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0shelter
5,000+ Views

조선이 왜란에서 이긴 이유

임진왜란의 영향으로 일본군 장수들에 대한 평가가 가려지는 경우가 있는데 조선군 선봉부대 중에 하나였던 가토 기요마사는 유능한 행정관이자 장군이었다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일본을 평정할때 후방에서 보급과 행정을 담당했을 정도로 능력있고 신뢰받는 인물이었다고 한다

후방에서 보급/행정하는 사람은 신뢰도 100 찍은 충신 중의 충신이 해야한다고 한다
안 그럼 조조 나간 사이에 통수 때린 진궁처럼 되니까

(히데요시 사후 히데요시 반대파에 서서 배신했다는 의견도 있는데 가토는 도요토미 가문에 끝까지 충성했으며 오직 그의 정적인 이시다 미츠나리의 제거만 목적으로 두었다. 오히려 도쿠가와가 도요토미 히데요리를 해칠 낌새를 읽자 히데요리를 자신의 영지에 대피시킬 계획과 경로까지 미리 짜두기도 했다)

하지만 이렇게 유능한 장군도 못 참는게 있었는데
마마 추운데스

조선 북방은 따뜻한 남쪽나라에서 살던 일본인들한테 지형적합성 빨강을 띄우는 혹한의 땅이었던 것이다

북관전투(9월 ~ 2월)에서 조선 관군 + 의병 3000명이 가토의 2만 2천을 상대로 싸움이 가능했던 요인 중에 하나는 적응하기 힘든 조선의 추위였는데 일본군이 땔감을 채취하려고 할때마다 요격대와 북방의 궁기병을 보내 이를 막았고 일본군을 포위하면 그대로 치는게 아니라 하룻밤씩 기다렸다고 한다

추위대책 확실했던 조선군과 달리 밤이 지나갈때마다 동사자가 속출하고 나가떨어져서 아침에 들어가보면 아예 전멸해버린 일본군 목만 베어가는 경우도 종종 나왔다

일본군의 패배가 들릴때마다 일본군의 물자 부족(feat 이순신) 때문에 약탈에 시달리던 조선 토병들이 들고 일어나면서(공질이 폭발해서) 함경도가 통제불능에 빠지기 시작했고 일본에 투항한 조선 세력이 모두 제압당한다

결국 가토는 3000명 때문에 함경도가 통제불능에 빠지자 본대 2만 2천을 이끌고 이들을 요격하기로 한다

여태까지 기습과 물자차단, 매복으로 체급차이를 극복해왔던 조선군은 마침내 결단을 내리는데 7배 더 많은 가토의 군대와 맞서 싸우기로 한것이다
(북관대첩도)

조선군은 가토가 이끄는 일본군 주력에 맞서 3번이나 물고 늘어졌고 3번 다 패배했다

하지만 일본인들이 견디기 힘든 조선 북방의 추위는 점점 심해졌고 가토군은 전투는 계속 이기지만 추위와 보급 부족으로 인한 비전투 손실이 눈덩이처럼 불어난다
마마 추운데스

처음부터 조선군은 훈련, 장비, 숫자가 모두 앞서는 일본군을 상대로 이길 생각이 없었다

하지만 초겨울 추위에도 픽픽 쓰러지던 일본군을 보며 늦겨울까지 시간을 벌면 이길 수 있다는 빅픽처를 그려놨고 마침내 조선군이 기다리던 폭설이 내리기 시작하자 가토는 함경도를 포기하고 남쪽으로 후퇴하기 시작한다

정면 대결에서 3번이나 승리했지만 가토의 피해는 막심했다
2만 2천명 중 전사자는 8864명에 달했다 부대의 1/3이 전사한 것.

조선은 훨씬 적은 병력으로 일본군 본대를 몰아내고 함경도를 탈환함으로 전략적 목표를 완수했고 가토가 한양까지 스트레이트로 후퇴하면서 생긴 전력공백은 조명 연합군이 평양성을 공략할때 유리한 요소가 되었다



