심인 '남미 원주민들은 사람인가 가축인가'를 해결하라는 토론을 지시하고 1550년 스페인 서북부, 바야돌리드에서 양 세력의 챔피언들이 격돌한다 엔코미엔다 측은 스페인의 유명한 르네상스 인문주의 학자인 '후안 히네스 데 세풀베다'였는데 아리스토텔레스 저서의 상당수를 라틴어로 번역한 아리스토텔레스 철학의 권위자로 유명했다 선교사 측은 크리스토퍼 콜로버스와 함께 남미로 건너간 이후 종군신부와 선교사, 주교로 남미에서 오랫동안 살았던 66세의 '바르톨로메 데 라스 카사스'였다 그는 오래전부터 스페인에 남미의 실상을 알려왔으며 엔코미엔다의 세습을 막는 법안을 통과시킨 적이 있었다 이 토론은 각국의 관심을 끌었으며 교황청도 심판이자 최종결정권을 가진 전권 특사를 보냈다 세풀베다의 논리는 '정복의 권리'와 '아리스토텔리스의 자연적 노예 상태', '성 아우구스티누스의 죄에 대한 징벌'이었고 그 근거로 식인풍습과 인신공양 등 '자연에 반하는 죄들'을 제시한다 반면 라스 카사스는 고대로마와 켈트, 게르만을 근거로 과거 유럽인 역시 인신공양과 식인을 하는등 야만적이었으나 예수와 사도들, 선교사들의 사랑과 희생으로 교화되었으며 그들은 명백한 문명을 가지고 있기에 이들의 재산권을 법과 교회의 이름으로 보호해야한다고 주장한다 라스 카서스는 여기서 더 나아가 교황과 그리스도교 군주라는 칭호만으로 타문명에 대한 정복의 근거가 될수없으며(!) 개종하지 않은 원주민의 생명권을 지켜야한다고 강조한다 마지막으로 무력은 오직 전도를 적극적으로 막는 악의 무리에게 한정적으로 사용되어야한다고 주장했다 길고 긴 토론을 거쳐 양쪽 모두 자신의 승리를 주장하였지만 교황 특사는 라스 카서스의 편을 들어 남미 원주민들 역시 인간이라는데 동의했고 그 타협으로 아프리카 흑인 노예를 아메리카로 보낸다는 결정을 내리면서(?) 바야돌리드 논쟁은 막을 내린다 교황청의 결정은 유럽 각국에 퍼졌으며 30년이 지난 후에도 프랑스의 철학자 몽테뉴가 이 토론을 언급하며 유럽인들은 남의 죄악을 찾으면서 자신의 악을 찾지 못한다고 한탄할만큼 큰 충격을 주었다 유럽은 잠시나마 자성의 시간을 가졌고, 남미 원주민의 대우는 조금이나마 개선되었다 역사적으로는 아프리카의 흑인 노예들이 신대륙으로 끌려가는데 큰 영향을 끼쳤다 일평생을 남미를 위해 봉사했으나 정복자들에게 차이며 주교자리까지 박탈당했던 라스 카서스는 유럽에서 집필에 몰두했으며 원주민의 문화와 스페인의 범죄를 상세하게 소개한 '인디오의 역사'를 서술했고 1566년 선종한다 만약을 위해 변호를 덧붙이면 나중에 흑인노예들의 참상을 알게 된 라스 카서스는 그 결정을 평생동안 후회했다고 한다 그의 책은 유언대로 1562년에 일부가, 1602년에 완전히 출간되었으며 영국과 프랑스는 이 책을 근거로 스페인을 비난하기도 했다 라스 카서스는 유럽의 지식인들에게 긍정적인 평가를 받으며 유럽의 양심으로 인정받았는데 정작 인종주의, 파시즘이 떠오르던 19세기 말 ~20세기 초에 뒤늦은 비난을 받기도 했다 멕시코에는 그의 이름을 기려 만든 '산 크리스토발 데 라스 카사스'라는 도시가 있다 정복자들은 자신의 경제적 이익과 권력을 위해 원주민들을 인간으로 여기지 않았는데 그들을 인간으로 만들기위해 선교사들이 피흘려 싸웠던 역사도 있었다 R.I.P --- 깨끗한 사람들에게는 모든 것이 깨끗하나 더럽고 믿지 않는 자들에게는 아무것도 깨끗한 것이 없고, 도리어 그들의 마음과 양심이 더럽혀져 있느니라 디도서 1장 15절 --- (출처) 그래서 흑인을요?????
조선 포수와 청 기병이 같이 싸운 이야기
청나라 북부 아무르강 유역에는 청나라한테 몇번 두들겨 맞은 후 복종하는 여러 소부족들이 살고 있었다 하지만 뇌제 이반 4세가 동쪽으로의 확장을 시작한 이후 러시아에서 온 개척단은 1649년 이 지역까지 진출하게 되었고 소부족들에게 복종을 요구하며 인적, 물적 자원을 강요하기 시작한다 몇번이나 쌩까보지만 러시아 개척단이 폭력적으로 대응하자 소부족들은 청나라에 도움을 요청했고 러시아의 급격한 확장이 만주까지 영향을 줄까 두려웠던 청나라는 1651년 병력을 보내 이들을 돕게 한다 문제는 이때까지만 하더라도 남명의 잔당 세력이 살아있었으며 청나라는 중국을 재패하기 위해 이들을 뿌리뽑는데 온 힘을 다하고 있었다 이 때문에 청나라 구원군은 화약을 주로 사용하는 한족팔기(녹영병)가 아니라 냉병기로 무장한 여진팔기와 몽골팔기가 중심이 된 600명의 지원군이 만들어졌다 청군 600명은 부족민 1500명과 함께 206명의 러시아 개척단과 전투를 벌이는데 와장창 포로 생포에 집착한 청지휘관의 무모한 작전과 구식대포 6문, 총기 30개 밖에 없는 빈약한 화력 때문에 러시아군 10명이 죽을동안 청군은 676명의 전사자가 나온다 이 패전의 책임을 지고 지휘관 하이써는 소환당해 처형당한다 후임으로 보내진 샤르후다는 화약병기에 능숙한 녹영군을 보내달라 요청하지만 남명을 뿌리뽑는데 사력을 다하던 순치제(강희제의 아버지)는 이를 들어줄 여유가 없었고 고민 끝에 근처에 사는 조선에 포수를 빌려달라 요청한다 하필 조선의 왕은 병자호란의 복수, 보오오오옥수!를 외치며 눈을 빙글빙글 돌리고 있던 효종이었다 효종은 청나라를 정벌해 복수하겠다는 명분으로 군비를 늘려 병사의 양과 질을 늘리고 있었고 병자호란 이후 흔들리던 왕권과 통치체계를 다시 다져왔는데 (그래서 학자에 따라서 북벌이 진짜 청을 치려는건 아니었고 이를 핑계로 병자호란의 패배로 땅에 떨어진 조선왕조의 위상을 다시 세우려는 정치적 명분일 뿐이었다는 주장도 있다) 떨떠름하게 청을 치려고 양성하던 부대 중 일부를 청을 돕기위해 보내준다 청나라는 그렇게 간절히 바라던 화약딜러를 100명 요청했고 조선은 포수 100명에 하급무관 50명을 딸려보냈다 조-청 연합군 1000명이 연합하여 북상하기 시작했고 러시아는 개척단을 보강해 400명으로 늘어났고 강에 대형범선을 배치하는 등 방어를 준비하고 있었다 원래 청군은 조선군을 시작으로 순차적으로 강을 넘어 상륙할 생각이었지만 자신들이 가진 작은 함선으로는 상륙 전에 대형범선에게 차단당할 것을 눈치채고 작전을 바꾼다 청군은 강 건너편에서 나무벽과 참호를 파게한 후 고지대에 조선포수와 청 기병대를 배치하고 정면에 청나라와 부족민을 배치했다 전투가 시작되고 청군이 시선을 끄는 사이 조선 포수들은 참호에서 나와 러시아군에게 사격하기 시작한다 마침 조선군의 위치는 러시아군보다 높았기에 유리한 환경에서 사격을 가할 수 있었다 높은 곳에서 날라오는 사격에 러시아 군은 큰 피해를 입었고 견디다못해 조선군에게 화력을 돌리자 조선포수들은 참호와 나무벽 뒤에 숨어버렸다 조선 포수를 제거하지 않으면 화력에서 밀릴거라는 