한국 겨울은 못버티지
약해빠진놈들
Comment
Suggested
Recent
Cards you may also be interested in
따닷하고 튼튼한 갑옷
보통 갑옷하면 이렇게 금속을 대량으로 쓴 반짝이는 모습을 기대한다 하지만 이런 금속 갑옷은 금속 가공 기술이 뒷받침해줘야 제대로 만들 수 있었고 가격도 비쌌으며, 강철을 대량으로 사용했기에 관리가 어려웠다 사람들은 금속 외에도 가죽이나 천으로 갑옷을 만들어 입었는데 각자 일장일단을 가지고 있었다 여기서는 천 갑옷, 그 중에서도 갬비슨을 araboza. 일단 천 갑옷의 역사가 꽤 길다 군대나 자원봉사로 제초 좀 해본 사람이면 알겠지만 금속제 도구로 풀을 내리쳐도 한번에 잘 잘리지 않고 오히려 날을 상하게 한다는걸 알고 있을거임 고대인들은 식물 섬유을 짜고 여러번 겹치는 방법으로 갑옷을 만들었는데 가벼우면서 어느정도 방호력을 가졌기에 그리스인들, 그리고 알렉산더가 즐겨 사용했다 하지만 이렇게 천을 여러겹 두르는것만으로는 방어력의 한계가 명백했고 가죽 가공 기술과 금속 기술이 발달하면서 주류에서 밀려났다 중세때 천 갑옷이 다시 재조명 받았는데 린넨을 여러겹 겹치고 솜과 양털, 옷조각을 넣어 부풀린 강화형 천갑옷이 등장했고 이 형태의 갑옷을 '갬비슨'이라고 불렀다 딱봐도 두툼한게 아주 깔깔이스럽다 갬비슨은 13세기정도에 전 유럽에 보급되었고 15세기에 정점을 찍었음 재배가 가능한 아마로 만들기 때문에 가죽이나 금속보다 훨씬 가격이 낮았고, 제대로 만든다면 비슷한 두께의 가죽보다 찌르는 힘에 더 잘 저항할 수 있었다고 한다 화살 방호가 높았다고 하는데 학자들은 재질만 인공섬유로 바꾸면 방탄복과 유사해지는 구조 덕분이라고 하더라 금속 갑옷처럼 동물의 지방을 바른다거나, 가죽 갑옷처럼 약품처리한 후 음지에서 말려야하는 등등 다른 갑옷의 유지보수가 번거로운 반면에 갬비슨은 햇볕이 좋은날, 잘 말리는 것으로도 쉽게 관리할 수 있었고 파손되더라도 현장수리가 가능했다 또 상대적으로 가볍고 움직임이 편했기에 누구나 쉽게 입고 싸울 수 있었는데 여성들도 갬비슨 갑옷을 어렵지않게 착용하고, 움직일 수 있었다고 한다 갬비슨은 모든 계층에게 사랑받았는데 기사들은 사슬 갑옷 아래에 갬비슨을 입어서 방호력을 늘렸고, 금속이 살과 마찰을 일으켜 상처가 나거나 짓무르는걸 막았다 금속 갑옷을 구입할 여유가 없는 일반 보병들은 아예 갬비슨만 입고 전투에 나서기도 했는데 철제 투구에 갬비슨을 입은 병사들의 모습은 중세 시대에 보편적인 보병들의 모습이었다 대충 이런 모습. 신분이 높은 사람도 가볍게 훈련하거나, 사냥을 나가거나, 스포츠를 즐길때 갬비슨을 즐겨 입곤했는데 이 때문에 화려한 갬비슨도 종종 볼 수 있었다 15세기 중후반에는 갑옷인 갬비슨이 일상복으로 쓰이기도 할 정도로 보편적으로 사용되었다 (중세 문화를 어느정도 반영한 마운트 앤 블레이드 2 : 배너로드에서는 갬비슨 갑옷을 전투복과 일상복 둘 다 쓰게 해놓은 걸로 고증해놓았다) (영국의 대제독 에드워드 클린톤이 착용한 고급 갬비슨의 모습) 금속갑옷과 함께 사용해 서로를 보완하고 그 자체로도 갑옷으로 쓰인 갬비슨은 더 이상 방호가 힘든 총기가 발달하면서 18세기가 되면 전장에서 사라졌다 갬비슨은 크게 두가지 형태로 나뉘는데 조끼형태로 상의를 보호하는 것과 코트형태로 하의까지 보호하는 것 두가지로 나뉜다 보통 조끼형태는 다른 갑옷과 함께 입은 모델로 기병이나 중보병이 애용했으며 코트 형태는 갬비슨 단일 방어구로 착용할때 쓰이는 물건이고 주로 보병들이 애용했음 중세를 상징한게 사슬, 판금 갑옷이라면 중세를 지배한건 갬비슨 갑옷이어서 그 시대를 다루는 많은 매체에서 등장하는데 위에 잠깐 언급한거처럼 마운트 앤 블레이드에서 갑옷&평상복으로 나오고 위처에서는 '강베송'이라는 불어 발음으로 나온다 그리고 중세하면 빼놓을 수 없는 그분들도 갬비슨을 입고 있음 (출처) 강베송이 겜비슨이었군 진짜 쓸모없지만 알아두면 재밌는 옛날 이야기 ㅋㅋ
마틴 루터도 이기지 못한 존재
마르틴 루터 아마 성당이나 교회 다닌 사람이라면 한 번 이상은 들어봤거나 하다 못해 종교나 역사에 대해 조금이라도 안다면 한 번 이상은 들어봤을 사람임. 마르틴 루터는  부유한 집안에서 태어나서 법관-사제 과정을 거치고 신학자로 승승장구하다가 당시 교황청의 막장 상황을 보다 못해 종교개혁 28조를 쓰고 이것을 공개적으로 비난함. 이후 교황청의 막장 상태에 공감이 가던 사람들과 함께 활동하기 시작하고 이 여파가 커지면서  지금의 구교 - 신교로 분리하게 됨. (그 외 더 복잡한 일이 있지만 대강 정리하면 이럼) 근데 마르틴 루터 역시 능력 자체가 어마어마하던 사람이었음. 하나 하나 나열 하자면 1. 말빨이 어마어마함 - 머리도 워낙 똑똑했고 아는 것도 엄청 많았음  이걸 기반으로 그 당시 하늘을 찌르던 교회의 권위를 말로 발라버렸을 정도로 어마어마하게 말빨이 좋았음. 당시 난다 긴다 하는 신학자들도 루터를 이기지 못했을 정도였음. 루터를 재판에 회부한 사제들도 '어 뭐지, 루터 쟤 말 들어보면 교회가 잘못한 것 같은데'라고 흔들렸을 정도임  2. 글빨도 짱좋았음 - 본인 스스로 '나는 글을 짜내지 않아도 됨. 그냥 생각나는데로 쓰니 되더라' 하면서  어마어마한 글빨을 보여줌. 루터가 활동하던 1523년에 900여권의 출판물이 발간됐는데 그 중에 346편이 루터가 쓴 것이었음. 지금처럼 독해력이 높지도 않고 출판 기술이 좋지 않았다는 걸 감안해도 한 명이 한 나라의 출판물의 3분의 1을 책임진다는게 말이 안됨. 그리고 루터 혼자서 평생 쓴 카톨릭 관련 저서가 당시 독일 내에 있는 모든 카톨릭 저서보다 무려 다섯배 많았음.  그냥 루터가 '글아, 써져라 호잇!' 했는데 그게 한 나라의 모든 저서의 다섯배가 넘는 결과를 만들어버린것 3. 예술 능력도 탁월했음 40살이 넘어서 음악에 꽂히더니 그냥 숨쉬면서 일년 동안 42곡의 찬송가를 작곡했음. 몇몇 곡은 아직도 불려지고 있음. 하지만 본인은 아무런 미련도 집착도 없어서 '음, 심심해서 써봤는데 님들이 부르던 태우던 맘대로 하세요' 하고 신경 안씀 4. 언어학의 마스터 - 이 분야의 갑 오브 갑 영국에 세익스피어가 있었다면 독일에는 마르틴 루터가 있다. 성경을 독일어로 전체 번역했을 뿐 만 아니라 히브리어, 그리스어 등에 아주 능통했음. (그 어려운 성경을 한 나라의 언어로 통째로 번역하는 건 상식적으로 보통 일이 아님) 완벽한 번역을 위해서 루터는 성서에 언급된 지방에 가서  그쪽 사람들과 직접 대화해서 자문을 얻었을 정도임. 그러면서 성경에 있는 언어들을 독일어 뜻에 맞는 단어로 하나 하나 바꾸고 이걸 통해 독일어 전체에 새로운 단어들이 탄생함. 5. 특히 말로 까는 건 엄청 잘했음 교회를 말빨로 발라버렸을 정도로 말이 쌨던 루터는 모두까기 인형으로 통했음. 신성로마제국 황제인 카를 5세에게는 '님 생긴 걸 보아하니 아기 잘낳게 생겼네요.(존나 계집애 처럼 생겼네)' 후원자인 브라운슈바이크 공작에게는 '님은 늙은 돼지 방귀 소리 듣고 배우세요' 자기 추종자들에게는 '내 이야기 하지 말고 성경 좀 봐 병신들아' 자기 나라 사람인 독일인들에게는 '님들 먹고 마시는거 밖에 모르는 짐승으로 소문난거 아시죠?' 등등 별의별 인용구와 다양한 단어들을 인용해서 다채롭고 화려하게 까기로 유명했음. 오죽했으면 동료가 '루터가 하루라도 좀 닥쳤으면 좋겠다'라고 평했을 정도임 즉 마르틴 루터는 신학 + 논리학 + 웅변능력 + 카리스마 + 깡 + 언어학 + 예술학 + 법학 등등 정말 유례 없는 시대의 먼치킨이었음. 하지만 교황청에게 빅엿을 날리고 난다긴다하는 사제들을 혓바닥으로 씹어 버리고 왕이고 나발이고 다채롭게 까버리는 루터마저 결코 이기지 못한 존재가 있으니..... 바로 아내 카테리나임. 카테리나와의 만남도 조금 골때리는데... "지참금을 주기 싫어서, 혹은 양육하기 싫다는 이유로 억지로 수녀원에 맡겨져서 평생 갇혀 사는 것은 말이 안된다!!! 수녀들도 자유롭게 살면서 사랑을 누릴 자유가 있다!!!" (실제로 루터는 이러면서 많은 수녀들이 탈출하게 도와줌) "음, 님 말이 맞는 것 같음 나도 우리 부모가 키우기 싫다고 수녀원 보냈거든. 근데 문제가 생김." "?  뭔데요" "남자가 없음. 그니까 님이 책임져" "???????" (카타리나가 16살 연하.....) "그래서 나랑 결혼 할꺼야, 말꺼야? 대답은 예 or 예로 대답해" "예?" "ㅇㅋ 수락했다?" .....자발적으로 수녀원을 탈출한 카타리나는 마르틴 루터에게 가서 책임지고 자신과 결혼하라고 회유를 가장한 설득과 협박을 했고 거기에 넘어간(???) 루터는 카타리나랑 결혼함.  루터는 수도사처럼 그냥 혼자 살고 싶어했다고 함.... 그리고 결혼 직후  마르틴 루터가 개빡치는 일이 생김. "여보" "왜" "알브레히트 추기경이란 사람에게 혹시 돈 받았어?" "ㅇㅇ 그양반이 결혼 축의금이라면서 줬는데?" "미쳤냐!!!!! 그 양반이 누군지 몰라서 그래!!!!!!!" "면죄부를 판 인간이잖아!!!!!" 알브레히트 추기경은 면죄부를 팔아서 교회의 타락과 종교개혁을 일으킨 마르틴 루터의 숙적 of 숙적이었음. 그런 추기경이 돈을 줬다는 것 자체가 정치적인 함정이나 견제의 목적으로 충분히 봐도 문제가 되는 일이었음....  "내가 알았겠냐?" "아 됐고,  빨리 그 돈 다시 보내!!!" "싫은데? 이미 돈 썻엉 ㅋ." "하..... 이게 연하라고 오냐오냐 봐줬더니.... 야, 내가 누군지 모르냐? 나 루터야. 교황이고 왕이고 다 까는 루터! 내가 여자라고 봐줄.......!!!" 그렇게 세기의 먼치킨은 아내와 첫 부부싸움을 하게 되었고 아내인 카테리나가 남편인 마르틴 루터를 개쳐발랐다고 한다. 부부싸움에서 이긴 카타리나는 축의금을 그냥 기분 좋게 살림에 보태썼다고 전해진다. 이렇게 인생 최초의 대패를 경험한 마르틴 루터는 개삐져서 내가 다음에 결혼하게 된다면 돌로 순종적인 여자를 조각해서 결혼할거임  이라고 투덜댔다고 전해진다.  (덧) 그래도 둘은 금슬은 좋아서 마르틴 루터는 종종 카타리나를 '나는 경건한 하인, 카타리나는 나의 여왕님' 이라고 치켜 세우거나 '나는 당신이 있는 집의 꼭대기만 봐도 행복하니, 이런 남자에게 굴복하지 말라'라고 당부하거나 '나는 아론, 카타리나가 모세' 라면서 성경 인용을 하거나 '프랑스를 다 준다고 해도 카타리나랑 바꾸지 않겠다!!라는 말도 자주했다고 함. (출처) 사랑은 마틴루터킹도 두손 두발 들게 했다 오 사랑