생각으로 러시아군은 강을 건너 상륙해 조선군과 육박전을 벌이려고 했지만 이를 대비해 조선 포수 옆을 청 기병대가 지키고 있었고 러시아군은 조선군의 근거리 조준사격과 청 기병의 역습 때문에 아무런 피해를 주지 못하고 시체만 남기고 퇴각한다 (이 날만은 예쁜 개새끼) 적의 주력 딜러를 제거하지 못했고 청의 본대도 쌩쌩하게 살아있자 결국 러시아군은 배에 올라타 강 상류로 도주하기 시작한다 4일동안의 추격전 끝에 범선이 요새 안으로 들어가면서 추적은 끝나고 조-청 연합군은 승리했다 러시아 측의 카자크인들은 조선군의 챙이 큰 모자와 화력에 깊은 인상을 받았는지 총을 잘 쓰며 머리가 큰 '대두인'이라고 부르며 무서워했다 조선은 단 한명의 전사자도 내지않고 집에 돌아왔고 효종은 북벌 정책이 처음으로 가시적인 성과를 낸것에 만족하며 1차 나선정벌은 막을 내렸다 그러니까 방진 옆에서 핸드거너가 계속 쏴서 모랄 터지니까 근접 붙여서 쫒아낼려고 하는데 옆에서 대기타던 치킨한테 역으로 털렸다는거지? (출처) 대두인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그리스 신화의 낭만적인 마지막 "최후"
그리스-로마 신화는 서양 문화의 근간이 되었으며 지금도 면면이 현대까지 남아있는 유서깊은 신화이다. 위의 짤 만화로 접했건 애니, 게임 등 씹떡질로 접했건 그리스 신화를 모르는 사람은 없겠지  그런데 우리가 알고 있는 그리스 신화는 대부분 트로이 전쟁, 혹은 가이아의 또 다른 자식들인 티탄들과의 최후의 결전인 '기간토마키아' 에서 승리하면서 내용이 끝난다.  그 뒤로도 ooo는 행복하게 살았답니다 끄읏이라는 것이다. 하지만 그리스 신화에서도 마지막 최후, 즉 "멸망"이 존재한다. 북유럽 신화에서의 라그나로크처럼 신화 속에서 공인된 멸망은 아니더라도, 아니 오히려 실제 역사 속에서의 더욱 확실한 멸망이 찾아온 것이다. 위 짤마냥 왠 대머리한테 찍혀서 몰살당했다는 소리는 당연히 아닐텐데 대체 이게 어떻게 된 일이냐면 (아폴론 : 태양과 예언의 신) 아 아버지 아니 제우스인가 암튼 큰일났어요 시발 우리 다 끝났어 (제우스 : 그리스 신 대빵) 티탄 애들도 정리했고 영웅들 숙청까지 다 끝났는데 또 왜 (???) 나다 씹새야 Aㅏ 시발 ㅈ됐다 뎃? (예수 : 훗날 43억명이 믿는 종교들의 신 or 선지자) 아버지의 마음을 도려내는 악귀들은 용서하지 않아요 신의 자리를 사칭한 너희들을 오늘 단죄하러 왔다 십자가에서 사흘간 벌서면 살려주시나요? 이뭐병 거릴 이야기지만 실제로 저 내용이다. '예수님이 구름 사이로 모습을 드러내자 올림포스 신들은 모두 두려워하며 땅 속으로 도망가 몸을 숨겼다.' 5세기 경 그리스에서 나온 설화이다. 이 설화가 나온 경위를 이해하려면 당시 그리스를 포함한 로마 제국 전체의 상황을 알아볼 필요가 있는데 예수가 죽은 사후 그의 제자들은 여전히 포교 활동을 이어가며 교세를 확장시키지만 아직 미약하던 와중 짤의 "사도 바울" 이라는 역대급 에이스가 탄생하면서 상황은 한순간에 뒤집히고 그 바울이 주요 타겟으로 포커싱한 곳이 바로 그리스였다. 그렇게 그리스 원정을 떠난 바울은 아테네에서 스토아 학파와 에피쿠로스 학파 전부를 상대로 한 설교전에서 연타석홈런을 치는 등 수많은 그리스인들을 기독교로 개종시키는 일에 전성기 페이커급 캐리력을 선보여, 당시만 해도 신화가 아니라 실제 종교였던 올림포스 신들의 라인을 전부 터뜨려버린다. 이렇게 기독교의 세력이 그리스 내에서 날로 퍼져나가자 그리스 신앙 종교인들은 불안감을 느끼게 됐고, 급기야 예언의 신인 아폴론이 머무는 곳으로 여겨져 신탁으로 유명한 "델포이 신전"에까지 퍼지는데 주로 신자들이 물은 내용은 이렇다고 기록된다. 아폴론 님과 예수 중에 누가 더 위대하시나요? (당시 신전의 여사제) 아폴론 님이신게 당연하지 않니 그런 질문을 하면서 신들을 의심하면 대가리가 깨진단다 사람들이 예수라는 분이야말로 신이라던데 진짜인가요? 그런거 다 사기꾼들의 구라란다 믿으면 못써 하지만 이미 대세는 정해진 후였다. 여타 종교들과는 달리 신 앞에서의 사랑과 평등을 강조했던 초기 기독교는 그리스를 넘어 로마 제국 전체에 침투했고 특히나 사회적 약자였던 여성, 하층민들의 대다수를 장악한 것이 결정적이었다. 아 솔직히 그남충들 거르고 스윗예수님은 못 참지ㅋㅋㅋ 아무튼 그렇게 로마 제국 전체가 기독교에게 장악되기 직전 (???) 안 된다! 안 돼! 나의 제우스쨩을 지켜야 한다능! ??? 님 돌았? 아ㅋㅋㅋ 그냥 지켜봅시다 아빠 로마 황제 중 그리스 문명을 사랑했던 최후의 황제라 불린 "율리아누스"의 제임이였다. 당시 로마 전체를 장악하다시피 했던 기독교를 견제하며 올림포스 12신 신앙의 부활을 염원했던 율리아누스는 교회에 세금을 매기고 기독교도들을 공직에서 내쫒는 등 할 수 있는 최대한 기독교를 탄압했다. 특히나 사장 직전이였던 델포이 신탁을 부활시키기 위해 델포이의 세금을 면제하고 사제들의 활동을 보호하는 등의 갖은 노력을 기울였으나 일개 황제의 노력으론 이미 시대의 흐름을 막지 못했다. 기독교... 기독교도들한테서 우리 제우스짱을 지켜내야돼...! 그래... 델포이의 신탁이라면 무언가 답을 주시겠지 (사절단) 아무튼 그래서 왔는데요 황제께서 다시 신들을 위대하게 만들 예언의 신탁을 찾으셔요 그렇다는데 뭐라고 전할까요? We're in the endgame now. 네? 이미 가망이 없어... 아폴론께서 뭐라 말씀하시나요? ...잘 들으시오. 황제께 전하시오. 아름답게 공들여 지어진 집은 무너졌다고. 이제 여기에는 아폴론도 없으며, 신성한 월계수 잎도 시들었다고. 샘들은 이제 잠잠하고, 목소리는 조용하다고. - 361년, 델포이신전 재건에 나선 율리아누스 황제에게 내려졌다고 기록된 마지막 신탁 - 물론 이 기록은 후세의 기독교도들이 날조한 내용이라는 주장도 존재하지만, 진위 여부완 별개로 적어도 율리아누스의 노력은 소용없었고, 예언은 정확히 이뤄졌던 셈이다. 2년 뒤인 363년 율리아누스는 페르시아 원정 도중 전사했고, 391년엔 로마에서의 이교 행위가 금지된다. 이듬 해인 392년, 마침내 로마 제국 전체에서 기독교가 국교로 선포되어 그리스 신들의 최후가 온 것이다. 즉, 그리스 신화의 최후란 북유럽의 라그나로크처럼 신화 속의 예언이나 종말로 인한 신들의 사망이 아닌, 실제 역사 속에서의 "종교"로서의 최후, 신앙을 잃고 단순히 전해져오는 이야기인 "신화"로 전락하는 과정 그 자체였던 것이다. (출처) 결국 신도들을 모두 기독교에 뺏겨 버린 거였구만 사실 드립은 노잼인데 내용이 볼만해서 퍼왔습니다
제우스가 최고신인데 왜 다른 신도 섬겨야함?