데뷔 초 신인상 휩쓸어 갔던 배우들.gif
배우말고 다른 분야로 연예계 데뷔 후 인지도 높은 상태로 신인상 휩쓴 경우 제외함 임수정 <장화, 홍련> <미안하다 사랑한다> 2003년 제24회 청룡영화상 신인여우상 <장화, 홍련> 제2회 대한민국영화대상 신인여우상 제23회 한국영화평론가협회상 신인배우상 제4회 부산영화평론가협회상 신인배우상 제6회 디렉터스 컷 시상식 신인상 2004년 제24회 판타스포르토 영화제 여우주연상 KBS 연기대상 여자 신인상 <미안하다 사랑한다> 이준기 <왕의남자> 2006년 제5회 대한민국영화대상 신인남우상 제43회 대종상 신인남우상 제42회 백상예술대상 영화부문 남자 신인연기상 제29회 황금촬영상 신인남우상 제3회 네티즌 연예대상 영화부문 신인상 박보영 <과속 스캔들> 2008년 씨네21 영화상 올해의 신인여자배우 2009년 제12회 디렉터스 컷 시상식 올해의 신인연기자상 제32회 황금촬영상 시상식 신인여우상 제30회 청룡영화상 신인여우상 제5회 대한민국 대학영화제 여자신인상 제17회 대한민국문화연예대상 영화배우부문 신인상 제29회 한국영화평론가협회상 신인여우상 제45회 백상예술대상 영화부문 여자 신인연기상 제6회 맥스무비 최고의 영화상 최고의 신인배우상 이제훈 <파수꾼> <고지전> 2011년 제19회 대한민국 문화연예대상 신인연기상 <파수꾼> 제32회 청룡영화상 신인남우상 제48회 대종상 영화제 신인남우 제31회 한국영화평론가협회상 남자신인상 <고지전> 제20회 부일영화상 신인남자연기상 2012년 제3회 올해의 영화상 신인상 김고은 <은교> 2012년 제1회 모엣&샹동 Jimff 라이징 스타 어워드 라이징 스타상 배우부문 제21회 부일영화상 신인여자연기상 제49회 대종상 신인여우상 제32회 한국영화평론가협회상 신인여우상 제33회 청룡영화상 신인여우상 제13회 부산영화평론가협회상 여자 신인연기상 제2회 아름다운 예술인상 신인예술인상 2013년 제4회 올해의 영화상 신인여우상 제12회 뉴욕 아시안 영화제 아시아 스타상 부문 라이징 스타상 여진구 <해를 품은 달> <화이> <오렌지 마말레이드> 2013년 드라마 피버 어워즈 신인상 <해를 품은 달> 제28회 코리아 베스트 드레서 스완 어워드 라이징 스타상 <화이> 제21회 대한민국 문화연예대상 영화부문 남자신인상 제34회 청룡영화상 신인남우상 제33회 한국영화평론가협회상 남자신인상 2014년 제14회 디렉터스 컷 어워드 올해의 남자신인연기자상 제5회 올해의 영화상 신인남우상 2015년 제4회 마리끌레르 영화제 루키상 KBS 연기대상 남자 신인상 <오렌지 마말레이드> 김태리 <아가씨> 2016년 제16회 디렉터스 컷 시상식 올해의 여자신인연기상 제25회 부일영화상 신인 여자 연기상 제37회 청룡영화상 신인여우상 제17회 부산영화평론가협회상 신인연기자상 제17회 올해의 여성영화인상 신인연기상 2017년 제8회 올해의 영화상 신인여우상 제6회 마리끌레르 영화제 루키상 제11회 아시안 필름 어워즈(Asian Film Awards) 신인배우상(Best Newcomer) 제17회 대한민국청소년영화제 인기 영화인 신인여자배우 부문 류준열 <소셜포비아><응답하라1988><운빨로맨스><더킹> 2016년 제11회 맥스무비 최고의 영화상 남자 신인상, 라이징 스타상 <소셜포비아> 한국케이블방송대상 연기부문 라이징스타상 <응답하라 1988> 제52회 백상예술대상 TV부문 남자 신인연기상 tvN 10 Awards 대세배우상 (tvn 시상식이 이거 뿐이라 신인상 아닌데 걍 넣음) MBC 연기대상 남자 신인상 <운빨로맨스> 2017년 제53회 백상예술대상 영화부문 남자 신인연기상 <더킹> 제1회 더 서울 어워즈 영화부문 남우신인상 최희서 <박열> 2017년 제26회 부일영화상 신인여자연기상 제1회 더 서울 어워즈 영화부문 여우신인상 제54회 대종상 여우주연상 신인여우상 제37회 한국영화평론가협회상 신인여우상 제18회 부산영화평론가협회상 신인여자연기상 제38회 청룡영화상 신인여우상 제17회 디렉터스 컷 시상식 올해의 여자 신인연기자상 2018년 제9회 올해의 영화상 신인여우상 제54회 백상예술대상 영화부문 여자 신인연기상 제23회 춘사영화제 신인여우상 출처
사회적으로 소외된 사람이 흑화하면 생기는 일: [괴벨스의 삶]
-몸이 약한데다 만곡족(발바닥이 안으로 심하게 굽은)이라는 선천적인 장애가 있었던 소년 괴벨스는 제대로 걷지 못해 친구들에게 왕따를 당했다. 이 때문에 2층 다락방에 혼자 틀어박혀 울곤 했다.  -수술도 해봤지만, 아무런 소용이 없었다. 평생 보조구를 착용하고 살아야 하는 아들을 바라보며 부모님도 가슴아파 했다. 당시 독일 사회는 장애를 '신의 형벌'로 받아들였기 때문에, 괴벨스의 부모님도 그의 장애를 불의의 사고 탓에 그렇게 되었다며 둘러대고 다녀야 했다. -괴벨스의 같은 반 학생들은 체격이 작고 장애를 가진 소년 괴벨스를 늘 업신여겼고, 괴벨스가 같은 반 여학생에게 쓴 연애편지를 빼앗아 큰 소리로 읽으면서 절름발이라고 놀려댔다.  -괴벨스는 항상 혼자 있고 싶어 했고, 자기를 이렇게 만든 하느님을 원망했다. -하느님은 왜 나를 사람들에게 경멸당하고 조롱당하는 인간으로 만들었는가? 나는 인간을 사랑하고 싶은데, 그러지 못하고 증오해야 하는가? - 괴벨스의 일기 中 -유일한 재미는 책이었다. 괴벨스는 골방에 틀어박혀 도스토예프스키, 신비주의, 종교적인 러시아 사회주의 성향의 책을 읽어댔고 이 때문에 몽상가 소년이 되었다. 심지어 자신이 직접 소설을 쓰기도 했는데, 모든 소설이 타락한 사회를 비난하고, 세상을 구원해줄 강력한 지도자를 열망하는 내용이었다. -신체적인 열등감을 학교 성적으로 커버하려고 이를 악물고 공부했다. 성적은 상당히 좋았다. 괴벨스의 부모는 빠듯한 살림에도 중고 피아노까지 사주면서 열심히 공부하는 괴벨스를 격려했다. -그의 학창시절 꿈은 신부였다. 괴벨스의 부모님 역시 그가 장애를 딛고 모든 사람들을 포용할 줄 알아야 된다고 생각했으며, 아들이 신부가 되는 길을 적극 장려했다. -괴벨스의 집안은 유대인을 싫어하지 않았고, 유대인과의 왕래도 잦았다. -유대인을 싫어하는 게 이해되지 않아. 그들도 똑같은 인간인데 왜 멸시받아야 하는 것이지? 내가 가장 존경하는 교수도 유대인이야. 그와 학구적인 토론을 할 때마다, 유대인들의 능력은 아주 뛰어나다는 걸 수긍하게 돼. 좋은 사람이지. 정치에 관심있는 주변 사람들은 유대인을 독일에서 추방해야 한다고 말하지만.... 그건 인간의 도리가 아니잖아?  - 청년시절 괴벨스가 친구에게 쓴 편지 中 -괴벨스는 역사수업, 특히 전쟁 이야기를 유난히 좋아했다. 특히 알렉산더, 마케도니아 대왕과 같은  '영웅'에게 완전히 마음을 빼앗겼다. 이때부터 조국과 민족, 신앙이 그의 마음속에 자리 잡기 시작한다. -16세의 괴벨스는 이 지옥같은 세상을 전쟁이 해결해줄 수 있고, 처자식과 조국을 위헤 목숨을 내놓는 것이 가장 명예로운 일이라고 믿게 되었다. 그러나, 다리 장애 때문에 군대에서 쫓겨나고 조롱당하기만 했다. -청년 괴벨스는 감성이 대단히 예민했다. 다른 사람들이 그냥 기분 나쁜 정도의 일이 터져도 괴벨스는 처절하게 절망하였다. -열심히 공부하여 명문대학교에 입학했지만, 먹을 것을 사기 위해 옷과 손목시계를 팔아야 했다. 차비가 없어 집에 돌아오지 못할 때도 있었다. 돈의 노예가 되는 상황을 씁쓸하게 생각했다. -언제나 돈 때문에 문제가 발생하고, 그것은 나를 매우 괴롭게 만든다.  - 괴벨스의 일기 中 -졸업 이후 뛰어난 논문 실력과 학위로 박사가 되었으나, 달라진 건 아무것도 없었다. 박사 이름으로 과외를 하거나 언론사에 가끔 기고나 논문을 올리면서 푼돈을 받는게 전부였다. 몇 푼 받아봤자 당시 독일의 인플레이션 상황에선 받으나마나 였다. 그는 또다시 현실의 무력함을 느꼈다. -이윽고 청년 괴벨스는 오랫동안 교제 중이었던 유대인 여자친구에게 청혼했지만, 그녀는 괴벨스의 장애 때문에 장애아가 태어나지 않을까 걱정된다며 괴벨스의 마음에 큰 상처를 주었다. 자존심이 강한 괴벨스는 여자친구가 헤어지자고 하면 '자살할 것'이라 말했다. 하지만 그녀는 결국 괴벨스와 헤어지고 '돈 많고 몸이 멀쩡한' 사내와 결혼한다. 이 때문에 괴벨스는 지독한 우울증에 시달린다. -방황하던 그는 유대인 은행에 입사하고자 했으나 장애가 있다는 이유로 퇴짜를 맞았고, 어렵게 들어간 또다른 유대계 은행에는 직원들이 양심의 가책도 없이 투기와 사기를 저지르는 것을 보고 유대인에 대한 혐오감을 느끼기 시작한다. -괴벨스가 결혼까지 생각하고 진심으로 따랐던 유대인 여자친구 엘제 얀케가 자신을 버리고 돈많고 사지가 멀쩡한 남성과 결혼한 것도 유대인에 대한 증오를 낳는 데 한몫했다.  -완전히 이사를 하고 나서 개를 한 마리 구했는데, 인간에 대해 더 많이 알면 알수록 개를 사랑하게 된다.  - 괴벨스의 일기 中 -괴벨스는 열심히 공부해서 출세하면 어린 시절의 아픈 기억을 잊고 새롭게 시작할 수 있을거라 여겼다. 하지만 독일의 제 1차 세계대전 패배 이후 경제 대공황은 계속 되었으며 모든 국가의 금액을 배상금으로 퉁치는 일들이 일어나고 결국 실업자들만 늘어났다. 뿐만 아니라 여자친구에게 차이고, 아끼던 여동생마저 사고로 죽었으며, 같은 독일인들은 장애가 있다는 이유로 여전히 자신을 멸시했으며, 유대인들의 지속적인 불법 행위로 인해 그는 인간에 대한 증오심을 가지게 되었다. 어린시절부터 앓았던 우울증은 청년이 되었을때 더더욱 극에 달해버렸고, 하루에도 수십번 씩 자살 생각이 들었다. 주변인에게 늘 '자살하고 싶어'라고 말하고 다녔다. -그래, 나는 고독해야 하고 고독할 것이다. 이 비참한 삶이 무엇이란 말인가! 인간이라고 하는 쓰레기들!  - 괴벨스의 일기 中 -스튜어트 체임벌린의 '19세기의 기초'를 읽고 또 다시 유대인을 생각하게 되었다. 