이라는 생각을 해본 사람들 많을거 같음 왜 그리스인들은 최고신 제우스가 있는데 그 밑의 하위신들까지 모두 챙겨야했을까? 왜냐하면 유일신이 전지전능한 일신교와 달리 다신교는 네임드 신들은 다른 이가 대신할 수 없는 자기만의 영역을 가지고 있어서 그럼 다신교에서 최고신(제우스, 라, 햄타지의 아슈리안 등)은 전지전능한 존재가 아니라 신들 중에서 가장 강한 권능을 가지고 현재 질서를 유지시키는 역할을 가진 신임 그렇기에 최고신도 약점을 가지고 있으며 털리기도 하고 밑의 신이 자기 일을 놓아버리면 세계가 무너지더라도 직접 해결하지 못하는 경우가 생기기도 함 데메테르가 딸을 찾기위해 자신의 업무를 놔버리자 인간세상의 농업이 망해버렸는데 제우스는 데메테르를 복귀시키기위해 사절을 보내고 중재를 했지 직접 농업을 담당하지는 못했다 비슷하게 헤라가 제우스의 애인들에게 잔인한 피의 복수를 했을때조차 제우스가 이넘심이라고 따지긴 했어도 머리채를 잡아 올림푸스 밖으로 던지거나 벼락으로 바삭하게 굽지 못했던 이유도 헤라는 제우스 애인들을 조지는게 자기가 담당한 영역인 가정의 평화를 충실하게 지키는거었고, 이걸로 벌을 주면 신계의 질서가 어지러워지기 때문이었음(그리고 헤라도 강력한 권능을 가진 대신이었고) 그렇게 그리스인은 신들이 가진 각자의 영역에 따라 숭배를 했음 최고신도 가끔 큰 코 다치는 종교관이기에 그 밑에 있는 신들도 비슷하게 돌아갔는데 강한 권능을 가진 신 밑에 약한 신들이 소속되어 따르는 경우나 비슷한 영역을 가진 신의 경우 그 신의 힘으로 다른 신의 힘을 막을 수 있다고 믿었음 그래서 질병이 창궐하면 이걸 병의 신의 권능으로 생각하면서도 의료의 신에게 제사를 드려 병을 막아내고자 했고, 전쟁을 관장하는 대신이 무려 2명인 이유도 신은 신으로 물리친다는 개념에서 출발한거임 판타지에서 다신교 구조임에도 최고신이 전지전능한 경우가 보이는건 현대판타지의 할아버지인 '반지의 제왕'과 '나니아 연대기'의 영향이 큰데 반지의 제왕은 여호와에서 모티브를 딴 절대신이자 창조주인 '일루바타르'가 그 밑에 직속 부하 개념으로 여러 발라들을 만들어서 일을 시켰고 (발라는 강한 존재지만 한계가 있었고, 지구를 둥글게 만들거나, 간달프를 더 강하게 부활시키거나, 골룸이 용암에 빠지게 하는등 큼직한 사건들은 일루바타르가 직접 개입했음) 여기서 모든 신적 존재들을 이끄는 전지전능한 최고신이라는 기독교 베이스에 다신교 신화가 섞인 재미있는 세계관이 나오게 되었음 (신들의 왕, 마누라한테 혼나고 다님) (출처) 내가 반지의 제왕을 너무 봐서 세뇌가 됐던 거였군ㅋ
마틴 루터도 이기지 못한 존재
마르틴 루터 아마 성당이나 교회 다닌 사람이라면 한 번 이상은 들어봤거나 하다 못해 종교나 역사에 대해 조금이라도 안다면 한 번 이상은 들어봤을 사람임. 마르틴 루터는  부유한 집안에서 태어나서 법관-사제 과정을 거치고 신학자로 승승장구하다가 당시 교황청의 막장 상황을 보다 못해 종교개혁 28조를 쓰고 이것을 공개적으로 비난함. 이후 교황청의 막장 상태에 공감이 가던 사람들과 함께 활동하기 시작하고 이 여파가 커지면서  지금의 구교 - 신교로 분리하게 됨. (그 외 더 복잡한 일이 있지만 대강 정리하면 이럼) 근데 마르틴 루터 역시 능력 자체가 어마어마하던 사람이었음. 하나 하나 나열 하자면 1. 말빨이 어마어마함 - 머리도 워낙 똑똑했고 아는 것도 엄청 많았음  이걸 기반으로 그 당시 하늘을 찌르던 교회의 권위를 말로 발라버렸을 정도로 어마어마하게 말빨이 좋았음. 당시 난다 긴다 하는 신학자들도 루터를 이기지 못했을 정도였음. 루터를 재판에 회부한 사제들도 '어 뭐지, 루터 쟤 말 들어보면 교회가 잘못한 것 같은데'라고 흔들렸을 정도임  2. 글빨도 짱좋았음 - 본인 스스로 '나는 글을 짜내지 않아도 됨. 그냥 생각나는데로 쓰니 되더라' 하면서  어마어마한 글빨을 보여줌. 루터가 활동하던 1523년에 900여권의 출판물이 발간됐는데 그 중에 346편이 루터가 쓴 것이었음. 지금처럼 독해력이 높지도 않고 출판 기술이 좋지 않았다는 걸 감안해도 한 명이 한 나라의 출판물의 3분의 1을 책임진다는게 말이 안됨. 그리고 루터 혼자서 평생 쓴 카톨릭 관련 저서가 당시 독일 내에 있는 모든 카톨릭 저서보다 무려 다섯배 많았음.  그냥 루터가 '글아, 써져라 호잇!' 했는데 그게 한 나라의 모든 저서의 다섯배가 넘는 결과를 만들어버린것 3. 예술 능력도 탁월했음 40살이 넘어서 음악에 꽂히더니 그냥 숨쉬면서 일년 동안 42곡의 찬송가를 작곡했음. 몇몇 곡은 아직도 불려지고 있음. 하지만 본인은 아무런 미련도 집착도 없어서 '음, 심심해서 써봤는데 님들이 부르던 태우던 맘대로 하세요' 하고 신경 안씀 4. 언어학의 마스터 - 이 분야의 갑 오브 갑 영국에 세익스피어가 있었다면 독일에는 마르틴 루터가 있다. 성경을 독일어로 전체 번역했을 뿐 만 아니라 히브리어, 그리스어 등에 아주 능통했음. (그 어려운 성경을 한 나라의 언어로 통째로 번역하는 건 상식적으로 보통 일이 아님) 완벽한 번역을 위해서 루터는 성서에 언급된 지방에 가서  그쪽 사람들과 직접 대화해서 자문을 얻었을 정도임. 그러면서 성경에 있는 언어들을 독일어 뜻에 맞는 단어로 하나 하나 바꾸고 이걸 통해 독일어 전체에 새로운 단어들이 탄생함. 5. 특히 말로 까는 건 엄청 잘했음 교회를 말빨로 발라버렸을 정도로 말이 쌨던 루터는 모두까기 인형으로 통했음. 신성로마제국 황제인 카를 5세에게는 '님 생긴 걸 보아하니 아기 잘낳게 생겼네요.