고귀한 독일 인종이 물질주의 때문에 타락했고, 그 원인은 유대인이다. 독일 민족을 유대인으로부터 보호해야 한다는 체임벌린 주장에 크게 공감하게 되었다. -당시 독일 사람들은 독일의 가장 큰 적은 증권 자본주의고, 그 증권자본을 장악하고 있는 세력이 '유대인'이라고 믿었다. 괴벨스역시 경제 대공황으로 실업자 신세가 된 자신의 처지를 모두 유대인의 책임으로 돌렸다. -30대로 접어들면서 고민이 생기면 모조리 민족 문제와 연관 시켰다. 이제 완전히 민족주의로 생각하기 시작했다. 자신은 독일을 깊이 사랑하고 애국심은 예배가 되어야 한다고 믿기 시작했다. -결국 유대인에 대한 증오는 나날이 심해졌다. 1929년 크리스마스 직전에는 유대인 귀신들이 자신을 뒤쫓아 오는 악몽을 꾸었다. -괴벨스가 보기에 사기꾼이 넘쳐나는 이 시대에서 독일 민족의 유일한 구원자는 아돌프 히틀러였다. 그는 히틀러를 만나기 오래 전부터 히틀러에게 고개 숙일 자세가 되어 있었다. 독실한 가톨릭 신자였던 그는 히틀러를 만난 뒤로 반종교주의자로 돌아선다.  -히틀러 덕에 출세하여 장관이 되자, 어릴 적 자신을 '절름발이'라며 무시하던 고향 사람들이 환심을 사기 위해 몰려드는 것을 보면서 인간에 대한 혐오감은 더욱 심해졌다. 괴벨스는 그것을 두고 '구역질이 난다'고 표현했다. -이후 그는 대저택, 커다란 배, 고급 승용차를 모조리 사들였고, 여자를 실컷 만나며 청년 시절의 한풀이를 했다. 절망과 고독에 몸부림 치면서 엉망진창인 세상을 향해 부논하던 괴벨스에게 히틀러는 모든 문제를 해결해주는 구세주였다. -처음에 히틀러는 유대인을 협상카드로 사용하려 했다. 그러나 유대인 몰살이 일생의 목표였던 괴벨스는 히틀러를 열심히 졸라댔고, 결국 1935년 뉘른베르크 법이 제정되었다. 유대인의 재산은 모두 압류되었고 시민권을 상실했다. 나치는 자(제도기)를 사용해 유대인을 감별해냈다. -실제로 학살 집행자였던 하인리히 히믈러는 '유대인 대학살 계획에 있어서 괴벨스 장관이 가장 적극적이었다'라고 말했다. -괴벨스는 자신이 장애인이라 '낙인찍기'의 위력을 잘 알고 있었다. 그는 일상생활에서 '유대인 낙인' 찍기 분위기를 조성했다. 또한 그는 자신과 같은 장애인들을 모두 '죽여야 하는 열등한 존재'로 인식하고 학살하거나 고문했다. 그는 사회적 약자에게 어린 시절 자신의 모습을 투영했다. 자신의 못나고 열등한 모습, 늘 도태되었던 모습, 인정받지 못했던 모습을 저주했으며, 그것을 매우 증오했다.  -1938년 11월 10일. 히틀러와 괴벨스 등 나치 일당은 '인종 대학살'을 감행하기 시작한다. 돌격대가 침대에서 유대인을 끌어내 죽였고 1939년에는 유대인을 가축 트럭에 실어 수송하기 시작했다. 1941년 베를린에서 3,5000명의 유대인을 색출해 모두 수용소로 보냈다. 노인은 따로 모아서 모두 죽였다. 그 당시 유대인이 할 수 있는 유일한 반항은 자살이었다. -자신의 장애를 잘 알고 있었던 괴벨스는 연설을 해나가면서 다음과 같은 각오를 다졌다. - 내 스스로 명성을 높여야 한다. 나 같은 절름발이에게 먼저 떡을 갖다 줄 사람은 아무도 없기 때문이다. 분노는 삶의 원동력이다. -  괴벨스의 일기 中 -그는 선전 장관으로 활약하면서 나치 웅변학교를 세워 수천명의 선동가를 양성했고, 여러 종교 단체를 진압했으며, 수도원의 성폭력 동성애 사건을 집중적으로 보도하였고, 독일인들에게 있어서 투쟁의 대상을 오로지 한가지로 통일하였다. 바로 유대인 척결.  -현재까지 뉴스 프로그램에서 이용되고 있는 "뚜... 뚜... 뚜.... 삐이~"소리를 낸 뒤 본격적으로 방송이 나가는 방식은 괴벨스가 사람들을 방송에 집중시키기 위해 최초로 개발한 방식이다.  -그는 tv와 라디오를 정치선전에 활용한 선구자이며 정치쇼의 원조, 공약보다는 감성에 호소하는 선거전략의 선구자이다. 또한 시장같은 장소에서 후보자가 유권자들과 어울리는 모습을 사진으로 찍어서 선전하는 행위의 창시자이다. 괴벨스 덕분에 독일은 프랑스와 함께 전 세계 최초로 정기적으로 tv방송을 보낸 국가가 되었다. -괴벨스는 히틀러 앞에서 어린애였다. 히틀러는 괴벨스 가족에게 크리스마스 선물도 보내고 생일 잔치도 베풀어주면서 계산된 총애를 했다.  -히틀러가 보기에 괴벨스는 자신을 맹목적으로 숭배하면서도 뛰어난 언변과 불같은 열정을 갖고 있으며, 당시 강력했던 사회주의 세력을 포섭할 만한 사고방식도 겸비하고 있는 인재였다. 괴벨스는 나치 당원 가운데, 거의 유일하게 박사 학위를 갖고 있는 뛰어난 인텔리였다. -괴벨스는 히틀러에게 아부했다. 히틀러 역시 괴벨스의 자존심을 세워주었다. 괴벨스는 히틀러를 '시대의 난관과 결핍에서 벗어나는 길을 제시하는 존재'로 끊임없이 미화했다. 이 때문에 대부분의 독일인들은 히틀러를 거의 '신'이라고 생각했으며, 숭배했다. -괴벨스는 전쟁이 불리해질 수록 전세계를 지배하려는 유대인과 싸워야 한다는 망상으로 빠져 들어갔다. 그는 유대인 학살이 서양을 구하는 유일한 방법이라 생각했다. -괴벨스는 자신과 제국이 위기에 빠져 들수록 히틀러에게 더욱 의존했다. 1945년 나치 제국이 완전히 패망하고 히틀러가 자살하자, 괴벨스는 역시 그를 뒤따라가겠다고 하며 처자식과 함께 음독 자살을 했다. -총통이 없으면 살 만한 가치가 없다. 내 사랑스런 아이들이 살아남아서 어떤 대접을 받겠는가? 그래, 모두 데리고 가련다. - 1945년 괴벨스의 마지막 일기 中 출처