(존나 계집애 처럼 생겼네)' 후원자인 브라운슈바이크 공작에게는 '님은 늙은 돼지 방귀 소리 듣고 배우세요' 자기 추종자들에게는 '내 이야기 하지 말고 성경 좀 봐 병신들아' 자기 나라 사람인 독일인들에게는 '님들 먹고 마시는거 밖에 모르는 짐승으로 소문난거 아시죠?' 등등 별의별 인용구와 다양한 단어들을 인용해서 다채롭고 화려하게 까기로 유명했음. 오죽했으면 동료가 '루터가 하루라도 좀 닥쳤으면 좋겠다'라고 평했을 정도임 즉 마르틴 루터는 신학 + 논리학 + 웅변능력 + 카리스마 + 깡 + 언어학 + 예술학 + 법학 등등 정말 유례 없는 시대의 먼치킨이었음. 하지만 교황청에게 빅엿을 날리고 난다긴다하는 사제들을 혓바닥으로 씹어 버리고 왕이고 나발이고 다채롭게 까버리는 루터마저 결코 이기지 못한 존재가 있으니..... 바로 아내 카테리나임. 카테리나와의 만남도 조금 골때리는데... "지참금을 주기 싫어서, 혹은 양육하기 싫다는 이유로 억지로 수녀원에 맡겨져서 평생 갇혀 사는 것은 말이 안된다!!! 수녀들도 자유롭게 살면서 사랑을 누릴 자유가 있다!!!" (실제로 루터는 이러면서 많은 수녀들이 탈출하게 도와줌) "음, 님 말이 맞는 것 같음 나도 우리 부모가 키우기 싫다고 수녀원 보냈거든. 근데 문제가 생김." "?  뭔데요" "남자가 없음. 그니까 님이 책임져" "???????" (카타리나가 16살 연하.....) "그래서 나랑 결혼 할꺼야, 말꺼야? 대답은 예 or 예로 대답해" "예?" "ㅇㅋ 수락했다?" .....자발적으로 수녀원을 탈출한 카타리나는 마르틴 루터에게 가서 책임지고 자신과 결혼하라고 회유를 가장한 설득과 협박을 했고 거기에 넘어간(???) 루터는 카타리나랑 결혼함.  루터는 수도사처럼 그냥 혼자 살고 싶어했다고 함.... 그리고 결혼 직후  마르틴 루터가 개빡치는 일이 생김. "여보" "왜" "알브레히트 추기경이란 사람에게 혹시 돈 받았어?" "ㅇㅇ 그양반이 결혼 축의금이라면서 줬는데?" "미쳤냐!!!!! 그 양반이 누군지 몰라서 그래!!!!!!!" "면죄부를 판 인간이잖아!!!!!" 알브레히트 추기경은 면죄부를 팔아서 교회의 타락과 종교개혁을 일으킨 마르틴 루터의 숙적 of 숙적이었음. 그런 추기경이 돈을 줬다는 것 자체가 정치적인 함정이나 견제의 목적으로 충분히 봐도 문제가 되는 일이었음....  "내가 알았겠냐?" "아 됐고,  빨리 그 돈 다시 보내!!!" "싫은데? 이미 돈 썻엉 ㅋ." "하..... 이게 연하라고 오냐오냐 봐줬더니.... 야, 내가 누군지 모르냐? 나 루터야. 교황이고 왕이고 다 까는 루터! 내가 여자라고 봐줄.......!!!" 그렇게 세기의 먼치킨은 아내와 첫 부부싸움을 하게 되었고 아내인 카테리나가 남편인 마르틴 루터를 개쳐발랐다고 한다. 부부싸움에서 이긴 카타리나는 축의금을 그냥 기분 좋게 살림에 보태썼다고 전해진다. 이렇게 인생 최초의 대패를 경험한 마르틴 루터는 개삐져서 내가 다음에 결혼하게 된다면 돌로 순종적인 여자를 조각해서 결혼할거임  이라고 투덜댔다고 전해진다.  (덧) 그래도 둘은 금슬은 좋아서 마르틴 루터는 종종 카타리나를 '나는 경건한 하인, 카타리나는 나의 여왕님' 이라고 치켜 세우거나 '나는 당신이 있는 집의 꼭대기만 봐도 행복하니, 이런 남자에게 굴복하지 말라'라고 당부하거나 '나는 아론, 카타리나가 모세' 라면서 성경 인용을 하거나 '프랑스를 다 준다고 해도 카타리나랑 바꾸지 않겠다!!라는 말도 자주했다고 함. (출처) 사랑은 마틴루터킹도 두손 두발 들게 했다 오 사랑
주택요새 토루
토루는 원형 주택단지로 평범한 주택이라고는 생각하기 힘들정도로 군사적인 성격을 가진 건축물이다 12세기 남쪽에 이주한 한족들에 의해 처음 만들어졌다고 하며 외벽은 두껍게 만들어 외부충격에 대비했고, 외부와의 출입구는 큰 대문 하나 뿐인 매우 패쇄적인 구조이다 상층부에 총구를 뚫어 놓아 공격이 가능하게 만든 토루도 있다 이런 요새화된 저택이 만들어지게 된건 중국의 인종적 특성과 관련이 많은데 화북지역에서 내려오면 이민족들이 한족보다 많아 중앙의 통제가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위의 사진처럼 삼국지 시대에도 화북 밖의 한족들은 좁고 얇은 한족 공동체를 중심으로 통치력이 작동되었다 결국 이민족과 짐승들의 위험에 둘러쌓인 한족 이주자들은 평범한 마을 대신 원형요새 형태의 주택단지를 만들어서 스스로를 보호하기 시작했다 이런 토루가 하나 세워지면 옆에 다른 토루가 세워지고, 그 옆에 다른 토루가 세워지는 형식으로 토루 공동체가 만들어졌고 건물 하나가 한 마을이자 요새가 되는 한족 중심지가 되었다 까놓고 말해서 그냥 주택기능이 달려있는 요새로 기능했다 내부는 수많은 집들이 원형으로 둘러쌓인 마을 형태로 1층은 시장이나 편의시설, 2층부터는 주택이었다 중앙의 건물은 관청이나 사원 같이 공동체의 중심이 되는 건물을 지었다 혈연이 아니면 쉽게 믿지 않는다는 중국인 성향 때문인지 토루 하나하나가 집성촌인 경우가 드물지 않았다고 한다 (저 토루는 김씨네 토루, 이 토루는 강씨네 토루, 저 멀리 반쯤 무너진 토루는 홍씨네 토루 등등) 토루는 20세기까지 지어졌으며 보수/관리를 거쳐 아직도 아파트처럼 기능하는 토루도 존재하지만 위생문제 등으로 아파트로 이주하는 추세이다 중국은 2008년에 토루를 유네스코 세계유산에 등록했는데 정작 본인들은 같은 해 베이징 올림픽 때 다민족 융합정책 어쩌구하면서 중국내 다민족 아이들에게 국기를 나르게 하는 퍼포먼스를 보여줬다 토루가 다른 민족과 분리되려는 한족의 요새형 정착지였다는걸 생각하면 그저 웃프다 니들이 뭐 그렇지 뭐... (출처) 진짜 단일국가인게 신기한 중국...
내 배를 망치는 따개비를 죽인다
뱀코 짤을 보다가 배에 들러붙은 따개비를 보게 되었다 따개비는 게의 친척으로 바위나 뱃바닥에 붙어서 증식하는 아주 무시무시한 생명체로 인간이 처음 배를 띄운 고대부터 오늘날까지 모든 배들의 숙적이 되었다 뱃바닥에 증식한 저 징그러운 따개비들 따개비가 늘어나면 1) 유선형 선체가 뭉개지면서 저항이 높아지고 속력이 느려지며 2) 방치하면 점점 무거워졌다 따개비의 석회질 껍데기는 매우 날카롭고 단단해서 손으로 때어내는게 매우 어려웠으며 배를 뒤집은 다음(?) 불에 지지거나 망치로 때리는 방법을 썼다 큰 항구에 도착하면 이런 대대적인 정비를 한번씩 받고 했는데 쥐를 쓸어버리기위해 배를 아주 침수시켰다가 끌어올리는거랑 따개비 제거하는게 가장 까다로운 작업이었다 항해는 길면 몇 개월이나 걸리는 길고 긴 여정이고 그 동안 한번도 정비를 못 받는 경우로 왕왕 나왔기에 따개비가 들러붙는걸 막기위해 그 비싼 동판을 뱃바닥에 두르는 경우도 있었다 동은 지금도 비싼 금속이므로 이런 고급 처리를 받은 배는 소수였다 요즘은 유독성 페인트를 발라 따개비 증식을 늦추거나(페인트도 항해를 오래하면 독성이 씻겨나가기 때문에 확실한 해결책은 아니었다) 전기 충격으로 조지거나 화학약품을 뿌리는 방법으로 따개비를 제거하고 있다 독성 페인트와 화약약품 처리는 해양오염 문제 때문에 점점 사용이 줄어들고 있다고 한다 역사와 전통의 영길리들은 중죄를 지은 선원을 밧줄에 묶은 다음 뱃바닥을 한번 쓸고가게 하는 형벌을 가했다 이 경우 선원의 등판은 따개비 때문에 너덜너덜해졌으며 운좋게 살아나도 감염 때문에 큰 고생을 했다고 한다 역시 영길리야 대단한 창의력! (출처) ????? 따개비 형벌 미친 거 아니냐며 영길리 창의력은 정말 ㄷㄷ 차라리 형벌로 바닥의 따개비를 떼라고 하지 이거 뭐......
세종대왕 vs 소금
조선은 초기부터 생필품인 소금의 가격을 잡기위해 노력했고 고려의 616개에서 1362개로 2배 넘게 염소(소금제작소)을 펌핑했다 또 태종은 백성들이 소금을 쉽게 살 수 있게 하려고 면포와 쌀로만 교환가능했던 소금을 잡곡과 저화(종이 영수증)로도 살 수 있게 바꿔주었음 이 정책은 성공을 거두어서 소금이 안정적으로 공급되었으며 면포 1필에 2석 6두, 쌀 1두에 3,4두로 가격이 내려갔다 다만 유통가를 낮추기위해 소금거래에 상인이 접근하지 못하게 규제를 많이 두어서 유통과정을 줄이는데는 성공했지만 일부 벽지에 소금이 원활하게 공급되지 않는 경우도 있었다 세종 때 조선에 염귀 현상이 나타나 소금이 귀해지고 가격이 올라가기 시작했는데 세종은 소금의 국가통제를 더욱 꽉 쥐어서 가격을 통제하려고 했고 아예 소금전매기구인 '의염색'을 만들어서 소금의 사매매를 틀어막고 국가독점을 시도했다 문제는 국가가 소금 생산을 전적으로 통제하고 소금장인들을 국가장부에 올려 사적인 거래까지 막아버리자 소금장인들이 염소를 버리고 호다닥 도망쳤고 문닫는 염소가 늘어나 소금가격이 더더욱 폭등하기 시작했다 집현전의 이계전이라는 학자가 올린 상소를 보면 의염색 이전에는 쌀 1두에 소금 3,4두를 살 수 있었는데 의염색이 생긴 이후에 쌀 1두가 소금 1,2두에 거래되었다고하니 문제가 심각했던거 같음 세종은 소금장인들에게 특혜를 주거나, 사적인 소금생산(자염)을 독려하거나 여러 보완책을 시도했지만 결국 10개월만에 의염색을 폐지하고 통제를 다시 예전처럼 돌렸다고 한다 교과서에는 안 나오는 대왕님의 실패담...;;;; 실록에 따르면 말이 좋아서 소금장인이지 일은 고되도 국가가 장려하고 돈이 되니까 시작한 사람이 많았는데 국가장부에 올라가서 고된 소금일을 평생 + 대대손손 하게되는걸 가장 두려워하였다고 한다 (출처) 세종대왕님도 인간이네 실패도 하네 (사실 실패한 거 꽤 많은데 쿨하게 실패 인정하고 중도포기하신 것도 대단ㅋ)
고증망) 조선의 중장보병 팽배수
조선이 직접 말 품종까지 개량하면서 귀하게 키우던 정예병들이 기병인데 거기다가 졸병 군복을 입혀놨다 이런 식으로 사극과 영화가 제작비를 외치며 조선군의 갑옷을 벗기니까 조선군 인식이 점점 나락으로 떨어지고 있어서 슬프다 (조선군의 갑옷이 후기로 갈수록 경량화된건 맞는데 그건 조총이 널리 보급되면서 그런거고, 이런 현상은 조선뿐만 아니라 총기가 보급되는 국가에서 공통적으로 보인다) 요즘은 조선군 = 경무장이라는 오해까지 생기고 있는데 오늘은 그런 오해를 한번에 해소하는 조선의 중장보병을 알아보자 너나우리 다함께 함성을 지르면서 뒤엉켜 싸우는 사극과 달리 '당연히' 조선도 진영과 방진의 중요성을 알고 있었다. 그리고 방진을 유지하는 뼈대로 튼튼한 중장보병이 필요하다는 사실도 알고 있었다 그래서 조선은 초기에 '팽배수'(방패수)라고 하는 탱커형 중장보병을 육성하여 방진의 뼈대로 삼았다 팽배수는 검과 방패를 다루는 중장보병으로 사슬갑옷(쇄자갑)이나 찰갑을 입히고 무거운 방패를 들게 했다. 