삶이라는 아이러니.jpg
어린시절의 친구였던 두 사람은 시위대와 경찰로 다시 만나게 된다 괴벨스의 결혼식과 해방 후 부셴발트 수용소에서 발견된 수천개의 반지들 베트남전쟁에서 네이팜탄 투하를 지켜보는 군인과 네이팜탄을 피해 도망가는 어린아이들 1945년, 패전 소식을 듣는 독일군과 수용소행 열차에서 해방된 유태인들 911테러의 사상자는 삼천명에 달하고, 그 중 이백명 가량은 건물에서 추락하여 사망한다. 참사 10주년 기념관을 맞아 개관한 기념관에서 오열하는 로버트 페라사. 이 사람의 아들은 사건 당시 북측 타워 104층에 머물고 있었다. 이라크 전쟁에서 전사한 아버지의 장례식장, 8살의 크리스찬 골츠니스키. 이라크에 파병되었던 군의관 테리 구롤라와 딸의 재회. 1942년, 네덜란드의 은신처에서 밖을 내다보는 안네 프랑크 종전 후 은신처였던 네덜란드의 다락방으로 돌아온 오토 프랑크. <안네의 일기>를 쓴 딸 아넬리스를 비롯한 은신처 식구들은 모두 죽었고, 오토 프랑크만이 유일하게 살아남았다. 브룩클린의 레스토랑에서 암살된 마피아 보스 조 마세리아. 죽는 순간 그가 쥐고 있었던 스페이드 에이스의 의미는 힘, 그리고 죽음. 출항을 기다리는 타이타닉 호, 그리고... 순서대로 고베 폭격/히로시마-나가사키 원폭 그리고 일왕의 패전선언이 있었고 이 사진은 일본 항복문서에 서명하는 맥아더 장군 1985년 스웨덴, 집회중인 네오나치의 머리를 핸드백으로 가격하는 다누타 다니엘손. 폴란드계 유태인이고 이 사람의 어머니가 아우슈비츠 생존자라고. 다니엘손은 지병이었던 정신적 문제로 결국 자살하고 말았고, 다니엘손이 때린 네오나치남 Seppo Seluska는.. 같은해 유태인 동성애자를 고문하고 살해해서 수감됨..... 1996년, KKK 반대 시위 도중 백인우월주의자로 추정되는 남성을 시위대가 폭행하기 시작했고, 시위 참여자인 케샤 토마스가 그를 온 몸으로 감싸 보호했다. 이 사진으로 케샤 토마스 역시 인종운동의 아이콘이 되었음. 출처
다이아수저 집에 처음 들어가 본 흙수저 표정 (feat.러시아혁명)
은 러시아 혁명 당시에 황궁에 들어가서 얼빠진 붉은 군대의 모습임... 이 때 황실과 귀족가에서 보유하고 있던 주얼리 한번 볼래? ㄹㅇ 눈돌아감 이건 혁명 당시 압수한 실제 사진 까악까악 놀랍지? 이걸 어떻게 착용 했냐면 이렇게 주렁주렁 달았다고 함 혁명군들 뿐만 아니라 그 당시 세계 최강이라고 불렸던 영국도 러시아 황실, 귀족가의 보석을 보고놀랐다는데 그만큼 집안도 으리으리하게 꾸며 놓고 살았다고 한다 함 보쉴? 서재, 응접실, 도서관, 드레스룸, 침실, 다이닝룸 등등 여러 용도의 방이 있었는데 그 중에서도 살롱 문화를 책임지던 무도회장을 정 말 정 말 공들여서 꾸몄다고 함 살롱 문화는 황족과 귀족들이 문화 예술을 즐기면서 사교 활동도 하고 비즈니스도 하고 결혼 상대를 고르기도 하는 고오급 그사세 동호회 같은 거였음 근데 19세기 중반부터 표토르 대제가 홍차국에 본격적으로 유럽의 문화를 들여 오면서 이제 살롱에서 프랑스어만 쓰고 유럽풍의 옷을 입고 유럽 춤을 추는 등 요상한 유행이 시작됐지 살롱과 무도회 문화도 그때부터 본격적으로 흥함 심지어는 1년에 무도회가 1000번 이상 열렸는데 초대를 받으면 중병이거나 상중이 아니고서는 반드시 가야 했다함 ;; 춤추다가 중병 걸릴듯 이 무도회가 참 오묘한게 미혼 남녀가 공식적으로 신체적 접촉을 할 수 있는 기회이면서 은근 서로의 마음을 확인하고 공표할 수 있는 공개적인 장소이기도 했음 예를 들어서 그 당시 러시아의 무도회 플리는 집주인 내외가 주도하는 웅장한 폴로네즈로 시작해서 왈츠, 헝가리 댄스, 크라카뱌크(폴란드 춤), 파데카트르, 카드리유 그 후가 사람들이 가장 기다리는 마주르카, 코틸리온, 러시아춤이었는데 사랑하는 사이는 반드시 마주르카를 같이 췄음 그래서 안나 카레리나에서 키티가 "그녀는 심장이 멈춰버릴 듯한 느낌으로 마주르카 차례가 되기를 기다렸다. 마주르카를 출 동안 모든 것이 결정날 거라 여겼던 것이다… 그녀는 이전 무도회들에서처럼 그와 마주르카를 출 사람은 자신이라 굳게 믿었기에, 다섯 명의 마주르카 신청자를 춤출 사람이 있다면서 모두 거절했다." 라고 브론스키에게 실망한 이유도 이것 때문임 한 사람이랑 두 번 세 번 춤추는 것도 대단히 실례일 뿐더러 손목에 순서표 같은걸 걸어 놔서 남자가 미리 춤신청을 한 후에 거기 이름을 적어놔야 하는게 매너라서 키티는 마냥 기다렸다고 한다.. 