이들의 역할은 최전열에서 적을 저지하는 것으로 이들이 뚫리면 방진이 위험해지기에 아주 작정하고 훈련시켰다 훈련할때는 전투시 입는 무장보다 더 무겁게 다니게 했고 특히 방패를 능숙하게 다루게 훈련했는데 훈련 중에는 순식간에 땅에 떨어진 방패를 주워 방어자세를 취하는 동작도 있었다고 한다 지원한다고 다 시켜주는건 아니고 무거운 방패와 갑옷을 입고 적병과 힘겨루기를 해야하는만큼 체력과 달리기가 특출한 사람만이 팽배수가 될 수 있었다 이런 하드코어한 훈련 덕분인지 팽배수 하나가 창병 다섯을 이긴다는 기록이 남아있다 이렇게 빡쎄게 키우다보니 계급부터 다른 병사와 다르게 찍어줬는데 전원 8품 이하의 관직을 받는 하급무관 + 직업군인이었다 팽배수는 조선 초기에 집중적으로 쓰였는데 세종대왕님이 4군 6진을 정복하기 전 국경선이 한반도 내부에 형성되어 있을때는 여진도 산악전에 유리한 보병 중심으로 쳐들어왔기 때문이다 그래서 요지마다 요새를 짓고 병사들을 상주하게 했는데 그 중에서도 팽배수의 중요성이 매우 컸다 여진을 몰아내고 강을 국경으로 삼자 여진도 기병 중심으로 군대가 개편되는데 여진이 기동전과 게릴라로 전략을 바꾸자 느린 중장보병인 팽배수의 중요성이 점점 낮아지게 된다 필연적으로 팽배수한테 가던 자원이 기병으로 넘어가기 시작한다 그렇게 팽배수의 수는 점점 줄어들었고 조선군의 백병전 능력이 약화되어갔는데 임진왜란이 터져버렸고 병자호란이 터지면서 백병전 능력(방진의 유지 능력)이 너무 부족했음을 뼈저리게 실감하게 된다 그래서 병자호란 이후에는 등패라는 방패가 중국으로부터 도입되어 '등패수'라는 이름으로 다시 백병전 전문 병사들이 육성되기 시작했는데 투창을 적에게 던지는 기술까지 익히게하여 기병 저지 능력을 높히고 좀 더 공격적으로 활용하게 진화시켰다 어? 하지만 조선은 이미 화약무기 보급에 박차를 가하고 있었고 방진이나 전략도 화약무기 중심으로 개편되고 있었기에 근접전에 특화된 중장보병들은 방진의 핵심에서 내려와 보조적인 자리에 머물렀다 조선이 팽배수를 어떤식으로 굴렸는지는 실록에 자세하게 나와있다 ----- 신(臣)이 오인(吳璘)의 첩진법(疊陣法)을 보니, 매양 싸울 때 장창(長槍)을 앞에 두었으며 우리 태조(太祖)께서 왜구(倭寇)를 칠 때에도 또한 장창(長槍)으로 결진(結陣)하였으니, 빌건대 지금 진(陣)을 설치할 때 팽배(彭湃)를 앞에 두게 하고 다음에 장창(長槍)을 두고 다음에 총통(銃筩)을 두어서 적(賊)으로 하여금 말을 달려 충돌(衝突)할 수 없게 하소서. ----- 팽배가 탱킹을서고, 그 뒤에 장창병이 기병을 저지하고, 그 뒤에 총통병이 적을 저격해 기병을 분쇄하는 방진을 짠걸로 보인다 조선은 중장기병부터 중장보병까지 있을건 다 있었음 이건 사극들이 잘못했다 ㅠㅠ (출처) 고증이 사실 제작비 문제긴 하겠지만 그래도 한 번 만들면 계속 돌려쓸텐데 좀 만듭시다 아무리 그래도 포졸복은 좀...
성벽 vs 대포
중세의 일반적인 성벽은 이렇게 생겼다 각졌고 높으며 거대하다 이 구조는 적을 아래서 내려다보며 공격하는데 특화된 구조로 적이 벽을 넘거나 성문을 공략할 동안 일방적인 피해를 줄 수 있었다 이런 성벽 중 콘스탄티노플의 3중 성벽은 최강의 성벽이었다 하지만 이런 형태의 성벽은 대포가 등장하면서 큰 문제가 발생한다 화약은 엄청난 무게의 돌을 강한 힘으로 때려박을 수 있게 해주었고 대포의 충격을 고스라니 받아내야하는 기존 성벽은 대포에 너무 취약했다 그동안 장점이었던 높고 거대한 크기는 대포의 명중률을 높혀주었고, 각진 구조는 포탄의 충격을 그대로 흡수했다 콘스탄티노플 성벽도 대포에 의해 붕괴되었다 하지만 사람들은 성벽을 포기하지 않았는데 대포를 고려하더라도 성벽이 주는 군사적인 이점이 더 컸기 때문이다 그래서 성벽을 진화시켰다 이탈리아의 기술자들은 실험을 통해 여러가지 성벽을 고안했고 이슬람에게 직접적으로 노출된 지역의 지도자들은 이런 실험품을 기꺼이 도입했다 그 중에서는 이슬람 전선의 최전방에 있는 로도스 섬 기사단이 있었다 로도스 섬 기사단은 엄청난 돈을 주고 자신들의 성벽을 대대적으로 개조했다 직각이었던 성벽은 약간 비스듬하게 기울게 되었고 성벽 하단이 붕괴되어 모두 무너지는걸 막기위해 아래는 두껍게, 위로 갈수록 얇게 바뀌었다 기존의 직각 성벽은 충격을 잘 견디는 원형으로 바뀐다 비스듬함이 보이십니까? 성벽은 낮아져서 적 보병이 접근했을때 일방적인 공격은 불가능해졌지만 내구도가 매우 올라갔다 낮아진 성벽을 보완하기 위해 해자를 적극적으로 활용했는데 (정확히는 물 없는 해자인 공호) 사진에 보이는 평야는 지하로 판 해자이다 실제 지표면은 왼쪽의 나무들이다 성벽 바로 앞에 해자를 파서 적 보병을 상대로 더 높은 곳으로 올라가는 효과를 받았으며 대포가 사격하더라도 포격이 성벽 위로 빗나가게 만들었다 성벽 뒤의 시설이 포격에 맞겠지만 사실 성벽이 뚫리면 공성전은 바로 패배하는 것이었기에 내부 시설의 희생은 어쩔 수 없었다 이 모든게 다 적용된 중요거점은 지금의 벙커와 비슷하기까지 하다 이 성벽은 결국 오스만의 포격을 견뎌냈고 수십배의 오스만 군을 상대로 기사단이 선전하는데 큰 도움을 주었다 결국 기사단은 물자부족으로 항복했지만 엄청난 피해를 입은 오스만도 기사단을 무기를 모두 가진 상태로, 포로나 배상금 없이 자유롭게 보내주는, 명예로운 항복을 받아주었다 로도스 공방전의 배경은 우리가 알고 있는 그런 거창한 단일 건물이 아니라 도시와 민간인 거주 구역이 들어있는 큰 도시였다 성벽 중간중간의 성채들과 성문이 중요 거점. 이런 성벽 사상은 전근대 대포병 방어시설물인 성형 요새에까지 그대로 적용되었다 1차 대전 때 성벽은 철조망으로 대체되었지만 남아있는 성벽 자체는 군사적으로 매우 잘 사용했으며 2차 대전 때 공군이 본격적으로 하늘을 지배하면서 드디어 성벽의 군사적 가치가 힘을 잃게 되었다 (출처) 성벽이 지금도 높은 거 아닌가 했는데 진짜 허벌나게 낮아진 거였구만
탈모와 싸웠지만 완패한 대기업 회장
'라디오 업계의 헨리 포드' 라 불릴 만큼 라디오 업계에서 독보적인 기업인이었고 수많은 가전제품을 발명한 발명가이자 MLB 신시내티 레즈의 오너이기도 했던 파웰 크로슬리에게는 큰 고민이 있었다. 이 세상 수많은 남자들이 그러하듯 탈모를 겪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던 파웰 크로슬리는 어느날 눈이 번쩍 뜨이는 정보를 알게 된다. 신새니티 의과대학 교수가 두피에 진공 자극을 가해 모발 성장을 촉진시킬 수 있다는 기계를 발명한 것이다. 수많은 물건을 발명한 발명가이기도 했던 파웰은 이 기계야 말로 저주스러운 탈모의 시대를 끝낼 수 있다고 믿고 거액을 주고 특허를 구입한 뒤 자사에서 제품을 생산하기 시작했다. 이 제품에 XERVAC이라는 이름을 붙인 것도 파웰이었고 파웰 본인도 틈만 나면 이 제품을 사용할 만큼 그는 XERVAC이야 말로 탈모의 시대를 끝낼 구세주임을 의심하지 않았다. 하지만 노년의 파웰 사진을 보면 알 수 있듯, XERVAC은 수많은 '실패한 탈모 치료기' 중 하나에 불과했다. 결국 파웰의 탈모 탈출 꿈은 산산조각났고, 자신처럼 탈모 탈출의 꿈을 품고 XERVAC을 산 사람들에게 사기꾼 새퀴라며 욕만 실컷 먹었다. 하지만 파웰 본인이 XERVAC에 막대한 돈을 들이고 본인도 XERVAC의 효과를 믿고 열심히 쓴 것을 보면 사기 치거나 비도덕적으로 고객들 등쳐먹은 악당이 아니라 그저 탈모와 싸워 완패한 피해자 중 한 명이었다는 게 학계의 정설이다. (출처) 머리카락이 멀쩡한 인간을 새로 만들지언정 인간의 사라져버린 머리카락은 만들 수 없는 인류... 아아 이다지도 슬플 수가 있겠소 ㅠㅠ
중국의 노벨평화상 수상자
류샤오보. 중국의 인권, 민주화운동가 천안문 민주화 운동에 참여 한 후  많은 수의 핵심 참여자들이 체포 혹은 암살을 피해 망명했음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중국에 남아 투옥 당하고 풀려나서 다시 투옥 당하고를 반복하여 중국을 대표하는 인권, 민주화운동가가 된다. 그러다 2010년 옥중에서 노벨 평화상을 수상하게 되었는데 중국 당국은 류샤오보의 친인척들을 모두 출국금지 시켜 대리수상을 막는다. 결국 그해 노벨평화상은 공석으로 이루어졌고 노르웨이 노벨위원회는  '우리가 미래를 내다볼 수 있는 것은, 긴 세월동안 때로는 위험을 무릅쓰고서도 신념을 지키기 위해 일어서서 우리에게 자유를 이끌어낸 수많은 이들의 어깨 위에 있기 때문인 것입니다. 다른 많은 이들이 돈을 세면서 눈앞의 국익만을 쫓거나 무관심으로 일관할 때, 노르웨이 노벨위원회는 다시금 우리 모두를 위해 싸워준 이를 지지하기로 결정했습니다. 류샤오보의 2010년 노벨 평화상 수상을 축하합니다. 류샤오보의 시각이야말로 결국에는 중국을 굳건하게 다질 것입니다.' 라는 축사와 함께 중국 정부에게 류샤오보의 석방을 촉구하고 중국은 노르웨이 연어의 수입을 금지시키는 것으로 화답한다. 그 후 류샤오보는 옥생활 중 간암에 걸리지만 중국 당국은 그가 말기암으로 진행 될 동안 일체의 치료행위를 해주지 않았고 치료가 불가능해질 때쯤에서야 류샤오보를 가석방한다. 그리고 류샤오보는 가석방된지 두달 뒤인 2017년 7월 13일 사망한다. 유가족들은 중국 전통인 두칠이라는 7일장을 요구하고 생전 거주하던 베이징 부근에 안치시켜달라고 요구했지만 중국 당국은 이를 무시, 류샤오보는 장례 2일차에 화장되어 바다 어느 곳에 수장된다. 류샤오보 사후 중국은 반체제, 민주화운동가들을 투옥 후 중병에 걸리게 한 후 손 쓸 수 없게 진행되면 석방시켜서 사회에서 죽게하는 방법을 애용하고 있다. 류샤오보의 부인은 그후 다른곳으로 옮겨져 가택연금을 당하다 접촉하려던 '홍콩인'이 괴한에게 납치당하고 고문 후 독실한 개신교인이니 십자가를 박아주겠다며 다리에 스테이플러를 +자 모양으로 수십개 박은 후 유기하는 사건이 일어나는등의 일로 국제사회의 지탄이 쏟아지자 2018년 출국금지와 가택연금이 풀리고 외국으로 망명한다. '자유로운 표현은 인권의 기본이며, 인간 본성의 뿌리와 진리의 어머니다' 류샤오보 (1955~2017) (출처) 오늘이 그날이죠 그들은 없었다고 하는 그날 성공했더라면...