또륵 여담이지만 무도회장의 특징은 바닥이 매끈매끈해서 신발이 슬슬 미끄러져야 한다는 건데 그래야 춤솜씨를 제대로 보여줄 수 있었음 바닥이 제대로 안 미끄러우면 집주인이 욕을 많이 ;; 먹었다 함 교양 없는 사람이라고 그래서 소설 같은데 보면 신흥 귀족이 된 사람을 괴롭힌답시고 무도회장 바닥 손질법을 안 가르쳐 주기도 함 하루종일 엎드려서 기름칠을 해야 하나? 싶지만 놉! 하인들에게 거친 솔이 달린 신발을 신기고 며칠동안 계속 춤을 추게 하면 바닥이 번쩍번쩍 매끈해진다는거!! 우왕 ㅋㅋㅋ 잘 기억해놨다가 회귀했을 때 유용하게 쓰길 바라 ㅋㅋㅋ 그리고 또 하나! 무도회때 옷차림도 아주 중요하겠지? 기혼 여성은 위에 있는 보석을 주렁주렁 달고 가도 되지만 미혼 여성은 파스텔톤이나 흰색의 심플한 드레스, 간단한 장식만 하는게 규칙이었대 무식한 영애라고 무시 당하지 않게 기억해두렴 그 당시 프랑스어 유행 때문에 전쟁과 평화 원작 소설도 상당 부분이 불어로 적혀 있대 신기방기 출처
2차대전 초기 독일의 광기와 히틀러의 인기
"이것은 평화가 아니다. 20년짜리 휴전협정이다." -베르사유 조약 체결 당시 포슈 원수 1차 세계대전의 승전국들은 둘 중 하나를 선택해야 했다. 독일에게 자비를 배풀어 한 편으로 끌어들이던가 독일이 다시는 전쟁을 못하도록 갈기갈기 찢어 철저하게 짓밟던가. 그러나 그들은 둘 중 어느 것도 제대로 하지 못했다. 독일의 힘을 찢어놓치도 못한 채 과도한 채무와 굴욕만을 요구하는 베르사유 조약이 체결되었다. 1차대전 이후, 베르샤유 조약은 독일을 짓누르고 있었으며, 독일인들은 절망에 허덕였다. 독일 국민들의 불만이 끓어오르고 있었다. 영국은 뒤늦게 프랑스가 강력히 주장했던 '독일에게 굴욕을 줄 정도로 가혹한 채무'에 반대했다. 그러나 1차대전 당시 본토가 짓밟힌 프랑스와 벨기에는 여전히 증오심에 불타고 있었다. 그들은 채무 불이행을 근거로 군대를 동원하여 독일 서부 최대 공업지역 루르 지역을 침공하여 강제점령했다. 이것이 바로 '루르 점령'(Ruhrbesetzung) 사건이다. 1923년 3월 독일 루르, 프랑스 군의 행렬 모자를 벗어 경의를 표하지 않는 독일인들이 프랑스 장교로부터 폭행당하고 있다. 2년에 걸친 강제점령 기간 동안 프랑스군은 130여 명의 독일인을 총살했다. 군대를 제한당한 독일은 변변찮은 항의조차 할 수 없었다. 또 공업지대를 빼앗긴 독일은 초인플레이션이란 경제적 재앙에 직면했다. 설상가상으로 대공황까지 세계를 덮쳤다. 2년 후 점령기간 동안 9억 달러의 차익을 남긴 프랑스 군은 철수했지만 이를 계기로 독일 민중의 베르사유 조약과 승전국에 대한 적개심이 돌이킬 수 없을 정도로 악화되었다. 그 때, 히틀러와 나치가 등장했다. 나치 독일, 베르사유 조약의 무효를 선언. '라인란트 재무장' 선포. 재무장과 동시에 각종 대규모 공공사업 추진으로 실업률 급감. 나치독일, 대독일의 통일을 외치며 오스트리아 합병 (안슐루스) 체코 주데텐란트 지역 강제합병 (뮌헨 조약) 사상자 4천만명을 낸 1차대전의 악몽에 시달리던 영국과 프랑스, 전쟁을 피하기 위해 이를 방관. 버려진 이들은 영국와 프랑스를 이렇게 불렀다. '서방의 배신자들' 자신감을 얻은 히틀러, 소련과 불가침조약 체결 후 폴란드 침공. 결국 임계점에 다다른 영국-프랑스-벨기에 3국, 연합군 결성. 대 독일 선전포고. 1차대전 종전 20년 만에 2차 세계대전 발발 '독일이 영국-프랑스 동맹과 정면으로 싸워서 승리할 것이라는 예상을 하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제 아무리 독일이 발빠른 경제성장을 일궈내 막강한 공업능력을 자랑하고 있다고 한들, 상대는 로마 제국 이후 세계의 헤게모니를 쥔 인류 역사상 최강국인 대영제국과, 그 대영제국을 상대로 수백년을 나란히 경쟁한 프랑스 식민제국이었다. (중략) ...' 연합군의 선전포고. 역으로 연합군 본토로 치고 들어가는 독일군 141개 사단의 진격. 독일 15기갑군단 제7기갑사단 에르빈 롬멜 소장, 프랑스 최정예 제1기갑사단, 제4기갑사단 격파. 마스강 도하 연합군의 대 독일 방어선, 3일 만에 붕괴 나치독일이 연합군에게 살포한 전단. "우리가 이긴다. 우리가 최강이니까." 독일군, 프랑스 전역 석권. 덩케르크에 고립된 영국군. 대서양과 맞닿은 프랑스의 서쪽 끝, 브르타뉴를 점령한 독일군 '독일의 형제들이여! 우리가 마침내 해냈다!' - 나치 독일 기관지 '검은 방패'의 당시 1면 헤드라인 - 프랑스 수도, 파리의 개선문을 통과하는 독일군 에펠탑에 휘날리는 히켄크로이츠 파리에 입성한 선봉부대의 사열을 받으며 항복 서명장에 도착한 히틀러. 항복서명은 1차대전 당시 독일이 항복한 기차 칸을 그대로 가져와 그곳에서 이루어졌다. 독일 장병들이 탑승한 열차가 역을 지나갈 때, 모든 일반 열차는 운행을 멈추었다. 귀국하는 장병들에게 경의를 표하는 독일인들. 1940년 독일 베를린, 라디오에서 격앙된 목소리의 아나운서가 장병들이 도착했다는 긴급 보도를 송출했다. 개선한 장병들을 보기 위해 생업을 멈추고 몰려드는 시민들 프랑스의 항복을 받아내고 귀국한 히틀러의 시가행진 인산인해를 이룬 베를린, 지크 하일! (승리, 만세!)을 외치는 독일인들 (출처)