조선의 더러운 화약무기
케리비언의 해적 때문에 배 위에 대포를 올려놓고 적 함선를 뻥뻥 부수는 장면을 생각하곤 하지만 사실 배랑 대포가 친해진건 18세기부터 가능했다 대포가 워낙 무거운데다 반동도 땅을 울릴만큼 크고, 한번 쏠때마다 사라지는 화약도 상당해서 여러가지로 부담스러운 무기였기 때문이다 오죽하면 명나라에서는 대포 반동으로 복원력을 상실하고 배가 뒤집히는 사고까지 터졌을까 자연스럽게 해전용 대포는 소구경을 쓰게 되었고 관통력 부족으로 함선을 부순다기보다는 전투원과 선원을 공격하는 용도로 사용되었다 그렇게 해전은 근접전 중심이되었고 승함전투는 일상적인 해전전투였는데 조선이 재밌는 발상을 한다 '화포가 작아서 관통력이 부족하다고? 그럼 발사체 관통력을 높히면 되지' 그래서 장군전 시리즈(대, 중, 소)가 만들어졌다 위의 실물은 실제로 임진왜란 당시 발사된 유물로 일본군이 주워간건데 머리부분의 둥근 촉 부분은 소실되었지만 몸체와 날개 등 나머지는 잘 살아있다 독특하게 장군전에는 만든 장인의 이름과 지역, 소속 등이 세겨져있는데 점검 중 불량이 나오면 그 장인에게 죄를 묻겠다는 소리였다 조선은 무기 제작에 엄청 깐깐하게 굴었는데 실록에 보면 이번 분기에 올라온 활이 다 상태가 메롱하니 처음부터 다시 만들어바치라는 극한의 공밀레도 나온다 보급이 잘 되어있고 배에도 올릴 수 있는 중형 대포에 특별한 개조없이 사용가능하며 관통력도 탁월한 미사일을 얻은 덕분에 조선군은 승함전투가 일상적이었던 임진왜란 때부터 남의 비싼 배에 구멍 쾅쾅 뚫으면서 행복한 시간을 가질 수 있었다 조선이 해상 화력에 자신감이 넘쳤기에 가능한 또 다른 기괴한 병기가 있는데 백병전에 면역이지만 자신도 백병전을 못거는 돌격선인 거북선을 투입한 것이다 즉, "우리는 화포만으로 니들을 확실하게 조져버릴 수 있다"는 의지의 표명이었다 여담으로 거북선이 뚜껑에 철갑을 덮었는지 아닌지 아직도 싸우는데 일단 그 이전부터 성문에 철갑을 씌운걸 보면 기술은 있었고 나름 탱커 포지션인데 화공의 위험 때문에라도 철갑을 씌우지 않았을까?라고 조심스럽게 추측해본다 원래 짚이나 천 등을 깔아두고 계속 물을 뿌리는 방법으로 화공을 막았는데 거북선은 그게 안되니까... 또 다른 유명한 화약 무기는 화차가 있다 사실 화차는 아직 한국이 어딨는지도 잘 몰랐던 2000년대부터 서양에 나름대로 알려졌던 재밌는 무기다 위 짤도 미국의 미스버스터라는 프로그램에서 실제로 제작해서 실험한 장면이다 원래 세종 시기에 만들어진 신기전은 발사대에 올려놓고 1발씩 쏘는 무기였는데 문종 때 저런 다연장 장비가 나왔다 가장 위력이 약하다는 소신기전도 화약에서 얻은 추진력으로 사람을 관통하는 것이 가능했고 활의 사정거리 이상부터 살상력을 가질 수 있었다 중신기전부터는 폭탄을 설치해 2차 폭발에 의한 추가피해를 주었다 방패로 막아도 터져버리니 그야말로 방관무기였다 보통 소신기전과 중신기전을 함께 사용했으며 이것만으로도 적군의 사기를 꺾는데 엄청난 효과가 있었다 북방의 여진은 물론, 일본군조차 소신기전과 중신기전을 번갈아 쏘니 결국 진을 버리고 도망쳤다는 기록이 있다 가장 큰 대신기전은 그 귀한 화약을 5kg이나 잡아먹는 돈먹는 하마였는데 2차 폭발범위가 매우 컸다 유효범위가 15m로, 저 당시는 방진짜고 싸우던 시기인지라 제대로만 박힌다면 오늘날 수류탄보다 효과가 컸다 워낙 가성비가 안 좋아서 일종의 결전병기처럼 드문드문 쓰였는데 싸움이 시작되기 전 멀리 떨어져 안심하는 적에게 몇방 쏘아 심리적으로 위축시켰고 아껴놨다 위급한 곳에 발사해 역전을 노렸다 신기전은 위력도 괜찮은 편이었고 무엇보다 적의 사기를 꺾는데 탁월한 무기였다 흔히 말하는 모랄빵 무기였던 것이다 여진족 같이 훈련정도가 덜한 군대는 물론 일본군 같이 훈련과 경험이 풍부한 상대로도 재미를 많이 봤다 세조 때는 이시애의 난을 진압할 때와 국경을 넘어 여진을 대대적으로 공격할때도 큰 효과를 보았고 성종실록에는 여진과 근접전으로 승패가 나지않자 화차를 가져와 쏘았더니 적이 진을 버리고 도망쳐서 추적해 크게 승리했다는 기록이 전해진다 병조판서(국방부장관) 이극균은 이렇게 좋은 화차가 400개 밖에 없으니 더 만들어서 조선팔도 모든 진에 100개씩 두자는 포방부스러운 주장도 했다 하지만 신기전은 매우매우 비싼 무기였다 화약 자체가 귀한 전략물자였기 때문이다 조선은 화약의 원료 중 초석을 전적으로 수입에 의존했는데 명나라는 조선의 포방부화를 견제했고 수시로 초석 수출에 제동을 걸며 방해했다 세종실록에 따르면 1년에 소모되는 초석이 4천근인데 자체 생산되는게 1천근(640kg) 남짓했다고... 조선은 중국 기술자가 찔끔 알려준 정보와 무수한 실험을 통해 초석을 알음알음 생산했지만 중국산보다 생산량도, 품질도 떨어졌고 중국의 군사기밀이었던 품질 좋은 초석제조법을 원했다 세종 때는 창피를 견디며 황제에게 초석제조법을 알려달라고 직접 편지를 쓰기도 했지만 결국 거절당했다 결국 인조 때 평안도의 하급무사 '성근'이 국경을 넘나들며 명나라에 사는 조선인과 명나라 피난민, 기술자에게 정보를 파편적으로 얻어냈고 이 정보들을 집대성해 마침내 명나라의 발전된 초석 생산법을 알아내 기술서를 편찬했다 아무튼 그 귀한 화약을 한번에 5kg 씩 산화시키는 신기전은 매우 강하지만 유지비 비싼 결전병기였고 결국 비슷한 위력의 화포가 개발될때마다 하나하나 빠지게 되었다 위의 화약문제로 조선의 화포개발은 가능한 적은 화약으로 가능한 큰 피해를 입히는 방향으로 나아갔고 그래서 중소형 대포인 현자총통이 인기가 높았다 이순신 장군님도 '쏴보니까 내구도 낮은 일본 배한테 대형포 쏘는건 화약이 아깝드라'라는 평가를 내리고 천자총통 생산을 크게 줄이고 현자총통을 찍어냈다 현자총통은 비슷한 위력의 이전 화포보다 1/4의 화약을 소비하며 비슷한 위력을 낼 수 있으며 포 하나로 대형화살과 철탄, 산탄 등 다양한 포탄을 발사할 수 있었다 공성 공격이 드물고 화약 문제 때문에 소형화포를 선호했던 조선은 병자호란 때 홍이포에 일방적으로 두들겨 맞은 슬프고 아픈 경험을 했고 적의 공성군과 맞포격을 할 대형화포의 필요성을 실감했다 이미 인조때 명나라에서 홍이포의 설계도를 받아왔지만 참고할 실물이 없고, 구조가 조선의 것과 많이 틀린 서양식 화포인지라 제작에 어려움이 많았는데 (박연으로 분장한 주한 네덜란드 대사 '요스트 불프스빙컬') 박연과 하멜 등 서양인들의 기술적 조언과 계속된 연구 끝에 영조 때 홍이포를 복제하는데 성공했다 이후로 조금씩 생산되어 조선에 실전 배치되었는데 정조가 홍이포를 일찍 배웠으면 남한산성에서 그렇게까지 털리지는 않았을텐데..라고 아쉬워했다는 기록이 남아있다 ------------------------ 임금이 말하기를, "이것은 원숭환(袁崇煥)이 영원(寧遠)에서 시험한 홍이포(紅夷砲)의 유제(遺制)이다. 병자년에 이 방법을 배우지 않아서 쓰지 못하였으니, 참으로 한탄스럽다." 하매, 서명응이 말하기를, "그때 이 방법을 썼다면, 적병이 어찌 감히 성 아래에 접근할 수 있었겠습니까?"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예전에는 산성의 별파진(別破陣)이 다 이 기법(技法)을 익혔는데 요즈음은 두 사람이 익숙할 뿐이라 하니, 이것도 권장하지 못한 탓이다." 하였다. (출처) 포방부 DNA는 못참지 ㅋㅋ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